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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 金守漢 전 국회의장(上)

“YS, ‘나는 대통령이 되어야 하거든!’”

정리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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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때 학도병으로 학생중대장 지내… 전두환·노태우가 중대원
⊙ 보안사령관 시절 만난 전두환에게 “군인의 정치 참여 안 된다”고 하자,
    “국민들에게 욕먹지 않는 방향으로 깨끗하게 하도록 하겠다”
⊙ “신한당은 윤보선의 얼굴하고 김수한의 입 말고 무엇이 있느냐?”

金守漢
⊙ 88세. 영남대 법학과 졸업. 경남대 명예정치학 박사, 영남대 명예법학박사.
⊙ 공명선거전국추진위원회 대변인,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대변인, 신한당 대변인,
    신민당 원내부총무, 신민당 대변인(4회 연임), 신한민주당 부총재, 제7~10, 12, 15대 국회의원,
    제15대 국회의장, 한일의원연맹 부회장 역임. 現 새누리당 상임고문단회의 의장,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 한일친선협회중앙회 회장.
⊙ 상훈: 국민훈장 무궁화장, 日훈1등욱일대수장 등.
  8·15 해방을 맞은 것은 추풍령에 있는 경북중학교 동기의 자형(姊兄) 집에서였다. 추풍령에는 저수지가 있었다. 나는 친구와 함께 저수지를 바라보면서 청운(靑雲)의 꿈을 키웠다.
 
  경북중 3학년에 다니던 내가 추풍령에 가 있었던 것은 당시 대구를 떠들썩하게 했던 ‘글라이더 사건’ 때문이었다. 경북중에는 거물 친일파(親日派)인 문명기가 일본군에 헌납한 글라이더가 한 대 있었다. 일제는 학교 운동장 한쪽에 격납고까지 설치하고, 이 글라이더를 금덩어리처럼 애지중지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천으로 된 글라이더 날개에 그려져 있던 일장기를 칼로 도려내는 사건이 벌어졌다.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학교 앞 대봉파출소의 나가시마(長島) 형사가 나를 호출했다. 나를 용의자 중 하나로 지목한 것이었다. 아마 그로서는 나름대로 이것저것 조사해 본 후에 나를 불렀을 것이다. 아버지는 보성전문(지금의 고려대학교)을 나온 인텔리로 고향인 왜관에서는 나름 대접을 받는 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가시마 형사는 처음에는 “젊었을 때에 그런 만용을 부릴 수도 있는 거지”라면서 나를 살살 구슬렀다.
 
  유도신문(訊問)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넘어갈 내가 아니었다. 나가시마 형사는 나를 어르다가 위협을 하는가 하면, 하숙집에 가서 내 신발을 가져다가 글라이더 기체 위에 있는 족적(足跡)과 대조해 보기도 했다. 1주일 후에 나는 대구경찰서 고등계로 넘겨졌다. 사무실에 나중에 제8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대우(李大雨)씨가 경찰관으로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경찰은 고문(拷問)까지는 아니지만, 따귀를 때리면서 취조(取調)했다. 하지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범인이 아니었으니까….
 
  나를 용의자로 지목한 것은 평소 행동에서 나를 반항적이라고 볼 대목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교련(敎鍊)시간에 전교생이 행진을 해야 할 때에 일부러 움직이지 않아 대열을 흐트러뜨린 적도 있었다. 우리가 ‘남중좌(南中佐)’라고 불렀던 배속교관(配屬敎官)이 달려와 군도(軍刀)로 나를 때렸다. 내가 그런 반항적 태도를 취한 것은 기숙사 생활이 갑갑해서이기도 했고, 재학 중에 가세(家勢)가 기울어서 마음이 우울해진 탓도 있었다.
 
  아마도 일제(日帝)하 마지막 항일(抗日)운동 사건이었을 이 사건의 범인은 끝내 드러나지 않았다. 경찰서에서 풀려나 학교로 돌아오니 후지사와(藤澤) 교장이 나를 불렀다. 교장실에는 담임선생님(이가야 모모히코)도 있었다. 담임선생님이 말했다.
 
  “도저히 너를 학교에 둘 수가 없게 되었다. 학교성적도 그렇고, 품행도 그렇고…. 어떻든 간에 요시찰인(要視察人)처럼 되어 버렸으니,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가서 좀 쉬는 것이 어떻겠느냐?”
 
  말하자면 자퇴(自退)권고였다. 담임선생님은 해방 후 일본으로 돌아가 고등학교 역사 교사를 했다. 내가 국회의원 시절 그분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반항적인 나를 바로잡아 보려 애를 태웠던 일들을 회고했다.
 
  그렇게 학교를 그만둔 나는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해방 즈음에는 추풍령에 있던 친구 자형 집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추풍령 기상관측소 옆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자형 집에 들러 “당신들은 이제 해방이 됐다”고 말했다.
 
 
  대구폭동
 
  해방이 되자 아버지는 교육청에 근무하던 덕산초등학교 동기 오(吳)모씨와 내 복교(復校)문제를 의논했다. 미(美) 군정청에서도 일제 말기에 항일운동 관계로 제적(除籍)된 학생들을 무조건 복교시키라는 지시를 내려 놓고 있었다. 그런데 대화 중에 두 분 사이에 언쟁이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나를 경북중에 복교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대구중학교 기성회(期成會)를 조직했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다니던 대구제1중학교를 접수해서 한국인 중학교로 전환한 것이다. 나도 대구중으로 진학, 1회 졸업생이 되었다.
 
  대구중 시절, 나는 학생자치회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응원단장, 체육부장 등도 지냈다. 당시 대구중은 귀국한 해외동포나 피란민의 자제, 학도병으로 나갔다가 늦은 나이에 복교한 학생 등이 뒤섞여 교풍(校風)이 엉망이었다. 나는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 훈화가 끝난 후, 단상에 올라가 바람직한 교풍에 대해 일장훈시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지역사회의 학생리더 중 하나로 점차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폭동이 일어났다. 대구 시내 곳곳에서 총성이 울렸다. 대구경찰서 앞에서는 인민재판이 열렸다. 우익(右翼)인사나 경찰관들이 타살(打殺)됐다. 거리 곳곳에는 경찰관들의 시신(屍身)이 널려 있었다. 깨진 머리에서 쏟아져 나온 뇌수(腦髓)가 빗물에 흘러갔다. 대구경찰서 앞에는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라고 하는 일본 절이 있었다. 거기에는 정육점에 걸린 고깃덩어리처럼 경찰관 시신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군중들이 “쌀이 왔다! 쌀!”이라고 외치며 몰려갔다. 대구공회당 앞에서는 난민들에게 식량을 배급해 주듯이 쌀을 나누어 주었다. 아마 어디선가 약탈해 온 쌀이었으리라. 미군(美軍)들은 사진촬영만 할 뿐 폭동을 진압할 생각은 하지 않는 듯했다.
 
  병원도 좌우(左右)로 나뉘었다. 좌익 부상자들은 경북대 병원으로, 우익 부상자들은 미션스쿨인 계명중학교 계열의 동산병원으로 실려 갔다.
 
  전국노동조합평의회(전평)의 파업으로 철도가 멈춰 섰다. 대구·경북 일대는 지옥이 됐다. 경북 영천에서는 대낮에 불구덩이 속으로 사람을 던져 넣었는데, 잠시 후면 “뻥”, “뻥” 하면서 배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대구 10·1폭동은 단순한 폭동이 아니었다. ‘인민혁명’이었다. 이런 아수라장을 목도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이런 것이 혁명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나는 대구폭동을 경험하면서 공산주의만은 안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대구대학교(영남대학교의 전신)에 진학했다. 대구대에는 신현확(申鉉確·전 국무총리), 백남억(白南檍·전 공화당 의장), 이재철(李在澈·전 인하대 총장)씨 등이 교수로 있었다. 대개 고향 어르신들로 우리 집안과도 인연이 닿는 분들이었다.
 
 
  “육군소장 전두환, 인사드리겠습니다”
 
2014년 4월 영남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6·25 당시 학도병으로 지원하면서 애국의 결의를 담은 글귀를 적었던 태극기를 기증했다.
  6·25전쟁이 터졌다. 대구폭동 등을 통해 공산주의의 잔혹함을 체험했던 나는 육군 제3사단 사령부로 달려가 혈서(血書)를 쓰고 자원입대했다. 학도병 1기였다. 대구 동부국민학교에 대구 일대의 대학교 및 중고교 출신 학도병들로 편성한 학생대대가 만들어졌다. 3개 중대를 편성했는데, 나는 제2중대장이 되었다. 우리 중대에는 대구공업고등학교 출신 학생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도 있었다.
 
  당시는 물론, 그 후에도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를 알게 된 것은 12·12사태 후 ‘서울의 봄’ 때였다. 한번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경복궁 옆에 있는 보안사령부로 갔다. 사령관실에서 기다리는데, 전두환 사령관이 들어섰다. 그는 깍듯이 거수경례를 올려붙이면서 말했다.
 
  “육군소장(少將),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 인사드리겠습니다!”
 
  이어서 그는 “의원님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의원님을 오래 전부터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라면서 6·25 때 내 중대원이었다는 얘기를 했다.
 
  “저는 이후 포병학교를 만들 때 차출되어 갔다가 육사(陸士)에 들어가 11기로 임관, 장교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의원님께서 활동하시는 걸 먼 데서 보면서 ‘참 놀라운 분, 애국심이 강한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며 늘 존경해 왔습니다.”
 
  솔직히 보안사령부에 갈 때만 해도 조금 긴장했었는데, 그 얘기를 듣고 나니 마음이 푹 놓였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나는 국회 개헌특위(改憲特委) 위원이었다. 정국(政局)에 대해 한마디 할 법도 한데, 그는 그에 관해서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이야기 끝에 나는 “군인이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전 사령관은 이렇게 말했다.
 
  “저희가 무슨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국민들에게 욕먹지 않는 방향으로 깨끗하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쩌면 전두환 사령관은 그 자리에서 은연중에 나를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인지 떠본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그런 내색을 일절 하지 않았다.
 
  이후 내가 정치규제에 묶여 있던 시절, 대통령이 된 그는 명절 같은 때에 우병규(禹炳奎) 정무수석비서관을 통해 술이나 양복지 등을 보내 주기도 했다.
 
  얼마 전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서울대 병원 빈소에서 우연히 그를 다시 만났다. 격동의 역사 속에서 생각지도 않은 고비마다 그와 만나곤 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는 건강해 보였다. 정치 얘기 등은 하지 않고 건강에 관한 이야기만 나누었다.
 
 
  東菴 徐相日 선생과 혁신계
 
동암 서상일 선생(왼쪽 안경 쓴 사람)은 5·16 후 혁신계 활동을 이유로 옥고를 치렀다.
  언젠가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큰일을 해 보고 싶다, 정치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내가 하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해방을 앞두고 추풍령 저수지를 바라보며 청운의 꿈을 키우던 시절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젊은 시절 내가 존경한 분은 동암 서상일(東菴 徐相日) 선생이었다.
 
  일제하에서 대동청년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벌였던 선생은 해방 후에는 제헌(制憲)의원, 제5대 민의원(民議員)을 지냈다.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면서 이승만(李承晩) 정권과 맞서 싸웠던 그는 1952년 독립운동가 출신 김시현(金始顯)씨 등이 시도한 이승만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나는 대구지역을 대표하는 거물 정치인이었던 그가 마냥 좋았다. 해방 후 젊은 시절에도 이승만 박사나 김구(金九) 선생은 잘 몰랐다. 내가 아는 건 ‘동암 서상일 선생’뿐이었다.
 
  서상일 선생은 ‘혁신계(革新系)’였다. 1955년 민주당 창당을 앞두고 야권은 ‘민주대동파(民主大同派)’와 ‘자유민주파’로 나뉘었다. 장택상(張澤相), 서상일, 김성수(金性洙) 등 민주대동파는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생각에서 혁신계인 조봉암(曺奉岩)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도연(金度演), 윤보선(尹潽善), 조병옥(趙炳玉), 장면(張勉) 등 ‘자유민주파’는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조봉암 선생은 진보당을, 서상일 선생은 민주혁신당을 창당했다. 민주혁신당에는 독립운동가 장건상(張建相) 선생, 젊은 사람으로는 후일 민주사회당 당수와 제11대 국회의원을 지낸 고정훈(高貞勳)씨 등이 있었다. 내가 정치활동을 시작한 정당도 바로 이 민주혁신당이었다. 나는 민주혁신당에서 섭외부장, 청년부장 등을 지냈다.
 
  조봉암 선생이 진보당을 창당하지 않고 서상일 선생과 함께 혁신정당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일제시대에 공산당 전력이 있는 조봉암 선생은 혁신계 활동을 하더라도 ‘우파(右派)’의 기치를 분명히 했어야 했다. 그가 해방 후 한국민주당에서 활동하기도 했던 서상일 선생과 함께하면서 좀 더 우파적 모습을 보였더라면, ‘진보당 사건’으로 혁신계가 궤멸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4·19 후에 실시한 7·29총선에서 이동화(李東華·대구戊), 최석채(崔錫采·전 《조선일보》 주필), 서상일(대구乙), 양호민(梁好民·대구丁) 등 쟁쟁한 인사들이 대구에서 출마했지만, 서 선생만 당선되고 나머지는 낙선했다. 나도 대구병(丙)구에서 출마했다가 떨어졌다.
 
 
 
공명선거전국추진위원회 대변인

 
  김영삼·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과 처음 만나게 된 것도 그 시절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는 그가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후 선거소송을 한다고 법원에 드나들 때 처음 만난 것으로 기억한다.
 
  1960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민주혁신당, 노농당(당수 전진한) 등 야권에서는 민권수호 국민총연맹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석기 민주당 원내총무가 총무부장, 내가 조직부장, 그리고 김대중씨가 선전부장을 맡았다. 민권수호 국민총연맹 회합이 있을 때면, 우리들의 이름도 신문에 거명되곤 했다.
 
  1960년 4월 18일, 서울 시내에서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돌아가던 고려대 학생들이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당했다. 《동아일보》에서는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야권인사의 평(評)을 실으려 했다. 하지만 급박한 상황 속에서 조재천(曺在千) 민주당 대변인마저 연락이 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장이욱(張利郁) 박사, 태윤기(太倫基) 변호사 등이 만든 공명선거전국추진위원회 대변인이었다. 《동아일보》에서 내게 소감을 물어 오자 나는 “학생들의 행동은 뜨거운 애국심의 발로”라고 답했다. 이 발언을 《동아일보》는 크게 실었다. 《동아일보》의 담당 기자가 이만섭(李萬燮) 전 국회의장이었다.
 
  고려대 학생회장으로 공명선거전국추진위원회 학생특별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이기택(李基澤) 전 민주당 총재는 경찰을 피해 서울 청파동에 있는 우리 집으로 피신을 하기도 했다. 해군 군복을 입고 우리 집을 찾아온 이기택씨는 내가 집에 없다는 아내의 얘기에 “큰일났다”며 난감해했다고 한다. 아내는 급히 밥을 해 주고 하룻밤 재웠는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벌써 뒷담을 넘어 다른 곳으로 도피했더라고 했다.
 
  나의 이런 활동을 좋게 봐 준 분이 있었다. 장면 정권의 재무부 장관이던 김영선(金永善)씨였다. 그는 30대 초의 젊은이였던 내게 해운공사 감사 자리를 내주었다. 이렇다 할 기업이 없던 시절, 해운공사는 대한중석공사 등과 더불어 국내 굴지의 회사였다. 해운공사 감사 자리는 좋은 자리였다. 때문에 시기도 좀 받았다.
 
 
  허정과 윤보선
 
대일 굴욕외교반대 집회에서 연설하는 김수한 대변인. 뒤에 박순천 여사, 장택상씨(오른쪽)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 시절도 5·16 쿠데타가 나면서 끝났다. 5·16이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박순천 여사, 홍익표 전 내무부 장관, 조흥만 전 치안본부장, 송원영 전 의원 등과 함께 국제구락부에서 “5·16은 무효”라면서 헌정(憲政)으로 복귀할 것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이런 일로 수배를 받았을 때, 내가 신세를 진 분이 김기철(전 농림부 차관)씨였다. 공군대령으로 공군 정훈감을 지낸 그는 성김 전 주한미국대사의 큰아버지였다. 한번은 나, 김기철씨, 김기완(성김 대사의 아버지) 등이 안국동 윤보선씨 집 앞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종로경찰서 경찰관들이 들이닥쳤다. 그 집에서 불온한 모임이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김기철씨가 기지를 발휘했다.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 원충연 대령 명의로 된 동생의 신분증명서를 제시하면서 “어디서 감히!”라고 호통을 쳤다. 육군대위가 종로경찰서장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걸 본 경찰관은 “잘못된 신고가 들어온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한 후 나갔다. 나는 그길로 혜화동에 있는 김기완씨의 집으로 가서 2주 가까이 신세를 졌다.
 
  1963년 군사정부는 민정(民政) 이양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야권 인사들은 정치재개를 서둘렀다. 홍익표 전 내무부 장관 등이 옛 민주당의 법통을 이어 받겠다면서 민주당을 창당했다. 나는 이 민주당에서 정책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나중에 민주당의 정식 총재는 박순천 여사가 맡았다. 민정 이양 과정에서 야당 세력이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거듭했다.
 
  이 와중에서 나는 허정(許政) 선생이 이끄는 국민의 당에 몸담았다가 1963년 11·26 제6대 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국민의 당 시절 김대중(DJ), 송원영 전 의원 등은 허정 선생의 신교동 집을 드나들면서 성명서 작성 등 일을 많이 했다. 마포 셋방에 살던 그 시절이 DJ에게는 참 비참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무한한 노력가였다. 나도 열심히 일했지만, DJ에게는 나도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흑석동에 살던 내가 아침 일찍 신교동 허정 선생 댁으로 간다고 갔지만, 늘 DJ가 먼저 와 있었다. 그런 점은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보선 전 대통령에게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명망이 있었고, 허정 선생 주위에는 행정경험이 풍부한 인재들이 있었다. 윤 전 대통령은 허정 선생을 경쟁자로 생각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불운한 지도자였다. 특히 5·16이 일어났을 때 “올 것이 왔다”면서 쿠데타 진압을 포기한 것은 잘못이었다.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 등을 통해 쿠데타 군을 진압할 생각을 했어야 했다. 국군끼리 충돌하는 내전적(內戰的) 상황을 우려해서였다고 이해한다고 해도, 그의 판단 때문에 우리나라는 오랜 기간 동안 군사통치 아래 들어가게 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후 그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권위를 배경으로 박정희 정권 시절 내내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군사정부조차 그에게 함부로 하지는 못했다.
 
  정치생활 초기에 실패를 거듭하던 나도 그분과 행보를 같이하면서 정치적으로 성장했다. 나는 1964년 박정희 정권이 추진하던 한일국교정상화에 반대하는 대일(對日) 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부터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기 시작했다.
 
 
 
신한당 대변인

 
1960년대 말 어떤 행사장에서 윤보선 전 대통령(가운데)과 함께한 김수한 대변인. 윤 전 대통령 옆에 JP가 앉아 있다.
  1965년 윤보선 선생의 민정당과 박순천 여사의 민주당은 민중당으로 통합했다. 대표최고위원으로는 박순천 여사가 선출되었다. 민중당은 창당할 때, 한일협정이 국회에서 비준될 경우 의원 전원이 사퇴하기로 결의했다. 그해 8월 14일 한일협정 비준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에 반발한 윤보선, 김도연, 정해영, 정일형, 윤제술, 서민호, 김재광, 정성태 등 8명의 의원은 즉각 민중당을 탈당했다. 당시 헌법에 의하면, 국회의원이 탈당을 하면 의원직을 자동 상실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의원들은 의원직 사퇴서를 국회에 제출했다가 슬그머니 국회로 복귀하고 말았다. 윤보선 등 탈당파 의원들은 1966년 2월 신한당을 창당했다. 나는 신한당 대변인으로 있으면서 그분들을 사육신(死六臣), 생육신(生六臣)에 비유하고, 의원직을 유지한 민주당 의원들을 ‘사쿠라’라고 비난했다.
 
  ‘사쿠라’는 겉으로는 야당 활동을 하면서 속으로는 여당과 내통하는 야당 정치인들을 비꼬는 얘기였다. 원래 일본에서 이토 히로부미 등이 선거유세를 갔을 때에, 군중 속에 섞여 있다가 “옳소!” 하는 식으로 호응해 주는 사람들을 ‘사쿠라’라고 했다고 한다. 그게 해방 후 우리나라 정치권에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사쿠라’라는 말이 널리 퍼진 것은 제3공화국 이후부터였다.
 
  나는 대일 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와 신한당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 점차 윤보선 전 대통령의 측근으로 자리를 굳혀 갔다. 유세가 끝나고 윤 전 대통령이 군화를 찾으면, ‘아, 오늘도 시위가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민중당과 신한당은 제7대 대선을 앞두고 1967년 2월 다시 합당했다. 당명은 신민당. 합당은 했지만, 누굴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느냐 하는 문제가 남았다. 당시 민중당 당수는 유진오(兪鎭午) 전 고려대 총장이었다. 민중당은 제1야당이었지만, 윤보선 전 대통령의 신한당은 현역 국회의원을 한 사람도 갖지 못한 원외(院外)정당이었다. 소속 의원수를 생각하면 유진오씨가, 명망을 생각하면 윤보선 전 대통령이 후보가 되어야 했다.
 
 
  4자 회담
 
  1967년 대선을 앞두고 필동 유진오 박사 집에서 ‘4자 회담’이 열렸다. 유진오, 윤보선 두 분과 재야 원로인 백낙준 전 참의원 의장, 이범석 전 국무총리가 참석했다. ‘4자 회담’은 그 이전에 수면 아래서 3~4차례 진행되다가, 안국동 윤보선 전 대통령 댁과 필동 유진오 당수 댁에서 열렸다. 마지막 날 발표는 내가 하기로 되어 있었다. 회담이 끝난 후 이범석 전 총리가 방에서 나와 내게 만년필을 주면서 “받아 적으라”고 했다. “오늘 4자 회담에서는 오랜 토론 끝에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하나, 대통령 후보는 윤보선으로 한다!
 
  둘, 당 대표는 유진오로 한다! ….”
 
  “합의내용 1, 2, 3” 하면서 이범석 전 총리가 불러 주는 내용들을 받아 적는데 손이 벌벌 떨렸다. 밖에는 기자들이 아마 100명 이상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나가서 발표를 하자 난리가 났다.
 
  그날 회담에서 윤보선 후보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짐작하건대 윤 후보를 강력하게 민 사람은 이범석 전 총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백낙준 전 의장은 묵묵히 들으면서 동의했을 것이고…. 아마 독립운동가 출신인 이 전 총리로서는 친일시비가 따라다녔던 유진오 당수보다는 독립운동을 했던 윤보선 전 대통령에게 호감이 더 갔을 수도 있다. 돌이켜 보면 당내 기반에서 뒤지기는 했지만, 윤보선 전 대통령에게는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을 하면서 전국적으로 쌓아 올린 명성이 있었다. 나도 그 투쟁을 함께 하면서 한일기본조약의 내용부터 시작해서 공부를 참 많이 했다. 그러면서 전국적인 인지도도 높일 수 있었다.
 
  당시 기자들 사이에서는 “신한당은 윤보선의 얼굴하고 김수한의 입 말고 무엇이 있느냐?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있었다. 김중위 전 의원도 “윤보선은 자신의 카리스마와 김수한 대변인의 언변으로 후보가 되었다. 굴러들어온 돌이 후보를 차지한 것이다. 정당 사상 이런 일은 유례가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반면에 유진오 당수는 학자 출신이라는 한계가 있었고, 건강도 안 좋았다. 회담을 마치고 안국동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보선 전 대통령은 내 손을 잡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대변인, 수고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좀처럼 그런 얘기를 하지 않는 분이었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속에는 온갖 의미가 다 녹아 있었을 것이다. ‘이 김수한이와는 내가 끝까지 같이 가겠다’는 생각, 그리고 내 전국구 문제까지도 결심을 했을 것이다.
 
 
  ‘돈 안 낸 신민당 전국구 1번’
 
  나는 1967년 6월 8일 실시한 제7대 총선에서 신민당 전국구 16번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15번은 후일 신한민주당 총재를 지낸 이민우(李敏雨)씨였다. 그해 총선에서 신민당 전국구 의원 중 정치헌금을 하지 않고 당선된 사람으로는 내가 ‘1번’이었던 셈이다. 그만큼 윤보선 전 대통령이 나의 투쟁을 인정해 주었다는 얘기였다.
 
  나는 김대중 의원이 출마한 목포에 내려가서 그의 선거를 도와주기도 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김 의원을 낙선시키기 위해 별의별 일을 다 했다. 김병삼(金炳三) 공화당 후보를 지원하려고 박정희 대통령이 목포에 내려가 국무회의를 주재하기까지 했다. 신민당에서도 김대중 의원 지원에 나서려 했다. 하지만 김대중 의원은 “나와 김수한, 두 사람이면 된다”고 자신했다. 나는 유세장에서 박정희 정권의 실정(失政)과 관권선거 획책을 소리 높여 규탄했다. 청중들은 열광했다. 흥분한 청중들은 김병삼 공화당 후보의 사무실로 쳐들어가 집기를 부수었다. 상황이 거의 ‘폭동’ 수준으로 번지자, 당에서는 내게 빨리 서울로 올라가라고 했다. 내가 ‘폭동’을 사주(使嗾)한 것으로 몰릴 것을 우려해서였다.
 
  그때가 내가 ‘김수한 대변인’으로 한창 이름을 떨칠 때였다. 그 시절 내 연설을 듣고 정치에 대한 꿈을 갖게 되었다는 사람도 있다. ‘국회의장 김수한’은 기억하지 못해도 ‘신민당 대변인 김수한’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직도 많다.
 
  하지만 후보 단일화의 보람도 없이, 총선보다 한 달여 전에 있었던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는 박정희 후보에게 패했다. 4년 전 대선에서 15만 표에 불과했던 표차는 100만 표로 벌어졌다. 국민들의 눈에는 젊은 군인 출신으로 경제건설을 이끄는 박정희 후보가 신선해 보였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윤보선 등 노쇠한 지도부가 이끄는 야당이 기득권 세력이었다. 국민적 지지를 받기에 당시 야당 신민당은 부족했다. 국민들은 신민당에게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런 부분은 지금 정치를 하는 사람들도 유념해야 할 부분이다. 다음 지도자를 정하는 데 있어서 너무 자기중심으로 생각하지 말고 국민이 바라는 정치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생각해서 확실하게 정하고 강력하게 밀어붙여야 한다.
 
 
  유진산 총재
 
유진산 총재(오른쪽)는 당권을 잡은 후 대변인을 계속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국민의 여망에도 불구하고 1970년 전당대회에서 신민당이 총재로 선택한 인물은 유진산(柳珍山)이었다. 유진산 총재는 총재를 맡은 후, 내게 대변인을 계속해서 맡아 달라고 했다. 나는 정중히 사양했다.
 
  “선생님, 솔직히 말해 제가 아무리 철면피라고 해도 어떻게 ‘진산 대변인’을 하겠습니까?”
 
  그 소리에 유 총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 봐. 지금 뭐라고 했나?”
 
  “선생님, 제가 신한당 대변인 시절을 비롯해 그동안 선생님께 ‘사쿠라’라며 입에 담지 못할 말로 매도한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하루아침에 선생님의 대변인으로 변신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유진산 총재는 조니워커 한 병을 땄다. 그는 술을 한 방울도 안 남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봐, 김 의원. 김 의원이 해위(海葦·윤보선)에게 한 것의 10분의 1만 내게 해 줘. 나를 위해 해 달라는 게 아니라, 당을 위해 해 달라는 거야. 그러면 우리가 승리할 수 있어!”
 
  이처럼 그에게는 개인의 체면을 넘어서 당과 국가를 생각하는 면모가 있었다. 선이 굵었다. 1961년 5·16쿠데타가 났을 때, 그는 일본에 체류하고 있었다. 국내로 들어오면 체포될 상황이었지만, 그는 자기 발로 귀국해서 당당하게 감옥으로 갔다. 홍익표씨 등 옛 정치인들과 어울리면서도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젊은 사람 얘기도 들어 보자”고 할 만큼 열린 면도 있었다. 살림살이도 무척 검소했다. 화장실도 옛날 화장실 그대로였다. 정치자금을 만졌고 풍류를 즐겼지만, 자기에게 들어온 돈을 개인적으로 쓰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대여(對與)투쟁에서는 곧잘 유화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로서는 ‘어차피 안 되는 일을 가지고 고집을 피우기보다는 적당히 양보해 주고 다른 것을 얻어 내는 것도 방법이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1971년 총선을 앞두고 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 사위인 장덕진(張德鎭)씨가 서울 영등포에서 출마했다. 그곳은 진산의 지역구였다. 그러자 진산은 지역구 출마를 포기하고, 신민당 전국구 1번이 됐다. 이른바 ‘진산파동(珍山波動)’이었다. 그때도 진산은 ‘여야가 있는 건데, 여당에서도 될 사람은 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상대방인 공화당 김진만(金振晩) 의원에게 생색도 낼 수 있다는 생각이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일절 변명하는 법이 없었다.
 
  야당 의원들은 나름 서로 통하는 여당 의원들이 있었다. 유진산 총재는 김진만 의원과 잘 통했고, 윤보선 전 대통령은 고흥문 의원 등을 통해 공화당의 양순직 의원 등과 소통하는 것 같았다.
 
  의회정치라는 측면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국민들은 선명한 투쟁을 원했다. 그래서 유진산 총재는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대중적 인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에게는 그 점이 부족했다. 당내에서도 윤보선 전 대통령 같은 절대적인 권위는 부족했다.
 
  유진산 총재도 자신의 한계를 모르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대권(大權)도전보다도 당권(黨權)을 장악하는 수준에서 자족(自足)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YS, 내게 애완견 선물한 적도
 
  당시 국회의원들이 가장 원하는 상임위원회는 재정경제위원회(재경위)였다. 상임위를 배정하는 데는 김영삼 원내총무의 힘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나는 원래 재경위원으로 내정됐다. YS가 신경을 써 준 것이었다. 그런데 문공위로 배정을 받은 한통숙 의원(장면 정권 시절 체신부 장관)이 “적성에 안 맞는다”면서 상임위를 바꾸어 달라고 했다. 그 바람에 몇몇 의원들이 상임위를 이동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들 희망 상임위로 재경위를 고집하자, 유진산 총재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두들 김수한 의원을 좀 본받으시오. 김 의원은 재경위로 배정되었는데도 ‘전투하는 데로 보내 달라’면서 내무위로 갔어요!”
 
  YS는 미국 등을 다녀온 후 《우리에게 기댈 언덕은 없다》라는 책을 냈다. 나는 경북중 선배가 일하는 동아출판사에서 이 책을 낼 수 있도록 주선했다. YS는 자기가 좋아하던 도베르만 종(種)의 개를 내게 준 적도 있다. 이래저래 나를 자기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나중에 내가 YS에게 “왜 그렇게 나를 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의 답은 간단했다.
 
  “나는 대통령이 되어야 하거든!”
 
 
  40대 기수론
 
1960년대 후반 김영삼 원내총무(가운데), 김대중 의원(오른쪽)과 함께. 두 사람은 이후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대선에 도전했다.
  결국 YS는 1971년 대선을 앞두고 ‘40대 기수론(旗手論)’을 제창하고 나섰다. ‘40대 기수론’은 YS가 1960년대 초 미국을 방문했을 때 40대 초이던 존 F. 케네디 상원의원이 대권에 도전하는 걸 보고 영향을 받아서 나온 것이었다. ‘40대 기수론’은 60~70대 장로(長老)들이 지배하고 있던 야당에 큰 충격을 주었다. 유진산 총재는 “구상유취(口尙乳臭)!”라며 이를 일축하려 했지만, 이미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이어서 김대중, 이철승(李哲承) 의원도 대권 도전 의사를 표했다. 40대 젊은 의원 세 사람이 대통령 후보 자리를 향해 경쟁하면서 오랫동안 침체해 있던 야당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그래도 유진산 총재에게는 아직 힘이 있었다. YS와 이철승 의원은 유 총재가 자신을 후보로 지명해 주기를 내심 바랐다. 유진산 총재는 내게 개탄한 한 적이 있다.
 
  “소석(素石·이철승)은 참 우둔해. 내가 파월(派越)장병 위문을 가는 데까지 따라와서 자기를 지명해 주기를 바라는데, 왜 그렇게 눈치가 없는지 모르겠어. 내가 사람들 눈도 있는데 어떻게 고향(전북)이 같은 소석을 지명할 수 있겠나? 사람이 분수를 알아야지….”
 
  이철승 의원은 1950년대 이후 줄곧 야당 소장파(少壯派)의 리더였다. 그가 지프차를 타고 가면 “저기 소석이 간다”면서 모두 쳐다볼 정도였다. 안국동 윤보선 전 대통령 댁에서 일을 할 때에도 “소석이 왔다”고 하면 상당한 중진 지도자가 온 것으로 인식했다. 하지만 이해관계에 밝고, 이후 정치적 고비에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지 못한 것이 흠결이 되어 YS와 DJ에게 밀리게 되었다.
 
  신민당 내에서 줄곧 ‘진산계’였고, ‘진산의 황태자’로까지 일컬어졌던 YS는 자신이 후보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YS는 전당대회 전날, 대선 후보 수락 연설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방심과 오만이 결국 패배로 이어졌다. 반면에 DJ는 유진산 총재가 절대로 자기를 밀어 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일찍부터 밑바닥 대의원들을 공략하고 다녔다. 전당대회 전날에도 DJ는 대의원들이 묵고 있는 여관방을 누볐다. 결국 DJ는 대선 후보 경선 2차 투표에서 이철승 후보의 표를 흡수하면서 대선 후보가 됐다. DJ는 이철승 의원에게 ‘대권은 DJ, 차기 당권은 이철승’이라는 이면(裏面)각서를 써 주었다고 알려졌다. 물론 이 각서의 내용은 이행되지 않았다.
 
  DJ가 대선 후보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박정희 정권의 정치공작도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부산 출신인 YS보다는 호남 출신인 DJ가 후보가 되는 것이 대선에서 수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것은 오랫동안 정치를 해 오고, 당시 현장을 지켜본 나의 느낌이다.
 
 
  유신 선포
 
1960년대 후반 만화가 안의섭 화백이 그린 만평. 신민당 김수한 대변인이 신동준 공화당 대변인(왼쪽)을 KO시킨 모습이다.
  1971년 5월 25일 제8대 국회의원 총선이 실시됐다. 나는 서울 영등포을(乙) 선거구에서 출마해 당선됐다. 지역구에서 당선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제8대 국회의원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듬해 10월 17일 ‘유신’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수원에 있는 경기도청에서 국회 내무위원회 국정감사를 하고 있었다. 당시 최종 총괄질의를 내가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손수익(孫守益) 경기도 지사가 국정감사를 받는 와중에 들락날락했다. 평소 하던 걸로 봐서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중앙정보부 출신 내무위 위원들도 뭔가 낌새가 이상했다.
 
  나는 바로 유진산 총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지금 공기가 이상합니다. 거기는 별 조짐이 없습니까?”
 
  유 총재가 대답했다.
 
  “안 그래도 나쁜 정보가 있소. 뭔가 큰 변혁이 오늘 있을 것 같아. 김 의원, 거기 일을 빨리 끝내고 올라오시오.”
 
  “제가 마지막 질의를 해야 하는데요. 그렇게 상황이 급박합니까?”
 
  “그렇소. 지금 견지동 사무실(진산계 사무실)에 다 모여 있으니, 대변인도 어서 오시오.”
 
  “알았다”고 한 후 회의장으로 돌아와 보니, 공화당 의원들이 보따리를 싸고 슬글슬금 빠져나가고 있었다. 공화당 소속인 김용호 내무위원장에게 호통을 쳤다.
 
  “이게 도대체 뭐하는 거야? 백주(白晝)에 쿠데타 하는 거요?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소?”
 
  그때는 아직 정식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가 진주하기 전이었다. 손수익 지사도 내게 “공기가 이상하다”고 말했다. 내가 물었다.
 
  “계엄령이요?”
 
  “그에 준하는 사태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알고 계십시오.”
 
  인민군이 쳐내려온 것도 아니고, 무장공비가 나타난 것도 아닌데, 계엄령이라니…. 나는 소리를 질렀다.
 
  “당신들,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 거요? 그럼 다 끝이다! 그래, 한번 해보자! 감옥밖에 더 가겠나?”
 
 
  ‘참여 속의 개혁’
 
박정희 정권이 유신을 선포하기에 앞서 1971년 12월 국가비상사태선언을 하자, 신민당 의원들은 거세게 항의했다. 김수한(오른쪽 끝), 김영삼(오른쪽에서 두 번째), 김대중(오른쪽에서 6번째).
  유신시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김상현, 최형우, 조윤형 의원 등은 계엄령 선포와 함께 보안사령부로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리고 유신헌법이 통과됐다. 중앙정보부는 선거 전에 일부 야당 의원들에게까지도 유신체제에 대한 지지를 요구하고, 그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치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나도 그런 압박을 피부로 느끼기는 했지만, 노골적인 위협을 받은 적은 없다. 나는 항상 ‘내가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니지 않나? 나는 떳떳하다. 잘못돼도 감옥밖에 더 가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1973년 2월 9일 제9대 국회의원 총선이 실시됐다. 사실상 대통령이 국회의원을 임명하는 유정회 제도와 함께 한 선거구에서 두 명씩 뽑은 중선거구제가 도입되었다. 유신체제하의 국회에 참여하느냐 하는 것은 정치인에게 갈등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국회라는 정치의 장(場)을 포기하기는 어려웠다. 유진산 총재가 들고 나온 ‘참여 속의 개혁’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었다. 유진산 총재의 주장은 이랬다.
 
  “세상이 더럽다고 수양산에 가서 고사리 캐 먹다가 죽을 수는 없는 일 아니냐? 그 수양산은 누구의 땅에 있는 것이냐? 결국 한국 땅에 있는 것 아닌가? 고사리 캐 먹다가 지사(志士)답게 죽어야 하느냐? 아니면 그 체제 속에 파고들어서 그 안에서 개혁을 하면서 진로를 찾아야 하느냐?”
 
  백이・숙제(伯夷・叔齊)의 고사를 끌어와 한 말이었다. 하지만 유 총재도 유신 체제 아래서 진정한 정치는 사라졌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참여 속의 개혁’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1973년 8월에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났다. 유신 선포 당시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던 DJ는 귀국을 포기하고 해외로 떠돌았다. 재일거류민단 내에는 ‘베트콩파(派)’라고 하는 좌파세력이 있었다. 조총련과 선을 댄 이들은 민단 내에서 좌파세력을 확장하면서 민단을 내분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역대 민단 단장들은 이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이 좌파세력들이 1973년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라는 걸 만들고, 대표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DJ를 추대했다. 정치적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던 DJ를 이용하려는 속셈이었다. 이 때문에 DJ는 그해 8월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되어 강제 귀국했다.
 
 
  긴급조치 1호
 
  1974년 1월에는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반대활동을 금지하는 대통령긴급조치 1호가 나왔다. 신민당은 긴급 정무회의를 열었다. 내가 제일 먼저 발언을 했다.
 
  “야당도 사생결단을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무슨 의논이 있겠습니까? 오직 행동만이 있을 뿐입니다.”
 
  나의 제안에 따라 기획위원회와 실행위원회를 만들기로 했다. 기획위원장은 당의 원로였던 김의택(金義澤) 전 의원, 실행위원장은 내가 맡았다.
 
  그날 밤 중앙정보부 이용택 수사국장이 보낸 수사관들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같이 좀 가셔야겠습니다.”
 
  “오냐, 가자. 내 차로 가는 게 좋겠나? 당신들 차로 가는 게 좋겠나?”
 
  “의원님 차로 가시죠.”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일단 안도가 되었다. ‘내 차로 가자는 걸 보니, 집에 돌아올 수 있겠구나’ 싶었다. 남산 중앙정보부로 갔더니, 이미 YS와 김의택 전 의원도 연행되어 와 있다고 했다. 이용택 국장이 내게 말했다.
 
  “그런 결의를 다 하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아니, 그럼 긴급조치가 나왔는데, 야당이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
 
  “무얼 할 생각이셨습니까?”
 
  “앞으로 정권이 하는 걸 봐 가면서 대응할 생각이었소. 그러기 위해 기구부터 만든 거고….”
 
  중앙정보부에서도 더 이상 험하게 나오지는 않았다. 나는 통행금지가 해제된 후, 이용택 국장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김영삼 총재 등장
 
  얼마 후 유진산 총재는 점심식사를 하다가 먹은 게 체한 것 같다며 병원 에 입원했다. 마침 서민호 전 의원의 사회장(社會葬)이 있던 날이었다. 행사에 참석 중인데, “세브란스병원으로 빨리 와 달라”는 연락이 왔다. 아들 유한렬(柳漢烈) 등이 와 있었다. 나는 전에 맹장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유진산 총재는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에 수술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한국일보사 앞에서 내과병원을 하던 서정삼 박사 등이 “별 거 아니니 걱정 마시라”고 안심을 시켰다. 유 총재는 수술을 받고 1주일쯤 입원해 있다가 퇴원했다. 얼마 후 유 총재는 몸이 안 좋다며 유성온천으로 내려갔다. 유 총재를 찾아갔던 고흥문 의원이 유 총재의 건강이 안 좋은 걸 보고 다시 서울 을지로 메디컬센터에 입원시켰다. 그곳에서 유 총재는 1974년 4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긴급조치 제1호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열렸던 신민당 정무회의가 유진산 총재가 주재한 마지막 회의였다.
 
  이어 열린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YS가 총재로 당선되었다. YS는 ‘선명야당’의 기치를 내걸고 유신정권에 맞섰다. 이듬해 5월 21일, 박정희 대통령과 김영삼 총재가 청와대에서 만났다. 이 자리에서 YS는 개헌 문제,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태 등에 대해 따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가 암살된 후 자신의 적적한 심정을 털어놓으면서 “내가 언제까지나 대통령을 할 것도 아니고…” 하는 식으로 YS의 감성에 호소했다고 한다.
 
 
  각목 전당대회 때 지붕 위로 도망간 YS
 
  영수회담이 끝난 후, 두 사람 사이에 뭔가 밀약(密約)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식의 얘기가 돌았다. 박정희 대통령도 정치를 하는 이상 YS를 만난 자리에서 뭔가 부드러운 얘기, 장래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얘기를 했을 수는 있다. 적어도 그런 자리에서 “당신, 죽고 싶어?” 하는 식의 얘기를 할 수는 없을 것 아닌가? 그리고 그런 얘기에 YS가 고무(鼓舞)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정치의 여백’과 같은 것이다. 영수회담 이후 박정희 정권에 대해 YS가 유연해진 것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다. 내가 아는 한, YS는 값싼 대가(代價)를 받고 자신의 뜻을 바꾸거나 권력에 편승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YS에게 반대하는 비주류(非主流)연합은 계속해서 의혹을 제기했다.
 
  1976년 5월 25일 신민당 전당대회는 흔히 ‘각목대회’라고 한다. 비주류 측은 각목을 휘둘러 주류 측 대의원들을 몰아내고 전당대회가 열린 시민회관을 점거했다. 이들은 집단지도체제로의 당헌 개정안을 통과시킨 후, 김원만(金元萬)을 대표로 선출했다. 관훈동 신민당사로 쫓겨간 주류는 단일지도체제 당헌을 고수하면서 YS를 총재로 다시 선출했다.
 
  신도환 의원이 동원한 각목부대는 관훈동 당사까지 쳐들어왔다. 나는 YS, 이충환 의원과 함께 총재실에 있었다. 각목부대가 쳐들어오자 김동영 총무국장은 셔터를 내렸다. 각목부대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3층에 있던 우리는 그들을 피해 달아났다. 회의실 옆에 있는 작은 문을 박차고 나갔더니, 어느 음식점 지붕이 나왔다. YS가 지붕 위를 달리는데 얼마나 빨리 달리던지…. 나도 정신없이 달렸다. 슬레이트 지붕이 무너져 내릴 뻔했다. 아래에는 국밥집의 펄펄 끓는 솥단지가 있었다.
 
  그런 난리를 치렀으니, 그 결과에 승복할 리가 없었다. 양측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누가 적법한 당수인지를 물었다. 선관위는 양자 모두 부적격하다고 유권해석을 내렸다.
 
  1976년 9월 15, 16일 다시 신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첫날에는 최고위원을 선출했다. 이충환, 유치송, 김재광(주류), 이철승, 신도환, 고흥문(비주류) 등이 최고위원으로 뽑혔다. 이튿날에는 대표 선거가 열렸다. YS, 이철승, 정일형, 세 사람이 나섰는데, 2차 투표에서 이철승 최고위원이 YS를 누르고 역전승을 거두었다.
 
  그 무렵 나는 이충환계(李忠煥系)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 야당 정치는 계보정치였다. 나도 선수(選數)가 높아지고, 여러 세력이 이합집산하는 와중에서 언제까지나 남의 밑에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충환 의원을 대표로 모시고, 내가 그 밑에서 실질적으로 간사장(幹事長) 역할을 하는 이충환계가 탄생한 것이다. 당시 YS와 잠시 소원해졌던 최형우 의원 등이 우리 계보에 속해 있었다.
 
 
  이철승도 나를 끌어당기려 노력
 
  이철승 대표는 ‘중도통합론’을 주장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취한 것인데,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자연히 ‘반(反)박정희’라는 기치를 분명히 한 YS나 DJ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나는 이철승 대표에게 “당신의 노선은 이상적인데, 실제 행동은 애매모호한 게 탈이다. 입장을 분명히 하라”고 여러 번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는 1980년대 중반 직선제 개헌 반대 투쟁 때에도 내각제에 관심을 보이면서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그래도 이철승 대표최고위원은 나를 끌어들이려 애썼다. 그는 국제위원장 직을 신설, ‘당6역(役)’이라며 나를 중요 당직자로 대접해 주었다.
 
  1979년 2월 제10대 국회의원 총선이 있었다. 나는 서울 관악구에서 21만2062표를 얻어 전국 최다 득표를 했다. 신민당은 의석에서는 공화당에 뒤졌지만, 득표율에서는 1.1% 앞섰다.
 
  이제 국민들은 유신정권에 당당하게 맞설 ‘선명야당’을 원하고 있었다. 1979년 5·30전당대회가 열렸다. 민심을 업은 당심(黨心)은 YS를 선택했다. 당 밖에 있던 DJ도 동교동계를 통해 YS를 지지했다. 내가 속해 있던 이충환계도 YS를 지지했다.
 
  YS는 두 번째로 총재가 된 후, 박정희 정권과 정면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YH사건이 발생했다. 이어 전당대회 대의원 가운데 부적격자가 있었다는 이유로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이 법원에 들어갔다. 법원은 YS의 총재직 수행을 정지시키고, 총재권한대행으로 정운갑(鄭雲甲) 전당대회의장을 지명했다. 박정희 정권의 정치공작이었다.
 
  당시 언론에는 정운갑 대행이 내게 원내총무를 제안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어 YS가 국회에서 제명되고, 부마사태가 발생했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접하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어코 올 것이 왔구나!”⊙
 
  〈취재지원=문지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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