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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온 대선(大選)

문재인 傳奇 (1/4)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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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는 헌법재판소 권한의 정당성이 어디에 있을까.
국민이 그들을 헌법재판관으로 선출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재판관인가.
꼭 그런 것도 아냐”
- 문재인


⊙ 부모 고향은 함경남도 흥남… 흥남철수 때 월남해 경남 거제에서 출생
⊙ 어렸을 적부터 가난에 진저리, “모멸감과 반항심 생겼고 세상의 불공평 느껴”
⊙ 고3 때부터 술·담배, 별명은 ‘문제아(問題兒)’
⊙ 대학 시절 리영희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 읽고 큰 감화, 운동권의 길로
⊙ 대학 3학년 때 첫 시위 주도, 4학년 때 시위 주모자로 구속
⊙ 석방 후 강제 징집… 타의(他意)로 공수부대 가. 당시 상관이 전두환·장세동
⊙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때 동원… 미루나무 자르지는 않고 외곽 경비
⊙ 1980년 ‘서울의 봄’ 때 경찰 유치장에서 사시 합격 소식 들어
⊙ 사법연수원 차석 졸업하고도 시위 전력으로 판사 임용 탈락… 노무현과 만나
⊙ 부산 미 문화원 점거, 부산 상공회의소 점거자 변론 등 시국 사건 도맡아
⊙ 釜民協·國本·民辯 등 재야단체 설립 초창기 멤버
⊙ “동의대 사건 주모자들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됐다고 해서 순직 경찰관에게
    모욕이 되는 것은 아냐”
⊙ “반기문은 관운(官運) 타고난 사람… 유엔사무총장 된 것은 노무현 정부 덕”
⊙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임명제청권, 대통령제에 맞지 않아”
⊙ “수사권은 경찰, 기소권은 검찰에 분리 귀속… 고위공직자 비리수사처 만들어야”
⊙ “대한민국 대통령은 무조건 미국 먼저 가야 한다는 고정관념 이제 극복해야”
⊙ 민정수석 2번 하면서 “제일 아쉬운 건 국가보안법 폐지 못 한 일”
⊙ 민정수석 재임 시 통진당 이석기 이유 없이 2차례 사면받아
⊙ “대북 경제제재 풀고 개성공단 재가동해야… 사드 배치는 차기 정부서 결정”
⊙ 조갑제 “문재인의 노선을 요약하면 친북(親北), 친중(親中), 반미(反美), 반일(反日),
    반한(反韓), 반법(反法)”
사진=뉴시스
  최태민·최순실 부녀가 대(代)를 이어 박근혜 대통령을 이용해 부(富)를 일구고 권력을 참칭한 국정농단 사태가 마침내 국회에 의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소추까지 이르렀다. 빠르면 올해 중반기 안에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가 열릴지 모르는 탄핵 정국의 최대 수혜자는 문재인(文在寅) 전 민주당 대표다.
 
  문 전 대표는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본인 역시 이를 의식한 듯 벌써 대통령이 된 듯한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2012년 박근혜 대통령과의 대선 투표에서 100만여 표 차로 패배한 그는 4년여 만에 맞은 기회를 되살릴 수 있을까. 박근혜 대통령과 동갑인 문재인 전 대표의 64년 삶을 문 전 대표가쓴 《문재인의 운명》 등 자서전을 바탕으로 전기(傳奇) 형식으로 정리해 본다.
 
 
  1. 탄생
 
  문 전 대표 부모의 고향은 함경남도 흥남(興南)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흥남에서 살았으며 문씨 집성촌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문 전 대표의 부모는 1950년 12월 흥남 철수 때 남한으로 내려왔다. 미군 LST 선박을 2박 3일간 타고 그의 가족이 도착한 곳은 거제도였다. 문 전 대표는 아버지 문용형과 어머니 강한옥이 거제도 피란살이를 하던 중인 1953년 1월 24일 거제면 명진리 694-1번지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2. 문재인의 사주
 
  문 전 대표의 사주는 임진년 계축월 일해일 병술시다. 인터넷에는 그와 관련한 역술가들의 평이 있다. 한 역술가는 “문재인은 용(龍)이 되기 힘들 것이다. 도리어 권력으로 인해 상당한 고초를 겪을 수도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역술가 또한 “싸우려는 상대가 줄줄이 기다리는 사주”라고 했다. 이 외 “노무현 전 대통령 같은 파트너 밑에서 최고의 빛을 발할 수 있는 사주”라는 평도 있다.
 
 
  3. 문재인의 아버지
 
  문 전 대표의 아버지 문용형은 흥남의 남평 문씨 집성촌 솔안마을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흥남시청에서 농업과장으로 근무하다 6·25가 터지자 1950년 12월 23일 흥남 부두에서 가족과 함께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월남했다. 문용형은 북한 거주 당시 공산당 입당을 강요받았으나 끝내 버텼다고 한다. 그때 하도 괴롭힘을 당해 다시는 공무원 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문용형은 거제에 정착한 후 공무원 경력 덕분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노무자로 일자리를 얻었으나 수입이 턱없이 부족해 문 전 대표의 어머니가 계란 행상으로 가계를 꾸렸다. 이후 문용형은 양말을 구입해 판매상들에게 공급하는 등의 사업을 벌였으나 빚만 잔뜩 졌다. 문재인 전 대표는 자신의 아버지를 “경제적으로 무능했다”고 평하면서 “원래 조용한 성격인데 사업에 실패한 이후 더 말수가 없어졌다”고 했다.
 
 
 
4. 문재인의 어머니

 
《문재인의 운명》.
  다음은 문 전 대표가 2012년 발간된 책 《운명》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회상한 부분이다.
 
  “아버지의 장사 실패 후 집안 생계는 거의 어머니가 꾸려나갔다. 어머니도 경제적으로 능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머니가 처음 한 일은 구호물자 옷가지를 시장 좌판에 놓고 파는 것이었다. 동네에서 작은 구멍가게를 한 적도 있었는데 다들 가난한데다 몇 집 되지도 않는 동네여서 잘될 리가 없었다. 연탄 배달도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연탄 배달을 거들게 하는 일은 없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나나 남동생에게 말씀했다. 학교 마치고 돌아온 후나 휴일이면 연탄 리어카를 끌거나 연탄을 손에 들고 배달하는 일을 도왔다. 나는 검댕을 묻히는 연탄 배달 일이 늘 창피했다. 오히려 어린 동생은 묵묵히 잘도 도왔지만 나는 툴툴거려서 어머니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한번은 리어카에 연탄을 잔뜩 싣고 내가 앞에서 끌고 어머니가 뒤에서 잡아주면서 내리막길을 내려가다가 힘이 달린 어머니가 손을 놓치고 말았다. 그 바람에 내가 무게를 감당 못 해 길가에 처박힌 적이 있다. 연탄만 좀 깨졌을 뿐 다치지는 않았는데도 어머니는 크게 상심하셨다.”
 
 
  5. 천주교
 
  “초등학교 1~2학년 때 배급날이 되면 학교를 마친 후 양동이를 들고 가 줄 서서 기다리다 성당에서 나눠주는 전지분유를 배급받아 오기도 했다. 싫은 일이었지만 그런 게 장남 노릇이었다. 그때 수녀님들이 수녀복을 입고 있는 모습은 어린 내 눈에 천사 같았다. 그런 고마움 때문에 어머니가 먼저 천주교 신자가 됐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영세를 받았다. 영도에 있는 신선성당이었다.”
 
 
 
6. 남항국민학교 시절

 
  “내가 다닌 남항초등학교는 원래 작은 학교였다. 그런데 피란민이 몰려들어 한 학년 학생 수가 1000명이 될 정도로 늘어났다. 어쩔 수 없이 주변에 판자와 함석지붕으로 임시교실을 지었다. 가교사(假校舍)라고 불렀다. 입학 때부터 3학년까지 가교사에서 공부했다.”
 
  “초등학교 때 나는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다. 키도 작고 몸도 약했다. 아주 내성적이어서 선생님 관심을 받아본 적도 없고, 수업시간 외에 선생님을 따로 만난 기억도 없다. 학기 말과 학년 말 방학 때 선생님이 통지표를 나눠줬다. 5학년 때까지 수우미양가로 표시되던 성적에서 ‘수’는 드물고 대부분 ‘우’나 ‘미’에 ‘양’도 있었다. ‘가’ ‘나’ ‘다’로 표시하던 행동발달 상황도 그저 그랬다. 성적에 별 관심이 없었다.”
 
 
  7. 태풍 사라호
 
  “초등학교 1학년 추석 때(1959년 9월) 기상관측 이후 최대의 태풍이라는 ‘사라’호가 부산 지역을 덮쳤다. 추석 연휴 끝나고 등교했더니 가교사들이 강풍에 모두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그때부터 교실이 있던 곳 땅바닥에서 수업을 했다. 지붕이 없어서 비가 오면 수업을 그만두고 귀가해야 했다.”
 
  “사라호 태풍 때 우리 집도 지붕이 날아갔다. 그때 우리 집은 흙벽돌로 지었고 지붕은 판자에 루핑이 씌워져 있었다. 하필 아버지가 장사를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해 집에 안 계실 때였다. 세찬 태풍이 몰아쳐 나무로 된 부엌문을 계속 흔들자 문이 견디지 못해 장석이 떨어져 나갔다. 어머니와 내가 문이 열리지 않도록 붙잡았고 누나도 거들었다. 그러다가 바람의 힘을 이기지 못해 문을 놓치고 말았다. 문이 확 열리면서 남은 장석마저 떨어져 나갔다. 그러자 바람이 순식간에 집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바람이 집에 가득 차서 집 안이 팽창하는 듯하더니 어느 순간 바람이 위로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지붕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그 지붕은 어디로 날아가 버렸는지 찾지도 못했다.”
 
 
  8. 가난
 
  문 전 대표는 가난에 대해 뼈저린 감정을 가지고 있다.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 매달 내는 돈이 있었다. 처음에는 ‘월사금’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사친회비’로 이름이 바뀌었다. 6학년 무렵엔 다시 ‘기성회비’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기억된다. 가난 때문에 그 돈을 제때 못 내는 아이들이 많았다. 담임선생님이 돈을 내지 않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독촉을 했다. 그래도 계속 못 내면 집에 가서 돈을 받아오라며 수업 중에 학교에서 내쫓았다.”
 
  “가난하면 일찍 철이 들기 마련이다. 선생님이 쫓아 보낸다고 집으로 가는 아이는 거의 없었다. 집으로 간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었고 어른들 마음만 아프게 할 뿐이었다. 그냥 우리끼리 이송도 바닷가에 가서 놀다가 학교 마칠 때쯤 교실로 돌아왔다.”
 
  “가난한 아이들은 설, 추석 때나 겨우 목욕탕에 갔다. 선생님들이 위생검사를 한다며 한번씩 웃통을 벗겨보고는 때가 많으면 아이들 앞에서 창피를 주기도 했다. 나는 그런 일을 한 번도 겪지 않았지만 다른 아이가 겪는 것을 보면서 모멸감과 함께 반항심을 느끼곤 했다.”
 
  “초등학교에서 도시락이 필요한 학년이 됐을 때 아이들 태반은 도시락을 싸 오지 못했다.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급식을 했다. 학교가 공급받는 급식재료 양이 일정하지 않았던지 강냉이떡을 한 개씩 줄 때도 있었고 반 개씩 줄 때도 있었다. 그나마도 안 될 때는 강냉이죽을 끓여서 줬다. 그런데 급식을 나눠줄 그릇이 없었다. 강냉이떡은 그래도 괜찮았지만 강냉이죽일 때가 문제였다. 도시락을 싸 온 아이들의 도시락 뚜껑을 빌려서 죽을 받아 먹도록 했다. 도시락 뚜껑이 부족할 때엔 2명이 교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나는 도시락 뚜껑을 빌릴 때마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무상급식 논쟁을 관심 있게 본다.”
 
  “가난 때문에 하고 싶어도 못한 것이 많다. 지금도 나는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 집에 자전거가 있었던 때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난이 내게 준 더 큰 선물도 있다. ‘돈이라는 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라는 지금의 내 가치관은 오히려 가난 때문에 내 속에 자리 잡은 것이다.”
 
 
  9. 경남중학교 시절
 
  “중학교 입시가 있던 시절이어서 6학년이 되자 학교에서 늦게까지 아이들을 공부시켰다. 시험도 매일 치다시피 했고 모의시험도 자주 쳤다. 그렇게 해서 4월달쯤 되자 내가 공부를 잘하는 편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순진했던 때여서 다른 생각 없이 열심히 공부했다. 입학시험 과목이 음악, 미술, 체육까지 포함해 전 과목이었다. 체육시험 종목은 달리기, 넓이뛰기, 던지기, 턱걸이 등이었다. 팔심이 약해 턱걸이가 전혀 되지 않았다. 친구가 식초를 많이 먹으면 뼈가 유연해져서 턱걸이를 잘할 수 있다고 했다. 솔깃해서 어머니가 안 계실 때 부엌에서 식초를 한 모금 마셨다. 요즘과 같은 양조식초가 아니고 빙초산이었다. 입에 들어가는 순간 입속에서 불이 났다. 순간적으로 내뱉은 덕분에 위로 넘어가지는 않았다. 만약 그랬으면 더 큰일이 났을 것이다. 그래도 입술과 입안, 식도까지 부풀어 올라 며칠 동안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아픈 것보다 한동안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 일이 나중에 후배들에게 입시 준비에 악착같았던 사례로 얘기되기도 했다는 말을 들었다.
 
  다행히 그 무렵 부산에서 최고 일류 학교로 꼽히던 경남중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합격자가 몇 명 되지 않았다. 부모님도 정말 기뻐했다. 아마 내가 태어난 후 가장 큰 기쁨을 드린 때였을 것이다.”
 
 
  10. 독서
 
  “경남중학교는 시내 잘사는 동네에 있었고 아이들도 대체로 부유했다. 가난한 아이들이 많았던 초등학교 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노는 문화가 전혀 달랐고 용돈 씀씀이도 큰 차이가 나서 함께 어울리기가 어려웠다. 어쩌다 친구들 집에 따라가 보면 나로서는 처음 보는 호사스러운 집에, 정원에, 가구가 놀랍기만 했다. 그에 더해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도련님으로 떠받들어지는 모습에 더 주눅이 들곤 했다. 그 무렵 부잣집에는 ‘식모’라고 부르던 가사고용인을 두고 있는 집들이 많았다. 세상의 불공평함을 처음으로 크게 느꼈다.
 
  점차 학교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책을 읽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습성은 아버지 덕이 컸다. 아버지가 장사를 다닐 때 한번 장사를 떠나면 한 달 정도 만에 돌아오시곤 했다. 그럴 때마다 꼭 내가 읽을 만한 동화책이나 아동문학, 위인전 같은 것을 사오셨다. 안데르센 동화집, 강소천 선생의 아동문학, 어린이용 플루타르크 위인전 같은 책들이었다. 《집 없는 아이》 같은 외국 작가의 장편 아동문학도 있었다. 교과서 말고 처음 접하는 책이어서 그런 책을 읽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책 읽는 재미를 알게 되고 난 후로는 늘 책에 굶주렸다. 그러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도서관을 알게 됐다. 읽을 책이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다.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다. 그 재미에 빠져 2학년 때 3개월가량을 매일 도서관 문 닫을 때까지 있다가 의자 정리까지 도와준 다음 집으로 돌아오기를 계속한 일도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학교 도서관에 가거나 책을 대출받아 읽는 것은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계속됐다. 처음에는 우리나라 소설에서 시작해 외국 소설로, 그리고 점차 다른 책들로 독서 영역이 넓어졌다. 닥치는 대로 읽었기 때문에 《사상계》 같은 의식을 깨우치는 잡지도 비교적 일찍 접했다. 야한 소설책도 일찍 읽어봤다. 중·고등학교 6년간 무척 많은 책을 읽었다. 독서를 통해 세상을 알게 됐고 인생을 알게 됐다. 사회의식도 생겼다.”
 
 
  11. 사회의식
 
  “내가 사회의식을 비교적 일찍부터 키워나갈 수 있었던 것은 상당히 일찍 신문을 읽기 시작했던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책에 굶주렸던 것과 같은 이유로, 나는 아버지가 보는 신문을 어릴 때부터 읽기 시작했다. 읽을거리가 궁해서였다. 당시 신문에 한자가 꽤 많이 섞여 있었다. 처음에는 한자가 없는 연재소설 같은 부분만 골라서 읽었다. 그러다 차츰 한자가 섞인 기사까지 읽게 됐다. 자꾸 읽다 보니 앞뒤 문맥으로 한자를 알 수 있었고 자주 쓰이는 쉬운 한자는 깨칠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 당시 대표적 야당지로 이름 높았던 《동아일보》 고정 독자였다. 나도 그 신문을 오랫동안 보면서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요즘 너무 많이 달라져 버린 《동아일보》가 안타깝다.”
 
 
  12. 경남고등학교 시절
 
  “일단 중학교 입시 관문을 넘어서자 고등학교 입시는 수월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머리가 굵어지면서 사회에 대한 반항심 같은 게 생겼다. 고3 올라가선 술, 담배도 하게 됐다. 내가 다닌 경남고등학교는 걸핏하면 ‘한강 이남에서 제일’이라 말할 정도로 일류 학교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대학입시를 중시했지만 요즘과는 달랐다. 공부는 학생들이 각자 알아서 하도록 했다.”
 
  고교 시절 초기에는 ‘문과에 문재인, 이과에 승효상’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학업에 두각을 나타냈지만, 말기에는 극도로 가난한 자신의 처지에 낙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13. 별명 ‘문제아(問題兒)’
 
경남고 재학 시절의 문재인 전 대표(가운데 친구를 안고 있는 이). 당시 그의 별명은 ‘문제아’였다.
  “고3 봄 소풍 때 일이다. 자유시간에 친구들과 인근 마을에서 술을 사 갖고 와 마셨는데 그중 한 명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많이 취했다. 들킬까 봐 걱정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집합시간에 이 친구가 담임선생님 앞에서 인사불성 뻗어버렸다. 할 수 없이 함께 술을 마셨다고 이실직고한 후 몇 명이 그 친구를 업고 병원에 갔다. 학교에서 처벌을 하니 마니 하다가 그래도 의리를 지켜 이실직고한 정상이 참작돼 뻗은 친구만 정학 받은 것으로 끝났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친구들과 축구시합을 한 후, 학교 뒷산에서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며 고성방가하다가 하필 당직을 하고 있던 지도부 주임 선생님에게 걸렸다. 그리고 몽땅 유기정학을 받았다. 중·고등학교 때 내 별명은 ‘문제아’였다. 처음엔 그냥 이름 때문에 생긴 별명이었는데 그 두 번의 일로 진짜 문제아가 됐다.”
 
 
  14. 첫 데모 참여
 
  “4·19 전통이 아직 생생할 때여서 중요 시국 상황을 맞이하면 고등학생도 시위 대열에 동참했다. 우리 학교에서도 내가 2학년 때 전교생이 3선 개헌 반대 데모를 하고 교문 밖 진출을 시도했다. 그 무렵 막 도입된 페퍼포그 차까지 출동해 교문을 막는 바람에 밖으로 나가지는 못했다.”
 
 
  15. 경남고 동문(同門)
 
  “경남고 동기들 가운데 잘된 친구들이 많다. 박맹우 울산시장, 한나라당 서병수 최고위원, 박종웅 전 의원, 최철국 전 의원, 진익철 서초구청장 등 정치권에 있는 동기들이다. 건축가 승효상, 연출가 이윤택 같은 문화·예술계 인사들도 있다. 행정고시를 거쳐 고위관직을 지낸 동기들도 꽤 여럿이고 법조계에 몸담고 있는 친구들도 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친구들도 많고 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친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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