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病魔와 싸우면서 90세에 회고록 낸 ‘韓美연합사 창설의 主役’ 柳炳賢 장군

양심상 代筆을 할 수 없었다는 ‘老兵의 마지막 전투’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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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핵미사일을 實戰배치하는 상황은 전쟁을 각오하고 막아야 한다”
  한국군의 대표적인 작전통(作戰通) 장군으로 꼽히는 유병현(柳炳賢) 전 합참의장이 병마(病魔)와 싸우면서 직접 쓴 회고록 원고를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여기 참군인이 있었구나” 하는 감회였다.
 
  유 장군은 5·16 후 군정(軍政) 시절 39세에 잠시 농림부 장관을 지낸 적이 있지만 1948년부터 1981년까지 33년간 줄곧 군(軍)의 요직을 거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영관장교 시절엔 육군본부 작전국 교육과장으로 근무하면서 한국군의 교육체계를 잡았다. 1966년엔 수도사단장으로서 베트남에 파병되었다. 수도사단은 맹호부대로 불렸다. 귀국한 뒤엔 북한군의 대남(對南)도발 극성기에 합참 전략기획국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지내면서 예비군 창설과 대(對)간첩 작전을 주도했다.
 
  1974년엔 5군단장으로서 6사단 지역에서 북한군이 파 들어오고 있던 땅굴을 지하에서 요격하는 작전을 지휘하였다. 철원의 제2땅굴이다. 회고록엔 이 ‘지하(地下)전쟁’ 이야기가 마치 추리소설처럼 전개된다. 이미 파놓은 땅굴을 발견한 적은 전후(前後) 세 차례 있었지만 파고 있는 땅굴의 방향과 깊이를 예측하여 미사일을 격추하듯이 대응 땅굴을 파서 요격에 성공한 예는 한국은 물론 세계전사상(戰史上) 처음일 것이다.
 
  유 장군은 1974년 말 합참본부장 겸 대간첩대책본부장으로 옮겨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될 ‘한미연합사령부’ 창설을 주도한다. 한미연합사 창설은, 그때까지 미군에 종속적이던 한국군의 위치를 대등한 동맹군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전시(戰時)에 미군의 대규모 지원을 제도화한 것이다. 그 뒤 한반도에서 평화가 유지되고 북한의 핵(核)개발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대응(對應) 핵개발을 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것은 한미연합사의 안전판 역할 덕분이라고 할 것이다. 한미연합사 창설은 한미 양국의 국가 지도부가 동의함으로써 만들어졌지만 시종일관 이 협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간 사람은 한국 측 대표 유병현 장군이었다. 유 장군은 ‘연합사는 내 작품’이란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다.
 
 
  全斗煥-레이건 정상회담 成事, 金大中 살려
 
한미연합사령부(CFC) 창설식에서 브라운 미 국방장관이 미 대통령의 축사를 전달했다. 맨 왼쪽은 박정희 대통령(1978.11).
  유 장군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1924년 충북 청원에서 태어난 그가 중일(中日)전쟁, 한국전, 베트남전을 거치면서 익힌 군사적 안목과 애국심 덕분일 것이다. 한미연합사 창설은 중화학공업 건설에 견줄 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업적인데, 유 장군은 그런 일을 하도록 단련되고 준비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미연합사의 산파(産婆)’라는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유 장군은 1979년 10·26사건 때는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었다. 위컴 사령관이 미국에 가 있었으므로 유 장군이 연합사를 대표하여 미국과 협의, 위기를 관리하였다. 12·12사건 직후 합동참모의장이 된 그는 1980년 5월 광주사태 때 미군과 공조, 북한군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신경을 썼다. 최근 《조갑제닷컴》은, 광주사태 때 북한군 1개 대대가 들어왔다는 탈북자의 주장을 반박하는 유병현 장군 인터뷰를 실었다. 대국(大局)을 보는 전략가의 한마디 한마디가 북한군 개입설의 허구성을 조목조목 무력화(無力化)시켰다. 필자는 ‘졸병은 졸병의 시각으로, 대장은 대장의 시각으로 이야기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합참의장 시절이던 1980년 말, 그는 방미(訪美) 길에 오르면서, 레이건 신임 대통령(당시는 당선자 시절)과 정상(頂上)회담을 성사시켜 달라는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밀명(密命)을 받는다. 오랫동안 미군 고위층과 좋은 관계를 가지면서 안보협력을 해왔던 유병현 장군의 진가(眞價)가 외교전선에서도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공화당 상원 총무 베이커 의원, 전 유엔군사령관 베시 대장 등의 도움으로 레이건 당선자의 측근인 리처드 알렌(뒤에 대통령 안보보좌관)을 만나 사형선고를 받은 김대중(金大中)씨의 감형(減刑)을 조건으로 전두환-레이건 정상회담을 성사시킨다. 당시의 비밀접촉 과정과 기록이 이 책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 “내가 김대중을 살렸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더러 있지만 유 장군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음은 이 자료로 입증된다.
 
 
  韓美연합사 해체 반대 운동
 
월남전선의 밀림을 둘러보는 유병현 맹호사단장.
  1981년 6월에 전역(轉役)한 그는 주미(駐美)대사를 거쳐 1986년에 공직(公職)에서 물러났다. 필자가 유병현 장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이 무렵이다. 박정희, 하나회, 5·16, 10·26, 12·12 사건 등의 비화(祕話)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만났다. 유 장군은 5·16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참여하고 군정의 농림부 장관으로 근무하였음에도 정치엔 관심이 적었다.
 
  1952년 육군본부 작전국에서 과장으로 근무할 때 작전국장 이용문(李龍文), 차장 박정희(朴正熙) 대령이 미군과 교감하면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제거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던 사실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고 한다. 유병현 장군은 군 내외의 정치적 격변엔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국군의 발전과 동맹국인 미군과의 협조에 진력했다. 유 장군은 너무 모범적 답변만 하여, 군내(軍內)의 권력투쟁 등 기삿거리를 좇는 기자로서는 좀 심심한 취재원이었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서 전시작전권 환수라는 선동적 용어를 앞세워 한미연합사 해체를 추진하자 80대 노병(老兵) 유병현 장군은 투병(鬪病) 중임에도 더 바빠졌다. 자신이 산파 역할을 한 한미연합사가 좌파 선동에 의하여 위태롭게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연합사 해체의 부당성을 비판하는 책을 펴내고 인터뷰와 기고문을 통하여 반미친북(反美親北) 세력과 싸웠다. 총을 들고 싸운 게 아니라 진실과 애국심을 들고 싸운 것이다.
 
  좌파정권 시절 애국운동에 참여한 예비역 장성들을 보고 느낀 바가 있었다. 과거 권력 동향에 관심을 갖고 민감하게 움직였던 정치성향의 군인들은 애국전선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 유병현 장군처럼 6·25와 베트남전에서 싸웠던 순수한 군인들, 그리고 대령들이 투쟁에 앞장섰다. 권력의 끈이 사라졌을 때 무력해지는 사람과 더 용감해지는 이들로 나눠졌다.
 
 
  15명의 副官 중 12명이 장성 진급
 
   필자가 유병현 회고록 원고를 제대로 읽은 것은, 지난여름 파리로 가는 대한항공 점보기 안에서였다. 12시간이 걸리는 비행시간을 활용하려고 원고를 갖고 탔다. 유 장군의 90평생을 압축적으로 읽었다.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고, 명작을 읽는 것처럼 감동적이었다. 언론과 정치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참호와 밀림과 상황실에서 오로지 군대를 위하여, 조국을 위하여, 준비하고, 싸우고, 고심(苦心)하였던 일꾼이 있었다. 그런 일꾼형 군인들에 대하여 필자가 너무 무관심하였다는 미안함도 우러나왔다.
 
  유병현 장군은 이 회고록을 투병 중에 썼다. 그런 점에서 그의 마지막 전투였던 셈이다. 유 장군은 <여러모로 부족한 나에게 40년이나 공직에서 봉사할 기회를 준 나라에 보은(報恩)하기 위하여> 썼다고 한다.
 
  그는, 86세에 급성폐렴에 걸려 중환자실을 왕래한 후유증으로 하루 한 끼는 액체영양식을 직접 위에 투입해야 한다.
 
  <한 발은 기동성을 잃고, 한 눈은 실명(失明)하여 3급 장애자가 되었다. 중환자실에서 사경(死境)을 헤매다 보니 새삼 필자가 걸어온 길이 특이하고 남다른 점이 많았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부관(副官)과 보좌관들을, ‘군사학파 문하생’이라고 부르는데, 15명의 부관 중 12명이 장성으로 진급하였다. 유 장군을 따르던 이들이 강력하게 권하여 5년간 투병 중 집필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대필(代筆)하기엔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군사편찬연구소 양영조(梁寧祚) 박사가 회고록을 읽고 출판을 권했고, 유병현 장군이 필자와 의논한 것은 2012년 여름이었다.
 
  유병현 장군은 머리글에서 <심한 병마와 싸우며 아흔인 내가 이 글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천운(天運)이었다>고 썼다. 대한민국이 유병현 장군 같은 인물을 가진 것도 천운이란 생각을 했다.
 
 
 
戰中세대 生殘者의 증언

  유병현 장군의 회고록은 적군(敵軍)보다 더 무서운 중병(重病)과 싸우면서 썼다는 점에서 ‘노병의 마지막 전투’인 셈이다. 중일전쟁-한국전-베트남전-대간첩전 등 평생을 전투 속에서 살아온 전중(戰中)세대 생잔자(生殘者)의 육성(肉聲)을 남기고 싶어 휠체어를 타고 나온 노병과 세 시간 대화를 가졌다.
 
 
 
中日전쟁 중 만리장성에서 광복을 맞다

 
  —평생을 전투와 벗하면서 살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분들이 우리 군인 중에 별로 없는데, 나는 중국에서 전투를 했어요. 욕심이 많아서 일본에서 두 번째로 어려운 학교에 재수를 해서 떨어졌어요. 할 수 없이 동경이과(理科)대학에 갔는데 2학년 때 징병(徵兵)으로 끌려갔죠. 1944년 9월이었습니다. 일본군 전차(戰車) 제3사단 소속이 되었습니다. 기동보병 제3연대 제1대대 1중대. 근무 중 간부 후보생으로 합격이 되어서 예비사관학교에 갔다가 거기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장교까지는 되지 못했고 중사로 예편했습니다. 허난성(河南省)에 주둔했습니다.
 
  일본은 전차사단이 없었습니다. 기병사단이 있을 뿐이었죠. 노몬한 사건 때 기병사단이 들어갔다가 소련의 기갑부대한테 졌죠. 기병사단이 망가졌다는 걸 알리지 않고 현지에서 전차사단으로 개편했습니다.
 
  모체(母體)는 기병 제3사단이었어요. 만주에 있던 것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끌고 왔죠. 연대장이 이은(李垠) 전하와 사관학교 동기생이었어요. 그래서 나를 개별적으로 불러 면담을 하면서 ‘앞으로 한국 장병들이 많이 오는데 모범적인 사병이 되어서 장교로 출세하라’고 하더군요.”
 
  —광복은 어디서 맞았습니까?
 
  “만리장성에서요. 1945년 8월 소련군이 만주로 쳐내려 왔단 말이에요. 소련군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예비사관학교를 여단 편성으로 개편, 만리장성에 배치했지요. 몽골을 내려다보는 팔달령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소련군한테 무장해제당했습니까?
 
  “마오쩌둥(毛澤東)의 팔로군(八路軍)에 포위를 당했어요. 그대로 있다가는 쓸데없이 팔로군과 일본군의 전투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일본군과 굿바이 했습니다. 다른 한국사람 세 명과 같이 걸어서 베이징(北京)까지 갔죠. 거기서 8개월 동안 피란민 수용소에 있다가 인천항을 통해 귀환했습니다. 1946년 5월이었습니다.”
 
 
  陸士에서 朴正熙를 만나다
 
맥나마라 미 국방장관 일행을 안내하는 유병현 맹호사단장.
  —광복 후의 인천항이 좀 혼란스러웠죠?
 
  “발진티푸스에 걸렸어요. 돌아오는 배 속에서 열흘 동안을 앓았습니다. 인천항에 내려서 갈 곳이 없는데 환자라고 해서 어느 여관에 집어넣어 줬어요. 5일 동안 정신을 못 차렸어요. 여관 주인이 약을 가져다 먹인 것 같아요. 주인이 경찰관을 불러왔어요.
 
  겨우 일어나서 청주 고향으로 갔지요. 집으로 들어가니 모친이 마루에 앉아 계시더군요. 광복 후에 여러 곳에서 피란민이 오고 거지들이 많이 왔는데, ‘아이고 저 젊은 사람, 그래도 내 자식이 저렇게 돼서라도 돌아오면 좋겠는데’라고 하시면서 나를 쳐다보고 계세요. 나는 병이 심해서 얼굴이 붓고 입은 것도 거지였었죠. 다가가서 어머니라고 부르려고 했더니 ‘이 사람아, 그만둬!’라고 하십디다.”
 
  —육사(陸士) 특(特)7기로 들어가신 게 1948년 8월 17일입니다.
 
  “박정희 대위가 중대장이었는데 후보생들이 말을 잘 안 듣는다고 기합을 줬죠. 두 사람이 구보 중에 죽었습니다. 그랬더니 사관학교가 일본식 교육을 하고 있다고 군사고문단의 지휘검열반이 나왔습니다.
 
  검열 후 내가 누명을 썼습니다. 내부 사정을 밀고(密告)했다고. 밀고자는 다른 사람이었어요. 내 성적을 보니 200명 중에 16등 했었어요. 내무성적을, 졸업식 전에, 밀고자라고 0점을 주었어요. 나는 ‘한국이 이런 줄 몰랐다’고 화를 내곤 집으로 돌아갔어요. 한 달 후에 학교에서 다시 오라고 하더군요. 진상을 알아본 모양입니다. 7기로 임관하라고 권해요. 내가 조건을 달았죠. 사관학교에 보직을 준다면 임관하겠다고. 그래서 사관학교 교무처 보좌관 겸 연역(硏譯)처장 대리였어요, 소위가.”
 
  —그때 구보를 시켜 학생을 죽게 한 박정희 중대장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후보생 중에 제법 나이 든 사람이 있었는데 젊은 교관들한테 수업 중에 ‘내 딸이 이화여대에 있는데…’ 이런 농담을 걸다 보니 ‘이놈들 안 되겠다’고 혼을 낸다고 구보를 시킨 거죠. 그 사고가 나자 박정희 대위는 중대장실에 들어가서 3일 동안 근신(謹愼)한다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보직 해임이 됐죠.”
 
  —맹호사단장이었는데, 베트남전에서 미국이 이길 방법이 있었나요?
 
  “그런 방식으로는 안 됐었어요. 나는 몇 번 미국사람한테 이야기했어요. 미군이 쓰는 장비를 나에게 줄 수 없느냐? 나에게 주면 맹호사단에서 몇 배의 전과(戰果)를 올릴 수 있다고요.”
 
  —기본적으로 정치 전쟁이었잖아요? 결국은 국민들의 마음을 잡는 전쟁인데 미국이 거기서 실패하니까 진 거죠. 베트남이 적화(赤化)된 것은 민심도 넘어갔지만 직접적인 이유는 1973년 평화협정 체결 이후 주월(駐越)미군이 철수한 것 때문 아닙니까? 17도선 남쪽에 내려와 있던 월맹(越盟) 정규군은 철수하지 않고. 이게 군사적인 균형을 부숴버리니까 결국은 그렇게 된 게 아니겠습니까? 베트남평화협정 맺는 거 보시고 유 장군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끝났다고 봤습니다.”
 
  —베트남 공무원들도 적군 지도자인 호치민(胡志明)을 존경했다던데요.
 
  “호치민을 민족주의자라고 알고 있었죠. 베트남사람은 공산주의가 뭔지 몰랐었어요. 오랫동안 프랑스 통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을 독립주의자로 인정하고 있었죠. 그래서 호치민을 지지했던 거죠. 공산주의자라고 해서 지지한 것은 아니었어요.”
 
  —민족주의를 이용하니까 막을 수가 없었군요.
 
  “김일성이라는 놈이 그 흉내를 내지 않았습니까.”
 
 
 
韓美연합사 發想

 
  —한미연합사는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자는 게 아니라 논의하는 과정에서 발전적으로 진화(進化)해 갔더군요? 처음부터 한미연합사를 그린 건 아니잖아요?
 
  “나는 (처음부터) 그렇게 그렸습니다. 주한미군에선 ‘그것도 하나의 생각이다’ 해서 미(美) 본국(本國)에 보고를 했더니 ‘한국과는 그런 것을 할 수 없다. 동양의 어느 나라도 그렇게 상대하지 않았다. 유럽은 나토(NATO)를 만들었지만. 그러니 전투상황실 정도로만 만들자’라고 했던 거죠. 나는 처음부터 나토하고 똑같은 걸 만들려고 했습니다.”
 
  —미국도 안 된다고 하다가 논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가게 되고, 그중에 스틸웰이나 베시 같은, 우리를 이해해 주는 분들을 만난 게 아주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한미연합사를 추진하는 데 유 장군을 가장 많이 뒷받침해 준 분이 누굽니까?
 
  “내가 책임지고 하는 일이기 때문에, 저를 믿어주셨어요. 해볼 수 있는 데까지 해보라고는 했지만 적극적으로 밀지는 않았어요.”
 
  —박정희 대통령은 어땠습니까?
 
  “박 대통령도 이렇게 말씀했어요. ‘글쎄…. 그 사람들이 들을까? 유 장군, 해봐.’”
 
  —고군분투(孤軍奮鬪)한 거군요.
 
  “미움을 많이 샀어요. ‘저 친구 합참본부장 하더니 그거 만들어서 부사령관 자리로 가서 대장 되려고 한다느니, 그 자리로 가서, 미국사람과의 협력관계에서 키 포지션에 앉아서 국방장관, 합참의장, 3군 총장의 영력을 약화시키려고 한다’ 등등.”
 
 
  “戰作權 還收는 잘못된 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전시(戰時) 작전통제권 ‘환수’(還收)라는 말을 썼죠. 이 환수라는 말은 잘못된 말이죠?
 
  “잘못된 거죠. 작전통제를, 한미(韓美) 양국 대통령이 같이하는데 뭘 환수합니까?”
 
  —‘환수’는 한미연합사를 해체하려는 선동에 써먹으려고 만든 거지요. 주식회사로 치면 지분을 50대 50으로 같이 가지고 있는 건데, 자기는 없는 걸로 하고 환수라고 억지를 부린 겁니다. 작전통제권과 작전지휘권을 혼동(混同)하는 이들이 많은데 가장 큰 차이는 뭡니까?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작전지휘라고 했는데 그다음부터는 작전통제로 됩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과 교환한 서신을 보면 두 가지의 뜻이 혼용되어 있습니다.
 
  작전지휘(Operational command)라는 말도 있고 작전통제(Operational control)라는 말도 있습니다. 미국 합참에서 《Joint military terminology》라는 사전을 냈습니다. 거기에 작전지휘(Operational command)는 옛날 말이고 작전통제(Operational control)가 지금 쓰는 말이다, 이렇게 수정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command라고 하는 것은 인사, 군수(軍需) 모든 걸 말하는데, operational이 붙으면 작전에 대한 것만 통제한다는 뜻입니다. 작전에 대한 통제도 한계가 있어요. 어느 지역에서 어떠한 조건으로, 언제서부터 언제까지 그런 것을 정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control은 한정적입니다. 이건 주권(主權) 문제가 아닙니다.”
 
  —미군이 작전통제권을 가져도 인사권은 없죠?
 
  “인사권은 전혀 없습니다.”
 
  —한국전쟁 중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사령관한테 넘겨준 것은 작전통제권이죠?
 
  “‘대전 협정’에 보면 ‘Operational control’을 인수했다는 식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유 장군님은 책에서 이 선택이 아주 잘한 거라고 말씀하셨더군요.
 
  “유엔군을 창설하고 유엔군사령관을 임명하면서 한반도 전쟁에서의 작전은 유엔군사령관에 전임하도록 한다는 것을 미국에서 결정했을 때 이승만 대통령도 ‘우리 군은 여기서 이 이상 버틸 수가 없다. 전쟁의 성공여부에 대해서는 미국에 일임해야 마땅하다. 그것이 살길이다’ 이렇게 과감하게 결정한 거죠.”
 
  —노태우 대통령 때 평시(平時) 작전통제권을 우리가 가져왔는데, 한미연합사령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몇 개 사안 중 ‘정전(停戰)협정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부분’ 항목과 관련,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연평도 포격을 당했을 때 우리 합참에서 북한을 폭격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어려웠다. 한미연합사령관의 허가를 받아야 했었다. 그래서 폭격을 못 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교전(交戰)규칙은 대칭적인 무기를 가지고 대응한다고 되어 있죠. 적의 포격에 대하여 전투기로 폭격한다는 것은 유엔사사령관(연합사사령관)이 가지고 있는 권한에 속할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폭격을 명령했으면?
 
  “반공(反共)포로를 석방한 이승만 박사와 비슷한 사람이 되죠.”
 
  —이명박 대통령이 우리 공군에 폭격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을 때 한미연합사령관이 ‘안 됩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어렵죠. 양국 정상(頂上) 간의 문제이지 군사령관과 대통령 사이의 문제는 아니죠.”
 
 
  “戰區사령부 개편도 방법”
 
1966년 무렵 베트남전선을 방문한 야당 박순천(朴順天·오른쪽) 총재와 김대중(金大中·왼쪽) 대변인. 1980년 말 유병현 합참의장은 미국에 가서 레이건‐전두환(全斗煥)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데 사형선고 받은 金씨의 감형이 조건이었다.
  —최근에 누가 한미연합사 전력(戰力)을 돈으로 환산(換算)해 봤다고 합니다. 1조3000억 달러라고 하던데요. 전시에 미군 60여만 명이 동원되는 전력까지 다 합쳐서 그렇게 계산한 모양입니다. 박근혜 정부에선, ‘1조3000억 달러의 전력을 한미연합사 체제가 확보하고 있다. 이걸 왜 우리가 해체해야 하느냐’는 이야기를 하면서 무기(無期)연기하는 쪽으로 논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미연합사는 (해체를) 연기하거나, 전구(戰區)작전사령부로 개편해서 우리가 사령관 자리에 앉고 부사령관을 미국사람으로 하는 체제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것보다는 북한이 지금 핵을 계속 개발하니까, 이걸 이유로 해서 무기연기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게 쉬운 방법 아닙니까?
 
  “북한의 핵(核)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미국의 확고한 계획이나 보장이 없다면 연합사를 쉽사리 해체해서는 안 되죠. 앞으로의 동북아(東北亞) 국제 정세를 내다볼 때 중국하고의 협력도 필요하고, 북한에 대해서 선전·선동의 재료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전구작전사령관 체제로 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입니다.”
 
  —미군이 사령관을 맡지 않으면 미국의 책임감이 약해지잖아요?
 
  “그것은 하기 나름입니다. 지금도 말입니다, 연합군사령관 체제라고 하더라도 지상군은 우리 한국군 사령관이 맡죠. 전구사령부가 된다고 해도 공군은 미군사령관 아래 그대로 둬야죠. 그것만 똑같이 만들어 놓으면 누가 하더라도 괜찮아요. 이북(以北)에서, 우리가 미국의 군사적 속국(屬國)이라고 비방하는데, 거기에 반박할 수도 있고요.
 
  앞으로 중국이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한국에 있는 미군기지를 제거하려 할 것입니다. 그에 대비해서 ‘우리가 지휘하는 것으로 이렇게 만들었는데’라고 하면 외교적으로 유리한 점이 있죠.
 
  미국사람들이 북한 핵을 완전히 제거해 줄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 이것을 보장받은 다음에 결정할 사안입니다. 예를 들어 핵실험을 또다시 한다면 때리겠다, 미사일로 미국 본토까지 사격할 수 있는 것이 개발되기 전에 반드시 제거하겠다, 한미 간에 탑시크릿(top secret)으로서 국가 간 협약이 있어야겠죠.”
 
 
  북한 核미사일 實戰배치를 금지선으로 설정해야
 
  —북한이 핵을 소형화(小型化)해서 미사일에 장착, 핵미사일을 실전(實戰)배치하는 상황은 절대로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죠? 이걸 하나의 레드라인(redline), 금지선으로 봅니까?
 
  “절대적이죠. 몇천 발 갖고 있는 미국하고 북한이 무슨 상대가 돼요. 우리가 문제예요. 우리에 대한 압박이 심해질 거예요. 그때 평화를 이야기하고 민족주의를 이야기하는 놈들이 나올 겁니다. 종북(從北)세력들이 가담해서 북한에 양보하자고 할 거예요.”
 
  —북한이 핵미사일을 실전배치한다는 상황을 가정한 다음에, 미사일방어망(MD)을 확실히 하면 어떻습니까?
 
  “발사 후 탐지해서 대응하기에는 너무나 근(近)거리입니다. 100% 막을 수가 없어요.”
 
  —지금 북한이 핵미사일을 발사하면 서울 상공까지 오는 데 대략 7분 걸리는 걸로 나옵니다. 서울, 수도권에 경제력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김정은 입장에서는 쓰고 싶은 유혹이 생기겠죠? 수도권이 인질로 잡히는 상황이 옵니다. 그런 상황이 되면 미국의 핵우산도 작동할 수가 없다는 거죠.
 
  “늦죠. 그 단계에 들어가기 전에 제거해야 합니다. 북한이 그 수준까지 도달하게 해놓고 협상하자는 것은 안 됩니다.”
 
  —북한이 핵으로 먼저 때려 서울이 완전 초토화(焦土化)되고, 이후 미국이 평양을 핵으로 공격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한반도 전체가 공멸하니까, 핵우산의 작동이 어렵겠군요. 문제는 이 상황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는 거죠. 북한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 말고.
 
  “1차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외교, 국제협력이죠. 다행히 중국이 북한의 핵 저지에 협력하고 있지 않습니까? 러시아도 거기에 동조해 주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도 그렇죠. 국제협력이 성립되면 북한의 핵개발 진전을 저지할 수는 있을 겁니다. 북한이 핵을 완전히 무기화하는 것은 기술상 자력(自力)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외국에서 도입해야 할 기술과 부품이 많습니다. 그것을 완전히 차단해야죠. 외교적 국제적 노력으로 막아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안 되면 그때는 북한에 경고해야죠. 그 이상 하면, 먼저 때리겠다고.”
 
 
  “中, 北核 저지에 협조할 것”
 
  —핵미사일 실전배치를 일종의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는 걸 미리 공개할 필요가 있죠. 이런 경고는 한국과 미국이 합니까 아니면 유엔안보리를 통해서 합니까?
 
  “한국하고 미국이 하되 유엔의 협조를 받아야죠.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이것은 한반도의 전쟁뿐 아니고 세계에 악영향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국제적인 공조가 조성돼야겠지요.”
 
  —중국이 북한의 핵미사일 실전배치를 막는 데 협조할 것이라고 보십니까?
 
  “할 것입니다. 중국은 꿈을 꾸고 있지 않습니까? 세계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던 제1등국의 영광을 되찾는다. 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 북핵(北核)은 저해요인이 되죠.”
 
  —그 저해요인이란 의미는, 북핵 문제 때문에 미국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군사력을 집중시킨다는 의미죠? 중국은 일본이나 한국이 핵개발을 할지 모르는 상황을 두려워하겠죠. 그래서 우리도 대응 핵개발을 해야 한다, 자위적 핵개발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국제사회가 북한의 핵개발을 막지 못한다면 우리도 NPT 10조에 따라서 탈퇴하고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하면 우리도 포기한다’는 조건을 달면서 대응 핵개발을 하고, 필요하면 국민투표라도 부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여론의 지지도 압도적이고요.
 
  “논의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실행에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핵에 대해서 얼마나 신중하고 얼마나 위협을 느끼고 있느냐 하는 것을 국제적으로 알리기 위해서는 그런 말도 할 수 있습니다만 실질적으로 그런 길에 들어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戰術核 再배치 필요 없지만…
 
레이건 미 대통령 부처(夫妻)와 함께(1983).
  —북한의 핵미사일 실전배치에 대응하여, 이미 철수한 미국의 전술핵(戰術核)을 재(再)배치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봅니까?
 
  “필요 없습니다. 할 수가 없어요. 전술핵을 가져오면 보관하고 관리하는 데 여러 가지 부수적인 문제가 생깁니다. 탄약고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적(敵)에 중대한 목표를 제공하는 겁니다. 핵무기는 어디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어디서부터 사격할 수 있느냐는 능력의 문제입니다. 해상도 있고 공중도 있고. 능력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전술핵을 굳이 우리 땅에 가질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가지려고 하면 북한이 거기 대응하기 위해서 핵을 개발한다는 구실만 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전술핵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가지고 북한을 압박해야 합니다.”
 
  —나토에 이런 제도가 있습니다. 뉴클리어 셰어링(Nuclear sharing)이라고 해서 ‘독일의 미군기지에 있는 전술핵무기에 대해서는 전시에 독일 정부도 공동사용권을 갖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핵개발을 안 한다면 전술핵을 재배치해서 그 정도의 공동사용권을 가지는 게 북한 핵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책이 아닐까요? 북한이 핵미사일을 실전배치하는 상황을 막아야 하지만, 막을 수 없을 때는 이 방법도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막지 못한다면 왜 그렇게 못 하겠습니까. 그때는 미국이 가진, 공중에서 투하할 수 있는 핵을 한국에 가져와서 우리 공군이 투하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까지 강구해야죠.”
 
 
  “NLL線도 못 지키는데 面을 어떻게 지키나”
 
  —서해북방한계선, 즉 NLL이 장군님이 합참에 있을 때는 남북 간에 문제가 된 적이 없었습니까?
 
  “그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해군력이 약해서 도서(島嶼)방어가 참 어려웠을 텐데요, 어떻게 지켜냈습니까?
 
  “북한도 상륙작전을 실시할 만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만, 합참본부장이라는 사람의 직능(職能)이 그땐 좀 컸었어요. 내가 대미(對美) 관계의 초점이 되어 있었고 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적기(敵機)가 날아오지 않습니까, 레이더에 탐지됩니다. ‘넘어오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라고 공군참모총장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옵니다. 합참본부장은 뭐라고 말해야 합니까? ‘교전규칙대로 하세요. 넘어오면 때리세요.’ ‘본부장, 그렇게 해도 되겠어요?’ 내가 말하죠. ‘그것이 교전규칙입니다.’ 그러고서 국방장관한테 ‘어떻게 할까요’라고 이야기하면 ‘나한테 그런 것을 물어봐?’라고 성을 내요. 다음 날 아침까지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내가 조치를 한 다음에 ‘어젯밤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라고만 보고하죠.”
 
  —노무현 정부 때, NLL 위에다가 공동어로수역을 남북 등면적(等面積)으로 설정하고 여기서 군대는 빼고 경찰이 방어하도록 한다는 발상이 나온 적이 있는데, 이 개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안 되죠. 이북에서는 경찰하고 군의 구별이 없습니다. 이북은 어선(漁船)도 무장합니다. NLL이라는 선(線)도 지키지 못하는데 면(面)을 어떻게 지킬 수 있습니까?”
 
  —노무현 때 제주해협(남해안과 제주도 사이)을 북한에 열어 북한 배가 지나다니도록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잘못이죠. 과거에도 제주도와 남해안을 통하여 북한 간첩들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이 해역(海域)을 열어놓으면 이북의 배들이 지나가면서 간첩선을 하나씩 내려놓고 갈 수 있어요. 우리가 사전에 막을 수도 없고 내려놓고 간 간첩선을 추격해서 격침하기도 어렵지요.”
 
  —회고록에서 노무현 정권 때 만든 국방장기계획을 비판했는데, 몇십 년을 상정(想定)한 군사계획은 할 수가 없다는 말씀이죠?
 
  “35년 동안 군에 있으면서 계획을 많이 세워봤습니다만, 실천되지 않는 것이 계획이에요. 목표 달성에 노력하기 위해서 (계획을) 만드는 것이지, 계획대로 달성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요. ‘그걸 다 하겠다’라고 장담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5년 정도의 계획이면 충분하죠. 10년 정도의 ‘목표계획’은 됩니다. 그 이상은 안 됩니다.”
 
  —한미 간 합동작전개념을 미일(美日)동맹 수준으로 한다는 말도 있었군요?
 
  “노무현 때 있었죠.”
 
  —이 사람들도 나름 머리를 쓴 거네요?
 
  “(웃음) 저희가 뭘 안다고…. 기가 막힐 노릇이지.”
 
  —저들 이야기는 한미 간은 너무 가까우니까 미일로 하면 조금 느슨할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렇죠. 미국하고 일본은 상설(常設)협의기구가 없어요. 일이 일어나면 협의한다는 거죠. 주일미군사령관하고 방위성 장관이 필요하면 회동해서 협의한다는 거죠.”
 
  —일본 자위대는 한미연합사를 부러워하겠네요?
 
  “한미연합사를 만들었을 때, 일본에 갔더니 일본 군인들이 나를 영웅시합디다. 필리핀, 인도네시아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일본에 《군사연구》라는 잡지가 있었어요. 거기에서 (나에 대해) 뭐라고 썼느냐 하면 ‘일본에는 무사도(武士道)가 없어졌다. 우연하게 알아낸 것은 한국에 이런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야말로 일본의 무사를 능가하는 장군이다’라고 쓴 기사가 있었어요. 어떻게 그런 것을 만들었느냐고 격찬하더라고요.”
 
 
  “일본에 유엔司 후방기지 있어”
 
  —통일과정에서 아마 이런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요. 중국이 한국의 통일을 인정하는 대가로서 한미동맹을 해체하라고 요구할 것 같습니다. 남한의 종북세력들도 그때쯤 되면 종중(從中)세력이 되어 거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떻게 대응하는 게 좋을까요?
 
  “거기에 대해서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연합사를 그대로 유지하느냐, 전구사령부로 개편하느냐를 잘 비교 검토하면서 취사선택할 수 있겠죠. 한미동맹 해체는, 국제법적으로도 강요할 수 없습니다. 동맹도 마음대로 못하고 따라다닌다면 독립국가가 아니죠.”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에 간 이후 우리 외교가 친중반일(親中反日) 노선 비슷해졌어요. 한일 관계가 나빠지면 한미일(韓美日)동맹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잖습니까?
 
  “지장을 받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유엔사의 후방사령부가 일본에 있는 것은 아시지요?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은 일본을 중계기지로 삼지 않고서는 직접 한국에 지원을 하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안보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는 일본과의 관계가 좋아져야 됩니다.”
 
  —장군님이 책에 쓴 대로 앞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유엔사령부(UNC)가 전쟁을 지휘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연합사가 하는 것이지. 그런데도 UNC의 지휘를 받아야 합니까?
 
  “UNC는 그대로 놔둬야 합니다. UNC의 작전을 지원하는 걸로 해서 연합사를 운용해야 합니다. UNC를 그대로 둬야 미군뿐만이 아니고 6·25 때 참전했던 16개국을 다시 불러들일 수 있고, 국제적인 지원은 UNC를 통해서 받아야 합니다. 한미연합사령부가 대외적인 교섭을 다할 수는 없습니다.”
 
  —잘못하면 UNC를 유엔안보리가 관할하니까, 유엔안보리에서 이상한 결의를 해버리면 불리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불리하게 되죠. 중국 등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개성공단을 군사적 관점에서는 어떻게 봅니까?
 
  “공단(工團) 지을 때 나는 언론 기고문에서, 북에서 내려오는 접근로가 크게 개방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위험이 됩니다. 공단이 북한의 전진(前進) 군사기지로 전환되지 않도록 예의 감시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개성공단에 단독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고 합작(合作) 기업을 만들거나 외국 기업과 같이 들어가는 것이 좋다고 썼습니다. 그것이 지금 이뤄지는 것 같아요.”
 
  —문제는 천안함 같은 사건이 한 번 더 났을 때 우리는 북한에 대해서 응징, 보복을 해야 되는데 그때 개성공단에 수백 명의 한국인이 있으면 응징이 어렵게 될 것입니다.
 
  “국제적으로 보호받도록 해야지요. 인질로 잡히면, 1사단이나 우리 부대는 무엇 때문에 있습니까?”
 
  —그러면 전쟁으로 확대되잖아요.
 
  “그렇죠. 그런 (전쟁을 불사할) 각오가 있다는 것을 북한에 알려놓아야 합니다.”
 
 
  李承晩 대통령 추억
 
  —이승만 대통령은 건군(建軍)의 아버지 아닙니까? 그분이 군 출신은 아니지만 대전략가죠. 어떻게 그게 가능했다고 보십니까?
 
  “그분은 박사 학위를 국제법 관련 논문으로 받으신 분 아닙니까? 몇 번 그분을 뵌 일이 있습니다.”
 
  —어떤 인상을 받았습니까?
 
  “6·25 때, 그러니 1950년 8월인데, 내가 미25사단에 연락장교로 나가 있을 때입니다. 대통령께서 진해에서 마산으로 오는데 터널이 막혀서 보트를 타고 오셨어요. 보트가 작고 안벽(岸壁)이 높아 올라오시질 못했어요. 내가 뛰어 내려가서 제 등에 올라타시라고 했죠. 업어보니 대통령이 마르셨어요. 외양으로는 괜찮게 보이던데 전쟁의 고통으로 참 가벼웠어요.
 
  두 번째로 뵌 것은 서울 수복 직후입니다. 정말 행복한 안색(顔色)이더군요. 1사단이 경무대 앞에 있었기 때문에 강문봉 사단장하고 참모인 제가 경무대에 갔었죠. 경무대 마당에 심어놨던 애호박이 있어서 그걸로 점심을 만들어 잡수시는데 식사 후에 이렇게 틀니를 빼시잖아요? 뺀 걸 보니까, 아이고 이 양반이 이승만 대통령인가. 얼굴이 전혀 달라졌어. 숭늉을 달라고 하시더니 우물우물 하시고 틀니를 씻어서 넣으시는데, ‘한 노인이 여기 계시구나’ 싶었죠.”
 
  —이승만 대통령은 군인들을 참 좋아하셨어요.
 
  “좋아하셨죠. 그다음에 뵌 것은 1956년일 것입니다. 저를 경무대로 부르셨어요. 강영훈(姜英勳) 장군하고 같이. ‘전쟁을 치르다 보니 역시 애국자는 군인들이더라’면서 ‘외무부에 말을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인재가 없어. 자네들 두 사람이 외무부에 가줄 수 없겠느냐’고 하시더군요. 강영훈 장군은 영리하신 분이에요. ‘예. 말씀하신 뜻은 잘 이해했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라고 했어요.
 
  이 대통령이 다음엔 나를 보시더군요. ‘저는 그대로 군복을 입도록 해주십시오. 저는 지금 국방대학원을 창설하고 있습니다. 이 사업을 완성하는 것이 저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더니 안고 있던 강아지를 탁 내던지셔(웃음). 안면에 경련이 일어나는데 대통령을 대면(對面)한 그 자리에서 ‘노’(No)라고 한 것은 내가 처음이다 이거지요.”
 
 
  光州에 북한군 1개 대대가 들어왔다?
 
  몇 달 전 5·18 무렵, 종편 채널에서 ‘광주사태 북한군 개입설’을 보도했다. 1980년 광주에 1개 대대 600명 규모의 북한군이 급파됐다는 것이다. ‘직접 광주에 왔었고 국군과 교전해 3명을 사살(射殺)했다’는 자칭 북한 특수부대원 출신의 탈북자까지 등장했다. 그 뒤 국방부는 ‘북한군 광주투입설’을 공식 부인했고, 종편 방송들도 탈북자들의 증언을 검증,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으나 아직도 믿는 이들이 적지 않다.
 
  당시 합참의장으로서 한국 방어를 책임지고 있었던 유병현 장군이야말로 가장 권위 있는 해답을 할 수 있는 분이다. 그는 5년간 대간첩대책본부장을 역임했고, 군사정전위원회 한국 측 수석대표로 북한을 상대해 그들의 습성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다. 《조갑제닷컴》의 이지영(李知映) 기자가 먼저 광주사태가 일어났을 때 합참의장으로서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를 물었다.
 
  “계엄사령관은 광주사태를 책임지고 조치하고, 나는 광주사태가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진력(盡力)하는 것이 책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과거 북한의 무장공비들은 주로 변산반도에 상륙해 광주, 지리산 지역으로 침투했습니다. 해군참모총장에게 각별히 부탁해 해군의 가용(可用)한 전력을 변산반도 쪽으로 돌려 이북의 특전부대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조치했어요.
 
  한국에서 (안보상) 어떤 사태가 발생하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사태가 확대되지 않도록 반드시 미국과 협조해야 합니다. 광주사태 초기에 위컴 한미연합사령부 사령관을 만나 일본에 있는 미7함대의 항공모함전대(戰隊)를 한국 수역(水域)에 파견하도록 조치했습니다. 북한에 ‘절대 광주사태를 악용하려 하지 마라. 그와 같은 행동을 취할 경우 한미연합군은 철저한 대처를 하겠다’는 경고를 주려는 의미였지요. 마찬가지로 일본 《아사히(朝日) 신문》을 이용해 매일 미7함대의 동태를 보도하도록 했습니다. 북한에 정보가 들어가도록 ‘쓰고 싶은 대로 써라’며 보도통제도 하지 않았어요.
 
  또 하나, 미국무성으로 하여금 ‘북한은 광주사태에 절대 편승하지 말라.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경고를 발표하도록 했습니다. 당시는 거의 군사정권이었고 외무부에는 안보 분야의 조직이 되어 있지 않아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결국 국방부에서 내가 중심이 되어 조치를 취했어요. 후에 최규하 대통령이 당시 외무부 장관을 불러 ‘당신 봉급의 반은 유 장군한테 드리라’고 이야기할 정도였습니다.”
 
 
  “韓美共助로 北침투 원천 봉쇄”
 
유병현 장군은 5·18 당시 합참의장으로 북한의 침투를 막는 데 만전을 기했다. 사진은 1980년 3월 위컴 8군 사령관과 한미1군단의 야전사 명칭 개칭 문서를 교환하고 있는 장면.
  유병현 장군은, “우리와 미국이 이렇게 먼저 그들의 행동을 봉쇄해 버렸기 때문에, 북한은 어떤 행동을 취할지 망설이다가 적기(適期)를 놓쳤다”고 말했다. 그는 “(광주사태 당시) 600명 규모의 북한군 1개 대대가 서해안을 통해 광주에 침투했다”는 탈북자의 주장을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 반박했다.
 
  “600명을 수송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의 선박이 필요합니다. 북한은 당시 600명 정도의 병력 수송을 할 수 있는, 상비된 선박부대가 없었어요. 무장공비를 침투시키기 위한 고속정들은 있었습니다만 70~80t 정도의 배인데, 20여 명이 정원이었어요. 광주사태가 발생하고 600명을 보낸다? 그럴 만한 수송능력이 없었어요.”
 
  대간첩대책본부장으로서 다년간 무장공비들을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말도 했다.
 
  “광주사태는 예측 가능했던 사건이 아닌 돌발사건이었습니다. 이런 돌발사건에서 아무리 북한이라고 해도 600명이라는 부대를 편성하고 교육해 출동명령을 내리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이런 작전을 할 때는 사전에 현지에 정찰조를 미리 보내게 되어 있어요. 덮어놓고 600명이 ‘나가자!’ 해서 광주까지 내려갈 수는 없어요. 증거를 남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M1, 칼빈 소총, 우리 군복을 마련해 입혀 내려보내야 하는데 600명분을 급히 마련하기는 쉽지 않아요.”
 
  그는 1·21사태와 울진삼척사태 등 북한이 실패한 예와 비교해 보기를 권했다. 북한은 1·21사태 때 31명을 보내기 위해 수개월간 준비했다. 청와대 모형을 만들어 공격예행연습까지 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 김신조는 생포되고 나머지는 사살됐다. 두 명은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다. 울진삼척사태 때는 120명을 보냈다. 태백산 지역에 올라가 인민해방촌을 만들겠다고 했다. 120명 대부분이 사살됐다.
 
  유 대사는 “모든 무장간첩의 시도가 실패했는데, 광주만 성공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고 되물었다. 600명에게 무기와 실탄을 주고 작전지역에 들어가라고 하면, 반드시 교전과 사고가 일어나 부상자가 발생하게 되어 있는데, 부상자라든가 시체 등 실질적인 물증(物證)을 남긴 게 하나도 없다는 점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했다.
 
 
  “첩보와 정보 구분해야”
 
  그는 “만약 북한이 정말 600명을 침투시켰다면 굉장한 사건이다. 정전협정의 위반이다. 광주사태가 일어났을 때는 한미연합사가 전·평시를 막론하고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뤘어야 한다. 그러나 한미연합사나 유엔사의 어느 누구도 이를 인지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한 종편 채널이 보도했던 북한 특수군 출신이라는 탈북자의 “50명이 광주로 들어갔고 국군과 교전해 3명을 사살했다”는 주장은 “완전 거짓말”이라고 일축했다.
 
  “그래도 내가 합참의장이라는 직책에 앉아 있었는데 그 정도의 사태에 대한 정보를 몰랐다면 그야말로 나라에 사죄해야 할 일이지요. 50명이 걸어서 광주까지 내려간다? 어떻게 들키지 않고 가나? 50명이 도보로 이동한다고 할 때는 50명의 보급품, 자동차 몇 대분이 필요할 것이다. 탄약, 식량 등 어떻게 수송했을까? 그런 부대이동을 어떻게 합참이 몰랐겠는가? 우리 사병을 3명이나 사살했다? 그러면 전사(戰死)보고가 올라올 것 아닌가? 국민들이 자식을 군에 보내고 있다. 자기 아들, 동생이 소식이 없어지면 국방부, 합참으로 연락이 온다.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인터뷰를 마치며 유병현 장군은 ‘북한군 개입설’을 믿는 사람들에게 “첩보(information)를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첩보를 정보(intelligence)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국민의 수준이 높으면 첩보와 정보를 구분할 줄 안다. 국민들이 상식적인 판단을 하기를 바란다”고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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