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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金白一과 鄭律成

글 :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thegood@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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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는 ‘흥남 철수’ 당시 김백일 장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2011년 5월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김백일(金白一) 장군은 6·25 당시 ‘흥남 철수 작전’의 주인공 중 한 명이다. 또 다른 ‘흥남 철수’의 주역, 현봉학 박사는 생전에 “흥남 철수는 김백일 장군이 ‘피란민이 우선이다. 우리는 여기서 싸우다 죽겠다’고 앨먼드 소장에게 얘기한 게 감동을 줬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얘기한 바 있다. 이 밖에 정일권 당시 육군참모총장의 회고록에서도 ‘흥남 철수’와 관련한 김백일 장군의 공적을 확인할 수 있다.
 
  김 장군은 1948년 10월 여순반란 사건 당시 제5여단장으로서 좌익 세력을 진압했다. 그가 지휘한 1군단은 6·25전쟁 때 가장 먼저 38선을 돌파하고, 압록강 혜산진까지 진격했다. 1950년 12월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미군 지휘부를 설득해 북한 지역 피란민 9만1000여 명을 안전하게 구출하는 데 앞장섰다. 정부는 이 같은 공적을 인정해 그에게 화랑·충무·을지 무공훈장을 줬다. 1951년 3월, 타고 가던 군용기가 추락해 김백일 장군이 순직하고 나서는 최고 등급인 태극 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그런데 지금 광주광역시에선 ‘김백일 장군 지우기’ 작업이 한창이다. 지난해 11월부터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광주전남본부,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광주전남본부 등은 김백일 장군의 이름을 딴 학교, 도로명, 공원 명칭 변경도 촉구했다. 육군보병학교에 있는 ‘김백일 장군 동상’을 현충시설에서 제외하라는 요구도 했다.
 
 
  光州市 서구, ‘백일로→ 학생독립로’ 개명 추진
 
  광주시 서구엔 ‘백일초등학교’ ‘백일어린이공원’ ‘백일로’ 등이 있다. 이는 1951년 경기도 시흥에서 광주 상무대로 이전한 육군보병학교가 김 장군의 이름을 빌려 교내 사격장 이름을 ‘백일 사격장’으로 명명한 데서 유래한다.
 
  육군보병학교는 1994년 전남 장성군으로 이전했다. 당시 광주시는 ‘백일 사격장’ 부지를 ‘백일택지개발지구’로 지정했다. 이에 따라 이곳에 들어선 초등학교와 공원, 도로 등에 ‘백일’이란 이름이 자연스레 붙은 것이다.
 
  그런데 광주 지역의 일부 단체들은 “김백일은 친일파”란 이유를 들어 그의 흔적들을 지우려고 한다. 김 장군은 1937년 만주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 간도특설대에 초급장교로 참여했다. 이 부대는 소련과 중국 공산당의 지령에 따라 공산 혁명을 위해 대일(對日) 무장투쟁을 했던 동북항일연군을 소탕하고자 만든 조직이다.
 
  광주시 서구청은 도로명 변경을 결정하고, 지난해 12월 8일부터 19일까지 주민 설문조사를 했다. 해당 지역 주민들은 ‘백일로’를 ‘학생독립로’로 개명하는 걸 선호했다.
 
 
  光州 남구 ‘정율성路’ 주인공은 北韓軍歌 작곡가
 
광주광역시 동구 불로동 ‘정율성 생가터 추정지’에 서 있는 ‘정율성 탄생 기념비’.
  기자는 ‘김백일 지우기’ 논란을 보면서 ‘정율성(鄭律成)’이란 인물을 떠올렸다. 광주시 남구 양림동엔 ‘정율성로(233m)’가 있다. 이는 광주시 남구청이 ‘정율성 생가터 추정지’에 1억원을 들여 2009년 1월 조성한 거리다.
 
  정율성은 광주 태생 중국 작곡가로 ‘중국 인민해방군가(팔로군 행진곡)’와 중국인의 아리랑으로 불리는 ‘연안송(延安頌)’ 등을 만들었다.
 
  정율성은 해방 후 북한에서 6년 동안 활동했다. 그는 1950년 6·25전쟁에 참전해 ‘조선인민유격대 전가’ ‘중국인민지원군 행진곡’ ‘공화국 기치 휘날린다’ ‘우리는 탱크부대’ 등을 작곡했다. 현재 북한의 ‘조선인민해방군가’도 정율성이 지은 곡이다.
 
  정율성이 1963년 《북경만보》에 “노래는 오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무기이며, 혁명의 무기”라고 밝힌 것처럼 그의 노래는 6·25전쟁 당시 우리 국군과 유엔군을 상대로 하는 또다른 ‘무기’였다.
 
  중국 조선족자치주 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을 지낸, 재중(在中) 작가 유연산은 중국 《인터넷 료녕신문》에 기고한 〈태양의 아들〉에서 “‘조선인민유격대 전가’ ‘중국인민지원군 행진곡’은 정율성이 조선과 중국의 입장에서 한국군과 연합군을 소멸하기 위하여 지은 것임은 변명할 여지도 없다. 가정해서 조선전쟁 당시 정율성이 한국군이나 연합군의 포로가 되어 사형을 당한다 해도 억울할 것이 추호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또 “정율성은 1970년대 초에도 ‘아직도 남조선 인민들은 해방되지 못하고 있다’면서 ‘나하고 유격전을 하러 남조선으로 가자’고 제의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정율성은 1976년 사망했기 때문에 그는 사실상 평생 ‘남한 적화’의 꿈을 꾸고 있었던 셈이다.
 
 
  光州, ‘反國家 행위자’는 巨金 들여 기념
 
  종합하면 정율성은 한반도를 적화하려는 북한군과 중공군의 선전(善戰)을 위해 독려한 선동가다. 그에게 ‘6·25’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아니라 ‘조국 해방 전쟁’ ‘항미 원조 전쟁’이었다.
 
  그런데도 광주광역시는 2005년부터 연평균 4억6000만원을 들여 정율성을 기리는 국제음악제를 개최하고 있다. 광주시 남구는 ‘정율성로’를 조성하고, ‘정율성 흉상’과 ‘정율성 거리 전시관’을 설치했다. ‘정율성기념사업회’는 광주시 동구 불로동에 있는, 또 다른 ‘정율성 생가터 추정지’에 기념비(4.5m)를 세웠다. 이 단체와 남구청은 ‘정율성 생가터’를 놓고 서로 자신의 주장이 옳다며 공방전을 벌였다.
 
  올해엔 광주시 산하 광주문화재단이 ‘정율성 탄생 100년’을 맞아 《사진으로 본 정율성》 《정율성 가곡집》을 펴냈다. 또 광주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는 중국 업체와 합작해 정율성의 일생을 조명하는, 영화 〈잃어버린 바이올린(가제)〉 제작을 추진하고 있다.
 
  7년간 정율성을 연구한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노기욱 박사는 과거 《월간조선》과의 통화에서 “정율성의 이력을 보면 광주가 열광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인데, 왜 지금 광주 사람들이 정율성을 가지고 저러는지 학자로서 지적하고 싶다”고 말했다.
 
  광주광역시와 자치구, 이 지역의 이른바 ‘시민단체’들의 눈에는 김백일 장군의 ‘친일 과오’만 보이고, 정율성의 ‘반국가 행위’는 보이지 않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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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영호    (2015-05-04) 찬성 : 85   반대 : 60
김백일 장군과 정율성이 이 지역에서 태어났다는 것으로 이 지역 사람들이 애착을 갖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백일 장군과 정을성은 비교 대상도 안 된다고 본다.
정율성은 그의 생 마지막까지 대한민국을 반역하여 북에 충성한 자이다. 김백일 장군은 반공에 앞장서 활동했고 대한민국 국군으로서 철수작전 때 북한 피난민 9만 1000여명을 미군에 요청하여 안전하게 구출하는데 성공했다.
광주시가 기왕에 잘한 백일 명칭으로 명명한 거리와 공원 학교 등의 명칭을 왜 바꾸려 하는가 광주시가 바른 역사의식을 기지고 딴 소리에 흔들리지 말고 모든 기념사업을 굳게 지겨 나가기를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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