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陸士 면접시험 때 朴正熙 대령이 면접관… 웅변했다고 하자 “해봐”
⊙ 삼성 상무 되어 李秉喆 회장에게 인사 가자, “얘는 우리 회사에 오래 있을 애가 아닌데…”
⊙ 全斗煥, 제12대 총선에서 낙선한 李台燮 의원 入閣시키려다 “국민과 싸우려는 거냐”며 반대하자
뜻 접어…
權翊鉉
⊙ 81세. 육군사관학교 11기 졸업.
⊙ 육군참모총장 보좌관, 연대장, 대령 예편, 연합철강 상임고문, 삼성정밀 상무·전무,
무임소장관 보좌관, 민주정의당 사무총장·同대표, 상임고문, 한일의원연맹 회장,
민주자유당 상임고문, 한나라당 부총재, 제11·12·14·15대 국회의원 역임.
⊙ 상훈: 을지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월남 1등명예훈장, 월남 은성무공훈장, 보국훈장 삼일장 등.
⊙ 삼성 상무 되어 李秉喆 회장에게 인사 가자, “얘는 우리 회사에 오래 있을 애가 아닌데…”
⊙ 全斗煥, 제12대 총선에서 낙선한 李台燮 의원 入閣시키려다 “국민과 싸우려는 거냐”며 반대하자
뜻 접어…
權翊鉉
⊙ 81세. 육군사관학교 11기 졸업.
⊙ 육군참모총장 보좌관, 연대장, 대령 예편, 연합철강 상임고문, 삼성정밀 상무·전무,
무임소장관 보좌관, 민주정의당 사무총장·同대표, 상임고문, 한일의원연맹 회장,
민주자유당 상임고문, 한나라당 부총재, 제11·12·14·15대 국회의원 역임.
⊙ 상훈: 을지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월남 1등명예훈장, 월남 은성무공훈장, 보국훈장 삼일장 등.
1951년 어느 날, 아버지가 신문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었다.
“이거 한번 가보면 어떻겠느냐?”
신문에는 4년제 정규 육사(陸士) 1기(육사 11기)생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나와 있었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 어차피 군대에 갈 거면 육사에 진학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령수학》 《요령영어》 같은 수험서를 구해서 일주일 동안 공부했다. 시험을 치는데, 내가 공부한 내용들이 그대로 나온 것 같았다. 아마 전쟁통이라 달리 책을 구할 수 없어서, 시험 출제관도 내가 공부한 것과 같은 책을 보고 문제를 낸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필기시험에 합격한 후 면접시험을 보러 갔다. 면접관 중에 키가 작고 얼굴이 새카만 대령이 하나 있었다. 육군정보학교장 박정희(朴正熙) 대령이었다. 그가 물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무얼 했나?”
“웅변을 했습니다.”
“상(賞)을 받은 적이 있나?”
“조재천(曺在千) 경북지사상을 받았습니다.”
“그래? 한번 해봐라.”
나는 2~3분 정도 웅변을 했다. 박 대령이 “됐어”라고 했다. 그분이 10년 후에 혁명을 일으켜 대통령이 되고 18년이나 이 나라를 이끌게 될 줄, 그리고 내 인생이 그분과 얽히게 될 줄은 그때는 생각도 못 했다.
1951년 10월 31일 정규 4년제 육사가 진해에서 문을 열었지만, 개교 기념식이 열린 것은 이듬해 1월 20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대장, 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 육해공군 참모총장 등이 참석했다. 이 대통령은 “80 연령에 이르러 이러한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게 된 것을 생각할 때 그 감상이란 말할 수 없이 기쁘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식장을 떠나면서 “이제는 마음 놨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8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생도들은 모두 200명이었다. 생도들은 2개 중대로 편성됐다. 1~100번까지가 1중대, 나머지가 2중대였다. 교번 106번을 받은 나는 2중대였다. 1중대에는 정호용(鄭鎬溶·육군참모총장, 내무・국방부 장관 역임)이, 2중대에는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등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을 다니다가 입교한 나는 동기생들보다 두세 살 어렸다.
1955년 10월, 드디어 육사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4년제 정규 육사’라는 말에 끌려 지망하기는 했지만, 정말 사관학교에서 4년 동안 교육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언제든 전선에 투입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입교한 생도는 200명이었지만, 임관한 사람은 156명이었다. 현재 생존해 있는 사람은 90여 명.
2사단 26연대 7중대 1소대장이 내 첫 보직이었다. 당시의 군대는 부정부패가 말도 못 했다. 분위기도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정규 육사 1기’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군내(軍內)에 청신한 분위기를 일으켜 보려 노력했다.
하나회 탄생
5・16 전이었을 것이다.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예하 병기기지사령부 감찰장교로 근무하다가 경북 영천으로 발령이 났다. 우연히 2군 부사령관이던 박정희 장군을 만났다. “영천으로 간다”고 했더니, “거기는 뭐 하러 가나? 6관구로 가”라고 했다. 서울 영등포에 있던 6관구 사령부에서 근무하다가 다시 지방 근무 발령이 났다. 얼마 후 5・16이 일어났다. 이후 나는 경기도지사 박창원(朴昌源) 장군의 보좌관,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 감찰과장, 보안사령부(현 국군기무사령부) 정보처장 등을 지냈다.
5・16군사정권 말기, 이른바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사건, 파친코사건, 새나라자동차사건)이 불거져 나왔다. 김종필(金鍾泌·JP) 중앙정보부가 저지른 권력형 비리였다. 국민들은 물론 군내에서도 비판적인 여론이 들끓었다.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孫永吉·예비역 육군 준장, 수경사 참모장 역임) 등과 함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찾아가 비판적인 여론을 전했다. 박정희 의장은 “너희가 뭘 좀 만들어보라”고 했다. 아마 JP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군내에서 자신을 도와줄 세력이 만들어지기를 희망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하나회였다. 거기에 무슨 정치적 의도는 없었다. 단지 박정희 의장에게 힘을 주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뿐이었다.
1개 사단분의 장비 노획
1969년 맹호부대 대대장으로 월남에 갔다. 채명신(蔡明新) 사령관이 떠나고 이세호(李世鎬) 사령관이 왔다. 부대는 1969년 11월 ‘창군기념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사단 단위의 대규모 작전을 벌였다. 적(敵)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구역을 포위하고 일주일 동안 작전을 전개했다. 그런데 사단 전체가 전혀 전과(戰果)를 거두지 못했다. 모두 당황했다. 장병들은 사기가 떨어졌다. 우리의 작전구역 바깥 지역은 미 공군이 일주일 동안 폭격을 했다. 그곳은 조용했다. 어쩐지, 그곳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육사 동기생인 사단 작전참모에게 “미군이 폭격한 지역으로 들어가 보겠다”고 했다. 그는 미군과 연락을 해보더니 “미군이 못 들어간다고 한다. 그곳은 월맹군 사단사령부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고 전했다. 그 말을 들으니 더 들어가고 싶어졌다.
“미군이 일주일을 폭격했는데, 어떻게 견디겠나? 아마 이미 궤멸했을 것이다. 들어가 보겠다.”
미군 측에서는 “위험을 각오하고 들어가겠다면, 들어가라”고 했다. 박민식 대위가 지휘하는 1개 중대가 헬기를 타고 월맹군 사단사령부가 있다는 적지(敵地)로 들어갔다. 교전(交戰)이 벌어졌어야 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조용했다. 박 대위에게 “이상 없느냐”고 했더니, “이상 없다”고 했다. “뒤져보라”고 했다.
적 사단사령부에는 각종 중화기를 비롯한 1개 사단분의 장비와 1년치 식량 등이 있었다. 적군은 모두 도망쳐서 아무도 없었다. 부상병 한 명만을 사로잡았을 뿐이었다. 노획한 전리품(戰利品)을 가져오려는데, 방법이 없었다. 공병 1개 중대를 요청해 헬기 착륙장을 만든 후, 일주일 동안 전리품을 실어 날랐다. 총알 한 방 안 쏘고, 한 명의 사망자, 부상자도 없이 거둔 전과였다. 사실은 거저주었다는 편이 옳다고 할까. 응우옌 반 티에우 월남 대통령을 비롯해 월남군, 미군, 한국군 요인들이 전리품을 보러 왔다. 이 일로 나는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대대장이 무공훈장 중 2등급에 해당하는 을지무공훈장을 받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1970년 귀국한 후 나는 서종철(徐鐘喆) 육군참모총장의 보좌관이 됐다. 내 전임자는 전두환 대령이었다. 이어 육군본부 인사운영감실 대령보직과장을 맡았다. 원래 이 자리는 고참 대령들이 맡는 자리였는데, 갓 대령으로 진급한 사람이 보임(補任)되는 건 드문 일이었다.
윤필용 사건
1972년 제26사단의 연대장으로 나갔다. 연대장을 맡은 지 1년쯤 지났을 때였을까. 갑자기 보안사령부에 연행되어 구속되었다. 윤필용(尹必鏞)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던 윤필용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 가운데 한 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5사단장으로 있을 때 군수참모로 인연을 맺었고, 이후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방첩부대장(국군기무사령관), 맹호사단장 등을 거쳐 1970년 수도경비사령관이 됐다. 당시 수도경비사령부는 중앙정보부, 대통령경호실, 보안사령부와 함께 권부(權府)로 꼽혔다. 윤필용 장군 밑에는 육사 동기생인 손영길 준장이 참모장으로 있었다.
윤 장군은 ‘군부 실세’ 소리를 듣고 있었다. 합참의장이 그에게 세배를 갔다는 소문도 있었다. 서울 필동의 수도경비사령부는 ‘필동 육본(육군본부)’이라고 일컬어졌다.
윤필용 사건은 1972년 10월 윤필용 장군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이미 연로했으니, 더 노쇠해지기 전에 후계자를 키워야 한다”고 말한 것이 박 대통령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벌어졌다고 한다. 대로(大怒)한 박정희 대통령이 강창성(姜昌成) 보안사령관에게 수사를 지시했고, 윤필용 장군과 가깝다고 알려진 장교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갔다.
하지만 나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윤필용 장군은 군인으로서 훌륭한 분이었고, 그래서 존경했던 것은 사실이다. 남들에게는, 내가 보안사 정보처장을 지냈고, 그분이 맹호부대장이었을 때 휘하 대대장이었으니, 그분 인맥(人脈)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그 사건에 엮여 들어갈 정도로 그분과 가까운 사이였거나 무슨 일을 도모한 것은 없다. 나는 솔직히 그때도 영문을 몰랐고, 지금도 모르겠다.
1973년 4월 육군보통군법회의가 열렸다. 내게 적용된 죄목은 ‘명령위반’이었다. 내가 무슨 명령을 위반했다는 것인지…. 그냥 사람을 잡아넣겠다고 만든 죄목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1심에서는 법정최고형인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2심인 고등군법회의에서는 선고유예로 형이 낮아졌다. 대법원은 무죄(無罪) 취지로 고등군법회의에 파기환송(破棄還送)했다. 손영길 준장은 2011년 재심(再審)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나는 사건 당시에 이미 무죄판결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무죄판결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든 군복을 벗어야 했다.
이병철 회장의 예언
군복을 벗은 내게 권철현(權哲鉉) 연합철강 회장이 고문(顧問) 자리를 제안해 왔다. 권 회장은 같은 집안이기는 했지만, 촌수가 그렇게 가까운 것은 아니었다.
1977년 연합철강의 경영권이 국제그룹으로 넘어갔다. 집에서 쉬고 있는데 이건희(李健熙) 삼성그룹 부회장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와 만났더니, “삼성에 와서 일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일주일 후 다시 연락이 왔다. “삼성으로 가겠다”고 했다.
당시 삼성 등 대기업에서는 일반적으로 대령 예편한 사람에게는 부장 자리를 주었다. 하지만 이 부회장은 나를 상무로 발령냈다. 삼성으로 출근한 지 사흘쯤 지났을 때였을까? 이건희 부회장이 나를 이병철(李秉喆) 회장에게 인사를 시켰다. 이 회장은 내 얼굴을 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
“얘는 우리 회사에 오래 있을 애가 아닌데….”
처음 출근해서 일 좀 해보려고 하는데, 그런 소리를 들으니 솔직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병철 회장의 말이 이어졌다.
“얘는 삼성에 오래 있을 애가 아니고,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앤데….”
그때는 그게 무슨 소린지 몰랐다. 3년 후 나는 삼성을 떠나 정치에 투신하게 된다. 이병철 회장은 그걸 미리 내다본 것일까?
삼성 본관 회장실 옆에는 회장 전용식당이 있었다. 임원들은 대개 거기에 불려갔다 오면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다. 그래서 임원들은 회장 전용식당에 불려가면 ‘죽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신입 임원임에도 자주 이 회장에게 불려갔다. 어느 날 이 회장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하나 있네.”
그룹의 총수가 일개 신입 상무인 내게 ‘부탁’이라니….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회장님께서 제게 부탁이라니요…. 제게 부탁하실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삼성에 임원이 200여 명이 있지만, 내가 특별히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있네. 들어주겠나?”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이 회장이 말했다.
“자네가 카메라를 맡아줘야겠네.”
“카메라라니요?”
“자동차공업은 10분의 1mm 수준의 정밀가공기술이 있으면 할 수 있네. 지금 우리나라는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카메라를 만들려면 100분의 1mm 수준의 기술이, 반도체를 만들려면 1000분의 1mm 수준의 기술이 필요하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카메라를 만들지 못하고 있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지금 반도체를 생산(당시 삼성은 반도체에 투자해 초기 제품들을 내놓기 시작했다)해 내다 팔려고 해도 외국인들은 ‘카메라도 못 만드는 한국이 어떻게 반도체를 만든단 말이냐?’며 인정을 해주질 않고 있어. 그러니 자네가 카메라를 맡아서 해주게.”
“저는 카메라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카메라를 합니까?”
“자네에게 카메라로 돈을 벌어오라는 게 아닐세. 반도체를 살리기 위해서 한국에 우선 100분의 1mm 수준의 정밀가공기술이 있다는 걸 인정받기 위해 카메라를 만들라는 것일세. 이건 기술자 몇 명으로 되는 일이 아닐세. 자네가 꼭 해주게.”
삼성 미놀타 카메라의 탄생
“제가 기계에 대해 아는 게 있어야지요. 기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기술을 조금 아는 사람은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지 못하네. 기술을 모르는 자네가 적임자야.”
회장이 그렇게 간곡하게 청하는데, 거절할 재간이 없었다. 결국 “해보기는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일을 맡았다.
당시 일본 도쿄에는 6개의 카메라 회사가 있었다. 이 회사들을 찾아다니며 기술제휴를 요청했다. 모두 대가(代價)를 엄청나게 불렀다. 100년 동안 장사를 해도 본전도 못 찾을 액수였다. ‘카메라 공장이 도쿄에만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사카에는 미놀타 카메라가 있었다. 그 회사 상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카메라를 사러 왔는데, 만나줄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좋다고 했다.
당시 미놀타 카메라에는 두 가지 기종이 있었다. 그 기종을 각각 5만 대씩 10만 대를 사겠다고 제안했다. 미놀타 상무는 무척 좋아했다. 그런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카메라는 우리나라에서 수입금지 품목입니다. 완제품으로 들여갈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반제품(半製品)으로 들여가서 녹다운 방식으로 생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만드는지 기술지도와 검사도 해줘야겠습니다.”
그래서 창원에 있는 삼성정밀 공장에서 카메라를 생산하게 됐다. 일본에서 과장급 직원이 나와서 기술지도를 했다. 그는 설계도를 갖고 왔으면서도, 007가방에 넣어두고 우리에게는 일절 보여주지 않았다. 잘못하다가는 일껏 생산은 하면서도 기술은 이전받지 못할 판국이었다. 설계도를 입수하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했다. 그리고 결국은 설계도를 복사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는 카메라 부품을 생산해야 할 단계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미 국내에서는 카메라 부품을 만들어서 미놀타에 납품하는 회사가 있었다.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부품 공급을 하지 않으면, 일본 공장이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었다. 미놀타 관계자에게 “우리나라에서 부품을 만들어서 너희는 포장만 해서 파는 게 말이 되느냐?”고 따졌다. 미놀타 관계자는 “그런 일 없다”고 잡아뗐다. “우리나라에서 부품 수출을 하지 않으면, 당신들 공장은 어떻게 되느냐? 부품만 있으면 이제 우리도 카메라를 생산할 수 있다”고 압박했다. 그러고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일본 미놀타에서 공급받는 가격으로 우리도 국내 부품업체로부터 부품을 받아서 미놀타 브랜드로 생산하기로 한 것이다. 이 바람에 우리는 대번에 카메라의 국산화율을 70%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삼성 미놀타’ 카메라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우리나라 업체가 생산한 최초의 카메라였다.
하지만 일본 측은 자신만만했다.
“한국이 다른 건 다 만들어도 렌즈는 만들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렌즈를 팔면 된다.”
카메라 렌즈를 자세히 보니, 렌즈를 만든 회사 이름이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렌즈 생산 기계를 만드는 회사 이름을 알아냈다. 그 회사에서 기계를 사다가 창원공장에 설치했다. 한국이 렌즈는 만들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하는 일본인들에게 “그런 소리 마라. 우리도 다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창원공장을 돌아보던 그들은 자기들의 렌즈 생산 기계와 같은 기계를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걸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오늘날 삼성이 만드는 스마트폰은 세계시장을 제패(制覇)하고 있다. 스마트폰에는 고성능의 디지털 카메라가 들어간다. 그 기초를 닦는 데 나도 일조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세지마 류조의 訪韓
내가 창원에 가 있는 3년 동안 군대에 남은 전두환 장군은 경호실 작전차장보, 1사단장을 거쳐 국군보안사령관이 됐다. 노태우 장군도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거쳐 9사단장으로 나갔다. 하지만 동기생들과의 접촉은 거의 없었다. 그들과 나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1979년 10・26사태에 이어 12・12사태가 일어났다. 외신에서는 ‘전두환 장군이 한국의 실권자’라고 했다.
이듬해 5・16비상계엄확대 조치가 나왔다. 이어 5・18광주민주화운동,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등 정국은 숨가쁘게 돌아갔다. 권력의 핵심에 진입한 친구들이 “너도 정부에 들어와서 일해보라”고 권했다. 삼성정밀 전무(창원공장장)를 끝으로 삼성을 떠나 차관급인 무임소장관 보좌관이 되었다. 장관은 없었다. 민주정의당(민정당) 창당 작업을 물밑에서 지원하는 일을 했다.
그 무렵 이병철 회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세지마 류조(瀬島龍三) 일본 이토추상사 회장과 고토 노보루(五島昇) 도큐그룹 회장이 한국에 오는데, 전두환 장군을 만나게 해줄 수 있겠소?”
세지마 류조 회장은 일본 대본영 참모 출신으로 소설 《불모지대(不毛地帶)》의 모델이 된 인물. 이 무렵에는 얼마 후 총리가 되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를 비롯해 일본 정계(政界) 인사들에게 멘토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에서는 그를 한국에 보내, 새로 등장한 전두환 정권의 성격을 알아보려 한 것이었다. 나는 이병철 회장의 뜻을 전두환 장군에게 전했다. 그해 6월 방한(訪韓)한 세지마 류조는 전두환, 노태우 장군을 만났다.
나는 세지마 류조 회장 일행에게 제3땅굴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세지마 회장은 땅굴 속으로 들어가더니 나침반을 꺼내는 것이었다. 그는 곡괭이가 팬 방향과 나침반 바늘의 방향을 대조해 보더니, “이건 북한이 판 게 맞다”고 말했다.
후일 국회의원이 된 후에 세지마를 만났더니, 그는 “전두환 대통령을 만났을 때, ‘올림픽을 유치하라’고 권했다”고 말했다. 내가 물었다.
“나고야가 올림픽 유치를 하려는데, 한국에 올림픽 유치를 권하다니, 그러면 일본에서 욕을 먹지 않습니까?”
“그러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1988년 올림픽은 한국이 하는 게 이익입니다. 일본은 1964년 도쿄올림픽, 1972년 삿포로 동계올림픽을 치른 바 있습니다. 올림픽을 치른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또다시 일본이 올림픽을 하겠다고 나서면 국제사회에서 욕을 먹습니다.”
세지마 회장과 방한했던 고토 회장은 일본 체육계의 거물이었는데, 서울이 올림픽 개최를 놓고 나고야와 경합을 벌이게 되자 난처한 입장에 처하기도 했다고 들었다. 그는 원래 나고야올림픽 유치위원이었는데도, 세지마 회장과 함께 서울올림픽 개최를 지지했다.
김해공항에서의 비밀 교섭
1981년 국회의원이 되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나카소네 야스히로 행정관리청 장관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세지마 회장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만나보라”고 했다. 나카소네 장관은 나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대 일본 총리들은 총리가 되면 첫 방문국으로 미국을 택했습니다. 나는 총리가 되면 한국을 가장 먼저 방문하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이를 환영하겠습니까?”
“물론 환영할 것입니다.”
사실 나카소네는 자유민주당 내 소수(少數)계파의 수장(首長)으로 당시만 해도 총리가 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때문에 나카소네의 방한 의사를 외무부나 전두환 대통령에게 전하지 않았다. 그런데 1년 후인 1982년 11월, 나카소네는 정말 일본 총리가 됐다. 이어 그는 세지마 회장을 통해 방한 의사를 전해왔다. 나는 노신영(盧信永·안기부장, 국무총리 역임) 외무부 장관을 만나 그 뜻을 전했다. 우리 정부도 환영의사를 표했다.
당시 양국 간 최대 현안은 경제협력자금 제공 문제였다. 전두환 정권은 출범 직후 한국이 공산주의의 방파제(防波堤)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일본이 안보 무임(無賃)승차를 하고 있으니 경제적으로 기여해 달라는 논리를 내세워 일본에 100억 달러의 경제협력자금을 요청했었다. 이후 양국은 액수와 구성을 놓고 줄다리기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에서는 나, 일본에서는 세지마 회장이 역할을 했다.
1982년 12월 8일 나는 김해공항 귀빈실에서 세지마 회장을 만났다. 이때 나는 민정당 사무총장을 맡고 있어서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언론의 관심이 되고 있었다. 때문에 서울에서는 세지마 회장을 만날 수 없어서 시골에 볼 일이 있어 내려간다는 핑계로 김해공항으로 내려간 것이었다. 그때쯤에는 경협 규모는 40억 달러로 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여 있었다. 다만 공적개발원조(ODA)와 수출입은행의 상품차관 규모를 각각 어느 정도로 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우리는 ODA 규모를 늘리려 했고, 일본은 수출입은행 차관을 늘리려 했다. 논의 끝에 나는 세지마 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경협자금 요구는 우리의 일방적 요구였습니다. 일본이 이에 응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 푼도 안 해도 좋습니다. 다만 우리 시대의 정치인들이 정치인으로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은 역사가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후 양국 간 교섭이 좀 더 진행된 끝에 경협자금 문제가 타결됐다. 이듬해 1월 11일 나카소네 총리는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공식 방문, 전두환 대통령과 정상(頂上)회담을 가졌다. 세지마 회장은 나를 좋아했다. 한번은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당신에게 반했소. 나나 일본과 가까우면 뭔가 부탁이 있을 법도 한데, 당신은 한 번도 업체를 위한 부탁을 한 적이 없소. 당신은 애국심 이외에는 생각이 없는 사람인 것 같아서, 좋아하는 거요.”
과분한 칭찬이었다. 나도 세지마 회장과 고토 회장이 베풀어준 후의(厚意)를 지금까지 잊지 않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민정당 사무총장이 되다
나는 1981년 3월 26일 실시된 제11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거창-산청-함양 선거구에서 출마, 당선됐다. 무임소장관 보좌관을 맡아 공직에 뛰어든 이상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정치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1982년 5월 이철희-장영자 사건이 터졌다. ‘정의사회구현’을 모토로 내걸었던 당시 정권에 준 충격은 컸다. 그 여파로 5월 20일 민정당 당직 개편이 있었다. 권정달(權正達·제11, 12, 15대 국회의원 역임) 사무총장이 물러나고, 내가 후임 사무총장이 됐다. 《조선일보》는 나를 “강직한 원칙주의자”라고 평가하면서 “어느 자리에서나 직언을 서슴지 않고 또 ‘상당한’ 보스 기질을 갖춘 것으로 알려진 그가 상처받은 당의 치유와 개혁주도 세력으로서의 민정당의 면모를 일신하는 이중의 과제를 어떤 솜씨로 풀어나갈지가 관심사”라고 평했다.
나를 사무총장으로 추천한 것은 이재형(李載瀅·국회의장 역임) 당시 민정당 대표였다고 한다. 그분과 개인적으로 특별히 가깝게 지낸 것은 아니었는데도 그분은 나를 눈여겨보았던 듯하다. 당 총재인 전두환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후임 사무총장으로 누가 좋겠느냐”고 하자 이 대표는 “권익현 의원이 좋겠다”고 추천했고, 전 대통령은 쾌락(快諾)했다고 한다.
김영삼의 단식
5・18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이 되는 1983년 5월 18일 김영삼(金泳三·YS) 전 신민당 총재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단식투쟁을 실시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 사실을 직접 보도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단식은 곧 정국(政局) 초미(焦眉)의 관심사가 되었다. 나는 그가 입원해 있는 서울대 병원으로 찾아갔다. 단식 19일이 지났을 때였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민주화운동을 하신다는 분이 정말 단식을 하다가 죽을 생각입니까?”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오!”
“벌써 19일이나 단식을 했습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죽습니다! 의사가 이제 처방을 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정말 죽을 생각입니까?”
“내가 죽기는 왜 죽어요?”
나는 “이제 할 만큼 하지 않았느냐? 이제 가만히 있어달라”고 설득했다.
내 설득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YS는 나흘 뒤에 단식을 그만두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YS가 책을 하나 출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책의 원고를 보니 ‘빨갱이 책’이었다. YS 측에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황낙주(黃珞周·제8~10, 12~15대 국회의원, 국회의장 역임) 전 의원의 집에서 만났다. 내가 물어보았다.
“이 책을 총재님이 썼습니까?”
“어느 대학생이 찾아와서 내 이름을 빌려 책을 쓰겠다고 해서 허락했소.”
“책 내용을 보셨습니까?”
“아니, 보지 않았소.”
“이 책이 나오면, 총재님은 ‘빨갱이’가 됩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YS는 그 책을 출간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그 책은 나오지 않았다. 이런 일들이 있어서인지, 나중에도 YS는 나를 좋게 대해주었다.
“부엌에서 일하다 보면 접시도 깨는 법”
1984년 6월 정래혁(丁來赫·국방부 장관, 국회의장, 제9~11대 국회의원 역임) 민정당 대표가 부정축재를 했다는 투서가 언론사 등에 들어갔다. 투서를 한 사람은 같은 전남 출신으로 군 시절부터 경쟁관계였던 문형태(文亨泰·합참의장, 체신부 장관, 제8~10대 국회의원 역임) 전 의원이었다. 문 전 의원은 내가 육사를 졸업한 후 소대장으로 근무할 때 사단장이었다. 결국 정 대표는 당 대표직에서 물러나고, 내가 대표가 되었다.
1985년 제12대 총선이 다가왔다. 민심은 출렁이고 있었다. 그런 민심을 우리도 모르지 않았다. 나는 ‘정상적으로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내 선거구에서는 YS의 오랜 측근인 김동영(金東英·제9, 10, 12, 13대 국회의원, 정무장관 역임)이 출마할 예정이었다. 나는 그를 정치규제에서 해제하는 데 찬성했다.
총선을 앞두고 노태우 장관의 출마가 관심사가 됐다. 서울 서대문이나 대구에서 출마하느냐, 아니면 전국구(비례대표)로 나오느냐를 놓고 여러 의견이 나왔다. 그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전두환 대통령이 ‘권 대표와 의논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도 선뜻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 결심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선택하라”고 했다. 그는 결국 전국구를 택했다.
제12대 총선 유세가 시작됐다. 정치규제에서 풀려난 YS의 오른팔 김동영 후보는 전두환 정권이 잘못한 점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나는 이렇게 응수했다.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은 일을 하다 보면 접시도 깨고, 시끄러운 소리도 내고 그러는 법입니다. 방안에서 일도 안 하고 누워만 있는 시누이는 접시를 깨지 않을 수 있겠지요. 그렇다고 정부가 그렇게 아무 일 안 하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내 말이 끝나자 청중이 박수를 쳤다. 한 선거구에서 두 명씩 선출하던 시절이라 우리 두 사람은 나란히 당선됐다. 김동영 의원은 유세장에서는 정권을 맹공했지만, 성품이 좋았다. 우리 부부와도 친하게 지냈다.
“대통령이 국민과 싸울 일 있습니까?”
2・12총선에서 YS와 DJ가 후원하는 신한민주당이 약진했다. 민정당은 지역구에서 90석에서 3석 줄어드는 데 그쳤지만, 제1야당이던 민주한국당(민한당)은 57석에서 26석으로 쪼그라들었다. 반면에 신한민주당은 48석을 차지했다. 선거 결과를 5공 정권에 대한 국민의 심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여론이 당 내외에서 비등했다. 그해 2월 23일 전두환 대통령은 당직 개편을 단행, 노태우 의원을 당 대표로 임명했다. 나는 상임고문으로 물러났다.
이에 앞서 2월 18일 전두환 대통령은 국무총리에 노신영 안기부장을 임명하고, 장관급 13명을 교체하는 전면 개각(改閣)을 단행했다. 개각에 앞서 전두환 대통령을 만났다. 전 대통령은 제12대 총선 때 서울 강남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한 이태섭(李台燮·제10, 11, 13, 15대 국회의원, 정무제1장관, 과학기술처 장관 역임) 의원을 입각(入閣)시키겠다고 말했다. 나는 바로 반대했다.
“각하, 그건 안 됩니다!”
“왜 안 된다는 거요?”
“대통령이 국민과 싸울 일 있습니까? 이번에 이태섭 의원이 떨어진 것은 어찌됐건 그에게도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번 선거에서 떨어진 사람을 바로 장관을 시킨다면,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화풀이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이미 이 의원에게 입각시키겠다고 얘기를 했어요.”
“취소하셔야 합니다. 그게 이 의원을 위해서도 좋습니다. 1년쯤 지난 후 기회를 봐서 장관 시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전두환 대통령은 “알았다. 좋은 얘기를 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다음날 이태섭 의원이 나를 찾아왔다.
“대표님, 이번에 제가 입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도 들었어요. 대통령께 이 의원을 이번에 입각시키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어요.”
이 의원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대통령께 이 의원을 입각시키려면 1년쯤 지난 후에 하라고 말씀드렸어요. 이번에 이 의원이 입각하면 국민들이 반발합니다. 1년쯤 후에 들어가는 게 이 의원에게도 좋아요. 이번에 장관으로 들어가면, 이 의원은 다시는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 없을 겁니다.”
1년 반쯤 후에 전두환 대통령은 개각을 했다. 개각을 하기 전에 나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전화를 넣었다.
“각하, 이태섭 전 의원, 기억하시지요?”
전 대통령은 1년 반 전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어요.”
전두환 대통령은 이태섭 전 의원을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이 전 의원은 제13대 국회에서 재기, 두 차례 더 국회의원을 지냈다.
흔히들 전두환 대통령을 남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이 센 사람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 고칠 줄 아는 분이었다.
全斗煥, 일찌감치 盧泰愚 낙점
전두환 대통령은 1981년 제5공화국 헌법에 의해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래 7년 단임(單任) 임기를 마치면 물러나겠다고 여러 차례 다짐했었다. 하지만 과거 역대 대통령들이 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을 꾀하는 것을 보아 온 많은 국민은 그 다짐을 믿지 않았다. 심지어는 야당 인사들조차도…. 어느 날 전 대통령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권 대표, 야당 중진인 아무개 의원이 다녀갔는데, 그가 나보고 단임으로 물러나면 안 된다고 말합디다. 허허.”
하지만 단임을 실천하겠다는 것은 전두환 대통령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1987년 3월 25일 전두환 대통령은 민정당 주요 당직자들을 청와대 상춘재로 초청해 만찬을 베풀었다. 당 고문인 나도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전 대통령은 “모든 권한을 줄 테니 노태우 대표가 알아서 하라”고 말했다. 노 대표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6월 2일 민정당 중앙집행위원과 당 소속 국회의장단을 상춘재로 초청한 자리에서 전 대통령은 노태우 대표를 당의 대통령 후보로 공식지명했다. 그동안 전두환 대통령의 후계자로 이런저런 사람들의 이름이 거명되었지만, 내 생각에 전 대통령은 일찌감치 노태우 대표를 후계자로 낙점해 놓고 있었다.
노태우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기 위한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린 6월 10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는 최루가스로 뒤덮였다. 박종철 군의 죽음을 규탄하고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나는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여도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김영삼씨와 김대중씨는 후보 단일화를 하지 못할 것이고, 결국 노태우 후보가 당선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듯하던 정국은 노태우 대표가 6・29선언을 발표하면서 일거에 반전(反轉)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직선제 개헌이었다.
8인 정치회담
여야는 7월 30일 8인 정치회담을 만들어 개헌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민정당에서는 나, 윤길중(尹吉重・제5, 8, 11~13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민정당 대표위원 역임), 최영철(崔永喆・제10~12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체신부・노동부 장관,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 역임), 이한동(李漢東・제11~16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대표위원, 국무총리 역임) 의원이, 통일민주당에서는 김동영, 박용만(朴容萬・제9, 10, 12, 13대 국회의원 역임), 이중재(李重載・제7~9, 12, 15대 국회의원 역임), 이용희(李龍熙・제9, 10, 12, 17, 18대 국회의원, 국회 부의장 역임) 의원이 나섰다.
직선제 개헌이라는 큰 원칙은 정해졌지만, 여야의 의견은 엇갈렸다. 민정당은 대통령 6년 단임을, 야당인 통일민주당은 4년 중임을 주장했다. 민정당이 대통령 단임을 주장한 것은 중임은 곧 장기집권 욕망으로 이어지기 쉽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8인 회담은 활동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인 8월 31일 개헌안의 주요 쟁점에 합의했다. 여야 합의에 의한 개헌은 우리 헌정사상(憲政史上)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합의개헌을 위해 정치권은 국회의원 임기 1년을 희생하는 용단을 내렸다. 합의개헌은 내 정치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 가운데 하나이다. 이후 평화적 정권교체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우리나라는 명실상부한 민주국가가 됐다. 우리가 만든 헌법이 그 후 28년이나 갈 줄은 그때는 생각지도 못했다.
당시 내각책임제 개헌을 생각하는 국민은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도 내각책임제를 채택했던 제2공화국의 실패가 드리운 그림자가 너무 컸다. 당시 집권당이던 민주당은 신파(新派)와 구파(舊派)로 나뉘어 갈등하다가 결국은 갈라섰다. 제2공화국의 실패로 내각책임제는 우리나라에서 죽어버렸다. 요즘 다시 개헌, 특히 내각책임제 개헌을 주장하는 얘기들이 솔솔 나오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정당들은 제2공화국이 안고 있던 문제점을 극복했나? 새정치민주연합은 친노(親盧)와 반노(反盧), 새누리당은 친박(親朴)과 비박(非朴)으로 나뉘어 시끄럽다. 지금과 같은 정당 정치로 내각책임제를 할 수 있을지, 솔직히 의문이다.
落薦, 그리고 再起
1987년 대선에서 YS와 DJ는 분열했고, 그해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1988년 4월, 제13대 총선 공천을 앞두고 공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노태우 대통령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나 때문에 부담 갖지 마십시오. 나는 국회의원이 돼도 좋고, 안 돼도 좋습니다. 각하가 대통령을 하는 데 부담이 된다면, 나는 언제라도 그만두겠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당시 그의 측근으로 거론되던 사람 두 명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그 사람들하고 좀 잘 지내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나는 “그 사람들하고는 특별히 가까이할 일도, 멀리할 일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결국 나는 5공 물갈이 차원에서 제13대 공천에서 탈락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노태우 대통령은 나와 가까운 사이였지만, 측근들 때문에 나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후 나는 4년간 쉬다가 1992년 제15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전국구로 의정(議政)단상에 복귀했다. 1996년 제16대 총선에서는 경남 산청-함양 선거구에서 출마, 당선됐다. 8년 만에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 배지를 단 것이다.
그 사이에도 여러 가지 큰일들이 있었다. 1992년에는 YS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95년에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들이 부정부패와 군사반란죄, 내란죄 혐의로 법정에 섰다. 육사 동기생이기도 한 그들이 수의(囚衣)를 입고 법정에 선 모습을 보는 마음은 착잡했다. 1997년에는 DJ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내가 몸담은 한나라당은 야당이 되었다. 나는 한 사람의 국회의원으로서 역할에 충실하려 노력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처음 건의한 대전-진주 간 고속도로가 완공된 것과 내가 주도해서 만든 국회 내 불자(佛子)들의 모임인 정각회(正覺會)가 자리를 잡은 것은 특히 보람 있는 일이었다.
政界를 떠나다
그러다가 내가 정치를 떠나야 할 날이 왔다. 2000년 1월 6일 뇌출혈(腦出血)로 쓰러진 것이다. 그 전날 나는 지역구에 내려가 연설을 하는 등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했다. 그러곤 6일 저녁, 의원회관에서 바둑을 두고 있는데 왠지 느낌이 안 좋았다. 나는 보좌관에게 “정의화(鄭義和·제15~19대 국회의원 역임, 현 국회의장) 의원을 부르라”고 했다. 의사 출신인 정 의원은 당시 초선(初選)의원이었다. 나와 특별히 가깝게 지내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그 일주일 전쯤 내 사무실로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내가 그에게 “전공이 뭐냐?”고 묻자, 그는 “골을 까는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골을 깐다는 게 무슨 소리요?”
“뇌수술을 말하는 겁니다.”
“뇌수술하면 생존율이 어떻습니까?”
“요즘은 기술이 좋아서 생존율이 높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최창락(崔昌洛) 가톨릭 의대 교수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뇌수술을 많이 한 의사였다. 나는 농담을 했다.
“당신은 길을 잘못 택했소. 정치는 나처럼 아무 기술 없는 사람이나 하는 거요.”
“저는 돈은 먹고살 만큼 벌어봤습니다. 이제 정치라는 걸 해보고 싶습니다.”
아마 보좌관에게 정 의원을 부르라고 한 것은 그때 나눈 대화가 생각나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마침 정 의원은 의원회관에 있다가 연락을 받고 내 사무실로 올라왔다. 정 의원은 여기저기 진찰을 하더니, 119에 전화를 걸어 구급차를 불렀다. 구급차는 여의도성모병원으로 달렸다. 최창락 박사는 노량진에 있다가 연락을 받고 달려왔다. 성모병원에는 들여온 지 두 달밖에 안 된 MRI(자기공명영상) 기기가 있었다. MRI를 찍어보니 이미 머릿속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나처럼 일찍 뇌출혈 증상을 파악하고 수술에 들어가는 것은 매우 운이 좋은 경우라고 한다.
뇌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기억상실증이 왔다. 오래전 기억은 생각나는데 비교적 근래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의사에게 물어보니 “기억력을 관장하는 뇌신경 일부가 다친 모양”이라고 했다. 제16대 총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정치를 그만두어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정치에서 물러났다. 수술을 받은 지 6개월쯤 지나고 나서 기억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80평생을 살면서 여러 고비를 넘겼다. 정치를 하면서 그래도 지역구민들이나 국민들로부터 크게 욕먹지 않은 것이 고마울 뿐이다.⊙
“이거 한번 가보면 어떻겠느냐?”
신문에는 4년제 정규 육사(陸士) 1기(육사 11기)생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나와 있었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 어차피 군대에 갈 거면 육사에 진학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령수학》 《요령영어》 같은 수험서를 구해서 일주일 동안 공부했다. 시험을 치는데, 내가 공부한 내용들이 그대로 나온 것 같았다. 아마 전쟁통이라 달리 책을 구할 수 없어서, 시험 출제관도 내가 공부한 것과 같은 책을 보고 문제를 낸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필기시험에 합격한 후 면접시험을 보러 갔다. 면접관 중에 키가 작고 얼굴이 새카만 대령이 하나 있었다. 육군정보학교장 박정희(朴正熙) 대령이었다. 그가 물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무얼 했나?”
“웅변을 했습니다.”
“상(賞)을 받은 적이 있나?”
“조재천(曺在千) 경북지사상을 받았습니다.”
“그래? 한번 해봐라.”
나는 2~3분 정도 웅변을 했다. 박 대령이 “됐어”라고 했다. 그분이 10년 후에 혁명을 일으켜 대통령이 되고 18년이나 이 나라를 이끌게 될 줄, 그리고 내 인생이 그분과 얽히게 될 줄은 그때는 생각도 못 했다.
1951년 10월 31일 정규 4년제 육사가 진해에서 문을 열었지만, 개교 기념식이 열린 것은 이듬해 1월 20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대장, 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 육해공군 참모총장 등이 참석했다. 이 대통령은 “80 연령에 이르러 이러한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게 된 것을 생각할 때 그 감상이란 말할 수 없이 기쁘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식장을 떠나면서 “이제는 마음 놨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8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생도들은 모두 200명이었다. 생도들은 2개 중대로 편성됐다. 1~100번까지가 1중대, 나머지가 2중대였다. 교번 106번을 받은 나는 2중대였다. 1중대에는 정호용(鄭鎬溶·육군참모총장, 내무・국방부 장관 역임)이, 2중대에는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등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을 다니다가 입교한 나는 동기생들보다 두세 살 어렸다.
1955년 10월, 드디어 육사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4년제 정규 육사’라는 말에 끌려 지망하기는 했지만, 정말 사관학교에서 4년 동안 교육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언제든 전선에 투입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입교한 생도는 200명이었지만, 임관한 사람은 156명이었다. 현재 생존해 있는 사람은 90여 명.
2사단 26연대 7중대 1소대장이 내 첫 보직이었다. 당시의 군대는 부정부패가 말도 못 했다. 분위기도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정규 육사 1기’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군내(軍內)에 청신한 분위기를 일으켜 보려 노력했다.
하나회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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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작전교육국 차장 시절의 박정희 대령(오른쪽). 이후 박 대령은 육군정보학교장으로 나갔다. 왼쪽은 작전교육국장 이용문 준장. |
5・16군사정권 말기, 이른바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사건, 파친코사건, 새나라자동차사건)이 불거져 나왔다. 김종필(金鍾泌·JP) 중앙정보부가 저지른 권력형 비리였다. 국민들은 물론 군내에서도 비판적인 여론이 들끓었다.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孫永吉·예비역 육군 준장, 수경사 참모장 역임) 등과 함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찾아가 비판적인 여론을 전했다. 박정희 의장은 “너희가 뭘 좀 만들어보라”고 했다. 아마 JP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군내에서 자신을 도와줄 세력이 만들어지기를 희망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하나회였다. 거기에 무슨 정치적 의도는 없었다. 단지 박정희 의장에게 힘을 주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뿐이었다.
1개 사단분의 장비 노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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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호부대 대대장 시절. 월남전에 참전,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
“미군이 일주일을 폭격했는데, 어떻게 견디겠나? 아마 이미 궤멸했을 것이다. 들어가 보겠다.”
미군 측에서는 “위험을 각오하고 들어가겠다면, 들어가라”고 했다. 박민식 대위가 지휘하는 1개 중대가 헬기를 타고 월맹군 사단사령부가 있다는 적지(敵地)로 들어갔다. 교전(交戰)이 벌어졌어야 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조용했다. 박 대위에게 “이상 없느냐”고 했더니, “이상 없다”고 했다. “뒤져보라”고 했다.
적 사단사령부에는 각종 중화기를 비롯한 1개 사단분의 장비와 1년치 식량 등이 있었다. 적군은 모두 도망쳐서 아무도 없었다. 부상병 한 명만을 사로잡았을 뿐이었다. 노획한 전리품(戰利品)을 가져오려는데, 방법이 없었다. 공병 1개 중대를 요청해 헬기 착륙장을 만든 후, 일주일 동안 전리품을 실어 날랐다. 총알 한 방 안 쏘고, 한 명의 사망자, 부상자도 없이 거둔 전과였다. 사실은 거저주었다는 편이 옳다고 할까. 응우옌 반 티에우 월남 대통령을 비롯해 월남군, 미군, 한국군 요인들이 전리품을 보러 왔다. 이 일로 나는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대대장이 무공훈장 중 2등급에 해당하는 을지무공훈장을 받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1970년 귀국한 후 나는 서종철(徐鐘喆) 육군참모총장의 보좌관이 됐다. 내 전임자는 전두환 대령이었다. 이어 육군본부 인사운영감실 대령보직과장을 맡았다. 원래 이 자리는 고참 대령들이 맡는 자리였는데, 갓 대령으로 진급한 사람이 보임(補任)되는 건 드문 일이었다.
윤필용 사건
1972년 제26사단의 연대장으로 나갔다. 연대장을 맡은 지 1년쯤 지났을 때였을까. 갑자기 보안사령부에 연행되어 구속되었다. 윤필용(尹必鏞)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던 윤필용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 가운데 한 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5사단장으로 있을 때 군수참모로 인연을 맺었고, 이후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방첩부대장(국군기무사령관), 맹호사단장 등을 거쳐 1970년 수도경비사령관이 됐다. 당시 수도경비사령부는 중앙정보부, 대통령경호실, 보안사령부와 함께 권부(權府)로 꼽혔다. 윤필용 장군 밑에는 육사 동기생인 손영길 준장이 참모장으로 있었다.
윤 장군은 ‘군부 실세’ 소리를 듣고 있었다. 합참의장이 그에게 세배를 갔다는 소문도 있었다. 서울 필동의 수도경비사령부는 ‘필동 육본(육군본부)’이라고 일컬어졌다.
윤필용 사건은 1972년 10월 윤필용 장군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이미 연로했으니, 더 노쇠해지기 전에 후계자를 키워야 한다”고 말한 것이 박 대통령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벌어졌다고 한다. 대로(大怒)한 박정희 대통령이 강창성(姜昌成) 보안사령관에게 수사를 지시했고, 윤필용 장군과 가깝다고 알려진 장교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갔다.
하지만 나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윤필용 장군은 군인으로서 훌륭한 분이었고, 그래서 존경했던 것은 사실이다. 남들에게는, 내가 보안사 정보처장을 지냈고, 그분이 맹호부대장이었을 때 휘하 대대장이었으니, 그분 인맥(人脈)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그 사건에 엮여 들어갈 정도로 그분과 가까운 사이였거나 무슨 일을 도모한 것은 없다. 나는 솔직히 그때도 영문을 몰랐고, 지금도 모르겠다.
1973년 4월 육군보통군법회의가 열렸다. 내게 적용된 죄목은 ‘명령위반’이었다. 내가 무슨 명령을 위반했다는 것인지…. 그냥 사람을 잡아넣겠다고 만든 죄목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1심에서는 법정최고형인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2심인 고등군법회의에서는 선고유예로 형이 낮아졌다. 대법원은 무죄(無罪) 취지로 고등군법회의에 파기환송(破棄還送)했다. 손영길 준장은 2011년 재심(再審)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나는 사건 당시에 이미 무죄판결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무죄판결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든 군복을 벗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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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과 이건희 당시 부회장. |
1977년 연합철강의 경영권이 국제그룹으로 넘어갔다. 집에서 쉬고 있는데 이건희(李健熙) 삼성그룹 부회장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와 만났더니, “삼성에 와서 일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일주일 후 다시 연락이 왔다. “삼성으로 가겠다”고 했다.
당시 삼성 등 대기업에서는 일반적으로 대령 예편한 사람에게는 부장 자리를 주었다. 하지만 이 부회장은 나를 상무로 발령냈다. 삼성으로 출근한 지 사흘쯤 지났을 때였을까? 이건희 부회장이 나를 이병철(李秉喆) 회장에게 인사를 시켰다. 이 회장은 내 얼굴을 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
“얘는 우리 회사에 오래 있을 애가 아닌데….”
처음 출근해서 일 좀 해보려고 하는데, 그런 소리를 들으니 솔직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병철 회장의 말이 이어졌다.
“얘는 삼성에 오래 있을 애가 아니고,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앤데….”
그때는 그게 무슨 소린지 몰랐다. 3년 후 나는 삼성을 떠나 정치에 투신하게 된다. 이병철 회장은 그걸 미리 내다본 것일까?
삼성 본관 회장실 옆에는 회장 전용식당이 있었다. 임원들은 대개 거기에 불려갔다 오면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다. 그래서 임원들은 회장 전용식당에 불려가면 ‘죽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신입 임원임에도 자주 이 회장에게 불려갔다. 어느 날 이 회장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하나 있네.”
그룹의 총수가 일개 신입 상무인 내게 ‘부탁’이라니….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회장님께서 제게 부탁이라니요…. 제게 부탁하실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삼성에 임원이 200여 명이 있지만, 내가 특별히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있네. 들어주겠나?”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이 회장이 말했다.
“자네가 카메라를 맡아줘야겠네.”
“카메라라니요?”
“자동차공업은 10분의 1mm 수준의 정밀가공기술이 있으면 할 수 있네. 지금 우리나라는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카메라를 만들려면 100분의 1mm 수준의 기술이, 반도체를 만들려면 1000분의 1mm 수준의 기술이 필요하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카메라를 만들지 못하고 있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지금 반도체를 생산(당시 삼성은 반도체에 투자해 초기 제품들을 내놓기 시작했다)해 내다 팔려고 해도 외국인들은 ‘카메라도 못 만드는 한국이 어떻게 반도체를 만든단 말이냐?’며 인정을 해주질 않고 있어. 그러니 자네가 카메라를 맡아서 해주게.”
“저는 카메라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카메라를 합니까?”
“자네에게 카메라로 돈을 벌어오라는 게 아닐세. 반도체를 살리기 위해서 한국에 우선 100분의 1mm 수준의 정밀가공기술이 있다는 걸 인정받기 위해 카메라를 만들라는 것일세. 이건 기술자 몇 명으로 되는 일이 아닐세. 자네가 꼭 해주게.”
삼성 미놀타 카메라의 탄생
“제가 기계에 대해 아는 게 있어야지요. 기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기술을 조금 아는 사람은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지 못하네. 기술을 모르는 자네가 적임자야.”
회장이 그렇게 간곡하게 청하는데, 거절할 재간이 없었다. 결국 “해보기는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일을 맡았다.
당시 일본 도쿄에는 6개의 카메라 회사가 있었다. 이 회사들을 찾아다니며 기술제휴를 요청했다. 모두 대가(代價)를 엄청나게 불렀다. 100년 동안 장사를 해도 본전도 못 찾을 액수였다. ‘카메라 공장이 도쿄에만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사카에는 미놀타 카메라가 있었다. 그 회사 상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카메라를 사러 왔는데, 만나줄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좋다고 했다.
당시 미놀타 카메라에는 두 가지 기종이 있었다. 그 기종을 각각 5만 대씩 10만 대를 사겠다고 제안했다. 미놀타 상무는 무척 좋아했다. 그런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카메라는 우리나라에서 수입금지 품목입니다. 완제품으로 들여갈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반제품(半製品)으로 들여가서 녹다운 방식으로 생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만드는지 기술지도와 검사도 해줘야겠습니다.”
그래서 창원에 있는 삼성정밀 공장에서 카메라를 생산하게 됐다. 일본에서 과장급 직원이 나와서 기술지도를 했다. 그는 설계도를 갖고 왔으면서도, 007가방에 넣어두고 우리에게는 일절 보여주지 않았다. 잘못하다가는 일껏 생산은 하면서도 기술은 이전받지 못할 판국이었다. 설계도를 입수하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했다. 그리고 결국은 설계도를 복사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는 카메라 부품을 생산해야 할 단계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미 국내에서는 카메라 부품을 만들어서 미놀타에 납품하는 회사가 있었다.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부품 공급을 하지 않으면, 일본 공장이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었다. 미놀타 관계자에게 “우리나라에서 부품을 만들어서 너희는 포장만 해서 파는 게 말이 되느냐?”고 따졌다. 미놀타 관계자는 “그런 일 없다”고 잡아뗐다. “우리나라에서 부품 수출을 하지 않으면, 당신들 공장은 어떻게 되느냐? 부품만 있으면 이제 우리도 카메라를 생산할 수 있다”고 압박했다. 그러고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일본 미놀타에서 공급받는 가격으로 우리도 국내 부품업체로부터 부품을 받아서 미놀타 브랜드로 생산하기로 한 것이다. 이 바람에 우리는 대번에 카메라의 국산화율을 70%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삼성 미놀타’ 카메라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우리나라 업체가 생산한 최초의 카메라였다.
하지만 일본 측은 자신만만했다.
“한국이 다른 건 다 만들어도 렌즈는 만들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렌즈를 팔면 된다.”
카메라 렌즈를 자세히 보니, 렌즈를 만든 회사 이름이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렌즈 생산 기계를 만드는 회사 이름을 알아냈다. 그 회사에서 기계를 사다가 창원공장에 설치했다. 한국이 렌즈는 만들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하는 일본인들에게 “그런 소리 마라. 우리도 다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창원공장을 돌아보던 그들은 자기들의 렌즈 생산 기계와 같은 기계를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걸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오늘날 삼성이 만드는 스마트폰은 세계시장을 제패(制覇)하고 있다. 스마트폰에는 고성능의 디지털 카메라가 들어간다. 그 기초를 닦는 데 나도 일조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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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지마 류조 전 이토추상사 회장. |
이듬해 5・16비상계엄확대 조치가 나왔다. 이어 5・18광주민주화운동,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등 정국은 숨가쁘게 돌아갔다. 권력의 핵심에 진입한 친구들이 “너도 정부에 들어와서 일해보라”고 권했다. 삼성정밀 전무(창원공장장)를 끝으로 삼성을 떠나 차관급인 무임소장관 보좌관이 되었다. 장관은 없었다. 민주정의당(민정당) 창당 작업을 물밑에서 지원하는 일을 했다.
그 무렵 이병철 회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세지마 류조(瀬島龍三) 일본 이토추상사 회장과 고토 노보루(五島昇) 도큐그룹 회장이 한국에 오는데, 전두환 장군을 만나게 해줄 수 있겠소?”
세지마 류조 회장은 일본 대본영 참모 출신으로 소설 《불모지대(不毛地帶)》의 모델이 된 인물. 이 무렵에는 얼마 후 총리가 되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를 비롯해 일본 정계(政界) 인사들에게 멘토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에서는 그를 한국에 보내, 새로 등장한 전두환 정권의 성격을 알아보려 한 것이었다. 나는 이병철 회장의 뜻을 전두환 장군에게 전했다. 그해 6월 방한(訪韓)한 세지마 류조는 전두환, 노태우 장군을 만났다.
나는 세지마 류조 회장 일행에게 제3땅굴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세지마 회장은 땅굴 속으로 들어가더니 나침반을 꺼내는 것이었다. 그는 곡괭이가 팬 방향과 나침반 바늘의 방향을 대조해 보더니, “이건 북한이 판 게 맞다”고 말했다.
후일 국회의원이 된 후에 세지마를 만났더니, 그는 “전두환 대통령을 만났을 때, ‘올림픽을 유치하라’고 권했다”고 말했다. 내가 물었다.
“나고야가 올림픽 유치를 하려는데, 한국에 올림픽 유치를 권하다니, 그러면 일본에서 욕을 먹지 않습니까?”
“그러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1988년 올림픽은 한국이 하는 게 이익입니다. 일본은 1964년 도쿄올림픽, 1972년 삿포로 동계올림픽을 치른 바 있습니다. 올림픽을 치른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또다시 일본이 올림픽을 하겠다고 나서면 국제사회에서 욕을 먹습니다.”
세지마 회장과 방한했던 고토 회장은 일본 체육계의 거물이었는데, 서울이 올림픽 개최를 놓고 나고야와 경합을 벌이게 되자 난처한 입장에 처하기도 했다고 들었다. 그는 원래 나고야올림픽 유치위원이었는데도, 세지마 회장과 함께 서울올림픽 개최를 지지했다.
김해공항에서의 비밀 교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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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총리는 취임 후 첫 방문국으로 한국을 선택했다. |
“역대 일본 총리들은 총리가 되면 첫 방문국으로 미국을 택했습니다. 나는 총리가 되면 한국을 가장 먼저 방문하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이를 환영하겠습니까?”
“물론 환영할 것입니다.”
사실 나카소네는 자유민주당 내 소수(少數)계파의 수장(首長)으로 당시만 해도 총리가 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때문에 나카소네의 방한 의사를 외무부나 전두환 대통령에게 전하지 않았다. 그런데 1년 후인 1982년 11월, 나카소네는 정말 일본 총리가 됐다. 이어 그는 세지마 회장을 통해 방한 의사를 전해왔다. 나는 노신영(盧信永·안기부장, 국무총리 역임) 외무부 장관을 만나 그 뜻을 전했다. 우리 정부도 환영의사를 표했다.
당시 양국 간 최대 현안은 경제협력자금 제공 문제였다. 전두환 정권은 출범 직후 한국이 공산주의의 방파제(防波堤)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일본이 안보 무임(無賃)승차를 하고 있으니 경제적으로 기여해 달라는 논리를 내세워 일본에 100억 달러의 경제협력자금을 요청했었다. 이후 양국은 액수와 구성을 놓고 줄다리기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에서는 나, 일본에서는 세지마 회장이 역할을 했다.
1982년 12월 8일 나는 김해공항 귀빈실에서 세지마 회장을 만났다. 이때 나는 민정당 사무총장을 맡고 있어서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언론의 관심이 되고 있었다. 때문에 서울에서는 세지마 회장을 만날 수 없어서 시골에 볼 일이 있어 내려간다는 핑계로 김해공항으로 내려간 것이었다. 그때쯤에는 경협 규모는 40억 달러로 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여 있었다. 다만 공적개발원조(ODA)와 수출입은행의 상품차관 규모를 각각 어느 정도로 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우리는 ODA 규모를 늘리려 했고, 일본은 수출입은행 차관을 늘리려 했다. 논의 끝에 나는 세지마 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경협자금 요구는 우리의 일방적 요구였습니다. 일본이 이에 응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 푼도 안 해도 좋습니다. 다만 우리 시대의 정치인들이 정치인으로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은 역사가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후 양국 간 교섭이 좀 더 진행된 끝에 경협자금 문제가 타결됐다. 이듬해 1월 11일 나카소네 총리는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공식 방문, 전두환 대통령과 정상(頂上)회담을 가졌다. 세지마 회장은 나를 좋아했다. 한번은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당신에게 반했소. 나나 일본과 가까우면 뭔가 부탁이 있을 법도 한데, 당신은 한 번도 업체를 위한 부탁을 한 적이 없소. 당신은 애국심 이외에는 생각이 없는 사람인 것 같아서, 좋아하는 거요.”
과분한 칭찬이었다. 나도 세지마 회장과 고토 회장이 베풀어준 후의(厚意)를 지금까지 잊지 않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민정당 사무총장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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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安倍晉三) 현 일본 총리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安倍晉太郞) 일본 외무대신과 함께. 아베 신타로 외상은 한국을 이해하고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한 이였다. |
1982년 5월 이철희-장영자 사건이 터졌다. ‘정의사회구현’을 모토로 내걸었던 당시 정권에 준 충격은 컸다. 그 여파로 5월 20일 민정당 당직 개편이 있었다. 권정달(權正達·제11, 12, 15대 국회의원 역임) 사무총장이 물러나고, 내가 후임 사무총장이 됐다. 《조선일보》는 나를 “강직한 원칙주의자”라고 평가하면서 “어느 자리에서나 직언을 서슴지 않고 또 ‘상당한’ 보스 기질을 갖춘 것으로 알려진 그가 상처받은 당의 치유와 개혁주도 세력으로서의 민정당의 면모를 일신하는 이중의 과제를 어떤 솜씨로 풀어나갈지가 관심사”라고 평했다.
나를 사무총장으로 추천한 것은 이재형(李載瀅·국회의장 역임) 당시 민정당 대표였다고 한다. 그분과 개인적으로 특별히 가깝게 지낸 것은 아니었는데도 그분은 나를 눈여겨보았던 듯하다. 당 총재인 전두환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후임 사무총장으로 누가 좋겠느냐”고 하자 이 대표는 “권익현 의원이 좋겠다”고 추천했고, 전 대통령은 쾌락(快諾)했다고 한다.
김영삼의 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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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5월 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 중인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 |
“민주화운동을 하신다는 분이 정말 단식을 하다가 죽을 생각입니까?”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오!”
“벌써 19일이나 단식을 했습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죽습니다! 의사가 이제 처방을 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정말 죽을 생각입니까?”
“내가 죽기는 왜 죽어요?”
나는 “이제 할 만큼 하지 않았느냐? 이제 가만히 있어달라”고 설득했다.
내 설득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YS는 나흘 뒤에 단식을 그만두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YS가 책을 하나 출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책의 원고를 보니 ‘빨갱이 책’이었다. YS 측에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황낙주(黃珞周·제8~10, 12~15대 국회의원, 국회의장 역임) 전 의원의 집에서 만났다. 내가 물어보았다.
“이 책을 총재님이 썼습니까?”
“어느 대학생이 찾아와서 내 이름을 빌려 책을 쓰겠다고 해서 허락했소.”
“책 내용을 보셨습니까?”
“아니, 보지 않았소.”
“이 책이 나오면, 총재님은 ‘빨갱이’가 됩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YS는 그 책을 출간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그 책은 나오지 않았다. 이런 일들이 있어서인지, 나중에도 YS는 나를 좋게 대해주었다.
“부엌에서 일하다 보면 접시도 깨는 법”
1984년 6월 정래혁(丁來赫·국방부 장관, 국회의장, 제9~11대 국회의원 역임) 민정당 대표가 부정축재를 했다는 투서가 언론사 등에 들어갔다. 투서를 한 사람은 같은 전남 출신으로 군 시절부터 경쟁관계였던 문형태(文亨泰·합참의장, 체신부 장관, 제8~10대 국회의원 역임) 전 의원이었다. 문 전 의원은 내가 육사를 졸업한 후 소대장으로 근무할 때 사단장이었다. 결국 정 대표는 당 대표직에서 물러나고, 내가 대표가 되었다.
1985년 제12대 총선이 다가왔다. 민심은 출렁이고 있었다. 그런 민심을 우리도 모르지 않았다. 나는 ‘정상적으로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내 선거구에서는 YS의 오랜 측근인 김동영(金東英·제9, 10, 12, 13대 국회의원, 정무장관 역임)이 출마할 예정이었다. 나는 그를 정치규제에서 해제하는 데 찬성했다.
총선을 앞두고 노태우 장관의 출마가 관심사가 됐다. 서울 서대문이나 대구에서 출마하느냐, 아니면 전국구(비례대표)로 나오느냐를 놓고 여러 의견이 나왔다. 그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전두환 대통령이 ‘권 대표와 의논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도 선뜻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 결심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선택하라”고 했다. 그는 결국 전국구를 택했다.
제12대 총선 유세가 시작됐다. 정치규제에서 풀려난 YS의 오른팔 김동영 후보는 전두환 정권이 잘못한 점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나는 이렇게 응수했다.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은 일을 하다 보면 접시도 깨고, 시끄러운 소리도 내고 그러는 법입니다. 방안에서 일도 안 하고 누워만 있는 시누이는 접시를 깨지 않을 수 있겠지요. 그렇다고 정부가 그렇게 아무 일 안 하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내 말이 끝나자 청중이 박수를 쳤다. 한 선거구에서 두 명씩 선출하던 시절이라 우리 두 사람은 나란히 당선됐다. 김동영 의원은 유세장에서는 정권을 맹공했지만, 성품이 좋았다. 우리 부부와도 친하게 지냈다.
“대통령이 국민과 싸울 일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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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시절 어느 행사장에서 전두환 대통령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 전 대통령은 옳다고 생각하는 얘기는 받아들이는 성품이었다. |
이에 앞서 2월 18일 전두환 대통령은 국무총리에 노신영 안기부장을 임명하고, 장관급 13명을 교체하는 전면 개각(改閣)을 단행했다. 개각에 앞서 전두환 대통령을 만났다. 전 대통령은 제12대 총선 때 서울 강남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한 이태섭(李台燮·제10, 11, 13, 15대 국회의원, 정무제1장관, 과학기술처 장관 역임) 의원을 입각(入閣)시키겠다고 말했다. 나는 바로 반대했다.
“각하, 그건 안 됩니다!”
“왜 안 된다는 거요?”
“대통령이 국민과 싸울 일 있습니까? 이번에 이태섭 의원이 떨어진 것은 어찌됐건 그에게도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번 선거에서 떨어진 사람을 바로 장관을 시킨다면,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화풀이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이미 이 의원에게 입각시키겠다고 얘기를 했어요.”
“취소하셔야 합니다. 그게 이 의원을 위해서도 좋습니다. 1년쯤 지난 후 기회를 봐서 장관 시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전두환 대통령은 “알았다. 좋은 얘기를 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다음날 이태섭 의원이 나를 찾아왔다.
“대표님, 이번에 제가 입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도 들었어요. 대통령께 이 의원을 이번에 입각시키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어요.”
이 의원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대통령께 이 의원을 입각시키려면 1년쯤 지난 후에 하라고 말씀드렸어요. 이번에 이 의원이 입각하면 국민들이 반발합니다. 1년쯤 후에 들어가는 게 이 의원에게도 좋아요. 이번에 장관으로 들어가면, 이 의원은 다시는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 없을 겁니다.”
1년 반쯤 후에 전두환 대통령은 개각을 했다. 개각을 하기 전에 나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전화를 넣었다.
“각하, 이태섭 전 의원, 기억하시지요?”
전 대통령은 1년 반 전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어요.”
전두환 대통령은 이태섭 전 의원을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이 전 의원은 제13대 국회에서 재기, 두 차례 더 국회의원을 지냈다.
흔히들 전두환 대통령을 남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이 센 사람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 고칠 줄 아는 분이었다.
全斗煥, 일찌감치 盧泰愚 낙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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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8월 민정당 개헌안 토론 의원총회에서 노태우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는 권익현 당시 고문. |
“권 대표, 야당 중진인 아무개 의원이 다녀갔는데, 그가 나보고 단임으로 물러나면 안 된다고 말합디다. 허허.”
하지만 단임을 실천하겠다는 것은 전두환 대통령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1987년 3월 25일 전두환 대통령은 민정당 주요 당직자들을 청와대 상춘재로 초청해 만찬을 베풀었다. 당 고문인 나도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전 대통령은 “모든 권한을 줄 테니 노태우 대표가 알아서 하라”고 말했다. 노 대표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6월 2일 민정당 중앙집행위원과 당 소속 국회의장단을 상춘재로 초청한 자리에서 전 대통령은 노태우 대표를 당의 대통령 후보로 공식지명했다. 그동안 전두환 대통령의 후계자로 이런저런 사람들의 이름이 거명되었지만, 내 생각에 전 대통령은 일찌감치 노태우 대표를 후계자로 낙점해 놓고 있었다.
노태우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기 위한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린 6월 10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는 최루가스로 뒤덮였다. 박종철 군의 죽음을 규탄하고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나는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여도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김영삼씨와 김대중씨는 후보 단일화를 하지 못할 것이고, 결국 노태우 후보가 당선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듯하던 정국은 노태우 대표가 6・29선언을 발표하면서 일거에 반전(反轉)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직선제 개헌이었다.
8인 정치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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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8월 30일 여야는 개헌안에 합의했다. 민정당을 대표한 권익현(좌) 의원과 통일민주당을 대표한 이중재 의원이 개헌안 합의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뒷줄 왼쪽부터 민정당 윤길중·최영철·이한동, 통일민주당 이용희·박용만·김동영 의원. |
직선제 개헌이라는 큰 원칙은 정해졌지만, 여야의 의견은 엇갈렸다. 민정당은 대통령 6년 단임을, 야당인 통일민주당은 4년 중임을 주장했다. 민정당이 대통령 단임을 주장한 것은 중임은 곧 장기집권 욕망으로 이어지기 쉽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8인 회담은 활동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인 8월 31일 개헌안의 주요 쟁점에 합의했다. 여야 합의에 의한 개헌은 우리 헌정사상(憲政史上)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합의개헌을 위해 정치권은 국회의원 임기 1년을 희생하는 용단을 내렸다. 합의개헌은 내 정치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 가운데 하나이다. 이후 평화적 정권교체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우리나라는 명실상부한 민주국가가 됐다. 우리가 만든 헌법이 그 후 28년이나 갈 줄은 그때는 생각지도 못했다.
당시 내각책임제 개헌을 생각하는 국민은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도 내각책임제를 채택했던 제2공화국의 실패가 드리운 그림자가 너무 컸다. 당시 집권당이던 민주당은 신파(新派)와 구파(舊派)로 나뉘어 갈등하다가 결국은 갈라섰다. 제2공화국의 실패로 내각책임제는 우리나라에서 죽어버렸다. 요즘 다시 개헌, 특히 내각책임제 개헌을 주장하는 얘기들이 솔솔 나오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정당들은 제2공화국이 안고 있던 문제점을 극복했나? 새정치민주연합은 친노(親盧)와 반노(反盧), 새누리당은 친박(親朴)과 비박(非朴)으로 나뉘어 시끄럽다. 지금과 같은 정당 정치로 내각책임제를 할 수 있을지, 솔직히 의문이다.
落薦, 그리고 再起
1987년 대선에서 YS와 DJ는 분열했고, 그해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1988년 4월, 제13대 총선 공천을 앞두고 공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노태우 대통령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나 때문에 부담 갖지 마십시오. 나는 국회의원이 돼도 좋고, 안 돼도 좋습니다. 각하가 대통령을 하는 데 부담이 된다면, 나는 언제라도 그만두겠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당시 그의 측근으로 거론되던 사람 두 명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그 사람들하고 좀 잘 지내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나는 “그 사람들하고는 특별히 가까이할 일도, 멀리할 일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결국 나는 5공 물갈이 차원에서 제13대 공천에서 탈락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노태우 대통령은 나와 가까운 사이였지만, 측근들 때문에 나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후 나는 4년간 쉬다가 1992년 제15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전국구로 의정(議政)단상에 복귀했다. 1996년 제16대 총선에서는 경남 산청-함양 선거구에서 출마, 당선됐다. 8년 만에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 배지를 단 것이다.
그 사이에도 여러 가지 큰일들이 있었다. 1992년에는 YS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95년에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들이 부정부패와 군사반란죄, 내란죄 혐의로 법정에 섰다. 육사 동기생이기도 한 그들이 수의(囚衣)를 입고 법정에 선 모습을 보는 마음은 착잡했다. 1997년에는 DJ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내가 몸담은 한나라당은 야당이 되었다. 나는 한 사람의 국회의원으로서 역할에 충실하려 노력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처음 건의한 대전-진주 간 고속도로가 완공된 것과 내가 주도해서 만든 국회 내 불자(佛子)들의 모임인 정각회(正覺會)가 자리를 잡은 것은 특히 보람 있는 일이었다.
政界를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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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선 의원 시절의 정의화 의원. |
“골을 깐다는 게 무슨 소리요?”
“뇌수술을 말하는 겁니다.”
“뇌수술하면 생존율이 어떻습니까?”
“요즘은 기술이 좋아서 생존율이 높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최창락(崔昌洛) 가톨릭 의대 교수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뇌수술을 많이 한 의사였다. 나는 농담을 했다.
“당신은 길을 잘못 택했소. 정치는 나처럼 아무 기술 없는 사람이나 하는 거요.”
“저는 돈은 먹고살 만큼 벌어봤습니다. 이제 정치라는 걸 해보고 싶습니다.”
아마 보좌관에게 정 의원을 부르라고 한 것은 그때 나눈 대화가 생각나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마침 정 의원은 의원회관에 있다가 연락을 받고 내 사무실로 올라왔다. 정 의원은 여기저기 진찰을 하더니, 119에 전화를 걸어 구급차를 불렀다. 구급차는 여의도성모병원으로 달렸다. 최창락 박사는 노량진에 있다가 연락을 받고 달려왔다. 성모병원에는 들여온 지 두 달밖에 안 된 MRI(자기공명영상) 기기가 있었다. MRI를 찍어보니 이미 머릿속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나처럼 일찍 뇌출혈 증상을 파악하고 수술에 들어가는 것은 매우 운이 좋은 경우라고 한다.
뇌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기억상실증이 왔다. 오래전 기억은 생각나는데 비교적 근래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의사에게 물어보니 “기억력을 관장하는 뇌신경 일부가 다친 모양”이라고 했다. 제16대 총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정치를 그만두어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정치에서 물러났다. 수술을 받은 지 6개월쯤 지나고 나서 기억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80평생을 살면서 여러 고비를 넘겼다. 정치를 하면서 그래도 지역구민들이나 국민들로부터 크게 욕먹지 않은 것이 고마울 뿐이다.⊙
[취재 후기] 10월 초 어느 날 선배인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가 “권익현 전 민정당 대표가 병에서 회복되어 근래에는 골프도 치러 다니고, 여의도에도 모습을 나타낸다더라”고 했다. 참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 하지만 기자가 고등학생 시절에는 민정당의 실세(實勢) 사무총장으로, 당 대표로 신문지상을 장식하던 이름이었다. 최병묵 편집장에게 이 이야기를 보고하자, 편집장은 바로 임태희(任太熙·제16~18대 국회의원, 고용노동부장관, 대통령비서실장 역임) 전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편집장은 임 전 실장과 함께 군대 생활을 한 사이였다. 며칠 후 편집장은 “권익현 전 대표가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를 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연로해서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기는 어렵다고 한다”고 했다. 10월 19일 권익현 전 대표를 자택 근처인 서울 마포구 도화동 마포가든 호텔 뒤 커피 전문점에서 만났다. 부인 신덕임 여사도 함께 나왔다. 모두 다섯 차례 권 전 대표를 만났다. 권 전 대표는 말을 아낀다는 느낌이었다. 12・12사태 이후 정치적 고비에서 자기가 한 일들을 내세우지 않았다. 윤필용 장군이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남을 평하는 것도 조심스러워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훌륭한 분”이라면서 “세상에서 그분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게 많다”고 말했다. 신덕임 여사도 “사실 이순자 여사는 참 착하고 좋은 분인데, 오해를 많이 받고 있다”고 거들었다. 노태우 대통령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나와 친했는데, 측근들 때문에 나에 대해 잘못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측근이 혹시 박철언씨 같은 사람을 얘기하는 거냐?”고 묻자, “그 사람도 있고…”라는 정도로 말했다.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은 삼성 미놀타 카메라 개발 얘기를 할 때는 “내가 우리나라에서 카메라를 처음 만든 사람이란 걸 아시오?”라면서 흥이 나서 얘기했다. 세지마 류조 이토추상사 회장 얘기를 할 때는 기자가 조금 아는 척을 하자 “젊은 사람이 세지마 류조를 알다니, 공부 좀 했구먼”이라면서 즐거워했다. 세지마 회장, 고토 회장에 대해서는 “고마운 분들”이라는 얘기를 여러 번 했다. 권 전 대표가 한창 활동하던 시절 신문에서 그의 별명이 ‘대호(大虎)’라고 한 것을 본 기억이 있다. 아마 군(軍) 출신이라는 배경에다가 호상(虎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나이 들어 정계에서 물러난 입장에서 남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얘기하지 않는 것, 남에 대한 좋은 기억만을 얘기하려 하는 것, 그리고 “정치를 하면서 그래도 지역구민들이나 국민들로부터 크게 욕먹지 않은 것이 고마울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참 남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여전히 ‘대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