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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러시아 해군무관 윤종구 제독의 한·러 군사교류 비망록 〈최종회〉

“공산권 종주국 러시아에 남북한 전쟁 시 자동개입조항 폐기를 요구”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goms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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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영해 국방차관, 러 무관 우소프 대령 불러 “자동개입조항 손보라” 요구
⊙ 1996년 러시아는 자동개입조항 폐기… 중국도 폐기해야 한·중 군사교류 가능
⊙ 1998년 74개국 대표 무관단장 맡아… ‘남북 대치공관’에서 총성 없는 외교전쟁
⊙ 중국의 패권주의 견제 위해 25년간 공들인 對러시아 관계 적극 활용해야
1999년 9월 4일 토요일, 러시아 국방장관 이고리 세르게예프 원수가 해군고속정을 이용, 러일전쟁 당시 제물포 해전(1904년)에서 자폭한 바랴그호 전사 장병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갖고 있다. 사진 중앙이 세르게예프 원수, 맞은편이 장정길 해군참모총장, 맨 오른쪽이 윤종구 제독.
  윤종구(尹鍾九) 제독이 초대 소련 해군무관으로 부임하기 직전인 1992년 3월 초, 권영해(權寧海) 국방부차관은 보좌관인 김국헌(金國憲) 당시 중령(예비역 육군 소장)을 통해 그를 국방부로 불렀다.
 
  윤종구 당시 대령이 차관 방에 들어서자 권 차관은 초대 주한 러시아 무관인 니콜라이 우소프 해군 대령과 함께 있었다. 우소프 대령은 러시아 군 최고교육기관인 총참모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트였으나 한국어를 하지 못했다. 권 차관은 그에게 뭔가 중대한 전달을 하려고 러시아어에 능통한 윤 대령을 부른 것이었다.
 
  당시 한국은 30억 달러에 달하는 경협차관을 상환받기 위해 ‘불곰사업’을 준비, 러시아로부터 방산물자를 도입하려 하고 있었다. 방산물자를 도입해 운영하려면 러시아 측의 기술정보도 함께 받아야 한다. 예컨대 전투기를 도입한다면 전투기를 운영·정비하는 기술, 그리고 그 전투기로 공격할 적에 대한 정보도 함께 받아야 한다. 이에 두 나라는 사전에 상호 제공받은 정보는 절대로 누설하지 않는다는 ‘군사비밀보호협정’을 맺어야 한다.
 
  군사비밀보호협정은 상대국이 제공한 기밀을 자국의 기밀과 똑같은 비중으로 지키겠다는 국가 간 약속이다. 따라서 적대국과는 맺을 수 없고 무기를 거래할 정도의 우방 사이에만 체결한다. 한국은 지금껏 중국, 일본과는 이 협정을 맺지 않았다. 한국은 러시아와 1995년 5월 유정갑(兪政甲) 당시 국방정보본부장이 한·러 군사비밀보호협정에 서명했다.
 
 
  패닉에 빠진 초대 주한 러시아 무관
 
1998년 8월 14일 모스크바 소빈센터에서 열린 8·15 국경일 리셉션에서 초대 주한 러시아 무관인 니콜라이 우소프 예비역 해군 대령(왼쪽)과 만난 윤종구 제독(오른쪽).
  권 차관은 우소프 대령에게 “한·러가 조만간 군사비밀보호협정을 맺고 불곰사업으로 방산물자를 거래하려는 판국에 러시아는 한국의 적인 북한이 전쟁을 하면 자동으로 북한에 군사 지원을 한다는 우호조약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엄청난 모순이 아닐 수 없다”고 지적하고 “러시아가 한국을 친구로 생각한다면 그 조약에서 자동 군사 개입 조항을 삭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한국과 러시아가 복교(復交)해 양국이 수도에 무관부를 설치한 것은 ‘상호 간에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거기에다 군사비밀보호협정까지 맺는다면 이는 군사동맹 다음으로 우호적인 군사 교류협력을 해나가겠다는 뜻이다.
 
  윤 대령이 그 말을 통역하자 우소프 대령은 깜짝 놀랐다. 1991년 9월 서울에 초대 소련 무관으로 부임한 우소프 대령은 6개월 만에 한·러 관계에 메가톤급 충격파를 던질 권 차관의 발언에 말투마저 떨리기 시작했다. 우소프 대령은 수첩을 꺼내 권 차관의 말을 받아 적고는 권 차관과 윤 대령에게 보여주며 러시아어와 영어로 번갈아가며 “차관이 한 말씀을 나는 이렇게 이해를 했는데, 맞느냐”고 누차 확인했다.
 
  우소프 대령은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북·러 조약에서 자동 개입 조항을 개정해 달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폐기해 달라는 말입니까”라고 반문했다. 권 차관은 “개정이나 폐기는 러시아 정부의 권한이니 러시아 정부가 재량껏 취할 수 있는 조치를 해달라”고 강조했다.
 
  우소프 대령은 권 차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러시아대사관으로 달려갔다. 윤종구 제독은 “북한을 위성국으로 삼아 6·25전쟁을 도발한 공산주의 종주국 러시아에게 맹방(盟邦)인 북한과 맺은 군사조약의 핵심조항을 빼라는 요구를 하고 있고 거기에다 그 말을 한국의 대통령이나 국방장관 또는 외교부장관도 아닌 국방부차관이 했다는 사실은 충격 그 자체였을 것”이라고 했다.
 
  윤 제독은 “내가 알기로는 당시 최세창(崔世昌) 국방부장관이나 다른 상위인사가 그 같은 지시를 한 것은 아니었다”며 “당시 권영해 차관의 남다른 통찰력,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이 등잔 밑을 보지 못했으나 그는 그것을 보았던 것”이라고 했다.
 
  자동 군사 개입 조항을 담은 북한·소련 간의 우호조약의 명칭은 ‘조·소 우호협조 및 호상(互相) 원조에 관한 조약’이다. 이 조약은 1961년 7월 6일 모스크바를 방문한 북한 수상 김일성과 소련 수상 흐루쇼프가 서명했다.
 
  북·러 군사동맹을 보장한 이 조약의 효력은 10년이다. 10년 뒤에는 한쪽이 폐기를 밝히지 않으면 자동으로 5년씩 효력을 연장하기로 했다. 양쪽은 폐기 의사를 밝히지 않았기에 이 조약은 계속 유지됐다. 1991년 소련이 무너짐으로써 고비를 맞았으나 러시아가 구소련의 모든 지위와 책임을 이어받기로 함으로써 존속했다.
 
 
  발끈한 러시아 외교부
 
1997년 11월 20일 이정린 국방부차관(중앙 앉은 이)이 러시아 국방부 회의실에서 미하일로프 러시아 제1국방차관과 역사적인 ‘한-러 정부 간 군사기술·방산·군수협력협정’을 체결하고 있다. 이정린 차관 뒤쪽에 선 이가 이정빈 주러대사, 윤종구 무관.
  우소프 대령이 본국에 권 차관의 요구사항을 러시아 외교부와 국방부에 보고하자, 옐친 대통령 공보실과 외교부 그리고 국방부는 벌집을 쑤셔놓은 듯했다. 러시아 외교부는 “일국의 국방부차관이 직분을 망각하고 제3국의 국가 대 국가가 맺은 조약을 개정하라 폐기하라는 식의 내정간섭적 발언을 할 수 있느냐”고 한국 정부에 항의했다. 그 후 잘나가던 한·러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의외로 한국 언론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런 요구가 국방차관의 권한이 아니라는 논리였다. 권영해 국방차관은 국내외 사퇴 압력을 받아가며 곤경에 처했으나 “국민의 한 사람, 군인의 한 사람으로서 할 바를 한 것”이라며 의연하게 버텼다. 1993년 2월 김영삼(金泳三)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방부장관으로 임명된 권영해 장관은 주러 해군무관 윤종구 대령에게 “자네, 북·러 조약에서 자동 개입 조항 하나만 빠지게 한다면 무관 임무는 달성한 거야”라며 격려했다고 한다.
 
  북·러 우호조약은 러시아 외교부가 담당하는 것이라 권 차관이 제기한 문제는 즉각 한·러 간, 북·러 간 외교 현안으로 떠올랐다. 한국 국방부가 문제제기를 했지만, 한국 외교부도 현지 공관을 중심으로 적극 대응에 나섰다. 윤종구 대령은 외교부 참사관과 동행해 외교부도 방문해 한국 국방부의 뜻을 전달했다.
 
  “러시아는 대국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유즈나야 카레야(남한)의 지적이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겁니다. 불곰사업도 하고, 정례 국방장관 회담도 하고, 함정 상호교류도 하는 사이인데, 권 차관의 요구가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한 거죠. 그때부터 러시아의 반응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자동 개입 조항이 살아 있으면 한반도 유사시 러시아가 다시 적국이 될 것이고, 지금 러시아 땅에서 아무리 애써 한·러 군사외교의 성과를 쌓아도 모래성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러시아 외교부와 국방부를 압박하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신조약 맺는 방법 택한 러시아 외교부
 
1992년 9월 30일 중국정부 수립 43주년 기념 리셉션에서 윤종구 대령 부부(맨 왼쪽)가 북한 무관 김정찬 소장(맨 오른쪽)과 기념촬영을 했다. 가운데 한복 입은 여성은 김정찬 소장의 부인이고, 그 옆이 중국 국방무관 닝 소장이다. 김정찬 소장 부인은 늘 행사장에 한복을 입고 나왔다.
  지난해 5월 20일 세르게이 나리시킨 러시아 연방 하원의장이 방한해 한·러 수교 25주년을 기념해 김학준(金學俊)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에게 고종 황제가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전한 감사의 편지 복사본을 ‘선물’로 전달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375일간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했던 고종이 니콜라이 2세에게 ‘몸 둘 바를 모르게 감사하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던 것이다.
 
  윤종구 제독은 “우리로서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편지를 전한 러시아 정치인들의 속내는 120년 전의 역사를 잊지 말고 러시아를 홀대하지 말라는 경고”라며 “1992년 한국 국방부가 러시아에 자동 개입 조항을 손보라고 했을 때 러시아의 심사가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북·러 우호조약의 폐기나 수정을 위해 윤종구 대령은 러시아 국방부와 외교부를 드나들며 2년여 동안 꾸준히 노력했다. 그 무렵 우소프 대령이 한국 근무를 끝내고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윤 대령은 우소프 대령과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고 그도 한국의 입장을 이해해 주었다. 결국 러시아는 자동 개입 조항을 폐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윤 제독은 “러시아는 기존 조약에서 자동 개입 조항을 손보는 것보다 북한과 새 조약을 맺으면서 자연스럽게 자동 개입 조항을 없애는 쪽을 택했다”면서 “때마침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 연방으로 국호가 바뀌었으니 새로 조약을 맺자고 북한에 요구했다”고 했다. 북한에도 그럴 만한 이유를 댄 것이다.
 
  러시아 외교부는 김일성 사망 이듬해인 1995년 8월 북한에 우호조약 폐기를 정식으로 통보함으로써 1996년 이 조약을 실효(失效)시켰다. 북·러 간 군사적 결속이 끊어진 것이다. 북한은 엄청난 충격을 받고 노발대발했다. 북한은 1994년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며 국제사회의 문제아로 전락했다.
 
  “당시 권희경 주러 대사, 김정찬 주러 무관 등은 얼마 후 소환당한 것으로 들었습니다. 《월간조선》 금년 8월호에 1979년 체코 주재 북한대사관 부무관으로 파견돼 3년간 근무했던 최주활 탈북자동지회 회장이 자신의 직속상관이었던 주러 북한대사관 무관 김정찬 소장(준장) 등 무관들이 보위사령부에 체포·처형됐다고 증언했습니다. 동독참모대학을 나와 독일어가 유창한 김 소장과 가끔 정담을 나눴고, 때론 형님 같은 느낌을 갖곤 했는데 그의 처형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중국에도 자동 개입 조항 폐기 요구해야

 
2000년 10월 22일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왼쪽)이 국회 외통위 소속으로 런던대사관 국정감사를 가는 길에 잠시 모스크바에 들러 이틀간 체재했다. 대한항공 파업으로 아에로플로트항공 편으로 서울에서 모스크바를 경유해 오후 9시30분 세레메체보 공항에 도착했다. 박근혜 의원은 윤종구 무관과 대화하면서 한러관계 발전을 위해 공공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박근혜 의원을 안내하는 윤종구 러시아 국방무관 뒤편으로 모스크바국립대와 민주당 임채정 의원, 문희상 의원의 모습이 보인다.
  1995년 10월 윤종구 대령은 귀국해 권영해 안기부장(1994년 12월 부임)의 보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1997년 10월 그는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게 되었다. 한국군을 대표하는 러시아 주재 국방무관이라는 중책을 맡은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그는 러시아에 주재하는 74개국(172명) 무관들을 대표하는 무관단장까지 맡았다. 초대 주러 해군무관 재직 때 해군무관단장을 역임한 데 이어 연거푸 러시아로부터 최고 무관임을 인정받은 것이다.
 
  2002년 3월 그는 4년6개월간의 러시아 국방무관 임무를 끝내고 귀국해 전역했다. 윤 제독이 귀국하기 전인 2000년 2월 9일, 북한은 러시아와 자동 군사 개입 조항이 없는 ‘친선, 선린 및 협조에 관한 조약’을 맺었다.
 
  윤 제독은 “처음 러시아가 조약을 실효하고 새로운 조약을 맺자고 하자 펄쩍 뛰며 거부하던 북한이 러시아마저 떠난다면 고립무원(孤立無援)이라고 판단해 울며겨자먹기로 수용했던 것”이라며 “북한은 정권 수립 이후 등거리 외교를 통해 중국과 소련을 경쟁시켜 가며 실리를 취해왔기 때문에 비록 ‘주체’를 내세웠다 하더라도 중국과 소련 어느 한 곳과도 척을 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북한은 소련과의 우호조약에 서명한 닷새 뒤인 1961년 7월 11일, 김일성이 베이징을 방문해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와 ‘조·중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북·중 우호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 2조에는 ‘체약 일방이 어떠한 한 개의 국가 또는 몇 개 국가의 연합으로부터 무력침공을 당함으로써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에, 체약 상대국은 힘을 다하여 지체없이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자동 군사 개입을 보장한 것이다. 그리고 3조를 ‘체약 쌍방은 체약 상대방을 반대하는 어떠한 집단과 어떠한 행동 또는 조치에도 참가하지 않는다’라고 해놓았다.
 
  윤종구 제독은 “이 조약을 보면 중국이 펼치는 한·중 군사외교는 명백히 이 조항을 위반한 것”이라며 “그런데도 중국이 우리와 외교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우리 국방부와 외교부는 중국에 이 조약을 폐기하라는 요구를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윤 제독은 “1992년 모스크바에 해군무관으로 부임해 자동 개입 조항 폐기 과정을 실무자로 지켜보면서 조만간 중국도 조약 폐기를 할 것으로 기대했던 것은 큰 오산이었다”며 “중국이 최근 사드(THAAD) 배치를 둘러싸고 애꿎은 한국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남남갈등을 조장하는 행태를 보며, 자동 개입 조항 폐기는커녕 군사교류 증진도 기대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고 했다.
 
 
  “러시아, 주변 4강 중 통일 거부감 가장 적어”
 
1997년 10월 1일 주러 국방무관 부임 리셉션에서 알렉산드르 레베지 장군(왼쪽)을 영접하는 윤종구 국방무관. 레베지 장군은 한때 ‘러시아의 박정희’로 불릴 만큼 옐친 대통령의 후계자로 거론된 인물이었다. 제14군사령관, 국가안보회의 서기, 옐친 대통령 안보보좌관, 대통령 후보, 크라스노야르스크 주지사 등을 역임했다. 주지사 시절, 헬기사고로 순직했다. 그는 푸틴 대통령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며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1896년 5월 말, 고종은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민영환에 특명전권공사직을 부여, 조선 대표로 파견하여 조선국왕 보호, 러시아 군사고문단 파견을 요청했다. 그해 7월 29일 러시아는 푸차타 대령을 단장으로 하는 군사교관단 14명을 조선에 파견했다. 러시아 교관단은 조선의 궁성호위대를 훈련시켰고, 이 경비대는 1897년 5월, 환궁한 고종이 지켜보는 앞에서 근대화된 군대로서의 러시아식 사열을 했다. 이것이 120년 전 한·러 군사교류의 시작이다.
 
  윤종구 제독은 “러시아는 한반도 주변 4강 중 6·25전쟁을 사주한 것을 빼놓고는 우리와 민족적 앙금이 가장 적다”면서 “러시아는 통일 한국이 러시아 극동 지역 경제발전과 자원개발에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4강 중 가장 통일에 거부감이 적다”고 했다. 그는 “최근 들어 서울에서 열리는 한반도 주변 4강 문제를 다룬 세미나를 가보면 러시아는 사라지고 ‘주변 3강’만 판을 치고 있다”며 “사드 문제에서처럼 중국의 안하무인 격 패권주의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25년간 쌓아온 러시아와의 관계를 잘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북한 정권이 붕괴되면 중국군의 북한 진주로 한·미와 북·중 간 전쟁의 가능성도 있고, 이때 러시아가 중국 편에 설지, 혹은 유엔 안보리에서 중재자의 입장에 설지 두고 봐야 한다”면서 “그런 측면에서 지금부터 교활하다는 말을 들을 만큼 스마트하고 담대한 주변 4강 외교를 펼쳐나가야만 한다”고 했다.
 
  윤종구 제독은 1999년 9월 러시아 국방장관 이고리 세르게예프 원수가 공식 방한해 해군 2함대사령부를 방문한 일을 회고했다. 세르게예프 원수는 처음으로 우리 해군고속정을 이용해 러일전쟁 당시 제물포 해전(1904년)에서 일본 함정 8척의 집중 공격을 받는 중 자폭한 순양함 바랴그호 전사 장병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가졌다.
 
  바랴그호는 제물포 해전에서 일본 함대의 기습공격을 받고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 해군에 의해 격침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기 위해 자폭했고, 지금까지도 러시아 군에서는 ‘상무정신의 혼(魂)’과 같은 존재로 남아 있다. 푸틴 대통령은 2005년 인천 연안부두에 전사한 러시아 수병들의 추모비를 세우고, 인천시립박물관에 보관돼 왔던 바랴그호의 마스트 깃발을 장기 대여해 갈 정도로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때까지 러시아 측은 어선이나 해경정을 이용해 추모행사를 하면서 무척이나 섭섭해했습니다. 우리 무관부가 해군에 간청해 고속정을 내주었고, 장정길(張正吉) 당시 해군참모총장(해사 21기)과 국방무관인 제가 세르게예프 원수를 수행했습니다. 선상에서 세르게예프 원수가 눈시울을 붉혀가며 자신의 사관학교 시절 배운 바랴그호의 최후를 이야기하더군요. 이런 스킨십을 통해야만 한·러 군사교류는 물론 양국 협력관계가 진정으로 증대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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