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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인터뷰

수사검사가 밝히는 오대양 사건의 진실

“현장 봤다면 타살 의혹이라 말하지 못할 것”

글 :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ksdhan@chosun.com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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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양 사건 3대 핵심 의혹 : 타살설, 유병언 관련설, 5공 인사 연루설

⊙ 시신 32구 중 타살 흔적은 단 1구도 없었다
⊙ 5공화국이 배후? 그런 흔적 찾을 수 없었다
⊙ 3번(검찰 2차례, 국회 1차례) 조사했지만 유병언과 오대양 관련설은 입증되지 않았다
⊙ 시신 서둘러 화장?… 유가족에 인계했다
⊙ 밖에서 죽인 후 천장으로 옮기는 것은 현장 구조상 불가능

박영수
⊙ 62세. 서울대 철학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법학 석사.
⊙ 수원지검 검사, 대검 공안기획관, 대검 중앙수사부장, 서울고검장. 現 법무법인 강남 대표변호사.
  ‘세월호 사건’ 후 도피하다가 지난 7월 25일 검거된 유대균씨는 검찰 진술에서 “오대양 사건이 떠올라 도주했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고 한다. 유대균씨는 세월호 사건과 관련 도피 중 사망한 전(前) 세모그룹 유병언(兪炳彦) 회장의 장남이다. 장남 대균씨가 그랬던 것처럼 검찰의 출두명령을 거부하고 도망다니던 유병언씨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 데에는 ‘오대양 사건이 그에게 안겨준 트라우마도 한 요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오대양 사건, 정확히 말하면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 또는 ‘오대양 집단변사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이 유씨 일가에게 도대체 어떤 ‘잊지 못할 충격’을 안겨 주었기에 국민적 공분을 일으킨 세월호 사건 후 이들을 도망다니게 하는 한 요인이 되었을까.
 
  1988년 12월 12일 당시 내무부가 국회에 제출한 오대양 사건의 개요를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변사자 박순자는 84년 5월 대전시 중구 가수원동에 오대양(주) 회사를 설립, 주거기구 및 민속공예품 생산판매업을 자영하면서 많은 사채를 끌어들여 사업을 확장하던 중, 빚 받으러 온 채권자 이○○(52) 부부를 회사원들이 집단 구타한 사건이 발생, 검찰의 조사를 받게 되자 자신도 조사 중 도망, 다른 종업원 80명을 여러 차례 용인공장으로 오도록 하여, 창고 등에 은신 중이던 49명은 제보를 받고 출동한 충남경찰국 형사반에 발견되어 대전으로 이송, 가족에게 인계되고, 박순자 등 32명은 87년 8월 29일 용인공장 천장 내에서 집단 변사체로 발견된 사건임.>
 
  간단히 말하면 1987년 8월 29일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 오대양 공장 구내식당 천장에서 4박5일간 숨어 있던 오대양 직원들의 변사체 32구가 발견된 사건이다. 사건이 발생하자 5공화국 당시 국방장관을 지낸 이○○씨,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씨 등 5공화국 관련 인사들의 관련설이 불거지며 수사에 외압이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오대양의 사장 박순자씨가 구원파 신도였다는 점을 이유로 구원파와 당시 구원파를 사실상 이끌었던 것으로 알려졌던 유병언씨의 관련설도 불거졌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유병언 회장의 친분설도 나돌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당시 수사당국은 ‘집단자살’ 사건, 즉 공장장이었던 이경수씨가 함께 숨어 있던 31명의 동의하에 그들의 목을 졸라 숨지게 하고 자신도 목을 매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수사당국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은 종교문제 전문가 탁명환씨, 전 국회의원 김현씨와 박찬종씨 등에 의해 계속 제기됐다. 의혹의 연결고리는 5공의 비호를 받고 있는 유병언씨가 오대양 사건의 배후라는 것이다.
 
 
  끊이지 않는 오대양 사건 배후설
 
1987년 8월 29일 오후 오대양 용인공장 식당 천장에서 발견된 32구의 사체를 내리는 장면.
  5공과 유병언씨 배후설의 전제는 이 사건이 집단자살이 아닌 타살이라는 주장이었다. 외부에서 살해 후 사체가 발견된 장소로 옮겨졌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게 제기되곤 했다. 결국 이 사건은 이후에도 두 차례나 재(再)수사가 이루어지게 된다. 한 번은 국회에서였고 또 한 번은 1991년 오대양의 전 직원 7명이 다른 직원 3명을 살해 후 암매장했다고 뒤늦게 자수해 오면서 시작된 수사당국의 수사에 의해서였다.
 
  국회에서 벌어진 오대양 사건 조사는 이른바 ‘5공 비리’ 조사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6공화국이 출범한 후인 1988년 12월 1일부터 89년 3월 23일까지 있었던 오대양 사건 재조사의 결과는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권력형비리 조사보고서>에 실려 있다. 그 보고서에 실린 오대양 사건 조사 목적은 다음과 같다.
 
  <오대양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대의 변사사건으로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심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정치권력의 관계 여부 및 자살이 아니라 외부 소행에 의한 타살이라는 일부 국민의 의혹이 있었던 바 사건의 정확한 진상을 밝히고 만약 정치권력의 개입이 있었다면 이를 척결함으로써 인권을 보호하고자 함.>
 
  그러나 4개월 가까운 국회 조사에서도 오대양 사건 ‘타살 의혹’은 규명되지 않았다. 1991년 수사당국의 재수사에서도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법적으로 오대양 사건은 집단자살이었던 것이다. 이 수사당국의 재수사에서 검찰은 오대양 사건의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배후로 지목돼 왔던 유병언씨를 구속하지만 그 구속사유는 오대양 사건과 관련이 없는 상습사기 혐의였다. 그 사기 사건은 오대양 사건 발생 이전인 1982년에 발생한 일 등이었다.
 
  유병언씨는 사기죄로 4년간 복역한 후 1995년 6월 석방됐다. 그 한참 후인 1999년 가을에 있었던 인터뷰에서 유씨는 이런 말을 했다.
 
  “… 지금도 나는 사람들이 오대양 사건과 저를 연관지었다는 것만 생각하면 아예 변명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기분이 나쁩니다. 내가 왜 오대양 배후라는 멍에와 누명을 쓰고 살아야 합니까. 원통할 때마다 어금니를 깨물며 억울함을 참습니다. 심정이 어떤지 아십니까. 좁은 시골 동네에서 어느 날 갑자기 성폭행당한 처녀 같아요. 억울해도 우리 정서상 어디다 하소연도 못하는데 소문은 제가 몹쓸 년인 것처럼 동네방네 나는 겁니다.”
 
  유씨는 전두환 전 대통령 등 5공 세력의 비호설에 대해서도 부인했다.
 
  “친한 것도 없고 봐준 것도 없어요. 오히려 제가 1986년에 세무조사를 당해서 30억원 넘게 추징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당시 매출액의 19% 정도였는데 5공이 비호했다면 왜 세무조사를 당했겠습니까. 세무조사 당할 때 보니까 완전히 벼룩 한 마리 잡기 위해서 해머로 방구들 깨는 것과 똑같았어요.”
 
  오대양 사건 수사와 재수사 과정에서 언론이 유병언 관련 의혹을 계속 제기하면서 일반 국민들에게는 ‘유병언은 집단살인 사건의 배후자’라는 인식이 심어졌고, 유씨 일가는 세월호 사건 이후의 사회 여론도 오대양 사건과 같은 패턴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찌됐든 유병언씨는 세 번의 조사를 통해 법적으로는 오대양 사건의 배후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대양 사건의 배후가 유병언씨라는 의혹은 세월호 사건 후 언론매체 등을 통해서 다시 제기되고 있다. 그런 의혹의 전제는 언제나 수사당국이 집단자살이라고 말하고 있는 32구가 타살됐다는 주장이다.
 
 
  서둘러 종결?
 
오대양 사건이 발생하자 국민들의 관심은 집단자살극의 배후가 누구인가에 쏠렸다. TV 뉴스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시민들.
  1987년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 발생 당시 수원지방검찰청 소속으로 수사를 지휘했던 박영수(朴英洙) 고검장은 타살 의혹 제기에 대해 “한마디로 현장을 보지도 못하고 하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32구의 시체가 발견된 현장을 직접 눈으로 봤다면 타살 의혹을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박 전 고검장은 사건 현장인 오대양 용인공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검사이기도 하다. 박 전 고검장을 만났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심재륜(沈在淪) 변호사가 오대양 사건에 관해 《月刊朝鮮》 2012년 1월호에 기고한 글을 박 전 고검장에게 읽어 줬다. 오대양 사건에 관한 사회 일반의 인식을 잘 대변해 주는 글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의 종교적 집단자살 사건이라는 충격과 파장에도 불구하고 웬일인지 이 사건은 서둘러 종결됐다. 빚에 찌든 채무자들의 자살로 추정된다는 쪽으로 얼버무려지며 덮였다. 후일을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증거라 할 시체들조차 서둘러 화장 처리됐다는 의혹을 샀다.>
 
  “서둘러 종결? 사건 당시 주임검사인 나를 포함해 5명의 검사가 투입됐어요. 서둘러 종결한 것이 아니라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수사를 했고 수사의 원칙에 입각해서 종결했다는 말이 맞을 겁니다.”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수사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6·29 선언 직후였고 5공 인사들의 관련설 등 각종 의혹이 언론 등을 통해서 제기되는 등 사건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높았습니다. 그래서 부검의도 여러 명, 검사도 5명씩이나 투입되는 등 집중적으로 수사를 했던 겁니다.”
 
  —오대양 사건에 대한 조사가 그 후에도 두 번이나 더 이루어졌다는 건 사건에 대한 의혹이 계속 제기됐기 때문 아닙니까.
 
  “국회에서 5공 비리 청문회 때 재조사가 있었죠. 저도 법무부에 6개월간 비공식적으로 파견돼서 그 조사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국회 조사에서도 오대양 사건에 유병언씨가 연루됐다거나 5공 인사들이 개입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의혹의 출발점이 되는 타살에 대한 새로운 증거도 없었고요. 91년 조사는 그해 7월 오대양 관계자 6명이 경찰에 자수하면서 시작된 것인데 그 조사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91년 당시 유병언씨를 검찰이 구속했지만 유씨의 구속은 오대양 사건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상습사기 혐의였습니다.”
 
  91년 오대양 관계자 6명의 자수는 오대양 용인공장 32구의 변사체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 그 사건 이전에 다른 오대양 직원 3명을 살해한 후 암매장 한 사실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1991년 오대양 사건 재수사 때 담당 검사가 심재륜 변호사 아닙니까.
 
  “그랬죠. 제가 국회 조사 때도 말했지만 현장에 가 본 사람이라면 타살 의혹을 제기할 수 없어요. 저는 처음 수사할 때도 수사가 잘못되면 옷을 벗을 각오로 했고 나중에 국회 조사나 91년 재수사 때도 결과가 다르게 나오면 옷을 벗을 각오가 돼 있었던 사람입니다.”
 
  —당시 수사 중에 5공 정권의 압력은 없었습니까.
 
  “전혀요. 전혀 없었습니다.”
 
 
  당시의 시체 인상까지 기억한다
 
1991년 오대양 직원 3명의 살해 사실을 자백하기 위해 자수한 오대양 관련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들의 자수로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의 재수사가 시작됐다.
  —87년 사건 발생 당시 현장에 최초로 도착한 검사인데 사건 발생 후 ‘시신이 옮겨졌다’, ‘시신에 누가 손을 댔다’는 등의 의혹들이 있었는데 정말 그런 흔적이 없었다는 겁니까.
 
  “전혀 없었습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제가 도착하기 전에 경찰 감식반이 천장에서 시체를 확인하고 있는 중이었어요. 제가 도착해서는 그것도 다 못하게 하고 내려오라고 했죠. 제가 모든 경찰관들을 장악한 후 시신 하나하나에 번호를 부여하는 등 주임검사인 제 지휘하에 작업을 했어요. 당시 별 이야기가 다 나왔어요. 시체를 들어서 옮겨놨다고 하는데 말도 안돼요. 사건 현장의 구조를 모르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어떤 구조였는데요.
 
  “슬레이트 지붕 밑에 철골로 돼 가지고 스티로폼을 깔았어요. 그러니까 천장 그 철골 위로 아니면 걸어다닐 수가 없는 구조예요. 게다가 엄청 더웠어요. 그곳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4박5일간인가 있었는데 추측건대 모두가 기진맥진한 상태였을 겁니다. 목을 스카프로 조였는데 멀쩡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조이는 그런 강도(强度)가 아니었어요. 아주 약한 강도인데도 사망했던 겁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그 사건에 하도 시달려서 아직도 그 당시 시체 얼굴 인상까지 기억할 정도로 기분 나쁜 사건입니다.”
 
  —그런 구조라고 해서 바깥에서 죽인 다음 시신을 그곳으로 옮겨 놓지 못하리란 법은 없는 것 아닙니까.
 
  “부검을 하기 위해 우리가 천장에서 시신을 아래로 내릴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철골이 아니면 발을 디딜 수가 없잖아요. 스티로폼이니까 잘못 디디면 무너지잖습니까. 처음에는 경찰관 20명이 가까운 쪽부터 내리려고 하는데 경찰관 6명이 달라붙어도 시체 한 구를 못 내려요.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영안실 시체를 잘 다루는 영안실 직원들을 부르는 거였습니다. 수원 동수원병원 영안실 직원들을 비롯해서 몇몇 병원 영안실 직원들을 불러서 시신을 내렸습니다. 시신을 다뤄 본 사람들이니까 시신을 훼손 안 하고 잘 내렸죠. 그런데 그 사람들을 죽여서 그 천장 위로 올렸다? 그건 그런 현장을 본 사람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예요. 내리기도 그렇게 힘든데 어떻게 올립니까.”
 
  —시신은 부패되지는 않은 상태였습니까.
 
  “깨끗했어요. 부패기는 약간 있었지만, 다행히 한여름이었지만 날이 흐려서 시체는 전부 깨끗했어요.”
 
 
 
화장했다고? 시신은 유족들이 처리

 
  —또다른 의혹 가운데 하나가 사건의 증거가 되는 시신들의 화장(火葬)을 서둘렀다고 하는 건데요.
 
  “아냐, 화장을 하지도 않았는데 무슨 화장을 서둘러요. 우리가 서두른 건 사체 부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막 ‘전경환이가 죽였다’는 등 국민들 여론이 안 좋았어요. 그래서 국민들의 의혹을 빨리 풀어 준다는 차원에서 수사의 속도를 내기 위해 부검을 서둘렀습니다. 부검의들을 각 지역에서 차출도 했어요. 시신 32구를 발견한 그 다음 날 바로 부검을 실시했어요. 시체 썩는 냄새 나는데도 옆에서 자장면 먹어 가면서 의사들과 부검하고 그랬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날 부검의들과 협의해서 결국은 외부 소행에 의한 타살 흔적은 없다는 결론을 내린 거죠.”
 
  —부검의들이 사건 현장으로 와서 부검을 한 겁니까.
 
  “그 천장에서 내려오면 바로 식당이 있어요. 큰 식당이 있었는데 거기서 했죠. 옮기는 과정에 훼손될까 봐 그렇게 했던 겁니다. 시신이 상하지 않도록 창문도 열어 놓고 사체 발견 다음 날 아침 9시부터 부검에 들어갔습니다.”
 
  —부검 후 시신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유가족들에게 시신을 인도해 가라고 통보했습니다. 유가족들이 시신을 찾아갈 때까지도 며칠 걸렸어요. 화장은 무슨. 화장했다는 것은 근거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 시신들은 유족들이 인도한 후 각자 장례 절차를 밟았다는 겁니까.
 
  “그랬죠. 제 기억으로는 1구인가가 결국 유족이 안 나타나서 그걸 아마 행려병자로 분류했다가 나중에 처리했을 겁니다.”
 
  —그럼 그 사람을 화장한 사실이 의혹으로 제기된 건가요.
 
  “모르겠습니다. 그 마지막 한 구는 행려병자 처리했으니까 아마 화장하겠죠.”
 
  —수사 주체들이 시신을 화장하거나 한 일은 없다는 거죠.
 
  “전혀 없어요.”
 
  —구원파라도 박순자와 유병언은 다른 계열로 알고 있는데요.
 
  “잘 봤어요. 제가 종교를 잘 몰라서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박순자라는 사람이 구원파에서 유병언이라는 세력한테 결국은 밀려서 나온 조직이 오대양이라고 봐요. 새로운 조직이죠. 수사를 해 보니까 시신 32구는 살아 있을 때 (박순자에 대해) 굉장히 맹렬한 추종자였어요. 천장 밑에서 식사 제공 등의 역할을 하며 살아 있던 아줌마들도 조사했는데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자기들도 천장에 올라가고 싶었다고 말이죠. 여담이지만 그때 서른두 명이 천장에 숨어 있을 때도 세월호 사건 때처럼 충남 도경에서 형사들이 와서 수색을 했는데 못 찾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있었으리라는 상상을 못했던 것 같아요.”
 
  —박순자가 모은 사채 170억원의 행방도 제기되는 의혹 중 하나인데요.
 
  “대부분 사채 이자 갚는 데 썼고, 그 돈이 구원파로 흘러간 것은 재수사에서도 못 찾았을 겁니다. 제가 알기로는 박순자가 그 돈을 갚을 길이 없어서 도망친 거예요.”
 
  —5공 관련설은 수사했습니까.
 
  “수사를 안 한 게 아니라, 그런 혐의를 발견 못했기 때문에 안 한 거죠.”
 
  —그래도 시중에서는 전경환씨가 관련됐다는 등의 소문이 돌았는데요.
 
  “하도 의문이 제기되니까 우리가 두 번이나 현장감식을 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이 철골 사이사이에 받은 메모를 찢어 가지고 버렸는데 그 메모를 찾아가지고 분석을 해 보니까, 두 가지 메모가 나왔습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하나가 ‘이제 곧 갈란다’는 식의 표현이 있었어요. 밑에 있는 아줌마들한테 이제 갈란다고 한 거죠. 두 번째 메모는 ‘박순자도 죽었고 거의 다 죽었다’ 하는 식의 메모가 있었습니다. 그 사건을 가지고 외부에서 죽여서 옮겨 놓은 것이라든지 이런 얘기는 현장을 본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정말 사체가 깨끗했습니다. 이런 얘기 하면 안 됐지만 시체들이 전부 편안하게 갔어요.”
 
 
  여성 시신에서 정액 검출?
  검사용 솜가루였다

 
1991년 7월 30일 당시 유병언 세모 사장이 대전지검에 출두하고 있다. 유씨는 상습사기 혐의로 구속됐다.
  —그런데 앞서도 여쭤봤지만 왜 이 사건에 대해 국회 재조사, 91년 검찰 재조사 같은 일들이 반복되는 걸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구원파가 사교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판단을 못해요. 판단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 사람들은 아주 열렬 종교인들인 것 같아요. 한국에서 일어난 최초의 집단자살극이라는 점도 국민적 관심을 끌게 했지만 당시 170억이라는 돈의 행방도 관심의 한 요인이었다고 봐요. 그 돈을 빌린 곳이 대전 지역이었는데 그 사건으로 대전 지역 경제가 흔들린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그 지역에서는 경제적으로도 큰 사건이었습니다. 대전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권, 즉 자민련 의원들이 이 사건과 관련해 상당히 움직이면서 이슈를 만들어 냈죠. 대표적인 분이 김현 전 의원인데 저하고도 친분이 있는 분입니다. 여러 차례 만날 때 제가 ‘(오대양 사건과 관련) 그만 좀 주장하세요’라고 하면 김현 의원은 ‘이해해 달라’고 하더군요.”
 
  —이번에 세월호 사건이 발생하면서 또 타살설이 제기되는데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 당시에도 제가 듣기로는 유병언이라는 사람이 왜 자기를 수사하느냐고 굉장히 항변했다고 그래요. 자기하고 박순자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는데 왜 자기를 이렇게 수사하느냐고 항변을 했다는데 그게 단순한 항변인지 아닌지 저는 진실은 모르겠지만, 그런 상황이 이번 세월호 사건 때도 일어나는데 유병언씨 개인으로서는 불만을 가졌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당시 항간의 소문은 오대양 돈이 구원파로 가고 구원파 돈이 유병언에게로 갔다는 것이었는데 그런 내용은 수사 대상이 아니었나요.
 
  “수사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런 흔적을 발견 못했으니까요. 박순자가 빌린 돈이 구원파로 흘러가고 구원파에서 유병언에게 갔다는 것은 그 진실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걸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
 
  —유병언씨와 전경환씨의 친분설 이런 것은 아예 조사 대상도 아니었습니까.
 
  “아니, 그게 박순자 남편(편집자 주-이○○씨로 당시 충남도 고위 공무원)도 조사하고 다 했죠. 그런데 전혀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대양 사건에 대한 조사가 또 이루어진다면요.
 
  “그게 낭비고 무용한 짓이죠. 내가 5공비리 조사 때 국회에서도 그랬어요. ‘현장을 보지 않고는 강력사건을 이야기하지 마라’, 검사 교본에 그렇게 돼 있거든요. 항상 강력사건은 현장에 답이 있습니다. 모든 답을 현장이 해 주는데 왜 그것은 보지 않고 자꾸 이상한 소문에 현혹돼서 사건의 본말을 흐리려고 그러느냐고 강하게 항변한 일이 있습니다.”
 
  —사체 가운데 일부 여성 시신에서 정액이 검출됐다는 주장도 있었는데요.
 
  “그랬죠. 제 기억으로는 박순자하고 어떤 젊은 여자 둘하고 해서 질액을 검출했더니 정자 비슷한 모양이 나왔어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나중에 수사 종결 시점에 부검의들 사이에서 이게 도대체 뭐냐 하는 논란이 있었죠. 결국엔 질액을 짤 때 쓰는 그 솜, 솜가루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그것 외에는 부검의들 사이에서도 외부 소행이냐 타살이냐 하는 데는 의견 차이가 없었었어요.”
 
  —당시 타살설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종교 전문가인 탁명환씨였는데 혹시 그분의 조언은 들었습니까.
 
  “제가 개인적으로 탁명환씨를 잘 알아요. 고소 사건 등 그분과 관련한 사건들을 제가 여러 건 수사했거든요. 탁명환씨도 현장에 왔었는데 그때 나한테 와서 한마디도 못하고 갔어요.”
 
  —박찬종 전 의원도 오대양 사건 타살설을 제기했는데 이를 구원파 측이 명예훼손 등으로 고소했지만 대법원에서는 96년에 박 의원의 타살설 의혹 제기가 무죄라는 판결을 내렸는데요.
 
  “하여간 현장도 모르고, 현장을 보지도 않고, 그 사건 수사에 관여해 보지도 않았으면서 무슨 이유로 타살설을 제기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무죄야 법원이 공익을 위해서 했다고 한 주장을 받아들여준 거겠죠.”
 
  박 전 고검장은 마지막으로 “오대양 사건의 감춰진 진실이 뭐든 87년 오대양 용인공장 천장에서 발견된 시신 32구는 타살당하지 않았다는 점만은 분명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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