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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의 클로즈업] “당신, 제발 혼자 나가 놀 수 없어?”

김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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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도장 꺼내며 퇴직 연금은 반반씩이라고 웃으며, 아주 상냥하게 이야기하는 일본 중년 여인들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가슴 한구석이 써늘해진다.
도대체 왜 남자들의 말년이 이래야 할까?
늦었지만 나만의 트레이드 마크를 개발하지 않으면 구박을 피할 길 없다


金珽運
⊙ 1962년 서울 출생.
⊙ 고려대 심리학과 졸업. 독일 베를린자유대 심리학 박사.
⊙ 베를린자유대 전임강사, 명지대 여가문화센터 소장 역임.
⊙ 저서 : <일본열광> <휴테크 성공학> <노는 만큼 성공한다> 등.
시가를 물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윈스턴 처칠. 그림 그리기는 그에게 자기확인의 수단이었다.
  “김 교수, 내 요즘 사는 게 아주 우울해.”
 
  대기업 사장으로 은퇴하신 분이 침울한 표정으로 하는 이야기다.
 
  “아니, 왜 그러세요?”
 
  한국의 대기업 사장으로 명예롭게 은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해외지사, 지방 공장장 등 정열적으로 일하던 시절의 대부분은 집 밖에서 보냈다. 은퇴하는 날 불현듯 아내 생각이 났다. 아이들이 훌륭하게 자라 각각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고, 자신이 이렇게 존경 받으며 은퇴할 수 있었던 것은 다 아내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에게도 아내가 있었던 것이다. 이토록 당연한 생각이 이처럼 늦게 떠오르다니. 뒤늦은 통찰에 그는 결심했다. 내가 이제부터는 아내를 위해 살리라.
 
  은퇴 후, 그는 매일같이 아내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고자 애썼다. 백화점에서 아내의 손가방을 들고 서 있기도 했다. 우아한 호텔 저녁식사도 자주 했다. 해외 골프여행, 크루즈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주말이면 아내가 다니는 교회에 따라 나가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그러나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이 더 이상 의무는 아니었다. 서서히 아내의 존재가 즐겁고 감사해지기 시작했다.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자신에게 아내밖에 없음을 피부로 느끼게 됐다. 아내도 즐거워하는 듯했다.
 
  그런데 딱 3개월이 되던 날, 아침 식탁에서 아내는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당신, 이젠 제발 좀 혼자 나가 놀 수 없어?”
 
 
  은퇴 남편 증후군과 ‘전국 헌신적 남편협회’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들 착각한다. 열심히 일해 은퇴하면 행복한 가정에서 다복한 노후를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어느 날 갑자기 행복해지자고 구호 외친다고 행복해지지 않는다. 몸은 함께 살았지만, 평생토록 함께 기쁨을 느껴 본 적이 없는 부부가 어찌 갑자기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제 이혼은 철없는 젊은 부부의 문제가 아니다. 황혼 이혼이 대세(?)다. 살 만큼 다 살고 이혼한다는 이야기다.
 
  황혼 이혼이 심각한 일본에서 2005년과 2006년, 갑자기 이혼율이 급격히 하락했다. 황혼 이혼에 대한 대책에 골몰하던 정책담당자들은 자신들의 각종 대책이 이제야 성과를 얻었다고 기뻐했다.
 
  착각이었다. 2007년 4월 이후 황혼 이혼율은 오히려 급증했다. 새롭게 시행되기 시작한 ‘年金(연금)분할제도’ 때문이다. 이혼한 부인도 남편의 연금을 받아 갈 수 있도록 한 제도다. 남편의 연금에서 최대 50%까지 가져갈 수 있다는 이 제도가 국회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2005년경부터 아내들은 이혼을 참고 미뤘던 것이다. 그리고 이 법이 시행되자마자 서둘러 이혼하기 시작했다.
 
  남편 옷만 만져도 두드러기가 돋고, 남편이 집안에 있으면 소화가 안 된다는 ‘은퇴남편 증후군(Retired Husband Syndrome)’이란 새로운 정신병리학 용어가 만들어진 일본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일본 여성의 60%가 이 증후군에 시달린다고 한다. 이 말도 안 되는 현실 앞에서, 은퇴를 앞둔 일본의 중년 남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들은 ‘전국 헌신적 남편협회’ 같은 단체를 만들어 가능한 한 아내 곁에서 오래 버틸 전략을 짜고 있다. 이들은 아침마다 외친다.
 
  “(아내에게) 이길 수 없다, 이기지 않는다, 이기고 싶지 않다.”
 
  오직 ‘젖은 낙엽’처럼 바닥에 딱 붙어 살겠다는 이야기다.
 
 
  “엄마가 미쳤다”
 
  은퇴는 한참 멀었지만 나도 아내가 서서히 두려워진다. 특히 요즘 인기가 많다는 ‘엄마가 미쳤다’인지, ‘엄마가 뿔났다’인지 하는 김수현의 주말드라마를 빠지지 않고 몰입해 보는 아내의 뒤통수가 그렇게 부담스러울 수가 없다.
 
  솔직히 내겐 ‘엄마가 뿔났다’는 제목보다는 ‘엄마가 미쳤다’가 옳다. 실제로 그렇게 기억하고 출연하던 아침 방송에서 ‘엄마가 미쳤다’고 말했다가, 아줌마들의 집단적 항의에 시달리기도 했다. 내 무의식의 불안이 그런 방식으로 표출된 것이다.
 
  사실 나는 특정 고유명사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기억한다. 예를 들면 서초동의 ‘예술의 전당’을 기억해 내려면 ‘전설의 고향’이 먼저 떠오른다. 또 용인의 워터 파크인 ‘캐러비안 베이’를 기억해 내려면 ‘크라운 베이커리’를 먼저 중얼거리게 된다.
 
  이 두 가지 경우는 단지 발음과 운율의 왜곡이지만 ‘엄마가 미쳤다’는 내 무의식의 저항이다. 아내도 연속극의 주인공 “김혜자가 정말 미쳤다”면서 내 앞에서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지만, 그 속을 어떻게 알까? 실제 뭔가가 공감이 되는 게 있으니 그토록 열심히 보는 것 아닌가?
 
  사실 내 어머니도 요즘 아버지를 많이 구박(?)하신다. 어머니가 손수 해 주는 밥을 아버지가 그토록 좋아하는데 잘 안 해 주신다. 아주 의도적으로 그러신다. 그리고 ‘가난한 집안의 7남매의 잘난 맏아들’(이는 아주 전형적인 며느리 恨-스토리 텔링의 주제다)에게 시집와 고생한 이야기를 시간 날 때마다 반복하신다. 돌아가신 지 오래된 시어머니의 교묘한 시집살이와 시누이들의 행태를 이야기하실 때는 아직도 눈물을 글썽거리신다.
 
  이야기를 잘 들어보면 참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셨다. 지금도 그 시동생들 때문에 곤란한 일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이미 사십 초 중반에 들어선 며느리가 둘이고, 잘난 사위도 있으며 대학생인 된 손자부터 초등학교 4학년인 손자까지, 손자만 일곱이다. 그런데도 아직 가족들이 모이면, 그때 강원도 산골짝에 시집가서 고생한 이야기다.
 
  이 한스러운 이야기에 이어질 다음 이야기는 뻔하다. 아버지에 대한 불평이다. 심지어 아버지의 바지를 다리면서 바지 길이가 짧아 다릴 것도 없다며 타박하신다.
 
 
  왜 남자들의 말년이 이래야 할까?
 
  내 아버지는 내년이면 여든이 되신다. 귀가 약간 어두우셔서 보청기를 끼는 것 말고는 여전히 정정하시다. 한 20년은 더 건강하게 지내실 것 같다.
 
  아버지는 이젠 어머니의 오래된 시집살이 스토리 텔링에 면역이 되셨을 만도 한데, 아직도 못 견디겠는지 슬그머니 보청기를 빼신다. 그리고 이내 책으로 눈길을 돌리신다. 이전에는 그래도 예의 평안도 말투로 “거, 그만 하라우!” 하셨는데, 이젠 아예 무반응이다.
 
  지금도 밖에 나가면 남들 앞에 꼿꼿한 자세를 잃지 않고 품위를 유지하는 내 아버지다. 비슷한 연배의 어른들과 모여 앉아 ‘10년 좌파정권’ 비판이라도 하실라치면, 흥분하신 그 표정이나 제스처가 60대 초반도 많아 보인다. 하나 집에서는 서글플 정도로 조용하시다. 바지 길이가 짧아서 밉다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어머니의 비난에도 그냥 씩 웃으실 뿐이다.
 
  아, 그러나 적어도 내 아버지만큼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어머니한테 당해서는 안 된다. 내 어린 시절, 그토록 큰 나무여서 도무지 그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었던 그 아버지가 저렇게 쉽게, 저토록 일방적으로 당하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냥, 그리고 아주 맥없이 당하신다.
 
  그래서 난 100% 아버지 편이다. 젊은 날, 그 엄하고 무서웠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르게 살고 싶었던 나였지만, 이제는 완전히 아버지 편이다. 단순히 아버지에 대한 연민 때문만이 아니다. 나도 나중에 그렇게 일방적으로 당할까 두려워서다. ‘엄마는 미쳤다’에 몰두하는 아내의 뒤통수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 아버지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이 땅에서 한때 폼 잡으며 천하를 호령하던 남자들의 후반기는 한결같이 이런 식이다. 그래도 아직은 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느껴지는 어머니의 투덜거림은 애교에 가깝다.
 
  이혼 도장 꺼내며 퇴직 연금은 반반씩이라고 웃으며, 아주 상냥하게 이야기하는 일본 중년 여인들의 모습은 정말 상상만 해도 가슴 한구석이 써늘해진다. 도대체 왜 남자들의 말년이 이래야 할까? 도대체 어디서 무엇이 문제가 된 것일까?
 
  ‘뿔난, 혹은 미친’ 여자들이 문제가 아니다. 일생 동안 자신의 존재를 사회적 지위로만 확인해 온 남자들이 문제다. 이 땅의 사내들이 불쌍해지는 것은 존재 확인방식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내와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존재를 확인해 본 적이 없던 이들에게 사회적 지위가 사라지는 순간은 사형선고와 마찬가지다. 존재 확인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존재확인
 
  느닷없이 아내와의 관계에서 존재를 확인하려니 아내들이 황당해지는 것이다. 아내는 아내대로 수 십년간 남편이 부재하는 일상에 익숙해져 있다. 그런데 그 평화로운 일상을 은퇴한 남편이 끼어들어 방해하니 부담스럽고 짜증나는 것이다.
 
  존재를 확인하는 방식을 심리학에서는 ‘아이덴티티(Identity)’라고 한다. 사실 아이덴티티는 철학에서 ‘A는 A로 변함없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同一律(동일률)의 개념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변하지 않고 영원히 동일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어디 있을까? 또 스스로가 스스로를 확인하는 것이 어디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스스로가 스스로를 확인하는 일은 ‘자기반성(Self-reflection)’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자기반성도 철학적으로 보면 모순이다. 스스로가 인식의 주체가 되면서 인식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 모순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문장이 있다.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 문장에는 참과 거짓이 동시에 존재한다. 만약 내가 하는 말이 정말 거짓말이라면 나는 지금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만약 내가 하는 말이 진실이라면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렇게 내가 내 스스로를 확인하는 일은 논리적으로 풀 수 없는 모순이 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플라톤은 스스로 자기확인이 가능한 세상을 ‘이데아’라고 했다. 자신이 자신으로 확인되는 것은 말 그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히 꿈꿔야만 하는 세상이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황당한 제목의 소설이 나오기도 하고,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는 노래가 한동안 유행하기도 했던 것이다.
 
  나는 절대 스스로 확인되지 않는다. 나는 항상 나와는 다른, 또 다른 어떤 것에 의해 ‘확인(identify)’되는 존재다. 그러나 내가 나를 확인해야 하는 그 대상이 쉽게 사라지는 것이라면 존재불안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된다. 사회적 지위로 자신을 확인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존재불안에 가장 많이 시달리는 사람이 ‘정치인’이다. 정치인은 자신이 선거에서 떨어지는 바로 그 순간부터 존재가 사라진다. 이름 앞에 前(전)이 붙은 명함을 달고 다니는 것처럼 불안한 존재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어떤 수모와 굴욕이 있어도 정치판을 떠나지 못한다. 존재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여름, ‘광우병 사태’로 곤경에 처한 李明博(이명박) 대통령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처칠에 관한 책을 나눠줬다고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아마도 이명박 대통령에게는 처칠이 불굴의 투지로 온갖 역경을 딛고 일어난 영웅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을 통해 존재 확인한 처칠
 
  그렇다. 하지만 그런 처칠을 가능케 한 처칠의 집요한 심리적 차원에 관한 이야기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듯하다. 사실 인격적으로 처칠은 그다지 훌륭한 사람이 못 된다. 일이 조금만 잘되어도 흥분하여 잘난 체하곤 했다. 다 자기가 잘나서였다는 투였다. 그러다가 조금 일이 안 풀려도 쉽게 무너져 낙담했다. 아주 쉽게 우울증상이 나타나 주위 사람들을 부담스럽게 했다. 울기도 잘 울었다.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자기 방에 처박혀 하루 종일 울었다.
 
  그를 가까이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가 얼마나 까다로운 사람이었는가를 전하고 있다. 심지어 그를 평생 보좌한 여비서는 이렇게 증언했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와 싸운 것이 아니에요. 처칠과 싸웠어요.”
 
  그녀의 표정은 “정말 지긋지긋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아내조차도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그의 성격에 질렸다. 그녀가 처칠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따뜻하고 친절한 영국신사와 오랫동안 불륜관계였다는 소문은 당시 공개된 비밀이었다. 이토록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그가 도대체 어떻게 그토록 위대한 세기의 영웅이 될 수 있었을까?
 
  존재 확인의 기술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20대에 국회의원이 되고, 30대에 장관을 지냈다. 그러고는 수십년간 재야에서 와신상담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는 사회적 지위로 존재를 확인하는 방식이 얼마나 위태로운가를 이미 젊은 시절에 다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 힘든 시간에 그는 항상 그림을 그렸다. 아내가 쉬겠다고 혼자 떠난 크루즈 여행에 그 불륜의 부드럽고 잘생긴 신사가 함께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그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처칠의 존재는 그림을 그릴 때 확인되었다. 사회적 지위가 사라져도, 사랑하는 아내의 배신에도 그에게는 마지막 존재확인의 방식이 있었다.
 
  그림 그리기. 그렇다. 내 존재는 내가 즐거워하는 일로 확인되어야 한다. 내가 즐거워하는 일로 존재를 확인하면 관계에서 확인되는 존재 역시 언젠가는 다시 작동하게 되어 있다. 처칠의 아내는 온갖 소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처칠의 곁에 머물렀다. 존재가 확인되면 사회적 지위는 부산물로 얻어지게 되어 있다. 처칠이 위대한 이유는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나는 교복(?)을 입는다
 
교복 스타일의 옷을 입은 필자.
  덤으로 처칠은 우리에게 우아하게 나이 들어가는 방법을 한 가지 알려준다. 자신만의 트레이드 마크를 개발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신의 옷을 스스로 디자인해 입었다. 촌스러워 보이는 그의 군복 스타일의 옷은 다 자신이 디자인한 옷이다. 손가락으로 승리의 ‘V’를 그려 보이는 것도 스스로 연출한 트레이드 마크다. 그가 독한 시가를 항상 물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는 처칠에 관한 자료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괴팍한 성격에 위로를 얻는다. 내 까다로운 성격도 처칠에 못지않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나도 처칠처럼 나만의 트레이드 마크를 개발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나만의 독특한 옷을 입기로 한 것이다. 다들 똑같이 입는 양복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다. 도대체 내가 반드시 양복을 입어야 하는 이유가 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 없다. 다른 옷을 입어야 한다.
 
  대안적인 공식 복장들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독일 성악가들이 입는 무대의상이 떠올랐다. 나는 독일 가곡을 좋아한다. 시간이 나면 독일 가곡을 따라 부르는 것이 내 즐거움이다. 처칠의 그림 그리기처럼. 처절한 외로움에 시달렸던 독일 유학시절, 나는 독일 가곡 연주회를 수없이 다녔다. 그때 봤던 차이나 칼라 스타일의 독일 성악가들의 옷은 참으로 단순하면서도 품위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 동네 양복점에서 그들이 입는 옷의 모양을 설명하고 비슷한 옷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이런, 교, 교복을 만들어 놨다. 그래도 나는 그 옷을 입기로 했다. 그 옷을 입고 있으면 슈베르트의 가곡을 부르는 성악가가 된 기분이기 때문이다.
 
  만나면 다들 왜 교복을 입고 다니느냐고 한다. 거참, 일일이 설명하기도 난감하다. 그래도 난 공식적인 자리에는 항상 그 옷을 입는다. 내 존재는 교수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슈베르트의 가곡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혼자 즐길 줄 알아야 내 아내도 이담에 내 존재를 부담스러워하며 뿔 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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