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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분석

한국사 교과서 무엇이 문제인가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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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건국’ 표현 없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 이승만·박정희 정권에 대해서는 독재·탄압·억압, 김일성 정권에 대해서는 ‘권력 강화’ ‘권력 독점’
⊙ ‘동백림사건 조작’은 있어도, 이승복 학살은 없어
⊙ 전태일은 대서특필… 기업가와 관련해서는 특혜와 비리만 강조
⊙ 햇볕정책 강조하면서, 천안함 폭침은 없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을 불러온 현행 고교 〈한국사〉 교과서들.
  교육부는 10월 12일 중학교 〈역사〉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2017년부터 국정(國定)교과서화하기로 결정했다. 야당과 시민단체에서는 “유신교육의 부활” 운운하면서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문재인(文在寅)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역사왜곡 교과서 반대’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1인시위를 벌였다.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4년 《월간조선》 4월호에서 기자가 처음 문제 삼은 이래 〈한국사〉 교과서의 이념적 편향성 문제에 대한 지적은 계속 있어 왔다. 지난 2013년에도 〈한국사〉 교과서의 문제점을 둘러싸고 거센 논란이 있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교과서는 당시 교육부의 시정지시를 받아 문제점을 상당 부분 수정했다는 교과서이다. 그럼에도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 현대사의 주요 쟁점들에 대해 현행 〈한국사〉 교과서들이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현행 〈한국사〉 교과서들이 ‘대한민국’의 국가 교과서로 적절한지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보천보는 살아 있다
 
두산동아 교과서는 보천보전투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과거 〈한국사〉 교과서 좌(左)편향 논란이 있을 때, 일제(日帝)시대 역사 중에서 가장 논란이 됐던 것 중 하나가 김일성의 보천보전투였다. 한 페이지에 걸쳐 보천보전투를 소개하던 것과 비교하면 분량은 다소 줄었지만, 대부분의 교과서들이 여전히 보천보전투와 조국광복회를 크게 다루고 있다.
 
  〈1937년 6월 동북항일연군 내의 한인 부대원들은 압록강을 건너 함경남도 보천보를 습격하였다. 이들은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 소방서 등 일제의 행정관청을 공격하였으며, 추격하던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여 피해를 입혔다. 보천보전투는 당시 국내 신문에도 크게 보도되었고, 이 작전을 성공시킨 김일성의 이름도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건에 놀란 일제는 조국광복회의 국내 조직 색출에 본격적으로 나섰으며, 만주 지역 유격대에 대한 공세도 크게 강화하였다.〉 (두산동아, 247쪽)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공산당은 일제에 대항하여 항일유격투쟁을 전개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만주지역의 사회주의자들과 민중들은 소규모의 항일유격대를 조직하였다. 항일유격대들은 중국공산당의 지원으로 조직되었지만, 그 구성원이나 지도자들의 대부분은 조선인이었다. 중국공산당은 항일유격대들을 결합하여 동북인민혁명군을 조직하였다(1935).
 
  동북인민혁명군은 민족과 이념을 초월한 동북항일연군으로 확대 개편되었다(1936). 동북항일연군은 3로 11군으로 편성되었는데, 이 중 제1로군 제2군 6사는 그 구성원이 대부분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불리웠다.
 
  한편, 동북항일연군 내 조선인들을 기반으로 반일민족통일전선 단체인 조국광복회가 조직되었다(1936). 조국광복회는 장백현과 함남 및 평북에 지부를 설치하였으며, 국내 조직원들과 함께 함경남도 갑산군 혜산진 보천보를 습격하여 일제의 통치기관을 마비시켰다(1937). 전투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일제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기에 일어난 이 사건은 국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금성출판사, 332쪽)
 
  금성출판사 교과서의 경우, 본문에서는 김일성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같은 페이지 하단 ‘탐구활동’에서는 ‘자료2/동북항일연군의 활동’이라는 제목 아래 1937년 6월 5일자 《동아일보》를 인용, “김일성파와 최현파 300여명은 국경 대안인 혜산진에서 동쪽으로 22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에 나타나”라고 함으로써 결국 김일성을 등장시키고 있다. 미래앤, 천재교육, 비상교육, 두산동아 교과서도 이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사진과 함께 보천보전투를 자세히 기술(記述) 하고 있다.
 
  교과서들은 해방 후 북한으로 들어간 연안파 공산주의자들, 즉 조선의용대의 활동과, 김구가 미(美) 전략정보국(OSS)과 합작해서 추진했던 ‘독수리작전(국내진공작전)’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미래앤 교과서는 미주에서 이승만과 경쟁관계에 있던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한인국방경위대(맹호군)도 언급하고 있다(299쪽). 반면에 이승만이 OSS와 함께 추진했던 냅코(Napko)작전을 소개하는 교과서는 하나도 없다.
 
독수리 작전과 냅코작전

 
  ‘독수리작전(국내진공작전)’은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휘하 광복군과 미 OSS가 추진한 비밀공작. 일본군에서 탈출한 학병 출신 광복군 가운데서 45명의 공작원을 선발, 훈련시킨 후 국내에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하고 유사시 대중봉기를 일으킬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장준하·김준엽 등 일본학병 출신들로 편성된 ‘국내정진대’를 만들어 훈련시켰으나, 8·15해방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냅코(Napko)작전’은 미 OSS 및 미군이 이승만의 측근인 장석윤(전 내무부 장관) 등과 추진한 비밀공작. 재미한인 및 미군의 포로가 된 조선인 병사들 가운데 공작원을 선발해 국내에 침투시켜, 격추 미군 조종사 구출, 파괴공작, 게릴라활동 등을 맡기려 했다. 유일한(유한양행 창업자) 등이 참여했으나, 요원들을 실전에 투입하기 전에 해방을 맞았다.
 
  미군=점령군, 소련군=해방군
 
금성출판사 교과서는 ‘미군정의 현상유지정책’이라는 제목 아래, 맥아더 포고문을 소개하고 있다.
  1980년대 대학가에는 신학기가 시작할 무렵이면 대자보가 붙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의 포고문과, 맥아더 사령관의 포고문이었다. “조선 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달렸다”는 내용의 치스차코프 포고문과, “태평양 방면 미국 육군부대 총사령관인 본관은 이에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반도와 한국민에 대하여 군사적인 관리를 실시하고자 한다”는 위압적 내용의 맥아더 포고문은 무척이나 대조적이었다. 이는 미군=점령군, 소련군=해방군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기 위한 것이었고, 신입생 의식화 교육의 첫걸음이었다. 이어 소련군은 인민위원회에 권한을 넘겨 조선인들의 자치기구를 존중한 반면, 미군을 일제 관료와 경찰을 온존시키면서 총독부 체제를 유지하려 했다는 식의 기술이 이어졌다.
 
  이런 내용은 2000년대 이후 〈한국사〉나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 그대로 이어져 논란이 되었다. 현행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과거보다는 분량이 줄었지만, 여전히 비슷한 서술들을 발견할 수 있다.
 
  〈38도선 이남에서는 9월초에 미군이 진주하여 조선총독의 항복을 받았다. 미국은 곧바로 군정청을 설치하고 38도선 이남 지역에 대한 직접 통치를 선포하였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부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광복 직후 각 지역에 자발적으로 수립된 인민위원회 등과 같은 자치 기구도 강제로 해산되거나 점차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또한 미 군정청은 통치의 편의를 위해 일제 강점기 관리들을 그대로 기용하고 조선총독부의 행정체제를 활용하는 현상유지 정책을 실시하였다.
 
  한편, 38도선 이북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여 각지에 인민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소련군은 행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긴 뒤, 간접통치의 방식으로 이북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소련군과 함께 귀국한 공산주의 세력을 후원하여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려 하였다.〉(금성출판사, 364쪽)
 
  〈이러한 가운데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구실로 미소 양군이 각각 38도선 남북에 진주하였다. 소련군은 인민위원회를 이용한 간접통치 방식을 취하였고, 미군은 군정을 선포하고 직접통치 방식을 취하였다. 미군정은 초기에 일본인 관리와 식민통치 기구를 그대로 이용하였다. 또한 인민공화국을 비롯하여 한국인이 만든 모든 행정기구와 그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천재교육, 304쪽)
 
  금성출판사 교과서는 같은 페이지 오른쪽에 “붉은 군대는 조선 인민이 자유롭게 창작적 노력에 착수할 만한 모든 조건을 지어 주었다” 운운하는 소련군 포고문을, 같은 페이지 하단에는 ‘미 군정청의 현상유지정책’이라는 제목 아래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권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하에서 시행된다”로 시작하는 ‘미국 태평양 방면 육군총사령부 맥아더 사령관 명의 포고 1호’를 실었다. 지학사 교과서는 ‘태평양방면 미국 육군 부대 총사령부의 포고 제1호’라는 제목으로 맥아더 포고문을 3분의1페이지에 걸쳐 실었다(344쪽). 두산동아 교과서도 ‘자료로 보는 역사’라는 코너에서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다’라는 제목 아래 맥아더 포고문과 치스차코프 포고문을 나란히 실었다(267쪽). 비상교육 교과서도 두 사람의 포고문을 나란히 실었다(366쪽).
 
  38선 획정과 관련해 미래앤 교과서는 ‘38도선, 일본군 패전 과정에서 갑작스럽게 제안되다’라는 제목 아래 미국이 38도선을 그은 경위를 반 페이지에 걸쳐 기술하고 있다(307쪽). 38선 획정에 참가한 미 육군 작전국 장교 러스크(후일 국무장관 역임)의 술회와 함께 〈한편 미국은 소련의 한국 단독 점령을 우려했는데, 이는 당시 미군이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어 한국에까지 오려면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은 서울 이북의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자고 소련에 제안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38선이 그어진 것은 전적으로 미국의 탓이라는 느낌을 주는 서술이다. 이 교과서는 〈38도선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미소연합군의 임시경계선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3년에 걸친 미소군정이 실시되고, 미소냉전이 격화되면서 민족의 분단선이 되고 말았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하지만 ‘미소연합군의 임시경계선’에 불과했던 38선이 체제분단선으로 둔갑한 것은, 소련군이 일방적으로 38선에서의 교통을 봉쇄하고 북한을 소비에트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교과서들은 스탈린이 1945년 9월 20일 소련군 지휘관들에게 사실상의 단독정권 수립을 지시했다는 사실이나, 해방 후 김일성 등 북한 내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철저히 소련 25군 정치위원 슈티코프 상장(上將)의 지시 아래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외면하고 있다. 교학사 교과서만이 ‘자료1/스탈린이 연해주 군관구 군사위원회와 25군 사령부에 하달한 명령(1945.9)’ ‘자료2/슈킨의 북조선 정세보고서(1945.12)’ 등 소련의 북한 적화(赤化)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를 소개하면서 “자료1과 자료2의 선포 내용과 감추어진 의도를 비교 분석해 보자”고 하고 있다(308쪽).
 
 
 
좌우합작운동이 美군정의 공작이었다는 사실 감춰

 
비상교육 교과서는 ‘정부수립에 대한 이승만과 김구의 입장 중 하나를 선택’하여 토론하도록 하고 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되자 한반도가 분단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확산되었다. 여운형,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중도세력은 좌우합작운동을 통해 분단을 피하고, 정파 간의 대립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좌익과 우익 모두 중도세력이 주도한 좌우합작운동을 외면하였다. 반면 이승만은 이른바 ‘정읍발언’을 통해 공개적으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금성출판사, 347쪽)
 
  좌우합작운동은 미군정이 이승만·김구 등 우익세력과 박헌영 등 좌익세력을 배제하고, 미소공동위원회 활동에 협조할 수 있는 세력을 육성하려던 미 국무부의 지시 아래 추진한 일종의 ‘정치공작’이었다. 이를 분단을 막기 위한 중도세력의 자발적인 노력인 것으로 기술한 것은 사실 왜곡이다.
 
  비상교육 교과서는 ‘생각을 키우는 자료’라는 코너에서 ‘정부 수립에 대한 두 가지 의견, 단독정부와 통일정부’라는 제목 아래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한 이승만의 정읍발언과 남북협상에 나서면서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고 한 김구의 발언을 나란히 소개하고 있다(350쪽). 이 교과서는 “정부수립에 대한 이승만과 김구의 입장 중 하나를 선택하여 주장의 근거를 말해 보자”고 하고 있지만, 이미 제목에서부터 이승만 주장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을 주입하고 있다.
 
  두산동아 교과서는 미국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한 사실을 설명하면서, 〈미국은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있는 국제연합을 통해 한국문제를 유리하게 해결하려고 하였다〉(269쪽)고 서술했다. 이후 유엔의 감시와 지원 아래 진행된 대한민국 건국 과정을 슬쩍 폄하하는 표현으로 보인다.
 
 
  4·3사태-좌익의 학살은 언급 없어
 
  〈남한 단독선거를 둘러싼 갈등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곳은 제주도였다. 1947년 삼일절 기념대회에서 경찰의 발포로 제주도민 여러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제주도민들이 크게 반발하였는데, 미군정청과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는 오히려 강압적으로 대응하여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마침내 1948년 4월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세력과 일부 주민들은 남한 단독선거 반대, 미군 철수 등을 요구하며 무장봉기하였다(제주 4·3사건). 무장대는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하고, 한라산을 근거지로 삼아 저항하였다. 제주도의 무장봉기는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군인과 경찰, 우익단체를 동원하여 대규모 진압작전을 벌였다. 사건은 1954년에 와서야 마무리될 수 있었는데, 진압 과정에서 2만5000명 이상의 주민들이 희생되는 큰 피해가 발생하였다.〉(금성출판사, 369쪽)
 
  〈1947년 3·1절 기념시위에서 경찰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자, 제주도민들은 이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관리들까지 가담한 총파업을 일으켰다. 미군정은 육지에서 경찰과 우익청년단체들을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주민이 가혹한 탄압을 받아 미군정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다.
 
  이러한 가운데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는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와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무장봉기가 일어났다(제주 4·3사건). 무장봉기 세력은 각지의 경찰서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를 습격하였고, 미군정은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에 나섰다.〉(미래앤, 309쪽)
 
  천재교육(309쪽)의 기술도 대동소이하다. 이 교과서들은 4·3사건이 본질적으로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하기 위해 소련의 지령 아래 남로당이 획책한 공산폭동이라는 측면을 외면하고 있다. 1947년 3·1절 시위 당시 경찰의 발포를 원인(遠因)으로 꼽으면서, 미군정, 이승만 정부, 군경, 우익단체에 의한 탄압에 책임을 돌리고 있다. ‘단독선거 반대’ ‘통일정부 수립’ 같은 구호들을 그대로 소개하면서 ‘봉기’ 운운하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폭동이 민족사적 정당성을 갖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금성출판사 교과서만이 남로당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고, 미래앤 교과서는 ‘좌익세력’이라는 표현도 하지 않고 있다. 모두 우익세력에 의한 피해만 언급할 뿐, 폭도들이 우익인사와 그 가족들을 학살한 데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여순반란이 ‘통일정부 수립’ 위한 봉기?

 
  〈한편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10월에는 여수, 순천 지역에서 군인들이 무장봉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여수 순천 10·19사건). 당시 여수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 소속 군인들 가운데 좌익세력은 제주도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통일정부 수립 등을 요구하며 무장봉기를 주도하였다. 이 사건은 조속히 진압되었으나, 일부 군인들은 지리산 등으로 근거지를 옮겨 6·25전쟁 때까지 저항을 계속하였다.〉(금성출판사, 369쪽)
 
  〈이승만 정부는 여수에 주둔한 군부대에 제주도로 출동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부대 내의 좌익세력은 ‘제주도 출동 반대’ ‘통일정부 수립’ 등의 구호를 내세우며 무장봉기하여 여수와 순천지역을 점령하였다.(중략) 제주 4·3사건과 여수·순천 10·19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국가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도 일어났다. 하지만 오랜 기간 그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다.〉(미래앤, 312쪽)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 군의 명령을 거부하고 상관과 장교들을 살해하고 여수·순천 일대를 점령한 14연대의 명백한 반란행위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봉기’ 내지 ‘저항’으로 미화하고 있다. 반면에 여순반란 당시 좌익세력에 의한 우익인사 학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천재교육 교과서에서는 여순사건에 대해 ‘반란’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309쪽). 하지만 같은 페이지 오른쪽에 작은 글씨로 ‘국민보도연맹’이라는 항목을 두어 〈좌익활동을 하던 사람들을 전향시켜 보호하고 자유민주주의로 인도한다는 명분으로 조직된 반공단체이다. 6·25전쟁 때 보도연맹원의 상당수가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일껏 여순사건을 ‘반란’이라고 기술하고서도, 보도연맹원 학살 이야기를 함께 배치함으로써 ‘반란’의 문제점은 희석시키고 있는 셈이다. 같은 페이지 하단에는 ‘생각 넓히기’라는 이름 아래 ‘제주 4·3사건,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은?’이라는 코너를 두고 있다.
 
 
  대한민국은 ‘정부수립’, 북한은 건국?
 
두산동아 교과서를 비롯해 대부분의 교과서는 대한민국 ‘건국’ 대신 ‘정부수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북한 정권 수립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대등하게 다루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제헌국회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대통령제를 근간으로 한 헌법을 공포하였다(1948.7.17.). 헌법 전문에는 대한민국이 3·1운동으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으며, 국민주권에 바탕을 둔 민주공화국임이 명시되었다.
 
  대통령 선거는 국회에서 간선제 방식으로 치러져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이 당선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곧바로 내각을 조직하고,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그해 12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유엔총회가 열렸다. 총회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보고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 감시하의 선거로 한반도에 성립한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금성출판사, 370쪽)
 
  〈북한 정부의 수립
 
  광복 직후 북한 지역에서도 정치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조만식은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신국가 건설운동에 참여하였으며, 해외에서는 여러 정파의 사회주의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사회주의 세력은 좌우합작의 성격을 띤 인민위원회를 각지에 설립하여 자치적으로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였다.
 
  소련은 인민위원회에 실질적인 권한을 넘겨주고 배후에서 북한을 관리하였다. 그러나 북한지역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중략)
 
  1946년 2월에 수립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친일파 처단, 토지개혁, 중요산업 국유화 조치 등 각종 개혁작업을 추진하였다. (중략)
 
  유엔이 남한 단독선거를 결정하자 북한은 이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통일정부 수립을 내세웠으나, 내부적으로는 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1948년 2월에는 군대를 창설하였으며, 8월에는 총선거를 통해 구성된 최고인민회의에서 헌법을 확정하였다. 그 사이에 남북협상에도 참여하면서 분단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는 명분을 쌓았다.
 
  1948년 8월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북한은 9월 초에 김일성을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1948.9.9.). 이로써 광복 이후 3년 동안에 걸친 신국가 건설운동은 결국 남한과 북한에 체제와 이념이 다른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금성출판사, 371쪽)
 
  〈유일한 합법정부인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다
 
  (전략)국회의 간접선거를 통해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내각을 조직한 이승만은 8월 15일 미군정 종식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후략)〉(미래앤, 313쪽)
 
  〈북한에도 정부가 수립되다
 
  해방 직후 평양에서 민족주의자 조만식을 중심으로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북한 각 지역에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소군정은 이들 인민위원회에 행정권을 이양하여 자치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되면서부터 북한정권 수립 작업이 진행되었다(1946.2). 임시인민위원회는 친일민족반역자 및 지주의 5정보 초과 토지를 무상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분배하는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북한에서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하는 총선거를 실시하였다(1948.8.25.). 최고인민회의는 헌법을 제정하고 김일성을 초대 수상으로 선출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1949.9.9.). 이로써 남과 북에 이념과 체제가 다른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미래앤, 315쪽)
 
  금성출판사 교과서와 미래앤 교과서 모두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남과 북 모두 ‘정부 수립’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등가적(等價的)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으로 기술했다. 대한민국은 ‘정부 수립’이지만, 북한은 ‘국가 수립’이라는 관점에서 서술했다는 의혹을 피하기 어렵다. 지학사 교과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다’라는 중간 제목 아래 짧게 남북한 정부의 수립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북한은 임시인민위원회를 기반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하였다〉(349쪽)고 했다. 천재교육 교과서도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308쪽), ‘북한정부의 수립’(311쪽)이라는 제목을 달고, 등가적으로 다루고 있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두산동아 교과서도 고약하다.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다’라는 큰 제목을 달았지만, 중간 제목과 본문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였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반면에 북한 정권 수립과 관련해서는, ‘북한, 정부를 수립하다’라는 중간 제목을 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고 기술하였다(273쪽).
 
  교과서들 중에서 교학사 교과서만이 〈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은 정부를 구성하여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대한민국 정부는 미군정으로부터 통치권을 인수하고 유엔으로부터 인정받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건국의 출발을 하게 되었다〉고 기술(307쪽), ‘건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또 금성출판사, 미래앤 교과서들은 조만식 등 우익인사들이 해방 후 4개월여 만에 숙청, 처형된 사실은 외면하고, 북한의 인민위원회들이 좌우합작 정권이었던 것으로 호도하고 있다.
 
 
  친일파 청산에 대한 이승만 고민은 무시
 
  반민특위와 친일파 청산 문제에 대해서는 대부분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두산동아 교과서는 〈이승만은 귀국 후 친일세력들에게 많은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친일파 청산에 소극적이었다. 친일 경력자들은 청산을 주장하는 의원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다〉고 서술하고 있다(274쪽). 비상교육 교과서는 〈반민족행위자 처벌보다 반공을 더 중요하게 여긴 이승만 정부는 반민특위 활동에 비협조적이었다. 반면 특위 소속 국회의원들 중 일부가 공산당과 접촉했다는 구실로 구속되었고(국회프락치 사건),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한 혐의로 고위급 경찰이 체포되자 일부 경찰관들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는 사건마저 발생했다〉고 적고 있다(352쪽). 천재교육 교과서도 〈반공 우선의 정책을 추구하고 있던 이승만 정부는 반민특위의 활동에 부정적이었다〉고 서술했다(310쪽). 미래앤 교과서는 〈반민특위가 일본 경찰 출신 노덕술을 검거하자, 대통령 이승만은 좌익반란분자 색출 경험이 풍부한 경찰관을 마구 잡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이어 공산당과 내통했다는 구실로 반민특위 소속 국회의원들을 구속하였다〉고 기술했다(314쪽). 금성출판사 교과서도 〈이승만 정부는 친일파 청산보다는 반공이 우선이라는 주장을 펴며 반민특위 활동을 공개적으로 반대하였다〉고 기술하고, 그 아래 박스로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에 대해 소개해 놓았다(372쪽).
 
  36년간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국가를 운영할 만한 인재풀이 거의 없었고,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에 맞서 국가를 보위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친일 경력자를 활용해야 했던 초대 (初代)대통령의 고민에 이해를 표시한 교과서는 보이지 않는다. 교학사 교과서만이 〈1949년 6월 경찰은 반민특위의 사무실을 습격하여 특별경찰을 무장해제시키기도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세력의 소탕에 경찰이 필요하다는 점을 감안하여 경찰의 행동을 묵인하였다〉고 기술, 그나마 이승만의 고민을 조금 이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307쪽).
 
 
  ‘청소년의 꿈을 앗아간 6·25’ 라고?
 
금성출판사 교과서는 6·25 당시 학도병을 소개하고 있지만, 애국심이 아니라 厭戰 사상을 유도하고 있다.
  6·25와 관련해 모든 교과서들이 6·25가 북한의 남침임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의 남침에 대한 기술에 앞서서 〈38도선 일대에서는 남북한 사이에 수백 회에 달하는 크고 작은 교전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남북한 사이의 군사적 충돌은 1949년말부터 차츰 진정되는 양상을 보였다〉(금성출판사, 377쪽), 〈38도선 일대에서도 크고 작은 무력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다〉(천재교육, 312쪽), 〈38도선 일대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크고 작은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다〉(두산동아, 278쪽), 〈남한과 북한의 대립은 38도선 부근에서의 잦은 무력충돌로 나타났다〉(비상교육, 354쪽) 등의 기술을 하고 있다. 6·25전쟁은 ‘내전(內戰)’이라는 브루스 커밍스류의 역사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특히 두산동아 교과서는 ‘자료로 보는 역사’ 코너에서 ‘38도선을 경계로 잦은 충돌이 일어나다’라는 제목 아래 남북한 충돌을 보여주는 지도까지 싣고 이렇게 기술했다(278쪽).
 
  〈38도선이 그어지고 6·25전쟁이 일어나기 이전 남북한 간에 많은 충돌이 있었다. 교전에 투입된 군인은 국군에 비해 북한군의 숫자가 월등히 많았다. 1949년 1월부터 10월까지 38도선을 경계로 벌어진 교전만 500회를 넘었다. 옹진 지역에서만 이미 전사자가 6000여명을 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북한은 서로 통일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남침에 대한 김일성의 책임을 희석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전쟁 중에 벌어진 민간인 희생에 대한 기술을 보면, 두산동아 교과서는 〈전쟁 중에 양측 군대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일어났다. 북한군은 지주와 자본가, 군인 및 경찰 가족들을 처형하고, 퇴각하면서 수많은 지식인, 정치인들을 끌고 갔다. 국군과 경찰은 좌익 출신의 보도연맹 소속원, 교도소 수감자 등을 처형하였다. 충북 영동의 노근리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많은 피난민들이 미군의 총격 또는 폭격에 죽거나 다쳤다〉고 기술하고 있다(282쪽).
 
  미래앤 교과서는 ‘아! 그렇구나’라는 박스에서 ‘2012년, 전쟁 중 발생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정부가 배상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라는 제목 아래 국군에 의한 거창양민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좌익세력에 의해 2만2000여명이 학살당한 영광대학살을 비롯해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양민학살을 구체적으로 기술한 교과서는 드물다. 다만 교학사 교과서만이 대전교도소에서의 보도연맹원 학살과 함께, 1950년 6월 28일 서울대병원에서 북한군이 자행한 국군·민간인 환자 학살, 인민재판으로 인한 처형, 그리고 북한군 점령지역에서의 현물세 징수 같은 악정(惡政)을 기술하고 있다(314쪽).
 
  두산동아와 금성출판사 교과서는 6·25 당시 포항전투에 참가했다가 전사한 학도병 이우근이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를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청소년들의 꿈마저 앗아간 6·25전쟁’(금성출판사, 378쪽) 같은 제목을 붙여서, 애국심을 고취하기보다는 염전(厭戰)사상을 고취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전쟁 후 남북한의 체제 강화에 대한 서술도 불균형한 점이 보인다.
 
  〈남한과 북한의 집권세력은 전쟁을 거치면서 권력기반을 더욱 확대해 나갔다. 이승만 정부는 반공주의를 내세워 정치적 반대세력을 억압하거나 정권의 부패와 무능함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탄압하였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권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김일성은 전쟁 책임을 물어 박헌영 등을 간첩 혐의로 체포하였는데, 이러한 조치들은 김일성 유일사상 체제가 자리 잡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금성출판사, 380쪽)
 
  ‘6·25전쟁이 국내외 정세에 미친 영향’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승만 정권에 대해서는 ‘억압’ ‘탄압’, 김일성 정권에 대해서는 ‘권력이 더욱 강화되었다’는 표현을 사용, 이승만 정권의 ‘독재적’ 성격을 강조한 반면, 김일성 정권의 독재성은 희석시켰다.
 
 
  이승만은 ‘독재’, 김일성은 ‘권력 독점’
 
  천재교육 교과서는 이승만·박정희 정권에 대해서는 ‘독재’라는 표현을 주저없이 사용하면서도, 김일성·김정일 정권에 대해서는 ‘독재’라는 표현을 한사코 회피하고 있다.
 
  〈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개정하고, 정부에 비판적인 경향신문을 폐간하는 등 언론을 탄압하며 독재정치를 강화하였다.〉(315쪽)
 
  〈4·19혁명은 부패한 독재정권을 학생과 시민의 힘으로 무너뜨린 민주혁명으로…〉(322쪽)
 
  반면에 북한 김일성 정권과 관련해서는 ‘김일성의 권력 독점’(318쪽), ‘김일성 1인 체제의 형성’(318쪽), ‘수령 유일체제의 성립’(329쪽) 등의 표현으로 피해 가다가, ‘유신체제의 성립’을 언급하는 말미에 북한의 사회주의헌법 공포에 대해 기술하면서 ‘조선노동당의 독재’ ‘1인 독재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는 표현을 사용했다(331쪽).
 
  금성출판사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남한의 역대 정권과 관련하여 독재, 탄압, 억압, 강압, 진압, 처형 등의 표현을 되풀이 사용하고 있다. 반면에 북한과 관련해서는 ‘김일성의 권력이 더욱 강화’(380쪽), ‘유일지배체제 확립’(407쪽), ‘김일성 개인숭배’(407쪽), ‘김정일은 후계자가 되면서 주체사상의 해석권을 독점’(408쪽), ‘3대에 걸친 권력세습’(408쪽) 등의 표현은 사용하면서도, 독재는 물론, 탄압, 억압 등의 표현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미래앤 교과서는 ‘이승만, 장기독재 체제를 추구하다’(320쪽), ‘4·19혁명, 장기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다’(325쪽)와 같은 중간 제목, 〈박정희 정부는 경제성장과 반공을 내세워 장기집권을 추구하였다. 특히 북한의 도발에 대처하기 위해 반공을 내세우면서 독재체제를 강화하였다〉(327쪽), 〈유신체제는 박정희의 종신집권을 위해 민주주의를 기만한 독재체제였다〉(328쪽)는 식으로 역대 정권을 ‘독재정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대신 북한에 대해서도 〈김일성은 비판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1인 독재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321쪽), 〈김일성은 6·25전쟁 이후 독재권력을 구축하였다〉(350쪽)는 식으로 ‘독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두산동아 교과서도 도표의 제목에서 ‘이승만 정부의 독재’(293쪽)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교과서는 북한 김일성 체제에 대해서도 제목에서는 ‘김일성, 독재체제를 구축해 가다’라는 표현을 썼지만, 본문에서는 〈김일성 중심의 유일사상 체계를 확립〉 〈사회주의헌법으로 수령 중심의 강력한 통치체제를 확립하였다〉(315쪽) 등의 표현을 사용했다.
 
  이들 교과서는 남한 역대 정권하에서 반정부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 시위 진압, 반공체제의 강화 등에 대해서는 생생하게 상술(詳述)하고 있다. 《동아일보》 광고 탄압(두산동아, 298쪽). 이한열의 죽음(두산동아, 301쪽), 3·1 민주구국선언(천재교육, 332쪽), 긴급조치 1호(비상교육, 367쪽), 4·19 당시 서울대 문리대학 학생선언문(지학사, 361쪽), 미니스커트 단속(천재교육, 343쪽),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궐기문(금성출판사, 391쪽) 등 자료도 풍부하게 제시하고 있다. 반면에 북한에서 김일성 독재체제의 형성과 강화에 대해서는 그 심각성을 인식하기 어려운 수박 겉핥기식 표현으로 일관하고 있다.
 
 
  북한체제 논리를 그대로 소개
 
북한의 천리마운동을 다룬 지학사 교과서. 북한의 체제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소개하는 교과서들이 많다.
  북한체제의 논리를 거르지 않고, 소개하는 교과서들도 많다. 두산동아 교과서는 김일성의 독재권력을 강화한 1972년 사회주의헌법에 대해 〈사회주의 건설의 성과를 법적으로 고착시키려는 목적으로 사회주의헌법을 제정한 것이다. 새 헌법은 김일성의 절대권력을 헌법적으로 보장하는 국가주석제를 신설했다. 이는 이미 수령으로서 절대권력을 확보한 김일성의 지위와 역할을 헌법에 명문화한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314쪽). 같은 교과서는 유신체제에 대해서는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만들어 반대세력을 억압하는 데 이용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유신체제를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합리화하였으나, 권력을 대통령에게 집중시킨 사실상 영구집권 체제였다〉(296쪽) 등으로 맹비난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싱거운 기술이다.
 
  천재교육은 ‘자주노선을 전면에 내세운 북한’이라는 제목으로 《로동신문》사설을 인용하고 있다(329쪽). 금성출판사는 ‘주체사상의 성립과 그 역할’이라는 글에서 주체사상에 대해, 〈북한 학계의 주장에 따르면, 주체사상은 ‘사람 중심의 세계관이고 인민 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사상’으로 ‘인간 중심의 새로운 철학사상’이라고 한다. 주체사상은 사상에서의 주체,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자위, 외교에서의 자주를 제창하면서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407쪽). ‘북한 학계의 주장에 따르면’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했으나, 주체사상에 대해 우리 학생들이 그렇게 미주알고주알 북한 주장 그대로를 알아야 하는지 의문이다.
 
 
  ‘반공’ 비판하면서, 북한 도발은 외면
 
  금성출판사 교과서는 〈이승만 정부는 반공이 우선이라는 주장을 펴며 반민특위 활동을 공개적으로 반대하였다〉(372쪽), 〈이승만 정부는 남북이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상황 속에서 반공주의를 정치 전면에 내세웠다. 반공주의는 6·25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으며, 이승만 정부의 실정에 대한 정당한 비판과 민주적 권리에 대한 요구를 탄압하는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385쪽)면서 역대 정권의 ‘반공주의’를 비판한다.
 
  그러나 당시 정부가 반공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 즉 북한의 대남도발에 대해서는 하나도 서술하지 않고 있다. 1·21사태,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승복 학살, 8·15 저격사건(육영수 여사 암살), 8·18 도끼만행사건, KAL 858기 폭파사건 등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국내정치에 대한 서술 한참 뒤에 남북한 관계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이러한 대립구도는 1960년대 후반 북한 무장간첩의 청와대 습격사건, 울진·삼척지구의 대규모 무장간첩 침투사건 등으로 더욱 격화되었다〉(413쪽)고 슬쩍 언급하고 넘어간다. 여기서도 이승복을 비롯한 양민학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2000년대 이후 남북관계를 서술하면서도 〈6·25전쟁 이후 설정된 북방한계선(NLL)을 부인하고, 여러 차례 군사적 도발을 함으로써 남북 간의 갈등을 야기하였다〉(411쪽), 〈서해안에서 양측 간 군사적 충돌이 연이어 발생하면서〉(415쪽)라고만 기술했을 뿐, 두 차례의 연평해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등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지는 않았다. 연평해전에 대해서는 당시 사진과 함께 “1999년 6월 북한 경비정이 북방한계선을 넘어와 우리 해군과 교전을 벌였다”는 사진설명을 달았을 뿐, 6명의 해군장병이 전사한 2002년 6월의 제2차 연평해전은 다루지 않았다. NLL과 관련해서는 작은 글씨로 〈북방한계선-1953년 휴전협정 체결 직후 유엔군사령부가 서해 5도인 백령도, 연평도, 대청도, 소청도, 우도를 따라 그은 해상경계선이다. 북한은 이를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선포하였다고 주장하며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NLL이 휴전 이후 사실상의 해상경계선으로 기능해 왔으며 남북기본합의서 등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 등은 외면한 채 사실상 북한 측 주장만을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금강산 관광의 중단에 대해 언급하면서도(415쪽), 그 이유가 된 북한군의 관광객 박왕자씨 사살사건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반면에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에 대해서는 6·15 공동선언의 전문을 소개하고 ‘더 알아보기/남북교류협력사업의 물꼬를 튼 「햇볕정책」’이라는 코너까지 마련하는 등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415쪽)
 
  북한인권문제와 관련해서는 〈북한은 인권문제로도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북한의 인권침해 사례는 공개처형, 정치범 수용소, 언론의 자유와 정치참여에 대한 억압, 거주와 여행의 자유에 대한 제한, 성분 분류에 따른 인민들의 차별 대우 등이다〉라면서도 〈이에 대하여 북한은 ‘우리 식 인권’을 내세우며 개인의 자유보다도 전체 조직을 위한 공민의 의무를 강조하고, 물질적 보장이 인민의 가치로서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면서 인권 유린에 대한 북한 당국의 변명을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411쪽).
 
 
  이승복 언급 없어
 
  미래앤 교과서는 박정희 정권에 대해 기술하는 가운데 오른쪽에 작은 글씨로 ‘북한의 도발’이라는 항목을 마련,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68년 1월 북한 특수부대가 청와대 부근까지 침입하였고, 미국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동해에서 북한에 나포되었다. 연말에는 무장공비 120여명이 울진·삼척 지역에 출몰하였다.〉(미래앤, 327쪽) 하지만 미래앤 교과서도 1·21사태나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 군경이나 민간인의 희생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미래앤 교과서는 같은 페이지 하단에 ‘사건 속으로’라는 코너를 마련, ‘동백림 간첩단 사건 조작’이라는 제목 아래 동백림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1967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3선 개헌을 위한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부정선거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중앙정보부는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사건을 조작하여 발표하였다. 유럽에서 평화통일 운동을 하던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노 등을 간첩으로 체포하여 국내로 압송한 것이다. 그러나 시인 천상병을 장애인으로 만들 정도로 고문수사를 벌였지만, 이들의 간첩혐의는 구체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이 사건이 정치적 의도로 확대·과장되었음을 밝히고, 불법연행과 가혹행위에 대해 정부가 사과할 것을 권고하였다.〉(미래앤, 327쪽)
 
  동백림사건을 당시 중앙정보부가 서독·프랑스 등에서 활동하던 인사들을 해당 국가의 주권을 침해해 가면서 체포해 왔다는 점, 조사과정에서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점 때문에 국제적 비난을 받았고, 결국 사건 자체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 체포되어 온 인사들은 북한과 연계가 있었고, 이후에도 일관되게 친북(親北)활동을 벌인 사람들이었다. 과거사위원회도 ‘정치적 의도로 확대·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했지, 사건 자체가 ‘조작’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미래앤 교과서의 서술은, 이승복 등 양민들을 처참하게 학살한 공비들의 침투는 ‘침입’이니 ‘출몰’이니 하는 말로 얼버무리면서, 동백림사건은 부정선거를 덮기 위한 조작사건이라고 상세하게 기술함으로써, 당시의 반공정책이 정권의 독재를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는 인상을 심고 있다.
 
  미래앤 교과서는 정주영 소떼 방북, 6·15 공동선언 등은 언급하면서도, 제1·2차 연평해전, 천안함 폭침 등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 교과서는 2010년의 연평도 포격에 대해서는 언급했지만, 〈이명박 정부는 한미공조 체제를 강화하고 대북강경정책을 폈다. 서해상에서 한미합동해상군사훈련을 전개하는 도중, 북한이 연평도에 포격을 가하면서(2010) 남북관계는 더욱 경색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353쪽). 마치 연평도 포격사건의 원인이 이명박 정부의 대북강경정책과 한미합동해상군사훈련에 있다는 투다.
 
  천재교육 교과서는 〈북한은 적화통일을 목표로 무장공비를 남파하여 청와대를 습격하는 등 대남공세를 강화함으로써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켰다〉(329쪽)고 한 것을 제외하면, 북한의 대남도발에 대해 서술하지 않았다. 제1·2차 연평해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등 2000년대 이후의 대남도발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반면에 천재교육 교과서는 ‘베트남전쟁 파병’을 다루면서 〈이밖에도 베트남 민간인 학살, 라이따이한 등 여전히 많은 문제점들이 남아 있다〉(327쪽)면서 근거가 분명치 않은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두산동아 교과서도 베트남 파병을 언급하면서 〈베트남에 민간인 학살 등 많은 상처를 남기기도 하였다〉(295쪽)고 기술했다.
 
  천안함 폭침사건에 대해 지학사 교과서는 ‘천안함 침몰사건’(392쪽), 두산동아 교과서는 천안함사건(320쪽)이라고 표현했다.
 
  교학사 교과서만이 육영수 여사 암살사건, 8·18 도끼만행사건(325쪽)을 소개하고, 북한의 미사일 개발, 제1·2차 연평해전,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 등에 대해 조금 자세하게 설명하거나 언급하고 있다(344쪽).
 
 
  전태일은 있고, 이병철·정주영은 안 보여…
 
천재교육 교과서에 실린 전태일에 관한 내용. 대부분의 교과서에서 전태일은 이순신 장군보다 더 크게 다루고 있다.
  금성출판사 한국사 교과서는 박정희 정부 이후의 경제발전 성과를 소개하면서도 정경유착, 대외의존도 심화, 광주대단지 난동사건 등 도시빈민 문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전개 등 부정적인 측면들을 언급함으로써 전체적으로는 부정적인 인상을 강화하고 있다. ‘탐구활동/전태일이 대통령과 근로감독관에게 보내려고 하였던 편지’라는 제목 아래 전태일의 편지 내용 일부를 인용하면서, 전태일의 동상 사진도 실었다(402쪽). 반면에 이병철·정주영·구인회 등 기업인들의 이름이나, 파독 광부, 중동 근로자 등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미래앤 교과서는 ‘한강의 기적, 그 원동력을 찾아서(1)-성실하고 근면한 국민의 노동력’라는 제목의 코너를 마련, 파독 광부, 베트남 근로자의 사진을 실었지만, 〈서독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 베트남에 파견된 병사와 근로자들의 외화 수입도 경제성장에 큰 몫을 차지하였다〉는 짤막한 서술과 사진설명만을 달았다(339쪽). 다음 페이지에서는 ‘한강의 기적, 그 원동력을 찾아서(2)-기업인의 노력’이라는 코너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유공 기업인들에게 훈장을 달아 주는 사진을 실었다(340쪽). 하지만 내용은 이병철·정주영 같은 기업인들의 기업가정신을 기리는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정부가 기업에 준 특혜와 이를 악용한 악덕기업인들의 행태를 서술하는 데 더 열심이다.
 
  〈물건 하나라도 더 수출하기 위한 기업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은 불가능했다. 기업인들은 우리 기업에 대한 국제적인 인지도가 낮은 여건 속에서 새로운 해외시장을 개척해 나갔다. 이에 정부는 수출기업을 표창하여 격려하고, 수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각종 금융 및 세금 혜택을 제공하였다. 1960년대 은행에서 100만원을 빌리면 일반인은 1년에 이자로 25~30만원을 내야 했지만, 대기업은 5~6만원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특혜 속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기업이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표적인 기업인들은 각종 혜택을 악용하여 횡령과 비자금 조성을 일삼고, 세금을 포탈하거나 수출대금을 해외로 빼돌렸다. 구속되어 실형을 선고받은 이들 기업인 대부분은 경제발전에 기여했다는 명분으로 특별사면되었다.〉
 
  기업인에 대한 이런 부정적 기술과는 달리 미래앤 교과서도 ‘전태일은 왜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냈을까’라는 제목 아래, 전태일의 편지와 동상 사진을 실었다(346쪽). 〈반공의 분위기 속에서 노동자들의 생존권 요구는 자칫하면 공산주의와 관련 있는 것으로 여기기 일쑤였고〉 운운하는 설명도 덧붙여서…. 두산동아 교과서도 본문(310쪽)에서 전태일의 동상 사진과 함께 그의 분신 사실을 기술하고, ‘생각하는 탐구활동’이라는 코너에서 전태일의 편지를 다시 소개하고 있다(313쪽). 지학사 교과서도 전태일의 동상 사진과 편지를 싣고 있다(379쪽).
 
  미래앤 교과서에 정주영의 이름이 나오기는 한다. 경제건설자로서가 아니라, 소떼를 몰고 북한을 방문한 사람으로서 말이다(353쪽).
 
  천재교육 교과서도 ‘전태일,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를 한 노동자’라는 제목으로 전태일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려 했던 편지와 동상 사진을 실었다(341쪽). 다음 페이지에서는 같은 비중으로 1980년대 이후의 농민운동도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파독 광부, 중동건설 노동자나 기업인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전태일보다 적게 언급된 이순신
 
  대부분의 교과서에서 3분의 1 페이지 이상을 할애해 전태일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대개 이순신 장군보다도 크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순신은 본문 중에서 이름이 한두 번 언급되는 데 그치고 있다.
 
  금성출판사 교과서는 〈그러나 전라도 지역에서는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남해안 여러 곳에서 연승을 거두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지키고, 왜군의 침략을 차단할 수 있었다〉(169쪽)고 한 것이 전부다. 두산동아 교과서는 〈전쟁은 이순신이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바뀌기 시작하였다. 한산도 대첩으로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왜군의 수륙병진 작전을 좌절시켰다. (중략) 이순신은 명량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123쪽)고 기술했다. 이순신에 대해 조금 더 신경을 쓴 것은,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이 올린 〈신에게는 아직 전선 열두 척이 있으니…〉 라는 내용의 장계를 소개한 지학사 교과서(155쪽)와 미래앤 교과서(116쪽) 정도다.
 
 
  새마을운동에 대해서도 딴지걸기
 
미래앤 교과서는 ‘신자유주의와 한국경제’라는 제목 아래 IMF와 세계은행, 다국적 기업 등을 악마로 묘사한 만평을 실었다.
  시장경제 체제에 대한 부정적인 기술도 눈에 뜨인다. 미래앤 교과서는 ‘신자유주의와 한국경제’라는 제목의 장(章)에서 IMF와 세계은행, 몬산토, 시티뱅크, 카길 등 다국적기업들을 악마로 그린 만평을 실었다(342쪽). 이 교과서는 343쪽에서는 ‘가난한 집 맏아들’이라는 제목 아래 ‘대기업이 국민의 협조와 희생을 바탕으로 성장하였음에도 업종을 다양화하면서 골목상권을 위협하는 상황을 풍자’한 만화도 실었다.
 
  대다수 국민들이 긍정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새마을운동에 대한 딴지걸기도 눈에 뜨인다.
 
  〈박정희 정부는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도시와 농촌 간의 소득격차가 더욱 커지자 1970년부터 농가의 소득증대와 농촌의 환경개선에 역점을 두고 새마을운동을 추진하였다. (중략) 이후 새마을운동은 도시와 직장으로 확대되고, 전 국민적인 의식개혁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중략) 그러나 한편으로는 농민의 실질적인 소득수준을 높이기보다는 농촌의 생활환경을 바꾸는 데 치중하였으며, 정권의 지지기반으로 이용되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천재교육, 342쪽)
 
  〈새마을운동은 농촌환경 개선을 시작으로 농촌소득증대 사업으로 발전했고, 점차 도시와 직장으로 확대되면서 ‘근면·자조·협동’을 강조하는 국민정신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유신체제 유지에 이용되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였다.〉(미래앤, 346쪽)
 
여명 한국대학생포럼 회장은 지난 10월 13일 서울 광화문 앞에서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전환하는 것을 찬성하는 1인시위를 벌였다.
  〈한국사〉 교과서들은 이승만 정권 시절 미국의 원조에 대해서도 농촌을 황폐화시킨 주범인 양,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정부는 미국의 원조농산물을 민간기업에 불하하여 확보한 대충자금으로 재정의 38%를 충당하였다. 그 중 절반 정도는 국방력 강화를 위한 무기도입과 주한미군을 유지하기 위한 경비로 지출되었다.
 
  미국의 원조농산물은 국내의 부족한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만 필요 이상으로 들여온 미국의 농산물은 우리의 농촌경제에 위협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보리와 밀, 면화 등이 가격경쟁에 밀려 우리 농촌에서 사라져 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은 미국이 무기와 농산물을 수출하는 주요 시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미래앤, 321쪽)
 
  〈이승만 정부는 미국에서 잉여농산물도 대규모로 들여왔다. 정부는 이를 민간에 매각하여 국가재정에 충당하거나 일부를 정치자금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잉여농산물의 도입은 식량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지만, 국내에서 생산한 농산물 가격이 하락하여 농민들의 소득이 줄어드는 결과를 낳았다.〉(금성출판사, 397쪽)
 
  전체적으로, 미국의 원조는 식량문제 해결에는 다소 도움이 되었지만, 우리 경제의 대미종속, 농촌경제 파탄,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등 부정적 영향이 더 컸다는 인상을 주는 기술이다. 이 책들로 공부하는 학생들의 조부모들, 즉 미국의 원조로 목숨을 부지해야 했던 1950년대 한국인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대한민국의 〈한국사〉 교과서들은, 대한민국의 경제적 성취에 대해서는 기를 쓰고 문제점을 찾아내려 들면서도, 북한의 총체적 파산에 대해서는 의외로 너그럽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함에 따라 북한과 사회주의 국가 간의 경제교류는 단절되거나 대폭 축소되었다. 그 영향으로 석유를 비롯한 원자재 공급, 식량지원이 끊기면서 북한경제는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특히 에너지 부족 문제는 북한경제를 더욱 어렵게 하여 1990년대 내내 마이너스 경제성장을 기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김일성의 항일운동 시기 어려움을 상기시키는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선포하기도 하였다.〉(금성출판사, 409쪽)
 
  북한의 경제난은 공산주의 체제 자체가 안고 있는 모순 내지 주체사상을 내세운 북한경제의 폐쇄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이 교과서는 1990년대 초 동구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에 원인이 있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300만명이 굶어 죽은 북한의 기아사태에 대해서도 “김일성의 항일운동 시기 어려움을 상기시키는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선포”라는 말로 넘어가고 있다.
 
 
  과거보다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지난 10월 1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1인시위를 하는 문재인 대표. 그는 〈한국사〉 교과서를 읽어보기나 하고 ‘역사왜곡’ 운운하는 것일까. 사진=남강호
  기자는 《월간조선》 2004년 4월호에 실린 ‘집중취재/경고! 귀하의 자녀들은 위험한 교과서에 노출돼 있다’라는 기사를 통해 고등학교 〈한국사 근현대사〉 교과서의 좌편향성을 최초로 공개했다. 이 기사를 바탕으로 권철현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그해 10월 국회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조선일보》 등 국내 주요 언론들이 이를 크게 다루면서 교과서의 좌편향성 문제가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11년 전에 비하면, 지금의 〈한국사〉 교과서는 조금 나아지기는 했다. 한 페이지씩 크게 다루었던 김일성의 보천보전투에 대한 언급은 적어도 분량상으로는 많이 줄어들었다. 우리나라 역대 정권을 ‘독재정권’으로 규정하는 것은 조금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고, 김일성 정권을 ‘독재’라고 표현하는 교과서도 나타났다. 천리마운동은 찬양하고, 새마을운동은 비판하는 황당한 기술도 사라졌다. 북한인권에 대한 언급이나 북한체제의 한계 등에 대해 나름대로 언급을 한 교과서도 있지만, 이 기사에서는 미처 소개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아직도 매우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손톱 밑의 가시처럼, 잘 보이지는 않지만, 요소요소에 여전히 좌편향적인 역사인식들이 숨어 있다. 이 기사에서는 내용상 중복이 되기 때문에 더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기사 중에 인용한 내용 못지않게 문제점을 안고 있는 기술들도 많다. 앞에서 조금 나아졌다고 한 부분들도 마지못해 고친 것이라는 느낌이 많이 든다.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의 건국을 당당하게 ‘건국’이라고 말하는 교과서가 없다는 것이 〈한국사〉 교과서의 현 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교과서화한다고 이런 문제가 해결된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국사편찬위원회 관계자들을 비롯해 대다수 국사학자들의 역사인식이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지금 이런 〈한국사〉 교과서로는 안 된다는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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