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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의 기무사(機務司) 비록 〈2〉 김창룡 특무대장 암살 사건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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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암살 미수 사건 나자 미(美)문화원 필름 구해다가 범인 찾아내
⊙ 군 장성 축첩(蓄妾), 국방부 원면(原綿) 부정 사건 등 수사하면서 함경도 군맥(軍脈)과 갈등
⊙ 이승만, 암살 사건 보고받으면서 “내가 다 알고 있어. 정 총장이 맞지?”
⊙ 특무대 실무 선에서 박정희(朴正熙)의 도미(渡美) 유학 막자, “좋은 성적 내고 오라”면서 도미 허용
육군 지휘관들을 접견하는 이승만 대통령. 왼쪽이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그 옆이 김창룡 특무대장.
  6·25 남침으로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놓여 있던 때에도 군내에서는 엄청난 부정부패가 자행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국민방위군 사건이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연합군이 후퇴를 시작하던 1950년 12월 11일 정부는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공포했다. 17~40세 장정(壯丁)들을 소집해서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나중에 정부가 발표한 바에 의하면 239만여 명이 등록했으나, 실제 징집된 것은 68만여 명이었고, 27만여 명이 낙오병이 됐다.
 
  국민방위군 지휘부는 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물자들을 착복하거나 군 상층부, 정치권에 상납(上納)했다. 그 규모가 전체 예산 209억원 가운데 10%가 넘는 23억원과 쌀 5만2000석에 달했다. 9만여 명의 장정이 아사(餓死), 병사(病死), 동사(凍死)했다. 결국 국회에서 이철승(李哲承) 의원 등이 문제 삼으면서 이 사건은 정치스캔들로 비화했다. 1951년 4월 국민방위군은 해산되었다. 사령관 김윤근(육군 준장, 전 대한청년단장), 부사령관 윤익헌(육군 대령) 등 5명은 군사재판에서 유죄 선고를 받고 총살당했다.
 
  김창룡 합동수사본부장도 이 사건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정일권(丁一權)이었다. 6·25 개전 당시 육군 준장이었던 정일권은 소장 진급과 함께 육군참모총장 겸 육해공군 총사령관이 됐다. 함경북도 경원 출신인 그는 만주 간도로 건너가 그곳에서 광명중학교를 나왔다. 이후 그는 만주육군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 일본육군대학교를 거쳐 만주군 헌병장교가 됐다. 정일권은 그 시절 함경도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다. 함경도 출신의 우수한 학생들이 광명중학교로 진학했다. 이 가운데는 해방 후 북한 보위부에 들어간 이도 많았다.
 
  김창룡 본부장은 정일권을 비롯한 군내 함경도 출신 엘리트들과 정·관계의 함경도 출신자들에게 북한의 공작이 들어올 가능성을 염려했다. 증언자인 이대인 전 기무사 연구관은 “김점곤(金點坤) 전 경희대 교수(예비역 육군 소장)는 ‘6·25 직후 수원 임시육군본부에서 김창룡이 싸들고 온 존안(存案)자료를 얼핏 보았는데, 맨 위에 정일권에 대한 것이 놓여 있어서 깜짝 놀랐다’고 증언했다”고 말했다.
 
  김창룡 본부장은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해서도 전쟁 상황에서 모든 권한을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는 군 상층부와 일부 정치인들이 결탁한 국가전복 음모라는 관점에서 접근했다. 자연히 정일권 등 군 상층부는 자신들을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는 그를 거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부산정치파동
 
원용덕 헌병총사령관.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단락된 후인 1951년 6월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을 해임,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명분은 사단장 등 일선 지휘관 경험 없이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정 장군에게 선진 군사기술을 공부하고 올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후임은 일본 육사 출신인 이종찬(李鍾贊) 장군이었다.
 
  이종찬 장군이 육군참모총장으로 있던 1952년 5월 26일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났다. 부산정치파동은 국회에서의 간접선거에 의해서는 대통령 당선이 어려워진 이승만 대통령이 직선제(直選制) 개헌(改憲)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종의 친위(親衛)쿠데타였다. 당시 미국은 자신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는 이승만 대통령 대신 장면(張勉) 국무총리를 내세우려 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야당이 지배하고 있는 국회를 무력화(無力化)시키기 위해 부산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려 했다. 하지만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내세워 이에 반대했다. 한국군에 대한 작전권을 갖고 있던 미군은 유사시 미군이나 한국군을 동원해 이승만을 하야시킨다는 에버레디 작전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의존할 수 있는 것은 육해공군헌병총사령부(사령관 원용덕 소장)와 특무부대(부대장 김창룡 대령)였다. 김창룡 대령은 부산정치파동이 발생하기 1년 전인 1951년 5월 15일 특무부대장으로 취임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5월 25일 원용덕 소장과 김창룡 대령을 불렀다. 이 대통령은 미국이 장면을 옹립하려 하고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이 계엄 선포에 반대하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두 사람에게 물었다.
 
  “원 장군, 창룡이, 적어도 미국에 할 말 해가면서 나라를 반듯하게 세울 수 있는 사람을 누구라고 생각하나?”
 
  두 사람은 “각하십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대통령이 말했다.
 
  “장면 총리가 고분고분 말을 잘 들으니 그 사람을 앞세우려고 하는데, 미국 말 고분고분 잘 들어서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겠어? 두 사람은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나?”
 
  두 사람은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이 대통령이 말했다.
 
  “왜 말을 못 하나? 미국이라는 나라가 힘이 있다고 하지만, 우리 일은 우리가 책임을 지고 해나가야 하는 것 아니야? 대한민국을 끝까지 살려나갈 수 있는 사람을 누구라고 생각해? 내가 장면 총리에게도 ‘당신이 대한민국을 살려나갈 수 있다면 당신이 해’라고 이야기한 사람이야.”
 
  그러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나라를 살려야 할 사람은 당신들 두 사람이야”라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적과 내통한 국회의원들을 특무부대장이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김창룡 특무부대장은 “특무부대는 공산당과 군내의 반란 움직임에 대처하는 데 진력하겠다”고 진언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 임무를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에게 넘겼다. 헌병총사령부는 다음날 국회의원들의 통근버스를 견인차로 끌고 갔다. 헌병총사령부는 두 차례에 걸쳐 서범석 의원 등을 국제공산당과 연계해 국가변란을 도모했다는 혐의로 구속했다.
 
  육군 일각에서는 후방에 있는 2개 대대병력을 부산으로 보내 이승만 대통령이 선포한 계엄령을 무력화하는 방안이 논의됐다. 이때 실병지휘관으로 내정됐던 사람이 육군 작전국 차장이던 박정희 대령이었다. 부산정치파동은 1952년 7월 4일 국회에서 발췌개헌안이 통과되면서 일단락됐다. 7월 22일 이승만 대통령은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을 해임했다. 후임으로는 만주군 출신인 제1군단장 백선엽(白善燁) 중장이 임명됐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었던 육군본부 지휘부는 뿔뿔이 흩어졌다. 이종찬 전 참모총장은 미국의 권유로 망명성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승만 암살 미수 사건
 
  부산정치파동이 한창이던 1952년 6월 25일,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임시수도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열린 6·25 1주년 행사에서 전 의열단원 유시태가 권총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저격한 것이다. 범인 유시태는 현장에서 체포됐다.
 
  전시(戰時), 계엄 중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한 수사는 특무대의 몫이었다. 김창룡 특무부대장은 유시태를 직접 심문했다. 유시태는 “대통령이 헌법을 무시하고 독재를 강화하려고 하는 데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 대통령을 저격해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 싶었다”고 진술했다. 김창룡 특무부대장은 유시태의 배후에 현역 정치인이 있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는 노련한 수사관 고영섭과 엄재림에게 사건 수사를 맡겼다. 엄재림은 엄대비의 6촌 조카로 여순반란 사건 후 숙군(肅軍)수사 때부터 김창룡 특무부대장의 최측근이었다.
 
  두 사람은 사건 당시 유시태 옆에 민주국민당 소속 국회의원 김시현(金始顯)이 앉아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김시현은 일제(日帝)시대 때 의열단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였다. 유시태는 그 시절 김시현의 부하였다. 하지만 김시현이 직접 관여했다는 증거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수사관들로부터 이 사실을 보고받은 김창룡 특무부대장은 미 문화원(USIS)의 협조를 받아보라고 지시했다. 두 수사관은 6・25 기념식 장면을 촬영한 USIS의 16mm 필름을 입수했다. 필름을 찬찬히 살펴보니, 이승만 대통령이 연설을 시작할 무렵 김시현이 자신과 유시태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모자에서 권총을 꺼내 유시태에게 건네주는 장면이 나왔다. 두 사람의 보고를 받은 김창룡 특무부대장은 직접 영상을 확인한 후 김시현 체포를 지시했다.
 
  부대장실로 잡혀온 김시현에게 김창룡 특무부대장은 “왜 대통령을 죽이려 했어요?” “사람을 함부로 죽여도 되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김창룡 특무부대장은 누구에게나 이런 식으로 경칭을 사용했다. 김시현은 “역시 김창룡이라는 사람은 생사람 잡는 데 뛰어나구먼!”이라며 맞섰다. 하지만 그도 자신이 유시태에게 권총을 건네주는 장면이 나오는 USIS의 영상물을 보고는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이승만의 군부 분할 통치
 
1956년 6월 정일권은 육군참모총장(왼쪽)에서 물러났다. 오른쪽은 신임 육군참모총장 이형근 대장.
  이승만 대통령은 집권 기간 내 군부를 분할 통치했다. 휴전 이후에는 만주군 출신인 정일권(함북, 제5・8대 육군참모총장), 백선엽(평남, 제7・10대 육군참모총장), 이형근(李亨根, 충남, 제9대 육군참모총장) 등 세 명의 대장(大將)을 교대로 발탁하면서 서로 견제하도록 했다.
 
  이 중에서 가장 세력이 강했던 것은 정일권을 필두로 하는 함경도계였다. 당시 주한미국대사관에 근무하던 필립 하비브(후일 주한미국대사 역임)에 의하면, 함경도계 장성은 75명에 달했다. 이들은 정일권을 중심으로 글자 그대로 똘똘 뭉쳐 있었다. 백선엽의 평안도계는 40여 명 정도였다. 하지만 백선엽은 정일권만큼 자기 사람을 챙기는 스타일은 아니어서 같은 평안도 출신인 장도영(張都暎)은 나중에 자기 파벌을 만들어 나갈 정도였다. 일본 육사 출신 장성이 중심이 된 이형근계는 10명 미만으로 파벌 색이 가장 옅었다.
 
  김창룡 특무부대장은 함북 출신이면서도 정일권계(系)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정일권계를 군부 부패의 온상으로 보았다. 김창룡 특무부대장은 늘 장제스(蔣介石)군이 마오쩌둥(毛澤東)군에게 패해서 대륙을 잃은 것은 부정부패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군부가 부패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생각 때문에 김창룡 특무부대장은 작은 부패 하나도 그냥 넘기려 하지 않았다. 반면에 정일권계에서는 김창룡 특무부대장에 대해 “같은 함경도 출신이면서도 인기없는 이승만 대통령에게만 충성하는 석두(石頭)”라며 불만스러워했다.
 
  정일권은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후 제2사단장으로 부임했다. 육군 중장, 그것도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사람이 사단장을 맡은 것은 우리 군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다. 정일권이 2사단장으로 취임할 때의 일이었다. 다른 휘하 부대장, 참모들은 사단장에게 인사를 하면서 깍듯한 자세를 취했는데, 자세가 불량한 사람이 있었다. 특무부대장 허태영 소령이었다.
 
 
 
허태영

 
  허태영은 일제 헌병 오장(伍長) 출신이었다. 허태영은 좋게 말하면 호방하고, 나쁘게 말하면 허풍이 심한 스타일이었다. 평양농업학교 시절부터 그의 별명은 ‘허꽝’이었다. 주색잡기(酒色雜技)에 능했고, 돈을 잘 만들어 부하들에게 풀면서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 김창룡과는 정반대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정일권 2사단장은 자신에게 불손했던 사단 특무부대장 허태영 소령을 좋아했다. 늘 허태영을 불러서 함께 식사를 했다. 지난날의 소소한 무용담을 이야기하며 껄껄거렸다. 육해공군 총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으로 전군(全軍)을 호령하다가 일선 사단장으로 내려온 정일권은 허태영과 어울리면서 우울한 심사를 풀어보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허태영이 중령으로 진급해 대전지구 특무부대장으로 나간 후에도, 정일권은 허태영을 찾아가 금일봉을 주기도 했다.
 
  반면에 허태영은 김창룡 특무부대장과는 잘 맞지 않았다. 그는 부하들 앞에서 “관동군 헌병 오장 출신인 김창룡이 군대의 선후배들을 모른 체하고, 너무 독재를 한다”고 부대장을 비난하곤 했다. 부하나 동료들에게 술을 사면서 “언젠가는 나도 특무부대장을 할 것”이라고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가는 곳마다 병적(兵籍)에도 올라 있지 않은 자들을 4~5명씩 운전사 등의 명목으로 부하라고 몰고 다녔다.
 
  이런 언동이 김창룡 특무부대장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 없었다. 결국 특무대 비위(非違)장교들을 정리할 때, 허태영도 일반 부대로 전출했다. 특무대를 떠나던 날 허태영은 김창룡 부대장에게 신고를 하고 부대장실을 나온 후 권총을 뽑아 부대장실에 대고 한 방을 쏘았다. 엄재림 부관은 오발(誤發)사고였다고 이를 덮어주었다.
 
  특무대를 떠난 허태영을 거두어준 사람은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이었다. 허태영은 1954년 11월 서울지구병사구(兵事區) 사령관이 됐다. 지금의 서울지방병무청장에 해당하는 이 자리는 대령이나 장군이 가는 자리였다. 중령인 허태영이 임시대령 계급장을 달고 이 자리를 맡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1년 뒤 허태영은 병사구사령관 자리에서 해임됐다. 무보직 상태가 된 그는 “김창룡 때문”이라면서 김창룡 특무부대장을 원망했다.
 
 
  軍의 부패 百態
 
  1955년 8월, 동해안 한 사단장의 후처(後妻)가 전처(前妻) 소생 아들을 굶겨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전처는 이 사실을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에 진정했다. 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대로(大怒)했다. 이 대통령은 김창룡 특무부대장을 불러 “군의 기강이 이토록 문란해서야 되겠느냐?”면서 군 장성들의 축첩 사례를 조사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사실 당시 30대 초・중반에 별을 두세 개씩 단 고급 장성들 사이에서 축첩을 한 사람은 하나 둘이 아니었다.
 
  이 무렵 국회에서는 국방부 원면(原綿) 부정 사건이 논란이 되고 있었다. 미국이 한국군 방한복을 만드는 데 쓰라고 제공한 1등급 고급 원면을 군 고위층이 모 방적회사 사장과 짜고 3등급 인도산 원면으로 바꿔치기한 사건이었다. 이기붕(李起鵬) 국회의장이 확인한 바에 의하면, 방적회사 사장이 군 고위층에게 준 돈은 5억환에 달했다. 그중 일부는 다시 정치권으로 흘러들어갔다. 이기붕 국회의장 집을 드나들던 특무대 소속 국회연락장교에 의하면, 한번은 군 고위층이 이기붕 의장에게 “겨울에 입으시라”면서 미 군용 파일럿 점퍼를 한 상자 보냈는데, 상자가 너무 무거워 살펴보니 점퍼 밑으로 돈다발이 가득했다고 한다.
 
  김창룡 특무부대장도 부하인 고영섭 수사관으로부터 “군 최고위층 장군이 부하들을 장군으로 승진시키면서 1500만환을 상납받았고, 백금(白金)으로 된 계급장, 황금 단추, 황금과 백금으로 된 벨트를 착용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있었다. 고영섭 수사관은 “군의 부패가 한계를 넘어서 이제 국가 존망이 걱정스러울 정도”라고 진언했다.
 
  그 외에도 당시 군내에는 크고 작은 비리들이 적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후생사업이었다. 부족한 부대 운영자금을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장병들을 동원해 나무를 베어 장작이나 목재를 만들거나 숯을 굽고, 두부나 콩나물을 만들어 내다 팔았다. 기름이나 피복, 군량 등 군수물자를 착복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찰과 헌병에게 후생사업을 단속하도록 지시했지만, 잘 먹혀들지 않았다. 그러자 이 대통령은 특무대도 단속에 투입하도록 지시했다. 한번은 육군참모총장 공관으로 가는 도벌(盜伐)장작을 실은 트럭이 특무대원에게 적발됐다. 특무대원은 김창룡 부대장에게 직접 보고를 했다. 김창룡 부대장은 “참모총장 관사가 아니라 대통령 관저로 가는 거라고 해도 도벌장작은 도벌장작이야요! 부대로 연행해 원칙대로 조사하세요!”라고 지시했다.
 
 
 
謀議

 
20사단을 방문한 강문봉 중장(가운데). 왼쪽에서 두 번째가 박정희 준장,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채명신 준장.
  국방부 원면 부정 사건 조사를 맡게 된 김창룡 특무부대장은 후방작전과 군수지원 업무를 맡고 있던 2군 사령부(사령관 강문봉 중장)를 수사했다. 강문봉(姜文奉) 2군 사령관은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의 직계(直系)였다. 특무대 수사관들은 2군 사령부에서 미국산 원면 수입면장과 바꿔치기된 인도산 원면 수입면장을 복사해 갔다. 한국은행에서는 미국산 고급 원면이 인도산 저급면으로 바꿔치기되는 과정에서 5억환 상당의 수표가 오간 사실을 확인했다. 특무대는 특히 이렇게 부정으로 연결된 군 고위층과 정치권이 고령(高齡)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불충(不忠)을 도모했을 가능성까지 유의했다.
 
  수사망이 좁혀져 오자 군 고위층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강문봉 2군 사령관은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에게 특무대가 원면 관련 면장들을 복사해 간 사실을 보고하고, 특무대의 비리를 조사해 보겠다고 했다. 김창룡 특무부대장의 부관, 참모, 운전사 등에게 접근해 김창룡의 공사(公私)생활을 캤다. 하지만 나오는 대답은 집에도 거의 들어가지 않고 부대장실 야전침대에서 잠을 자며 업무에만 매달린다는 얘기였다. 육군참모총장실에서 내려간 특무부대장 정보비 내역을 뒤져봐도 한 푼도 유용한 게 없었다.
 
  김창룡 특무부대장에 대한 모략도 들어갔다. 어느 날 이기붕 의장 집에 드나들던 특무대 국회연락장교는 이 의장으로부터 묘한 말을 들었다. “김창룡 장군이 월남(越南)하기 전에 북한 정보기관에서 근무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이냐?”는 것이었다. 연락장교가 그런 일 없다고 대답하자 이기붕은 “이승만 대통령께서 정일권 총장에게 김창룡을 조사하라고 하명(下命)했다”면서 김창룡에게 몸조심하라 전해라고 말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김창룡 특무부대장은 화를 냈다.
 
  “또 모략이야! 모략을 꾸며대 본들 사실이 없는 것을 왜들 그래요! 나쁜 사람들! 이번에 군내 부정부패 세력들을 정리하고는 아무래도 군적(軍籍)을 떠나 조용하게 살아야 할 것 같아요.”
 
  그러자 군 고위층에서는 방향을 바꾸었다. 김창룡 특무부대장을 암살하기로 한 것이다. 그 일을 맡게 된 사람이 김창룡 특무부대장에게 원한을 품은 허태영이었다.
 
  허태영에게는 늘 그를 따라다니는 신초식, 송용고 등의 부하들이 있었다. 이들은 허태영 밑 특무대에서 근무했다고 하지만, 병적에는 올라 있지 않았다. 허태영의 사병(私兵)이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당시 군 행정은 엉망이었다.
 
 
  암살 미수
 
김창룡 암살범 허태영.
  1955년 9월 어느 날, 허태영은 “아무 죄도 없는 나를 잡아먹으려 드는 게 김창룡이다. 그놈이 있는 한 나나 너희나 살길이 없다”면서 김창룡 특무부대장을 죽이겠다는 뜻을 밝혔다. 허태영은 “이번 일은 높은 분들과도 합의가 있었다”면서 “김창룡을 없애고도 절대 체포되지 않을 것이며, 만일의 경우 체포된다고 해도 일주일 내에 석방시켜 주겠다”고 장담했다.
 
  1955년 12월 3일 김창룡 특무부대장은 서울 회현동 소재 요정 신성에서 강문봉 2군 사령관을 비롯한 군 고위 장성들과 식사를 같이했다. 그런데 낌새가 이상했다. 의당 가운데 자리에 앉아야 할 강문봉 중장이 가운데 자리를 김창룡 특무부대장에게 양보하고 다른 장성들은 왠지 그의 옆자리를 피하는 것 같았다.
 
  사실 이날은 신초식이 김창룡 특무부대장을 저격하기로 한 날이었다. 하지만 김창룡 부대장의 신변안전을 걱정한 부관이 신성 지배인에게 방을 바꾸어 달라고 했다. 결국 신초식은 김창룡 부대장 등이 식사하고 있는 방을 찾지 못해 암살에 실패했다.
 
  김창룡 부대장은 귀가해서 부인에게 장군들이 자기 옆자리를 피하더라는 얘기를 하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틀간 고민한 후 부인은 “위험한 거 아닌가요?”라고 했다. 부인도 수상한 사람들이 집 근처를 살피고 돌아가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국방부 원면부정사건 등 보고 예정
 
서울 통의동(옥인동)에 있던 특무부대 본부(1955~1971년).
  1956년 1월 28일 오전 7시30분, 허태영 일당은 원효로 1가 삼거리에서 출근길의 김창룡 특무부대장을 저격하려 했다. 김창룡 부대장의 집은 서울 원효로 1가 17번지에 있었다. 1955년 초 특무부대가 서울로 옮겨올 무렵, 이승만 대통령이 “잠이라도 제대로 자면서 일하라”고 하사한 집이었다. 하지만 김창룡 부대장이 이미 출근한 뒤여서 이날은 저격에 실패했다.
 
  이틀 후인 1월 30일 오전 7시 신초식, 송용고 등 범인들은 원효로 1가 삼거리 길로 가서 아직 김창룡 부대장이 출근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이 시각, 김창룡 부대장은 초임 소위였던 자신을 1연대 정보장교로 임명해 주었던 이성가 5관구 사령관과 통화하고 있었다. 그는 이 장군에게 “경무대에 올라가 군내 축첩자와 국방부 원면 부정 사건에 대해 보고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 장군은 “몸조심하라”고 당부했다.
 
  7시30분 김창룡 특무부대장을 태운 지프가 원효로 삼거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신초식 등은 자신들의 지프로 가로막았다. 김창룡 부대장의 운전사 박대복 중사가 경적을 울렸다. 순간 지프 안에서 송용고와 신초식이 튀어나왔다. 송용고는 육군 소령, 신초식은 육군 중위 계급장을 단 군복 차림이었다. 송용고가 미제 45구경 권총 두 발을 쏘았다. 신초식도 네 발을 발사했다. 총에 맞은 운전사 박대복 중사는 필사적으로 차를 서대문 적십자병원으로 몰았다. 의사가 달려왔지만, 잠시 후 김창룡 특무부대장은 숨을 거두었다. 이때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김창룡 부대장과 함께 경무대로 들어가기 위해 통의동(옥인동) 부대장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엄재림 부관이 달려왔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피를 닦아내는 동안, 엄 부관은 부대장의 호주머니를 열었다. 5000환짜리 지폐 한 장, 부적, 메모 한 장이 피에 젖어 있었다. 그는 부대장의 시신을 부대로 모시도록 조치한 후, 서대문에 있는 이기붕 국회의장 집(지금의 4·19혁명기념도서관 자리)으로 갔다. 보고를 받은 이기붕 의장은 “며칠 전에도 ‘몸조심하라’고 일러주었는데, 큰일이 났구먼! 경무대 큰 영감님(이승만 대통령)께도 빨리 보고드려야지요”라고 말했다.
 
  엄 부관은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김창룡 부대장이 피살되었다고 보고했다. “나라가 망했군! 나라가 망했어”라고 탄식하던 이 대통령은 잠옷에 외투만 걸치고 통의동(옥인동)에 있는 특무부대 본부를 찾았다. 이 대통령은 “내가 수차 몸조심하라고 했지만, 그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라서 아무것도 무섭지 않다고 하더니만…”이라며 애통해했다.
 
 
  이승만, “이 火賊을 잡을 사람이 누구야?”
 
  이승만 대통령은 부대장의 시신 앞에 서 있던 특무대 간부들에게 소리쳤다.
 
  “이 화적(火賊)을 잡을 사람이 누구야? 이 화적을 바로(빨리) 잡아야지!”
 
  엄 부관이 서울지구 특무부대장 조서길 중령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서울지구 특무부대장이 잡을 것입니다!”
 
  이 대통령은 “그래, 당신이 빨리 화적을 잡아내게! 빨리!”라고 신신당부한 후, 비서의 부축을 받으며 경무대로 돌아갔다.
 
  육군 중장으로 추서(追敍)된 김창룡 특무부대장의 장례는 1956년 2월 3일 첫 번째 국방장(國防葬・현 국군장)으로 엄수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함태영 부통령이 대독(代讀)한 조사(弔辭)에서 “김 장군은 평소에도 자기가 이렇게 끝마칠 것을 알았지만 조금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다. 자신이 군과 국가를 위하는 일에 성심성의를 다하다가 이렇게 끝을 고하게 된 것이니, 이는 나라를 위해 순국(殉國)한 것이며, 충렬(忠烈)의 공훈을 세운 것이다”라고 애도했다.
 
  서울지구 특무대(506특무대)에 합동수사본부가 설치됐다. 엄재림 부관은 “우리가 알면서도 당했다”고 통탄했다. 그는 김창룡 부대장에게 원한을 품고 있고, 특무대를 떠날 때 부대장실을 향해 권총을 쏜 적이 있는 허태영을 의심했다. 하지만 증거가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범인이 승천입지(昇天入地)했느냐!”면서 범인을 빨리 잡으라고 재촉했다. 그러던 중 2월 10일, 허태영의 심복인 신초식이 1월 29일 허태영의 지프를 타고 의정부에서 상경한 후 행방이 묘연하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2월 23일 특무대는 허태영과 그의 운전사 이유회(육군 중사)를 검거했다. 이어 범행을 저지른 신초식, 송용고와 이진용 대령(전 특무대 특무처장), 도진희 국회의원, 김기상 동대문경찰서장 등이 방조혐의로 구속됐다.
 
 
  이승만은 배후를 알고 있었다
 
서울역 인근 소화아동병원 옆에 있던 특무부대 수송과. 김창룡 특무부대장은 9·28 서울수복 당시 특무부대가 서울탈환작전에서 활약한 것을 기념해 ‘9·28 선봉부대’라는 의미에서 1928부대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허태영은 재판정에서 “김창룡은 군 조직을 파괴하고 사기를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항명(抗命)을 일삼았다. 그가 검거했다는 사건의 9할은 조작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허태영이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후인 1956년 11월 12일, 그의 아내 황운하씨가 육군 요로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자신의 남편 허태영의 배후에 강문봉 중장(전 2군 사령관. 당시 국방대학원 입교)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녀는 강 중장이 허 대령에게 막대한 자금을 제공하는 등 암살을 교사(敎唆)했다고 폭로했다. 물론 남편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허태영도 재판정에서 강문봉 중장 관련 사실을 시인했다.
 
  허태영・이유회・신초식・송용고 등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현역 군인 신분인 허태영・이유회는 총살, 신초식・송용고는 교수형이 집행됐다. 범행을 사주한 강문봉에게는 사형, 공모한 공국진 준장에게는 징역 5년이 선고됐다. 강문봉은 무기(無期)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 4·19 이후 석방되었다.
 
  당시에도 강문봉 중장 윗선이 누구냐 하는 논란이 분분했다. 엄재림 부관에 의하면, 수사결과 발표를 앞두고 이승만 대통령이 수사본부장인 조서길 서울지구 특무부대장을 불렀다. 조서길 본부장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이 대통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고 한다.
 
  “조 수사본부장, 내가 다 알고 있어. 바른 대로 이야기해. 정 총장(정일권-기자 주)이 맞지?”
 
  조서길 중령이 머뭇거리다가 “예, 그러합니다”라고 대답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내가 다 알고 있어…. 세계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얼마나 지지리도 못난 나라로 보겠는가? 4성 장군이 2성 장군에게 총질이나 하는 나라와 군대를 나라라고, 군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승만 대통령은 “국제적으로 나라 꼴이 창피스럽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현명하게 처리하라”면서 강문봉의 윗선으로 수사가 확대되는 것을 막았다. 강문봉 등도 자기 윗선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사건이 일단락된 후인 1957년 5월 정일권 대장은 군복을 벗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주터키대사로 내보냈다.
 
 
  朴正熙의 渡美유학
 
  김창룡 특무부대장 암살 당시 제5사단장이던 박정희 준장은 “허, 그 사람이 이렇게 죽다니…. 참, 내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그 사람 덕분에 살아났는데 말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여순반란사건 후 숙군 당시 박정희 소령을 수사한 것도, 사형선고를 받은 그를 구명해 준 것도 김창룡이었다. 서울이 함락된 후, 두 사람은 함께 한강을 건넜다. 이후 박정희 소령은 현역으로 복귀했지만, 용공(容共)혐의는 늘 그를 따라다녔다.
 
  1953년 11월 박정희 대령은 준장 진급과 함께 미 육군포병학교 고등군사반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해서는 특무대의 신원조회를 거쳐야 했다. 특무대에서는 불가(不可) 판정을 내렸다. 실무자 선에서의 기계적인 판단이었다. 박정희 대령은 부관 원병오(전 경희대 교수·조류학자) 중위 앞에서 “누가 가고 싶어서 가는 줄 알아? 위에서 가라고 해서 가는 건데. 그따위로 놀면 차라리 군대 그만두겠어”라며 화를 냈다. 그러면서도 속이 상했던 박정희 대령은 김창룡 특무부대장의 부관 엄재림에게 연락을 넣어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봐 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숙군 당시 수사를 받았던 박정희는 엄재림 부관이 김창룡 특무부대장과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미군은 한국군 강화를 위해 각급 장교들을 미국으로 불러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많은 한국군 장교가 교과과정을 따라가지 못했다. 미군 일각에서는 한국군 장교 교육에 대해 회의적인 얘기도 나오고 있었다. 엄재림 부관은 김창룡 부대장에게 박정희 대령 건을 보고하면서 이렇게 건의했다.
 
  “박정희 대령 같은 머리 좋은 사람이 미국에 가서 좋은 성적을 내면, 한국군 장교의 능력에 대한 미군의 부정적 인식을 바꿀 수 있지 않겠습니까?”
 
  김창룡 부대장은 엄 부관의 얘기를 바로 받아들였다.
 
  “그래, 당신 이야기가 맞아요. 바로 우리 박정희 대령 같은 사람이 미국에 가서 1등, 2등, 좋은 성적을 내서 우리 군의 이미지를 바꿔야죠.”
 
  김창룡 부대장은 그 자리에서 “박정희 대령 바꾸라”고 했다. 박정희 대령과 연결이 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밑에 우리 애들이 잘 모르고 신원조회가 오니까 그런 모양인데, 그건 잘못됐어요. 박 대령 같은 분이 미국 가서 1등 하면, 우리 한국군에 대한 이미지를 확 바꿀 수 있잖아요. 이번에 박 대령은 미국 가서 좋은 성적 내고 오셔야 돼요. 부탁이에요.”
 
  박정희 대령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후 제5사단장, 제7사단장, 제1군 참모장, 6관구 사령관, 부산군수기지사령관, 육군작전참모부장 등을 거치면서 승승장구했다.
 
  후일 그는 김창룡 장군 저격 사건에 대해 “이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업고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계열의 비리를 캐던 특무부대장을 정일권의 추종자인 강문봉이 제거한 사건”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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