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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포커스

일본의 右傾化와 미디어

글 :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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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미디어, 단카이세대의 쇠퇴, 종이매체의 위기 겹치면서 경영위기 처해
⊙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 등 리버럴 신문도 右傾化 편승해 위기 타개 모색
⊙ 2차대전 전 일본 미디어, 만주사변 이후 軍國主義 나팔수 노릇하며 성장

劉敏鎬
⊙ 52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일본 마쓰시타 정경숙 15기.
⊙ SBS 보도국 기자, 일본 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
⊙ 現 워싱턴 〈Pacific, Inc〉 프로그램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소장.
  “일본을 중요한 이웃이라고 말한다면, 일한(日韓)대화에 임하면서 일방적인 양보를 요구하지 말라!”
 
  광복절 다음 날인 8월 16일 일본 《요미우리(讀賣)신문》에 실린 사설(社說)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종군위안부에 관한 보상은 1965년 일한청구권협정을 통해 법적으로 해결된 것이라는 것이 일본의 입장이다.… 역사인식문제로 일본에 일방적인 양보를 요구하면서 대화를 거부하는 식의 한국 측 행동이 고쳐졌으면 한다.”
 
  《요미우리신문》의 사설은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의 광복절 연설을 분석한 뒤 내린 일본의 답장에 해당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요미우리신문》은 일본에서 발행부수 넘버원을 자랑하는 신문이다. 올해 7월 기준으로 하루 985만 부를 발간한다(일본ABC협회). 국제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는, 국내지향적인 생활대국 일본에 맞추는 신문이다. ‘읽을거리(讀)를 판다(賣)’라는 신문사 이름에서 보듯, 적(敵)을 만들지 않으면서 모두를 만족시켜 주는 팔방미인(八方美人)형 신문에 해당된다. 기사는 물론 사설에서도 가능하면 중립적 자세에서 양시론(兩是論)에 그치는 것이 《요미우리신문》의 논조이다. 리버럴을 지향하는 《아사히(朝日)신문》과 비교해, 《요미우리신문》을 극우(極右) 미디어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필자는 다르게 본다. 보통 일본인들은 별로 치우치지 않은 중도우파 노선의 신문으로 받아들인다. 참고로, 《아사히신문》의 발행부수는 767만 부이다. 《요미우리신문》보다 220만 부 정도 적다.
 
  팔방미인형 《요미우리신문》이지만, 8월 16일 사설은 날카로운 각을 세운 전혀 다른 모습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일관(對日觀)을 조목조목 부정하면서 정면으로 맞대응한다. 훈계를 하는 듯한 느낌의 문장도 발견할 수 있다. 그동안 간헐적으로 박 대통령의 대일관을 비판하는 기사가 있었지만, 이날 사설은 아예 작심을 하고 하나하나 맞대응한 듯한 느낌을 준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8월 15일 야스쿠니(靖國)신사에 가지 않은 것을 강조하면서, 한국 측이 내심 감사해야 할 것이란 뉘앙스의 문장도 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서두에 소개한 사설의 제목도 상당히 도전적이다.
 
 
  《요미우리》의 반기문 총장 비판
 
지난 8월 23일 청와대를 방문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박근혜 대통령이 맞이하고 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최근 박근혜 대통령과 반기문 총장을 비판하는 사설을 게재했다.
  《요미우리신문》의 한국에 대한 정면대응은 이후 12일 뒤인 8월 28일 다시 등장한다. 역시 사설을 통한 대응이다. 타이틀은, “반기문 국제연합 사무총장 자질이 의문시되는 편향된 개입발언”이다.
 
  얼마 전 반기문 총장이 한국을 방문해 박근혜 대통령과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문제시한 사설이다. 한국에도 보도됐듯이, 반 총장이 말한 역사인식문제가 글의 핵심이다. “잘못 들었는지, 귀를 의심케 하는 발언이다.… 반 총장은 ‘일본정부 정치지도자는 (역사인식에 관한) 깊은 성찰을 가져야 할 것이며, 국제적 측면에서의 미래를 제시할 수 있는 비전을 갖춰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반 총장은 유엔사무총장으로서 특정국가에 치우치지 않는 중립성과 공평성이 요구된다.”
 
  사설을 읽으면서 놀란 것은 중간중간에, 반 총장의 호칭을 ‘반씨(潘氏)’라고 표기한 점이다. 노골적인 하대(下待)이다. 유엔공용어인 영어를 대신해 한국어로 대화를 나눈, 국제 룰도 모르는 인물이 반씨라고 비난한다.
 
  사설에는 반 총장 발언의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일본정부에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라는 요구도 들어 있다. 일본의 유엔 분담금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를 차지한다. 일본 돈에 의존하는 유엔조직을 통해 반 총장을 흔들라는 의미이다. 《요미우리신문》 사설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본 외무성은 반 총장의 발언이 유엔의 중립성에 어긋나는지 여부를 논의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이성(理性)이 아닌 감성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한국 대통령과 한국인 유엔사무총장에 대한 요미우리의 사설은 한국과 한판 붙어보자는 기분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아사히신문》도 ‘逸脫’에 합류
 
  《요미우리신문》을 극우로 보는 사람이라면, ‘한판 붙자’는 심리가 《요미우리신문》이나 일본 극우의 최전선에 선 《산케이(産經)신문》에서나 볼 수 있는 일부의 의견이며, 일본 지식인이 신뢰하는 《아사히신문》을 보면 그 같은 극단적인 반응이 없다고 강조할지도 모른다. 이는 현재 일본의 흐름을 잘 모르는 얘기이다.
 
  8월 30일 《아사히신문》에 실린 글을 읽어보자. 제목은 “방위성은 항공모함이 필요하다면 정정당당히 건조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군사전문가인 기요타니 신이치(淸谷信一)라는 인물이 쓴 글이다. 헬리콥터 이착륙이 가능한 호위함을 건조하면서 여론에 굴복해 어정쩡한 규모로 만들지 말고 아예 대규모 항공모함급으로 만들자는 것이 글의 핵심이다. 군사전문가로서 내린 결론이겠지만, 그 같은 주제가 《아사히신문》을 통해 다뤄졌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아사히신문》의 ‘일탈(逸脫)’은 군사문제만이 아니다. 한국에 관한 부분에도 적용된다. 지난 7월 13일, 웹 게시판 니찬네르(二チャンネル)를 통해 일본 전역에 빠르게 퍼져나간 현재 서울에 거주하는 자유기고가 하라 미와코(原美和子)란 여성이 쓴 “박 정권의 4개월과 험악한 일한관계”라는 글이다. 내용을 보자. “(한국정치의 경우) 정책실패나 스캔들이 표면화할 경우, 독도문제나 역사인식문제를 꺼내 (일본에 대해) 도발적인 발언을 반복해 왔다.… 반일적(反日的) 입장을 취하면서 정권의 위기를 타개하려는 것은 역대 정권의 상투적인 수단이다.… 한국의 매스컴이 정권의 입장이나 언동에 발맞춰 움직이는 한, (반일로 점철된 왜곡된) 사태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다.”
 
  니찬네르를 비롯한 일본 내 반한(反韓) 웹사이트들은 이 서울발(發) 리포트를 두고 “마침내 《아사히신문》, 혐한(嫌韓)선언”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평소 반미(反美)·친한(親韓)·친중(親中) 논조가 강한 《아사히신문》 마침내 한국을 제대로 알기 시작했다”라는 투였다.
 
 
  암묵적 상식의 붕괴
 
  《아사히신문》에 실린 두 개의 글은 사실, 신문 자체가 아닌 웹사이트에서 운영하는 ‘웹 논좌(Web 論座)’라는 코너에 실린 글이다. 정식기자가 아니라, 전문가나 현장의 젊은이들이 올리는 글이다.
 
  《아사히신문》 입장과 다른 글이 나올 수도 있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이건 일본 조직의 생리를 잘 모르는 주장이다. 일사불란(一絲不亂)은 일본 조직의 특성이다. 특히 신문·방송에서 기본원칙과 어긋나는 말이나 입장을 가진 사람은 곧바로 현장에서 사라진다. 일본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움직이는 사회이다. 기발하고 좋고 정확하다 하더라도 조직의 방향에 어긋날 경우 결과는 뻔하다.
 
  기요타니 신이치와 하라 미와코 두 사람의 글이 《아사히신문》 상부의 지시를 받아 쓴 글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편집국 담당기자들이라면 내용이 《아사히신문》 방침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통 편집과정에서 내용을 첨삭(添削)하게 된다. 가감(加減) 없이 글을 그대로 내보내고, 친한 사이트에서 난리를 쳐도 수정 없이 그대로 게재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이후에도 계속 글을 쓰고 있다.
 
  필자는 《아사히신문》에 실린 글의 내용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산케이신문》에서 친한·친중 기사가 나올 수 없듯이, 《아사히신문》에서 반한·반중 기사가 나올 수 없다는 기존의 암묵적 상식에 주목할 뿐이다. 그러나 최근 《아사히신문》의 움직임을 보면, 그 같은 생각은 이미 시대착오라는 감을 지우기 어렵다.
 
 
 
‘언론’과 ‘미디어’

 
  한국에서는 신문·방송을 ‘언론(言論)’이라 표현한다. 일본은 언론이란 말보다는 미디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언론’이란 말 속에는 신념과 이데올로기를 지향하는, “입에 칼이 들어와도 말은 똑바로 하겠다”라는 뉘앙스가 들어가 있다. 좀 과장하자면 ‘지사형(志士型) 논객’이 일하는 곳이 언론사이다.
 
  ‘미디어’는 이데올로기와는 거리가 멀다. 말 그대로 정보를 전해주는 전달자의 역할이 미디어이다. 이데올로기나 특정 가치관으로 무장할 필요도 없다. ‘Must나 Should’로 일관하는 주관(主觀)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알려주는 기능인이 필요할 뿐이다. 따라서 일본에서 신문·방송에서 일한다고 하면, ‘월급이 좋은 곳에서 일하는 샐러리맨’ 정도로 받아들여진다. 태평양전쟁을 전후해 ‘언론’이란 말이 유행했지만, 평화대국이자 세계 굴지의 경제대국으로 자리 잡으면서 ‘언론’이라는 말은 사라지고 ‘미디어’라는 말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필자가 워싱턴에서 만나는 일본기자들도 대부분 ‘미디어 회사에서 일하는 샐러리맨’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언론인으로서의 사명감이나 희생은 아예 없다. 정보에 대한 개인적 호기심을 통해 기사를 만들어 나간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믿는 언론인으로서의 기자는 1970년대 이전에 입사(入社)한 노년층에 국한된다. ‘미디어 샐러리맨’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승진과 봉급이다. 민주주의 쟁취를 위한 펜의 힘을 믿기보다, 승진하고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다면 범위를 넓혀 샐러리맨 기자 차원이 아닌, 전체 조직으로서의 미디어 업계의 최대 관심사는 무엇일까? 공정보도나 빠른 정보, 민주주의 쟁취 나아가 소수자(少數者) 보호 같은 것을 열거할지 모르겠다. 부분적으로 옳지만 전부는 아니다. 정답은 경영, 즉 돈이다. 신문사를 유지하고, 미래에 대한 투자를 통해 사세(社勢)를 확장하는 것이 조직으로서의 미디어가 갖는 최대 관심사이다. 21세기 자본주의 시대의 당연한 상식이지만, 일본 미디어는 그 같은 경제논리를 20세기 초부터 시행해 온 모범생에 해당된다.
 
  《아사히신문》의 미묘한 변화와 《요미우리신문》의 각을 세운 사설은 지금까지의 ‘전통’을 충실히 이행하는 좋은 예(例)에 불과하다. 결론부터 얘기하자.
 
  변화하는 일본은 변화한 미디어를 필요로 한다. 거기에 맞추지 못하면 도태될 뿐이다.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우향우(右向右)로 발맞춰 나가는 1억2000만 열도(列島)의 공기(분위기)에 답하는 과정에서 《아사히신문》마저 변하고 있다.
 
  우향우에 맞출 경우 돈으로 연결되지만, 거기에 맞추지 못하거나 정반대로 나갈 경우 돈과 멀어지게 된다. 핵심은 발행부수이다. 우향우로 변해가는 일본의 공기에 얼마나 잘 맞추느냐가 승패(勝敗)의 조건이다.
 
 
  《아사히신문》의 몰락
 
  잘 알려져 있듯이 일본 최대의 정론지(正論紙)로 알려진 《아사히신문》은 해가 갈수록 왜소해지고 있다. 아사히는 프랑스 좌파(左派)신문의 대명사인 《리베라시옹(Liberation)》지와 같은 성격이다. 1960년대 좌파학생운동의 거두인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를 비롯해 모택동주의자들이 만든 신문이다. 이 신문에서 반미는 기본이다. 프랑스 지식인 대부분이 신뢰하는 신문이지만, 중심세력이 사라지기 시작한 1990년대 들어 하향세(下向勢)에 들어섰다. 도산(倒産)과 휴간(休刊)을 거듭하다가, 현재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21세기 프랑스는 《리베라시옹》의 거창한 혁명이데올로기가 필요 없는, 소시민(小市民) 장수(長壽)만세 국가로 변한 상태이다.
 
  반핵·평화·반미·친중·친한 이념으로 무장한 《아사히신문》은 전후(戰後) 태어난 단카이(團塊)세대의 나침반에 해당된다. 중심세력이 무대에서 물러나면서 《아사히신문》 역시 《리베라시옹》과 같은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종이활자매체의 하향세, 전(全)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아사히신문》의 하강세는 일본 미디어 중에서도 특별하다. 단카이 쇠퇴에 따른 고정독자 상실도 이유겠지만, 국민적 정서로 자리 잡은 우향우 흐름에 반하는 기사를 내보내면서 판매부수가 급감(急減)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많이 접하는 인터넷의 외부칼럼을 통한 일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공기(분위기)에 따라 움직이는 나라다. 일단 공기가 변하면, 공기에 적응해 가는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 일본학(Japanology)의 입문서(入門書) 추신쿠라(忠臣蔵)를 보면, 주군의 원수를 처단한 뒤 사무라이 47명 모두가 할복(割腹)을 자행한다. 추신쿠라를 다룬 가부키(歌舞伎), 영화, 소설 어디를 봐도, “원수를 없애고 함께 죽자”라 말하는 대목이 없다. 47명 모두가 마치 최면에 걸린 듯, 공기로 느끼고 공기로 실행한다. 한 명씩 호명(呼名)하면서 할복이 이뤄지는 동안, 도망가거나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사람도 없다. “추신쿠라는 300여 년 전의 일로, 잘 포장된 스토리에 불과하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일본이라는 나라는 언제라도 ‘47명의 사무라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나라다.
 
  현재 일본 미디어의 흐름을 보면 필자는 1930년대 상황과 너무도 비슷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공기에 편승하면서 위상을 지키고 확장해 나가는 미디어 생존전략이다.
 
  1930년대 일본 미디어의 현황을 살펴보자. 출발점은 1931년 만주사변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만주사변은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關東軍)이 일본 본토의 정부·군부(軍部)의 명령과 무관하게 저지른 사건이다. 1931년 9월 18일 남만주철도 폭파사건이 발생했다. 철도보호를 명목으로 남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1만여 명의 관동군은 이 사건이 중국인이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군사행동을 개시한 후, 본국으로부터 그에 대한 추인(追認)을 받아냈다. 불과 6개월 만에 만주를 장악한 일본은 6년 뒤 중국대륙 전체를 상대로 한 침략에 나섰다. 미국이 일본에 만주국 포기와 중국침략 중지를 요구하자 일본제국주의는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맞섰다.
 
  1931년 만주침략은 일본 미디어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꾼 결정적 사건이다. 만주침략을 기회로, 모든 미디어가 한순간 극우 프로파간다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戰前 일본 언론의 豹變

 
워싱턴조약을 체결한 후 암살당한 하마구치 총리.
  일본 정치학자들은 1912년부터 1926년에 이르는 14년간을 ‘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デモクラシ一)’ 기간이라고 한다. 다이쇼(大正)란 메이지(明治) 천황의 아들인 요시히토(嘉仁) 천황의 연호(年號)다. 이 기간 동안 메이지시대를 통해 국가적 틀을 완성한 일본은 보통선거제도를 도입하고, 인권·민주주의 등의 개념이 확산되면서 사회 각 분야에서 자유가 신장되었다. 일본 미디어가 제자백가(諸子百家), 백인백색(百人百色) 시대를 맞은 시기가 바로 이때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통해 확산된 사회주의 사상도 이 기간 동안 일본 전역에 퍼져나갔다. 당시 식민지 한국에 흘러들어 온 각종 문예사조나 사회주의 운동도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정부와 특정 정치가를 비판하고, 군부를 비난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당시 선봉에 선 미디어의 쌍두마차는 《아사히신문》과 《마이니치(每日)신문》이었다. 특히 《아사히신문》은 정부와 군부의 정책을 사사건건 부정하는, 가장 영향력이 강한 신문이었다.
 
  1921년의 런던조약과 1930년의 워싱턴조약은 미국에 의해 개방된 일본이 미국을 적으로 삼게 된 출발점이 되었다. 일본 해군의 규모를 미국·영국에 비해 대략 7할 선에서 통제한 조약이었기 때문이다. 군부와 국민들이 제국주의 강대국의 횡포라고 조약에 반대했지만, 《아사히신문》과 《마이니치신문》은 군축을 지지하는 글을 계속해서 내보냈다. 국민부담을 줄이고 전쟁이 아닌 평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 당시 두 신문사의 지론(持論)이었다. 정부가 군부의 반발을 무릅쓰고 조약을 체결할 당시 두 신문은 ‘훌륭한 결단’이란 찬사를 보냈다.
 
  위싱턴조약이 체결된 지 7개월 후인 1930년 11월 14일, 당시 총리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가 도쿄(東京)역에서 총탄에 맞았다. “하마구치는 비굴한 조약을 체결한 매국노(賣國奴)”라는 것이 암살범의 주장이었다. 하마구치 총리는 피격 9개월 뒤 세상을 떠났다.
 
 
  변신의 가장 큰 이유는 ‘돈’
 
  21세기 《아사히신문》이 부러워할 정도의 언론자유는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180도 바뀌게 된다. 단순히 사실을 전달하는 미디어가 아니라 편향되고 일방적인 프로파간다로 바뀐 것이다.
 
  놀랍게도 이에 가장 앞장선 매체가 《아사히신문》이다. 《아사히신문》 지국(支局) 가운데서도 가장 리버럴한 곳으로 알려진 《오사카(大阪) 아사히》가 하루아침에 논조를 바꾸었다. 만주침략 한 달째로 접어든 1931년 10월 중순, 군비확산이나 전쟁에 반대하던 논조는 사라지고 만주침략과 군비증강에 찬성하는 사설이 등장한 것이다. 《아사히신문》 도쿄 본사를 비롯해 전국으로 확산된다. 《마이니치신문》도 마찬가지였다.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언제 있었느냐는 듯 미디어 전체가 한목소리로 군국주의(軍國主義) 선전대로 전락한 것이다. 이후 극우의 목소리는 1945년 8월 15일 패전 마지막 날까지 이어진다.
 
  일본 국민 모두가 놀란 《아사히신문》과 《마이니치신문》의 변신은 어떤 배경하에서 나타난 것일까? 정부나 군부가 언론탄압에 나서면서 어쩔 수 없이 굴복한 것일까?
 
  아니다. 외부간섭이나 강압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편집진과 경영진 스스로가 내린 결정이 더 큰 원인이다. 펜을 잡은 편집진이 변신에 더더욱 적극적이었다. 이유는 바로 경영, 즉 ‘돈’에서 찾을 수 있다. 돈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신문사의 목을 졸랐다.
 
  첫째, 라디오 보급이다. 1930년대는 라디오가 일상적으로 보급된 시기이다. 신문을 대신해 당시로서는 최첨단 테크놀로지인 라디오 뉴스에 대한 관심이 한층 높아졌다. 라디오 애청자가 늘어나면서 신문구독자와 광고가 줄어들었다. 21세기 종이매체가 아이폰으로 상징되는 스마트폰에 대해 갖는 것 이상의 위기의식이 당시 신문업계에 불어닥쳤다.
 
  흥미롭게도 국영라디오 NHK는 라디오 생중계로 만주사변 상황을 보도했다. 당시의 방송은 유튜브를 통해 지금도 들을 수 있다. 마치 축구중계하듯 이뤄지는 전쟁 생중계는 일본 국민 전체를 우향우로 만드는 최면제로 작용했다.
 
 
  언론과 軍部의 野合
 
만주사변 당시 출병하는 일본군. 만주사변 이후 일본 언론은 군국주의의 나팔수로 전락했다.
  반대세력에 대한 적극적인 불매(不買)운동은 리버럴 신문을 코너로 몰아세운 두 번째 이유였다. 리버럴 신문에 대한 반감(反感)은 만주침략 이전부터 느낄 수 있는 ‘일상적인 흐름’이었다. 이들 신문에 대한 찬성자가 있는 만큼 반대하는 사람도 결코 적지 않았다.
 
  만주침략 이후 부분적인 전시(戰時)체제로 돌입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라디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리버럴 신문을 매국노라 부르는 사람들이 급증했다. 특히 재향군인회 활동이 활발하고 군부대가 있는 지역에서 나오는 불만이 강력했다.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한 후 《아사히신문》의 발행부수는 매달 평균 4만~5만 부씩 떨어졌다. 이 신문의 리버럴한 논조에 불만을 품은 친(親)군부세력에 의한 불매운동 때문에 경영악화가 가속화됐다. 《마이니치신문》 역시 비슷한 상황에 빠졌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도쿄 본사의 《아사히신문》 편집국장은 군부와의 만남을 자청했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이었지만, 이미 회사 방침이 내려진 상태에서 통과의례(通過儀禮)에 불과했다. 군부가 만주침략의 정당성을 열거하자 《아사히신문》 편집팀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화답했다. “그동안 잘 몰랐던 부분에 관한 실체를 알게 됐다.”
 
  《아사히신문》은 곧바로 군부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대의명분은 ‘국익(國益)’이었다. 만주침략을 정당화하는 사설과 관련기사가 지면을 메웠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편집국 기자들의 분위기이다. 리버럴의 대명사였던 만큼, 뭔가 화끈한 반대투쟁이 있을 법하지만, 대부분은 변화된 공기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일본의 모든 신문·방송이 국익을 앞세운 프로파간다 수단으로 전락했다.
 
  이와 함께 신문사의 경영수지도 개선되기 시작했다. 《요미우리신문》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 3사(社)의 총 발행부수를 보면, 1931년 400만 부에서, 1937년 중일전쟁 때 700만 부, 1941년 태평양전쟁 때 800만 부로 급신장했다.
 
 
  일본을 極右로 몰고 간 언론
 
  늦바람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지만, 군부와 공동운명체에 들어간 미디어는 군부조차 겁을 낼 정도의 극우논리를 쏟아냈다. 대표적인 것은 1933년 3월 28일 일본의 국제연맹(國際連盟) 탈퇴이다. 당시 국제연맹은 일본의 만주침략을 규탄하면서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당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리를 비롯한 일본정부는 국제연맹과 협상안을 마련하면서 국제연맹 탈퇴는 고려하지 않았다. 일본 해군도 이를 지지했다. 그러나 스위스에 간 외무장관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는 일본군의 만주 철수를 거부하고 국제연맹 탈퇴를 감행했다.
 
  이유는 당시 일본 국내에서 들끓었던 여론 때문이었다. 국제연맹을 비난하면서 즉시 탈퇴할 것을 요구하는 대중집회가 연일 열렸다. 제국주의 본산인 서구인들의 억지논리에 따르지 말고, ‘일본 독자적으로 당당하게 세계를 개척해 나가자!’라는 구호가 여론의 중심에 선다.
 
  당시 1억 일본 국민 전체를 극우로 몰아세운 주범은 미디어이다. 일본 전국의 132개 신문·방송사가 ‘만주를 절대 넘겨줄 수 없다’는 결의안을 만들어 정부에 올렸다.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 같은 전(前) 리버럴 미디어도 가세했다. 결국 사이토 총리는 여론에 굴복했다. 마쓰오카 외무장관은 이렇게 술회했다.
 
  “국제연맹 탈퇴라는 악수(惡手)를 낳은 인물로 귀국 후 암살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도쿄에 도착 후 나를 영웅으로 대접하는 일본의 분위기가 너무도 놀라웠다.”
 
  일본을 2차대전의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간 3국동맹도 언론의 작품이다. 일본이 독일·이탈리아와 맺은 3국동맹에 대해 오늘날 일본 정치학자 대부분은 ‘세계사에 유례를 찾기 어려운 황당하고도 무용(無用)한 동맹’이라 규정한다. 일본정부로서는 동맹까지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미디어가 앞장서서 독일과의 동맹 체결을 주장했다. 당시 일본 미디어는 미국·영국의 시대가 가고 독일의 시대가 온다고 믿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히틀러조차 왜 일본이 나치독일과 동맹관계를 원하는지 궁금해했다고 한다.
 
 
  나카무라 대위 사건
 
중국에서 간첩활동을 하던 나카무라 신타로 대위(왼쪽)가 살해되자 일본 언론은 보복을 선동했다.
  태평양전쟁 이전의 상황을 21세기 일본에 비교한다는 것이 어불성설(語不成說)일지 모른다. 미디어의 사설이나 기사를 통해 극단적인 상황에 비교한다는 데 대해 반감을 갖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향우 바람은 곧 사라질, 일부에 그치는 미풍(微風)이라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전혀 반대 입장이다. 《아사히신문》과 《마이니치신문》은 역사문제에 관해 한국의 입장을 이해해 온 중요한 친구들이다. 그러나 이들 리버럴 신문도 가까운 시일 내에 크게 변신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더불어 기존의 우향우 논조의 미디어들은 한층 더 강력한 ‘우(右)’의 목소리를 낼 것이다. 문제는 얼마나 변할지, 언제 변할지에 달려 있을 뿐이다.
 
  워싱턴에서 확인한 것이지만, 사실 30대 이하 일본기자들의 경우 더 이상 리버럴의 흔적을 발견하기 어렵다. 《아사히신문》의 경우 장년 기자와 젊은 기자의 마찰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센카쿠(尖閣)열도에 대한 중국의 무력시위를 보면서 일본 미디어들이 ‘친중’을 외칠 수는 없다. 한국과의 관계 역시 비슷하다. 3·11 대지진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주변국들과의 긴장이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평화·반핵·친중·친한·반미를 외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단카이세대가 사라지면서 발행부수가 급감하는 경영상의 문제는 일본 미디어 최대의 현안이다.
 
  1931년 일본인들이 리버럴 미디어를 매국노라 부른 계기는 아주 사소한 데서 출발했다. 만주침략 80여 일 전인 1931년 6월 27일 발생한 나카무라(中村) 대위 살해사건이다. 농업기사로 위장해 중국에서 스파이 활동을 벌이던 육군참모본부 소속 나카무라 신타로(中村震太郎)가 중국군에 체포돼 잔혹하게 살해된 사건이다. 당시 《아사히신문》과 《마이니치신문》을 제외한 모든 미디어는 잔인하게 난도질 된 나카무라 대위의 시신 사진을 게재하면서 중국에 대한 응징을 요구했다. 관동군의 만주침략은 그 같은 분위기의 산물이었다. 한 장교의 죽음을 적나라하게 보도하는 과정에서 열도의 공기가 전쟁으로 나가고, 미디어도 한순간에 변했던 것이다.
 
 
  2020도쿄올림픽 유치와 일본 미디어
 
  9월 8일 아침 도쿄(東京)가 2020년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됐다. 앞으로 남은 7년간의 일본은 일사불란(一絲不亂)한 체제로 움직일 것이다. 미디어는 그 선두에 설 것이다.
 
  일본은 결정하기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방침이 정해지면 그대로 밀고 나가는 나라다. 8월 22일 일본 문부과학성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올림픽 개최에 관한 국민적 지지율이 92%에 달한다. 필자가 알기로는 1945년 패전(敗戰) 이후 어떤 사안에 대해 국민의 의사(意思)가 90% 이상의 한목소리로 모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4년 전 2016년 올림픽 개최지 선정문제에 대한 일본국민의 지지율은 60%대에 그쳤다. 당시에는 “올림픽은 쓸데없는 전시용 스포츠 이벤트로, 도쿄만 살찌우는 1회용 불균형 발전모델”이라는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다. 오사카(大阪)・나고야(名古屋) 같은 도시들이 반대를 했다.
 
  하지만 2020년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된 지금은 다르다. 평소 올림픽 유치에 부정적이던 《아사히신문》조차 적극 찬성으로 돌아섰다. 필자가 아는 한, 일본 미디어 100%가 적극 찬성했다. “3・11 동일본 대지진으로 엉망이 된 나라를 되살리고, 모처럼 불어온 경제회생 바람을 일심단결해서 지켜나가자”는 것이 현재 일본 미디어의 태도다. 예외가 없다.
 
  도쿄가 2020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9월 8일, 올림픽 개최지에 관한 중국 미디어의 보도가 인터넷을 달구었다. 중국 국영 《신화(新華)통신》은 “이스탄불이 2020년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됐다”고 보도했고, CCTV는 도쿄가 올림픽을 유치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즉시 “7년간 방사능 오염상황을 지켜보겠다”는 ‘저주’를 던졌다는 뉴스이다.
 
  중국에 대한 성토가 인터넷을 달군 것은 물론이다. 2008년 중국 올림픽 당시 그 어떤 나라보다도 성원한 나라가 일본이란 점을 강조하면서 2020년 올림픽에 중국이 참가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코멘트가 쇄도했다.
 
  8일 하루 동안 무려 1000건이 넘는 댓글이 니찬네르에 올랐다. 필자가 본 지금까지의 반중 댓글 가운데 가장 격렬하고 많은 수이다. 간접적으로 둘러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살벌한 표현과 함께 중국을 비난하는 문장이 끝이 없다. 필자가 이해하고 있는 일본인들 대신, 전혀 다른 성격의 사람들로 가득한 느낌이었다.
 
  중국은 거의 매일 순시함을 보내 센가쿠열도를 넘보고 있다. 올림픽 유치와 함께 일본은 앞으로 결코 수동적인 대응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이 2020 도쿄올림픽을 엉망으로 만드는 ‘세계의 적(敵)’이란 식으로 국제사회에 호소할 것이다. 일본의 모든 미디어는 그 같은 상황을 한목소리로 모아 세계에 전하는 역할을 자임할 것이다.
 
 
  ‘대포동미사일’을 기다리는 일본
 
  기우(杞憂)이기를 바라지만, 일본 미디어의 극우화도 어떤 돌발적 사건을 계기로 급속도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일본의 극우세력은 그 같은 상황을 기다리고 있다.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전 도쿄도(東京都) 지사는 “북한 대포동미사일이 일본 열도에 날아와야 일본인들이 비로소 정신을 차릴 것이다”라는 말을 곧잘 했다. 아베 총리 집권 이후 일본의 공기를 보면, 대포동미사일이 아니라 아주 작은 사건만으로도 일본열도 전체가 극우열풍에 휩쓸릴 듯하다.
 
  역사무대에서 사라지고 있는 단카이에 의지해 일본 사회의 우향우를 견제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일본을 무조건 비난하면서 훈계까지 곁들이는 식의 감정적 처방은 안방에서나 통하는 것이다. 그보다는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면서 일본의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세계의 변화에 둔감하다가 나라를 잃었던 20세기 초 한국 근대사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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