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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적 문제제기

‘대마도는 한국 땅’ 지도 발견

글 : 김상훈  관동대 학군단장·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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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1861~1862년 오가사와라 영유권 분쟁 당시, 하야시 시헤이의 <삼국접양지도>(프랑스어판)를 제시해 오가사와라가 일본영토임을 인정받았다. 그런데 미국ㆍ영국 등 열강으로부터 공인받은 이 지도에 대마도는 한국땅으로 되어 있다

金尙勳
⊙ 53세. 육군사관학교(39기) 졸업.
⊙ 대대장·연대장·참모장, 육사 기획처장·군사훈련처장 역임. 現 관동대 학군단장.
⊙ 논문 : <이승만의 대마도 반환요구> <국제사회가 인정한 조선의 대마도 영유권에 관한 연구> 등.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요구를 보도한 1949년 1월 8일자 신문.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건국 사흘 뒤인 1948년 8월 18일 첫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일본에 대마도(對馬島)를 한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는 상도(上島)와 하도(下島)의 두 섬으로 되어 한일 양국의 중간에 위치한 우리 영토인데 350년 전 일본이 탈취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듬해 1월 8일 연두기자회견에서도 이 대통령은 “일본의 배상문제는 임진왜란 시부터 기산(起算)해야 한다”면서 대마도 문제를 다시 거론했다.
 
  “대마도가 우리 섬이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350년 전 일본인들이 그 섬에 침입하여 와 도민들이 민병을 일으켜 일본인과 싸웠던 것이다. 그 역사적 증거는 도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마도의 여러 곳에 건립했던 비석을 일본인들이 뽑아다가 동경박물관에 갖다둔 것으로도 넉넉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비석도 찾아올 생각이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1949년 12월 31일 대통령 연말기자회견에서도 이 대통령은 거듭 “대마도 반환은 우리의 실지(失地)를 회복하는 것”이라면서 “대마도 문제는 대일 강화회의 석상에서 해결할 수 있으며, 일본인이 아무리 주장해도 역사는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이러한 주장은 얼마나 근거가 있는 것일까?
 
 
  오가사와라 분쟁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에 주목한 필자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지도를 하나 발견했다. 일본 에도(江戶)시대의 학자 하야시 시헤이(林子平· 1738~1793년)가 작성한 <삼국접양지도(三國接壤地圖)>(프랑스어판)가 그것이다.
 
  하야시 시헤이가 작성한 <삼국접양지도>와 그 해설서인 <삼국통람도설(三國通覽圖說)>은 일본과 그 주위 3국인 조선국, 류큐국(琉球國·오키나와), 에조국(蝦夷國·홋카이도)과 무인도(無人島)였던 오가사와라제도(小笠原諸島·일본 남쪽 1000km 지점에 있는 8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태평양상의 제도)에 대한 지도와 해설을 담고 있다. 이것을 독일인 율리우스 클라프로트(Julius Klaproth)가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 <삼국접양지도> 프랑스어판이다.
 
  일본은 1861년 2월과 1862년 4월 미국의 해리스(Harris) 대사, 영국의 알코크(Alcock) 대사 등 당시 열강(列强)의 대사들에게 <삼국접양지도>(프랑스어판)를 제시해 오가사와라제도가 일본 영토임을 인정받았다.
 
  일본을 강제 개항한 미 해군제독 페리(M.Perry)는 1853년 미국인 새보리(Savory)와 몇 명의 외국인이 살고 있을 뿐 무인도나 다름없던 오가사와라제도에 미국 포경선(捕鯨船)을 위한 저탄장(貯炭場)을 설치해 사실상 식민지화했다.
 
  하지만 페리는 일본과 개항협상 시에는 이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오가사와라제도에 별 관심 없던 일본 막부(幕府) 정권에 공연히 이 사실을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860년 미국을 방문한 사절단을 통해 페리가 미 상원에 제출한 <일본원정기>(Narrative of Tthe Expedition of an America Squadron)를 입수한 막부 정권은 비로소 오가사와라제도에 대한 미국의 영토욕을 알게 됐다.
 
  막부는 다나베 다이치(田邊太一)를 오가사와라제도에 보내 탐사하게 했다(후일 초대 프랑스주재 일본대사, 외무대신 등을 지낸 다나베는 외무성 국장 시절 “마쓰시마(松島·독도. 당시에는 일본이 독도를 다케시마가 아니라 마쓰시마라고 했음)는 일본인이 명명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조선의 울릉도에 속하는 우산(于山)”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다나베로부터 “오가사와라는 자원(資源)의 보고(寶庫)”라는 보고를 받은 막부는 이주민단을 편성해 오가사와라에 이주시키는 한편 오가사와라가 자국의 영토임을 증명할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열강, <삼국접양지도> 프랑스어판 인정
 
대마도, 독도가 모두 우리 영토로 기술된 국제법상 공인지도인 <삼국접양지도> 프랑스어판, 1832년 클라프로트 제작.
  하야시 시헤이의 <삼국접양지도> 일본어판을 발견한 막부는 이 지도를 제시하면서 “오가사와라라는 명칭은 이 섬을 발견한 일본인 오가사와라(小笠原)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면서 열강을 설득했다.
 
  하지만 미국의 해리스, 영국의 알코크 대사는 “일본어 지도는 국제법적 공인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막부는 당시 유럽 제일의 동양학자였던 클라프로트가 번역한 프랑스어판 <삼국접양지도>를 제시해, 오가사와라제도에 대한 영유권을 공인받았다.
 
  <삼국접양지도> 프랑스어판의 가치에 대해 호사카 유지 교수(세종대 독도연구센터 소장)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에 개국을 요구한 미국의 페리는, 오가사와라를 미국령(領)으로 할 목적으로 이미 미국인을 군도에 살게 하였고, 이 사실을 들어 막부에 오가사와라를 미국령으로 인정하도록 요구했다.
 
  이에 대해 막부 측은, 하야시 시헤이의 <삼국통람도설>과 그 삽입지도인 <삼국통람여지노정전도(三國通覽與地路程全圖·삼국접양지도)>를 제시했다. 이를 미국이 인정하지 않자, 막부는 그 프랑스어판을 제시하여 겨우 미국의 영유권 주장을 물리쳤다. 이와 같이 하야시 시헤이의 <삼국통람도설>과 그 삽입지도는 오가사와라의 영유권을 결정하는 사료(史料)로서 역사적으로 일본의 막부에 의해 활용되었던 것이다.
 
  하야시 시헤이라는 한 개인에 의해 작성된 지도(삼국접양지도)와 그 해설서(삼국통람도설)이긴 하지만, 막부의 공인지도로서 사용된 이상, 그 시점부터 그것은 영유권을 주장한 막부의 공식지도가 된 것이다.”
 
 
  일본 정부, 85년간 공식 지도로 활용
 
<삼국접양지도>를 제작한 하야시 시헤이의 동상.
  호사카 유지 교수는 이 지도에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영토로 표기된 것과 관련하여 “결론적으로 오가사와라가 일본영토인 점을 국제법적으로 인정한 하야시 시헤이의 <삼국통람도설>과 그 삽입지도(삼국접양지도)는, 동시에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국제법적으로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야시 시헤이의 <삼국통람도설>과 <삼국통람여지노정전도(삼국접양지도)>만으로도 독도의 영토문제는 해결된다”고 말한다. (《三國通覽與地路程全圖》と‘伊能島’の 中の 獨島. 독도 창간호, 영남대 독도연구소. 2008)
 
  같은 논리로, <삼국접양지도>에 대마도가 조선영토로 표기되어 있다면 대마도 역시 한국영토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런데 호사카 유지 교수가 독도를 한국영토로 기록하고 있다고 언론에 공개한 <삼국접양지도>를 보면, 대마도는 일본영토로 표기되어 있다. 반면에 클라프로트가 1832년 제작했고, 오가사와라 영유권 분쟁 당시 미국, 영국 대사에게 제시했던 <삼국접양지도> 프랑스어판 지도를 보면, 대마도는 한반도, 울릉도, 독도와 마찬가지로 노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일본은 파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필자는 2008년 일본 도호쿠(東北)대에서 <삼국통람도설>에 <삼국접양지도>와 함께 수록된 <조선팔도지도> 원본도 찾아냈다. 이 지도에도 대마도는 조선영토로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에는 하야시 시헤이의 서명도 들어 있다. 필자는 일본 정부가 이 지도를 1788년부터 1873년 10월까지 최소한 85년간 한일(韓日) 양국 영토를 식별하는 공식지도로 활용해 온 기록도 발견했다.
 
  이에 비추어볼 때, 미 하와이대나 일본 와세다대에서 소장하고 있는, 대마도가 일본령으로 표시되어 있는 <조선팔도지도>는 모조품이거나 필사본인 것으로 보인다.
 
 
 
대마도 관련 역사왜곡

 
일본 도호쿠대(東北大)에서 발견한 <조선팔도지도>. 대마도가 우리 영토로 표시되어 있고, 하야시 시헤이의 서명이 오른쪽 아래 있다.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은 대마도가 한국영토임을 입증하는 자료들을 왜곡, 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오가사와라 분쟁 당시 활약했던 다나베는 1863년 초대 주불(駐佛) 일본대사가 된다. 7개월 후 일본으로 귀국한 그는 1867년 다시 주불대사가 된다. 이는 1868년 대마도의 일본 귀속을 앞두고 대마도가 한국영토로 표기된 클라프로트의 지도를 수집, 폐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1897 ~1945)는 《근대 일본-조선관계의 연구(近代 日鮮關係の 硏究)》 등을 저술한 일본의 사학자이다. 일본인 사학자 하라다 사이에쿠(原田 榮)에 의하면, 그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으로 활동하던 1923년 7월 일본인 사학자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와 함께 대마도 현지로 건너가서 한국 관련 문서 6만6469매, 고기록류 3576권, 고지도 36매, 고서류 18점, 그림 53점 등을 은폐하거나 태워버렸다고 한다.
 
  다보하시의 《근대 일본-조선관계의 연구》는 1940년 출판됐으나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다가 1970년 다시 발행됐다. 그는 이 논문에서 대마도가 일본에 귀속된 후의 대마도 관련사항을 전체 내용의 1/3 분량으로 장황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는 이 논문에서 대마도주(島主)가 일본의 명을 받아 조선과 접촉하였음을 은연중에 강조하여 일본의 속지(屬地)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다보하시는 1928년 <이삭 틸싱크의 일본연구(Issac Titsinghの 日本硏究')>라는 논문도 썼다. 이삭 틸싱크(1745 ~1812)는 일본에 와 있던 네덜란드 의사이자 학자로 하야시 시헤이의 <삼국접양지도> 원본 1부를 1806년 유럽으로 가져가 클라프로트에게 전해지도록 한 사람이다. 이는 다보하시가 대마도가 한국영토로 기록된 <삼국접양지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대마도 반환요구를 한 데 대해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라는 미국 요구에 맞서기 위한 지렛대로 대마도 카드를 뽑아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필자는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의 바탕 위에서 그러한 주장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를 접한 일본 정부의 반응은 위기감과 체념이었다고 한다(2008년 7월3일 일본 NHK 방영). 일본 정부는 맥아더 연합군 사령관에게 대마도 확보를 위해 필사적으로 로비를 했다고 한다.
 
  1949년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가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를 펴내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일본이 지배했다는 주장을 내놓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니 대마도는 당연히 일본령이라고 인식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판단이 가능한 것이다.
 
  일본은 1950년 1월 17일에는 500만 달러를 투입하는 대마도 개발계획을 발표했다. 2일 후에는 일본 수상이 히로히토 천황에게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에 대해 보고했다.
 
  하지만 6·25가 터지면서 상황은 반전(反轉)됐다. 국가존망의 전쟁 상황 속에서 더 이상 대마도 영유권 문제를 강력하게 제기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평화선’은 대마도 포기 아니다
 
  오히려 트리그브 리 유엔사무총장이 한국전 휴전 문제를 언급한 직후인 1951년 3월 일본은 독도 영유권 주장을 제기하면서 독도 주변에서 어업활동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이는 휴전이 되면 이승만 대통령이 대마도 반환 문제를 다시 주장하고 나올 것에 대비해 성동격서(聲東擊西)격으로 독도를 물고 늘어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1월 18일 ‘평화선’을 선포(대한민국 국무원 고시 제14호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함으로써 이에 맞섰다. 이는 평화선을 설정해서 독도 문제를 먼저 종결짓기 위한 것이었다.
 
  일부에서는 ‘이승만 라인(평화선)’은 이승만 대통령이 대마도 반환 요구를 포기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평화선’ 안에 독도는 포함시켰지만, 대마도는 제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평화선’을 선언하면서 ‘이 경계선은 장래에 규명될 새로운 발견, 연구, 또는 권익의 출현에 인하여 발생하는 신 정세에 맞추어 수정할 수 있음을 겸하여 선언한다’고 밝혔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 반환요구를 하면서 “한일 간에는 오래된 명백한 해상경계선이 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말한 ‘명백한 해상경계선’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앞에서의 연구결과 그리고 필자가 소유하고 있는 지도 원본를 살펴보건대, 이 대통령이 언급한 ‘한일 간의 해상 경계선’은 현해탄(玄海灘) 혹은 현계탄(겐카이나다·玄界灘)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현해탄은 무슨 뜻인가? ‘현(玄)’이라는 것은 고대 동북아시아에서 공통적으로 동서남북 4방향 중 북쪽을 의미한다. ‘현해탄’이나 ‘현계탄’은 ‘북쪽 바다’ 내지 “북쪽 경계인 바다”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 한일 간의 해상 경계선은 부산과 대마도 사이가 아니라, 대마도 남단 이키섬과 일본 본토 사이가 된다.
 
 
 
국제법적 해석

 
  대마도에 대해서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다. 일제시대에 일본이 수많은 관련 자료를 은폐하거나 파기해 버렸음에도 우리 주변의 고지도나 자료를 조금만 살펴보면 한일병합 전까지 우리 선조들이 대마도를 우리 영토로 기록하고 표기한 자료는 너무 많다(참조 : 이찬, 《우리 옛지도》, 서울역사박물관, 2003). 우리 학자들의 선행연구도 상당하다. 독도를 우리 영토로 표기한 자료보다 대마도를 우리 영토로 표기한 자료가 더 많은 것을 알면 놀라게 될 것이다.
 
  국제법상의 영토취득 권원에는 선점(Occupation), 공인(Recognition), 시효(Prescription), 실효적 지배 등이 있다. 대마도의 경우 19세기까지 한일 양국 공히 선점(Occupation)에 대한 증거는 모두 보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868년 이후 일본이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일본의 실효적 지배 6년 전인 1862년 일본 스스로 <삼국접양지도>를 통해 여러 외국에 대마도가 일본 땅이 아님을 공인(Recognition)했다.
 
  국제법에 정통한 이한기(李漢基) 박사(1917~1995, 서울대 법대학장, 국무총리서리 역임)의 논문(<한국의 영토, -영토취득에 관한 국제법적 연구> , 1969, 서울대 출판부)에 따르면, “일국(一國)의 영토주권에 대한 타국의 공인(Recognition)은 공인한 타국이 장래 그 지역의 지배권을 다투는 것을 스스로 금하는 이른바 금반언(禁反言 Estoppel)의 효과를 발생한다”고 한다.
 
  이한기 박사의 논문은 이러한 예로 과거 노르웨이와 덴마크 간의 그린란드 영토 분쟁을 언급하고 있다. “노르웨이가 덴마크보다 그린란드에서 가깝고 접근성도 좋아 소유권을 주장했으나 과거 영토 협상 시 덴마크 영토로 공인했었기 때문에 이것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판정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대마도 반환해야
 
  대마도가 한국땅임을 국제사회가 인정한 그 원본 물증이 발견된 이상, ‘일본이 불법적으로 삼킨 우리 영토를 반환해야 한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주장은 국제법적으로도 검토가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현 일본의 실효지배는 그 근거를 잃게 되는 것이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당시 대마도가 일본령으로 인정됐지만, 여기서 오가사와라는 일본령에 누락되어 미국의 관리에 들어갔다. 그러나 미국은 1862년의 국제 합의(<삼국접양지도> 프랑스어판)를 존중, 국제적신의(Friendship)이라는 명분 아래 1968년 오가사와라를 일본에 조건 없이 반환하였다.
 
  그렇다면, 일본도 동 조약에서 우리 영토로부터 누락된 대마도를 1862년 합의(<삼국접양지도> 프랑스어판)를 존중, 한국에 반환하는 것이 국제조약과 국제적 신의에 입각해서도 합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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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국사랑    (2011-11-13)     수정   삭제 찬성 : 305   반대 : 120
좋은 글을 접하고 나니 너무나 기쁩니다.
독도는 당연히 우리땅이며, 대마도도 분명 우리땅입니다.
주장하신 학술적 근거가 국제적 영향력을 발휘하여
현실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민족    (2011-11-10)     수정   삭제 찬성 : 159   반대 : 93
아직까지리승만대통령만한태통령없네일본에대고하이속대있는말한마디도못하는
권력자들
  lcj0413    (2011-11-01)     수정   삭제 찬성 : 153   반대 : 94
내가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이니까1947년경 할아버지께서 대마도는 우리나라땅 이라고 말씀을 많이 하시어 지금까지 나혼자는 일본 ㄴ 들이 독도는 자기들땅이라고할때 항상 나는 대마도를 우리땅이라고 내노라고 말하고싶었는데 내속에있는 응어리가 한70년 만에 세상으로나온 점 많이 느저지만 지금이라도 세상에알려지는게 다행이라 생각 함니다 우리 대마도 찿음시다
  antique    (2011-10-20)     수정   삭제 찬성 : 185   반대 : 186
대마도는 한국땅 대마도를 반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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