⊙ 김대중, 40%로 당선된 후 통합 강조… “야당 협조 없이 난국 극복 어려워”
⊙ 김중권, 엄삼탁, 권정달 등 5·6공 인사 기용해 영남권 향한 ‘동진(東進) 전략’ 구사
⊙ 박정희 시대를 대표하는 김종필, 박태준과 손잡고 집권해 공동정부 구성
⊙ 전두환, “DJ 때 전직 대통령들이 제일 행복했다”
⊙ 김중권, 엄삼탁, 권정달 등 5·6공 인사 기용해 영남권 향한 ‘동진(東進) 전략’ 구사
⊙ 박정희 시대를 대표하는 김종필, 박태준과 손잡고 집권해 공동정부 구성
⊙ 전두환, “DJ 때 전직 대통령들이 제일 행복했다”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은 15대 대선에서 38.7%를 얻은 이회창(李會昌) 당시 한나라당 후보와의 접전 끝에 득표율 40%로 겨우 당선됐다. 이마저도 한나라당의 텃밭이었던 부산·경남, 강원에서 30%를 얻는 등 전국적으로 중도·우파 표를 19.2%를 가져간 이인제(李仁濟) 당시 국민신당 후보의 ‘활약’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국민 중 ‘반(反)김대중’에 섰던 이들이 58%나 되는 상황인데다 사상 초유의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망하는 건 아닌지 우려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김 전 대통령이 강조한 건 ‘통합’이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김 전 대통령의 연설이다.
“국회의 다수당인 야당 여러분에게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오늘의 난국은 여러분의 협력 없이는 결코 극복할 수 없습니다. 저도 모든 것을 여러분과 같이 상의하겠습니다. 나라가 벼랑 끝에 서 있는 올해 1년 만이라도 저를 도와주셔야 하겠습니다. 저는 온 국민이 이를 바라고 있다고 믿습니다. (중략) ‘국민의 정부’는 어떠한 정치 보복도 하지 않겠습니다. 어떠한 차별과 특혜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무슨 지역 정권이니 무슨 도(道) 차별이니 하는 말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중략) 우리 국민은 해낼 수 있습니다. 6·25의 폐허에서 일어선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제가 여러분의 선두에 서겠습니다. 우리 다 같이 손잡고 힘차게 나아갑시다. 국난을 극복합시다. 재도약을 이룩합시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영광을 다시 한 번 드높입시다.” -1998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사 중
“민주주의만 이뤄진다면 보복은 필요치 않다”
집권 이전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은 호남 지역당의 당수란 이미지와 함께 ‘레드 콤플렉스’를 지우기 위해서라도 ‘통합’을 역설해야 했다. 김 전 대통령이 ‘빨갱이’ 또는 ‘용공주의자’란 의혹을 받기 시작한 건 1971년 7대 대선에 출마할 때부터다. 당시 그는 ▲향토예비군 폐지 ▲남북 교류 ▲대중 경제 노선 등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북한이 무력 적화통일을 획책하는 상황에서 급진적인 것으로 평가됐다.
김 전 대통령이 만든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기획조정실장 등을 역임한 김삼웅(金三雄)씨가 쓴 《후광 김대중 평전》에 따르면 1979년 10·26 이후 실세로 등장한 정승화(鄭昇和)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육군본부로 언론사 간부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김대중은 사상이 의심스럽다” “김대중은 최고 사령관인 대통령은 고사하고 일개 소위도 할 자격이 없다”고 지적했다.
정승화를 전격 연행하고 권력을 잡은 신군부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전두환(全斗煥) 국군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는 강창성(姜昌成) 전 보안사령관을 초청한 자리에서 이른바 ‘3김’을 비난했다. 그는 “3김, 저것들이 설치고 있는데, 저 사람들 가지고는 어디 되겠습니까? 김종필(金鍾泌)이는 흠이 많고 경솔하며, 김영삼(金泳三)이는 아직 어려서 능력이 부족한 것 같고, 김대중이는 사상을 도무지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1987년에도 김대중은 사상적인 의심을 받았다. 1986년 11월에 한 ‘대선 불출마 선언’을 번복하고, 대권 도전 움직임을 보이자 박희도(朴熙道)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기자들과의 간담회 도중 공개적으로 김대중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김대중에 대한 군부의 생각은 1980년과 다를 바 없다는 취지의 얘기를 하면서 “김대중이 대통령에 출마하면 불행한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경고했다. 군 고위 관계자도 사석에서 “김대중이 대통령 된다면 수류탄을 들고 뛰어들겠다”고 말해 대정부질문에서 문제 제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군부가 김 전 대통령에 대해 반감을 가진 이유는 ‘김대중의 불온한 이념’보다도 그가 집권했을 때 광주사태를 내세워 유례없는 정치 보복을 가할 것이란 두려움 때문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87년 대선 유세 당시 “‘김대중이가 피리를 불면 김일성이 춤을 추고, 김일성이가 북을 치면 김대중이가 장단을 맞춘다’고 몰고 있다”면서 억울함을 토로했다. 군부 내 움직임과 관련해선 “군이 국가방위를 위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민주주의만 이뤄진다면 보복은 필요치 않다. 나는 보복에 강력히 반대한다” 등의 의견을 피력하면서 ‘반김대중’ 정서를 불식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87년에 있었던 13대 대선에서 37%로 당선된 노태우(盧泰愚) 당시 민주정의당 후보, 28%였던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후보보다 뒤진 27%를 얻어 3위에 머물렀다.
“거국내각을 만들어 대화합의 정치를 하겠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적 격변기마다 ‘통합’을 강조했고, 이를 통해 활로를 모색했다. 1988년 13대 총선 이후, 여소야대 정국을 깨기 위해 민주정의당(125석), 통일민주당(59석), 신민주공화당(35석)이 1990년 2월 전격적인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을 만들어 김 전 대통령의 평화민주당(70석)을 포위했다. 14대 총선과 대선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호남정당’이란 색깔이 짙은 평민당으로서는 집권할 수 없었다. 김 전 대통령은 야권 통합을 추진했다. 일단 그는 호남색을 빼기 위해 1991년 4월 당 쇄신을 위해 재야운동가를 영입하고 당명을 신민주연합당(新民主聯合黨)으로 변경했다. 그해 8월엔 3당 합당에 반대한 통일민주당 잔류파가 모인 민주당(세칭 ‘꼬마 민주당’), 바꿔 말하면 1987년 대선 당시 자신을 반대하고 김영삼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세력과도 뭉치려 했다. 1991년 9월, 신민당과 민주당은 6:4의 지분으로 합당했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14대 대선에 도전했지만, 804만 표(34%)를 받아 998만 표(42%)를 얻은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후보에게 194만 표 차로 패배했다.
김 전 대통령은 대선 다음날인 1992년 12월 19일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성명을 통해 “또다시 국민 여러분의 신임을 얻는 데 실패했다. 저는 김영삼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며 “모든 평가를 역사에 맡기고 조용한 시민 생활로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15대 대선에 도전했다. 그는 1997년 5월 새정치국민회의 대선 후보로 선출된 직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사면 가능성을 얘기했다. 그는 후보 수락 연설을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면 정치 보복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며 “전두환, 노태우씨도 법과 국민 양심의 심판을 받은 이상 죄과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빌면 국민과 더불어 용서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또 “대통령이 되면 모든 정당, 지역, 계층, 여성과 청년이 다 같이 참가해서 전 국민적인 기반 위에 거국 내각을 만들어 대화합의 정치를 하겠다”고 밝혔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연대
김 전 대통령은 집권을 위해 야권 통합을 추진했다. 새정치국민회의 합류를 거부했던 국민통합추진위원회 소속 김원기(金元基, 전 국회의장),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 등과 재결합했다. 또 노태우 대통령 시절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김중권(金重權), ‘6공 실세’ 엄삼탁(嚴三鐸), 민정당 초대 사무총장 권정달(權正達) 등 구여권 인사들을 영입해 영남을 공략하는 ‘동진 전략’을 추진했다. 결정적인 건 역시 박정희(朴正熙) 정부의 이인자였던 김종필 당시 자유민주연합 총재와의 ‘DJP 연합’이었다.
1996년 4월, 15대 총선이 끝난 뒤 당시 김대중의 정책참모기구였던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의 이강래(李康來) 상임고문은 호남 고립 구도를 깨기 위해 김종필의 자민련과 연합하는 방안을 보고서 형식으로 조언했다. 김대중은 이를 수용해 1996년부터 자민련과의 정책 공조를 추진했다. 자민련 내부에선 김대중과 손을 잡는 데 대해 갑론을박이 계속됐다.
이런 상황에서 강삼재(姜三載) 당시 신한국당 사무총장이 “김대중이 노태우로부터 ‘20억원+α’를 받았다”는 의혹을 제기하자 수세에 몰린 김 전 대통령은 김종필 전 총리에게 파격적인 양보를 해 ‘DJP 연합’을 결성했다. 이로써 김대중 집권 시 초대 국무총리는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맡고, 16대 국회 때 내각제 개헌을 하며, 경제 부처 임명권은 총리가 갖고, 지방선거 때 수도권 광역단체 중 한 곳을 자민련 후보로 낸다는 데 합의했다.
김 전 대통령과 김 전 총리의 결합은 박정희 집권 당시 포항제철 신화를 일궈 당시의 산업화를 대표하는 박태준(朴泰俊) 당시 의원을 포함해 ‘DJT 연합’이라고도 한다. ‘박정희 독재 정권의 피해자’를 자처해 왔던 김 전 대통령은 ‘DJT 연합’에 대해 “후보 단일화는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의 연대이자, 개혁 세력과 보수 세력의 결합이라며 연립정부가 구성되면 권력 독점 시대가 끝나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시작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국민 통합 차원에서 전두환·노태우 사면 건의
‘DJT 연합’을 통한 후보 단일화, 이인제 당시 국민신당 후보의 여권표 잠식 덕분에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는 간발의 차이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를 따돌리고 당선됐다. 그 직후 기자회견에서 그는 ‘통합’을 강조했다.
“자민련 김종필, 박태준 두 분 총재께서 정말 헌신적으로 몸을 아끼지 않고 정성을 다해 협력해 주신 데 대해 특별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우리 당과 다시 힘을 합친 김원기 대표 이하 국민통합추진위원회 여러분 모두의 협력이 큰 힘과 성원이 됐습니다. (중략) 1997년 12월 18일은 국민 전체가 대동단결할 수 있는 역사적 전환점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다시는 이 나라에 정치 보복이나 지역 차별이나 계층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모든 지역과 계층을 다 같이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저는 대통령으로서 모든 차별을 일소하고, 모든 국가 구성원의 권익을 공정하게 보장함으로써 다시는 이 땅에 차별로 인한 대립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특히 저는 지역 간 대립과 갈등의 시대를 마감하고, 국민 화해와 통합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당선자 신분일 때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면을 건의했다고 알려졌다.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내란 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바 있었지만, 국민 통합 차원에서 요청했다고 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12월 20일 두 사람을 사면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2009년 8월 14일 폐렴으로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하면서 그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했다. 전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20층 VIP 대기실에서 김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와의 면담에서 “DJ 때 전직 대통령들이 제일 행복했다. 현직이 안 봐주면 전직들처럼 불쌍한 이들이 없지 않으냐”면서 “재임기간 10번 가까이 초대받아 세상 돌아가는 상황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고 도움도 많이 받았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박정희 기념사업회 명예회장 맡고 기념관 건립에 국비 200억원 지원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집권 이후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해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에게 총리를 맡겼고, 내각에 자민련 인사들을 기용했다. 동서화합을 위해 자신의 정적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에 국비 200억원 지원을 약속하고,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으로 참여했다. 김대중 정부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중권 변호사는 이에 대해 《월간조선》에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건립도 동서화합을 위한 것이었다. 1998년 4월, 박근혜 현 대통령이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 출마하기 직전이었다. DJ(김대중)가 나를 불렀다.
“피해자인 살아 있는 대통령이 가해자인 돌아가신 대통령을 용서한다면, 동서화합의 징표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나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 나는 신현확(申鉉確) 전 총리, 김준성(金埈成) 전 부총리, 이원경(李源京) 전 외무장관, 정수창(鄭壽昌) 전 대한상공회의소 의장 등 TK 원로들을 찾아가 DJ의 뜻을 전했다. 모두 선뜻 믿지 않았다. “DJ가 그런 소리를 하다니, 쇼”라는 반응이었다. DJ는 이분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식사를 같이하면서 자신의 뜻을 설명했다. 이들은 비로소 DJ의 진심을 믿게 되었다. 그해 5월 DJ는 대구를 방문한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을 건립하겠다는 뜻을 공표했다. 나는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박근혜 의원을 만나 DJ의 뜻을 전했다. 박근혜 의원도 고마워했다.〉
현재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은 41%의 지지를 받아 집권했다. 지지자보다 반대자가 훨씬 많은 셈이다. 국회 상황도 만만치 않다. 국회선진화법에 따라 180석 이상의 의석을 확보해야 법안 처리가 되는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차지한 의석은 120석에 불과하다. 자유한국당과 국민의당, 바른정당의 협조를 구하지 않고선 법안 처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연립정부를 구성해 국정 안정을 꾀했고, 반대파 배제보다는 화해와 통합을 강조하며 외환위기를 극복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신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국회의 다수당인 야당 여러분에게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오늘의 난국은 여러분의 협력 없이는 결코 극복할 수 없습니다. 저도 모든 것을 여러분과 같이 상의하겠습니다. 나라가 벼랑 끝에 서 있는 올해 1년 만이라도 저를 도와주셔야 하겠습니다. 저는 온 국민이 이를 바라고 있다고 믿습니다. (중략) ‘국민의 정부’는 어떠한 정치 보복도 하지 않겠습니다. 어떠한 차별과 특혜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무슨 지역 정권이니 무슨 도(道) 차별이니 하는 말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중략) 우리 국민은 해낼 수 있습니다. 6·25의 폐허에서 일어선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제가 여러분의 선두에 서겠습니다. 우리 다 같이 손잡고 힘차게 나아갑시다. 국난을 극복합시다. 재도약을 이룩합시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영광을 다시 한 번 드높입시다.” -1998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사 중
“민주주의만 이뤄진다면 보복은 필요치 않다”
집권 이전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은 호남 지역당의 당수란 이미지와 함께 ‘레드 콤플렉스’를 지우기 위해서라도 ‘통합’을 역설해야 했다. 김 전 대통령이 ‘빨갱이’ 또는 ‘용공주의자’란 의혹을 받기 시작한 건 1971년 7대 대선에 출마할 때부터다. 당시 그는 ▲향토예비군 폐지 ▲남북 교류 ▲대중 경제 노선 등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북한이 무력 적화통일을 획책하는 상황에서 급진적인 것으로 평가됐다.
김 전 대통령이 만든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기획조정실장 등을 역임한 김삼웅(金三雄)씨가 쓴 《후광 김대중 평전》에 따르면 1979년 10·26 이후 실세로 등장한 정승화(鄭昇和)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육군본부로 언론사 간부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김대중은 사상이 의심스럽다” “김대중은 최고 사령관인 대통령은 고사하고 일개 소위도 할 자격이 없다”고 지적했다.
정승화를 전격 연행하고 권력을 잡은 신군부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전두환(全斗煥) 국군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는 강창성(姜昌成) 전 보안사령관을 초청한 자리에서 이른바 ‘3김’을 비난했다. 그는 “3김, 저것들이 설치고 있는데, 저 사람들 가지고는 어디 되겠습니까? 김종필(金鍾泌)이는 흠이 많고 경솔하며, 김영삼(金泳三)이는 아직 어려서 능력이 부족한 것 같고, 김대중이는 사상을 도무지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1987년에도 김대중은 사상적인 의심을 받았다. 1986년 11월에 한 ‘대선 불출마 선언’을 번복하고, 대권 도전 움직임을 보이자 박희도(朴熙道)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기자들과의 간담회 도중 공개적으로 김대중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김대중에 대한 군부의 생각은 1980년과 다를 바 없다는 취지의 얘기를 하면서 “김대중이 대통령에 출마하면 불행한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경고했다. 군 고위 관계자도 사석에서 “김대중이 대통령 된다면 수류탄을 들고 뛰어들겠다”고 말해 대정부질문에서 문제 제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군부가 김 전 대통령에 대해 반감을 가진 이유는 ‘김대중의 불온한 이념’보다도 그가 집권했을 때 광주사태를 내세워 유례없는 정치 보복을 가할 것이란 두려움 때문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87년 대선 유세 당시 “‘김대중이가 피리를 불면 김일성이 춤을 추고, 김일성이가 북을 치면 김대중이가 장단을 맞춘다’고 몰고 있다”면서 억울함을 토로했다. 군부 내 움직임과 관련해선 “군이 국가방위를 위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민주주의만 이뤄진다면 보복은 필요치 않다. 나는 보복에 강력히 반대한다” 등의 의견을 피력하면서 ‘반김대중’ 정서를 불식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87년에 있었던 13대 대선에서 37%로 당선된 노태우(盧泰愚) 당시 민주정의당 후보, 28%였던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후보보다 뒤진 27%를 얻어 3위에 머물렀다.
“거국내각을 만들어 대화합의 정치를 하겠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적 격변기마다 ‘통합’을 강조했고, 이를 통해 활로를 모색했다. 1988년 13대 총선 이후, 여소야대 정국을 깨기 위해 민주정의당(125석), 통일민주당(59석), 신민주공화당(35석)이 1990년 2월 전격적인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을 만들어 김 전 대통령의 평화민주당(70석)을 포위했다. 14대 총선과 대선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호남정당’이란 색깔이 짙은 평민당으로서는 집권할 수 없었다. 김 전 대통령은 야권 통합을 추진했다. 일단 그는 호남색을 빼기 위해 1991년 4월 당 쇄신을 위해 재야운동가를 영입하고 당명을 신민주연합당(新民主聯合黨)으로 변경했다. 그해 8월엔 3당 합당에 반대한 통일민주당 잔류파가 모인 민주당(세칭 ‘꼬마 민주당’), 바꿔 말하면 1987년 대선 당시 자신을 반대하고 김영삼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세력과도 뭉치려 했다. 1991년 9월, 신민당과 민주당은 6:4의 지분으로 합당했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14대 대선에 도전했지만, 804만 표(34%)를 받아 998만 표(42%)를 얻은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후보에게 194만 표 차로 패배했다.
김 전 대통령은 대선 다음날인 1992년 12월 19일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성명을 통해 “또다시 국민 여러분의 신임을 얻는 데 실패했다. 저는 김영삼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며 “모든 평가를 역사에 맡기고 조용한 시민 생활로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15대 대선에 도전했다. 그는 1997년 5월 새정치국민회의 대선 후보로 선출된 직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사면 가능성을 얘기했다. 그는 후보 수락 연설을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면 정치 보복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며 “전두환, 노태우씨도 법과 국민 양심의 심판을 받은 이상 죄과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빌면 국민과 더불어 용서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또 “대통령이 되면 모든 정당, 지역, 계층, 여성과 청년이 다 같이 참가해서 전 국민적인 기반 위에 거국 내각을 만들어 대화합의 정치를 하겠다”고 밝혔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연대
![]() |
김대중(우) 전 대통령은 1997년 15대 대선 당시 ‘박정희 정부의 이인자’ 김종필(좌) 자유민주연합 총재와 손을 잡았다. |
1996년 4월, 15대 총선이 끝난 뒤 당시 김대중의 정책참모기구였던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의 이강래(李康來) 상임고문은 호남 고립 구도를 깨기 위해 김종필의 자민련과 연합하는 방안을 보고서 형식으로 조언했다. 김대중은 이를 수용해 1996년부터 자민련과의 정책 공조를 추진했다. 자민련 내부에선 김대중과 손을 잡는 데 대해 갑론을박이 계속됐다.
이런 상황에서 강삼재(姜三載) 당시 신한국당 사무총장이 “김대중이 노태우로부터 ‘20억원+α’를 받았다”는 의혹을 제기하자 수세에 몰린 김 전 대통령은 김종필 전 총리에게 파격적인 양보를 해 ‘DJP 연합’을 결성했다. 이로써 김대중 집권 시 초대 국무총리는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맡고, 16대 국회 때 내각제 개헌을 하며, 경제 부처 임명권은 총리가 갖고, 지방선거 때 수도권 광역단체 중 한 곳을 자민련 후보로 낸다는 데 합의했다.
김 전 대통령과 김 전 총리의 결합은 박정희 집권 당시 포항제철 신화를 일궈 당시의 산업화를 대표하는 박태준(朴泰俊) 당시 의원을 포함해 ‘DJT 연합’이라고도 한다. ‘박정희 독재 정권의 피해자’를 자처해 왔던 김 전 대통령은 ‘DJT 연합’에 대해 “후보 단일화는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의 연대이자, 개혁 세력과 보수 세력의 결합이라며 연립정부가 구성되면 권력 독점 시대가 끝나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시작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 |
김대중(좌측 세 번째)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청와대로 노태우(왼쪽부터), 전두환, 최규하 등 전직 대통령을 10여 차례 초청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DJ 때 전직 대통령들이 가장 행복했다. 도움도 많이 받았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
“자민련 김종필, 박태준 두 분 총재께서 정말 헌신적으로 몸을 아끼지 않고 정성을 다해 협력해 주신 데 대해 특별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우리 당과 다시 힘을 합친 김원기 대표 이하 국민통합추진위원회 여러분 모두의 협력이 큰 힘과 성원이 됐습니다. (중략) 1997년 12월 18일은 국민 전체가 대동단결할 수 있는 역사적 전환점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다시는 이 나라에 정치 보복이나 지역 차별이나 계층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모든 지역과 계층을 다 같이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저는 대통령으로서 모든 차별을 일소하고, 모든 국가 구성원의 권익을 공정하게 보장함으로써 다시는 이 땅에 차별로 인한 대립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특히 저는 지역 간 대립과 갈등의 시대를 마감하고, 국민 화해와 통합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당선자 신분일 때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면을 건의했다고 알려졌다.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내란 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바 있었지만, 국민 통합 차원에서 요청했다고 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12월 20일 두 사람을 사면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2009년 8월 14일 폐렴으로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하면서 그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했다. 전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20층 VIP 대기실에서 김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와의 면담에서 “DJ 때 전직 대통령들이 제일 행복했다. 현직이 안 봐주면 전직들처럼 불쌍한 이들이 없지 않으냐”면서 “재임기간 10번 가까이 초대받아 세상 돌아가는 상황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고 도움도 많이 받았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박정희 기념사업회 명예회장 맡고 기념관 건립에 국비 200억원 지원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집권 이후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해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에게 총리를 맡겼고, 내각에 자민련 인사들을 기용했다. 동서화합을 위해 자신의 정적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에 국비 200억원 지원을 약속하고,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으로 참여했다. 김대중 정부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중권 변호사는 이에 대해 《월간조선》에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건립도 동서화합을 위한 것이었다. 1998년 4월, 박근혜 현 대통령이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 출마하기 직전이었다. DJ(김대중)가 나를 불렀다.
“피해자인 살아 있는 대통령이 가해자인 돌아가신 대통령을 용서한다면, 동서화합의 징표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나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 나는 신현확(申鉉確) 전 총리, 김준성(金埈成) 전 부총리, 이원경(李源京) 전 외무장관, 정수창(鄭壽昌) 전 대한상공회의소 의장 등 TK 원로들을 찾아가 DJ의 뜻을 전했다. 모두 선뜻 믿지 않았다. “DJ가 그런 소리를 하다니, 쇼”라는 반응이었다. DJ는 이분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식사를 같이하면서 자신의 뜻을 설명했다. 이들은 비로소 DJ의 진심을 믿게 되었다. 그해 5월 DJ는 대구를 방문한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을 건립하겠다는 뜻을 공표했다. 나는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박근혜 의원을 만나 DJ의 뜻을 전했다. 박근혜 의원도 고마워했다.〉
현재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은 41%의 지지를 받아 집권했다. 지지자보다 반대자가 훨씬 많은 셈이다. 국회 상황도 만만치 않다. 국회선진화법에 따라 180석 이상의 의석을 확보해야 법안 처리가 되는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차지한 의석은 120석에 불과하다. 자유한국당과 국민의당, 바른정당의 협조를 구하지 않고선 법안 처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연립정부를 구성해 국정 안정을 꾀했고, 반대파 배제보다는 화해와 통합을 강조하며 외환위기를 극복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신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