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안사에서 만난 全斗煥, 권총으로 자기 가슴 겨누며 “나는 야심이 없습니다”
⊙ YS, 내가 민추협 공동의장 권한대행 되자 회의 때마다 얼굴 찡그려
⊙ 2·12총선 앞두고 전국구 헌금으로 5억7000만원 받아, ‘문방구어음’으로 헌금하고
당선 후 안 낸 사람도 있어
⊙ 1991년 신민주연합당 입당하겠다고 하자 DJ, “자네는 안 돼!”
金相賢
⊙ 77세. 한영高 중퇴.
⊙ 제6·7·8·14·15·16대 국회의원, 김대중 대통령후보 비서실장,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권한대행,
통일민주당 부총재, 민주당 최고위원, 새정치국민회의 지도위원회 의장, 국민회의 고문,
대한산악회장, 아시아산악연맹 회장,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새천년민주당 고문 역임.
유신반대로 2년간 복역,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2년3개월간 복역.
⊙ YS, 내가 민추협 공동의장 권한대행 되자 회의 때마다 얼굴 찡그려
⊙ 2·12총선 앞두고 전국구 헌금으로 5억7000만원 받아, ‘문방구어음’으로 헌금하고
당선 후 안 낸 사람도 있어
⊙ 1991년 신민주연합당 입당하겠다고 하자 DJ, “자네는 안 돼!”
金相賢
⊙ 77세. 한영高 중퇴.
⊙ 제6·7·8·14·15·16대 국회의원, 김대중 대통령후보 비서실장,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권한대행,
통일민주당 부총재, 민주당 최고위원, 새정치국민회의 지도위원회 의장, 국민회의 고문,
대한산악회장, 아시아산악연맹 회장,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새천년민주당 고문 역임.
유신반대로 2년간 복역,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2년3개월간 복역.
1972년 10월 17일, 나는 광주(光州)에서 전라남도 국정감사를 하고 있었다. 국회에서 오후 국정감사는 하지 말고 서울로 올라오라는 연락이 왔다.
전날 어떤 신문기자가 “내일 오후 7시에 중대발표가 있는데, 아마 국회가 해산될 것 같다”고 했다. 설마 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월 17일 오후 5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5·16에 이은 두 번째 쿠데타였다.
오후 5시쯤 서울로 올라온 나는 광화문(도렴동)에 있는 《다리》사(社)로 갔다. 여기서 윤형두(尹炯斗) 사장 등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維新) 선포 특별담화를 들었다. 인근 석굴암다방으로 가서 커피 한 잔을 마신 후 밀튼 주한브라질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와는 내가 운영하던 해외교포문제연구소가 브라질교포 문제를 다루면서 가까워졌다. 그는 장충동에 있는 자기 공관으로 오라고 했다. 그는 나를 맞이하기 위해 대사관 경비경찰도 다른 곳으로 보내놓고 있었다.
밀튼 대사는 내게 미국이나 브라질로 망명을 하라고 권하면서, 자기가 손을 써주겠다고 했다. 밀튼 대사의 조국 브라질도 쿠데타와 군부(軍部) 통치로 점철된 나라였다. 그 때문인지 밀튼 대사는 이 같은 상황에서는 우선 몸부터 피하고 봐야 한다는 것을 체득하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망명(亡命)’이라는 것이 내 일이 됐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졌다.
“조국을 버리고 어떻게 망명하는가?”
“그럼 우선 3개월만이라도 피신해 있어라. 장소는 내가 제공하겠다.”
내가 피신을 하면, 내 가족, 비서관, 운전기사, 그리고 《다리》나 해외교포문제연구소 등 내가 만들어놓은 연구소 관계자들이 다칠 것이 뻔했다. 그날 밤은 밀튼 대사의 공관에서 잤다.
다음 날, 밀튼 대사는 충무로 수도극장 앞까지 직접 차로 데려다 줬다. 그는 헤어지기 전에 5000달러를 주려 했지만, 사양했다. 그에 대한 고마움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강창성(姜昌成) 보안사령관과 통화를 했다. 강 사령관과는 그가 중앙정보부 차장보로 있을 때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내가 속해 있는 국회 내무위원회 관할이었다. 그가 말했다.
“왜 집에 안 들어가십니까? 집에 들어가 계십시오.”
“미국에서 손님이 오기로 돼 있어요. 그를 만나고 저녁때 들어가겠소.”
나는 이구홍 교포문제연구소 사무국장과 함께 영화를 보고, 하와이에서 온 교포와 저녁식사를 한 후 집으로 갔다. 보안사령부 요원들이 감시하는 가운데 연금(軟禁)이 시작됐다.
“유신에 협조하라”
11월 5일 강창성 보안사령관에게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강 사령관은 “김대중(金大中·이하 ‘DJ’. 필요한 경우 ‘김대중’으로 표기)씨는 앞으로 귀국하기 어려울 것은 물론, 박 정권 아래서는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면서 “유신에 협조하라”고 말했다.
나는 강 사령관에게 유신에는 협조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리고 건강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입원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검진을 받았는데, 건강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감옥에 가도 버텨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조일제(趙一濟, 중정 보안차장보, 주일공사, 10·11대 국회의원) 중앙정보부 3국장이 찾아왔다. 그가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락(李厚洛) 부장, 강창성 사령관 모두 김 의원을 살리고 싶어합니다. 유신에 협조해 주십시오. 그러면 계속 국회의원을 할 수 있게 밀어드리겠습니다.”
“나는 협상론자지만, 원칙만큼은 협상을 하지 않습니다. 이건 원칙의 문제입니다. 유신에는 결코 협력할 수 없어요.”
“강하면 부러집니다. 민주주의를 하더라도 국회에 들어가서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는 “야당 의원 누구누구가 잡혀들어가 고문을 받고 병신이 됐다”는 얘기도 했다. 내가 계속 유신 지지를 거부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김 의원의 지구당 부위원장 중 누구라도 좋으니, 그에게 유신을 지지하라고 해주십시오.”
“여보, 하려면 내가 하지, 나는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보고 하라고 한단 말이오?”
“이틀간 말미를 드리겠습니다. 이틀 안에 전화가 없으면, 그대로 구속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정권 아래서는 더 이상 정치를 못 하게 될 겁니다.”
고문
조 국장이 나가고 나자 두려움이 밀려왔다. 마음이 약해졌다. 그때 아내가 들어왔다. 아내는 내 얘기를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잘했어요. 당신이 유신을 지지하면, 나나 아이들이 밖에 나가서 어떻게 누구 아내, 누구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나는 아내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고맙소. 당신 말대로 하리다!”
사실 나는 아내가 유신을 지지하라고 하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정말 훌륭한 아내였다. 나는 한국 정치인 중에서 나만큼 결혼을 잘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수원의 부잣집 딸로 태어나 내게 시집와서 온갖 고생을 다했다. 내가 그동안 처가와 아내에게서 갖다 쓴 돈이 수십억원은 될 것이다. 그걸 떠나서라도 아내는 내가 정치를 하는 동안 잘못된 길로 빠져들지 않게 하는 버팀목이었다.
잠자리에 누우니 별생각이 다 났다.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계속 뒤척거리자 아내가 말했다.
“사람은 다 한번 죽는 건데, 다 하느님에게 맡겨야지 뭘 그러세요?”
유신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가 있던 11월 21일 나는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됐다. 차에 타자 보안사 요원들이 무전기로 “짐짝 출발했다”고 말하는 게 들렸다.
보안사 요원들은 다짜고짜 옷을 벗기고 나서 손을 묶어 무릎에 끼우더니 양다리 사이에 막대기를 넣어 거꾸로 매달았다. 소위 ‘통닭구이’라는 고문(拷問)이었다. 그들은 몽둥이로 내 발바닥을 때리며 취조했다. 주로 DJ의 여자관계, 정치자금줄, 그리고 그의 군부인맥 등에 대해 물었다. 나 자신과 관련된 일로는 따귀 한 대 맞지 않았다.
며칠 동안 혹독한 고문이 이어졌다. 의자에 묶은 채 2층에서 아래층으로 밀어버리는 고문도 당했다. ‘사우나’라는 고문이었다. 전기고문도 당했다.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하자 그들은 나를 뇌물알선 및 뇌물수수로 엮어 넣었다. 소위 ‘떡값’이 빌미가 됐다.
떡값
8대 국회 당시 나는 내무위원회 신민당 측 간사였다. 그때는 설이나 추석, 연말이면 국회 각 분과위원장들이 소속 위원들에게 20만~30만원씩 ‘떡값’을 돌리는 게 관행이었다. 그런데 당시 오치성(吳致成) 내무위원장은 영 ‘떡값’을 만들어 오지 못했다. 그러자 내무위 소속 신민당 의원들이 불만을 터뜨렸다.
“건설위나 재경위에서는 50만원씩 돌렸다는데, 우린 이게 뭐요?”
나는 공화당 간사인 김용진 의원과 함께 오치성 위원장을 닦달했다.
“서울시장에게 얘기해서라도 어떻게 한 300만원만 만들어 보시오.”
오 위원장과 나, 김용진 의원은 김현옥(金玄玉) 서울시장을 만났다. 오치성 위원장을 대신해서 내가 김 시장에게 말했다.
“다른 위원회에서는 위원장이 알아서 떡값을 만들지만, 우리 위원장은 그러질 못하니, 시장께서 300만원만 마련해 주시오.”
김현옥 시장이 말했다.
“제가 현금을 마련해 드릴 수는 없고, 건설공사를 하나 드릴 테니 업자한테서 갖다 쓰시지요.”
마침 건설회사 전무로 있는 친구가 있었다. 평소 그에게 신세를 졌던 것을 갚을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를 서울시와 연결시켜 주고 ‘떡값’을 받아 내무위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고문을 견디다 못한 나는 그 사실을 실토했다. 하지만 오치성 위원장 등 다른 사람들이 다칠까 봐 내가 돈을 받아 나누어주었다고 진술했다. 내 친구도 보안사로 연행되어 곤욕을 치렀다. 결국 나는 뇌물알선 및 뇌물수수죄로 기소됐다. 최후진술을 할 때 나는 고문을 당한 사실을 폭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 국회의원이 백악관 강아지만도 못한가?”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애완용 강아지 귀를 잡아 올렸다가 동물학대라는 비판을 받고 사과했다고 합니다. 박 대통령은 이 김상현이가 귀여워서 발가벗겨 거꾸로 매달았는지 모르지만, 그래,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백악관 강아지만도 못하단 말입니까?”
재판정은 웃음바다가 됐다.
성북구치소에 있는 동안 아내가 면회를 왔다. 눈물을 보이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왜 사람을 감옥에 보내놓고 울어?”
서대문교도소에 있는 동안 나는 그동안 못한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루 13시간씩 책을 읽었다. 사마천의 《사기》, 새뮤얼슨의 《경제학》, 그리고 전사(戰史)책들을 많이 읽었다. 1년쯤 지나서 안양교도소로 옮겼다.
거기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모반(謀叛)을 꾀했다 해서 투옥된 전(前)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尹必鏞) 소장 등을 만났다. 나와 조연하(趙淵夏, 5·8·12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조윤형(趙尹衡, 6~8·13·14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김한수(金漢洙, 8·12대 국회의원) 전 의원, 그리고 윤필용 소장은 가끔 함께 테니스를 했다. 하루는 테니스를 하고 난 후 쉬는데, 윤 장군이 이런 얘길 했다.
“1971년 대선 후 미8군사령관을 만났더니 ‘만일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면, 군부가 어떻게 했겠느냐?’고 묻더군요. 나는 두 손으로 기관총을 쏘는 시늉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죠. ‘드르륵…’”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소식을 들은 것도, 1974년 육영수(陸英修) 여사 피살 소식을 접한 것도 감옥에서였다.
1974년 12월 나는 형기(刑期)를 1년가량 남겨놓은 상태에서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학생과 지식인들의 반(反)유신 민주회복운동으로 정국(政局)은 얼어붙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로 맞섰다. 나는 정치가 파국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박 대통령과 만나려 했다. 청와대와 통할 만한 사람들을 만나 부탁했지만, 대화의 길은 막혀 있었다. 남은 것은 투쟁뿐이었다.
나는 1972년 유신 선포 직후 보안사에 연행(連行)되어 고문을 당했던 사실을 폭로하기로 했다. 당시 고초를 겪었던 조윤형·홍영기(洪英基, 5·6·8·13·14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이종남·조연하·김록영(金祿永, 8~10·12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김경인(金敬仁, 8·9대 국회의원)·최형우(崔炯佑, 8~10·13~15대 국회의원, 내무부장관)·박종률(朴鍾律, 8·11·12대 국회의원)·강근호(姜根鎬, 8대 국회의원, 군산시장)·이세규(李世圭, 8대 국회의원)·유갑종(劉甲鍾, 8·12대 국회의원) 전 의원이 동참했다.
‘고문정치 종식을 위한 선언’
‘고문정치 종식을 위한 선언문’과 고문을 당했던 정치인들의 자술(自述) 내용은 DJ의 부인 이희호(李嬉鎬) 여사가 등사(謄寫)로 작성했다. 1975년 2월 28일, 김영삼(金泳三·이하 ‘YS’. 필요한 경우 ‘김영삼’으로 표기) 신민당 총재,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 후보, 양일동(梁一東, 3~5·8·10대 국회의원) 민주통일당 총재가 참석한 가운데, 서울 태평로 뉴서울호텔에서 ‘고문정치 종식을 위한 선언’이 있었다. 최형우 전 의원이 대표로 유신 선포 직후 있었던 고문 사실을 폭로하고, 유신정권의 인권유린을 규탄했다. 나는 선언장인 뉴서울호텔 앞에서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구속까지도 각오했지만, 이틀 만에 석방됐다.
유신정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이후에는 DJ 등 민주인사들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다.
1979년 5월 30일 신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DJ와 나는 ‘중도통합론’을 내세우던 이철승(李哲承) 대표 대신 YS를 지지하기로 했다. 나는 대표 경선에 나선 조윤형·박영록(朴永祿, 7·9·10대 국회의원)·김재광(金在光, 6~10·12~14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씨 등을 설득해 사퇴시켰다. 1차 투표가 끝난 후 나는 이기택(李基澤, 7~10·12~14대 국회의원, 민주당 총재, 민주평통 상임부의장)씨에게 ‘사퇴하면 부총재를 보장한다’는 DJ의 편지를 전했다. 이기택씨는 결국 YS 지지를 선언했고, YS는 총재로 당선됐다.
전당대회 후 당직 인선이 있었다. YS는 처음에는 동교동계를 인사에서 배려하는 것 같더니, 언론에서 ‘김대중의 섭정’이라는 말이 나오자 동교동계를 소외시키기 시작했다. 섭섭했다. 가택연금 중이던 DJ는 장남 김홍일(金弘一, 15~17대 국회의원) 군을 통해 “김 총재에게 어떤 불만이 있더라도 그가 민주회복투쟁을 계속하는 한 적극 밀어주는 것이 우리의 도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술, 자동차, 운전 등 특히 조심해 주기를 바라네”라는 말로 편지를 끝맺었다.
朴正熙의 죽음을 알린 의문의 전화
1979년 10월 27일 새벽 4시경이었다. 전화가 왔다. 수화기를 들었다.
“박정희가 죽었소.”
그는 그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그날 새벽 전화를 걸어왔던 이가 누군지는 아직도 모른다. 기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를 하기는 했지만 ‘대통령의 불행은 나라의 불행이고, 야당이 그런 데서 반사이익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평소 소신이었다.
당시 나는 가택연금 중이었다. 김제만 신민당 의원이 집으로 찾아왔다. 나는 그에게 “박 대통령 빈소(殯所)에 조문(弔問)을 하고 싶으니 청와대에 얘기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김 의원이 청와대로 전화를 넣었다. 얼마 후 다음 날 오후 3시에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다음 날 나를 감시하던 서대문경찰서 정보과 강모 경사의 차를 타고 청와대로 들어갔다.
박정희 대통령의 관(棺) 앞에서 나는 1968년 그와의 만남을 생각했다. 그때 그는 내게 “만일 내가 장기집권을 하거든 김 의원이 앞장서서 극한투쟁을 하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장기집권을 하다가 비명(非命)에 갔다. 조문을 마치고 나오는데 내가 만든 《다리》지 필진 중 한 명이었던 남재희(南在熙, 10~13대 국회의원, 노동부장관) 공화당 의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반색을 했다. 나는 남 의원에게 말했다.
“김대중 선생이 조문을 오려 하는데, 주선 좀 해주십시오.”
그건 순전히 내 독단이었다. DJ가 박정희 대통령을 조문하면, 그에 대한 세상의 오해가 많이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 의원도 기뻐하면서 그러겠다고 했다. 다음 날 남 의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렵다”는 얘기였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유족 측에서는 좋다고 했으나, 계엄사령부 측에서 반대했다고 한다.
YWCA 위장결혼식 사건
10·26 이후 재야(在野)의 의견은 둘로 갈라졌다. 안국동에 있는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의 집에서는 재야인사들의 모임이 있었다. 예춘호(芮春浩, 6·7·10대 국회의원)·양순직(梁淳稙, 6·7·14대 국회의원)·박종태(朴鍾泰, 7·13대 국회의원)·김윤식 전 의원, 백기완(白基玩)씨, 김관석(金觀錫) 목사 등이 참석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최규하(崔圭夏) 정권 즉각 퇴진, 유신헌법 즉각 철폐”를 주장했다. 백기완씨도 앞장서서 강경론을 주장했다. 나는 반론을 제기했다.
“지금은 최규하 정권의 힘을 강화시켜야 할 때입니다. 최 정권을 강화시켜 유신헌법을 민주헌법으로 개정할 수 있도록, 민주세력이 뒷받침해 줘야 합니다. 우리가 최규하 정권을 흔들면, 그건 군부를 초대하는 결과가 됩니다.”
하지만 평소 나의 이런 주장에 동조하던 양순직·박종태·예춘호 전 의원도 웬일인지 그 자리에서는 강경론에 찬성했다. 윤 전 대통령은 “우리가 강경 투쟁을 하면, 군부 내에서도 지지세력이 나오게 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해할 수 없는 얘기였다. 김관석 목사만이 내 주장에 동조했다. 격론 끝에 나와 김 목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79년 11월 24일, 재야인사들은 서울 명동 YWCA에서 결혼식을 가장해 유신헌법 철폐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최규하 대통령 선출을 반대하는 집회를 가졌다. 이것이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이다. 나는 이 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됐다. 보안사 요원들은 이름도 물어보지 않고 다짜고짜 야구방망이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내가 기절하면 찬물을 끼얹어 깨운 후 다시 팼다. 보안사에서는 DJ를 YWCA 사건의 배후조종자, 나를 조직책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잡혀 들어가, 제일 많이 얻어맞았다. 그때 맞은 것이 원인이 되어 왼쪽 시력에 이상이 왔다. ‘타박성 백내장’이었다. 옆방에서 박종태 전 의원이 매를 맞으면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全斗煥과의 만남
내가 YWCA 사건과 무관하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연행된 지 사흘째 되는 날부터는 더 이상 매를 맞지 않았다. 연행된 지 6일째 되는 날, 합동수사본부 수사국장 이학봉(李鶴捧, 민정수석비서관·안기부2차장·13대 국회의원) 대령이 찾아왔다.
“전두환 사령관을 만나보시겠습니까?”
“못 만날 것 없지요.”
하도 맞아서 제대로 운신할 수 없는 나를 좌우에서 두 사람이 부축해서 이학봉 수사국장의 방으로 데려갔다. 점퍼 차림의 전두환 사령관은 조니 워커와 오징어 등 마른안주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김 의원께서 약주를 좋아하신다기에, 술이나 한 잔 하려고 뵙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시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 장군이 말했다.
“조사를 해보니, 윤보선씨가 이번 사건을 주동했더군요. 즉각 연행해서 철저히 조사를 할 생각입니다.”
“그건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살아계실 때, 민청학련 사건이 있었잖습니까? 그때 윤보선씨가 김지하 시인에게 자금을 대준 것이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검사가 그때 안국동 윤보선씨 댁으로 가서 전직 대통령의 예우를 갖춰 조사했지, 수사기관으로 연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아, 그랬습니까? 알겠습니다.”
시원시원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전두환 장군은 이야기 도중에 갑자기 점퍼 속주머니에 손을 넣어 권총을 뽑더니, 자기 가슴을 겨누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보안사령관을 일생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국가를 위해서라면 오늘 당장 죽어도 후회가 없는 사람입니다. 내게는 다른 야심이 없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아, 이 사람은 야심이 있는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전 장군은 내게 시국수습방안이 있으면 얘기해 달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악마와 다리 건너기’
“그리스 속담에 ‘이 다리를 건너기 위해서는 악마와도 손을 잡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리 이쪽은 절망과 불행의 땅이고, 다리를 건너가면 희망과 행복의 땅입니다. 그런데 이 다리를 건너기 위해서는 악마와 손을 잡아야만 하고, 우리 편만 건너려고 하면 다리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악마와도 손을 잡고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는 얘깁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사정이 이와 같습니다. 악마, 즉 정치적 반대자와는 손을 잡을 수 없다고 해서 자기편만 다리를 건너려고 하면 다리가 무너져버리고 모두 다 죽게 됩니다.”
이학봉 국장이 끼어들었다.
“악마가 누굽니까?”
“내 편에서 보면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나 김종필(金鍾泌)씨, 전 장군 같은 분이 악마고, 전 장군 입장에서 보면 김대중·김영삼씨 같은 분이 악마, 저 같은 사람이 새끼 악마겠지요. 군부와 재야세력이 손을 잡고 함께 다리를 건너 희망의 땅으로 가야 합니다.”
밤 9시20분쯤 시작된 대화는 3시간 정도 계속됐다. 나는 최규하 정권을 강화시키고, 각계각층의 대타협을 통해 민주화를 이룩해야 하며, 군부의 정치개입은 안 된다고 역설했다.
다음 날 이학봉 수사국장이 찾아와 어제 전두환 사령관과 나눈 이야기를 문서로 정리해 달라고 했다. 그날 저녁 연행된 지 일주일 만에 풀려났다.
20여 일쯤 지났을까. 이학봉 국장이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연락해 왔다. 1차 술자리를 마치고 2차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 국장은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형님, 김대중씨와 손을 끊으세요. 그래야 형님이 삽니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 사람아, 누구와 손을 끊는다는 게 세수하는 것처럼 간단한 일인 줄 아나?”
서울의 봄
이후의 역사는 불행하게도 내가 바랐던 것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두환 장군은 12·12사태를 일으켜 군권(軍權)을 장악했다. 군부가 권력을 향해 나가고 있는데도 DJ·YS를 비롯한 민주화운동세력은 그 위험을 느끼지 못했다.
당시 DJ는 1978년 3월 이후 신민당을 탈당한 상태였다. 그때 투옥 중이던 DJ는 나와 의논 없이 이택돈 변호사를 통해 자신의 탈당의사를 알려왔다. 10·26사태 이후 DJ의 신민당 입당(入黨) 문제는 정계의 초미(焦眉)의 관심사였다. 나는 DJ가 무조건 신민당에 입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도기에는 외풍(外風)을 막아줄 수 있는 보호막이 필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또 나는 DJ가 대학 등에서 대중연설을 하는 것도 반대했다. 자칫 대학생들을 선동했다는 빌미를 줄까 우려해서였다. 하지만 DJ는 신민당 입당을 망설이면서 민주헌정동지회 등 자신을 지지하는 재야세력에 기대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재야세력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고, YS가 기득권(旣得權)을 갖고 있는 신민당에 들어가 경선(競選)을 벌일 경우 자기가 불리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1980년 5월 16일 나는 DJ의 외곽조직인 한국정치문화연구소 제주지부 개소식 참석을 위해 제주도에 가 있었다. 다음 날 개소식에는 문익환(文益煥) 목사가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동교동에 전화를 걸었던 동지 하나가 사색이 되어 말했다.
“동교동이 박살났답니다. 계엄군이 들어와서 선생님을 잡아가고, 계엄령이 제주도까지 확대됐답니다.”
‘아이쿠, 또 감옥 가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새벽 1시, 숙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여니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 서 있었다. 중앙정보부 제주분실로 연행되어 갔다가 5월 18일 아침 비행기편으로 서울로 압송됐다.
“金相賢이 金大中을 살렸다”
이후 54일간 남산에서 조사를 받았다. 열흘쯤 지났을까, 수사관들이 내가 알고 지내던 호남권 주먹 C모씨와의 관계를 묻기 시작했다. 내가 그에게 지시해서 호남권 깡패들을 동원, 광주에서 민중봉기를 일으킨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아,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두 달 후, 육군교도소에서였다.
이어 수사관들은 전남대 총학생회장 정동년(鄭東年)씨와의 관계를 물었다. 기억에 없는 사람이었다(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나는 1970년대 초 박정훈씨의 소개로 정동년씨를 만난 적이 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전혀 모른다”고 하자, 고문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정동년씨를 DJ에게 소개시켜 줬고, DJ에게 200만원을 받아 정동년씨에게 주면서 파출소에 화염병을 던지는 등 민중봉기를 일으키라고 사주했다는 것이었다.
이학봉 합동수사본부 수사국장도 육군교도소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수사하는 책임자였다. 그는 “정동년이에게 돈을 안 줬다고 해도 좋으니, 만났다고만 해달라”고 했다. 나중에는 “법정에서 소란을 일으키거나, 김대중씨 등 다른 사람들을 변호하지 말고 재판에 협조해 달라”고 했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재판이 열렸다. 검찰 측에서는 윤모라고 하는 재일동포 전향(轉向)간첩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그는 DJ를 일본에 있는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과 조총련을 통해 북한과 내통한 간첩으로 몰아갔다. 나는 듣다못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재판장! 전향도 제대로 안 된 간첩을 내세워가지고 46%에 달하는 국민의 지지를 받은 김대중 선생을 용공(容共)분자로 만드는 게 대한민국의 군사재판이오?”
그러자 그때까지 순순히 재판을 받고 있던 24명의 피고인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문익환 목사, 이문영(李文永) 교수, 시인 고은(高銀)씨 등이 앞장서서 소리를 질렀다.
“엉터리 재판 집어치워라!”
DJ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네, 한 건 했네’하는 표정이었다. 문익환 목사는 그 뒤 기회 있을 때마다 “김상현이가 김대중 선생을 살렸다”고 말하곤 했다.
YS, 상도동系만으로 민주국민회의 추진
이후 나는 7년형을 선고받고, 육군교도소, 서대문·안양·경주교도소에서 2년3개월간 복역했다. 수감되어 있는 동안 나는 하루 5시간씩 영어공부를 했다. 고교 중퇴 학력인 내가 더듬거리면서 영어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그때의 공부 덕분이다. 역설적이지만 전두환 정권에 신세를 진 셈이다.
1982년 8월, 나는 2년3개월 만에 출감했다. 이듬해 5월 18일, YS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23일간 계속된 그의 단식은, 1980년 5·17비상계엄확대 이후 숨죽이고 있던 민주화운동세력이 다시 기지개를 켜는 계기가 됐다.
그해 6월부터 옛 동교동계 전직 의원들이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조연하·김록영·박성철(김대중 후보 경호실장)·예춘호·박종태·양순직·박종률·김창환(金昌煥, 8대 국회의원)·최영근(崔泳瑾, 5·6·13대 국회의원)씨 등이었다. 우리가 모임을 가질 때면 안기부나 경찰에서 나와 감시를 했다.
나는 “후광(後光·DJ)이 없는 이상, 거산(巨山·YS)과 대화를 해서, 거산을 간판으로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심하게 반대했다. YS가 1979년 5·30전당대회에서 신민당 총재가 된 후 동교동계를 소외시켰던 일, 1980년 5·17조치 이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한동안 침묵했던 일 등이 앙금으로 남아 있었다.
그때 YS는 상도동계를 중심으로 민주국민회의라는 것을 만들려 하고 있었다. 회장은 이민우(李敏雨, 4·5·7~10·12대 국회의원, 신한민주당 총재) 전 국회부의장, 대변인은 김덕룡(金德龍, 13~17대 국회의원, 정무장관)씨였다. 나와 조연하·김록영씨도 이사로 되어 있었다. 나는 김 전 총재와 만난 자리에서 항의했다.
“나조차도 모르고 있었는데, 민주국민회의 이사라뇨? 동교동과 상도동이 힘을 합쳐 민주화운동을 하려면 신뢰가 회복되어야 하는데,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민주국민회의부터 해체하십시오.”
내 얘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YS는 민주국민회의를 해체하겠다고 했다. 이때부터 동교동과 상도동 사이에 민주화를 위한 공동투쟁 논의가 시작됐다. 동교동에서는 나와 조연하·김록영·예춘호씨가, 상도동에서는 YS·이민우·최형우·김동영(金東英, 9·10·13대 국회의원, 정무장관)씨가 나왔다.
民推協의 탄생
YS는 정치인과 재야가 연합하는 국민연합 같은 기구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나는 정치인들만으로 조직을 꾸리자고 주장했다. 재야와 정치인의 조직이 일원화(一元化)되면 투쟁방법에 경직성을 가져오게 된다, 정치인과 혁명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때 이미 재야 일각에서는 남북교류나 통일, 주한미군 문제 등에 대해 급진적인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었는데, 정치인과 재야가 연합할 경우, 이런 문제에 대한 이견(異見)으로 조직이 표류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들었다. 이러한 걱정은 후일 전통 야당이 재야세력을 대거 영입하면서 현실화됐다.
조직 명칭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도 논란이 있었다. 나는 ‘민주화추진간담회’를 주장했다. YS는 ‘민주구국투쟁동지회’라는 명칭을 주장했다. “투쟁을 해도 시원치 않은 마당에 간담회가 뭐냐”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과거에 구호만 과감하고 거창했지 행동이 따르지 못해 국민들을 실망시키곤 했잖습니까? 명칭이야 온건하더라도 투쟁을 과감하게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YS는 ‘구국’과 ‘투쟁’이라는 단어에 집착했다. 나는 타협안으로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내놓았다. YS도 동의했다. ‘민추협’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해서 나왔다.
이제 회칙과 정관(定款)을 만들어야 했다. 나는 “회칙과 정관을 만들지 말고 민주협선언문의 정신에 기초해 운영하자”고 주장했다.
“향우회·친목계까지도 정관·회칙이 있습니다. 민추협은 상호간의 신뢰에 바탕을 둔 조직이 되어야 합니다. 정관이나 회칙 없이, 상호 신뢰에 기반 해서, 모든 것을 관례와 합의에 의해 운영해 나가는 것으로 합시다.”
상도동계에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으나 나는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성문(成文)헌법 없이도 민주주의를 잘하고 있지 않느냐”고 주장했다. 결국 내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공동의장’에서 ‘공동의장 권한대행’으로
이제 지도부를 구성할 차례였다. 나는 YS를 찾아가 김대중 위원장-김영삼 부위원장 체제를 제안했다. “김대중 선생은 미국에 계시지만 투쟁은 국내에서 하는 것입니다. 김 총재(YS)께서는 부위원장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위원장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대승적 견지에서 큰 바둑을 두십시오.”
하지만 YS는 난색을 표명했다. 그는 김영삼-김대중 공동의장 체제를 제안했다. 나는 미국에 있는 DJ를 공동의장으로 할 경우, 두 사람이 모든 것을 일일이 의논해서 결정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오해가 생겨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가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DJ를 고문, YS를 공동의장으로 하되, 동교동에서 공동의장을 내기로 했다.
동교동계에서는 누구를 공동의장으로 하느냐를 놓고 논의 끝에 조연하 전 의원이 나를 추천했다. 김록영·박종률 전 의원도 찬성했다.
동교동계에서도 나이가 어린 축이었던 내가 공동의장으로 추천되자 상도동에서는 깜짝 놀랐다. 안 그래도 DJ가 아닌 동교동 인사가 공동의장을 맡는 것은 YS의 격(格)을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들은 공동의장제에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나는 공동의장이 아니라 ‘공동의장 권한대행’을 맡는 것으로 타협했다.
그러나 다음 날 YS는 ‘공동의장 권한대행’도 곤란하다고 했다. 주변에서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럼 민추협을 깨자”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공동의장-공동의장 권한대행으로 낙착을 봤다.
1984년 5월 18일, 서울 남산 외교구락부에서 민추협 출범식이 열렸다. 정보기관원들과 전투경찰들이 회의장 주변을 에워쌌다. 민추협에 참여하기로 했다가, 기관의 협박을 받고 그만둔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 모 회사에서 한 달에 얼마씩 받고 있어서 참여하는 것은 어렵겠다”고 말한 모씨의 경우는 그나마 양심적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가석방 중이던 내게도 다시 수감하겠다고 위협했다.
민추협은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정치인들이 50대 50으로 만든 조직이었다. 처음에는 사회를 보거나 기자회견을 할 때에도, YS가 한 번 하면, 다음에는 내가 한 번 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그런데 내가 사회를 보거나 기자회견을 할 때에는 YS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내가 어쩌다 저런 놈하고 같이 공동의장이 되었나’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기자회견을 할 때에는 꼭 이렇게 발표했다.
“고문 김대중, 공동의장 김영삼, 그리고 김대중씨가 돌아오면 공동의장을 맡기기로 하고, 공동의장 권한대행 김상현.”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김 총재(YS)께서 사회도, 기자회견도 다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동교동계에서 반발하고 나섰다. 조연하·김록영·박종률·박성철 씨 등이 “왜 김영삼이 혼자서 회의를 진행하게 하느냐”고 따졌다.
“형님들, 죽을 죄를 졌습니다. 가만히 보니 그쪽 사람들이 모두 팍 찌그러진 인상들인데, 이거 일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가지고는 건강에도 좋지 않고, 소화도 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김 총재보고 다 하라고 했소.”
DJ, 民推協에 소극적
나는 민추협을 하는 동안, 한번도 내가 YS와 동렬(同列)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공식회의 석상이 아니면, 뒷자리로 물러나 앉았다.
민추협을 만들면서 나는 미국의 DJ에게 사전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정보기관의 공작이 끼어들 수도 있어, 일이 잘못될 경우, 그에게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DJ도 나의 진정을 알아줄 것으로 믿었다. 그와 30년 동안 정치를 하면서 나는 늘 그런 생각으로,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했다.
민추협을 만드는 과정에서 동교동계는 소극적이었다. 미국에 있는 DJ도 ‘김영삼씨와 함께하는 민추협은 찬성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왔다. 그래서 민추협은 ‘정치인들의 조직’이라는 원칙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교동 가신(家臣)들은 한 명도 참여하지 않았다. 동교동계 정치인들 중에서도 박영록·박종태·양순직·최영근 전 의원 등은 처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들이 참여한 것은 1985년 DJ 귀국 이후였다. 전반적으로 DJ나 동교동계는 내가 강하게 밀고 나가니까 어쩔 수 없이 민추협 활동에 끌려오는 그런 분위기였다.
나는 정치적·인간적으로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지만, 세상은 내 마음 같지 않았다. “김상현이가 김대중 선생과는 관계없는 사조직(私組織)을 만들고 있다”, “김대중 계보를 김영삼에게 팔아먹었다”는 얘기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정보기관 돈을 받고 하는 짓이다”라느니 “전두환의 지시를 받고 하는, 전두환 앞잡이다”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DJ의 경고
1985년 2·12총선을 앞두고 재야의 의견은 둘로 갈라졌다. 하나는 총선에 참가하는 것은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는 것이므로 총선을 보이코트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두환 정권의 관제(官製)야당인 민한당(민주한국당)을 대신하는 선명야당을 만들어 총선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후자(後者) 쪽이었다.
조연하 전 의원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신당(新黨)을 만들어 만석(晩石·조윤형)을 당수로 밀자”고 했다. 나도 기꺼이 동의했다. 조병옥(趙炳玉) 박사의 아들로 7·8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윤형 전 의원은 유신선포 직후 보안사에 연행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13년 가까이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있던 민주투사였다.
당시 조윤형 전 의원은 민한당 입당을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얘기를 듣고 난 후 그는 민한당 입당을 재고(再考)해 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에게 민한당 입당을 강하게 권한 사람은 DJ였다. 이때 민한당행(行)을 택한 조 전 의원은 2·12총선 후 잠깐 민한당 총재를 맡았다. 그러나 이후 민한당이 신민당에 흡수된 뒤 정치적으로 별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1996년 세상을 떠났다.
그 무렵 미국에 있던 DJ가 미국에서 한국인권문제연구소 활동을 하고 있던 심기섭씨를 보내왔다. 평창동 북악파크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DJ의 장남 김홍일씨가 동석했다. DJ의 메시지는 강경했다.
“김대중 선생은 신당 창당을 중지하라고 하십니다. ‘이번에도 말을 듣지 않으면 절교한다’고 통지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번에도’라는 것은 DJ의 소극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민추협 결성을 밀어붙인 것을 말했다. 나는 “‘국내 정세를 감안해서 대처하고 있으니, 그 점은 내게 맡겨달라’고 전해달라”고 했다.
DJ의 방침에 따라 권노갑씨 등 동교동 가신들은 2·12총선에 참여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DJ는 조윤형·정대철씨 등의 민한당 입당에 주안점을 두면서, 나를 통한 신당 추진, 민주헌정연구회 등을 통한 재야활동 등 3트랙(track) 전술을 썼던 게 아닌가 싶다.
1984년 11월 30일 ‘정치풍토쇄신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공민권을 제약받고 있던 정치인에 대한 3차 해금(解禁)조치가 취해졌다. 15명만 마지막까지 해금이 되지 않았는데, 나도 그중 하나였다.
신한민주당 창당 과정에서 논란이 된 것은 민추협 대(對) 비민추협의 비율이었다. YS는 그 비율을 70대 30으로 하자고 했고, 이철승·신도환·김재광·이기택씨 등은 50대 50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가 나서서 50대 50 주장을 받아들이자고 YS를 설득했다. 민추협 내에서는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50대 50으로 지분을 갖기로 했다. 총재는 상도동계인 이민우 전 국회부의장이 맡게 됐다.
전국구 팔아 정치자금 마련
선거를 치르려면 돈이 있어야 했다. 전국구(全國區) 공천으로 마련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연하·김록영·박종률 전 의원과 의논해 ‘공천헌금’을 받기로 했다. 1~7번은 5억원, 8번은 3억원, 9번은 2억원, 10~13번은 1억원, 14번은 7000만원, 15번은 5000만원이었다.
상아탑학원을 운영해 돈을 번 임춘원(林春元, 12~14대 국회의원)씨가 당에 3억원, 동교동에 2억원을 내기로 하고 2번을 받았다. 현금으로 2억원을 냈고, 내게는 별도로 5000만원을 주기로 했다.
한석봉(韓錫奉, 12~14대 국회의원)씨는 당에 3억원, 동교동에 2억원을 내기로 하고 6번을 받았다. 그는 동교동에 내기로 한 2억원은 현금으로 1억, 어음으로 1억을 냈다.
승려인 김용오(金容午, 12대 국회의원)씨는 현금 7000만원을 내고, 2억원짜리 어음을 주면서, 당선이 되면 모두 6억원을 내기로 했다. 9번 박종률씨는 2억원을 내야 했지만 그동안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생각해서 1억원만 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모두 5억7000만원을 만들었다.
여기에 내가 집을 담보 잡혀서 빌린 돈 6000만원과 집사람이 빌려온 돈 3800만원을 보탰다. 집은 은행과 제2금융권, 연희동성당 신용조합 세 군데에 3중으로 담보를 잡혔다.
이 돈으로 동교동계의 조연하 전 의원에게 1억6000만원, 김록영 전 의원에게 1억1000만원을 지원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유명한 이철(李哲, 12~14대 국회의원)씨도 동교동계로 분류되어 1억500만원을 지원했다. 박종률 전 의원에게는 동교동 앞으로 들어온 돈 중에서 5000만원에 내가 임춘원씨에게 비공식적으로 받은 돈 5000만원을 더해서 1억원을 만들어주었다. 그 돈으로 전국구 헌금 1억원을 내게 했다. 상도동계인 이민우 신한민주당 총재에게도 5000만원을 지원했다. 그 밖에 동교동과 인연이 있거나 친분이 있던 이들에게 100만~200만원씩 도와준 것도 꽤 많았다.
한석봉·김용오씨, 내기로 한 공천헌금 부도내
나는 경남 마산에서 출마한 정치신인(新人) 강삼재(姜三載, 12~16대 국회의원)씨에게도 9500만원을 지원했다. 경남에 동교동계 의원을 하나 만들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나중에 정치권의 지역구도가 확연해진 후 나는 그를 “YS에게 가라”고 놓아주었다.
공천헌금을 받고 전국구 의석을 준 것은 사실 부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 초 이래 탄압만 받아온 동교동계로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돈을 만들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만든 돈은 단 한 푼도 사적(私的)인 용도로는 쓰지 않았다. 무너진 동교동계를 재건하는 데 썼다. 그럼에도 일부 동교동 비서들은 미국에 있는 DJ에게 “김상현이가 전국구를 팔아서 혼자 다 썼다”는 편지를 보냈다.
나중에 DJ가 귀국한 후, 나는 돈을 어떻게 모아서 어디에 썼는지를 모두 보고했다. 그는 박종률 전 의원에게 1억원을 지원한 사실 하나만 지적했다.
“박종률이는 (2억원을 내놓아야 하는) 전국구 9번인데 1억원을 깎아줬으면 1억원은 자기가 내야지, 왜 자네가 대신 내줬나?”
“조연하·김록영·박종률이 없으면 민추협이 없고, 그들이 없었으면 신민당(신한민주당)이 없고, 오늘의 동교동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어음으로 공천헌금을 냈던 한석봉·김용오씨는 의원이 된 후 약속한 돈을 내놓지 않았다. 그들이 낸 어음은 공신력이 없는 속칭 ‘문방구어음’이었다. ‘문방구어음’이라도 받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당시 동교동계의 사정은 열악했다.
그걸 어렵게 어음할인을 해서 현금화(現金化)했는데, 부도가 난 것이다. 모두 3억5000만원이나 됐다. 그걸 메우느라 10년을 고생했다. 그 과정에서 목포의 토건업자라고 소개받은 정요섭이라는 사람에게서 어음으로 3500만원을 빌리기도 했다. 그중 2000만원을 갚았고, 1500만원은 부도어음이어서 갚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서진룸살롱 사건의 주범이었다. 나중에 내가 정요섭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 하여 문제가 됐다.
당초 신한민주당 창당에 소극적이었던 동교동계는 선거 과정에서도 신민당 후보가 아닌 동교동계 후보를 지원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서울 종로구에서는 김홍일씨가 이민우 신민당 총재 대신 정대철씨를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 동교동 비서들도 정대철씨 지지 운동을 하고 다녔다. YS가 펄펄 뛰었다. 나는 YS를 찾아가 백배사죄하고 “앞으로는 이민우씨를 적극 지지하겠다”고 다짐했다. YS가 물었다.
“어떻게 지원하겠소?”
“5000만원을 지원하겠습니다.”
앞에서 말한 이민우 신민당 총재에게 5000만원을 지원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趙淵夏 파동
1985년 2월 8일 DJ가 귀국했다. 2·12총선 후 수안보온천으로 그를 찾아갔다. 민추협 결성에서부터 신당 창당까지의 과정을 죽 설명하고, 그 과정에서 그와 일부 뜻을 같이하지 못한 데 대해 사과했다. 그가 말했다.
“나는 신당이 완전히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자네 생각이 맞았네. 미안하네. 내가 자네에게 양해를 구해야겠네.”
“형님이 미국에 계셔서 국내 상황을 잘 몰라서 그러신 것이죠. 형님이 귀국해서 힘이 되어주셨기 때문에 이번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민추협 결성에서부터 신당 창당까지의 과정에서 소원(疎遠)해진 간격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조연하 파동이 터졌다.
제12대 국회의 야당 몫 국회부의장은 원래 조연하 의원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당시 동교동계인 김록영 의원이 투병(鬪病) 중이었다. 그에게 국회부의장 직함을 달아주면 외국으로 나가 예우를 받으며 치료를 받을 수 있겠다 싶었다. 조연하 의원도 흔쾌히 동의했다. 김록영 의원은 국회부의장이 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985년 7월 일본 도쿄(東京)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연하 의원은 당연히 자신이 국회부의장으로 추천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DJ는 귀국 후 자신에게 ‘재정적 기여’를 한 유제연(柳濟然, 8·12대 국회의원) 의원을 부의장으로 내세웠다.
조연하 의원은 격분했다. 1971년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이철승씨의 참모장 역할을 하면서 DJ 지지를 이끌어낸 사람이 조 의원이었다. 그 후에도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민추협 활동 등을 통해 동교동계를 재건하는 데 앞장섰던 그로서는 배신감이 컸을 것이다. 조 의원은 1985년 10월 독자적으로 부의장 출마를 강행했다. 상도동계와 비민추협계, 그리고 민정당 의원들의 지원을 받아 그는 부의장으로 당선됐다. 동교동계도, 신민당도 발칵 뒤집혔다.
동교동계 내에서는 내가 조 의원을 부추겼다는 얘기가 돌았다. 나는 조연하 의원과 사석(私席)에서는 서로 말을 놓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지만, 부의장 출마와 관련해서는 동교동계의 분열을 우려해 만류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조 의원은 동교동의 압박에 밀려 1년 후 부의장직을 사퇴했다. DJ를 위해 헌신했고, 직언(直言)도 많이 했던 그는 이후 DJ와 멀어졌다. 이런 식으로 DJ 주변에서 직언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 둘 사라져갔다.
DJ와의 결별
DJ는 1987년 10월 28일 대선 출마와 평화민주당 창당을 선언했다. 창당 선언 사흘 전, 그는 내게 평민당 창당 의사를 밝혔다. 나는 “지금 두 분이 분열되면 집권은 멀어진다. 나는 동참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묵묵부답(默默不答)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YS가 이끄는 통일민주당에 남았다. 1987년 대선기간에 나는 통일민주당 ‘총재직무대행’직을 수행했다. 사실 그건 내가 “15년 만에 정치를 시작하는 사람이 모양을 갖춰야 할 게 아니냐. 털어놓고 말해서 내가 당신을 도우려면 힘이 없는 놈이라도 그냥 부총재보다는 ‘총재직무대행’이란 걸 붙여서 씌워줘야 힘이 솟을 것 아니냐”고 해서였다. YS는 1989년 6월 소련 방문 때 나를 데려가는 등 나름 배려를 해주었다.
1988년 4·26총선에서 나는 서대문갑구(甲區)에 다시 출마했다. 1972년 유신 이래 16년 만이었다. 우리나라 정치인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공민권을 박탈당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평화민주당에서는 재야에서 출판운동을 하던 김학민(金學珉, 16대 국회의원)씨를 출마시켰다. 이희호 여사가 내 지역구까지 와서 “김상현이에게 표를 주면 안 된다”고 낙선운동을 했다. 결국 나는 낙선했다.
YS는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198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김대중이 자신의 출마를 위해 통일민주당에서 뛰쳐나가 평민당을 만들었을 때에도 김상현은 통일민주당에 남아 있었다. 그가 김대중과 나 사이에서 개인적으로 나를 선택했다기보다는 야당의 정통성을 깨지 않으려는 정치인으로서의 충정이었다”고 술회했다. 정확한 얘기였다.
때문에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合黨)이 발표되었을 때, 거기에 합류하지 않은 것은 나로서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나는 이기택씨 등과 함께 민주당을 만들었다.
黨權 도전
DJ는 1991년 4월, 이듬해 총선에 대비해서 재야인사들을 영입, 신민주연합당(신민당)을 창당했다. 평민당의 ‘지역당’ 이미지를 희석시키기 위해서였다. 신민당 창당을 앞두고 나는 DJ의 처남인 이성호씨와 함께 동교동을 찾아갔다. 내가 말했다.
“입당하겠습니다.”
DJ는 단칼에 거부했다.
“자네는 안 돼!”
그런다고 밀릴 내가 아니었다.
“민주정당에서 입당하겠다는 사람을 왜 안 받습니까? 전당대회에서 뵙겠습니다.”
4월 9일 나는 전당대회가 열리는 서울 삼성동 COEX 귀빈실로 갔다. 박홍(朴弘) 서강대 총장이 들어오면서 DJ에게 말했다.
“오면서 라디오에서 김상현씨가 입당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DJ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다시 DJ당(黨)으로 돌아갔다.
1992년 대선에서 패배한 후 DJ는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나는 그가 100% 정계로 복귀할 것으로 확신했다. 그는 1995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정계로 복귀했다.
1997년 5월 19일 제15대 대통령 후보와 당 총재를 선출하는 새정치국민회의 전당대회가 열렸다. 나는 대통령 후보로 나선 정대철(鄭大哲, 9·10·13·14·16대 국회의원) 부총재와 연대(連帶)해 총재 후보로 나섰다. 나는 당권(黨權)과 대권(大權)을 분리하고, 경선을 통해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이 DJ에게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 대한 도전 가능성을 철저하게 봉쇄했다. 나는 25.8%, 정대철 부총재는 21.8%를 득표하는 데 그쳤다.
“물구나무를 서서라도”
그해 12월 18일 대선에서 DJ는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지 26년 만이었다. 46세의 패기만만한 젊은 정치인이던 그는 72세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36세의 청년이던 나도 이순(耳順)의 나이를 넘어버렸다.
젊은 시절, DJ를 따른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감옥에 가고 고문을 당했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 아래서 내가 할 일은 없었다. 평생 정치를 하면서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내 능력의 한계를 알기 때문이었다. ‘야당 당수’라면 한번 해보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렇다고 DJ에게 서운할 것은 없었다.
2000년 제16대 총선거를 앞두고 DJ는 새정치국민회의를 새천년민주당으로 간판을 바꾸어 달았다. 총선을 앞두고 총선연대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거기에 참여한 시민단체 인사들은 모두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어려웠던 시절, 내게 와서 단체를 운영할 자금을 얻어가거나, 용돈을 받아 쓴 사람도 여럿이었다. 그런데 그 총선연대에서 낙천(落薦)-낙선운동 대상자 명단에 내 이름을 집어넣었다. 충격이었다. 1996년 한보그룹으로부터 국정감사와 관련해 청탁을 받고 5000만원을 받았다는 것인데, 2심에서 정치자금임을 인정받아 무죄(無罪)판결을 받은 사안이었다. 나중에 총선연대에 참가했던 인사들로부터 청와대의 주문이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단식까지 해가며 총선연대에 항의했다. 그리고 “물구나무를 서서라도 국회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김윤환(金潤煥, 11·13~15대 국회의원)·이기택·신상우(辛相佑, 8~10·13~15대 국회의원)·박찬종(朴燦鍾, 9·12~14대 국회의원)씨 등이 만든 민주국민당에 합류했다. 나는 전국구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2년 후 나는 광주북갑(北甲)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나가서 당선됐다.
《김대중자서전》
2004년 4·15총선. 나는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노무현(盧武鉉) 탄핵 역풍(逆風)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나는 어느덧 ‘낡은 정치인’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정치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래도 노무현 대통령은 나를 좋게 본 모양이다. 한번은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을 맡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가족과 의논해 보았더니, 아내와 자식들은 “맡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다.
DJ가 세상을 떠나기 전, 가끔 그를 찾아갔다.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저 어떻게 지내느냐는 얘기, 가족 얘기 정도였다. 2008년 8월 18일 DJ가 세상을 떠났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만감이 교차했다.
2010년 8월 《김대중자서전》이 나왔다. 두 권 합쳐서 1348쪽에 달하는 책이었다. 1971년 대선과 관련해 내 이름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대선 출마를 권고했고, 당시 그를 따르는 유일한 국회의원이었으며, ‘김대중 후보 비서실장’이었는데 말이다. 1980년 군사재판과 관련해서도 내 이름은 피고인들 가운데 한 명으로만 언급되어 있다. 민추협과 관련해서는 달랑 다섯 줄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씁쓸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DJ에 대한 미움도, 원망도 없다. 이제 그런 걸 따질 나이는 아니니까….⊙
전날 어떤 신문기자가 “내일 오후 7시에 중대발표가 있는데, 아마 국회가 해산될 것 같다”고 했다. 설마 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월 17일 오후 5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5·16에 이은 두 번째 쿠데타였다.
오후 5시쯤 서울로 올라온 나는 광화문(도렴동)에 있는 《다리》사(社)로 갔다. 여기서 윤형두(尹炯斗) 사장 등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維新) 선포 특별담화를 들었다. 인근 석굴암다방으로 가서 커피 한 잔을 마신 후 밀튼 주한브라질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와는 내가 운영하던 해외교포문제연구소가 브라질교포 문제를 다루면서 가까워졌다. 그는 장충동에 있는 자기 공관으로 오라고 했다. 그는 나를 맞이하기 위해 대사관 경비경찰도 다른 곳으로 보내놓고 있었다.
밀튼 대사는 내게 미국이나 브라질로 망명을 하라고 권하면서, 자기가 손을 써주겠다고 했다. 밀튼 대사의 조국 브라질도 쿠데타와 군부(軍部) 통치로 점철된 나라였다. 그 때문인지 밀튼 대사는 이 같은 상황에서는 우선 몸부터 피하고 봐야 한다는 것을 체득하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망명(亡命)’이라는 것이 내 일이 됐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졌다.
“조국을 버리고 어떻게 망명하는가?”
“그럼 우선 3개월만이라도 피신해 있어라. 장소는 내가 제공하겠다.”
내가 피신을 하면, 내 가족, 비서관, 운전기사, 그리고 《다리》나 해외교포문제연구소 등 내가 만들어놓은 연구소 관계자들이 다칠 것이 뻔했다. 그날 밤은 밀튼 대사의 공관에서 잤다.
다음 날, 밀튼 대사는 충무로 수도극장 앞까지 직접 차로 데려다 줬다. 그는 헤어지기 전에 5000달러를 주려 했지만, 사양했다. 그에 대한 고마움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강창성(姜昌成) 보안사령관과 통화를 했다. 강 사령관과는 그가 중앙정보부 차장보로 있을 때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내가 속해 있는 국회 내무위원회 관할이었다. 그가 말했다.
“왜 집에 안 들어가십니까? 집에 들어가 계십시오.”
“미국에서 손님이 오기로 돼 있어요. 그를 만나고 저녁때 들어가겠소.”
나는 이구홍 교포문제연구소 사무국장과 함께 영화를 보고, 하와이에서 온 교포와 저녁식사를 한 후 집으로 갔다. 보안사령부 요원들이 감시하는 가운데 연금(軟禁)이 시작됐다.
“유신에 협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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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유신이 선포된 후인 1972년 10월 18일 무장한 계엄군이 연세대로 진주하고 있다. |
나는 강 사령관에게 유신에는 협조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리고 건강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입원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검진을 받았는데, 건강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감옥에 가도 버텨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조일제(趙一濟, 중정 보안차장보, 주일공사, 10·11대 국회의원) 중앙정보부 3국장이 찾아왔다. 그가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락(李厚洛) 부장, 강창성 사령관 모두 김 의원을 살리고 싶어합니다. 유신에 협조해 주십시오. 그러면 계속 국회의원을 할 수 있게 밀어드리겠습니다.”
“나는 협상론자지만, 원칙만큼은 협상을 하지 않습니다. 이건 원칙의 문제입니다. 유신에는 결코 협력할 수 없어요.”
“강하면 부러집니다. 민주주의를 하더라도 국회에 들어가서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는 “야당 의원 누구누구가 잡혀들어가 고문을 받고 병신이 됐다”는 얘기도 했다. 내가 계속 유신 지지를 거부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김 의원의 지구당 부위원장 중 누구라도 좋으니, 그에게 유신을 지지하라고 해주십시오.”
“여보, 하려면 내가 하지, 나는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보고 하라고 한단 말이오?”
“이틀간 말미를 드리겠습니다. 이틀 안에 전화가 없으면, 그대로 구속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정권 아래서는 더 이상 정치를 못 하게 될 겁니다.”
고문
조 국장이 나가고 나자 두려움이 밀려왔다. 마음이 약해졌다. 그때 아내가 들어왔다. 아내는 내 얘기를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잘했어요. 당신이 유신을 지지하면, 나나 아이들이 밖에 나가서 어떻게 누구 아내, 누구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나는 아내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고맙소. 당신 말대로 하리다!”
사실 나는 아내가 유신을 지지하라고 하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정말 훌륭한 아내였다. 나는 한국 정치인 중에서 나만큼 결혼을 잘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수원의 부잣집 딸로 태어나 내게 시집와서 온갖 고생을 다했다. 내가 그동안 처가와 아내에게서 갖다 쓴 돈이 수십억원은 될 것이다. 그걸 떠나서라도 아내는 내가 정치를 하는 동안 잘못된 길로 빠져들지 않게 하는 버팀목이었다.
잠자리에 누우니 별생각이 다 났다.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계속 뒤척거리자 아내가 말했다.
“사람은 다 한번 죽는 건데, 다 하느님에게 맡겨야지 뭘 그러세요?”
유신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가 있던 11월 21일 나는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됐다. 차에 타자 보안사 요원들이 무전기로 “짐짝 출발했다”고 말하는 게 들렸다.
보안사 요원들은 다짜고짜 옷을 벗기고 나서 손을 묶어 무릎에 끼우더니 양다리 사이에 막대기를 넣어 거꾸로 매달았다. 소위 ‘통닭구이’라는 고문(拷問)이었다. 그들은 몽둥이로 내 발바닥을 때리며 취조했다. 주로 DJ의 여자관계, 정치자금줄, 그리고 그의 군부인맥 등에 대해 물었다. 나 자신과 관련된 일로는 따귀 한 대 맞지 않았다.
며칠 동안 혹독한 고문이 이어졌다. 의자에 묶은 채 2층에서 아래층으로 밀어버리는 고문도 당했다. ‘사우나’라는 고문이었다. 전기고문도 당했다.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하자 그들은 나를 뇌물알선 및 뇌물수수로 엮어 넣었다. 소위 ‘떡값’이 빌미가 됐다.
떡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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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이후 보안사에서 고문을 받은 조윤형・김상현・조연하 의원(왼쪽부터)이 1972년 12월 30일 서대문교도소로 이송되고 있다. |
“건설위나 재경위에서는 50만원씩 돌렸다는데, 우린 이게 뭐요?”
나는 공화당 간사인 김용진 의원과 함께 오치성 위원장을 닦달했다.
“서울시장에게 얘기해서라도 어떻게 한 300만원만 만들어 보시오.”
오 위원장과 나, 김용진 의원은 김현옥(金玄玉) 서울시장을 만났다. 오치성 위원장을 대신해서 내가 김 시장에게 말했다.
“다른 위원회에서는 위원장이 알아서 떡값을 만들지만, 우리 위원장은 그러질 못하니, 시장께서 300만원만 마련해 주시오.”
김현옥 시장이 말했다.
“제가 현금을 마련해 드릴 수는 없고, 건설공사를 하나 드릴 테니 업자한테서 갖다 쓰시지요.”
마침 건설회사 전무로 있는 친구가 있었다. 평소 그에게 신세를 졌던 것을 갚을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를 서울시와 연결시켜 주고 ‘떡값’을 받아 내무위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고문을 견디다 못한 나는 그 사실을 실토했다. 하지만 오치성 위원장 등 다른 사람들이 다칠까 봐 내가 돈을 받아 나누어주었다고 진술했다. 내 친구도 보안사로 연행되어 곤욕을 치렀다. 결국 나는 뇌물알선 및 뇌물수수죄로 기소됐다. 최후진술을 할 때 나는 고문을 당한 사실을 폭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애완용 강아지 귀를 잡아 올렸다가 동물학대라는 비판을 받고 사과했다고 합니다. 박 대통령은 이 김상현이가 귀여워서 발가벗겨 거꾸로 매달았는지 모르지만, 그래,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백악관 강아지만도 못하단 말입니까?”
재판정은 웃음바다가 됐다.
성북구치소에 있는 동안 아내가 면회를 왔다. 눈물을 보이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왜 사람을 감옥에 보내놓고 울어?”
서대문교도소에 있는 동안 나는 그동안 못한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루 13시간씩 책을 읽었다. 사마천의 《사기》, 새뮤얼슨의 《경제학》, 그리고 전사(戰史)책들을 많이 읽었다. 1년쯤 지나서 안양교도소로 옮겼다.
거기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모반(謀叛)을 꾀했다 해서 투옥된 전(前)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尹必鏞) 소장 등을 만났다. 나와 조연하(趙淵夏, 5·8·12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조윤형(趙尹衡, 6~8·13·14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김한수(金漢洙, 8·12대 국회의원) 전 의원, 그리고 윤필용 소장은 가끔 함께 테니스를 했다. 하루는 테니스를 하고 난 후 쉬는데, 윤 장군이 이런 얘길 했다.
“1971년 대선 후 미8군사령관을 만났더니 ‘만일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면, 군부가 어떻게 했겠느냐?’고 묻더군요. 나는 두 손으로 기관총을 쏘는 시늉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죠. ‘드르륵…’”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소식을 들은 것도, 1974년 육영수(陸英修) 여사 피살 소식을 접한 것도 감옥에서였다.
1974년 12월 나는 형기(刑期)를 1년가량 남겨놓은 상태에서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학생과 지식인들의 반(反)유신 민주회복운동으로 정국(政局)은 얼어붙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로 맞섰다. 나는 정치가 파국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박 대통령과 만나려 했다. 청와대와 통할 만한 사람들을 만나 부탁했지만, 대화의 길은 막혀 있었다. 남은 것은 투쟁뿐이었다.
나는 1972년 유신 선포 직후 보안사에 연행(連行)되어 고문을 당했던 사실을 폭로하기로 했다. 당시 고초를 겪었던 조윤형·홍영기(洪英基, 5·6·8·13·14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이종남·조연하·김록영(金祿永, 8~10·12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김경인(金敬仁, 8·9대 국회의원)·최형우(崔炯佑, 8~10·13~15대 국회의원, 내무부장관)·박종률(朴鍾律, 8·11·12대 국회의원)·강근호(姜根鎬, 8대 국회의원, 군산시장)·이세규(李世圭, 8대 국회의원)·유갑종(劉甲鍾, 8·12대 국회의원) 전 의원이 동참했다.
‘고문정치 종식을 위한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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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2월 9일 유신 직후 투옥됐던 조연하(왼쪽에서 첫 번째)・김상현(왼쪽에서 두 번째)・조윤형(맨 오른쪽) 전 의원이 마중나온 김영삼 신민당 총재(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함께 기뻐하고 있다. |
유신정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이후에는 DJ 등 민주인사들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다.
1979년 5월 30일 신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DJ와 나는 ‘중도통합론’을 내세우던 이철승(李哲承) 대표 대신 YS를 지지하기로 했다. 나는 대표 경선에 나선 조윤형·박영록(朴永祿, 7·9·10대 국회의원)·김재광(金在光, 6~10·12~14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씨 등을 설득해 사퇴시켰다. 1차 투표가 끝난 후 나는 이기택(李基澤, 7~10·12~14대 국회의원, 민주당 총재, 민주평통 상임부의장)씨에게 ‘사퇴하면 부총재를 보장한다’는 DJ의 편지를 전했다. 이기택씨는 결국 YS 지지를 선언했고, YS는 총재로 당선됐다.
전당대회 후 당직 인선이 있었다. YS는 처음에는 동교동계를 인사에서 배려하는 것 같더니, 언론에서 ‘김대중의 섭정’이라는 말이 나오자 동교동계를 소외시키기 시작했다. 섭섭했다. 가택연금 중이던 DJ는 장남 김홍일(金弘一, 15~17대 국회의원) 군을 통해 “김 총재에게 어떤 불만이 있더라도 그가 민주회복투쟁을 계속하는 한 적극 밀어주는 것이 우리의 도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술, 자동차, 운전 등 특히 조심해 주기를 바라네”라는 말로 편지를 끝맺었다.
1979년 10월 27일 새벽 4시경이었다. 전화가 왔다. 수화기를 들었다.
“박정희가 죽었소.”
그는 그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그날 새벽 전화를 걸어왔던 이가 누군지는 아직도 모른다. 기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를 하기는 했지만 ‘대통령의 불행은 나라의 불행이고, 야당이 그런 데서 반사이익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평소 소신이었다.
당시 나는 가택연금 중이었다. 김제만 신민당 의원이 집으로 찾아왔다. 나는 그에게 “박 대통령 빈소(殯所)에 조문(弔問)을 하고 싶으니 청와대에 얘기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김 의원이 청와대로 전화를 넣었다. 얼마 후 다음 날 오후 3시에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다음 날 나를 감시하던 서대문경찰서 정보과 강모 경사의 차를 타고 청와대로 들어갔다.
박정희 대통령의 관(棺) 앞에서 나는 1968년 그와의 만남을 생각했다. 그때 그는 내게 “만일 내가 장기집권을 하거든 김 의원이 앞장서서 극한투쟁을 하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장기집권을 하다가 비명(非命)에 갔다. 조문을 마치고 나오는데 내가 만든 《다리》지 필진 중 한 명이었던 남재희(南在熙, 10~13대 국회의원, 노동부장관) 공화당 의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반색을 했다. 나는 남 의원에게 말했다.
“김대중 선생이 조문을 오려 하는데, 주선 좀 해주십시오.”
그건 순전히 내 독단이었다. DJ가 박정희 대통령을 조문하면, 그에 대한 세상의 오해가 많이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 의원도 기뻐하면서 그러겠다고 했다. 다음 날 남 의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렵다”는 얘기였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유족 측에서는 좋다고 했으나, 계엄사령부 측에서 반대했다고 한다.
YWCA 위장결혼식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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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2월 11일 가석방으로 출옥한 김상현 전 의원(왼쪽)이 DJ부부와 함께 명동성당에서 열린 ‘구속자 석방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했다. |
“지금은 최규하 정권의 힘을 강화시켜야 할 때입니다. 최 정권을 강화시켜 유신헌법을 민주헌법으로 개정할 수 있도록, 민주세력이 뒷받침해 줘야 합니다. 우리가 최규하 정권을 흔들면, 그건 군부를 초대하는 결과가 됩니다.”
하지만 평소 나의 이런 주장에 동조하던 양순직·박종태·예춘호 전 의원도 웬일인지 그 자리에서는 강경론에 찬성했다. 윤 전 대통령은 “우리가 강경 투쟁을 하면, 군부 내에서도 지지세력이 나오게 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해할 수 없는 얘기였다. 김관석 목사만이 내 주장에 동조했다. 격론 끝에 나와 김 목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79년 11월 24일, 재야인사들은 서울 명동 YWCA에서 결혼식을 가장해 유신헌법 철폐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최규하 대통령 선출을 반대하는 집회를 가졌다. 이것이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이다. 나는 이 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됐다. 보안사 요원들은 이름도 물어보지 않고 다짜고짜 야구방망이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내가 기절하면 찬물을 끼얹어 깨운 후 다시 팼다. 보안사에서는 DJ를 YWCA 사건의 배후조종자, 나를 조직책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잡혀 들어가, 제일 많이 얻어맞았다. 그때 맞은 것이 원인이 되어 왼쪽 시력에 이상이 왔다. ‘타박성 백내장’이었다. 옆방에서 박종태 전 의원이 매를 맞으면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全斗煥과의 만남
내가 YWCA 사건과 무관하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연행된 지 사흘째 되는 날부터는 더 이상 매를 맞지 않았다. 연행된 지 6일째 되는 날, 합동수사본부 수사국장 이학봉(李鶴捧, 민정수석비서관·안기부2차장·13대 국회의원) 대령이 찾아왔다.
“전두환 사령관을 만나보시겠습니까?”
“못 만날 것 없지요.”
하도 맞아서 제대로 운신할 수 없는 나를 좌우에서 두 사람이 부축해서 이학봉 수사국장의 방으로 데려갔다. 점퍼 차림의 전두환 사령관은 조니 워커와 오징어 등 마른안주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김 의원께서 약주를 좋아하신다기에, 술이나 한 잔 하려고 뵙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시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 장군이 말했다.
“조사를 해보니, 윤보선씨가 이번 사건을 주동했더군요. 즉각 연행해서 철저히 조사를 할 생각입니다.”
“그건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살아계실 때, 민청학련 사건이 있었잖습니까? 그때 윤보선씨가 김지하 시인에게 자금을 대준 것이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검사가 그때 안국동 윤보선씨 댁으로 가서 전직 대통령의 예우를 갖춰 조사했지, 수사기관으로 연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아, 그랬습니까? 알겠습니다.”
시원시원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전두환 장군은 이야기 도중에 갑자기 점퍼 속주머니에 손을 넣어 권총을 뽑더니, 자기 가슴을 겨누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보안사령관을 일생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국가를 위해서라면 오늘 당장 죽어도 후회가 없는 사람입니다. 내게는 다른 야심이 없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아, 이 사람은 야심이 있는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전 장군은 내게 시국수습방안이 있으면 얘기해 달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악마와 다리 건너기’
“그리스 속담에 ‘이 다리를 건너기 위해서는 악마와도 손을 잡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리 이쪽은 절망과 불행의 땅이고, 다리를 건너가면 희망과 행복의 땅입니다. 그런데 이 다리를 건너기 위해서는 악마와 손을 잡아야만 하고, 우리 편만 건너려고 하면 다리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악마와도 손을 잡고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는 얘깁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사정이 이와 같습니다. 악마, 즉 정치적 반대자와는 손을 잡을 수 없다고 해서 자기편만 다리를 건너려고 하면 다리가 무너져버리고 모두 다 죽게 됩니다.”
이학봉 국장이 끼어들었다.
“악마가 누굽니까?”
“내 편에서 보면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나 김종필(金鍾泌)씨, 전 장군 같은 분이 악마고, 전 장군 입장에서 보면 김대중·김영삼씨 같은 분이 악마, 저 같은 사람이 새끼 악마겠지요. 군부와 재야세력이 손을 잡고 함께 다리를 건너 희망의 땅으로 가야 합니다.”
밤 9시20분쯤 시작된 대화는 3시간 정도 계속됐다. 나는 최규하 정권을 강화시키고, 각계각층의 대타협을 통해 민주화를 이룩해야 하며, 군부의 정치개입은 안 된다고 역설했다.
다음 날 이학봉 수사국장이 찾아와 어제 전두환 사령관과 나눈 이야기를 문서로 정리해 달라고 했다. 그날 저녁 연행된 지 일주일 만에 풀려났다.
20여 일쯤 지났을까. 이학봉 국장이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연락해 왔다. 1차 술자리를 마치고 2차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 국장은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형님, 김대중씨와 손을 끊으세요. 그래야 형님이 삽니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 사람아, 누구와 손을 끊는다는 게 세수하는 것처럼 간단한 일인 줄 아나?”
서울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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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8월 14일 육군본부 계엄보통 군법회의 대법정에서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재판이 열리고 있다. (오른쪽부터 앞줄은 김대중, 문익환, 이문영 피고인, 둘째줄은 고은태, 예춘호 피고인) |
당시 DJ는 1978년 3월 이후 신민당을 탈당한 상태였다. 그때 투옥 중이던 DJ는 나와 의논 없이 이택돈 변호사를 통해 자신의 탈당의사를 알려왔다. 10·26사태 이후 DJ의 신민당 입당(入黨) 문제는 정계의 초미(焦眉)의 관심사였다. 나는 DJ가 무조건 신민당에 입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도기에는 외풍(外風)을 막아줄 수 있는 보호막이 필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또 나는 DJ가 대학 등에서 대중연설을 하는 것도 반대했다. 자칫 대학생들을 선동했다는 빌미를 줄까 우려해서였다. 하지만 DJ는 신민당 입당을 망설이면서 민주헌정동지회 등 자신을 지지하는 재야세력에 기대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재야세력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고, YS가 기득권(旣得權)을 갖고 있는 신민당에 들어가 경선(競選)을 벌일 경우 자기가 불리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1980년 5월 16일 나는 DJ의 외곽조직인 한국정치문화연구소 제주지부 개소식 참석을 위해 제주도에 가 있었다. 다음 날 개소식에는 문익환(文益煥) 목사가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동교동에 전화를 걸었던 동지 하나가 사색이 되어 말했다.
“동교동이 박살났답니다. 계엄군이 들어와서 선생님을 잡아가고, 계엄령이 제주도까지 확대됐답니다.”
‘아이쿠, 또 감옥 가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새벽 1시, 숙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여니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 서 있었다. 중앙정보부 제주분실로 연행되어 갔다가 5월 18일 아침 비행기편으로 서울로 압송됐다.
“金相賢이 金大中을 살렸다”
이후 54일간 남산에서 조사를 받았다. 열흘쯤 지났을까, 수사관들이 내가 알고 지내던 호남권 주먹 C모씨와의 관계를 묻기 시작했다. 내가 그에게 지시해서 호남권 깡패들을 동원, 광주에서 민중봉기를 일으킨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아,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두 달 후, 육군교도소에서였다.
이어 수사관들은 전남대 총학생회장 정동년(鄭東年)씨와의 관계를 물었다. 기억에 없는 사람이었다(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나는 1970년대 초 박정훈씨의 소개로 정동년씨를 만난 적이 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전혀 모른다”고 하자, 고문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정동년씨를 DJ에게 소개시켜 줬고, DJ에게 200만원을 받아 정동년씨에게 주면서 파출소에 화염병을 던지는 등 민중봉기를 일으키라고 사주했다는 것이었다.
이학봉 합동수사본부 수사국장도 육군교도소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수사하는 책임자였다. 그는 “정동년이에게 돈을 안 줬다고 해도 좋으니, 만났다고만 해달라”고 했다. 나중에는 “법정에서 소란을 일으키거나, 김대중씨 등 다른 사람들을 변호하지 말고 재판에 협조해 달라”고 했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재판이 열렸다. 검찰 측에서는 윤모라고 하는 재일동포 전향(轉向)간첩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그는 DJ를 일본에 있는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과 조총련을 통해 북한과 내통한 간첩으로 몰아갔다. 나는 듣다못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재판장! 전향도 제대로 안 된 간첩을 내세워가지고 46%에 달하는 국민의 지지를 받은 김대중 선생을 용공(容共)분자로 만드는 게 대한민국의 군사재판이오?”
그러자 그때까지 순순히 재판을 받고 있던 24명의 피고인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문익환 목사, 이문영(李文永) 교수, 시인 고은(高銀)씨 등이 앞장서서 소리를 질렀다.
“엉터리 재판 집어치워라!”
DJ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네, 한 건 했네’하는 표정이었다. 문익환 목사는 그 뒤 기회 있을 때마다 “김상현이가 김대중 선생을 살렸다”고 말하곤 했다.
YS, 상도동系만으로 민주국민회의 추진
이후 나는 7년형을 선고받고, 육군교도소, 서대문·안양·경주교도소에서 2년3개월간 복역했다. 수감되어 있는 동안 나는 하루 5시간씩 영어공부를 했다. 고교 중퇴 학력인 내가 더듬거리면서 영어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그때의 공부 덕분이다. 역설적이지만 전두환 정권에 신세를 진 셈이다.
1982년 8월, 나는 2년3개월 만에 출감했다. 이듬해 5월 18일, YS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23일간 계속된 그의 단식은, 1980년 5·17비상계엄확대 이후 숨죽이고 있던 민주화운동세력이 다시 기지개를 켜는 계기가 됐다.
그해 6월부터 옛 동교동계 전직 의원들이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조연하·김록영·박성철(김대중 후보 경호실장)·예춘호·박종태·양순직·박종률·김창환(金昌煥, 8대 국회의원)·최영근(崔泳瑾, 5·6·13대 국회의원)씨 등이었다. 우리가 모임을 가질 때면 안기부나 경찰에서 나와 감시를 했다.
나는 “후광(後光·DJ)이 없는 이상, 거산(巨山·YS)과 대화를 해서, 거산을 간판으로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심하게 반대했다. YS가 1979년 5·30전당대회에서 신민당 총재가 된 후 동교동계를 소외시켰던 일, 1980년 5·17조치 이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한동안 침묵했던 일 등이 앙금으로 남아 있었다.
그때 YS는 상도동계를 중심으로 민주국민회의라는 것을 만들려 하고 있었다. 회장은 이민우(李敏雨, 4·5·7~10·12대 국회의원, 신한민주당 총재) 전 국회부의장, 대변인은 김덕룡(金德龍, 13~17대 국회의원, 정무장관)씨였다. 나와 조연하·김록영씨도 이사로 되어 있었다. 나는 김 전 총재와 만난 자리에서 항의했다.
“나조차도 모르고 있었는데, 민주국민회의 이사라뇨? 동교동과 상도동이 힘을 합쳐 민주화운동을 하려면 신뢰가 회복되어야 하는데,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민주국민회의부터 해체하십시오.”
내 얘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YS는 민주국민회의를 해체하겠다고 했다. 이때부터 동교동과 상도동 사이에 민주화를 위한 공동투쟁 논의가 시작됐다. 동교동에서는 나와 조연하·김록영·예춘호씨가, 상도동에서는 YS·이민우·최형우·김동영(金東英, 9·10·13대 국회의원, 정무장관)씨가 나왔다.
民推協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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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5월 18일 출범을 선언한 민추협은 그해 7월 12일 민추협 사무실 개소식을 열었다. |
조직 명칭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도 논란이 있었다. 나는 ‘민주화추진간담회’를 주장했다. YS는 ‘민주구국투쟁동지회’라는 명칭을 주장했다. “투쟁을 해도 시원치 않은 마당에 간담회가 뭐냐”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과거에 구호만 과감하고 거창했지 행동이 따르지 못해 국민들을 실망시키곤 했잖습니까? 명칭이야 온건하더라도 투쟁을 과감하게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YS는 ‘구국’과 ‘투쟁’이라는 단어에 집착했다. 나는 타협안으로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내놓았다. YS도 동의했다. ‘민추협’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해서 나왔다.
이제 회칙과 정관(定款)을 만들어야 했다. 나는 “회칙과 정관을 만들지 말고 민주협선언문의 정신에 기초해 운영하자”고 주장했다.
“향우회·친목계까지도 정관·회칙이 있습니다. 민추협은 상호간의 신뢰에 바탕을 둔 조직이 되어야 합니다. 정관이나 회칙 없이, 상호 신뢰에 기반 해서, 모든 것을 관례와 합의에 의해 운영해 나가는 것으로 합시다.”
상도동계에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으나 나는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성문(成文)헌법 없이도 민주주의를 잘하고 있지 않느냐”고 주장했다. 결국 내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공동의장’에서 ‘공동의장 권한대행’으로
이제 지도부를 구성할 차례였다. 나는 YS를 찾아가 김대중 위원장-김영삼 부위원장 체제를 제안했다. “김대중 선생은 미국에 계시지만 투쟁은 국내에서 하는 것입니다. 김 총재(YS)께서는 부위원장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위원장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대승적 견지에서 큰 바둑을 두십시오.”
하지만 YS는 난색을 표명했다. 그는 김영삼-김대중 공동의장 체제를 제안했다. 나는 미국에 있는 DJ를 공동의장으로 할 경우, 두 사람이 모든 것을 일일이 의논해서 결정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오해가 생겨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가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DJ를 고문, YS를 공동의장으로 하되, 동교동에서 공동의장을 내기로 했다.
동교동계에서는 누구를 공동의장으로 하느냐를 놓고 논의 끝에 조연하 전 의원이 나를 추천했다. 김록영·박종률 전 의원도 찬성했다.
동교동계에서도 나이가 어린 축이었던 내가 공동의장으로 추천되자 상도동에서는 깜짝 놀랐다. 안 그래도 DJ가 아닌 동교동 인사가 공동의장을 맡는 것은 YS의 격(格)을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들은 공동의장제에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나는 공동의장이 아니라 ‘공동의장 권한대행’을 맡는 것으로 타협했다.
그러나 다음 날 YS는 ‘공동의장 권한대행’도 곤란하다고 했다. 주변에서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럼 민추협을 깨자”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공동의장-공동의장 권한대행으로 낙착을 봤다.
1984년 5월 18일, 서울 남산 외교구락부에서 민추협 출범식이 열렸다. 정보기관원들과 전투경찰들이 회의장 주변을 에워쌌다. 민추협에 참여하기로 했다가, 기관의 협박을 받고 그만둔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 모 회사에서 한 달에 얼마씩 받고 있어서 참여하는 것은 어렵겠다”고 말한 모씨의 경우는 그나마 양심적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가석방 중이던 내게도 다시 수감하겠다고 위협했다.
민추협은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정치인들이 50대 50으로 만든 조직이었다. 처음에는 사회를 보거나 기자회견을 할 때에도, YS가 한 번 하면, 다음에는 내가 한 번 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그런데 내가 사회를 보거나 기자회견을 할 때에는 YS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내가 어쩌다 저런 놈하고 같이 공동의장이 되었나’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기자회견을 할 때에는 꼭 이렇게 발표했다.
“고문 김대중, 공동의장 김영삼, 그리고 김대중씨가 돌아오면 공동의장을 맡기기로 하고, 공동의장 권한대행 김상현.”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김 총재(YS)께서 사회도, 기자회견도 다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동교동계에서 반발하고 나섰다. 조연하·김록영·박종률·박성철 씨 등이 “왜 김영삼이 혼자서 회의를 진행하게 하느냐”고 따졌다.
“형님들, 죽을 죄를 졌습니다. 가만히 보니 그쪽 사람들이 모두 팍 찌그러진 인상들인데, 이거 일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가지고는 건강에도 좋지 않고, 소화도 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김 총재보고 다 하라고 했소.”
DJ, 民推協에 소극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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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2월 11일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이 민추협의 2・12총선 참여 결정을 발표하고 있다. |
민추협을 만들면서 나는 미국의 DJ에게 사전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정보기관의 공작이 끼어들 수도 있어, 일이 잘못될 경우, 그에게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DJ도 나의 진정을 알아줄 것으로 믿었다. 그와 30년 동안 정치를 하면서 나는 늘 그런 생각으로,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했다.
민추협을 만드는 과정에서 동교동계는 소극적이었다. 미국에 있는 DJ도 ‘김영삼씨와 함께하는 민추협은 찬성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왔다. 그래서 민추협은 ‘정치인들의 조직’이라는 원칙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교동 가신(家臣)들은 한 명도 참여하지 않았다. 동교동계 정치인들 중에서도 박영록·박종태·양순직·최영근 전 의원 등은 처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들이 참여한 것은 1985년 DJ 귀국 이후였다. 전반적으로 DJ나 동교동계는 내가 강하게 밀고 나가니까 어쩔 수 없이 민추협 활동에 끌려오는 그런 분위기였다.
나는 정치적·인간적으로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지만, 세상은 내 마음 같지 않았다. “김상현이가 김대중 선생과는 관계없는 사조직(私組織)을 만들고 있다”, “김대중 계보를 김영삼에게 팔아먹었다”는 얘기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정보기관 돈을 받고 하는 짓이다”라느니 “전두환의 지시를 받고 하는, 전두환 앞잡이다”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DJ의 경고
1985년 2·12총선을 앞두고 재야의 의견은 둘로 갈라졌다. 하나는 총선에 참가하는 것은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는 것이므로 총선을 보이코트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두환 정권의 관제(官製)야당인 민한당(민주한국당)을 대신하는 선명야당을 만들어 총선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후자(後者) 쪽이었다.
조연하 전 의원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신당(新黨)을 만들어 만석(晩石·조윤형)을 당수로 밀자”고 했다. 나도 기꺼이 동의했다. 조병옥(趙炳玉) 박사의 아들로 7·8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윤형 전 의원은 유신선포 직후 보안사에 연행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13년 가까이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있던 민주투사였다.
당시 조윤형 전 의원은 민한당 입당을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얘기를 듣고 난 후 그는 민한당 입당을 재고(再考)해 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에게 민한당 입당을 강하게 권한 사람은 DJ였다. 이때 민한당행(行)을 택한 조 전 의원은 2·12총선 후 잠깐 민한당 총재를 맡았다. 그러나 이후 민한당이 신민당에 흡수된 뒤 정치적으로 별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1996년 세상을 떠났다.
그 무렵 미국에 있던 DJ가 미국에서 한국인권문제연구소 활동을 하고 있던 심기섭씨를 보내왔다. 평창동 북악파크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DJ의 장남 김홍일씨가 동석했다. DJ의 메시지는 강경했다.
“김대중 선생은 신당 창당을 중지하라고 하십니다. ‘이번에도 말을 듣지 않으면 절교한다’고 통지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번에도’라는 것은 DJ의 소극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민추협 결성을 밀어붙인 것을 말했다. 나는 “‘국내 정세를 감안해서 대처하고 있으니, 그 점은 내게 맡겨달라’고 전해달라”고 했다.
DJ의 방침에 따라 권노갑씨 등 동교동 가신들은 2·12총선에 참여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DJ는 조윤형·정대철씨 등의 민한당 입당에 주안점을 두면서, 나를 통한 신당 추진, 민주헌정연구회 등을 통한 재야활동 등 3트랙(track) 전술을 썼던 게 아닌가 싶다.
1984년 11월 30일 ‘정치풍토쇄신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공민권을 제약받고 있던 정치인에 대한 3차 해금(解禁)조치가 취해졌다. 15명만 마지막까지 해금이 되지 않았는데, 나도 그중 하나였다.
신한민주당 창당 과정에서 논란이 된 것은 민추협 대(對) 비민추협의 비율이었다. YS는 그 비율을 70대 30으로 하자고 했고, 이철승·신도환·김재광·이기택씨 등은 50대 50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가 나서서 50대 50 주장을 받아들이자고 YS를 설득했다. 민추협 내에서는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50대 50으로 지분을 갖기로 했다. 총재는 상도동계인 이민우 전 국회부의장이 맡게 됐다.
전국구 팔아 정치자금 마련
선거를 치르려면 돈이 있어야 했다. 전국구(全國區) 공천으로 마련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연하·김록영·박종률 전 의원과 의논해 ‘공천헌금’을 받기로 했다. 1~7번은 5억원, 8번은 3억원, 9번은 2억원, 10~13번은 1억원, 14번은 7000만원, 15번은 5000만원이었다.
상아탑학원을 운영해 돈을 번 임춘원(林春元, 12~14대 국회의원)씨가 당에 3억원, 동교동에 2억원을 내기로 하고 2번을 받았다. 현금으로 2억원을 냈고, 내게는 별도로 5000만원을 주기로 했다.
한석봉(韓錫奉, 12~14대 국회의원)씨는 당에 3억원, 동교동에 2억원을 내기로 하고 6번을 받았다. 그는 동교동에 내기로 한 2억원은 현금으로 1억, 어음으로 1억을 냈다.
승려인 김용오(金容午, 12대 국회의원)씨는 현금 7000만원을 내고, 2억원짜리 어음을 주면서, 당선이 되면 모두 6억원을 내기로 했다. 9번 박종률씨는 2억원을 내야 했지만 그동안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생각해서 1억원만 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모두 5억7000만원을 만들었다.
여기에 내가 집을 담보 잡혀서 빌린 돈 6000만원과 집사람이 빌려온 돈 3800만원을 보탰다. 집은 은행과 제2금융권, 연희동성당 신용조합 세 군데에 3중으로 담보를 잡혔다.
이 돈으로 동교동계의 조연하 전 의원에게 1억6000만원, 김록영 전 의원에게 1억1000만원을 지원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유명한 이철(李哲, 12~14대 국회의원)씨도 동교동계로 분류되어 1억500만원을 지원했다. 박종률 전 의원에게는 동교동 앞으로 들어온 돈 중에서 5000만원에 내가 임춘원씨에게 비공식적으로 받은 돈 5000만원을 더해서 1억원을 만들어주었다. 그 돈으로 전국구 헌금 1억원을 내게 했다. 상도동계인 이민우 신한민주당 총재에게도 5000만원을 지원했다. 그 밖에 동교동과 인연이 있거나 친분이 있던 이들에게 100만~200만원씩 도와준 것도 꽤 많았다.
한석봉·김용오씨, 내기로 한 공천헌금 부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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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3월 6일 정치활동금지조치가 해제된 DJ가 동교동 자택에서 YS와 손을 맞잡고 있다. 오른쪽 끝이 김상현 전 의원. |
공천헌금을 받고 전국구 의석을 준 것은 사실 부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 초 이래 탄압만 받아온 동교동계로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돈을 만들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만든 돈은 단 한 푼도 사적(私的)인 용도로는 쓰지 않았다. 무너진 동교동계를 재건하는 데 썼다. 그럼에도 일부 동교동 비서들은 미국에 있는 DJ에게 “김상현이가 전국구를 팔아서 혼자 다 썼다”는 편지를 보냈다.
나중에 DJ가 귀국한 후, 나는 돈을 어떻게 모아서 어디에 썼는지를 모두 보고했다. 그는 박종률 전 의원에게 1억원을 지원한 사실 하나만 지적했다.
“박종률이는 (2억원을 내놓아야 하는) 전국구 9번인데 1억원을 깎아줬으면 1억원은 자기가 내야지, 왜 자네가 대신 내줬나?”
“조연하·김록영·박종률이 없으면 민추협이 없고, 그들이 없었으면 신민당(신한민주당)이 없고, 오늘의 동교동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어음으로 공천헌금을 냈던 한석봉·김용오씨는 의원이 된 후 약속한 돈을 내놓지 않았다. 그들이 낸 어음은 공신력이 없는 속칭 ‘문방구어음’이었다. ‘문방구어음’이라도 받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당시 동교동계의 사정은 열악했다.
그걸 어렵게 어음할인을 해서 현금화(現金化)했는데, 부도가 난 것이다. 모두 3억5000만원이나 됐다. 그걸 메우느라 10년을 고생했다. 그 과정에서 목포의 토건업자라고 소개받은 정요섭이라는 사람에게서 어음으로 3500만원을 빌리기도 했다. 그중 2000만원을 갚았고, 1500만원은 부도어음이어서 갚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서진룸살롱 사건의 주범이었다. 나중에 내가 정요섭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 하여 문제가 됐다.
당초 신한민주당 창당에 소극적이었던 동교동계는 선거 과정에서도 신민당 후보가 아닌 동교동계 후보를 지원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서울 종로구에서는 김홍일씨가 이민우 신민당 총재 대신 정대철씨를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 동교동 비서들도 정대철씨 지지 운동을 하고 다녔다. YS가 펄펄 뛰었다. 나는 YS를 찾아가 백배사죄하고 “앞으로는 이민우씨를 적극 지지하겠다”고 다짐했다. YS가 물었다.
“어떻게 지원하겠소?”
“5000만원을 지원하겠습니다.”
앞에서 말한 이민우 신민당 총재에게 5000만원을 지원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趙淵夏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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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대선 때 김상현 전 의원은 평민당으로 합류하기를 거부하고 통일민주당에 남았다. 1987년 12월 15일 김영삼 후보의 유세를 지원하는 김상현 전 의원(왼쪽). |
“나는 신당이 완전히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자네 생각이 맞았네. 미안하네. 내가 자네에게 양해를 구해야겠네.”
“형님이 미국에 계셔서 국내 상황을 잘 몰라서 그러신 것이죠. 형님이 귀국해서 힘이 되어주셨기 때문에 이번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민추협 결성에서부터 신당 창당까지의 과정에서 소원(疎遠)해진 간격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조연하 파동이 터졌다.
제12대 국회의 야당 몫 국회부의장은 원래 조연하 의원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당시 동교동계인 김록영 의원이 투병(鬪病) 중이었다. 그에게 국회부의장 직함을 달아주면 외국으로 나가 예우를 받으며 치료를 받을 수 있겠다 싶었다. 조연하 의원도 흔쾌히 동의했다. 김록영 의원은 국회부의장이 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985년 7월 일본 도쿄(東京)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연하 의원은 당연히 자신이 국회부의장으로 추천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DJ는 귀국 후 자신에게 ‘재정적 기여’를 한 유제연(柳濟然, 8·12대 국회의원) 의원을 부의장으로 내세웠다.
조연하 의원은 격분했다. 1971년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이철승씨의 참모장 역할을 하면서 DJ 지지를 이끌어낸 사람이 조 의원이었다. 그 후에도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민추협 활동 등을 통해 동교동계를 재건하는 데 앞장섰던 그로서는 배신감이 컸을 것이다. 조 의원은 1985년 10월 독자적으로 부의장 출마를 강행했다. 상도동계와 비민추협계, 그리고 민정당 의원들의 지원을 받아 그는 부의장으로 당선됐다. 동교동계도, 신민당도 발칵 뒤집혔다.
동교동계 내에서는 내가 조 의원을 부추겼다는 얘기가 돌았다. 나는 조연하 의원과 사석(私席)에서는 서로 말을 놓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지만, 부의장 출마와 관련해서는 동교동계의 분열을 우려해 만류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조 의원은 동교동의 압박에 밀려 1년 후 부의장직을 사퇴했다. DJ를 위해 헌신했고, 직언(直言)도 많이 했던 그는 이후 DJ와 멀어졌다. 이런 식으로 DJ 주변에서 직언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 둘 사라져갔다.
DJ와의 결별
DJ는 1987년 10월 28일 대선 출마와 평화민주당 창당을 선언했다. 창당 선언 사흘 전, 그는 내게 평민당 창당 의사를 밝혔다. 나는 “지금 두 분이 분열되면 집권은 멀어진다. 나는 동참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묵묵부답(默默不答)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YS가 이끄는 통일민주당에 남았다. 1987년 대선기간에 나는 통일민주당 ‘총재직무대행’직을 수행했다. 사실 그건 내가 “15년 만에 정치를 시작하는 사람이 모양을 갖춰야 할 게 아니냐. 털어놓고 말해서 내가 당신을 도우려면 힘이 없는 놈이라도 그냥 부총재보다는 ‘총재직무대행’이란 걸 붙여서 씌워줘야 힘이 솟을 것 아니냐”고 해서였다. YS는 1989년 6월 소련 방문 때 나를 데려가는 등 나름 배려를 해주었다.
1988년 4·26총선에서 나는 서대문갑구(甲區)에 다시 출마했다. 1972년 유신 이래 16년 만이었다. 우리나라 정치인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공민권을 박탈당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평화민주당에서는 재야에서 출판운동을 하던 김학민(金學珉, 16대 국회의원)씨를 출마시켰다. 이희호 여사가 내 지역구까지 와서 “김상현이에게 표를 주면 안 된다”고 낙선운동을 했다. 결국 나는 낙선했다.
YS는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198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김대중이 자신의 출마를 위해 통일민주당에서 뛰쳐나가 평민당을 만들었을 때에도 김상현은 통일민주당에 남아 있었다. 그가 김대중과 나 사이에서 개인적으로 나를 선택했다기보다는 야당의 정통성을 깨지 않으려는 정치인으로서의 충정이었다”고 술회했다. 정확한 얘기였다.
때문에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合黨)이 발표되었을 때, 거기에 합류하지 않은 것은 나로서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나는 이기택씨 등과 함께 민주당을 만들었다.
黨權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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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시민연대의 낙천 대상자 명단에 포함된 김상현 전 의원이 2000년 2월 1일 서울 안국동 총선연대 사무실에서 공개토론을 요구하고 있다. |
“입당하겠습니다.”
DJ는 단칼에 거부했다.
“자네는 안 돼!”
그런다고 밀릴 내가 아니었다.
“민주정당에서 입당하겠다는 사람을 왜 안 받습니까? 전당대회에서 뵙겠습니다.”
4월 9일 나는 전당대회가 열리는 서울 삼성동 COEX 귀빈실로 갔다. 박홍(朴弘) 서강대 총장이 들어오면서 DJ에게 말했다.
“오면서 라디오에서 김상현씨가 입당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DJ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다시 DJ당(黨)으로 돌아갔다.
1992년 대선에서 패배한 후 DJ는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나는 그가 100% 정계로 복귀할 것으로 확신했다. 그는 1995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정계로 복귀했다.
1997년 5월 19일 제15대 대통령 후보와 당 총재를 선출하는 새정치국민회의 전당대회가 열렸다. 나는 대통령 후보로 나선 정대철(鄭大哲, 9·10·13·14·16대 국회의원) 부총재와 연대(連帶)해 총재 후보로 나섰다. 나는 당권(黨權)과 대권(大權)을 분리하고, 경선을 통해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이 DJ에게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 대한 도전 가능성을 철저하게 봉쇄했다. 나는 25.8%, 정대철 부총재는 21.8%를 득표하는 데 그쳤다.
“물구나무를 서서라도”
그해 12월 18일 대선에서 DJ는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지 26년 만이었다. 46세의 패기만만한 젊은 정치인이던 그는 72세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36세의 청년이던 나도 이순(耳順)의 나이를 넘어버렸다.
젊은 시절, DJ를 따른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감옥에 가고 고문을 당했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 아래서 내가 할 일은 없었다. 평생 정치를 하면서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내 능력의 한계를 알기 때문이었다. ‘야당 당수’라면 한번 해보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렇다고 DJ에게 서운할 것은 없었다.
2000년 제16대 총선거를 앞두고 DJ는 새정치국민회의를 새천년민주당으로 간판을 바꾸어 달았다. 총선을 앞두고 총선연대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거기에 참여한 시민단체 인사들은 모두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어려웠던 시절, 내게 와서 단체를 운영할 자금을 얻어가거나, 용돈을 받아 쓴 사람도 여럿이었다. 그런데 그 총선연대에서 낙천(落薦)-낙선운동 대상자 명단에 내 이름을 집어넣었다. 충격이었다. 1996년 한보그룹으로부터 국정감사와 관련해 청탁을 받고 5000만원을 받았다는 것인데, 2심에서 정치자금임을 인정받아 무죄(無罪)판결을 받은 사안이었다. 나중에 총선연대에 참가했던 인사들로부터 청와대의 주문이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단식까지 해가며 총선연대에 항의했다. 그리고 “물구나무를 서서라도 국회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김윤환(金潤煥, 11·13~15대 국회의원)·이기택·신상우(辛相佑, 8~10·13~15대 국회의원)·박찬종(朴燦鍾, 9·12~14대 국회의원)씨 등이 만든 민주국민당에 합류했다. 나는 전국구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2년 후 나는 광주북갑(北甲)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나가서 당선됐다.
《김대중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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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1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광장에서 김상현 전 국회의원, 한화갑 전 국회의원, 김무성 국회의원 등 민추협 회원들이 빈소를 지키고 있다. |
그래도 노무현 대통령은 나를 좋게 본 모양이다. 한번은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을 맡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가족과 의논해 보았더니, 아내와 자식들은 “맡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다.
DJ가 세상을 떠나기 전, 가끔 그를 찾아갔다.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저 어떻게 지내느냐는 얘기, 가족 얘기 정도였다. 2008년 8월 18일 DJ가 세상을 떠났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만감이 교차했다.
2010년 8월 《김대중자서전》이 나왔다. 두 권 합쳐서 1348쪽에 달하는 책이었다. 1971년 대선과 관련해 내 이름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대선 출마를 권고했고, 당시 그를 따르는 유일한 국회의원이었으며, ‘김대중 후보 비서실장’이었는데 말이다. 1980년 군사재판과 관련해서도 내 이름은 피고인들 가운데 한 명으로만 언급되어 있다. 민추협과 관련해서는 달랑 다섯 줄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씁쓸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DJ에 대한 미움도, 원망도 없다. 이제 그런 걸 따질 나이는 아니니까….⊙
[취재후기] 11년 전 스트레스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김상현 전 의원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김 전 의원은 나와의 인터뷰를 마친 후, 동석(同席)했던 이동욱 기자에게 1968년 박정희 대통령과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어찌나 재미있게 이야기하던지 마치 내가 두 사람이 만나는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 기사를 쓰기 위해 2012년 11월 1일 서울 광화문 코리아나호텔에서 김상현 전 의원을 만났을 때, 깜짝 놀랐다. 발을 끌면서 들어오는 모습, 작고 기운 없는 목소리…. 전에 만났던 김 전 의원이 아니었다. 그는 허리디스크 수술을 하고 퇴원한 직후였다. 그래도 그는 성심껏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두 번째 만남은 12월 3일이었다. 김상현 전 의원은 한결 나아진 모습이었다. 목소리에도 힘이 실려 있었다. 민추협 시절 그의 보좌역이었던 최병윤(崔秉鈗) 그린기술산업 회장이 동석해서 그가 옛날 기억을 되살리는 것을 거들었다. 이날은 주로 민추협, 신한민주당 창당과 2·12총선 당시의 이야기를 들었다. 김 전 의원은 전국구 공천헌금 등 ‘구린’ 이야기도 거침없이 했다. 역시 그의 전성시대는 ‘민추협 공동의장 권한대행’ 시절이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에게 질문할 때 내가 사용한 호칭도 ‘의장님’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DJ에게 누가 될 만한 얘기는 삼갔다. “DJ에게 서운한 건 없느냐?”고 물으면 “이젠 그런 얘기 할 나이는 아니지 않소”라며 말을 돌렸다. 다만 민추협이나 2·12총선 당시의 이야기를 할 때, 중간중간 서운함이 느껴졌다. 자신과 DJ와의 관계를 얘기하는 대목에서는 ‘나는 개인적으로는 DJ를 형님으로 모셨지만, 정치적으로는 대등한 동반자였다. DJ를 맹종(盲從)한 동교동 가신들과는 다르다’하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구식(舊式)정치인, 그러나 상쾌한 구식정치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그렇게 고난을 겪었으면서도 일관되게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주장해 왔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우리 정치풍토에서는 대화와 타협을 주장하면 ‘사꾸라’라고 하는데, 그런 시련 속에서도 대화와 타협의 정치에 대한 신념을 놓지 않은 그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왕사꾸라’였다. 그리고 그가 우리 정치판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었다면, ‘사꾸라’가 활짝 피었다면, 오늘날 우리 정치는 이토록 삭막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