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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의 북한요지경

《일본에서 북한으로 간 사람들의 이야기》 쓴 가와사키 에이코

글 : 장원재  장원재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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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송 재일동포가 겪은 북한의 모습을 그린 실화소설
⊙ 고3 때 사회주의 통일의 역군이 되려 홀로 北送 선택
⊙ 환영객, 일본어로 “조선학교 학생들은 단 한 명도 내리지 마라. 다시 그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가라”고 외쳐
⊙ 탈북 후 북한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 제기… 국제형사재판소에 김정은과 조총련의 허종만 제소
북송 재일교포 출신 탈북자 가와사키 에이코(왼쪽) 씨는 2004년 일본에 재정착한 이후 도쿄 도심 조총련 본부 앞에서 자신의 수기를 들어 보이며 조총련의 사죄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여왔다. 사진=조선DB
  1944년 말 200만명 넘게 헤아리던 재일(在日) 조선인들은 1945년 해방 이후 대다수가 귀국했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일본에 남은 인원은 약 60만명. 북한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일본은 그들이 잠재적인 그리고 중대한 사회불안 요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둘 사이의 협잡으로, 1959년부터 1984년까지 9만3340명이 북한으로 갔다. 일본에서 차별에 시달리던 그들은, 조총련(朝總聯)과 일본의 선전을 믿고 평등한 세상과 지상낙원을 그리며 북송선(北送船)에 올랐다. 꿈에 부풀어 떠난 길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도착 첫날부터 ‘속았다’는 말이 속출했다. 상식이 통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먹고 입을 것이 절대 부족했다. 그들은 노예였다. 노예들은 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었다. 미쳐버린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진영이 소리 높여 찬양한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민족 대이동!’의 민낯이다.
 
 
  《일본에서 북한으로 간 사람들의 이야기》
 
가와사키 에이코 씨의 실화 소설 《일본에서 북한으로 간 사람들의 이야기》.
  지난 7월 30일 출간한 《일본에서 북한으로 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노예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비참한 생애를 노예였던 누군가가 기록한 실화 소설이다. 2007년 일본에서 나온 책(《日本から北に帰った人の物語》(新幹社))을 읽은 실향민 곽철(郭鐵) 캘리포니아주(州) 변호사가 제작비를 부담했다. 출판 실무는 김덕영 감독이 진행했다. 북한에서 유럽으로 보내진 전쟁고아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김일성의 아이들〉(2020)을 만든 바로 그 사람이다. 두 사람은 2021년 말 개최 예정인 리버티국제영화제 발기인과 집행위원장이기도 하다. 번역은 리소라씨가 담당했다.
 
  저자 가와사키 에이코(川崎榮子)는 1942년 교토(京都)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다. 고3 때인 1960년 홀로 북한으로 갔고, 43년 동안 북한에서 살다 2003년 탈북해 2004년 일본에 정착했다. 일본 이름을 쓰고 일본 국적을 취득한 이유는 여럿이다.
 
  첫째, 북송사업으로 귀국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일본 내에서 일본 국민으로 활동해야 일본 정부가 더욱 관심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북송 인원 중에는 6838명의 일본인 처(妻)와 자녀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사업의 일본 측 주체는 일본 적십자사다. 일본과 북한 사이의 국교(國交)가 없어 일본 적십자가 사실상 일본 정부의 역할을 대리한 것이다.
 
  설령 사업 초기에는 비인도적 사업이라는 것을 몰랐다 해도, 이후에는 사정이 다르다. 1980년대 이후에는 일본과 북한의 왕래가 가능했다. 일본 정부가 26년 동안 벌어진 북송사업의 실상을 모를 리 없다는 뜻이다. 대학살(大虐殺)에 버금가는 비극의 책임이 전적으로 북한에 있다는 점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일본 정부에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 ‘사후(事後) 대책’을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출국한 이들의 인권문제는 자기들 소관이 아니라며 시종일관 모르쇠로 일관했다. 무엇보다도 북송사업의 적극적 실행자의 한 축이라는 점에서 적어도 이 문제를 방관 혹은 방조했다는 책임이 있는 것이다.
 
  둘째, 안전문제다. 만에 하나 일본 국민의 안전에 문제가 생긴다면 일본 정부도 전면(前面)에 나서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일본에는 조총련의 근거지가 있고, 북한을 추종하는 과격집단이 살고 있다. 일본인을 일본에서 북한으로 납치하는 집단이 북한이다. 100% 신변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가와사키 에이코 선생은 자신을 일종의 인계철선(引繼鐵線·tripwire)으로 활용하고 있는 셈인지도 모른다.
 
  셋째는 개인사(個人史)에 얽힌 감정적인 이유다. 43년 북한 생활 내내 사용했던 본명에 진저리가 나기 때문이다. 이름을 들으면 기억이 따라온다. 바꿀수 없는 몸서리쳐지는 과거사에 일상에서 시시때때로 분노가 치민다면 생존에도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좀 지나면 이런 것도 먹지 못해요”
 
1959년 12월 14일 일본 니가타항에서 첫 북송선이 북한으로 떠났다. 환호와 환희 속에 북송선을 탄 재일교포들은 48시간 후 청진항에 도착하자마자 절망에 빠졌다. 사진=《마이니치신문》 제공
  책의 서두는 떠들썩한 항구 풍경이다. 조총련 계열 조선학교 취주악단이 쉼 없이 쿵작거리며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연주하고 부두와 사람들 사이에 형형색색의 테이프가 드리워져 있다. 사람들은, 가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이나 들뜬 분위기다. 소설 속 고3 승객 ‘경희’는 아마 가와사키 에이코 자신일 것이다. 부모 모두 남쪽 출신이라 북으로 갈 이유가 없었지만,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한행을 신청했다. 집안 형편이 어렵기도 했지만, 통일의 역군이 되고 싶었기에 결행한 일이다.
 
  4·19가 발생하자 조총련은 “이승만이 무너졌으니 남조선은 곧 붕괴될 것”이라며 “청년 인재들이 북에 가서 사회주의 통일을 미리 준비하자”고 했다.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만류했지만, 소녀는 소신에 따라 배에 올랐다. 사회주의를 배우기는 했지만 겪어보지 않았기에 직접 체험해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조총련은 “2년 후에는 자유 왕래와 일본 방문이 가능할 것”이라고 선전했다. 가와사키 에이코 혹은 경희가 큰 부담 없이 북송선을 탄 이유다.
 
  승객 모두가 ‘속았다’는 걸 안 것은 배가 청진항에 도착한 바로 그 순간이다. 도시 전체가 새카맸고, 환영 나온 사람들의 얼굴도 말이 아니었다. 씻지 못했고, 영양부족의 흔적이 역력했다. 환영객 중에는 “조선학교 학생들은 단 한 명도 내리지 마라. 다시 그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가라”며 일본어로 외치는 선배도 보였다. 북한 군인들이 못 알아듣도록 암호처럼 말을 건넨 것이다.
 
  하지만 선내(船內) 체류는 불가능했다. 북송 교포가 “내리지 않겠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어디론가 끌려갔다. 함흥초대소에서 나눠준 ‘귀국 후 첫 도시락’은 ‘사료’로도 쓸 수 없는 수준이었다. 모두가 버린 밥을 누군가가 보자기에 챙겨 담았다. 한 달쯤 먼저 도착한 하급생이었다. 거지처럼 구는 모습이 괘씸하고 전신(全身)의 피가 거꾸로 흐를 만큼 기가 막혔지만, “좀 지나면 이런 것도 먹지 못해요”라는 하급생의 혼잣말을 이해하게 된 건 바로 며칠 후다. 누군가가 항의와 분노의 표시로 벽에 걸린 김일성 보천보 전투 그림을 짓밟았다. 바로 어딘가로 끌려간 그의 얼굴을 다시 본 사람은 없었다.
 
  경희는 살아남기 위해 평생을 말조심하며 살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래도 일본으로 편지는 쓸 수 있었다. 1년 후 출발하려던 고향의 가족들에게 ‘서두르지 마시고, 막내가 다 자란 뒤 천천히 오시라’는 편지를 거듭 발송한 가와사키 에이코의 실화가 겹친다. 가족들은 계속 같은 이야기만 써서 보내는 큰딸의 속마음을 알아듣고 일본에 남았다.
 
 
  간식 대신 골탄
 
  책에는 모두 여덟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가와사키 에이코 여사가 전하는 재일교포 귀국자들 삶의 기록이다. 처음부터 탄광이나 산간벽지로 배치되든 대도시에서 편하게 일하든 결론은 같다. 누군가가 재일교포들을 연행하고, ‘간첩이 아니냐’며 일본 내에서의 행적을 캐묻는다. 가족들은 사라진 이들의 행방을 모른다.
 
  사방 70~80cm의 시멘트 독감방에서는 사람이 앉을 수도 설 수도 없다. 징그러운 벌레들의 습격과 취조를 빙자한 무자비한 폭력은 그곳의 다반사(茶飯事)다.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던 사람은 북한 독재자에게는 그 존재 자체가 ‘위험인자(危險因子)’인지도 모른다. 북으로 귀환한 인민군 포로들조차 ‘자본주의 경험’을 했다며 거의 다 숙청한 북한이 아닌가.
 
  그래서 본토박이라면 웃고 넘어갈 일도 귀국동포에게는 적용 기준이 다르다. 사소한 불평불만조차 국가반역죄로 간주해 처벌하는 것이다. 의견을 내거나 생각을 말하는 것도 금지다. 사회주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말 한 마디로 잡혀가는가. 누가 그들의 말과 행동을 보고 듣고 일일이 기록하는가.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배경이 있다. 귀국동포들은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감시 대상이다. 과수원 낙과(落果)를 주워도, 가지에 달린 과일을 몰래 따갔다며 누군가가 밀고(密告)하는 정도다. 밀고자에게는 포상이 따른다. 그래서 모두 열심이다. 이웃 사람 모두가 24시간 눈에 불을 켜고 나의 삶을 감시하는 삶. 재일교포들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간 배경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속았다’는 탄식이나 취중에 부른 일본 노래 한 소절이다.
 
  간식이 먹고 싶은 아이들이 골탄(석탄과 진흙을 이긴 것)을 껌 삼아 씹고(실제로 단맛이 난다고 한다), 강냉이 낱알을 하나하나 헤아리며 먹는 곳이 북한이다. 무엇보다도 인명을 경시하기에 안전사고가 잦다. 교통사고, 폭발사고, 건축현장 동원 중 추락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다 인재(人災)다. 하지만 누구 하나 책임지는 법이 없고, 보상이나 사과도 기대난망(期待難望)이다.
 
  안전사고만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해치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무법천지(無法天地)가 바로 북한이다. 한 가족의 생명이 걸린 화물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열차 승무원과 승객들은 다른 이들의 물품을 거리낌 없이 훔치고 빼돌린다. 내가 먼저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굶주림 앞에선 체면이나 염치가 들어설 틈이 없다.
 
 
  자살자 가족은 수용소로 끌려가
 
  열차 여행은 편안한 레저가 아니다. 과장 보태지 않고, 그야말로 목숨을 건 행동이다. 모두가 악에 받쳐 있는 상황이라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한 번 떠나면 언제 다음 열차가 올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래서 무조건 승차다. 좌석이든 복도든 화장실이든 예외 없이 모든 공간이 사람으로 꽉 찼기에, 때로는 업은 아기가 압사(壓死)할 때도 있다. 용변은 창문을 열고 해결해야 한다. 화장실 칸까지 갈 수도 없고, 화장실 안에도 이미 뇌물을 고인 누군가가 짐을 가득 실어놓았기 때문이다. 전기가 끊어지면 며칠씩 열차가 멈춰서는 일도 부지기수다. 냉난방은 물론 사치다. 다 알아서 각자가 해결해야 한다.
 
  골짜기를 가로지른 난간 없는 다리 위에 열차는 한없이 멈춰 있는데, 한 여학생이 잠결에 평지로 착각해 바닥에서 일 보고 온다고 점프했다가 산골짜기 밑으로 추락사한 일도 있다. 기차는 여전히 멈춰 있고, 한참 아래로 굴러 떨어진 여학생은 아직 숨이 붙어 있는데 아무도 구하러 가지 않는다. 갈 수도 없지만, 구해온 다음 일도 난감하기 때문이다.
 
  30년 만에 만난, 일본에서 고향방문단으로 건너온 친구가 건넨 3만 엔은 생명의 동아줄이었다. 장사 밑천으로 활용하면 수십 년 가난을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3만 엔은 지역의 당 간부에게도 큰돈이었다. 더 위에서 알기 전에 각종 구실을 붙여 물건을 몰수하고, 온전히 자기 주머니로 집어넣었다. 돈을 뺏긴 재일교포가 죽어도 양심의 가책은 없다. 다만 위에서 추궁해 비위 사실이 드러나고, 지방으로 추방되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자살도 할 수 없다. 자살하는 것 자체가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비방이자 배신이기 때문이다. 자살자의 가족은 그날로 수용소로 끌려간다. 그래서 가족들의 안전을 염려한 한 일본인 처는 이렇게 유서를 남겼다.
 
  “나는 절대로 이 나라의 제도나 정치에 불만이 있어서 죽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어머니로서 자식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실격자이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김정은을 국제형사재판소에 제소

 
  가와사키 에이코 여사는 북한에서 결혼해 1남4녀를 낳았다. 결혼하지 않으면 간첩이라고 의심받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사망했고, 후에 탈북한 딸 하나를 제외한 가족들은 아직도 북한에 남아 있다. 국제 인권단체가 관심을 가진 사안이라 수용소로 추방되지는 않았지만, 보위부가 그의 가족을 집중 감시 중이라는 전언(傳言)이 있다. 의약품 등을 보내고 싶어도 연락이 닿지 않는 것을 보면 이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브로커나 다른 탈북자들도 이러한 점을 모르지 않기에 물품전달 부탁을 할 수도 없다. 소설 속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지만, 가족 이외에 친구나 친지 등도 남아 있어 소설 속 등장인물의 이름과 고향 등을 살짝 바꾸었다. 11월에는 영문판도 출간할 계획이다.
 
  재일교포 역사학자이자 시민운동가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양태호(梁泰昊·1946~98) 선생을 ‘양태황’으로 표기한 것은 아쉬운 오타다. 그렇다고 이 책의 가치가 빛바래는 건 아니다. 북한의 속살을 보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진실을 알고 싶다면 일독을 권한다. 소생, 읽는 내내 둔중한 기운이 가슴을 짓눌렀다.
 
  가와사키 에이코 여사는 부모님과 상봉했다. 27년 만이었다. 독단으로 오게 된 북한이라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지만, 부모님이 1986년 북한을 방문했다. 부모님 허리는 곧은데 본인의 허리가 휘어 있어 민망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딸의 모습을 보고 분노했다. 북한 그리고 조총련과 발을 끊었다. 어머니는 모두 네 번 북한에 오셨다.
 
  탈북 후 중국에서 지내며 일본 귀국을 확정할 무렵, 아버지는 병상에 누워 계셨다. ‘내가 갈 때까지만 버텨주시라’는 바람이 통했는지, 아버지의 임종(臨終)을 지킬 수 있었다. 2004년 귀국 후 나흘 만의 영면(永眠)이었다.
 
  가와사키 에이코 여사는 현재 NGO 단체 ‘모두 모이자’, 사단법인 ‘AKU JAPAN’을 이끌며 북송문제 해결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북한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을 도쿄지방재판소에 제기하고,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에 김정은과 조총련의 허종만을 제소한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승소(勝訴)하면 일본 내 조총련 자산에 대한 압류를 시도할 계획이다.
 
 
  〈피와 뼈〉 〈트루 노스〉
 
북송 재일교포 문제를 다룬 시미즈 한 에이지 감독의 애니메이션 〈트루 노스〉. 사진=유튜브 캡처
  이 책과 더불어, 재일교포 북송문제에 대해 두 편의 영상도 함께 추천한다. 하나는 양석일(梁石日·85)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최양일(崔洋一·62) 감독의 〈피와 뼈(血と骨)〉(2004년)다. 두 사람은 재일교포 2세다. 두 번째는 제44회 프랑스 안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나온 시미즈 한 에이지(淸水ハン榮治·50) 감독의 〈트루 노스(True North)〉(2020년)다.
 
  양석일 작가는 택시 운전을 하며 발표한 소설 〈달은 어디에 떠있는가〉가 유명하다. 이 소설 역시 최양일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양 작가의 아버지와 두 여동생은 북송선을 탔고, 그 후 부친은 곧 사망하지만 남은 가족이 아직 북한에 있다고 한다. 1998년에 발표한 〈피와 뼈〉는 작가의 유년 시절 기억이 담긴 자전 소설이다. 최양일 감독이 각색도 맡았는데, 주연 배우로는 일본의 국민배우 기타노 타케시(北野 武)가 출연했다. 최양일 감독과의 친분이 작용한 결과다.
 
  ‘애니메이션이라면 전 세계 사람들이 즐길 수 있다. 북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심을 가져주기 바란다’고 제작 의도를 밝힌 시미즈 한 감독은 재일 한국인 4세다. 인권침해가 심각한 북한의 실정을 알리고 싶다는 사명감에 탈북자 증언을 수집하며 10년에 걸쳐 〈트루 노스(True North)〉를 제작했다.
 
  이 애니메이션의 소재가 《일본에서 북한으로 간 사람들의 이야기》와 겹친다. ‘1960년대 북송사업에 참여해 북한으로 건너간 후 간첩 혐의를 받아 가혹한 수용소 생활을 겪는 한 가족을 주인공으로 하는 픽션’이다. 본인의 가족 중에는 없지만, 그의 어머니에게는 ‘북송사업’으로 북한으로 건너간 뒤 소식이 끊긴 친구가 여럿 있다고 한다. 그것이 작품을 만든 동기였다고 한다.
 
  재일교포 북송은 가와사키 에이코, 양석일, 최양일, 시미즈 한 감독을 넘어서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관련된 문제인지도 모른다. 인류 전체에 대한 도발이며 인권유린이기 때문이다. 심각한 인권침해는 현재진행형이며 해결의 기미도 보이지 않지만,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것도 인권운동일 수 있다. 진실을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거짓과 폭력의 힘은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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