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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분석

白善燁 장군 명예원수 추대 불발의 전말

국방부 無所信에 2년째 표류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goms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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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2월 기무사령관, MB 독대해 명예원수 추대 여론동향 보고
⊙ 6·25 60주년 기념사업과 맞물리면서 급물살… 법률검토 후 ‘대통령령’ 제정으로 가닥
⊙ 국방부 내무 문서에는 2010년 9월 명예원수로 추대하기로
⊙ 일부 예비역과 광복회 반발로 좌초
⊙ 밴 플리트, 월턴 워커, 金鍾五 장군 등과 복수 추대하자는 의견도
2009년 6월 2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백선엽 장군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얘기하며 생각에 잠겼다.
  2009년 3월 23일자 《조선일보》는 1면에 ‘6·25전쟁의 영웅 백선엽(白善燁·92) 예비역 육군대장이 우리 군 사상 처음으로 5성(星) 장군인 명예원수(元帥)로 추대될 전망’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당연히 대다수의 국민은 ‘우리나라도 원수가 탄생하는구나’라는 생각을 가졌다. 당시 기사에서 정부 소식통이 “내년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이 같은 방안을 적극 검토 중”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년후인 6·25전쟁 60주년인 2010년 3월 무렵, 백 장군을 명예원수로 추대하려던 국방부 계획이 차질을 빚고 있다는 소리가 국방부 주변에서 흘러나왔다. 군 인사법 관련 규정을 고쳐야 하는 데다, 일부 예비역들이 반발한다는 것이었다. 3년 동안 치러지는 6·25전쟁 60주년 기념행사 마지막 해인 올해, 명예원수 추대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고, 추대 사실조차 일반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 도대체 그동안 명예원수 추대를 추진하던 국방부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던 것일까.
 
  시간을 거슬러 2009년으로 돌아가 보자. 백선엽 장군 명예원수 추대에 관한 이야기는 2009년 무렵 처음 나온 것이 아니라, 훨씬 이전부터 예비역 단체들을 중심으로 거론됐다고 한다. 재향군인회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하면서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일 뿐, 예비역 단체들은 이전부터 원수추대를 하자고 했었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는 2009년 8월 5일 서울 세종로 중앙청사에서 한승수(韓昇洙) 국무총리와 이홍구(李洪九) 전 국무총리를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6·25전쟁 60주년기념사업위원회’를 출범시켰다. 60주년기념사업위원회는 서울수복 기념행사, 참전국 방문 감사행사 등 12개 행사를 준비했고, 국방부는 국방부 나름대로 ‘6·25전쟁 60주년사업단’을 만들어 인천상륙작전 재연행사, 낙동강 등 전투기념행사, 백선엽 장군 명예원수 추대 및 회고록 발간 등 14개 행사를 치르기로 했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6·25 전쟁영웅에 대한 명예원수 추대건이었다.
 
  명예원수 추대 이야기가 예비역 장군들을 중심으로 한창 무르익자, 국군기무사령부는 2009년 2월 무렵, 군 원로들과 현역들의 의견을 두루 수렴해 당시 김태영(金泰榮) 국방장관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김종태(金鍾泰) 기무사령관(새누리당 경북 상주 당선자)은 청와대에서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을 독대해 보고했다. 기무사령부 관계자는 “성우회 등 예비역 장군들을 중심으로 백 장군을 명예원수로 추대하자는 이야기가 한창 나올 때였다”면서 “그의 전공(戰功)을 따지면 명예원수 추대가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고 했다.
 
 
  기무사령관, 청와대에 보고
 
2010년 4월 22일 이명박 대통령이 군 원로를 초청, 청와대에서 오찬장으로 향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백선엽 육군협회장이 대화를 하며 걷고 있다.
  김종태 당시 기무사령관은 “이 건과 관련해 군(軍)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정확하게 알고 중심을 잡으실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보고를 드렸던 것”이라며 “국방부의 의견, 국회 동향, 현역과 예비역들의 의견을 종합해 말씀드렸다”고 했다.
 
  김 사령관은 “대통령은 백 장군님 명예원수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갖고 호의적으로 대하신 걸로 기억한다”고 했다. 그는 “백선엽 장군은 6·25전쟁에서 국가를 위기에서 건지신 분으로, 현재 연로하심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을 위해 안보강연을 하시는 등 참군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다고 보고를 드렸다”면서 “백 장군을 명예원수로 추대하는 문제는 역사를 정리한다는 차원에서 국민여론을 보아 가며 국방부에서 여러가지 검증을 통해 임명하는 것이 좋겠다는 취지로 정리해서 말씀드렸다”고 했다.
 
  김 사령관은 또 “명예원수 추대는 오성(五星) 장군에 준하는 장군 임명 건이기 때문에 이번에 추대를 하면 백선엽 장군이 개인적으로 국민적 영웅이 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6·25전쟁 참전자들의 자긍심도 올라가고, 국민들의 안보의식도 높아질 것이라는 등 긍정적인 견해들을 전했다”고 했다. 그는 “청와대 안보수석실이나 언론에서 나설 수도 있지만, 군 선배의 문제이기 때문에 국방부에서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했다”며 “보고를 받은 이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나서는 모양새보다 김태영 장관에게 일임해서 처리하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명예원수 발목 잡은 ‘군 인사법’
 
  백 장군의 명예원수 추대 건은 이때부터 국방부로 넘어왔다. 6·25전쟁 60주년인 2010년을 1년 남긴 시점이었다. 국방부의 명예원수 업무는 인사복지실에서 주도했다. 공을 넘겨받은 국방부는 당초 백 대장을 ‘명예원수’가 아닌 ‘원수’로 추대하는 방안도 검토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행 법령이 ‘전시(戰時)에 현역 대장을 국무회의 의결 및 국회 동의를 거쳐 원수로 임명할 수 있다’고 돼 있어 명예원수 추대로 가닥을 잡았다고 한다. 국방부 관계자는 “김태영 장관 지시로 인사복지실에서 명예원수 추대를 위한 법률적 검토를 진행했다”면서 “군 인사법상 평시에 원수 계급을 줄 근거가 없어 국무회의를 거쳐 대통령령으로 명예원수를 추대하는 쪽으로 선회했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웠다. 그런데 문제는 법률검토에서 불거졌다.
 
  명예원수 추대를 위한 법률검토는 국방부 법무관리관실에서 담당했다고 한다. 국방부 관계자는 “현행 군 인사법 제27조는 ‘원수는 국가에 대한 공적이 현저한 대장 중에서 임명한다’고 돼 있어 예비역 대장이 원수가 되려면 ‘현역 대장’으로 규정하고 있는 이 법령도 개정해야 했다”고 말했다.
 
  군 인사법 제24조도 문제였다. 제24조에 있는 ‘명예진급 규정’에는 중령·대령 계급만 해당했기 때문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예비역의 진급 및 장교 임용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제3조는 예비역으로서 진급할 수 있는 계급을 예비역 대령까지로 규정하고 있어, 원수는 대상 계급이 아니었다”면서 “결론적으로 현행법상 명예원수 수여와 관련한 법적 근거가 없는 셈”이라고 했다. 이렇게 되면 국회에서 명예원수에 대한 별도의 법을 제정하거나 군 인사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 무렵 국방부는 명예원수 추대를 위해 국방위 의원들을 찾아 협조를 구하기도 했다. 당시 한나라당 김장수(金章洙) 의원(국방부 장관 역임)은 국방위 전체회의에서 ‘백선엽 장군 명예원수 추대 촉구 결의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2010년 2월 24일 김장수 의원은 국방위에서 “백선엽 장군 명예원수 추대를 위한 제도와 법규를 신속하게 정비하라”면서 “반대하는 사람들은 설득해 추진하기 바란다”고 했다. 4월 당시 한나라당 황진하(黃震夏) 의원은 “백선엽 장군 명예원수 추대는 정부가 나서야 하며 국무총리가 앞장서 달라”면서 “‘천안함 사건’ 관련 군 사기 앙양을 위해 백선엽 장군 명예원수 추대는 반드시 관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국회에서 법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쉽지 않았다.
 
 
  국방부의 추진 문서엔 2010년 9월 수여
 
  《월간조선(月刊朝鮮)》은 국방부가 2010년 4월 16일 작성한 ‘백선엽 장군 명예원수 추진계획’을 최근 입수했다. 이 문건은 국방부 인사기획관실이 작성한 것으로, 국방부는 백선엽 장군 명예원수 추대가 참전용사들의 명예를 선양하고, 국민 안보의식을 제고시키기 위해 추진하는 계획이라고 했다.
 
  문건에 따르면, 국회에서 백선엽 장군 명예원수 추대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고, 《조선일보》를 비롯한 주요언론들이 긍정적으로 보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아울러 2010년 3월 19일 ‘예비역영관장교연합회(회장 권오강)’가 창립 20주년 기념식에서 백 장군 명예원수 추대를 결의하고, 회원들의 뜻이 담긴 추대 결의문을 국무총리실과 국방부에 전달했다 적고 있다.
 
  문서를 살펴보면, ‘일부 언론 및 군 원로들이 백선엽 장군 명예원수 추대와 관련해 부정적인 의견을 제기하고 있다’면서 ‘6·25참전용사의 대표로서 군 내외의 존경을 받고 있는 백선엽 장군의 원수 추대를 통해 참전용사들의 명예를 높이고 국민 안보의식 고취 차원에서 이를 적극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문건은 명예원수 추대를 위한 세부적인 일정을 밝혀 눈길을 끈다. 2010년 4월까지 정부의 ‘6·25 60주년사업위원회’에서 추진토록 제기한다는 것이다. 이는 천안함 사건 후 군 사기진작을 강조하는 국회와 예비역 단체들의 여망을 고려한 것이라고 했다.
 
  5월 중에는 예비역 단체와 부정적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설득 활동을 펴기로 했다. 이를 위해 국방부는 재향군인회, 성우회, 6·25참전전우회 등 예비역 단체들을 찾아 지지를 요청하고, 반대의견을 가진 인물들을 개별적으로 접촉하기로 했다.
 
  5~8월에는 대통령령을 제정하기로 했다. 문건에 따르면, 국방부는 관련 법령을 제정하기 위해 ‘외국군인 군속에 대한 명예계급 수여규정’을 참조하기도 했다고 밝히고 있다. 만약 법령을 제정한다면 ‘예비역 대장 명예원수 수여규정(안)’이 될 것이고, 그 문안은 ‘예비역 대장 중에서 국가 안보를 위해 현저한 공훈(功勳)이 있다고 인정되는 자는 국무회의 의결, 대통령 재가 후 명예원수를 수여할 수 있다’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
 
  국방부 관계자는 “국회에서 군 인사법을 개정하는 것보다 국무회의에서 대통령령으로 통과시키는 방법이 시간상·절차상 적절하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만약 명예원수 추대가 국방부의 예상대로 추진됐다면 관계부처 협의→입법예고→법제처 심의→국무회의→대통령 재가의 절차를 거쳐 명예원수 추대가 됐을 것이다. 국방부는 제정된 대통령령을 바탕으로 9월 6·25 60주년 행사에 반영해 명예원수를 수여하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서울 재탈환일(3월 15일)을 ‘D-Day’로

 
  국방부는 명예원수 추대에 대비해 추대 날짜, 의미, 역할에 대해 전문가들에게 자문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 관계자는 “명예원수 추대 날짜는 우선 1사단이 서울을 재탈환한 날인 3월 15일로 하자는 1안(案), 60주년 기념일인 6월 25일로 하자는 2안, 1사단이 적의 수도인 평양을 탈환한 10월 19일로 하자는 3안 등 3가지 안이 나왔다”면서 “결국 60주년의 분위기를 띄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 1안을 추천했다”고 했다.
 
  이렇게 될 경우, 6·25전쟁 60주년기념사업단은 1사단 출신 생존 노병(老兵)과 백선엽 장군이 60년 전의 한강도하 작전을 재연한다는 의미로 도색(塗色)한 차량을 타고 한강대교를 건너 전쟁기념관까지 시가행진을 하는 것으로 했다. 전쟁기념관에 도착하면, 이명박 대통령이 백 장군에게 명예원수 계급장을 친수(親授)하는 모양새가 어떠냐는 이야기도 나왔다고 한다. 60주년 기념행사 당일, 국가원수인 이 대통령과 군(軍)을 대표한 백 명예원수가 호스트가 돼 각각 해외 정상들과 참전용사들을 이원화(二元化)해 접견한다는 ‘공동 주관 아이디어’도 있었다고 한다.
 
 
  국방부, 군 인사법 개정보다 대통령령 제정으로 가닥
 
국방부가 2010년 4월 작성한 ‘백선엽 장군 명예원수 추진계획’ 문건.
  2010년 4월 당시 한나라당 김장수 의원은 국방부에서 명예원수 추대에 따른 이상 기류가 감지되자, 국방위에서 김태영 장관에게 “백선엽 장군 명예원수 추대에 대한 국방부 입장은 무엇인가”라고 질의했다.
 
  이에 대해 김 장관은 “백선엽 장군의 명예원수 추대를 추진했으나 현 법령으로 추진이 제한될 뿐만 아니라 국민들과 군 관련 인사들의 공감대 형성이 미흡하다”면서 “군 내외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해 백선엽 장군을 실질적으로 예우하고, 명예를 선양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김 장관은 “군 관련 인사들의 통일된 의견 정립이 미흡하다”면서 “백선엽 장군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가 엇갈리고, 일부 원로들이 백 장군의 6·25전쟁에 대한 공과(功過) 등을 이유로 반대하고 있으며, 성우회·재향군인회 등 예비역 단체의 공식적 입장이 불분명하다”고 이유를 밝혔다.
 
  김장수 의원은 또 “백선엽 장군 명예원수 추대는 별도의 법개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가, 아니면 대안을 통해 추대가 가능한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김 장관은 “법령 검토 결과, 현행 군 인사법으로는 추진이 제한된다”면서 “명예원수로 추대하기 위해서는 군 인사법 개정 또는 대통령령의 법적 근거가 필요하다”고 답변했다.
 
  이때부터 국방부는 군 인사법(제27조)을 개정하는 것은 입법 소요기간 장기화로 개정이 불투명하다고 판단, ‘퇴역군인에 대한 명예원수 수여 규정’(가칭)이란 대통령령을 제정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를 위해 국방부는 ‘미수복지 명예시장·군수 등 위촉에 대한 규정’(대통령령 제21727호, 행정안전부 소관)에 따라 명예시장을 위촉하고 있고, ‘외국군인·군속에 대한 명예계급 수여규정’(대통령령 제4936호, 국방부 소관)에 따라 외국군인 등에 명예계급을 수여하고 있는 것에 착안해 대통령령을 만들기로 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이러한 입법례처럼 상위법(上位法) 근거 없이 대통령령 제정만으로도 백선엽 장군에게 명예원수를 수여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했다.
 
 
 
일부 예비역, “백선엽 혼자 다 했나”

 
1950년 10월 19일 대동강변에서 미군장교로부터 적의 상황을 설명 받고 있는 백선엽 장군.
  명예원수 추대를 적극 밀어붙이던 국방부는 2010년 4월이 지나면서 자신감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6·25전쟁 60주년기념일까지는 어려울 것 같다는 소극적인 태도로 변한 것이다. 국방부가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 중 하나는 대통령령에 근거규정을 만드는 데 시일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행정적인’ 이유보다는 일부 예비역을 중심으로 한 반발이 가장 큰 이유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 관계자는 “명예원수 추대계획이 알려지고 나서 일부 군 원로들이 국방부 장관을 찾아가 ‘그만두는 게 낫겠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바람에 벽에 부딪히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집중적으로 반대하는 예비역 장성들을 찾아가 반대하는 이유를 확인하려고 만났다”면서 “그분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장관에게 왜곡되게 전달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증언을 정확하게 녹취(錄取)하라고 말하더라”고 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백 장군이 6·25전쟁을 마치 혼자 다 한 것처럼 돼 있는데 부하 장병의 공도 크다. 또한 실패와 잘못도 적지 않다”는 논지를 폈다고 한다.
 
  반대한 인물들은 국방부 담당자 면담에서 “6·25 전쟁영웅을 예우하는 것을 반대할 이유는 없다”면서도 “특별법을 제정하면서까지 추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A장군은 “우리 군이 독립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독립군을 토벌하는 부대에서 근무했던 백선엽 장군을 명예원수로 추대한다는 것은 건군(建軍) 이념을 훼손하는 것으로 결사반대”라며 “만약 현 정부에서 명예원수를 추진한다면 헌법소원 등의 법적 대응을 할 것이며, 현재 변호사와 협의 중에 있다”고 했다.
 
  B장군은 “백선엽 장군은 간도특설대 출신인데 대장 되었다고 자랑하지만 제대로 한 것이 뭐가 있는지 궁금하다”면서 “6사단장이었던 김종오(金鍾五) 장군(작고·예비역 대장)은 잘 싸웠기 때문에 서울 진격을 지연시켰지만, 1사단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은 개성을 무방비 상태로 점령당하고, 봉일천에서 사단사령부가 기습당해 무기를 버리고 도망했는데, 무슨 영웅이고 원수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국방부 관계자는 “당시 면담 결과는 장관께 보고했고 육군협회에도 설명했다”면서 “이렇게 반발이 거세다면 국방부도 부담스럽고 추진하기 어렵다. 만약 추진하고 싶다면 직접 설득하라고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 백선엽 장군은
 
   1920년생으로 올해 92세인 백선엽 장군은 미국 등 6·25전쟁 참전국 베테랑들에게 ‘살아있는 전설(living legend)’로 불리는 인물이다. 건군(建軍)에도 참여한 백 장군은 60년 전인 1950년 6월 불과 서른 살의 나이에 1사단장으로 6·25를 맞았다.
 
  그는 미국 전사에도 6·25전쟁 최악의 전투로 기록된 1950년 8월 낙동강 방어선상의 다부동(多富洞)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가 지휘한 1사단은 다부동 전투에서 8000명 가량의 병력으로 북한군 2만여명의 총공세를 한 달 이상 막아 냈다. 다부동 전투에서 패했다면 인근 대구와 부산까지 북한 수중에 넘어갈 수 있는 위기에서 낙동강 전선을 사수했다.
 
  당시 백 장군은 “내가 선두에 서겠다. 후퇴하면 쏴도 좋다”며 부대를 독려했다고 한다. 그는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육군 1사단을 이끌고 미군에 앞서 평양을 탈환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6·25전쟁 발발부터 휴전까지 3년1개월2일17시간을 전장(戰場)에서 보낸 그는 1951년 휴전협상에도 참여했다. 이어 사단장·군단장을 거쳐 32세의 나이에 최연소 육군참모총장의 자리에 올랐고, 한국군 최초로 육군대장에 임명됐다.
 
  그는 전쟁기간 중 방한한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에게 한국군 20개 사단 증강을 요청해 허락을 받아 내는 등 세계 최강의 미국 군사 시스템을 단기간에 압축적으로 한국군에 이식(移植)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특히 그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일등공신이다. 그는 1953년 1월 콜린스 참모총장의 초청으로 워싱턴을 방문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한국 국민들은 안전보장을 위해 미국의 방위조약을 원한다”고 요청했고, 마침내 1953년 10월 한미 양국은 워싱턴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정식으로 서명했다.
 
  백 장군에 대한 예우는 미국이 더 극진하다. 미 육군은 최근 백 장군을 조지아주(州) 포트 베닝의 보병학교로 초청해 6·25전쟁에 관한 그의 육성(肉聲) 증언을 녹음했다. 이 학교에 있는 보병박물관 측은 2009년 6월 ‘한국전 기념관’을 개관하면서, 이곳에 백 장군의 증언을 영구 보존하기로 했다.
 
  역대 주한미군 사령관들은 이·취임사를 “존경하는 백선엽 장군님”이란 말로 시작하는 전통을 이어 가고 있다. 해마다 주한미군 소속 장군 전원이 참석하는 6·25전적지 여행에 백 장군을 초대하고, 역대 사령관들은 그가 1992년 펴낸 영문판 《From Busan to Panmunjeom(부산에서 판문점까지)》을 필독서로 여긴다.
 
  광복회도 반발
 
  국방부 관계자는 “일부 예비역들의 반대는 솔직히 군 생활을 하면서 생긴 개인적 감정일 수도 있어 국방부 차원에서 설득할 자신도 있었다”면서 “그러나 광복회(光復會)도 반대의사를 표명하면서 부담이 가중됐다”고 했다.
 
  이때부터 국방부는 좌파 단체까지 가세해 일제히 ‘흠집 내기’에 나설 경우 백 장군이 봉변을 당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2009년 11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백 장군을 올렸다. 위원회는 백 장군이 1942년 만주군 소위 임관 이래 일본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고, 1943년부터 간도특설대(間島特設隊)에서 항일세력(독립군)을 탄압한 사실을 들었다. 백 장군 가족은 “팔로군과의 소규모 전투는 있었으나 광복군과의 전투를 한 일도 없다”며 “따라서 항일세력 탄압은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며 이의를 제기했으나, 위원회 측은 기각했다.
 
  익명을 요구한 전사학자는 “미국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조지 워싱턴은 영국군 소령 출신이었다”면서 “미국은 조지 워싱턴의 영국군 경력을 포용했고, 그의 전쟁 경험은 훗날 독립군 총사령관이 될 자질을 닦은 훌륭한 훈련이 된 셈이었다”고 했다.
 
  재향군인회 관계자는 “명예원수 추대를 서둘러야 한다는 회장 명의의 지지성명을 준비했었다”면서 “갑자기 국방부가 ‘향군을 비롯한 예비역 단체에서 지지성명을 내면, 좌파 단체들을 자극해 결과적으로 백 장군님의 명예에 먹칠을 할지도 모르니 잠깐 보류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했다.
 
 
  김태영 장관, “안타깝지만…”
 
2012년 3월 12일 오후 서울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6·25전쟁실 재개관식에서 백선엽 장군(왼쪽), 김관진 국방부장관 등 참석자들이 6·25전쟁실을 살펴보고 있다.
  국방부 관계자는 “반대하는 사람이나 단체의 의견을 들어 요약한 다음, 장관께 보고를 드렸다”면서 “보고를 받은 장관은 ‘명예원수 추대가 참으로 어렵다. 안타깝지만 어떡하나. 접어야겠다’면서 탄식했다”고 했다.
 
  그는 “국방부도 백 장군님을 원수로 추대하고 싶은 마음이 꿀뚝같았지만, 갈등을 조장하고 명예를 실추시킬 수 있는 문제로 비화하는 것을 막아야겠다는 생각부터 들더라”면서 “국회의원들께도 설명을 드렸더니, ‘미국은 영웅을 만들기도 하는데, 우리는 있는 영웅도 비하(卑下)하니 참으로 개탄스럽다’고 했다”고 말했다.
 
  김태영 장관은 추대 의견을 주었던 모든 사람에게 설명을 하도록 했고, 그 이후로 국방부는 이 문제에 관해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국방부 관계자는 “육군협회 부회장을 통해 이 사실을 전달했고, 후에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백선엽 장군께서 ‘그저 군과 국가에 봉사하는 걸로 만족한다’고 말씀했다고 들었다”고 했다.
 
  파주시는 임진각에 6·25전쟁 참전기념비를 설치하다 좌파 단체들의 항의를 받고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6·25전쟁 참전기념비’라고 명명한 백선엽 장군 조형물 설치 사실이 알려지자, 좌파 단체들이 들고일어났다. 그러나 이인재(李麟載) 시장은 단호하게 밀어붙여 지난해 6월 27일 제막식을 가졌다. 당시 제막식에 정작 주인공인 백 장군은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동안 미국·러시아·독일 등 몇몇 국가에서 주로 전시에 원수가 배출됐지만 우리나라엔 없었다. 북한에선 김일성이 대원수로, 김정일·이을설이 원수로 불린다. 원수(元帥)란 군인으로서 입신의 경지에 든 경우를 일컫는다. 영국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독일의 에르빈 롬멜,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소련의 게오르기 주코프,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등 최고의 경지에 오른 군인에게 주어지는 계급이다.
 
 
  美軍들이 ‘General Baik’에 열광하는 까닭
 
파주시가 지난해 6월 임진각에 설치한 6·25전쟁 참전기념비. 좌파 단체들은 백선엽 장군 조형물 설치에 반대했고, 백 장군은 제막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맥아더가 2차대전의 영웅이고, 존 조셉 퍼싱은 1차대전에서 미군을 이끈 ‘6성장군(general of the armies)’이며, 윌리엄 셔먼은 남북전쟁에서 북군을 이끈 장군이다. 일본에서는 천황의 최고 군사고문인 원수부(元帥府)에 든 육해군 대장들을 원수라고 불렀다. 따라서 정확히는 원수 육군대장 오야마 이와오(大山嚴), 원수 해군대장 도오고 헤이하치로 등이다.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남정옥(南廷屋) 박사는 “우리는 왜 수많은 전쟁을 치렀으면서도 영웅에 인색한지 모르겠다”면서 “6·25전쟁은 한민족 5000년 역사에서 가장 치열한 전쟁이었고, 그 결과 한미동맹, 60만 국군, 한강의 기적을 낳게 했다”고 했다. 그는 또 “미국은 6·25전쟁에서 마지막 원수를 배출했다”면서 “그들은 평시임에도 브래들리 합참의장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후 곧바로 원수로 승진시켰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우린 생존한 전쟁영웅에 대해서도 각박하다. 이런저런 흠을 트집잡아 깎아내린다면 우리 역사에서 누가 영웅 자격이 있을 것인가. 영웅을 통한 역사가 필요한 시점이다. 마치 이순신(李舜臣) 장군을 통해 임진왜란을 잘 알게 되듯 6·25 전쟁영웅을 통해 6·25전쟁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데 많은 분의 희생이 있었기에 더더욱 영웅이 필요한 것 아닌가. 선진국일수록 전사(戰史)연구가 활발하고 원수와 전쟁영웅이 많은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김국헌(金國憲) 전 국방부 군비통제관(예비역 육군 소장)은 “백선엽 장군은 전공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 6·25동란 최고의 장군”이라면서 “대구를 사수한 다부동전투, 북진간 평양 선두입성, 휴전직전 금성전투 등 백 장군의 역전의 전공은 실로 발군”이라고 했다.
 
  그는 “휴전 후에도 국군 10개 사단 증강, 야전군사령부 창설 등 군정(軍政)에서도 백선엽 장군의 자취는 뚜렷하다”면서 “무엇보다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마련해 낸 주역은 이승만 대통령과 백선엽 장군이다.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우리 국민과 역사는 이 두 분께 감사해야 한다”고 했다.
 
  김국헌 장군은 “국군에서 원수로 받들 만한, 생존해 있는 장군은 백선엽 장군뿐”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때 명예원수로 모신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시들해진 것 같다. 국방부에서 이를 제대로 추진하기나 했는지 모르겠다. 미군들이 제너럴 백(General Baik)에 열광하는 까닭은 맥아더, 리지웨이와 같은 장군들이 이미 오래전에 역사의 인물이 된 지금, 미군들이 살아 있는 영웅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교훈이기 때문이다.”
 
 
  밴 플리트 대장 등 복수로 추대하는 案도
 
이승만 대통령과 밴 플리트 미 8군사령관(왼쪽).
  6·25전쟁 62주년이 다가오면서 백선엽 장군에 대한 정부 차원의 기념관 건립과 명예원수 추대를 다시 한 번 숙고해 추진해야 한다는 여론도 고개를 들고 있다. 6·25전쟁 전문가들은 “국가안보를 위해 헌신한 노 장군의 삶을 통해 군내 정신적 기반 구축 및 군심(軍心)을 결집하고, 6·25 참전국들도 백선엽 장군의 명예원수 추대에 적극적이어서 국격 제고의 계기”라며 “역대 한미연합사령관들은 백선엽 장군을 ‘한국의 조지 워싱턴’으로 흠모하며, 명예원수 추대는 대한민국의 자랑으로 손색없다”고 강조했다.
 
  남정옥 박사는 “명예원수를 1명으로 제한할 이유도 없다”면서 “예비역 대장 가운데 전공이 혁혁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추가로 명예원수로 추대할 수 있을 것이다. 더이상 영웅 만들기에 인색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는 “당시 60주년을 앞두고 국방부에 밴 플리트·월턴 워커 8군사령관, 김종오 6사단장 등 복수 인사를 추천했었다”면서 “혼자 명예원수로 추대되는 것보다는 한미가 함께 싸운 전쟁이라는 차원에서 6·25전쟁 영웅을 추대하는 것도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본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밴 플리트 대장은 6·25전쟁 때 자식까지 희생시키면서 8군사령관으로 전쟁을 수행했고, 전후 한국군 현대화는 물론 퇴임후에도 한미재단 이사로 전후복구 사업에 여생을 바쳤습니다. 월턴 워커 8군사령관은 6·25전쟁 개전 초기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는 등 활약했고, 1950년 12월 의정부 지역 전선을 시찰하러 가던 중 차량 사고로 순직하면서 대장으로 추서됐던 분입니다. 김종오 장군은 6사단장으로 개전 초기 춘천~홍천 전투에서 적의 남하를 사흘 동안 저지해 북한군의 초기 전쟁계획을 좌절시켰고, 국군 주력부대가 한강방어선을 구축하게 했으며, 유엔군이 참전할 시간을 벌게 했습니다.”
 
  그는 “만약 밴 플리트나 워커 장군 명예원수 추진이 이뤄진다면, 이는 한미동맹 차원에서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며 “한국 정부에 호감을 갖고 있는 오바마 행정부로 볼 때는 미국의 기도 살려 주고, 한국은 역시 은혜를 아는 나라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좌파, 백선엽 장군의 공비토벌 경력에 이를 갈아”(許南渻 교수)
 
  허남성(許南渻) 국방대 명예교수는 “좌파 단체들은 6·25동란 중 흥남철수 때 북한동포 10만명을 구출한 것으로 잘 알려진 김백일(金白一) 장군 동상 끌어내리기에 혈안이 돼 있다”면서 “6·25전쟁 기간 중 후방에서 준동하던 빨갱이들은 백선엽·김백일 두 사람에게 섬멸적 타격을 입었기에 그들이 김백일·백선엽의 만주군 경력을 트집잡는 등 극악한 행패를 부리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빨갱이들은 낙동강 교두보 확보 및 평양 선두입성에서의 백선엽 장군보다 백 야전사령관으로 지리산 공비토벌을 마무리한 그에 대해 이를 갈기 때문”이라면서 “만군에 있던 정일권, 백선엽, 김백일은 북한을 소련군이 점령하자 바로 월남해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남조선국방경비대에 들어갔다. 만군에서 공산당을 상대해 왔던 그들은 소련에 대한 어떤 환상도 갖지 않았고, 따라서 투철한 반공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했다.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지낸 김재창(金在昌) 장군(예비역 육군대장)은 “명예원수 추대 문제는 한 개인의 영예에 관한 문제라기보다 국가의 존립을 가능케 한 인물에 대해 국가 차원에서 예우해 주자는 것”이라면서 “백선엽 장군은 그의 활약상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나폴레옹 못지않은 지략과 용맹, 그리고 군인정신으로 후배들의 본보기가 되는 군인”이라고 했다.
 
  그는 또 “반대자들의 논리도 반대할 만한 명분인지 따져 보고 경청해야 하지만, 현재까지 나온 반대논리에는 찬동할 수 없다”면서 “현 정부와 국방부 담당자들은 반대자들이 대다수가 아니라면 확고한 신념을 갖고 이 문제를 관철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백선엽 장군은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 자문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의 집무실에는 ‘탄주어불유지류(呑舟魚不遊支流·배를 삼키는 큰 고기는 지류에서 놀지 않는다: 출전 《列子》)가 걸려 있다. 백선엽은 6·25전쟁 기간 중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명장(名將)들을 만난다.
 
  더글러스 맥아더, 매튜 리지웨이, 마크 클라크(유엔군사령관), 월턴 워커, 제임스 밴 플리트, 맥스웰 테일러(8군사령관), 프랭크 밀번 1군단장…. 당시 미 8군의 주요 지휘관들은 ‘아버지뻘’인 자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전쟁을 수행하던, 아무런 백그라운드도 없는 청년 장군 백선엽을 주목했다.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대장은 그의 회고록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From the Danube to the Yalu)》에서 “한국군 발전의 모든 공로는 휴전회담 조인 당시 16개 전투사단을 지휘한 젊은 백선엽 대장에게 주어져야 한다”면서 “나는 그가 정직함과 용기, 그리고 훌륭한 직업적 능력을 가졌으며, 동시에 항상 팀플레이를 하는 인물임을 알게 됐다”고 회고했다.
 
  얼마전 월터 샤프 전 주한미군사령관(미 6·25전쟁 60주년사업위원회 명예위원장)이 60주년 사업 및 2013년 정전 60주년을 계기로 한미 간 사업 협력을 위해 방한했다고 한다. 정작 우리에게 6·25는 잊혀진 전쟁이고 백선엽은 잊혀진 영웅일까. 이제 공은 다시 청와대와 국방부로 넘어왔다.
 
  재향군인회 김광현(金光鉉) 대변인은 “백 장군의 명예원수 추대를 여기서 멈추는 것은 대한민국이 백 장군께 죄를 짓는 것”이라면서 “지금이라도 국방부는 소신을 갖고 명예원수 추대의 불씨를 다시 살려야 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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