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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인기史劇 <정도전>의 작가 鄭賢敏

“<정도전> 통해 정치의 맨살 보여주고 싶었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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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운동, 국회의원 보좌관 거쳐 드라마 작가로
⊙‌“<정도전> 속 이성계는 보좌관 시절 모셨던 박인상 전 민주당 의원 모습 많이 반영”
⊙ “한편에서는 혁명 美化, 한편에서는 쿠데타 美化”라고 비판
⊙ “세상에 100% 선하거나 악한 사람이 어디 있나?”
  KBS 사극(史劇) <정도전>이 ‘모처럼 보는 정통 대하사극(大河史劇)’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조용히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지난 3월 9일 방영한 <정도전> 제20회는 시청률 16.5%를 기록하면서 자체 최고기록을 경신했다. 동 시간대 프로그램들 중에서 1위다. 이 시간대에 부동의 1위를 차지했던 <개그콘서트>까지 누른 좋은 성적이다.
 
  사실은 기자도 이 드라마의 팬이다. 기자는 TV를 보는 일이 별로 없고, 어떤 드라마가 화제가 되면 그제야 뒤늦게 보기 시작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정도전>은 첫 회부터 ‘본방사수(本放死守)’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전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정도전을 어떻게 그렸을까’가 궁금해서 보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인임(박영규 분), 정도전(조재현 분), 이성계(유동근 분), 최영(서인석 분) 등의 연기와 맛깔나는 대사(臺詞)에 빠져 이 드라마를 본다. 특히 첫 회부터 이 드라마를 이끌어온 권신(權臣) 이인임의 어록은 인터넷에 올라와 있을 정도로 인기가 있다. 그중 몇 개를 보자.
 
  • “전장(戰場)에서 적을 만나면 칼을 뽑아야 하지만, 조정에서 적을 만나면 웃으세요. 정치하는 사람의 칼은 칼집이 아니라 웃음 속에 숨기는 것입니다.”
 
  • “정치를 오래 할 생각이라면 새겨들으시오. 의혹은 궁금할 때 갖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감당할 능력이 있을 때 제기하는 것이오.”
 
  • “힘없는 자의 용기만큼 공허한 것도 없지요. 세상을 바꾸려거든 힘부터 기르세요. 고작 당신 정도가 떼를 쓴다고 바뀔 세상이었으면 난세라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 “말단 학관 주제에 시비를 따지겠다는 자체가 객기요. 이해는 합니다. 미관말직을 전전하다 보니, 자격지심이 뼈에 사무쳤을 테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오기라는 것도 가지게 되겠지요. 한데, 그런 사람들의 문제는 꼭 티를 낸다는 것이오. 남들은 다 꾹 참고 견디는데 저만 잘났다고 불쑥 튀어나오거든요.”
 
  한 마디 한 마디가 현실을 곱씹어보게 만든다. 도대체 작가가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대사를 쓸 수 있을까? 작가는 정현민(鄭賢敏·44). 알아보니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이라고 했다. 호기심이 동했다. 3월 10일 서울 영등포구 당산역 인근 카페에서 정현민 작가를 만났다.
 
 
  “정도전 관련 책 7권 읽고 집필 결심”
 
지난 1월 2일 <정도전> 제작발표회에서 이 드라마에 대해 설명하는 강병택 감독.
  —<정도전> 드라마는 어떻게 하게 되었습니까.
 
  “작년 1월 5일 아침드라마 <사랑아 사랑아>가 끝난 다음날 강병택 감독이 전화를 걸어왔어요. 강 감독은 오래전부터 <정도전>을 하려고 생각하고 작가를 찾고 있었나 봐요. 사실 대하사극은 신인 작가에게 기회가 잘 안 와요. 언젠가 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기회가 올 줄은 몰랐어요.
 
  만나 얘기하는데 강 감독이 ‘기존 대하사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더군요. ‘너무 올바르기만 한 영웅, 칼싸움 위주, 군왕(君王) 중심, 이런 것들은 이제 달라져야 하지 않겠느냐’ ‘세트장 안으로 들어오되 여자들 궁궐암투 말고 정치 얘기를 보여주는 드라마가 재미있지 않겠느냐’고 말씀드렸어요. 그런 문제의식이 맞았던 것 같아요.”
 
  —정도전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습니까.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 말고는 잘 몰랐어요. 마침 드라마를 끝내고 2주간 제주도 여행이 예정되어 있어서, 강 감독이 주는 정도전 관련 책 일곱 권을 가지고 가서 읽었어요.”
 
  —어떤 책들이었습니까.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한영우), 《정도전을 위한 변명》(조유식), 《삼봉 정도전의 정치철학》(김용옥) 같은 책들이었습니다. 《정치가 정도전》(최상용-박홍규)을 가장 많이 참고했습니다. 《고려사》 열전(列傳)과 세가(世家)도 읽었고요.”
 
  —책을 읽어보니 어떻던가요.
 
  “2주 동안 쭉 보니 전체적인 아우트라인(out line)이 나오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한 달 정도 걸려 가기획안(假企劃案)을 냈죠.”
 
 
  “亂世를 고민하는 정치가들의 모습 보였다”
 
  —그런 자신감이 생긴 것은 책을 읽으면서 정도전이나 고려 말 역사에 대해 뭔가 공감하는 바가 있어서였겠죠.
 
  “그 시대를 읽어보니 정말 난세(亂世)더라고요. 그리고 그 난세를 고민하는 정치가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들이 사는 시대를 난세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면서도 국민들은 정치는 혐오합니다. 물론 정치가 국민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측면도 있지만, 정치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정도전>은 팍팍하게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정치의 맨살을 보여줄 수 있는 소재라고 생각했어요.”
 
  —역사책을 통해 본 정도전은 어떤 사람이던가요.
 
  “정말 뜨거운 사람이었습니다. 깜짝 놀랐어요. ‘이렇게 진보적인 사람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사람이 갖고 있는 키워드는 민생(民生)이었어요. 사실 정치권에서 민생이 화두(話頭)가 된 것은 오래전부터였고, 정치인들도 노력을 많이 해왔어요. 국민들은 피부로 느끼지 못하지만…. 정도전이 혁명을 하게 되는 것도 거창한 대의명분(大義名分) 때문이라기보다는 토지제도라는 경제적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당시는 양극화(兩極化)가 무척 심한 시대였어요.
 
  이런 것들 때문에, 정도전의 얘기를 하면, 제가 어설프게 오버랩시키지 않아도 보는 분들이 자연스럽게 오버랩하겠구나, 시청자나 위정자(爲政者)들이 공감할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정 작가는 “정도전은 대단히 그리기 어려운 사람이기는 하지만, 드라마적 재미가 있는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지만 정도전은 정몽주와 진짜 친한 사이였어요.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는 정적(政敵)이 되어서 싸우죠. 이성계도 정몽주와 되게 가까운 사이였어요. 전쟁에 나갈 때마다 정몽주를 데리고 갔었죠. 이 세 사람의 삼각관계, 그 사이에 선 이성계의 고뇌가 보이더군요. 정몽주는 이방원의 과외선생이었지만, 나중에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죠. 이런 관계만 잘 풀어나가면 드라마는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는 고려 말의 386”
 
정도전(조재현 분)은 고려 말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보며 혁명을 꿈꾼다.
  —과거 KBS 사극 <용의 눈물>에서도 정도전을 그렸었는데, 본 적이 있습니까.
 
  “당시에는 보지 않았어요. TV드라마는 잘 안 보는 편이에요. 이번에 <정도전>을 하게 되면서, <용의 눈물>을 보기는 했지만, 조선이 건국하는 7회까지 보고 더 이상 보지 않았어요. 혹시라도 저도 모르는 사이에 <용의 눈물>에 끌려가는 일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마찬가지 이유에서 정도전에 관한 소설도 일절 보지 않았습니다.”
 
  <정도전> 제14회에서는 정도전이 나주 거평부곡에서 만났던 처녀 양지가 권력에 의해 처참하게 죽는 것을 보고 난 후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겠다고 결심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 장면을 보면서 광주(光州)사태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나 주체사상을 받아들여 혁명을 꿈꾸던 386들의 모습을 연상했다. 이 얘기를 하니, 정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들은 당시의 386세대가 맞아요. 정도전은 비유하자면, 촌(村)에서 장학금 받고 올라온 서울대 운동권 출신으로 행시(行試)에 패스한 엘리트라고 할 수 있죠. 지금 386과는 달리 당시 신진사대부들은 정말 엘리트였어요.”
 
  —정도전을 386세대처럼 묘사한 이유가 있습니까.
 
  “사실 역사책을 읽으면서 이인임이나 이성계는 그 모습이 금방 그려졌어요. 이인임은 정치력이 뛰어난 사람, 이성계는 변방 출신의 마이너리티. 하지만 지적(知的)인 선비인 정도전의 경우, 그런 모습을 그려내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생각해 낸 것이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史劇에서 팩트는 징검다리”

 
  한영우(韓永愚) 서울대 명예교수 등은 정도전은 모계(母系) 쪽으로 천민(賤民)의 피가 흐르는 데 대해 콤플렉스를 안고 살았다고 말한다. 아직까지 드라마 속의 정도전에게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정도전에 관한 책을 섭렵했다면, 주인공의 내면과 관련해 중요한 요소인 이 부분을 놓칠 리는 없을 텐데 의아했다. 정 작가는 이에 대해 “처음부터 그걸 보여주면 시청자들은 ‘결국 그것 때문에 혁명을 하려는 거였어?’라고 선입견(先入見)을 갖게 될 것 같아서 일부러 다루지 않고 있다”면서 “나중에 정몽주 등에 의해 탄핵당하고 귀양을 가게 될 때쯤 그 문제를 약간 다룰 생각”이라고 말했다.
 
  <정도전>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탄탄한 고증(考證)이다.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들이 제대로 그려지고 있고, 그러한 사실들 사이의 빈 공간을 설득력 있는 허구(虛構)가 잘 메우고 있다.
 
  —드라마를 보니 사실(史實)에 충실한 것 같더군요.
 
  “정통사극을 해보니, 팩트는 징검다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 징검다리 사이가 멀고 징검다리 위는 뾰족하다는 것이죠. 그 옆에는 연못이 하나 있는데 잔잔하고 깊이도 얕습니다. 팩트의 징검다리를 건너는 대신 연못으로 편하게 가고 싶다는 유혹이 들 수도 있죠. 드라마이기 때문에 극적인 재미를 위해 어느 정도 왜곡을 할 수는 있겠지만, 중요한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KBS의 얼굴인 정통사극은 사실을 우선해야죠. 이 점에서는 강병택 감독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KBS였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청률에 연연해야 하는 상업방송이라면 이런 작품을 만들기 어려웠을 거예요.”
 
 
  박영규와 조재현
 
<정도전> 인기의 주역은 이인임(박영규 분)이다.
  <정도전> 첫 회부터 보아온 시청자들은, 지금까지 이 드라마의 인기몰이를 해온 주역은 사실 정도전 역을 맡은 조재현씨라기보다는 이인임 역을 맡은 박영규씨라고 입을 모은다. 이는 <정도전>의 시청자 게시판에 올라오는 반응들을 봐도 확인할 수 있다. 그만큼 박영규씨가 연기하는 이인임은 흡인력이 강하다.
 
  —이인임 역으로 박영규씨를 캐스팅하자는 것은 누구 생각이었습니까.
 
  “강병택 감독이었어요.”
 
  —박영규씨는 코믹 연기자라는 인상이 강한데요.
 
  “저도 강 감독의 얘기를 듣고 처음에는 ‘미달이 아빠잖아’라며 웃었어요. 그런데 강 감독이 ‘<해신>을 한 번 봐라. 진지한 연기도 잘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해신> 1회를 봤어요. 박영규씨는 상단(商團)의 대장으로 나오는데, 그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박영규씨의 이인임 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대본보다 200% 이상 잘해 주고 있습니다.”
 
  —조재현씨가 분한 정도전이 박영규씨가 분한 이인임에게 너무 밀리는 것 아니냐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제가 봐도 그렇고요. <정도전>이라고 쓰고 <간웅(奸雄) 이인임>이라고 읽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드라마 초기에는 이인임이 중심 역할을 하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이인임에게 이입(移入)될 것으로 생각하기는 했어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많이 이입할 줄은 몰랐어요. 저도 당황스러울 정도였으니까요. 재현이 형에게 미안했어요. 전화를 해서 ‘형, 간이 덜 된 음식하고 간이 된 음식하고 놓으면, 사람들은 간이 된 음식 쪽으로 손이 가기 마련이에요. 아직 정도전이 간이 덜 된 상태여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 주세요’라고 했어요. 재현이 형은 전혀 개의치 않더군요.”
 
  —조재현씨의 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합니까.
 
  “사실 재현이 형이니까 박영규, 유동근 선생님들 속에서 묻히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정도전의 캐릭터가 변화하면서 이제 시청자들도 주인공답다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정 작가는 드라마 속 정도전의 캐릭터는 고정된 게 아니라고 말했다.
 
  “정도전의 캐릭터는 몇 번의 변화를 거듭하는 ‘성장하는 캐릭터’입니다. 초기에는 원리원칙에 철저한 유생(儒生)의 모습이었지만, 거평부곡 시절에는 민초(民草)들의 현실을 알아가면서 아파하고 고민하는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굽힐 줄 알고 시니컬하기도 한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어요. 앞으로는 권력을 쥐게 되면서 권모술수를 쓰고, 스승과 친구들에게 못 할 짓도 하는 모습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 保守가 최영 같으면 좋겠다”

 
  정 작가는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드라마의 중심축은 정도전이지만, 주변에서 부침(浮沈)하는 인물들도 그에 못지않은 비중으로 보여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원래 생각으로는 9회까지는 이인임, 18회까지는 이성계, 28회까지는 최영에게 그런 역할을 맡기려 했어요. 그 뒤로는 정몽주, 이방원 등이 그런 역할을 하게 되겠지요.”
 
  —3월 15, 16일 편을 보니 이인임의 실각(失脚)이 얼마 남지 않았던데, 이인임은 어떻게 됩니까.
 
  “드라마에서는 23회에서 귀양을 가게 됩니다. 원래 《고려사》 등에 의하면, 이인임은 임견미, 염흥방 등과는 달리 최영, 이성계에 의해 쫓겨났다기보다는 나이가 들어 퇴직한 후 자연스럽게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것 같아요. 드라마에서는 귀양을 간 후 한 번 더 뒤집기를 시도하다가 정도전에 의해 죽은 것으로 처리될 것입니다.”
 
  이인임이 숙청된 후 권력을 잡게 되는 인물은 최영(서인석 분)이다.
 
  —극 중 최영의 모습을 보면 우리가 아는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는’ 담백한 인물이 아니라, 마음 한구석에 은근히 정치적 욕심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그려지더군요.
 
  “저를 제일 고민하게 만든 캐릭터 중 하나가 최영이었습니다. 역사책을 보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최영의 모습과 너무 달랐어요. 사실 이인임 정권은 어떤 의미에서는 최영과의 연립(聯立)정권이었어요. 또 ‘어, 최영이 왜 이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잔혹한 측면도 있었고, 그의 정치노선도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어요. 그래서 고민 끝에 차라리 융통성 없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우국충정(憂國衷情)의 화신(化身)으로 그리기로 했어요. 저는 우리나라의 보수가 최영 같았으면 좋겠어요.”
 
  —무슨 의미입니까.
 
  “최영의 청렴함을 배웠으면 하는 거죠. 우리나라 보수들이 국가관(國家觀)은 투철하니 그건 굳이 말할 필요 없겠지만, 그 청렴함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배웠으면 좋겠어요.”
 
 
  “고민하는 境界人 이성계”
 
<정도전> 속의 이성계는 고민하는 경계인으로 그려진다.
  —이성계는 어떻게 그릴 예정인가요? 지금까지 보면 순정을 가진 야전군인의 모습과 정치군인의 모습을 다 갖고 있는 것 같은데요.
 
  “안 그래도 이성계 때문에 얘기를 많이 들어요. ‘드라마에서 정도전의 혁명을 그리고 있는 데 대해 외압(外壓)은 없느냐’고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공영방송인 KBS에서 쿠데타를 미화(美化)하는 드라마를 하는 이유가 뭐냐’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박근혜 정부니까 KBS가 이성계를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미화하는 것 아니냐는 거죠. 양쪽 모두 자기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는 건데, 지금 우리나라가 그런 수준은 아니잖아요?”
 
  —드라마 속 이성계는 고민도 많고, 눈물도 많은 사람이더군요.
 
  “이성계는 변방 출신의 마이너리티로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을 끊임없이 고민하는 경계인(境界人)이죠. 정도전이 선악의 경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성계는 선하고 덕(德)이 있는 사람, 그래서 시청자들이 보기에 ‘정치적 수완은 약하지만 임금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만한 사람으로 그려내고 싶어요.”
 
  현재는 극 중 정도전의 동지지만, 나중에 그와 맞서게 되는 사람이 정몽주(임호 분)와 이방원(안재모 분)이다. 이 두 사람의 캐릭터는 어떻게 될까.
 
  “정몽주는 정도전과 함께 개혁을 추진하지만, 나중에 정도전 등 혁명세력의 본색을 알게 되면서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줄 것입니다. 지금은 조용하고 남과 화합하는 모습이지만, 그때가 되면 안에 있던 것이 터져 나오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정도전과 대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예요.”
 
  —나중에 정도전에게 최대의 정적이 되는 이방원은요.
 
  “이방원이 정도전과 대립하게 되는 걸 단순히 왕위계승 구도에서 탈락했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두 사람 간 철학의 충돌로 그리고 싶어요. 법가적(法家的)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대단히 현실적인 사람인 이방원이 그 때문에 신권(臣權)정치를 주장하는 정도전과 충돌하는 것으로…. 인간적으로는 잔인한 부분이 있지만 좋으면 간까지 빼줄 수 있는 사람, 나름의 의리를 가진 사람이 이방원이죠.”
 
  역사 속에서 이방원이 정도전을 칠 때 그의 책사(策士)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하륜(이광기 분)이다. 이인임의 조카사위로 정도전과 동문수학했지만, 정도전이 득세하던 조선 건국 초에는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인물.
 
  —하륜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도 기대됩니다.
 
  “하륜도 정도전처럼 계속 성장하는 캐릭터로 그려질 것입니다. 지금은 이인임의 조카사위면서도 정도전을 존경하는 후배로 나오고 있지만, 정도전이 이성계를 왕으로 만드는 것을 보면서 ‘그럼 나도 나의 왕을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그러면서 정도전급의 책사로 성장하는 인물이죠. 아직까지 비중이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이광기씨가 깊이 있게 잘해 주고 있는 것 같아요.”
 
 
  “이인임 통해 정치의 맛 보여주고 싶어”
 
국회의원 보좌관 시절 개성공단을 방문한 정현민 작가.
  기사 앞머리에서 얘기한 것처럼, <정도전>의 묘미 중 하나는 정치현실을 꼬집는 듯한 생생한 대사다. 이인임 역을 맡은 박영규씨는 “정현민 작가가 정치판에 훈수를 두고 있는 것 같다”고까지 했다. 이 얘기를 전했더니, 정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훈수 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제가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이기 때문에 현실정치를 잘 알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국회의원과 보좌관의 역할은 엄연히 달라요. 보좌관은 보좌관일 뿐입니다. 다만 주워들은 풍월은 많겠지요.”
 
  —실제로 본 정치인의 모습이 극 중 인물들에게 투영되지는 않습니까.
 
  “이인임의 경우는 다소 목적의식을 갖고 만들어가는 캐릭터이기는 합니다. 사서(史書)를 보니 이인임은 대단히 공손하고 붙임성이 있었던 인물이더군요. 그런 사람이라면 제가 경험한 정치인들의 모습을 넣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인임을 통해 시청자들이 정치의 맛과 멋을 느끼게 하고 싶었습니다. 정치인들 가운데는 쓰레기 같은 사람도 있지만, 자신의 철학을 가진 훌륭한 분들도 있거든요.”
 
  —이인임의 모델이 된 정치인이 있습니까.
 
  “제가 본 정치 고수(高手) 여러분의 모습을 녹여 넣기는 했지만, 특정인을 매치시키지는 않았습니다.”
 
  —극 중 이인임은 악역(惡役)이기는 하지만, 절대적으로 악하기만 한 인물은 아니더군요. 오히려 나름의 정의(正義)와 가치(價値)를 갖고 있는 인물로 보였습니다.
 
  “이인임은 수구(守舊)세력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고려 귀족이라는 데 대해, 그리고 고려라는 나라에 대해 프라이드를 가진 사람이었어요. 그런 모습을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이인임뿐 아니라, 다른 등장인물도 일방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인물로 그리지는 않을 생각이에요. 지금은 정도전을 선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런 인물로만 그릴 생각은 없습니다. 세상에 100% 선하거나 악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누구나 한 사람 안에 선악이 섞여 있는 것 아니겠어요?”
 
  정현민 작가는 1970년생. 부산 동아대 신문방송학과를 나왔다. 올해 나이 44세. 생물학적으로는 아니어도 정서적으로는 386세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대학 다닐 때, 데모는 많이 했습니까.
 
  “남들 하는 만큼은 했죠.”
 
  —운동권이었나요.
 
  “부산기공을 졸업한 후 1987~ 1988년에는 창원공단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노조(勞組) 간부로 일하기도 했어요. 노회찬 전 의원이 하던 《매일노동뉴스》 기자로 일한 적도 있고, 한국주택은행 노조, 한국노총 직원으로 일한 적도 있습니다. 그때는 솔직히 민주당도 눈에 안 들어왔죠. 당시 저는 민노당 당원이었으니까요.”
 
  정 작가는 “그 시절 꿈이 언젠가 경남 지방 노동위원장이 되는 것일 정도로 ‘노동’은 나의 관심사였다”고 말했다.
 
  국회의원 보좌관도 노동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했다. 민주당과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을 넘나들면서 다섯 명의 국회의원을 모셨지만, 모두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의원이었다. 그들 밑에서 노동 쪽을 담당했다. 정현민 작가는 보좌관이 된 후 “처음으로 노동부 측의 국정감사 답변서를 받았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스스로 노동 문제에 관해서는 전문가라고 생각했는데, 한 50페이지 정도 읽어보니 꽉 막히는 거예요. 노동부 공무원들이라고 하면 기득권 세력, 공권력만을 대변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단순 이분법(二分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논리 싸움에서 이겨야 했어요. 중요한 건 전문성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서울 신림동에 있는 고시생 상대의 학원을 다니면서 수험노동법을 다시 공부했어요.”
 
 
  “이경재 의원 보며 保守에 대한 생각 바꿔”
 
정현민 작가가 국회의원 보좌관 시절 큰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박인상 전 의원(왼쪽)과 이경재 전 의원(오른쪽).
  —국회의원 보좌관 생활은 어떻던가요.
 
  “그때는 정말 그게 천직(天職)이라고 생각하고 했어요. 모시는 의원님과 호흡만 잘 맞으면 그보다 재미있는 직업이 없어요. 지금도 국회의원 보좌관을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누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한국노총 박인상(朴仁相) 전 민주당 의원님과 이경재(李敬在) 전 한나라당 의원님입니다. 박인상 의원님은 제겐 양아버지 같은 분이었습니다. 점잖고 사람을 부릴 줄 아는 분이었죠. 자기 생각이 분명히 있으면서도 보좌관들에게 많이 물어봤어요. 덕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아닌 것 같으면서도 조금은 자기 욕심이 있기도 하고…. 사실 <정도전> 속 이성계의 모습은 박 의원님에게서 많이 따온 것입니다.
 
  이경재 의원님을 모시면서는 ‘보수에도 이런 분이 있었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합리적, 도덕적이면서, 청렴한 분이었어요. 양복 내피가 떨어진 것을 그냥 입고 다니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을 모시면서 보수에 대한 생각을 많이 바꾸게 되었습니다.”
 
  —민노당 당원이면서 한나라당 의원 보좌관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난리가 난 적이 있는데, 정 작가도 그중 하나였군요.
 
  “그때는 이미 생각이 많이 바뀌어 가고 있던 참이었어요. 북한 체제에 대해서는 원래부터 비판적이었고, 무상(無償)급식 문제에 대해서도 ‘저건 아닌데…’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논란이 되자 바로 당적을 버렸습니다.”
 
  정현민 작가는 “30대 때 국회라는 국가기관에서 근무하면서 여야 의원들을 모셔본 덕에 세상을 균형 있게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확신은 옅어졌지만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마 30대 때의 저였으면, 지금 같은 드라마는 쓰지 못했을 거예요. 칼 포퍼는 젊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사람도 문제지만, 늙어서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인 사람도 문제라고 했다잖아요.”
 
  —지금은 정치적 좌표가 어디쯤 와 있다고 생각하세요.
 
  “중간에서 조금 왼쪽 정도 아닌가 싶어요.”
 
  —그런 정치적 성향이 <정도전>을 쓰는 데 반영이 되나요.
 
  “<정도전>은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의 간판 사극입니다. 거기에 작가가 자기의 정치적 이념을 담으면 안 되지요.”
 
 
  2009년 드라마 작가로 변신
 
  2008년 정 작가는 국회의원 보좌관에서 작가로 변신했다. 국회의원 보좌관의 세계를 다룬 드라마를 쓰기 위해 그를 찾아온 작가와 인터뷰를 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그 작가가 ‘글 쓰는 걸 좋아하느냐’고 묻더군요. 평소 콩트 같은 걸 쓰는 걸 좋아했어요. 전태일문학상 최종심까지 올라간 적도 있어요. 이경재 전 의원님이 저를 뽑은 것도 글솜씨 때문이었다고 하네요. 이런 얘길 했더니, 그 작가가 국회 앞 금산빌딩에 드라마 작가교육원이 있으니 다녀보라고 권하더군요. 2009년부터 다니기 시작했어요. 2년 과정이었는데, 재미있었어요. 국회에서 싸움만 하다가 힐링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2009년 KBS 시나리오 공모에서 정 작가가 낸 <운동권 vs. 운동권>이 가작으로 당선된다. 정 작가는 “앞의 ‘운동권’은 사회운동을 하는 운동권, 뒤의 ‘운동권’은 체육을 하는 운동권”이라고 설명했다. 이 작품은 2011년 <서경시체육회 구조조정 비하인드 스토리>라는 제목으로 전파를 탔다. 이게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당선된 사람은 1년간 KBS에서 인턴십을 해야 했어요. 석 달쯤 보좌관 생활과 병행하다 보니 ‘한번쯤 승부를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족에게 ‘2년 내에 정식 작가로 데뷔하지 못하면, 2012년 총선 후 보좌관 생활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보좌관을 그만두었죠.”
 
  이후 정현민 작가는 2010년 KBS특별기획드라마 <자유인 이회영>, 수목미니시리즈 <프레지던트>를 공동집필,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2011년에는 <남자가 운다> <올레길 그 여자> <수호천사 김영구> 등을, 2012년에는 TV소설 <사랑아 사랑아>를 집필했다. 정 작가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작가로 자리를 잡았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고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루 16시간 이상 일해”
 
  —일주일에 원고 분량이 얼마나 되나요.
 
  “일주일에 2회분을 쓰는데 한 회분이 11포인트로 A4용지 22매 정도 됩니다. 대본 한 장이 2분 길이쯤 돼요.”
 
  —하루에 일하는 시간은.
 
  “16~20시간 정도. 옆에 논문이나 역사책 등을 잔뜩 쌓아놓고 봐야 하기 때문에 현대극을 쓸 때보다 힘이 더 드는 것 같아요.”
 
  —힘들지 않나요.
 
  “175회 정도 되는 일일극도 해봤고, 국회의원 보좌관도 하드잡(hard job)이었죠. 하지만 이게 제일 힘들더라고요. 한두 회만 늦어져도 생방송 해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잖아요. 때문에, 보약 먹고 홍삼 먹으며 하고 있습니다.”
 
  헤어지기 전 정 작가는 “과거 운동했던 것이나, 국회의원 보좌관 시절의 얘기를 꼭 기사에 넣어야겠느냐”고 물었다. “보수주의자인 내가 보기에도 정 작가가 지금 <정도전>에서 보여주는,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지 않는 시각이 좋다. 지금의 정 작가를 있게 한 배경을 설명하는 범위 내에서 옛날 얘기, 그리고 박인상, 이경재 전 의원 얘기는 써도 좋지 않겠나”라고 대답했다. 정 작가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웃으면서 “그러시라”고 말했다. 웃음이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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