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4년 3월 합참에 전략연구위원회 조직해 국가급 군사전략 문서 작성
⊙ 만주와 7광구 영유권 분쟁 시 중국, 일본과의 군사적 대결 상황도 포함
⊙ 전두환 대통령이 당시 윤성민 국방장관, 이기백 합참의장에 지시
⊙ 만주와 7광구 영유권 분쟁 시 중국, 일본과의 군사적 대결 상황도 포함
⊙ 전두환 대통령이 당시 윤성민 국방장관, 이기백 합참의장에 지시
- 백두산 계획을 마련 중이었던 1984년 6월 3일 전두환 대통령이 8시간에 걸쳐 중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 있는 육군부대를 차례로 시찰, 북한 군사동향과 대비태세를 보고받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전두환(全斗煥) 정부가 1984년 3월, 한반도 통일 이후 주변국과의 역학관계를 예견하고 군사적 대결을 상정한 국가급 군사전략 문서를 작성한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청와대는 이 문서를 국가기밀 1급으로 분류, 관계부처에 이관했다.
전두환 정부가 작성한 총합적 총력 국가전략(Comprehensive all-out grand strategy)의 명칭은 ‘백두산 계획’으로, 통일 이후 한민족의 생존전략을 담고 있다. 특히 만주와 이어도 일대에서 중국-일본과의 영토 분쟁 시 군사적 지원 방안까지 포함하고 있어 주목된다.
전두환 대통령은 당시 윤성민(尹誠敏) 국방부 장관과 이기백(李基百) 합참의장에게 “통일 이후 한국의 방위전략을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합동참모본부(합참)는 1984년 3월 14일 합참 내에 ‘전략연구위원회’를 조직해 백두산 계획의 기획·입안에 착수했다.
이 기획에 참여한 예비역 A장군은 “백두산 계획은 통일 이후 한국의 국가전략과 군사전략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판 슐리펜 계획’”이라고 증언했다. 독일의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군 참모총장을 지낸 알프레드 슐리펜 장군이 프랑스와 러시아 두 강대국과의 동시결전에서 승리하려면 ‘선(先)프랑스, 후(後)러시아를 공격해야 한다’면서 기동전을 통한 승전 묘책(妙策)을 제시한 것으로, 백두산 계획이 그와 유사한 국가전략 문서라는 것이다.
이기백 합참의장의 지시에 따라 합참의 전략기획국 주도로 백두산 계획 입안 작업에 착수해 그해 11월 말 보고서를 완성했다. 전략연구위원회는 보고서를 작성, 이기백 합참의장 보고를 거쳐 1984년 12월 1일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당시 장세동(張世東) 비서실장은 30분 정도의 보고시간을 잡았다가 위원회가 “보고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니 늘려달라”고 하자, 한 시간으로 연장했다. 보고를 받은 전 대통령은 크게 만족해하며 “잘 발전시켜 보라”고 치하했다고 한다.
백두산 계획 작성한 육사11기생들
백두산 계획은 2030년 한반도 ‘통일 이후’의 국가전략을 담고 있는 문서다. 따라서 북한 정권을 제거하고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통일하기 위해 부대배치와 부대운용 등의 내용을 담은 군사전략 문서와는 그 성격이 크게 다르다.
참고로 북한과의 대결을 상정한 한국군의 공세전략들은 해방 이후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다. 공세전략을 처음 주장한 이는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김홍일(金弘壹) 장군이다. 김 장군은 1949년 출간한 그의 저서 《국방개론》에서 한반도의 종심(縱深)이 좁아 만주에서 결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2년 육군본부 전쟁기획실은 1년간의 연구 끝에 한국 단독의 한반도 전역에서의 독자적인 방어와 반격계획인 ‘태극72계획’을 마련했고, 이후 이 계획은 미국의 눈을 피해 ‘무궁화회의’로 명명한 비밀회의에서 한국군의 독자적 군사력 운용계획으로 확립했다. 이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지시로 1974년 국방부는 제1차 전력증강계획(율곡 계획)을 수립했다.
한국군이 독자적 군사전략을 확립함에 따라 7사단이 철군하면서 설립한 한미 제1군단의 홀링스워드(Hollingsworth) 사령관은 수도 서울의 안보 취약성 때문에 보다 강력한 화력의 집중으로 공자(攻者)의 전투력을 조속히 고갈시켜 전국(戰局)의 전환점을 일주일 이내에 마련하는 공세전략을 수립했다.
1977년 후반 군은 육본에 전력증강연구위원회(80위원회)를 창설해 이병형(李秉衡) 중장 주관으로 1980년대 육군발전계획을 마련했다. 이 계획은 주한미군 철수를 염두에 두고 자주적 억제력을 갖추기 위한 장기전략이었다.
그러나 한국군의 군사전략은 1980년대 접어들면서 공세적 전략에서 소극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1980년대 초 극심한 혼란 상황에서 출범한 전두환 정부는 정통성 측면에서 심각한 취약성을 지니고 있었고, 따라서 대미관계 개선을 통해 정통성을 강화하려 했다. 때마침 신보수주의 물결을 타고 등장한 미 레이건 행정부의 실용주의 노선과 박자가 맞아 불편했던 한미관계를 일소할 수 있었다.
박정희 정부가 독자적인 억제전략을 구사하는 적극적 자주국방을 추진한 반면, 전두환 정부는 보다 안정된 한미관계의 유지를 위해 미국과의 갈등을 피하면서 대북전략은 한미연합 억제전략하 ‘작계 5027’의 울타리에서 추진했다.
그러나 예비역 소장 A씨는 “전두환, 이기백 등 육사11기생들이 대북전략은 한미연합 억제전력에 의존했지만, 안정된 한미관계를 토대로 ‘통일 이후’의 국가전략을 비밀리에 마련했다는 사실은 평가할 만하다”면서 “지휘부의 반대로 백두산 계획에 대북 통일전략까지는 포함시키지 못했지만, 만약 대북 통일전략까지 포함했더라면 완벽한 문서가 됐을 것”이라고 했다.
80페이지에 달하는 전략문서
8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백두산 계획은 한민족 생존의 지혜를 담고 있다고 한다. 위원회를 이끌었던 예비역 B모 대령은 “통일 한국이 당면할 국제적 상황, 군사적 대응에 대해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었다”고 했다. 그는 “전략계획 프로젝트에 ‘백두산’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남북관계를 떠나 고토(古土)의 회복을 암시한다”고 했다.
그는 “현재 엄연히 살아숨쉬는 국가기밀 문서의 내용을 밝힐 수는 없으나, 작전명령 시트의 제1항이 상황설정인 것처럼, 백두산 플랜 그림을 그릴 때도 그와 같은 상황설정을 담았다”고 했다. 백두산 계획에는 한반도 통일 직후 육상으로는 만주 지역의 고토 회복, 해양으로는 이어도와 7광구의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군사적으로 뒷받침하는 내용을 담았다.
대륙붕 한일공동개발구역(7광구)도 2030년 무렵 한중일 간 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것으로 전망했다. 현재 이 해역의 석유와 가스 매장량은 흑해유전과 맞먹는 72억t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중국은 한국과 일본이 이 구역을 공동개발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7광구가 지리적으로는 일본에 더 가깝지만 당시 대륙붕 연장론이 우세했던 국제정세에 입각해 1970년 5월 한국이 먼저 7광구를 개발해 영유권 선포를 했으나, 일본의 반대에 부딪혀 1974년 한일대륙붕 협정을 맺었다. 협정에 따르면, 어느 한쪽이라도 자원탐사 및 채취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면 개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비역 B모 대령은 “2009년 유엔 대륙붕한계위원회(UN CLCS)에서 영토분쟁 해결을 위한 기준안을 마련하기 위해 관련 51개국에 관할권을 주장하는 보고서 제출을 의뢰했으나, 일본과 중국은 각각 수백 쪽의 대륙붕 보고서를 유엔에 제출한 반면, 우리는 100여 쪽 분량의 보고서를 만들어 놓고도 8쪽의 예비보고서만 제출했다”면서 “2028년 50년 기한의 한일대륙붕협정이 만료되기 전까지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국제해양법에 따라 7광구 대부분이 일본 측에 넘어간다”고 했다.
그는 “백두산 계획에는 7광구를 비롯해 해양영토와 자원분쟁을 뒷받침할 군사력을 건설하는 것을 담았다”면서 “대륙으로 해양으로 커다란 그림을 그려놓으면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어떠한 무기체계가 필요한지 즉각 알게 된다”고 했다.
홍산문화와 균형자론, 고슴도치 전략
백두산 계획의 서론은 ‘5000년 역사 속에서 수많은 국가가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쳤는데 그 요결(要訣)이 무엇인가’라는 다소 철학적 내용을 담았다고 한다. 예비역 B모 대령은 “우리 민족사의 한 부분으로 홍산문화(紅山文化)를 언급해 고구려와 발해를 연결시켰다”며 “홍산문화를 언급했다는 것은 만주가 고구려 강토(疆土)였다는 강력한 연결고리를 만들어 현재의 그 지역 국가들과 연합전선을 펴 중국을 압박하자는 논리”라고 했다.
홍산문화는 중국 네이멍구자치구의 츠펑시(赤峰市)의 훙산(紅山)에서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랜 신석기 유적지로, 홍산문화를 창조한 주역은 동이족으로 알려졌다. 예비역 L모 대령은 “영국의 헨리8세와 프랑스의 루이14세가 통치 지역의 지도를 보며 제국주의의 꿈이 시작됐다”며 “만일 광개토대왕이 아들 장수왕에게 강역(疆域) 지도를 그리게 했다면 만주 지역을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백두산 계획에는 균형자론(均衡者論)도 등장한다. 균형자론은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동북아 지역에서의 한국의 역할을 강조한 우리나라의 외교안보 비전이다. 20년 전 작성한 백두산 계획에 이미 통일 이후의 전략으로 균형자론을 내세웠다고 한다.
예비역 C모 소장은 “통일 이후에도 한반도가 엄청난 주변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상황이라면 미국이라는 동맹의 끈 하나로는 통일 한국이 지탱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면서 “미국 위주의 일방적 동맹 관계에서 탈피해 당시 미수교국인 중국과 러시아와도 관계개선을 모색해 동북아 지역에서 균형자적 역할을 해야만 한다는 내용”이라고 했다.
예비역 C모 소장은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 중 균형자론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균형자론이 국제정치학에 등장하는 용어이긴 하지만 ‘혹시 백두산 계획을 열람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면서 “노태우 정부 시절, 백두산 계획의 균형자론은 중국·소련과의 수교 때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했다.
백두산 계획은 한반도 방어의 범위를 1000km로 상정하고, 공세적 적극방어전략, 즉응전략을 담았다고 한다. 검도에서 다가오는 적을 선제적으로 한칼에 쓰러뜨리는 것처럼 선제공격(Preemptive strike) 전략도 포함시켰다.
예비역 A장군은 “1990년대 이후 세간에 알려진 고슴도치 전략(Porcupine strategy)은 이미 백두산 계획에 들어 있었다”며 “고슴도치 전략은 강대국이 영향 능력을 발휘해 얻어낼 수 있는 이득보다 더 큰 손실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면 안전하다는 전략”이라고 했다. 이 전략의 수행을 위해 약소국은 신뢰도 높은 반격 능력을 위해 대량파괴무기가 필수적이다. 핵무기 보유, 원자력 추진 잠수함, 레이저 유도무기 등이 고슴도치 전략의 핵심적 수단들이다.
“백두산 계획 확대발전시켜야”
백두산 계획은 한국군의 5개년 국방계획을 뛰어넘는 훨씬 장기플랜이었다. 예비역 A장군은 “당시 군비를 담당하던 장성들이 옛날식 중기계획이나 얘기할 때 합참의 영관급 엘리트 장교들은 50년 이후의 원대한 통일 이후 전략을 그리고 있었다”며 “백두산 계획이란 장기 국가군사전략이란 큰 그림을 그려주면 군비 담당자들이 5개년 계획 등 하부 계획을 수립할 때 예산 낭비를 막고 요긴한 지침서로 활용할 것이라 생각했다”고 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백두산 계획 문서에 사인한 후, 32부를 발행해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 국방부, 각 군 본부, 군사령부 등 관계기관에 각 1부씩을 배포해 보관토록 했다. 현재 국방부가 보유한 국가기밀 1급은 전력증강연구위원회(80위원회)의 율곡 계획 문건과 백두산 계획 문건 등 2개로 알려졌다.
예비역 A장군은 “백두산 계획은 군사전략이라기보다 철학이자 국방정책”이라며 “총합적 총력 국가전략”이라고 했다. 예비역 B모 대령은 ‘국가기밀의 존재사실을 왜 공개하는가’라는 물음에 “안보 관계자들에게 우리 군도 동북아 정세를 조망하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이 문서를 더욱 확대·발전시키라는 취지”라며 “백두산 계획의 큰 그림을 합참의 해당 부서가 오늘의 군사력으로 적용시켜 나간다면 동북아에서 우리의 군사적 위상은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전두환 정부가 작성한 총합적 총력 국가전략(Comprehensive all-out grand strategy)의 명칭은 ‘백두산 계획’으로, 통일 이후 한민족의 생존전략을 담고 있다. 특히 만주와 이어도 일대에서 중국-일본과의 영토 분쟁 시 군사적 지원 방안까지 포함하고 있어 주목된다.
전두환 대통령은 당시 윤성민(尹誠敏) 국방부 장관과 이기백(李基百) 합참의장에게 “통일 이후 한국의 방위전략을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합동참모본부(합참)는 1984년 3월 14일 합참 내에 ‘전략연구위원회’를 조직해 백두산 계획의 기획·입안에 착수했다.
이 기획에 참여한 예비역 A장군은 “백두산 계획은 통일 이후 한국의 국가전략과 군사전략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판 슐리펜 계획’”이라고 증언했다. 독일의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군 참모총장을 지낸 알프레드 슐리펜 장군이 프랑스와 러시아 두 강대국과의 동시결전에서 승리하려면 ‘선(先)프랑스, 후(後)러시아를 공격해야 한다’면서 기동전을 통한 승전 묘책(妙策)을 제시한 것으로, 백두산 계획이 그와 유사한 국가전략 문서라는 것이다.
이기백 합참의장의 지시에 따라 합참의 전략기획국 주도로 백두산 계획 입안 작업에 착수해 그해 11월 말 보고서를 완성했다. 전략연구위원회는 보고서를 작성, 이기백 합참의장 보고를 거쳐 1984년 12월 1일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당시 장세동(張世東) 비서실장은 30분 정도의 보고시간을 잡았다가 위원회가 “보고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니 늘려달라”고 하자, 한 시간으로 연장했다. 보고를 받은 전 대통령은 크게 만족해하며 “잘 발전시켜 보라”고 치하했다고 한다.
백두산 계획 작성한 육사11기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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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백 합참의장이 1983년 10월 31일 필리핀 클라크 미 공군기지에서 귀국, 국립묘지에서 아웅산묘소 암살폭발사건으로 순직한 외교사절들의 묘소를 참배했다. 사진=조선일보 |
참고로 북한과의 대결을 상정한 한국군의 공세전략들은 해방 이후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다. 공세전략을 처음 주장한 이는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김홍일(金弘壹) 장군이다. 김 장군은 1949년 출간한 그의 저서 《국방개론》에서 한반도의 종심(縱深)이 좁아 만주에서 결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2년 육군본부 전쟁기획실은 1년간의 연구 끝에 한국 단독의 한반도 전역에서의 독자적인 방어와 반격계획인 ‘태극72계획’을 마련했고, 이후 이 계획은 미국의 눈을 피해 ‘무궁화회의’로 명명한 비밀회의에서 한국군의 독자적 군사력 운용계획으로 확립했다. 이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지시로 1974년 국방부는 제1차 전력증강계획(율곡 계획)을 수립했다.
한국군이 독자적 군사전략을 확립함에 따라 7사단이 철군하면서 설립한 한미 제1군단의 홀링스워드(Hollingsworth) 사령관은 수도 서울의 안보 취약성 때문에 보다 강력한 화력의 집중으로 공자(攻者)의 전투력을 조속히 고갈시켜 전국(戰局)의 전환점을 일주일 이내에 마련하는 공세전략을 수립했다.
1977년 후반 군은 육본에 전력증강연구위원회(80위원회)를 창설해 이병형(李秉衡) 중장 주관으로 1980년대 육군발전계획을 마련했다. 이 계획은 주한미군 철수를 염두에 두고 자주적 억제력을 갖추기 위한 장기전략이었다.
그러나 한국군의 군사전략은 1980년대 접어들면서 공세적 전략에서 소극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1980년대 초 극심한 혼란 상황에서 출범한 전두환 정부는 정통성 측면에서 심각한 취약성을 지니고 있었고, 따라서 대미관계 개선을 통해 정통성을 강화하려 했다. 때마침 신보수주의 물결을 타고 등장한 미 레이건 행정부의 실용주의 노선과 박자가 맞아 불편했던 한미관계를 일소할 수 있었다.
박정희 정부가 독자적인 억제전략을 구사하는 적극적 자주국방을 추진한 반면, 전두환 정부는 보다 안정된 한미관계의 유지를 위해 미국과의 갈등을 피하면서 대북전략은 한미연합 억제전략하 ‘작계 5027’의 울타리에서 추진했다.
그러나 예비역 소장 A씨는 “전두환, 이기백 등 육사11기생들이 대북전략은 한미연합 억제전력에 의존했지만, 안정된 한미관계를 토대로 ‘통일 이후’의 국가전략을 비밀리에 마련했다는 사실은 평가할 만하다”면서 “지휘부의 반대로 백두산 계획에 대북 통일전략까지는 포함시키지 못했지만, 만약 대북 통일전략까지 포함했더라면 완벽한 문서가 됐을 것”이라고 했다.
80페이지에 달하는 전략문서
8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백두산 계획은 한민족 생존의 지혜를 담고 있다고 한다. 위원회를 이끌었던 예비역 B모 대령은 “통일 한국이 당면할 국제적 상황, 군사적 대응에 대해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었다”고 했다. 그는 “전략계획 프로젝트에 ‘백두산’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남북관계를 떠나 고토(古土)의 회복을 암시한다”고 했다.
그는 “현재 엄연히 살아숨쉬는 국가기밀 문서의 내용을 밝힐 수는 없으나, 작전명령 시트의 제1항이 상황설정인 것처럼, 백두산 플랜 그림을 그릴 때도 그와 같은 상황설정을 담았다”고 했다. 백두산 계획에는 한반도 통일 직후 육상으로는 만주 지역의 고토 회복, 해양으로는 이어도와 7광구의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군사적으로 뒷받침하는 내용을 담았다.
대륙붕 한일공동개발구역(7광구)도 2030년 무렵 한중일 간 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것으로 전망했다. 현재 이 해역의 석유와 가스 매장량은 흑해유전과 맞먹는 72억t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중국은 한국과 일본이 이 구역을 공동개발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7광구가 지리적으로는 일본에 더 가깝지만 당시 대륙붕 연장론이 우세했던 국제정세에 입각해 1970년 5월 한국이 먼저 7광구를 개발해 영유권 선포를 했으나, 일본의 반대에 부딪혀 1974년 한일대륙붕 협정을 맺었다. 협정에 따르면, 어느 한쪽이라도 자원탐사 및 채취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면 개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비역 B모 대령은 “2009년 유엔 대륙붕한계위원회(UN CLCS)에서 영토분쟁 해결을 위한 기준안을 마련하기 위해 관련 51개국에 관할권을 주장하는 보고서 제출을 의뢰했으나, 일본과 중국은 각각 수백 쪽의 대륙붕 보고서를 유엔에 제출한 반면, 우리는 100여 쪽 분량의 보고서를 만들어 놓고도 8쪽의 예비보고서만 제출했다”면서 “2028년 50년 기한의 한일대륙붕협정이 만료되기 전까지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국제해양법에 따라 7광구 대부분이 일본 측에 넘어간다”고 했다.
그는 “백두산 계획에는 7광구를 비롯해 해양영토와 자원분쟁을 뒷받침할 군사력을 건설하는 것을 담았다”면서 “대륙으로 해양으로 커다란 그림을 그려놓으면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어떠한 무기체계가 필요한지 즉각 알게 된다”고 했다.
홍산문화와 균형자론, 고슴도치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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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해군의 핵추진 잠수함 ‘오하이오함’(SSGN-726)이 2012년 10월 24일 해군작전사령부 부산기지 부두에 입항하고 있다. 오하이오함은 1600㎞ 떨어진 목표물을 정확히 요격할 수 있는 토마호크 순항미사일 154기와 MK48 중어뢰, 각종 특수전 장비 등을 갖추고 있다. 백두산 계획에 적시된 고슴도치 전략에는 원자력추진 잠수함이 포함돼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뉴시스 |
홍산문화는 중국 네이멍구자치구의 츠펑시(赤峰市)의 훙산(紅山)에서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랜 신석기 유적지로, 홍산문화를 창조한 주역은 동이족으로 알려졌다. 예비역 L모 대령은 “영국의 헨리8세와 프랑스의 루이14세가 통치 지역의 지도를 보며 제국주의의 꿈이 시작됐다”며 “만일 광개토대왕이 아들 장수왕에게 강역(疆域) 지도를 그리게 했다면 만주 지역을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백두산 계획에는 균형자론(均衡者論)도 등장한다. 균형자론은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동북아 지역에서의 한국의 역할을 강조한 우리나라의 외교안보 비전이다. 20년 전 작성한 백두산 계획에 이미 통일 이후의 전략으로 균형자론을 내세웠다고 한다.
예비역 C모 소장은 “통일 이후에도 한반도가 엄청난 주변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상황이라면 미국이라는 동맹의 끈 하나로는 통일 한국이 지탱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면서 “미국 위주의 일방적 동맹 관계에서 탈피해 당시 미수교국인 중국과 러시아와도 관계개선을 모색해 동북아 지역에서 균형자적 역할을 해야만 한다는 내용”이라고 했다.
예비역 C모 소장은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 중 균형자론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균형자론이 국제정치학에 등장하는 용어이긴 하지만 ‘혹시 백두산 계획을 열람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면서 “노태우 정부 시절, 백두산 계획의 균형자론은 중국·소련과의 수교 때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했다.
백두산 계획은 한반도 방어의 범위를 1000km로 상정하고, 공세적 적극방어전략, 즉응전략을 담았다고 한다. 검도에서 다가오는 적을 선제적으로 한칼에 쓰러뜨리는 것처럼 선제공격(Preemptive strike) 전략도 포함시켰다.
예비역 A장군은 “1990년대 이후 세간에 알려진 고슴도치 전략(Porcupine strategy)은 이미 백두산 계획에 들어 있었다”며 “고슴도치 전략은 강대국이 영향 능력을 발휘해 얻어낼 수 있는 이득보다 더 큰 손실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면 안전하다는 전략”이라고 했다. 이 전략의 수행을 위해 약소국은 신뢰도 높은 반격 능력을 위해 대량파괴무기가 필수적이다. 핵무기 보유, 원자력 추진 잠수함, 레이저 유도무기 등이 고슴도치 전략의 핵심적 수단들이다.
백두산 계획은 한국군의 5개년 국방계획을 뛰어넘는 훨씬 장기플랜이었다. 예비역 A장군은 “당시 군비를 담당하던 장성들이 옛날식 중기계획이나 얘기할 때 합참의 영관급 엘리트 장교들은 50년 이후의 원대한 통일 이후 전략을 그리고 있었다”며 “백두산 계획이란 장기 국가군사전략이란 큰 그림을 그려주면 군비 담당자들이 5개년 계획 등 하부 계획을 수립할 때 예산 낭비를 막고 요긴한 지침서로 활용할 것이라 생각했다”고 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백두산 계획 문서에 사인한 후, 32부를 발행해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 국방부, 각 군 본부, 군사령부 등 관계기관에 각 1부씩을 배포해 보관토록 했다. 현재 국방부가 보유한 국가기밀 1급은 전력증강연구위원회(80위원회)의 율곡 계획 문건과 백두산 계획 문건 등 2개로 알려졌다.
예비역 A장군은 “백두산 계획은 군사전략이라기보다 철학이자 국방정책”이라며 “총합적 총력 국가전략”이라고 했다. 예비역 B모 대령은 ‘국가기밀의 존재사실을 왜 공개하는가’라는 물음에 “안보 관계자들에게 우리 군도 동북아 정세를 조망하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이 문서를 더욱 확대·발전시키라는 취지”라며 “백두산 계획의 큰 그림을 합참의 해당 부서가 오늘의 군사력으로 적용시켜 나간다면 동북아에서 우리의 군사적 위상은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