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해외현장

李承晩 아들 태산이의 무덤을 찾다!

아,태산아!

글 : 이종숙  미국 뉴저지 프린스턴한국학교 교장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이승만의 삶과 꿈》이란 책에서 발견한 태산이의 어릴 적 사진
⊙ 1905년 태산이를 맡아줄 가정을 찾는다는 이승만의 신문 광고
⊙ 이역에서 일곱 살 생애를 마감한 태산이와 그의 아버지 이승만의 슬픔 느껴져

李鐘淑
⊙ 이화여대 국문학과 조교수, 트렌턴한국학교 교장, 美프린스턴대 동아시아도서관 한국부(Princeton
    University East Asian Library - Korean Section) 담당 역임. 現 프린스턴한국학교 교장,
    美뉴저지 프린스턴한겨레문화연구회 회장
⊙ 수상 : 대통령표창(2003년, 한글발전공로).
  내가 태산이를 알게 된 것은 《이승만의 삶과 꿈》이라는 책에서 본 두 장의 사진으로 인해서였다.
 
  하나는 나막신을 신은 대여섯 살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탕건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아버지 우남(雩南) 이승만 앞에 서서 죄수들과 함께 감옥의 뜰안에서 찍은 사진이었는데, 사진의 왼쪽 귀퉁이에는 만년필 글씨로 ‘Prison group, 1904’라고 적혀 있었다.
 
  다른 하나는 이승만이 감옥에서 나와 1904년 가을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에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이 가족사진에서 태산이는 정자관을 쓴 풍골 좋은 할아버지와 나비 넥타이를 맨 아버지 사이에서 응석을 부리듯 할아버지 곁으로 몸을 기대선, 좀 장난기가 있어 보이는 어린아이 모습이었다. 두루마기에 학생모를 썼지만 모자를 쓴 것이 아니라 그냥 머리에 얹어 놓은 것처럼 보였는데 그것은 머리에 맞지 않는 모자 크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우남이 한국을 떠난 것이 그해 11월 초였으니까 이 가족사진은 어림잡아서 태산이가 죽기 1년4개월 전쯤에 찍은 사진일 것 같았다.
 
 
  태산이의 묘를 찾아서
 
1904년 한성감옥에서 찍은 이승만(왼쪽에서 세 번째)과 그의 아들 태산(이승만 앞)의 사진.
  태산이 묘지가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로, 나는 이 묘지를 한번 찾아가 보리라 마음먹고 있었지만 시간을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겨우 2011년 2월 23일(忌日은 2월 25일) 우리 학교의 P 선생과 같이 길을 나섰다. 작년은 2월 내내 눈도 많았고 날씨도 사나웠다. North 535, M Section이라고 적힌 종이쪽지만을 들고 무작정 길을 나섰는데, 당도하고 보니 82에이커(acre·1에이커는 약 4047㎡·대략 10만 평)라는 광활한 묘원에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사무실을 찾아 들어갔다. 왼쪽 방에 있는 키가 크고 머리를 길게 늘인 여직원에게 종이를 내보이면서 “이 묘지를 못 찾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것은 여기 주소가 아니며 이 묘지의 지도를 받으려면 20달러의 수수료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좀 머뭇거리다가 20달러를 꺼내 주었더니 묘원 내 길 이름이 적힌 복사 지도의 ‘DIAMOND’라는 칸에다 빠른 손길로 동그라미를 쳤다. 그러더니 오른쪽 귀퉁이에다 별표를 하고는 달랑 그 종이 한 장을 내미는 것이었다. 20달러에 종이 한 장을 받아들었는데 뭔가 미흡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머뭇거리다가 얼른 생각난 것이 태산이의 묘지 대장이었다. 그 여자는 구두 소리를 또박또박 내며 안으로 들어가더니 대장을 들고 나와 선 채로 내게 Mrs. Murphy라고 적힌 쪽지를 펼쳤다. 잔 타자 글씨 속에서 순간 Syngman Rhee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President of Republic of Korea / 3 Mass. Ave. NW Washington DC라고 적혀 있었다. 즉 묘지 주인이 Mrs. Murphy에서 이승만으로 바뀐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을 복사해 달라”고 요청하고는 “이 묘지가 언제, 어디서 이리로 이장(移葬)해 왔는지를 당신 손으로 적어달라”고 했다. 그는 아까 내게 건네준 묘지 지도의 뒷장에다 볼펜으로 Odd Fellows Cemetery의 주소와 이장 연도를 적어주었다.
 
 
  10만 평의 묘지 속에 외로이 묻혀 있는 태산이
 
1904년 가을 출국하기 전의 이승만과 그의 가족. 오른쪽에서 두 번째 양복 차림이 이승만, 가운데 모자 쓴 어린이가 태산.
  그렇게 해서 얻은 지도를 손에 들고도 태산이의 묘지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볼펜으로 표시해 준 ‘다이아몬드’ 섹션까지는 차를 몰고 잘 갔지만, 시야가 온통 하얗게 눈에 덮인데다 이 다이아몬드 지역도 워낙 넓었다. 그 직원이 표해 준 별표가 있는 북쪽으로 걸어가서 대충 둘러봤는데, 온 세상이 크고 작은 비석 천지였다. P 선생과 언저리의 묘비마다 하나씩 들여다 보면서 Taisanah Rhee의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날씨는 여전히 춥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를 못 내고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직전에 장례식이 끝나 묘지 흙을 덮고 있는, 묘지에서 일하는 분들을 만났다. 지도를 그들에게 건네주며 “이 묘지 찾는 것을 좀 도와달라”고 했다. 그들을 따라갔다. 가서 보니, 북쪽 끝의 철조망 앞으로 처진 생나무 울타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바로 앞쪽에 태산이(Taisanah Rhee)의 작은 묘비가 나타났다.
 
  아, 태산아! 네가 여기 있었구나. 네가 여기에 묻혀 있었구나! 화강석의 묘비에는 RHEE라는 성과 그 아래에 TAISAN AH라는 이름이 있고, 이름 양쪽에 생년인 1899와 졸년(卒年)인 1906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비석 아래 왼쪽 구석에는 팬지꽃 모양의 꽃들 속에 긴 촛대가 있었고 펼쳐진 성경책 안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묘비 장식이 있었다.
 
  갑자기 손이 허전했다. 내가 뭐라도 가져왔어야 했는데! 100년 넘게 묻혀 있었던 불쌍한 어린아이 태산이에게 줄 선물을 아무것도 준비해 가지고 오지 않았다니!
 
 
  ‘I Love You’
 
  이럴 수는 없었다. 다시 묘원 밖으로 나갔다. 헌팅턴 파크를 따라 올라가다가 오른쪽 쇼핑센터로 들어갔다. 꽃가게에 들러 별 모양의 자잘한 하얀 꽃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플라스틱 화분의 히아신스와 도톰한 꽃망울이 맺힌 수선화 화분을 샀다. 하마터면 삽이 필요한 걸 깜빡 잊을 뻔했다.
 
  다시 꽃삽을 사들고는 풍선을 사려고 가게를 돌았다. 가게마다 가지각색의 풍선들이 펄렁대고 있었지만 모두가 ‘Happy Birthday’ 글자가 박힌 것들이었다. 몇 가게를 돌다가 간신히 단 하나밖에 없는 빨간색 ‘I Love You’라고 쓰인 풍선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얼마나 풍선을 좋아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이번에 태산이 비석에 풍선을 꼭 매달아주고 싶었다. 풍선은 샀지만, 이걸 어떻게 끈으로 묘비에 매달지가 문제였다. 다시 가게들을 돌고 돌면서 풍선을 매달 깃대 모양의 막대기를 찾았다. 마지막으로 들어간 카드가게에서 15인치 정도의 나무 막대기 끝에 분홍색 쌍(雙) 하트 모양의 초콜릿을 달고 있는 막대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냥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쓸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값을 치르고는 이것저것 든 쇼핑백을 들고 다시 론뷰(Lawnview) 묘원으로 돌아갔다.
 
  2월 내내 쌓인 눈 때문에 묘지의 땅은 꽁꽁 얼어 있었다. 삽이 아닌 꽃삽으로는 팔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그냥 꽃삽 끝으로 아이들이 장난하듯 비석 앞의 땅을 콩콩 찍어가며 조금씩 파기 시작했다. 추위에 빨개진 손으로 화분의 꽃들을 땅에다 옮겨 심었다.
 
  다음은 풍선을 매달 막대기를 비석 모서리에 세우는 일이었다. 막대기를 땅속 깊이 묻지 않으면 바람을 따라 풍선이 막대기째 날아갈 수 있기 때문에 풍선 끈을 아주 짧게 하여 막대기 끝에 동여매고는 언 땅을 파고 막대기를 묻었다. 그러고 보니 종이에 싸인 쌍 하트 모양의 초콜릿은 땅 위로 솟아오른 분홍색 꽃 같았다.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태산이의 묘지에는 꽃들이 있었고 또 풍선이 펄럭이고 있었다. 나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태산아, 따사로운 봄날, 히아신스가 피고 수선화가 피어나면 풍선을 날리며 바람 따라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신나게 놀아라.”
 
 
  《워싱턴 타임스》에 실린 이승만 부자의 사진
 
1905년 6월 4일자 《워싱턴타임스》에 실린, 태산을 돌봐줄 집을 찾는다는 기사.
  태산이는 1899년에 태어나 1906년에 사망했으니, 묘지의 원(原)대장에 기록된 대로 미국 나이 일곱 살에 사망한 어린아이다. 그렇다면 태산이는 예닐곱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미국에 있는 아버지를 찾아와서 1년도 채 못 살고, 그것도 아버지와 같이 산 것이 아닌, 필라델피아의 Western Home for Children이라는 보육원을 마지막 거주지로 하고 사망했다는 것이 된다.
 
  더구나 영어를 못하니 태산이가 고아원에서 얼마나 시달렸을까. 얼굴 노란 어린아이가 어떻게 미국 아이들의 놀림을 견뎌냈을까. 때때로 밀치고 떠미는 원생들의 텃세와 조롱을 어떻게 참아냈을까. 한국 말이 하고 싶어도, 한국 음식이 먹고 싶어도, 워싱턴에 있는 아버지가 보고 싶어도, 서울의 어머니가 보고 싶어도, 할아버지가 그리워도 어린 태산이는 그저 울면서 참아냈겠지. 그랬겠지. 아, 가엾은 태산이!
 
  우남은 아들 잃은 날의 일기를 자세히 적어놓았다. 살펴보니, 2월 25일 저녁 7시에 아들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아버지는 리버데일 장로교회(Riverdale Presbyterian Church)에서 강연을 하고 있었다. 그뿐인가, 우남은 아들을 그렇게 허망하게 보내고도 며칠 뒤인 3월 4일 다시 교회에 나가서 강연을 한 기록이 있다. 날벼락처럼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처참한 회한과 애달픔을 어떻게 가누면서 교회에서 일본의 침략 야욕을 폭로하며 또 한국의 독립을 외칠 수 있었을까. 어떻게 7대 독자 혈육을 잃은 아픔을 달랠 수 있었을까.
 
  얼마 전, 우남 자료를 뒤적이다 나는 아주 색다른 태산이의 사진 하나를 찾게 되었다. 부자(父子)가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우남은 아들의 왼쪽 팔을 싸안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찰싹 붙어 안긴 사진이었다. 안쓰러워 보였다.
 
  이것은 놀랍게도 1905년 6월 4일자 《워싱턴 타임스》에 실린 것이었다. 사진 밑에는 아버지의 학업이 끝날 때까지 이 아이를 맡아줄 기독교 가정을 찾는다는 해설이 붙어 있었다. 이건 “WANTED A home in a Christian family for little Taisanah Rhee”의 광고를 신문사 측에서 이승만(Sung Mahn Rhee/나중에 Syngman Rhee로 바꿈)의 어려운 사정을 돕기 위해 일요판 신문에다 자상하게 안내해 준 기사문이었다.
 
 
  一人多役으로 허덕이던 워싱턴의 이승만
 
  뜻밖의 사진이었다. 그러고 보면, 미국에서 태산이의 짧은 삶은 문자 그대로 파란만장이었다. 이것은 필라델피아의 미세스 보이드(Mrs. Boyd) 감리교 신자에게 맡겨지기 전, 태산이의 워싱턴 흔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아버지가 아들을 기숙시키려고 미국집을 찾는 광고에 게재된 사진이었으니, 어쩌면 신문사 측에서 이 부자에게 포즈를 취하게 하고는 그 자리에서 이 사진을 찍었을지도 모른다.
 
  그해 2월 조지 워싱턴 대학에 편입한 우남은 여기저기 교회에 나가 강연하여 받는 사례금으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고 있던 처지였다. 그런데다 만리타국으로 아버지를 찾아온 어린 아들까지 돌봐야 하는 대학생 아버지가 되었으니 그 고단함이야 오죽했으랴. 하루 세 끼 밥을 챙겨 먹여야 하고, 옷을 빨아 입혀야 하고, 영어도 못하고 친구도 없는 아들과 함께 놀아주어야 하는 아버지였고, 서울 엄마와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칭얼대면 달래줘야 하는 아버지였고, 혼자 있는 아들 때문에 공부하다 말고 급하게 달려와야 하는 아버지였고, 시장에 가서 두 식구 먹을 빵도 사고, 우유도 사와야 하는 아버지였다. 그뿐만 아니라, 남들과는 달리 2월 12일 오전 11시, Gurley Memorial Church / 4월 2일 오후 6시30분, 메트로폴리탄 침례교회/ 11월 15일, Y.M.C.A. Camden, NJ / 12월 6일 오전 11시, 제일장로교회 볼티모어 등의 빽빽하게 적힌 강연 시간표를 가지고 있는 아버지였다. 그리고 공부하는 정규 대학생이었다.
 
▣ 태산이에 관한 새로운 사실들
 
  그런데 나는 이 신문기사를 읽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는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우남이 인터뷰에서 말한 태산이에 관한 것들이 내가 이때껏 알고 있었던 사실들과 다르더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태산이의 묘비에는 생년이 1899년으로 되어 있다.
  흔히 알려진 대로 태산이의 생년월일이 1898년 7월 27일이라면 음력이었을 것이므로 양력으로 환산하면 같은 해인 1898년 9월 17일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비석의 생년은 1899년이므로 태산이의 생년과 생월은 1898년 12월(음력)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필자가 직접 호적 원본을 대조하지 않았기에 여기엔 확인 여부가 남을 수 있다.
 
  2.태산이가 미국에 도착한 것은 1905년 4월이었다.
  《워싱턴 타임스》 1905년 6월 4일자 기사에 따르면,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하숙집 작은 방에서 이미 두 달을 살았다고 했다. 태산이가 프랭클린학교(Franklin school)의 정규학생으로 2개월을 지낸 뒤에 《워싱턴 타임스》 기자와 인터뷰를 하였다면, 태산이는 아마 4월쯤에 워싱턴에 도착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러니까 우남이 조지 워싱턴 대학의 대학생이 된 지 두 달 만에 아들이 찾아왔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Taisanah의 이름이 우남의 일기 Log Book of S.R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1905년 6월 4일자이다. 그러므로 더러의 역사학자들은 이 일자를 태산이가 미국에 온 날짜라고 책에 적고 있지만, 이 6월 4일은 우남이 태산이의 기독교 가정을 찾는 광고가 신문에 나간 날짜이고, 우남의 일기에 의하면 저녁에 기숙할 집의 Mr. Harbough가 태산이를 데리러 온 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알려진 대로 태산이는 미국 와서 8개월 만에 죽은 것이 아니라, 11개월 만에 사망한 것이라는 계산이 나오게 된다.
 
  3.태산이를 미국에 데리고 온 사람은 우남의 친구인 Peung Yang(풍양인지 평양인지 불분명)에서 온 이인흥(In Heung Lee)과 이관용(kwan Young Lee)이었다.
  대개 태산이를 우남에게 데려다준 사람은 우남의 옥중 동지인 박용만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남은 이인흥과 이관용 두 사람이 태산이를 데려왔다고 기자에게 말하였다.
 
  다시 가본 묘지에는 히아신스와 수선화의 싹이 자라고
 
  이런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어린 아들을 기독교 가정을 찾아 맡겨야만 했던 그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어린 일곱 살짜리 아들이 미국에 와서 채 일 년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떴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우남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태산이가 언젠가 조국의 기독교 선교사가 되어 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데에 공헌하기를 바란 아버지였다.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태산이가 기독교 가정에 입주하기를 바란 것 또한 미국 가정에서 영어를 빨리 습득하도록 하기 위한, 교육이라는 것에 그 바탕을 두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기자에게 “태산이는 이미 영어 단어도 많이 알고 있으며, 총명하고 활발하고 강한 아이로 자신의 일은 자신이 처리할 수 있는 아이”라면서 “여름 동안만이라도 태산이를 돌봐줄 기독교 가정을 찾는다”고 부연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우남은 그해 8월 4일, 윤병구 목사와 함께 한국 역사상 외교의 첫발이라고 말할 수 있는 뉴욕주 롱 아일랜드(Long Island) 오이스터 베이(Oyster Bay)의 백악관 여름 별장에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만나는 일을 해냈다. 비록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미국 온 지 일 년도 채 안 된 한국인 대학생이 미국의 대통령을 만난 일이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같은 유명한 신문 외에도 여러 신문에 기사화되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한국 근현대사에 기록할 만한 것이다.
 
  나라를 잃게 되는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우남이 독립을 지키려고 동서남북으로 뛰고 있을 때, 어린 아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가 “미국이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도와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을 때에 어린 아들은 하숙집에서 혼자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필부의 아버지가 아니라, 공부하는 아버지, 강연하는 아버지, 나라 찾으려고 동분서주하는 아버지이기 때문에, 생각다 못하여 아들이 기숙할 기독교 가정을 찾을 수밖에 없었음을, 우리는 여기에서 이해하게 된다. 가슴이 아파 온다.
 
  태산이를 기숙시키고자 했던 이 1905년의 옛 광고문 기사를 읽고 나니, 워싱턴으로 필라델피아로 전전하며 살다간 태산이의 일곱 살 생애가 애처로웠다. 젖어드는 가슴에 작년 성묘 때, 태산이 묘비 앞에 심어놓은 히아신스와 수선화가 어찌되었는지 궁금했다. 나는 P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봄 기운도 이는 듯하니 강 건너로 바람 쐬러 가지 않겠느냐고.
 
  2012년 3월 날씨는 포근하고 청명했다. 론뷰 태산이의 묘지에는 작년 심어놓은 히아신스와 수선화의 파란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난 장미 다발을 비석 앞에 놓으면서 나도 모르게 “태산아!”라고 불렀다. 디프테리아의 고열에 떨다가 아무도 없는 하얀 병실에서 혼자 숨을 거둔 가엾은 태산아! 어린 네가 겪었을 아픔과 무서움과 외로움을 생각할 때마다 살아생전 몰래 숨어서 처절하게 가슴으로 흐느껴 울었을 아버지의 비통함을 너는 알기나 할까. 오늘은 정지용의 시 ‘유리창’을 네게 주고 싶구나.
 
  유리(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山)새처럼 날아갔구나! ⊙
조회 : 13932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003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도서출간 배너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