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시 정계의 실세 4인방 가운데 한 명
⊙ 동학혁명 주도한 전봉준은 그를 부패관리라고 지목
⊙ 윤치호는 “민영환은 죽음으로 얻은 게 더 많다”고 기록
장철균
1950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 석사 / 제9회 외무고시,
주라오스 대사·주스위스 대사 / 현 서희외교포럼 대표, 중앙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
《21세기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스위스에서 배운다》 출간
⊙ 동학혁명 주도한 전봉준은 그를 부패관리라고 지목
⊙ 윤치호는 “민영환은 죽음으로 얻은 게 더 많다”고 기록
장철균
1950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 석사 / 제9회 외무고시,
주라오스 대사·주스위스 대사 / 현 서희외교포럼 대표, 중앙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
《21세기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스위스에서 배운다》 출간
1873년(고종 10),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조선은 개방정책을 폈다. 그중 하나가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 창설이었다. 재정난으로 기존의 군인들에 대한 군료(軍料)가 제대로 지불되지 못하자 1882년, 일본인 교관과 일본인 13명이 살해되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생했다. 고종은 청국에 군란 제압을 요청했다. 청이 4500명의 군대를 파견하자 일본도 군함을 이끌고 와서 군란으로 인한 피해를 보상하라고 요구했다.
청이 군란을 수습한 후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자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 신진 혁신 세력이 반대에 나섰다. 메이지 신(新)일본의 성공에 영향을 받은 이들은 청의 조선 속방화 정책에 저항하면서 친청 민씨 척족 세력과 각을 세워 대립하였다. 정한론(征韓論)의 분위기가 팽배해진 일본은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일본 공사를 통해 이들을 부추겼다.
김옥균 등은 1884년 10월 우정국(郵政局) 개설 축하연을 이용하여 거사를 감행했다. 때마침 조선에 주둔한 청군은 베트남을 둘러싼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3000여 명이 철수한 상태였다. 이들은 일본군 200명과 조선 군인 50여 명을 동원하여 고종과 민비를 볼모로 잡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 것이다.
정변이 일어나자 민비와 외척 정권은 다시 청에 원병을 요청했다. 서울에 남아 있던 1500여 명의 청군이 정변 세력을 공격하자 일본은 군대를 철수시켰다. 정변은 실패로 돌아갔고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은 공사관 화재와 거류민 희생에 대한 책임을 조선에 전가하였다. 결국 조선은 일본에 배상금과 일본 공사관 수축비를 부담하는 굴욕적인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하고 마무리하였다. 일본은 청국과도 천진(天津)조약을 체결해 조선에 대한 파병(派兵)권을 얻게 되었다.
청의 간섭 견제하기 위한 親露拒淸策과 한러 밀약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치르며 청의 조선 내정에 대한 간섭이 도를 넘었다. 청을 견제하기 위해 고종이 러시아에 접근한 이면에는 ‘외교 참모’ 민비가 있었다. 러시아도 독일과 영국이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조선과의 국교 수립을 서둘러 1884년 7월 조러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됐다.
군란과 정변의 내우외환 와중에 생부 민겸호(閔謙鎬)가 살해되어 거상하고 있던 민영환은 1884년(고종 21) 9월 이조참의에 임명되어 정치에 복귀했다. 이때 민씨 척족의 실세인 민영익(閔泳翊)이 갑신정변에서 칼에 맞고 간신히 목숨을 건져 상하이로 망명하면서 민영환이 민씨 척족 세력의 중심인물로 주목받게 된다.
1885년(고종 22) 2월, 예조참판 서상우(徐相雨)는 일본에 있던 러시아 공사 다비도프(Davidov)와 접촉해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보호와 군사교관의 파견 등을 협의했다. ‘제1차 한러 밀약’ 사건이다. 이 밀약이 청과 일본에 알려지면서 청의 이홍장(李鴻章)은 흥선대원군을 귀국시켜 조선의 친러정책을 견제하려 했다. 대원군은 고종을 폐위하고 큰아들 이재면을 임금으로 만들려는 계획도 꾸몄으나 실패했다.
제1차 러시아 접촉이 실패로 돌아가자 고종과 민비는 민영환을 내세웠다. 1886년 3월 민영환은 김가진(金嘉鎭) 등과 함께 러시아 측에 접근했다. 주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Karl Ivanovich Veber)를 통해 유사시 청국 견제를 위해 러시아가 군함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제2차 한러 밀약’ 사건이다. 이 시도도 민영익이 청국 주차관 원세개(袁世凱)에게 밀고함으로써 실패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리자 다시 1887년 출국하여 홍콩과 상해 등지를 전전하게 되고, 원세개는 청 정부에 고종 폐위와 대원군 섭정을 건의했다. 당황한 고종은 러시아 접촉을 부인하고 김가진 등을 문서날조 혐의로 유배시켜 사건을 무마시켰다. 김가진은 유배됐지만 민영환은 왕실의 보호로 이듬해에 예조판서가 된다.
일본 견제를 위한 引俄拒日策과 을미사변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조선은 다시 청에 원병을 요청했다. 이번에는 일본도 10년 전 체결한 ‘천진조약’을 근거로 조선에 출병했다. 출병에 앞서 정한을 위해 지난 10년을 준비해 온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했다.
일본은 전리품으로 요동반도(遼東半島)도 점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만주에 이해가 큰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연합해 1895년 ‘삼국간섭(三國干涉)’으로 개입했다. 일본은 수중에 넣었던 요동반도를 청에 반환하고 말았다. 러시아의 힘을 목격한 민비는 민영환 등을 앞세워 러시아를 끌어들였다.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으로 러시아를 일본의 경쟁상대로 등장시킨 것이다.
러시아의 힘을 두려워한 일본은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민비를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이 만행이 1895년 8월 자행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일본은 국모를 시해한 후 그 만행을 대원군과 민비의 권력투쟁에서 빚어진 사고로 위장시켰다. 고종은 할 수 없이 “왕후 민씨는 짐의 명령을 위조해 사변이 일어나게 만들었고 홀로 몸을 피해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왕후 민씨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곧이어 친러파가 축출되고, 김홍집(金弘集)을 주축으로 하는 친일 내각을 구성해 개혁을 단행했다. 개혁 중에는 단발령(斷髮令)도 포함돼 있었다. 고종은 1895년 11월, 단발령을 명하면서 동시에 왕세자와 함께 상투를 잘랐다.
아관파천과 친러 세력의 부활
을미사변을 당한 고종은 이제 궁궐도 불안했다. 이범진(李範瑨) 등 친러파는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1895년 11월 이 거사는 삼청동 춘생문(春生門)의 담을 넘다가 협력을 약속했던 친위대장 이진호(李軫鎬)가 배신해 실패하고 사건을 주도했던 이범진은 해외로 탈출했다. 이 사건에는 미국인 선교사와 교관, 미국 공사관 서기관 알렌(H.N.Allen), 러시아 공사 베베르(Veber) 등 구미 외교관도 직간접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단발령이 실시되자 전국에 걸쳐 의병이 일어났다. 김홍집 내각은 지방의 진위대가 의병을 진압하는 데 실패하자 중앙의 친위대 병력까지 동원했다. 수도 경비에 공백이 생긴 틈새를 이용해 해외로 탈출했던 이범진이 비밀리에 귀국하여 이완용(李完用) 등 친러 인사들과 고종의 파천 계획을 다시 모의했다.
고종이 파천(播遷)에 동의하자 러시아는 1896년 2월 10일 공사관 보호를 구실로 인천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군함 수군 120여 명을 무장시켜 한양에 주둔시켰다. 그리고 다음날 11일 새벽 왕과 왕세자는 극비리에 궁녀의 교자를 타고 경복궁 영추문(迎秋門)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하였다. 고종은 선조(宣祖), 인조(仁祖)에 이어 세 번째로 궁궐을 나와 파천한 왕이 되었다.
파천을 성공시킨 친러파는 고종을 앞세워 친일내각을 응징했다. 총리대신 김홍집은 성난 민중에게 타살되고 농상공부대신 정병하(鄭秉夏)는 참형되었다. 유길준(兪吉濬)을 비롯한 10여 명의 고관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탁지부대신 어윤중(魚允中)은 도피 중에 백성에게 살해되었고, 외무대신 김윤식(金允植)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파견된 조선의 특사
파천 후의 문제는 어떻게 고종이 경복궁으로 돌아오느냐는 것이었다. 이 문제도 러시아에 의지해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민영환은 을미사변 후 친일 내각이 들어서면서 전격 주미전권공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한 후 낙향했다.
고종은 파천 후 민영환을 불러냈다. 민영환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축하사절 특사로 모스크바에 파견하기 위함이었다. 임무는 일본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의 지원을 얻고 당면과제인 국왕의 환궁문제를 협의하는 것이었다. 이제 파천 이후 ‘인아거일(引俄拒日)’ 외교가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1896년 3월, 민영환은 대관식 참석을 위해 학부협판 윤치호(尹致昊) 등을 대동하고 제물포에서 출발하여 상해, 요코하마, 도쿄, 밴쿠버, 뉴욕, 워싱턴, 런던,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를 거쳐 러시아에 도착한다. 이때 그는 서구 문명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데, 기행문 《해천추범(海天秋帆)》은 이 여행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민영환 일행은 정작 대관식장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관모를 벗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러시아 차르의 대관식 참석은 그런대로 마쳤으나 대러 교섭은 녹록지 않았다. 고종의 밀명은 구체적으로 왕의 신변보호와 군경 양성을 위한 교관 파견, 내정과 산업을 지도할 고문 초빙, 차관 300만원 제공과 한러 간 전신선 건설 등이었다.
그중 핵심은 대일본 부채를 해결하기 위한 차관 교섭으로, 로바노프(Rovanov) 외무장관은 물론 외교부 아주국장 등과 협상을 벌였지만 실패했다. 러시아는 군사고문 파견은 가능하나 차관 제공과 전신선 설치는 불가하다는 입장이었다. 러시아가 이 문제에 냉담한 반응을 보인 이유는 민영환이 대러 교섭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조러협상의 ‘장외(場外)’에서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밀거래
러시아는 고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벌채권, 월미도의 저탄소 설치권 등 여러 이권을 차지했다. 일본은 큰 타격을 받았지만 러시아와의 무력대결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해 먼저 아관파천에 대한 열강의 태도를 타진했다. 열강들이 중립, 불간섭 입장을 표방함에 따라 일본은 파천의 현상을 인정하는 선에서 당분간 러시아와의 정면충돌을 피하는 방향으로 상호 접근을 모색해 나갔다.
일본 외상대리 사이온지(西園寺公望)와 주일러시아 공사 히트로보(Hitro Vo) 간에 고종의 환궁과 조선 내 주요 지역에 배치할 양국 군사의 규모 등에 대해 원칙 합의를 보았다. 5월 14일에는 일본이 아관파천의 인정, 을미사변에 대한 일본의 책임 시인과 조선 주둔 일본군 병력 감원 등을 골자로 하는 ‘베베르-고무라 각서(Veber-Komura Memorandum)’가 체결되었다(제1차 러일협정).
1896년 6월 9일, 러시아 황제 대관식이 치러지고 있던 모스크바의 한 밀실에서는 대관식 특사로 참석한 일본의 전직 총리 야마가타(山縣有朋)와 러시아 외상 로바노프 간에 은밀한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일본 측은 대동강과 원산 사이(북위 39도)를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하자는 방안을 제시했다. 로바노프는 이를 거부했다. 러시아는 며칠 전 6월 3일 청국과 비밀동맹을 교섭하면서 이때 이미 청에 조선의 영토보전을 약속한 바 있었다. 또한 현재의 유리한 상황에서 한반도가 분할되면 자국 함선의 출입과 육군의 활동도 구속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양국은 일본이 제안한 39도선 국토 분할안을 명기하지 않는 대신, 비밀조항에 향후 필요한 경우 러일 양국이 조선을 공동 점거할 수 있다는 데 합의했다. 그러고 제1차협정을 재확인하는 내용의 제2차 러일협정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Yamagata-Lobanov Agreement)’를 체결했다. 이러한 러일의 비밀교섭을 알지 못한 조선은 러시아의 개입과 관여를 오히려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고종은 러시아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각종 이권을 러시아에 제공했음에도 정작 러시아는 일본과 다른 거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양 세력의 反러시아 연대와 러일 ‘로젠-니시 협정’
러시아는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통해 조정의 인사와 정책에도 간여했다. 1897년 영국과 미국이 추천한 재정고문 브라운을 해고하고 러시아에서 알렉세예프를 데려왔다. 그를 통해 군사고문 파견, 한러은행 설립, 마산 군사기지화 등 경제・군사적 세력 확장을 획책했다.
또한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조선에 진출한 여타 서구 열강도 조선의 중요한 이권을 차지하려고 했다. 파천 중인 조선 정부는 실제로 많은 이권을 이들 열강에 넘겨주었다. 일본은 경인철도를 넘겨받기 위해 인수조합을 발족시키고 방곡령을 철회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목포와 진남포를 개항시켰다.
고종은 이러한 열강들의 이해가 교차하는 가운데 러시아 주도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지면서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하 한국)을 선포할 수 있었다.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민비를 명성황후로, 왕태자를 황태자로 개칭하는 등 청국, 일본과 동등한 지위로 승격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대한제국은 자력이 아닌 러시아 수중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고종이 환궁해 대한제국이 선포되던 1897년 11월, 독일이 산동반도 남부의 교주만을 기습적으로 점령하자 러시아는 여순과 대련을 강제 점령했다. 러시아가 만주에 영향력을 넓혀 나가자 이곳에 경제적 이해가 큰 미국과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하던 영국은 긴장했다. 러시아 견제에 이해를 같이한 일본, 미국, 영국의 해양 삼국은 상호 접근하면서 반(反)러시아 연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만주 지역에서의 열강의 대립은 곧바로 조선을 둘러싼 러일의 이해에 영향을 미쳤다. 영국은 1897년 11월, 8척의 군함으로 거문도를 점령하는 무력시위를 벌이고, 미국은 조선에서 빼앗은 경인철도 부설권 등 이권을 일본에 넘겨주어 일본을 통한 러시아 견제에 착수했다. 이듬해 1898년 러시아는 일본과의 타협을 모색했다. 러시아가 만주를 확보하는 대신 일본은 조선을 장악하기로 양국 간에 합의를 만들어 냈다. 1898년 4월, 일본과 러시아는 ‘만한교환(滿韓交換)’을 내용으로 하는 제3차 러일협약 ‘로젠-니시 협정(Rosen-Nish Agreement)’을 맺었다.
러일의 충돌과 미일의 ‘가쓰라-태프트 밀약’
1904년 2월, 준비된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기습, 격파했다. 일본은 1차전은 승리했지만 많은 전쟁비용을 미국-영국에 의존하고 있어 장기전은 어려웠다. 러시아도 국내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내심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이에 앞서 미국과 일본은 1905년 7월 비밀리에 ‘가쓰라-태프트 메모랜덤(Memorandum of Taft and Katsura)’에 합의해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승인을 교환해 놓고 있었다. 또한 그해 8월 일본은 영국과 ‘2차 영일동맹’을 맺어 조선과 인도의 지배를 상호 승인하였다.
일본은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미국과 영국은 ‘극동의 평화를 위해 일본이 탁월한 세력을 유지할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며 일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루스벨트의 중재하에 9월 러일 양국은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보호 조치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포츠머스 조약을 맺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하였다.
일본은 러일전쟁에 앞서 ‘한국보호화’ 계획도 치밀하게 준비해 놓고 있었다. 5만여 명의 일본군을 앞세워 전쟁 발발 보름 만에 한반도에서 군사전략상 필요한 곳을 사용할 수 있게 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맺고, 8월에는 제1차 한일협약을 맺어 일본인에 의한 고문정치를 실시해 나갔다.
을사늑약과 대한제국의 종말
1905년 10월, 일본 정부 수뇌는 추밀원의장(樞密院議長)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한국에 파견했다. 11월 9일 ‘한일협약안’을 들고 서울에 온 이토는 다음날 궁궐 내외를 포위하고 고종을 협박했다. 고종이 조약 승인을 거부하자 일본은 조정 대신들을 위협하면서 매수공작에 나섰다.
이토는 11월 17일 경운궁에서 어전회의를 열도록 했다. 고종은 강압에 의한 조약 체결을 피할 목적으로 의견의 개진 없이 대신들에게 결정을 위임했다. 이토는 군사령관과 헌병대장을 대동하고 궐내로 들어가 대신들에게 가부를 물었다.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은 불가(不可)를,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은 찬성했다. 이 다섯 명이 ‘을사오적’이다.
이토는 고종의 칙재(勅裁)를 강요했다. 이어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 간에 ‘한일협상조약’이 체결되었다(제2차 한일협약). 이 조약에 따라 한국은 외교・군사권을 일본에 박탈당했다. 외국의 공사관이 전부 폐지되고 주한공사관들도 철수했다. 대한제국이 국권을 상실한 것이다.
고종은 제2차 한일협약이 무효임을 국제사회에 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별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1935년 국제연맹은 ‘보호조약’의 효력이 발생할 수 없는 역사상의 조약 3개 중 하나로 을사늑약을 꼽았는데 이것은 1935년 발표된 〈하버드 법대 보고서〉를 인용한 것이다. 1963년에는 유엔 총회가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은 무효〉라는 보고서를 만장일치로 채택한 바 있다.
스스로 무너진 조선의 망국을 돌아보면서
민영환은 러일전쟁 당시 내부대신·학부대신에 있으며 러일전쟁에 엄정중립을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친일각료들과 일본의 압력에 의해 한직인 시종무관장으로 좌천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끝났을 때는 한성부 감옥에 수감 중인 이승만(李承晩)을 석방시켜 고종의 밀서를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전달토록 하였으나 이미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상태여서 이승만이 들고 간 밀서는 묵살당하고 말았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민영환은 5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고 항쟁할 것을 의론하였으나 대세를 뒤집을 수 없게 되자 자결을 선택하였다. 민영환의 자결은 연쇄적인 ‘순국 투쟁’을 불렀다. 전 참판 홍만식(洪萬植), 전 좌의정 조병세(趙秉世), 전 대사헌 송병선(宋秉璿), 학부주사 이상철(李相喆), 군인 김봉학(金奉學) 등도 순절했다.
민영환은 세 통의 유서를 남겼다. 한 통은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 제하의 국민에게 각성을 요망하는 내용이었고, 다른 한 통은 재경 외국사절들에게 또 다른 한 통은 고종에게 올리는 글이었다. 그가 자결했던 곳에서는 대나무가 솟아났고 이 대나무는 ‘혈죽’(血竹)이라 불렸다.
이제 민영환의 다른 모습을 통해 조선 망국의 원인을 추적해 보자. 동학혁명의 지도자 전봉준(全琫準)은 법정진술에서 민영환을 매관매직, 부정부패의 주역으로 지목하였다. 전봉준의 발언만으로 민영환이 부패한 관리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는 민영준, 민영달, 민영소와 함께 당시 실세 4인방 중 한 명이었다.
영국인 브라운(J.M.Brown)은 고종의 재정문란을 지적한 바 있고 민영환도 고종을 닮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국공사 알렌도 이러한 부패상을 기록에 남겼다. 그러나 민영환의 자결 파장은 컸다. 권력의 핵심인물이었던 그의 죽음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범으로 받아들여졌다. 부마(駙馬)였던 박영효가 일본 귀족이 되었고, 이완용 등 을사오적이 일제하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것과 대비되면서 민영환의 혈죽 ‘신화’는 더 부각됐다. 윤치호는 민영환이 생시의 노력으로 이룬 것보다 죽음으로 이룬 것이 더 많았다고 전했다.⊙
청이 군란을 수습한 후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자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 신진 혁신 세력이 반대에 나섰다. 메이지 신(新)일본의 성공에 영향을 받은 이들은 청의 조선 속방화 정책에 저항하면서 친청 민씨 척족 세력과 각을 세워 대립하였다. 정한론(征韓論)의 분위기가 팽배해진 일본은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일본 공사를 통해 이들을 부추겼다.
김옥균 등은 1884년 10월 우정국(郵政局) 개설 축하연을 이용하여 거사를 감행했다. 때마침 조선에 주둔한 청군은 베트남을 둘러싼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3000여 명이 철수한 상태였다. 이들은 일본군 200명과 조선 군인 50여 명을 동원하여 고종과 민비를 볼모로 잡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 것이다.
정변이 일어나자 민비와 외척 정권은 다시 청에 원병을 요청했다. 서울에 남아 있던 1500여 명의 청군이 정변 세력을 공격하자 일본은 군대를 철수시켰다. 정변은 실패로 돌아갔고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은 공사관 화재와 거류민 희생에 대한 책임을 조선에 전가하였다. 결국 조선은 일본에 배상금과 일본 공사관 수축비를 부담하는 굴욕적인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하고 마무리하였다. 일본은 청국과도 천진(天津)조약을 체결해 조선에 대한 파병(派兵)권을 얻게 되었다.
청의 간섭 견제하기 위한 親露拒淸策과 한러 밀약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치르며 청의 조선 내정에 대한 간섭이 도를 넘었다. 청을 견제하기 위해 고종이 러시아에 접근한 이면에는 ‘외교 참모’ 민비가 있었다. 러시아도 독일과 영국이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조선과의 국교 수립을 서둘러 1884년 7월 조러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됐다.
군란과 정변의 내우외환 와중에 생부 민겸호(閔謙鎬)가 살해되어 거상하고 있던 민영환은 1884년(고종 21) 9월 이조참의에 임명되어 정치에 복귀했다. 이때 민씨 척족의 실세인 민영익(閔泳翊)이 갑신정변에서 칼에 맞고 간신히 목숨을 건져 상하이로 망명하면서 민영환이 민씨 척족 세력의 중심인물로 주목받게 된다.
1885년(고종 22) 2월, 예조참판 서상우(徐相雨)는 일본에 있던 러시아 공사 다비도프(Davidov)와 접촉해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보호와 군사교관의 파견 등을 협의했다. ‘제1차 한러 밀약’ 사건이다. 이 밀약이 청과 일본에 알려지면서 청의 이홍장(李鴻章)은 흥선대원군을 귀국시켜 조선의 친러정책을 견제하려 했다. 대원군은 고종을 폐위하고 큰아들 이재면을 임금으로 만들려는 계획도 꾸몄으나 실패했다.
제1차 러시아 접촉이 실패로 돌아가자 고종과 민비는 민영환을 내세웠다. 1886년 3월 민영환은 김가진(金嘉鎭) 등과 함께 러시아 측에 접근했다. 주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Karl Ivanovich Veber)를 통해 유사시 청국 견제를 위해 러시아가 군함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제2차 한러 밀약’ 사건이다. 이 시도도 민영익이 청국 주차관 원세개(袁世凱)에게 밀고함으로써 실패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리자 다시 1887년 출국하여 홍콩과 상해 등지를 전전하게 되고, 원세개는 청 정부에 고종 폐위와 대원군 섭정을 건의했다. 당황한 고종은 러시아 접촉을 부인하고 김가진 등을 문서날조 혐의로 유배시켜 사건을 무마시켰다. 김가진은 유배됐지만 민영환은 왕실의 보호로 이듬해에 예조판서가 된다.
일본 견제를 위한 引俄拒日策과 을미사변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조선은 다시 청에 원병을 요청했다. 이번에는 일본도 10년 전 체결한 ‘천진조약’을 근거로 조선에 출병했다. 출병에 앞서 정한을 위해 지난 10년을 준비해 온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했다.
일본은 전리품으로 요동반도(遼東半島)도 점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만주에 이해가 큰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연합해 1895년 ‘삼국간섭(三國干涉)’으로 개입했다. 일본은 수중에 넣었던 요동반도를 청에 반환하고 말았다. 러시아의 힘을 목격한 민비는 민영환 등을 앞세워 러시아를 끌어들였다.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으로 러시아를 일본의 경쟁상대로 등장시킨 것이다.
러시아의 힘을 두려워한 일본은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민비를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이 만행이 1895년 8월 자행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일본은 국모를 시해한 후 그 만행을 대원군과 민비의 권력투쟁에서 빚어진 사고로 위장시켰다. 고종은 할 수 없이 “왕후 민씨는 짐의 명령을 위조해 사변이 일어나게 만들었고 홀로 몸을 피해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왕후 민씨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곧이어 친러파가 축출되고, 김홍집(金弘集)을 주축으로 하는 친일 내각을 구성해 개혁을 단행했다. 개혁 중에는 단발령(斷髮令)도 포함돼 있었다. 고종은 1895년 11월, 단발령을 명하면서 동시에 왕세자와 함께 상투를 잘랐다.
아관파천과 친러 세력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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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고종. 중앙에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가 고종이다. |
단발령이 실시되자 전국에 걸쳐 의병이 일어났다. 김홍집 내각은 지방의 진위대가 의병을 진압하는 데 실패하자 중앙의 친위대 병력까지 동원했다. 수도 경비에 공백이 생긴 틈새를 이용해 해외로 탈출했던 이범진이 비밀리에 귀국하여 이완용(李完用) 등 친러 인사들과 고종의 파천 계획을 다시 모의했다.
고종이 파천(播遷)에 동의하자 러시아는 1896년 2월 10일 공사관 보호를 구실로 인천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군함 수군 120여 명을 무장시켜 한양에 주둔시켰다. 그리고 다음날 11일 새벽 왕과 왕세자는 극비리에 궁녀의 교자를 타고 경복궁 영추문(迎秋門)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하였다. 고종은 선조(宣祖), 인조(仁祖)에 이어 세 번째로 궁궐을 나와 파천한 왕이 되었다.
파천을 성공시킨 친러파는 고종을 앞세워 친일내각을 응징했다. 총리대신 김홍집은 성난 민중에게 타살되고 농상공부대신 정병하(鄭秉夏)는 참형되었다. 유길준(兪吉濬)을 비롯한 10여 명의 고관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탁지부대신 어윤중(魚允中)은 도피 중에 백성에게 살해되었고, 외무대신 김윤식(金允植)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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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중앙에 갓을 쓴 인물)은 1896년 학부대신 윤치호 등을 대동하고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참석했다. |
고종은 파천 후 민영환을 불러냈다. 민영환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축하사절 특사로 모스크바에 파견하기 위함이었다. 임무는 일본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의 지원을 얻고 당면과제인 국왕의 환궁문제를 협의하는 것이었다. 이제 파천 이후 ‘인아거일(引俄拒日)’ 외교가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1896년 3월, 민영환은 대관식 참석을 위해 학부협판 윤치호(尹致昊) 등을 대동하고 제물포에서 출발하여 상해, 요코하마, 도쿄, 밴쿠버, 뉴욕, 워싱턴, 런던,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를 거쳐 러시아에 도착한다. 이때 그는 서구 문명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데, 기행문 《해천추범(海天秋帆)》은 이 여행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민영환 일행은 정작 대관식장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관모를 벗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러시아 차르의 대관식 참석은 그런대로 마쳤으나 대러 교섭은 녹록지 않았다. 고종의 밀명은 구체적으로 왕의 신변보호와 군경 양성을 위한 교관 파견, 내정과 산업을 지도할 고문 초빙, 차관 300만원 제공과 한러 간 전신선 건설 등이었다.
그중 핵심은 대일본 부채를 해결하기 위한 차관 교섭으로, 로바노프(Rovanov) 외무장관은 물론 외교부 아주국장 등과 협상을 벌였지만 실패했다. 러시아는 군사고문 파견은 가능하나 차관 제공과 전신선 설치는 불가하다는 입장이었다. 러시아가 이 문제에 냉담한 반응을 보인 이유는 민영환이 대러 교섭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조러협상의 ‘장외(場外)’에서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밀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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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6월, 러시아 황제 대관식이 거행될 당시 비밀 협상을 벌였던 러시아 외상 로바노프와 일본 전직 총리 야마가타 일행. |
일본 외상대리 사이온지(西園寺公望)와 주일러시아 공사 히트로보(Hitro Vo) 간에 고종의 환궁과 조선 내 주요 지역에 배치할 양국 군사의 규모 등에 대해 원칙 합의를 보았다. 5월 14일에는 일본이 아관파천의 인정, 을미사변에 대한 일본의 책임 시인과 조선 주둔 일본군 병력 감원 등을 골자로 하는 ‘베베르-고무라 각서(Veber-Komura Memorandum)’가 체결되었다(제1차 러일협정).
1896년 6월 9일, 러시아 황제 대관식이 치러지고 있던 모스크바의 한 밀실에서는 대관식 특사로 참석한 일본의 전직 총리 야마가타(山縣有朋)와 러시아 외상 로바노프 간에 은밀한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일본 측은 대동강과 원산 사이(북위 39도)를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하자는 방안을 제시했다. 로바노프는 이를 거부했다. 러시아는 며칠 전 6월 3일 청국과 비밀동맹을 교섭하면서 이때 이미 청에 조선의 영토보전을 약속한 바 있었다. 또한 현재의 유리한 상황에서 한반도가 분할되면 자국 함선의 출입과 육군의 활동도 구속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양국은 일본이 제안한 39도선 국토 분할안을 명기하지 않는 대신, 비밀조항에 향후 필요한 경우 러일 양국이 조선을 공동 점거할 수 있다는 데 합의했다. 그러고 제1차협정을 재확인하는 내용의 제2차 러일협정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Yamagata-Lobanov Agreement)’를 체결했다. 이러한 러일의 비밀교섭을 알지 못한 조선은 러시아의 개입과 관여를 오히려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고종은 러시아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각종 이권을 러시아에 제공했음에도 정작 러시아는 일본과 다른 거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는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통해 조정의 인사와 정책에도 간여했다. 1897년 영국과 미국이 추천한 재정고문 브라운을 해고하고 러시아에서 알렉세예프를 데려왔다. 그를 통해 군사고문 파견, 한러은행 설립, 마산 군사기지화 등 경제・군사적 세력 확장을 획책했다.
또한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조선에 진출한 여타 서구 열강도 조선의 중요한 이권을 차지하려고 했다. 파천 중인 조선 정부는 실제로 많은 이권을 이들 열강에 넘겨주었다. 일본은 경인철도를 넘겨받기 위해 인수조합을 발족시키고 방곡령을 철회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목포와 진남포를 개항시켰다.
고종은 이러한 열강들의 이해가 교차하는 가운데 러시아 주도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지면서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하 한국)을 선포할 수 있었다.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민비를 명성황후로, 왕태자를 황태자로 개칭하는 등 청국, 일본과 동등한 지위로 승격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대한제국은 자력이 아닌 러시아 수중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고종이 환궁해 대한제국이 선포되던 1897년 11월, 독일이 산동반도 남부의 교주만을 기습적으로 점령하자 러시아는 여순과 대련을 강제 점령했다. 러시아가 만주에 영향력을 넓혀 나가자 이곳에 경제적 이해가 큰 미국과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하던 영국은 긴장했다. 러시아 견제에 이해를 같이한 일본, 미국, 영국의 해양 삼국은 상호 접근하면서 반(反)러시아 연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만주 지역에서의 열강의 대립은 곧바로 조선을 둘러싼 러일의 이해에 영향을 미쳤다. 영국은 1897년 11월, 8척의 군함으로 거문도를 점령하는 무력시위를 벌이고, 미국은 조선에서 빼앗은 경인철도 부설권 등 이권을 일본에 넘겨주어 일본을 통한 러시아 견제에 착수했다. 이듬해 1898년 러시아는 일본과의 타협을 모색했다. 러시아가 만주를 확보하는 대신 일본은 조선을 장악하기로 양국 간에 합의를 만들어 냈다. 1898년 4월, 일본과 러시아는 ‘만한교환(滿韓交換)’을 내용으로 하는 제3차 러일협약 ‘로젠-니시 협정(Rosen-Nish Agreement)’을 맺었다.
러일의 충돌과 미일의 ‘가쓰라-태프트 밀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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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7월, 미국과 일본이 각각 필리핀과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를 상호 인정하기로 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당사자인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왼쪽)와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 |
이에 앞서 미국과 일본은 1905년 7월 비밀리에 ‘가쓰라-태프트 메모랜덤(Memorandum of Taft and Katsura)’에 합의해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승인을 교환해 놓고 있었다. 또한 그해 8월 일본은 영국과 ‘2차 영일동맹’을 맺어 조선과 인도의 지배를 상호 승인하였다.
일본은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미국과 영국은 ‘극동의 평화를 위해 일본이 탁월한 세력을 유지할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며 일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루스벨트의 중재하에 9월 러일 양국은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보호 조치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포츠머스 조약을 맺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하였다.
일본은 러일전쟁에 앞서 ‘한국보호화’ 계획도 치밀하게 준비해 놓고 있었다. 5만여 명의 일본군을 앞세워 전쟁 발발 보름 만에 한반도에서 군사전략상 필요한 곳을 사용할 수 있게 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맺고, 8월에는 제1차 한일협약을 맺어 일본인에 의한 고문정치를 실시해 나갔다.
을사늑약과 대한제국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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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 |
이토는 11월 17일 경운궁에서 어전회의를 열도록 했다. 고종은 강압에 의한 조약 체결을 피할 목적으로 의견의 개진 없이 대신들에게 결정을 위임했다. 이토는 군사령관과 헌병대장을 대동하고 궐내로 들어가 대신들에게 가부를 물었다.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은 불가(不可)를,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은 찬성했다. 이 다섯 명이 ‘을사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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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한일협약이 무효임을 알리기 위해 영국에 전달한 고종의 친서. |
고종은 제2차 한일협약이 무효임을 국제사회에 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별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1935년 국제연맹은 ‘보호조약’의 효력이 발생할 수 없는 역사상의 조약 3개 중 하나로 을사늑약을 꼽았는데 이것은 1935년 발표된 〈하버드 법대 보고서〉를 인용한 것이다. 1963년에는 유엔 총회가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은 무효〉라는 보고서를 만장일치로 채택한 바 있다.
스스로 무너진 조선의 망국을 돌아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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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민영환은 5적의 처형과 조약 파기를 요구하고 항쟁할 것을 제기했으나 대세를 뒤집을 수 없게 되자 자결했다. 세 통의 유서를 남긴 민영환의 유서. |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민영환은 5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고 항쟁할 것을 의론하였으나 대세를 뒤집을 수 없게 되자 자결을 선택하였다. 민영환의 자결은 연쇄적인 ‘순국 투쟁’을 불렀다. 전 참판 홍만식(洪萬植), 전 좌의정 조병세(趙秉世), 전 대사헌 송병선(宋秉璿), 학부주사 이상철(李相喆), 군인 김봉학(金奉學) 등도 순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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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들이 보관해 온 민영환의 혈죽. |
이제 민영환의 다른 모습을 통해 조선 망국의 원인을 추적해 보자. 동학혁명의 지도자 전봉준(全琫準)은 법정진술에서 민영환을 매관매직, 부정부패의 주역으로 지목하였다. 전봉준의 발언만으로 민영환이 부패한 관리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는 민영준, 민영달, 민영소와 함께 당시 실세 4인방 중 한 명이었다.
영국인 브라운(J.M.Brown)은 고종의 재정문란을 지적한 바 있고 민영환도 고종을 닮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국공사 알렌도 이러한 부패상을 기록에 남겼다. 그러나 민영환의 자결 파장은 컸다. 권력의 핵심인물이었던 그의 죽음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범으로 받아들여졌다. 부마(駙馬)였던 박영효가 일본 귀족이 되었고, 이완용 등 을사오적이 일제하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것과 대비되면서 민영환의 혈죽 ‘신화’는 더 부각됐다. 윤치호는 민영환이 생시의 노력으로 이룬 것보다 죽음으로 이룬 것이 더 많았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