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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세 차례의 癌 이겨낸 윤영탁 前 국회의원

정기검진, 의사 처방 새겨듣고, 마음 비워야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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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전립선암, 2015년 위암, 2018년 혈액암 판정… 모두 극복
⊙ “마음 비워야… 돈이나 땅도 결국 내 것이 아닌 것”
⊙ “10·26 일으킨 김재규는 고교 은사, 박선호는 고교 동기”
⊙ “요즘 나라 걱정 많아. 정치권이 사실상 內戰 상태”

尹榮卓
193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건국대 명예 행정학 박사 / 12·14·16대 국회의원, 국회 교육위원회 위원장, 서울지방국토관리청장, 건설부 국토이용관리국 국장 역임
윤영탁 전 의원과 아내 권춘자씨.
  3선 국회의원인 윤영탁(尹榮卓·88) 전 의원은 정계를 떠난 지 15년이 됐다. 16대 국회를 끝으로 삶의 ‘저녁기도 시간’에 들어간 셈이다.
 
  ‘인생은 앞을 내다보며 살아야 하지만, 그 인생을 이해하려면 뒤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말처럼 그는 요즘 살아온 흔적들을 되돌아보는 일이 많단다.
 
  기자는 우연히 윤 전 의원이 세 차례의 서로 다른 암을 이겨냈고, 지금은 암세포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 연희동에서 그를 만난 것은 구랍 12월 5일 오후. 집수리 탓에 부득이 근처 커피숍에서 아내인 권춘자(權春子·86)씨, 장남 종근(鍾根·62)씨와 함께 만났다.
 
 
  “철저하게 의사 신뢰해야”
 
  ― 암을 극복한 비결은 무엇인가요.
 
  윤 전 의원은 “의사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것”이라고 했고 아내 권씨는 “조기 발견이 아닐까요?”라고 했다. 윤 전 의원의 말이다.
 
  “옛말에 ‘일병장수’라는 말이 있잖아요. 내가 50년간 지병이 있었거든. 당뇨병. 그것 때문에 조심하며 살았어요. 담배는 30대 때 딱 끊었고요. 아직 머리가 안 세었어요.”
 
  머리를 보니 새치처럼 듬성듬성 흰머리가 보일 뿐 백발이 아니었다.
 
  보통 노년기에 성미가 나빠지기 쉽다. 욱신거림과 통증, 약물 부작용, 둔하고 느린 움직임으로 짜증이 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정기적인 건강검진이 중요해요. 또 철저하게 의사를 신뢰해야 합니다. 노년이라는 이유로 정박한 채로 시간을 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2003년 9월(71세)에 서울대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다가 전립선암 판정을 받았다. 2009년 5월(77세)에는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심혈관 확장 스텐트 수술을 받고 이후 2년마다 예후를 체크하고 있다.
 
  2015년 4월(83세) 어지럼증을 호소, 다시 응급실을 찾았다. 위궤양으로 인한 과다출혈로 응급처치가 필요했다. 추후 정밀검사 결과, 위암이 확인되어 암 제거 수술을 받았다. 매년 예후를 관찰 중인데 병원으로부터 완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조기 발견이 중요해. 매번 건강검진을 받다가, 혹은 몸의 이상 징후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암을 발견했으니까. 아프면 미련 부리지 말고 빨리 병원에 가야 해요.”
 
 
  “아들이 힘들었지”
 
2018년 1월 3일 윤영탁·권춘자씨의 회혼식 모습. 뒷줄은 2남2녀 자녀들. 왼쪽부터 창근·종근·계훈·경훈씨.
  2018년 11월(86세) 심근경색의 예후를 확인하던 중 혈액에 이상이 있다는 소견을 듣고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를 찾았다. 그리고 암센터로 안내를 받았다. 혈액암(골수종)이었다. 세 번째 찾아온 암이었다.
 
  “나이 때문에 수술은 못 하고 약물치료를 받을 수밖에 없었어요. 보통 3주 치료를 받고 3주 쉬고… 다음 검사를 받고 결과를 본 뒤 다시 투약하고 3주 쉬고…. 이런 식으로 치료가 진행됐는데 병원 측에서 ‘이제는 약을 끊자’고 했어요.”
 
  곁에 있는 장남 종근씨가 말을 받았다.
 
  “세 번째 암 판정을 받기 전인 그해 여름, 정말 걱정이 많았어요. 아버지 안색이 안 좋으셨고 식사도 못 하셨어요. 밥도 물에 말아 한술 드시는 정도셨어요. 돌이켜보면 그때 (암이) 발병이 됐던 겁니다.
 
  그런데 놀라워요. 아버지가 암 판정을 받으시니까 사람이 변해요. 전투욕이 살아난다고 할까. 그때부터 식사를 잘하셨어요. 그 힘든 병마와 싸우기 위해 다시 일어선 것이죠.”
 
  ― 안 힘드셨어요?
 
  기자의 질문에 윤 전 의원은 이렇게 답했다.
 
  “아들이 힘들었지. 미리 병원에 예약해놓고 데려가고 온다고…. 입원비 대주고 하니까.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아무리 옛날에 잘해도 지금 못하면 섭섭한데 그렇지 않거든요.”
 
  장남 종근씨는 미소를 띠며 말없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내 권씨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 의원님은 뭘 좋아하세요.
 
  “기름기 있는 것은 잘 안 잡숫고 야채 같은 것을 좋아하세요.”
 
윤영탁 전 의원이 말하는 건강비결
 
  가족력 관찰, 부부가 함께 나누기, 마음 비우기
 
  윤영탁 전 의원의 선친(先親)과 형은 암으로 사망했다. 암과 관련한 가족력이 있는 셈이다. 그러니 자연 건강에 신경이 쓰였다.
 
  “고향(경북 경산) 향교(鄕校)에서 전교(典敎)를 지낸 선친께서 모든 면에서 늘 중용을 지키며 남달리 건강하셨던 터라 당연히 오래 사실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폐암을 말기에 발견해 돌아가셨어요. 너무 안타까웠어요.”
 
  윤 전 의원 부부는 늘 함께 다닌다. “서로가 보호자”라고 말한다.
 
  남자끼리의 약속이 있으면 아내 권씨는 근처 성당이나 커피숍에서 기다리다 같이 귀가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윤 전 의원은 또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20여 년 전 자산 규모 100억원대의 회사를 전문경영인에게 맡겼다가 한 푼도 못 건지고 날린 적이 있다. 그 경영인을 상대로 10년간 민사재판을 벌였으나, “모든 사항을 믿고 맡긴 것”이 발목을 잡아 패소하고 말았다. 가족과 지인들이 그를 걱정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건설부에서 경주개발소장을 할 때 느낀 게 하나 있어요. 신라시대 왕릉을 발굴하면 수많은 부장품이 나오는데, 정작 죽은 당사자는 아무것도 못 가져갑니다. 돈이나 땅도 잠시 내게 머무를 수는 있어도 결국 내 것이 아닌 거지요. 그런 생각을 하며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어요.”
 
 
“요즘 잔소리를 했다가는 굶어요”

 
  ― 사모님은 건강하세요?
 
  “경상도 남자의 잔소리를 먹고 사니까 건강해요. 하하하.”
 
  그러더니 조금 있다가 이런 말을 덧붙였다.
 
  “딸이 둘인데 ‘절대 경상도 남자하고 결혼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하나는 호주, 하나는 미국에 이민 가서 살더라고요. 하하하.”
 
  윤 전 의원이 웃으며 말했다.
 
  “요즘 잔소리를 했다가는 굶어요. 이 사람은 나한테 간호사야. 나는 아내의 보호자고요. 우리 거의 같이 다녀요. 서로 부족한 부분을 메워요.”
 
  ― 사모님은 부족한 점이 없는 것 같은데요.
 
  “왜… 가끔 깜빡깜빡해요. 하하하.”
 
 
  17대 총선 앞두고 가장 먼저 정계은퇴
 
1995년 10월 21일 열린 민자당 대구 수성을 지구당 임시대회에서 윤영탁(오른쪽에서 두 번째) 의원이 선출되자 김윤환(왼쪽에서 두 번째) 대표가 손을 들어 환호하고 있다.
  기자는 윤 전 의원을 안 지가 넉넉하게 잡아 20년쯤 된다. 그가 정계은퇴 할 때가 생각난다. 그러니까 17대 총선을 앞둔 2003년 11월. 한나라당 의원 중 가장 먼저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나이가 71세였다.
 
  지역구는 ‘한나라당 깃발만 꽂으면 당선된다’는 대구 수성을. 현재 주호영 의원이 윤 전 의원의 지역구를 승계, 4선을 이어오고 있다.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두 달 후 그는 건국대에서 명예 행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5년간(3선+국회 사무총장 3년)의 정치 이력을 정리하는 선물을 받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명박’을 받으며 그는 인생 칠십을 ‘종심(從心)’이라 표현한 《논어》의 위정편(爲政篇)을 얘기했다. 종심이란, ‘일흔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는다’는 뜻. 그때 이런 말을 했었다. (기자는 당시 ‘명박’에 대해 기사를 썼는데, 옛 기사를 찾아보니 이렇게 써 있었다.)
 
  〈종심의 경지에는 턱없이 모자라지만 늘 배움에 목말라하며 열심히 살아왔죠. 소년 학도병으로 6·25에 참전한 뒤 스무 살이 넘어 고교를 졸업한 늦깎이 만학도였어요. 또 서해-남해-동해를 연결하는 ‘U자형 국토개발계획’의 원형이 바로 내가 창안한 대구·포항 간 광역권 개발 계획이었고, 그런 생존전략을 만든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당시 윤 전 의원은 자신의 불출마 배경을 ‘시대정신’이라 표현하면서도 한마디 사족(蛇足)을 붙였다.
 
  “현실의 모태가 되는 과거를 모조리 잘못된 것으로 치부하고, 연륜과 경륜을 배척의 대상으로 매도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나이 많은 중진은 천덕꾸러기”

 
국회 사무총장(1996~1998년) 시절의 윤영탁.
  기자는 12년 전 불출마를 상기시키며 그에게 정계를 떠난 이유를 다시 물어보았다.
 
  “16대 국회 때, 박정희 대통령 시절 육군보안사령관을 지낸 강창성(姜昌成·1927~2006) 의원이 한나라당에 있었어요. 저보다 5년 선배셨는데 10·26을 일으킨 김재규(金載圭·1926~1980)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10·26 이후) 잘려서 야당에서 정치를 시작했죠. 돌고 돌다가 한나라당으로 왔어요. 그때 그분이 당에서 제일 연장자인데, 남경필 같은 젊은 의원들이 강 의원을 밀어내려고 할 때였어요.
 
  이회창(李會昌) 총재도 자기 곁에 젊은 사람을 두려고 했어요. 그래서 강창선, 서정화(徐廷和), 나오연(羅午淵), 김용환(金龍渙·1932~2017) 같은 분들이 (한나라당에서) 쓸려나갔던 겁니다. 나는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선 ‘저런 천대를 받을 바에야 정치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죠.
 
  나이 많은 중진은 천덕꾸러기야, 완전히….”
 
  ― 참, 10·26을 일으킨 김재규와 인연이 있다고 들었어요.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하고 육사 2기 동기잖아요. 미군 고문단하고 싸워서 일찍 퇴역해 교사로 안동농림에 있다가 김천중을 거쳐 대륜고에 있었어요. 내 고교 시절 은사야.
 
  내가 (입법고시 1기로) 국회사무처 총무과장으로 일할 때인데, 김재규가 국회의원 당선증을 받으러 왔어요. 9대 국회 시절이니까 1973년 무렵이지요. 그때 박선호와 같이 왔는데, 선호는 나와 고교 동기입니다.”
 
  여기서 잠깐, 박선호(朴善浩· 1934~1980)에 대해 부연 설명하면 이렇다. 박선호는 김재규와 1946년 김천중학교에서 사제(師弟) 간으로 만났다. 6·25전쟁 직후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했고, 해병 대령으로 1974년 예편한 뒤 스승인 김재규의 추천으로 중앙정보부(중정)에 들어갔다. 10·26 당시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으로 있다가 김재규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하여 사형당했다.
 
  계속된 윤 전 의원의 말이다.
 
  “그때 박선호가 나를 김재규에게 소개한 거지. 그 후로 (김재규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어요. 그러다 1974년 육영수 여사가 시해를 당하자 (김재규가) 중정 차장으로 가게 됐고, 얼마 후 건설부 장관이 되었습니다.
 
  당시 나는 국회 운영위원회 행정실장(부이사관)으로 있을 때였는데, 김재규가 ‘건설부로 같이 가자’는 겁니다. 처음에는 안 간다고 했지요. 건설부엔 엔지니어만 있지 나 같은 행정직은 없을 것 같았거든. 그리고 직급도 안 맞았고.
 
  김재규 장관은 ‘내가 자네를 데려가는데 손해 보게 하겠느냐’고 그랬어요.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해서 주위에 물어보니 다들 ‘천하의 김재규인데 가라’는 겁니다. 그래서 따라갔어요.”
 
 
  炎凉世態
 
  김재규는 얼마 후 다시 중정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중정 부장으로. 이번에도 그에게 ‘중정에 가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따라가지 않았다. 윤 전 의원의 말이다.
 
  “한번은 박통(박정희), JP(김종필)와 혁명동지였던 김용태(金龍泰·1926~2005)가 내게 ‘자네가 가서 김 부장(김재규)을 도와야지’ 그래요. (내가) ‘안 갑니다’라고 하니까, 그분이 이렇게 말해요. ‘하기야, 권력 좋아하는 놈치고 인간 제대로 된 놈 없지…’라고.”
 
  윤 전 의원은 10·26 직후도 회고했다. 염량세태(炎凉世態)랄까. 10월 26일은 금요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날은 이튿날 아침. 27일 새벽부터 그의 집 전화기가 쉴 새 없이 울렸다.
 
  “박통이 돌아가셨으니 권력 2인자인 김재규의 세상이 왔다고 생각한 거지. 내가 김재규와 가까우니까 잘 보이려고 안부 전화를 한 거지. 그런데 오후 3~4시쯤 되니까 그렇게 울리던 전화가 딱 끊겨. 바로 그 시각, 김재규가 체포된 겁니다. 세상이 그렇더라고.”
 
  ― 10·26은 어떻게 일어났다고 보세요.
 
  “내가 볼 때 100% 김재규의 성격 탓에 일어난 돌발사건이야. 국가관이 투철하고… 절대 그럴 분이 아닌데…. 평소 성격이 무척 급했거든.”
 
  윤 전 의원은 건설부 국토이용관리국장, 서울지방국토관리청장을 끝으로 공직을 떠났다.
 
  “10·26이 났는데 건설부 장관이 나한테 사표 받겠다는 말을 못 해. 그래서 ‘내가 알던 사람이 역적(逆賊)인데 알아서 나갈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라고 했어.
 
  1년간 발이 묶였어요. 동료들이 ‘그냥 있으면 안 된다’고 대우그룹에 날 소개해서 해외담당총괄본부장으로 발령이 났어요. 조간신문을 보고야 인사가 난 걸 알았으니까…. 대우그룹에서 3년 반 동안 있다가 도저히 못 하겠어. 피해 간 곳이 정치야. 정치를 그렇게 시작한 겁니다.”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윤영탁 전 의원은 6·25 전쟁에 소년병으로 참전했다. 참전 기념 메달.
  윤 전 의원은 12대와 14대, 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대구·경북(TK) 정치권에서는 보기 드물게 당선, 낙선, 당선, 낙선, 당선을 거듭한 오뚝이형 정치인이다. 통상 현역이 선거에 낙선하면 상실감에 폐인이 되기 마련인 정치판에서 희귀한 사례다. 장남 종근씨의 말이다.
 
  “정치판에 이런 말이 있어요.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정치인은 떨어지면(낙선하면) 사람이 아니다.’
 
  TK 3선이면 쉽게 당선됐을 것으로 오해하지만 아버지가 치른 다섯 번의 선거 중 16대 총선만 쉽게 당선됐을 뿐, 나머지 네 차례 선거는 글자 그대로 고군분투(孤軍奮鬪)였어요.”
 
  윤 전 의원은 12대 총선에선 야당인 신한민주당 간판으로 당선됐고 13대 총선 때는 통일민주당(당시 총재가 김영삼) 후보로 출마하여 낙선하고 말았다. 낙선자 중에는 전국 최다 득표(5만1000표)였다.
 
  14대 총선 때는 정주영(鄭周永·1915 ~2001)의 국민당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또 YS가 대통령이던 15대 총선 때 대구의 극심한 반(反)YS 정서를 무릅쓰고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2000표 차이로 다시 낙선하고 말았다. 그때 신한국당 간판으로 당선된 이는 강재섭·이상득 정도였다. 장남 종근씨의 계속된 말이다.
 
 
  “주말에 서울에서 골프 친 적 한 번도 없어”
 
  “15대 총선에서 반YS 정서를 무릅쓰고 대구에서 선전(善戰)한 것을 인정받아 국회 사무총장에 지명된 겁니다. 사무총장이 된 것도 사연이 있어요. 총선이 끝나고 청와대가 TK의 패인(敗因)을 분석하려고 당시 후보들이 선거 때 썼던 유세 자료를 가져갔다고 합니다. 유세 때 YS 개혁의 당위성을 이야기한 이가 윤영탁뿐이었다는 겁니다. 심지어 당시 YS의 직계라던 유성환(兪成煥·1931~2018) 의원조차 ‘점방이 시원찮아도 상품 보고 뽑자’고 말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점방이 바로 YS인 거죠.”
 
  ‘국회 사무총장 이후 다시 재기하기 어렵다’는 통설을 깨고 16대 총선 당시 한나라당 공천을 따내고 대구에서 80% 득표로 당선됐다. 윤 전 의원의 말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순리대로 최선을 다한다는 게 정치 소신입니다. 정치를 하며 금요일 오후면 무조건 지역구로 내려갔어요. 주말에 서울에서 골프 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게 두 번의 낙선에도 다시 재기할 수 있었던 비결이야.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 법이니까. 지역구 3개 성당(두산, 지산, 범물성당) 건립추진위원장을 맡아 가톨릭세가 강한 대구에서 인정받은 것도 큰 역할을 했어요.”
 
  그는 16대 국회 후반기 국회 교육위원장을 맡았었다.
 
  “16대 국회 후반기, 이회창 총재로부터 ‘노른자위’인 건설교통위원장을 지명받았으나, 일부 의원들이 항의하는 바람에 사양하고 말았어요. 비교적 한직인 교육위원장직을 자청했지요.
 
  그런데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교육위원장 때 피감기관인 서울대병원의 권유로 건강검진을 받았어요. 거기서 전립선암을 조기에 발견하는 행운을 누리게 됐어요. ‘조기’니까 수술이 아니라 ‘시술’을 받은 거지요. 이후 지속적인 관리 덕분에 위암, 혈액암도 완치할 수 있었어요.”
 
 
  “지금은 內戰 상황. 나라 걱정 많아”
 
얼마 전 어느 식당에서 찍은 윤영탁·권춘자씨 내외 사진. 두 사람은 서로의 보호자가 되어 어디든 함께 다닌다.
  ―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고교와 대학 동기 모임에 참석했는데 동기생 대부분이 세상을 등져 그 모임도 얼마 가지 못할 것 같아요.
 
  또 ‘12 동우회’(12대 국회의원 모임) 모임을 부부동반으로 해왔으나 회장인 김수한(金守漢·1926~) 전 국회의장이 거동을 못 하고 회원들 다수가 사망 또는 병석에 누워 올 초 모임을 해체했어요.
 
  ‘함덕회’ 모임은 요즘도 하고 있어요. 지난 2001년 제주도 함덕해수욕장에서 결성한 모임인데, 고인이 된 양정규(梁正圭·1933~2011) 전 의원과 하순봉(河舜鳳), 유흥수(柳興洙), 이해구(李海龜), 김종하(金鍾河), 신경식(辛卿植), 주진우(朱鎭旴) 전 의원 등이 회원입니다. 이회창 총재를 대선 후보로 옹립한 모임이죠. 지금까지 격월로 부부동반 모임을 하고 있어요. 같은 멤버였던 최돈웅(崔燉雄·1935~2018) 전 의원은 작고했어요.”
 
  윤 전 의원은 요즘 주말마다 광화문 집회에 나간다. 혼란한 정국 상황을 걱정하며 도저히 집에만 있을 수 없어서다.
 
  “내가 겪었던 70년 전 광복 직후의 좌우갈등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회한이 들곤 해요. 지금 우리나라 정치는 내전(內戰) 상황입니다. 집권당은 집권당대로, 여야는 여야끼리 내전이에요. 이런 나라가 어딨나요. 참다운 어른이 안 보이고 진짜 정치인이 없어 걱정이에요. 내 손자, 손녀를 생각해서 광화문에 나갑니다. 요즘 제일 걱정이 나라 걱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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