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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인터뷰

'김정일의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 - 내가 만난 김정은

“金正日, 金正恩 9살 생일잔치 때 후계자로 낙점”
2009년 처음 알려진 金正恩 찬양노래 <발걸음>은 9살 생일잔치 때 만든 노래.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goms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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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正日, ‘바카라’ 최고숫자 ‘9’자 신봉… 당 대표자회도 숫자 합이 ‘9’인 9월 28일 열어
⊙ ‘金正恩의 생모가 金玉’ 說은 사실무근
⊙ 金正日, 金正恩을 이름 대신 ‘작은오빠’라고 불러
⊙ 金正恩, 기쁨조 공연보고 ”여자 가슴 크다”고 후지모토에게 말해
⊙ 金正恩, “우리는 중국을 모범으로 살아야”

후지모토 겐지·藤本健二
1947년 일본 아키타현(秋田縣)에서 태어나 도쿄 긴자(銀座)의 최고급 초밥집 ‘스시센(壽司淸)’에서 일본요리를 익혔다. 1982년 8월 처음 북한에 들어가 ‘안산관(安山館)’의 요리사로 일했으며, 1988년 김정일의 전속요리사로 뽑혀 13년을 일했다.
1998년 6월 스파이 혐의로 1년6개월 간 가택연금을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다 2001년 4월 일본으로 탈출, 일본에서 2003년 <金正日의 料理人>이라는 책을 발간한 후 안전문제 때문에 방탄조끼를 입고 숨어 살고 있다. 이어 그는 <김정일의 사생활> <핵과 여자를 사랑한 김정일> 등을 저술했고, 최근 김정은 3대세습 확정 이후 <北의 후계자, 김정은>이란 책을 펴냈다. 북한에 인기가수 출신인 부인 엄정녀와 1남1녀가 있다.
후지모토 겐지 씨는 김정은 후계자 지명을 정확히 예측했다. 각종 일정으로 빼곡한 수첩을 보여주는 후지모토 씨.
  지난 10월 8일, 도쿄 시내 중심부 롯본기(六本木)의 한 호텔에서 만난 후지모토 겐지(藤本健二·63) 씨는 휴대전화 벨이 계속 울려대자 기자를 보고 멋쩍은 듯 웃었다. 짙은 색 선글라스에 턱수염을 길게 기른 그는 “9월 9일부터 스케줄이 꽉 차 있다”면서 한국말로 “바쁘다”를 연방 외쳤다.
 
  지난 9월 28일 북한은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김정은(金正恩·27)을 김일성(金日成)-김정일(金正日)에 이은 북한의 3대 세습 후계자로 확정했다. 후지모토 겐지 씨는 2003년 출간한 <김정일의 요리사>에서 북한의 후계자로 일찍이 김정일의 세 아들 가운데 3남 김정은을 꼽았고,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1988년부터 2001년까지 김정일 요리사로 13년간 일한 그는 일명 ‘왕자(王子)들의 놀이상대’로서 김정은과 생활하며, 그의 생각까지 읽어 낼 정도로 그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기자가 서울에서 준비해 간 ‘마른김’을 건네자, 그는 “평양의 8번 연회장에서 김정일이 가장 좋아하는 ‘성게초밥’를 만들 때 ‘조선산’ 김을 재료로 썼는데, 맛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신간 <북의 후계자 김정은>을 선물로 건네며, ‘박철(Pak Chol)’이라고 북한에서 사용하던 이름으로 사인했다. ‘박철’은 차남 김정철(金正哲)이 스위스에서 유학할 때의 이름과 같은 것으로, ‘박’은 스위스 외교관인 이모부 박건의 성(姓)에서 따온 것이고, ‘철’은 김정철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참고로 김정은은 스위스 베른의 공립중학교 시절, ‘박은(Pak Un)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그는 기자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김정은 대장(그는 ‘김정은’을 이렇게 불렀다―필자주)은 지난 9월 28일 당 대표자회에서 후계자가 된 것이 아니다”라고 해 기자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는 “김정일은 정은 왕자의 9살 생일 때인 1992년 1월 8일 생일잔치를 위해 <발걸음>이란 노래를 제작했다”고 했다.
 
 
  9살 생일날 발표한 <발걸음>
 
   후지모토 겐지 씨는 <발걸음>을 발표하던 날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1992년 1월 8일 아침, 원산초대소는 김정은 생일파티 준비로 바빴다. 비서실을 담당하고 있던 이명제(李明濟) 부부장은 파티준비를 진두지휘했다. 후지모토 씨는 파티에서 김정은에게 꽃다발을 증정할 세 명의 소녀, 노동당 간부 35명과 함께 두서너 차례 큰 목소리로 축하 인사말을 반복해 연습했다.
 
  “작은 대장 동지, 태어나신 지 아홉 해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건강하십시오―. 축하합니다―.”
 
  오전 11시30분, 김정일이 파티장에 들어섰고, 곧이어 김정은, 김정철, 김여정 세 남매, 그리고 김정일의 부인 고영희(高英姬)가 김옥(金玉)과 함께 들어왔다. 도열해 있던 간부들의 박수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늘 그랬던 것처럼 김정일이 양손으로 ‘그만하라’는 신호를 하고 나서야 박수소리가 그쳤다.
 
  후지모토 씨는 “9살이 된 김정은은 검은 양복에 나비넥타이 차림이었다”면서 “정은 대장은 입가에 쑥스러운 미소를 띠었다”고 했다. 꽃다발을 증정하고 축하인사를 마치자, 김정은은 “고맙습니다”라고 간부 일동에게 답례 인사를 했다. 로열패밀리와 간부들은 무대가 설치된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커다란 장방형 테이블 옆의 비서실 직원들이 쓰는 원탁 테이블. 그 위에는 참석자들의 명패가 놓여 있었다. 후지모토 씨는 “여느 때처럼 자리에 앉으려고 했으나, 테이블 위를 보니 메뉴판과 함께 노랫말이 적힌 인쇄물이 놓여 있었다”면서 “노래의 타이틀은 <발걸음>이었다”고 했다.
 
  “김용순(金容淳) 노동당 비서는 참석자들이 모두 착석(着席)한 것을 확인하고 축하 인사말을 했습니다. 전원 잔을 들고 정은 대장과 한 사람씩 ‘건배’를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맨 나중 순서였던 내게도 차례가 왔습니다. 나는 ‘작은대장 동지,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 정은 대장의 눈빛이 반짝였습니다.”
 
  무대의 막이 오르고 보천보전자악단의 노래와 연주가 시작됐다. <발걸음> 연주였다. 후지모토 씨는 “한 번만 들어도 따라할 수 있는 경쾌한 리듬이었다”고 했다. 파티 연회장엔 곧 <발걸음> 대합창이 울려 퍼졌다. <발걸음>은 김정일이 김정은에게 주는 생일선물이었다. 김정일은 악단에게 서너 차례 계속 합창하게 한 다음, 작사자·작곡자를 격려했다. 김정일은 “작은대장을 위해 좋은 노래를 만들어 줘 고맙다”고 했고, 김정은도 “고맙다”고 인사했다.
 
 
  ‘작은대장’이란 가사를 ‘큰대장’으로 바꿔
 
북한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 후계체제 구축을 시작했다.
  후지모토 겐지 씨는 “<발걸음>이라는 가사를 읽어 보면 감춰진 의미가 있다는 것을 금세 알게 된다”면서 “정철 대장과 여정 공주에게 지어 준 노랫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발걸음>은 기억하기 쉬웠고, 멜로디도 경쾌했다”고 했다. 그는 18년 전에 불렀던 <발걸음> 노래를 “척~척~척~” 하며 기자 앞에서 흥얼거렸다.
 
  <척척 척척척 발걸음/우리 김대장 발걸음/2월의 정기 뿌리며/앞으로 척척척/발걸음 발걸음 힘차게 구르면/온나라 강산이 반기며 척척(1절)
 
  척척 척척척 발걸음/우리 김대장 발걸음/2월의 기상 떨치며/앞으로 척척척/발걸음 발걸음 힘차게 한번 구르면/온나라 인민이 따라서 척척척(2절)
 
  척척 척척척 발걸음/우리 김대장 발걸음/2월의 위업 받들어/앞으로 척척척/발걸음 발걸음 더 높이 울려 퍼져라/찬란한 미래를 앞당겨 척척척(3절)>
 
  <발걸음>이라는 노래 가사에 등장하는 ‘김대장’은 김정일의 뒤를 이을 후계자 김정은을 강조하고 있다. 1, 2, 3절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2월의 정기’와 ‘2월의 기상’ ‘2월의 위업’은 모두 1942년 2월 16일 태어난 김정일을 찬양하는 구절이다. 후지모토 겐지 씨는 “9살 생일잔치에서 <발걸음>을 발표할 때는 ‘김대장’이 아니라 ‘작은대장’이었다”면서 “현재의 <발걸음> 가사와 당시의 <발걸음> 가사를 대조할 수는 없지만, ‘김대장’이란 가사 이외에는 노랫말이 같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김정일은 3남 정은을 이미 9살 때 점찍었단 말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9살 생일파티에서는 ‘우리 작은대장 발걸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작년에 발표할 때 ‘우리 김대장 발걸음’이라고 가사를 바꾼 겁니다. 김정일은 두 왕자를 어렸을 적부터 관찰해 왔고, 그 결과 정철 왕자보다 정은 왕자가 후계자로 적합했다고 일찍이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는 “김정은 대장의 9살 생일 때 <발걸음>이란 노래를 지은 것에 주목해야 한다”면서 “장군(김정일)은 ‘아홉’이란 숫자에 병적일 정도로 집착했다”고 했다.
 
  “바카라(baccara·카드 석 장을 갖고 합계 숫자 끝자리 수의 크고 작은 것으로 승부를 가리는 트럼프 놀이)를 광적(狂的)으로 즐겼던 김정일은 바카라의 가장 높은 숫자인 ‘9’가 운수대통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김정일의 생일 2월 16일도 합하면 ‘9’가 됩니다. 그는 전용차 번호판도 ‘2165555’로, 생일 숫자인 216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도 숫자를 합하면 ‘9’가 됩니다. 내 승용차도 ‘2168345’로 합한 끝자리 숫자가 ‘9’입니다. 노동당 대표자회를 개최한 9월 28일 숫자도 더해 보세요. 9로 끝나지요?”
 
 
  北간부들, “훌륭한 왕자님들이십니다”
 
조선중앙통신이 공개한 김정은 사진을 살펴보는 후지모토 겐지 씨.
  후지모토 겐지 씨가 김정은을 처음 만난 것은 1990년 1월 15일경 황해남도 ‘신천초대소’였다. 김정일은 점심 연회를 마치고, “지금부터 내 자식들을 소개할 테니 모두들 중앙으로 나오라우!”라고 지시했다. 김정일이 두 명의 아들을 당 간부들에게 처음으로 소개하는 순간이었다.
 
  좌중이 가볍게 술렁였다. 김정은은 형인 김정철과 함께 당구대 옆에서 군복(軍服)차림에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후지모토 씨는 군복 입은 모습을 보고 ‘장군님이 아들들을 군인들처럼 씩씩하게 키우고 싶어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김정은을 처음 만났을 때 인상은 어땠습니까.
 
  “허담(許錟), 장성택(張成澤), 김용순(金容淳), 김기남(金基南) 등 노동당 최고 간부들과 악수를 나누는 동안, 고영희 부인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간부들 인사가 끝나고 맨 마지막으로 내가 악수를 위해 정철 왕자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정철 왕자는 내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습니다. 이어 정은 왕자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그는 손을 내미는 대신, 저를 험악한 얼굴로 노려보았습니다. ‘이 녀석은 증오스러운 일본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듯한 눈빛이었습니다. 7살에 불과한 어린아이가 40살 먹은 남자를 상대로 당돌한 태도를 보이는데 당혹스러웠죠.”
 
  ―결국 악수를 못했나요.
 
  “간신히 했습니다. 몇 초에 불과했지만, 몇 분이 지난 듯했습니다. 김정일이 ‘후지모토잖아’라고 말한 다음에야 정은 왕자는 가까스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렇지만 정철 왕자처럼 성의껏 악수를 하진 않았습니다.
 
  나는 김정일 패밀리를 위해 와사비(고추냉이)를 뺀 초밥을 만들어 몇 차례 보낸 적이 있기 때문에, 김정일은 초밥을 먹으면서 ‘일본에서 온 후지모토라는 조리사가 만든 초밥이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김정일은 고영희 부인이 두 왕자를 데리고 가자, 간부들에게 ‘우리 아이들 어땠어?’라고 묻더군요. ‘훌륭한 왕자님들이십니다’ ‘쑥쑥 잘 자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덕담하는 간부들을 곁눈으로 보면서 씁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亡命한 고영희의 여동생 長男도 함께 놀아

 
김정일의 부인 고영희. 2004년 암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졌으나, 후지모토 씨는 암으로 사망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1주일 후, 후지모토 씨는 김정일의 호출을 받았다. 신천초대소 내의 김정일 관저로 가니 김정은은 생모(生母) 고영희와 넓은 정원에서 연(鳶)을 날리고 있었다.
 
  “두 왕자가 날리는 연은 매번 땅에 곤두박질쳤습니다. 가만 보니 연에 ‘꼬리’가 없어서 그랬던 겁니다. 큰 모조지와 테이프를 구해 두 개의 꼬리를 만들었습니다. 정은 왕자가 바람 방향을 찾아 날리니 연은 초대소 하늘 높이 춤추듯 날아올랐습니다. 고영희 부인이 ‘후지모토 씨가 만들어 주니 연이 잘 날아가네~’라고 하자, 정은 왕자는 ‘네’라며 즐거워했죠.”
 
  그날 초대소로 불려 가 연을 날려 준 이후, 한 달쯤 시간이 흘렀다. 후지모토 겐지 씨는 김정일로부터 김정철·김정은의 ‘놀이 친구’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후지모토 겐지 씨는 “김정일은 김정철·김정은 두 왕자가 일반 소학교에 다니는 것이 리스크가 있다고 판단, 소학교 시절까지 관저 내에서 전속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도록 했다”면서 “그 때문에 왕자들은 학교친구가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이들의 교육은 매제인 장성택이 담당했다고 한다. 장성택은 고모부로서 김정철과 김정은의 어릴 적부터 ‘후견인’을 맡아 온 셈이다. 이어진 그의 말이다.
 
  “정철, 정은 왕자는 놀이를 할 때면 늘 함께였고, 이모님(고영희의 여동생, 高英淑)의 장남과 함께 놀았습니다. 정은 대장과 비슷한 나이로 보였습니다. ‘놀이 상대’로 4명의 미소녀를 ‘선발’, 각각 두 명씩 정철, 정은 왕자에게 붙여 주었습니다. 정은 왕자는 일본 유명 문구사 ‘고쿠요’ 공책을 들고 내게 ‘한자 파(波)를 일본어로 어떻게 쓰느냐’고 물었던 기억도 납니다. 왜 한자를 일본어로 옮기는 것을 공부할까 궁금해하던 차에, 고영희 부인은 ‘정은, 혼자 공부하지 않으면 안 돼요’라고 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정은 왕자의 이름을 알게 됐습니다.”
 
 
  高英姬의 일본이름, ‘아유미’
 
  후지모토 겐지 씨는 “고영희 부인은 만수대예술단 출신의 배우로서 키 165cm에 가벼운 파마머리, 차분한 차림의 수수한 미인”이라면서 “김정일이 향수에 민감한 것을 배려해 향수도 일절 사용하지 않았고, 옅은 화장만을 했다”고 했다.
 
  그는 “수영장 풀에서 차분한 검정 수영복을 입고 수영하는 모습을 보았다”면서 “요리사인 나도 그의 ‘메기 요리’는 높이 평가할 만했다”고 했다. 그녀는 김정일의 부인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김정일의 집무를 곁에서 보좌했다. 밤늦도록 각 부서에서 올라오는 팩스(최근엔 컴퓨터로 업무) 보고서를 정리해 김정일에게 보고하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그러나 고영희 부인은 업무와 관련한 이야기를 절대 외부에 발설하지 않았다고 한다.
 
  후지모토 씨는 “고영희 부인은 아플 때, 입맛을 돋구라고 초밥을 만들어 주었더니 수일 후 만나 ‘일전의 초밥, 정말 맛있게 먹었다’며 인사를 할 정도로 자상한 사람”이라고 했다. 2000년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고영희 부인은 환영 매스게임에 참가한 학생들을 위해 과자를 전달하기도 했다.
 
  후지모토 씨는 “재일교포 출신으로 입북자 가족인 고영희는 해외에 나갈 때면 편지를 김정일에게 쓰곤 했다”면서 “그때마다 김정일은 ‘아유미에게 편지가 왔구나’라고 말했다”고 했다. 고영희의 일본 이름이 ‘아유미’였던 것이다. 고영희 부인은 아들들을 대동하고 여러 차례 해외를 다닌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고영희는 후지모토 씨에게 “나도 몇 번이나 일본에 가서 초밥을 먹어 봤지만, 후지모토 씨 초밥이 제일인 것 같아요” “일본 택시는 세계 제일이에요”라고 말했다.
 
 
 
고영희, 경호원 총에 죽을 뻔한 金正日 구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노동당대표자회 후 기념촬영을 한 사진에 김정일의 현재 부인(넷째 부인)인 김옥(오른쪽 붉은색 원)으로 추정되는 여성이 등장한다. 또 그 옆에는 김정일의 딸이자 김정은의 여동생인 김여정(왼쪽 붉은색 원)으로 추정되는 인물도 보인다. 후지모토는 김옥과 김여정이 맞다고 확인해 주었다.
  고영희 부인이 김정일의 생명도 구했다. 후지모토 씨의 설명이다.
 
  “1980년대 후반, 함흥 72호 초대소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김정일이 홀로 밤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경호원이 술취한 것을 보게 됐습니다. 김정일이 ‘뭐야, 술을 먹은 것 아닌가’라고 하자, 경호원은 총을 빼들어 김정일 이마를 겨눴다고 합니다. 그때 갑자기 경호원 뒤에서 고영희 부인이 달려들어 총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다른 경호원이 술취한 경호원을 쏘아 사살했다고 합니다. 김정일은 ‘내 목숨도 이것으로 끝나는구나 생각했다, 정말 고맙다’라고 말했답니다.”
 
  스위스 주재 외교관인 박건은 고영희의 여동생 고영숙(高英淑)과 함께 1998년 미국으로 전격 망명한다. 그는 스위스 주재 북한대사 리철과 함께 43억 달러로 추정되는 김정일의 해외비자금을 관리했던 인물이다.
 
  “1996년 1월 (일본에)귀국했다 ‘불법입국 방조죄’로 체포돼 2년간 오키나와에서 공안의 보호를 받으며 일식집을 전전했습니다. 귀국하기 전까지만 해도 농구경기를 할 때 이모님(高英淑) 아들이 함께했는데, 2년 만에 북한에 돌아갔을 때는 농구경기장에 (고영숙 아들들이)나타나지 않았습니다. 2001년 일본으로 탈출했을 때, 일본 경시청은 고영희 부인의 여동생 부부가 미국으로 망명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고영희의 乳腺癌 사망은 誤報
 
  ―그렇다면 1998년 이후 김정일이 고영희 부인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까.
 
  “김정일은 고영희 부인을 변함없이 잘 대해 주었습니다. 잘 대해 주면 더 가슴이 아프지 않을까요. 오히려 화를 내는 게 낫지요. 북한체제에서 망명(亡命)은 국가에 대한 ‘배신’을 의미합니다. 김정일은 로열패밀리 정보가 적국인 미국과 한국에 노출되는 것을 가장 경계합니다. 미루어 짐작컨대 고영희 부인은 여동생의 망명을 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을 것입니다. 죽기 전까지 계속해서 가슴앓이를 했을 것입니다.”
 
  고영희는 2004년 5월 26일 프랑스에서 ‘유선암(乳腺癌)’으로 사망해 6월 초 북한에서 장례를 치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영희의 사망 사실은 그해 8월 국내에 알려졌다. 그러나 후지모토 씨는 “유선암은 치료됐다”며 “뇌경색(腦硬塞)이나 다른 원인으로 사망했을 것”이라고 했다.
 
  “1993년 고영희 부인은 프랑스에서 유선암 수술을 받았고, 입원 중 고영희 부인은 김정일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를 김정일이 읽으며 눈물을 흘렸답니다. 2000년 12월 크리스마스 직전, 고영희 부인은 우반신(右半身) 마비가 왔습니다. 고영희 부인은 좋아하는 자장면을 장군님과 함께 먹다가 돌연 오른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뜨렸습니다. 부인이 이걸 집지 못하는 거예요. 주치의는 우측 뇌경색이 왔다고 진단했고, 유선암 때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다행히 치료가 잘돼 이듬해 1월 15일 평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후 고영희 부인은 스포츠 관전 등 뇌를 흥분시킬 만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50세 전후였던 부인은 1000미터 수영을 하고도 거뜬했는데, 역시 병에는 장사가 없습니다.”
 
  ―고영희 부인이 암 치료를 하러 프랑스에 갔을 때, 김정일은 평소와 달리 기분이 울적해하지 않았습니까.
 
  “병원에서 치료 중일 때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김정일 본래의 모습이 아니고, 뭔가 안절부절못해했습니다.”
 
  그러나 후지모토 씨는 “프랑스 의사가 완전히 치료됐다는 편지를 북한으로 보냈다”면서 “그것을 옥이 동지가 읽고 ‘잘됐다’고 했고, 김정일도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리며 좋아했었다”고 했다.
 
  ―2000년 8월 8일, 원산초대소 김정일 관저에서 처음으로 장어덮밥을 만들 때 고영희는 후지모토 씨에게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라고 물었고, 실제 후지모토 씨가 일본에 다녀오도록 했습니다. 그만큼 특별한 배려를 한 것은 고영희가 재일교포 출신이기 때문 아닌가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고영희 부인은 제 목숨을 구해 준 분입니다. 북한에 돌아가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오키나와에서 일본 공안의 보호를 받고 있을 때, 김정일은 측근들에게 ‘후지모토, 처리해!’라고 했답니다. 그때 고영희 부인이 강하게 말렸답니다. 고영희 부인은 여정 공주가 입던 원피스 3장, 정은 왕자가 끼던 다이아몬드 장식 반지 등을 제 아이들에게 갖다 주라고 하던 분이었습니다.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이 대목에서 후지모토 씨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金正恩의 생모가 金玉’?
 
후지모토 겐지 씨가 공개한 김정은의 11살때 사진. 후지모토 씨는 이 사진을 2001년 3월 31일 원산초대소에서 김정은으로부터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얼마전 국내 매스컴들은 김정은의 생모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고 보도했다. 외부에는 김정은의 생모가 김정일의 부인 고영희로 알려졌지만, 최근에는 넷째 부인으로 알려진 김옥(金玉·46)이라는 설도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김정일의 정부인은 김영숙(63) 한 명뿐이고, 고영희·김옥 모두 동거녀일 뿐이기 때문에 모계의 정통성은 취약하다고 분석했다.
 
  이에 대해 후지모토 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김정일은 고영희 부인과 1976년부터, 옥이 동지와는 2006년부터 동거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983년생인 정은 대장의 생모가 옥이 동지라면, 김정일은 부인 김영숙과 동거녀 고영희를 둔 상태에서 당시 19세였던 김옥에게서 아이를 낳은 셈입니다. 난 옥이 동지가 임신한 모습을 본 적이 없고, 그녀가 장기간 어디론가 휴가를 다녀왔다는 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두 왕자가 스무 살이나 많은 옥이 동지를 ‘옥이’라고 부릅니다. 생모라면 김정일 장군이 그렇게 부르도록 놓아둘까요?”
 
  후지모토 씨는 “옥이 동지는 흰 살결에 항상 미소를 띠는 미야자와 리에(宮澤里惠·1980년대 일본의 최고 여배우)를 닮은 귀여운 여성”이라며 “고영희 부인이 있을 때는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었지만, 부인이 없을 때는 김정일 옆에 앉았고, 김정일과 사모님밖에 쓸 수 없는 프랑스제 최고급 식기를 사용했다”고 했다.
 
  “옥이 동지는 고영희 부인보다 작은 158cm의 키였습니다. 한여름 수영장에서 고영희 부인은 차분한 느낌의 검은색 수영복을 입었고, 옥이 동지는 언제나 귀여운 파란색 수영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고영희 부인은 마른 체형이었지만, 옥이 동지는 탄력 있는 몸으로 각선미도 발군으로 기억합니다.
 
  옥이 동지는 노래와 춤에 능숙하지 않았지만, 피아노를 정말 잘 쳤습니다. 그녀는 김정일 집무실의 전용 금고를 관리했고, 해외로 식재료(食材料)를 사러 갈 때 장군님의 지시를 받아 돈을 꺼내 주었습니다. 그녀는 매달 새하얀 봉투에 월급을 넣어 주었습니다. 일본어는 조금 하는 것 같았습니다.”
 
  ―2006년 7월 <핵과 여자를 사랑한 장군님>을 보면, 후지모토 씨는 부인 왕재산음악단 출신 가수 엄정녀씨를 만나기 전, 김옥 비서에게 가볍게(?) 연심을 품고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사랑 고백도 했나요?
 
  “(후지모토 씨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야바이요(위험해요)! (목을 손으로 자르는 시늉을 하며) 그렇다면 이렇게 될 겁니다, 하하. 김정일 산책길에 옥이 동지가 우리 비서실 사람들과 동행했는데, 뒤를 따라 걸으면서 ‘후지모토 씨가 만드는 초밥은 언제나 맛있어요’라고 했습니다. 스위스에 여권 연장하러 나갔다가 요들송 CD를 사다 주었고, 닭고기 요리도 만들어 주었습니다. 옥이 동지가 예사 비서가 아니란 것은, 연회장에서 김정일 오른쪽 고영희 부인 자리에 그녀가 앉았을 때였습니다. 김정일은 옥이 동지의 머리카락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어 주곤 했죠.”
 
 
  金正日, 정은을 ‘작은오빠’라고 불러
 
함경남도 함흥의 섬유공장인 ‘2ㆍ8비날론연합기업소’를 찾은 김정일과 김정일의 여동생인 김경희 노동당 경공업부장(흰 점선 안).
원안) 김정은 후계자 지명 이후 김정은의 후견인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장성택 군사위 부위원장.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지난 9월 30일 김정일과 김정은이 노동당 대표자회 참가자들과 함께 찍었다면서 공개한 사진 속에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젊은 여성 두 명이 앞줄에 서 있습니다. 한국 언론은 두 여성을 ‘김옥’과 ‘김여정’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만.
 
  “띵동!(맞았다는 뜻) 옥이 동지는 올해 46살, 1987년생인 여정 공주는 23살입니다. 정은 대장보다 4살 어립니다.”
 
  ―그럼, 2000년 10월 조명록 노동당 상무위원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국방위원회 과장 직함을 갖고 ‘김선옥’이란 이름으로 동행한 여성도 ‘김옥’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고영희와 김옥의 사이는 어땠습니까.
 
  “둘다 마음이 선한 사람들인 데다, 정치적이지도 않습니다. 여자로서 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한 번도 다투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까요. 오히려 고영희 부인이 김정일을 두고 프랑스로 치료를 받으러 갈 때, 옥이 동지에게 ‘아빠를 잘 부탁해’라고 말했습니다. 두 여인 중 한 사람은 반드시 김정일 장군 곁을 지킨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습니다.”
 
  ―김정일과 고영희 부인은 자녀들을 어떻게 부릅니까.
 
  “여정 공주를 기준으로 부릅니다. 예컨대 장군님은 정철 왕자를 ‘큰오빠’, 정은 왕자를 ‘작은오빠’라고 부릅니다. 고영희 부인도 똑같이 부릅니다. 여정 공주는 ‘공주’라고 불렀습니다.”
 
  ―그럼, 김정일이 김정은을 ‘김대장’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김정일 장군이 직접 부를 때도 그렇게(작은오빠) 부릅니다.”
 
  ―김정철·김정은은 김정일을 어떻게 부릅니까.
 
  “성인이 된 지금은 어떻게 부르는지 알 수 없지만, 내가 북한을 떠날 때까지 두 왕자는 김정일을 ‘아빠’라고 했고, 고영희 부인을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김정은은 어렸을 적 어머니 고영희의 말을 잘 들었습니까.
 
  “부모 말 잘 안 듣는 것은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웃음) 형제가 농구를 워낙 좋아해서 식사를 마치자마자 농구코트로 달려가려고 하면, 고영희 부인이 ‘30분 정도 쉬었다가 농구를 하라’고 해도, 잠시 앉아 있는 척하다가 5분도 안돼 정은 왕자가 ‘형, 농구하러 가자!’며 농구장으로 함께 달아나곤 했습니다.”
 
  후지모토 씨는 “정은 왕자는 13살부터 사격을 배웠고, 교관들이 전문적으로 가르쳤다”면서 “10점 만점에 8, 9점을 쏘았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두 왕자가 어렸을 적, 김정일은 연회장에서 두 왕자에게 노래를 시켰습니다. 두 왕자는 <에이비씨송>을 ‘에이, 비, 시, 디…’라고 부르더군요. 두 왕자 모두 성장해서 워크맨으로 음악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간부들에게도 깍듯하게 대했습니다.”
 
  후지모토 겐지 씨는 “‘정은 왕자가 당뇨로 쓰러졌다’, ‘오토바이 사고로 크게 다쳤다’는 이야기는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라면서 “후계자로 결정된 인물을 김정일 장군은 절대 밖으로 돌리지 않는다”고 했다.
 
 
  김정은, 기름기 많은 음식 선호
 
  ―김정은의 목소리가 지금껏 공개된 적이 없습니다. 김정은은 관상학적으로 보면, 체질적으로 술·담배를 즐기고, 육류를 좋아하고, 혀가 큰 스타일이라 발음이 둔할 것이라 합니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입니다만, 정은 대장의 발음은 정확하고, 목소리는 아버지와는 달리 맑은 편입니다.”
 
  ―김정은은 어렸을 때부터 형 김정철보다 대담한 면모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무엇보다 김정일이 그를 강하게 키운 것은 아닐까요.
 
  “김정일은 정은 왕자에게 ‘남자는 술을 잘 먹어야 한다’며 15세 무렵부터 마시게 했습니다. 정은 왕자는 러시아의 오카(보드카) 가운데 최고급인 ‘크리스탈’ 한 병을 단숨에 들이켰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은 ‘담배만은 일찍 배우면 키가 안 큰다’고 주의를 줘 내 담배(이브생로랑)를 얻어 피웠습니다. 정은 대장은 새벽 3시에 전화를 걸어 ‘V를 하자’고 했고, 내가 묵고 있는 신천초대소 건물 아래에서 기다리면 대장은 관저에서 자전거를 타고 나와 함께 담배를 피웠습니다. ‘아빠한테는 비밀이야’라고 말했어요. 7살 때부터는 초대소 안에서 벤츠 600형을 운전하기도 했어요. 물론 발이 닿지 않아 시트 아래에 상자를 만들어 다리를 닿게 해 주었습니다.”
 
  ―김정은이 가리는 음식은 없습니까.
 
  “기본적으로 기름기 많은 음식을 좋아합니다. 김정일은 다랑어뱃살초밥·성게초밥을 좋아했고, 정은 왕자는 날치알초밥을 특히 좋아합니다. 처음에는 시사모(열빙어)의 알을 즐겨 먹었고요. 식재료를 일본에서 비행기 화물로 한 번에 1t까지 싣고 간 적도 있습니다.”
 
  ―김정일 일가는 초밥만 먹고, 회는 잘 안 먹습니까.
 
  “김정일은 대형 선박에서 잡은 물고기로 즉석에서 회 쳐 먹는 걸 좋아했습니다. 일본 오사카 사람들은 꿈틀거리며 씹히는 맛을 좋아하고, 도쿄 인근의 간토지역 사람들은 하루 정도 냉장고에 넣어 숙성시킨 다음 회를 먹습니다. 김정일은 ‘물고기는 금방 잡은 게 맛있다’고 하더군요.
 
  일본 요리사들은 회를 칠 때 물고기의 폐(肺)를 절대적으로 보호합니다. 조심스레 칼질하면 물고기도 자신이 죽은 줄 모릅니다.(웃음) 김정일·고영희 부부에게 큰 접시에 한 마리를 그대로 회를 떠 올렸더니, 고영희 부인이 ‘어머나’ 하고 소스라치게 놀랐어요. 물고기가 눈을 껌벅거렸기 때문입니다. 김정일은 북한에서 산 채로 물고기 회를 올린 것은 제가 처음이라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김정일은 가족식사 때 좌석배치를 어떻게 합니까.
 
  “김정일 장군이 가운데 앉고, 그 오른쪽은 부인 고영희, 그 옆이 김정은입니다. 여정 공주는 김정일 왼편에 앉았고, 그 다음 정철 왕자가 앉았습니다. 고영희 부인이 빠질 경우, 그 자리에는 옥이 동지가 앉았습니다.”
 
 
  金正日, 정은 15살부터 술 마시게 해
 
  후지모토 씨와 인터뷰를 하다 인근 롯본기잇초메의 아크모리빌딩 음식점으로 가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후지모토 씨는 위스키 미즈와리에 보리를 섞은 칵테일 ‘하이볼’을 먹어 보라고 권했다.
 
  후지모토 겐지 씨는 “두 왕자는 사이가 좋았지만, 체형이나 성격은 대조적”이라면서 “정은 대장은 김정일을 닮아 퉁퉁한 체형이고, 형 정철 대장은 고영희 부인을 닮아 예쁘고 날씬한 체형”이라고 했다.
 
  ―김정은은 여동생 김여정이 큰오빠 정철을 ‘큰대장’이라고 하고, 자신을 ‘작은대장’이라고 부르는 것에 반발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정은 왕자가 12살 때, 여정 공주가 ‘작은오빠’라고 부르자 화를 냈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저도 정철 왕자를 ‘큰 대장 동지’라고 부르고, 정은 왕자를 ‘작은’을 빼고 그냥 ‘대장 동지’라고 불렀습니다.
 
  2009년 1월 8일 후계자 결정 이후, 김정은은 북한에서 ‘김대장’ 혹은 ‘청년대장’으로 불렸는데, 후지모토 씨 증언에 따르면, 이미 그가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대장’으로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지모토 씨는 “김정은 대장은 짓궂은 성격”이라며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1991년 정은 대장이 여덟살 때, 중국 국경 근처 창성초대소에서 고영희 부인과 나를 포함한 네 사람이 숨바꼭질을 했습니다. 나는 갑자기 배가 아파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죠. 그런데 화장실 안에 잠금장치가 없었어요. 게다가 문은 절반 정도가 유리로 돼 있어 안이 들여다보였습니다. 일을 치르며 끙끙거리는 나를 발견한 정은 대장은 ‘후지모토, 빨리 나와!’ 하면서 얼굴을 창틀에 대고 문을 흔들어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문틀을 힘껏 잡고 있었죠. 나중에 장군님께 말씀드려 유리를 없애고 잠금장치를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몰라요.” 그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했다.
 
  “1992년쯤, ‘오셀로게임’(othello game·흑백으로 된 동그란 말을 늘어 놓고 상대편의 말을 자기의 말 사이에 끼이게 해 자기 말의 색깔로 바꾸어 가는 게임)을 정은 대장이 하고 있었는데, 서서 지켜보던 정철 대장이 정은 대장에게 ‘이렇게 해 봐~’라며 손짓을 하다 돌을 떨어뜨린 모양입니다. 약이 오른 정은 대장은 떨어진 돌을 형의 얼굴을 겨냥해 던졌습니다. 다치지는 않았지만, 내가 오히려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동생이 돌을 던졌는데도 정철 대장은 히죽히죽 웃고 있었습니다. 정철 대장이 받아 주지를 않니까 싸움이 되질 않았습니다.”
 
  ―김정은의 사진은 그동안 몇 차례 공개됐습니다. 귓불 형태와 눈썹 형태가 달라 가짜 사진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돋보기를 들고 사진을 자세하게 들여다 본뒤)
 
  “정은 왕자의 사진들은 모두 맞습니다. 정은 왕자가 성인으로 성장하면서 얼굴이 바뀐 데다, 사진촬영을 할 때 각도에 따라 인상이 바뀌니까요.”
 
 
  金正恩, 승부욕·리더십 강해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지난 9월 30일 공개한 당 대표자회 기념사진에서 김정은을 사실상 10년 만에 사진으로 대한 느낌은 어떻습니까.
 
  “처음 봤을 때는 저도 놀랐습니다. 긴장한 모습인 데다 비만이었으니까요. 아마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개석상에 나서기 위해 몸이 마르면 볼품이 없으니 몸을 만들라’고 지시했을지도 모릅니다. 김정일은 남자가 마르면 보기 흉하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정은 대장은 결심만 하면 살을 금방 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기자가 “김정은의 생년월일은 1983년 1월 8일이 맞는가”라고 묻자 그는 “1993년 원산초대소에서 김정일 패밀리와 윷놀이를 하다 우연히 알게 됐다”고 했다.
 
  “김정일이 모두에게 띠를 물었습니다. 고영희 부인에게 ‘당신은?’이라고 하자, ‘난 1950년이니 호랑이’라고 했고, 정철 왕자는 ‘1980년 원숭이’, 정은 왕자는 ‘1983년 돼지’라고 했습니다. 김정일이 ‘후지모토는?’이라고 하기에, ‘멧돼지띠(돼지띠)’라고 했더니, 정은 왕자가 ‘후지모토와 띠가 같네’라며 내 손을 반갑게 꽉 잡았던 기억이 납니다.”
 
  ―후지모토 씨는 <김정일 요리사>에서 김정일이 식사 후 두 아들이 농구장으로 나가자 간부들에게 “정철은 마음이 여려서 안된다. 정은은 나하고 닮았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정철 왕자는 일렉트릭 기타에 심취한다거나 예술 쪽을 좋아했고,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정은 왕자는 스포츠도 좋아하지만, 승부욕과 리더십이 강했습니다. ‘정철팀’은 농구시합을 한 후 팀원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정은팀’은 오랜 시간 ‘복기(復棋)’를 했습니다. 정은 왕자는 팀원들에게 ‘좀전의 패스는 좋았다’ ‘네가 왜 그쪽으로 패스를 했느냐, 보완해라!’라고 다그쳤습니다.”
 
  후지모토 씨는 김정은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세심한 측면도 있다고 했다. 2000년 7월, 김정일 일가와 백두산에 올랐을 때, 후지모토 겐지 씨는 김정은과 안개 속에서 소변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후지모토 씨가 그에게 “혹시 제 것을 보지 않았느냐”고 묻자, 못 본 체하며 “보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金正恩, 기쁨조 공연 보고 “가슴 크다”
 
후지모토 씨 부부(왼쪽)가 김정일과 만나는 모습. 가운데가 북한의 인기가수인 부인 엄정녀씨.
  ―김정은은 후지모토 씨가 북한에 있을 때 여자친구가 있었습니까.
 
  “내가 김정은 대장이 18살일 때까지 함께 있었습니다. 정철 대장은 여정 공주의 ‘놀이친구’인 서구적 마스크를 가진 향순(이름만 기억)과 사귀었답니다. 정은 왕자는 여자친구와 어울리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정은 왕자가 17살일 때, 함께 기쁨조 공연을 봤습니다. 그중에 가슴이 큰 여성이 있었는데, 정은 왕자가 그것을 보고, ‘야~, 가슴 크다’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여자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구나’라고 안도했습니다. 남자가 마음에 들면 위험하잖아요?(웃음) 정은 왕자는 15살까지 여자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2000년 스위스에서 여름방학 때 돌아와 내가 CD워크맨으로 <휘트니 휴스톤> 노래를 듣고 있자, ‘더빙해 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습니다. 한국 인기가수의 CD를 갖고 와서 ‘좋은 곡이네요’라고 말하기도 했죠. 일본 게임은 나이가 들어서도 좋아했습니다.”
 
  2000년 8월 11일, 후지모토 씨는 원산초대소에서 평양으로 오는 특별열차에서 5시간 동안 김정은과 ‘회담’을 가졌다고 한다. 김정은은 여름방학을 맞아 평양에 와 있었다(후지모토 씨는 김정은이 스위스 공립학교에 다닌 기간은 방학이나 기념일 귀국을 제외하면 실제 1년 중 5개월 남짓이라고 한다).
 
 
  金正恩, “왜 우리나라는 상점에 물건이 없나?”
 
  김정은은 “나는 매일 제트스키를 타고, 해양스포츠를 하고, 롤러블레이드, 승마를 하고 있는데, 인민들은 어떻게 하고 있나”라고 물었다고 한다. 후지모토 씨는 “18세의 나이에 인민들의 생활을 궁금해하고 있어 내심 놀랐다”고 했다.
 
  김정은은 후지모토 씨에게 “외국 백화점이나 상점엔 어디나 물자와 식량이 넘쳐나는데 놀랐다”며 “왜 우리나라 상점에는 물건이 없을까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후지모토 씨는 김정은이 일본을 여행하거나, 와우와우(WOWOW) TV, NHK를 시청하면서 느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고 한다.
 
  원산~평양 열차 안에서 김정은이 갑자기 “오락실(娛樂室) 차량으로 가자”며 후지모토 씨를 이끌었다. 그때가 밤 11시였다고 한다. 김정은은 웨이터에게 술을 주문했다고 한다. 김정은이 말문을 열었다.
 
  “후지모토―. 우리나라는 공업기술이 상당히 뒤떨어져 있어요.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지하자원이라고는 우라늄 정도입니다. 지금 우리가 초대소에 머물 때도 시도때도 없이 정전(停電)이 많고, 전력부족이 심각한 상황입니다. 나는 스위스 유학 때 언어문제 때문에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말을 듣는 순간, 후지모토 씨는 어린 시절의 정은 왕자가 아니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고 한다. 시야(視野)를 넓히고 인간적 성장을 했고, 예전의 개구쟁이 이미지는 사라졌다고 판단했다. 김정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에 패했지만, 엄청난 부활을 했습니다. 일본의 상점들을 가 보면 물품들이 넘쳐 흘러요. 우리나라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후지모토 씨는 “이솝우화의 ‘토끼와 거북이’ 설화(說話)를 들려주었다”면서 “그러나 서방세계의 설화라서 정은 대장은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하더라”고 했다. 김정은은 중국의 고도성장 이야기도 꺼냈다.
 
  “후지모토, 위(김정일)에서 들으니 지금 중국은 여러가지 면에서 성공하고 있다고 해요. 공업, 상업, 호텔, 농업 등 모두가 잘되고 있답니다. 우리나라의 인구는 2300만명이고, 중국은 13억입니다. 13억이라는 인구를 통제한다는 게 대단한 일입니다. 우리나라의 전력보급은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입니다. 중국이 13억명을 먹이는 농업을 성공적으로 달성한 것은 대단합니다. 식량도 수출한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중국을 여러가지 면에서 모범(벤치마킹)으로 삼아야 합니다.” 후지모토 씨는 “김정은 대장이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 성공을 김정일로부터 듣고, 무척이나 관심을 갖고 있는 듯했다”고 말했다. 김정은은 “오늘날 북조선의 문제점들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중국이 어떻게 개혁개방을 성공으로 이끌었는지 철저히 분석해 따라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후지모토 씨는 “밤 11시부터 시작한 대화가 이튿날 새벽 4시까지 계속됐다”고 했다.
 
 
  장성택·김경희 사이엔 자녀 없어
 
기자와 롯본기 근처를 산책하는 후지모토 겐지 씨(오른쪽).
  금번 당 대표자회를 전후로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金京姬)의 부상은 김정은 후계구도에서 김경희가 남편인 장성택과 함께 김정은의 강력한 후견인 역할을 할 것이란 점을 예고하고 있다. 김경희는 1980년대부터 알코올중독에 시달리는 것으로 알려졌고, 장성택과의 결혼생활도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후지모토 겐지 씨의 증언과 장성택의 승승장구를 놓고 볼 때, 부부관계는 원만한 것으로 보인다.
 
  장성택이 정은의 후견인이 될 것이란 근거는 또 있다. 1990년대 중반 김정일 패밀리가 식사를 하던 중의 일이다. 1995년 김일성 추도 1주기 전후 관저내 8번 연회장 2층 식사자리에서 김정일과 장성택 간에 가벼운 언쟁이 벌어졌다. 화가 치민 김정일은 매제 장성택을 향해 냅킨 통을 던지려 했고, 놀란 고영희가 김정일을 말리는 사이 장성택이 재빨리 “잘못했습니다”라고 사죄했다고 한다.
 
  후지모토 씨는 “당시 상황이 상당히 심각했는데, 고영희가 상황을 수습하는 바람에 없었던 일이 됐고, 이 이후 고영희와 장성택 간의 사이가 좋았다. 이런 인연들 때문에 장성택이 고영희의 소생들을 후견인으로 잘 돌볼 것으로 본다”고 했다.
 
  ―북한에 납치됐다 탈출한 영화배우 최은희씨는 수기에서 “장성택과 김경희는 얼마전 둘째 아들을 낳았다고 들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둘 사이의 딸 장금송이 2006년 프랑스 유학 중 부모의 결혼 반대로 고민하다 자살한 것으로 보도됐습니다.
 
 
  金正男, 간부들 연회 참석한 적 없어
 
  “김경희 동지는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둘 중 누가 문제인지는 모릅니다. 자살했다는 딸은 김일성이 간호사와의 사이에 낳은 ‘가쿠시노코(숨겨놓은 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1995년 김일성 사망 1주기 기념연회 때 김경희 동지는 8살짜리 남자아이를 간부들에게 인사시켰습니다. 인사를 시킬 때, 김경희 동지가 아들의 목덜미를 잡아 ‘여러 사람들에게 인사하라!’며 내리누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피가 하나도 섞이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북한은 고아를 매년 선발해 유력자 집안에서 키우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미담이라며 방송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장성택은 김정은을 어떻게 부릅니까.
 
  “다른 사람처럼 ‘큰대장’ ‘대장’으로 부른 것 같습니다.”
 
  후지모토 씨는 “장성택은 팬티 내리기 명인”이라며 일화를 소개했다.
 
  “1992년 여름, 원산초대소의 50m 풀장에서 간부들과 기쁨조, 농구선수 등 40여 명이 수영을 하고 놀았습니다. 장성택이 물속에서 남자들 수영팬티를 끌어내리면서 짓궂게 행동해 사람들이 모두 피해 다녔습니다. 장성택은 걸상빼기 장난도 칩니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간부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래도 하지 말라 소리를 하는 사람을 못 봤습니다.”
 
  ―북한에 있는 동안 김정남을 연회장에서 본 적은 있습니까.
 
  “13년 동안 연회장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1996년 일본에 귀국해 공안에 체포됐을 때 경시청 관계자로부터 처음 그의 존재에 대해 들었습니다. 저는 김정남이 애초부터 후계자 대열에 낄 수 없다고 일관되게 주장해 왔습니다. 노동당 최고간부들, 군대장(장성급 장교)들 일곱 명이 모두 참석하는 연회에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습니다. 정철·정은 두 왕자는 큰 연회에는 반드시 참석해 그들과 교분을 쌓았습니다.”
 
  후지모토 씨는 어느 정도 한국말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한국말로 이야기를 하려고 애쓰다가도, 어려운 대목이 나와 막히면 금세 일본말로 되돌아갔다.
 
  ―(웃으며) 북한에 13년 동안 살았으면 한국말이 유창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부인 엄정녀씨도 한국여성인데요. 게다가 김정일의 측근 요리사로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한국말을 빨리 익혔으면 더 좋았을 것 아닙니까.
 
  “1988년 김정일 요리사가 되고 나서부터 통역사가 붙어 있으니까 말을 배우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김정일은 어느 정도 일본말을 이해했습니까.
 
  “오쿠상(부인), 오야붕(두목), 사요나라(작별인사) 정도였습니다. 제가 일본에 식재료를 사러 가겠다고 하면 꼭 ‘사요나라’하기에, ‘일본에서는 앞으로 못 만날 사이에 하는 인사’라고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2001년 4월 일본으로 탈출할 때 김정일 장군이 ‘사요나라’라고 할 때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물러나왔습니다.”
 
  ―황장엽(黃長燁) 전 노동당 비서는 “장성택이 차기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고, 이 때문에 장성택이 고영희 측의 견제를 받아 가택연금을 당했다는 설이 있었습니다.
 
  “장성택 동지가 감금당했다는 것은 이해가 안 갑니다. 김정일 장군은 동생 김경희 동지를 끔찍하게 아낍니다. 동생의 남편(매제)도 마찬가지로 대합니다. 개인적으로 황장엽 비서는 일본을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꼭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은 분입니다(황 전 비서는 인터뷰 이틀 후 세상을 떴다).”
 
  후지모토 겐지 씨는 “북조선이 살아갈 방법은 3대세습밖에 없다”면서 “만약 집단지도체제에서 당과 군이 부딪친다면 무력을 보유한 군부가 승리해 미얀마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 걸그룹이 기쁨조보다 예뻐”
 
  밤 10시 무렵, 기자는 호텔방 짐을 정리하고 호텔 로비로 나왔다. 롯본기와 아자부주방(麻布十番) 거리를 산보하기 위해서였다. 좀전에 작별인사를 나누었던 후지모토 겐지 씨가 모자를 깊숙하게 눌러쓴 채 어디론가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기자가 “롯본기 산책이나 하자”고 하자, 그는 흔쾌히 동의했다. 평소 실내에서 머플러로 머리를 감고 있어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는데, 그는 모자를 벗으며 “머리가 다 벗겨졌다”고 쑥스럽게 웃었다. 후지모토 씨는 왕재산 경음악단 출신의 엄정녀와 결혼하기 위해 일본의 부인과 1989년 이혼했다. 당시 큰딸이 스무 살, 작은딸이 15살이었다. 그는 작은딸이 성인이 될 때까지 양육비 1800만엔(매달 30만엔씩 60개월) 등 총 4800만엔(약 4억8000만원)을 지불했다.
 
  기자가 “일본에 와서 헤어진 부인·딸과 만나느냐”고 묻자, “딸들과 만난다”면서 “올해 서른아홉 살인 큰딸은 아들을 셋이나 둬, 손자가 셋이나 된다”며 좋아했다.
 
  길가의 일식집들은 손님들도 빼곡했고, 요리사들은 부지런히 횟감을 칼질하며 초밥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도쿄 긴자 최고 수준의 일식집 ‘스시센(壽司淸)’의 요리사로 근무한 실력파 요리사다. 스시센은 정계·재계의 유명인사들이 주로 이용하는 일식집이다. 그는 “긴자 8정목에 있는 일식집 스시센에서 일할 때, 학생이었던 아들이 벌써 스시센의 주인이 됐다”면서 “일식집을 지나칠 때마다 요리를 하고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나 집에서 만들어 보곤 한다”고 했다.
 
  휘황찬란한 조명 아래 반라(半裸)의 차림으로 호객을 하는 술집 여성들 사이로 흑인 ‘삐끼’들이 폼을 잡으며, “당신이 보스냐”며 후지모토 씨에게 명함을 건네고 손을 잡아끌었다. 그는 “한국의 걸그룹 ‘소녀시대’가 일본에서 대히트를 치고 있다”면서 “북한의 기쁨조보다 훨씬 예쁘다”고 했다.
 
  점집이 나타났다. 기자가 “한국인들은 초년운보다 말년운이 좋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고 하자, 그는 “일본에도 그런 말이 있다”면서 “나쁜 것은 잘 맞히기 때문에 무서워서 점집엔 근처에도 안 간다”고 했다.
 
 
  정은에게 거짓말한 게 못내 가슴 아파
 
  그에게 아내 엄정녀 이야기를 꺼내자, “그 이야기는 하지 말자”며 손사래를 쳤다. 그의 남은 소망은 김정은이 그의 방북(訪北)을 허락해 그의 처 엄정녀와 지금은 15살이 훌쩍 넘었을 자녀들과 재회하는 일일 것이다. 현재 그도 이산가족인 셈이다.
 
  후지모토 겐지 씨는 북한 탈출 직전인 2004년 3월 31일 원산초대소에서 낙마(落馬)했을 때 김정은이 “후지모토, 이번에 일본에 가더라도 꼭 돌아와야 해요”라며 꼭 끌어안던 기억이 새롭다고 했다. 그는 “정은 왕자에게 거짓말을 한 게,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한 게 못내 가슴 아프다”고 했다. 그는 “<북의 후계자 김정은>이란 책은 김정은 대장에게 드리는 나의 편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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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기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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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현    (2010-11-12) 찬성 : 697   반대 : 381
정권이란게 일단 한번 형성되면 끈질기고 사악하기가 한도 끝도 없고 개개인은 감히 저항할 수 없다. 저 김왕조 가 그렇게 많은 사람을 굻주리게 하고 세계적 경제 발전에도 나홀로 외톨이가 돼 있어도 민중들은 그냥 수긍하고 따라야 하는걸로 알고 있다.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게 개개인의 능력, 성실도같은 것도 중요하지만 진짜 중요한건 올바른 정권하에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채득셥    (2010-10-23) 찬성 : 299   반대 : 211
어제 "프리미엄"을 결재했는데 열람이 안되는군요.앍그신후 삭제하여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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