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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1. 칼럼

김병헌의 다시 짚어보는 우리 역사(47)

백제의 '서기(書記)'와 신라의 '국사(國史)'는 역사서가 아니다.

한국사 교과서, 이대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

김병헌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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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진흥왕(眞興王) 6년 기록
현행 한국사 교과서에는 고대 문화 부문(部門)에서 삼국(三國)의 역사서를 소개하고 있다. 내용에는 큰 차이가 없이 고구려는 영양왕 때 이문진이 이전의 『유기(留記)』를 요약하여 『신집(新集)』 5권을 편찬하였으며, 백제에서는 근초고왕 때 고흥이 『서기(書記)』를, 신라에서는 진흥왕 때 거칠부가 『국사(國史)』를 편찬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실려 있어 정설로 굳어진 상태다. 그런데, 백제의 서기와 신라의 국사를 과연 역사서라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아래는 이와 관련한 현행 한국사 교과서 서술이다.
 
금성출판사
백제는 근초고왕 때에 고흥이 서기, 신라는 진흥왕 때에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였다. 현재 이들 역사서는 현재 전하지 않지만, ‘삼국사기등에 그 내용이 남아 있다.(71)
동아출판
이와 함께 왕실과 국가 위신을 과시하기 위해 고구려는 유기’, ‘신집’, 백제는 서기’, 신라는 국사등 역사를 비롯한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39)
리베르스쿨
백제에서는 근초고왕 때 고흥이 서기, 신라에서는 진흥왕 때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였다. 이들 역사서는 모두 전하지 않는다.(59)
미래엔
백제는 근초고왕 때 고흥이 서기, 신라는 진흥왕 때 거칠부가 국사를 각각 편찬하였다. 이러한 역사서의 편찬에는 국력을 과시하고 왕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52)
비상교육
백제에서는 근초고왕 때 고흥이 서기, 신라에서는 진흥왕 때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였다. 이들 역사서는 현재 모두 전하지 않고 있다.(54)
지학사
백제에서는 근초고왕 때 박사 고흥이 역사서인 서기를 편찬하였다.(68)
천재교육
백제에서는 근초고왕 때 고흥이 서기, 신라에서는 진흥왕 때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였다. 그러나 이들 역사서는 현재 모두 전하지 않는다.(37)
 
먼저 백제의 서기(書記)로 『삼국사기(三國史記)』 근초고왕(近肖古王) 30년 11월에는 ‘왕이 죽었다[王薨]’는 기사에 이어 “古記云, “百濟開國已來, 未有以文字記事, 至是得博士髙興, 始有書記.”라는 글이 수록되어 있다. 이 글을 천재교육 교과서는 아래와 같이 소개하였다.
 
근초고왕 30년(360), 옛 기록에는 “이때에 와서 박사 고흥이 처음으로 ‘서기’를 썼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천재교육, 37)
 
이 번역문에서 근초고왕 30년은 375년으로 360년은 잘못이며, “이때에 와서 박사 고흥이 처음으로 ‘서기’를 썼다.”는 문장은 명백한 오역(誤譯)이다. 고기(古記)의 내용으로 소개된 원문을 이해하기 쉽도록 재배치해봤다.
 
  百濟開國已來, 未有以文字記事
至是得博士髙興, 始有(以文字)書記
 
이 문장의 핵심은 ‘未有(미유:없었음)’와 ‘始有(시유:있기 시작함)’에 있다. 백제가 개국한 이래 없었다가 근초고왕 때에 이르러 박사 고흥을 만나 있기 시작한 것은 바로 ‘문자로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記事’나 ‘書記’는 동의어 반복으로 다른 글자를 썼을 뿐 ‘기록(記錄)’이라는 같은 의미의 단어이며, ‘書記’ 앞에는 ‘以文字’가 생략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 득(得)은 ‘얻다’는 뜻으로 많이 쓰이나 여기서는 ‘만나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를 토대로 이 문장을 다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백제는 개국(開國) 이래 문자(文字)로 기록하는 일이 없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박사(博士) 고흥(高興)을 만나 기록하는 일이 있기 시작하였다.
 
근초고왕 이전에는 문자로 기록하는 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박사 고흥이 나타나서 비로소 글로 써서 기록한 것으로 해석된다. 근초고왕 이전에 문자가 없었던 백제에 기록을 남겨놓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박사 고흥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타 기록에 없으니 어떤 인물인지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런데, 현행 국사 교과서에는 모두 박사 고흥이 백제의 역사서인 ’서기‘를 편찬하였다고 서술하였다. 또, ‘백제 근초고왕 때 박사 고흥(高興)이 편찬한 역사책’이라고 정의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백제가 국가의 제도를 정비하고 대외적인 발전을 시작할 무렵에 편찬한 이 책은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건설의 문화적 기념탑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해당 항목 집필자는 원전(原典)부터 제대로 살펴보기 바란다.
 
다음은 신라의 국사(國史)다. 마찬가지 출전은 『삼국사기』로 진흥왕(眞興王) 6년(545) 7월 기록에 ‘伊湌異斯夫奏曰, “國史者, 記君臣之善惡, 示褒貶於萬代. 不有修撰, 後代何觀.” 王深然之, 命大阿湌居柒夫等, 廣集文士, 俾之修撰.’으로 실려있다.
 
먼저 사료로 소개한 천재교육 교과서의 역문(譯文)을 보도록 한다.
 
진흥왕6년(545), 7월에 이찬 이사부가 아뢰기를 “나라의 역사는 임금과 신하의 선악을 기록하여 포폄(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만대에 보이는 것이니 (이것을) 편찬하지 않으면 후대에 무엇을 보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진실로 그렇다고 여겨 대아찬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널리...... ‘국사’를 편찬하였다. -삼국사기- (천재교육, 37)
 
여기서 ‘포폄’을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정확한 의미가 아니다. 포폄은 군신(君臣)의 행위에서 선(善:잘한 것)은 포창(襃彰:찬양하여 내세움)하고 악(惡:잘못한 것)은 폄하(貶下:깎아 내림)한다는 것으로 선악을 엄격히 평가하여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놓아야 후대의 위정자(爲政者)들이 이를 보고 처신에 신중할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이어서 ‘(이것을) 편찬하지 않으면’은 ‘편찬한 것이 없으면’으로, ‘후대에 무엇을 보이겠습니까?’는 ‘후대에 무엇을 보겠습니까?’로 번역해야 한다. 군신의 선악에 대한 엄격한 평가를 수집하여 편찬한 것이 있어야 후대에 그것을 보고 경계(警戒)로 삼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무엇을 보고 경계로 삼겠는가라는 뜻이다. 마지막의 “‘국사’를 편찬하였다.”는 것은 자의적 해석으로 당연히 오역이다. 이를 다시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이찬 이사부가 아뢰기를, “나라의 역사라는 것은 군신(君臣)의 선악을 기록하여 만대에 포폄(褒貶)을 보이는 것이니 수찬(修撰:편찬)한 것이 없으면 후대에 무엇을 보겠습니까?”라고 하자 왕이 정말 그렇구나 하고 대아찬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널리 문사(文士)를 모집하여 편찬하도록 하였다.

  문제는 국사(國史)다. 문장 그대로 ‘진흥왕이 국사를 편찬하도록 하였다.’는 번역이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이때 ‘국사’는 그냥 ‘나라의 역사’일 뿐 책명이라고 할 수 없다. 진흥왕 때 나라의 역사를 편찬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나 그 역사서의 명칭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기록이 있다면 모를까 현재로서는 이 글이 유일한 전거(典據)이니 그때 편찬된 역사서의 명칭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원전의 내용이 이러함에도 교과서뿐만 아니라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백제의 ‘서기’와 신라의 ‘국사’를 『책명』이라고 명시하여 실었다.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는 포정(庖丁)이 소를 해체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이 글의 본질은 양생(養生)의 도(道)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나, 포정이 해우(解牛)의 신기(神技)를 발휘하는 데는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어도 방금 숫돌에 간 것처럼 날이 서있는 칼이 있었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칼이 없는 포정을 상상할 수 없으며, 무딘 날을 가진 칼을 든 포정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국학 연구자에게 포정의 칼은 곧 한문 실력이라 할 수 있다. 한문을 모르는 역사 연구자를 상상할 수 없고, 무딘 한문 실력에서 명석(明晳)한 연구 성과가 나오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필자의 한문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문학 전문가들이 모인 곳에서는 말석에조차 앉을 수 없는 얕은 실력임에도 우리 역사책만 펴면 걸리는 것이 사료(史料) 오역(誤譯)이다. 다수의 논문에 거론된 사료 오역이 그렇고, 교과서에 인용된 사료의 오역이 그렇다.
 
한문을 잘 모르고 해석이 제대로 안 되니 진경산수(眞景山水) 같은 황당한 산수화가 등장하고,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도깨비 같은 새로운 서체가 나타나 세상을 혼탁하게 해도 시비를 따지기는커녕 손뼉 치며 환호하기에 바쁘다. 소위 전문가조차 날카로운 포정의 칼을 들이대기보다는 온갖 현학적(衒學的) 용어를 동원하여 찬양에만 몰두하는 듯하다. 한문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원전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한자‧한문을 홀대한 대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입력 : 2017.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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