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선(부산저축은행 대주주) 부인, ‘노무현 대통령이 남편을 훈센 총리에게 직접 소개했다’고 자랑하고 다녀”
“부산저축은행 사건과 조현오 경찰청장의 노무현 명예훼손 사건으로 검찰은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직후 봉인했던 수사기록을 다시 꺼낼 수 있다. 당시 수사팀은 조세피난처에 있는 출처 불명의 해외자금을 추적하는 중이었다.”
⊙ 투자금 중 사라진 3000억원… 캄보디아 캄코뱅크와 ABA은행 의심
⊙ 부산저축은행 사건의 핵심은 캄보디아 사업에 숨겨둔 비자금 찾기
⊙ “박형선은 노무현 정권 때 광주ㆍ전남의 청와대였다”
⊙ “박형선, 2009년 盧武鉉 비자금 사건이 중단되자 ‘죽다 살았다’는 반응 보여”
취재지원 : 全敬雄 뉴데일리 기자 enoch2051@hanmail.net
“부산저축은행 사건과 조현오 경찰청장의 노무현 명예훼손 사건으로 검찰은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직후 봉인했던 수사기록을 다시 꺼낼 수 있다. 당시 수사팀은 조세피난처에 있는 출처 불명의 해외자금을 추적하는 중이었다.”
⊙ 투자금 중 사라진 3000억원… 캄보디아 캄코뱅크와 ABA은행 의심
⊙ 부산저축은행 사건의 핵심은 캄보디아 사업에 숨겨둔 비자금 찾기
⊙ “박형선은 노무현 정권 때 광주ㆍ전남의 청와대였다”
⊙ “박형선, 2009년 盧武鉉 비자금 사건이 중단되자 ‘죽다 살았다’는 반응 보여”
취재지원 : 全敬雄 뉴데일리 기자 enoch2051@hanmail.net
-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인근 신도시개발 프로젝트인 ‘캄코시티’의 타운하우스. 부산저축은행이 시행사 랜드마크월드와이드(LMD)에 수천억원을 투자해 공사가 진행돼 왔으나 타운하우스만 완공됐을 뿐 다른 공사는 중단된 상태다.
부산저축은행 사건이 캄보디아로 향하고 있다. 검찰은 현지에 투자된 5000억원의 행방을 쫓고 있다. 금융시스템이 허술한 현지 사정을 악용해 거액(巨額)의 불법자금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서다.
이 사건의 핵심은 몇몇 광주일고 출신의 금융마피아가 수조 원의 자금을 어떻게 불법적으로 사용했고, 그 과정에서 조성한 거액(巨額)의 비자금을 얼마나 찾아내느냐에 있다. 한 검찰 관계자는 “부산저축은행 사건의 핵심은 비자금 찾기”라며 “악(惡)의 줄기는 캄보디아 개발사업에서 나올 것”이라고 했다.
부산저축은행은 캄보디아 수도(首都) 프놈펜에 신도시 ‘캄코시티’를 건설하기 위해 수천억 원을 쏟아 부었다. 캄코시티 개발사업에만 2984억원을 밀어 넣었다. 또 공항개발사업에 1200억원, 고속도로 개발사업에 542억원, 부지개발사업에 172억원, 깜뽕섬 개발사업에 64억원 등 총 4962억원을 투자했다. 부산저축은행이 추진한 인천 효성동 도시개발사업(4738억원)과 전남 신안군 개발사업(2991억원)보다 더 많은 돈이 들어간 것이다.
사업 1단계도 완성하지 못하고 좌초
1인당 GDP가 640달러에 불과한 캄보디아는 산업기반시설은 물론 사회 시스템이 낙후돼 있다. 작년 여름 캄보디아의 농업 현황을 알아보기 위해 현지를 방문했던 기자는 외국 기업이 투자하기에 리스크가 많은 나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지에서 만난 코트라 관계자는 “한국의 농업 관계자들이 이곳에 소규모로 투자하고 있지만, 대기업은 들어오지 않거나 들어온 기업도 대부분 손해를 본 후 철수했다”고 전했다. 돈과 정보, 조직을 갖춘 대기업조차 실패하는 곳이 캄보디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부산저축은행은 왜 캄보디아를 해외투자처로 선택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캄코시티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했던 것일까. 그 과정을 추적해 봤다.
부산저축은행의 대주주와 경영진은 전국적 명문고(名門高)인 광주일고 출신이다. 박연호(61·43회) 부산저축은행 회장을 비롯해 김양(59·45회) 부회장, 오지열(59·45회) 은행장, 김민영(39회) 대표, 문평기(41회) 감사, 그리고 부산저축은행의 대주주인 박형선(59·45회) 해동건설 회장, 부산저축은행의 계열사인 서울신용평가정보 이정상 대표, 사모펀드 회사 칸서스파트너스 김영재(41회) 대표 등이 같은 학교를 나왔다.
이들은 서로를 형님·동생으로 부르며 사업을 진행해 왔다. 정상적인 여수신(與受信) 영업보다는 국내외 부동산 개발사업에 집중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120여 개의 SPC(특수목적법인)도 만들었다.
캄보디아 사업은 2004년 김양 부회장의 구상에서 출발했다. 그 무렵 부산저축은행 주식을 대량 매입한 박형선 해동건설 회장이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둘은 광주일고 45회 출신으로 막역한 친구 사이다. 2005년 3월 국회의원 7명이 캄보디아 시엠립 지역개발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현지를 방문했을 때 두 사람은 캄보디아에 체류하며 국회의원들을 ‘모셨다’고 한다.
행방 묘연한 3000억원
부산저축은행이 추진한 캄코시티 프로젝트는 프놈펜 시청에서 9㎞ 떨어진 ‘뚤꺽’이라는 곳(부지면적 132만㎡)에 캄보디아 최대의 신도시를 만드는 사업이었다. 2006년부터 2018년까지 6단계에 걸쳐 아파트 8000여 가구와 증권거래소·금융센터·대학교·시청 등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캄보디아의 주요 정부기관도 이곳으로 이전하기로 돼 있었다. 총 사업비 규모는 29억 달러였다.
그러나 캄코시티는 전체 6단계 사업 중 1단계도 끝내지 못하고 작년 말 중단됐다. 현재 타운하우스와 빌라 180여 가구만 완공돼 입주가 끝난 상황이다. 아파트 900여 가구 중 440여 채는 완공됐으나 입주율은 10%에 불과하다.
2년 가까이 사업을 준비해 온 김양·박형선 두 사람은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측근 건축가 강모씨에게 도시계획을 맡기기도 했다. 2006년 11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캄보디아를 방문한 후 사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노 대통령의 캄보디아 방문 한 달 전(2006년 10월), 부산저축은행 입장에서 획기적인 일이 벌어졌다. 당시 금감원이 저축은행의 해외 PF(project financing·특정 프로젝트에 자금을 조달하는 금융기법) 투자를 허용했던 것이다. 캄보디아 진출의 법적 토대가 만들어진 셈이었다. 박형선 회장을 잘 아는 한 지인(知人)은 “박 회장이 그 일을 해냈다”고 증언했다.
캄보디아 증권거래소 설립 결정도 이때쯤 이뤄졌다. 한국 정부는 증권거래소 시스템과 운영 노하우를 전수해 주기로 약속했다. 이런 기대 속에 캄보디아 정부는 캄코시티 지역 전체를 ‘금융특구’로 지정했다. 캄보디아 정부는 ‘캄코시티’에 대한 정책적·제도적 지원을 국무회의 주요 안건으로 올릴 정도로 관심을 많이 가졌다고 한다. 김양 부회장은 이런 공로로 캄보디아 정부의 최고 훈장인 ‘소바타라 훈장’을 받았다.
2007년 5~6월경 박연호 회장, 김양 부회장, 김민영 대표, 그리고 대주주 박형선 회장 등 부산저축은행의 핵심(核心) 인사 4명이 캄보디아를 방문해 사업에 힘을 실었다. 2007년 8월에는 프놈펜에 자본금 1500만 달러짜리 ‘캄코뱅크’를 설립했다. 부산저축은행은 광주일고 동문(同門) 장인환 대표가 운영하는 KTB자산운용에서도 돈을 끌어당겼다. KTB자산운용은 2006~2007년 800억원 규모의 사모펀드를 조성, 캄코시티와 캄코뱅크에 투자했다.
캄코시티의 1단계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부산저축은행의 자금 투입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아 마침내 공사는 전면 중단됐다.
현재 부산저축은행이 랜드마크 월드와이드(캄코시티 사업 시행사)에 투입한 돈은 대략 4300억원이다. 그런데 시행사가 지금까지 사업비 명목으로 지출한 금액은 토지 매입비용 400억원과 공사비용 900억원 등 1300억원에 불과하다. 산술적으로 시행사의 금고에 3000억원이 남아 있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현재 이 회사는 지급불능 상태다. 남은 돈 3000억원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검찰은 최소한 수백억 원이 조세피난처를 통해 빼돌려진 정황을 포착하고 금융정보분석원(FIU)과 함께 추적 중이다. 사정당국 관계자는 “부산저축은행 사람들이 세운 캄코뱅크와 전 진로그룹 회장 장진호씨가 세운 ABA은행이 의심스럽지만 캄보디아 측이 이들을 보호하고 있어 수사에 어려움이 있다. ABA은행은 스위스 비밀은행만큼 비밀이 보장돼 현지인들 사이에 인기가 있다”고 했다.
박형선과 노무현의 因緣
거액(巨額)의 돈이 사라진 건 부산저축은행만이 아니다. M&A 전문가들이 세운 ‘연우개발’이라는 회사는 2008년 2월 캄보디아 프놈펜에 42층짜리 고급 주상복합빌딩을 짓겠다고 밝혔다. 사업비는 무려 2억4000만 달러였다. 군인공제회의 자회사인 대한토지신탁이 초기 사업비를 댔다. 이 빌딩도 현재 캄코시티처럼 자금부족으로 공사가 중단됐다. 2009년 3월 이 사업과 관련해 노무현 대통령 사람인 이강철 전(前) 정무특보의 측근이 구속됐다.
캄코시티 개발 과정에서 사라진 돈을 찾기 위해서는 부산저축은행 대주주인 박형선 해동건설 회장이 어떤 사람인지를 살펴봐야 한다. 검찰 수사상황에 밝은 한 고위인사는 “박형선씨가 입을 열지 않아 수사에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며 “캄보디아 현지 금융권의 자금 흐름을 확인하는 일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박형선 회장, 그는 과연 누구인가.
2002년 5월 6일 광주지역의 인터넷 매체인 <전라도닷컴>이 보도한 ‘노풍의 광주 주역들’이란 기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보성건설 부사장 출신인 사업가 박형선씨는 1982년 부미방(부산미문화원방화) 사건으로 노 후보와 인연을 맺었다. 친구 사이인 방화사건의 주역 김현장씨의 변호를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 자청하면서 처음 만났다. 이후 정치에 입문한 노 후보가 광주에 내려오면 숙소도 잡아 주는 등 금전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한번은 3~4년 전엔가 한 주간잡지가, 여론조사 결과 노 후보가 ‘차세대 정치지도자 1위’로 나왔다고 대서특필했다. 박씨는 이 주간지를 대량으로 사들여 뿌렸고, 이것도 부족해 노 후보의 보좌역인 이광재씨 등이 광주에 오면 “이 책을 사서 부산 가서 많이 뿌려라”며 일부러 돈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민청학련 출신으로 세미나, 강연, 중소기업인과의 미팅, 교수 및 법조인과 여성단체, 재야단체, 언론기관 등 공식적인 당조직 외의 일반 사조직 관련 만남을 두루 주선했다.>
2003년 2월 6일 당시 친노(親盧) 매체인 <오마이뉴스>의 기사도 주목을 끈다.
<노무현 당선자는 지난 1월 28일 광주에서 국정토론회를 마치고 한 호텔에서 김수복·박형선·정향자·정찬용씨 등 광주 시민사회 현장 지도자들을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중략) 기업가 박형선씨는 음으로 양으로 노 당선자를 지원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리에서는 노무현 당선자는 “여러분이 추천하는 사람이라면 믿고 쓰겠습니다, 추천해 주십시오”라고 청했고, 이들은 광주 시민사회의 여론을 수렴해 만장일치로 정찬용씨를 추천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 기사에 등장하는 박형선 회장의 회사는 노무현 정권 시절 급성장했다. 박형선 회장과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화 운동가를 자처해 왔다. 운동권 출신들이 권력과 가까워지면 부패 혐의자로 변질하는 경우가 많다.
“금호의 대우건설 인수에 박형선 회장이 도움 줘”
박형선 회장의 집안은 광주에서 유명한 ‘운동권 명문가’라고 한다. 그는 광주일고를 졸업하고 전남대에 들어간 후 ‘민청학련’ 사건으로 1974년 구속돼 10개월간 감옥생활을 했다. 이해찬(李海瓚) 전 국무총리, 정찬용(鄭燦龍) 전 청와대 인사수석 등이 민청학련 사건 동지들이다.
박형선 회장은 2002년 친구 회사인 보성건설을 그만두고 성호종합건설을 인수했다. 그해 8월 해동건설로 이름을 바꿨다. 토목건축 공사가 주요 사업이었다. 박형선 본인과 가족이 주식 100%를 갖고 있다. 2010년 현재 누적(累積) 공사 매출액은 2914억원이다. 작년 당기순이익은 60여억원이었다.
해동건설은 2003년부터 공사 매출액이 늘었다. 2003년 276억원, 2004년 302억원, 2005년 405억원, 2006년 462억원, 2007년 601억원이었다. 노무현 정권 때 사업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이 회사가 진행해 온 공사는 영산강 하구둑, 새만금 개발, 광양시 하수처리장, 여수세계박람회 건설 등이다. 서울 천호대로 광나루역과 낙동강 공사도 맡았다.
박형선 회장은 오지열 부산중앙저축은행장과 사돈 관계다. 박 회장의 아들과 오 행장의 딸이 결혼할 때 박상구 부산저축은행 창업주가 주례를 섰다. 당시 이해찬 총리 등 노무현 정부 실세들이 대거 참석했다고 한다.
박형선 회장을 잘 아는 한 인사는 주목할 만한 내용을 전했다.
“박형선 회장은 지난 정부 때 사업체를 많이 키웠습니다. 관급 공사도 적지 않게 따냈습니다. 그분은 노무현 대통령, 그리고 그의 측근들과 아주 친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수사가 진행될 때 그는 아주 힘들어했습니다.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이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려 검찰 수사가 중단되자 그는 ‘죽다 살았다’는 투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뭔지 모르지만 깊은 근심이 사라지자 안도했던 것입니다. 일각에서는 2006년 금호그룹이 대우건설을 인수할 때 그분이 박삼구 회장에게 도움을 줬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광주일고 출신인 박삼구 회장은 고교 동문을 적극 챙기는 대표적인 재계(財界) 인사로 알려져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에 광주일고 출신이 많은 이유다.
복수의 정부기관 관계자는 “부산저축은행 사건과 조현오 경찰청장의 노무현 대통령 명예훼손 사건으로 검찰은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직후 봉인했던 수사기록을 다시 꺼낼 수 있다. 당시 수사팀은 해외에 있는 출처 불명의 자금을 추적하는 중이었고 국내에는 서울 종로구 ○○은행 지점의 계좌번호까지 확인한 걸로 안다”고 전했다.
수상 대상으로 떠오른 광주일고 출신의 시행사 대표
캄보디아 투자금의 행방을 추적하는 데 주목해야 할 사람이 또 있다. 캄코시티 프로젝트 시행사인 랜드마크 월드와이드의 대표인 이상호(54)씨다. 이상호씨 역시 광주일고 출신이다. 그는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3년 자본금 11억원으로 시행사를 설립한 그는 캄보디아 개발사업의 열쇠를 쥐고 있다. 검찰은 이씨를 수사선상에 올려놓고 있고 회사 자금의 흐름을 추적하고 있다.
부산저축은행은 캄코시티 프로젝트 외에 신공항과 고속도로 건설에 각각 1200억원과 620억원을 투자했다. 이들 공사는 현재 어려움에 처해 있다. 캄보디아 고위 공무원들이 사업부지에 ‘알박기’를 하는 바람에 진척이 잘 안된다는 것이다.
캄코시티 건설과 관련해 부산저축은행과 시행사의 경영진은 2005년 8월 계약을 체결했다. 사업초기 이들은 고교 동문(同門)이라는 인연으로 손발이 척척 맞았다. 자금(資金) 문제가 불거지면서 두 경영진의 거리는 멀어졌다.
노무현 정부, 부산저축은행 경영진에게 각종 훈장 수여
두 회사가 처음 사업계약을 맺었던 ‘2005년 8월’은 저축은행의 해외투자 사업이 법적으로 불가능한 시기였다. 예언이나 한 듯 이들은 2006년 10월 저축은행의 해외투자가 허용되자 캄코시티 개발사업을 본격화했고, 추가 자금이 투입되지 않자 서로 갈라선 것이었다.
최근 이진복(李珍福) 한나라당 의원은 노무현 정부 당시 부산저축은행 경영진에게 수여된 각종 훈·포장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이진복 의원에 따르면, 김양 부회장은 2006년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당시 총리는 한명숙(韓明淑)씨였다. 김양 부회장의 표창 공적서에는 “생활은 낮게, 생각은 높게, 개인은 검소하게, 사회는 풍요롭게 라는 경영이념을 몸소 실천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2007년 3월에는 김민영 부산2저축은행 대표가 대통령 산업포장을 받았다. 공적서에는 “서민·중소기업을 위한 지역금융기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저금리 시대에 주주들에게 현금배당을 하고 지역 중소기업들에 자금을 대출해 줬으며 부실관리를 잘해 부산 지역 경제를 잘 이끌었다”고 적혀 있다.
신지호(申志鎬) 한나라당 의원은 “민주당 원내대표인 김진표(金振杓) 의원이 2007년 말부터 수차례에 걸쳐 부산저축은행 관계자들과 캄보디아를 방문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진표 의원은 “종교행사 때문에 캄보디아를 방문했을 뿐 부산저축은행과의 관계는 없다”고 반박했다. 김진표 의원은 2007년 세 차례(공식 1회·비공식 2회) 캄보디아를 방문했는데 세 번째의 경우 묘하게도 김양 부회장의 현지 방문 일정과 겹쳤다.
부산저축은행 사건은 박연호 회장을 비롯한 소수의 광주일고 출신 금융마피아가 서민의 돈을 조직적으로 착복하고, 자신들의 부정(不正)을 숨기기 위해 정·관계(政官界) 인사에게 거액의 로비자금을 준 역대 최악(最惡)의 금융사기 사건이다.
지난 3월부터 시작된 검찰의 부산저축은행 수사로 6월 8일 현재 형사 입건된 사람은 53명이다(구속 37명·불구속 16명). 이번 사건의 핵심인물인 박연호 회장은 대주주 자기대출 4조5621억원, 부실대출 등 배임 3672억원, 법인자금 횡령 44억원, 회계분식 1조3105억원, 사기 등 부정거래 1000억원 등의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부패금융인의 만행
부산저축은행 사태는 피해자 수와 피해 금액 또한 최고 수치를 기록했다. 2011년 4월 15일 현재, 5개의 부산저축은행에 돈을 예치한 예금자 3만143명이 예금자보호법상 원금(元金)을 돌려받지 못한다. 못 받는 돈의 총액은 2882억원이다. 정부는 예금자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부산저축은행 전체 예금자 24만5140명에게 3조 4075억원을 지급했다. 이 돈은 일반 국민이 낸 세금이다. 결과적으로 소수의 광주일고 출신 금융마피아가 부산 서민은 물론, 전국민의 돈까지 훔쳐간 셈이다.
기자는 이번 사건을 취재하면서 유독 제2금융권에 호남 인사들, 그중에서 광주일고 출신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대기업 생명보험사에 20년 가까이 근무했던 전직 금융인은 “김대중 정권 이전까지 호남 출신들은 제1금융권에 들어가더라도 최고위직까지 승진하기 어려웠다”며 “제2금융권에서 일하던 광주일고 출신 같은 똑똑한 친구들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회사 전면에 대거 등장했다”고 전했다.
과거 10년 동안 권력의 비호(庇護)를 받아 온 일부 부패(腐敗)금융인들의 만행(蠻行)은 부산겭接춠보해저축은행 사건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 부산저축은행 사건에서 부패의 고리로 작용한 ‘특정고교 동문’이라는 대목을 지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광주에 사는 한 인사는 “광주일고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다. 일부 광주일고 출신이 오히려 호남 전체를 먹칠하고 있다”고 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일부 단체들은 부산저축은행 경영진과 금융당국을 상대로 한 민·형사상 대응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부산저축은행에 돈을 맡긴 사람들은 평생 동안 어렵게 돈을 모은 서민들이 대부분이다. 장애인 남편과 대학생 자녀를 둔 아주머니가 목욕탕 때밀이를 하면서 번 돈으로 부산저축은행이 발행한 채권을 샀다가 전액을 날린 경우도 있고, 1998년 IMF 이후 13년 동안 악착같이 모은 돈 1억5000만원을 저축은행에 예금했다가 원금조차 돌려받지 못한 사람도 있다.
이처럼 억울한 사연을 가진 피해자가 부산저축은행 사건에서만 3만명이 넘는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비분강개(悲憤慷慨)하지 않는다면 정상적 사고(思考)를 하는 교양인(敎養人)이 아닐 것이다.⊙
이 사건의 핵심은 몇몇 광주일고 출신의 금융마피아가 수조 원의 자금을 어떻게 불법적으로 사용했고, 그 과정에서 조성한 거액(巨額)의 비자금을 얼마나 찾아내느냐에 있다. 한 검찰 관계자는 “부산저축은행 사건의 핵심은 비자금 찾기”라며 “악(惡)의 줄기는 캄보디아 개발사업에서 나올 것”이라고 했다.
부산저축은행은 캄보디아 수도(首都) 프놈펜에 신도시 ‘캄코시티’를 건설하기 위해 수천억 원을 쏟아 부었다. 캄코시티 개발사업에만 2984억원을 밀어 넣었다. 또 공항개발사업에 1200억원, 고속도로 개발사업에 542억원, 부지개발사업에 172억원, 깜뽕섬 개발사업에 64억원 등 총 4962억원을 투자했다. 부산저축은행이 추진한 인천 효성동 도시개발사업(4738억원)과 전남 신안군 개발사업(2991억원)보다 더 많은 돈이 들어간 것이다.
사업 1단계도 완성하지 못하고 좌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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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코시티 조감도. |
그렇다면 부산저축은행은 왜 캄보디아를 해외투자처로 선택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캄코시티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했던 것일까. 그 과정을 추적해 봤다.
부산저축은행의 대주주와 경영진은 전국적 명문고(名門高)인 광주일고 출신이다. 박연호(61·43회) 부산저축은행 회장을 비롯해 김양(59·45회) 부회장, 오지열(59·45회) 은행장, 김민영(39회) 대표, 문평기(41회) 감사, 그리고 부산저축은행의 대주주인 박형선(59·45회) 해동건설 회장, 부산저축은행의 계열사인 서울신용평가정보 이정상 대표, 사모펀드 회사 칸서스파트너스 김영재(41회) 대표 등이 같은 학교를 나왔다.
이들은 서로를 형님·동생으로 부르며 사업을 진행해 왔다. 정상적인 여수신(與受信) 영업보다는 국내외 부동산 개발사업에 집중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120여 개의 SPC(특수목적법인)도 만들었다.
캄보디아 사업은 2004년 김양 부회장의 구상에서 출발했다. 그 무렵 부산저축은행 주식을 대량 매입한 박형선 해동건설 회장이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둘은 광주일고 45회 출신으로 막역한 친구 사이다. 2005년 3월 국회의원 7명이 캄보디아 시엠립 지역개발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현지를 방문했을 때 두 사람은 캄보디아에 체류하며 국회의원들을 ‘모셨다’고 한다.
행방 묘연한 3000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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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놈펜에 투자된 한국기업의 개발사업 현황. |
그러나 캄코시티는 전체 6단계 사업 중 1단계도 끝내지 못하고 작년 말 중단됐다. 현재 타운하우스와 빌라 180여 가구만 완공돼 입주가 끝난 상황이다. 아파트 900여 가구 중 440여 채는 완공됐으나 입주율은 10%에 불과하다.
2년 가까이 사업을 준비해 온 김양·박형선 두 사람은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측근 건축가 강모씨에게 도시계획을 맡기기도 했다. 2006년 11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캄보디아를 방문한 후 사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노 대통령의 캄보디아 방문 한 달 전(2006년 10월), 부산저축은행 입장에서 획기적인 일이 벌어졌다. 당시 금감원이 저축은행의 해외 PF(project financing·특정 프로젝트에 자금을 조달하는 금융기법) 투자를 허용했던 것이다. 캄보디아 진출의 법적 토대가 만들어진 셈이었다. 박형선 회장을 잘 아는 한 지인(知人)은 “박 회장이 그 일을 해냈다”고 증언했다.
캄보디아 증권거래소 설립 결정도 이때쯤 이뤄졌다. 한국 정부는 증권거래소 시스템과 운영 노하우를 전수해 주기로 약속했다. 이런 기대 속에 캄보디아 정부는 캄코시티 지역 전체를 ‘금융특구’로 지정했다. 캄보디아 정부는 ‘캄코시티’에 대한 정책적·제도적 지원을 국무회의 주요 안건으로 올릴 정도로 관심을 많이 가졌다고 한다. 김양 부회장은 이런 공로로 캄보디아 정부의 최고 훈장인 ‘소바타라 훈장’을 받았다.
2007년 5~6월경 박연호 회장, 김양 부회장, 김민영 대표, 그리고 대주주 박형선 회장 등 부산저축은행의 핵심(核心) 인사 4명이 캄보디아를 방문해 사업에 힘을 실었다. 2007년 8월에는 프놈펜에 자본금 1500만 달러짜리 ‘캄코뱅크’를 설립했다. 부산저축은행은 광주일고 동문(同門) 장인환 대표가 운영하는 KTB자산운용에서도 돈을 끌어당겼다. KTB자산운용은 2006~2007년 800억원 규모의 사모펀드를 조성, 캄코시티와 캄코뱅크에 투자했다.
캄코시티의 1단계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부산저축은행의 자금 투입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아 마침내 공사는 전면 중단됐다.
현재 부산저축은행이 랜드마크 월드와이드(캄코시티 사업 시행사)에 투입한 돈은 대략 4300억원이다. 그런데 시행사가 지금까지 사업비 명목으로 지출한 금액은 토지 매입비용 400억원과 공사비용 900억원 등 1300억원에 불과하다. 산술적으로 시행사의 금고에 3000억원이 남아 있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현재 이 회사는 지급불능 상태다. 남은 돈 3000억원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검찰은 최소한 수백억 원이 조세피난처를 통해 빼돌려진 정황을 포착하고 금융정보분석원(FIU)과 함께 추적 중이다. 사정당국 관계자는 “부산저축은행 사람들이 세운 캄코뱅크와 전 진로그룹 회장 장진호씨가 세운 ABA은행이 의심스럽지만 캄보디아 측이 이들을 보호하고 있어 수사에 어려움이 있다. ABA은행은 스위스 비밀은행만큼 비밀이 보장돼 현지인들 사이에 인기가 있다”고 했다.
박형선과 노무현의 因緣
거액(巨額)의 돈이 사라진 건 부산저축은행만이 아니다. M&A 전문가들이 세운 ‘연우개발’이라는 회사는 2008년 2월 캄보디아 프놈펜에 42층짜리 고급 주상복합빌딩을 짓겠다고 밝혔다. 사업비는 무려 2억4000만 달러였다. 군인공제회의 자회사인 대한토지신탁이 초기 사업비를 댔다. 이 빌딩도 현재 캄코시티처럼 자금부족으로 공사가 중단됐다. 2009년 3월 이 사업과 관련해 노무현 대통령 사람인 이강철 전(前) 정무특보의 측근이 구속됐다.
캄코시티 개발 과정에서 사라진 돈을 찾기 위해서는 부산저축은행 대주주인 박형선 해동건설 회장이 어떤 사람인지를 살펴봐야 한다. 검찰 수사상황에 밝은 한 고위인사는 “박형선씨가 입을 열지 않아 수사에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며 “캄보디아 현지 금융권의 자금 흐름을 확인하는 일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박형선 회장, 그는 과연 누구인가.
2002년 5월 6일 광주지역의 인터넷 매체인 <전라도닷컴>이 보도한 ‘노풍의 광주 주역들’이란 기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보성건설 부사장 출신인 사업가 박형선씨는 1982년 부미방(부산미문화원방화) 사건으로 노 후보와 인연을 맺었다. 친구 사이인 방화사건의 주역 김현장씨의 변호를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 자청하면서 처음 만났다. 이후 정치에 입문한 노 후보가 광주에 내려오면 숙소도 잡아 주는 등 금전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한번은 3~4년 전엔가 한 주간잡지가, 여론조사 결과 노 후보가 ‘차세대 정치지도자 1위’로 나왔다고 대서특필했다. 박씨는 이 주간지를 대량으로 사들여 뿌렸고, 이것도 부족해 노 후보의 보좌역인 이광재씨 등이 광주에 오면 “이 책을 사서 부산 가서 많이 뿌려라”며 일부러 돈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민청학련 출신으로 세미나, 강연, 중소기업인과의 미팅, 교수 및 법조인과 여성단체, 재야단체, 언론기관 등 공식적인 당조직 외의 일반 사조직 관련 만남을 두루 주선했다.>
2003년 2월 6일 당시 친노(親盧) 매체인 <오마이뉴스>의 기사도 주목을 끈다.
<노무현 당선자는 지난 1월 28일 광주에서 국정토론회를 마치고 한 호텔에서 김수복·박형선·정향자·정찬용씨 등 광주 시민사회 현장 지도자들을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중략) 기업가 박형선씨는 음으로 양으로 노 당선자를 지원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리에서는 노무현 당선자는 “여러분이 추천하는 사람이라면 믿고 쓰겠습니다, 추천해 주십시오”라고 청했고, 이들은 광주 시민사회의 여론을 수렴해 만장일치로 정찬용씨를 추천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 기사에 등장하는 박형선 회장의 회사는 노무현 정권 시절 급성장했다. 박형선 회장과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화 운동가를 자처해 왔다. 운동권 출신들이 권력과 가까워지면 부패 혐의자로 변질하는 경우가 많다.
박형선 회장의 집안은 광주에서 유명한 ‘운동권 명문가’라고 한다. 그는 광주일고를 졸업하고 전남대에 들어간 후 ‘민청학련’ 사건으로 1974년 구속돼 10개월간 감옥생활을 했다. 이해찬(李海瓚) 전 국무총리, 정찬용(鄭燦龍) 전 청와대 인사수석 등이 민청학련 사건 동지들이다.
박형선 회장은 2002년 친구 회사인 보성건설을 그만두고 성호종합건설을 인수했다. 그해 8월 해동건설로 이름을 바꿨다. 토목건축 공사가 주요 사업이었다. 박형선 본인과 가족이 주식 100%를 갖고 있다. 2010년 현재 누적(累積) 공사 매출액은 2914억원이다. 작년 당기순이익은 60여억원이었다.
해동건설은 2003년부터 공사 매출액이 늘었다. 2003년 276억원, 2004년 302억원, 2005년 405억원, 2006년 462억원, 2007년 601억원이었다. 노무현 정권 때 사업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이 회사가 진행해 온 공사는 영산강 하구둑, 새만금 개발, 광양시 하수처리장, 여수세계박람회 건설 등이다. 서울 천호대로 광나루역과 낙동강 공사도 맡았다.
박형선 회장은 오지열 부산중앙저축은행장과 사돈 관계다. 박 회장의 아들과 오 행장의 딸이 결혼할 때 박상구 부산저축은행 창업주가 주례를 섰다. 당시 이해찬 총리 등 노무현 정부 실세들이 대거 참석했다고 한다.
박형선 회장을 잘 아는 한 인사는 주목할 만한 내용을 전했다.
“박형선 회장은 지난 정부 때 사업체를 많이 키웠습니다. 관급 공사도 적지 않게 따냈습니다. 그분은 노무현 대통령, 그리고 그의 측근들과 아주 친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수사가 진행될 때 그는 아주 힘들어했습니다.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이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려 검찰 수사가 중단되자 그는 ‘죽다 살았다’는 투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뭔지 모르지만 깊은 근심이 사라지자 안도했던 것입니다. 일각에서는 2006년 금호그룹이 대우건설을 인수할 때 그분이 박삼구 회장에게 도움을 줬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광주일고 출신인 박삼구 회장은 고교 동문을 적극 챙기는 대표적인 재계(財界) 인사로 알려져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에 광주일고 출신이 많은 이유다.
복수의 정부기관 관계자는 “부산저축은행 사건과 조현오 경찰청장의 노무현 대통령 명예훼손 사건으로 검찰은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직후 봉인했던 수사기록을 다시 꺼낼 수 있다. 당시 수사팀은 해외에 있는 출처 불명의 자금을 추적하는 중이었고 국내에는 서울 종로구 ○○은행 지점의 계좌번호까지 확인한 걸로 안다”고 전했다.
수상 대상으로 떠오른 광주일고 출신의 시행사 대표
캄보디아 투자금의 행방을 추적하는 데 주목해야 할 사람이 또 있다. 캄코시티 프로젝트 시행사인 랜드마크 월드와이드의 대표인 이상호(54)씨다. 이상호씨 역시 광주일고 출신이다. 그는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3년 자본금 11억원으로 시행사를 설립한 그는 캄보디아 개발사업의 열쇠를 쥐고 있다. 검찰은 이씨를 수사선상에 올려놓고 있고 회사 자금의 흐름을 추적하고 있다.
부산저축은행은 캄코시티 프로젝트 외에 신공항과 고속도로 건설에 각각 1200억원과 620억원을 투자했다. 이들 공사는 현재 어려움에 처해 있다. 캄보디아 고위 공무원들이 사업부지에 ‘알박기’를 하는 바람에 진척이 잘 안된다는 것이다.
캄코시티 건설과 관련해 부산저축은행과 시행사의 경영진은 2005년 8월 계약을 체결했다. 사업초기 이들은 고교 동문(同門)이라는 인연으로 손발이 척척 맞았다. 자금(資金) 문제가 불거지면서 두 경영진의 거리는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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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고 총동창회 홈페이지에 게재돼 있는 부산저축은행과 금호그룹 계열사의 광고. |
최근 이진복(李珍福) 한나라당 의원은 노무현 정부 당시 부산저축은행 경영진에게 수여된 각종 훈·포장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이진복 의원에 따르면, 김양 부회장은 2006년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당시 총리는 한명숙(韓明淑)씨였다. 김양 부회장의 표창 공적서에는 “생활은 낮게, 생각은 높게, 개인은 검소하게, 사회는 풍요롭게 라는 경영이념을 몸소 실천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2007년 3월에는 김민영 부산2저축은행 대표가 대통령 산업포장을 받았다. 공적서에는 “서민·중소기업을 위한 지역금융기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저금리 시대에 주주들에게 현금배당을 하고 지역 중소기업들에 자금을 대출해 줬으며 부실관리를 잘해 부산 지역 경제를 잘 이끌었다”고 적혀 있다.
신지호(申志鎬) 한나라당 의원은 “민주당 원내대표인 김진표(金振杓) 의원이 2007년 말부터 수차례에 걸쳐 부산저축은행 관계자들과 캄보디아를 방문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진표 의원은 “종교행사 때문에 캄보디아를 방문했을 뿐 부산저축은행과의 관계는 없다”고 반박했다. 김진표 의원은 2007년 세 차례(공식 1회·비공식 2회) 캄보디아를 방문했는데 세 번째의 경우 묘하게도 김양 부회장의 현지 방문 일정과 겹쳤다.
부산저축은행 사건은 박연호 회장을 비롯한 소수의 광주일고 출신 금융마피아가 서민의 돈을 조직적으로 착복하고, 자신들의 부정(不正)을 숨기기 위해 정·관계(政官界) 인사에게 거액의 로비자금을 준 역대 최악(最惡)의 금융사기 사건이다.
지난 3월부터 시작된 검찰의 부산저축은행 수사로 6월 8일 현재 형사 입건된 사람은 53명이다(구속 37명·불구속 16명). 이번 사건의 핵심인물인 박연호 회장은 대주주 자기대출 4조5621억원, 부실대출 등 배임 3672억원, 법인자금 횡령 44억원, 회계분식 1조3105억원, 사기 등 부정거래 1000억원 등의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저축은행의 어제와 오늘] 저축은행의 역사는 권력형 비리의 변천사 저축은행은 1972년 8월 ‘상호신용금고법’에 의해 만들어진 상호신용금고에서 출발했다. 상호신용금고는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폭풍 속에 잠겼다. 1997년 전국의 231개 상호신용금고는 2001년 121개로 줄었다. 상호신용금고들은 각종 게이트에 연루됐다. 정현준 게이트에 동방상호신용금고, 이용호 게이트에서는 대양상호신용금고가 불법대출을 해 줬다. 진승현 게이트에서는 열린상호신용금고가 연루됐다. 금고 업계는 이런 일이 터지자 정부를 향해 “명칭을 바꿔 달라”고 호소했다. 김대중 정부는 2002년 업계의 요청을 받아들여 상호신용금고를 ‘상호저축은행’으로 바꿨다. 서민금융 활성화를 명분으로 예금보호 한도도 2000만원에서 5000만원으로 올렸다. 그동안 허용되지 않던 PF 대출도 국내에 한해 허락했다. 노무현 정부 들어 금융감독원은 2006년 10월 ‘저축은행의 해외 PF를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저축은행은 2007년 초부터 PF 대출을 통해 해외 개발사업에 뛰어들었다. 부산저축은행의 공식적인 캄보디아 진출 시기도 이때였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사정이 달라졌다. 이명박 정부는 저축은행들의 부동산 PF(특히 브리지론) 부실이 심각하다고 보고 인수합병(M&A)을 유도했다. 2008년 9월 우량 저축은행이 부실 저축은행을 인수했다. 이 과정에서 저축은행은 정부에 ‘상호’라는 말을 빼 달라고 요구했다. 정부는 2008년 12월 이 요구를 들어주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국회는 이를 받아들였다. ‘상호신용금고’가 ‘저축은행’으로 이름이 바뀌는 과정에서 이들 금융기관은 각종 비리를 저질렀다. 저축은행의 역사는 ‘권력형 비리’의 변천사였다. |
부패금융인의 만행
부산저축은행 사태는 피해자 수와 피해 금액 또한 최고 수치를 기록했다. 2011년 4월 15일 현재, 5개의 부산저축은행에 돈을 예치한 예금자 3만143명이 예금자보호법상 원금(元金)을 돌려받지 못한다. 못 받는 돈의 총액은 2882억원이다. 정부는 예금자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부산저축은행 전체 예금자 24만5140명에게 3조 4075억원을 지급했다. 이 돈은 일반 국민이 낸 세금이다. 결과적으로 소수의 광주일고 출신 금융마피아가 부산 서민은 물론, 전국민의 돈까지 훔쳐간 셈이다.
기자는 이번 사건을 취재하면서 유독 제2금융권에 호남 인사들, 그중에서 광주일고 출신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대기업 생명보험사에 20년 가까이 근무했던 전직 금융인은 “김대중 정권 이전까지 호남 출신들은 제1금융권에 들어가더라도 최고위직까지 승진하기 어려웠다”며 “제2금융권에서 일하던 광주일고 출신 같은 똑똑한 친구들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회사 전면에 대거 등장했다”고 전했다.
과거 10년 동안 권력의 비호(庇護)를 받아 온 일부 부패(腐敗)금융인들의 만행(蠻行)은 부산겭接춠보해저축은행 사건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 부산저축은행 사건에서 부패의 고리로 작용한 ‘특정고교 동문’이라는 대목을 지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광주에 사는 한 인사는 “광주일고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다. 일부 광주일고 출신이 오히려 호남 전체를 먹칠하고 있다”고 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일부 단체들은 부산저축은행 경영진과 금융당국을 상대로 한 민·형사상 대응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부산저축은행에 돈을 맡긴 사람들은 평생 동안 어렵게 돈을 모은 서민들이 대부분이다. 장애인 남편과 대학생 자녀를 둔 아주머니가 목욕탕 때밀이를 하면서 번 돈으로 부산저축은행이 발행한 채권을 샀다가 전액을 날린 경우도 있고, 1998년 IMF 이후 13년 동안 악착같이 모은 돈 1억5000만원을 저축은행에 예금했다가 원금조차 돌려받지 못한 사람도 있다.
이처럼 억울한 사연을 가진 피해자가 부산저축은행 사건에서만 3만명이 넘는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비분강개(悲憤慷慨)하지 않는다면 정상적 사고(思考)를 하는 교양인(敎養人)이 아닐 것이다.⊙
최초증언|박형선 회장의 지인이 밝힌 ‘박형선과 노무현 정권’ 박형선은 광주·전남의 청와대 부산저축은행 대주주이자 해동건설 회장인 박형선씨는 노무현 정권 당시 ‘광주·전남의 청와대’로 불릴 만큼 실력자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의 후원자였던 강금원·박연차 회장보다 더 깊은 후원자 역할도 했다고 한다. 박 회장과 운동권 동지였던 A씨는 “박 회장 부부는 노 대통령 내외와 청와대 관저에서 독대할 만큼 아주 가까웠다”고 전했다. 다음은 ‘박형선과 노무현’의 인연에 대한 A씨의 최초 증언이다. <박형선 회장은 광주일고 동아리 ‘진클럽’ 출신이다. 이 클럽에는 ‘행동’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는 전남대 농대를 다니면서 민주화운동을 했고 졸업 후 친구 이○○가 운영하는 보성건설에 들어갔다. 박 회장은 그 회사에서 영업을 도맡아 했다. 2002년 회사를 나왔는데 친구에게서 60억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180억원을 받아냈다. 2002년 여름에 건설회사를 인수해 해동건설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2002년 4월 광주에서 열린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노풍(盧風)’이 불었는데 박 회장의 역할이 컸다. 당시 두 개의 팀이 가동됐다. 하나는 박 회장팀이고, 또 다른 하나는 농협 출신의 김○○팀이다. 박 회장팀에는 정찬용·김수복씨 등이 있었다. 광주의 각종 재야단체의 상층부를 대상으로 활동했다. 김○○팀은 진성당원 등 하층부를 대상으로 움직였다. 박 회장은 2002년 대선 내내 노무현 후보 측에 돈과 조직을 제공했다. 대선 승리 후 그는 정찬용씨를 인사수석으로 추천했다. 2002년 노풍을 일으켰던 두 팀의 핵심멤버들은 내년 대선(大選) 때 ‘제2의 노풍’을 기대하고 있다. 이들은 김정길씨나 문재인씨를 염두에 두고 있다. 노무현 정권이 출범한 2003년 박 회장은 광양·여수 해안선 공사의 일부를 따냈다. 이 사업의 전체 공사비는 수천억 원 규모였다. 노무현 정권 초기부터 광주·전남에서 박 회장의 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박 회장은 ‘광주·전남의 청와대’로 불렸다.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던 것은 그가 철저히 뒤에서 움직였기 때문이다. 박 회장은 노무현 대통령을 청와대에서 만날 때 대통령 관저에서 독대를 했다. 그는 노 대통령을 ‘형님’, 권양숙 여사를 ‘형수’라고 불렀다. 박 회장의 부인 윤○○씨는 권 여사를 ‘언니’라고 불렀다. 양씨는 김치를 담가 청와대에 가져가곤 했다. 두 내외(內外)는 오래 전부터 가깝게 지냈다. 박형선 회장은 이광재, 안희정, 서갑원, 천호선 등과 가깝게 지냈다. 이들은 박 회장을 ‘형선이 형’이라고 불렀다. 얼마 전 언론에 박 회장의 별장 얘기가 나왔을 때 이들은 모른다고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를 너무 잘 안다. 얼마 전 저축은행 사건이 터진 후 문재인씨도 박 회장을 알지도 못한다고 했는데 이것 또한 거짓말이다. 부산저축은행 사건으로 박 회장이 문제가 되자 ‘광주 노무현재단’ 측은 5·18단체 관계자에게 “박 회장은 노무현 정권과 관련이 없다”고 말해 줄 것으로 요청했다. 그러나 5·18단체 관계자는 이를 거절했다. 지금 민주당 소속 호남지역구 의원들은 부산저축은행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들이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이용섭 대변인 스스로가 잘 알 것이다. 2003~2004년 박 회장은 고교 동문이 운영하는 부산저축은행의 주식을 샀다. 그는 2006년 여러 일들을 했다. 2006년 10월 저축은행도 해외 PF 개발투자가 가능해졌는데 그의 역할이 컸다. 그는 그해 금호아시아나가 대우건설을 인수할 때도 움직였다. 2006년 11월 노무현 대통령이 캄보디아를 방문했을 때 박 회장과 김양 부산저축은행 부회장도 따라갔다. 박 회장의 부인은 주위사람들에게 ‘노 대통령이 남편을 훈센 총리에게 직접 소개하면서 대한민국의 대표 사업가라고 소개했다’며 자랑하고 다녔다. 박 회장은 순수한 운동권 인사가 아니다. 그는 노무현 정권을 사업적으로 활용했다. 박 회장은 노무현 정권 때 광주일고 친구인 오지열 부산저축은행장과 사돈을 맺었다. 결혼식은 서울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열렸다. 식장에는 이해찬 총리를 비롯해 여당과 행정부의 고위인사들이 많이 왔다. 2009년 노무현 대통령이 저세상으로 간 후 검찰의 수사가 중단되자 그를 아는 광주사람들은 “하늘이 돕는구나”라고 말했다. 검찰 수사가 시작되면서 광주에는 “박형선 회장도 이제 끝이다”는 얘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수사 기간 내내 가슴을 졸였다. 그러나 노 대통령 서거 후 활발히 움직였다. 박 회장은 뚝심이 아주 세다. 검찰이 그를 수사하고 있지만 어떤 자백도 받아내지 못할 것이다. 박 회장의 입을 열게 하려면 그의 부인을 움직이게 하는 수밖에 없다. 박 회장은 구속되기 직전 주변 사람들에게 “3~4년 감방에 있다 나올 테니 정권(政權)을 바꿔 달라”고 얘기하고 구속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