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 대통령, 내 손 덥석 잡으며 “종합제철소 부지로 어디가 적당하다고 보나” 질문
⊙ 삼성 이병철 회장, “너무 고집부려서야 되겠는가”라며 비료사업 지지부진에 불만 터뜨려
⊙ 농업국가가 공업화투자로 경제개발을 추진한 것은 상당한 혜안
⊙ 삼성 이병철 회장, “너무 고집부려서야 되겠는가”라며 비료사업 지지부진에 불만 터뜨려
⊙ 농업국가가 공업화투자로 경제개발을 추진한 것은 상당한 혜안
- 1967년 종합제철소 부지선정 당시 김종필 공화당 의장,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인 서정귀씨는 정치적 입김으로 각기 다른 지역을 밀고 있었다. 왼쪽부터 김종필, 이후락, 서정귀 씨.
지금의 포스코(포항제철)가 건설되는 과정에서 입지선정 문제를 두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담당자를 시켜 직접 연극에 가담할 만큼 모종의 작전을 벌였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때의 연극이 아니었다면, 아마 포스코는 포항 바닷가에 세워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출범 당시의 이름도 포항제철이 아니라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당시 경제기획원에 근무하면서 박 대통령과 장기영(張基榮) 부총리를 보필하며 개발사업에 깊이 관여했던 황병태(黃秉泰)씨가 그 연극의 주연배우였다. 그는 집필 중인 회고록에서 그런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거의 마무리를 앞두고 있는 원고 더미에서 그 부분을 찾아 읽어 내려가는 그의 목소리가 자못 흥분된 듯하다. 작전을 꾸미기까지의 전 단계 부분이다.
“… 우리를 태운 차가 용산을 지나 한강다리를 지날 때였다. 그제야 박 대통령이 의중을 드러냈다. 내 손을 덥석 잡으며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솔직히 답변을 해주게. 정말로 중대한 문제야’라며 말문을 연 것이다. 표정도 진지했다. 박 대통령은 내 눈을 직시하면서 ‘종합제철소 부지로 어디가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휘하의 실력자들이 서로 나서 연고지를 주장하는 바람에 본인으로서도 입장이 불편했을 것이 틀림없다. 내 손을 움켜쥔 그의 손아귀에서 힘이 느껴졌다.”
때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제2차 단계로 접어들었던 1967년 6월쯤이었다. 종합제철소 사업계획이 무르익어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입지선정 문제가 불거진 것이었다. 종합제철추진단이 결성되어 대한중석 사장이던 박태준(朴泰俊)씨가 추진단장을 맡아 실무작업을 진행해 나가던 상황이었기에 조만간 입지를 선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황병태씨는 기획원의 공공차관 과장에서 경제협력국장으로 막 승진해 있었다.
김종필, 이후락, 서정귀씨가 각기 다른 지역 밀어
앞서의 회고록의 장면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종합제철소 입지를 선정하는 단계에서 쟁쟁한 여러 핵심인사가 후보지역을 추천했고, 그 후보지들에 대한 평가를 들을 겸해서 박 대통령이 실무 책임자인 황 국장만을 승용차에 태우고 시내 드라이브에 나섰던 것이다. 가랑비가 내리던 어느 날, 대통령은 공식 관용차가 아닌 벤츠 승용차를 타고, 경호원도 없이 수행비서만 달랑 앞자리에 태운 채 비밀 외출을 나선 것이었다. 뒤에서는 장기영 부총리의 지프가 열심히 쫓아오고 있었다.
“그때 종합제철소의 후보지로 올랐던 지역은 충남 서천군의 비인, 경남의 울산과 삼천포 등 세 곳이었고 정작 포항은 빠져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40년 전의 일이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쳤던 문제를 박 대통령이 나름 작전을 꾸며 쾌도난마식으로 처리한 것이었으니, 거기에 관여했던 당사자의 한 사람으로서 새롭게 감회가 느껴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문제는 이들 후보지역 추천에 정치적 입김이 다분히 작용했다는 사실이다. 입지의 경제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만, 경제적 타당성보다는 추천 인사들의 지역 연고가 훨씬 앞서 있었다. 역대 정부에서 대규모 지역개발 공약이 나올 때마다 논란이 빚어지던 실력자 연고 위주의 정책 움직임이 이미 경제개발 계획 추진 과정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던 것이다.
비인은 당시 5·16혁명의 중심세력들로 구성된 공화당의 김종필(金鍾泌) 의장과 김용태(金龍泰) 원내총무가 밀고 있었다. 이들의 고향이 충남이었다. 울산 역시 이 지역 출신인 이후락(李厚洛) 청와대 비서실장이 배후에 있었다. 삼천포는 박 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동창인 서정귀(徐廷貴)씨가 강력히 지원하고 있었는데, 그의 고향이 바로 삼천포였다. 이들은 모두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박 대통령과 각별한 관계였다.
물론 이들 각 지역이 후보지로서 나름 장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비인은 서해안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으므로 종합제철소 건립에 따른 파급효과가 전국적으로 골고루 미칠 것으로 여겨졌고, 울산은 이미 다른 공장들이 들어서고 있었으므로 제철소가 추가로 들어선다면 경제적인 상승효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삼천포는 기존의 항만 시설을 확장하는 식으로 제철공장 부지를 마련할 경우 개발비용이 적게 들어간다는 것이 장점으로 꼽히고 있었다.
이렇게 입지를 둘러싸고 난타전이 벌어지자 기획원과 상공부, 종합제철추진단 주변의 분위기는 단번에 경색되고 말았다. 누구라도 어느 한쪽을 편들어 섣불리 생색을 내려고 했다가는 자칫 모두에게 인심만 잃게 되는 애매한 판국인 것이었다. 박 대통령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부분도 바로 이런 과열된 분위기였다.
하지만 실무진 차원의 판단으로는 이들 세 곳 모두 문제가 있었다. 비인은 바다의 수심이 얕아 화물선의 출입이 자유롭지 않다는 점에서, 삼천포는 연관공장이나 야적장을 마련할 만한 배후지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적합하지 않았다. 울산은 이미 다른 공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상태여서 대단위 부지를 필요로 하는 종합제철 사업에서는 터를 잡기가 곤란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정유, 비료공장과 같은 기간산업체들과 한데 있어야 한다는 위험부담도 따랐다.
“자네 나하고 연극 좀 하세”
황 국장은 개인적으로 포항을 최적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종합제철 사업과 관련해 국내 곳곳을 돌아보며 조사작업을 벌였던 미국의 밴플리트 조사단도 포항을 적격지로 추천했었다. 6·25 당시 미8군 사령관으로 작전을 지휘했던 밴플리트 장군이 육군대장으로 예편한 뒤 웨스팅하우스의 고문을 맡으면서 미국 기업의 대표들로 방한 투자단을 구성해 종합제철소 예비조사를 실시했던 것이다. 포항은 바다가 깊어 추가로 준설을 하지 않아도 10만 톤급의 화물선이 드나들 수 있었던 데다 배후지도 넓었다. 그가 별도로 건설부의 항만관계 실무자들과 협의하면서 얻은 결론도 비슷했다.
“그래서 그때 승용차 안에서 박 대통령의 질문에 포항이 최적지라고 말씀을 드렸지요. 실제로, 후보지 논란이 제기되면서 장기영 부총리와 함께 헬기를 타고 비인과 삼천포, 울산 세 군데를 차례로 둘러보았습니다만 모두 적합하지가 않았지요. 망설이지 않고 ‘제 생각으로는 포항입니다’라고 얘기했더니, 무척 놀라신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그의 답변에 박 대통령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자신의 측근들이 추천한 후보지가 아니라 다른 지역을 추천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연이은 그의 설명을 듣고는 박 대통령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계의 실력자들이 저마다 후보지를 지원하는 상황에서 다른 지역을 내세웠다가는 공연히 미운털이 박힐 것이라는 사정에 대해서도 이해한 듯했다.
연극은 그래서 나온 방안이었다. 박 대통령은 그에게 “자네, 나하고 연극 좀 하세”라며 즉석에서 각본을 제시했다. 그달의 경제동향 보고회가 열리는 자리에서 앞으로 불러 세울 터이니 종합제철소의 입지 문제에 대해 서슴없이 발표하라는 주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연극이었다.
그날의 각본은 뒤따라오던 장기영 부총리에게도 비밀로 부쳐졌다. 연출자인 박 대통령의 당부 사항이기도 했다. 그때 승용차 안에서 그렇게 얘기를 끝내고 청와대로 다시 돌아와 커피를 마시는 자리에서도 박 대통령은 “모처럼 시내구경 잘했다”며 짐짓 딴청을 부렸고, 장 부총리는 영문도 모른 채 “오늘처럼 가랑비가 촉촉하게 내리면 올해 벼농사가 잘될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인다”며 맞장구를 쳤다. 그 자체가 며칠 뒤에 연출될 연극의 예행연습이었던 셈이다.
드디어 열흘쯤 뒤에 경제동향 보고회가 열렸다. 브리핑을 맡은 이희일(李熺逸) 기획국장이 전반적인 경제 움직임에 대한 보고를 마치자 박 대통령이 고개를 뒤쪽으로 돌리며 “기획원의 황병태 국장, 여기에 와 있는가”라며 그를 큰 목소리로 호명했다. 연극의 서막이었다. 박 대통령은 그를 앞으로 불러 세우고는 종합제철소 계획과 입지 문제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며칠 전, 차 안에서 짠 각본 그대로였다.
그는 비인과 삼천포, 울산이 후보지로 올라 있으며 각각의 장점과 단점은 이러이러하다고 보고를 해나갔다. 그러고는 개인적인 의견까지 곁들여 이들 지역보다는 포항이 훨씬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결론까지 제시했다. 다른 참석자들로서는 예기치 못했던 답변이 터져나온 것이었다. 장 부총리와 박충훈(朴忠勳) 상공장관의 표정이 단번에 변했고, 공화당 구태회(具泰會) 정책의장도 놀란 모습이었다. 마침 김종필 당의장은 다른 일로 인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연극이라는 게 쉬우면서도 어렵고, 어려우면서도 쉽다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야 아무렇지도 않을 답변인데, 왜 그렇게 떨리고 식은땀이 나던지.” 그는 당시 회의 참석자들의 반응이 떠올랐는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박 대통령, “황 국장 말이 맞는 것 같다”
연극의 마무리는 박 대통령 자신이 지었다. 그의 설명이 끝나자 “종합제철 입지를 두고 말들이 많은 모양인데 내 생각에는 지금 황 국장 얘기가 맞는 것 같다. 그러니 별 의견이 없으면 포항으로 결정하는 게 어떻겠는가”라며 즉석에서 결론을 유도했다. 생각이야 많았겠지만 누구라도 나서서 감히 이견을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박정희 연출, 황병태 주연의 단막극을 통해 이렇게 종합제철소의 입지는 포항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이 같은 결정을 두고 현재까지 이렇다 할 뒷말이 없으니, 연극 자체로도 충분히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꼭 입지 덕분만은 아니겠으나, 지금의 포스코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위치를 굳히고 있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경제적 타당성까지 입증받은 셈이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연극을 꾸미면서까지 경제개발 계획을 차질없이 이끌어가려던 박 대통령의 의지가 정말로 대단했다”며 당시의 상황을 평가했다. 박 대통령이 측근들의 이해관계나 개인적인 인정에 흔들림 없이 원칙적인 입장에서 개발사업을 추진했다는 얘기다. 거기에는 오로지 경제적인 판단 기준만 있었을 뿐이다. 경제계획이 성공할 수 있었던 하나의 비결이기도 하다.
박 대통령의 이러한 의지와 원칙은 소양강댐을 건설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소양강댐은 홍수가 범람하던 한강의 치수(治水) 관리를 위해 계획된 다목적댐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일본 미쓰비시(三菱)로부터 발전시설을 들여와 설치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게 된다.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 정권의 실세들이 내부적으로 그렇게 계획을 변경하고 있었다. 시기적으로 앞서의 종합제철소 입지를 결정할 때보다 서너 달 전의 일이다.
국내의 전력사정이 원활치 못해 일어난 논란이었다. 한국전력이 이러한 계획변경 추진의 진원지였다. 특히 당시 박영준(朴英俊) 사장은 5·16 직후 일선 사단장에서 한국전력으로 곧바로 옮겨 앉은 사실이 말해주듯 실세로 꼽히고 있었다. 청와대 이후락 비서실장도 이런 의견에 동조하고 있었고, 장기영 부총리도 “소양강댐에 발전소를 지으면 발전과 수자원 관리를 함께할 수 있어 일거양득 아니냐”며 발전 위주의 건설에 힘을 싣고 있었다.
그러나 이 방안은 홍수를 관리하고 갈수기에 대비해 수자원을 확보토록 한다는 건설부의 원래 취지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홍수 관리를 위한 다목적댐은 수량의 확보를 위해 제방을 높여 고(高)댐으로 쌓아야 한다. 하지만 전력 생산을 위한 댐은 저(低)댐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굳이 댐을 높일 이유가 없었다. 몇백 년을 내다보고 계획했던 국토정비 계획의 일환인 소양강댐 건설작업이 전력 공급이라는 눈앞의 필요성 때문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주원(朱源) 장관을 비롯한 건설부 간부들이 원래 방안대로 관철시키려 고군분투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때도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섰습니다. 소양강댐 건설을 둘러싼 시끄러운 논란이 대통령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갔지요. 이미 댐 공사장 주변의 산허리를 허물고 덤프트럭이 접근할 수 있도록 주변도로를 내고 있었지만 정작 댐 자체에 대해서는 결론이 나지 않고 있었으니 시간적으로도 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연극이 아니라 저녁 회식을 통해 자연스럽게 결론을 유도하는 방식이었다. 박 대통령이 청와대에 회식자리를 마련하여 관계부처 장관들을 불러모은 것이다. 장 부총리를 비롯해 서봉균(徐奉均) 재무장관, 주원 건설장관, 그리고 김학렬(金鶴烈) 경제수석 등이 참석 멤버였다. 황 국장도 신동관(申東寬) 대통령수행비서로부터 연락을 받고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하지만 소양강댐 업무는 어디까지나 건설부 소관이었고 기획원은 거의 관련이 없었다. 관련이 있다면 소양강댐이 한일협정에 따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건설된다는 점에서 자금조달 문제에만 관여될 뿐이었다. “장관들의 회식자리에 신참 국장인데다 업무와는 별로 관계도 없던 나를 참석시킨 것이었으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며 그는 당시의 소감을 털어놓았다.
그날 저녁의 회식 메뉴는 소금에 절인 청어알 요리로,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즈노코(數の子)라는 것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다시마와 순무절임, 검은콩 따위를 곁들여 새해 아침에 즐겨 먹는 음식이다. 청어가 알을 많이 낳기 때문에 자손들이 그처럼 번창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지닌다. 주일 대사관에서 청어알 요리를 특별히 마련해 보낸 기회에 회식을 겸하여 소양강댐 관계장관 회의가 소집된 것이었다.
소양강댐도 원래 건설부안으로 밀어붙여
회식이 끝나자 드디어 박 대통령이 본론을 꺼냈다. 본론을 꺼냈다기보다는 곧바로 그에게 개인적인 견해를 물었던 것이다. “요새 소양강댐을 놓고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망설이지 말고 의견을 말해 주게나”라며 답변을 요구했다. 그 대답을 듣기 위해 그를 회식자리에 부른 것이었다. 역시 소양강댐을 다목적용 고댐으로 만드느냐, 아니면 발전용 저댐으로 만드느냐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렇게 되자 분위기는 단번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그의 답변이 이어졌다. “제가 아는 바로는 소양강댐은 한강 수계에서 가장 높게 계획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홍수와 한발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한 것이지요. 고댐 계획을 그대로 살려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직속 상사인 장 부총리가 발전시설의 저댐 방식을 주장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치를 살필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댐을 만들면서 처음부터 제대로 기초를 잡지 못하면 두고두고 문제가 될 것’이라는 말씀도 드렸다”고 말했다. 일단 발전설비를 설치했다가 여건이 맞지 않으면 추후에 고댐으로 만든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었는데, 그런 발상 자체가 무모하다는 생각을 밝힌 것이었다. 저댐으로 만들었다가 다시 제방을 높이는 작업 자체가 불가능하지야 않겠으나 기술적으로나 비용에 있어서나 수용하기 어려운 방안이었다.
그의 설명이 끝나자 박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어때요, 황 국장 말이 맞는 것 아니냐”며 참석자들을 두루 둘러보았다. 그 자리에서 확실히 결론을 내리겠다는 투였다. 관계부처 장관들이 참석한 자리였던 만큼 결론을 내리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여기에 김학렬 경제수석도 “고댐으로 짓는 게 올바른 선택인 것 같다”며 은근히 건설부의 입장을 거들고 나섰다. 그동안 이 문제로 억눌렸던 주원 건설부장관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박 대통령이 마지막 한마디를 더 얹으면서 논의에 종지부를 찍었다. “일본의 상업차관 업자들이 여기저기 들락거리면서 바람을 불어넣은 것 같은데 원래 건설부 방안대로 추진하는 게 좋겠다. 더 이상 재론되지 않기를 바란다.” 단호한 말투였다. 대통령 자신도 정부 내에서 자꾸 엉뚱한 얘기들이 흘러나오는 데 대해 기분이 매우 언짢았을 것이다. 그러고는 곧바로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려버렸다. 더 이상 이견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결국 이러한 결론에 따라 소양강댐은 기본설계를 거쳐 1967년 4월에 착공되었다. 댐 높이 123m, 제방길이 530m로, 흙과 돌로 구성된 사력(砂礫) 댐이다. 공사가 시작된 지 6년6개월 만인 1973년 10월에 준공되어 지금껏 한강 수계의 홍수조절에 절대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그는 “그때 소양강댐의 운명이 바뀌었다면 지금도 장마철마다 한강 수계의 홍수를 막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원칙에 투철한 박 대통령의 의지가 당시 주변의 실세라고 하는 분들에 의해 꺾이지 않은 덕분”이라고 평가했다. 적어도 박 대통령이 그 점에 있어서만큼은 충분히 존경을 받을 만하다는 것이다. 그는 장기영 부총리에 대해서도 “왕초라는 별명답게 통이 크고 처신이 대단하셨던 분”이라며 평가를 덧붙인다. 발전설비의 저댐을 바라던 자신의 뜻에 거스르는 발언으로 인해 역정을 내거나 불쾌해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얘기를 시원하게 잘했다”며 격려를 해주더라는 것이었다.
그가 박 대통령의 옆에서 직접 경험하거나 지켜본 바에 따르면 이러한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여기서 사례로 든 종합제철소 입지 선정 때의 논란이나 소양강댐의 고댐, 저댐 논란의 경우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어 마지막 도장을 찍기 직전에 결정이 철회된 경우도 없지 않았다. 대한중석 사장으로 재직하던 박태준씨가 일본으로부터 상업차관을 끌어들여 소다회 화학공장을 지으려 했을 때가 가장 극적인 경우다. 그로서는 아직 공공차관 과장일 때였다.
“담당과장이 반대하면 그렇게 해야지”
박태준씨는 일본의 종합상사인 닛쇼이와이(日商岩井)와 차관 교섭을 벌이고 있었다. 대한중석과 합작으로 소다회 공장을 짓는다는 계획이었다. 한때 대한중석의 수출 규모가 우리 전체 수출액의 50% 안팎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그의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았다. 게다가 소다회 수요가 계속 증가하고 있었으므로 누구라도 나서서 공장을 만들어야 하는 처지였다. 주무부처인 상공부도 찬성하고 있었다. 농약에서부터 조미료와 염료, 비누 제조에 이르기까지 그 용도가 다양한 것이 바로 소다회였다. 종이 공장에서의 펄프작업과 판유리 제조 과정에도 약방의 감초처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일본의 상업차관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거나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미국 국무성 국제개발처(USAID)에 요청해 놓고 있던 공공차관과의 균형관계가 문제됐던 겁니다.” 박태준씨가 추진하던 소다회 공장이 일본자금으로 세워질 경우 미국이 우리 정부에 지원하던 차관계획이 자칫 엉뚱하게 꼬일 개연성이 엿보이고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당시 동양화학이 박태준씨에 앞서 소다회 공장을 지으려고 미국에 공공차관을 요청하고 있었지만, 아직 승인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국내에서 해외 민간기업의 상업차관이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공공차관보다 2~3년 늦은 1962년쯤부터다. 그러나 도입 절차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됐기 때문에 공공차관보다는 훨씬 인기를 끌던 터였다. 현대건설도 시멘트 공장 건립을 위해 미국에 공공차관을 신청했으나 감감무소식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사이 뒤늦게 뛰어든 쌍용시멘트와 한일시멘트가 서독 폴리시우스의 상업차관을 끌어들여 공장을 건립, 시멘트 제품이 시중에 선보이기 시작했을 정도다.
그때의 상업차관은 특히 일본 자금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미쓰비시와 미쓰이, 도요, 마루베니, 이토추 등의 종합상사들이 경쟁적으로 나서서 오히려 자금을 필요로 하는 국내의 거래선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기업들이 저마다 상업차관을 끌어오게 된다면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던 비료공장 등 중화학 분야는 상대적으로 위축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는 걱정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상업차관은 공공차관보다 대체로 상환기간이 짧고 금리도 더 높은 편이어서 한꺼번에 상환 시점이 겹치기라도 한다면 자칫 외환수급 사정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우려도 없지 않았다. 당시 상업차관은 상환기간이 5년 안팎에 금리도 연 4~5% 정도가 보통이었다. 이에 비해 공공차관은 금리가 0.5~1.5%에 상환기간도 10~20년의 조건으로 결정되고 있었다.
“따라서 공공차관 실무 책임자인 나로서는 박태준씨의 소다회 공장 계획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단 미국의 결정을 기다려본 뒤에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었지요.” 특히 박태준씨가 5·16 직후 최고회의 시절 박정희 의장의 비서실장을 지낸 측근이라는 점에서 그가 일본의 상업차관을 끌어들이게 된다면 미국에 대해 우리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비칠 소지도 적지 않았다. 그것은 차관의 거래선을 일본으로 돌리겠다는 표시나 마찬가지라고 그는 염려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워싱턴에 출장을 다녀온 며칠 사이에 상황이 급속도로 진행되어 있었다. 박태준씨의 차관도입 작업이 거의 마무리되어 조만간 경제기획원의 외자도입승인위원회에 안건이 오르게 됐던 것이다. 그로서는 드디어 우려하던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그는 즉각 장 부총리에게 이 문제를 제기하고는 곧바로 청와대로 이후락 비서실장을 찾아갔다. 박 대통령의 직접 신임에 의해 이 실장과는 수시로 접촉하던 관계였다. 그는 이 실장에게 미국 정부의 예상되는 반응을 설명하며 “이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면서 “이 상황을 각하께 정확하게 말씀드려 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뜻밖에도 다음 날 아침에 상황은 바뀌어 있었다. 그가 출근하기를 기다려 장 부총리가 “대한중석의 차관도입 건은 없었던 일로 하기로 결정됐다”고 알려주었다. 박 대통령이 지난밤 이후락 실장을 통해 그의 건의를 전해듣고는 “그렇다면 일단 보류하도록 하자”며 즉석에서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는 “그때 장 부총리로부터 그 얘기를 전달받고는 당장에라도 ‘박정희 만세’라고 외치고 싶은 기분이었다”며 흥분됐던 심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로서도 박 대통령이 자신의 얘기를 그렇게 간단히 들어주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던 것이다.
“며칠 뒤 이후락 실장을 만났더니 그날 저녁 내 건의에 대한 박 대통령의 반응을 들려주더군요. ‘담당과장이 반대하면 그렇게 해야지’라는 간단한 한마디였다고 합니다.” 바로 그게 박 대통령의 경제철학이었다고 그는 강조했다. 이해타산도 없었고, 정치적 계산도 용납되지 않았다. 언제나 경제적 상황판단이 우선이었다. 측근이 관련된 문제라고 해서 물러서거나 봐주는 법도 없었다. 직접 이런 상황을 체험했던 그의 입장에서 박 대통령의 강직한 결단력이 우리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미국과의 직접투자 협상이 끝날 때까지 외자도입 허가 보류
삼성그룹이 비료공장 건설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그가 이병철(李秉喆) 회장과 직접 부딪치게 됐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원칙에 입각한 박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임이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대통령의 뜻이 아니었다면 경제기획원의 일개 과장이 어떻게 감히 대한민국 최대 재벌의 총수와 얼굴을 붉히며 말다툼을 벌일 수 있었겠느냐”며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그때 삼성은 일본 미쓰이의 상업차관으로 울산공업단지에 비료공장 건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무렵 정부 차원에서도 미국의 메이저 석유회사인 걸프사와 비료공장의 직접투자 방안을 놓고 협상을 구체화해 가던 중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삼성의 비료사업을 승인해 준다면 미국으로부터의 투자유치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나 다름없었다. 앞서 박태준 회장의 소다회 공장 추진에서와 경우가 비슷했다.
“이병철 회장은 일본 측과 모든 협상을 끝낸 상황에서 정부의 차관 승인을 촉구하고 있었습니다. 외자도입은 경제기획원의 승인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자연히 내가 관여하게 되었지요. 역시 반대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아니, 반대가 아니라 일단 미국과의 직접투자 협상이 결정된 다음에 논의하자는 것이었습니다만….”
그렇게 비료사업 추진방안을 놓고 삼성 측과 옥신각신하던 어느 날 이병철 회장이 직접 기획원으로 장기영 부총리를 찾아왔다. 명목상으로는 장 부총리를 만나러 온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담당과장인 그를 만나려는 것이었다. 장 부총리도 그런 뜻을 짐작하고는 황 과장을 자신의 집무실로 호출했다.
이 회장은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당신이 황 과장인가. 일을 열심히 한다는 것은 잘 알지만 너무 고집을 부려서야 되겠는가”라며 다그치듯 몰아세웠다. 역시 비료회사에 대한 얘기였다. 그는 “제가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우리 비료산업의 앞날을 감안하면 이게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며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는 게 좋겠다”고 답변을 했지만 이 회장의 어조는 전혀 누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회장은 그의 얘기를 다 듣고는 “자네와 도저히 얘기가 안 되겠구먼”이라며 불만스런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그가 “그렇다면 직접 높은 데 말씀하시지 왜 절 찾아오셨느냐”며 반쯤 짜증스런 목소리를 섞어 대꾸하자 이 회장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한마디를 던졌다. “이 사람아, 대통령께서 자네가 안 된다면 안 된다고 그러셨네. 다 자네가 만드는 게 아닌가.” 자리에서 일어나던 이 회장이 “허허~” 웃으면서 남긴 한마디였다. 이미 청와대까지 여기저기 알아볼 대로 알아보고는 마지막으로 담당과장인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나의 반대로 인해 1년에 가깝도록 비료사업이 늦춰지고 있던 이 회장의 입장에서 그만한 정도의 불만 표시는 당연했다고도 여겨진다”며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그러나 실무 책임자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해도 박 대통령이 그의 얘기를 듣고 이병철 회장에 대해서조차 원칙을 지키려 했다는 점은 지금으로서는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삼성의 한국비료 사업이 정부의 차관승인이 늦춰짐으로써 진해화학에 대한 걸프사의 직접투자가 이뤄진 다음에서야 본격적으로 진행됐다는 사실만큼은 쉽게 확인되는 일이다.
“이런 일들이 모두 미국 대사관에까지 보고가 올라갔던 모양입니다. 유솜(USOM) 관계자들이 두고두고 박 대통령의 확고한 원칙과 의지에 박수를 보내더군요. 무엇보다 다른 개발도상국에서처럼 최고 권력자가 개인적인 친소(親疎) 관계와 상황적 판단에 따라 자의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게 된 것이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하긴, 국제사회에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아직은 신생 후진국의 하나로 분류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적지 않은 후진국에서, 그리고 독재국가에서 최고 권력자 주변의 측근들이 경제적 이권을 독차지함으로써 뒤탈을 일으키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대부분의 개도국에서 정경유착의 실력자들 사이에 끼리끼리 나눠 먹는 ‘측근 자본주의’가 문제가 되고 있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 사례들이다.
그는 “박 대통령이 경제개발에서 얻어지는 모든 이익과 효과는 국민 모두가 골고루 누려야 하는 공공재(公共財)라는 인식에 바탕을 둔 이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평가한다. 원칙을 벗어나면서까지 사업의 혜택을 특정인에게 부여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 얘기다. 경제개발 추진으로 경제 규모가 갑자기 확장되는 과정에서 자칫 흐트러지기 쉬운 공직기강을 확립하고 책임과 권한의 경계를 확실히 설정했던 것도 그런 때문이다. 그는 이를 두고 ‘개발의 공의(公義)’라는 개념으로 뭉뚱그려 표현하고 있다.
“경제계획에서 나타난 박 대통령의 의지와 결단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전통적인 농업국가인 한국에서 농업이 아닌 공업화 투자로 경제개발을 시작했다는 자체가 커다란 결단이었습니다.” 그 무렵의 세계 경제학계에서 개발이론은 대체로 농촌의 잉여노동력을 동원해 먼저 농업부문의 생산증대를 꾀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공업화부터 시작한 박 대통령의 승부사적 결단이야말로 새로운 한국적 개발모델의 시발점이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따라서 우리의 개발전략은 모든 분야에 앞서 공업개발을 먼저 일으키고 그 파급효과로 다른 분야를 순차적으로 이끌어간다는 ‘불균형성장 전략’이 될 수밖에 없었다. 농촌개발에 앞서 먼저 기간산업 시설을 확충하고 여기서 생기는 고용과 생산, 그리고 소득효과를 주변으로 점차 확대시킨다는 개발계획은 그때만 해도 상당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게 사실이다.
경부고속도로는 세계은행 아시아담당국장 아이디어
“그러나 이 개발전략은 1970년대 들어와 덩샤오핑(鄧小平)의 선부론(先富論)이 중국의 개방·개혁 전략으로 굳어지면서 후진국 개발의 일반론으로서 널리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고 그는 설명한다. 박 대통령의 개발전략이 중국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덩샤오핑보다 적어도 10여 년 앞서서 시행됐다는 얘기다. 이 같은 공업화 주도의 불균형성장 말고는 빈곤의 쇠사슬에 묶여 있던 당시의 한국 경제를 살려 근대화를 이룩해 낼 만한 마땅한 방법도 달리 없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리고 공업화 개발을 위해 결과적으로 투자 자본과 기술을 외국으로부터 조달하는 개방체제 전략을 선택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한국 경제가 폐쇄적인 막스레닌이즘을 뿌리치고 케인스 체제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울타리에 깊숙이 편입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 시장은 한편으로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냉혹한 싸움판으로 오랫동안의 식민체제에서 벗어나 참혹한 전란을 치르고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한국 경제가 거기에 뛰어들었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자 결단이었다”며 의미를 부여한다.
그의 회고록은 그 무렵 우리 정부가 세계은행과 접촉하던 과정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앞서의 얘기대로 바깥으로부터 투자를 받아들여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 점차 깊숙이 편입되어 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우리 정부가 경제개발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나가던 1966년쯤 세계은행이 서울에 조사단을 파견했을 때의 얘기다. 자금지원 계획을 마련하기 위해 다른 나라의 정부와 기관들이 어떤 사업을,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지 현황조사를 위한 작업이었다.
당시 세계은행의 총재는 로버트 맥나마라였다. 포드자동차 사장을 지낸데 이어 케네디 정부 시절 국방장관을 지냈으며, 베트남전쟁 당시 미 정부의 베트남 군사 개입에 반대하여 과감히 국방장관직을 사임하고 나와 세계은행 총재까지 지낸 인물이다. 그런 맥나마라 총재가 우리 경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그때의 조사단도 맥나마라 총재의 지시에 따라 파견됐을 만큼 한국 경제는 세계무대에서 서서히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때 조사단 책임자가 레이먼드 굿맨(Raymond Goodman)이라는 사람으로 아시아 지역 담당국장이었습니다. 그 뒤로도 우리 정부에 상당한 도움을 준 분이지요.” 직책상 그가 접촉창구가 됐던 것이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친구처럼 가깝게 지낸 결과이기도 했다. 그는 “박 대통령도 그에게는 상당히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며 일화를 하나 들려주었다. 박 대통령이 그에게 개인적으로 ‘나선남(羅善男)’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레이먼드(Raymond) 발음에서 ‘나(羅)’씨를 따왔고, 굿맨(Goodman)이라는 이름의 뜻을 살려 ‘선남(善男)’이라고 지어준 것이니, 박 대통령의 작명 실력도 그쯤이면 수준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접촉에 따라 우리 정부는 세계은행에 광산개발 및 철도사업 자금을 신청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경부고속도로의 아이디어를 처음 얻게 됐다는 점이다. 한국 이름으로 나선남이라 불리던 굿맨 국장이 “세계적으로 디젤기관차 철도수송의 시대는 지나간 것 같다”면서 한국도 운송체계를 자동차 위주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해 보라고 권유한 것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각 주를 연결하는 고속도로(Inter-state Highway)가 동서와 남북으로 뻗어가고 있었으며, 일본에서도 도쿄에서 오사카로 이어지는 도메이센(東名線)이 운영되고 있었다.
“이런 사항을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더니 대통령께서는 단박에 무릎을 치면서 ‘정말로 좋은 생각’이라며 뜻밖의 반응을 나타내시더군요. 그러고는 ‘자네 생각은 어떤가’라며 내 생각을 묻기도 했지요.” 그는 “박 대통령이 1964년 12월 서독을 방문하면서 아우토반(Autobahn)을 달려보기는 했지만, 그때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하다가 이렇듯 고속도로 건설 의욕을 과시할 정도로 어느새 우리 역량이 커지고 있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가 그러했다. 불과 2년 만에 달라진 우리의 경제적 위상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사업은 이렇게 시작되어 이듬해인 1967년의 제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식으로 선거공약으로 제시되면서 윤곽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이때의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박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선언하고 준비작업에 착수한 끝에 1968년 2월 착공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에 들어간 300억원의 건설자금은 휘발유 세금과 도로국채, 대일청구권자금 등으로 충당하기로 계획이 세워졌다. 416km의 전 구간이 왕복 4차선으로 준공된 것은 1970년 7월의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박 대통령이 경제개발 계획의 성공을 위해 개인적으로도 끊임없이 노력하고 궁리했다는 사실이다. 그보다 몇 년 뒤에 세계은행의 차관지원으로 경주보문단지를 건설할 때의 일화가 그 하나다.
“박 대통령이 사업 착공에 앞서 스무 개 정도의 단어를 메모지에 적어서 당시 정소영(鄭韶永) 경제비서관에게 내밀었다고 하잖아요.” 거기에는 유현(幽玄), 아치(雅致), 상고(尙古), 고전(古典), 기상(氣像) 등의 단어가 씌어 있었다. 관광단지를 만드는 데 있어 그러한 단어의 뜻과 의미를 살리도록 하라는 지시였다. 실무 차원에서 올린 사업계획을 검토하는 차원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아이디어를 내고 사업을 이끌어갔다는 얘기다. “아마 그 메모지만 해도 박 대통령의 성격상 하루 저녁을 꼬박 고심하며 썼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당시 경제기획원에 근무하면서 박 대통령과 장기영(張基榮) 부총리를 보필하며 개발사업에 깊이 관여했던 황병태(黃秉泰)씨가 그 연극의 주연배우였다. 그는 집필 중인 회고록에서 그런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거의 마무리를 앞두고 있는 원고 더미에서 그 부분을 찾아 읽어 내려가는 그의 목소리가 자못 흥분된 듯하다. 작전을 꾸미기까지의 전 단계 부분이다.
“… 우리를 태운 차가 용산을 지나 한강다리를 지날 때였다. 그제야 박 대통령이 의중을 드러냈다. 내 손을 덥석 잡으며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솔직히 답변을 해주게. 정말로 중대한 문제야’라며 말문을 연 것이다. 표정도 진지했다. 박 대통령은 내 눈을 직시하면서 ‘종합제철소 부지로 어디가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휘하의 실력자들이 서로 나서 연고지를 주장하는 바람에 본인으로서도 입장이 불편했을 것이 틀림없다. 내 손을 움켜쥔 그의 손아귀에서 힘이 느껴졌다.”
때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제2차 단계로 접어들었던 1967년 6월쯤이었다. 종합제철소 사업계획이 무르익어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입지선정 문제가 불거진 것이었다. 종합제철추진단이 결성되어 대한중석 사장이던 박태준(朴泰俊)씨가 추진단장을 맡아 실무작업을 진행해 나가던 상황이었기에 조만간 입지를 선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황병태씨는 기획원의 공공차관 과장에서 경제협력국장으로 막 승진해 있었다.
김종필, 이후락, 서정귀씨가 각기 다른 지역 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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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 끝에 최종으로 선정된 포항의 종합제철소 부지 전경.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동향보고회에서 황병태 국장의 브리핑 후 포항을 종합제철소 부지로 결정했다. |
“그때 종합제철소의 후보지로 올랐던 지역은 충남 서천군의 비인, 경남의 울산과 삼천포 등 세 곳이었고 정작 포항은 빠져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40년 전의 일이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쳤던 문제를 박 대통령이 나름 작전을 꾸며 쾌도난마식으로 처리한 것이었으니, 거기에 관여했던 당사자의 한 사람으로서 새롭게 감회가 느껴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문제는 이들 후보지역 추천에 정치적 입김이 다분히 작용했다는 사실이다. 입지의 경제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만, 경제적 타당성보다는 추천 인사들의 지역 연고가 훨씬 앞서 있었다. 역대 정부에서 대규모 지역개발 공약이 나올 때마다 논란이 빚어지던 실력자 연고 위주의 정책 움직임이 이미 경제개발 계획 추진 과정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던 것이다.
비인은 당시 5·16혁명의 중심세력들로 구성된 공화당의 김종필(金鍾泌) 의장과 김용태(金龍泰) 원내총무가 밀고 있었다. 이들의 고향이 충남이었다. 울산 역시 이 지역 출신인 이후락(李厚洛) 청와대 비서실장이 배후에 있었다. 삼천포는 박 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동창인 서정귀(徐廷貴)씨가 강력히 지원하고 있었는데, 그의 고향이 바로 삼천포였다. 이들은 모두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박 대통령과 각별한 관계였다.
물론 이들 각 지역이 후보지로서 나름 장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비인은 서해안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으므로 종합제철소 건립에 따른 파급효과가 전국적으로 골고루 미칠 것으로 여겨졌고, 울산은 이미 다른 공장들이 들어서고 있었으므로 제철소가 추가로 들어선다면 경제적인 상승효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삼천포는 기존의 항만 시설을 확장하는 식으로 제철공장 부지를 마련할 경우 개발비용이 적게 들어간다는 것이 장점으로 꼽히고 있었다.
이렇게 입지를 둘러싸고 난타전이 벌어지자 기획원과 상공부, 종합제철추진단 주변의 분위기는 단번에 경색되고 말았다. 누구라도 어느 한쪽을 편들어 섣불리 생색을 내려고 했다가는 자칫 모두에게 인심만 잃게 되는 애매한 판국인 것이었다. 박 대통령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부분도 바로 이런 과열된 분위기였다.
하지만 실무진 차원의 판단으로는 이들 세 곳 모두 문제가 있었다. 비인은 바다의 수심이 얕아 화물선의 출입이 자유롭지 않다는 점에서, 삼천포는 연관공장이나 야적장을 마련할 만한 배후지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적합하지 않았다. 울산은 이미 다른 공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상태여서 대단위 부지를 필요로 하는 종합제철 사업에서는 터를 잡기가 곤란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정유, 비료공장과 같은 기간산업체들과 한데 있어야 한다는 위험부담도 따랐다.
“자네 나하고 연극 좀 하세”
황 국장은 개인적으로 포항을 최적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종합제철 사업과 관련해 국내 곳곳을 돌아보며 조사작업을 벌였던 미국의 밴플리트 조사단도 포항을 적격지로 추천했었다. 6·25 당시 미8군 사령관으로 작전을 지휘했던 밴플리트 장군이 육군대장으로 예편한 뒤 웨스팅하우스의 고문을 맡으면서 미국 기업의 대표들로 방한 투자단을 구성해 종합제철소 예비조사를 실시했던 것이다. 포항은 바다가 깊어 추가로 준설을 하지 않아도 10만 톤급의 화물선이 드나들 수 있었던 데다 배후지도 넓었다. 그가 별도로 건설부의 항만관계 실무자들과 협의하면서 얻은 결론도 비슷했다.
“그래서 그때 승용차 안에서 박 대통령의 질문에 포항이 최적지라고 말씀을 드렸지요. 실제로, 후보지 논란이 제기되면서 장기영 부총리와 함께 헬기를 타고 비인과 삼천포, 울산 세 군데를 차례로 둘러보았습니다만 모두 적합하지가 않았지요. 망설이지 않고 ‘제 생각으로는 포항입니다’라고 얘기했더니, 무척 놀라신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그의 답변에 박 대통령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자신의 측근들이 추천한 후보지가 아니라 다른 지역을 추천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연이은 그의 설명을 듣고는 박 대통령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계의 실력자들이 저마다 후보지를 지원하는 상황에서 다른 지역을 내세웠다가는 공연히 미운털이 박힐 것이라는 사정에 대해서도 이해한 듯했다.
연극은 그래서 나온 방안이었다. 박 대통령은 그에게 “자네, 나하고 연극 좀 하세”라며 즉석에서 각본을 제시했다. 그달의 경제동향 보고회가 열리는 자리에서 앞으로 불러 세울 터이니 종합제철소의 입지 문제에 대해 서슴없이 발표하라는 주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연극이었다.
그날의 각본은 뒤따라오던 장기영 부총리에게도 비밀로 부쳐졌다. 연출자인 박 대통령의 당부 사항이기도 했다. 그때 승용차 안에서 그렇게 얘기를 끝내고 청와대로 다시 돌아와 커피를 마시는 자리에서도 박 대통령은 “모처럼 시내구경 잘했다”며 짐짓 딴청을 부렸고, 장 부총리는 영문도 모른 채 “오늘처럼 가랑비가 촉촉하게 내리면 올해 벼농사가 잘될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인다”며 맞장구를 쳤다. 그 자체가 며칠 뒤에 연출될 연극의 예행연습이었던 셈이다.
드디어 열흘쯤 뒤에 경제동향 보고회가 열렸다. 브리핑을 맡은 이희일(李熺逸) 기획국장이 전반적인 경제 움직임에 대한 보고를 마치자 박 대통령이 고개를 뒤쪽으로 돌리며 “기획원의 황병태 국장, 여기에 와 있는가”라며 그를 큰 목소리로 호명했다. 연극의 서막이었다. 박 대통령은 그를 앞으로 불러 세우고는 종합제철소 계획과 입지 문제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며칠 전, 차 안에서 짠 각본 그대로였다.
그는 비인과 삼천포, 울산이 후보지로 올라 있으며 각각의 장점과 단점은 이러이러하다고 보고를 해나갔다. 그러고는 개인적인 의견까지 곁들여 이들 지역보다는 포항이 훨씬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결론까지 제시했다. 다른 참석자들로서는 예기치 못했던 답변이 터져나온 것이었다. 장 부총리와 박충훈(朴忠勳) 상공장관의 표정이 단번에 변했고, 공화당 구태회(具泰會) 정책의장도 놀란 모습이었다. 마침 김종필 당의장은 다른 일로 인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연극이라는 게 쉬우면서도 어렵고, 어려우면서도 쉽다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야 아무렇지도 않을 답변인데, 왜 그렇게 떨리고 식은땀이 나던지.” 그는 당시 회의 참석자들의 반응이 떠올랐는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박 대통령, “황 국장 말이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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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강댐 건설현장을 시찰 중인 박정희 대통령. |
박정희 연출, 황병태 주연의 단막극을 통해 이렇게 종합제철소의 입지는 포항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이 같은 결정을 두고 현재까지 이렇다 할 뒷말이 없으니, 연극 자체로도 충분히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꼭 입지 덕분만은 아니겠으나, 지금의 포스코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위치를 굳히고 있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경제적 타당성까지 입증받은 셈이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연극을 꾸미면서까지 경제개발 계획을 차질없이 이끌어가려던 박 대통령의 의지가 정말로 대단했다”며 당시의 상황을 평가했다. 박 대통령이 측근들의 이해관계나 개인적인 인정에 흔들림 없이 원칙적인 입장에서 개발사업을 추진했다는 얘기다. 거기에는 오로지 경제적인 판단 기준만 있었을 뿐이다. 경제계획이 성공할 수 있었던 하나의 비결이기도 하다.
박 대통령의 이러한 의지와 원칙은 소양강댐을 건설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소양강댐은 홍수가 범람하던 한강의 치수(治水) 관리를 위해 계획된 다목적댐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일본 미쓰비시(三菱)로부터 발전시설을 들여와 설치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게 된다.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 정권의 실세들이 내부적으로 그렇게 계획을 변경하고 있었다. 시기적으로 앞서의 종합제철소 입지를 결정할 때보다 서너 달 전의 일이다.
국내의 전력사정이 원활치 못해 일어난 논란이었다. 한국전력이 이러한 계획변경 추진의 진원지였다. 특히 당시 박영준(朴英俊) 사장은 5·16 직후 일선 사단장에서 한국전력으로 곧바로 옮겨 앉은 사실이 말해주듯 실세로 꼽히고 있었다. 청와대 이후락 비서실장도 이런 의견에 동조하고 있었고, 장기영 부총리도 “소양강댐에 발전소를 지으면 발전과 수자원 관리를 함께할 수 있어 일거양득 아니냐”며 발전 위주의 건설에 힘을 싣고 있었다.
그러나 이 방안은 홍수를 관리하고 갈수기에 대비해 수자원을 확보토록 한다는 건설부의 원래 취지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홍수 관리를 위한 다목적댐은 수량의 확보를 위해 제방을 높여 고(高)댐으로 쌓아야 한다. 하지만 전력 생산을 위한 댐은 저(低)댐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굳이 댐을 높일 이유가 없었다. 몇백 년을 내다보고 계획했던 국토정비 계획의 일환인 소양강댐 건설작업이 전력 공급이라는 눈앞의 필요성 때문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주원(朱源) 장관을 비롯한 건설부 간부들이 원래 방안대로 관철시키려 고군분투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때도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섰습니다. 소양강댐 건설을 둘러싼 시끄러운 논란이 대통령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갔지요. 이미 댐 공사장 주변의 산허리를 허물고 덤프트럭이 접근할 수 있도록 주변도로를 내고 있었지만 정작 댐 자체에 대해서는 결론이 나지 않고 있었으니 시간적으로도 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연극이 아니라 저녁 회식을 통해 자연스럽게 결론을 유도하는 방식이었다. 박 대통령이 청와대에 회식자리를 마련하여 관계부처 장관들을 불러모은 것이다. 장 부총리를 비롯해 서봉균(徐奉均) 재무장관, 주원 건설장관, 그리고 김학렬(金鶴烈) 경제수석 등이 참석 멤버였다. 황 국장도 신동관(申東寬) 대통령수행비서로부터 연락을 받고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하지만 소양강댐 업무는 어디까지나 건설부 소관이었고 기획원은 거의 관련이 없었다. 관련이 있다면 소양강댐이 한일협정에 따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건설된다는 점에서 자금조달 문제에만 관여될 뿐이었다. “장관들의 회식자리에 신참 국장인데다 업무와는 별로 관계도 없던 나를 참석시킨 것이었으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며 그는 당시의 소감을 털어놓았다.
그날 저녁의 회식 메뉴는 소금에 절인 청어알 요리로,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즈노코(數の子)라는 것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다시마와 순무절임, 검은콩 따위를 곁들여 새해 아침에 즐겨 먹는 음식이다. 청어가 알을 많이 낳기 때문에 자손들이 그처럼 번창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지닌다. 주일 대사관에서 청어알 요리를 특별히 마련해 보낸 기회에 회식을 겸하여 소양강댐 관계장관 회의가 소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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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9월 비료공장을 돌아보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과의 직접 투자 협상이 끝날 때까지 이병철 회장이 비료공장 건립을 위해 추진 중이던 외자도입의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
이렇게 되자 분위기는 단번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그의 답변이 이어졌다. “제가 아는 바로는 소양강댐은 한강 수계에서 가장 높게 계획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홍수와 한발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한 것이지요. 고댐 계획을 그대로 살려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직속 상사인 장 부총리가 발전시설의 저댐 방식을 주장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치를 살필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댐을 만들면서 처음부터 제대로 기초를 잡지 못하면 두고두고 문제가 될 것’이라는 말씀도 드렸다”고 말했다. 일단 발전설비를 설치했다가 여건이 맞지 않으면 추후에 고댐으로 만든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었는데, 그런 발상 자체가 무모하다는 생각을 밝힌 것이었다. 저댐으로 만들었다가 다시 제방을 높이는 작업 자체가 불가능하지야 않겠으나 기술적으로나 비용에 있어서나 수용하기 어려운 방안이었다.
그의 설명이 끝나자 박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어때요, 황 국장 말이 맞는 것 아니냐”며 참석자들을 두루 둘러보았다. 그 자리에서 확실히 결론을 내리겠다는 투였다. 관계부처 장관들이 참석한 자리였던 만큼 결론을 내리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여기에 김학렬 경제수석도 “고댐으로 짓는 게 올바른 선택인 것 같다”며 은근히 건설부의 입장을 거들고 나섰다. 그동안 이 문제로 억눌렸던 주원 건설부장관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박 대통령이 마지막 한마디를 더 얹으면서 논의에 종지부를 찍었다. “일본의 상업차관 업자들이 여기저기 들락거리면서 바람을 불어넣은 것 같은데 원래 건설부 방안대로 추진하는 게 좋겠다. 더 이상 재론되지 않기를 바란다.” 단호한 말투였다. 대통령 자신도 정부 내에서 자꾸 엉뚱한 얘기들이 흘러나오는 데 대해 기분이 매우 언짢았을 것이다. 그러고는 곧바로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려버렸다. 더 이상 이견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결국 이러한 결론에 따라 소양강댐은 기본설계를 거쳐 1967년 4월에 착공되었다. 댐 높이 123m, 제방길이 530m로, 흙과 돌로 구성된 사력(砂礫) 댐이다. 공사가 시작된 지 6년6개월 만인 1973년 10월에 준공되어 지금껏 한강 수계의 홍수조절에 절대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그는 “그때 소양강댐의 운명이 바뀌었다면 지금도 장마철마다 한강 수계의 홍수를 막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원칙에 투철한 박 대통령의 의지가 당시 주변의 실세라고 하는 분들에 의해 꺾이지 않은 덕분”이라고 평가했다. 적어도 박 대통령이 그 점에 있어서만큼은 충분히 존경을 받을 만하다는 것이다. 그는 장기영 부총리에 대해서도 “왕초라는 별명답게 통이 크고 처신이 대단하셨던 분”이라며 평가를 덧붙인다. 발전설비의 저댐을 바라던 자신의 뜻에 거스르는 발언으로 인해 역정을 내거나 불쾌해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얘기를 시원하게 잘했다”며 격려를 해주더라는 것이었다.
그가 박 대통령의 옆에서 직접 경험하거나 지켜본 바에 따르면 이러한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여기서 사례로 든 종합제철소 입지 선정 때의 논란이나 소양강댐의 고댐, 저댐 논란의 경우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어 마지막 도장을 찍기 직전에 결정이 철회된 경우도 없지 않았다. 대한중석 사장으로 재직하던 박태준씨가 일본으로부터 상업차관을 끌어들여 소다회 화학공장을 지으려 했을 때가 가장 극적인 경우다. 그로서는 아직 공공차관 과장일 때였다.
“담당과장이 반대하면 그렇게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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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서 샴페인을 뿌리며 축하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 |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일본의 상업차관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거나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미국 국무성 국제개발처(USAID)에 요청해 놓고 있던 공공차관과의 균형관계가 문제됐던 겁니다.” 박태준씨가 추진하던 소다회 공장이 일본자금으로 세워질 경우 미국이 우리 정부에 지원하던 차관계획이 자칫 엉뚱하게 꼬일 개연성이 엿보이고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당시 동양화학이 박태준씨에 앞서 소다회 공장을 지으려고 미국에 공공차관을 요청하고 있었지만, 아직 승인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국내에서 해외 민간기업의 상업차관이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공공차관보다 2~3년 늦은 1962년쯤부터다. 그러나 도입 절차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됐기 때문에 공공차관보다는 훨씬 인기를 끌던 터였다. 현대건설도 시멘트 공장 건립을 위해 미국에 공공차관을 신청했으나 감감무소식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사이 뒤늦게 뛰어든 쌍용시멘트와 한일시멘트가 서독 폴리시우스의 상업차관을 끌어들여 공장을 건립, 시멘트 제품이 시중에 선보이기 시작했을 정도다.
그때의 상업차관은 특히 일본 자금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미쓰비시와 미쓰이, 도요, 마루베니, 이토추 등의 종합상사들이 경쟁적으로 나서서 오히려 자금을 필요로 하는 국내의 거래선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기업들이 저마다 상업차관을 끌어오게 된다면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던 비료공장 등 중화학 분야는 상대적으로 위축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는 걱정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상업차관은 공공차관보다 대체로 상환기간이 짧고 금리도 더 높은 편이어서 한꺼번에 상환 시점이 겹치기라도 한다면 자칫 외환수급 사정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우려도 없지 않았다. 당시 상업차관은 상환기간이 5년 안팎에 금리도 연 4~5% 정도가 보통이었다. 이에 비해 공공차관은 금리가 0.5~1.5%에 상환기간도 10~20년의 조건으로 결정되고 있었다.
“따라서 공공차관 실무 책임자인 나로서는 박태준씨의 소다회 공장 계획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단 미국의 결정을 기다려본 뒤에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었지요.” 특히 박태준씨가 5·16 직후 최고회의 시절 박정희 의장의 비서실장을 지낸 측근이라는 점에서 그가 일본의 상업차관을 끌어들이게 된다면 미국에 대해 우리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비칠 소지도 적지 않았다. 그것은 차관의 거래선을 일본으로 돌리겠다는 표시나 마찬가지라고 그는 염려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워싱턴에 출장을 다녀온 며칠 사이에 상황이 급속도로 진행되어 있었다. 박태준씨의 차관도입 작업이 거의 마무리되어 조만간 경제기획원의 외자도입승인위원회에 안건이 오르게 됐던 것이다. 그로서는 드디어 우려하던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그는 즉각 장 부총리에게 이 문제를 제기하고는 곧바로 청와대로 이후락 비서실장을 찾아갔다. 박 대통령의 직접 신임에 의해 이 실장과는 수시로 접촉하던 관계였다. 그는 이 실장에게 미국 정부의 예상되는 반응을 설명하며 “이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면서 “이 상황을 각하께 정확하게 말씀드려 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뜻밖에도 다음 날 아침에 상황은 바뀌어 있었다. 그가 출근하기를 기다려 장 부총리가 “대한중석의 차관도입 건은 없었던 일로 하기로 결정됐다”고 알려주었다. 박 대통령이 지난밤 이후락 실장을 통해 그의 건의를 전해듣고는 “그렇다면 일단 보류하도록 하자”며 즉석에서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는 “그때 장 부총리로부터 그 얘기를 전달받고는 당장에라도 ‘박정희 만세’라고 외치고 싶은 기분이었다”며 흥분됐던 심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로서도 박 대통령이 자신의 얘기를 그렇게 간단히 들어주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던 것이다.
“며칠 뒤 이후락 실장을 만났더니 그날 저녁 내 건의에 대한 박 대통령의 반응을 들려주더군요. ‘담당과장이 반대하면 그렇게 해야지’라는 간단한 한마디였다고 합니다.” 바로 그게 박 대통령의 경제철학이었다고 그는 강조했다. 이해타산도 없었고, 정치적 계산도 용납되지 않았다. 언제나 경제적 상황판단이 우선이었다. 측근이 관련된 문제라고 해서 물러서거나 봐주는 법도 없었다. 직접 이런 상황을 체험했던 그의 입장에서 박 대통령의 강직한 결단력이 우리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삼성그룹이 비료공장 건설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그가 이병철(李秉喆) 회장과 직접 부딪치게 됐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원칙에 입각한 박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임이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대통령의 뜻이 아니었다면 경제기획원의 일개 과장이 어떻게 감히 대한민국 최대 재벌의 총수와 얼굴을 붉히며 말다툼을 벌일 수 있었겠느냐”며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그때 삼성은 일본 미쓰이의 상업차관으로 울산공업단지에 비료공장 건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무렵 정부 차원에서도 미국의 메이저 석유회사인 걸프사와 비료공장의 직접투자 방안을 놓고 협상을 구체화해 가던 중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삼성의 비료사업을 승인해 준다면 미국으로부터의 투자유치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나 다름없었다. 앞서 박태준 회장의 소다회 공장 추진에서와 경우가 비슷했다.
“이병철 회장은 일본 측과 모든 협상을 끝낸 상황에서 정부의 차관 승인을 촉구하고 있었습니다. 외자도입은 경제기획원의 승인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자연히 내가 관여하게 되었지요. 역시 반대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아니, 반대가 아니라 일단 미국과의 직접투자 협상이 결정된 다음에 논의하자는 것이었습니다만….”
그렇게 비료사업 추진방안을 놓고 삼성 측과 옥신각신하던 어느 날 이병철 회장이 직접 기획원으로 장기영 부총리를 찾아왔다. 명목상으로는 장 부총리를 만나러 온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담당과장인 그를 만나려는 것이었다. 장 부총리도 그런 뜻을 짐작하고는 황 과장을 자신의 집무실로 호출했다.
이 회장은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당신이 황 과장인가. 일을 열심히 한다는 것은 잘 알지만 너무 고집을 부려서야 되겠는가”라며 다그치듯 몰아세웠다. 역시 비료회사에 대한 얘기였다. 그는 “제가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우리 비료산업의 앞날을 감안하면 이게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며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는 게 좋겠다”고 답변을 했지만 이 회장의 어조는 전혀 누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회장은 그의 얘기를 다 듣고는 “자네와 도저히 얘기가 안 되겠구먼”이라며 불만스런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그가 “그렇다면 직접 높은 데 말씀하시지 왜 절 찾아오셨느냐”며 반쯤 짜증스런 목소리를 섞어 대꾸하자 이 회장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한마디를 던졌다. “이 사람아, 대통령께서 자네가 안 된다면 안 된다고 그러셨네. 다 자네가 만드는 게 아닌가.” 자리에서 일어나던 이 회장이 “허허~” 웃으면서 남긴 한마디였다. 이미 청와대까지 여기저기 알아볼 대로 알아보고는 마지막으로 담당과장인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나의 반대로 인해 1년에 가깝도록 비료사업이 늦춰지고 있던 이 회장의 입장에서 그만한 정도의 불만 표시는 당연했다고도 여겨진다”며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그러나 실무 책임자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해도 박 대통령이 그의 얘기를 듣고 이병철 회장에 대해서조차 원칙을 지키려 했다는 점은 지금으로서는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삼성의 한국비료 사업이 정부의 차관승인이 늦춰짐으로써 진해화학에 대한 걸프사의 직접투자가 이뤄진 다음에서야 본격적으로 진행됐다는 사실만큼은 쉽게 확인되는 일이다.
“이런 일들이 모두 미국 대사관에까지 보고가 올라갔던 모양입니다. 유솜(USOM) 관계자들이 두고두고 박 대통령의 확고한 원칙과 의지에 박수를 보내더군요. 무엇보다 다른 개발도상국에서처럼 최고 권력자가 개인적인 친소(親疎) 관계와 상황적 판단에 따라 자의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게 된 것이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하긴, 국제사회에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아직은 신생 후진국의 하나로 분류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적지 않은 후진국에서, 그리고 독재국가에서 최고 권력자 주변의 측근들이 경제적 이권을 독차지함으로써 뒤탈을 일으키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대부분의 개도국에서 정경유착의 실력자들 사이에 끼리끼리 나눠 먹는 ‘측근 자본주의’가 문제가 되고 있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 사례들이다.
그는 “박 대통령이 경제개발에서 얻어지는 모든 이익과 효과는 국민 모두가 골고루 누려야 하는 공공재(公共財)라는 인식에 바탕을 둔 이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평가한다. 원칙을 벗어나면서까지 사업의 혜택을 특정인에게 부여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 얘기다. 경제개발 추진으로 경제 규모가 갑자기 확장되는 과정에서 자칫 흐트러지기 쉬운 공직기강을 확립하고 책임과 권한의 경계를 확실히 설정했던 것도 그런 때문이다. 그는 이를 두고 ‘개발의 공의(公義)’라는 개념으로 뭉뚱그려 표현하고 있다.
“경제계획에서 나타난 박 대통령의 의지와 결단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전통적인 농업국가인 한국에서 농업이 아닌 공업화 투자로 경제개발을 시작했다는 자체가 커다란 결단이었습니다.” 그 무렵의 세계 경제학계에서 개발이론은 대체로 농촌의 잉여노동력을 동원해 먼저 농업부문의 생산증대를 꾀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공업화부터 시작한 박 대통령의 승부사적 결단이야말로 새로운 한국적 개발모델의 시발점이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따라서 우리의 개발전략은 모든 분야에 앞서 공업개발을 먼저 일으키고 그 파급효과로 다른 분야를 순차적으로 이끌어간다는 ‘불균형성장 전략’이 될 수밖에 없었다. 농촌개발에 앞서 먼저 기간산업 시설을 확충하고 여기서 생기는 고용과 생산, 그리고 소득효과를 주변으로 점차 확대시킨다는 개발계획은 그때만 해도 상당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게 사실이다.
경부고속도로는 세계은행 아시아담당국장 아이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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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굿맨 세계은행 아시아담당국장. 세계은행 조사단으로 한국 방문 당시 경부고속도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
그리고 공업화 개발을 위해 결과적으로 투자 자본과 기술을 외국으로부터 조달하는 개방체제 전략을 선택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한국 경제가 폐쇄적인 막스레닌이즘을 뿌리치고 케인스 체제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울타리에 깊숙이 편입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 시장은 한편으로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냉혹한 싸움판으로 오랫동안의 식민체제에서 벗어나 참혹한 전란을 치르고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한국 경제가 거기에 뛰어들었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자 결단이었다”며 의미를 부여한다.
그의 회고록은 그 무렵 우리 정부가 세계은행과 접촉하던 과정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앞서의 얘기대로 바깥으로부터 투자를 받아들여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 점차 깊숙이 편입되어 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우리 정부가 경제개발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나가던 1966년쯤 세계은행이 서울에 조사단을 파견했을 때의 얘기다. 자금지원 계획을 마련하기 위해 다른 나라의 정부와 기관들이 어떤 사업을,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지 현황조사를 위한 작업이었다.
당시 세계은행의 총재는 로버트 맥나마라였다. 포드자동차 사장을 지낸데 이어 케네디 정부 시절 국방장관을 지냈으며, 베트남전쟁 당시 미 정부의 베트남 군사 개입에 반대하여 과감히 국방장관직을 사임하고 나와 세계은행 총재까지 지낸 인물이다. 그런 맥나마라 총재가 우리 경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그때의 조사단도 맥나마라 총재의 지시에 따라 파견됐을 만큼 한국 경제는 세계무대에서 서서히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때 조사단 책임자가 레이먼드 굿맨(Raymond Goodman)이라는 사람으로 아시아 지역 담당국장이었습니다. 그 뒤로도 우리 정부에 상당한 도움을 준 분이지요.” 직책상 그가 접촉창구가 됐던 것이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친구처럼 가깝게 지낸 결과이기도 했다. 그는 “박 대통령도 그에게는 상당히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며 일화를 하나 들려주었다. 박 대통령이 그에게 개인적으로 ‘나선남(羅善男)’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레이먼드(Raymond) 발음에서 ‘나(羅)’씨를 따왔고, 굿맨(Goodman)이라는 이름의 뜻을 살려 ‘선남(善男)’이라고 지어준 것이니, 박 대통령의 작명 실력도 그쯤이면 수준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접촉에 따라 우리 정부는 세계은행에 광산개발 및 철도사업 자금을 신청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경부고속도로의 아이디어를 처음 얻게 됐다는 점이다. 한국 이름으로 나선남이라 불리던 굿맨 국장이 “세계적으로 디젤기관차 철도수송의 시대는 지나간 것 같다”면서 한국도 운송체계를 자동차 위주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해 보라고 권유한 것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각 주를 연결하는 고속도로(Inter-state Highway)가 동서와 남북으로 뻗어가고 있었으며, 일본에서도 도쿄에서 오사카로 이어지는 도메이센(東名線)이 운영되고 있었다.
“이런 사항을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더니 대통령께서는 단박에 무릎을 치면서 ‘정말로 좋은 생각’이라며 뜻밖의 반응을 나타내시더군요. 그러고는 ‘자네 생각은 어떤가’라며 내 생각을 묻기도 했지요.” 그는 “박 대통령이 1964년 12월 서독을 방문하면서 아우토반(Autobahn)을 달려보기는 했지만, 그때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하다가 이렇듯 고속도로 건설 의욕을 과시할 정도로 어느새 우리 역량이 커지고 있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가 그러했다. 불과 2년 만에 달라진 우리의 경제적 위상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사업은 이렇게 시작되어 이듬해인 1967년의 제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식으로 선거공약으로 제시되면서 윤곽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이때의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박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선언하고 준비작업에 착수한 끝에 1968년 2월 착공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에 들어간 300억원의 건설자금은 휘발유 세금과 도로국채, 대일청구권자금 등으로 충당하기로 계획이 세워졌다. 416km의 전 구간이 왕복 4차선으로 준공된 것은 1970년 7월의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박 대통령이 경제개발 계획의 성공을 위해 개인적으로도 끊임없이 노력하고 궁리했다는 사실이다. 그보다 몇 년 뒤에 세계은행의 차관지원으로 경주보문단지를 건설할 때의 일화가 그 하나다.
“박 대통령이 사업 착공에 앞서 스무 개 정도의 단어를 메모지에 적어서 당시 정소영(鄭韶永) 경제비서관에게 내밀었다고 하잖아요.” 거기에는 유현(幽玄), 아치(雅致), 상고(尙古), 고전(古典), 기상(氣像) 등의 단어가 씌어 있었다. 관광단지를 만드는 데 있어 그러한 단어의 뜻과 의미를 살리도록 하라는 지시였다. 실무 차원에서 올린 사업계획을 검토하는 차원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아이디어를 내고 사업을 이끌어갔다는 얘기다. “아마 그 메모지만 해도 박 대통령의 성격상 하루 저녁을 꼬박 고심하며 썼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