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진핑과 문재인이 ‘한중 우호’ 상징으로 내세웠던 ‘중국인’ 정율성
⊙ 6·25 때 북한·중공군 독려 군가 다수 작곡… ‘적화통일’ 선동한 ‘적군’
⊙ ‘김일성 상장 영상’ 상영, ‘항미원조 운운 사진첩’ 전시된 화순군 소재 ‘정율성 고향집’
⊙ 정율성 관련 시설물을 ‘주요 볼거리’로 내세우는 광주광역시
⊙ 동구에는 ‘정율성 역사공원’… 남구에는 ‘정율성 기념관’ 조성 예정
⊙ ▲성악 콩쿠르 ▲정율성 동요제에 세금 지원… 정율성 음악제에 연평균 3억2540만원 써
⊙ 6·25 때 북한·중공군 독려 군가 다수 작곡… ‘적화통일’ 선동한 ‘적군’
⊙ ‘김일성 상장 영상’ 상영, ‘항미원조 운운 사진첩’ 전시된 화순군 소재 ‘정율성 고향집’
⊙ 정율성 관련 시설물을 ‘주요 볼거리’로 내세우는 광주광역시
⊙ 동구에는 ‘정율성 역사공원’… 남구에는 ‘정율성 기념관’ 조성 예정
⊙ ▲성악 콩쿠르 ▲정율성 동요제에 세금 지원… 정율성 음악제에 연평균 3억2540만원 써
- 사진=월간조선
2017년 12월 15일, 중국을 국빈(國賓) 방문한 문재인(文在寅) 당시 대통령은 베이징대(北京大)에서 ‘한중 청년의 힘찬 악수, 함께 만드는 번영의 미래’를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연설 도중 중국과의 연결고리를 강조하기 위해 “광주(光州)시에는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한국의 음악가 정율성(鄭律成)을 기념하는 ‘정율성로’가 있다. 지금도 많은 중국인이 ‘정율성로’에 있는 그의 생가를 찾고 있다”고 언급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역시 2014년 7월 방한 당시 서울대 강연에서 정율성을 ‘한중 우호’의 상징으로 치켜세운 바 있다.
일반에는 생소한 정율성이란 인물은 광주광역시 태생의 중국인 작곡가다. 정율성은 중국인이므로, 현행 중국어 표기법상 ‘정뤼청’이라고 해야 하지만 편의상 정율성이라고 지칭한다. 정율성은 1914년 당시 전남 광주군에서 태어났다.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음악을 공부했다. 이후에는 중국공산당에 가담해 소위 ‘혁명음악’을 만들었다. 나중에는 북한으로 넘어가 북한군가를 짓고, 6·25 때는 북한군으로 참전했다. 민족반역자·전쟁범죄자 김일성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동족상잔을 격려하는 북한군가를 다수 작곡했다. 이후에도 ‘중국공산당’에 적(籍)을 두고 북한에 남아 이른바 ‘창작 활동’을 했다. 그 후 중국으로 돌아가서는 죽을 때까지 음악을 ‘공산혁명’의 수단으로 여기다가 눈을 감았다.
그 일생을 보면, 정율성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고, ‘반국가단체’ 북한 정권 입장에서 대한민국에 대항한 ‘적(敵)’이다. 그는 대한민국 국민을 살상하고, 재산을 파괴한 ‘북한군’의 일원이었다. 우리의 자유통일을 저지하고, 민족적 비극인 ‘분단’을 고착화한 ‘중공군’ 소속이기도 했다. 이런 자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자랑스레 내세우거나 우호선린의 상징 또는 매개체로 내세울 만한 인사가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문 전 대통령 입에서 그 이름이 거리낌 없이 호명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찌감치 대한민국 안에서 국민 세금으로 ‘정율성 포장·미화·찬양 작업’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정율성의 의열단 활동 입증하는 근거는?
정율성은 중국공산당에 가담해 지금의 중국 인민해방군 공식 군가(軍歌)인 ‘인민해방군가(팔로군 행진곡)’를 작곡했다. 1934년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당시 중국 국민당군의 토벌을 피해 패주를 거듭한 끝에 중국 산시성(陕西省) 옌안(延安)에 자리하는데, 이를 기린다는 명목으로 ‘옌안송(延安頌)’을 짓기도 했다. 중국 안에서는 이른바 ‘혁명음악의 대부’로 불리며, 중국의 국가 ‘의용군 행진곡’의 작곡가 녜얼(聂耳)과 ‘황허(黃河) 대합창’을 만든 선싱하이(詵星海)와 함께 소위 ‘중국 3대 현대 음악가’로 꼽힌다. 2009년 9월에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을 맞아 ‘신(新)중국 창건영웅 100인’에 선정됐다.
정율성은 1914년 수피아여학교 교사였던 부친 정해업(鄭海業)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부은(富恩)이었다. 《정율성 평전》과 이를 참조한 국내 정율성 관련 연구물을 보면, 정율성은 1933년 5월 김원봉(金元鳳)이 이끌던 의열단 간부학교 입교생을 모집하러 국내에 잠입한 셋째 형 의은(義恩)을 따라 중국 난징(南京)으로 건너갔다.
그해 9월 의열단 간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한 정율성은 정신·정치·군사 교육을 받고 1934년 4월 동기 55명과 함께 졸업했다. 그 후 정율성은 난징 고루(鼓樓)전화국에 침투해 일본인 전화를 도청(盜聽)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이게 바로 정율성의 생애 중 유일한 ‘항일(抗日)’ 행적인데,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근거는 없다.
이는 정율성의 부인 딩쉐쑹(丁雪松)이 1992년에 펴낸 《작곡가 정율성》에 기술된 주장에서 비롯됐는데, 이를 인용한 관련 저작물을 보면 대체 왜 정율성을 ‘항일 독립운동가’라고 치켜세우고, 그를 기려야 하는지 공감할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항상 “비밀공작을 수행했다”는 식의 기술만 있을 뿐이다.
‘중공 찬가’ 만든 게 ‘항일 독립운동’?
정율성이 정말 항일 독립운동을 했고, 그 목적으로 ‘비밀공작’에 참여했다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없는 셈이다. 그럼에도 현재 국내의 정율성 옹호론자들이나 정율성을 관광자원으로 삼아 중국 관광객 돈을 만져보려고 하는 지방자치단체들은 ‘독립운동가 정율성’이란 주장을 지속적으로 유포하고 있다. 정율성에 관한 여러 논문과 중국 측 기록을 살펴봐도 ‘의열단원 정율성’의 행적에 대해 알 길이 없다. 백번 양보해서 정율성이 실제 의열단원으로서 임무를 수행했다고 해도, 그 기간은 60년 넘는 그의 일생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정율성이 정말 ‘의열단원’이었다고 해도 그가 마오쩌둥과 김일성 또는 중국공산당과 조선노동당에 충성하며 대한민국 적화(赤化)를 기도한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일부 인사들은 정율성이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타이항산(太行山)에 있던 조선혁명군정학교 살림을 책임진 교무장을 맡았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항일 독립운동가’라고 주장한다. 이 역시 설득력이 떨어진다.
조선혁명군정학교는 무정(武亭·본명은 박병희. 6·25 때 북한군 2군단장으로 남침)이 이끄는 조선의용군 산하 조직이었다.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 팔로군 산하의 일개 무장 정치 선전대에 불과했다. 조국 독립을 위해 일본과 싸우던 ‘항일 독립군’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당시 정율성을 포함한 조선의용군은 ‘항일’보다는 자신들의 세력 확대와 국민당 정부 축출을 꿈꾸던 중국공산당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고 할 수 있다.
혹여 내심으로는 ‘조국 독립’의 뜻을 품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실제 그들의 행적을 보면 ‘항일 독립운동’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대목 자체를 찾기 어렵다. 한마디로 중국공산당에 가담했다고 해서 이를 ‘항일 독립운동’이라고 칭송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셈이다.
당시 팔로군은 일본군과 대규모 전투를 치르지 않고, 후방에서 형식적인 소규모 게릴라전을 전개하면서 중국 일반 주민과 국민당 정부군 장병을 대상으로 한 선전·세뇌 작업에 열중했다. 국민당군이 일본군과 싸우는 동안 세력 확장에 집중한 것이다. 소위 ‘제2차 국공합작’ 와중에도 국민당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일본군에 각종 기밀을 넘기기도 했다는 게 최신 연구 결과다.
북한군·중공군가 작곡에 진력
정율성은 평생을 중국과 북한을 위해 살았다. 그는 중국공산당에 충성하면서 팔로군을 위한 군가를 짓고, 소위 ‘혁명 의식’을 고취하는 음악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1945년 12월, 정율성은 북한으로 건너가 조선공산당에 입당한 뒤 황해도당위원회 선전부장으로 일했다. 1947년에는 평양에서 조선보안대 구락부 부장을 맡았다. 당시 그는 곧바로 협주단을 만들어 2년여에 걸쳐 북한 전역 순회공연에 나섰다. 북한 당국은 그의 노고를 위로하며 ‘모범 근로자’ 칭호를 내렸다. 1949년에는 평양음악대학 작곡부 부장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기간 그는 북한군가를 만드는 데 매진했다. 6·25 남침 당시 북한군이 불렀던 노래, 월북(越北)시인 박세영(朴世永)의 시에 곡을 붙여 훗날 ‘조선인민해방군가’가 된 ‘조선인민군행진곡’이 바로 정율성의 곡이다.
1950년 9월, 중국으로 돌아간 정율성은 다시 중국공산당 당적(黨籍)을 회복하고,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취득했다. 완전한 ‘중국인’이 된 정율성은 그해 12월, 소위 ‘중국 인민지원군’으로 다시 참전했다. 그는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중공군과 함께 서울까지 내려왔다. 중공군으로 참전한 그는 약 4개월 동안, 북한이 주장하는 조국해방전쟁, 중국이 강변하는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을 수행했다. 이 기간, 그는 북한군과 중공군의 사기(士氣)를 고취시키기 위해 ‘조선인민유격대 전가’ ‘중국인민지원군 행진곡’ ‘공화국 기치 휘날린다’ 등을 만들었다.
이후 중국으로 다시 돌아간 정율성은 1966년 소위 ‘문화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중국의 농촌, 공장, 병영, 소수민족 등을 소재로 창작 활동을 했다. 오페라 〈망부운(亡婦雲)〉 등이 이 시기에 그가 만든 작품이다. 마오쩌둥이 지은 시사(詩詞)에 곡을 붙이기도 했다. 이후 문화혁명 기간 정율성은 주로 천렵(川獵)과 사냥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1976년 12월 사망했다.
음악 재능을 중공과 북한 노동당에 바쳐
정율성의 음악 인생을 반추하면 ▲중국공산당의 옌안·타이항산(8년) ▲김일성의 북한(6년) ▲마오쩌둥의 중국(25년)으로 나눌 수 있다. 일부 국내 인사들이 주장하는 정율성의 ‘항일 독립운동’이 실재한다면, 그 시기는 중국공산당 소속으로 활동했던 초기 8년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기간, 정율성이 만든 곡들을 보면 우리 민족의 독립과 상관성을 갖는 작품을 찾기 쉽지 않다. ‘조국 독립’에 대한 ‘항일열사 정율성’의 의지를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단서가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과연 정율성은 중국공산당원으로서 중국 공산혁명을 꿈꾼 것일까, 조국 독립을 바랐던 것일까.
사실상 정율성은 항일과 거리가 먼 중국공산당 활동에 주력했고, 북한의 남침을 독려하고 적화를 찬양하는 노래를 만드는 데 매진했다. 중국 귀환 후에는 당시 우리 ‘적성국’의 국민으로 살았던 자에 불과하다. 설혹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해도, 정율성은 그 재능을 ‘중국 공산혁명’과 ‘한반도 공산화’를 위해 바쳤을 뿐이다. 혈연적으로는 한국인일지 몰라도 정신적으로 그는 철저하게 중국인이었고, 사상적으로는 ‘중국 공산당원’이었다. 대한민국이 ‘독립’하는 데 일조했다고 전혀 볼 수 없는 인물이다.
설령 그가 조국 독립에 티끌만 한 공이 있다고 해도 훗날 반(反)국가행위 혹은 민족반역행위를 했으므로, 대한민국 땅에서 정율성을 기리는 행사가 열려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그의 고향인 광주광역시와 유년기를 잠깐 보낸 전남 화순군은 ‘정율성’을 내세우고 관련 사업에 국민 세금을 쓰고 있다. 《월간조선》은 10년 전인 2012년부터 수차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하고, 세금 집행 실태를 고발해왔지만 의미 있는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이들 자치단체의 행태는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심지어 이들은 정율성 연고 문제를 놓고 갈등을 벌이고, 경쟁적으로 정율성 기념사업을 추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2억원 들인 화순군의 ‘정율성 고향집’
화순군 능주면에는 ‘정율성 고향집’이 있다. 정율성이 세 살이던 1917년에 화순군 능주면으로 이주해 1923년까지 7년 동안 거주했다고 화순군은 주장한다. 이 기간, 정율성은 능주면 소재 능주공립보통학교(현 능주초등학교)에 재학했다. 화순군은 정율성 거주 사실을 내세워 중국 관광객 등을 유치할 생각인지 그 ‘생가’를 조성했다. 능주초등학교에는 정율성 벽화와 관련 조형물, 기념 시설을 만들었다.
6월 5일 오후 2시쯤, 화순군 능주면으로 진입했다. 능주면으로 들어가는 도로 초입에는 ‘정율성 선생 고향집 1.2km’란 표지판이 서 있었다. 얼마 더 이동하자, ‘정율성 선생 고향집 600m’란 안내문을 또 마주할 수 있었다. ‘정율성 고향집’ 앞 주차장에는 ‘정율성 선생 유적지 안내도’란 대형 표지판이 있었다.
다시 강조하면, 정율성은 6·25동란 당시 동족상잔을 자행한 북한군의 일원으로 우리 국군을 죽이라는 내용의 여러 군가를 작곡했다. 북한군으로서 인공 치하 서울에 진주하기도 했다. 우리 국군의 북진을 방해하고, 대한민국의 자유통일을 좌절시킨 중공군의 군가 다수를 지은 자이기도 하다. 동족상잔을 응원하고, 적화통일을 독려했고, 평생 공산혁명 망상에 사로잡혔던 자를 대한민국의 기초자치단체 전남 화순군은 ‘군(郡)’ 차원에서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선생’으로 모시는 것이다.
전남 화순군 능주면 관영리 282번지, ‘정율성 고향집’에 도착했다. 화순군은 공터였던 이곳에 12억원을 투입해 초가를 모방한 건물을 짓고, 주차장과 진입로를 조성했다. 화순군이 만든 ‘정율성 고향집’의 면적은 전시관과 관리동을 합쳐 66.86㎡(20평)다. 이곳을 방문했을 당시 관람객은 한 명도 없었다. 이후 30분 동안 전시관을 찾은 이는 단 2명에 불과했다. 해당 시설 안내인에게 “이곳을 찾는 이는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안내인은 “저분(정율성)이 중국에서는 아주 유명한 분이라서 공자학원 사람들이 온다”고 밝혔다.
공자학원은 중국 정부가 중국어 교육 및 중국의 사상, 체제와 문화를 전파·홍보한다는 명목으로 세계 각지에 세운 기관이다. 표면적으로는 ‘교육’ ‘대외 협력’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중국공산당의 통제·지시를 받는 선전기구, 간첩 양성소란 비판을 받는다. 이런 이유 탓에 미국과 유럽에서는 공자학원을 퇴출하는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버젓이 ‘김일성 포상장’ 소개하는 의도는?
화순군 능주면 소재 ‘정율성 고향집’의 방은 3개다. 그중 한 곳은 정율성 관련 사진과 각종 기록물을 영상화해 이를 반복해서 틀어주는 곳이었다. 그 영상을 쭉 보다가 충격적인 내용을 발견했다. 북한 김일성이 정율성에게 준 포상장을 버젓이 소개하는 것이었다. 그 상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포상장
우(右) 동지(기자 주: 정율성)는 확고한 민주사상과 애국적 열성으로 1947년경 인민경제계획을 완수함에 헌신참가하여 책임 있게 사업을 수행하였으므로 이를 포상함.
1948년 2월 8일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
정율성 사진첩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발견했다. 해당 사진첩에는 인민군 방한모를 쓴 정율성이 악보를 쳐다보는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의 설명에는 “정율성이 항미원조 시절 남긴 소중한 사진으로 전쟁 중 열악한 환경에서 창작하는 정율성의 헌신과 혁명의 낭만주의 정서를 엿볼 수 있다”고 써놨다.
항미원조란, “북한을 돕기 위해 미국에 대항한 전쟁”이란 뜻을 가진 6·25의 중국식 표현이다. 대한민국의 영토를 참절하고, 정부를 참칭하고, 불법 기습 공격을 시작으로 각종 전쟁범죄를 자행한 김일성 세력을 격퇴하려는 우리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을 좌절시킨 중공군의 억지 주장이 국내에서 거리낌 없이 유포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전남 화순군이 조성한 ‘정율성 고향집’은 ‘과연 이곳이 대한민국이 맞나?’란 생각이 들 정도로 비상식적인 전시물과 각종 주장, 표현들로 가득했다. 그 건물 마루 한쪽에 쌓인 ‘위대한 음악가 정율성 선생의 삶의 자 취’란 제목의 홍보물에서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정율성 선생 연대기 ▲항일 독립운동가 정율성 선생 ▲정율성 선생 연표 ▲정율성 선생의 고향집 재현 ▲정율성 선생을 기리기 위한 화순의 노력과 자원들 등으로 구성된 해당 홍보물은 그야말로 정율성 찬양 일색이었다. 항일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지만 그 행적은 지금까지 밝혀진 게 없으며, 오로지 평생을 중국공산당과 북한 독재정권을 위해 살아온 ‘한국계 중국인’에게 ‘위대한 선생’ 운운하며, 특기할 일도 많지 않은 그 생애를 마치 대단한 것인 양 칭송하는 그 행태에 이질감마저 느껴졌다.
“위대한 음악가, 아시아에 희망 선사한 혁명가!”
‘정율성 고향집’을 나와서 인근에 있는 능주초등학교로 갔다. 앞서 밝혔듯, 능주초등학교는 과거 정율성이 다닌 능주공립보통학교의 후신이다. 그런 이유로 이곳에도 정율성 관련 기념 시설이 다수 조성됐다. 먼저 능주초등학교 본관 우측 벽면에는 정율성 모자이크(10×11m)가 있었다. 건물 한쪽 벽면 전체를 ‘정율성’으로 채웠다. 본관 뒤쪽 후문으로 가는 길에는 ‘정율성 선생상(像)’이란 흉상이 있었다. 그 뒤에는 정율성의 생몰년인 ‘1914년’과 ‘1976년’을 뜻하는 조형물을 설치해놨다. 흉상 기단에 음각된 ‘건립 취지’에는 다음과 같은 찬양문이 있었다.
“동아시아 현대음악의 최고 반열에 오른 능주초등학교가 낳은 위대한 음악가 정율성 선생, 중국인들이 사랑하는 ‘팔로군행진곡’ ‘옌안송’ 등 300여 곡의 주옥같은 선율을 남긴 작곡가요, 아시아에 희망을 선사한 혁명가인 선생의 뜨거운 조국애와 열정적인 예술을 기리며 그 호연지기의 기상을 후배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한다.”
그 흉상 옆에는 또 ‘항일 독립운동가 정율성 선생’이라는 제목의 조형물이 있었다. 이 조형물에 기술된 주장은 다음과 같다.
“화순이 고향인 정율성 선생은 1914년 광주에서 태어나 1917년부터 1923년까지 이곳 화순군 능주면에서 초등학교 등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정율성 선생은 중국의 ‘3대 혁명 음악가’이자, ‘신(新)중국 창건 100대 영웅’으로 선정되는 등 작곡가로서 중국 대륙에서 명성을 드높이고 있습니다. 정율성 선생은 음악가와 더불어 독립투사로 강고한 항일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중략) 이제라도 항일 독립운동가로서 선생을 기억해야 합니다.”
능주초등학교에는 정율성 관련 기념물 말고는 조형물이 많지 않았다. 관찰한 바로는 여느 학교에 다 있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형상화한 작은 동상 2개가 전부였다. 이런 현실을 고려하면, 능주초를 졸업한 학생과 현재 재학 중인 81명은 우리 국민 대다수가 ‘위인’이라고 인정하는 세종대왕·이순신 장군보다 정율성이 더 ‘위대’한 인물이라고 오해할 소지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압도적으로 그 규모가 크고, 수가 많은 정율성 기념물을 보면서 공부하고, 성장해왔기 때문이다.
광주 남구 양림동의 ‘정율성로’
6월 6일, 67회 현충일 정오에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을 찾았다. 양림동은 정율성과 그 가족이 ‘정율성의 고향’이라고 주장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광주 남구가 정율성 관련 각종 시설물을 설치한 ‘음악가 정율성로’가 있다. 총연장 233m에 달하는 ‘정율성로’는 2009년 1월 29일 개통됐다. 당시 남구청장은 문재인 정부 때 한국전력공사 상임감사위원으로 임명돼 계속 그 자리를 지키는 최영호씨다.
‘정율성로’ 왼쪽, 양림동 휴먼시아 2단지 외벽은 ‘정율성 거리 전시관’으로 조성됐다. 이 보도 초입에는 작년 8월에 신규 설치한 ‘정율성 부조’가 있었다. 해당 조형물은 정율성이 바위에 걸터앉아 만리장성 너머를 바라보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중국에서 왕성히 활동하신 정율성 선생님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으로 한·중 교류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제작·설치했다”고 한다. 이어서 피아노 건반을 형상화한 구조물과 함께 ▲정율성 사진 ▲정율성 기념사업 내역 ▲중국 내 정율성 인지도 ▲정율성의 ‘옌안송’ 악보 동판 ▲정율성 기록물이 233m에 걸쳐 전시돼 있었다. 이 길 끝에는 정율성 상반신 그림과 함께 “동아시아의 예술혼, 음악가 정율성”이란 문구가 적힌 큰 표지판이 있었다. 또 길 건너편에는 북한 또는 공산권 국가들의 조각과 유사한 형태의 ‘정율성상’이 있었다. 이 동상은 중국 광저우시의 청년연합회 지부가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광주 대표 볼거리가 ‘정율성 집’?
또한 ‘정율성로’는 현재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일원의 도로명 주소로 사용되고 있다. 현장을 찾은 당일은 전술한 것처럼 현충일이라서 간혹 태극기를 게양한 집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집 대문 옆에는 ‘정율성로 ○○’이란 도로명 주소 팻말이 붙어 있었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날에 태극기를 내건 ‘애국시민’의 집조차 행정적으로는 북한군가, 중공군가를 작곡하고 대남 적화를 꿈꿨던 공산주의자의 이름을 딴 주소명을 써야 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소위 ‘정율성로’ 인근에는 또 다른 ‘정율성 생가’가 있다.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7○번지 소재 주택이다. 정율성 가족은 이곳을 ‘생가’라고 주장했다. 현재 이곳은 민간인이 소유·거주하고 있어 관광객의 출입이 불가능하다. 대신 대문 옆에 방문 기념으로 도장을 찍을 수 있는 이른바 ‘투어 스탬프’ 시설이 설치돼 있다. ‘정율성 생가’를 꼭 가봐야 할 관광명소로 홍보하는 셈이다.
실제 광주광역시 광주 관광 안내지도 ‘오매 광주’를 보면, 광주의 숱한 마을과 거리 중 광주 원도심 충장로 일대와 ‘양림동 역사문화마을’만 확대해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 중 ‘양림동 역사문화마을’의 내용을 보면 가장 굵은 글씨로 표기한 관광지 6곳 중 3곳이 정율성 관련 시설물(정율성 생가, 정율성 거리, 정율성 흉상)이다.
한편, 광주광역시에는 남구뿐 아니라 동구에도 정율성 기념물이 있다. 정율성로에서 1km 떨어진 동구 불로동 163번지 소재 벤○○호텔에도 정율성 기념 시설이 있다. 과거 히딩크관광호텔이었던, 이곳의 주차장 안쪽에는 ‘정율성 선생 생가 복원 추진위원회’가 2006년 9월에 세운 높이 4.5m 비석이 있다. 이 비석에는 ‘음악가 정율성 선생 탄생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비석 옆에는 ‘율성정(律成井)’이란 우물도 있다.
광주광역시는 2020년 5월, 이 생가터와 남구 양림동 소재 ‘정율성 생가’를 사들여 각각 ‘정율성 역사공원’과 ‘정율성 기념관’으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당시 광주광역시는 양림동 생가 매입과 시설비 등으로 10억원을 책정했다. 불로동 생가터와 그 인접 부지 매입과 시설 조성에는 38억원이 들 것으로 예상했다.
광주광역시는 또 2015년 12월, 광주천변 서석교-학강교 구간 보도(1.6km)와 학강초등학교 주변 도로(420m)에 ‘정율성 노래길’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동작감지기를 설치하고, 노래길 가로등에 자동 음악 재생 기기를 달아 행인들이 자동으로 ‘정율성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현장을 찾았을 당시 정율성 음악은 흘러나오지 않았으나, 광주천변 다른 구간과 달리 서석교-학강교 구간 보도에는 음향증폭기가 설치돼 있었다.
지금까지 살핀 광주광역시와 전남 화순군에 산재한 정율성 관련 시설들의 공통점은 세 가지다. 첫째, 근거 불분명한 ‘항일 독립운동’과 관련해서는 그 누구보다 애국심이 끓어 올랐던 것처럼 정율성을 묘사한다는 점이다. 둘째, 정율성의 음악적 재능과 그의 작품들을 과도할 정도로 칭송한다는 사실이다. 셋째, 정율성의 6·25 당시 행적과 북한군가 작곡 이력은 도무지 얘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장황한 정율성 찬양문 중에는 정율성의 북한 관련 행적 기술이 전혀 없다.
‘정율성’에 목매는 광주시와 남구
이 밖에도 《월간조선》이 입수한 광주광역시와 남구의 자료를 보면, 이들 자치단체는 정율성 관련 시설 건립은 물론 각종 행사 개최, 민간 활동에 세금을 투입하고 있다.
광주광역시의 경우 그 산하기관인 광주문화재단이 2005년부터 매년 ‘정율성 국제음악제’를 개최하고 있다. 이에 대한 광주광역시의 최근 6년 동안의 지원금은 ▲2017년 3억5500만원 ▲2018년 3억5500만원 ▲2019년 3억5500만원 ▲2020년 3억1950만원 ▲2021년 2억8400만원 ▲2022년 2억8400만원 등이다. 6년 동안 총 19억5250만원을 ‘정율성 국제음악제’에 사용한 셈이다.
광주문화재단은 또 정율성을 주제로 한 대중(對中) 교류 명목으로 ▲취안저우(泉州) 방문 공연(2018년) ▲중국 저장성(浙江省) 방문 공연(2019년) ▲중국 저장성 공연단 광주 초청 공연(2019년) 등을 진행했다.
광주광역시는 2007년에 4800만원을 들여 ‘정율성 국제음악제 및 선양(瀋陽)·후난성(湖南省) 노선 연계상품 개발을 위한 관광설명회’를 개최했다. 2008년에는 3580만원을 투입해 ‘정율성 국제음악제 관광설명회 및 신규 상품 판매 촉진을 위한 설명회’를 열었다. 2009년에는 2127만원을 쓰면서 ‘정율성 국제음악제 중국 공연 연계 광주 관광 상품 설명회’를 했다. 2013년에는 ‘온리 광주 도심권 관광 기반 구축을 위한 정율성 스토리텔링 개발 계획’이란 명목 아래 ‘광주시민의○○’란 단체에 용역을 줬다. 용역비는 2700만원이다. 2017년에는 양림동 정율성로 홍보 영상 모니터 보수에 2000만원, 정율성 거리 복구 사업에 5400만원을 썼다.
광주광역시 남구 역시 다양한 정율성 관련 사업에 세금을 쓰고 있다. 남구 작성 자료에 따르면 2016~2022년, 1억9000만원을 썼다. 해당 기간, ‘정율성 동요제’ 홍보 방송을 지원한다는 명목 아래 광주 MBC에 총 1억2000만원을 지출했다. 이 밖에 ▲정율성 사진 전시회 보조금 300만원 ▲‘정율성 책자 발간’ 300만원 ▲정율성의 항일 공훈 조사 보조금 250만원 ▲정율성 관련 유적·인물 탐방 보조금 720만원(2020~2022년) ▲다큐멘터리 〈음악가, 정율성의 선택〉 홍보·방송 송출 지원 3000만원 ▲‘정율성과 김원봉의 항일 이야기’ 팟캐스트 제작 지원 250만원 ▲정율성 거리 하자 보수 1850만원 등에 약 7000만원을 썼다.
“정율성으로 광주의 ‘親中’ 이미지 형성 기대”
광주광역시와 그 산하 자치구인 남구는 왜 ‘반(反)대한민국’적 인물인 ‘정율성’을 기릴까. ‘민주화의 성지’를 자처하는 광주에서 반(反)인권적 폭압 통치 체제에 충성하며 음악 재능을 바친 자를 치켜세우는 배경은 무엇일까. 표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유는 ‘돈’, 소위 ‘차이나 머니’다.
광주광역시는 중국 관광객 유치를 위해 일찌감치 ‘중국과 친해지기’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정율성’을 주요 자산으로 활용하려 했다. 이런 까닭에 평생을 중공과 북한을 위해 살았던 정율성을 ‘위대한 음악가’라고 칭송하고, 관련 시설들을 계속해서 만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공자학원’이 있는 호남대학교(광주 소재 4년제 사립대)의 산학협력단이 작성해 2016년 12월 광주광역시에 제출한 연구용역 보고서 〈제6차 광주권 관광 개발 계획(2017~2021)〉에서 확인할 수 있다. 총 362쪽인 해당 보고서에는 ‘정율성’이란 이름이 44회 등장한다. 이는 광주광역시가 ‘정율성’이란 인물에 얼마나 의존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해당 보고서 연구진은 정율성 관련 시설이 있는 광주광역시 동구 불로동(출생지), 남구 양림동(주 거주지), 전남 화순군(유년기 거주지) 일원에 ‘호남권 차이나 관광 벨트’를 구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광주와 전남에 분포한 한·중 우호 인물, 중국 관련 역사유적 등 친(親)중국 역사 문화 콘텐츠를 활용한 광역권 차이나 관광 벨트와 중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중국 친화적 관광 매력물 개발 및 대(對)중국 광주·전남 상생협력의 거점 공간 구축이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사업 기간은 2017~2021년(5년), 총사업비는 200억원(국비 100억원, 지방비 100억원)이다. 사업의 기대효과로는 ▲정율성으로 대표되는 광주의 긍정적이고 호의적인 중국인 친화 관광 이미지 형성 기대 ▲친중국 역사 문화 콘텐츠를 활용한 ‘펑유(朋友·친구) 마케팅’ 등 대중국 관광 마케팅 플랫폼 성장 기대 등을 제시했다.
또한 “정율성을 대중국 프로모션의 핵심적 가교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율성 생가 복원·관련 시설 정비 ▲한·중 우호교류 기념관 조성 ▲정율성 스토리텔링 개발 등을 제안했다. 이어서 ‘독립운동가·천재 음악가 정율성’의 삶과 연애사를 관광 홍보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대한민국 헌법 정신’과 ‘정율성 추앙’은 ‘상충’
이 같은 광주의 ‘정율성 사랑’은 대한민국 헌법 정신과 들어맞지 않는다. 헌법이 규정한 대한민국의 정체성인 ‘자유민주주의’와 ▲영광은 스탈린에게(1950) ▲모(毛) 주석께서 우리를 인도하다(1959) ▲모 주석의 장엄한 성명은 방향을 가리킨다(1970) 등 대규모 학살과 정치적 숙청을 거리낌 없이 저지른 공산 독재자를 찬양한 정율성은 어울리지 않는다.
한반도에서 정통성과 합법성을 가진 유일한 국가인 ‘대한민국’의 영토를 참절하고, 정부를 참칭하고, 동족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 적화를 시도한 공산 세력에 부역한 정율성을 대한민국 또는 그 산하 지방자치단체가 세금으로 기리는 것은 ‘자폭(自爆)’ ‘자해(自害)’와 같은 비상식적 행태라고 할 수 있다. 그저 중국 관광객을 많이 끌어들여서 돈 좀 만질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우리 국가 공동체에 무슨 짓을 했든지 상관 않고 관광자원으로 내세워도 된다는 발상은 ‘황금만능주의’ ‘배금주의(拜金主義)’의 전형이다.
더구나 ‘민주·평화·인권의 도시’를 자처하는 광주광역시가 ‘관광 수입 증대’를 제일 목적으로 정율성이란 자를 추앙한다면, 이는 ‘자기부정(自己否定)’ 아니냐는 비판을 피하기 쉽지 않다.⊙
일반에는 생소한 정율성이란 인물은 광주광역시 태생의 중국인 작곡가다. 정율성은 중국인이므로, 현행 중국어 표기법상 ‘정뤼청’이라고 해야 하지만 편의상 정율성이라고 지칭한다. 정율성은 1914년 당시 전남 광주군에서 태어났다.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음악을 공부했다. 이후에는 중국공산당에 가담해 소위 ‘혁명음악’을 만들었다. 나중에는 북한으로 넘어가 북한군가를 짓고, 6·25 때는 북한군으로 참전했다. 민족반역자·전쟁범죄자 김일성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동족상잔을 격려하는 북한군가를 다수 작곡했다. 이후에도 ‘중국공산당’에 적(籍)을 두고 북한에 남아 이른바 ‘창작 활동’을 했다. 그 후 중국으로 돌아가서는 죽을 때까지 음악을 ‘공산혁명’의 수단으로 여기다가 눈을 감았다.
그 일생을 보면, 정율성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고, ‘반국가단체’ 북한 정권 입장에서 대한민국에 대항한 ‘적(敵)’이다. 그는 대한민국 국민을 살상하고, 재산을 파괴한 ‘북한군’의 일원이었다. 우리의 자유통일을 저지하고, 민족적 비극인 ‘분단’을 고착화한 ‘중공군’ 소속이기도 했다. 이런 자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자랑스레 내세우거나 우호선린의 상징 또는 매개체로 내세울 만한 인사가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문 전 대통령 입에서 그 이름이 거리낌 없이 호명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찌감치 대한민국 안에서 국민 세금으로 ‘정율성 포장·미화·찬양 작업’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정율성의 의열단 활동 입증하는 근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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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산하 광주문화재단은 정율성을 주제로 한 대중(對中) 교류 명목으로 취안저우(泉州) 방문 공연(2018년) 등을 진행했다. 사진=뉴시스 |
정율성은 1914년 수피아여학교 교사였던 부친 정해업(鄭海業)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부은(富恩)이었다. 《정율성 평전》과 이를 참조한 국내 정율성 관련 연구물을 보면, 정율성은 1933년 5월 김원봉(金元鳳)이 이끌던 의열단 간부학교 입교생을 모집하러 국내에 잠입한 셋째 형 의은(義恩)을 따라 중국 난징(南京)으로 건너갔다.
그해 9월 의열단 간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한 정율성은 정신·정치·군사 교육을 받고 1934년 4월 동기 55명과 함께 졸업했다. 그 후 정율성은 난징 고루(鼓樓)전화국에 침투해 일본인 전화를 도청(盜聽)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이게 바로 정율성의 생애 중 유일한 ‘항일(抗日)’ 행적인데,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근거는 없다.
이는 정율성의 부인 딩쉐쑹(丁雪松)이 1992년에 펴낸 《작곡가 정율성》에 기술된 주장에서 비롯됐는데, 이를 인용한 관련 저작물을 보면 대체 왜 정율성을 ‘항일 독립운동가’라고 치켜세우고, 그를 기려야 하는지 공감할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항상 “비밀공작을 수행했다”는 식의 기술만 있을 뿐이다.
‘중공 찬가’ 만든 게 ‘항일 독립운동’?
정율성이 정말 항일 독립운동을 했고, 그 목적으로 ‘비밀공작’에 참여했다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없는 셈이다. 그럼에도 현재 국내의 정율성 옹호론자들이나 정율성을 관광자원으로 삼아 중국 관광객 돈을 만져보려고 하는 지방자치단체들은 ‘독립운동가 정율성’이란 주장을 지속적으로 유포하고 있다. 정율성에 관한 여러 논문과 중국 측 기록을 살펴봐도 ‘의열단원 정율성’의 행적에 대해 알 길이 없다. 백번 양보해서 정율성이 실제 의열단원으로서 임무를 수행했다고 해도, 그 기간은 60년 넘는 그의 일생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정율성이 정말 ‘의열단원’이었다고 해도 그가 마오쩌둥과 김일성 또는 중국공산당과 조선노동당에 충성하며 대한민국 적화(赤化)를 기도한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일부 인사들은 정율성이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타이항산(太行山)에 있던 조선혁명군정학교 살림을 책임진 교무장을 맡았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항일 독립운동가’라고 주장한다. 이 역시 설득력이 떨어진다.
조선혁명군정학교는 무정(武亭·본명은 박병희. 6·25 때 북한군 2군단장으로 남침)이 이끄는 조선의용군 산하 조직이었다.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 팔로군 산하의 일개 무장 정치 선전대에 불과했다. 조국 독립을 위해 일본과 싸우던 ‘항일 독립군’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당시 정율성을 포함한 조선의용군은 ‘항일’보다는 자신들의 세력 확대와 국민당 정부 축출을 꿈꾸던 중국공산당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고 할 수 있다.
혹여 내심으로는 ‘조국 독립’의 뜻을 품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실제 그들의 행적을 보면 ‘항일 독립운동’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대목 자체를 찾기 어렵다. 한마디로 중국공산당에 가담했다고 해서 이를 ‘항일 독립운동’이라고 칭송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셈이다.
당시 팔로군은 일본군과 대규모 전투를 치르지 않고, 후방에서 형식적인 소규모 게릴라전을 전개하면서 중국 일반 주민과 국민당 정부군 장병을 대상으로 한 선전·세뇌 작업에 열중했다. 국민당군이 일본군과 싸우는 동안 세력 확장에 집중한 것이다. 소위 ‘제2차 국공합작’ 와중에도 국민당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일본군에 각종 기밀을 넘기기도 했다는 게 최신 연구 결과다.
북한군·중공군가 작곡에 진력
정율성은 평생을 중국과 북한을 위해 살았다. 그는 중국공산당에 충성하면서 팔로군을 위한 군가를 짓고, 소위 ‘혁명 의식’을 고취하는 음악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1945년 12월, 정율성은 북한으로 건너가 조선공산당에 입당한 뒤 황해도당위원회 선전부장으로 일했다. 1947년에는 평양에서 조선보안대 구락부 부장을 맡았다. 당시 그는 곧바로 협주단을 만들어 2년여에 걸쳐 북한 전역 순회공연에 나섰다. 북한 당국은 그의 노고를 위로하며 ‘모범 근로자’ 칭호를 내렸다. 1949년에는 평양음악대학 작곡부 부장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기간 그는 북한군가를 만드는 데 매진했다. 6·25 남침 당시 북한군이 불렀던 노래, 월북(越北)시인 박세영(朴世永)의 시에 곡을 붙여 훗날 ‘조선인민해방군가’가 된 ‘조선인민군행진곡’이 바로 정율성의 곡이다.
1950년 9월, 중국으로 돌아간 정율성은 다시 중국공산당 당적(黨籍)을 회복하고,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취득했다. 완전한 ‘중국인’이 된 정율성은 그해 12월, 소위 ‘중국 인민지원군’으로 다시 참전했다. 그는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중공군과 함께 서울까지 내려왔다. 중공군으로 참전한 그는 약 4개월 동안, 북한이 주장하는 조국해방전쟁, 중국이 강변하는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을 수행했다. 이 기간, 그는 북한군과 중공군의 사기(士氣)를 고취시키기 위해 ‘조선인민유격대 전가’ ‘중국인민지원군 행진곡’ ‘공화국 기치 휘날린다’ 등을 만들었다.
이후 중국으로 다시 돌아간 정율성은 1966년 소위 ‘문화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중국의 농촌, 공장, 병영, 소수민족 등을 소재로 창작 활동을 했다. 오페라 〈망부운(亡婦雲)〉 등이 이 시기에 그가 만든 작품이다. 마오쩌둥이 지은 시사(詩詞)에 곡을 붙이기도 했다. 이후 문화혁명 기간 정율성은 주로 천렵(川獵)과 사냥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1976년 12월 사망했다.
정율성의 음악 인생을 반추하면 ▲중국공산당의 옌안·타이항산(8년) ▲김일성의 북한(6년) ▲마오쩌둥의 중국(25년)으로 나눌 수 있다. 일부 국내 인사들이 주장하는 정율성의 ‘항일 독립운동’이 실재한다면, 그 시기는 중국공산당 소속으로 활동했던 초기 8년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기간, 정율성이 만든 곡들을 보면 우리 민족의 독립과 상관성을 갖는 작품을 찾기 쉽지 않다. ‘조국 독립’에 대한 ‘항일열사 정율성’의 의지를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단서가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과연 정율성은 중국공산당원으로서 중국 공산혁명을 꿈꾼 것일까, 조국 독립을 바랐던 것일까.
사실상 정율성은 항일과 거리가 먼 중국공산당 활동에 주력했고, 북한의 남침을 독려하고 적화를 찬양하는 노래를 만드는 데 매진했다. 중국 귀환 후에는 당시 우리 ‘적성국’의 국민으로 살았던 자에 불과하다. 설혹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해도, 정율성은 그 재능을 ‘중국 공산혁명’과 ‘한반도 공산화’를 위해 바쳤을 뿐이다. 혈연적으로는 한국인일지 몰라도 정신적으로 그는 철저하게 중국인이었고, 사상적으로는 ‘중국 공산당원’이었다. 대한민국이 ‘독립’하는 데 일조했다고 전혀 볼 수 없는 인물이다.
설령 그가 조국 독립에 티끌만 한 공이 있다고 해도 훗날 반(反)국가행위 혹은 민족반역행위를 했으므로, 대한민국 땅에서 정율성을 기리는 행사가 열려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그의 고향인 광주광역시와 유년기를 잠깐 보낸 전남 화순군은 ‘정율성’을 내세우고 관련 사업에 국민 세금을 쓰고 있다. 《월간조선》은 10년 전인 2012년부터 수차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하고, 세금 집행 실태를 고발해왔지만 의미 있는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이들 자치단체의 행태는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심지어 이들은 정율성 연고 문제를 놓고 갈등을 벌이고, 경쟁적으로 정율성 기념사업을 추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2억원 들인 화순군의 ‘정율성 고향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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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화순군 능주면 관영리에는 정율성이 유년기에 잠시 살았던 집터에 세금 12억원을 들여 만든 ‘정율성 고향집’이 있다. 사진=월간조선 |
6월 5일 오후 2시쯤, 화순군 능주면으로 진입했다. 능주면으로 들어가는 도로 초입에는 ‘정율성 선생 고향집 1.2km’란 표지판이 서 있었다. 얼마 더 이동하자, ‘정율성 선생 고향집 600m’란 안내문을 또 마주할 수 있었다. ‘정율성 고향집’ 앞 주차장에는 ‘정율성 선생 유적지 안내도’란 대형 표지판이 있었다.
다시 강조하면, 정율성은 6·25동란 당시 동족상잔을 자행한 북한군의 일원으로 우리 국군을 죽이라는 내용의 여러 군가를 작곡했다. 북한군으로서 인공 치하 서울에 진주하기도 했다. 우리 국군의 북진을 방해하고, 대한민국의 자유통일을 좌절시킨 중공군의 군가 다수를 지은 자이기도 하다. 동족상잔을 응원하고, 적화통일을 독려했고, 평생 공산혁명 망상에 사로잡혔던 자를 대한민국의 기초자치단체 전남 화순군은 ‘군(郡)’ 차원에서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선생’으로 모시는 것이다.
전남 화순군 능주면 관영리 282번지, ‘정율성 고향집’에 도착했다. 화순군은 공터였던 이곳에 12억원을 투입해 초가를 모방한 건물을 짓고, 주차장과 진입로를 조성했다. 화순군이 만든 ‘정율성 고향집’의 면적은 전시관과 관리동을 합쳐 66.86㎡(20평)다. 이곳을 방문했을 당시 관람객은 한 명도 없었다. 이후 30분 동안 전시관을 찾은 이는 단 2명에 불과했다. 해당 시설 안내인에게 “이곳을 찾는 이는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안내인은 “저분(정율성)이 중국에서는 아주 유명한 분이라서 공자학원 사람들이 온다”고 밝혔다.
공자학원은 중국 정부가 중국어 교육 및 중국의 사상, 체제와 문화를 전파·홍보한다는 명목으로 세계 각지에 세운 기관이다. 표면적으로는 ‘교육’ ‘대외 협력’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중국공산당의 통제·지시를 받는 선전기구, 간첩 양성소란 비판을 받는다. 이런 이유 탓에 미국과 유럽에서는 공자학원을 퇴출하는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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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화순군 능주면 소재 ‘정율성 고향집’에서는 정율성이 ‘동족상잔’ ‘민족분단’의 원흉 김일성으로부터 받은 ‘상장’이 담긴 영상이 버젓이 상영되고 있다. 사진=월간조선 |
〈포상장
우(右) 동지(기자 주: 정율성)는 확고한 민주사상과 애국적 열성으로 1947년경 인민경제계획을 완수함에 헌신참가하여 책임 있게 사업을 수행하였으므로 이를 포상함.
1948년 2월 8일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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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 고향집’에 전시된 사진첩에는 정율성이 6ㆍ25 전장에서 곡을 짓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다. 이 사진 설명에는 중국이 북한을 돕기 위해 미국에 대항했던 전쟁이란 뜻의 ‘항미원조’가 명기돼 있다. 사진=월간조선 |
항미원조란, “북한을 돕기 위해 미국에 대항한 전쟁”이란 뜻을 가진 6·25의 중국식 표현이다. 대한민국의 영토를 참절하고, 정부를 참칭하고, 불법 기습 공격을 시작으로 각종 전쟁범죄를 자행한 김일성 세력을 격퇴하려는 우리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을 좌절시킨 중공군의 억지 주장이 국내에서 거리낌 없이 유포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전남 화순군이 조성한 ‘정율성 고향집’은 ‘과연 이곳이 대한민국이 맞나?’란 생각이 들 정도로 비상식적인 전시물과 각종 주장, 표현들로 가득했다. 그 건물 마루 한쪽에 쌓인 ‘위대한 음악가 정율성 선생의 삶의 자 취’란 제목의 홍보물에서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정율성 선생 연대기 ▲항일 독립운동가 정율성 선생 ▲정율성 선생 연표 ▲정율성 선생의 고향집 재현 ▲정율성 선생을 기리기 위한 화순의 노력과 자원들 등으로 구성된 해당 홍보물은 그야말로 정율성 찬양 일색이었다. 항일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지만 그 행적은 지금까지 밝혀진 게 없으며, 오로지 평생을 중국공산당과 북한 독재정권을 위해 살아온 ‘한국계 중국인’에게 ‘위대한 선생’ 운운하며, 특기할 일도 많지 않은 그 생애를 마치 대단한 것인 양 칭송하는 그 행태에 이질감마저 느껴졌다.
“위대한 음악가, 아시아에 희망 선사한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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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이 잠시 다녔다고 하는 화순군 능주초등학교 본관 우측 벽면에는 정율성을 그린 대형 모자이크가 있다. 사진=월간조선 |
“동아시아 현대음악의 최고 반열에 오른 능주초등학교가 낳은 위대한 음악가 정율성 선생, 중국인들이 사랑하는 ‘팔로군행진곡’ ‘옌안송’ 등 300여 곡의 주옥같은 선율을 남긴 작곡가요, 아시아에 희망을 선사한 혁명가인 선생의 뜨거운 조국애와 열정적인 예술을 기리며 그 호연지기의 기상을 후배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한다.”
그 흉상 옆에는 또 ‘항일 독립운동가 정율성 선생’이라는 제목의 조형물이 있었다. 이 조형물에 기술된 주장은 다음과 같다.
“화순이 고향인 정율성 선생은 1914년 광주에서 태어나 1917년부터 1923년까지 이곳 화순군 능주면에서 초등학교 등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정율성 선생은 중국의 ‘3대 혁명 음악가’이자, ‘신(新)중국 창건 100대 영웅’으로 선정되는 등 작곡가로서 중국 대륙에서 명성을 드높이고 있습니다. 정율성 선생은 음악가와 더불어 독립투사로 강고한 항일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중략) 이제라도 항일 독립운동가로서 선생을 기억해야 합니다.”
능주초등학교에는 정율성 관련 기념물 말고는 조형물이 많지 않았다. 관찰한 바로는 여느 학교에 다 있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형상화한 작은 동상 2개가 전부였다. 이런 현실을 고려하면, 능주초를 졸업한 학생과 현재 재학 중인 81명은 우리 국민 대다수가 ‘위인’이라고 인정하는 세종대왕·이순신 장군보다 정율성이 더 ‘위대’한 인물이라고 오해할 소지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압도적으로 그 규모가 크고, 수가 많은 정율성 기념물을 보면서 공부하고, 성장해왔기 때문이다.
광주 남구 양림동의 ‘정율성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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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남구는 2009년 양림동 소재 ‘정율성 생가’ 인근의 도로변 233m를 ‘정율성로’로 단장해 개통했다. 사진=월간조선 |
‘정율성로’ 왼쪽, 양림동 휴먼시아 2단지 외벽은 ‘정율성 거리 전시관’으로 조성됐다. 이 보도 초입에는 작년 8월에 신규 설치한 ‘정율성 부조’가 있었다. 해당 조형물은 정율성이 바위에 걸터앉아 만리장성 너머를 바라보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중국에서 왕성히 활동하신 정율성 선생님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으로 한·중 교류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제작·설치했다”고 한다. 이어서 피아노 건반을 형상화한 구조물과 함께 ▲정율성 사진 ▲정율성 기념사업 내역 ▲중국 내 정율성 인지도 ▲정율성의 ‘옌안송’ 악보 동판 ▲정율성 기록물이 233m에 걸쳐 전시돼 있었다. 이 길 끝에는 정율성 상반신 그림과 함께 “동아시아의 예술혼, 음악가 정율성”이란 문구가 적힌 큰 표지판이 있었다. 또 길 건너편에는 북한 또는 공산권 국가들의 조각과 유사한 형태의 ‘정율성상’이 있었다. 이 동상은 중국 광저우시의 청년연합회 지부가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광주 대표 볼거리가 ‘정율성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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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정율성 생가터’인 광주광역시 동구 불로동 소재 벤○○호텔 주차장에는 ‘정율성 탄생지’ 비석과 ‘율성정’이 있다. 사진=월간조선 |
소위 ‘정율성로’ 인근에는 또 다른 ‘정율성 생가’가 있다.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7○번지 소재 주택이다. 정율성 가족은 이곳을 ‘생가’라고 주장했다. 현재 이곳은 민간인이 소유·거주하고 있어 관광객의 출입이 불가능하다. 대신 대문 옆에 방문 기념으로 도장을 찍을 수 있는 이른바 ‘투어 스탬프’ 시설이 설치돼 있다. ‘정율성 생가’를 꼭 가봐야 할 관광명소로 홍보하는 셈이다.
실제 광주광역시 광주 관광 안내지도 ‘오매 광주’를 보면, 광주의 숱한 마을과 거리 중 광주 원도심 충장로 일대와 ‘양림동 역사문화마을’만 확대해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 중 ‘양림동 역사문화마을’의 내용을 보면 가장 굵은 글씨로 표기한 관광지 6곳 중 3곳이 정율성 관련 시설물(정율성 생가, 정율성 거리, 정율성 흉상)이다.
한편, 광주광역시에는 남구뿐 아니라 동구에도 정율성 기념물이 있다. 정율성로에서 1km 떨어진 동구 불로동 163번지 소재 벤○○호텔에도 정율성 기념 시설이 있다. 과거 히딩크관광호텔이었던, 이곳의 주차장 안쪽에는 ‘정율성 선생 생가 복원 추진위원회’가 2006년 9월에 세운 높이 4.5m 비석이 있다. 이 비석에는 ‘음악가 정율성 선생 탄생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비석 옆에는 ‘율성정(律成井)’이란 우물도 있다.
광주광역시는 2020년 5월, 이 생가터와 남구 양림동 소재 ‘정율성 생가’를 사들여 각각 ‘정율성 역사공원’과 ‘정율성 기념관’으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당시 광주광역시는 양림동 생가 매입과 시설비 등으로 10억원을 책정했다. 불로동 생가터와 그 인접 부지 매입과 시설 조성에는 38억원이 들 것으로 예상했다.
광주광역시는 또 2015년 12월, 광주천변 서석교-학강교 구간 보도(1.6km)와 학강초등학교 주변 도로(420m)에 ‘정율성 노래길’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동작감지기를 설치하고, 노래길 가로등에 자동 음악 재생 기기를 달아 행인들이 자동으로 ‘정율성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현장을 찾았을 당시 정율성 음악은 흘러나오지 않았으나, 광주천변 다른 구간과 달리 서석교-학강교 구간 보도에는 음향증폭기가 설치돼 있었다.
지금까지 살핀 광주광역시와 전남 화순군에 산재한 정율성 관련 시설들의 공통점은 세 가지다. 첫째, 근거 불분명한 ‘항일 독립운동’과 관련해서는 그 누구보다 애국심이 끓어 올랐던 것처럼 정율성을 묘사한다는 점이다. 둘째, 정율성의 음악적 재능과 그의 작품들을 과도할 정도로 칭송한다는 사실이다. 셋째, 정율성의 6·25 당시 행적과 북한군가 작곡 이력은 도무지 얘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장황한 정율성 찬양문 중에는 정율성의 북한 관련 행적 기술이 전혀 없다.
‘정율성’에 목매는 광주시와 남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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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문화재단은 2005년부터 매년 ‘정율성 국제음악제’를 개최하고 있다. 광주광역시는 6년 동안 총 19억5250만원을 ‘정율성 국제음악제’에 지원했다. 사진=뉴시스 |
광주광역시의 경우 그 산하기관인 광주문화재단이 2005년부터 매년 ‘정율성 국제음악제’를 개최하고 있다. 이에 대한 광주광역시의 최근 6년 동안의 지원금은 ▲2017년 3억5500만원 ▲2018년 3억5500만원 ▲2019년 3억5500만원 ▲2020년 3억1950만원 ▲2021년 2억8400만원 ▲2022년 2억8400만원 등이다. 6년 동안 총 19억5250만원을 ‘정율성 국제음악제’에 사용한 셈이다.
광주문화재단은 또 정율성을 주제로 한 대중(對中) 교류 명목으로 ▲취안저우(泉州) 방문 공연(2018년) ▲중국 저장성(浙江省) 방문 공연(2019년) ▲중국 저장성 공연단 광주 초청 공연(2019년) 등을 진행했다.
광주광역시는 2007년에 4800만원을 들여 ‘정율성 국제음악제 및 선양(瀋陽)·후난성(湖南省) 노선 연계상품 개발을 위한 관광설명회’를 개최했다. 2008년에는 3580만원을 투입해 ‘정율성 국제음악제 관광설명회 및 신규 상품 판매 촉진을 위한 설명회’를 열었다. 2009년에는 2127만원을 쓰면서 ‘정율성 국제음악제 중국 공연 연계 광주 관광 상품 설명회’를 했다. 2013년에는 ‘온리 광주 도심권 관광 기반 구축을 위한 정율성 스토리텔링 개발 계획’이란 명목 아래 ‘광주시민의○○’란 단체에 용역을 줬다. 용역비는 2700만원이다. 2017년에는 양림동 정율성로 홍보 영상 모니터 보수에 2000만원, 정율성 거리 복구 사업에 5400만원을 썼다.
광주광역시 남구 역시 다양한 정율성 관련 사업에 세금을 쓰고 있다. 남구 작성 자료에 따르면 2016~2022년, 1억9000만원을 썼다. 해당 기간, ‘정율성 동요제’ 홍보 방송을 지원한다는 명목 아래 광주 MBC에 총 1억2000만원을 지출했다. 이 밖에 ▲정율성 사진 전시회 보조금 300만원 ▲‘정율성 책자 발간’ 300만원 ▲정율성의 항일 공훈 조사 보조금 250만원 ▲정율성 관련 유적·인물 탐방 보조금 720만원(2020~2022년) ▲다큐멘터리 〈음악가, 정율성의 선택〉 홍보·방송 송출 지원 3000만원 ▲‘정율성과 김원봉의 항일 이야기’ 팟캐스트 제작 지원 250만원 ▲정율성 거리 하자 보수 1850만원 등에 약 7000만원을 썼다.
“정율성으로 광주의 ‘親中’ 이미지 형성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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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도심 광주천변 곳곳에는 이처럼 정율성 관련 시설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설치돼 있다. 사진=월간조선 |
광주광역시는 중국 관광객 유치를 위해 일찌감치 ‘중국과 친해지기’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정율성’을 주요 자산으로 활용하려 했다. 이런 까닭에 평생을 중공과 북한을 위해 살았던 정율성을 ‘위대한 음악가’라고 칭송하고, 관련 시설들을 계속해서 만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공자학원’이 있는 호남대학교(광주 소재 4년제 사립대)의 산학협력단이 작성해 2016년 12월 광주광역시에 제출한 연구용역 보고서 〈제6차 광주권 관광 개발 계획(2017~2021)〉에서 확인할 수 있다. 총 362쪽인 해당 보고서에는 ‘정율성’이란 이름이 44회 등장한다. 이는 광주광역시가 ‘정율성’이란 인물에 얼마나 의존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해당 보고서 연구진은 정율성 관련 시설이 있는 광주광역시 동구 불로동(출생지), 남구 양림동(주 거주지), 전남 화순군(유년기 거주지) 일원에 ‘호남권 차이나 관광 벨트’를 구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광주와 전남에 분포한 한·중 우호 인물, 중국 관련 역사유적 등 친(親)중국 역사 문화 콘텐츠를 활용한 광역권 차이나 관광 벨트와 중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중국 친화적 관광 매력물 개발 및 대(對)중국 광주·전남 상생협력의 거점 공간 구축이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사업 기간은 2017~2021년(5년), 총사업비는 200억원(국비 100억원, 지방비 100억원)이다. 사업의 기대효과로는 ▲정율성으로 대표되는 광주의 긍정적이고 호의적인 중국인 친화 관광 이미지 형성 기대 ▲친중국 역사 문화 콘텐츠를 활용한 ‘펑유(朋友·친구) 마케팅’ 등 대중국 관광 마케팅 플랫폼 성장 기대 등을 제시했다.
또한 “정율성을 대중국 프로모션의 핵심적 가교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율성 생가 복원·관련 시설 정비 ▲한·중 우호교류 기념관 조성 ▲정율성 스토리텔링 개발 등을 제안했다. 이어서 ‘독립운동가·천재 음악가 정율성’의 삶과 연애사를 관광 홍보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대한민국 헌법 정신’과 ‘정율성 추앙’은 ‘상충’
이 같은 광주의 ‘정율성 사랑’은 대한민국 헌법 정신과 들어맞지 않는다. 헌법이 규정한 대한민국의 정체성인 ‘자유민주주의’와 ▲영광은 스탈린에게(1950) ▲모(毛) 주석께서 우리를 인도하다(1959) ▲모 주석의 장엄한 성명은 방향을 가리킨다(1970) 등 대규모 학살과 정치적 숙청을 거리낌 없이 저지른 공산 독재자를 찬양한 정율성은 어울리지 않는다.
한반도에서 정통성과 합법성을 가진 유일한 국가인 ‘대한민국’의 영토를 참절하고, 정부를 참칭하고, 동족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 적화를 시도한 공산 세력에 부역한 정율성을 대한민국 또는 그 산하 지방자치단체가 세금으로 기리는 것은 ‘자폭(自爆)’ ‘자해(自害)’와 같은 비상식적 행태라고 할 수 있다. 그저 중국 관광객을 많이 끌어들여서 돈 좀 만질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우리 국가 공동체에 무슨 짓을 했든지 상관 않고 관광자원으로 내세워도 된다는 발상은 ‘황금만능주의’ ‘배금주의(拜金主義)’의 전형이다.
더구나 ‘민주·평화·인권의 도시’를 자처하는 광주광역시가 ‘관광 수입 증대’를 제일 목적으로 정율성이란 자를 추앙한다면, 이는 ‘자기부정(自己否定)’ 아니냐는 비판을 피하기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