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줌업

‘영원한 현역’ 박종세(朴鍾世) 아나운서의 방송과 야구인생

“고향 장단땅 도까밭(묘목밭)에 지뢰와 잡초 제거하고 묘목 심는 게 꿈”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gomsi@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박정희 소장은 방송 시작 5분 전까지 5·16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 〈국방뉴스〉 30년간 방송… 해태 타이거즈로 옮겨서도 방송 놓지 않아
⊙ “아나운서 길 아니면 교육공무원으로 갔을 것… 지금도 방송에 늦어 진땀 흘리는 꿈 꿔”
  “5·16의 성패가 달려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아나운서를 겁박(劫迫)하지 않고 소학교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치듯 혁명의 당위성을 차근차근 설명한 박정희(朴正熙) 소장의 모습이 55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팔순을 넘긴 박종세(朴鍾世·81) 전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경쾌하고 쟁쟁했다. 목소리는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일까. 눈을 감고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1970년대 극장에서 흘러나오던 〈대한뉴스〉를 현장에서 듣는 느낌이었다.
 
  10월 27일 만난 박 전 회장은 “5·16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지 벌써 반세기가 지났다”면서 “내년 박 대통령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민족중흥의 기틀을 다진 그의 리더십을 다시 한 번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박종세 아나운서는 한국 아나운서 1세대다. 작년 3월 4일 임국희(林菊姬)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은 취임사에서 “이름만 들어도 그립고 아나운서의 무게가 느껴지며 두려운 이름들”을 열거했다. 고 장기범(張基範), 고 강찬선(康贊宣), 황우겸(黃祐謙), 임택근(任宅根), 박종세, 전영우(全英雨), 최만린(崔滿麟), 김동건(金東鍵) 아나운서다.
 
  ‘박종세 아나운서’ 하면 50대 중반 이상들은 ‘5·16혁명 방송을 한 아나운서’로, 40대 중반 이상은 고교 야구 중계나 〈대한뉴스〉를 떠올릴 것이다. 박종세 아나운서는 1956년 12월 서울중앙방송(KBS)에 입사해 동양방송(TBC) 아나운서실장, KBS 방송위원실 주간,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을 역임했다. 1981년 12월부터 1994년까지 해태 타이거즈 구단주를 거쳐 광고회사 코래드(KORAD) 대표이사·부회장, 아시아컴 회장을 지냈고 현재 문영학원(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이사장이다.
 
  1981년 말 해태 타이거즈 구단주로 옮기면서 방송을 떠나는 듯했으나 그는 방송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1966년 베트남전 시작부터 1996년 4월까지 30년간 〈국방뉴스〉를 방송했다.
 
 
  “박종세 아나운서 있습니까”
 
5·16 쿠데타 성공 후 서울 시청 정문에 선 장도영(왼쪽) 의장과 박정희 소장.
  1961년 5월 15일 입사 5년 차 박종세 주사는 숙직을 위해 남산 KBS방송국으로 출근했다. 초여름 불볕더위에서 몇 시간 동안 악을 쓰며 야구 중계를 했던 터라 온몸이 축 늘어졌다. 입술까지 터져 방송국 아래 약국에서 약을 사 먹고 아나운서실로 들어왔다.
 
  박종세와 같은 팀인 후배 송영규(宋泳圭) 아나운서는 저녁~밤 방송을 마치고 새벽 1시가 넘은 시각 숙직실로 올라와 곯아떨어졌다. 새벽 4시쯤 숙직실로 올라온 수위가 소리를 질러댔다. 옷을 걸치고 1층 현관에 나가보니 헌병 대위가 숙직 책임자인 박종세 아나운서를 찾아 “정체불명의 군인들이 김포 방면에서 서울을 향해 진격하고 있다. 북괴군 같기도 하고 반란군 같기도 한데, 그들이 서울에 들어오면 KBS를 접수하려 할 것이다. 헌병부대가 지키러 왔으니 별일은 없을 것이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고 하며 헌병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박종세 전 회장은 “그로부터 10분 후 방송국을 지키던 헌병들은 허둥지둥 트럭에 올라타더니 명동 쪽을 향해 도망치듯 내달렸다”며 “헌병들이 사라지고 채 5분도 안 돼 또 다른 군 트럭들이 남산 쪽에서 방송국으로 들이닥치더니 군인들이 단숨에 방송국 담을 뛰어넘어 일제히 총을 쏘아댔고 우리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정도로 겁에 질렸다”고 했다.
 
  삼태기 모양의 KBS 남산연주소(南山演奏所)는 한순간에 총성으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6·25전쟁 때 수색중대장(대위) 출신인 도상보 프로듀서가 “나를 따르라”며 뛰기 시작했다. 박종세는 그를 따라 1층 아나운서실을 지나 보도실 안쪽 텔레타이프실로 숨어들었다. 그런데 앞장섰던 도상보 PD가 더 안전한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창문을 훌쩍 뛰어넘어가다 “손들어” 하는 소리와 함께 군인들에게 붙들렸다.
 
  박종세 전 회장은 “언뜻 6·25전쟁 때 납치당한 윤영노, 전인국 등 선배 아나운서들의 이름이 떠올라 신분증, 출입증, 방송메모가 들어 있는 양복 상의를 말아 창문 밖으로 던졌다”고 했다. 그때 누군가 텔레타이프실을 똑똑 두드리며 “거기 박종세 아나운서 있습니까”라고 나지막한 소리로 불렀다.
 
  박종세 전 회장은 “순간 그 목소리는 위해감(危害感)이 느껴지지 않았고 정중하기까지 했다”며 “아무리 비상상황이어도 말을 전문으로 하는 아나운서가 그것을 구별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고 했다. 박종세는 “미안합니다”를 연발하며 일어섰다. 공수부대 복장의 고재일(高在一) 소령(국세청장 역임)이 박종세를 이끌었고 두 명의 대위가 그의 등을 기관단총으로 쿡쿡 찔러가며 어디론가 끌고 갔다.
 
 
  ‘대한민국 만세’ 문구 보고 ‘안도’
 
KBS 7호 스튜디오에서 방송 중인 박종세 아나운서. 이 방에서 5·16 첫 방송을 했다(왼쪽). 당시 박종세 아나운서가 낭독한 혁명공약(오른쪽).
  끌려간 곳은 보도실을 나와 2층 계단 앞이었다. 그곳에서 군모의 별 두 개가 유난히 선명한 군 장성을 만났다. 그는 “박종세 아나운서입니까? 나 박정희라고 하오”라며 악수를 청했다. 박종세 전 회장은 “아마도 내가 거사 당일 악수한 최초의 민간인일 것”이라며 “박정희 대통령과는 운명적 만남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박 장군은 차분한 목소리로 “지금 나라가 너무나 어지럽소. 학생들이 판문점에 가서 북한 학생들과 만나겠다고 하지를 않나 국회는 매일같이 싸움질만 하고,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소. 그래서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우리 군이 일어섰소. 오전 5시 정각에 이것을 방송해 줘야겠소” 하면서 전단(傳單) 한 장을 내밀었다.
 
  박종세는 직업적 본능으로 재빨리 전단을 받아 훑어보았다. 그것은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서…’로 시작되는 혁명공약(革命公約)이었다. 혁명공약은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로 마무리돼 있었다. 북한군이나 여순(14연대)반란 사건 같은 정체불명의 군부대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면서 박종세는 일단 가슴을 쓸어내렸다. 박종세 전 회장의 말이다.
 
  “혁명공약이 적힌 인쇄물을 내게 건넨 뒤로도 박정희 장군은 군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을 몇 마디 더 보태면서 나를 설득했는데 그런 그의 모습은 한강에서 총격전을 벌이며 사선을 뚫고 온 분답지 않게 차분하며 진지했고 말에는 조리가 있었습니다.
 
  그런 긴박함 속에, 위험에 처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사였을까, 박정희의 ‘박(朴)’자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종씨군요’ 하는 말을 목구멍에서 억지로 참았어요. 그러다 보니 떨리는 가슴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작은 여유도 생겼어요.”
 
  박종세는 용기를 내 “박 장군님이 직접 방송하시고 제가 소개 멘트를 해드리면 안 될까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박 장군은 “박 아나운서가 하시오!”라고 했다. 박종세 전 회장은 “그 목소리가 너무도 단호했던 것이 기억에 생생하다”며 “박 대통령의 칼칼한 성격이 그대로 묻어나왔다”고 했다.
 
  — 왜 혁명공약을 박정희 장군에게 읽으라고 했나요.
 
  “반사적으로 그렇게 말했어요. 내가 낭독하는 것보다 혁명의 주체가 직접 하는 것도 방법이잖습니까.”
 
 
  사라진 엔지니어 때문에 ‘십년감수’
 
  곧이어 박종세는 십년감수하는 일을 겪는다. 그때 시각이 오전 4시40분으로, 방송 시작 오전 5시까지 20분밖에 남아 있지 않았는데 엔지니어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박종세는 옆에 서 있던 이석제(李錫濟) 중령(총무처 장관·감사원장 역임)에게 “저 혼자서는 방송을 할 수 없습니다”라며 엔지니어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때부터 방송국 건물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방송국에 들어와 있던 혁명군들은 “엔지니어를 찾으라”는 긴급명령이 떨어지자 건물의 구석구석, 하다 못해 공개방송실 의자 밑까지 뒤지며 법석을 피웠다. 그러나 엔지니어는 방송국 내 어디에도 없었다. 그날의 담당 엔지니어인 한영식씨와 임시현씨는 박종세가 아래층에서 혁명군의 난입(亂入)으로 떨고 있을 때 2층의 주조종실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방송국 뒷담을 넘어 명동 쪽 주자동파출소로 피신했던 것이다.
 
  방송시각은 점점 다가오는데 기술담당 직원을 찾을 수 없게 되자 군인들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중 큰 키에 우락부락한 용모를 가진 군인 한 사람은 “아나운서 혼자 다 할 수 있는 것 아냐? 5시에 방송 안 나가면 당신 죽을 줄 알아!” 하면서 ‘철커덕’ 권총을 장전해 박종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박종세 전 회장은 “그가 옥창호(玉昌鎬) 중령인 줄로만 알았는데, 실은 한웅진(韓雄震) 준장(박정희 대통령과 조선경비사관학교 동기)이었다”고 했다. 한 준장은 그 큰 군홧발로 복도를 쾅쾅 울리며 윽박질렀고, 박종세는 현기증이 일어나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 현장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동창 김기주(金基柱) 기자(MBC 전무 역임)는 “그때 박종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지는 것을 보고 자기까지 조마조마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전 5시 5분 전, 시간이 5분밖에 남지 않은 그 절박한 순간에 갑자기 아래층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났다. 엔지니어가 돌아온 것이다. 박종세는 두 사람의 손을 맞잡고 ‘방송 상태’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전날 방송 준비를 해둔 엔지니어들은 지체 없이 메인 키를 올렸고 남산연주소와 연희송신소 사이 방송되는 타령(打令)이 남산연주소 전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박종세 전 회장은 “훗날 5·16 첫 방송 이야기를 쓴 혁명주체 한 사람이 이 타령이 울려 퍼진 상황을 묘사하면서 ‘박종세를 잡아와 방송을 시켰더니 덜덜 떨면서 애국가를 틀어야 할 순간에 민요를 틀었다’고 써서 쓴웃음을 지은 일이 있다”며 “타령은 실제 방송이 아니라 시보(時報) 직전까지 연주소와 송신소 사이 전파를 조정하는 방송조정용 음악이었다”고 했다.
 
 
 
레지스탕스처럼 지휘하던 김종필

 
연설을 하는 정복 차림의 박정희 의장과 중계방송을 하는 박종세 아나운서. 박 의장 뒤로 박종규 실장이 보인다.
  당시 KBS연주소는 작은 스튜디오에서 아나운서 혼자 기기를 조작하면서 뉴스와 음악 등을 방송했다. 박종세 전 회장은 “그날 5·16혁명을 알리는 첫 방송은 7호 스튜디오로 불리는 작은 방송실에서 했다”며 “내가 메인 마이크 앞에 앉고 송영규 아나운서가 보조 자리에서 턴테이블에 행진곡을 걸어놓고 기계조작을 해줬다”고 했다.
 
  박종세 전 회장은 스튜디오 안에 있었던 혁명주체들의 포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박 아나운서 앞에는 박정희 장군이 꼿꼿이 서서 방송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뒤로 김동하(金東河·마사회장 역임) 장군, 이주일(李周一·육군 대장·감사원장 역임) 장군과 함께 김종필(金鍾泌), 이석제 중령이 서 있었다. 정문순 중령, 이형주 중령은 박종세 아나운서 뒤의 작은 의자에 앉아 권총을 빼 든 채 감시했다.
 
  타령에 이어 방송이 시작되어 애국가가 나가고 5시 정각(正刻) 행진곡과 함께 5·16혁명 방송이 시작됐다. 스튜디오 내 군인들은 일순 긴장했다. 박종세가 “…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서…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육군 중장 장도영(張都暎)”으로 끝나는 혁명공약 방송을 반복했다. 첫 방송이 성공적으로 나가자 군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박종세 전 회장은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지 않은 검은 양복 차림의 김종필 중령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한쪽 머리칼이 축 처져 내려온 데다 손에 카빈총을 들고 군인들을 지휘하는 모습이 영화에서 본 프랑스 레지스탕스 지도자 같았다고 한다.
 
  이석제 중령이 박종세에게 출신 대학을 물었을 때 “서울대 사대를 나왔다”고 하자 이 중령은 “김 중령도 서울대 사대(2회)를 다녔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오전 4시40분경 마침 김종필이 박종세에게 다가오자 박종세는 “서울대 사대 12회 출신입니다”라고 했더니 김종필은 “반갑다”고 했다.
 
  박종세는 김종필 중령에게 “이곳 남산 KBS방송국만 접수했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이곳은 연주소이고 방송이 발사되는 곳은 연희송신소라는 곳이다. 그곳에서 자키(콘센트) 하나를 빼든가 스위치를 내리면 방송은 되지 않는다. 그곳을 빨리 챙겨야 한다”는 중요한 말을 전했다.
 
  ― 대학 선배임을 확인한 순간, 혁명 협력자로 바뀌셨군요!
 
  “불과 몇 초 사이에 바뀌었지요(웃음).”
 
  김종필 중령은 “그런 절차가 있느냐”며 깜짝 놀랐고 서둘러 송신소로 군인들을 보내느라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연희동 송신소로 향한 군인들이 아현동 언덕을 넘어 신촌역 부근을 지날 때 5·16 첫 방송은 전파를 탔다. 연희송신소에 군인들이 도착하지 않았는데도 혁명방송이 탈 없이 나간 것이다.
 
 
  “그때 나 때문에 혼났지?”
 
청와대를 방문한 박종세 아나운서 부부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그때 나 때문에 혼났지”라고 말을 건네고 있다.
  그날 연희송신소 담당 엔지니어는 박종세와 서울대 동문인 정용문(鄭溶文·전 한솔PCS 사장)씨였다. 그는 새벽에 방송 스위치를 올리고 나서 잠시 혼란에 빠졌다. 난데없이 행진곡이 울려 퍼지고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으로 시작되는 방송이 나오자 그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판단이 들어 남산연주소로 연락을 해볼 생각을 했다고 한다.
 
  “다시 들어보니 전날부터 같이 숙직을 하는 박종세가 분명해 스위치를 내릴 수 없어서 그대로 놔두었다고 해요. 만약 생판 모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면 방송은 중단되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 7번 방송실은 지금도 보존하고 있나요.
 
  “남산연주소 2층에 있던 제7방송실은 그 후 5·16 첫 방송 기념관이 되었죠. 밑줄을 그은 원고(原稿)가 사진틀에 넣어져 벽에 걸리고 그때 사용한 마이크와 당시 박정희 장군을 중심으로 한 사진도 전시되어 있었어요. 그런데언제부터인가 그것들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아들 이강석(왼쪽 둘째)과 함께한 KBS 아나운서들. 앞줄 왼쪽부터 장기범 아나운서, 이강석, 박종세, 최계한, 뒷줄 중앙은 강찬선 아나운서. 1959년 12월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는 육군 소위 신분으로 당시 국회부의장을 지낸 야당 인사의 딸인 미모의 M아나운서를 만나기 위해 KBS를 자주 찾았다. 그러나 M아나운서가 냉랭하게 대하는 바람에 박종세 아나운서가 리셉션홀에서 차를 함께 마시기도 하고, 프란체스카 여사가 싸준 도시락을 바꿔 먹기도 했다고 한다.
  ― 오전 5시에 방송을 시작해 언제까지 계속하셨나요.
 
  “오전 9시까지 방송을 계속하고 있는데, 강찬선씨가 가장 먼저 출근해서 교대를 해주어 나는 집으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시각 이한림(李翰林) 야전군사령관과 미8군사령관 매그루더의 움직임이 혁명군들을 긴장시키고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절망의 소리까지 돌고 있을 때여서 퇴근하는 발걸음은 무거웠습니다.”
 
  ― 혁명 이후 박정희 대통령을 언제 처음 만났습니까.
 
  “1972년 김종필 총재 등의 추천으로 5·16 민족상을 받게 된 내가 내자(內子)와 함께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입니다. 그전에도 몇 번 청와대에 초청을 받아 밥을 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는 별말씀이 없던 박 대통령이 그날은 많은 사람 앞에서 큰소리로 ‘박종세씨 그날 아침에 나 때문에 혼났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방송 실수로 사표 제출

 
1972년 9월 서울에서 열린 남북적십자사 2차회담에서 북한대표단의 귀환을 판문점에서 중계방송하는 TBC의 박종세 아나운서.
  박종세 아나운서는 1935년 경기도 장단군 도라산리에서 태어났다. 박교준(朴敎駿)씨와 이금순(李金順)씨의 6남매 중 4남이다. 부친은 국가의 재경(財經), 토목(土木), 산림(山林)을 관장하는 대한제국 탁지부(度支部) 관원을 지냈다. 박종세는 1948년 서울로 유학, 경복중학교에 입학한다.
 
  경복중 3학년 때 6·25전쟁을 맞았고 1955년 서울대 사대에 입학했다. 박종세는 1956년 겨울, 대학 2학년 재학생 신분으로 서울중앙방송국(KBS) 시험에 응시했다. 접수창구에서 퇴짜를 맞는 우여곡절 끝에 그는 1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다.
 
  1956년 정동 KBS 시절 박종세는 아나운서 교육을 마치고 황우겸 아나운서를 선임으로 하는 첫 숙직 방송을 했다. 밤 10시50분부터 11시까지 10분간 진행되는 ‘내일의 방송순서’였다.
 
  “100번도 넘게 읽고 또 읽었어요. 스튜디오에 들어가 목청을 가다듬자 방송 시작 불이 들어왔어요. ‘내일의 방송순서를 예고해 드리겠습니다. 5시 아침음악, 5시30분 농사메모…’ 막상 마이크를 잡으니 스스로에게 ‘내가 왜 이렇게 잘하지?’ 하고 묻고 싶을 정도였어요. 시간까지 정확하게 맞췄어요. ‘여기는 서울중앙방송국입니다. HLKA’ 멘트를 마치자 ‘삐삐삑’ 하고 시보가 울렸어요. 신이 나서 밖에 있는 엔지니어를 쳐다보자 그는 손가락을 동그랗게 해 보이며 성공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어깨를 으쓱대며 주조종실로 들어간 박종세에게 엔지니어가 전화를 바꿔주었다. 드라마 작가 이경제였다. 이경제는 박종세에게 “내일 밤 8시30분에는 내가 쓴 방송극이 나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 지금 이서구(李瑞求) 선생 이름이 나온 것 같아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잘 확인해 보시죠. 내일이 며칠이고 무슨 요일인지…”라고 했다.
 
  박종세는 다음날이 아니라 이틀 뒤의 방송 예고지를 들고나와 읽었던 것이다. 방송사고였다. 스튜디오에서 고민을 거듭하다 사표를 쓰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나운서로 첫 방송을 끝내 흥분으로 잠을 못 이뤄야 할 판인데 사표를 안고 누워 있으니 죽을 맛이었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박종세는 윤길구(尹吉九) 과장에게 ‘방송사고’를 보고하고 사표를 제출했다. 윤 과장은 “이봐 미스터 박, 오늘의 방송순서인지 내일 것인지 그걸 누가 알 수 있겠어? 앞으로는 날짜 잘 보고 방송해!” 하더니 사표를 북북 찢어버렸다.
 
  1958년과 1959년은 박종세의 생애에 잊지 못할 해였다. ‘박종세 아나운서’ 하면 떠올리게 되는 야구 중계방송과 〈대한뉴스〉 해설 두 가지를 이때 시작했기 때문이다.
 
  “첫 야구방송 중계는 1958년 동대문 서울운동장 축구장에서 했습니다. 장훈(張勳) 선수가 재일교포 고교 선수 대표로 우리 고교 대표와 벌이는 경기였습니다. 메인 캐스터는 윤길구, 황우겸 아나운서였고 저는 경기 시작 전 양쪽 선수 오더(order)를 소개하는 게 임무의 전부였어요. 어찌나 긴장이 되던지 가끔 꿈에 그때 정경이 나타납니다.”
 
  박종세 전 회장은 “유수호(柳壽浩) 아나운서, 김동엽(金東燁) 감독에 이어 해설을 맡은 환일고 교사 출신의 하일성(河日成) 해설위원(KBO 사무총장 역임)이야말로 나의 야구 중계방송을 가장 빛나게 해준 분들”이라며 “하일성 위원이 지난 9월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데 무척 가슴 아팠다”고 했다.
 
 
  〈대한뉴스〉 제작의 어려움
 
1967년 5월 3일 제6대 대통령 선거 당시 종로구 신교동 맹아학교에서 투표를 마친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를 단독 인터뷰하는 박종세 아나운서.
  그 무렵 박종세는 공보처 김영권(金永權) 국장실의 연락을 받았다. 〈대한뉴스〉 해설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대한뉴스〉 해설은 강찬선 아나운서가 해왔다. 국립영화제작소 관계자들이 새 해설자로 박종세를 최종 선정했다는 것이다.
 
  “〈대한뉴스〉 해설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에요. 음악과 효과, 멘트가 한 치의 오차 없이 화면에 맞게 10분 동안 맞아떨어져야 합니다. 9분이 넘어 거의 다 완성이 된 상황에서 오류가 발생하면 처음부터 작업을 다시 해야 해요. 최종 OK 사인이 날 때까지 전 스태프가 마음을 졸였습니다.”
 
  박종세 전 회장은 “10분 동안 읽을 원고가 100장 정도였고 그것을 화면에 맞게 글자 하나하나를 자고저(字高低)에 맞추어 읽어 내려가야 했다”며 “화면에 맞도록 감정까지 넣어야 했으니까, 10분짜리 작업이 완성되면 녹초가 됐다”고 회고했다.
 
  박종세 아나운서는 〈대한뉴스〉를 1958년 시작해 1968년 10월까지 10년간 했다. 멕시코올림픽 취재로 두 달간 방송 공백이 생기게 되자 김승한(金丞漢) 아나운서에게 바통을 넘겼다.
 
  “〈대한뉴스〉를 진행한 10년은 정말 격동기였어요. 자유당 정권 말기, 4·19의거, 장면(張勉) 정권의 혼란기, 5·16군사혁명, 1964년의 6·3사태, 새마을운동, 월남파병… 이게 모두 제가 〈대한뉴스〉를 해설할 때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지금도 종합편성채널에서 격동의 시대 자료화면을 내보낼 때 내 방송이 소개되는 경우가 많아요.”
 
  ― 당시 아나운서 초기 때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어떤 게 있습니까.
 
  “1960년 3·15대선을 앞두고 여당의 이승만 대통령과 야당의 조병옥(趙炳玉) 박사가 선거연설 방송을 녹음했습니다. 존경하는 조병옥 박사가 남산KBS연주소로 나오셨고 스튜디오로 모시고 가 녹음을 했는데, 조 박사께서 부흥(復興)이란 단어를 ‘복흥’으로 여러 차례 발음하시는 바람에 녹음을 다시 하자고 했다가 ‘내가 복흥이라면 복흥이야’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셨습니다. 연희전문에 컬럼비아대 철학박사를 받으신 당대 석학이 한자를 모를 리 없고 연설용 원고를 읽는 체질이 아니어서 잠시 실수를 하신 것 같아요.”
 
 
  〈국방뉴스〉 30년간 방송
 
박종세 아나운서가 경복고 후배인 ‘빨간장갑의 마술사’ 고 김동엽 해설위원과 함께 중계방송하는 모습. 두 사람은 1982년 1월 해태 타이거즈 야구단이 창단되자 단장과 감독으로 다시 만난다.
  아나운서로 역사에 남는 혁명방송을 한 박종세는 1961년 군에 입대한다. 5·16군사혁명 한 달 후 박종세는 논산훈련소행 입소열차를 타야 했다. 전쟁 발발 시 전국 각지의 임시방송실에 배치되는 아나운서들은 ‘특수요원’으로 분류된다. 마침 5·16이 일어나자 군 입대가 보류됐던 교수, 공무원 등 특수요원들이 모두 징집되는 바람에 특수요원 제1차 입대 대열에 끼게 됐다.
 
  박종세 전 회장은 “군복을 지급받고 전체 훈련병 대표선서를 했는데, 몸이 뚱뚱한 편이어서 ‘장군 훈병’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며 “그때 중앙대 교수를 지낸 백영훈(白英勳) 박사(박정희 대통령 서독방문 수행)와 함께 훈련병 대표로 나가 훈련소를 홍보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했다.
 
  박종세씨는 〈대한뉴스〉 해설이 계기가 돼 나중에 국방부 홍보관리소에서 제작하는 〈국방뉴스〉 〈배달의 기수〉 해설을 맡게 됐다. 국군의 베트남 파병 시점인 1966년 1월의 1호부터 1996년 4월의 1469호까지 〈국방뉴스〉를 장장 30년간 해설했다.
 
  — 30년간 한 프로를 계속했다는 건 찾아보기 힘든 기록 아닌가요.
 
  “〈국방뉴스〉 때문에 누구나 가고 싶어 했던 해외 출장을 포기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나중엔 생활의 일부로 여겨지더군요. 1991년 2월에 3주 정도 소련에서 열린 드루즈바컵 세계역도대회에 고광구(高光九) 선수를 데리고 단장으로 다녀왔어요. 고 선수가 52kg급에서 금메달을 따냈고 미수교국 소련 땅에서 제가 육성으로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다른 사람이 〈국방뉴스〉를 진행했더니 국방부에 ‘박종세 어디 갔느냐’며 무더기로 전화가 걸려오는 소동이 벌어졌답니다.”
 
1991년 2월 소련에서 열린 세계역도대회에 선수단을 이끌고 참가한 박종세 대한역도연맹 부회장. 고광구 선수는 52kg급에 출전해 눈물겨운 감량전쟁을 치른 끝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주최 측이 애국가를 준비하지 않아 박종세 부회장이 독창을 했다.
  — 해설료는 좀 나왔습니까.
 
  “1980년에 와서 한 편에 3만원을 받았습니다. 택시 값에 녹음이 끝나 간단히 스태프들과 함께하는 식사비로 다 썼어요. 결국 내가 돈을 내고 시간을 내서 녹음을 한 셈이지요. 사명감 때문에 열심히 했고 지금도 대단한 긍지를 느낍니다.”
 
  1980년 들어 박종세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뉴스전망대〉 〈정오뉴스〉 〈야구 중계방송〉 〈다큐멘터리 사회〉 〈TBC석간〉 등을 진행했다. TBC의 라디오 보도 프로그램 중에서 매일 오전 8시에 방송되는 〈뉴스 전망대〉가 비중이 높았다. 초기에 김승한, 신상초(申相楚), 양흥모(梁興模), 조용중(趙庸中), 봉두완(奉斗玩)씨 등이 캐스터로 나섰다. 여러 사람이 맡다 보니 일관성이 떨어져 조용중, 봉두완, 박종세가 맡게 됐다.
 
 
  아나운서는 스스로 모범 보여야
 
1977년 이른 봄, 박종세 아나운서가 모친 이금순 여사를 모시고 고향이 지척에 보이는 통일촌을 찾았다. 왼쪽에서 세 번째가 큰아들 준수, 둘째아들 증수, 맨 오른쪽이 박종세씨의 부인 구숙자 여사.
  TBC 간판 뉴스 프로인 저녁 9시 뉴스 〈TBC석간〉에서 봉두완 위원은 기발하고 튀는 진행으로, 박종세는 정통파 스타일로 성가(聲價)를 높였다. 박종세는 1980년 9월 3일 ‘방송의 날’을 맞아 방송대상을 수상했다.
 
  박종세가 감격스러워하고 있는 사이 신군부는 새로운 언론풍토 조성이라는 명분 아래 언론기관을 통폐합했다. 1980년 11월 30일 동양방송은 깃발을 내리고 KBS로 통합됐다. 동양방송 인원 중 가장 직급이 높았던 박종세 아나운서는 망설였다.
 
  “TBC 개국 축하쇼 사회를 보고… 막을 내리는 쇼의 사회를 보는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더군요. KBS로 가기로 결정을 했어요. 11월 30일 TBC의 마지막 특집방송에서 시청자들에게 ‘내일부터는 KBS에서 다시 뵙겠다’고 인사를 했지요. 그러고 나서 직원들과 술독에 빠졌어요. 이병철(李秉喆), 홍진기(洪璡基) 두 회장님이 떠나는 우리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면서 자그마한 선물을 하나씩 나누어주셨습니다. 문진(文鎭)과 시계였는데, 거기에는 ‘그 위대한 17년, TBC는 영원하리!’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박종세 전 회장은 1981년 12월부터 1994년까지 해태 타이거즈 단장을 지내며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고 세계적 광고회사 오길비 앤 매더와 합작해 대형광고회사 코래드를 탄생시켰다.
 
  — 인터넷 시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말과 글의 오염이 심각합니다.
 
  “우리말을 순화(醇化)해야 하는데 걱정이 돼요. 우리말이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일본이나 영국은 NHK나 BBC 방송 아나운서들의 발음을 모범으로 해서 일반인들이 따라 하도록 교육을 합니다. 방송이 책임감을 갖고 종사자들 교육을 강화해서 고운 말, 순우리말을 가급적 많이 사용해 우리말이 거칠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 엔터테인먼트가 강조되는 요즘, 아나운서들이 본령인 뉴스보다 연예 프로그램 진행을 선호하는 바람에 뉴스의 진지함이 떨어져 보입니다만.
 
  “당연히 신뢰도가 떨어져요. 텔레비전 보면 속상한 장면이 많아요. 아나운서들은 사회생활은 물론 가정생활에서도 스스로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5·16 때 혁명군이 왜 KBS 아나운서에게 방송을 맡겼는지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 아나운서 길을 가지 않으셨다면 무엇을 하셨을 것 같습니까.
 
  “서울사대 교육학과를 졸업했으니까 아무래도 고등고시를 보고 교육계로 갔을 거예요. 1956년 대학 2학년 때 교내방송국 아나운서로 뽑혀 그 길로 간 거지. 대학 방송경력까지 따지면 올해로 아나운서 생활한 지 60년입니다. 지금도 가끔 방송에 늦어 쩔쩔매는 꿈을 꾸다가 진땀을 흘리며 깨어나곤 합니다.”
 
  박종세 전 회장은 2007년 부인 구숙자(具淑子) 여사와 사별했다. 그는 “아나운서의 박봉생활을 잘 견뎌주었고 잠을 못 자는 나의 성미 때문에 시집와서 한 번도 한 이불에서 잠자리를 하지 못한, 평생 나만 바라보다 저세상으로 간 아내가 그립다”며 “어느 날 둘이 마음먹고 백화점엘 갔더니 결국 아이들 옷가지와 시어머니 선물만 사 들고 나와서는 함흥냉면 한 그릇 사달라고 한 아내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자유롭게 갈 수는 없지만 일 년에 서너 번은 파주 통일대교 건너 고향 장단 땅을 바라보는 도라산역을 찾고 있다. 그는 “얼마전 찾은 도까밭(묘목밭)에 지뢰를 제거하고 잡초를 뽑아낸 뒤 묘목을 심을 계획”이라며 “나무를 심던 부친의 뜻을 헤아리고 도까밭에 엎드려 나무를 소중히 가꾸던 어머니를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