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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기적을 만든 사람들

복지정책 50년

경제발전과 함께 발전한 복지정책

글 : 김종대  전 보건복지부 기획관리실장

정리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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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대통령, 신현확 보사부 장관에게 의료복지정책 수립을 특별 당부”
⊙ 사회주의적 논리를 앞세워 의료보험 통합을 강행… 의보 재정파탄

金鍾大
⊙ 1947년생. 서울대 정치과 졸업. 대구한의대 명예보건학 박사.
⊙ 보사부 사회보험국장, 의료보험국장, 보건복지부 기획관리실장 역임. 현 대구가톨릭대 의과대 교수.
의료보험 제도 실시 직후 병원에 몰려든 환자들. 1977년 7월 1일 처음 시행된 의료보험 제도에는 513개 조합 314만명(전 국민의 8.8%)이 가입했고 점차 가입자가 늘어 12년 후 전 국민으로 확대됐다.
  한국의 정책 역사는 1961년 5·16에서 시작된다. 4·19 이후 장면 과도정부에 분출된 사회개혁에 대한 요구들이 5·16 군사정부의 ‘혁명공약’으로 실천됐기 때문이다. 4대 사회보험(산재보험·건강보험·국민연금·고용보험)과 공공부조(생활보호제도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정책결정 과정에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의지와 고민이 배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2년 7월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회의 의장은 내각수반에게 “사회보장 제도를 확립하라”는 지시각서를 내렸는데 3공화국이 들어선 1963년 11월 사회보장에 관한 법률과 산업재해보상법이 마련되고 그해 12월 의료보험법이 제정돼 그 기초가 마련된 것이다.
 
  사회보장 제도 연구를 통해, 혁명공약이었던 사회개혁이 지지부진한 것을 만회해 보려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먼저 4대 사회보험 중의 하나인 의료보험법을 들여다보자. 이 법은 1963년 12월 제정됐다. 박정희 의장이 1962년 시정연설에서 ‘복지국가건설’을 기본정책으로 공표한 뒤 본격적 연구가 시작됐다.
 
  그러나 당시 의료보험법은 ‘강제조항’이 삭제된 채 근로자와 농·어민의 ‘임의가입’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제도적 골격만 마련된, 실효성 없는 법안으로 남게 된 셈이다. 사실 5·16 이후 집권세력이 국민적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강제적으로 의료보험 가입을 권할 상황이 아니었다. 국가의 경제적 여건과 사회적 성숙도 역시 강제가입은 불가능했다고 봐야 한다.
 
  또한 군사권력으로 집권한 통치자의 정치적 부담이 컸던 당시는 경제적 상황도 대단히 어려웠다. 당연히 의료비에 대한 가계 부담 또한 높았다. 논밭을 팔고, 집을 팔아 병원비를 내야 할 판이었다.
 
  그러다 1976년 12월 의료보험법 2차 전면개정과 이듬해 7월 동법이 시행되면서 자리를 잡게 됐다. ‘강제가입’ 조항을 삽입함으로써 비로소 정착된 셈이다.
 
  박 대통령은 1976년 1월 연두기자회견에서 국민의료 제도 확립을 밝힌 데 이어 그해 2월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연두 순시에서 거듭 의료보험 실시 검토를 지시했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金正濂)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1975년 12월 개각 당시 의료보장 제도의 실시, 노사문제 그리고 근로자의 권익옹호와 처우개선 등 어려운 문제가 많은 보사부 장관의 후보 인선에 각별히 신경을 써 달라는 분부가 있으셨다. 박 대통령은 신임 신현확(申鉉碻) 보사부 장관에게 의료복지정책을 쓰되 국방력 강화와 경제의 고도성장이 계속해서 요긴한 우리 현실에 비춰 우리 실정에 맞는 건전한 제도를 마련해 달라고 특별히 당부하셨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신임하던 신현확 장관에게 의료보험법 시행을 맡긴 것이다. 그만큼 대통령의 의료보험 도입 의지가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신현확 對 남덕우의 의료보험 논쟁
 
1978년 2월 1일 박정희 대통령이 보사부를 순시, 신현확 보사부 장관으로부터 영접을 받고 있다.
  그러나 ‘강제가입’ 조항이 담긴 의료보험제 시행을 두고 정부 내 논쟁이 컸다. 신현확 장관과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남덕우(南悳祐) 장관이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당시 남·신 장관은 한국 경제를 이끄는 양대 산맥이 아닌가.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7~1981)을 착실히 입안해야 했던 남 장관으로선 의보 시행이 시기상조라는 주장을 폈다. 경제여건이 성숙하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사실 1976년 당시 국내 상황은 최악이었다. 오일쇼크 위기가 몰아쳐 국민의 가계소득이 줄어 의료비 지출이 막막했다. 서민들은 집에서 재래적 민간요법으로 치료하거나 동네 약방이나 약국에서 산 약으로 대증(對症) 치료에 그칠 뿐이었다.
 
  게다가 북한의 경제력이 남한을 압도, 사회주의 체제가 우위를 점하는 시대였다. ‘모든 북한 주민은 무상의료를 받는다’는 북한의 대남(對南) 선전이 박 대통령으로선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일간지 사회면은 연탄가스에 중독됐지만 돈이 없어 병원을 전전하다 숨진 서민의 절절한 사연을 중요 기사로 다뤘다. 국민들을 잘살게 해 주겠다며 군사혁명을 일으킨 박 대통령으로서는 굉장히 아픈 대목이었을 것이다.
 
  신 장관은 “사회보험 제도 시행을 더 지체하면 사회불안이 온다. 사회가 안정돼야 경제개발도 안정적으로 달성한다”는 논리로 남 장관을 압박했다. 박 대통령은 신 장관 손을 들어 주었다. 매우 큰 결단이었다.
 
  당시 신 장관은 전체 보사부 직원들을 불러 모아 놓고 이런 말을 했다.
 
  “사회보장 제도 도입이 늦으면 사회가 불안해진다. 비 오는 날, ‘경제’라는 큰 수레가 지나고 나면 무른 땅에 바큇자국이 깊이 팬다. 경제발전 이면의 바큇자국을 지우는 게 공적부조이자, 사회개발이다. 그대로 놔두면 땅이 굳어 버려 바큇자국을 영영 못 지운다.”
 
  보사부 직원들은 신 장관의 말에 100% 공감했다. 사명감으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신현확, 차 안에서 일본 의보책 번역하기도
 
1977년 당시 ‘강제가입’ 조항이 담긴 의료보험제 시행을 두고 정부 내 논쟁이 컸다. 신현확 보사부 장관과 경제기획원 남덕우 장관이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1997년 4월 청와대에서 신현확(앞쪽), 남덕우 전 장관을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필자는 1976년 11월 12일 조달청에서 보사부 복지연금국 연금기획과로 발령이 났다. 신 장관이 직접 조달청장에게 전화해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그렇게 행정고시 출신 젊은 공직자를 신 장관이 직접 ‘리크루팅(recruiting·충원)’할 정도로 의보개혁에 대한 정부의 의지가 단단했다.
 
  연금기획과의 주된 업무는 의료보험 문제였다. 1977년 7월 1일 의료보험이 시행될 예정이었던 만큼 남은 시간이 6~7개월에 불과했다.
 
  필자는 일본, 독일, 프랑스 등 선진국 의료보험 실시사례를 수집하고 꼼꼼하게 분석했다. 각국 의보(醫保) 제도를 비교·검토하며 한편으론 입법도 챙겨야 했다. 한국 의료보험법령의 주춧돌은 그렇게 놓였다.
 
  눈코 뜰 새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산적한 업무를 처리하느라 연금기획과(나중 보험관리과로 분리되면서 첫 보험관리과장이 되었다) 직원들은 더위를 참아 가며 의료보험법을 두고 씨름했다. 신현확 장관도 승용차 안에서 일본 의료보험 관계 서적을 읽으며 제도를 검토하고, 자신이 직접 읽은 내용을 번역해 실무자에게 보내줄 정도였다.
 
  ‘의료보험은 사업장 근로자부터 시행한다.’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기 위해 단계적으로 확대해 나간다.’
 
  우리는 이런 원칙부터 정했다. 먼저 500명 이상의 사업장부터 시행하고 다음으로 300인 이상, 100인 이상 순으로 점차 확대하는 직장 의료보험 사업을 전략적으로 시행키로 했다. 그렇게 하여 얻어지는 노하우를 바탕으로 농어촌 의료보험 사업과 도시지역 의료보험 사업까지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물론 한꺼번에 시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현실이 여의치 못했다. 시행이 가능한 분야부터 재정상황을 감안해 단계적으로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
 
  500인 이상 근로자가 있는 사업장부터 의료보험을 시작했을 때, “왜 돈 있는 사람들부터 먼저 시작하느냐”는 비판도 많았다. 그러나 ‘500인 이상’이라 해도 모두가 돈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사장도 전무도 있지만 일반 사원이나 생산직 사원이 대부분이다.
 
  사실 1977년 7월 의료보험이 시작되기 전인 그해 1월 저소득 영세민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호’ 제도가 먼저 시작되었다. 보험료 내기가 버거운 영세민과 생활보장 대상자에게 공적부조 제도로서 ‘의료보호’ 제도를 우선 시행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한 가지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 장맛비가 몹시 내리던 1977년 여름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경기도 안양 만안교 근처에 있던 집으로 퇴근하기 위해 사무실을 나섰다. 당시 보사부는 서울 광화문에 청사가 있었다. 폭우 탓에 안양행 버스가 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서울역까지 걸어갔다. 서울역에 가면 버스가 있을 것 같아서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택시를 잡아타려 주머니를 뒤적였으나 텅 비어 있었다. 그때가 밤 10시쯤이었다. 비를 맞으며 새벽이 돼서야 안양에 도착했지만, 우리집이 보이지 않았다. 모든 가재도구와 함께 집마저 떠내려가고 없었다. 아내와 어린아이들은 동네 중국음식점 2층에 대피하고 있었다. 바깥일에 매달려 가족을 지키지 못한 미안함에 목이 메었다. 지금도 장마가 쏟아지거나 의료보험 제도에 문제가 생겨 괴로울 때면 그때의 일이 떠오른다. 필자에게 의료보험은 그렇게 밥 굶어 가면서 만든 제도다. 비가 폭포같이 쏟아 붓는데도 가족 걱정은 손톱만큼도 하지 않은 무심한 가장이 만든 제도였다.
 
 
  전두환, 의보 통합 논의에 제동
 
  1977년 7월 사업장 근로자 의료보험 시행을 시작으로 1979년 1월부터 공무원·사립학교 교직원 의료보험이 적용되고, 1981년 7월부터 지역주민의료보험 시범사업까지 시행됐다.
 
  그러나 1982년 당시 사업장 근로자(1종), 지역주민·자영자(2종), 공무원·교직원 의료보험에 포함되는 인구는 전 인구의 32.3%(1268만900여 명)에 불과했다. 의료보험 대상이 아닌 이들 대부분이 농어민, 도시 자영자, 영세 사업장 근로자들이었다. 의료보험에서 소외받고 있던 이들 또한 대부분 의료시혜가 절실한 저소득층이었다. 그들은 의료보험 수가보다 157% 수준이나 되는 일반 의료수가를 적용받고 있어 이중고를 겪고 있었다.
 
  게다가 2종 의료보험 시범사업 결과, 1년간의 보험료 징수실적이 61.9%인 것도 고민거리였다. 의보재정 적자도 느는 상황이었다. 현 체제로 전 지역 주민에게 의보 적용을 할 때에는 정부의 재정 부담이 가중될 것은 불문가지였다.
 
  1982년 11월 2일 청와대에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의료보험 일원화에 관한 보고가 있었다. 당시 정부 측에서는 민정당 이종찬(李鍾贊) 원내총무, 최영철(崔永喆) 보사위원장, 김정례(金正禮) 보사부 장관이 의료보험 일원화에 대해 보고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보사부가 작성한 보고서를 이종찬 총무가 직접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점이다. 당시 이 총무는 전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실력자였다. 청와대에서는 김태호(金泰鎬) 정무2수석비서관과 윤성태(尹成泰) 비서관이 검토보고를 했다. 필자 역시 청와대 행정관으로 관여하고 있었다. 이 총무가 주장하는 통합일원화 주장의 요지는 이러했다.
 
  <전 국민을 상대로 조기에 의료보험을 확대실시하기 위해서는 피용자(被傭者)와 자영자를 통합해 단일 관리하는 게 좋다. 왜냐하면 피용자 의료보험의 재정 적립금 내지 재정 흑자 분을 자영자에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 의료보험 확대가 용이하다.>
 
  이 총무의 보고를 들은 대통령은 윤성태 비서관에게 의견을 물었다. 윤 비서관은 “통합이 불가능하다”는 반대 입장을 개진했다. 논리는 이러했다.
 
  <근로자·자영자·농민을 하나의 잣대로 보험료 기준을 마련해야 하나, 소득 파악률이 낮은 게 문제다. 여러 직업군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통일되고 형평성 있는 보험료 부과기준을 마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윤 비서관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청와대 비서실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구구절절 맞는 얘기 아닌가? 당에서 공부 좀 해요.”
 
  결국 1983년 의보통합 논의는 표면적으로 잠잠해졌다.
 
 
  1989년 노태우 대통령도 의보통합 법안에 거부권
 
2000년 7월 의료보험통합과 의약분업으로 2001년 3월 건강보험재정이 파탄 나자 김대중 정부는 우선 은행차입(2001~2004년, 35조원)으로 진료비를 지급하면서 보험료를 대폭 인상(3년간 22.5%, 23.4%, 25.7%)했다. 사진은 의약분업 초기인 2001년 8월 서울 성북구 한 동네약국 모습.
  노태우(盧泰愚) 정부 출범 이후 2대 보사부 장관으로 의사협회 회장 출신인 문태준(文太俊) 장관이 취임했다. 문 장관은 1989년 1월 필자를 보사부 공보관에 임명했다. 이른바 여소야대 시절이었다.
 
  1989년 3월 9일 야 3당인 민주당, 평민당, 신민주공화당은 야당 단일안으로 통합법안인 국민의료보험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통합 법안은 전국을 단위로 직장·직종·지역에 관계없이 전 조합원의 소득에 따라 보험료를 납부하도록 하는 의료보험 법안이다.
 
  그러다 당시에도 자영업자에 대한 소득 파악률이 몹시 낮았다. 도시 자영업자의 경우 소득 파악률이 11%(농어촌은 60%)에 불과했다. 이렇게 낮은 소득 파악률 때문에 표준소득을 기준으로 보험료가 부과될 경우 소득 노출도가 높은 도시 근로자의 보험료 부담이 자영업자들보다 2.8배 정도 더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필자는 야당 의원들에게 “통합법안이 시행되면 법 개정의 경과조치 기간인 2년6개월 동안에, 그나마 지금까지 이뤄 놓은 의료보험 체계가 전반적으로 붕괴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결국 의료보험 통합법안의 곡절 많은 논란이 불가피했다. 그리고 1989년 3월 16일 노태우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열어 ‘통합 법안에 대한 재의요구안’을 가결했고, 노 대통령은 3월 22일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렇게 해서 당시 야 3당 단일안으로 국회를 통과한 통합의료보험법안은 그 시행을 멈추었다.
 
  당시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를 한 일을 두고 뒷얘기가 많았다. 통합법안의 문제점을 처음 제기한 사람이 필자였기에 대통령의 거부권을 두고 ‘보사부 김종대 공보관의 거부권 행사’라는 말이 회자됐다.
 
 
  김대중, 의보통합으로 건강보험 재정 부실화 초래
 
  필자는 김대중(金大中) 정부의 대선 공약인 의료보험 통합이 ‘국민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정책’이라 맞서다 25년간 일하던 자리에서 ‘직권 면직(職權免職)’이란 형태로 쫓겨났다.
 
  김대중 정부는 2000년 7월 1일을 기해 지역의보, 공무원·교직원 의보, 직장의보를 하나로 통합하고, 단일 보험자(보험회사)로 건강보험공단을 설립했다. 지금까지 사업장 또는 시·군·구 지역별로 노사합의나 주민 자치적으로 운영하던 의보시스템을 국가관리하에 건강보험공단에서 획일적으로 관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를 배제한 국가관리의 획일적 보험방식을 ‘사회주의에 경도된 정책’이라 생각한다. 보험은 수지(收支)를 맞추는 것이 우선이라는 교과서적 논리를 무시하고, 소득 재분배를 우선으로 한다는 사회주의적 논리를 앞세워 의보통합을 강행함으로써 의보재정 파탄을 가져왔다.
 
  국민은 건강보험 파탄으로 4중고를 겪고 있다. 보험료 부담이 늘어나지만, 오히려 보험혜택이 줄어들고 있다. 정부가 파탄 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수가나 급여기준을 재정 절감에만 맞추다 보니 의료의 질과 서비스도 급격히 저하되는 4중고를 맞고 있다.
 
  2000년 7월 의료보험 통합과 의약분업으로 2001년 3월 건강보험 재정이 파탄 나자 김대중 정부는 우선 은행차입(2001~2004년, 35조원)으로 진료비를 지급하면서 보험료를 대폭 인상(3년간 22.5%, 23.4%, 25.7%)했고 여기다 국고지원 대폭 확대(2001년 69.1%), 담뱃값에 보험료부담제도(500원) 신설, 의료수가 인상억제, 의료기관 심사강화 등으로 고육책을 써 왔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현재 건강보험 제도 운용의 틀을 선진국의 경쟁방향으로 바꾸는 개혁이 필요하다. 건강보험공단 지역본부(6개)를 상호 경쟁시켜 관리의 효율화를 도모하면서 단계적으로 경쟁과 자율의 폭을 확대하는 방안과 전략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의약분업으로 인해 매년 보험재정 순 지출증가액이 3조원 내외가 되어 이에 대한 개선 없이는 보험재정 파탄 극복과 건강보험 제도의 지속 가능성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 문제의 또 다른 핵심이다.
 
  현재 매월 1000억~2000억원의 건보재정 적자가 쌓이고 있다. 이대로라면 2012년에 재정이 고갈될 수 있다는 추산이 나오는 상황이다. 2012년은 대선의 해다. 야당이 자신들의 건보재정 파탄을 호도하기 위해 또 다른 포퓰리즘 정책을 내세울 공산이 크다. ‘무상급식’에 이어 ‘무상의료’다. 무상의료는 건보재정을 완전히 거덜낼 무시무시한 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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