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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권·베를린 장벽 붕괴 20년 특집] 盧泰愚-20세기 巨人들과의 대화록

盧泰愚 대통령,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에 激動의 현장 순방

조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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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이 무너져 내릴 때, 레이건·요한 바오로 2세·브란트·콜·대처·미테랑은 한국 대통령에게 무슨 말을 했던가?
1989년 11월 1일 프랑스를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이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1988년 9~10월에 열린 서울올림픽에는 소련과 東歐(동구) 공산권 국가가 모두 참여했다. 서울올림픽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22년 만에 東西(동서) 진영이 모두 참여한 온전한 올림픽이었다.
 
  스포츠 强國(강국)인 공산국가에선 이 올림픽을 텔레비전으로 중계 방송했다. 이 나라 국민들은 자유롭고 번영한 한국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경기운영도 최고였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나라, 美(미)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신세로 거지국가처럼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던 나라가 자신들보다도 잘살고 있는 데 대한 충격은 공산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전환됐다. 때는 마침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일으킨 개혁 개방의 바람이 공산권을 휩쓸고 있던 시절이었다.
 
  盧泰愚(노태우) 前(전) 대통령은 “소련, 중국, 동구 공산권 국가들을 상대로 북방정책을 펼 때 한국이 6·29선언을 계기로 민주화를 시작했다는 점과 서울올림픽의 성공이 큰 도움이 됐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한국은 그때부터 ‘올림픽을 성공시킨 민주주의 국가’라는 브랜드를 지니게 됐다.
 
  1987년의 6·29민주화 선언, 1988년의 서울올림픽, 1989년의 북방정책 시동은 동구공산권 붕괴 사태와 만나게 된다.
 
  1989년 2월 1일 헝가리의 줄라 호른 외무담당 국무장관이 서울에 와서 兩國(양국)의 상주 대표부를 대사관으로 승격시키는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國交(국교) 수립에 이르렀다. 헝가리는 운명적인 1989년 여름엔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을 개방함으로써 동독 주민들이 탈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베를린 장벽 붕괴, 동독 정권 붕괴, 독일 통일로 이어지는 대사변을 일으킨다.
 
  1989년 6월엔 폴란드의 공산정권이 下院(하원)의석의 35%, 새로 만든 上院(상원)의석 100석 전부를 선거에 부쳤다. 이 선거에서 하원의석의 35% 전부와 상원의 99석을 자유노조 후보가 차지했다. 의회는 할 수 없이 자유노조 정부를 승인했다. 선거에 의해 폴란드의 공산정권이 무너진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선거 직전 폴란드 공산당 당수와 전화하면서 “선거 결과를 존중하겠다”고 말했다. 역사가들은 소련이 동구의 자유화 大勢(대세)에 대한 武力(무력)저지를 포기할 것임을 선언한 이 전화가 “사실상 東西(동서)냉전을 끝낸 것”이라고 말했다. 그 뒤 반년 사이 체코,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의 공산당 정권이 붕괴되고 11월엔 드디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민주화-올림픽-북방정책의 연장선상에서 동구 공산권 붕괴가 있었다. 한반도의 運勢(운세)가 세계사의 대세와 결합된 것이다. 이 대세를 만드는 데 한국인들이 서울올림픽을 통해 한몫을 했다는 점은 영원히 자랑할 만하다.
 
 
  요한 바오로 2세의 訪韓
 
성체대회 참석차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신자들에게 답례하고 있다.
  세계사의 전환점이 된 1989년 가을의 동구 대혁명, 그 현장으로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頂上(정상)회담 여행을 한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노 대통령은 그해 11월 9일에 있었던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16일 동안 서독을 비롯하여 헝가리, 영국, 프랑스 등지를 방문, 정상회담을 가졌다.
 
  필자는 노 대통령이,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의 進路(진로)를 놓고 고심하던 대처 영국 수상, 콜 서독 수상,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등을 만나 나눈 생생한 대화록을 최근 입수했다.
 
  한국의 대통령이,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는 한복판에서 그 역사를 만들던 주인공들과 나눈 대화를 20년 뒤에 읽어보니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에 담긴 인간의 숨결과 감정까지 느낄 수 있었다. 독자들을 타임머신에 태워 20년 전 동구 혁명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노태우 대통령은 유럽 巡訪(순방)을 앞두고 찾아온 두 손님을 맞았다. 이들이야말로 동구 공산권 붕괴의 단초를 연 인물이었다.
 
  1989년 10월 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聖體(성체)대회 참석차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청와대를 찾아왔다. 폴란드 출신인 교황은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폴란드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여 소련을 코너로 몰았다.
 
  두 사람은 폴란드가 공산세계의 안전핀이라고 생각했다. 이 안전핀을 뽑아버리면 동구가 수류탄처럼 폭발하고, 그 파편으로 소련도 날아갈 것으로 보았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노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폴란드·헝가리 등 동구권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이유는 경제파탄 때문입니다. 저의 母國(모국) 폴란드에서는 솔리데리티라는 강력한 자유노조의 압력이 작용했습니다. 그에 따라 공산당은 원탁 정치협상 회의를 소집하게 되었고, 그 결정에 따라 완전한 것은 못되지만, 처음으로 자유선거가 이루어져 자유노조가 절대적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헝가리도 비슷한 개혁이 진행되고 있고, 최근 동독에서도 체제 자체에는 변화가 없지만, 국민 간에 큰 동요가 일고 있습니다. 동구에는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기초가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변화가 이룩될 수 있는데, 쿠바나 북한 같은 나라는 사정이 다릅니다. 동구권에서도 루마니아, 체코와 동독은 아직도 개혁을 거부하고 있는데, 앞으로 공산세계 개혁이 어떻게 될지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브란트, “統獨은 꼭 한 나라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9년 10월 25일 낮에는 한 시간 반 동안 빌리 브란트 서독 전 총리를 접견, 청와대에서 점심을 함께하면서 환담했다. 1970년대 동방정책으로 동·서독 교류 시대를 열었던 브란트 전 총리는 “독일의 통일과 유럽의 통합이 매우 중대한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브란트는 “지난주 고르바초프 서기장을 만나러 모스크바에 갔었는데 그곳은 벌써 꽤 추운 날씨였다”고 했다. 그는 韓蘇(한·소) 수교를 추진하던 노 대통령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내가 고르바초프와 만나기 하루 전에 그의 보좌관인 야코블레프를 만난 말씀부터 드려야겠습니다. 그는 내가 한국에 가는 줄 알고 있었고, 한국 사정에 정통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새로 시작된 한·소 관계를 더욱 발전시키기를 원한다고 말하면서, 평양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평양은 크렘린이 너무 급속하고 너무 우호적으로 남한과 접근하고 있다고 불평을 한다’고 했습니다.
 
  틀림없이 고르바초프의 견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만, 야코블레프는 한국과 경제 등의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한·소 두 나라의 공동이익에 기여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고르바초프와는 그의 집권 이래 네 번째 만났습니다만, 그는 여전히 건강한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의 개혁정책이 성공할지는 의문이 있습니다. 私的(사적)인 대담을 하는 도중에 그는 ‘폭약더미 위에 올라앉아 있는 기분이다. 누구라도 성냥 하나만 던지면 폭발이 일어날 것 같다’고 실토했습니다. 이번 겨울에는 식량문제가 걱정이라고도 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브란트는 독일의 통일을 상당히 장기적으로 전망했다.
 
  “지금은 동구권이라 하지만 우리가 학생 때는 바로 그들 나라를 中歐(중구)라 불렀지요. 제가 보기에 소련에서 예상치 못한 큰 폭발이 없는 한, 동구권 자체에는 큰 위험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독일의 통일은 꼭 한 나라(One State)가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랜 역사상 독일이 단일국가였던 시기는 그리 오래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통일은 일차적으로 하나의 국가연합의 형태를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올림픽이 한국을 우리 안방에 가져다놓았다”
 
  브란트는 “떠나기 전에 집사람한테 ‘멀리 여행하고 오겠다’고 했더니, ‘한국은 먼 나라가 아니에요. 올림픽이 한국을 우리 안방에 가져다 놓았지 않아요’라고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서울올림픽은 세계 모든 나라에 한국을 알렸고, 그 결과 여러 가지 정치·외교적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듣기 좋은 소리로 하는 말이 아니고, 全(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에 확실한 인식을 가지고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빌리 브란트 전 총리는 이날 대화를 통해 베를린 장벽이 보름 뒤에 무너지고, 독일이 1년 뒤에 통일될 것임을 상상도 하지 못했음을 증거로 남겼다.
 
  노태우 대통령이 유럽 순방길에 서독에 도착한 것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11일이 지난 때였다. 서독의 국가지도부는 이 급변 사태에 대처하느라고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세계사가 요동치는 폭풍의 한복판으로 한국 대통령이 들어간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1989년 11월 20일 서독 수도 본에 도착했다. 그 사흘 전부터 체코의 프라하에선 수십만 명이 反共(반공) 민주화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 소련군의 침공으로 깨어진 지 21년 만의 사태였다. 체코 공산당은 강제진압을 주저하고 있었다.
 
  집무실에서 노 대통령을 맞은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서독 대통령은 “독일로서는 가장 의미 있는 시점에 방문해 주셨다”고 인사했다. 노 대통령은 “한국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는데 직접 보고 듣고 싶었다”고 했다.
 
  이날 대화는 자연히 통일문제로 집약됐다. 바이츠제커 대통령은 신중했다.
 
  “독일의 통일문제는 독일 단독으로 해결할 수 없으며, 유럽의 여러 관련된 나라가 모여 함께 해결해야 한다고 봅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의 협력이 동독의 사태발전에 도움이 되며, 특히 소련의 협조가 매우 긴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우리 독일국민은, 베를린 시민도 그렇지만, 모두가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兩獨(양독) 문제를 해결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콜 총리가 말한 동구사태의 원인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후 시민들이 베를린장벽에 올라가 환호하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은 다음날 오전 헬무트 콜 총리의 집무실을 방문,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때 콜 총리는 베를린 장벽 붕괴란 대사건과 流動(유동)하는 공산권의 정세를 기회로 잡아 독일 통일을 추진하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그 바쁜 가운데서도 두 分斷(분단)국가 정상은 오찬을 포함하여 세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콜 총리는 당시 동구사태의 원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동독의 급변을 유도한 데는 몇 가지 여건이 작용했는데, 그것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1983년 NATO(북대서양조약기구)는 핵무기 감축과 퍼싱 미사일의 域內(역내) 배치를 결정했는데, 그 당시 고르바초프는 집권하고 있지 않았으나, 소련은 NATO 諸國(제국)과 핵무기 경쟁에서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둘째, 소련과 그 주변 동구 위성국에서는 새로운 정치풍토, 즉 자유주의 경향이 싹트고, 공산주의의 폐쇄성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 교육수준이 높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많이 벌어야 한다는 에어할트의 이론이 마르크스 이론에 이긴 것입니다.
 
  셋째, 西歐(서구) 자유주의 제국은 유럽 통합이 최종 정치 과제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바르샤바 가맹국은 헝가리와 폴란드를 압력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되어 이런 인식이 결국은 폴란드와 헝가리를 개혁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최근 동독이 급변한 것은 상당히 오랜 기간 서독과 접촉을 계속해 왔으며, 그 접촉을 통해 동독인은 ‘왜 우리는 서독보다 못살고 있나’ 하고 회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주창하게 됨에 따라, 모든 발전은 폭력 없이 평화롭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思潮(사조)가 팽배하고, 매일 많은 사람이 함께 모여 자유선거, 노조결성, 경제개혁 등을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에 동독 집권층은 처음에는 별로 개의치 않았으나, 동독인이 점차 이탈하기 시작해 금년 들어 약 27만명의 동독인이 서독으로 이주했으며, 지난 20일간에는 동독 인구 1700만명의 절반가량인 800만명이 국경개방 기회를 이용해 서독으로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향후 동독이 더욱 개방정책을 펼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동독인과 서독인이 서로 섞여서 모두 하나의 독일인이 되는 날이 올 것으로 희망하고 있습니다. 너무 빠른 동독의 변화는 동·서독을 둘러싼 양 주변국들에 우려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이 서독은 너무 강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서독 인구는 6200만명이며, 동독은 약 1700만명입니다.”
 
 
  헝가리 지도자들과의 대화
 
  오찬 연설에서 콜 총리는 의미 있는 말을 했다.
 
  “우리 두 민족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은 동일한 정치적 운명을 통해 결속되어 있습니다. 兩國(양국)이 자유로운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통일을 이룩하는 것은 恒時的(항시적)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두 분단국가 수반은 공동 발표문에서도 “냉전구조가 더 이상 민족을 갈라놓을 수 없다”는 원칙을 천명했다.
 
  정상회담 뉴스를 전한 조선일보 1면엔 金玄浩(김현호) 특파원의 프라하 르포 기사가 실렸다. ‘프라하, 민주화 함성-플래카드 물결’이란 제목과 함께 ‘電車(전차)경적-시민들 열쇠고리 흔들어 弔鐘(조종)시위’ ‘일부 배우들 파업, 극장 문닫아…경찰은 방관’이란 설명이 붙은 기사였다.
 
  기사는 ‘저명한 反(반)체제 지도자이자 극작가’인 하벨의 주도하에 시민포럼 창립총회가 있었고 반체제 단체들은 현 체코 지도층의 퇴진 조건에 대한 협상을 시작할 것을 제의했다고 보도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헝가리 방문은 양국에 다 의미가 깊었다. 노 대통령은 동구국가를 처음으로 방문하는 셈이고 헝가리로선 10월의 민주화 조치 이후 맞는 최초의 자유진영 지도자였다.
 
  헝가리 공산당은 그 한 달 전 黨名(당명)을 헝가리 사회당으로 바꾸고 사회민주주의의 기치를 내걸었다. 정당 설립의 자유와 자유선거의 실시를 선언하면서 國名(국명)도 헝가리 인민공화국에서 헝가리 공화국으로 바꿨다. 이런 민주화로 정당이 여럿 생기기 시작했다.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어서인지 群小(군소) 정당이 난립하고 있었다.
 
  자유진영에서 올림픽을 치른 대통령이 왔다고 해서인지 그 정당의 대표자들이 전부 노 대통령 면담을 신청해 왔다. 운동권 학생대표까지 만나기를 원했다. 노 대통령은 야당 총재이거나 대통령 후보인 비중 있는 인사들을 불러서 국회의사당 회의실과 영빈관에서 연속적으로 개별 면담했다.
 
  헝가리 민주화의 지도자였던 임레 포즈거이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사회당(전 공산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직후였다. 포즈거이는 1980년대 헝가리 공산당 내의 개혁파 지도자로서 복수정당제 등 민주화 개혁을 이끈 ‘헝가리의 고르바초프’였다. 포즈거이 후보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과의 수교는 헝가리 공화국 국민의 희망과 의지를 반영한 것이며, 헝가리 국민은 올림픽 이전부터 한국의 기적적인 경제발전에 경탄해 왔는데, 아름다운 서울올림픽과 따뜻한 한국 사람들의 모습이 헝가리 국민에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의 경험을 배우고자 합니다.”
 
 
 
盧泰愚, “민주주의는 많이 참는 것”

 
콜 독일 총리(가운데)는 동구권 대전환의 호기를 놓치지 않고 독일통일을 달성했다.
  노 대통령은, 11월 23일 아침에는 미클로시 네메트 총리를 만났다. 네메트는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해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가져온 바로 그 사람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야당 지도자들에겐 6·29선언과 대통령 선거 경험 등을 이야기하면서 “민주주의를 하려면 많이 참아야 합니다”라고 조언해 주었다.
 
  노 대통령은 그들이 공산주의·사회주의를 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투도 거칠고 극렬한 주장을 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온유한 태도를 보이는 데 놀랐다고 한다. 오랫동안 유럽 문명을 호흡하면서 중부 유럽의 强者(강자) 노릇을 했던 관록과 전통이 이들의 교양으로 體現(체현)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헝가리 국영방송이 생중계하는 가운데 국회의사당에서 <화해와 새 시대를 함께 여는 동반자 관계>란 제목의 연설을 했다. 11월 24일자 한국 신문들은 이 역사적 연설을 옆으로 미루고 백담사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全斗煥(전두환) 전 대통령을 국회로 불러내 신문하는 문제에 대한 與野(여야) 공방전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1989년 11월 9일의 베를린 장벽 붕괴에 대해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이가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였다.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엄청난 파괴력을 맛보았던 영국으로선 통일된 독일의 등장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11월 10일 콜 총리가 대처에게 전화를 걸어왔을 때 그는 “자유를 향한 위대한 날이었다”고 축하해 주었지만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의논해 보라”고 충고했다. 며칠 뒤 대처는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대처는 “우리가 지금 사태를 악용하여 소련의 안보를 약화시키려 한다는 인상을 주어선 안된다. 독일 통일은 현시점에서 논의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11월 24일 대처는 미국으로 날아가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서 부시 대통령과 만났다. 대처는 독일 통일을 지지하기로 이미 결심한 미국 대통령을 설득하려 했다. 그는 “최우선적인 과제가 동구에서 민주화 흐름을 굳히는 것”이라면서, “독일의 문제는 ‘민족자결의 원칙’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했다. 대처는 예언적인 말을 했다.
 
  “독일 통일은 고르바초프의 失脚(실각)을 의미한다.”
 
  노태우 대통령 일행이 영국 히드로 공항에 도착한 것은 11월 27일 오전이었다. 다음날 오후, 노 대통령은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관저 집무실에서 마거릿 대처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날 저녁 만찬에서도 노 대통령은 ‘鐵(철)의 여인’과 깊은 대화를 나눴다.
 
  기자들은 정상회담장은 물론이고 官邸(관저)의 현관을 넘어서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회담 내용은 金宗輝(김종휘) 외교안보 보좌관이 기자들에게 설명했다.
 
 
  독일 통일 반대한 ‘鐵의 여인’ 대처
 
대처 영국 총리는 독일 통일에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강인하면서도 여성스러움을 간직한 대처 총리는 “우선 최근 한국의 민주화에 대하여 축하드립니다. 각하 전임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자기의 최대 꿈은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한 최초의 한국 대통령이 되는 것’이라 했는데, 그것에는 성공했군요”라고 인사했다.
 
  대처는 “우리는 요즈음 매우 흥미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라고 동구 공산권의 격변을 표현했다. 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동구의 민주화, 개방·개혁의 바람이 히말라야 산맥에 걸려서 아직 東北亞(동북아)까지 불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작년 올림픽을 통해 이념·인종·지역 등 모든 장벽을 넘어 인류화합과 평화에 기여했습니다.”
 
  대처 총리는 “참, 서울올림픽은 너무나 훌륭했습니다”라고 축하해 주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부다페스트를 방문하셨다니 반갑습니다. 헝가리는 경제속박을 벗어버린 최초의 나라입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약간 전진해서는 주위를 둘러보고, 기다렸다가 다시 전진하는 식으로 개혁해 왔습니다. 1984년에 가 보았더니 식량사정도 좋고, 시장에 물건도 풍부했습니다.
 
  폴란드는 다릅니다. 심각한 식량부족으로 큰 어려움에 봉착해 있습니다. 폴란드의 개혁은 주로 자유노조가 주도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노조가 아니고, 반공정치 세력으로 정부를 비판하고, 폭정에 항거해 왔고, 이제는 집권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앙집권적 계획경제 체제를 어떻게 민주화할 것인지 난관에 봉착해 있습니다. 소련도 마찬가지지만, 관료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속수무책입니다.
 
  우리는 폴란드와 헝가리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복수정당 제도를 채택해 공산체제로부터 자유체제로 옮겨온 최초의 정부들인데, 그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매우 긴요합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특별원조계획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소련도 경제개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유경제 질서하에서 책임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도대체 이해하지 못합니다. 고르바초프는 자본주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인도적인 사회주의(Socialism with human face)를 지향한다고 하는데, 물론 인도주의는 좋지만, 사회주의는 인류복지를 절대로 보장 못 하는 제도입니다.”
 
 
  대처, “김일성은 참으로 나쁜 사람”
 
  노태우 대통령은 한국의 민주화를 거울삼아 중국을 변호했다.
 
  “중국이 우리 이웃나라이므로 그에 대해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데 있어 중국과 소련은 처음부터 달랐습니다. 소련이 정치·경제 양면의 개혁을 동시에 추진한 데 반하여 중국은 경제개혁부터 먼저 추진하고, 정치변혁은 뒤로 미루어 왔습니다. 경제개방에 따라 국민들의 민주화 욕구가 폭발해서 톈안먼 사태가 발생했고, 그 후 중국의 개혁은 멈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문화·역사와 국민성으로 보아 후퇴는 없을 것이며, 결국 경제·정치의 개방과 개혁의 방향으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부시 대통령께도 말한 바 있지만, 서방 측은 중국에 대해 인권이나 민주화 등으로 지나치게 몰아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원하지 않았던 반작용이 나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서서히 사태를 보아가면서 그들을 유도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중국을 잘 알고 있는 부시 대통령도 동감이었습니다.”
 
  대처 총리는 그래도 불만스런 표정이었다.
 
  “중국이 대체로 잘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망이 컸습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문화혁명 때 고생을 많이 해서 절대로 그런 일이 재발되어서는 안된다고 늘 말해 왔고, 자오쯔양(趙紫陽)과는 홍콩 반환교섭 일로 자주 만났는데, 교섭 결과도 대체로 만족스럽고, 1997년 반환까지 잘될 줄 알았습니다. 덩샤오핑은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고, 자오쯔양도 퍽 합리적인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들이 그런 무자비한 짓을 했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외국 貴賓(귀빈)이 와 있어서 나라 체면도 있었다지만, 그 사람들은 최루탄도 없는지, 꼭 총을 쏘아 사람을 죽여야만 되는 것인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중국이 더 이상 후퇴하지 않고, 자오쯔양 같은 사람이 복귀되었으면 합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좀 더 자유로운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홍콩 문제도 안심이 되니까요.”
 
  대처 총리는 “중국 지도자들은 金日成(김일성)을 싫어하지만, 그와 등을 질 수 없는 모양입니다. 김일성은 참으로 나쁜 사람(Terrible Man)이고, 북한은 참으로 나쁜 나라(Terrible Country)입니다. 미국 TV를 보니까 김일성이 국민을 완전히 꼭두각시로 만들어 놓았더군요. 그 사람은 계속 남한을 전복하려고 한다지요?”라고 질문했다.
 
  대처 총리는 이어서 “북한 사람들이 TV나 라디오로 남한 소식을 알게 되면 동독과 같이 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소련 사람들도 우리 BBC 해외방송 보도를 듣고 있는데…. 북한이 벽을 쌓아 외부세계와 완전히 단절시킬 수 있는가요?”라고 물었다.
 
 
  “노조 지도층의 독재적 권위를 분쇄해야”
 
  노태우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
 
  “그들은 외부와 거의 100% 차단되어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법으로 외국방송 청취가 금지되어 있고, 일반 TV와 라디오는 채널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또 전파방해도 하고 있지요. 위반자는 엄한 처벌을 받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폐쇄되어 있는가 하면, 얼마 전에 그들의 방송은 ‘남한은 올림픽 관계로 외채를 져서 파산지경에 있으니,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선전을 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대처 총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 대통령은, “총리께서는 노사분규를 과감히 처리해 산업평화를 이루는 데 성공하셨는데, 그 비결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노사관계의 비결은 간단합니다. 일반 노조원들은 순진하고 정직하고 부지런히 일합니다. 문제는 노조 지도층인데, 그들이 모든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노조 지도자(Union Boss)가 파업을 하려면 노조원 전체의 비밀투표에 의한 동의를 받아야 되도록 법을 고쳤습니다. 그랬더니 대부분의 근로자가 그에 가담하지 않았고, 간혹 파업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그로 인한 피해가 있으면 그들에게 책임을 지우도록 되어 있습니다.
 
  요는 노조 지도층의 독재적 권위를 분쇄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업장 출입방해 등 부분 파업에 대해서도 규제합니다. 영국에서는 자동차 업체에서 노사분규가 제일 심했었는데, 한 업체에 다수의 노조가 있어 서로 경쟁적으로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에, 새로 생기는 공장에는 하나의 노조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 사원지주제를 실시해서 자기 회사뿐 아니라, 다른 회사의 것이라도 다만 몇 개의 주식이라도 소유하게 되면 노동자 스스로가 소자본가가 되므로 생각이 변하게 됩니다.”
 
  만찬 자리에서도 대처 총리는 북한을 이해할 수 없는 나라라고 표현하는 등 못마땅해 했다.
 
  “동유럽은 하루 앞을 내다보지 못할 정도로 급격히 변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분단된 현실에서 동독이 겪고 있는 변화는 한국인들에게는 남의 일 같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몇 년 전 서울을 방문해 비무장지대에서 한국의 분단현실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이를 더욱 절감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소설에서나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철저히 비현실적인 나라이고, 김일성은 아주 이상한(Very Strange) 지도자입니다.
 
  訪韓(방한) 도중 판문점을 찾았을 때, 북측 군인들이 동료들이 있는 데서는 근엄한 표정을 짓다가 동료들이 안 보니까 나에게 손짓을 했습니다. 그들도 표리부동한 것입니다.
 
  한국의 발전을 위해 그토록 많은 일을 한 지도자(전두환 전 대통령)가 현재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은 가슴 아픕니다. 닉슨 대통령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지 않고 계속 대통령직을 수행했더라면 미국과 국제발전에 더 이로웠을 것입니다.”
 
  노 대통령은, “그 문제(전두환)는 금년 말 이내로 잘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테랑, 先 EC 통합 강조
 
  노태우 대통령은 런던에 체류중이던 11월 30일 오전 부시 미국 대통령과 전화 회담을 했다. 부시는 수일 내로 지중해 몰타에서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회담할 계획이었다.
 
  노 대통령은 “이번 유럽 방문을 통해 급변하는 역사의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고 했다. 부시는 “한국 사람들이 유럽사태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므로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회담할 때 그런 점에서 유의하려 한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북한이 개방노선으로 나올 수 있도록 소련이 영향력을 행사해달라는 말을 해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오후 영국을 떠나 파리의 오를리 공항에 도착했다.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공항까지 나와 영접했다. 오후 6시30분부터 7시20분까지, 그리고 오후 8시30분부터 11시20분까지 엘리제궁의 집무실과 대연회실에서 정상회담과 만찬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미테랑 대통령은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의 독일 상황에 대해 관심과 걱정을 보였다. 이런 대화가 오고갔다.
 
  미테랑: “세계는 현재 역사의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헝가리·폴란드·체코·불가리아, 그리고 최근에는 동독·소련까지 모두 급변하고 있습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구축되었던 체제가 국민들의 자연적인 의지의 발산 하나로 일거에 붕괴되고 있습니다.
 
  독일 문제는 심사숙고한 고찰이 필요합니다. 두 개의 국가로 있는 동일 민족의 독일이 합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양독 국민은 과거의 국제적인 협약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통일의 방향을 설정해야 할 것입니다.
 
  독일 통일에 대해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나라는 역시 소련인데, 이는 독일 통일이 戰後(전후) 유럽에 설정된 국경선의 변경을 초래하지 않을까에 대한 우려로 보입니다. 하여간 독일 통일에 관해서는 신중한 관찰이 필요합니다. 또 독일 통일문제가 현재 급진전되고 있는 유럽통합에 영향을 미쳐서도 안될 것입니다.
 
  내주 중 있을 EC(유럽공동체) 회담에서 이 문제가 심도 있게 협의될 것입니다. 만약 독일 통일이 EC 통합보다 먼저 이루어지면 유럽 판도에 커다란 영향을 줄 것입니다. 또 EC 통합이 빠르면 독일 통일문제도 양상이 많이 달라질 것이나, 그래도 EC 통합이 先行(선행)되는 것이 유럽 전체로 보아 불안요소가 적다고 봅니다.
 
  독일 통일에 대해 소련이 불안한 심정으로 이를 주시한다면 이 또한 유럽 전체의 불안으로 확대될 수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볼 때 독일 통일문제는 별도로 관망하되, 우선 EC 통합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봅니다. 동구권에 대한 서구의 경제적 지원도 구체화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형성된 질서를 붕괴시키고, 동·서 냉전으로 인한 긴장을 해소시킨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제도적 보장이 될 것입니다.”
 
 
  “독일 통일 방해하지 않겠다” (미테랑)
 
  노태우: “각하께서는 현재 EC 의장직을 맡고 계신바, 앞으로 형성되어야 할 이상적인 질서에 관해 어떠한 高見(고견)을 갖고 계신지요?”
 
  미테랑: “동독 국민의 강렬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독일 통일에는 적지 않은 난관이 있습니다. 우선 경제면에서 볼 때 동독과 서독은 그 격차가 어마어마합니다. 또 국경선 문제와 관련한 소련의 신경질적인 우려 표명도 문제의 하나입니다.
 
  독일 통일의 기본 골격은 아무래도 민족연방 형태가 바람직하며, 이에 대해서는 戰後(전후) 관계 4국인 프랑스·소련·미국·영국과 충분히 협의해 이들 4국으로 하여금 독일문제에 대해 새롭게 합의된 입장을 정립토록 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각국은 동독이 경제부흥을 추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독일 통일문제를 위시한 동구문제 모두가 현 서구질서를 해치지 않는 방향에서 해결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우선 EC 통합 운동이 먼저 결실을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봅니다.”
 
  미테랑 대통령은 대처 총리만큼 분명하게 독일 통일에 반대하지 않았다. 노 대통령을 만나던 날 서독의 겐셔 외무장관이 파리로 와서 미테랑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미테랑은 “나는 독일 통일을 방해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물어볼 것이 있다”면서 “독일은 유럽통합의 과정을 계속할 것이냐”고 물었다.
 
  겐셔는 “물론이다. 통합은 가속화될 것이다”라고 안심시켰다. 미테랑은 독일 통일을 반대하지 않는 대신 자신이 추구해 온 유럽통합을 촉진시키는 방향으로 독일문제를 이용하기로 한다.
 
  그해 12월 초 열린 몰타회담에서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독일 통일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콜 독일총리와 손잡고 독일 통일을 밀어붙였다. 이듬해 10월 3일 독일은 총 한방 쏘지 않고 통일됐다.
 
  독일의 운명은 노태우 대통령이 유럽을 방문하던 11월 말에서 12월 초에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노 대통령은 귀국길의 비행기 안에서 달포 전에 만났던 레이건과의 대화가 생각났다고 한다. 노태우 대통령은 유럽 방문에 나서기 직전 미국에 가서 부시 대통령과 회담한 뒤 1989년 10월 19일엔 레이건 전 대통령의 사무실을 예방했다. 소련을 ‘惡(악)의 제국’이라고 공격했던 레이건 대통령은 8년간 대결과 대화를 통한 對蘇(대소) 강경정책으로 공산권이 무너질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놓고 퇴임, 1989년에 전개되는 역사의 대격변을 즐기면서 감상하고 있었다.
 
 
  레이건, “우리는 함께 싸우고 함께 죽었다”
 
1987년 9월 백악관을 방문한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가 레이건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노 대통령은 “각하께서 재직 8년간 세계평화를 유지하고 미국을 재건하신 업적이 이제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는 것을 부시 대통령과 이야기한 바 있다”라고 인사했다.
 
  레이건은 “나는 8년간 정부가 국민의 생활에 관여 못하도록(Get government out of the people’s way) 하는 데 주력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노 대통령은, “요즈음 소련, 동구권과 중공까지 변화하고 있는데, 그것도 스스로의 필요도 있었겠지만, 각하의 그러한 확고한 외교정책의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고 했다.
 
  레이건은 “요즈음 공산권 내에서는 그 체제 가지고는 잘살 수 없다는 인식이 점증하고 있고, 동시에 전 세계적으로 민주화 바람이 일고 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한국이다. 다만 한국이 분단되어 북한 공산체제가 지속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다”라고 했다.
 
  노 대통령이 “한국을 위해 희생과 지원을 아끼지 않은 미국에 대해 이제부터는 응분의 보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하자, 레이건은 “그렇다. 우리는 함께 싸우고 함께 죽었다. 우리는 동맹국이자 우방이다”라고 화답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12월 4일 새벽 특별기가 미국의 시애틀 공항을 이륙하자 기자들을 불러 20분간 간담회를 가졌다. 질문은 거의가 5공 청산 문제였다. 대통령은 내키지 않는 대답을 해야 했다. 마지막에 그는 북방정책의 앞날을 전망했다.
 
  “북방정책의 출발은 올림픽이었어요. 올림픽 때 서울에 와 본 공산국가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20~30년 만에 이런 경제성장을 이룬 한국이야말로 모델 케이스다 해서, 결국 오늘의 헝가리, 폴란드, 유고 등과 이 같은 관계를 맺게 된 것입니다.
 
  우리 경제가 지금 노사분규, 환율문제 등으로 어려움이 많아요. 이와 관련하여 무슨 돌파구가 없겠는가 하고 생각해 보면 바로 북방정책이 그 돌파구가 될 수 있으리라고 느껴져요. 잘하면 북방정책을 통하여 우리 경제에 새로운 活力(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북방정책을 한국경제의 돌파구로 설정한 노 대통령의 대전략은 근사하게 성공했다. 1989년의 동구권 국가 수교, 1990년의 한·소 수교, 1991년의 유엔 남·북한 동시 가입, 그리고 1992년의 韓中(한·중) 수교. 한국인의 활동공간이 북한만 뺀 지구 전체로 넓어졌다. 특히 한·중 수교는 한국경제의 돌파구이자 생명줄이 됐다. 한·중 수교 17년 만에 한·중 무역액은 한·미, 한·일 무역액을 합친 것만큼 많아졌다.
 
 
  에필로그
 
  국내적으론 민주화의 소용돌이, 국제적으론 공산권 붕괴라는 二重(이중)의 전환기를 맞아 노태우 대통령이 국가대전략으로 추진한 북방정책의 혜택을 모든 한국인이 보고 있지만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는 매우 인색하다. 퇴임 후에 터진 비자금 사건 때문이다.
 
  1989년의 격변기에 노 대통령이 상대했던 지도자들의 운명도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콜 독일 총리는 16년간 재직한 뒤 1998년에 물러났고 2002년에 政界(정계)에서 은퇴했다. 그는 은퇴 전부터 기독교민주당의 비자금 사건에 휘말렸고 그 가운데 부인이 身病(신병)을 비관, 자살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말년에 치매로 고생하다가 죽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독일 통일 과정에서 양보를 많이 한 여파로 실각했다. 대처 총리는 독일 통일 직후 보수당 내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총리직에서 밀려났고, 지금은 치매를 앓고 있다. 미테랑은 퇴임한 지 1년 만에 암으로 죽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도 病床(병상)에 있는 날이 많다. 그에 대한 평가는 當代(당대)에선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레이건, 콜, 고르바초프, 대처, 미테랑이 모두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정치인으로 평가받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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