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J 대통령 때 이홍구씨가 주미대사 나간 것 보면 내게만 자리 제안한 것 아닌 듯”… 주일대사(?)
⊙ DJ, “YS 인사를 보면 잘못된 게 많았는데, 이번에는 YS가 의장을 잘 선택했다”며 나의 국회의장
취임 승인
⊙ 1996년 노동법 날치기 통과 당시 YS에게 “DJ가 함정 파 놓고 있다”고 경고했지만, 안 받아들여
⊙ 1997년 대선 당시 YS에게 이인제 탈당 움직임 알리자 “의장이 말리세요”
金守漢
⊙ 88세. 영남대 법학과 졸업. 경남대 명예정치학 박사, 영남대 명예법학박사.
⊙ 공명선거전국추진위원회 대변인,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대변인, 신한당 대변인,
신민당 원내부총무, 신민당 대변인(4회 연임), 신한민주당 부총재, 제7~10, 12, 15대 국회의원,
제15대 국회의장, 한일의원연맹 부회장 역임. 現 새누리당 상임고문단회의 의장,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 한일친선협회중앙회 회장.
⊙ 상훈: 국민훈장 무궁화장, 日훈1등욱일대수장 등.
⊙ DJ, “YS 인사를 보면 잘못된 게 많았는데, 이번에는 YS가 의장을 잘 선택했다”며 나의 국회의장
취임 승인
⊙ 1996년 노동법 날치기 통과 당시 YS에게 “DJ가 함정 파 놓고 있다”고 경고했지만, 안 받아들여
⊙ 1997년 대선 당시 YS에게 이인제 탈당 움직임 알리자 “의장이 말리세요”
金守漢
⊙ 88세. 영남대 법학과 졸업. 경남대 명예정치학 박사, 영남대 명예법학박사.
⊙ 공명선거전국추진위원회 대변인,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대변인, 신한당 대변인,
신민당 원내부총무, 신민당 대변인(4회 연임), 신한민주당 부총재, 제7~10, 12, 15대 국회의원,
제15대 국회의장, 한일의원연맹 부회장 역임. 現 새누리당 상임고문단회의 의장,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 한일친선협회중앙회 회장.
⊙ 상훈: 국민훈장 무궁화장, 日훈1등욱일대수장 등.
10·26사태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고 ‘서울의 봄’이 왔다. 김영삼(金泳三·YS), 김대중(金大中·DJ), 김종필(金鍾泌·JP) 등 세 사람은 대권(大權)을 향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YS는 자신이 1979년 5·30전당대회 이후 ‘선명(鮮明)야당’을 기치로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였기 때문에 결국 박정희 정권이 무너졌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반면에 DJ에게는 1971년 대선(大選)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라는 상징성이 있었다. 그는 1973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되어 돌아오기 전까지 미국과 일본에서 박정희 정권의 비(非)민주성을 고발했다. 또 국내에 들어와서는 재야(在野)세력과 연대(連帶)해서 박정희 정권과 싸웠다.
두 사람 모두 대권 가도(街道)에서 자신이 양보해야 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1980년 봄 내내 DJ의 신민당 입당 문제를 놓고 두 사람은 줄다리기를 하다가 결국은 결별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 신군부(新軍部)였다. 물론 YS와 DJ의 갈등이 없었더라도 신군부는 정치에 개입했을 것이다.
가스가 잇코 일본 민사당 위원장의 의리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비상계엄확대조치’라는 이름 아래 사실상의 쿠데타를 감행했다. 이어 광주(光州)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을 무력(武力)으로 진압한 후에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해 정권을 잡았다. 전두환(全斗煥) 정권은 1980년 11월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했다. 전두환 정권은 과거 공화당이나 신민당 등에서 활동하던 정치인들 중 일부는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으로 흡수하고, 일부는 관제(官製)야당인 민주한국당(민한당), 한국국민당(국민당) 등에서 정치를 계속할 수 있도록 했다. 협조하지 않는 정치인들은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다.
이런 조치가 있기 전에 신군부가 정치인들을 면담해 민정당이나 민한당에 참여할 의사를 타진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과정이 없었다. 아마 1980년 초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만났을 때(《월간조선》 2016년 1월호 참조), 내가 “군인이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말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들은 ‘김수한은 회유해도 안 따라올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권력에 굴종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니들 마음대로 해 봐라. 정 안 되면 지게라도 지면 된다. 설마 내가 밥을 못 먹기야 하겠느냐’는 게 내 생각이었다. 아내에게도 “체통 구길 일은 하지 말라”고 했다. 아내는 그 시절 알게 모르게 고생을 많이 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 시절을 견뎌 준 아내가 고맙다. 때때로 이철승(李哲承) 전 신민당 대표최고위원, 신경식(辛卿植, 제13~16대 국회의원) 현(現) 헌정회장 등과 테니스를 하면서 소일했다.
그 시절의 일로 가스가 잇코(春日一幸) 일본 민주사회당(민사당) 위원장이 나를 찾아 준 일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한일의원연맹 활동을 같이 하면서 나와 친하게 지냈던 그는 1981년 3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일본 총리와 함께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 축하사절로 방한(訪韓)했다. 그는 취임식에 참석한 후 일본대사관 차(車)를 타고 우리 집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나는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에는 관심이 없다. 김 의원이 무사한지 보려고 온 거다”라고 말했다. 그는 “고문(拷問)당하거나 하지는 않았느냐?”면서 내 몸을 만져 보기까지 했다. 그 마음 씀씀이가 눈물 나게 고마웠다.
신군부, YS에게 渡美 권유
아마 전두환 정권은 민한당이라는 ‘가짜 야당’을 앞세우고, 자기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는 정치인들은 한 4년 정도 정치활동을 못하게 묶어 놓으면 저절로 사그라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엄혹한 시절에도 물밑으로는 민주화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었다.
1983년 5월 18일, YS는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민주화를 요구하는 단식(斷食)투쟁을 벌였다. 전두환 정권은 권익현(權翊鉉) 민정당 사무총장을 보내 YS를 설득했다. 항공권이며 체재비 등을 다 제공할 테니 미국으로 나가 달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YS는 “국민들이 군사통치의 억압 아래 있는데, 내가 국민 곁을 떠날 수는 없다”면서 이를 거부했다. 군사정권 시절, ‘죽으나 사나 국민과 함께’라는 자세로 한 번도 국민의 곁을 떠나지 않고 국내에서 투쟁했다는 것이 YS의 큰 특징이었다. 10월 유신 선포 당시에도 그는 일본에 있었지만, 체포될 위험을 무릅쓰고 귀국했다. 이 점에서 YS는 유신선포 후 한동안 해외를 떠돌았고, 전두환 정권 시절에도 미국으로 나갔던 DJ와 달랐다.
단식투쟁 이후 YS는 민주산악회,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활동 등을 통해 민주화운동을 이어 갔다. 나도 거기에 참여해서 힘을 보탰다. 1984년 9월경이 되면서는 물밑에서 신당(新黨) 창당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민추협은 재야에서의 민주화운동을, 신당은 원내(院內)로 진출한다는 투 트랙(two track) 전략이었다. 이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YS였다. DJ는 당시 미국에 체류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수동적인 입장에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보나마나 이듬해 제12대 총선(總選)을 코앞에 두고 마지막 남은 정치활동 피(被)규제자들을 해금(解禁)할 것이 뻔했다. 그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해야 했다. 나는 창당선언문, 당헌·당규안(黨憲·黨規案) 등을 가지고 안기부의 감시를 피해 김재광(金在光, 제6~10,12~14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역임) 전 의원 등을 찾아다니면서 신당 창당에 대해 논의했다. 이런 연유로 신한민주당이 창당된 후, 창당 기념행사 때에는 내가 창당선언문을 낭독하곤 했다.
민한당에 참여하고 있던 고재청(高在淸, 제9~12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역임) 의원 등이 자기들에게 오라고 손짓을 하기도 했다. 함께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면서 정국(政局)추이를 살폈다.
新黨돌풍
1985년 1월 18일 신한민주당은 창당을 선언했다. 정치규제에 묶여 있는 YS와 DJ를 대신해 이민우(李敏雨, 제4,5,7,9,10,12대 국회의원) 전 국회부의장을 총재로 선출했다. 하지만 신당 간판으로 출마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언론에서도 총선을 치르면 민한당이 80~90석을 차지해 제1야당의 자리를 지킬 것으로, 신한민주당은 30~40석 정도를 얻어 원내 교섭단체 구성에는 성공할 것으로 보았다.
지금은 선거 때 공천(公薦)경쟁이 치열하지만, 그때는 신한민주당 공천으로 나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내로라하던 옛 신민당의 중진(重鎭)들도 자신 없어 하면서 억지로 나서는 듯한 모양새였다. 서울 관악, 영등포 쪽에서 출마하려는 사람은 나와 박한상(朴漢相, 제6~10,12대 국회의원 역임) 전 의원 정도였다.
1985년 2월 12일, 군사정권의 억압 아래서 숨을 죽이고 있던 민심(民心)이 드디어 폭발했다. 신한민주당은 지역구(50석)와 전국구(17석)를 합쳐 67석을 차지하면서 제1야당으로 떠올랐다. 민한당은 모두 35석을 얻어 제2야당으로 추락했다. ‘이변(異變) 중의 이변’이 벌어진 것이다.
서울 관악에서 출마한 나는 43%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국회로 돌아왔다. 2위로 당선된 임철순(任哲淳, 제11,12대 국회의원 역임) 의원은 29.3%를 득표하는 데 그쳤다. 이렇게 압승할 수 있었던 것은 제10대 총선 당시 61.4%라는 전국 최고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면서도 이후 전두환 정권 아래서 정치규제에 묶여야 했던 나에 대한 유권자들의 동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신한민주당이 내건 ‘직선제(直選制) 개헌’이라는 구호가 먹혀들어 갔기 때문이었다. 유신 이후 ‘체육관 대통령 선거’에 신물이 난 국민들은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자’는 외침에 열광했다.
‘이민우 구상’
이러한 국민의 호응에 힘입어 신민당은 직선제 개헌 투쟁에 나섰다. 이에 대해 민정당은 의원내각제 개헌 주장으로 맞섰다. 국민의 희망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주장이었다. 당시 일각에서는 DJ는 대통령직선제를 고집하겠지만, YS는 의원내각제 개헌에 대해 유연하게 대응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전혀 사실무근인 얘기였다. YS도 직선제 개헌을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의원내각제 개헌에 관심을 보인 것은 이철승(李哲承, 제3~5,8~10,12대 국회의원 역임) 전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이었다. 나는 그에게 “제발 의원내각제니 하는 소리는 하지 말라. 그런 소리를 하니까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것이다”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직선제 개헌 투쟁이 2년 가까이 계속되면서 정국은 교착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86년 12월 나온 것이 ‘이민우 구상’이었다. 이민우 총재는 언론자유 보장, 구속자 석방, 사면복권, 공무원의 정치중립 보장, 국회의원 선거법 협상, 지방자치제도 도입 등을 전두환 정권이 받아들이면 의원내각제 개헌에 응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당시 신민당 대변인이던 홍사덕(洪思德, 제11,12,14,15,16,19대 국회의원 역임) 의원의 조언이 있었다.
아마 이민우 총재는 “전두환 정권이 저렇게 버티는 한 직선제 개헌은 어렵다. 차라리 의원내각제 개헌을 받고, 어느 정도의 민주화라도 이루어 보자”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또 그도 정치인인 이상 개인적인 야심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의원내각제 개헌이 되면 실권(實權)이야 있건 없건 간에 자기가 수상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전두환 정권이 “의원내각제 개헌이 되고 야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면, 이민우 대통령-김영삼 수상도 가능하다”고 속삭였을지도 모른다.
정호용, “장난 치지 말라”
하지만 ‘이민우 구상’은 그를 신민당 총재로 내세웠던 YS와 DJ에게는 일종의 ‘배신’이었다. YS와 DJ는 자신들을 따르는 의원들을 탈당(脫黨)시켜 통일민주당을 창당, 이민우 총재를 무력화(無力化)했다.
통일민주당이 창당에 들어가자 전두환 정권은 1987년 4월 조폭들을 동원해 폭력으로 창당방해에 나섰다. 이른파 ‘용팔이사건’이다. 통일민주당 관악지구당 창당행사가 있던 날, 나는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YS 등과 함께 일종의 장행회(壯行會)를 가진 후, 김현규(金鉉圭, 제10~12대 국회의원 역임) 의원 등과 지구당으로 향했다. 하지만 지구당 사무실은 이미 폭력배들에게 점령을 당한 후였다. 결국 대회는 다른 곳에서 약식으로 치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박용만(朴容萬, 제9,10,12,13대 국회의원 역임) 의원과 함께 정호용(鄭鎬溶, 내무·국방부 장관, 제13,14대 국회의원 역임) 내무부 장관을 찾아가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항의했다. 당시 사건의 배후에 안기부가 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 장관은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 오히려 우리보고 “장난치지 말라”고 했다. 경북고를 졸업한 정 장관은 경북고 중퇴인 내게는 후배였다. 이때의 일 때문에 그는 경북고 행사 같은 데서 나를 만나면, 미안해한다.
1987년 1월 박종철군 고문치사(致死) 사건이 발생했다. 국민들은 군사정권의 폭력성에 분노했다. ‘독재 타도, 직선제 개헌’을 외치는 국민들의 함성이 높아졌다. 전두환 정권은 개헌 논의를 중단하고 5공(共)헌법에 따라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내용의 4·13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이어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 조작되었다는 폭로가 나왔다. 민정당이 노태우(盧泰愚)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는 6월 10일을 전후해서 전국적으로 민주화요구 시위가 벌어졌다. 결국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직선제 개헌안 수용 등 일련의 민주화 조치를 약속하는 6·29선언을 발표했다. 국민이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고, 정권교체가 눈앞으로 다가오자 YS와 DJ는 다시 분열했다. 국민들은 두 사람에게 ‘단일화’를 요구했다. 두 사람도 ‘단일화’를 다짐했다. 하지만 그건 자기로의 단일화였다. 시일이 지날수록 두 사람이 갈라설 것이라는 사실은 점점 분명해졌다.
DJ, “내가 출마 안 하면 큰일난다”
두 사람의 분열이 목전에 닥치자, 통일민주당 소속 의원들은 의원총회를 열어 YS와 DJ에게 “하나가 되어 달라”고 호소하는 결의를 채택한 후, 두 사람에게 대표단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대표단은 나를 비롯해 고재청 의원 등 7~8명으로 구성했다.
YS에게 전화를 걸어 대표단이 찾아가겠다고 알렸다. YS는 “나는 의총(議總) 결의에 따를 테니, 내게는 굳이 찾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DJ에게 전화를 했더니 “오라”고 했다. 동교동 지하 서재에서 DJ를 만났다. DJ는 한참 동안 자기가 젊은 시절부터 시작해서 민주화 과정에서 고생한 이야기, 감옥에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이야기 등을 했다. 그러고는 “내가 출마하지 않으면 큰일난다”고 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자기가 출마하지 않으면 지지자들이 여러 명 목숨을 끊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런 분들을 설득해서 후보 단일화를 이룩하고, 군정(軍政)을 종식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간곡하게 호소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고 YS가 양보할 리도 없었다. YS는 자신이야말로 정통야당의 적자(嫡子)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반면에 DJ는 비주류(非主流)였다. 나중에는 호남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되었지만, 젊은 시절에는 호남 출신이 주도하던 민주당 내에서도 소외된 편이었다. 심지어 1967년 6·8선거 당시 야당 일부에서는 DJ의 지역구이던 목포에 DJ 대신 나를 출마시키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그때 DJ는 한일국교정상화 비준반대투쟁 과정에서 비교적 온건한 행보를 보였다는 이유로 야권 강경파 인사들로부터 훼절했다는 소리까지 듣고 있었다. 나는 정통야당의 주류로 성장해 온 YS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그 시점에서는 순리라고 생각했다. 당내에서도 말로는 ‘단일화’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두 사람의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이 있었다.
결국 DJ는 제13대 대선(大選)을 앞둔 1987년 11월,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했다. YS와 DJ가 분열한 결과, 그해 대선 승리는 노태우 민정당 후보에게 돌아갔다.
이듬해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다. 1971년 제8대 총선 이후 17년 만에 다시 소선거구제가 도입됐다. 내 지역구인 서울 관악을(乙)은 호남세(湖南勢)가 강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경북 출신인 나는 평소 지구당 간부에 호남 출신 인사들을 많이 썼다. 나도 그들에게 잘해 주려 애를 썼고, 그들도 내게 잘해 주었다.
분당 후 평민당 이해찬에 낙선
하지만 DJ가 평민당을 창당하고 나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호남 출신 참모들은 내게 “DJ에게 가라”고 간절하게 호소했다. 나로서도 총선을 생각하면 그렇게 하는 게 유리했다. 하지만 나는 자유당 시절 민권수호국민총연맹을 할 때부터 DJ를 잘 알고 지냈다. 정치적 입장, 성격 등으로 보아 우리는 맞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나는 DJ에게는 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YS와 잘 맞는 편이었고, YS도 일찍부터 내게 잘해 주었다. 나는 평민당 행을 호소하는 지구당 간부들에게 “정치를 그만두었으면 그만두었지, 인간적으로 그럴 수는 없다”고 말했다. 결국 그들은 통일민주당을 떠나 평민당으로 옮겨갔다. 그때의 안타까움, 아쉬움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다.
평민당에서는 서울대 운동권 출신인 이해찬(李海讚, 제13~17,19대 국회의원, 국무총리 역임)씨를 후보로 내세웠다. 나를 겨냥한 ‘표적공천’이라는 소리가 나왔다. 이희호 여사는 선거 기간 중 내 지역구에 세 번이나 다녀갔다. 결국 나는 패배의 쓴잔을 마시고 말았다.
제13대 총선 결과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이 형성되었다. YS는 대선에서는 2위를 했지만, 총선에서는 호남을 기반으로 한 DJ의 평민당에 밀려 제3당이 되었다. 아마 YS는 절치부심(切齒腐心)했을 것이다. 5공 청산 등으로 정국이 바쁘게 돌아갔다. 하지만 원외(院外)인 나는 정국의 소용돌이에서 한 발 물러나 있었다.
1990년 1월 22일 YS가 노태우 대통령, JP와 함께 3당 합당(合黨)을 발표했다. 그러한 움직임을 잘 모르고 있었던 나는 깜짝 놀랐다.
YS라고 해서 왜 고민이 없었을까? 하지만 정치인에게는 뭔가 성취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초산(硝酸)테러, 1976년 5·25전당대회 당시 깡패들의 습격, 전두환 정권 시절의 단식투쟁 등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 그때까지 견뎌 온 YS로서는 자신의 나이 등을 생각할 때, 뭔가 인생의 승부를 걸 때가 왔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나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3당 합당을 결행했다”는 YS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때문에 나는 3당 합당이라는 YS의 결심을 지지했다.
YS도 그런 나를 여러 가지로 배려해 주었다. 원외였지만, 민자당 당무위원으로 밀어 주었다. 3당 합당을 한 후 민자당 지구당 조직책을 뽑을 때의 일이다. 구(舊) 민정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에서 인선(人選)위원을 선정해 지구당 조직책을 선정하기로 했다. 원외인 나는 아무래도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때 나는 한일친선협회 행사로 일본 도쿄에 있다가 지구당 조직책에서 탈락할 것 같다는 소식을 들었다. YS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 얘기를 했더니 “씰데 없는 소리!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결국 나는 지구당을 지킬 수 있었다.
여러 가지로 나를 챙겨 준 YS
1990년 3월 YS는 소련을 방문했다. YS는 방문단에 원외 정치인으로는 유일하게 나를 포함시켰다. 명단은 박준병(朴俊炳, 제12~14대 국회의원 역임) 민자당 사무총장을 거쳐 청와대로 올라갔다. 청와대에서는 현역 의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나를 제외했다. 박준병 사무총장은 YS에게 “김수한 전 의원 대신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달라”고 요청했다. YS는 “안 된다. 김수한은 꼭 넣어야 한다”고 했다. 얼마 후 박 사무총장이 재차 나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 달라고 요청하자 YS는 “그럼 나도 안 간다”고 말했다. YS의 고집 때문에 결국 나는 방소단(訪蘇團)에 포함될 수 있었다.
YS가 그렇게 나를 챙겨 준 것은 “다른 세력과 싸울 때에는 김수한이 꼭 필요한 사람이다. 김수한이 나서서 해 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였던 것 같다. YS의 그런 믿음과 배려에 대해 나는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나도 YS에게 크고 작은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에서 황영조 선수가 우승했을 때였다. 나는 이른 새벽 황 선수가 1위로 골인한 직후 YS에게 전화를 걸어서 “오늘 하루만이라도 여야(與野) 간에 정쟁(政爭)을 하지 말자고 제안하라”고 건의했다. YS는 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좋은 제안을 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3당 합당 이후 YS는 우여곡절 끝에 민자당 대통령 후보 자리를 쟁취했다. 대선 기간 중 손명순(孫命順) 여사가 정병국(鄭柄國, 제16~19대 국회의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역임) 비서관을 데리고 내 지역구인 서울 관악구 난곡의 판잣집들을 누비는 모습을 보면서 동정의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드디어 고대하던 문민(文民)정부가 들어섰다. YS는 하나회 숙정(肅正), 금융실명제, 공직자재산공개 등 개혁작업을 밀어붙였다. 나는 한일친선협회중앙회 회장으로 YS의 개혁작업을 응원했다.
1995년 8월 15일 YS는 구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했다. 나도 그날 행사에 내빈 중 한 사람으로 참석했다. YS와는 가볍게 목례만 나누었다. 행사가 끝난 후 하얏트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데스크에서 나를 찾았다.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는 것이었다. YS와 연결됐다. 그는 “오늘 내 연설이 어떻던가요?”라고 물었다. “아주 좋았습니다. 감동적이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역사바로세우기’가 당시 YS의 화두였다. 그해 11~12월에는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을 부정부패 및 12·12군사반란, 5·17내란 혐의로 구속했다. ‘역사바로세우기’ 와중에 JP도 민자당에서 밀려났다. 일각에서는 “YS가 그래도 JP를 생각해 주는 마음이 있었다”, 심지어는 “YS가 자기 다음은 JP라고 생각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JP는 독한 사람이거나 권력의지에 불타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YS는 JP를 대통령 후보로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JP가 퇴출(退出)된 후 민자당은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로 돌아왔다. 지역구가 아니라 전국구라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8년 만에 의정 단상으로 복귀한 것이다. 청와대에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YS를 만났다. 그는 “이번에 국회의장을 맡아 주어야겠다”고 했다.
全國區로 8년 만에 국회 복귀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에서는 내가 국회의장으로 지명되자 반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던 모양이다. 박상천(朴相千, 제13~16, 18대 국회의원, 법무부 장관·통합민주당 대표 역임) 원내총무가 DJ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DJ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YS 인사를 보면 잘못된 게 많았는데, 이번에는 YS가 의장을 잘 선택했습니다. 그러니 반대하지 마세요.”
참새들이 떠들어도 황새가 한마디 하면 다 조용해진다고 했던가? DJ가 한마디 하자 야당 안에서 반대의견을 쏙 들어가 버렸고, 나는 여야의 고른 지지를 받아 국회의장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동교동계와도 관계가 원만했다. DJ가 미국에 나가 있던 1980년대에 권노갑(權魯甲, 제13~15대 국회의원 역임)씨 등은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를 찾아오곤 했다. 나중에 DJ에게 합류한 사람들은 몰라도, 동교동계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국민회의 소속 신 모 의원은 나와 자꾸 부딪쳤다. 그러자 한영애(韓英愛, 제15대 국회의원 역임) 의원은 “신 의원, 의장님이 밥도 사 주고, 우리를 얼마나 많이 도와주었는데, 너무 그러지 마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노동개혁법안 날치기 통과
1996년 12월, YS정부는 노동 및 금융개혁법안들을 국회에 제출했다. 논란 끝에 이 법률들은 국회를 날치기로 통과했다. 야당과 재야는 거리로 몰려나왔다. 일련의 혼란 속에서 경제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결국 이는 외환(外換)위기로 가는 단초가 되었다.
나는 이수성(李壽成) 국무총리에게 노동개혁법안을 가급적 빨리 국회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어차피 국회에서 논란이 될 것이 뻔한 법안이었다. 그렇다면 국회 해당 상임위원회에서 시간을 갖고 검토해서 김을 빼 놓는 것이 좋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국회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쳤음에도 야당이 끝내 법안 처리를 거부한다면, 여당이 단독으로 강행처리하더라도 국민들이 이해해 줄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YS에게도 법안을 빨리 국회로 보내서 논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다. 그런데 YS는 천만 뜻밖의 얘기를 했다.
“의장이 그러는 게 일본 가는 문제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닙니까?” 당시 나는 국회의장이 된 후 일본 국회로부터 방일(訪日) 초청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중의원(하원)·참의원(상원) 합동회의에서 연설도 예정되어 있었다. YS는 내가 방일 일정에 차질을 빚을까 봐 법안 처리를 서두르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나는 일본을 내 집 드나들 듯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일본에 못 가서 병날 사람입니까?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 DJ가 함정을 파 놓고 있는 게 안 보입니까? 노동개혁법안 처리가 잘못되면 DJ는 정권타도의 불길을 불러일으키려 들 것입니다.”
1997년은 대선이 있는 해였다. 내가 보기에 DJ는 노동개혁법안을 원만하게 통과시켜 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노동개혁법안의 날치기 통과를 유도한 후 노동계를 비롯한 재야세력들이 거리로 나서서 대규모 반(反)정부시위를 벌이고 이로 인해 혼란이 야기되어 YS정권이 무력화(無力化)되는 상황을 노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YS에게 노동법안을 빨리 국회로 보내 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DJ는 지금 춘계공세(春季攻勢)를 준비하고 있어요. 거기에 말려들면 안 됩니다.”
하지만 YS나 정부는 태평이었다. 날치기로라도 노동개혁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만 하면, 이후 연말연시(年末年始)의 들뜬 분위기에 묻혀 날치기의 기억은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부가 뒤늦게 노동개혁법안을 국회로 보낸 후, 이홍구(李洪九) 신한국당 대표와 서청원(徐淸源, 제11,13~16,18,19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 새누리당 최고위원 역임) 원내총무는 의장공관으로 와서 법안 처리를 해 달라고 조르기만 했다. 나는 “법안 처리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랬다가는 큰일난다”고 했다. 그들은 나를 설득하지 못하자 오세응(吳世應, 제8~11,14,15대 국회의원 역임) 부의장에게 의사봉을 잡게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파국(破局)이었다.
민심의 흐름을 그렇게 잘 읽던 YS가 왜 그랬을까? 아마도 상황을 너무 쉽게 보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DJ는 그걸 읽고 있었다. 그는 밑밥을 놓고 낚싯대를 드리워 놓고 YS정부가 걸려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YS, 1997년 이회창, 이인제 중 누굴 지지했나?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에서는 한때 9룡(龍)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여러 사람이 대선 후보로 거론되었다. 하지만 결국은 이회창(李會昌, 국무총리, 제15,16,18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총재 역임) 대표와 이인제(李仁濟, 제13,14,16~19대 국회의원, 노동부장관, 경기도지사 역임) 경기도지사로 후보가 압축되었다. 이 지사는 YS가 ‘깜짝 놀랄 젊은 후보’를 이야기하면서 부각된 인물.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競選)에서 이회창 대표가 이겼지만, 이인제 지사는 1997년 9월 13일 신한국당을 탈당해 출마를 선언했다.
이인제 지사의 탈당을 두고 말이 많았다. 자신과 갈등을 빚던 이회창 대표가 대선 후보가 되는 것을 마뜩지 않아 하던 YS가 이 지사의 탈당을 은근히 조장했다거나, 대선 막바지까지도 YS가 이인제 후보에게 ‘끝까지 버티라’고 독려했다거나 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는 YS는 누가 신한국당 후보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을 정해 놓고 있지 않았다. 이회창은 절대로 안 된다거나, 이인제를 밀어야겠다거나 하는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애매했다.
9월 9일 이인제 지사가 탈당할 것이라는 얘기가 들려오자 나는 YS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인제 지사가 탈당한다고 합니다. 이 지사가 출마하게 놔 두어서는 안 됩니다.”
YS는 “의장께서 말리도록 하세요”라고 했다. YS는 자신의 영향력이 이인제 지사에게 미치지도 않거니와 자기가 직접 나서면 오해를 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이인제 지사를 만나 이렇게 설득했다.
“이 지사가 대선 후보로 나가도 DJ를 꺾을 수는 없어요. 오히려 일만 이상하게 되고 맙니다. 나가지 말고 다음을 생각하도록 합시다. 이회창 대표에게는 내가 잘 얘기해 놓겠어요.”
이 지사도 내 말에 수긍하는 것 같았다. 그는 “63빌딩에서 이회창 대표를 만나기로 했다”고 말했다. 나는 기자들에게 “이인제 지사는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회창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인제 지사를 만나거든 엎드려서 ‘제발 살려 달라. 도와 달라’고 해야 합니다. 무조건 낮은 자세로 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회창 대표는 YS가 이중플레이를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반응이 영 미덥지 않았다. 나는 걱정이 되어서 두 사람이 만나는 현장으로 사람을 보냈다. 그에게서 제1보가 왔다.
“의장님, 다 틀렸습니다!”
그의 얘기로는 이회창 대표가 이인제 지사를 만나는데, 마치 적장(敵將)의 항복을 받는 장수처럼 뻣뻣한 자세로 맞았다고 한다. 이 지사는 나와 통화한 것도 있고 해서 내심 이회창 대표가 유화적으로 나오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회창 대표가 그런 식으로 나오니 ‘빈정’이 상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두 사람 모두 율사(律師) 출신으로 정치적 유연성이 부족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결국 이인제 지사는 독자출마를 강행했다. 제15대 대선에서 DJ는 1032만여 표, 이회창 후보는 993만여 표, 이인제 후보는 492만여 표를 얻었다. 이회창 후보가 이인제 후보를 놓치지만 않았어도 선거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회창 후보는 제 복(福)을 차 버린 셈이다.
DJ의 ‘要職’ 제안
DJ의 대통령 취임준비위원회 사무실은 국회 내에 있었다. DJ는 당선자 시절 주요 외빈(外賓)들을 맞을 때면 새로 준비한 귀빈실을 곧잘 이용했다. DJ가 의장실에 들를 때면 옛날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대통령에 취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DJ가 박정수(朴定洙, 제10,11,13~15대 국회의원 역임) 외교통상부 장관을 보내 요직(要職)을 제안했다. DJ는 “의장께 걸맞은 자리는 아니라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나라를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맡아 달라”고 전해왔다. 깜짝 놀랐다. 단순히 모사(謀事)라고 치부할 수는 없는 발상이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DJ의 심려(深慮)는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장관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내가 걸어온 길이나 ‘국회의장’이라는 자리의 무게를 생각할 때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마 DJ가 내게 직접 제안을 하지 않고 박정수 장관을 통해 제안을 해 온 것도 그런 내 입장을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큰 부담 없이 “제안은 고맙지만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뜻을 전했다. 얼마 후 YS정부에서 국무총리와 신한국당 대표를 지낸 이홍구(李洪九)씨가 주미(駐美)대사로 나간 걸 보면, DJ는 내게만 그런 제안을 해 온 것이 아닌 듯했다.
후일 청와대에서 몇몇 인사들의 만찬(晩餐) 행사가 있었다. 국무총리였던 JP도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DJ는 “김수한 의장은 참 대단하신 분”이라면서 자기가 내게 이러이러한 제안을 했는데 거절하더라는 얘기를 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DJ는 험한 정치역정을 밟아 그 자리까지 올라갔다. 정치 초년병 시절에는 ‘호남 민주당’ 내에서도 철저하게 냉대를 받았다. 호남에서는 발가락 하나 넣을 틈도 얻지 못해 지역구를 찾아 강원도 인제 등지를 전전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부지런했고, 부단히 공부를 했다. 성명서의 90%는 본인이 직접 쓴 것이었다.
반면에 YS는 정치적으로는 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정치적으로 발목을 잡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주어진 비옥한 밭을 경작하는 사람과 같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구김이나 꾸밈이 없었다. 그에게는 천진난만한 동심(童心)과 같은 것이 있었다. 그에게 사람이 많이 몰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JP와는 걸어온 길이 달랐지만, 한일(韓日)의원연맹 일 등으로 많이 만났다. 그는 일본 문화, 예술, 정치, 그리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시기의 역사 등에 대해 잘 알았기 때문에 서로 말이 통하는 사이였다.
JP 총리 인준 부결
DJP연대(連帶)를 통해 대통령이 된 DJ는 JP를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JP가 DJ와 연대하는 바람에 대선에서 패했다고 생각한 한나라당은 JP를 비토하고 나섰다. 사실 국무총리 임명동의안 투표 전 여야 원내총무 회담 때는 이상득(李相得, 제13~18대 국회의원 역임) 원내총무도 총리 인준에 부정적이 아니었다.
나는 어차피 JP가 국무총리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거기에 반대하는 것은 못 먹는 밥에 재를 뿌리는 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선 패배의 한(恨)을 품은 한나라당은 결국 JP 임명동의안을 부결시키기로 했다. 나는 이상득 원내총무에게 “여당과 타협을 해 놓고서 이렇게 뒤집으면 의회정치가 안 된다. 이 총무는 원내총무 이전에 국회의원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
1998년 3월 2일 국무총리 임명동의안 투표가 있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기표소에 들어가지 않거나 기표소에 들어갔다가 바로 나왔다. 사실상의 공개투표였다. 여당이 된 새정치국민회의 의원들은 내게 몰려와 “저걸 두고만 볼 거냐?”고 아우성을 쳤다. 나는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북한에서나 하는 공개투표를 하고 있는 거냐?”고 야단을 쳤다. 하지만 먹혀들지 않았다. 결국 나는 “국회의장으로서 공개투표를 두고 볼 수는 없다”면서 투표를 중단시켰다.
이후 JP는 그해 8월까지 ‘국무총리 서리(署理)’ 딱지를 떼지 못했다. 이로 인해 경색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나는 여야 원내총무 회담을 여러 번 주선했다. 새정치국민회의의 박상천 원내총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의 이정무(李廷武, 제13,15대 국회의원, 건설교통부 장관 역임) 원내총무는 원만한 사람이었다. 이상득 한나라당 원내총무도 모난 사람은 아니었다. 꼬인 정국이 풀릴 듯도 했다. 그런데 회의 도중에 이상득 총무에게 전화가 걸려 오곤 했다. 나가서 전화통화를 하고 돌아오면 이 총무의 입장이 바뀌었다. 박상천 새정치국민회의 원내총무는 화가 나서 내게 “의장님, 차라리 이회창 총재 보고 이리 나오라고 하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이상득 원내총무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상득) 총무, XX 단 사람이 부끄럽지도 않소?”
“이 총무, XX 단 사람이 부끄럽지도 않소? 어떻게 하나하나 전화로 지시를 받아 가면서 일을 합니까?”
문제는 원내총무에게 재량(裁量)이 없다는 데 있었다. 나는 1960년대 말 신민당 원내 부총무를 하면서 정해영(鄭海永, 제3,5~10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역임) 원내총무가 일하는 것을 지켜본 일이 있었다. 정 총무는 여당인 공화당과 선거법 협상을 하면서 통 크게 협상을 했다. 어차피 안 된다 싶은 것은 과감하게 던져 주고, 대신 받을 것은 받았다. 선거법 협상 결과를 당에 보고하자 유옥우(劉沃祐, 제3,4,5,8,11대 국회의원 역임) 의원이 “정해영이가 당(黨)을 팔아먹는다”고 거세게 비난했다. 정 총무는 “뭐? 내가 당을 팔아먹는다고? 그럼 니가 해 봐라”라고 맞받아쳤다. 서로 서류와 물컵을 집어던지며 난리가 났다. 그래도 당시 원내총무는 재량을 가지고 회담장에 나왔고, 그 결과를 가지고 자기 당을 설득하는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모습이 언제부터인가 사라졌다.
원내총무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의원총회에서도 전과 같은 열정이 사라졌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매달리는 자기집착도, 문을 박차고 뛰쳐나오는 오기도 사라졌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아생연후(我生然後)라는 자세로 힘 있는 사람에게 잘못 보이지 않고 살아남고 보겠다는 기회주의 때문 아닐까?
정치를 하는 동안, 그리고 정치를 그만둔 이후에도 내가 힘을 쏟고 있는 문제 중 하나가 한일관계이다. 국회의원을 하는 동안에는 한일의원연맹 부회장을 지냈고, 1993년부터는 한일친선협회중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현해탄을 넘으면 與野가 없다”
젊은 시절 나는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대변인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6·3사태 등 우여곡절 끝에 한일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지만, 그 전도는 굉장히 암담했다. 내가 기억하기에 한일 양국 간에는 이렇다 할 정상적인 대화와 교류의 통로가 거의 없었다. 한일 양국 간에는 ‘손 붙일 곳’이 없었다.
그래서 한일관계 초기에는 학연(學緣)이 큰 역할을 했다. 예컨대 제8,9대 국회의원을 지낸 최세경(崔世卿) 전 의원 같은 경우는 아베 신타로(安倍晉太郞·아베 신조 현 일본 총리의 아버지) 전 일본 외무대신과 고등학교 동기동창이라는 인연으로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정권과 파이프라인 역할을 했었다.
하지만 일제(日帝)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대학이나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 많아야 얼마나 되었겠는가? 이런 식의 교류로는 한계가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일 양국에서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의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주지하다시피 일본은 의원내각제 국가였다. 국회의원들이 정치의 중심이었고, 다방면에 영향력도 강했다. 한국에도 국회가 있는 이상 학연을 비롯해 각종 인연을 더듬어서 공식적인 대화창구를 만들어야겠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래서 1972년에 한일의원간친회(懇親會)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일본측 대표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에서 대장(大藏)대신을 지낸 거물 정치인 가야 오키노리(賀屋興宣) 의원이, 우리측 대표는 처음에는 차지철(車智澈, 제6~9대 국회의원, 경호실장 역임) 의원이, 나중에는 JP가 맡았다. 차지철 의원이 간친회 대표가 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뜻이었다.
가야 의원과 차지철 의원 사이는 할아버지와 손자뻘 되었다. 하지만 가야 의원은 차 의원에게 깍듯하게 대했다. 먼저 자리를 양보하고 45도 각도로 인사를 하는 걸 보면서 ‘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일본측 간사는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 총리의 최고 정치참모가 되는 다나카 다쓰오(田中龍夫) 의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1920년대에 일본 총리를 지낸 조슈(長州)군벌의 거두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였다.
나도 간친회에 열심히 참여했다. 그때 우리는 ‘일단 현해탄(玄海灘)을 넘으면 여야(與野)가 없다. 오직 대한민국 대표일 뿐이다’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나는 한일의원연맹에 참여하는 후배 정치인들에게 “국내에서는 서로 머리가 터지도록 싸워도, 일단 현해탄을 넘어서 일본에 가면 대한민국이라는 깃발 아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당부한다.
한일의원연맹 출범
간친회는 국회의원들의 모임이다 보니, 참석자들의 발언이 자유롭고 운신의 폭도 넓었다. 가야 오키노리 의원은 일본 정계의 거물이다 보니 한일협정이 서둘러 처리되는 과정에서 생긴 문제점들을 살피고 보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도 간친회 활동에 큰 관심을 보였다.
나도 한일굴욕외교반대에 앞장섰지만, 당시 야당은 ‘더러운 돈 몇 푼을 받아서 우리 민족의 혼(魂)을 팔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강했다. 반면에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안 되는 상황에서 경제발전을 하자면 일본에서 들여오는 돈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당시는 일본측과 만남이 있을 때에, 일본측 인사들이 가져오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보고도 신기해하던 시절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못 참을 것을 참아서라도 일본으로부터 투자를 받고, 재일동포들의 재산을 들여와서 경제발전을 앞당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것밖에는 길이 없었다. 결국 그렇게 들여온 청구권 자금이나 차관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포항종합제철 등을 만들었다.
일본 야당 중에는 가스가 잇코 의원이 이끄는 민주사회당(민사당)이 있었다. 친북(親北)노선으로 일관한 사회당과는 달리 반공(反共)노선을 분명히 하는 정당이었다. 민사당도 31명의 의원 가운데 한 명만 빼고 모두 간친회에 들어오기로 했다. 이때 가스가 잇코 의원은 “‘간친회’라는 이름이 뭔가 부정한, 일종의 유착(癒着)과 같은 인상을 준다. 안 그래도 청구권 자금을 둘러싸고 온갖 이야기가 돌았는데, 그런 오해를 없애기 위해 이름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간친회는 1975년 한일의원연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공명당도 한일의원연맹에 들어오면서 사회당은 외톨이가 되었다. 일본의 민노총이라고 할 수 있는 총평(總評·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 일본의 전교조(全敎組) 격인 일교조(日敎組·일본교직원조합) 등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사회당은 이후로도 “대한민국은 정통성 없는 괴뢰정부이며, 북한이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일본사회당과 교류의 물꼬를 트다
1988년 통일민주당은 내가 중심이 되어 일본사회당과의 교류를 추진했다. 나는 일본 민사당 대회에서 연설하는 기회에 “사회당은 이제 한국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사회당 의원을 만날 기회가 있으면 “한 해에 수백만 명의 일본 국민이 한국을 방문하는데 사회당이 ‘북한이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일본 국민들이 이런 상황을 납득하겠느냐?”고 따졌다. 사회당 내에서도 이가라시 고조(五十嵐廣三·무라야마 정권에서 관방장관 역임) 의원 같은 이는 “사회당이 지금처럼 계속 과격 좌파노선을 걸으면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적대시하다가는 고립되고 만다”고 주장했다. 결국 일본사회당도 뒤늦게 한일의원연맹에 가입하겠다는 뜻을 표시해 왔다. 그러자 사회당에 비판적이던 가스가 잇코 민사당 위원장은 “한국이 사회당 같은 것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나가겠다”고 반발했다. 1988년 일본사회당의 이시바시 마사시(石橋政綱) 위원장이 방한(訪韓), 청와대를 예방(禮訪)했다. 일본사회당으로서는 가히 ‘페레스트로이카’라고 할 만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도이 다카고(土井多賀子) 의원 같은 사회당 내 좌파 인사들은 DJ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야 한국을 찾았다.
YS 시절 사회당 출신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가 일본 총리가 됐다. 나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고집 세게 지키는 무라야마 총리를 좋아했다. 나는 양국 사이에서 가교(架橋)역할을 했다. YS도 한일관계와 관련해서는 내 의견을 경청했다. YS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당선자 신분으로 일본 언론과 첫 인터뷰를 할 때 통역을 한 것도 나였다. YS가 한국어로 짧게 이야기하면, 나는 거기에 살을 붙여 전달했다. 일본 기자는 “YS가 하는 말은 짧은데, 당신이 하는 말은 왜 그렇게 기냐?”고 묻기도 했다.
한일친선협회
국회의원들이 아무리 영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한일 양국 간의 진정한 우호협력을 위해서는 풀뿌리 차원에서의 교류, 협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한일친선협회였다. 1976년 일본에서 일한(日韓)친선협회가, 이어 한국에서도 한일친선협회가 출범했다.
사실 일본에서는 1961년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친선협회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나왔다. 처음으로 친선협회가 만들어진 곳은 나가사키였다. 일본 정계의 거물인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한일국교정상화 당시 일본 외무대신)의 비서 출신인 나카무라 고카이(中村弘海)씨가 주동이 됐다. 그는 “지금 한국이 어려운 상황에 있으면서, 자유진영의 불침번으로서의 희생적 노력을 다하고 있는데, 우리가 본체만체해서야 되겠느냐? 도와주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 아들인 나카무라 가쓰스케(中村克介) 씨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가사키 한일친선협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나가사키의 뒤를 이어 야마구치, 구마모토, 시마네, 오이타, 히로시마 등에 협회가 만들어졌다.
일본에는 47개 도·도·부·현(都·道·府·縣)에 일한친선협회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광역지방자치단체는 물론 기초자치단체 수준에도 한일친선협회가 설립되어 있다. 특히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운 부산·경남지역이 활동이 활발한 편이다.
한일의원연맹에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통(日本通)이 된 나는 1993년부터 한일친선협회중앙회 회장을 맡았다. 친선협회 회장으로 일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데라우치(寺內) 문고의 반환이었다.
데라우치 문고는 초대(初代)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총독 재직 중 조선에서 수집한 서화(書畵), 서적 등을 말한다. 그는 일본의 골동품 및 서예 전문가들을 총독부의 별정직 공무원으로 데려와 조선 곳곳을 누비면서 추사(秋史)나 퇴계(退溪) 선생의 글씨나 전적(典籍)들을 수집하도록 했다. 은퇴하면 자신의 수집품들로 개인박물관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가 수집한 유물들은 그의 고향인 야마구치(山口)에 있는 야마구치현립대학(구 야마구치여대)이 소장하게 되었다.
1990년대 초 박영석(朴永錫) 국사편찬위원장이 데라우치 문고의 존재를 알고, 직접 현지에 가서 이를 확인했다. 박 위원장은 우리 선조들이 남긴 그림과 글씨, 책들이 대학 창고에서 썩어 가고 있는 것을 보고 바닥에 엎드려 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는 공노명(孔魯明·외무부장관 역임) 주일대사를 찾아가서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다. 공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건 공노명이도, 대통령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경위야 어찌 되었건 그 문화재들은 이미 개인의 것이고, 일본에 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정부간 교섭에 의해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유일한 방법은 인간적인 차원의 호소, 민간 레벨인 친선협회 차원에서의 호소밖에는 없습니다. 이걸 해결할 사람은 김수한 회장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문제는 내게 넘어왔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일한친선협회 회장은 앞에서 언급했던 다나카 다쓰오 씨였다. 그의 아버지 다나카 기이치 전 일본 총리는 같은 조슈 군벌인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직계(直系)였다. 다나카가(家)와 데라우치가는 인척(姻戚) 간이기도 했다. 나의 파트너이자 가까운 사이였던 다나카 다쓰오 회장, 가와무라 다케오(河村建夫) 중의원(衆議員)이 열심히 나서 주었다.
야마구치대학에서는 당초 자신들에게 유물들을 기증했던 데라우치 마사다케 후손들이 도장을 찍어서 동의를 하면 유물을 넘겨주겠다고 했다. 나와 다나카 회장은 일본 가나자와에 사는 데라우치의 후손을 수없이 찾아갔다. 일본 언론이나 문화계에서는 이 사실이 알려지자 맹렬히 반대했다. “문화재 반환 길이 이렇게 열리게 되면, 둑이 무너지듯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오게 된다”는 논리였다.
데라우치의 후손들과 야마구치대학은 1995년 북한 지역에서 수집한 유물들을 제외한 98종 135점의 유물을 돌려주기로 했다. 김생, 흥선대원군, 김정희, 성삼문, 서경덕, 정철, 고경명, 곽재우, 신흠, 임제, 장유 등의 글씨, 이황의 책, 순조의 세자인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가 세자시강원에 입학하는 장면을 묘사한 〈정축입학도첩〉 등 보물급 이상의 가치를 가진 유물들이었다.
그런데 기증식을 앞두고 문제가 생겼다. 《동아일보》에서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 ‘데라우치가 약탈해 간 유물들이 돌아온다’는 취지의 보도를 한 것이다. 데라우치의 유족들은 자기들이 유물들을 도둑질해 갔다는 얘기냐면서 기증식을 거부했다. 자칫하면 그때까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판이었다. 나는 《동아일보》 출신인 최시중(崔時仲) 한국갤럽 회장에게 부탁해서 정정(訂正)보도를 내보내도록 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돌아온 유물들을 일본과 가까운 경상남도에 위치한 경남대에 기증했다.⊙
YS는 자신이 1979년 5·30전당대회 이후 ‘선명(鮮明)야당’을 기치로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였기 때문에 결국 박정희 정권이 무너졌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반면에 DJ에게는 1971년 대선(大選)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라는 상징성이 있었다. 그는 1973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되어 돌아오기 전까지 미국과 일본에서 박정희 정권의 비(非)민주성을 고발했다. 또 국내에 들어와서는 재야(在野)세력과 연대(連帶)해서 박정희 정권과 싸웠다.
두 사람 모두 대권 가도(街道)에서 자신이 양보해야 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1980년 봄 내내 DJ의 신민당 입당 문제를 놓고 두 사람은 줄다리기를 하다가 결국은 결별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 신군부(新軍部)였다. 물론 YS와 DJ의 갈등이 없었더라도 신군부는 정치에 개입했을 것이다.
가스가 잇코 일본 민사당 위원장의 의리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비상계엄확대조치’라는 이름 아래 사실상의 쿠데타를 감행했다. 이어 광주(光州)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을 무력(武力)으로 진압한 후에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해 정권을 잡았다. 전두환(全斗煥) 정권은 1980년 11월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했다. 전두환 정권은 과거 공화당이나 신민당 등에서 활동하던 정치인들 중 일부는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으로 흡수하고, 일부는 관제(官製)야당인 민주한국당(민한당), 한국국민당(국민당) 등에서 정치를 계속할 수 있도록 했다. 협조하지 않는 정치인들은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다.
이런 조치가 있기 전에 신군부가 정치인들을 면담해 민정당이나 민한당에 참여할 의사를 타진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과정이 없었다. 아마 1980년 초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만났을 때(《월간조선》 2016년 1월호 참조), 내가 “군인이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말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들은 ‘김수한은 회유해도 안 따라올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권력에 굴종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니들 마음대로 해 봐라. 정 안 되면 지게라도 지면 된다. 설마 내가 밥을 못 먹기야 하겠느냐’는 게 내 생각이었다. 아내에게도 “체통 구길 일은 하지 말라”고 했다. 아내는 그 시절 알게 모르게 고생을 많이 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 시절을 견뎌 준 아내가 고맙다. 때때로 이철승(李哲承) 전 신민당 대표최고위원, 신경식(辛卿植, 제13~16대 국회의원) 현(現) 헌정회장 등과 테니스를 하면서 소일했다.
그 시절의 일로 가스가 잇코(春日一幸) 일본 민주사회당(민사당) 위원장이 나를 찾아 준 일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한일의원연맹 활동을 같이 하면서 나와 친하게 지냈던 그는 1981년 3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일본 총리와 함께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 축하사절로 방한(訪韓)했다. 그는 취임식에 참석한 후 일본대사관 차(車)를 타고 우리 집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나는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에는 관심이 없다. 김 의원이 무사한지 보려고 온 거다”라고 말했다. 그는 “고문(拷問)당하거나 하지는 않았느냐?”면서 내 몸을 만져 보기까지 했다. 그 마음 씀씀이가 눈물 나게 고마웠다.
신군부, YS에게 渡美 권유
아마 전두환 정권은 민한당이라는 ‘가짜 야당’을 앞세우고, 자기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는 정치인들은 한 4년 정도 정치활동을 못하게 묶어 놓으면 저절로 사그라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엄혹한 시절에도 물밑으로는 민주화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었다.
1983년 5월 18일, YS는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민주화를 요구하는 단식(斷食)투쟁을 벌였다. 전두환 정권은 권익현(權翊鉉) 민정당 사무총장을 보내 YS를 설득했다. 항공권이며 체재비 등을 다 제공할 테니 미국으로 나가 달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YS는 “국민들이 군사통치의 억압 아래 있는데, 내가 국민 곁을 떠날 수는 없다”면서 이를 거부했다. 군사정권 시절, ‘죽으나 사나 국민과 함께’라는 자세로 한 번도 국민의 곁을 떠나지 않고 국내에서 투쟁했다는 것이 YS의 큰 특징이었다. 10월 유신 선포 당시에도 그는 일본에 있었지만, 체포될 위험을 무릅쓰고 귀국했다. 이 점에서 YS는 유신선포 후 한동안 해외를 떠돌았고, 전두환 정권 시절에도 미국으로 나갔던 DJ와 달랐다.
단식투쟁 이후 YS는 민주산악회,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활동 등을 통해 민주화운동을 이어 갔다. 나도 거기에 참여해서 힘을 보탰다. 1984년 9월경이 되면서는 물밑에서 신당(新黨) 창당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민추협은 재야에서의 민주화운동을, 신당은 원내(院內)로 진출한다는 투 트랙(two track) 전략이었다. 이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YS였다. DJ는 당시 미국에 체류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수동적인 입장에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보나마나 이듬해 제12대 총선(總選)을 코앞에 두고 마지막 남은 정치활동 피(被)규제자들을 해금(解禁)할 것이 뻔했다. 그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해야 했다. 나는 창당선언문, 당헌·당규안(黨憲·黨規案) 등을 가지고 안기부의 감시를 피해 김재광(金在光, 제6~10,12~14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역임) 전 의원 등을 찾아다니면서 신당 창당에 대해 논의했다. 이런 연유로 신한민주당이 창당된 후, 창당 기념행사 때에는 내가 창당선언문을 낭독하곤 했다.
민한당에 참여하고 있던 고재청(高在淸, 제9~12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역임) 의원 등이 자기들에게 오라고 손짓을 하기도 했다. 함께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면서 정국(政局)추이를 살폈다.
新黨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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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민주당 관악지구당 창당대회. 1980년 이후 5년간 억눌려 왔던 민심은 2·12총선에서 폭발, ‘신당 돌풍’을 일으켰다. |
지금은 선거 때 공천(公薦)경쟁이 치열하지만, 그때는 신한민주당 공천으로 나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내로라하던 옛 신민당의 중진(重鎭)들도 자신 없어 하면서 억지로 나서는 듯한 모양새였다. 서울 관악, 영등포 쪽에서 출마하려는 사람은 나와 박한상(朴漢相, 제6~10,12대 국회의원 역임) 전 의원 정도였다.
1985년 2월 12일, 군사정권의 억압 아래서 숨을 죽이고 있던 민심(民心)이 드디어 폭발했다. 신한민주당은 지역구(50석)와 전국구(17석)를 합쳐 67석을 차지하면서 제1야당으로 떠올랐다. 민한당은 모두 35석을 얻어 제2야당으로 추락했다. ‘이변(異變) 중의 이변’이 벌어진 것이다.
서울 관악에서 출마한 나는 43%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국회로 돌아왔다. 2위로 당선된 임철순(任哲淳, 제11,12대 국회의원 역임) 의원은 29.3%를 득표하는 데 그쳤다. 이렇게 압승할 수 있었던 것은 제10대 총선 당시 61.4%라는 전국 최고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면서도 이후 전두환 정권 아래서 정치규제에 묶여야 했던 나에 대한 유권자들의 동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신한민주당이 내건 ‘직선제(直選制) 개헌’이라는 구호가 먹혀들어 갔기 때문이었다. 유신 이후 ‘체육관 대통령 선거’에 신물이 난 국민들은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자’는 외침에 열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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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민주당 개헌추진본부 대구시 및 경상북도 지부 출범식을 마친 후. 왼쪽부터 신도환, 김수한, 이민우, 김영삼, 김동영. |
직선제 개헌 투쟁이 2년 가까이 계속되면서 정국은 교착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86년 12월 나온 것이 ‘이민우 구상’이었다. 이민우 총재는 언론자유 보장, 구속자 석방, 사면복권, 공무원의 정치중립 보장, 국회의원 선거법 협상, 지방자치제도 도입 등을 전두환 정권이 받아들이면 의원내각제 개헌에 응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당시 신민당 대변인이던 홍사덕(洪思德, 제11,12,14,15,16,19대 국회의원 역임) 의원의 조언이 있었다.
아마 이민우 총재는 “전두환 정권이 저렇게 버티는 한 직선제 개헌은 어렵다. 차라리 의원내각제 개헌을 받고, 어느 정도의 민주화라도 이루어 보자”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또 그도 정치인인 이상 개인적인 야심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의원내각제 개헌이 되면 실권(實權)이야 있건 없건 간에 자기가 수상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전두환 정권이 “의원내각제 개헌이 되고 야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면, 이민우 대통령-김영삼 수상도 가능하다”고 속삭였을지도 모른다.
정호용, “장난 치지 말라”
하지만 ‘이민우 구상’은 그를 신민당 총재로 내세웠던 YS와 DJ에게는 일종의 ‘배신’이었다. YS와 DJ는 자신들을 따르는 의원들을 탈당(脫黨)시켜 통일민주당을 창당, 이민우 총재를 무력화(無力化)했다.
통일민주당이 창당에 들어가자 전두환 정권은 1987년 4월 조폭들을 동원해 폭력으로 창당방해에 나섰다. 이른파 ‘용팔이사건’이다. 통일민주당 관악지구당 창당행사가 있던 날, 나는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YS 등과 함께 일종의 장행회(壯行會)를 가진 후, 김현규(金鉉圭, 제10~12대 국회의원 역임) 의원 등과 지구당으로 향했다. 하지만 지구당 사무실은 이미 폭력배들에게 점령을 당한 후였다. 결국 대회는 다른 곳에서 약식으로 치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박용만(朴容萬, 제9,10,12,13대 국회의원 역임) 의원과 함께 정호용(鄭鎬溶, 내무·국방부 장관, 제13,14대 국회의원 역임) 내무부 장관을 찾아가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항의했다. 당시 사건의 배후에 안기부가 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 장관은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 오히려 우리보고 “장난치지 말라”고 했다. 경북고를 졸업한 정 장관은 경북고 중퇴인 내게는 후배였다. 이때의 일 때문에 그는 경북고 행사 같은 데서 나를 만나면, 미안해한다.
1987년 1월 박종철군 고문치사(致死) 사건이 발생했다. 국민들은 군사정권의 폭력성에 분노했다. ‘독재 타도, 직선제 개헌’을 외치는 국민들의 함성이 높아졌다. 전두환 정권은 개헌 논의를 중단하고 5공(共)헌법에 따라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내용의 4·13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이어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 조작되었다는 폭로가 나왔다. 민정당이 노태우(盧泰愚)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는 6월 10일을 전후해서 전국적으로 민주화요구 시위가 벌어졌다. 결국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직선제 개헌안 수용 등 일련의 민주화 조치를 약속하는 6·29선언을 발표했다. 국민이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고, 정권교체가 눈앞으로 다가오자 YS와 DJ는 다시 분열했다. 국민들은 두 사람에게 ‘단일화’를 요구했다. 두 사람도 ‘단일화’를 다짐했다. 하지만 그건 자기로의 단일화였다. 시일이 지날수록 두 사람이 갈라설 것이라는 사실은 점점 분명해졌다.
두 사람의 분열이 목전에 닥치자, 통일민주당 소속 의원들은 의원총회를 열어 YS와 DJ에게 “하나가 되어 달라”고 호소하는 결의를 채택한 후, 두 사람에게 대표단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대표단은 나를 비롯해 고재청 의원 등 7~8명으로 구성했다.
YS에게 전화를 걸어 대표단이 찾아가겠다고 알렸다. YS는 “나는 의총(議總) 결의에 따를 테니, 내게는 굳이 찾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DJ에게 전화를 했더니 “오라”고 했다. 동교동 지하 서재에서 DJ를 만났다. DJ는 한참 동안 자기가 젊은 시절부터 시작해서 민주화 과정에서 고생한 이야기, 감옥에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이야기 등을 했다. 그러고는 “내가 출마하지 않으면 큰일난다”고 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자기가 출마하지 않으면 지지자들이 여러 명 목숨을 끊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런 분들을 설득해서 후보 단일화를 이룩하고, 군정(軍政)을 종식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간곡하게 호소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고 YS가 양보할 리도 없었다. YS는 자신이야말로 정통야당의 적자(嫡子)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반면에 DJ는 비주류(非主流)였다. 나중에는 호남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되었지만, 젊은 시절에는 호남 출신이 주도하던 민주당 내에서도 소외된 편이었다. 심지어 1967년 6·8선거 당시 야당 일부에서는 DJ의 지역구이던 목포에 DJ 대신 나를 출마시키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그때 DJ는 한일국교정상화 비준반대투쟁 과정에서 비교적 온건한 행보를 보였다는 이유로 야권 강경파 인사들로부터 훼절했다는 소리까지 듣고 있었다. 나는 정통야당의 주류로 성장해 온 YS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그 시점에서는 순리라고 생각했다. 당내에서도 말로는 ‘단일화’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두 사람의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이 있었다.
결국 DJ는 제13대 대선(大選)을 앞둔 1987년 11월,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했다. YS와 DJ가 분열한 결과, 그해 대선 승리는 노태우 민정당 후보에게 돌아갔다.
이듬해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다. 1971년 제8대 총선 이후 17년 만에 다시 소선거구제가 도입됐다. 내 지역구인 서울 관악을(乙)은 호남세(湖南勢)가 강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경북 출신인 나는 평소 지구당 간부에 호남 출신 인사들을 많이 썼다. 나도 그들에게 잘해 주려 애를 썼고, 그들도 내게 잘해 주었다.
분당 후 평민당 이해찬에 낙선
하지만 DJ가 평민당을 창당하고 나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호남 출신 참모들은 내게 “DJ에게 가라”고 간절하게 호소했다. 나로서도 총선을 생각하면 그렇게 하는 게 유리했다. 하지만 나는 자유당 시절 민권수호국민총연맹을 할 때부터 DJ를 잘 알고 지냈다. 정치적 입장, 성격 등으로 보아 우리는 맞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나는 DJ에게는 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YS와 잘 맞는 편이었고, YS도 일찍부터 내게 잘해 주었다. 나는 평민당 행을 호소하는 지구당 간부들에게 “정치를 그만두었으면 그만두었지, 인간적으로 그럴 수는 없다”고 말했다. 결국 그들은 통일민주당을 떠나 평민당으로 옮겨갔다. 그때의 안타까움, 아쉬움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다.
평민당에서는 서울대 운동권 출신인 이해찬(李海讚, 제13~17,19대 국회의원, 국무총리 역임)씨를 후보로 내세웠다. 나를 겨냥한 ‘표적공천’이라는 소리가 나왔다. 이희호 여사는 선거 기간 중 내 지역구에 세 번이나 다녀갔다. 결국 나는 패배의 쓴잔을 마시고 말았다.
제13대 총선 결과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이 형성되었다. YS는 대선에서는 2위를 했지만, 총선에서는 호남을 기반으로 한 DJ의 평민당에 밀려 제3당이 되었다. 아마 YS는 절치부심(切齒腐心)했을 것이다. 5공 청산 등으로 정국이 바쁘게 돌아갔다. 하지만 원외(院外)인 나는 정국의 소용돌이에서 한 발 물러나 있었다.
1990년 1월 22일 YS가 노태우 대통령, JP와 함께 3당 합당(合黨)을 발표했다. 그러한 움직임을 잘 모르고 있었던 나는 깜짝 놀랐다.
YS라고 해서 왜 고민이 없었을까? 하지만 정치인에게는 뭔가 성취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초산(硝酸)테러, 1976년 5·25전당대회 당시 깡패들의 습격, 전두환 정권 시절의 단식투쟁 등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 그때까지 견뎌 온 YS로서는 자신의 나이 등을 생각할 때, 뭔가 인생의 승부를 걸 때가 왔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나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3당 합당을 결행했다”는 YS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때문에 나는 3당 합당이라는 YS의 결심을 지지했다.
YS도 그런 나를 여러 가지로 배려해 주었다. 원외였지만, 민자당 당무위원으로 밀어 주었다. 3당 합당을 한 후 민자당 지구당 조직책을 뽑을 때의 일이다. 구(舊) 민정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에서 인선(人選)위원을 선정해 지구당 조직책을 선정하기로 했다. 원외인 나는 아무래도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때 나는 한일친선협회 행사로 일본 도쿄에 있다가 지구당 조직책에서 탈락할 것 같다는 소식을 들었다. YS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 얘기를 했더니 “씰데 없는 소리!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결국 나는 지구당을 지킬 수 있었다.
여러 가지로 나를 챙겨 준 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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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는 1990년 소련 방문 당시 고집을 부려 방문단에 김수한 의원을 포함시켰다. 왼쪽부터 박종률 의원,YS,김수한 의원, 황병태 의원. |
YS가 그렇게 나를 챙겨 준 것은 “다른 세력과 싸울 때에는 김수한이 꼭 필요한 사람이다. 김수한이 나서서 해 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였던 것 같다. YS의 그런 믿음과 배려에 대해 나는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나도 YS에게 크고 작은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에서 황영조 선수가 우승했을 때였다. 나는 이른 새벽 황 선수가 1위로 골인한 직후 YS에게 전화를 걸어서 “오늘 하루만이라도 여야(與野) 간에 정쟁(政爭)을 하지 말자고 제안하라”고 건의했다. YS는 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좋은 제안을 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3당 합당 이후 YS는 우여곡절 끝에 민자당 대통령 후보 자리를 쟁취했다. 대선 기간 중 손명순(孫命順) 여사가 정병국(鄭柄國, 제16~19대 국회의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역임) 비서관을 데리고 내 지역구인 서울 관악구 난곡의 판잣집들을 누비는 모습을 보면서 동정의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드디어 고대하던 문민(文民)정부가 들어섰다. YS는 하나회 숙정(肅正), 금융실명제, 공직자재산공개 등 개혁작업을 밀어붙였다. 나는 한일친선협회중앙회 회장으로 YS의 개혁작업을 응원했다.
1995년 8월 15일 YS는 구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했다. 나도 그날 행사에 내빈 중 한 사람으로 참석했다. YS와는 가볍게 목례만 나누었다. 행사가 끝난 후 하얏트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데스크에서 나를 찾았다.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는 것이었다. YS와 연결됐다. 그는 “오늘 내 연설이 어떻던가요?”라고 물었다. “아주 좋았습니다. 감동적이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역사바로세우기’가 당시 YS의 화두였다. 그해 11~12월에는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을 부정부패 및 12·12군사반란, 5·17내란 혐의로 구속했다. ‘역사바로세우기’ 와중에 JP도 민자당에서 밀려났다. 일각에서는 “YS가 그래도 JP를 생각해 주는 마음이 있었다”, 심지어는 “YS가 자기 다음은 JP라고 생각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JP는 독한 사람이거나 권력의지에 불타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YS는 JP를 대통령 후보로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JP가 퇴출(退出)된 후 민자당은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로 돌아왔다. 지역구가 아니라 전국구라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8년 만에 의정 단상으로 복귀한 것이다. 청와대에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YS를 만났다. 그는 “이번에 국회의장을 맡아 주어야겠다”고 했다.
全國區로 8년 만에 국회 복귀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에서는 내가 국회의장으로 지명되자 반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던 모양이다. 박상천(朴相千, 제13~16, 18대 국회의원, 법무부 장관·통합민주당 대표 역임) 원내총무가 DJ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DJ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YS 인사를 보면 잘못된 게 많았는데, 이번에는 YS가 의장을 잘 선택했습니다. 그러니 반대하지 마세요.”
참새들이 떠들어도 황새가 한마디 하면 다 조용해진다고 했던가? DJ가 한마디 하자 야당 안에서 반대의견을 쏙 들어가 버렸고, 나는 여야의 고른 지지를 받아 국회의장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동교동계와도 관계가 원만했다. DJ가 미국에 나가 있던 1980년대에 권노갑(權魯甲, 제13~15대 국회의원 역임)씨 등은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를 찾아오곤 했다. 나중에 DJ에게 합류한 사람들은 몰라도, 동교동계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국민회의 소속 신 모 의원은 나와 자꾸 부딪쳤다. 그러자 한영애(韓英愛, 제15대 국회의원 역임) 의원은 “신 의원, 의장님이 밥도 사 주고, 우리를 얼마나 많이 도와주었는데, 너무 그러지 마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노동개혁법안 날치기 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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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7월 8일 YS의 국회연설을 지켜보는 김수한 국회의장. |
나는 이수성(李壽成) 국무총리에게 노동개혁법안을 가급적 빨리 국회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어차피 국회에서 논란이 될 것이 뻔한 법안이었다. 그렇다면 국회 해당 상임위원회에서 시간을 갖고 검토해서 김을 빼 놓는 것이 좋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국회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쳤음에도 야당이 끝내 법안 처리를 거부한다면, 여당이 단독으로 강행처리하더라도 국민들이 이해해 줄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YS에게도 법안을 빨리 국회로 보내서 논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다. 그런데 YS는 천만 뜻밖의 얘기를 했다.
“의장이 그러는 게 일본 가는 문제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닙니까?” 당시 나는 국회의장이 된 후 일본 국회로부터 방일(訪日) 초청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중의원(하원)·참의원(상원) 합동회의에서 연설도 예정되어 있었다. YS는 내가 방일 일정에 차질을 빚을까 봐 법안 처리를 서두르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나는 일본을 내 집 드나들 듯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일본에 못 가서 병날 사람입니까?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 DJ가 함정을 파 놓고 있는 게 안 보입니까? 노동개혁법안 처리가 잘못되면 DJ는 정권타도의 불길을 불러일으키려 들 것입니다.”
1997년은 대선이 있는 해였다. 내가 보기에 DJ는 노동개혁법안을 원만하게 통과시켜 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노동개혁법안의 날치기 통과를 유도한 후 노동계를 비롯한 재야세력들이 거리로 나서서 대규모 반(反)정부시위를 벌이고 이로 인해 혼란이 야기되어 YS정권이 무력화(無力化)되는 상황을 노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YS에게 노동법안을 빨리 국회로 보내 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DJ는 지금 춘계공세(春季攻勢)를 준비하고 있어요. 거기에 말려들면 안 됩니다.”
하지만 YS나 정부는 태평이었다. 날치기로라도 노동개혁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만 하면, 이후 연말연시(年末年始)의 들뜬 분위기에 묻혀 날치기의 기억은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부가 뒤늦게 노동개혁법안을 국회로 보낸 후, 이홍구(李洪九) 신한국당 대표와 서청원(徐淸源, 제11,13~16,18,19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 새누리당 최고위원 역임) 원내총무는 의장공관으로 와서 법안 처리를 해 달라고 조르기만 했다. 나는 “법안 처리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랬다가는 큰일난다”고 했다. 그들은 나를 설득하지 못하자 오세응(吳世應, 제8~11,14,15대 국회의원 역임) 부의장에게 의사봉을 잡게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파국(破局)이었다.
민심의 흐름을 그렇게 잘 읽던 YS가 왜 그랬을까? 아마도 상황을 너무 쉽게 보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DJ는 그걸 읽고 있었다. 그는 밑밥을 놓고 낚싯대를 드리워 놓고 YS정부가 걸려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YS, 1997년 이회창, 이인제 중 누굴 지지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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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신한국당 대표는 1997년 9월 9일 이인제 경기지사와 만났지만, 이 지사는 결국 독자출마를 강행했다. |
이인제 지사의 탈당을 두고 말이 많았다. 자신과 갈등을 빚던 이회창 대표가 대선 후보가 되는 것을 마뜩지 않아 하던 YS가 이 지사의 탈당을 은근히 조장했다거나, 대선 막바지까지도 YS가 이인제 후보에게 ‘끝까지 버티라’고 독려했다거나 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는 YS는 누가 신한국당 후보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을 정해 놓고 있지 않았다. 이회창은 절대로 안 된다거나, 이인제를 밀어야겠다거나 하는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애매했다.
9월 9일 이인제 지사가 탈당할 것이라는 얘기가 들려오자 나는 YS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인제 지사가 탈당한다고 합니다. 이 지사가 출마하게 놔 두어서는 안 됩니다.”
YS는 “의장께서 말리도록 하세요”라고 했다. YS는 자신의 영향력이 이인제 지사에게 미치지도 않거니와 자기가 직접 나서면 오해를 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이인제 지사를 만나 이렇게 설득했다.
“이 지사가 대선 후보로 나가도 DJ를 꺾을 수는 없어요. 오히려 일만 이상하게 되고 맙니다. 나가지 말고 다음을 생각하도록 합시다. 이회창 대표에게는 내가 잘 얘기해 놓겠어요.”
이 지사도 내 말에 수긍하는 것 같았다. 그는 “63빌딩에서 이회창 대표를 만나기로 했다”고 말했다. 나는 기자들에게 “이인제 지사는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회창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인제 지사를 만나거든 엎드려서 ‘제발 살려 달라. 도와 달라’고 해야 합니다. 무조건 낮은 자세로 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회창 대표는 YS가 이중플레이를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반응이 영 미덥지 않았다. 나는 걱정이 되어서 두 사람이 만나는 현장으로 사람을 보냈다. 그에게서 제1보가 왔다.
“의장님, 다 틀렸습니다!”
그의 얘기로는 이회창 대표가 이인제 지사를 만나는데, 마치 적장(敵將)의 항복을 받는 장수처럼 뻣뻣한 자세로 맞았다고 한다. 이 지사는 나와 통화한 것도 있고 해서 내심 이회창 대표가 유화적으로 나오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회창 대표가 그런 식으로 나오니 ‘빈정’이 상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두 사람 모두 율사(律師) 출신으로 정치적 유연성이 부족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결국 이인제 지사는 독자출마를 강행했다. 제15대 대선에서 DJ는 1032만여 표, 이회창 후보는 993만여 표, 이인제 후보는 492만여 표를 얻었다. 이회창 후보가 이인제 후보를 놓치지만 않았어도 선거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회창 후보는 제 복(福)을 차 버린 셈이다.
DJ의 ‘要職’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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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에 당선된 DJ는 1997년 12월 26일 국회를 방문, 김수한 국회의장과 인사를 나누었다. |
대통령에 취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DJ가 박정수(朴定洙, 제10,11,13~15대 국회의원 역임) 외교통상부 장관을 보내 요직(要職)을 제안했다. DJ는 “의장께 걸맞은 자리는 아니라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나라를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맡아 달라”고 전해왔다. 깜짝 놀랐다. 단순히 모사(謀事)라고 치부할 수는 없는 발상이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DJ의 심려(深慮)는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장관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내가 걸어온 길이나 ‘국회의장’이라는 자리의 무게를 생각할 때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마 DJ가 내게 직접 제안을 하지 않고 박정수 장관을 통해 제안을 해 온 것도 그런 내 입장을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큰 부담 없이 “제안은 고맙지만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뜻을 전했다. 얼마 후 YS정부에서 국무총리와 신한국당 대표를 지낸 이홍구(李洪九)씨가 주미(駐美)대사로 나간 걸 보면, DJ는 내게만 그런 제안을 해 온 것이 아닌 듯했다.
후일 청와대에서 몇몇 인사들의 만찬(晩餐) 행사가 있었다. 국무총리였던 JP도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DJ는 “김수한 의장은 참 대단하신 분”이라면서 자기가 내게 이러이러한 제안을 했는데 거절하더라는 얘기를 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DJ는 험한 정치역정을 밟아 그 자리까지 올라갔다. 정치 초년병 시절에는 ‘호남 민주당’ 내에서도 철저하게 냉대를 받았다. 호남에서는 발가락 하나 넣을 틈도 얻지 못해 지역구를 찾아 강원도 인제 등지를 전전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부지런했고, 부단히 공부를 했다. 성명서의 90%는 본인이 직접 쓴 것이었다.
반면에 YS는 정치적으로는 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정치적으로 발목을 잡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주어진 비옥한 밭을 경작하는 사람과 같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구김이나 꾸밈이 없었다. 그에게는 천진난만한 동심(童心)과 같은 것이 있었다. 그에게 사람이 많이 몰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JP와는 걸어온 길이 달랐지만, 한일(韓日)의원연맹 일 등으로 많이 만났다. 그는 일본 문화, 예술, 정치, 그리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시기의 역사 등에 대해 잘 알았기 때문에 서로 말이 통하는 사이였다.
JP 총리 인준 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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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3월 2일 JP의 국무총리 임명동의안 표결 도중, 투표 중단을 선언하자 한나라당 의원들이 김수한 의장에게 거세게 항의하고 있다. |
나는 어차피 JP가 국무총리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거기에 반대하는 것은 못 먹는 밥에 재를 뿌리는 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선 패배의 한(恨)을 품은 한나라당은 결국 JP 임명동의안을 부결시키기로 했다. 나는 이상득 원내총무에게 “여당과 타협을 해 놓고서 이렇게 뒤집으면 의회정치가 안 된다. 이 총무는 원내총무 이전에 국회의원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
1998년 3월 2일 국무총리 임명동의안 투표가 있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기표소에 들어가지 않거나 기표소에 들어갔다가 바로 나왔다. 사실상의 공개투표였다. 여당이 된 새정치국민회의 의원들은 내게 몰려와 “저걸 두고만 볼 거냐?”고 아우성을 쳤다. 나는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북한에서나 하는 공개투표를 하고 있는 거냐?”고 야단을 쳤다. 하지만 먹혀들지 않았다. 결국 나는 “국회의장으로서 공개투표를 두고 볼 수는 없다”면서 투표를 중단시켰다.
이후 JP는 그해 8월까지 ‘국무총리 서리(署理)’ 딱지를 떼지 못했다. 이로 인해 경색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나는 여야 원내총무 회담을 여러 번 주선했다. 새정치국민회의의 박상천 원내총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의 이정무(李廷武, 제13,15대 국회의원, 건설교통부 장관 역임) 원내총무는 원만한 사람이었다. 이상득 한나라당 원내총무도 모난 사람은 아니었다. 꼬인 정국이 풀릴 듯도 했다. 그런데 회의 도중에 이상득 총무에게 전화가 걸려 오곤 했다. 나가서 전화통화를 하고 돌아오면 이 총무의 입장이 바뀌었다. 박상천 새정치국민회의 원내총무는 화가 나서 내게 “의장님, 차라리 이회창 총재 보고 이리 나오라고 하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이상득 원내총무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상득) 총무, XX 단 사람이 부끄럽지도 않소?”
“이 총무, XX 단 사람이 부끄럽지도 않소? 어떻게 하나하나 전화로 지시를 받아 가면서 일을 합니까?”
문제는 원내총무에게 재량(裁量)이 없다는 데 있었다. 나는 1960년대 말 신민당 원내 부총무를 하면서 정해영(鄭海永, 제3,5~10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역임) 원내총무가 일하는 것을 지켜본 일이 있었다. 정 총무는 여당인 공화당과 선거법 협상을 하면서 통 크게 협상을 했다. 어차피 안 된다 싶은 것은 과감하게 던져 주고, 대신 받을 것은 받았다. 선거법 협상 결과를 당에 보고하자 유옥우(劉沃祐, 제3,4,5,8,11대 국회의원 역임) 의원이 “정해영이가 당(黨)을 팔아먹는다”고 거세게 비난했다. 정 총무는 “뭐? 내가 당을 팔아먹는다고? 그럼 니가 해 봐라”라고 맞받아쳤다. 서로 서류와 물컵을 집어던지며 난리가 났다. 그래도 당시 원내총무는 재량을 가지고 회담장에 나왔고, 그 결과를 가지고 자기 당을 설득하는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모습이 언제부터인가 사라졌다.
원내총무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의원총회에서도 전과 같은 열정이 사라졌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매달리는 자기집착도, 문을 박차고 뛰쳐나오는 오기도 사라졌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아생연후(我生然後)라는 자세로 힘 있는 사람에게 잘못 보이지 않고 살아남고 보겠다는 기회주의 때문 아닐까?
정치를 하는 동안, 그리고 정치를 그만둔 이후에도 내가 힘을 쏟고 있는 문제 중 하나가 한일관계이다. 국회의원을 하는 동안에는 한일의원연맹 부회장을 지냈고, 1993년부터는 한일친선협회중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현해탄을 넘으면 與野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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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5월 일본을 방문, 사이토 류조 참의원 의장(오른쪽) 등과 만나 의원외교를 펼쳤다. |
그래서 한일관계 초기에는 학연(學緣)이 큰 역할을 했다. 예컨대 제8,9대 국회의원을 지낸 최세경(崔世卿) 전 의원 같은 경우는 아베 신타로(安倍晉太郞·아베 신조 현 일본 총리의 아버지) 전 일본 외무대신과 고등학교 동기동창이라는 인연으로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정권과 파이프라인 역할을 했었다.
하지만 일제(日帝)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대학이나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 많아야 얼마나 되었겠는가? 이런 식의 교류로는 한계가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일 양국에서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의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주지하다시피 일본은 의원내각제 국가였다. 국회의원들이 정치의 중심이었고, 다방면에 영향력도 강했다. 한국에도 국회가 있는 이상 학연을 비롯해 각종 인연을 더듬어서 공식적인 대화창구를 만들어야겠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래서 1972년에 한일의원간친회(懇親會)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일본측 대표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에서 대장(大藏)대신을 지낸 거물 정치인 가야 오키노리(賀屋興宣) 의원이, 우리측 대표는 처음에는 차지철(車智澈, 제6~9대 국회의원, 경호실장 역임) 의원이, 나중에는 JP가 맡았다. 차지철 의원이 간친회 대표가 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뜻이었다.
가야 의원과 차지철 의원 사이는 할아버지와 손자뻘 되었다. 하지만 가야 의원은 차 의원에게 깍듯하게 대했다. 먼저 자리를 양보하고 45도 각도로 인사를 하는 걸 보면서 ‘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일본측 간사는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 총리의 최고 정치참모가 되는 다나카 다쓰오(田中龍夫) 의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1920년대에 일본 총리를 지낸 조슈(長州)군벌의 거두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였다.
나도 간친회에 열심히 참여했다. 그때 우리는 ‘일단 현해탄(玄海灘)을 넘으면 여야(與野)가 없다. 오직 대한민국 대표일 뿐이다’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나는 한일의원연맹에 참여하는 후배 정치인들에게 “국내에서는 서로 머리가 터지도록 싸워도, 일단 현해탄을 넘어서 일본에 가면 대한민국이라는 깃발 아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당부한다.
한일의원연맹 출범
간친회는 국회의원들의 모임이다 보니, 참석자들의 발언이 자유롭고 운신의 폭도 넓었다. 가야 오키노리 의원은 일본 정계의 거물이다 보니 한일협정이 서둘러 처리되는 과정에서 생긴 문제점들을 살피고 보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도 간친회 활동에 큰 관심을 보였다.
나도 한일굴욕외교반대에 앞장섰지만, 당시 야당은 ‘더러운 돈 몇 푼을 받아서 우리 민족의 혼(魂)을 팔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강했다. 반면에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안 되는 상황에서 경제발전을 하자면 일본에서 들여오는 돈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당시는 일본측과 만남이 있을 때에, 일본측 인사들이 가져오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보고도 신기해하던 시절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못 참을 것을 참아서라도 일본으로부터 투자를 받고, 재일동포들의 재산을 들여와서 경제발전을 앞당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것밖에는 길이 없었다. 결국 그렇게 들여온 청구권 자금이나 차관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포항종합제철 등을 만들었다.
일본 야당 중에는 가스가 잇코 의원이 이끄는 민주사회당(민사당)이 있었다. 친북(親北)노선으로 일관한 사회당과는 달리 반공(反共)노선을 분명히 하는 정당이었다. 민사당도 31명의 의원 가운데 한 명만 빼고 모두 간친회에 들어오기로 했다. 이때 가스가 잇코 의원은 “‘간친회’라는 이름이 뭔가 부정한, 일종의 유착(癒着)과 같은 인상을 준다. 안 그래도 청구권 자금을 둘러싸고 온갖 이야기가 돌았는데, 그런 오해를 없애기 위해 이름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간친회는 1975년 한일의원연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공명당도 한일의원연맹에 들어오면서 사회당은 외톨이가 되었다. 일본의 민노총이라고 할 수 있는 총평(總評·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 일본의 전교조(全敎組) 격인 일교조(日敎組·일본교직원조합) 등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사회당은 이후로도 “대한민국은 정통성 없는 괴뢰정부이며, 북한이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일본사회당과 교류의 물꼬를 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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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5월 9일 아키히토 일본 천황을 예방한 김수한 국회의장. |
YS 시절 사회당 출신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가 일본 총리가 됐다. 나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고집 세게 지키는 무라야마 총리를 좋아했다. 나는 양국 사이에서 가교(架橋)역할을 했다. YS도 한일관계와 관련해서는 내 의견을 경청했다. YS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당선자 신분으로 일본 언론과 첫 인터뷰를 할 때 통역을 한 것도 나였다. YS가 한국어로 짧게 이야기하면, 나는 거기에 살을 붙여 전달했다. 일본 기자는 “YS가 하는 말은 짧은데, 당신이 하는 말은 왜 그렇게 기냐?”고 묻기도 했다.
한일친선협회
국회의원들이 아무리 영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한일 양국 간의 진정한 우호협력을 위해서는 풀뿌리 차원에서의 교류, 협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한일친선협회였다. 1976년 일본에서 일한(日韓)친선협회가, 이어 한국에서도 한일친선협회가 출범했다.
사실 일본에서는 1961년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친선협회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나왔다. 처음으로 친선협회가 만들어진 곳은 나가사키였다. 일본 정계의 거물인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한일국교정상화 당시 일본 외무대신)의 비서 출신인 나카무라 고카이(中村弘海)씨가 주동이 됐다. 그는 “지금 한국이 어려운 상황에 있으면서, 자유진영의 불침번으로서의 희생적 노력을 다하고 있는데, 우리가 본체만체해서야 되겠느냐? 도와주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 아들인 나카무라 가쓰스케(中村克介) 씨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가사키 한일친선협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나가사키의 뒤를 이어 야마구치, 구마모토, 시마네, 오이타, 히로시마 등에 협회가 만들어졌다.
일본에는 47개 도·도·부·현(都·道·府·縣)에 일한친선협회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광역지방자치단체는 물론 기초자치단체 수준에도 한일친선협회가 설립되어 있다. 특히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운 부산·경남지역이 활동이 활발한 편이다.
한일의원연맹에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통(日本通)이 된 나는 1993년부터 한일친선협회중앙회 회장을 맡았다. 친선협회 회장으로 일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데라우치(寺內) 문고의 반환이었다.
데라우치 문고는 초대(初代)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총독 재직 중 조선에서 수집한 서화(書畵), 서적 등을 말한다. 그는 일본의 골동품 및 서예 전문가들을 총독부의 별정직 공무원으로 데려와 조선 곳곳을 누비면서 추사(秋史)나 퇴계(退溪) 선생의 글씨나 전적(典籍)들을 수집하도록 했다. 은퇴하면 자신의 수집품들로 개인박물관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가 수집한 유물들은 그의 고향인 야마구치(山口)에 있는 야마구치현립대학(구 야마구치여대)이 소장하게 되었다.
1990년대 초 박영석(朴永錫) 국사편찬위원장이 데라우치 문고의 존재를 알고, 직접 현지에 가서 이를 확인했다. 박 위원장은 우리 선조들이 남긴 그림과 글씨, 책들이 대학 창고에서 썩어 가고 있는 것을 보고 바닥에 엎드려 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는 공노명(孔魯明·외무부장관 역임) 주일대사를 찾아가서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다. 공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건 공노명이도, 대통령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경위야 어찌 되었건 그 문화재들은 이미 개인의 것이고, 일본에 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정부간 교섭에 의해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유일한 방법은 인간적인 차원의 호소, 민간 레벨인 친선협회 차원에서의 호소밖에는 없습니다. 이걸 해결할 사람은 김수한 회장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문제는 내게 넘어왔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일한친선협회 회장은 앞에서 언급했던 다나카 다쓰오 씨였다. 그의 아버지 다나카 기이치 전 일본 총리는 같은 조슈 군벌인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직계(直系)였다. 다나카가(家)와 데라우치가는 인척(姻戚) 간이기도 했다. 나의 파트너이자 가까운 사이였던 다나카 다쓰오 회장, 가와무라 다케오(河村建夫) 중의원(衆議員)이 열심히 나서 주었다.
야마구치대학에서는 당초 자신들에게 유물들을 기증했던 데라우치 마사다케 후손들이 도장을 찍어서 동의를 하면 유물을 넘겨주겠다고 했다. 나와 다나카 회장은 일본 가나자와에 사는 데라우치의 후손을 수없이 찾아갔다. 일본 언론이나 문화계에서는 이 사실이 알려지자 맹렬히 반대했다. “문화재 반환 길이 이렇게 열리게 되면, 둑이 무너지듯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오게 된다”는 논리였다.
데라우치의 후손들과 야마구치대학은 1995년 북한 지역에서 수집한 유물들을 제외한 98종 135점의 유물을 돌려주기로 했다. 김생, 흥선대원군, 김정희, 성삼문, 서경덕, 정철, 고경명, 곽재우, 신흠, 임제, 장유 등의 글씨, 이황의 책, 순조의 세자인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가 세자시강원에 입학하는 장면을 묘사한 〈정축입학도첩〉 등 보물급 이상의 가치를 가진 유물들이었다.
그런데 기증식을 앞두고 문제가 생겼다. 《동아일보》에서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 ‘데라우치가 약탈해 간 유물들이 돌아온다’는 취지의 보도를 한 것이다. 데라우치의 유족들은 자기들이 유물들을 도둑질해 갔다는 얘기냐면서 기증식을 거부했다. 자칫하면 그때까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판이었다. 나는 《동아일보》 출신인 최시중(崔時仲) 한국갤럽 회장에게 부탁해서 정정(訂正)보도를 내보내도록 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돌아온 유물들을 일본과 가까운 경상남도에 위치한 경남대에 기증했다.⊙
취재 후기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작년 11월 말의 어느날, 김창기 조선뉴스프레스 대표가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로 김수한 전 국회의장을 할 테니 준비하라”고 했다. 김창기 대표는 정치부 기자로 1980~90년대에 상도동과 청와대를 오래 출입했었다. 김 대표는 “김 의장은 원래 혁신계로 출발한 분인데, 나도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상도동을 출입하기는 했지만 그 이전 얘기는 궁금한 게 많다”면서 자신이 직접 인터뷰를 하겠다고 했다. 김수한 전 의장의 아들인 김성동(金盛東) 전 국회의원도 동석해서 김 전 의장이 기억을 되살리는 것을 도왔다. 그동안 기자는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를 통해 정계 원로들의 이야기를 많이 써 왔지만 대개는 주로 1980년대 이후에 정치인으로 활약했던 분들이었다. 김수한 전 의장은 그들과 나이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도 ‘정치적’으로는 한 세대(世代) 위에 해당하는, YS나 DJ와 같은 시대를 호흡하면서 그들로부터 존중을 받았던 분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직후라 아무래도 YS와 DJ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김수한 전 의장은 YS에 대해서는 인간적인 매력, 천진함에 대해 많이 얘기했다. DJ에 대해서는 그가 초기에는 호남 민주당 내에서도 소외받는 입장이었지만,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는 점을 강조했다. 윤보선, 유진오, 유진산, 이범석 등 1960년대 야당을 움직였던 분들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현실정치와 관련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원내대표(원내총무)들이 윗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재량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정치인들의 행태가 자꾸만 잘아지고 있는 데 대해 답답해했다. 김수한 전 의장은 한일의원연맹 부회장, 한일친선협회중앙회 회장으로 오랫동안 한일관계에 천착해 온 분. 그런 입장에서 그는 지난 수년간 한일관계가 경색되어 온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미래를 볼 것을 강조했다. 문득 그가 항일투사이자 혁신계 정치인이었던 서상일 선생 밑에서 정치를 시작했고,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의 대변인 경력을 바탕으로 정치인으로 입신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런 분이 한일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새삼 가슴에 와 닿았다. 그것은 험한 시대를 한 세기 가까이 살아온 원로(元老)의 지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