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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李明博을 서울시장과 대통령, 吳世勳을 두 번 서울시장에 當選시킨 諸他龍

‘모든(諸) 남(他)을 용(龍)으로 만드는 사람’

글 : 조남준  전 월간조선 이사  njch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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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復元의 유공자, 諸他龍 전 서울시 교통국장이 말하는 과거와 미래 이야기

⊙ 최근 하버드大 실사팀과 면담, 서울시의 ‘베로니카 러지 그린賞’ 受賞에 기여
⊙ 서울시 교통정책의 아이디어 뱅크…중앙차로제, 버스 공영제, 버스카드, 환승할인,
    도심 혼잡통행료가 그의 작품
⊙ 정년퇴직 후인 62세에 대학 입학, 首席으로 졸업한 만학도
⊙ 도시철도공사 사장 시절, 지하철길 152km를 도보로 답사… 직원들 감복시킨 感性경영
⊙ 未來學 전도사로 변신, 地自體에서 특강도

諸他龍
⊙ 1938년생.
⊙ 연세대 행정대학원 석사. 서일대 사회체육학과 졸업.
⊙ 서울시 교통국장, 감사실장, 서울시도시철도공사 사장, 제33대 서울시장직무인수위 공동위원장,
    서울시 정책특보, 서울시정개발연구원장 역임.

趙南俊
⊙ 1949년생.
⊙ 중앙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 조선일보 기자, 사회부 부장대우, 월간낚시 부장, 월간조선 부국장ㆍ국장ㆍ이사,
    시사저널 상무이사 겸 편집기획위원 역임. 現 감커뮤니케이션 회장.
  지난 4월 20일 미국 하버드대에서 서울시로 손님이 찾아왔다. 디자인대학원의 ‘이브 블로(Eve Blau)’ 겸임교수(adjunct professor) 일행 5명이었다. 이들의 방한(訪韓) 목적은 청계천(淸溪川)을 살펴보는 일.
 
  하버드대는 2년마다 세계 대도시들이 수행한 도시 디자인 및 환경관련 프로젝트 가운데 가장 우수한 작품을 골라 ‘베로니카 러지(Veronica Rudge) 그린상(賞)’을 시상해 왔다. 이 분야 최고의 권위로 꼽힌다. 상금은 5만 달러(약 6000만원). 하버드대는 지난 2년간 세계로부터 800여 개 프로젝트를 신청받아 정밀한 서류심사 끝에 이 가운데 4개를 골랐는데, 청계천 복원사업이 그중 하나로 뽑힌 것이다.
 
  이들이 서울에 와서 만난 사람은 2명. 한 명은 양윤재(梁鈗在) 현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전 청계천복원추진본부장), 또 한 명은 제타룡(諸他龍) 전 서울시 교통국장이다. 이들은 롯데호텔에서 하루 동안 두 사람에 대한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갔다. 그리고 2주 후인 지난 5월 3일, 하버드대는 수상 대상자로 서울시가 최종 선정됐음을 통지해 왔다. 시상식은 9월 28일이다. 서울시는 이인근(李仁根) 도시기반시설본부장을 시상식에 보내 상을 받아올 예정이다. 제 전 국장도 초청장을 받아 시상식에 참석한다.
 
  양 위원은 청계천 복원 당시, 추진본부의 본부장이었으니까 당연하다고 치고, 제 전 국장은 왜 만났을까. 하버드대가 청계천 복원사업의 소프트웨어를 제공한 인물로 제 전 국장을 지목한 것이다.
 
  제 전 국장은 청계천 복원 이유를 묻는 하버드대 일행에게 “디자인은 미(美)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철학과 혼(魂), 역사가 어우러져야 위대한 것”이라고 전하고 동양철학적 접근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고 한다.
 
  〈서울은 조산(祖山)인 북한산(北漢山), 주산(主山)인 부아악(負兒岳 또는 북악산), 안산(案山)인 남산(南山)을 앞뒤로 하고, 낙산(駱山), 인왕산(仁王山)을 좌우로 거느리며 중앙에 임금이 남면(南面)하는 경복궁(景福宮)을 배치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흥인지문(興仁之門), 돈의문(敦義門), 숭례문(崇禮門), 홍지문(弘智門), 보신각(普信閣) 등을 오행(五行)에 맞춰 지은 것이다.
 
  산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물이다. 주산인 북악산 양쪽에서 시작하는 청계천은 동쪽으로 흘러 뚝섬 북서쪽에서 중랑천(中浪川)과 합류한 다음 서쪽으로 흐르는 한강에 유입한다. 하천이 서울 도심을 빠져나가는 이른바 수구(水口)가 산에 둘러싸여 밖에서 볼 수 없는 형국을 풍수(風水)에서는 이상적인 산수의 배치로 보고 있다. 남산과 낙산 줄기는 수구를 감싸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풍수에서 그토록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청계천이 콘크리트에 덮여 눈에 보이지 않는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내려는 의지일 뿐 아니라, 서울을 본래의 서울답게 다시 찾는 일이기 때문에 청계천을 복원한 것이다. 이는 역사의 회복이고 서울의 혼을 살리는 길이었다.〉
 
 
  정책팀장으로 李明博 시장후보 캠프에 합류
 
2005년 12월 퇴임하는 제타룡 도시철도 사장(오른쪽)에게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공로패를 수여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청계천 복원은 2001년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 후보의 공약사업으로 제시되었다. 이명박 시장이 당선된 후, 정확히 1년 후인 2003년 7월 1일 삼일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복개를 걷어내는 공사에 착수,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부터 성동구 신답 철교에 이르는 약 5.8km 구간의 청계천이 2005년 9월 30일 복원되었다. 청계천 복원은 도심환경을 개선했고 시민들의 휴식처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청계천 복원사업이 이명박 서울시장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최대의 공로자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국민들은 과연 대기업의 사장, 회장을 한 사람이라 무언가 다르다, 강력한 리더십과 추진력이 있다, 이런 사람이 리더가 되면 나라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배경이 있어,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장 임기를 마친 후, 한나라당 경선(競選)에서 승리한 데 이어 대선에서 압승을 거둔 것이라는 자타(自他)의 평가가 따른다.
 
  제타룡이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한 이명박 대통령과 연결된 것은 2001년 봄. 정년퇴직 후, 입학한 2년제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었다. 당시 이명박 후보 캠프에서 정책팀장을 맡고 있던 그의 교통국장 후임자 조광권(趙匡權·현 서울시 교통연수원장)의 소개에 따른 것이다. 교통 관련 정책 입안 적임자로 꼽혀 후보 캠프가 꾸려져 있던 서초구 영포빌딩에 가서 이명박 후보를 만났다. 두 사람은 구면이었다. 제타룡이 종로구 부구청장으로 있을 때, 이 후보는 종로에 선거구를 가진 신한국당 소속 국회의원이었던 것. 그런데 조 팀장이 구청장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캠프를 떠나는 바람에 자동적으로 정책팀장 자리가 제타룡에게 떨어졌다.
 
 
  청계천 복원 연구
 
  정책을 헌팅 중이던 그에게 어느 날, 이명박 후보가 어디서 들었는지 청계천에 대해 물었다. 제타룡은 서울시 시정개발연구원에 청계천 복원에 관한 연구보고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노수홍(盧秀弘) 연세대 환경공학과 교수가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로 활동하던 소설가 박경리(朴景利)씨의 제의에 따라 1~2년간 연구해 왔던 것이다. 노 교수의 보고서는 서울시에서 토론을 한 결과, 복원 불가로 판정이 난 상태였다.
 
  정책팀은 이 보고서를 다시 꺼내 들고 검토에 들어갔다. 노수홍 교수를 일주일 간격으로 수차례 초청해 설명회도 가졌다. 정책팀은 토론 끝에 복원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냈다.
 
  복원이 불가피하다는 이유는 다섯 가지였다.
 
  첫째, 삼일고가도로 아래 6~8차선 청계천 도로에 배기가스가 빠지지 않는다. 그 결과 미세먼지가 서울시내 도로의 평균인 50ppm의 두 배 가까운 80~ 90ppm에 이른다.
 
  둘째, 건설된 지 30년이 넘어 이미 부식(腐蝕)이 시작됐을 만큼 안전상 문제가 있다.
 
  셋째, 미8군이 통행을 금지시켰을 정도로 메탄가스 폭발 위험이 있다.
 
  넷째, 도시미관상 문제가 있다.
 
  다섯째, 도심 토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없다는 것 등이었다.
 
  청계천 복원에서 가장 큰 장애는 노점상 문제인 것처럼 알려졌지만 실제는 교통이었다. 하루 통행 차량 17만 대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분산시키는가에 성패가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울시 교통정책을 오랫동안 다뤄본 제타룡은 다음과 같은 대책을 내놓았다.
 
 
  복원의 가장 큰 難關이던 교통대책 수립
 
버스 중앙차로제는 제타룡의 아이디어다.
  환승할인으로 버스를 승용차와 경쟁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개혁하여 청계천 철거에 따른 교통문제를 해결한다. 버스 준공영제와 중앙차선제가 이 안에 포함돼 있다. 그래도 문제가 있으면 주요 간선도로 일방통행, 공사기간 중 4대문 내 자동차 5부제를 시행한다는 것이었다.
 
  버스의 준공영제는 이스라엘이 도입하여 성공한 것으로, 수익금을 버스회사가 아니라 버스조합이 갖도록 하여 버스 운행 횟수에 따라 나눠주도록 하는 제도다. 서울시내엔 426개의 버스노선이 있는데, 3분의 1은 잘되고, 3분의 1은 현상유지, 3분의 1은 적자를 보고 있었다. 업자들은 적자를 보는 노선에는 버스 배차를 적게 하여 시민들에게 큰 불편을 주었다. 준공영제를 도입하여 승객이 있든 없든 수익금을 분배해 주니까 이 문제가 해소됐다.
 
  버스중앙차선제는 세계적 추세로, 과거 천호대로에서 시험 운행해 본 경험이 도움이 됐다. 환승할인제는 뉴욕시를 벤치마킹했다. 시안(試案) 중 일부는 시행된 것도 있고, 일부는 유보된 것도 있다. 아무튼 안정화되기까지 초기엔 조금 말썽이 있긴 했지만, 이러한 교통대책은 지금도 서울시에서 그대로 시행되고 있는 시스템이다.
 
  제타룡은 자신에게 청계천 복원사업의 공로가 돌아오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가 제시한 공로의 1순위는 이명박 후보의 강력한 의지, 추진력, 결단력이었다. 이 후보는 매주 토요일마다 한 번도 거르지 않고 6개월 동안 추진내용을 보고받았다는 것. 여기에 청계천을 연구한 학자, 복원용역을 맡은 업체, 공사를 담당한 엔지니어, 그리고 서울시 관련 공무원들의 뒷받침을 들었다.
 
 
 
吳世勳 시장후보에겐 ‘도심의 재창조’와 ‘물의 도시’ 콘셉트 건의

 
제타룡 서울시장직무인수위원장이 오세훈 시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제타룡은 오세훈 현 서울시장을 당선시키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둘이 만난 것은 이명박 캠프에서였다. 이재오(李在五)가 선거대책위원장, 오세훈은 홍보위원장이었다. 이명박 후보가 인터뷰할 일이 있으면 이재오 위원장의 호출에 따라 이들 세 사람은 미리 만나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논의했다. 이런 시간을 오래 보내다 보니 서로에게 익숙해졌다. 특히 한번 능력을 인정하면 계속 믿어주고, 미래 관련 책을 꾸준히 읽는 등 배짱이 맞는 부분이 많았다.
 
  2005년 서울시장 경선(競選)에 나선 오세훈 후보는 제타룡에게 선대위 정책팀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해 왔다. 그가 오 후보 캠프에서 건의한 정책의 핵심이 ‘도심의 재창조’이다. 구체적으로는 도심(都心)의 남북개발, 광화문 광장 건설, 세운상가의 녹지대 조성, 동대문운동장 철거 후 디자인 중심지로 탄생 등이다.
 
  그리고 이번 선거에서는 청계천 복원을 계기로 서울을 ‘물의 도시’로 만들 것도 제안했다. ‘물의 도시’에 대해선 설명이 필요하다. 세계의 대도시들은 모두 콘셉트가 있다. 예컨대 파리는 ‘빛의 도시’, 로마는 ‘영원한 도시’ 같은 거다. 서울에는 세계 어느 도시에서도 보기 드믄 수량(水量) 풍부한 한강(漢江)이 있다. 이를 살리는 방안으로 한강으로 흘러드는 지천(支川) 25개 가운데 복개된 지천 17개를 청계천처럼 복원하고, 건천(乾川)에는 물이 흐르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밖에 ▲중랑하수처리장에 들어오는 1일 100만 톤의 하수를 BOD 1~2ppm으로 고도 정수처리하여 4대문 안 도로에 하루 30분씩 물이 흐르도록 한다. ▲서울광장을 둘로 나눠 하나를 깊이 30~50cm의 호수로 만든다는 것도 포함돼 있다.
 
  아무튼 서울시장에 당선된 오세훈은 제타룡을 시장직무 인수위원장에 임명했다. 4년 뒤인 지난 6월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재선에 도전한 오 시장은 제타룡을 선거대책위의 고문으로 위촉했다.
 
  그렇다면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청계천 복원사업에 소프트웨어를 제공한 인물로 지목받고 있고, 오세훈의 서울시장 재선에 기여한 제타룡은 어떤 사람인가. 그의 이력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諸他龍. 모두 諸, 남 他, 용 龍. ‘모든 남을 용으로 만든다’는 뜻이니, 독특한 이름이다. 하기야 이명박을 ‘용’으로 만들었고, 오세훈을 ‘잠룡(潛龍)’으로 만들었으니 그의 이름이 틀린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에 대해 그는 펄쩍 뛴다. 자신은 그저 뒤에서 한 조각 힘을 빌려줬을 뿐, 모두 그들의 능력으로 성취한 결과라는 것이다. 다만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한 가닥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용납하겠단다.
 
 
  친구 따라갔다가 자신만 홀로 공무원 시험 合格
 
  제타룡은 1938년 경남 사천에서 제성수(諸性秀)씨와 황덕순(黃德順)씨 사이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우리 나이로 올해 73세다.
 
  사천중, 진주고를 나온 그는 1964년 부산에서 5급 을류(지금의 9급) 시험에 합격,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1965년 서울시로 전출한 뒤, 서울시 운수 1, 2과장, 교통기획과장, 교통관리사업소장, 교통국장 등 교통 분야에서 주로 일했고, 감사관실에서 사무관, 이사관을 지냈다. 종로구 부구청장, 양천구 부구청장을 지냈으며, 1999년 서울시 감사실장(2급)으로 정년퇴직했다.
 
  그는 교통 관련 분야에서 오래 근무하며 도심 혼잡통행료 징수, 압축 천연가스(CNG), 교통카드, 버스 중앙차선제를 처음 도입, 운영했다. 서울시 지하철의 공사화(公社化), 서울 지하철 공사(工事)를 오픈컷(Open Cut) 공법에서 나틈(NATM) 공법으로 바꾼 것도 그의 제안이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오픈컷은 땅을 파헤친 상태로 공사하는 것이고, 나틈은 복공판으로 공사장을 덮어 차량을 소통시키면서 공사하는 방법이다.
 
  그가 공무원이 된 것은 조금 사연이 있다. 진주고에서 전교 10등 안에 들던 그는 서울공대를 지망했다. 그런데 입학시험을 치러 가서야 자신이 적록(赤綠) 색약임을 알았다. 당시엔 응시 자체가 불가능했다. 좌절감에 빠진 그는 육군에 자원입대했다. 3년간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한 후, 분명한 목표 없이 세월을 보내던 그에게 공무원 세계가 다가왔다. 1964년 친구 7~8명이 부산시 실시 5급 을류 지방공무원 시험을 보러 간다기에 따라갔다가 자신만 덜컥 붙어버린 것. 취직하기 어려운 때라 270명 모집에 1만2000여 명이 응시, 50대 1 가까운 경쟁률이었다.
 
  이듬해 동생이 서울법대에 진학, 뒷바라지를 해야 할 형편이 생겨 서울시 전출을 신청했더니, 받아들여졌다. 그 뒤 정년퇴직하기까지 35년간 서울시에서만 공무원 생활을 했다.
 
 
 
직원들 등 떠밀어 대학원 보내…

 
  이명박 시장이 취임한 후 얼마 되지 않은 2002년 9월, 제타룡은 지하철 5~8호선을 운영하는 도시철도공사 사장에 임명됐다. 임기는 3년. 그가 사장에 취임한 후, 실행한 경영철학은 네 가지였다. ▲철학경영 ▲감성경영 ▲윤리경영 ▲지혜경영이다. 이를 통틀어 그는 경영의 인문학적 접근이라고 했다.
 
  간단히 소개하면 이익을 내는 것은 이사(理事) 이하의 실무 경영진이 생각할 일이고, 최고경영자는 이보다 차원 높은 인간존중의 경영을 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근본적으로 이기적 성격이 강한 인간은 이성에 호소하면 잘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리더가 몸을 던져 실천하면서 감성에 호소할 때는 먹혀든다는 것이다. 그는 사정이 어렵다고 조직을 축소할 것이 아니라, 직원들에게 투자하는 것이 어려움을 이겨내는 더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이러한 원칙 아래 그는 직원들이 공부하는 것을 적극 도왔다. 대학원에 가겠다면 업무시간과 관계없이 낮에 가도 좋다고 등을 밀며 격려했다. 그는 정식으로 예산을 편성하여 석·박사과정을 이수하는 직원들에게 학기당 100만원씩 지원했다. 학비의 일부지만, 회사가 상징적으로 도와준다는 데 초점을 맞췄다. 제타룡이 사장으로 있는 동안, 대학원에 진학한 직원이 60여 명에 이르렀다. 조직의 파워가 강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직접 몸을 던져 실천한 것은 총연장 152km인 지하철 5~8호선의 도보 답사다. 그는 선로를 매주 금요일마다 걸어서 다녔다. 어둡고 좁은 구역을 걸으면 직원 몇이 뒤따른다. 답사 후에는 통닭파티를 하면서 그 구역의 문제점들을 파악하는 방식을 취했다. 사람이 걸어 다닐 만한 공간이 나 있기는 했지만, 목숨을 건 답사에 직원들은 질색했다. 처음에는 쇼라고 했다. 하지만 1년 몇 개월을 이런 식으로 사장이 지속하니까 직원들이 진정성을 인정해 줬다. 그러고는 안전에 더욱 신경을 써줬다. 그 결과, 사고율이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
 
  조직의 리더란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고, 직원들이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란 것이 그의 견해다. 어린 시절 일본 역사소설 <대망>(大望)을 읽으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행하던 영웅적인 일들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날씨에 1만명 군사가 먹을 식량은 5000명분밖에 없었다. 도쿠가와는 자신이 먹을 양식까지 병사들에게 나눠줬다. 아랫사람들에게 말로만 아무리 따르라고 설득해 봤자 소용없고, 직접 몸으로 보여줘 감성적으로 공감할 때 비로소 설득력이 생긴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적자회사 월급 다 받을 수 없다” 절반 반납
 
제타룡 서울시 도시철도공사 사장이 2003년 12월 노조의 파업에 대한 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그가 한 일은 이뿐 아니다. 그는 첫 달 월급부터 반액을 회사에 반납했다. 적자를 보는 공기업 사장이 월급을 다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처음엔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얼마나 갈 것이냐는 눈치였다. 그는 3년 임기 동안 매월 200만원씩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월급 반을 회사 금고에 다시 집어넣었다.
 
  한 달에 한 번 평직원의 생일잔치에도 찾아다녔다. 부인에게 줄 꽃다발, 케이크 하나 사들고 집으로 찾아갔다. 시골에 사는 직원 부모의 집이 태풍이나 홍수피해 등을 당하면 직접 찾아가 위로금을 전달했다. 상(喪)을 당하면 발인 때까지 회사 차량을 지원해 줬다.
 
  이런 감성, 윤리경영은 보답을 받았다. 임기 3년 동안 도시철도공사는 검찰 수사를 여러 번 받았지만, 형사입건된 직원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 그의 자랑이다. 또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을 때 도시철도공사 노조는 30%의 인원만 동조했다. 70%가 현업에 종사했으므로 지하철이 멈추는 사태를 막을 수 있었고 정시운행이 가능했다. 70%가 파업에 동조하고 30% 정도만 현업에 남은 타 업체와 비교됐다. 도시철도공사가 정상운행을 계속하자, 지하철 파업은 흐지부지되어 오래가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공부와 독서는 그의 평소 생활이자, 평생 화두이다. 고졸(高卒) 출신으로서 신분이 보장되는 직업공무원으로서는 최고봉인 이사관까지 승진했지만, 그는 항상 배움에 목말라 했다. 그래서 시간이 허락하는 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1999년 이사관으로 정년퇴직한 후, 62세의 나이로 2년제 서일대 사회체육과에 들어가 250명의 졸업생 가운데 수석으로 졸업했다. 만학도(晩學徒) 이야기는 드문 일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20세 전후의 새파란 젊은이들과 경쟁하여 수석졸업을 했다는 것은 아마도 신문의 사회면 화제기사나 사람들 면 톱으로 기사화될 만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사회체육과에서 골프를 배우며 3급 지도자 자격증까지 땄다. 취미가 운동이라 할 만큼 테니스, 스키, 인라인 스케이트 등 각종 운동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70대 중반이 된 지금도 드라이버 거리가 250m에 육박하고, 80타 초반의 스코어를 유지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는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 캠프에서 바쁜 날을 보내면서도 서경대 영어과에 3학년으로 편입하여 학사증을 받았고, 이어 연세대 행정대학원에 입학해서 정식으로 석사학위를 땄다. 그의 이력서를 보면 미국 유타대 수학(修學)이라고 나와 있다. 그래서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서울시에서 근무할 때, 누군가가 통신교육으로 미국 대학에 다닐 수 있다고 알려줬다. 교육을 받고 숙제를 우편으로 보내면 1년에 3학점 정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이 방식으로 유타대에서 10여 년 동안 경영학을 중심으로 한 정치학, 경제학 관련 공부를 하여 43학점을 땄다.
 
  서울시에서 같이 근무한 동료들은 그를 온화하고 합리적이며 공부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평한다. 고졸 학력이 전부였던 그에게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고 한 것은 이유가 있다.
 
  IMF 사태는 1997년 11월에 터졌는데, 그는 7개월 전인 4월 무렵 이미 수상한 낌새를 감지하고 주변에 경고를 했다. 당시엔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사태가 발발한 후에야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느냐면서 그의 안목을 비로소 인정했다.
 
 
  책을 읽으면 미래가 보인다
 
  그는 유타대 통신교육을 받으면서 원서(原書)를 1년에 2~3권은 읽었다. 〈타임〉 등 시사잡지는 정기구독했다. 아무리 바빠도 최소한 〈타임〉의 커버스토리는 정독했다. 특히 미래학에 관심을 갖고 세계정세를 분석하는 내용의 책을 많이 읽었다. 지금까지 읽은 책이 700여 권. 그는 건성으로 책을 읽지 않는다. 반드시 요약 노트를 만들면서 읽는 정독형이다. 핵심 내용을 정리해서 주변 사람들에게도 끊임없이 나누어준다.
 
  공부 가운데 최상의 공부는 무지(無知)를 참을 수 없는 자발적인 욕구와 앎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껴서 하는 공부라고 한다. 제타룡은 바로 그런 공부를 했다. 호기심이 끊임없이 솟아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는 중에 절로 세상 보는 눈이 떠졌다.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돌아갈지가 대충 짐작됐다.
 
  매사에 호기심이 많은 그가 세계의 트렌드를 살피기 위해 탐구하듯 책을 읽는 가운데 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미래사회로 옮겨갔다. 정치·경제·사회의 미래 트렌드 읽기가 그의 주 종목이 되어 버렸다. 정책 아이디어의 원천은 끊임없는 공부였고 미래 트렌드 읽기였다.
 
  2007년 1월 오세훈 서울시장은 그를 시정개발연구원장에 임명했다. 하지만 그는 미래의 세상 돌아가는 공부를 하고 싶어서 임기 3년인 원장직을 7개월 만에 자진 사임했다.
 
  최근에 읽은 책 가운데 추천해 줄 만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미국의 조지 프리드먼이 쓴 <100년 후(The Next One Hundred Years)>라는 책을 들었다.
 
  조지 프리드먼은 ‘21세기의 노스트라다무스’라고 불릴 만큼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난 국제정세 분석가로 꼽힌다. 이 책은 지정학에 관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100년 후의 지구 상 나라들의 패권, 힘의 기울기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해 이야기한다. 다른 말로 하면 전쟁론이라고 할 수 있고 결론은 미국이 이긴다는 것이다.
 
 
  부인이 돈 버는 바람에 돈에서 해방돼
 
제타룡은 서울시 공무원을 그만둔 후 서일대 사회체육학과에 입학,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가 말 많고 탈 많은 서울시에서, 특히 교통 관련 부서에서 오래 일하면서 별 잡음 없이 근무할 수 있었던 것은 공무원 초창기에 워낙 뼈저린 경험을 한 것이 계기가 됐다. 교통부서는 버스업자, 택시업자들과 관련돼 있어 행정 처리에 따른 각종 이권이 민감하게 얽힌 곳이었다. 여간 투명하게 처신하지 않고서는 그런 업자들의 이권에 말려들 소지가 있었다. 그래서 서울시에선 청렴하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대체로 교통 관련 부서에 배치되었다.
 
  그가 감사과 1계장으로 있을 때였다. 서울시 교통국은 치안본부 특수수사대의 ‘밥’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꼴로 부정이 있다는 혐의로 직원들이 조사받으러 불려갔다. 사안이 간단할 때는 감사과로 직원 신병을 인수해 가라는 통지가 오는데, 가보면 밤새 취조당하느라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옷도 흐트러지고 표정은 얼이 빠지고. 그걸 보면서 평생 저런 일로 엮여서는 안 되겠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맹자(孟子)에 ‘유항산(有恒産) 유항심(有恒心)’이라는 말이 있다. 일정한 재산이 있어야 곧은 마음이 생긴다는 뜻이다. 그가 항심(恒心)을 갖게 된 것은 그의 부인 이명춘(李明春·62)씨의 공이다. 부인이 결혼 이후 친정아버지 회사에 취직해, 돈 걱정을 해결해 줬던 것이다. 지금까지 집에 봉급을 가져다준 적이 없을 정도로 그는 돈 문제에서 해방됐다.
 
  부인과 만난 것은 세 번의 우연이 겹친 결과였다. 감사과 재직 시,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으로 친구의 자가용을 얻어 타고 출장을 나갔다가 남산을 지나는 중이었다. 여대생으로 보이는 처녀 2명이 사내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있었다. 그는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여 두 여학생을 위기에서 구해줬다. 그중 한 명이 동향인 경남 사천 출신이었다. 또 흑석동 쪽에 출장을 갔다가 버스정류장에서 사천 출신 여학생을 다시 만났다. 그녀는 중앙대 가정교육과 4학년이라고 했다. 세 번째 종로 길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우연히. 단성사 옆 골목 다방으로 데리고 가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헤어진 그녀로부터 편지가 배달됐다. 전북 익산에서 교생실습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주사(6급) 승진시험 공부 중이던 그는 책을 던져버리고 친구의 개인택시를 타고 익산으로 달려갔다. 한 번지에 여러 집이 있어 문을 일일이 두드려 가며 끝내 그녀를 찾아내 반가운 해후를 한다.
 
  머잖아 둘은 결혼한다. 신혼부부는 결혼 축의금으로 들어온 60만원 가운데 30만원은 셋방을 얻고 남은 돈 30만원으로는 그날 택시를 몰고 먼 길을 함께 달려가 준 친구에게 개인택시 하나를 사주기로 합의한다.
 
 
  미래학 특강
 
  둘 사이엔 1녀1남이 있다. 맏이인 딸 초롱(40)은 이화여대 경영학과를 나와 검사와 결혼했고, 외국어대 불어과를 나온 아들 성훈(省勳·36)은 문단에 정식 등단한 소설가로 LG그룹에서 근무한다.
 
  요즘 그의 일과를 보면 지방 출장을 다니는 일이 잦다. 미래학을 공부한 그의 명성이 조금씩 알려져 지역자치단체로부터 지식을 전수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1~2일씩 출장을 다니는 것이다. 9월 8일엔 충남도 초청으로 호서대학교 아산캠퍼스에서 초·중·고교장 765명에게‘세계의 메가트렌드와 교육’이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했다.
 
  출장이 없는 날은 아침 5시에 일어나 미국의 다큐멘터리 등을 시청하면서 미국문화를 공부하는 데 1시간(7년째), 오전 9시20분부터 10시20분까지 1시간 시사영어학원에서 타임지 수강(7년째), AFN뉴스와 드라마를 시청하는 데 1시간(4년째)을 보낸다. 오후엔 테니스, 인라인 스케이트, 골프 연습에 시간을 쓴다. 그의 일과에서 그의 나이를 짐작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진 : 서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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