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안함을 기억해주시고, 또 격려해주시는 분들이 대한민국 국민”
⊙ 천안함 탑승자들이 기록한 1차 史料 정리 중… 326호국보훈연구소 만들어
⊙ 수병 출신 아버지, 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의 이름을 따서 아들 이름 지어
⊙ “일지 등 점검하고 있는데 갑자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오른쪽으로 급격히 기울어”
⊙ “일부가 주장하는 한반도 평화는, 북에 순응해서라도 전쟁을 막자는 것 아닐까”
⊙ 58명 생존자 중 23명은 아직 군복을 입고 있고 35명은 전역
⊙ “천안함 장병들은 특정 지역, 특정 정권이 아니라 대한민국과 국민을 지키던 군인들”
⊙ 천안함 탑승자들이 기록한 1차 史料 정리 중… 326호국보훈연구소 만들어
⊙ 수병 출신 아버지, 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의 이름을 따서 아들 이름 지어
⊙ “일지 등 점검하고 있는데 갑자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오른쪽으로 급격히 기울어”
⊙ “일부가 주장하는 한반도 평화는, 북에 순응해서라도 전쟁을 막자는 것 아닐까”
⊙ 58명 생존자 중 23명은 아직 군복을 입고 있고 35명은 전역
⊙ “천안함 장병들은 특정 지역, 특정 정권이 아니라 대한민국과 국민을 지키던 군인들”
한 국가의 품격(品格)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그 나라가 어떤 인물을, 어떤 사건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는가를 통해서다. 2010년 3월 26일 밤 9시22분, 백령도 남서쪽 약 2km 부근에서 포항급 초계함 PCC-772 천안함이 북한 해군 잠수정 어뢰에 피격, 침몰했다. 46명의 장병이 전사(戰死)했다. 58명은 현장에서 구조됐다. 그런데 그날 이후, 우리 사회에서 천안함을 기억하는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우리는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영웅들을 지금 현재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가. 갑갑하고 죄송한 심정으로 2월 말 최원일(崔元一·54) 전 천안함 함장(艦長)을 만났다.
“처음 3~4년은 술·담배에 의지”
― 곧 3월 26일이 다가옵니다. 어떤 심정이십니까.
“올해가 13주기인데, 매년 제가 느끼는 심정은 똑같습니다. 먼저 간 전우(戰友)들이 보고 싶고, 고통받는 생존 전우들이 많이 생각나고 그렇습니다.”
필자는 2021년 6월 천안함 생존 장병 함은혁 예비역 하사와 정현구 장병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두 사람 모두, 매년 ‘그날’이 다가올 때마다 알 수 없는 스트레스에 짓눌린다고 했다.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하다고 했다. 죽음 직전까지 갔던 공포(恐怖)와 더불어, ‘우리만 살았다’라는 죄책감에 시달린다고 했다.
― 생존 장병 모두가 그날이 오면 전우들 묘소에 찾아가서 묘비(墓碑)를 붙들고 울기도 하고, 도무지 생활에 집중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함장님도 스트레스나 외상 후 증후군을 겪으십니까.
“네, 있습니다. 항상 2월이 오면, 그러니까 3월이 가까워지면 몸과 마음이 반응합니다. 몸은, 당시에 추웠던 걸 기억합니다. 그리고 제가 그날 부상(負傷)한 부위에 통증을 느끼죠. 실제로 아픈 건지 아니면 정신적으로 아픈 건지,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심정적으로는, 좀 심한 고통을 겪는 날이 많습니다. 그 순간이 생각나서 며칠 동안 잠을 못 이룰 정도죠.”
― 어떻게 극복하십니까.
“고백하자면, 처음 3~4년 정도는 술과 담배에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렇게 살다가는 그날의 기억을 영영 잊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땀을 흘리는 운동을 하고, 명상(冥想) 등을 하면서 몸과 마음을 진정시킵니다. 또 전우들의 사진을 보면서 그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최원일 함장은 두툼한 자료를 들고 왔다. ‘그날의 기록’이다. “한 권이 아니고 여러 권입니다. 저는 ‘국방부나 해군이 당연히 천안함 자료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진 자료 말고는 아무 곳에도 상세한 기록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정리했습니다.”
― 공식 기록이 없다니, 믿을 수 없습니다.
“공식 기록은 있죠. 《피격사건 백서(被擊事件 白書)》라든가 조사단 조사결과보고서는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 자료는 상부(上部)의 시각으로 작성한 문서입니다. 천안함 탑승자들이 기록한 1차 사료(史料)는 제가 기록하고 모으지 않으면 다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작년부터 자료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 공식 기록과 직접 작성한 자료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까.
“예를 들면, 처음엔 승조원이 104명이라고 했죠. 정확하게는 108명입니다. 시험을 본다든가 집안 사정으로 4명이 못 탔어요. 정식으로 보고하고 승함(乘艦)하지 않은 인원입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출동한 인원이 104명, 그중 생존자가 58명, 전사자가 46명입니다.”
‘상부의 시각’
최원일 함장이 말한 ‘상부의 시각’이란 무슨 의미일까. MBC는 2021년 6월 〈PD수첩 1292회-천안함 생존자의 증언〉을 방송했다. “전역하고 MBC와 인터뷰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천안함 피폭 사건 당시에는 다들 경황이 없었죠. 그래서 당시 적절한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고, 여러 대응이 다 미흡했던 사실이 나중에 다 판명됐습니다. 저희 함정은 피격 후 전기가 나갔습니다. 통신 장비도 없어졌어요. 그래서 통신이 가능한 수단이라고는 폴더폰이 유일했습니다. 침몰 과정에서 제 전화기는 없어지고 대원들 기기로 통화했습니다. 당시는 통화 녹음 기능이 없었으니까 다 수기(手記)로 적었죠. 그래서 저희 쪽 기록은 없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나중에 기록을 열람하니 제가 일일이 보고했던 기록들이 조금씩 변형이 되고, 왜곡된 부분이 많았다는 겁니다.”
― 어떤 부분입니까.
“예를 들면, 피격 판단 보고 같은 것이 누락되었습니다.”
― 사전에 ‘북이 도발할 가능성이 있다’라고 보고하신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북한은 2009년 11월 10일 대청해전 이후에 ‘보복하겠다’라고 공공연히 말했습니다. 조선중앙방송이라든가 각종 매체를 통해 ‘보복 성전을 하겠다’라고 했죠.”
대청해전(大靑海戰)은 2009년 11월 10일 11시27분, 대한민국 해군과 북한 해군 사이에 일어났던 소규모 전투다. 북한 해군 경비정이 대청도 동쪽 NLL을 1.2해리 넘어왔고, 우리 측 대응으로 월선(越船)한 북 경비정이 반파(半破)되었다. 8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북한 경비정은 다른 함선에 예인(曳引)되어 북상하였다. 대한민국 해군이 입은 피해는 함선 외부 격벽의 파손이 전부였다. 정치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군 수뇌부가 교전수칙(交戰守則)대로 대응해 얻은 승전(勝戰)이다.
“당시 우리 경계 태세는 평상 상태”
― 북이 복수를 공언한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이었는데, 왜 천안함은 위험 지역인 백령도(白翎島) 가까이 갔던 겁니까? 이런 사정 때문에, 함장이 임의로 그곳에 가지 않았느냐는 의혹을 제기한 사람도 있었죠.
“네. 있었죠. 그런데 제가 임의로 그곳까지 갔다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제 개인의 판단이 아니라, 북의 보복 위협에 대비한 상부 작전 지침에 따라 출동한 것이니까요. 백령도는 적(敵)의 해안포 유도탄 공격으로부터 안전하면서도 레이더 탐지가 되지 않는 비교적 안전한 구역입니다.”
― 그런데 뭐가 문제였습니까.
“천안함은 그 구역에서 경비를 하고 있었죠. 대북(對北) 경계가 심화된 상태였는데, 갑자기 1월에 경계 태세가 해제되면서 평상 상태로 전환되었습니다. 전환되었지만, 위협 요소는 계속 상존하고 있었죠. 대(對)잠수함 경계 태세라든가 다른 대북 경계 태세는 상향된 것이 없었고 ‘북한이 공격에 나설 것이다’라는 정보도 없었습니다. 있었다면 함대에서도 저희 배를 백령도 인근에 놔두지 않고, 당연히 더 안전한 아래쪽으로 이동하라고 했겠죠. 그때 당시 우리 경계 태세는 평상 상태였어요. 그러니까 제가 임의로 그곳까지 함정을 몰고 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최원일 함장을 괴롭힌 건 숱한 음모론과 근거 없는 비난이다. 그 기가 막힌 사연은 글 뒷부분에서 따로 다루기로 하자. 천안함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지만, 인간(人間) 최원일, 군인(軍人) 최원일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피격 폭침 전후 그의 삶을 기록하는 일은, 천안함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웅(英雄)의 일대기(一代記)를 기록하는 마음으로 그의 생애(生涯)를 물었다.
수병 출신 아버지, 유언처럼 海士 입교 권유
― 어린 시절부터 군인이 꿈이었나요? 해군에 입대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최원일 함장님의 이름이 손원일(孫元一·1909~1980년) 제독(提督)의 성함을 딴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해사(海士) 입교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는 문과생으로 인문학(人文學)을 동경했어요. 특히 언론 쪽에 관심이 많아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고3 여름에 아버지께서 갑자기 많이 편찮으셨습니다. 위독한 상태였죠. 그런데 병상(病牀)에서 아버지가 이러시더군요. ‘네 이름엔 사연이 있다’라고요.”
아버지의 성함은 최순(崔洵·1934~ 2013년). 해군 수병(水兵) 출신으로, 전역 후에는 버스 운송업에 종사했다.
“아버지도, 형님도 외자 이름인데, 제 이름만 ‘원일’이어서 어려서부터 궁금했었죠. ‘해군 시절 동경(憧憬)했던 참모총장님 성함을 따서 네 이름을 지었다. 그러니 해군사관학교에 가는 게 어떻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유언(遺言)일 수도 있으니까 일단 제 꿈을 접고 해사에 원서를 넣었습니다.”
1986년의 일이다. 최원일은 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손원일 제독의 전기(傳記)를 10번 정도 읽었다. 그러고 1987년 초 해사에 들어갔다.
어머니 김옥점(金玉點·85)씨는 자신의 꿈을 접은 아들이 안타까웠다. 진해(鎭海)로 면회 와 “지금이라도 퇴교(退校)해 일반 대학으로 가라”고 권유했다. 문과 체질이라 처음에는 생도 생활이 힘들었는데, 어찌어찌 적응해서 무사히 졸업하고 임관했다.
― 해사 시절 최원일 생도는 어떤 생도였습니까.
“제가 함장 할 때는 체중이 80kg 정도였습니다. 몸이 좋았죠. 생도 입교할 때는 60kg 정도로, 아주 왜소하고 마른 체구였어요. 사관학교 들어가면 맨 처음에 가입교(假入校) 훈련을 5주 동안 받습니다. 그 몸으로 훈련 과정을 소화할 수 있겠나 주변에서 다들 걱정하셨어요. 어떻게든 버텨서 입학했습니다.”
― 입교 뒤에는 상황이 나아졌습니까.
“생도 생활하다 보니까, 몸이 적응하는 겁니다. 체력도 올라오고 구보도 잘했고요. 1학년 때는 힘들었지만 ‘2학년 되면 좀 낫겠지’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2학년 때는 ‘3학년 올라가면 좀 낫겠지’라고 생각했고요. 그러다 보니까 졸업할 때가 되어 있더군요.”
동복 입고 출동, 하복 입고 입항
― 임관 후 첫 임지가 어디였습니까.
“첫 임지가 PC, 초계함(哨戒艦)이었습니다. 저는 초계함을 계급마다 다 탔어요. 네 번을 탔습니다. 초계함 탑승은 출동도 많고 임무도 복잡한 데다 출동 일수도 길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병과(兵科)로 옮길까도 생각했지만, ‘중위(中尉)가 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하며 버텼다.
“중위 때도 힘들었고 대위 때도 힘들었죠. 군 생활이 항상 힘들었어요. 하지만 힘든 가운데서도 보람이 컸습니다. 대원들과 부대끼면서 뭔가 임무를 성취하고, 저희가 대한민국과 바다를 지킨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복무했습니다.”
― 초급 장교 시절에 또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정신없이 출동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한번 출동하면 거의 한 달을 바다 위에서 보냈어요. 때로는 해상(海上)에서 여러 달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해군은 검은색 동(冬) 근무복, 카키색 하(夏) 근무복을 입습니다. 동 근무복을 입고 출동한 후 반팔 옷을 입고 입항(入港)할 때도 있었죠.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초계함을 탈 때 아이들이 한 살, 세 살이었거든요. 해군 퇴근 버스를 보면 아빠 온다고 매일 뛰어나갔답니다. 몇 달을 그렇게 아빠 마중 나갔다가 허탕치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더군요. 지금도 청해부대 등 몇몇 함정은 6개월씩 해상 작전을 합니다.”
― 결혼 얘기를 하셨는데 어떻게 만났습니까.
“우연히 기차 안에서 만났죠. 졸업 직전에 만나 4년 연애하고 대위 때 결혼했습니다.”
박경수 중사
최원일은 동기 중 늘 선두로 진급했다. 중령 진급 예정일에 동기생들은 상륙함, 정보함으로 발령받았고 최원일은 전투함인 초계함 함장으로 발령받았다. 동기 중 가장 먼저 함장이 된 것이다. 그 배가 바로 천안함이었다. 필자는 2021년 6월 천안함 생존 장병 국방부 앞 데모를 취재한 적이 있다. 최원일 함장과 생존 장병, 그리고 전사자 유족(遺族)과의 사이에 전우애를 넘어서는, 가족애 같은 무언가가 있음을 느꼈다.
“천안함뿐만이 아니고, 해군 함정을 타는 대원들은 전우라기보다는 가족 같은 전우입니다. 같은 배 타고 의식주 같이하고 가족들보다 더 자주 보기 때문이죠. 특히 천안함 같은 경우는 생사(生死)를 같이했으니까 더 끈끈합니다. 모든 걸 다 봤고, 그때 당시 서로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또 우리가 어떻게 살아 나왔는지를 다 아니까요.”
― 생사(生死)를 같이했다고 하셨는데, 전사한 장병 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누군가가 있습니까.
“누구 하나를 특별히 언급하는 것은 조금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다 그립지만 제가 가장 안타까운 건 뭐냐 하면…. 그날 파도가 많이 쳤습니다. 3월 25일, 피격 전날이죠. 풍랑주의보가 발령될 정도로 파고(波高)가 높았어요. 멀미 때문에 밥을 못 먹을 정도였죠. 피격 직전이 야식 시간이었는데, 어느 정도 파도에 강하고 배에 적응한 친구들이 함미(艦尾)에서 야식을 먹는다든가 휴식 운동하다가 많이 전사했습니다. 제가 2년간 함장을 했는데, 저랑 오래 근무한 친구들이 많이 전사했다는 사실이… 너무 가슴 아픕니다.”
― 그날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시는군요.
“그럼요. 21시 조금 넘어서 저는 함미에서 함수(艦首)로 넘어왔습니다. 그때 중간 부분에서 마주쳤던, 함미로 야식을 먹으러, 또는 휴식하러 가던 대원들의 얼굴과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 기록을 보다가 제가 또 좀 울컥했던 부분이 있는데, 박경수 중사인가요? 연평해전 참전용사인데 천안함 때 전사했고 안타깝게도 아직도 시신을 못 찾은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정말 박경수 전우 같은 경우는 두 차례 다 참전하고 마지막에 안타깝게 전사했습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호국영웅(護國英雄)입니다.”
폭침 순간
― 지금 이 질문은 여쭙기가 상당히 조심스럽습니다마는, 피격 폭침 순간은 어떻게 기억합니까.
“함미 순찰 후 함수로 이동했고, 피격 15분 전쯤 함교(艦橋)에 가서 당직자들에게 지침을 내렸습니다. 그 후 접촉물이 있는지 살피고, 날씨 상태를 보고 함장실로 돌아왔죠. 각종 일지, 모니터 등을 점검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오른쪽으로 급격히 기울었습니다. 제 몸도 붕 뜨면서 물이 차올라 제 목 밑에까지 다 잠겼어요. 저는 머리 오른쪽 뒤쪽을 어떤 물체가 강타해 잠시 정신을 잃었었죠. 그때 위쪽에서 ‘함장님 계십니까?’라며 울면서 저를 계속 부르는 겁니다.”
― 배가 뒤집힌 거네요.
“배가 90도로 기울면서 문이 위쪽으로 올라간 겁니다. 저는 거의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구조 요청하고 상황 보고하라는 지시를 하고 이제 집기류들을 몸에서 걷어내는 순간 우리 전우들이 소화기로 문을 부수고 저를 구했습니다. 소화전 호스를 내려줘서 그걸로 제 몸을 묶고 올라갔던 것이 폭침 순간의 기억입니다.”
최원일 함장을 구한 장병들의 공통된 증언이 있다. 최원일 함장은 생존자를 한 명이라도 더 구하겠다며 끝까지 퇴선(退船)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천안함과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의지를 밝혀서, 부하 장병들이 억지로 끌어내다시피 구조선에 태웠다고 한다.
“당연히 104라는 번호가 나와야 하는데, 점호를 하니 58에서 계속 끊어지는 겁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요. 그럼 46명이 없어진 것 아닙니까? 혹시라도 배 안에 남은 사람은 없나, 바다에 빠져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 대원이 있진 않을까? 이런 생각에 배에서 이탈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배와 운명을 같이한다기보다는, 구조하지 못한 우리 전우들에 대한 책임 이런 것들이 더 많이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음모론자들
― 천안함 폭침 이후 음모론자들이 온갖 유언비어(流言蜚語)를 유포했습니다. 어떤 심정이셨습니까.
“살아 돌아와 보니까, 저희가 지켜주던 국민이 저희에게 또 다른 어뢰를 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음모론은 13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천안함 좌초설 등, 사실과 다른 주장을 하는 책들도 20여 종이나 된다. 그런 책의 저자들이 지금도 강연을 다니고, 인세를 받는다. 천안함 피격 폭침을 생계에 이용하는 건지도 모른다.
“이렇게 된 현실이 개탄스럽습니다. 법적으로 대응하려고 해도, 표현의 자유 때문에 적절한 제재를 가할 수 없습니다. 당사자가 ‘사실’이라고 믿었기에 그런 주장을 한 것이라면, 달리 처벌할 방도가 없다고 하네요.”
심지어 모 유명 사립 고등학교 교사는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을 섞어서 공개적으로 최원일 함장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 교사의 경우, 고소 등 법적으로 대응했습니다. 미래 세대를 이끌어나갈 명문고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가 어떻게 온갖 욕설을 섞어 저에 대한 모욕을 하는지, 그건 순전히 자기주장일 뿐이고, 도저히 용서가 안 되더라고요. 그 교사가 반성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이런 분들이 안 나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 언론으로 보도된 뒤, 그 교사가 함장님께 직접 연락했습니까.
“아닙니다. 페이스북 메시지라든가 뭐 각종 매체로 연락을 했던 기억은 납니다.”
“지금은 성당에 나가지 않는다”
일부 가톨릭 사제도 음모론을 업고 최원일 함장을 비난했다.
“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해사 시절에도 성당에 열심히 다녔고, 가톨릭생도회 총무였죠. 그런데 일부 사제가 하는 얘기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성당에 나가지 않습니다.”
― 일부 몰지각한 사제들이 어떤 이야기를 한 겁니까.
“제가 2010년 11월까지 수사받았는데, 당시는 충남 계룡시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열차를 타고 서울로 계속 출두하면서 수사를 받았는데, 어느 날 대전역에 내렸는데 어떤 사제단이 플래카드를 걸어놨더군요. ‘함장 구속! 책임져라!’ 이런 식으로 적어놓고요.”
일부 몰지각한 사제들은 아직까지도 사과가 없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분들은 제주 해군기지도 반대하고, 정치 활동을 많이 하는 분들이더군요. 사실이 아니더라도, 자기들 주장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 개인에 대해 모욕적인 발언을 성직자들이, 그것도 공개적으로 했다는 사실은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저는 신자가 아닙니까.”
“軍 생활 절반을 중령으로 보낸 셈”
― 왜 형사 입건이 된 겁니까.
“제가 3월부터 11월까지 조사받고 수사받았습니다. 또 징계위원회가 따로 열려서 11월 17일에 마쳤습니다. ‘22사단 철책선 노크귀순 때는 사단장부터 소대장까지 다 징계받았는데, 어떻게 당사자인 함장이 죄가 없느냐’라는 논리로 형사 입건하더군요. 기소유예를 받았습니다. 징계위원회 결정도 징계유예였습니다.”
― 저는 천안함장이 형사 입건되어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도저히 납득이 안 됩니다.
“혐의가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가 대잠(對潛) 정보가 있는데, 왜 경비 구역을 이탈하겠다고 함대에 건의하지 않았는가. 두 번째, 왜 속력을 빠르게 올려서 다니지 않았는가.
아니, 북한이 천안함을 공격한다는 사전 정보가 어디 있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함장이 정상 경비를 하다가 이탈하겠다고 함대에 건의할 수가 있습니까? 그건 근무지 이탈이죠. 그리고 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구역이라며 함대에서 정해준 매복 구역이었고, 3~4m로 파도가 치는데 어떻게 빨리 달립니까?”
군인(軍人) 최원일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항상 선두 진급하던 최원일 함장은 천안함 피격 폭침 이후 꽤 오랜동안 한직(閑職)을 전전했다. 그렇게 10년을 중령으로 지내다 전역(轉役) 하루 전 대령으로 승진했다.
― 어떻게 된 겁니까.
“명예 진급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전역하는 당일 진급하는 거죠. 연금이라든가 각종 혜택은 없습니다. 오직 명예뿐이죠. 본인이 신청해서 적부심을 받습니다. 통과되면 명예 진급을 하는 겁니다. 저는 2008년 중령으로 진급했습니다. 2021년에 전역했으니까, 군 생활 절반을 중령으로 보낸 셈이죠.”
― 왜 그렇게 오랫동안 진급이 안 된 겁니까.
“저를 진급시키면 혹시 북한에 잘못된 메시지를 줄까 봐 부담스러웠겠죠. 천안함을 언급하면 한반도 평화가 깨진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고….”
생존 병사들에게 환자복 입힌 국방부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군은 대한민국의 영토와 주권을 수호하는 보루가 돼야 한다. 군이 정치에 휩쓸리는 순간, 정치적 판단에 따라 누구를 진급시키고 탈락시킨다면, 그 자체가 이미 군 본연의 자세와는 많이 멀어진 것일 터이다.
“국군의 사명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겁니다. 그런데 전역 후 사회에 나오니, 저는 일부 국민으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받는 처지더군요. 국가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 우리를 보호하는 순간 시끄러워지니까요. 일부가 주장하는 한반도 평화는, 북에 순응해서라도 전쟁을 막자는 것 아닐까요? 천안함을 언급하는 순간 북한이 동요하고 시끄러워진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국방부는 다른 방식으로 최원일 함장과 생존 장병을 모욕하기도 했다. 필자 개인의 생각이다. 2010년 4월 7일, 누군가가 생존 장병들에게 환자복을 입히고 기자회견을 했다. 패잔병이라는 이미지가 여기서부터 나왔다. 군인들은 명예가 생명인데,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까 제가 옷을 다섯 번까지 갈아입었더군요. 환자복 입었다가 전투복 입었다가…. 대원들도 사실 전투복을 다 입히려고 했는데, 전투복이 다 유실돼서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구해서 입히자는 말도 있었는데, 갑자기 기자회견 한 10분 전에 저만 전투복을 입으라고 하더군요. 장병들에게 환자복을 입히고, 저는 또 전투복을 입고 기자회견을 했으니, 대부분의 국민이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환자복 입은 장병들은 다 패잔병이고 함장 저놈이 수괴로구나, 책임자로구나, 이렇게 느끼지 않겠습니까? 저는 기자회견 트라우마가 아직도 좀 심해요.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왜 패잔병입니까?”
― 지금 말씀을 들어보면 천안함 사건 당일의 트라우마도 트라우마지만 이후 정치권과 일부 국민이 보인 행태로 인해 울화병이 더 쌓였을 거 같습니다. 그건 어떻게 극복하나요.
“현재 진행형이죠. 제가 언론에 노출되거나 기사에 한 줄이라도 제 이름이 나오면 바로 댓글이 달립니다. 그중에서 악플이 거의 70% 정도예요. 제가 법적 대응을 많이 하니까 요즘은 비율이 좀 줄었습니다만, 아주 심한 내용도 있습니다. ‘왜 그때 죽지 않았느냐’ ‘할복 자결했어야 할 인간이 안보팔이를 하고 있다’…. 어떤 인터넷 신문에 나왔던 내용이에요. 패잔병이란 말은 그냥 통상적인 용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왜 패잔병입니까?”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목소리를 높일 권리가 있다.
“그다음에, 왜 함장 너는 왜 안 죽었느냐. 따라 죽었어야지. 가장 심한 건 ‘시체팔이 그만하라’라는 글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46명 영웅화를 중단하라’는 소리도 합니다. 46명이 호국영웅이 아닙니까? 댓글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걸 안 보자니 대응을 못 하고, 보면 정말 울화통이 치밀고 머리가 아픕니다. 처음 몇 년은 댓글을 안 봤는데, 제가 대응을 안 하니까 점점 이게 심화되는 거예요.”
지금은 전우들과 팀을 짜서 일일이 댓글을 읽고, 심한 글을 단 사람들을 하나하나 고발한다. 악플러들의 한마디가 천안함 생존 장병들에겐 2차, 3차 가해이자 살인 행위다. 최 함장은 “자기 형이나 아버지가 천안함 대원이었더라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지,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했다.
“응원해주신 분들 덕에 살아”
― 일련의 과정들을 겪으면서 가족들 반응은 어땠을까.
“제가 한 몇 년 동안은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집사람이 그때마다 기다려줬죠. 특히 검찰에 형사 입건됐을 때는 제가 삶을 놓지 않도록 많이 격려해주면서 저를 계속 믿고 따라줬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 부모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버님은 2013년에 돌아가셨고 어머님은 살아계시죠. 아버님은 어쩌면 제 일로 화병이 나 가신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제가 정신을 차리고 본가에 가보니까, 어머니가 갖고 계시던 금반지, 금목걸이 등 금붙이가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왜 없냐고 여쭈니까 ‘팔아서 어디 썼다’라고 하세요. 나중에 확인해보니, 2010년 5월인가 6월에 모 사찰에 가서 천안함 전사 장병들을 위한 천도재(薦度祭)를 지냈더라고요. 감사하기도 했지만, 아들로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 2021년 6월 초 국방부 앞에서 시위할 때 인상 깊은 일이 있었습니다. 몇몇 현역 장병이 거수경례하고, 커피 같은 음료수도 사다 주고 응원하던 모습입니다.
“아무래도 현역은 언론 노출이라든가 의사표현을 공개적으로 하기 어렵죠. 현재도 현역 중에 저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하는 행동을 마음속으로 응원하는 그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서 감사드립니다.”
― 몇몇 분이 함장님께 거수경례하며 지나갈 때 거수경례로 답하시던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응원해주시는 분들도 많으시죠?
“그럼요. 그분들 덕분에 제가 살고 있는 거죠. 제가 한창 수사받던 2010년 5월, 6월엔 편지도 많이 받았습니다. 아들이 군에 가 있다는 어머니, 교도소 재소자까지 편지를 보내왔어요. ‘현충원에 왔다가 함장님 눈물 흘리는 거 보고 가슴 아파서 편지 보냅니다’라는 여학생의 편지도 기억합니다. 받은 편지는 지금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때는 편지로 했지만, 지금은 제가 소셜미디어를 시작해 페이스북 메시지라든가 인스타그램 DM 메시지를 통해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죠. 그분들 격려 덕분에 지금 또 힘내서 이렇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326호국보훈연구소
― 어떤 활동입니까? 단체를 하나 만들었죠?
“네. 작년 3월에 국가보훈처로부터 사단법인 인가가 났습니다. ‘사단법인 326호국보훈연구소’라는 비영리 법인입니다. 연말에 지정기부금 단체 승인도 받아서 올해부터 서울 모처에 사무실을 내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 어떤 활동을 하는 단체입니까.
“이름 그대로 326호국보훈연구소입니다. 3월 26일을 기억하고, 그날 백령도 바다에 있었던 군인들을 기억하자는 겁니다. 강연, 세미나 등을 통해 잘못 알려진 얘기들을 바로잡고 국민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알리고자 합니다.”
― 아까 편지 얘기 중에 ‘함장님 눈물’ 이야기가 있었죠? 천안함 관련 보도를 검색하는데 순간적으로 울컥하는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3월 26일에 현충원에 가서 생존 장병들과 함께 추도 행사하며 함장 이하 모두가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었습니다. 생존 장병들은 자주 만나시나요.
“각자 현업이 있으니까 그렇게 자주 만나지는 못합니다. 우리 전우들은 13년간 반복되는 삶을 살고 있어요. 58명 생존자 중에 23명은 아직 군복을 입고 있고 35명은 전역했습니다. 제가 현역 때 진급이 잘 안 됐다고 그랬잖습니까? 생존 현역들도 마찬가지입니다.”
― 그건 또 왜 그런가요.
“트라우마 때문에 배를 못 타니까요. 해군은 진급 점수가 있는데, 배를 못 타니까 점수가 모자라는 거죠. 또 승진 누락으로 전역하면 국가유공자가 돼야 하는데, 그것도 어렵습니다. 진료 기록이 없으니까요. 왜냐하면, 현역 때 부서장이나 함장한테 가서 ‘정신과 다녀오겠다’라는 말을 못 한 겁니다. 우리나라 보훈 정책은 ‘개인 입증주의’입니다. 기록이 없으니 신청 자체를 못 하는 거죠. 주말에 일반 병원에서 진료받은 친구들은 누적 기록이 있으니까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친구들에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 뭡니까.
“나이가 젊으니까 직업을 구해야 하지 않습니까? 취업 지원하면 서류 심사는 통과인데, 마지막에 항상 불합격합니다. 정신과 치료 이력 때문이죠. 기업 하는 분 입장에서 생각하면, 왜 그러는지 이해가 가기는 합니다.”
“국가가 유공자라는 걸 입증해줘야”
― 한숨이 납니다. 해결책은 뭘까요.
“뭔가 제도적인 뒷받침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면, 현역 군인들에겐 승진 시 평균 점수라도 준다든가, 전역한 친구들은 국가가 유공자라는 걸 입증해줘야죠. 천안함 피격 폭침 사건은 국가적인 사건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국가보훈부에서 전원 국가유공자로 지정하고, 특별 채용의 길도 열어주셨으면 합니다.”
미국은 전사 장병의 유해를 끝까지 발굴한다. 시간, 비용이 얼마든지 들어도 상관하지 않는다. 아직도 6·25 당시 전사한 장병의 시신을 수습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을 끝까지 챙기는 건 나라다운 나라의 참모습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대한민국의 조치는 많이 미흡해 보인다.
― 국민 여러분에게 꼭 하고 싶은 말씀은.
“천안함을 기억해주시고, 또 격려해주시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분들이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그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히 잘못된 정보나 왜곡된 사실에 현혹되어 진실이 무엇인지 잘못 아시는 분들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관련 자료와 정부 공식 발표를 잘 보아주십시오. 천안함은 대한민국 NLL 바다를 지키기 위해서 전국 팔도 출신 군인들이 모여 국방의 의무를 다하던 함정입니다. 이들은 영남, 호남처럼 특정 지역을 지킨 군인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을 지켰습니다. 특정인을, 당시 정권과 정부를 지키던 군인들이 아닙니다. 대한민국과 국민을 지키던 군인들이었습니다. 이분들의 희생,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길이길이 기억해주시고, 더 이상 이분들의 명예가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전역 후 직업 가져본 적 없어
필자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최원일 함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2010년 3월 26일, 천안함과 장병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천안함 장병들을 구조하기 위해 순국하신 한주호 준위도 잊지 않겠습니다. 금양호 선원 아홉 분의 명복도 함께 빕니다.”
그런데 답답한 일이 하나 더 있다. 몇몇 생존 장병뿐만 아니라, 최원일 함장도 현재 무직(無職)이다. 전역 후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를 채용하는 일이 누군가의 눈치를 봐야 했던 결과는 혹시 아닐까? 새 정부 들어서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약간의 연금과 보육교사로 일하는 아내의 수입이 생계 수단의 전부다.
우리는 우리의 영웅을 지금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가? 대한민국은 미래 세대에게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자’라는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해마다 3월 26일이면, 6월 25일이면 묻고 싶은 질문이다.⊙
“처음 3~4년은 술·담배에 의지”
― 곧 3월 26일이 다가옵니다. 어떤 심정이십니까.
“올해가 13주기인데, 매년 제가 느끼는 심정은 똑같습니다. 먼저 간 전우(戰友)들이 보고 싶고, 고통받는 생존 전우들이 많이 생각나고 그렇습니다.”
필자는 2021년 6월 천안함 생존 장병 함은혁 예비역 하사와 정현구 장병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두 사람 모두, 매년 ‘그날’이 다가올 때마다 알 수 없는 스트레스에 짓눌린다고 했다.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하다고 했다. 죽음 직전까지 갔던 공포(恐怖)와 더불어, ‘우리만 살았다’라는 죄책감에 시달린다고 했다.
― 생존 장병 모두가 그날이 오면 전우들 묘소에 찾아가서 묘비(墓碑)를 붙들고 울기도 하고, 도무지 생활에 집중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함장님도 스트레스나 외상 후 증후군을 겪으십니까.
“네, 있습니다. 항상 2월이 오면, 그러니까 3월이 가까워지면 몸과 마음이 반응합니다. 몸은, 당시에 추웠던 걸 기억합니다. 그리고 제가 그날 부상(負傷)한 부위에 통증을 느끼죠. 실제로 아픈 건지 아니면 정신적으로 아픈 건지,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심정적으로는, 좀 심한 고통을 겪는 날이 많습니다. 그 순간이 생각나서 며칠 동안 잠을 못 이룰 정도죠.”
― 어떻게 극복하십니까.
“고백하자면, 처음 3~4년 정도는 술과 담배에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렇게 살다가는 그날의 기억을 영영 잊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땀을 흘리는 운동을 하고, 명상(冥想) 등을 하면서 몸과 마음을 진정시킵니다. 또 전우들의 사진을 보면서 그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최원일 함장은 두툼한 자료를 들고 왔다. ‘그날의 기록’이다. “한 권이 아니고 여러 권입니다. 저는 ‘국방부나 해군이 당연히 천안함 자료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진 자료 말고는 아무 곳에도 상세한 기록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정리했습니다.”
― 공식 기록이 없다니, 믿을 수 없습니다.
“공식 기록은 있죠. 《피격사건 백서(被擊事件 白書)》라든가 조사단 조사결과보고서는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 자료는 상부(上部)의 시각으로 작성한 문서입니다. 천안함 탑승자들이 기록한 1차 사료(史料)는 제가 기록하고 모으지 않으면 다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작년부터 자료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 공식 기록과 직접 작성한 자료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까.
“예를 들면, 처음엔 승조원이 104명이라고 했죠. 정확하게는 108명입니다. 시험을 본다든가 집안 사정으로 4명이 못 탔어요. 정식으로 보고하고 승함(乘艦)하지 않은 인원입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출동한 인원이 104명, 그중 생존자가 58명, 전사자가 46명입니다.”
‘상부의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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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24일 천안함 함수가 인양되었다. 폭침으로 동강 난 선체가 그날의 참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진=조선DB |
― 어떤 부분입니까.
“예를 들면, 피격 판단 보고 같은 것이 누락되었습니다.”
― 사전에 ‘북이 도발할 가능성이 있다’라고 보고하신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북한은 2009년 11월 10일 대청해전 이후에 ‘보복하겠다’라고 공공연히 말했습니다. 조선중앙방송이라든가 각종 매체를 통해 ‘보복 성전을 하겠다’라고 했죠.”
대청해전(大靑海戰)은 2009년 11월 10일 11시27분, 대한민국 해군과 북한 해군 사이에 일어났던 소규모 전투다. 북한 해군 경비정이 대청도 동쪽 NLL을 1.2해리 넘어왔고, 우리 측 대응으로 월선(越船)한 북 경비정이 반파(半破)되었다. 8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북한 경비정은 다른 함선에 예인(曳引)되어 북상하였다. 대한민국 해군이 입은 피해는 함선 외부 격벽의 파손이 전부였다. 정치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군 수뇌부가 교전수칙(交戰守則)대로 대응해 얻은 승전(勝戰)이다.
“당시 우리 경계 태세는 평상 상태”
― 북이 복수를 공언한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이었는데, 왜 천안함은 위험 지역인 백령도(白翎島) 가까이 갔던 겁니까? 이런 사정 때문에, 함장이 임의로 그곳에 가지 않았느냐는 의혹을 제기한 사람도 있었죠.
“네. 있었죠. 그런데 제가 임의로 그곳까지 갔다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제 개인의 판단이 아니라, 북의 보복 위협에 대비한 상부 작전 지침에 따라 출동한 것이니까요. 백령도는 적(敵)의 해안포 유도탄 공격으로부터 안전하면서도 레이더 탐지가 되지 않는 비교적 안전한 구역입니다.”
― 그런데 뭐가 문제였습니까.
“천안함은 그 구역에서 경비를 하고 있었죠. 대북(對北) 경계가 심화된 상태였는데, 갑자기 1월에 경계 태세가 해제되면서 평상 상태로 전환되었습니다. 전환되었지만, 위협 요소는 계속 상존하고 있었죠. 대(對)잠수함 경계 태세라든가 다른 대북 경계 태세는 상향된 것이 없었고 ‘북한이 공격에 나설 것이다’라는 정보도 없었습니다. 있었다면 함대에서도 저희 배를 백령도 인근에 놔두지 않고, 당연히 더 안전한 아래쪽으로 이동하라고 했겠죠. 그때 당시 우리 경계 태세는 평상 상태였어요. 그러니까 제가 임의로 그곳까지 함정을 몰고 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최원일 함장을 괴롭힌 건 숱한 음모론과 근거 없는 비난이다. 그 기가 막힌 사연은 글 뒷부분에서 따로 다루기로 하자. 천안함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지만, 인간(人間) 최원일, 군인(軍人) 최원일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피격 폭침 전후 그의 삶을 기록하는 일은, 천안함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웅(英雄)의 일대기(一代記)를 기록하는 마음으로 그의 생애(生涯)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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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 |
“고등학교 때까지는 해사(海士) 입교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는 문과생으로 인문학(人文學)을 동경했어요. 특히 언론 쪽에 관심이 많아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고3 여름에 아버지께서 갑자기 많이 편찮으셨습니다. 위독한 상태였죠. 그런데 병상(病牀)에서 아버지가 이러시더군요. ‘네 이름엔 사연이 있다’라고요.”
아버지의 성함은 최순(崔洵·1934~ 2013년). 해군 수병(水兵) 출신으로, 전역 후에는 버스 운송업에 종사했다.
“아버지도, 형님도 외자 이름인데, 제 이름만 ‘원일’이어서 어려서부터 궁금했었죠. ‘해군 시절 동경(憧憬)했던 참모총장님 성함을 따서 네 이름을 지었다. 그러니 해군사관학교에 가는 게 어떻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유언(遺言)일 수도 있으니까 일단 제 꿈을 접고 해사에 원서를 넣었습니다.”
1986년의 일이다. 최원일은 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손원일 제독의 전기(傳記)를 10번 정도 읽었다. 그러고 1987년 초 해사에 들어갔다.
어머니 김옥점(金玉點·85)씨는 자신의 꿈을 접은 아들이 안타까웠다. 진해(鎭海)로 면회 와 “지금이라도 퇴교(退校)해 일반 대학으로 가라”고 권유했다. 문과 체질이라 처음에는 생도 생활이 힘들었는데, 어찌어찌 적응해서 무사히 졸업하고 임관했다.
― 해사 시절 최원일 생도는 어떤 생도였습니까.
“제가 함장 할 때는 체중이 80kg 정도였습니다. 몸이 좋았죠. 생도 입교할 때는 60kg 정도로, 아주 왜소하고 마른 체구였어요. 사관학교 들어가면 맨 처음에 가입교(假入校) 훈련을 5주 동안 받습니다. 그 몸으로 훈련 과정을 소화할 수 있겠나 주변에서 다들 걱정하셨어요. 어떻게든 버텨서 입학했습니다.”
― 입교 뒤에는 상황이 나아졌습니까.
“생도 생활하다 보니까, 몸이 적응하는 겁니다. 체력도 올라오고 구보도 잘했고요. 1학년 때는 힘들었지만 ‘2학년 되면 좀 낫겠지’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2학년 때는 ‘3학년 올라가면 좀 낫겠지’라고 생각했고요. 그러다 보니까 졸업할 때가 되어 있더군요.”
동복 입고 출동, 하복 입고 입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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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 시절 최원일. 한창 연애를 하던 무렵이다. |
“첫 임지가 PC, 초계함(哨戒艦)이었습니다. 저는 초계함을 계급마다 다 탔어요. 네 번을 탔습니다. 초계함 탑승은 출동도 많고 임무도 복잡한 데다 출동 일수도 길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병과(兵科)로 옮길까도 생각했지만, ‘중위(中尉)가 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하며 버텼다.
“중위 때도 힘들었고 대위 때도 힘들었죠. 군 생활이 항상 힘들었어요. 하지만 힘든 가운데서도 보람이 컸습니다. 대원들과 부대끼면서 뭔가 임무를 성취하고, 저희가 대한민국과 바다를 지킨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복무했습니다.”
― 초급 장교 시절에 또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정신없이 출동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한번 출동하면 거의 한 달을 바다 위에서 보냈어요. 때로는 해상(海上)에서 여러 달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해군은 검은색 동(冬) 근무복, 카키색 하(夏) 근무복을 입습니다. 동 근무복을 입고 출동한 후 반팔 옷을 입고 입항(入港)할 때도 있었죠.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초계함을 탈 때 아이들이 한 살, 세 살이었거든요. 해군 퇴근 버스를 보면 아빠 온다고 매일 뛰어나갔답니다. 몇 달을 그렇게 아빠 마중 나갔다가 허탕치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더군요. 지금도 청해부대 등 몇몇 함정은 6개월씩 해상 작전을 합니다.”
― 결혼 얘기를 하셨는데 어떻게 만났습니까.
“우연히 기차 안에서 만났죠. 졸업 직전에 만나 4년 연애하고 대위 때 결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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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수 중사 |
“천안함뿐만이 아니고, 해군 함정을 타는 대원들은 전우라기보다는 가족 같은 전우입니다. 같은 배 타고 의식주 같이하고 가족들보다 더 자주 보기 때문이죠. 특히 천안함 같은 경우는 생사(生死)를 같이했으니까 더 끈끈합니다. 모든 걸 다 봤고, 그때 당시 서로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또 우리가 어떻게 살아 나왔는지를 다 아니까요.”
― 생사(生死)를 같이했다고 하셨는데, 전사한 장병 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누군가가 있습니까.
“누구 하나를 특별히 언급하는 것은 조금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다 그립지만 제가 가장 안타까운 건 뭐냐 하면…. 그날 파도가 많이 쳤습니다. 3월 25일, 피격 전날이죠. 풍랑주의보가 발령될 정도로 파고(波高)가 높았어요. 멀미 때문에 밥을 못 먹을 정도였죠. 피격 직전이 야식 시간이었는데, 어느 정도 파도에 강하고 배에 적응한 친구들이 함미(艦尾)에서 야식을 먹는다든가 휴식 운동하다가 많이 전사했습니다. 제가 2년간 함장을 했는데, 저랑 오래 근무한 친구들이 많이 전사했다는 사실이… 너무 가슴 아픕니다.”
― 그날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시는군요.
“그럼요. 21시 조금 넘어서 저는 함미에서 함수(艦首)로 넘어왔습니다. 그때 중간 부분에서 마주쳤던, 함미로 야식을 먹으러, 또는 휴식하러 가던 대원들의 얼굴과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 기록을 보다가 제가 또 좀 울컥했던 부분이 있는데, 박경수 중사인가요? 연평해전 참전용사인데 천안함 때 전사했고 안타깝게도 아직도 시신을 못 찾은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정말 박경수 전우 같은 경우는 두 차례 다 참전하고 마지막에 안타깝게 전사했습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호국영웅(護國英雄)입니다.”
폭침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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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일 함장은 중령 진급과 동시에 천안함 함장으로 발령받았다. |
“함미 순찰 후 함수로 이동했고, 피격 15분 전쯤 함교(艦橋)에 가서 당직자들에게 지침을 내렸습니다. 그 후 접촉물이 있는지 살피고, 날씨 상태를 보고 함장실로 돌아왔죠. 각종 일지, 모니터 등을 점검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오른쪽으로 급격히 기울었습니다. 제 몸도 붕 뜨면서 물이 차올라 제 목 밑에까지 다 잠겼어요. 저는 머리 오른쪽 뒤쪽을 어떤 물체가 강타해 잠시 정신을 잃었었죠. 그때 위쪽에서 ‘함장님 계십니까?’라며 울면서 저를 계속 부르는 겁니다.”
― 배가 뒤집힌 거네요.
“배가 90도로 기울면서 문이 위쪽으로 올라간 겁니다. 저는 거의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구조 요청하고 상황 보고하라는 지시를 하고 이제 집기류들을 몸에서 걷어내는 순간 우리 전우들이 소화기로 문을 부수고 저를 구했습니다. 소화전 호스를 내려줘서 그걸로 제 몸을 묶고 올라갔던 것이 폭침 순간의 기억입니다.”
최원일 함장을 구한 장병들의 공통된 증언이 있다. 최원일 함장은 생존자를 한 명이라도 더 구하겠다며 끝까지 퇴선(退船)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천안함과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의지를 밝혀서, 부하 장병들이 억지로 끌어내다시피 구조선에 태웠다고 한다.
“당연히 104라는 번호가 나와야 하는데, 점호를 하니 58에서 계속 끊어지는 겁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요. 그럼 46명이 없어진 것 아닙니까? 혹시라도 배 안에 남은 사람은 없나, 바다에 빠져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 대원이 있진 않을까? 이런 생각에 배에서 이탈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배와 운명을 같이한다기보다는, 구조하지 못한 우리 전우들에 대한 책임 이런 것들이 더 많이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음모론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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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고교 교사의 천안함 관련 망언은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사진=조선DB |
“살아 돌아와 보니까, 저희가 지켜주던 국민이 저희에게 또 다른 어뢰를 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음모론은 13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천안함 좌초설 등, 사실과 다른 주장을 하는 책들도 20여 종이나 된다. 그런 책의 저자들이 지금도 강연을 다니고, 인세를 받는다. 천안함 피격 폭침을 생계에 이용하는 건지도 모른다.
“이렇게 된 현실이 개탄스럽습니다. 법적으로 대응하려고 해도, 표현의 자유 때문에 적절한 제재를 가할 수 없습니다. 당사자가 ‘사실’이라고 믿었기에 그런 주장을 한 것이라면, 달리 처벌할 방도가 없다고 하네요.”
심지어 모 유명 사립 고등학교 교사는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을 섞어서 공개적으로 최원일 함장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 교사의 경우, 고소 등 법적으로 대응했습니다. 미래 세대를 이끌어나갈 명문고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가 어떻게 온갖 욕설을 섞어 저에 대한 모욕을 하는지, 그건 순전히 자기주장일 뿐이고, 도저히 용서가 안 되더라고요. 그 교사가 반성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이런 분들이 안 나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 언론으로 보도된 뒤, 그 교사가 함장님께 직접 연락했습니까.
“아닙니다. 페이스북 메시지라든가 뭐 각종 매체로 연락을 했던 기억은 납니다.”
“지금은 성당에 나가지 않는다”
일부 가톨릭 사제도 음모론을 업고 최원일 함장을 비난했다.
“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해사 시절에도 성당에 열심히 다녔고, 가톨릭생도회 총무였죠. 그런데 일부 사제가 하는 얘기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성당에 나가지 않습니다.”
― 일부 몰지각한 사제들이 어떤 이야기를 한 겁니까.
“제가 2010년 11월까지 수사받았는데, 당시는 충남 계룡시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열차를 타고 서울로 계속 출두하면서 수사를 받았는데, 어느 날 대전역에 내렸는데 어떤 사제단이 플래카드를 걸어놨더군요. ‘함장 구속! 책임져라!’ 이런 식으로 적어놓고요.”
일부 몰지각한 사제들은 아직까지도 사과가 없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분들은 제주 해군기지도 반대하고, 정치 활동을 많이 하는 분들이더군요. 사실이 아니더라도, 자기들 주장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 개인에 대해 모욕적인 발언을 성직자들이, 그것도 공개적으로 했다는 사실은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저는 신자가 아닙니까.”
“軍 생활 절반을 중령으로 보낸 셈”
― 왜 형사 입건이 된 겁니까.
“제가 3월부터 11월까지 조사받고 수사받았습니다. 또 징계위원회가 따로 열려서 11월 17일에 마쳤습니다. ‘22사단 철책선 노크귀순 때는 사단장부터 소대장까지 다 징계받았는데, 어떻게 당사자인 함장이 죄가 없느냐’라는 논리로 형사 입건하더군요. 기소유예를 받았습니다. 징계위원회 결정도 징계유예였습니다.”
― 저는 천안함장이 형사 입건되어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도저히 납득이 안 됩니다.
“혐의가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가 대잠(對潛) 정보가 있는데, 왜 경비 구역을 이탈하겠다고 함대에 건의하지 않았는가. 두 번째, 왜 속력을 빠르게 올려서 다니지 않았는가.
아니, 북한이 천안함을 공격한다는 사전 정보가 어디 있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함장이 정상 경비를 하다가 이탈하겠다고 함대에 건의할 수가 있습니까? 그건 근무지 이탈이죠. 그리고 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구역이라며 함대에서 정해준 매복 구역이었고, 3~4m로 파도가 치는데 어떻게 빨리 달립니까?”
군인(軍人) 최원일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항상 선두 진급하던 최원일 함장은 천안함 피격 폭침 이후 꽤 오랜동안 한직(閑職)을 전전했다. 그렇게 10년을 중령으로 지내다 전역(轉役) 하루 전 대령으로 승진했다.
― 어떻게 된 겁니까.
“명예 진급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전역하는 당일 진급하는 거죠. 연금이라든가 각종 혜택은 없습니다. 오직 명예뿐이죠. 본인이 신청해서 적부심을 받습니다. 통과되면 명예 진급을 하는 겁니다. 저는 2008년 중령으로 진급했습니다. 2021년에 전역했으니까, 군 생활 절반을 중령으로 보낸 셈이죠.”
― 왜 그렇게 오랫동안 진급이 안 된 겁니까.
“저를 진급시키면 혹시 북한에 잘못된 메시지를 줄까 봐 부담스러웠겠죠. 천안함을 언급하면 한반도 평화가 깨진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고….”
생존 병사들에게 환자복 입힌 국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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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는 2010년 4월 7일 열린 기자회견에 최원일 함장을 제외한 나머지 장병들은 환자복을 입고 나가도록 했다. 사진=조선DB |
“국군의 사명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겁니다. 그런데 전역 후 사회에 나오니, 저는 일부 국민으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받는 처지더군요. 국가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 우리를 보호하는 순간 시끄러워지니까요. 일부가 주장하는 한반도 평화는, 북에 순응해서라도 전쟁을 막자는 것 아닐까요? 천안함을 언급하는 순간 북한이 동요하고 시끄러워진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국방부는 다른 방식으로 최원일 함장과 생존 장병을 모욕하기도 했다. 필자 개인의 생각이다. 2010년 4월 7일, 누군가가 생존 장병들에게 환자복을 입히고 기자회견을 했다. 패잔병이라는 이미지가 여기서부터 나왔다. 군인들은 명예가 생명인데,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까 제가 옷을 다섯 번까지 갈아입었더군요. 환자복 입었다가 전투복 입었다가…. 대원들도 사실 전투복을 다 입히려고 했는데, 전투복이 다 유실돼서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구해서 입히자는 말도 있었는데, 갑자기 기자회견 한 10분 전에 저만 전투복을 입으라고 하더군요. 장병들에게 환자복을 입히고, 저는 또 전투복을 입고 기자회견을 했으니, 대부분의 국민이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환자복 입은 장병들은 다 패잔병이고 함장 저놈이 수괴로구나, 책임자로구나, 이렇게 느끼지 않겠습니까? 저는 기자회견 트라우마가 아직도 좀 심해요.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왜 패잔병입니까?”
― 지금 말씀을 들어보면 천안함 사건 당일의 트라우마도 트라우마지만 이후 정치권과 일부 국민이 보인 행태로 인해 울화병이 더 쌓였을 거 같습니다. 그건 어떻게 극복하나요.
“현재 진행형이죠. 제가 언론에 노출되거나 기사에 한 줄이라도 제 이름이 나오면 바로 댓글이 달립니다. 그중에서 악플이 거의 70% 정도예요. 제가 법적 대응을 많이 하니까 요즘은 비율이 좀 줄었습니다만, 아주 심한 내용도 있습니다. ‘왜 그때 죽지 않았느냐’ ‘할복 자결했어야 할 인간이 안보팔이를 하고 있다’…. 어떤 인터넷 신문에 나왔던 내용이에요. 패잔병이란 말은 그냥 통상적인 용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왜 패잔병입니까?”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목소리를 높일 권리가 있다.
“그다음에, 왜 함장 너는 왜 안 죽었느냐. 따라 죽었어야지. 가장 심한 건 ‘시체팔이 그만하라’라는 글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46명 영웅화를 중단하라’는 소리도 합니다. 46명이 호국영웅이 아닙니까? 댓글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걸 안 보자니 대응을 못 하고, 보면 정말 울화통이 치밀고 머리가 아픕니다. 처음 몇 년은 댓글을 안 봤는데, 제가 대응을 안 하니까 점점 이게 심화되는 거예요.”
지금은 전우들과 팀을 짜서 일일이 댓글을 읽고, 심한 글을 단 사람들을 하나하나 고발한다. 악플러들의 한마디가 천안함 생존 장병들에겐 2차, 3차 가해이자 살인 행위다. 최 함장은 “자기 형이나 아버지가 천안함 대원이었더라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지,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했다.
“응원해주신 분들 덕에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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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16일 오전 천안함46용사유족회와 천안함생존자전우회는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40일째 천안함 명예회복 시위를 이어가며 천안함 망언 방지법 제정을 촉구했다. 사진=조선DB |
“제가 한 몇 년 동안은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집사람이 그때마다 기다려줬죠. 특히 검찰에 형사 입건됐을 때는 제가 삶을 놓지 않도록 많이 격려해주면서 저를 계속 믿고 따라줬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 부모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버님은 2013년에 돌아가셨고 어머님은 살아계시죠. 아버님은 어쩌면 제 일로 화병이 나 가신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제가 정신을 차리고 본가에 가보니까, 어머니가 갖고 계시던 금반지, 금목걸이 등 금붙이가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왜 없냐고 여쭈니까 ‘팔아서 어디 썼다’라고 하세요. 나중에 확인해보니, 2010년 5월인가 6월에 모 사찰에 가서 천안함 전사 장병들을 위한 천도재(薦度祭)를 지냈더라고요. 감사하기도 했지만, 아들로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 2021년 6월 초 국방부 앞에서 시위할 때 인상 깊은 일이 있었습니다. 몇몇 현역 장병이 거수경례하고, 커피 같은 음료수도 사다 주고 응원하던 모습입니다.
“아무래도 현역은 언론 노출이라든가 의사표현을 공개적으로 하기 어렵죠. 현재도 현역 중에 저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하는 행동을 마음속으로 응원하는 그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서 감사드립니다.”
― 몇몇 분이 함장님께 거수경례하며 지나갈 때 거수경례로 답하시던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응원해주시는 분들도 많으시죠?
“그럼요. 그분들 덕분에 제가 살고 있는 거죠. 제가 한창 수사받던 2010년 5월, 6월엔 편지도 많이 받았습니다. 아들이 군에 가 있다는 어머니, 교도소 재소자까지 편지를 보내왔어요. ‘현충원에 왔다가 함장님 눈물 흘리는 거 보고 가슴 아파서 편지 보냅니다’라는 여학생의 편지도 기억합니다. 받은 편지는 지금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때는 편지로 했지만, 지금은 제가 소셜미디어를 시작해 페이스북 메시지라든가 인스타그램 DM 메시지를 통해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죠. 그분들 격려 덕분에 지금 또 힘내서 이렇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326호국보훈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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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호국보훈연구소 홈페이지(https://remember772.com). |
“네. 작년 3월에 국가보훈처로부터 사단법인 인가가 났습니다. ‘사단법인 326호국보훈연구소’라는 비영리 법인입니다. 연말에 지정기부금 단체 승인도 받아서 올해부터 서울 모처에 사무실을 내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 어떤 활동을 하는 단체입니까.
“이름 그대로 326호국보훈연구소입니다. 3월 26일을 기억하고, 그날 백령도 바다에 있었던 군인들을 기억하자는 겁니다. 강연, 세미나 등을 통해 잘못 알려진 얘기들을 바로잡고 국민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알리고자 합니다.”
― 아까 편지 얘기 중에 ‘함장님 눈물’ 이야기가 있었죠? 천안함 관련 보도를 검색하는데 순간적으로 울컥하는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3월 26일에 현충원에 가서 생존 장병들과 함께 추도 행사하며 함장 이하 모두가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었습니다. 생존 장병들은 자주 만나시나요.
“각자 현업이 있으니까 그렇게 자주 만나지는 못합니다. 우리 전우들은 13년간 반복되는 삶을 살고 있어요. 58명 생존자 중에 23명은 아직 군복을 입고 있고 35명은 전역했습니다. 제가 현역 때 진급이 잘 안 됐다고 그랬잖습니까? 생존 현역들도 마찬가지입니다.”
― 그건 또 왜 그런가요.
“트라우마 때문에 배를 못 타니까요. 해군은 진급 점수가 있는데, 배를 못 타니까 점수가 모자라는 거죠. 또 승진 누락으로 전역하면 국가유공자가 돼야 하는데, 그것도 어렵습니다. 진료 기록이 없으니까요. 왜냐하면, 현역 때 부서장이나 함장한테 가서 ‘정신과 다녀오겠다’라는 말을 못 한 겁니다. 우리나라 보훈 정책은 ‘개인 입증주의’입니다. 기록이 없으니 신청 자체를 못 하는 거죠. 주말에 일반 병원에서 진료받은 친구들은 누적 기록이 있으니까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친구들에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 뭡니까.
“나이가 젊으니까 직업을 구해야 하지 않습니까? 취업 지원하면 서류 심사는 통과인데, 마지막에 항상 불합격합니다. 정신과 치료 이력 때문이죠. 기업 하는 분 입장에서 생각하면, 왜 그러는지 이해가 가기는 합니다.”
“국가가 유공자라는 걸 입증해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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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은 검찰총장 자리에서 물러난 직후인 2021년 7월 6일 국립대전현충원 천안함46용사 묘역을 참배했다. 사진=조선DB |
“뭔가 제도적인 뒷받침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면, 현역 군인들에겐 승진 시 평균 점수라도 준다든가, 전역한 친구들은 국가가 유공자라는 걸 입증해줘야죠. 천안함 피격 폭침 사건은 국가적인 사건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국가보훈부에서 전원 국가유공자로 지정하고, 특별 채용의 길도 열어주셨으면 합니다.”
미국은 전사 장병의 유해를 끝까지 발굴한다. 시간, 비용이 얼마든지 들어도 상관하지 않는다. 아직도 6·25 당시 전사한 장병의 시신을 수습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을 끝까지 챙기는 건 나라다운 나라의 참모습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대한민국의 조치는 많이 미흡해 보인다.
― 국민 여러분에게 꼭 하고 싶은 말씀은.
“천안함을 기억해주시고, 또 격려해주시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분들이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그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히 잘못된 정보나 왜곡된 사실에 현혹되어 진실이 무엇인지 잘못 아시는 분들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관련 자료와 정부 공식 발표를 잘 보아주십시오. 천안함은 대한민국 NLL 바다를 지키기 위해서 전국 팔도 출신 군인들이 모여 국방의 의무를 다하던 함정입니다. 이들은 영남, 호남처럼 특정 지역을 지킨 군인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을 지켰습니다. 특정인을, 당시 정권과 정부를 지키던 군인들이 아닙니다. 대한민국과 국민을 지키던 군인들이었습니다. 이분들의 희생,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길이길이 기억해주시고, 더 이상 이분들의 명예가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전역 후 직업 가져본 적 없어
필자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최원일 함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2010년 3월 26일, 천안함과 장병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천안함 장병들을 구조하기 위해 순국하신 한주호 준위도 잊지 않겠습니다. 금양호 선원 아홉 분의 명복도 함께 빕니다.”
그런데 답답한 일이 하나 더 있다. 몇몇 생존 장병뿐만 아니라, 최원일 함장도 현재 무직(無職)이다. 전역 후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를 채용하는 일이 누군가의 눈치를 봐야 했던 결과는 혹시 아닐까? 새 정부 들어서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약간의 연금과 보육교사로 일하는 아내의 수입이 생계 수단의 전부다.
우리는 우리의 영웅을 지금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가? 대한민국은 미래 세대에게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자’라는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해마다 3월 26일이면, 6월 25일이면 묻고 싶은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