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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박종철 사건과 영등포교도관들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사건 내부고발자, 23년 만에 밝혀져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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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이 ‘딥 스로트’

안유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은 교도소에서 일어나는 모든 보안 사안을 1차로 취급하는 자리에 있었다. 고문 경찰관들의 면담기록 등 극비사항은 가장 먼저 그의 손을 거쳐 상부로 보고되었다.

⊙ 안유 보안계장이 당시 재야운동을 하다 수감된 이부영씨에게 은폐·조작 사실 알려
⊙ 이부영씨는 비밀 편지를 써 전·현직 교도관을 통해 영등포교도소 밖으로 전달
⊙ 1987년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폭로, 6월항쟁의 도화선
⊙ 한국 교정사(矯正史)에서 영등포교도관들의 내부자고발을 어떻게 평가할지 의문
1970~80년대 영등포교도소 전경.
  1987년 6월항쟁의 불씨가 됐던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사건의 ‘딥 스로트(Deep Throat)’가 23년 만에 처음 공개됐다.
 
  박종철을 물고문으로 숨지게 한 경찰관이 당초 2명(조한경·강진규)이 아니라 3명(황정웅·반금곤·이정호)이 더 있었으며 이 과정에 전두환(全斗煥) 정권이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것이 은폐·조작 사건의 본질이다.
 
  그동안 딥 스로트가 누군지는 미스터리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歷史)’는 영등포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이부영(李富榮·전 열린우리당 의장)씨가 축소·은폐 사실을 우연히 알아내, 그 사실을 비밀 편지에 적어 교도관(지난 2007년 5월 그 교도관이 한재동씨로 밝혀졌다)을 통해 교도소 담장 밖으로 전했다는 정도였다. 수형자(受刑者) 신분이던 이씨가 어떻게 엄청난 정보를 입수하게 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씨 스스로도 입을 닫았었다.
 
  그러나 최근 영등포교도소 황용희(53) 교도관이 쓴 <가시울타리의 증언>이라는 수필집 속에 내부고발자가 처음 등장한다. 바로 1987년 당시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으로 근무하던 안유(安裕·66)씨다. 안씨는 이후 인천구치소 부소장과 청송제2교도소 소장, 서울지방교정청장을 거쳐 2003년 퇴직한 상태다. 서울교정청장은 교정업무를 책임지는 법무부 교정본부장 다음의 최고위직이다.
 
  안씨는 당시 영등포교도소에서 일어나는 모든 보안 사안을 1차로 취급하는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고문 경찰관들의 면담기록 등 극비사항은 가장 먼저 그의 손을 거쳐 상부로 보고되었다.
 
  황 교도관은 지난 6월 책을 집필하며 이부영씨를 만나 딥 스로트의 실체를 처음 듣게 됐다. 이씨는 실명을 공개하는 과정에서 안씨를 여러 차례 설득했다고 한다. 안씨는 자신의 신원이 드러나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이부영씨는 “지금도 (안씨가) 굉장히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고위직으로 공직생활을 마쳤으니 그들 커뮤니티 내에서 오는 압박과 고립감이 작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했다. 기자는 직접 안씨에게 연락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 외에 더 언급할 내용이 없다. 정중히 거절한다”고 알려 왔다.
 
1987년 박종철 사건 당시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됐던 이부영씨.
  할 수 없이 기자는 영등포교도소에 근무한 전·현직 교도관들을 만나 보았다. 그들이 보는 박종철 은폐 사건의 진상은 어떠했는지, 어떻게 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는지 탐문해 보았다. 그리고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 보았다.
 
  결론적으로, ‘박종철 은폐·조작 사건’이 폭로되고 그것이 민주주의 역사에 큰 획을 긋게 만든 주인공은 영등포교도관들이었다.
 
  박종철을 숨지게 한 경관이 3명 더 있다는 사실을 이부영씨에게 알린 이와, 이씨가 안유 보안계장의 귀띔을 메모할 수 있게 펜과 종이를 건넨 이도 수형자를 감시해야 하는 교도관들이었다.
 
  또 ‘의식화된’ 교도관이 수시로 이씨와 접촉해도 모른 척 눈을 감아 준 이도, 이씨의 ‘비밀 편지’를 교도소 담장 밖으로 전달한 밀사(密使) 역시 전·현직 교도관들이었다.
 
  영등포교도관들로부터 쪽지를 건네받은 종착지는 김정남(金正男·김영삼 전 대통령 당시 청와대 교육문화수석비서관)씨였다. 김씨는 2005년 펴낸 저서 <진실, 광장에 서다>를 통해 이런 말을 했었다.
 
  “아직도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몇몇 사람들이 없었다면 박종철 사건은 조작된 채로 은폐될 뻔했던 것이다.”
 
  이름을 밝힐 수 없다던 ‘몇몇 사람’이 바로 교정직 공무원, 즉 교도관들이었으며, 그들이 전두환 정권을 벼랑 아래로 떠밀었다. 역사는 그들을 ‘의인(義人)’으로 기록할 것이다.
 
  그러나 군사정부는 정작 교도관들의 실체를 까마득히 몰랐다. 역사가 몇 번 바뀐 뒤에야 겨우 알았을 테지만, 1980년대 민주화 시대를 활짝 열었던 이들 뒤에 교도관이 있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영등포교도소, 역사의 아이러니
 
1975년 2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의 석방조처에 따라 영등포교도소에서 출감한 김지하 시인을 친지들이 헹가래쳐 환영하고 있다.
  박종철 은폐·조작 사건의 진원지는 영등포교도소다. 먼저 영등포교도소가 어떤 곳인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영등포교도소는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독특한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1970~ 80년대 영등포교도소는 서울구치소(옛 서대문형무소 자리)와 함께 많은 정치범이 수감됐던 곳이다. 민주주의가 억압받던 시대의 우울한 아이콘인 셈이다.
 
  ‘고척호텔’(서울 구로구 고척동에 있어 부르는 영등포교도소의 별칭) 정문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이곳을 거쳐 가는 자여, 우리는 그대를 믿노라.>
 
  고척호텔을 거쳐 간 수많은 사람이 있다. 긴급조치 1호로 구속됐었던 통일운동가 백기완씨와 민청학련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던 김지하씨,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함세웅 신부, 시집 <겨울공화국>으로 필화사건을 일으켰던 양성우 시인, 박형규 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김동완 목사 등도 한 시절 영등포교도소 창살 아래서 긴 밤을 보냈던 인물이다.
 
  황 교도관에 따르면, 김지하(金芝河) 선생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됐다고 한다. 그는 교도소 내 인쇄공장에 나가 한 달에 300원(국가가 재소자에게 주는 작업 상여금) 가량을 벌었는데 그 시절을 <지옥>이란 시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중략)
 
  내 갓 스물아
  영화나 되어
  낮도 밤도 없는 시커먼 영등포
  멍청히 남은
  소화(昭和) 20년제의
  아아 나는 낡아빠진 가와모도 반절기
 
  시인이 말한 ‘가와모도 반절기’는 일제(日帝) 구형 활판인쇄기로 1980년대까지 교도소에 있었다고 한다. 그는 붉은색 글씨로 ‘가와모도(川本)’라 새겨진 인쇄기와 씨름하며 종일 작업을 했던 것이다.
 
  김근태(金槿泰) 전 의원(당시 39살)도 고척호텔에 머문 일이 있다. 그는 1986년 5월 영등포교도소로 이송된 뒤 1개월14일 머무르다 강릉교도소로 이감됐다고 한다. 김 전 의원은 영등포에서의 44일 동안 바로 서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나빴고 고문 후유증으로 치아가 흔들려 제대로 음식을 못 먹었다고 한다.(<가시울타리의 증언> 참조)
 
  그런데 14년 뒤인 2000년 10월엔 김근태씨를 고문했던 이근안씨가 영등포에 수감돼 교도관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역사는 돌고 도는 수레바퀴가 아닐 수 없다. 이씨는 광목으로 만든 앞치마를 두르고 유압기에서 생산된 두부 판을 날라 수돗가에 차곡차곡 쌓는 일을 부지런히 했다고 한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 잡혀 온 인사들은 교도소 내 특별사동(特別舍棟)에 수감됐다. 특별사동은 네 번째 감시대 망루 바로 아래에 있었다. 특별사동은 다른 사동과 떨어져 ‘교도소 내 교도소’로 불리는 ‘절해고도(絶海孤島)’였다. 직원 이발관과 원예 작업장을 경계로 높은 담이 둘러쳐져 있었다고 한다.
 
  박종철을 고문해 숨지게 한 조한경(趙漢慶·당시 42세) 경위와 강진규(姜鎭圭·당시 30세) 경사가 붙잡혀 있을 당시 이부영씨가 특별사동에 수감된 것은 어쩌면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는 1986년 5·3 인천사태 때 배후주동 혐의로 수배를 받아 오다가 그해 10월 붙잡혀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리고 이듬해 1월 19일 조·강 두 경관이 들어왔다. 이부영씨의 감방과 두 경찰관 감방의 거리는 10여m에 불과했다고 한다.
 
  당시 특별사동에는 그들 외에도 ‘국시(國是) 파동’으로 잡혀 온 현역 국회의원이 있었다. 신한민주당 소속 유성환(兪成煥·대구 중·서구) 의원은 1986년 10월 14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대한민국 국시는 반공보다 통일이어야 한다”고 말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됐었다. 면책특권을 지닌 현역 의원의 법정 구속으로 정국이 급랭할 정도로 어수선했다. 유 의원의 대정부질문 원고작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서울시지부 부의장 이재오(李在五·현 특임장관)씨도 검찰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유 의원은 영등포교도소에 9개월가량 있다가 1987년 7월 보석으로 풀려 났다.
 
 
  고문경찰들은 이부영씨 방 크기 5배짜리에 수감
 
  박종철 은폐·조작 사건의 시발점은 1987년 1월 19일 밤이다. 그날 밤 9시 40분쯤 조한경·강진규 경찰관이 영등포교도소에 들어온 것이다. 그들이 들어온다는 소식에 교도관들도 아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구속 경찰관들은 모자 달린 오리털 파커를 입고 들어와 간단한 입감절차를 밟았다. 그런데 파커 차림의 5명 가운데 2명만 내려놓고 나머지 3명(고문 경관을 숨기기 위해 똑같은 복장의 전경들을 같이 태웠다)은 호송차에 태워 경인로로 사라졌다. 2명의 경관 손에는 노란 봉투가 쥐여져 있었다고 한다. 봉투 안에는 교도소 내에서 급전(急錢)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지 빠닥빠닥한 만원짜리 지폐 20장이 담겨 있었다.
 
  교도관의 눈에 비친 고문 경관들은 어떤 모습일까. <가시울타리의 증언>을 펴 보니 이런 구절이 있었다.
 
  <나이 든 사람(조한경-편집자 주)은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젊은 경사(강진규)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비교적 느긋한 경위에게 신입 안내를 하며 슬쩍 속내를 떠봤는데 그는 상부의 언질을 받은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방을 배정받은 뒤에 몇 번 물었으나 자물쇠를 채운 듯 입도 벙긋 안 했다.>
 
  당시 이부영씨는 특별사동 2.4제곱미터짜리 독방에 수감돼 있었다. 그러나 고문 경찰관은 같은 사동이지만 13제곱미터가 넘는 큰 방에 따로따로 수감되었다. 그들에겐 하루가 멀다 하고 외부인이 찾아왔다. 치안본부(현 경찰청) 사람들이었다.
 
 
  고문 경찰관의 통곡
 
1987년 1월 19일 밤,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를 태운 차량이 치안본부 특수수사대 정문을 빠져 나오고 있다. 경찰은 승용차 1대와 봉고와 베스타 등 모두 3대의 차량을 동원, 두 수사관을 호송했다.
  교도소 내에서 이뤄지는 모든 접견은 교도관이 반드시 입회해야 한다. 박종철 사건의 위력으로 볼 때, 하급 교도관 대신 교도소 내 1차 보안 책임자였던 교도소 보안계장이 입회하는 것은 당연했다. 안유 계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박종철 사건을 둘러싼 경찰 내부의 음모와 갈등을 고스란히 지켜볼 수 있었다.
 
  1월 24일쯤엔가 특별사동 내에 “억울하다”는 통곡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취재 중 만난 한 전직 교도관 A씨는 이런 말을 했다.
 
  “가족들이 면회를 할 때 강진규 경사는 시멘트 바닥에 엎드려 엉엉 울면서 칠순의 아버지에게 ‘불효자식을 용서하라’고 하소연할 정도로 괴로워했던 것으로 압니다. 조한경 경위 역시 자신의 감방에서 소리 내어 찬송가를 부르거나 성경을 읽었어요.”
 
  많은 교도관들이 귀를 쫑긋 세웠으나 사안이 사안인지라 제지할 수 없었다. 그들 방에는 간수가 더 충원돼 24시간 감시했다.
 
  안유 보안계장은 남영동 대공 수사단장 등이 2억원이 든 입금통장을 조·강 두 사람에게 제시하는 ‘은폐·조작’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가족들의 생활은 염려 말라. 만약 말을 안 들으면 가족들 생활이 어려워지고 두 사람 역시 밖에 나와도 살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치안본부 사자(使者)들의 협박도 들었다.
 
  경찰 수뇌부와 두 경찰관과의 갈등과 반목이 깊어지면서 나머지 3명의 경찰관 이름이 불거져 나온 것도 그즈음이었다.
 
 
 
이부영·안유의 인연은 서울구치소

 
  안유씨와 이부영씨는 어떤 사이일까. 두 사람의 신뢰관계는 1970~80년대 서울구치소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안유 계장의 지인(知人)이 운영하는 출판사 사장과 이 전 의원이 친해 자연스레 가까워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취재 도중 만난 전직 교도관 B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안유씨가 밤이 되면 이부영씨를 보안과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고 커피도 주고 했단 말이에요. 보안계장이라면 그만한 권한이 있지요. 야간에는 그 사람이 대장이니까,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리고 둘이서 무슨 얘기를 주고받았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지요. 저는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정보 제공자가 안유씨라는 것을 직감했지요. 그런 고급정보를 알 수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으니까요.”
 
  또 다른 현직 C 교도관은 이런 얘기를 했다.
 
  “안유씨가 그런 정보를 흘렸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현직 교도관들 사이에 반응이 무척 엇갈렸습니다. 놀라워하는 분위기가 역력해요. 그럴 분이 아니라 생각했거든요. 현직에 있을 때 이런저런 구설에 오른 적도 있어서 교도관 사이에 평판이 엇갈린다고 할까요? 그러니 놀랄 수밖에요. 철저히 자신을 숨기기 위해 그랬을까요?”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전직 교도관 D씨는 안유씨를 이렇게 평가했다.
 
  “당시 민주화 운동을 하다 끌려온 사람에게 반드시 좋게만 해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친한 사람 몇몇하고만 대화를 했던 것으로 압니다. 운동을 하다 잡혀 온 대학생들을 혹독하게 다루기도 했어요. 심하게 때리기도 하고 묶기도 하고…. (지금 안유씨가 그런 일을 했다고 하니) 뭐가 진짜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이부영씨는 23년 동안의 비밀을 털어놓으며 “안씨를 만난 것은 운명”이라고 했다.
 
  “그는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조·강 두 사람과 경찰 간부들이 만나는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세상에 이럴 수 있나’며 공분(公憤)을 참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게 일부를 얘기해 준 것입니다. 그러나 현직에 있어서 그동안 그의 이름을 공개할 수 없다가 이번에 어렵게 설득해 밝혔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주저했지만, 나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가볍게 보지 말라’고 설득했어요.”
 
 
  의식화 교육을 받은 교도관들
 
1984년부터 88년까지 영등포교도소 교도관으로 재직했던 한재동씨.
  이부영씨는 안유 계장으로부터 ‘폭발력 있는’ 정보를 듣게 된 뒤 평소 알고 지내던 한재동(韓在東·현재 63세) 교도관에게 종이와 펜을 달라고 부탁한다. 한씨는 지난 2004년 12월 정년퇴직했다. 그가 영등포교도소에 근무한 것은 34년 재직기간 중 1984년부터 88년까지다. 그는 “죽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근무용지와 볼펜을 건넸다. 발각될지 몰라 두렵고 떨렸지만 사건의 진실이 묻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씨는 이씨에게 몰래 근무용지와 볼펜을 건네주고 이튿날 퇴근 무렵 건네받았다. 이렇게 해서 작성된 쪽지가 5~6건이었던 것으로 그는 기억했다. 두 사람 역시 서울구치소 시절 재소자와 교도관 신분으로 만나 인연을 텄다고 한다.
 
  “저는 민주화 운동을 하다 잡혀 온 이들에게 호감이 있었고,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들을 돕는 일을 했어요. 또 제가 영등포교도소로 발령을 받아 가니, 그곳에 의식화된 교도관이 몇 분 있더라고요. 업무가 끝나면 (의식화) 교육을 받으러 다니기도 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저는 스스로 사회과학 책을 읽고 깨우쳤는데, 몇몇 교도관은 (재야 인사들에게) 교육을 받으러 다니기도 했어요. 또 신촌이나 광화문 등지에서 의식화된 책을 파는 서점에 드나들면서 깨우친 이도 있었고요.”
 
  ―어떤 식으로 쪽지를 건네받았나요?
 
  (요즘엔 재소자가 감방에서 글을 쓸 수 있지만 1970~80년대 군사정부 시절엔 불가능했다.)
 
  “아마 안유 계장에게 이야기를 들은 뒤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다가 제가 찾아가면 볼펜과 쪽지를 달라고 했어요. 그럼 깨알같이 적어 이튿날 제게 전해 주곤 했어요. 처음에는 3명의 고문 경관 이름이 틀렸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왜냐면 안유씨가 구두(口頭)로 전한 이야기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교도관이면 마음대로 특별사동 정치범과 만날 수 있었나요? (한재동 교도관은 영등포교도소에 재직할 당시 특별사동 근무자가 아니었다. 재소자들이 근무하는 교도소 공장 중 하나인 철공소 담당자였다.)
 
  “평상시 다른 교도관들과 두루 친해야지요. 친한 교도관에게 부탁하면 100% 못 자르거든요. 정치범이 수감된 특별사동으로 가서 직접 만났습니다. 요즘엔 CCTV가 있어 개인적으로 만나는 일이 불가능하지만 그땐 안면 있는 교도관에게 부탁하면 가능한 일이었어요. 그 사실을 아는 다른 교도관들도 서로 쉬쉬하는 분위기였죠. 게다가 교도소 감독자가 안 다니는 시간대를 이용하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었어요.”
 
 
 
“공무원은 특정 권력자에게 충성할 순 없다”

 
1987년 2월 7일 박종철 고문치사 추모집회 모습.
  이부영씨는 박종철 축소·조작 사건을 적은 쪽지를 한재동 교도관에게 전하며 무슨 말을 했을까. 한씨의 말이다.
 
  “첫 마디가 ‘걸리면 위태롭다. 조심해라’는 말이었어요. 내용이 뭐냐고 물으니까 박종철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는 얘기였어요. 당시 박종철 사건이 알려지긴 했어도 조작됐다는 사실은 몰랐거든요. 깜짝 놀랐어요.”
 
  이씨는 그 쪽지를 김정남씨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재야(在野) 민주계 진영의 맏형 역할을 했던 김씨는 YS 정부가 들어서자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사회 수석비서관을 역임했다.
 
  “김정남씨에게 쪽지를 전하려 했는데 그가 있는 곳을 알아야지요. 재야인사들이 모두 잠적한 상태여서 찾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전직 교도관이던 전병용씨를 찾아가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지요. 전씨가 어렵게 찾아 김씨의 연락처를 전해 주더군요. 그래서 다음부턴 김씨에게 직접 연락을 하게 됐어요.”
 
  전병용씨는 1979년 3월 교도관의 복장 문제로 상급자에게 폭행당한 사건에 반발, 연판장을 돌리다 해직된 인물이다. 당시 그는 간판업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전씨는 김지하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됐을 때 시인의 <양심선언>을 외부로 유출하는 일에도 직접 가담했다고 한다. 당시 김지하가 수감된 사동의 청소를 담당하던 기결수가 반출한 것으로 연출했으나 실상은 전씨가 김정남씨에게 전달해 세상에 알렸다. 그 일화는 김씨의 저서 <진실, 광장에 서다>에 실려 있다.
 
  ―김정남씨와 어디서 주로 만났나요?
 
  “신촌과 평창동 음식점에서 만났어요. 가끔 김덕룡씨와 같이 나타날 때도 있었습니다.”
 
  ―밖에서 안으로 메모를 전달하는 역할은 하지 않았나요?
 
  “가끔 했었지요. 지금 기억에 나는 것은 민추협의 메시지를 안으로 전한 일이 있지요. 공개 접견 때 못하던 이야기, 그러니까 민주진영의 움직임이나 동향을 이부영씨에게 전해 주곤 했지요.”
 
  ―국가공무원이 그런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해 거리낌이 있었나요?
 
  “물론 공무원은 국가에 충성해야 하지요. 그러나 공무원이라도 국가가 아닌 특정 권력자에게 충성할 순 없다고 생각했어요. 군사정부를 정당한 권력을 가진 집단으로 보지 않았고 학살범이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돕게 됐습니다.”
 
 
  신민당에서 다시 천주교 신부들에게 전달
 
박종철 고문치사범 축소조작사건을 최초로 폭로한 천주교 김승훈 신부.
  한재동씨는 “처음에는 국회에서 터뜨리려고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김정남→김덕룡을 통해 당시 야당인 신민당으로 메모가 전달됐던 것이다. 그러나 신민당 측은 자신들이 발표하는 것을 꺼렸다. 겉으로는 당시 이민우(李敏雨) 총재와 김영삼(金泳三)·김대중(金大中)씨와의 갈등 등 당 내분을 이유로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은 사건이 워낙 메가톤급이어서 강경 일변도의 군사정부와 갈등을 빚을 우려로 주저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그 메모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으로 전달됐다. 천주교 측에 전달한 이는 고영구(高泳耉) 변호사의 가족이었다. 그때 김정남씨는 고 변호사의 집에 은신하고 있었다. 당시 이 사건을 취재했던 <월간조선> 함영준(咸永準) 기자(현 청와대 문화체육 비서관)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1990년 <월간조선> 8월호에 <특종 발굴: 박종철 고문치사 제보자는 이부영>이라는 기사를 썼다.
 
  “천주교 사제들 역시 고민스럽기는 마찬가지였어요.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함세웅(咸世雄) 신부 등이 관련 증거자료를 확보했지만 공개 여부를 두고 부담이 작지 않았던 것이죠. 언론사에 다시 제보할 계획도 세웠으나 그만두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때 언론사 상황이, 제보내용을 확인하기도 보도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죠. 당시 김수환(金壽煥) 추기경 역시 함 신부에게 보고를 받고 ‘이 사건의 진상은 철저히 밝혀져야 하나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히 해야 한다. 충분한 증거자료도 있어야 한다’는 요지로 말한 것으로 압니다.”
 
  결국 1987년 5월 18일 저녁 명동성당에서 열린 ‘5·18 광주항쟁 희생자 추모 미사’ 때 정의구현사제단의 최연장자였던 김승훈(金勝勳) 신부가 의혹을 공개했다.
 
  한씨는 “나와 이부영씨, 그리고 고문치사에 관여했던 경찰관들이 한교도소의 같은 사동에 있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모르는 과거로 사라질 일이었다는 점에서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천운(天運)’이 닿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고 회고했다.
 
  한씨는 2004년 12월 서울구치소에서 정년퇴임할 때까지 교도소 민주화를 위한 내부고발자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과천 경마공원에서 직원용 테니스장을 관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재직 중이다.
 
 
  내부고발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
 
  박종철 은폐·조작 사건이 공개된 뒤 영등포교도소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한씨의 기억이다.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어요. 조한경, 강진규 경관이 의정부교도소로 이송됐을 뿐입니다. 아마 정부 당국은 검찰 쪽에서 정보를 흘린 것으로 오해한 것 같아요. 당시 박종철 부검을 지휘했던 안상수(安商守) 검사(현 한나라당 대표)가 옷을 벗었지 않습니까. 그래서인지 자체 조사도 안 하고 그냥 넘어가 버렸지요.”
 
  영등포교도소, 높다란 망루 아래 거친 질감의 수의를 입고 한철을 보냈던 수많은 ‘민주화의 증인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들에게 고척호텔은 검은 펠트 천으로 만든 모자일까. 창이 긴 모자를 눌러쓰듯 덮어 버리고 지워 버리고 싶은 아픈 기억일까. 아니면 면도를 하다 기어코 살을 베듯 아픈 상흔으로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있을까.
 
  또 그들을 바라보던 교도관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쇠창살 안과 밖을 바라보던 그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어떠했을까. 19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 인사들이 캄캄한 감방에서 묵선(墨線) 같은 눈으로 세상을 응시할 때, 적어도 몇몇 교도관들은 그들을 안타깝게 바라봤을 것이다. 그것이 ‘내부고발자’ 역을 기꺼이 도맡게 하였다.
 
  세상은 일부 영등포교도관들을 ‘의인’으로 기록할 태세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1987년 6월항쟁이 촉발되지 않았거나 불꽃이 더디게 타올랐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 교정사(矯正史)에서 그들이 어떤 평가를 받을까는 자못 궁금해진다. 최고위직 간부의 내부자고발을 어떻게 바라볼까. 충격으로 받아들일까, 아니면 ‘의로운 행동’을 자랑스럽게 여길까. 영등포교도관들의 활약을 교정사에 제대로 기록할 수 있을까. 혹시나 부끄러운 상처, 감추고 싶은 기억으로 생각하지는 않을까.⊙
 
▣ 민주주의가 된 박종철 사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
 
  1987년 1월 15일 저녁 경찰청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카메라 플래시를 뒤로하고 기자회견을 시작했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박종철은,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된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고 있다고 여겨져… 1월 14일 오전 8시10분경 관악구 신림동 하숙방에서 연행되었다. 10시51분경부터 심문을 시작, 박종운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하고 소리를 지르며 쓰러져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
 
  박처원 치안감이 강 본부장의 말을 거들었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
 
  세상은 들끓었고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흘 뒤인 1월 19일에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무거운 얼굴로 다시 ‘진상’을 발표하기 위해 섰다.
 
  “박종철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한경 경위, 강진규 경사 두 사람에게 물고문을 당했으며 그 도중에 ‘사고’로 사망했다. 지나친 공명심 때문에 두 경찰이 멋대로 벌인 일이다.”
 
  그러나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몇 달 뒤 진실이 밝혀졌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 김승훈 신부는 5월 18일 광주항쟁 7주년 추도 미사가 열리던 명동성당에서 이렇게 폭탄선언을 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축소·조작되었다. 지금 구속된 경찰관들은 종범에 불과하며 현장에는 상급자 세 사람(황정웅·반금곤·이정호)이 더 있었다.”
 
  불빛을 잃어 가던 박종철 사건이 다시 점화됐다. 김수환 추기경은 “수사팀을 교체하고 원점에서 재수사해야 한다”고 밝혔다.
 
  결국 5월 29일,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정 등이 은폐와 축소 과정을 지휘했으며 처음 범인으로 구속된 두 경찰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대가로 1억원의 돈을 안겼다’는 검찰의 수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박처원 등은 이때 구속되고, 강민창 치안본부장도 쇠고랑을 찼다. 군사정부는 노신영 국무총리, 장세동 안기부장, 김성기 법무장관, 정호용 내무장관을 퇴진시키며 사태에 대한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거대한 민주화의 물결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1987년 6월 항쟁이 터져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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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썩은조선    (2019-03-18) 찬성 : 0   반대 : 1
스스로 의식화 교육을 했다니... 참내... 민주주의에 눈을 떳다고 표현을 하는 게 옳은거지... 누가 조선일보 방계 아니랄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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