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탈린은 김일성의 早期 승리를 방해, 말리크에게 전화 걸어 安保理 不參 지시
⊙ “스탈린은 김일성의 南侵을 역이용, 美中 싸움을 붙여, 마오쩌둥을 소련에 예속시키려 하였으나
트루먼은 스탈린을 역이용, 對蘇봉쇄망을 완성하였다”(소턴 교수)
⊙ 한국전의 최종 勝者는 누구인가?
⊙ “스탈린은 김일성의 南侵을 역이용, 美中 싸움을 붙여, 마오쩌둥을 소련에 예속시키려 하였으나
트루먼은 스탈린을 역이용, 對蘇봉쇄망을 완성하였다”(소턴 교수)
⊙ 한국전의 최종 勝者는 누구인가?
최근 100년간 일어난 전쟁 중 세계사(世界史)의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전쟁은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 1939년의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1950년의 6·25 남침(南侵)전쟁이다. 1차대전은 오스트리아-독일-러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러시아 공산혁명을 불렀다. 2차대전은 독일과 일본의 침략주의를 분쇄, 미·소(美蘇) 경쟁시대를 불렀다. 한국전은 공산-자유진영 싸움에서 자유진영의 승리를 예약하였다.
6·25 전쟁에 대한 연구는 요즘 더 활발하다. 새로운 자료들이 관련 국가에서 계속 발굴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6·25 전쟁은 ‘스탈린의 전쟁’이었다는 방향으로 정리된다. 스탈린이 기획하고 지휘하고 그의 죽음으로 휴전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미끼로 이용, 미군 등 유엔군과 중공군을 한반도로 끌어들여 국제전쟁터로 만들었다.
2000년에 조지워싱턴 대학의 리처드 C. 소턴(Richard C.Thorton) 교수가 쓴 《왕따(ODD MAN OUT): 트루먼, 스탈린, 마오쩌둥, 그리고 한국전의 기원》이란 책은 당시로선 파격적인 결론을 내렸다. 6·25 남침전쟁이 김일성(金日成)의 공산통일 야욕(野慾)으로 일어난 듯이 보이지만 스탈린의 더 큰 전략구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김일성을 미끼로 삼아 전쟁을 일으킨 뒤 미군을 불러들이고, 중국을 끌어들여 한국을 미·중(美中) 대결장으로 만든다. 그렇게 되면 중국은 미국과 적(敵)이 되면서 소련에 군사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스탈린의 악몽(惡夢)이던 미·중 접근은 차단된다. 이런 시나리오가 성공하려면 북한군이 남한을 점령하는 데 성공해선 안 된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승리를 방해”
소턴 교수는 이렇게 주장한다.
<중국과 미국이 싸우도록 하려면 북한이 남한을 패배시키는 데 실패하여야 했다. 소련이 만들어 준 전쟁계획, 전쟁의 수행, 제공된 무기와 주지 않은 무기, 그리고 이들 무기의 제공 시점 등에 관한 새로운 자료들을 분석하면 스탈린은 북한군의 승리를 막으려고 했음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북한군이 승리에 가까이 갈수록 성공 가능성은 떨어졌다. 장기전은 북한군엔 재앙이었다.
스탈린은 북한군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공군력을 제공하지 않았고, 방공(防空)무기나 신무기, 그리고 도하(渡河) 장비를 주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스탈린은 마오쩌둥(毛澤東)에게 파병 준비를 압박한다. 이는 스탈린이 김일성의 실패를 예견하였음을 보여준다. 스탈린은 북한군이 부산 교두보 공격에만 집중케 하고, 미군의 후방 공격에는 대비하지 못하도록 유도하였다. 인천상륙 이후에도 스탈린은 북한군을 지원하지 않고 마오쩌둥에게 파병을 요구하였다.>
소턴 교수는 스탈린이 북한군의 작전을 방해하고 미군 개입을 도운 여러 사례들을 적시(摘示)하였다.
소턴 교수는 스탈린이 김일성과 마오쩌둥을 이용한 데 대하여 트루먼은 스탈린의 전략을 읽고서 이를 역이용, 이 게임의 최종 승자가 되었다고 분석하였다.
6·25 남침 전에 이미 미국 지도부는 NSC-68이란 소련 봉쇄전략 문서를 완성, 이를 집행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처럼 공산진영의 선제공격이 있어야 의회와 여론을 대결구도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김일성의 남침은 미국이 기다리던 절호의 찬스였다.
미국 또한 스탈린처럼 한국에서 단기전(短期戰)에 의한 전쟁종결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쟁을 오래 끌어야 군비(軍備)증강 등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맥아더의 북진(北進)이 중공군(中共軍)의 개입을 부를 위험성이 있음을 알고도 트루먼 대통령은 이를 승인하였다. 중공군의 개입 이후 트루먼 대통령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일련의 대소(對蘇) 봉쇄정책의 집행에 들어간다. 1950~53년 사이 미국의 국방예산은 연(年) 140억 달러에서 440억 달러로 늘었다.
김일성, “스탈린 때문에 졌다”
수년 전 시집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를 지은 탈북시인 장진성씨는 조갑제닷컴에 이런 요지의 글을 썼다.
<필자는 2000년 《김조실록(金朝實錄)》 편찬에 참여했던 적이 있다. 김정일이 이씨 조선시대에도 《이조실록》이 있었는데 위대한 김일성 시대에 《김조실록》이 없다는 것은 죄악이라며 편찬을 지시한 것이다. 사회과학원이 아닌 통전부 필진에 이 업무를 맡긴 이유는 외부에 알려진 김일성 신격화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역사 사실들을 열람해야 하는 관계로 보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김조실록》조(組)는 통전부 필진 8인으로 구성되어 평양시 대동강구역 청류동 문수 초대소에서 근 2년 동안 집필했다. 조선노동당 역사문헌고에서 실려 온 수많은 과거 자료들은 당시 흔적 그대로였다. 그중 1976년경 외무성에서 기록 정리한 김일성의 교시가 있었는데 북한 정권의 친소(親蘇)정책만을 알았던 나에겐 작지 않은 충격이었다. 김일성의 그 교시란 것은 스탈린에 대한 분노로 일관된 내용이었는데 기억나는 대로 적어 보려고 한다.
“내가 조국전쟁 이후 국방공업을 우선적으로, 그 다음에 농업과 경공업을 다 같이 발전시키자는 정책을 내놓았는데 그 이유가 뭔지 아는가? 스탈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조국통일을 방해하고 가장 치명적 상처를 남긴 제일 나쁜 사람이다. 내가 늘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었는데 하고 가슴 치며 통탄하는 것이 바로 서울점령 3일이었다. 그때 우리가 서울에서 3일 동안 쉬지 않고 그 기세로 쭉 밀고 나갔다면 미국 놈들의 생각도 바꿔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소련에서 주겠다던 무기를 주지 않았다. 그때 가진 것으로 밑에까지 쭉 내려가기엔 도무지 타산이 맞지 않았다. 소련 놈들은 서울이 그렇게 빨리 점령당할 줄 몰랐다고 후에 변명을 했지만 그것도 새빨간 거짓말이다. 애당초 스탈린은 미국이 무서워 줄 생각을 안 했다. 그 무기를 기다리며 3일 동안 서울에서 엎어져 있는데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스탈린은 장사꾼이다. 전쟁 이전에 준 무기들도 그냥 지원한 것이 아니다. 일본 놈들이 남기고 간 발전소, 제철소, 주요 설비들과 설계도면을 대신 다 가져갔다. 심지어는 철도 레루(레일)까지 뽑아 가겠다는 것을 내가 안 주었다. 조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놓친 그 3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나는 밤잠을 자지 못한다. 내가 그래서 자주국방 공업만이 조국통일이라고 생각하고 국가의 제일정책으로 밀고 나갔던 것이다.”>
황장엽(黃長燁) 선생도 작고하기 전 필자에게 비슷한 비화(秘話)를 들려주었다. 김일성이 남침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것은 서울을 점령한 뒤 바로 한강을 건너지 못한 때문이라고 아쉬워하더란 것이다. 그 원인에 대하여 김일성은 스탈린 탓을 하였다고 한다. 스탈린이 도하장비 등 군수지원을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탈린, 말리크에게 安保理 不參 지시
한국전쟁을 둘러싼 미스터리 중 하나는 1950년 6월 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소련이 불참, 유엔군 파병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사건이다. 소련의 불참(不參)으로 미국이 주도한 안보리 결의안이 통과돼 유엔군을 조직하고 한국에 파병할 수 있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였더라면 미국은 ‘유엔과 국제사회가 북한군의 남침을 반대한다’는 명분을 살릴 수 없었다. 오히려 남의 나라 내부 문제에 개입한 침략자로 몰렸을 것이다. 이 결의안 통과는 트루먼 대통령이 그 사흘 뒤 (해·공군에 이어)육군까지 파병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소련의 불참이 미군 파병(派兵)을 도운 셈이다.
이는 소련의 큰 실수였다는 게 중론(衆論)이었다. 소련의 유엔대사 야코프 말리크는 1950년 초부터 안보리 회의를 보이콧하였다. 대만(臺灣)이 중국의 정통정부로 인정받아 상임이사국 자리에 앉아 있는 것에 항의하기 위함이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말리크가 불참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 비밀문서가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이 정설(定說)이 도전 받게 된다.
조지워싱턴 대학 리처드 C. 소턴 교수는 《왕따(ODD MAN OUT): 트루먼, 스탈린, 마오쩌둥, 그리고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스탈린이 미군 개입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안보리결의 때 불참하도록 지시하였다는 대담한 주장을 하였다.
6월 27일 안보리에 미국이 유엔군 파병결의안을 제출하였을 때 소련 대사 말리크는 뉴욕에 있었다. 스웨덴 식당에서 유엔사무총장, 미국대사, 말리크 등이 점심을 함께 하였다. 식후(食後) 안보리 회의장으로 향하면서 트리그브 리 유엔사무총장이 말리크에게 “소련의 국익을 위해서라도 참석하는 게 좋겠다”고 권하였다. 말리크는 “나는 가지 않겠다”고 잘랐다. 이런 중대한 결정을 말리크가 했을 리는 없다.
2005년 정 창 및 존 핼리데이가 공저(共著)한 《마오쩌둥 비화(秘話)》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말리크도 상부에, 안보리로 돌아가고 싶다면서 허가를 요청하였다. 스탈린은 그를 전화로 불러내 ‘불참’을 지시하였다. 그는 서방군대를 (한반도로) 불러들이려 하였던 것이다.>
스탈린의 電文, “한반도를 美中 대결장으로 만들 것”
최근 소련의 안보리 불참과 관련한 중요 문서가 발견되었다. 2005년에, 러시아 3대 국립문서보관소 중 하나인 사회정치사(社會政治史) 문서보관소(RGASPI)에서 안드레 레도프스키라는 러시아 학자가 발견한 스탈린의 편지(문서번호 fond 558, opis 11, delo 62, listy 71∼72)가 그것이다. 이 문서에 대하여 베이징대 역사학부 김동길 교수(한국인)가 논문을 썼다. 편지의 전문(全文)은 이렇다.
필리포프(스탈린)가 프라하 주재 소련 대사에게 보낸 편지: 체코슬로바키아 클레멘트 고트발트 대통령에게 전달할 메시지(1950년 8월 27일)
고트발트에게 아래 메시지를 구두(口頭)로 전달할 것. 요구한다면 필사(筆寫)하여 줄 것.
우리는 지난 6월 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소련이 불참한 것과 그 뒤의 사태전개에 대하여 고트발트 동지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우리는 안보리에 네 가지 이유로 불참하였다. 첫째, 새로운 중국과 소련의 단결을 과시하기 위하여, 둘째, 미국이 안보리(상임이사국)에서 국민당 괴뢰 정권을 중국의 대표로 인정하고 (注-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의 진정한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는 정책의 바보스러움과 어리석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셋째, 두 강대국의 불참 때문에 안보리 결의는 정당성이 없음을 드러내기 위하여, 넷째, 미국 정부가 안보리 다수결(多數決)을 이용, ‘프리 핸드’를 갖고 어리석은 짓을 마음대로 저지르도록 함으로써 여론이 미국 정부의 진면목을 알도록 그렇게 하였다.
나는 우리가 이런 목적들을 달성하고 있는 중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안보리에 불참한 이후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에 엮이어 들어가 군사적 명성(名聲)과 도덕적 권위를 망치고 있다. 미국이 한국에서 침략자와 폭군(暴君)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미국이 한때 생각하였던 것만큼 군사적으로 강력하지 않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미국이 극동(極東)에 묶여 현재 유럽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는 사실도 명백하다. 이 같은 사실은 세계의 세력 균형에 있어서 우리에게 득(得)이 되지 않는가? 의심할 바 없이 그렇다.
미국 정부가 극동에 계속해서 묶여 있고,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 중국을 끌어들인다고 가정하여 보자. 이로부터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첫째, 미국은, 그 어떤 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방대한 병력을 보유한 중국과 싸워 이길 수 없다. 미국은 이 투쟁에서 (전선을) 지나치게 넓히게 될 것이다.
둘째, 그렇게 함으로써 미국은 가까운 장래엔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제3차 세계대전은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모르지만 연기될 것이고, 이는 유럽에서 사회주의를 강화하는 시간을 줄 것이며, 더구나 미국과 중국의 투쟁이 극동의 전(全)지역을 혁명화(革命化)할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모든 것들이 세계의 세력균형에 있어서 우리를 유리하게 만들지 않는가? 의심의 여지 없이 그렇다. 귀하도 이해하겠지만, 소련이 안보리에 참여할 것이냐 아니냐는 피상적으로 보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은 문제이다.
이런 이유로 하여 우리는 “민주진영은 안보리에 불참해선 안 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참여할 것인가 불참할 것인가는 당시 상황에 따라 결정할 문제이다. 국제환경에 따라서 우리는 또 다시 안보리에 불참할 수도, 복귀(復歸)할 수도 있다.
왜 우리가 지금 안보리에 복귀하였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돌아간 것은, 미국 정부의 침략적 정책을 폭로하고, 그들이 안보리의 깃발을 이용하여 침략성을 은폐하려는 책동을 저지하기 위함이다. 미국이 한국에 침략적으로 개입하였으므로 안보리에 참여하여 이를 폭로하기가 매우 쉬워진 것이다. 이는 너무나 명백하므로 더 설명할 필요도 없는 사안(事案)이라고 생각한다.
필리포프(스탈린)
미국에 ‘프리 핸드’를 주다
스탈린의 이 편지는 충격적인 고백이다. 6·25 전쟁에 대한 전혀 새로운 해석을 강요한다. 스탈린은 소련이 유엔 안보리에 불참한 네 가지 이유를 설명하면서 “넷째, 미국 정부가 안보리 다수결을 이용, 멋대로 더 많은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도록 함으로써 여론이 미국 정부의 진면목을 알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했다. 한국전에 개입할 수 있도록 ‘프리 핸드(free hand)’를 주었다는 표현을 하였다. 즉 미국이 유엔군의 기치하에 한국전에 참전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놀라운 고백이다.
이 편지에서 스탈린은 자신이 기획하고 일으킨 이 전쟁의 목적을 솔직하게 드러내는데 하나 없는 게 있다. 김일성이 전쟁을 통하여 달성하고자 한 ‘한반도의 공산화 통일’이다. 스탈린의 전쟁 목표엔 ‘통일’ 같은 건 들어 있지도 않다. 미군이 한국전에 ‘묶여 유럽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도록’ 만들려고 하는 스탈린에겐 김일성이 전쟁에서 이기면 안 된다. 전쟁을 오래 끌어야 하고, 유엔군이 38도선 이북으로 북진해야 하며 그래서 중국 군대가 들어와야 한다.
스탈린의 편지를 읽으면 그가 중공군의 개입을 기정사실로 전제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스탈린이 이 편지를 썼던 1950년 8월 하순은,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가 절정에 달하고, 맥아더 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을 준비 중일 때였다. 중공군 개입 가능성은 거론되지 않을 때였다.
스탈린은 북한군 총공세의 실패를 예견하였고, 그렇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 틀림없다. 아니 실패하도록 유도하였을 것이다. 이는 김일성의 증언이나 소턴 교수의 주장-스탈린이 북한군의 승리를 방해하였다는-과 부합한다.
美中 이간질이 최대 목표
스탈린은 초전(初戰) 때부터 북한군의 조기(早期) 승리를 막으려 애썼다는 소턴 교수의 과격하게 보이던 주장이 스탈린의 편지를 보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북한군이 서울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한강을 건너 부산으로 진격하였더라면 7월 중에 전쟁을 끝냈을 것이라고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소턴 교수는 문제의 저서에서 스탈린이 이런 조기 승리를 막기 위하여 여러 수단을 썼다고 주장하였다.
스탈린은 고트발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 정부가 극동에 계속해서 묶여 있고,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 중국을 끌어들인다고 가정하여 보자”고 했다. 스탈린은 ‘가정해 보자’고 했지만 이미 중국군을 끌어들이기 위한 압박을 마오쩌둥에게 가하고 있었다.
미국이 파병을 결정한 직후인 1950년 7월 2일 중국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중국주재 소련 대사 로시친을 불러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마오쩌둥은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서울을 방어하기 위하여 인천에 견고한 방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국군은 조선 사람으로 변장, 미국에 대항하는 일종의 의용군(義勇軍) 역할을 하려 한다. 이 목적을 위하여 이미 펑톈(奉天)지구에 12만명으로 구성된 3개군(軍)을 집결시켰다. 이들을 엄호하는 데 소련 공군이 협력해 줄 수 있는지 알고 싶다. 북조선의 지도부는 마오쩌둥이 두 차례 경고하였음에도 미국의 군사적 개입 가능성을 과소평가한다.”
7월 5일 스탈린은 저우언라이에게 전문을 보내 “우리는 공군력으로 중국의 병력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스탈린은 자신이 던진 김일성의 남침이란 미끼를 미국이 물었으므로(파병 결정) 중국을 시켜 함정에 빠진 미국을 치게 함으로써 독자노선을 가려는 마오쩌둥을 붙들어 둘 수 있다고 자신하였을 것이다. 스탈린이 한국전을 이용하여 미·중을 이간질시킴으로써 중국을 소련 진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는 데 대하여는 키신저 등 많은 연구가들이 동의하고 있다.
스탈린, 중국의 분열 원해
한국전 발발 직전 국제정세는 매우 유동적이었다. 1950년 1월 12일 워싱턴의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이 한 연설은 역사에 남는다. 이 연설에서 애치슨은 한국이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된다는 점을 명시, 김일성의 남침을 불렀다는 평판을 듣기 때문이다.
애치슨 국무장관의 이야기는 개인적 견해가 아니었다. 1947년에 이미 미국의 합참(合參) 등 국가 지도부가 한국에 대한 전략적 평가를 통하여 내린 결론의 요약이었다. 즉 한국은 미군을 주둔시켜 지킬 필요가 없고 지킬 수도 없다는 판단하에서 1949년 여름 주한미군 4만5000명을 철수시키고 500명 규모의 군사 고문단만 남겼던 것이다. 미군 철수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이는 당시 육군참모총장 아이젠하워 원수(元帥)였다.
애치슨 연설이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은 타이밍 때문이다. 1950년 초 세계의 세력판도가 급변(急變)하고 있었다. 1949년 9월에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여 미국의 핵독점 시대를 끝냈다. 그 직후 마오쩌둥이 중국의 공산통일에 성공하였다.
장차 소련과 미국의 군사적 대결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던 스탈린으로선 유리해진 셈이지만 마오쩌둥의 통일 중국은 두통거리이기도 하였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지도노선과는 다른 방법으로 공산화 통일에 성공하였고, 유고의 티토 식으로 독자노선을 걷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스탈린은 상당기간 중국이 장제스(蔣介石)와 마오쩌둥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기를 바랐다.
스탈린 같은 전체주의 독재자는 같은 진영 안에서 라이벌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티토 암살 지시까지 내렸으나 성공하진 못하였다. 세계 최다(最多)의 인구를 가진 중국이 독자노선을 선택, 미국·영국 등 서방세계와도 교류하게 되면 소련은 대미(對美) 전략에서 큰 타격을 받는다. 1950년 초 스탈린의 최대 관심사는, 중국이 미국과 친해지는 것을 막고 소련 진영에 붙들어 둘 방도의 탐색이었다.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도 비슷한 고민에 빠진다. 미국은 국공(國共)내전 때 장제스 정부를 도와 중국의 공산화를 막아 보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누가 중국을 잃었는가”란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여론의 비판에 몰리던 트루먼 정부는 공산화한 ‘새 중국’과의 관계를 재설정하기로 한다. 트루먼 정부는 중국을 적대시(敵對視)하면 소련과 붙어 버릴 것이란 판단을 내리고 유화(宥和) 제스처를 쓰기로 한다.
애치슨 선언은 미국의 對中 유화제스처
당시 마오쩌둥은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스탈린을 상대로 ‘중·소(中蘇)동맹 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에 맞추어 미국은 중국에 추파를 던진다. 1950년 1월 5일 트루먼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대만으로 철수한 중국 군대(장제스 편)에 군사적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 사실상 대만 방어를 포기한다. 애치슨 장관의 1월 12일 내셔널프레스클럽 연설은 트루먼의 이 발언에 이어서 더 구체적으로 대중(對中) 메시지를 던진 것이었다. 연설은 중국을 소련으로부터 떼 놓으려는 의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애치슨은 먼저 중국의 대만 점령을 미국이 막을 생각이 없다는 점을 재차 강조하였다. 스탈린의 소련을, ‘공산주의적 개념과 전술로 무장한 러시아 제국주의’라고 단정한 애치슨은 소련이 만주지역을 중국으로부터 떼어 내 차지하려고 한다면서 외몽골에선 그런 과정이 이미 진행 중이라고 강조하였다. 애치슨은 스탈린을 겨냥, “중국의 통합성을 해치는 자가 바로 중국의 적”이라고 표현한 뒤 중국 지도부에 화해의 메시지를 보냈다. 요지는 이념이 아니라 국익(國益)을 바탕으로 하여 미·중관계를 설정하자는 제안이었다.
“과거 방식의 동서(東西)관계는 끝났다. 극동에서 동서관계는 상호존중과 상호이익의 관계여야 한다.”
스탈린은 이 연설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마오쩌둥을 상대로 중·소관계의 틀을 협상하는 결정적 시기에 미국이 두 나라의 틈을 벌리려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스탈린은 몰로토프를 모스크바에 머물고 있던 마오쩌둥에게 보내 애치슨 연설을 비판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헨리 키신저는 최근의 저서 《중국에 대하여》에서 이 에피소드를 소개한 뒤 이런 요지의 평을 붙였다.
<그런 요청을 한 것은 스탈린이 중국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증거이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애치슨의 연설이 중·소관계에 대한 정확한 표현임을 알았던 것이다.>
마오쩌둥은 하급관리를 시켜 애치슨 연설을 반박하도록 하는 데 그쳤다. 마오쩌둥은 소련과 동맹조약을 맺고 대만을 점령한 다음엔 미국과 수교할 생각이었다. 스탈린은 미·중 접근의 저지를 소련 외교의 최대 과제로 설정하였다. 소련과 미국이 중국을 사이에 두고 줄다리기를 하는 무대에 김일성이 등장한다.
1950년 1월 17일 평양에서 열린 이주연(李周淵) 주중(駐中)대사의 베이징(北京) 부임 송별 연회장에서 김일성은 술에 취한 말투로 소련대사관 참사관 이그나체프와 페리센코에게 말을 걸었다. 슈티코프 소련대사가 모스크바로 보고한 전문에 실린 김일성의 발언.
“나는 통일문제를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 하여 잠을 자지 못한다. 만약 남조선 인민의 해방과 조국통일 사업을 미룬다면 나는 조선인민의 신뢰를 잃게 될 것이다. (1949년에)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스탈린 동지는 남쪽을 공격해선 안 된다, 이승만 군대가 북한을 공격한 경우에만 남조선을 향해 반격해도 좋다고 나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지금까지도 공격해 오지 않기 때문에 남조선 인민 해방과 국가통일은 미뤄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남조선 인민을 해방하기 위한 인민군의 공격계획에 관하여 허가를 얻고 싶다. 만약 스탈린 동지와 만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마오쩌둥(필자 注-그는 모스크바를 방문 중이었다) 동지가 모스크바로부터 귀국한 후 그와 만날 것이다. 마오쩌둥 동지는 중국의 내전(內戰)이 끝난 뒤 원조해 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슈티코프 소련대사는 ‘미리 계획된 발언으로 보인다. 자신의 기분을 드러내는 식으로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탐색하려는 것이다’고 분석했다. 중국의 6·25 전사(戰史)학자 주젠룽(朱建榮)은 《마오쩌둥의 조선전쟁》이란 책에서, 김일성이 마오쩌둥 이야기를 꺼낸 것은 스탈린을 자극하려는 목적에서였다고 주장하였다.
김일성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중·소관계에 대한 중대한 회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중국이 소련 진영에서 이탈할까 초조해하는 스탈린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김일성을 逆이용한 스탈린
스탈린은 슈티코프의 전문을 받고는 처음엔 ‘애송이가 많이 컸군’이라면서 기분 나빠하다가 ‘이거야말로 굴러온 호박이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한반도를 국제전쟁터로 만들어 여기에 미군과 중공군을 끌어들여 서로 싸우게 하면 고민이 풀린다!
스탈린은 1월 30일 슈티코프 대사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
<나는 김일성의 불만을 이해한다. 신중하게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가 이 건으로 나와 이야기하고 싶다면 나는 언제라도 만날 용의가 있다. 이상의 메시지를 그에게 전달하고 나는 그를 도울 용의가 있음을 전해 주기 바란다. 이 사실이 마오쩌둥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라.>
김일성은 이 메시지를 받고서는 스탈린을 갖고 놀았다고 기분이 좋았겠지만 그 뒤 전개된 역사는 스탈린에 의해서 처참하게 이용된 쪽은 김일성이란 사실을 기록한다.
1950년 4월 모스크바에 간 김일성에게 스탈린은 남침을 허가해 주면서 이런 요지의 설명을 하였다고 한다(소련 문서).
<소련의 핵무장, 중·소동맹 조약 덕분에 (남침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스탈린이 진심으로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은 것 같지는 않다. 스탈린은 미군개입을 전제로 전략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소련이 무기는 지원하겠지만 병력을 보낼 순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당신 이빨이 부러져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데 신경을 쓸 데가 많다. 그럴 때는 마오쩌둥의 지원을 요청하라.”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조건을 단다. 중국을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이었다.
“마오쩌둥을 찾아가 전쟁계획을 설명하고 동의를 받아라. 그가 반대하면 남침은 안 된다.”
1971년의 미·중 화해를 주도하였던 전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스탈린의 의도를 이렇게 분석하였다(저서 《중국에 대하여》).
스탈린, 마오쩌둥을 끌어들이다
<만약 미국이 개입하면 중국은 위협을 받고, 따라서 소련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다. 중국이 미국과 대결하게 되면 소련으로부터 대규모 원조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중국이 북한을 돕지 않으면 중국에 실망한 북한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이 커진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이용, 전쟁을 일으키면 미국이 개입하든 안 하든 소련으로선 득을 보게 된다고 계산하였다는 이야기이다.
1950년 5월 마오쩌둥을 만난 김일성은 ‘미국이 구원군을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2~3주 안에 남한점령을 끝낼 것이므로 군대를 보낼 시간이 없을 것이다’고 장담하였다. 마오쩌둥은 미국의 개입 가능성에 대비하여 3개군의 병력을 중·북(中北) 경계선에 배치하겠다고 했으나 김일성은 ‘건방진 태도로’(마오쩌둥의 표현) 북한군과 남로당 게릴라들이 남한을 간단하게 해치울 것이므로 도움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마오쩌둥은 속으로 비웃었을 것이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에 대한 일종의 보증인으로 마오쩌둥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마오쩌둥은 그 전에도 중공군에 있던 조선족 3만5000명을 북한으로 돌려보내 북한군을 증강시키는 등 남침준비를 지원한 전력(前歷)이 있었다.
마오쩌둥은 이때 한국보다 더 급한 게 있었다. 대만점령을 위하여 대안(對岸)에 약 15만명의 병력과 약 4000척의 선박을 집결시켜 놓았다. 소턴 교수는 《왕따》에서 스탈린이 선수(先手)를 쳤다고 표현하였다. 마오쩌둥이 먼저 대만상륙작전을 펴면 김일성의 남침으로 미군이 들어와도 중국군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대만보다 먼저 한국을 치도록 한 것도 스탈린이란 것이다. 이 타이밍으로 살아난 게 대만이다. 한때 대만을 포기하였던 트루먼 대통령은 김일성의 남침 직후 미 7함대를 보내 대만을 방어하도록 명령한다.
김일성의 등을 떠민 스탈린
한국전에서 스탈린이 마오쩌둥과 김일성을 마치 부하처럼 다뤘다는 것은 공개된 3자 사이 전문에서 잘 드러나 있다. 자존심 강한 마오쩌둥이 스탈린을 스승처럼 받든다. 이는 스탈린이 연출한 무대에 마오쩌둥이 배우로 등장한 때문일 것이다. 일단 전쟁국면(局面)으로 들어가면 무기지원 능력을 독점한 스탈린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6월 25일 이후 한국전의 지휘체제는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 순으로 서열화된다.
7월 1일 김일성은 북한주재 슈티코프 대사에게 질책성 전문을 보냈다. 서울을 점령한 지 사흘이 지났는데 뭘 하고 있느냐고 따진다.
“왜 귀하는 조선군 사령부가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보고하지 않는가. 사령부는 전진(前進)을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일시 중단을 결정하였는가?”
스탈린은 “진격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조선 해방이 빠르면 빠를수록 (미국의) 개입 기회는 줄어든다”고 충고성 지시를 한다.
김일성은 스탈린이 무기를 충분히 대 주지도 않으면서 진격을 계속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데 불만이 많았겠지만 항의할 처지가 아니었다. 이튿날 슈티코프 대사는 스탈린에게 북한군 지휘부의 동향을 보고하는데, “김두봉과 홍명희 등은 조선군의 전력상(戰力上) 대미전쟁을 감행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입장이다”고 했다.
스탈린은, 점령한 서울을 지키면서 한강 남쪽으로 내려가기를 머뭇거리는 김일성의 등을 민 것 같다. 그는 유엔대사를 안보리에 불참시켜 유엔군 파병 결의를 막지 않음으로써 미군이 개입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지만, 김일성이 미군과 싸워서 져야 중공군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스탈린의 압박을 받은 김일성의 북한군은 한강을 넘어 7월 3일부터 본격적인 남진작전을 펼친다. 이날 슈티코프는 스탈린에게 김일성과 만난 일을 보고하면서 김이 “민족보위상 최용건이 가 있는데도 중부전선에서 북한군이 도하작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불평하였다고 했다. 김일성 자신이 남진을 내키지 않아한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대목이다. 김일성은 7월 8일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내 이렇게 애걸한다.
스탈린이 반긴(?) 인천상륙작전
<우리 군 간부들은 현대적 군대의 통솔에 미숙하므로 인민군 전선사령부와 2개의 군단사령부에 25~35명의 소련군 고문을 파견하도록 허락해 주기를 간청함.>
소턴 교수는 스탈린이 소련군 고문을 통하거나 직접 나서서 김일성의 진격상황을 세부적으로 통제하였는데, 고의로 부산까지의 진격속도를 늦추고 병력을 분산시켰다고 주장하였다. 6사단을 떼 내어 호남지방으로 돌린 것이 일례(一例)이다.
소턴은 스탈린이 개입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전선의 북한군에 파견되었던 소련군 고문들을 통신장비와 함께 모두 철수시켜 작전에 큰 혼란을 야기하였다고도 썼다.
스탈린은, 체코 대통령 고트발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반도에 미군을 불러들이고 중국군을 끌어들여 지구전을 하도록 하는 게 유럽에서 유리한 조건을 만든다”는 요지의 본심을 털어놓은 다음 날(8월 28일) 슈티코프 대사를 통하여 김일성에게 구두(口頭) 메시지를 전하게 한다.
그는 “이런 전쟁에선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는 없는 것이다. 조선인민의 최대 승리는 조선이 지금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나라가 되고, 제국주의적 억압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키는 투쟁의 기수(旗手)가 된 점이다”고 김일성을 추켜 준다. 스탈린이 김일성과 북한군을 하나의 도구로 이용하여 희생시키고 있는 데 대한 변명이다.
슈티코프는 스탈린의 편지를 가져가서 읽어 주었다. 김일성은 받아 써도 좋으냐고 물었고 대사는 김일성이 구술(口述)을 받아 적도록 했다. 김일성은 부수상 박헌영을 불러 이 전보(電報)를 읽어 주어도 되느냐고 물었고 대사가 허락하자 이번엔 정치위원회를 소집하여 알려도 되느냐고 했다. 무서운 상전의 칭찬을 받고 감격해하는 노예의 모습이다.
소턴 교수의 주장과 스탈린의 체코 대통령 앞 편지를 종합하면 1950년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은 스탈린으로선 기다리던 바였다. 북한군이 38선 북쪽으로 퇴각하는 것을 따라 미군이 올라오면 중국군을 끌어들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서울이 한국군에 의하여 수복된 다음 날인 9월 29일 슈티코프 대사는 김일성과 박헌영을 만난 상황을 스탈린에게 보고하였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신경질적이다. 어려운 상황에 직면, 절망적으로 되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모습이다.>
그날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탈린에게 애걸조의 전문을 보냈다.
<친애하는 요세프 비사리오노비치, 우리는 귀하로부터의 특별한 지원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적군(敵軍)이 38선을 넘는 경우 우리는 소련으로부터 직접적 군사원조를 필요로 하게 될 것입니다. 무슨 이유에서 이게 불가능하다면 중국 및 기타 인민민주주의 국가에 의한 국제의용군을 창설, 우리를 도와주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일성을 남침하게 만들어 미군을 불러들이고, 미군이 38도선을 넘도록 하여 중국군을 끌어들이면 미·중이 충돌하게 되고 그 뒤로는 중국이 소련에 종속된다’는 스탈린의 시나리오는 이제 막바지를 향해 달린다. 10월 1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공식으로 파병을 요청하였다.
그는 “나는 모스크바로부터 먼 지방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어 조선에서 일어나는 일들에서 조금 떨어져 있으나 오늘 모스크바로부터 온 보고에 따르면 조선의 동지들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여겨진다”고 시작한 후 “5~6개 사단이라도 좋으니 38도선으로 즉시 이동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고 했다.
10월 2일, 마오쩌둥은 주더(朱德), 저우언라이, 류사오치(劉少奇), 가오강(高崗) 등 수뇌부 회의를 소집하고 한국전 참전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다수가 참전에 반대했다. 다음 날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에서 “파병하면 미국과 중국이 공공연히 충돌하게 되므로 우리들의 평화건설 계획이 좌절된다”면서 “조선인들이 빨치산 투쟁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고 했다.
스탈린, 마오쩌둥을 몰아붙여
스탈린은 이에 대한 답장에서 마오쩌둥을 강하게 몰아붙인다.
<미국은 현재 대규모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군국주의가 아직 부활하지 않은 일본은 미국을 도울 수가 없다. 중국과 상호원조 조약을 맺은 소련까지 말려들 것이라고 무서워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미국, 영국보다 강하다. 만약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지금 전쟁을 하는 게 좋다. 이승만의 한국이 미국과 일본의 대륙 전진(前進)기지가 될 수년 뒤보다는 지금 싸우는 게 유리하다.>
10월 12일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전보를 친다.
<중국인들은 재차 파병을 거부하였다. 귀하는 북조선에서 철퇴하는 게 좋겠다.>
만주로 피하여 빨치산 투쟁을 준비하라는 권유였다.
다음 날 중국 주재 소련대사 로시친이 스탈린에게 생각지도 않은 보고를 했다. 마오쩌둥이 중국군의 참전 결정을 알려 왔다는 것이었다. 10월 14일 스탈린은 이 소식을 김일성에게 전한다.
마오쩌둥은 한반도로 들어갈 중공군의 총사령관에는 펑더화이(彭德懷)를 임명하고 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을 데려가도록 명령했다. 펑더화이는 중국내전 중에 마오쩌둥의 처와 아들이 피살된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양했지만 마오의 강권을 이기지 못하고 데려가게 된다(아들은 나중에 북한에서 사망).
마오쩌둥은 압록강을 넘는 날을 10월 15일로 잡았다. 그러고는 저우언라이 총리를 소련으로 보내 소련공군의 엄호를 요청했다. 스탈린은 그렇게 하면 미국이 소련과 정면대결로 나올 가능성이 있다면서 중공군에 20개 사단분의 장비를 제공할 용의는 있지만 공군지원은 당분간 불가능하다고 뒤로 빠져 버리는 것이었다.
이 배신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은 불면(不眠)의 고민을 한 끝에 참전 강행을 결심한다. 압록강 도강은 10월 19일, 제1파(波)는 25만, 제2파는 15만, 제3파는 20만, 총 60만의 대군(大軍)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전투기와 탱크는 한 대도 없고, 소총과 방망이 수류탄마저 한 명에 하나씩 돌아갈까 말까 한 중공군은 그러나 혁명적 열정과 엄정한 군기(軍紀)로 똘똘 뭉쳐서 육·해·공의 최신 무기로 철갑을 두른 유엔군을 향하여 나아갈 참이었다.
정일권의 증언
이 무렵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사령관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낸다. 중공군의 개입 직후 이 대통령이 보여준 그 편지를 읽어 보았다는 정일권(丁一權) 육군 총참모장의 기억에 따르면, 요지는 이러했다.
<본직은 소련은 몰라도 중공이 (한반도에) 개입할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보는 바입니다. 이번에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더라도 이 가능성을 긍정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귀하가 긍정함으로써 북진을 방해하는 작전상의 제한이 가중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민은 거족적으로 북진(北進) 통일만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귀하의 영매(英邁)하신 지도가 아니고서는 이 열망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굳게 믿고 있으니 이 간절한 심정을 살펴 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정일권은 이승만 대통령의 편지에 대한 맥아더의 답장도 보았다고 한다. 그가 기억한 10월 13일자 맥아더의 답장 요지는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정일권 회고록》).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본직은 믿을 만한 정보통의 보고를 받고 있습니다. 중공군은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 이 가능성을 겉으로는 긍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숨어서 압록강을 넘을 것입니다. 조금도 모르는 것으로 할 것입니다. 중공은 그 방대한 군사력을 배경 삼아 가까운 장래에 아시아에 있어서 데모크라시의 최대 위협이 될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소련이 있습니다. 중공의 잠재적인 군사력을 때릴 만한 기회는 지금 아니고서는 없을 것입니다. 전략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만 워싱턴이 언제까지 본직의 전략을 뒷받침해 주느냐가 문제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거센 반대에 부딪힐 것입니다. 하지만 본직의 불퇴전의 결의는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필요하다면 원폭(原爆)도 불사(不辭)할 것입니다.>
정일권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사령관이 주고받은 이 두 통의 사신(私信)을 아는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가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극비 중의 극비였다. 사가(史家)들이나 비평가들이 이 극비를 알 까닭이 없었다. 맥아더 장군은 자신에게 집중되는 비판의 소리, 즉 ‘맥아더는 중공군 개입의 가능성을 오판하여 유엔군의 북조선 철수를 자초했다’는 명예롭지 못한 책임추궁에도 이 비밀 서한만큼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맥아더의 야심
한편 10월 15일 태평양상의 작은 섬(웨이크)에서 트루먼-맥아더 회담이 열렸다. 트루먼 대통령이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에 대해서 물었다. 맥아더 원수는 단언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전쟁이 터진 첫째 달 혹은 둘째 달에 그들이 개입하였더라면 결정적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저들을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만주에 집결한 30만 병력 중 기껏해야 5만~6만명 정도가 압록강을 건널 수 있을지 모르지요. 중공군이 만약 평양으로 남진하려고 하면 아마도 역사상 최대의 떼죽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맥아더의 야심은 한반도 통일을 넘어서 공산화한 중국을 수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중공을 칠 구실을 찾고 있었다. 맥아더는 ‘중공군이 개입할 것이다’고 사실대로 보고하면 트루먼이 북진을 중단시켜 중공을 칠 기회를 앗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였을지 모르나 소턴 교수는 트루먼 행정부도 중공군의 개입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1950년 10월 하순 북진하는 유엔군을 중공군이 기습 공격한 뒤 사라져 버리자 맥아더는 수십만의 대병력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수만 명에 불과하다고 축소 보고를 하였다. 있는 그대로 보고하면 워싱턴이 북진을 중단시킬 것이라고 염려하였을 것이다.
맥아더가 중공군의 대병력이 매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린 1950년 11월 하순의 총공격 명령은 중공군이 깔아 놓은 거대한 함정으로 유엔군을 밀어 넣은 자살적 공격이었다. 맥아더는 중공군이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서자 드디어 워싱턴에 자신의 복안을 내놓는다. 만주폭격, 중공해안 봉쇄, 장제스 군대의 중공 상륙 지원, 한국에 대규모 증원군 파병, 원폭 사용 검토 등.
이는 중공에 대한 사실상의 선전포고 건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중공을 정면으로 공격하면 소련(당시 핵 보유)이 참전, 미국이 이길 수 없는 세계대전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판단, 맥아더의 건의를 거부하고 제한전(制限戰)을 선택한다.
왕따는 마오쩌둥
맥아더는 유엔군에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미군을 주력(主力)으로 한 유엔군은 싸우지도 않고, 저지선을 치지도 않고, 평양을 내주면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운명이 다시 한번 경각(頃刻)에 달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사태를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았다.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넘긴 상태에서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적 대전략을 구사해야 하는 트루먼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을 고려할 여지가 아주 좁았다.
중공군은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점령, 수원까지 내려갔으나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이 지휘한 반격작전으로 그해 3월 서울을 탈환하고 전선을 지금의 휴전선에서 거의 고착화시켰다. 2년 남짓 지루한 고지전(高地戰)이 계속되고 인명 손실만 늘어났다.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휴전을 하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냉혈한(冷血漢) 스탈린은 이를 거절한다. 체코 대통령에게 설명하였던 대로 미군을 한반도에 묶어 두고 출혈(出血)을 시키는 건 소련 등 공산진영에 유리하다고 마오쩌둥과 김일성을 설득한다. “잃는 것은 인명뿐이고 얻는 것은 현대전의 연습이다”는 말까지 한다.
소턴 교수는 자신의 책에 《왕따》란 제목을 붙였는데, 이는 마오쩌둥을 지칭한 것이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이 판 함정에 빠져 미국과 원수가 되고, 서방세계로부터 고립되었으며, 선진기술 도입이 좌절되었다. 수천만 명이 희생된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도 한국전 참전이 몰고 온 상황에서 일어난 재앙이었다. 중국이 미국과 손을 잡는 것은 한국전 참전 20년 뒤이고, 본격적으로 개혁 개방에 착수하는 건 30년 뒤이다. 마오쩌둥은 스탈린과 김일성 때문에 30년을 잃어버린 것이다.
승자는 트루먼과 이승만
그렇다면 스탈린이 승자인가? 그는 1952년 7월 모스크바에서 저우언라이 총리와 만나 “미국은 형편없는 조선(북한)을 상대로 싸워 이기지도 못하고 있다. 만약 대전(大戰)이 일어난다면 미국 전체가 울게 될 것이다”고 기고만장해하였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죽었다. 2주 뒤인 3월 19일 소련 내각은 한국에서 휴전하기로 결정한다. 3월 29일 소련의 특별대표로부터 휴전결정 통보를 받은 김일성은 “매우 흥분하여 좋은 소식을 들어 기쁘다”고 했다. 마오쩌둥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2년을 끌던 휴전협상이 급진전, 7월 27일 전선에서 총성이 멎는다. 스탈린이 죽자마자 소련 지도부가 휴전을 결심한 것은 이 전쟁이 소련에 불리한 결과를 낳았다는 판단을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트루먼 행정부는 미군이 한국전에서 고전(苦戰)하는 상황을 위기로 활용, 대소 봉쇄망을 완성한다. 대만 방어, 일본의 경제부흥과 미·일동맹, 한미동맹, 독일의 재무장과 나토(NATO)의 군사동맹화가 이뤄졌다. 미국은 진주만 기습 직후 그러하였던 것처럼 막강한 경제력을 동원하여 소련을 상대로 군사력 건설 경쟁에 나선다. 군사예산을 몇 배로 늘린다. 이 군사력 경쟁에서 소련의 경제가 망가진다. 내부 붕괴로 동구 공산권은 1989년에, 소련도 1991년에 해체된다. 트루먼은 스탈린의 대전략을 역이용, 소련을 죽인 것이다. 이런 흐름에 편승한 이승만 영도하의 한국도 득을 많이 보았다.
한국전을 통하여 “빨갱이는 안 돼”라는 국민적 합의가 있었다. 좌익을 일소, 반공(反共) 자유민주주의 노선으로 근대화, 민주화에 성공한다. 군 장교단이 최강의 조직으로 등장, 정권을 잡고 산업화의 주체세력이 된다. 한미동맹, 한일수교, 월남파병, 중동진출, 수출입국 등 개방적인 국가전략이 대성공하면서 조선조적 명분론이 퇴조하고 실용적인 국가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전쟁을 겪고 살아남은 국민들은 강해진다.
스탈린의 대전략으로 시작된 6·25 전쟁의 가장 큰 수혜자(受惠者)는 트루먼과 이승만이었다. 문제는 6·25 전쟁과 냉전(冷戰)이 한반도에선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북한노동당 정권을 평화적으로 해체하고 자유통일하는 날이 와야 한국의 최종 승리로 끝날 것이다. 지금은 하프 타임이다.⊙
6·25 전쟁에 대한 연구는 요즘 더 활발하다. 새로운 자료들이 관련 국가에서 계속 발굴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6·25 전쟁은 ‘스탈린의 전쟁’이었다는 방향으로 정리된다. 스탈린이 기획하고 지휘하고 그의 죽음으로 휴전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미끼로 이용, 미군 등 유엔군과 중공군을 한반도로 끌어들여 국제전쟁터로 만들었다.
2000년에 조지워싱턴 대학의 리처드 C. 소턴(Richard C.Thorton) 교수가 쓴 《왕따(ODD MAN OUT): 트루먼, 스탈린, 마오쩌둥, 그리고 한국전의 기원》이란 책은 당시로선 파격적인 결론을 내렸다. 6·25 남침전쟁이 김일성(金日成)의 공산통일 야욕(野慾)으로 일어난 듯이 보이지만 스탈린의 더 큰 전략구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김일성을 미끼로 삼아 전쟁을 일으킨 뒤 미군을 불러들이고, 중국을 끌어들여 한국을 미·중(美中) 대결장으로 만든다. 그렇게 되면 중국은 미국과 적(敵)이 되면서 소련에 군사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스탈린의 악몽(惡夢)이던 미·중 접근은 차단된다. 이런 시나리오가 성공하려면 북한군이 남한을 점령하는 데 성공해선 안 된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승리를 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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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소턴의 《왕따》. |
<중국과 미국이 싸우도록 하려면 북한이 남한을 패배시키는 데 실패하여야 했다. 소련이 만들어 준 전쟁계획, 전쟁의 수행, 제공된 무기와 주지 않은 무기, 그리고 이들 무기의 제공 시점 등에 관한 새로운 자료들을 분석하면 스탈린은 북한군의 승리를 막으려고 했음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북한군이 승리에 가까이 갈수록 성공 가능성은 떨어졌다. 장기전은 북한군엔 재앙이었다.
스탈린은 북한군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공군력을 제공하지 않았고, 방공(防空)무기나 신무기, 그리고 도하(渡河) 장비를 주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스탈린은 마오쩌둥(毛澤東)에게 파병 준비를 압박한다. 이는 스탈린이 김일성의 실패를 예견하였음을 보여준다. 스탈린은 북한군이 부산 교두보 공격에만 집중케 하고, 미군의 후방 공격에는 대비하지 못하도록 유도하였다. 인천상륙 이후에도 스탈린은 북한군을 지원하지 않고 마오쩌둥에게 파병을 요구하였다.>
소턴 교수는 스탈린이 북한군의 작전을 방해하고 미군 개입을 도운 여러 사례들을 적시(摘示)하였다.
소턴 교수는 스탈린이 김일성과 마오쩌둥을 이용한 데 대하여 트루먼은 스탈린의 전략을 읽고서 이를 역이용, 이 게임의 최종 승자가 되었다고 분석하였다.
6·25 남침 전에 이미 미국 지도부는 NSC-68이란 소련 봉쇄전략 문서를 완성, 이를 집행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처럼 공산진영의 선제공격이 있어야 의회와 여론을 대결구도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김일성의 남침은 미국이 기다리던 절호의 찬스였다.
미국 또한 스탈린처럼 한국에서 단기전(短期戰)에 의한 전쟁종결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쟁을 오래 끌어야 군비(軍備)증강 등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맥아더의 북진(北進)이 중공군(中共軍)의 개입을 부를 위험성이 있음을 알고도 트루먼 대통령은 이를 승인하였다. 중공군의 개입 이후 트루먼 대통령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일련의 대소(對蘇) 봉쇄정책의 집행에 들어간다. 1950~53년 사이 미국의 국방예산은 연(年) 140억 달러에서 440억 달러로 늘었다.
김일성, “스탈린 때문에 졌다”
수년 전 시집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를 지은 탈북시인 장진성씨는 조갑제닷컴에 이런 요지의 글을 썼다.
<필자는 2000년 《김조실록(金朝實錄)》 편찬에 참여했던 적이 있다. 김정일이 이씨 조선시대에도 《이조실록》이 있었는데 위대한 김일성 시대에 《김조실록》이 없다는 것은 죄악이라며 편찬을 지시한 것이다. 사회과학원이 아닌 통전부 필진에 이 업무를 맡긴 이유는 외부에 알려진 김일성 신격화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역사 사실들을 열람해야 하는 관계로 보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김조실록》조(組)는 통전부 필진 8인으로 구성되어 평양시 대동강구역 청류동 문수 초대소에서 근 2년 동안 집필했다. 조선노동당 역사문헌고에서 실려 온 수많은 과거 자료들은 당시 흔적 그대로였다. 그중 1976년경 외무성에서 기록 정리한 김일성의 교시가 있었는데 북한 정권의 친소(親蘇)정책만을 알았던 나에겐 작지 않은 충격이었다. 김일성의 그 교시란 것은 스탈린에 대한 분노로 일관된 내용이었는데 기억나는 대로 적어 보려고 한다.
“내가 조국전쟁 이후 국방공업을 우선적으로, 그 다음에 농업과 경공업을 다 같이 발전시키자는 정책을 내놓았는데 그 이유가 뭔지 아는가? 스탈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조국통일을 방해하고 가장 치명적 상처를 남긴 제일 나쁜 사람이다. 내가 늘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었는데 하고 가슴 치며 통탄하는 것이 바로 서울점령 3일이었다. 그때 우리가 서울에서 3일 동안 쉬지 않고 그 기세로 쭉 밀고 나갔다면 미국 놈들의 생각도 바꿔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소련에서 주겠다던 무기를 주지 않았다. 그때 가진 것으로 밑에까지 쭉 내려가기엔 도무지 타산이 맞지 않았다. 소련 놈들은 서울이 그렇게 빨리 점령당할 줄 몰랐다고 후에 변명을 했지만 그것도 새빨간 거짓말이다. 애당초 스탈린은 미국이 무서워 줄 생각을 안 했다. 그 무기를 기다리며 3일 동안 서울에서 엎어져 있는데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스탈린은 장사꾼이다. 전쟁 이전에 준 무기들도 그냥 지원한 것이 아니다. 일본 놈들이 남기고 간 발전소, 제철소, 주요 설비들과 설계도면을 대신 다 가져갔다. 심지어는 철도 레루(레일)까지 뽑아 가겠다는 것을 내가 안 주었다. 조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놓친 그 3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나는 밤잠을 자지 못한다. 내가 그래서 자주국방 공업만이 조국통일이라고 생각하고 국가의 제일정책으로 밀고 나갔던 것이다.”>
황장엽(黃長燁) 선생도 작고하기 전 필자에게 비슷한 비화(秘話)를 들려주었다. 김일성이 남침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것은 서울을 점령한 뒤 바로 한강을 건너지 못한 때문이라고 아쉬워하더란 것이다. 그 원인에 대하여 김일성은 스탈린 탓을 하였다고 한다. 스탈린이 도하장비 등 군수지원을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탈린, 말리크에게 安保理 不參 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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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포츠담 선언 당시 트루먼과 스탈린. 두 사람은 6·25가 터지자 한반도를 무대로 자신들의 세계전략을 펼쳐 보인다. |
이는 소련의 큰 실수였다는 게 중론(衆論)이었다. 소련의 유엔대사 야코프 말리크는 1950년 초부터 안보리 회의를 보이콧하였다. 대만(臺灣)이 중국의 정통정부로 인정받아 상임이사국 자리에 앉아 있는 것에 항의하기 위함이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말리크가 불참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 비밀문서가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이 정설(定說)이 도전 받게 된다.
조지워싱턴 대학 리처드 C. 소턴 교수는 《왕따(ODD MAN OUT): 트루먼, 스탈린, 마오쩌둥, 그리고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스탈린이 미군 개입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안보리결의 때 불참하도록 지시하였다는 대담한 주장을 하였다.
6월 27일 안보리에 미국이 유엔군 파병결의안을 제출하였을 때 소련 대사 말리크는 뉴욕에 있었다. 스웨덴 식당에서 유엔사무총장, 미국대사, 말리크 등이 점심을 함께 하였다. 식후(食後) 안보리 회의장으로 향하면서 트리그브 리 유엔사무총장이 말리크에게 “소련의 국익을 위해서라도 참석하는 게 좋겠다”고 권하였다. 말리크는 “나는 가지 않겠다”고 잘랐다. 이런 중대한 결정을 말리크가 했을 리는 없다.
2005년 정 창 및 존 핼리데이가 공저(共著)한 《마오쩌둥 비화(秘話)》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말리크도 상부에, 안보리로 돌아가고 싶다면서 허가를 요청하였다. 스탈린은 그를 전화로 불러내 ‘불참’을 지시하였다. 그는 서방군대를 (한반도로) 불러들이려 하였던 것이다.>
최근 소련의 안보리 불참과 관련한 중요 문서가 발견되었다. 2005년에, 러시아 3대 국립문서보관소 중 하나인 사회정치사(社會政治史) 문서보관소(RGASPI)에서 안드레 레도프스키라는 러시아 학자가 발견한 스탈린의 편지(문서번호 fond 558, opis 11, delo 62, listy 71∼72)가 그것이다. 이 문서에 대하여 베이징대 역사학부 김동길 교수(한국인)가 논문을 썼다. 편지의 전문(全文)은 이렇다.
필리포프(스탈린)가 프라하 주재 소련 대사에게 보낸 편지: 체코슬로바키아 클레멘트 고트발트 대통령에게 전달할 메시지(1950년 8월 27일)
고트발트에게 아래 메시지를 구두(口頭)로 전달할 것. 요구한다면 필사(筆寫)하여 줄 것.
우리는 지난 6월 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소련이 불참한 것과 그 뒤의 사태전개에 대하여 고트발트 동지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우리는 안보리에 네 가지 이유로 불참하였다. 첫째, 새로운 중국과 소련의 단결을 과시하기 위하여, 둘째, 미국이 안보리(상임이사국)에서 국민당 괴뢰 정권을 중국의 대표로 인정하고 (注-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의 진정한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는 정책의 바보스러움과 어리석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셋째, 두 강대국의 불참 때문에 안보리 결의는 정당성이 없음을 드러내기 위하여, 넷째, 미국 정부가 안보리 다수결(多數決)을 이용, ‘프리 핸드’를 갖고 어리석은 짓을 마음대로 저지르도록 함으로써 여론이 미국 정부의 진면목을 알도록 그렇게 하였다.
나는 우리가 이런 목적들을 달성하고 있는 중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안보리에 불참한 이후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에 엮이어 들어가 군사적 명성(名聲)과 도덕적 권위를 망치고 있다. 미국이 한국에서 침략자와 폭군(暴君)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미국이 한때 생각하였던 것만큼 군사적으로 강력하지 않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미국이 극동(極東)에 묶여 현재 유럽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는 사실도 명백하다. 이 같은 사실은 세계의 세력 균형에 있어서 우리에게 득(得)이 되지 않는가? 의심할 바 없이 그렇다.
미국 정부가 극동에 계속해서 묶여 있고,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 중국을 끌어들인다고 가정하여 보자. 이로부터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첫째, 미국은, 그 어떤 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방대한 병력을 보유한 중국과 싸워 이길 수 없다. 미국은 이 투쟁에서 (전선을) 지나치게 넓히게 될 것이다.
둘째, 그렇게 함으로써 미국은 가까운 장래엔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제3차 세계대전은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모르지만 연기될 것이고, 이는 유럽에서 사회주의를 강화하는 시간을 줄 것이며, 더구나 미국과 중국의 투쟁이 극동의 전(全)지역을 혁명화(革命化)할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모든 것들이 세계의 세력균형에 있어서 우리를 유리하게 만들지 않는가? 의심의 여지 없이 그렇다. 귀하도 이해하겠지만, 소련이 안보리에 참여할 것이냐 아니냐는 피상적으로 보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은 문제이다.
이런 이유로 하여 우리는 “민주진영은 안보리에 불참해선 안 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참여할 것인가 불참할 것인가는 당시 상황에 따라 결정할 문제이다. 국제환경에 따라서 우리는 또 다시 안보리에 불참할 수도, 복귀(復歸)할 수도 있다.
왜 우리가 지금 안보리에 복귀하였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돌아간 것은, 미국 정부의 침략적 정책을 폭로하고, 그들이 안보리의 깃발을 이용하여 침략성을 은폐하려는 책동을 저지하기 위함이다. 미국이 한국에 침략적으로 개입하였으므로 안보리에 참여하여 이를 폭로하기가 매우 쉬워진 것이다. 이는 너무나 명백하므로 더 설명할 필요도 없는 사안(事案)이라고 생각한다.
필리포프(스탈린)
미국에 ‘프리 핸드’를 주다
스탈린의 이 편지는 충격적인 고백이다. 6·25 전쟁에 대한 전혀 새로운 해석을 강요한다. 스탈린은 소련이 유엔 안보리에 불참한 네 가지 이유를 설명하면서 “넷째, 미국 정부가 안보리 다수결을 이용, 멋대로 더 많은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도록 함으로써 여론이 미국 정부의 진면목을 알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했다. 한국전에 개입할 수 있도록 ‘프리 핸드(free hand)’를 주었다는 표현을 하였다. 즉 미국이 유엔군의 기치하에 한국전에 참전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놀라운 고백이다.
이 편지에서 스탈린은 자신이 기획하고 일으킨 이 전쟁의 목적을 솔직하게 드러내는데 하나 없는 게 있다. 김일성이 전쟁을 통하여 달성하고자 한 ‘한반도의 공산화 통일’이다. 스탈린의 전쟁 목표엔 ‘통일’ 같은 건 들어 있지도 않다. 미군이 한국전에 ‘묶여 유럽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도록’ 만들려고 하는 스탈린에겐 김일성이 전쟁에서 이기면 안 된다. 전쟁을 오래 끌어야 하고, 유엔군이 38도선 이북으로 북진해야 하며 그래서 중국 군대가 들어와야 한다.
스탈린의 편지를 읽으면 그가 중공군의 개입을 기정사실로 전제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스탈린이 이 편지를 썼던 1950년 8월 하순은,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가 절정에 달하고, 맥아더 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을 준비 중일 때였다. 중공군 개입 가능성은 거론되지 않을 때였다.
스탈린은 북한군 총공세의 실패를 예견하였고, 그렇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 틀림없다. 아니 실패하도록 유도하였을 것이다. 이는 김일성의 증언이나 소턴 교수의 주장-스탈린이 북한군의 승리를 방해하였다는-과 부합한다.
스탈린은 초전(初戰) 때부터 북한군의 조기(早期) 승리를 막으려 애썼다는 소턴 교수의 과격하게 보이던 주장이 스탈린의 편지를 보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북한군이 서울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한강을 건너 부산으로 진격하였더라면 7월 중에 전쟁을 끝냈을 것이라고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소턴 교수는 문제의 저서에서 스탈린이 이런 조기 승리를 막기 위하여 여러 수단을 썼다고 주장하였다.
스탈린은 고트발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 정부가 극동에 계속해서 묶여 있고,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 중국을 끌어들인다고 가정하여 보자”고 했다. 스탈린은 ‘가정해 보자’고 했지만 이미 중국군을 끌어들이기 위한 압박을 마오쩌둥에게 가하고 있었다.
미국이 파병을 결정한 직후인 1950년 7월 2일 중국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중국주재 소련 대사 로시친을 불러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마오쩌둥은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서울을 방어하기 위하여 인천에 견고한 방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국군은 조선 사람으로 변장, 미국에 대항하는 일종의 의용군(義勇軍) 역할을 하려 한다. 이 목적을 위하여 이미 펑톈(奉天)지구에 12만명으로 구성된 3개군(軍)을 집결시켰다. 이들을 엄호하는 데 소련 공군이 협력해 줄 수 있는지 알고 싶다. 북조선의 지도부는 마오쩌둥이 두 차례 경고하였음에도 미국의 군사적 개입 가능성을 과소평가한다.”
7월 5일 스탈린은 저우언라이에게 전문을 보내 “우리는 공군력으로 중국의 병력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스탈린은 자신이 던진 김일성의 남침이란 미끼를 미국이 물었으므로(파병 결정) 중국을 시켜 함정에 빠진 미국을 치게 함으로써 독자노선을 가려는 마오쩌둥을 붙들어 둘 수 있다고 자신하였을 것이다. 스탈린이 한국전을 이용하여 미·중을 이간질시킴으로써 중국을 소련 진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는 데 대하여는 키신저 등 많은 연구가들이 동의하고 있다.
스탈린, 중국의 분열 원해
한국전 발발 직전 국제정세는 매우 유동적이었다. 1950년 1월 12일 워싱턴의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이 한 연설은 역사에 남는다. 이 연설에서 애치슨은 한국이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된다는 점을 명시, 김일성의 남침을 불렀다는 평판을 듣기 때문이다.
애치슨 국무장관의 이야기는 개인적 견해가 아니었다. 1947년에 이미 미국의 합참(合參) 등 국가 지도부가 한국에 대한 전략적 평가를 통하여 내린 결론의 요약이었다. 즉 한국은 미군을 주둔시켜 지킬 필요가 없고 지킬 수도 없다는 판단하에서 1949년 여름 주한미군 4만5000명을 철수시키고 500명 규모의 군사 고문단만 남겼던 것이다. 미군 철수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이는 당시 육군참모총장 아이젠하워 원수(元帥)였다.
애치슨 연설이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은 타이밍 때문이다. 1950년 초 세계의 세력판도가 급변(急變)하고 있었다. 1949년 9월에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여 미국의 핵독점 시대를 끝냈다. 그 직후 마오쩌둥이 중국의 공산통일에 성공하였다.
장차 소련과 미국의 군사적 대결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던 스탈린으로선 유리해진 셈이지만 마오쩌둥의 통일 중국은 두통거리이기도 하였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지도노선과는 다른 방법으로 공산화 통일에 성공하였고, 유고의 티토 식으로 독자노선을 걷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스탈린은 상당기간 중국이 장제스(蔣介石)와 마오쩌둥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기를 바랐다.
스탈린 같은 전체주의 독재자는 같은 진영 안에서 라이벌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티토 암살 지시까지 내렸으나 성공하진 못하였다. 세계 최다(最多)의 인구를 가진 중국이 독자노선을 선택, 미국·영국 등 서방세계와도 교류하게 되면 소련은 대미(對美) 전략에서 큰 타격을 받는다. 1950년 초 스탈린의 최대 관심사는, 중국이 미국과 친해지는 것을 막고 소련 진영에 붙들어 둘 방도의 탐색이었다.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도 비슷한 고민에 빠진다. 미국은 국공(國共)내전 때 장제스 정부를 도와 중국의 공산화를 막아 보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누가 중국을 잃었는가”란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여론의 비판에 몰리던 트루먼 정부는 공산화한 ‘새 중국’과의 관계를 재설정하기로 한다. 트루먼 정부는 중국을 적대시(敵對視)하면 소련과 붙어 버릴 것이란 판단을 내리고 유화(宥和) 제스처를 쓰기로 한다.
애치슨 선언은 미국의 對中 유화제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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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치슨 미 국무장관. 1950년 1월 애치슨선언은 사실 미국의 대중(對中) 유화제스처였다. |
애치슨은 먼저 중국의 대만 점령을 미국이 막을 생각이 없다는 점을 재차 강조하였다. 스탈린의 소련을, ‘공산주의적 개념과 전술로 무장한 러시아 제국주의’라고 단정한 애치슨은 소련이 만주지역을 중국으로부터 떼어 내 차지하려고 한다면서 외몽골에선 그런 과정이 이미 진행 중이라고 강조하였다. 애치슨은 스탈린을 겨냥, “중국의 통합성을 해치는 자가 바로 중국의 적”이라고 표현한 뒤 중국 지도부에 화해의 메시지를 보냈다. 요지는 이념이 아니라 국익(國益)을 바탕으로 하여 미·중관계를 설정하자는 제안이었다.
“과거 방식의 동서(東西)관계는 끝났다. 극동에서 동서관계는 상호존중과 상호이익의 관계여야 한다.”
스탈린은 이 연설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마오쩌둥을 상대로 중·소관계의 틀을 협상하는 결정적 시기에 미국이 두 나라의 틈을 벌리려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스탈린은 몰로토프를 모스크바에 머물고 있던 마오쩌둥에게 보내 애치슨 연설을 비판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헨리 키신저는 최근의 저서 《중국에 대하여》에서 이 에피소드를 소개한 뒤 이런 요지의 평을 붙였다.
<그런 요청을 한 것은 스탈린이 중국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증거이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애치슨의 연설이 중·소관계에 대한 정확한 표현임을 알았던 것이다.>
마오쩌둥은 하급관리를 시켜 애치슨 연설을 반박하도록 하는 데 그쳤다. 마오쩌둥은 소련과 동맹조약을 맺고 대만을 점령한 다음엔 미국과 수교할 생각이었다. 스탈린은 미·중 접근의 저지를 소련 외교의 최대 과제로 설정하였다. 소련과 미국이 중국을 사이에 두고 줄다리기를 하는 무대에 김일성이 등장한다.
1950년 1월 17일 평양에서 열린 이주연(李周淵) 주중(駐中)대사의 베이징(北京) 부임 송별 연회장에서 김일성은 술에 취한 말투로 소련대사관 참사관 이그나체프와 페리센코에게 말을 걸었다. 슈티코프 소련대사가 모스크바로 보고한 전문에 실린 김일성의 발언.
“나는 통일문제를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 하여 잠을 자지 못한다. 만약 남조선 인민의 해방과 조국통일 사업을 미룬다면 나는 조선인민의 신뢰를 잃게 될 것이다. (1949년에)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스탈린 동지는 남쪽을 공격해선 안 된다, 이승만 군대가 북한을 공격한 경우에만 남조선을 향해 반격해도 좋다고 나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지금까지도 공격해 오지 않기 때문에 남조선 인민 해방과 국가통일은 미뤄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남조선 인민을 해방하기 위한 인민군의 공격계획에 관하여 허가를 얻고 싶다. 만약 스탈린 동지와 만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마오쩌둥(필자 注-그는 모스크바를 방문 중이었다) 동지가 모스크바로부터 귀국한 후 그와 만날 것이다. 마오쩌둥 동지는 중국의 내전(內戰)이 끝난 뒤 원조해 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슈티코프 소련대사는 ‘미리 계획된 발언으로 보인다. 자신의 기분을 드러내는 식으로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탐색하려는 것이다’고 분석했다. 중국의 6·25 전사(戰史)학자 주젠룽(朱建榮)은 《마오쩌둥의 조선전쟁》이란 책에서, 김일성이 마오쩌둥 이야기를 꺼낸 것은 스탈린을 자극하려는 목적에서였다고 주장하였다.
김일성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중·소관계에 대한 중대한 회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중국이 소련 진영에서 이탈할까 초조해하는 스탈린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김일성을 逆이용한 스탈린
스탈린은 슈티코프의 전문을 받고는 처음엔 ‘애송이가 많이 컸군’이라면서 기분 나빠하다가 ‘이거야말로 굴러온 호박이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한반도를 국제전쟁터로 만들어 여기에 미군과 중공군을 끌어들여 서로 싸우게 하면 고민이 풀린다!
스탈린은 1월 30일 슈티코프 대사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
<나는 김일성의 불만을 이해한다. 신중하게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가 이 건으로 나와 이야기하고 싶다면 나는 언제라도 만날 용의가 있다. 이상의 메시지를 그에게 전달하고 나는 그를 도울 용의가 있음을 전해 주기 바란다. 이 사실이 마오쩌둥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라.>
김일성은 이 메시지를 받고서는 스탈린을 갖고 놀았다고 기분이 좋았겠지만 그 뒤 전개된 역사는 스탈린에 의해서 처참하게 이용된 쪽은 김일성이란 사실을 기록한다.
1950년 4월 모스크바에 간 김일성에게 스탈린은 남침을 허가해 주면서 이런 요지의 설명을 하였다고 한다(소련 문서).
<소련의 핵무장, 중·소동맹 조약 덕분에 (남침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스탈린이 진심으로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은 것 같지는 않다. 스탈린은 미군개입을 전제로 전략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소련이 무기는 지원하겠지만 병력을 보낼 순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당신 이빨이 부러져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데 신경을 쓸 데가 많다. 그럴 때는 마오쩌둥의 지원을 요청하라.”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조건을 단다. 중국을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이었다.
“마오쩌둥을 찾아가 전쟁계획을 설명하고 동의를 받아라. 그가 반대하면 남침은 안 된다.”
1971년의 미·중 화해를 주도하였던 전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스탈린의 의도를 이렇게 분석하였다(저서 《중국에 대하여》).
스탈린, 마오쩌둥을 끌어들이다
<만약 미국이 개입하면 중국은 위협을 받고, 따라서 소련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다. 중국이 미국과 대결하게 되면 소련으로부터 대규모 원조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중국이 북한을 돕지 않으면 중국에 실망한 북한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이 커진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이용, 전쟁을 일으키면 미국이 개입하든 안 하든 소련으로선 득을 보게 된다고 계산하였다는 이야기이다.
1950년 5월 마오쩌둥을 만난 김일성은 ‘미국이 구원군을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2~3주 안에 남한점령을 끝낼 것이므로 군대를 보낼 시간이 없을 것이다’고 장담하였다. 마오쩌둥은 미국의 개입 가능성에 대비하여 3개군의 병력을 중·북(中北) 경계선에 배치하겠다고 했으나 김일성은 ‘건방진 태도로’(마오쩌둥의 표현) 북한군과 남로당 게릴라들이 남한을 간단하게 해치울 것이므로 도움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마오쩌둥은 속으로 비웃었을 것이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에 대한 일종의 보증인으로 마오쩌둥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마오쩌둥은 그 전에도 중공군에 있던 조선족 3만5000명을 북한으로 돌려보내 북한군을 증강시키는 등 남침준비를 지원한 전력(前歷)이 있었다.
마오쩌둥은 이때 한국보다 더 급한 게 있었다. 대만점령을 위하여 대안(對岸)에 약 15만명의 병력과 약 4000척의 선박을 집결시켜 놓았다. 소턴 교수는 《왕따》에서 스탈린이 선수(先手)를 쳤다고 표현하였다. 마오쩌둥이 먼저 대만상륙작전을 펴면 김일성의 남침으로 미군이 들어와도 중국군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대만보다 먼저 한국을 치도록 한 것도 스탈린이란 것이다. 이 타이밍으로 살아난 게 대만이다. 한때 대만을 포기하였던 트루먼 대통령은 김일성의 남침 직후 미 7함대를 보내 대만을 방어하도록 명령한다.
김일성의 등을 떠민 스탈린
한국전에서 스탈린이 마오쩌둥과 김일성을 마치 부하처럼 다뤘다는 것은 공개된 3자 사이 전문에서 잘 드러나 있다. 자존심 강한 마오쩌둥이 스탈린을 스승처럼 받든다. 이는 스탈린이 연출한 무대에 마오쩌둥이 배우로 등장한 때문일 것이다. 일단 전쟁국면(局面)으로 들어가면 무기지원 능력을 독점한 스탈린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6월 25일 이후 한국전의 지휘체제는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 순으로 서열화된다.
7월 1일 김일성은 북한주재 슈티코프 대사에게 질책성 전문을 보냈다. 서울을 점령한 지 사흘이 지났는데 뭘 하고 있느냐고 따진다.
“왜 귀하는 조선군 사령부가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보고하지 않는가. 사령부는 전진(前進)을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일시 중단을 결정하였는가?”
스탈린은 “진격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조선 해방이 빠르면 빠를수록 (미국의) 개입 기회는 줄어든다”고 충고성 지시를 한다.
김일성은 스탈린이 무기를 충분히 대 주지도 않으면서 진격을 계속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데 불만이 많았겠지만 항의할 처지가 아니었다. 이튿날 슈티코프 대사는 스탈린에게 북한군 지휘부의 동향을 보고하는데, “김두봉과 홍명희 등은 조선군의 전력상(戰力上) 대미전쟁을 감행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입장이다”고 했다.
스탈린은, 점령한 서울을 지키면서 한강 남쪽으로 내려가기를 머뭇거리는 김일성의 등을 민 것 같다. 그는 유엔대사를 안보리에 불참시켜 유엔군 파병 결의를 막지 않음으로써 미군이 개입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지만, 김일성이 미군과 싸워서 져야 중공군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스탈린의 압박을 받은 김일성의 북한군은 한강을 넘어 7월 3일부터 본격적인 남진작전을 펼친다. 이날 슈티코프는 스탈린에게 김일성과 만난 일을 보고하면서 김이 “민족보위상 최용건이 가 있는데도 중부전선에서 북한군이 도하작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불평하였다고 했다. 김일성 자신이 남진을 내키지 않아한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대목이다. 김일성은 7월 8일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내 이렇게 애걸한다.
스탈린이 반긴(?) 인천상륙작전
<우리 군 간부들은 현대적 군대의 통솔에 미숙하므로 인민군 전선사령부와 2개의 군단사령부에 25~35명의 소련군 고문을 파견하도록 허락해 주기를 간청함.>
소턴 교수는 스탈린이 소련군 고문을 통하거나 직접 나서서 김일성의 진격상황을 세부적으로 통제하였는데, 고의로 부산까지의 진격속도를 늦추고 병력을 분산시켰다고 주장하였다. 6사단을 떼 내어 호남지방으로 돌린 것이 일례(一例)이다.
소턴은 스탈린이 개입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전선의 북한군에 파견되었던 소련군 고문들을 통신장비와 함께 모두 철수시켜 작전에 큰 혼란을 야기하였다고도 썼다.
스탈린은, 체코 대통령 고트발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반도에 미군을 불러들이고 중국군을 끌어들여 지구전을 하도록 하는 게 유럽에서 유리한 조건을 만든다”는 요지의 본심을 털어놓은 다음 날(8월 28일) 슈티코프 대사를 통하여 김일성에게 구두(口頭) 메시지를 전하게 한다.
그는 “이런 전쟁에선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는 없는 것이다. 조선인민의 최대 승리는 조선이 지금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나라가 되고, 제국주의적 억압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키는 투쟁의 기수(旗手)가 된 점이다”고 김일성을 추켜 준다. 스탈린이 김일성과 북한군을 하나의 도구로 이용하여 희생시키고 있는 데 대한 변명이다.
슈티코프는 스탈린의 편지를 가져가서 읽어 주었다. 김일성은 받아 써도 좋으냐고 물었고 대사는 김일성이 구술(口述)을 받아 적도록 했다. 김일성은 부수상 박헌영을 불러 이 전보(電報)를 읽어 주어도 되느냐고 물었고 대사가 허락하자 이번엔 정치위원회를 소집하여 알려도 되느냐고 했다. 무서운 상전의 칭찬을 받고 감격해하는 노예의 모습이다.
소턴 교수의 주장과 스탈린의 체코 대통령 앞 편지를 종합하면 1950년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은 스탈린으로선 기다리던 바였다. 북한군이 38선 북쪽으로 퇴각하는 것을 따라 미군이 올라오면 중국군을 끌어들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서울이 한국군에 의하여 수복된 다음 날인 9월 29일 슈티코프 대사는 김일성과 박헌영을 만난 상황을 스탈린에게 보고하였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신경질적이다. 어려운 상황에 직면, 절망적으로 되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모습이다.>
그날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탈린에게 애걸조의 전문을 보냈다.
<친애하는 요세프 비사리오노비치, 우리는 귀하로부터의 특별한 지원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적군(敵軍)이 38선을 넘는 경우 우리는 소련으로부터 직접적 군사원조를 필요로 하게 될 것입니다. 무슨 이유에서 이게 불가능하다면 중국 및 기타 인민민주주의 국가에 의한 국제의용군을 창설, 우리를 도와주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일성을 남침하게 만들어 미군을 불러들이고, 미군이 38도선을 넘도록 하여 중국군을 끌어들이면 미·중이 충돌하게 되고 그 뒤로는 중국이 소련에 종속된다’는 스탈린의 시나리오는 이제 막바지를 향해 달린다. 10월 1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공식으로 파병을 요청하였다.
그는 “나는 모스크바로부터 먼 지방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어 조선에서 일어나는 일들에서 조금 떨어져 있으나 오늘 모스크바로부터 온 보고에 따르면 조선의 동지들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여겨진다”고 시작한 후 “5~6개 사단이라도 좋으니 38도선으로 즉시 이동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고 했다.
10월 2일, 마오쩌둥은 주더(朱德), 저우언라이, 류사오치(劉少奇), 가오강(高崗) 등 수뇌부 회의를 소집하고 한국전 참전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다수가 참전에 반대했다. 다음 날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에서 “파병하면 미국과 중국이 공공연히 충돌하게 되므로 우리들의 평화건설 계획이 좌절된다”면서 “조선인들이 빨치산 투쟁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고 했다.
스탈린, 마오쩌둥을 몰아붙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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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중공군 대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침공했다. |
<미국은 현재 대규모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군국주의가 아직 부활하지 않은 일본은 미국을 도울 수가 없다. 중국과 상호원조 조약을 맺은 소련까지 말려들 것이라고 무서워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미국, 영국보다 강하다. 만약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지금 전쟁을 하는 게 좋다. 이승만의 한국이 미국과 일본의 대륙 전진(前進)기지가 될 수년 뒤보다는 지금 싸우는 게 유리하다.>
10월 12일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전보를 친다.
<중국인들은 재차 파병을 거부하였다. 귀하는 북조선에서 철퇴하는 게 좋겠다.>
만주로 피하여 빨치산 투쟁을 준비하라는 권유였다.
다음 날 중국 주재 소련대사 로시친이 스탈린에게 생각지도 않은 보고를 했다. 마오쩌둥이 중국군의 참전 결정을 알려 왔다는 것이었다. 10월 14일 스탈린은 이 소식을 김일성에게 전한다.
마오쩌둥은 한반도로 들어갈 중공군의 총사령관에는 펑더화이(彭德懷)를 임명하고 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을 데려가도록 명령했다. 펑더화이는 중국내전 중에 마오쩌둥의 처와 아들이 피살된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양했지만 마오의 강권을 이기지 못하고 데려가게 된다(아들은 나중에 북한에서 사망).
마오쩌둥은 압록강을 넘는 날을 10월 15일로 잡았다. 그러고는 저우언라이 총리를 소련으로 보내 소련공군의 엄호를 요청했다. 스탈린은 그렇게 하면 미국이 소련과 정면대결로 나올 가능성이 있다면서 중공군에 20개 사단분의 장비를 제공할 용의는 있지만 공군지원은 당분간 불가능하다고 뒤로 빠져 버리는 것이었다.
이 배신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은 불면(不眠)의 고민을 한 끝에 참전 강행을 결심한다. 압록강 도강은 10월 19일, 제1파(波)는 25만, 제2파는 15만, 제3파는 20만, 총 60만의 대군(大軍)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전투기와 탱크는 한 대도 없고, 소총과 방망이 수류탄마저 한 명에 하나씩 돌아갈까 말까 한 중공군은 그러나 혁명적 열정과 엄정한 군기(軍紀)로 똘똘 뭉쳐서 육·해·공의 최신 무기로 철갑을 두른 유엔군을 향하여 나아갈 참이었다.
정일권의 증언
이 무렵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사령관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낸다. 중공군의 개입 직후 이 대통령이 보여준 그 편지를 읽어 보았다는 정일권(丁一權) 육군 총참모장의 기억에 따르면, 요지는 이러했다.
<본직은 소련은 몰라도 중공이 (한반도에) 개입할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보는 바입니다. 이번에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더라도 이 가능성을 긍정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귀하가 긍정함으로써 북진을 방해하는 작전상의 제한이 가중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민은 거족적으로 북진(北進) 통일만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귀하의 영매(英邁)하신 지도가 아니고서는 이 열망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굳게 믿고 있으니 이 간절한 심정을 살펴 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정일권은 이승만 대통령의 편지에 대한 맥아더의 답장도 보았다고 한다. 그가 기억한 10월 13일자 맥아더의 답장 요지는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정일권 회고록》).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본직은 믿을 만한 정보통의 보고를 받고 있습니다. 중공군은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 이 가능성을 겉으로는 긍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숨어서 압록강을 넘을 것입니다. 조금도 모르는 것으로 할 것입니다. 중공은 그 방대한 군사력을 배경 삼아 가까운 장래에 아시아에 있어서 데모크라시의 최대 위협이 될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소련이 있습니다. 중공의 잠재적인 군사력을 때릴 만한 기회는 지금 아니고서는 없을 것입니다. 전략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만 워싱턴이 언제까지 본직의 전략을 뒷받침해 주느냐가 문제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거센 반대에 부딪힐 것입니다. 하지만 본직의 불퇴전의 결의는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필요하다면 원폭(原爆)도 불사(不辭)할 것입니다.>
정일권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사령관이 주고받은 이 두 통의 사신(私信)을 아는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가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극비 중의 극비였다. 사가(史家)들이나 비평가들이 이 극비를 알 까닭이 없었다. 맥아더 장군은 자신에게 집중되는 비판의 소리, 즉 ‘맥아더는 중공군 개입의 가능성을 오판하여 유엔군의 북조선 철수를 자초했다’는 명예롭지 못한 책임추궁에도 이 비밀 서한만큼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맥아더의 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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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는 1950년 10월 15일 태평양상의 웨이크섬에서 만나 한국전쟁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전쟁이 터진 첫째 달 혹은 둘째 달에 그들이 개입하였더라면 결정적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저들을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만주에 집결한 30만 병력 중 기껏해야 5만~6만명 정도가 압록강을 건널 수 있을지 모르지요. 중공군이 만약 평양으로 남진하려고 하면 아마도 역사상 최대의 떼죽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맥아더의 야심은 한반도 통일을 넘어서 공산화한 중국을 수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중공을 칠 구실을 찾고 있었다. 맥아더는 ‘중공군이 개입할 것이다’고 사실대로 보고하면 트루먼이 북진을 중단시켜 중공을 칠 기회를 앗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였을지 모르나 소턴 교수는 트루먼 행정부도 중공군의 개입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1950년 10월 하순 북진하는 유엔군을 중공군이 기습 공격한 뒤 사라져 버리자 맥아더는 수십만의 대병력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수만 명에 불과하다고 축소 보고를 하였다. 있는 그대로 보고하면 워싱턴이 북진을 중단시킬 것이라고 염려하였을 것이다.
맥아더가 중공군의 대병력이 매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린 1950년 11월 하순의 총공격 명령은 중공군이 깔아 놓은 거대한 함정으로 유엔군을 밀어 넣은 자살적 공격이었다. 맥아더는 중공군이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서자 드디어 워싱턴에 자신의 복안을 내놓는다. 만주폭격, 중공해안 봉쇄, 장제스 군대의 중공 상륙 지원, 한국에 대규모 증원군 파병, 원폭 사용 검토 등.
이는 중공에 대한 사실상의 선전포고 건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중공을 정면으로 공격하면 소련(당시 핵 보유)이 참전, 미국이 이길 수 없는 세계대전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판단, 맥아더의 건의를 거부하고 제한전(制限戰)을 선택한다.
왕따는 마오쩌둥
맥아더는 유엔군에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미군을 주력(主力)으로 한 유엔군은 싸우지도 않고, 저지선을 치지도 않고, 평양을 내주면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운명이 다시 한번 경각(頃刻)에 달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사태를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았다.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넘긴 상태에서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적 대전략을 구사해야 하는 트루먼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을 고려할 여지가 아주 좁았다.
중공군은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점령, 수원까지 내려갔으나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이 지휘한 반격작전으로 그해 3월 서울을 탈환하고 전선을 지금의 휴전선에서 거의 고착화시켰다. 2년 남짓 지루한 고지전(高地戰)이 계속되고 인명 손실만 늘어났다.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휴전을 하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냉혈한(冷血漢) 스탈린은 이를 거절한다. 체코 대통령에게 설명하였던 대로 미군을 한반도에 묶어 두고 출혈(出血)을 시키는 건 소련 등 공산진영에 유리하다고 마오쩌둥과 김일성을 설득한다. “잃는 것은 인명뿐이고 얻는 것은 현대전의 연습이다”는 말까지 한다.
소턴 교수는 자신의 책에 《왕따》란 제목을 붙였는데, 이는 마오쩌둥을 지칭한 것이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이 판 함정에 빠져 미국과 원수가 되고, 서방세계로부터 고립되었으며, 선진기술 도입이 좌절되었다. 수천만 명이 희생된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도 한국전 참전이 몰고 온 상황에서 일어난 재앙이었다. 중국이 미국과 손을 잡는 것은 한국전 참전 20년 뒤이고, 본격적으로 개혁 개방에 착수하는 건 30년 뒤이다. 마오쩌둥은 스탈린과 김일성 때문에 30년을 잃어버린 것이다.
승자는 트루먼과 이승만
그렇다면 스탈린이 승자인가? 그는 1952년 7월 모스크바에서 저우언라이 총리와 만나 “미국은 형편없는 조선(북한)을 상대로 싸워 이기지도 못하고 있다. 만약 대전(大戰)이 일어난다면 미국 전체가 울게 될 것이다”고 기고만장해하였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죽었다. 2주 뒤인 3월 19일 소련 내각은 한국에서 휴전하기로 결정한다. 3월 29일 소련의 특별대표로부터 휴전결정 통보를 받은 김일성은 “매우 흥분하여 좋은 소식을 들어 기쁘다”고 했다. 마오쩌둥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2년을 끌던 휴전협상이 급진전, 7월 27일 전선에서 총성이 멎는다. 스탈린이 죽자마자 소련 지도부가 휴전을 결심한 것은 이 전쟁이 소련에 불리한 결과를 낳았다는 판단을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트루먼 행정부는 미군이 한국전에서 고전(苦戰)하는 상황을 위기로 활용, 대소 봉쇄망을 완성한다. 대만 방어, 일본의 경제부흥과 미·일동맹, 한미동맹, 독일의 재무장과 나토(NATO)의 군사동맹화가 이뤄졌다. 미국은 진주만 기습 직후 그러하였던 것처럼 막강한 경제력을 동원하여 소련을 상대로 군사력 건설 경쟁에 나선다. 군사예산을 몇 배로 늘린다. 이 군사력 경쟁에서 소련의 경제가 망가진다. 내부 붕괴로 동구 공산권은 1989년에, 소련도 1991년에 해체된다. 트루먼은 스탈린의 대전략을 역이용, 소련을 죽인 것이다. 이런 흐름에 편승한 이승만 영도하의 한국도 득을 많이 보았다.
한국전을 통하여 “빨갱이는 안 돼”라는 국민적 합의가 있었다. 좌익을 일소, 반공(反共) 자유민주주의 노선으로 근대화, 민주화에 성공한다. 군 장교단이 최강의 조직으로 등장, 정권을 잡고 산업화의 주체세력이 된다. 한미동맹, 한일수교, 월남파병, 중동진출, 수출입국 등 개방적인 국가전략이 대성공하면서 조선조적 명분론이 퇴조하고 실용적인 국가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전쟁을 겪고 살아남은 국민들은 강해진다.
스탈린의 대전략으로 시작된 6·25 전쟁의 가장 큰 수혜자(受惠者)는 트루먼과 이승만이었다. 문제는 6·25 전쟁과 냉전(冷戰)이 한반도에선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북한노동당 정권을 평화적으로 해체하고 자유통일하는 날이 와야 한국의 최종 승리로 끝날 것이다. 지금은 하프 타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