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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60주년 특별기획] 白善燁이 만난 6·25전쟁의 영웅들 <상>

“6·25전쟁으로 美國의 군사시스템을 압축적으로 배운 것은 행운”

오동룡    goms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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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세 노구 이끌고 한국전선으로 달려온 맥아더 원수
⊙ 아들 샘 워커 대위 훈장 수훈 축하길에 사고당한 워커 사령관
⊙ 야간폭격 작전 중 실종된 아들 수색을 중단시킨 밴 플리트 대장
⊙ 北전차에 직접 바주카포 쏘며 분전하다 북한군 포로 된 딘 소장…
⊙ 2차대전 영웅들의 희생이 위기의 대한민국을 구했다!

사진 : 白善燁 예비역 대장 제공
  1920년생인 백선엽(白善燁) 예비역 육군대장(전 육군참모총장)은 올해로 망백(望百)이다. 60년 전인 1950년 6월 길고 긴 여름날, 1사단장으로 6·25를 맞았던 그는 서른 살의 나이에 불과했다.
 
  6·25전쟁 6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그의 이름 석 자는 한국 전사(戰史)에 더욱 빛난다. 백선엽은 건군(建軍)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 전사에도 6·25전쟁 최악의 전투로 기록된 낙동강 방어선상의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6·25전쟁 발발부터 휴전까지 3년1개월2일17시간을 전장(戰場)에서 보낸 그는 전쟁기간 중 북한군과 중공군에 불패(不敗)의 기록을 남겼다.
 
  그래선지 그는 6·25전쟁 참전국 베테랑들에게 ‘살아 있는 전설(living legend)’로 불린다. 그에 대한 예우는 미국이 더 극진하다. 역대(歷代) 주한미군 사령관들은 예외 없이 “존경하는 백선엽 장군님”이란 말로 이·취임사를 시작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
 
  미(美) 8군은 수시로 그를 초청해 생생한 증언을 듣고 있고, 한국에 부임하는 미군 장교들은 그의 저서 <군과 나>의 영문판인 을 필독하고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고 한다.
 
  백선엽은 6·25전쟁 기간 중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명장(名將)들을 만난다. 더글러스 맥아더, 매튜 리지웨이, 마크 클라크(유엔군사령관), 월턴 워커, 제임스 밴 플리트, 맥스웰 테일러(8군사령관), 프랭크 밀번 1군단장….
 
  당시 미 8군의 주요 지휘관들은 ‘아버지뻘’인 자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전쟁을 수행하던, 아무런 백그라운드도 없는 청년 장군 백선엽을 주목했다.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대장은 그의 회고록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From the Danube to the Yalu)>에서 “한국군 발전의 모든 공로는 휴전회담 조인 당시 16개 전투사단을 지휘한 젊은 백선엽 대장에게 주어져야 한다”면서 “나는 그가 정직함과 용기, 그리고 훌륭한 직업적 능력을 가졌으며, 동시에 항상 팀플레이를 하는 인물임을 알게 됐다”고 회고했다.
 
  최근 백선엽 예비역 대장은 “전쟁 기간 중 미군들이 촬영해 준 것들”이라며 6·25전쟁 관련 사진 5000여 장을 기자에게 내보였다. 육군본부 ‘존안자료’인 그의 사진들은 6·25전쟁 초기부터 1960년 5월 31일 연합참모본부 의장을 끝으로 전역하기까지의 기록들이다.
 
  6·25전쟁을 비롯해 온갖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으며 성장한 우리 군(軍)의 ‘역사’가 노병(老兵)의 사진첩 속에 오롯하게 담겨 있는 일종의 ‘사진 비망록(備忘錄)’인 셈이다.
 
  그는 “기라성(綺羅星) 같은 2차 세계대전의 ‘군사스승’들은 전쟁 과정에서 무기와 물자, 군사력 운용 등 세계 최강의 미국 군사 시스템을 단기간에 압축적으로 이식(移植)해 주었고, 그것은 분명 우리에게 행운이었다”며 “밴 플리트 8군사령관 등 자식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벼랑 끝의 대한민국을 구한 그들에게 다시금 경의를 표한다”고 했다.
 
  <월간조선>은 백선엽 장군의 6·25전쟁 참전영웅들의 증언을 청취,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새우 밀번’ 별명 가진 나의 ‘군사 스승’ 프랭크 밀번 1군단장
 
   1950년 10월 19일, 평양 대동교 로터리에서 1사단장 전용지프 보닛 위에서 미 1군단장 프랭크 밀번(Frank W. Milburn, 1892~1962) 소장과 작전을 숙의(熟議)하고 있는 장면이다. 뒤쪽으로 밀번 소장의 지프가 보이고, 그 옆으로 문형태(文亨泰) 작전참모(중령)가 보인다. 밀번 소장은 나의 평양 입성 계획에 대한 브리핑을 듣고, “훌륭하게 평양 진공(進攻)계획을 세웠다”고 칭찬했다.
 
  6·25전쟁 초기 나를 가장 신뢰하며 내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게 했던 장군이 있다면 그는 밀번 장군일 것이다. 그는 나의 군사적 스승이다. 그는 그만큼 내가 군 고급지휘관으로 성장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 그는 온화하면서도 투지가 강하고, 부하를 칭찬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한번 신뢰한 부하에게는 간섭보다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고, 그 결과를 기다릴 줄 아는 배포 있는 지휘관이었다. 내가 그런 지휘관 밑에서 전쟁 중 가장 중요한 시기에 함께 작전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인디애나주(州) 출신인 밀번은 1914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했다. 8군사령관을 역임한 밴 플리트 장군, 나토군사령관을 지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그의 웨스트포인트 1년 후배다. 170cm 남짓의 크지 않은 키였지만, 그는 생도 시절 미식축구 공격수로 맹활약했다. 그가 미식축구 볼을 가슴에 안고 머리를 숙인 채 질주하는 장면이 새우를 연상케 한다고 해서 ‘슈림프 밀번(shrimp Milburn)’이라고 불렸다. 그의 이런 투지와 적극성은 군대생활에 그대로 적용됐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그는 미7군 예하 미21군단장으로 프랑스 마르세유에 최초로 상륙, 독·불(獨佛) 국경지대인 알사스-로렌 지역으로 진격했다. 이때 그는 미군 2개 사단과 드골 장군이 지휘하는 자유 프랑스(Free France)군 2개 사단을 통합 지휘함으로써 미군 장성 중 최초로 ‘자유프랑스 훈장’을 받았다.
 
  6·25전쟁 발발 당시 그는 서독에 주둔하고 있던 미1사단장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한국전선의 미9군단장에 내정됐으나, 공세 이전(移轉)의 상황에서 워커 미8군사령관에 의해 주공(主攻) 군단인 미1군단장을 맡게 됐다. 그는 미1사단장 시절 함께 호흡을 맞췄던 그의 참모장과 참모들을 데리고 한국전선으로 왔다. 참모장 밴 브런트, 정보참모 톰슨, 작전참모 지터 등이 그들이다.
 
  그는 그만큼 한번 신뢰하는 부하들은 끝까지 믿는 대범한 지휘관이었다. 그런 밀번 장군이 총반격을 앞두고 나의 1사단을 주공인 미1군단에 배속시킨 것은 내게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였다.
 
평양 소탕작전이 끝난 1950년 10월 20일 저녁 무렵, 밀번 군단장이 선교리 초등학교에 자리 잡은 1사단사령부를 방문해 내게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그와의 첫 만남은 1950년 10월 5일 대구 교외의 사과밭에서였다. 내가 속리산의 적 패잔병을 소탕하고 청주에 도착했을 때, 미1군단 사령부에서 “작전명령을 직접 수령하라”는 사단장회의 소집 연락을 받고 미군 포병부대가 내준 연락기 편으로 대전으로 날아갔다.
 
  충남도청에 자리 잡고 있던 군단사령부에 도착해 보니 미군 사단장들은 이미 작전명령을 수령해 갔고 내가 가장 늦었다. 군단참모장으로부터 평양 공격이라는 두툼한 작전명령서를 받고 “아, 우리가 드디어 평양으로 진격하게 됐구나” 하는 기쁜 마음으로 작전 명령서를 읽었다. 그러나 내용은 실망스러웠다.
 
  기쁜 마음에 투명지를 살펴보니 우리 사단은 개성~해주~진남포 방면으로 공격해 후방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반면 미1기병사단(사단장 게이 소장)은 주력부대로서 경의선 축선을 따라 공격하고, 미24사단(존 처치 소장)은 1기병사단의 우익부대로 시변리~수안을 거쳐 평양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평양공격 작전에 국군은 배제된 것이었다.
 
  아무리 미군이 작전권을 행사하고 내가 미군단 산하에 있다고 하지만 적의 수도를 공격하는데 국군이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시 밴 브런트 참모장을 통해 밀번 군단장 면담을 요청했다. 참모장은 “지금 군단장이 심한 감기로 누워 있다”면서 거절했다. 내가 “아니, 사단장이 군단장도 만나지 못한단 말이냐”고 언성을 높이자 그제야 전화를 했다.
 
  밀번 군단장은 감기몸살로 특수차량의 침대에 누워 강아지를 데리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는 장군이라기보다 마음씨 좋은 시골 아저씨의 인상이었다.
 
1951년 3월, 서울 재탈환 후 밀번 1군단장(왼쪽)과 부군단장 해버 준장(가운데)이 서울 만리동의 1사단사령부를 방문했다.
  나는 그에게 노획한 소련제 권총을 선물로 주었고, 그는 “전선 돌파를 축하한다”며 위스키를 권했다. 그는 낙동강에서 1사단의 선전을 치하하며, “전황은 곧 공격으로 전환한다”며 “귀하의 1사단은 미1기병사단·미24사단과 함께 미1군단에 배속됐다”고 말했다.
 
  나는 대뜸 “우리는 차량은 많지 않으나 밤낮으로 행군할 투지가 있으니 대한민국 군대가 평양에 처음으로 입성하게 해달라”고 눈물어린 호소를 했다. 나는 “나의 평양공격 작전 계획은 1894년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짠 평양 공격과 공교롭게도 거의 같은 구상”이라며 “게다가 평양은 내 고향이다. 그 고장 지리를 나만큼 아는 사람도 없다”며 평양공격의 선봉에 서게 해줄 것을 간청했던 것이다. 그러자 잠시 침묵 속에 지도를 바라보던 밀번 장군은 참모장에게 전화해 “1사단과 미24사단의 임무를 바꾸라”고 지시했다.
 
  특히 1사단이 공격 첫날부터 난관에 부딪히면서 전차증원을 요청하자, 그는 흔쾌히 전차 1개 중대를 보내줘 미군 사단과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케 했다. 그는 또 국군 전체 사단의 화력보다 우세한 미군 포병부대(3개 대대)를 내게 배속시켜 장차 통합지휘관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게 했다.
 
북진 중 만난 밀번 1군단장. 그는 국군 전체 사단의 화력보다 우세한 미군 포병부대(3개 대대)를 내게 배속시켜 장차 통합지휘관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게 했다. 오른쪽은 육사3기생인 작전참모 박진석 중령이다.
  ‘평양 입성 제1호’의 영예를 안겨준 밀번 장군에게 나는 평양탈환으로 보답했다. 이어 나는 북진하며 생포한 중공군 포로를 밀번 장군 앞에서 직접 심문, 적의 실상을 알게 했다.
 
  또 평북 운산(雲山)에 진출한 1사단이 중공군의 공세에 전멸할 위기에 몰렸을 때, 그는 나의 즉각적 보고를 받아들여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 헤닉 대령의 미 고사포군단의 전 화력을 동원, 1만3000여 발의 포탄을 적에게 퍼부어 1사단과 미1군단을 구했다.
 
  그가 없었다면 운산전투는 아군의 참혹한 패배로 끝났을지 모른다. 1·4후퇴 이후까지 계속 적군에 밀리기는 했지만, 후일 대반격의 기틀을 잡은 것은 운산 전투에서 그의 현명한 판단으로 군단 건제(建制)를 그대로 유지한 채 후퇴했기 때문이다.
 
  특히 임진강선 철수와 이어지는 37도선 철수, 그리고 서울 재(再)탈환을 할 때 나에 대한 그의 강한 믿음과 전폭적인 지원으로 1사단은 적의 어떠한 공격에도 끄떡하지 않았다. 1951년 내가 소장 진급과 동시에 1군단장으로 영전하자 그는 과분하게도 서한을 보내 “당신은 가장 뛰어난 리더(You are the most skillful leader)”라며 축하해 주었다.
 
  밀번 장군은 6·25전쟁이 채 끝나지 않은 1951년 5월쯤 중장으로 진급하고, 그해 7월 미국으로 돌아가 이듬해인 1952년 4월 예편했다. 그 뒤 고향에서 몬태나주립대 학생들에게 미식축구를 가르치며 70세로 생(生)을 마쳤다.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며 전장을 누빈 밀번 장군이 학생들과 몸을 부대끼면서 미식축구를 하며 말년을 보낸 것은 영화의 해피엔딩처럼 아름답다.
 
 
  70세의 ‘老軀’ 이끌고 한국전선으로 달려온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

 
   나는 평생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원수를 네 차례나 만났다. 전쟁터에서 두 번, 휴전 후 두 번 만났다. 이것은 군인인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전쟁터에서 우리는 사단장과 유엔군총사령관이라는 상하관계로 만났다.
 
  맥아더 원수가 1951년 2월 초순 ‘킬러작전(리지웨이의 對중공군 최초 공세작전)’을 격려하기 위해 미8군을 시찰하러 왔을 때, 나는 수원비행장으로 출영(出迎)해 그를 처음 만났다. 수원비행장에는 리지웨이 8군사령관을 비롯해 밀번 1군단장과 군단 예하 사단장들이 참석했다. 나는 미1군단에 배속된 국군 1사단장 자격으로 나갔다. 제국주의 일본을 굴복시킨 맥아더 원수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두 번째로 맥아더 원수를 만난 것은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나서였다. 1951년 3월 15일 우리 1사단에 의해 서울이 재탈환된 지 얼마 안돼, 맥아더 원수가 직접 1사단 사령부를 방문했다. 그때 나는 사단사령부를 서울 서대문 근처 만리동 고개의 한 초등학교에 두고 있었다.
 
  71세의 고령이었던 맥아더 원수는 웬만하면 차에서 내리기를 꺼렸다. 그는 지프에 그대로 앉은 채 “요즘 급식(給食) 상태는 어떠냐”고 내게 물었고, 나는 예기치 않은 질문을 받고 “쌀 보급은 괜찮은 편인데, 채소와 사탕 등 감미품(甘味品)이 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내 말을 귀담아 들은 그는 도쿄로 돌아가 한국군에 엄청난 양의 전투식량(K-레이션)을 보내 우리 사단뿐만 아니라 전체 한국군을 기쁘게 해 준 적이 있다.
 
맥아더 원수가 1951년 2월 초순 ‘킬러작전’을 격려하기 위해 미8군을 시찰하러 왔을 때, 나는 수원비행장으로 출영 나가 그를 처음 만났다. 수원비행장에는 리지웨이 8군사령관을 비롯해 밀번 1군단장과 군단 예하 사단장들이 참석했다. 나는 미1군단에 배속된 국군 1사단장 자격으로 나갔다.
  6·25전쟁 당시 맥아더 원수는 태평양 지역을 총괄하는 미 극동군사령관·극동육군사령관에다 주일 연합군총사령관을 겸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서울이 함락된 다음날인 6월 29일, 한국전선 상황을 정확히 알아보기 위해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고, 전쟁의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미 지상군 파견을 미 합참(JCS)을 통해 트루먼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을 구하기 위해 노구(老軀)를 이끌고 한국전선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곧이어 한국전선에는 스미스 부대장을 선두로 미24사단의 딘 소장과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도 오게 됐다. 그는 이때 ‘세기(世紀)의 도박’이라고 하는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의 어려운 전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확고한 신념과 결단을 바탕으로 11m에 달하는 간만의 차를 비롯한 악조건을 극복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북한군의 허리를 자르는 데 성공했다. 나와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맥아더 원수는 전선을 두 차례 더 방문했다.
 
  우리 1사단이 평양을 탈환하고 미187공수연대와 평양 이북에서 연결작전을 할 때, 그는 평양을 방문해 미1기병사단의 의장대를 사열했고, 중공군 개입 후에는 단둥의 압록강 상공을 공중 시찰하기도 했다.
 
두 반공 영웅의 만남. 이승만과 맥아더는 트루먼이 유엔군의 북진에 제동을 걸려는 것을 막으려고 애쓴다.
  유엔군총사령관인 맥아더는 워싱턴의 트루먼 정부와 불화를 빚고 있었다. 워싱턴은 이미 6·25전쟁을 확전(擴戰)으로 치닫지 않게 관리하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군인 맥아더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북진(北進)을 주장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그에 의지했다. 워싱턴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쟁이 노(老) 장군’을 해임했다. 그 천재적인 전략가가 6·25전쟁에서 빠지는 게 나로서는 마치 아버지를 잃은 것만큼이나 허전했다.
 
  한 번은 1953년 5월로 내가 첫 번째로 참모총장을 할 때였다. 이때 미 정보국에 근무 중인 하우스만 중령(한국 육군참모총장 고문관 역임)의 안내로 남성인(南星寅) 대위와 함께 뉴욕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의 펜트하우스에 거주하고 있던 맥아더 원수를 방문했다.
 
  나를 반갑게 맞이한 맥아더는 1시간 넘게 대화하면서 “휴전이 되면 한국방위는 어떻게 되느냐. 한국군의 상태와 보급은 어떤가. 또 이승만 대통령의 근황은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 대통령에 대해 무한한 존경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 후 내가 다시 그를 만난 것은 1958년 두 번째로 참모총장을 할 때였다. 이때 나는 정래혁(丁來赫) 육본작전국장과 백선진(白善鎭) 국방부 군수차관보를 대동하고, 미 극동군사령부의 민사부장(G-5)을 지낸 휘트니 장군의 안내로 그를 방문했다. 그는 한국과 아시아 정세에 궁금해하면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근황과 한국경제 발전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다. 이때도 나는 그와 1시간 넘게 대화를 나눴다. 당시 그는 건강이 좋았으나, 1961년 이후 내가 프랑스 대사로 있을 때 건강이 나빠졌다고 한다.
 
1951년 3월 24일 맥아더 원수가 서울 재탈환 후 처음으로 서울 서대문 근처 만리동 초등학교의 1사단사령부를 방문했다. 오른쪽은 사단 수석고문관.
  맥아더는 1880년 아칸소주 리틀록에서,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한 아서 맥아더 2세(중장, 필리핀 총독 역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타고난 군인이었다. 그는 오직 ‘승리’만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었다. 적이 나타나면 끝까지 그를 막아 내고 섬멸하는 데만 온 정력을 쏟았다.
 
  맥아더는 웨스트포인트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제1·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무지개부대(42사단)를 이끌고 프랑스에서 복무했다. 1925년에 최연소 육군 소장이 됐고, 윌슨 대통령 시절인 1930년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올랐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 초기인 1937년 퇴역했다가 1941년 7월 현역으로 소집돼 필리핀 주재 미국 극동군 사령관이 됐다. 1942년 3월 서남 태평양 방면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고, 1944년 원수가 됐다.
 
1958년 5월, 나는 맥아더 원수가 만년에 머물고 있던 뉴욕의 월도프 아스토리아호텔에서 전후 두 번째 만났다. 맥아더 원수는 내게 자신의 친필 사인이 담긴 회고록(Reminiscences)을 선물로 주었다.
  미군 역사상 원수는 퍼싱, 마셜, 아널드(미국 유일의 공군 원수), 맥아더, 아이젠하워, 브래들리,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니미츠 제독 총 7명이다. 그는 1945년 일본군을 격파하고 필리핀에 상륙했으며, 이후 대일(對日) 점령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8월 30일 일본 땅을 밟았다.
 
  맥아더는 한국과 인연이 깊다. 그에게는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란 조선시대의 향로(香爐)가 있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아서 2세가 1890년대 조선을 방문했을 때 고종(高宗)으로부터 하사받은 물건이었다.
 
  아서 2세는 그 물건을 끔찍이 아꼈고, 어린 맥아더는 그것을 보면서 자랐을 것이다. 맥아더 역시 아버지로부터 조선의 향로를 물려받아 애지중지(愛之重之)했다.
 
  맥아더는 향로를 1942년 5월 필리핀 내 연합군사령부였던 코레히도르가 일본군에 함락되는 와중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이승만 대통령은 비슷한 조선 향로를 구해 맥아더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그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내한해 축하했고, 이후에도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에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특히 그는 6·25 때 한국을 통일시켜 보려고 무던히 애썼던 한국의 은인(恩人)이자, 미국의 전쟁영웅이었다.
 
 
  부산교두보 死守한 패튼 장군의 열렬한 지지자
월턴 워커 8군사령관

 
   다부동 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 8월 23일, 월턴 워커(Walton H. Walker, 1889~1950) 미8군사령관이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동명초등학교에 임시로 주둔한 1사단사령부를 방문했을 때 그를 처음 만났다.
 
  한국전쟁에서 워커 사령관의 공로는 그 누구보다 컸다. 그는 전황이 최악이던 시점에 한국에 부임, 부산 교두보선을 지켜내 북진의 돌파구를 열었고, 이후 평양을 공략, 탈환하는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낙동강 사수(死守)가 없었다면 전세를 역전시킨 인천상륙도, 오늘의 한국도 없었을 것이다.
 
  나와 워커 장군과의 인연은 남달랐다. 6·25전쟁 때 워커 미8군사령관과 나는 군사령관과 사단장의 관계로 직책상 또는 업무상 만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워커 장군은 맥아더 원수를 대신해 한국 전선의 모든 지상군을 총괄하는 총사령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고, 나는 한국군의 일개 사단장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워커 8군사령관과 여러 차례 직접 대면했고, 때로는 전화상으로 작전성공에 따른 격려와 추가 작전을 지시받았다.
 
  워커는 제1·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의 전쟁영웅이었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모든 미군을 통틀어 그는 가장 선임자였다. 미 웨스트포인트 출신으로 1912년 소위로 임관한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미5사단 기관총대대 중대장으로 뫼즈-아르곤 전투에 참전, 뛰어난 전공으로 소령 계급장을 달았다.
 
1950년 8월 23일,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조수석)을 수행하고 다부동의 동명초등학교에 있는 임시 1사단사령부를 방문한 워커 중장(서 있는 이) 일행. 내(왼쪽)가 전황 브리핑을 마치고 돌아가는 일행을 전송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전차전의 귀재(鬼才)였던 패튼 장군이 지휘하는 미3군 예하 20군단을 지휘했다. 당시 미20군단은 프랑스를 거쳐 독일로 진군하는 패튼의 선봉군단이었다.
 
  워커는 그 누구보다 패튼 장군의 열렬한 신봉자로서 그의 과감한 지휘방식을 모방했고, 6·25전쟁 때 이것을 그대로 재현했다. 전후 그는 미 본토 5군사령관을 거쳐 1948년 9월 일본 점령 임무를 맡은 미8군사령관에 임명됐다. 6·25전쟁 때 그는 맥아더의 명령으로 한국의 모든 지상군을 통합 지휘하는 주한 유엔군지상군 사령관이었다.
 
  나는 제1·2차 세계대전의 영웅, 워커 장군을 상관으로 모시고 한국전쟁의 가장 위기였던 1950년 7월 지연(遲延)전부터 낙동강 방어선, 총반격과 북진, 중공군 개입에 따른 38도선 철수 중 그와 인연을 맺었다.
 
  그의 애칭은 ‘불독’이다. 불독처럼 생긴 얼굴에 번쩍거리는 철모를 항상 쓰고 다녀 활동적이고 과감한 군인이라는 인상을 짙게 풍겼다. 그는 잠시도 쉬지 않았다. 낙동강 전선에선 머물던 막사(幕舍)를 나서면 쉼 없이 전장을 돌아다니면서 장병을 독려했다. 별안간 나타나 전쟁터의 현황을 파악하고 요점을 간단히 정리해 작전 지시를 내린 뒤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는 내게 ‘공세방어’를 알려줬다. 적에게 몰릴 때라도 항상 역습을 염두에 두라는 것이었다. 1950년 9월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낸 뒤 반격이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1950년 12월 23일 의정부 입구 국도상에서 워커 중장의 지프와 충돌한 국군 제6사단 소속의 스리쿼터 트럭. 이 사고로 워커 중장은 병원으로 후송하기 전 사망했다.
  그는 대구 인근 동촌(東村)비행장 근처 양조장터로 옮겨진 사단사령부로 나를 찾아와 느닷없이 “당신, 미국 참모대학(포트 레븐워스)에 유학한 적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 나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고 대답했다. 그는 내게 “참모대학의 교과서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는 우회전술(bypass)을 택하라”면서 “어떻게 돌아가는가 하는 것은 귀관과 예하부대가 판단할 일”이라고 충고했다.
 
  워커 사령관은 ‘소방대 전술’도 구사했다. 예비 기동타격대를 마련해 두고 다급한 전선에 이를 재빨리 투입하는 전술이다. 국군 1사단은 낙동강 전선에서 2만1000명에 달하는 적 3개 사단의 공세에 직면했다.
 
  그때 병력 7600명의 우리 사단은 그가 보내준 미군 23연대와 27연대 병력과 함께 사상 최초의 한미 연합작전을 벌였다. 그는 처음으로 미군을 한국군 지휘관 휘하(麾下)에 보내줘 다부동 전투에서 대승(大勝)을 거둘 수 있게 해 준 사람이다.
 
  일선 미군 지휘관들은 그가 나타나면 고양이 앞에 쥐처럼 긴장했다. 꾸물거리면서 공격을 주저하는 지휘관은 더욱 그랬다. 그는 이들을 아주 호되게 다뤘다. 심각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얼굴 앞에 바짝 갖다대면서 “공격하라고, 공격 말이야”라고 호통을 쳤다.
 
  그는 한국군에 대한 불만을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자주 토로(吐露)했다. 매우 직설적인 어법을 구사하는 그에게 기(氣)가 세기로 유명한 이승만 대통령도 혀를 내둘렀다. 훗날 이 대통령은 워커 장군 이야기만 나오면 “그 친구, 참 버릇없는 사람이었어”라고 할 정도였다.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방어작전을 시작할 무렵이던 1950년 7월 말, 그는 명언을 남겼다. “적에게 한 치의 땅이라도 내준다면 수많은 전우가 그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며 내린 ‘전선 사수(Stand or Die)’ 명령은 전사(戰士)로서의 기백을 보여준다. 그는 미군들에게 “제2의 케르크 철수(1940년 5월 프랑스 북부 케르크 항구에서 독일군에 몰린 연합군 30만명을 영국으로 철수시킨 작전)는 없다”며 비장한 의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는 결국 전쟁 초반 거셌던 북한군의 공세로부터 낙동강 전선을 지켜낸다는 ‘부산 교두보 작전’을 구상해 실천에 옮겼다. 그의 지휘로 마침내 국군과 연합군이 북진하는 전기(轉機)를 마련했다.
 
  낙동강 방어선 초기 미1기병사단과 왜관 북쪽 303고지를 축(軸)으로 배치될 때, 워커 사령관은 8군 작전참모를 통해 “사단장이 현장에 나가 인접 부대와 협조하라”고 했고, 8월 15일 다부동 전투에서 1사단이 최대의 위기에 몰릴 때 그는 나의 증원요청에 미 2개 연대를 흔쾌히 증원해 줘 북한군의 최후 공세를 저지할 수 있도록 했다.
 
6·25전쟁 중 전선을 시찰한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맨왼쪽)에게 아들 샘 워커 중위(왼쪽에서 세 번째)를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워커 미8군 사령관(왼쪽에서 두 번째).
  인천상륙작전 후 아군이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12연대가 돌파구를 마련, 북진의 기틀을 마련하자 그는 전화로 “어떻게 그렇게 했느냐”며 나를 격려했다. 특히 중공군 개입으로 아군이 38선으로 후퇴할 때 그는 고랑포에 있던 나에게 “후퇴하는 한국군 장병들을 전부 수용해 백 장군이 통합 지휘하라”고 했다. 이것이 그와 생애 마지막 통화였다.
 
  미8군 사령관으로서 전쟁 초기 낙동강 전선을 적의 침입으로부터 지켜냈던 워커는 1950년 12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미25사단 소속으로 참전한 아들 샘 워커 대위가 공을 세워 전날 은성무공훈장을 받자 부대를 찾아가 축하해 주기 위해 의정부 근처 영(英)연방여단으로 가는 도중 발생한 사고 때문이었다.
 
  스피드광(狂)인 워커 장군이 타고 가던 지프가 국군 6사단 소속 병사가 몰던 트럭에 부딪힌 것이다. 그 직전에는 미9군단장이었던 브라이언트 무어 소장이 헬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는 병원으로 후송되기도 전에 숨을 거뒀다. 국군 1사단이 정신없이 임진강으로 후퇴하던 도중에 받은 슬픈 소식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 운전병을 처형하라”고 명령했으나 옆에 있던 군사고문관 하우스만 대위가 말리는 바람에 총살을 면했다.
 
  그는 지프와 L5 경비행기로 현장을 누볐다. 지프에는 항상 모래부대를 깔았다. 지뢰 폭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전장에서 경주용 차처럼 움직이는 그의 지프는 결국 지뢰 아닌 충돌 사고로 주인을 보냈다. 그는 평소 존경했던 조지 패튼과 똑같이 자동차 사고로 세상과 영원히 이별했다. 미 육군은 지금도 그를 추앙하는 의미에서 수색용 경전차인 M41형 전차에 ‘불독 워커’라는 애칭(愛稱)을 붙이고 있다.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된 월턴 워커장군은 대장으로 추서됐고,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외아들 샘 워커 대위는 후에 미군 역사상 최연소 대장으로 진급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대장으로 진급한 것은 미군 역사상 최초였다.
 
  나는 전쟁 중 워커 사령관과 네 차례 마주쳤다. 낙동강 전선 영천(永川)에서 공로훈장(Legion of Merit)을 받을 때, 다부동 전선에서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동명초등학교의 사단사령부를 방문했을 때, 공세 이전(移轉)의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있을 때 대구 동촌비행장 근처로 나를 찾아왔고, 청천강 북쪽 전선에서 부대가 이동할 때 도로상에서 마주친 것이 네 번째였다. 그게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다.
 
 
  ‘한국군 건설의 아버지’ 제임스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
 
   내가 미8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James A. Van Fleet, 1892~1992)을 처음 만난 것은 1951년 중공군 5월 공세가 한창이던 무렵 대관령 서쪽 용평(龍坪)에 위치한 국군 3군단의 간이활주로에서였다.
 
  중공군 2차 춘계공세로 강원도 인제군 현리 지역에 종심(縱深·앞뒤로 늘어선 대형·진지·방어 지대 따위의 전방에서 후방까지의 거리를 이르던 군사용어) 깊은 대돌파구가 형성되고 있던 시기였다. 미8군은 중공군이 서울~강릉 간 경강(京江)도로를 차단해 아군의 전선을 동서(東西)로 분리한 다음, 아군을 각개격파하고 동해안의 전략적 요충지인 강릉으로 진출해 강릉비행장과 인근의 보급항(주문진·삼척 등)을 점령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렇게 될 경우 서울 측면이 완전히 노출돼 서울이 다시 적의 직접적인 위협에 놓이게 되고, 아군은 전선 조정을 위해 다시 37도선으로 물러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다. 그때 나와 밴 플리트 장군은 각각 1군단장과 미8군사령관에 임명된 지 얼마 안된 때였다.
 
  나는 1951년 4월 12일 그동안의 전공(戰功)을 인정받아 소장 진급과 동시에 1군단장에 보직됐고, 밴 플리트는 맥아더 원수의 해임에 따라 리지웨이 미8군사령관이 유엔군사령관으로 영전하자, 리지웨이 후임으로 미 본토 2군사령관에서 한국 전선의 8군사령관에 부임했다.
 
  우리 두 사람은 군단장과 군사령관으로 부임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라는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게 됐다. 1951년 5월 21일, 나는 미8군 지시에 따라 군단 수석고문관 로저스 대령과 미군 L-19기를 타고 3군단의 간이활주로에 착륙했다. 내가 활주로에 내리자 그곳에는 미3사단의 라이딩스 준장이 사단장을 대신해 와 있었다.
 
1952년 4월 5일, 소토고미에서 국군 2군단의 재창설이 끝난 후 밴 플리트 장군으로부터 아들 실종소식을 듣고 있는 모습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장면이다. 왼쪽부터 파머 제10군단장, 나, 오다니엘 제2군단장, 와이만 제9군단장이다.
  얼마 후 밴 플리트 사령관과 8군 작전참모 머제트 대령이 2대의 L-19기를 나눠 탄 채 착륙했다. 이때 밴 플리트 장군이 타고 있던 비행기가 적의 지상 화포에 맞아 가솔린을 흰 연기처럼 뿜으며 산중의 간이활주로에 착륙하는 것이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착륙하는 모습에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머제트 대령은 L-19에서 내리자마자 커다란 포켓(pocket·돌파구)이 남쪽을 향해 그려진 두루마리 상황도를 펼쳤고, 밴 플리트는 그 지도를 가리키며 “1군단은 대관령에서 서북방으로, 미8군의 유일한 예비인 미3사단은 하진부리에서 동북방으로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적에게 최대한의 징벌을 가하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군 3군단에 대해 “나는 3군단에 저항을 되풀이하는 후퇴(retrograde movement)를 명령했는데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참으로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내가 공격시기를 묻자 그는 “지체없이 개시하라(Without delay)”고 잘라 말했다. 우리 1군단은 수도사단 1연대를 대관령으로 급파해 파도처럼 밀려오는 중공군을 격퇴했고, 미3사단은 경안~속사리 250km의 거리를 하루 만에 돌파, 1951년 유엔군의 최대 위기를 극적으로 모면하게 됐다.
 
  얼마 안돼 나는 다시 밴 플리트 장군을 만나게 됐다. 밴 플리트는 우리가 대관령 전투에서 적의 예봉을 꺾고 공세 이전에 들어갔던 5월 25일경 강릉비행장을 방문했다. 이때 나는 군단사령부가 있는 속초에서 연락을 받고 급히 비행장으로 갔다. 그곳에는 정일권 참모총장과 이준식(李俊植) 육본 전방지휘소장(소장)이 나와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밴 플리트는 내리자마자 선 채로 “제너럴 정(丁), 귀관은 대구로 돌아가시오. 이것으로 3군단은 폐지합니다(No more Third Corps). 육군본부의 임무는 훈련과 인사·군수·행정·훈련에 국한합니다. 국군 1군단은 나의 지휘하에 두며, 육본 전방지휘소는 폐쇄하고, 국군 3군단의 3사단은 1군단에, 9사단은 미10군단에 배속합니다”라고 필요한 말만 끝낸 후 10분 만에 돌아갔다. 이른바 밴 플리트 장군의 현리전투 대패(大敗)에 따른 후속조치였다.
 
내가 1군사령관 시절인 1958년, 밴 플리트 여사가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원주의 1군사령부를 방문했다. 밴 플리트 여사는 마릴린 먼로를 닮은 미인이었다. 시신조차 찾지 못한 아들 생각에 한국을 다시 찾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1951년 5월 17일부터 일주일간 벌어진 ‘현리전투’에서 중공군 1개 대대 병력이 미10군단과 국군 3군단의 전투 지경선인 오마치고개(현 오미재고개)를 파고들어 포위하자 3사단, 9사단 등 2개 사단으로 구성된 국군 3군단은 전면 붕괴되고 만 것이다.
 
  국군이 손도 써 보지 못하고 70km를 후퇴하게 되자, 밴 플리트 장군은 긴급히 미3사단과 187공수연대를 투입해 미10군단의 우측을 막고, 국군 1군단 예하 수도사단 1연대를 투입해 대관령을 선점하게 해 가까스로 중공군의 대공세를 저지했다.
 
  전선이 진정되자 밴 플리트는 한국군의 위상을 고려해 육본을 통한 통제를 해 오던 것을 중지하고 직접 통제체제로 전환함과 동시에 3군단을 해체, 지휘권을 박탈했다. 현리전투 패배로 미군 수뇌부에서는 한국군 사단의 지휘를 미군 장성에게 맡겨야 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우리는 밴 플리트의 말에 크게 낙담한 채 할 말을 잃고 각각 헤어졌다. 이후 나의 1군단은 국군 유일의 군단이 되면서 미8군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게 됐고, 미8군도 축소된 4개 군단으로 전선을 지탱하며 전쟁을 치르게 됐다. 밴 플리트 장군은 국군 3군단의 작전 실패에 따른 경험을 소중히 여기고 한국군 재건과 발전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1952년 8월경, 이승만 대통령과 밴 플리트 사령관.
  그는 3년1개월간의 6·25전쟁 중 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2년간을 미8군사령관으로 활약했다. 그는 군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 한국군 발전에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마치 한국군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국군 2군단을 재창설하는 등 한국군의 발전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미군 장성 중 보병전술에 가장 조예(造詣)가 깊고, 군 육성과 훈련에서 1인자 역할을 했다. 그가 제일 먼저 손을 댄 것은 우리 군의 교육과 작전능력 향상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사단 집중훈련, 미 17개 병과학교에 한국군 장교 유학, 제주도·논산에 사병 양성 훈련소를 설치하는 등 한국군의 전반적인 작전능력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미국의 웨스트포인트에 해당하는 4년제 육사를 만들었고, 1960년 3월 31일 육사에 자신의 동상이 세워진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한국군에 대한 밴 플리트 장군의 열정과 창의적인 노력은 모두 그의 다양하면서도 오랜 군사 경험에서 비롯됐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아이젠하워, 브래들리 원수와 함께 1915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동기생이다.
 
1953년 1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건국훈장을 수여받은 밴 플리트 8군사령관.
  그는 밀번 장군처럼 웨스트포인트 시절 발군의 풋볼 선수였다. 그는 경기시간 60분 내내 쉬지 않고 뛰는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웨스트포인트 풋볼팀을 무적의 팀으로 이끌었다. 그가 미 해군사관학교를 ‘20 대 0’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이긴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 인연으로 그는 캔자스주립대학 학군단에 근무할 때 8년간 이 학교의 풋볼 코치로 일했다. 그만큼 그의 리더십은 뛰어났다.
 
  밴 플리트는 제1·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전쟁영웅이었다. 1차 대전 때는 미6사단 기관총 대대장으로 참전해 2개의 은성무공훈장을 받았고, 2차 대전 때는 보병연대장으로 참전해 1년도 안돼 군단장까지 고속 승진한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인물이었다.
 
  그는 제8보병연대장으로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하였고, 1944년 8월 1일에는 그토록 기다리던 육군준장으로 진급하게 된다. 그는 동기생보다 늦게 진급했다. 육군 수뇌부에서 계속 그를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마셜 장군은 밴 플리트와 이름이 비슷한 알코올중독자를 밴 플리트로 착각하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장군으로 진급한 밴 플리트는 제90주방위군 사단장, 제23군단장, 제2지원사령관, 그리고 제3군단장을 역임했다. 그후 그는 트루먼 대통령의 제의로 1948년 군사외교관으로서 그리스 내 공산반란군 진압과 그리스군 재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952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날, 동숭동의 8군사령부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연 밴 플리트 장군. 밴 플리트 장군이 스테이크를 썰어 이승만 대통령에게 드리고 있다.
  밴 플리트는 그리스에서의 게릴라 토벌 경험을 십분 살렸다. 그는 지리산 일대의 공비(共匪)토벌 임무를 내게 맡겼고, 공비토벌 부대의 명칭은 미8군 작전명령서에 따라 ‘백(白)야전전투사령부(Task Force Paik)’로 명명했다. 토벌부대 명칭을 개인 이름으로 정한 것은 한국군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후 ‘백야사(白野司)’를 모체로 완전한 군단 편제인 2군단을 창설했다. 특히 내가 2군단장일 때, 단대호(單隊號, 단위 부대마다 소속, 규모, 병과 따위를 정해 붙인 번호)를 알 수 없는 중공군 포로를 잡아 보고하자, 그는 군단 정면에 180여 문의 야포와 박격포 2만 발의 포병사격을 지시, 중공군의 공세를 사전에 차단시켰다. 미 의회에서 탄약소비량이 문제가 되고 있음에도 불구, 밴 플리트는 과단성 있게 포격전을 전개했다. 미군들 사이에는 ‘밴 플리트 탄약량’이라는 신조어가 나돌기도 했다.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건의, 그를 한국전선의 미8군사령관에 임명한 것도 그의 이런 경험과 탁월한 전투 경험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1953년 2월 5일, 이승만 대통령 부처와 국무위원 일동이 이한하는 밴 플리트 장군을 환송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1952년 12월,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 스티븐슨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후 공약에 따라 한국을 방문했을 때, 미8군 사령관 자격으로 ‘웨스트포인트 동기(同期)’인 그를 수행했다. 그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방한에 앞서 라이언 미 군사고문단장과 나를 불러 한국군 20개 사단 증편안을 수립, 브리핑하게 했다.
 
  밴 플리트는 6·25전쟁 중에 견딜 수 없는 슬픔을 겪었다.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한 외아들 제임스 밴 플리트 2세(애칭 지미) 중위가 1952년 4월 4일 야간폭격 작전에서 행방불명이 됐다. 네 번째 출격이자 첫 단독비행인 지미는 B-26 폭격기를 타고 전북 군산의 옥구 비행장을 이륙했다. 그가 새벽 3시 김포비행단 레이더와 접촉, “주(主)표적이 구름에 가려 있으니 예비표적을 달라”고 교신하고, 레이더에서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날인 4월 5일, 화천 북방 소토고미리(小土古味里) 경비행장에서 국군 2군단의 재창설식이 있었다. 식(式)에 참석한 밴 플리트 사령관은 소식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밴 플리트 사령관은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하게 행동했다. 그리스 전선에서 근무하다 아버지 곁에 있기 위해 한국전선 근무를 자원했던 아들이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구출작전을 중지하라”며 아들에 대한 수색작전을 중단시켰다.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그의 부인도 사흘 만에 비행기편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억누르고 2군단사령부 의장대를 사열하던 그녀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밴 플리트도 아들이 사라진 지역의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1953년 육군대장으로 퇴역한 밴 플리트 장군이 아이젠하워 대통령 특사로 한국을 방문해 나와 정일권 참모총장과 재회했다.
  6·25전쟁에는 미국의 정치 지도자나 군 장성들의 아들들이 대거 참전했다. 아이젠하워 원수의 아들 존 중령이 미3사단 대대장으로 참전하는 등 미군 현역장성 아들 142명이 참전해 이들 가운데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클라크 장군의 아들 빌 대위는 미9군단장 무어 장군의 부관이었으나 일선 소총 중대장으로 자원해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특히 해리스 미 해병 제1항공사단장은 장진호 철수작전 중 항공지원을 담당했다. 이때 그의 아들 해리스 소령은 미해병 제1사단 7연대 3대대를 지휘해 아버지의 항공지원하에 장진호를 돌파하다 하갈우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참모들은 밴 플리트 사령관을 ‘노인(old man)’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지혜와 경험이 풍부하다는 존경의 뜻이 담겨 있었다. 밴 플리트 사령관은 격무에도 불구하고 매달 2~3차례 서울 대학로, 서울대 문리대 건물의 8군 식당으로 이 대통령 부처(夫妻)를 초청, 식사를 대접했다. 80세에 가까운 이승만 대통령은 밴 플리트 사령관만 만나면 즐거워했다.
 
  식사 자리에서 밴 플리트의 친절한 ‘서비스’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밴 플리트는 칠면조나 햄, 스테이크가 메뉴로 나오면 얼른 나이프와 포크를 잡고 직접 썰어 대통령 내외의 접시에 담아 드렸다. 마치 아버지를 모시는 아들 같았다. 미국에서 오래 생활했지만 유교적 윤리에 젖어 있던 이 대통령은 나이가 한참 아래인 밴 플리트 사령관의 그런 공손함과 예의 바름을 좋아했다.
 
  밴 플리트는 1953년 육군대장으로 퇴역한 후, 대통령 특사로 극동 여러 나라를 순방했으며, 그 후 한미재단(韓美財團) 총재에 피선되어 제주도 목장건설 등 한국 재건과 문화사업에 큰 공적을 남겼다.
 
  그 후 플로리다주에 머물면서 농장경영과 부동산 회사를 운영했다. 1992년 100회 생일 축하연 이후 만성 감기증세로 급격하게 건강이 악화돼 그해 9월 23일 ‘충혈성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알링턴 국립묘지 묘비에는 그의 좌우명이었던 “필승의 신념(The Will to Win)”이 새겨졌다. 그는 한국군과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알아준 상관이자 전우였다. 그러한 그를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한다.
 
 
  최초의 한미연합작전 수행한 미27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
 
   미25사단 27연대장 존 마이켈리스(John H. Micheles, 1912~1985) 대령은 개전 초기 낙동강 전선에서 함께 적을 막아냈던 절친한 사이였다. 1950년 8월 20일 1사단의 좌익 13연대는 다부동의 328고지를 유지하고 있었고, 중앙의 12연대는 유학산 정상을 공격하고 있었으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우익의 11연대는 증원군에 힘입어 인접 6사단과의 연결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 적들이 갑자기 소극적으로 변했다. 적 15사단이 우리 군의 저항이 강하자 영천 방면으로 공세를 전환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적의 공격력이 약해진 것으로 보고 마이켈리스 대령과 협의해 Y선(낙동강 전선)의 완전한 탈환을 위한 공격을 결의했다.
 
  그러나 다음날 적이 선공(先攻)에 나서 기선을 제압했다. 미27연대도 출격하지 못하고 방어에만 전념하게 됐다. 이때 미27연대의 좌측 능선을 엄호하던 11연대 1대대가 기선을 제압당해 고지를 빼앗기고 다부동 쪽으로 후퇴하고 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곧 8군사령부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한국군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싸울 의지가 있느냐”는 노한 음성이었다. 연대의 옆이 뚫리자 마이켈리스 대령이 즉각 미8군에 “한국군이 후퇴했다, 퇴로가 차단되기 전에 철수해야겠다”고 보고한 것이었다. 그는 내게도 전화로 “후퇴하겠다”고 통고했다.
 
1950년 8월 21일 다부동전투에서 한미연합군은 13대의 북한군 전차를 격파했다.
  나는 김재명(金在命) 대대장(교통부 장관 역임)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고, 후퇴하는 병사들 앞으로 달려가 “우리는 더 후퇴할 곳이 없다. 더 밀리면 곧 망국이다. 저 미군을 보라. 미군은 우리를 믿고 있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대한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고 했다. 나는 부대에 돌격명령을 내리고 선두에 서서 앞으로 나갔다.
 
  곧 병사들의 함성이 골짜기를 진동했다. 대대는 삽시간에 고지를 재탈환했다. 적은 아마 증원부대가 공격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마이켈리스 대령이 내게 와 “미안하다”면서 “사단장이 직접 돌격에 나서는 것을 보니 한국군은 신병(神兵)”이라고 치켜세웠다. 이날 처음 겪은 한미연합작전에서 나는 연합작전의 성패는 상호신뢰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샌프란시스코 출신인 마이켈리스는 아버지가 1차대전 참전 중 전사한 군인 집안 출신이다. 1936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필리핀에서 군 생활을 시작한 그는 2차대전 중 501공정대에 복무하는 등 공정(空挺) 장교로 이름을 날렸다. 종전 후 아이젠하워의 참모로 근무하던 그는 1951년 유럽으로 전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 창설에 참여했다.
 
1953년 5월 15일, 미국 방문길에 웨스트포인트를 방문해 다부동전투에서 함께 싸웠던 마이켈리스 생도대장(준장)에게 을지훈장을 수여했다.
  1953년 5월 15일,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약 닷새간의 일정을 마친 나는 뉴욕으로 가 웨스트포인트와 미1군사령부를 방문했다.
 
  17발의 예포 속에 방문한 웨스트포인트에서 1사단장 시절 다부동 전투 때 함께 격전을 치렀던 마이켈리스를 재회했다. 그는 준장으로 진급해 생도대장을 맡고 있었다. 마이켈리스 준장에게 대한민국 정부가 수여하는 을지무공훈장을 가슴에 달아 주었다.
 
  내가 이때 이곳에 기증한 태극기가 지금까지 그곳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명예, 의무, 국가’를 모토로 하는 웨스트포인트는 아이젠하워, 맥아더, 패튼, 워커, 리지웨이, 밴 플리트, 테일러 등을 배출한 학교답게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이켈리스는 1969년 9월 주한미군사령관으로 부임해 3년간의 임무를 마치고 1972년 8월 33년간의 군생활을 한국에서 마감했다. 그는 1985년 10월 31일 조지아주 크레이튼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北전차에 직접 바주카포 쏘며 분전 윌리엄 딘 24사단장
 
   내가 윌리엄 딘(William F. Dean, 1899~1981) 소장을 처음 만난 곳은 비행기에서였다. 나는 1948년 육본 정보국장 시절 강릉에 있던 국군 8사단을 방문했다. 군 수송기를 타고 강릉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대관령을 넘어설 때 난기류로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렸다. ‘추락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그때 비행기에 같이 타고 있던 사람이 딘 소장이었다. 그는 당시 미 군정장관 자격으로 강릉을 시찰하러 가던 길이었다. 동승했던 사람들이 모두 불안감에 떨고 있는데, 오직 그만이 태연했다. 매우 담대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딘 소장은 캘리포니아주립대를 졸업하고, 1921년 ROTC 소위로 캘리포니아 주방위군에 들어갔다. 그는 맥아더 사령관 밑에서 24사단을 지휘하며 일본에 주둔하다가 6·25전쟁에 뛰어들었다.
 
  미24사단의 스미스 선발 부대는 비행기 편으로 1950년 6월 30일 부산 수영비행장에 도착했다. 후속 부대는 그보다 늦게 도착했다. 평택과 오산, 다시 금강 주변에 방어선을 설정한 24사단이 공을 들여 지키고자 했던 곳은 대전이었다. 금강 방어선이 무너진 다음, 24사단은 대전을 3일 동안 지켰다. 나중에 열차 편으로 후퇴하려고 했으나 대전 외곽의 터널이 적에게 점령당해 수포로 돌아갔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까지 10개월간 군정장관을 역임했던 윌리엄 딘 소장의 장관 시절 모습.
  북한군 최정예 3개사단을 맞아 대전 시내에서 딘 소장은 힘겹게 싸웠다. ‘별 둘’을 단 딘 소장이 대전 로터리에서 3.5인치 바주카포를 적 탱크에 직접 발사했을 정도였다. 신속히 철수하라는 상부의 지시에도 불구, 딘 소장은 대전을 사수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것이다. “전차로써 철수로를 확보하라!” 이것이 그의 마지막 명령이었다. 그는 후퇴할 때도 부상자를 자신의 지프에 태우고 가는 등 끔찍이 아꼈다.
 
  딘 소장은 미군 장성으로는 유일하게 6·25전쟁에서 북한군의 포로가 됐다. 1950년 7월 20일, 그는 대전 전투에서 밀린 뒤 금산(錦山) 방면으로 가다가 실종됐다. 평소 습관대로 부관도 없이 혼자 다니다가 길을 잃었던 것이다.
 
  산속에서 헤매다가 25일 만인 8월 25일 금산의 어느 마을에서 주민의 신고로 북한군에 붙잡혔다. 그는 3년여의 포로생활 끝에 1953년 9월 4일 포로 교환 시 돌아올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44사단장으로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약 1년간의 전투 중 제44사단에서 포로가 된 사람이 42명에 불과해 딘 소장은 이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여겼었다. 이러한 신념을 가진 장군이 6·25전쟁에서 적의 포로가 됐다는 사실은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말해준다. 그는 “자신이 북한군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기 때문에 스미스 대대를 아무런 준비 없이 출동시켜 죽미령 패퇴의 불명예를 자초했다”고 두고두고 후회했다.
 
1950년 7월, 무초 주한미국대사, 워커 8군사령관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딘 소장(왼쪽부터).
  부하의 잘못을 책하기 전에 자신의 잘못을 먼저 반성할 줄 아는 지휘관이었던 것이다.
 
  딘 소장이 지휘하는 24사단은 1950년 7월 18일부터 3일간 북한군의 총공세에 맞서 대전을 방어했다. 이 3일은 부산 교두보를 강화하는 데 소중한 시간이었다.
 
  금강과 대전에서 24사단이 수행한 전투로 인해 적은 일정 기간 남하할 수 없었다. 그리고 미군이 6·25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는 점을 북한과 소련에 분명히 알렸다. 그들은 이 때문에 향후 공격 진로 등을 새로 조정하는 등 얼마간 혼란에 빠졌다. 미군의 참전으로 대한민국도 크게 고무됐다.
 
공산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포로교환 협정에 따라 풀려난 미 24사단장 딘 소장.
  딘 소장은 압록강 근처 만포진 포로수용소에서 3년을 보냈다. 나는 두 번째로 참모총장을 할 때인 1958년 미국 방문 길에 그를 다시 만났다. 나의 방미 소식을 전해 듣고 만나자는 연락을 해 왔던 것이다. 나는 그를 샌프란시스코의 육군장교회관에서 만났다. 군우리(軍隅里) 전투에서 미2사단을 이끌었던 로런스 카이저 소장(1950년 4~12월 2사단장 재임)도 동석해 함께 식사를 했다.
 
  딘 소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는 “포로로 잡혔을 때 사실 당신 신세를 진 일이 있다”고 말했다. 포로수용소에서 인민군 장교 한 사람이 “백선엽씨를 아느냐”고 묻기에 “잘 안다”고 대답하자, 감시병 몰래 모포와 음식 등을 갖다 줬다는 얘기였다. 그 인민군 장교는 내가 국군 창군 초기 부산의 5연대에서 근무할 때 부하로 데리고 있던 안흥만이라는 사람으로, 월북해서 인민군이 됐다. 6·25전쟁 전 그가 미 군정장관을 지낼 때의 이야기 등 화제가 다양했다.
 
  그러나 카이저 소장은 시종일관 입을 굳게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얼굴표정은 어두웠다. 1950년 11월 평안남도 운산 남쪽 군우리에서 당한 처참한 패배가 그의 뇌리에서 줄곧 떠나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 역시 한마디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그냥 떠오르는 몇 마디 인사말로 그의 상처를 위로하기에는 당시의 참혹함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함께 점심을 하던 딘 소장은 한국에서 생활하던 때를 회상하면서 “백 장군, 요즘 내가 말이지요… 김치를 잘 담근답니다. 한국에서 생활하다가 김치 맛을 알게 됐는가 봅니다” 하고 웃으며 말한 기억이 난다. 그는 한국을 사랑했다. 김치까지 담가 먹었으니 포로 생활 3년에 한국사람 다 된 셈이다. 국군 수뇌부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 준 딘 소장은 1981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돌적인 ‘인파이터’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
 
   자동차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월턴 워커 전임 미8군 사령관의 후임으로 미 육군성 작전참모부장인 매튜 리지웨이(Matthew Bunker Ridgway, 1895~1993) 중장이 1950년 12월 부임했다. 그는 취임 일성으로 “인분(人糞) 냄새가 진동하는 이 나라에 내가 왜 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해 한국인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리지웨이는 2차대전 중 제82공정사단장으로 시칠리아, 노르망디 작전에 참가했고, 이전에는 중국 톈진(天津)과 필리핀에 근무한 적이 있는 패기만만한 군인이었다.
 
  1951년 1월, 그가 부임했을 때, 전선은 북위 37도 선까지 밀렸다. 중공군의 3차 공세가 워낙 거셌고, 한번 밀리기 시작한 국군과 유엔군은 숨돌릴 틈도 없이 계속 남하했다. 그러나 전열을 갖춰야 했다. 제대로 된 준비를 한 뒤에 반격을 해야 할 시점이었다.
 
  1950년 12월 19일 법원리(法院里) 근처 초등학교에 있는 1사단사령부를 방문했다. 그는 수류탄과 구급대를 양쪽 가슴에 매달고 있었다. 번쩍거리는 철모가 전임자 워커 사령관의 상징이었듯, 가슴의 수류탄이 그의 상징이었다. 그는 내게 적정(敵情)과 장병들의 사기 등 여러 가지를 묻고는 “굿럭(행운을 빈다)”이라는 말을 남기고 20여 분 만에 돌아갔다.
 
  그는 워커 장군에게 뒤지지 않는 맹장(猛將)이었다. 반격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부임 직후 중공군의 공세가 다시 불붙었다는 보고를 받고 곧 의정부 전선으로 달려갔다. 국군 6사단과 미군 25사단 병사들이 형편없이 적군에 쫓겨 후퇴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몹시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설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각하가 한국군을 통솔할 만한 지도력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국군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뒤로 장면(張勉) 총리를 비롯해 정부의 고위층 인사들이 전선을 방문하는 일이 잦아졌다.
 
1952년 3월, 2군단 창설을 위해 춘천의 미9군단에 모인 한미연합 장성들이다. 왼쪽부터 9군단참모장, 나, 밴 플리트 8군사령관,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중앙), 9군단장 와이만 장군.
  그는 자신의 조국 미국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던 사람이다. 걸핏하면 ‘세계 최강의 미국’을 입에 올리기 일쑤였고, 말끝마다 ‘세계 최고의 나라, 세계 최고의 인재’라는 말로 미국과 미국인을 칭송하기에 바빴다.
 
  실제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공정 부대를 지휘했던 리지웨이는 군대에서 다져진 성격으로 볼 때 과감한 인파이터다. 과감하면서 저돌적인 인상, 거대한 전쟁이었던 2차대전을 영웅적으로 이끈 장수답게 늘 공격적이어서 남을 불편하게 했다. 얼굴에서 풍기는 카리스마처럼 조크를 할 줄 몰랐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자칫 무너질 뻔했던 1·4후퇴 당시의 아군 전선을 강력한 지휘력으로 아주 튼튼하게 묶은 뒤 빈틈이 없고, 때로는 무모할 정도로 과감한 전법을 구사해 중공군의 공세를 물리쳤다.
 
  또한 정치 감각이 뛰어난 군인이었다. 맥아더 장군이 태평양 전쟁을 수행하면서 워싱턴을 오래 떠나 있다가 그곳 정가(政街)의 동향에 무관심하게 됐던 것과 달리, 리지웨이는 자국 정부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많이 기울였다.
 
1951년 2월, 나는 워커 장군 후임으로 부임한 리지웨이 8군사령관에게 경기도 파주 법원리 초등학교에서 서울 재탈환계획을 보고했다.
  38선에서 북진을 멈추고 전선을 고착화하려는 워싱턴의 결정에 리지웨이는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맥아더는 그 반대였다. 벌어진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를 해야 한다는 군인으로서의 자세가 더 강했다. 리지웨이는 그에 비해 워싱턴의 결정에 최대한 순응(順應)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리지웨이 역시 군인이었다. 38선을 고착화하되 적 저지선을 최대한 북상(北上)시키려는 뜻이 강했다. 그가 흔히 말하는 ‘합법적인 (미국) 정부의 합법적인 명령’에는 따르지만, 군인으로서 전쟁에서는 이겨야 한다는 생각에 충실했다. 그래서 38선 북쪽으로 설정한 ‘캔자스 라인’(임진강-화천-양양)으로 방어에 유리한 거점을 먼저 차지하도록 아군에 명령한 것이다.
 
  리지웨이는 1917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공수군단을 이끌고 싸웠다. 특히 1943년 7월 시칠리아섬 공략에서는 미국 육군 사상 최초의 대(大)공수 강습작전을 감행했다. 맥아더가 미 육사인 웨스트포인트의 교장을 지낼 때, 리지웨이는 대위로서 체육 교관이었다. 맥아더가 장군이었을 때, 리지웨이는 위관(尉官)에 불과했다.
 
  그러나 리지웨이는 맥아더의 2인자로 머물러 있기를 싫어했다. 1951년 1·4후퇴 이후 총반격을 개시하면서 중공군을 북으로 밀어내고 있을 때, 맥아더 장군이 유엔군 격려차 수원비행장에 내렸다. 그러나 리지웨이의 심기는 편치 않았다. 그는 나중에 회고록을 통해 “전쟁은 내가 치러서 성공적으로 반격을 하고 있는데, 맥아더 원수가 느닷없이 나타나 그 전공을 가로채는 느낌”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막상 맥아더가 나타나면 리지웨이는 사실 꼼짝도 못했다. 선생님 앞에서 꾸지람을 듣고 있는 학생 같았다.
 
휴전회담이 진행 중인 1951년 7월 11일, 임진강 도하장 입구에 선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
  미군도 서로 경쟁하는 모양새는 국군과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군인정신에 충실했다. 그들은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늘 절치부심(切齒腐心)했고, 대담하면서도 창의적인 작전을 짜기에 골몰했다.
 
  느닷없이 다가온 한국전쟁의 많은 전장에서 그들에게 배운 것들이 많다. 특히 적 앞에서 결코 움츠러들지 않는 용맹성, 거대한 난관(難關)이 앞에 닥쳐도 전체적인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려는 우직함이었다. 맥아더의 후임으로 도쿄 유엔군총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의 그 군인정신도 그랬다.
 
  그는 전임 월턴 워커 장군과는 다른 전법(戰法)을 택했다. 워커 장군은 전차전의 명수였던 패튼의 부하답게 기갑부대를 앞세워 돌파를 시도하는 타입이었지만, 리지웨이는 달랐다. 그는 각 부대를 옆으로 펼쳐 인접 부대 사이의 ‘연결’을 중시하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전법을 택했다. 우회와 매복, 그리고 포위에 능한 중공군의 전술을 염두에 둔 작전이었다.
 
  당시 리지웨이 사령관의 작전명은 ‘선더볼트(Thunderbolt·벼락)’였다. 작전이 펼쳐지면서 나온 구호는 ‘어깨를 나란히(Shoulder to shoulder)’, 서로 가까이 붙어 밀집하라는 뜻이다. 리지웨이는 부대와 부대의 간격을 좁히라고 강력하게 지시했다.
 
  그는 또 지휘관들에게 ‘2단계 하급제대 지휘’를 강조했다. 즉 “사단장은 연대·대대까지 나가라. 연대장은 대대에 이어 중대까지 가서 지휘하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서로 다른 부대 간의 횡적 유대와 함께 부대 내 상하 간의 종적인 유대도 강화하라는 뜻이었다.
 
1953년 6월 11일, 미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한 리지웨이 장군이 대구 육군본부를 방문했다. 왼쪽부터 나,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 헐 대장, 미 병참관구사령부(KCOMZ) 사령관 로턴 소장.
  리지웨이의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그가 지휘하는 미8군의 사령부는 대구에 있었지만, 그는 그곳에 머물지 않았다. ‘지휘관은 전선에 바짝 붙어 있어야 한다’ ‘현장감을 무시하고 작전계획을 세우면 안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늘 미1군단의 프랭크 밀번 군단장과 함께 머물면서 숙식(宿食)을 했다. 나이는 어리지만 ‘상관’으로 모셔야 했던 리지웨이와 붙어 지내면서 밀번 군단장이 받은 스트레스는 상당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리지웨이는 또 1군단의 작전계획을 살펴보다 작전참모가 후퇴 위주로 작전을 짜 놓은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그 작전참모를 경질해 버렸다. 당시 그가 지휘했던 강력한 반격작전이 제대로 펼쳐진 이유를 알게 해 주는 대목이다.
 
  1951년 극동연합군 최고사령관에 오른 그는 1년 뒤 아이젠하워의 뒤를 이어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 1953년 미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했고, 1955년에 퇴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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