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계: 아서 밀러, 노먼 메일러
⊙ 클래식 음악계: 레너드 번스타인, 로린 마젤, 유진 오르만디, 다니엘 바렌보임,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 야샤 하이페츠, 이작 펄만 등
⊙ 대중음악계: 밥 딜런, 빌리 조엘, 사이먼&가펑클,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올리비아 뉴튼 존
⊙ 유니버설, 파라마운트, 20세기폭스, MGM, 워너브러더스, 컬럼비아, 미라맥스,
드림웍스 등 영화사 설립
⊙ 유대인 영화배우: 커크 더글러스, 피터 포크, 율 브리너, 폴 뉴먼, 더스틴 호프만, 해리슨 포드
朴宰善 홍익대 초빙교수
⊙ 1946년 충남 공주 출생.
⊙ 경기고·한양대 상학과 졸업. 프랑스 국제행정대학원 졸업.
⊙ 駐佛공사, 駐세네갈 대사, 외교통상부 구주국장, 駐보스턴 총영사, 駐모로코 대사,
美브랜다이스大 중동·유대연구소 객원교수 역임.
⊙ 저서: <세계사의 주역: 유대인> <제2의 가나안: 유대인의 미국>.
⊙ 상훈: 근정포장,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기사장, 프랑스 공로훈장 등.
⊙ 클래식 음악계: 레너드 번스타인, 로린 마젤, 유진 오르만디, 다니엘 바렌보임,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 야샤 하이페츠, 이작 펄만 등
⊙ 대중음악계: 밥 딜런, 빌리 조엘, 사이먼&가펑클,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올리비아 뉴튼 존
⊙ 유니버설, 파라마운트, 20세기폭스, MGM, 워너브러더스, 컬럼비아, 미라맥스,
드림웍스 등 영화사 설립
⊙ 유대인 영화배우: 커크 더글러스, 피터 포크, 율 브리너, 폴 뉴먼, 더스틴 호프만, 해리슨 포드
朴宰善 홍익대 초빙교수
⊙ 1946년 충남 공주 출생.
⊙ 경기고·한양대 상학과 졸업. 프랑스 국제행정대학원 졸업.
⊙ 駐佛공사, 駐세네갈 대사, 외교통상부 구주국장, 駐보스턴 총영사, 駐모로코 대사,
美브랜다이스大 중동·유대연구소 객원교수 역임.
⊙ 저서: <세계사의 주역: 유대인> <제2의 가나안: 유대인의 미국>.
⊙ 상훈: 근정포장,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기사장, 프랑스 공로훈장 등.
유대인은 창조성이 뛰어나다. 이는 유대교 經典(경전) <탈무드>의 영향 때문이다. 랍비(유대교 율법학자)의 토론과 분석을 편집한 탈무드는 종교적인 내용 외에도 지혜를 바탕으로 한 응용력을 제시한 생활지침서다. 그래서 탈무드는 2000년 동안 세계 각지로 離散(이산)한 유대인들에게는 舊約(구약)성서보다 더 중요한 경전이며 평생교육 자료다.
오늘날 全(전)세계 유대인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아시케나지 유대인(중·동유럽계 유대인)들에게 탈무드는 거의 독보적인 교육·신앙서로 인식되고 있다. 4세기에 걸쳐 유럽 각국의 ‘게토’(격리된 유대인 거주구역; 중·동구권에서는 ‘슈테틀’이라고 부름)에서 격리되어 살면서 일반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던 유대인들이 근대 이후 사상 철학 문학 문화 예술 등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탈무드 교육의 힘이다.
탈무드 교육은 유대인들의 논리적인 사고와 창조적 상상력을 배양했다. 이런 전통이 바탕이 되어 유대인 중 많은 사상가, 학자, 언론인, 문화·예술인들이 배출됐다.
문학계의 유대인들
미국은 독립 이후 한동안 광활한 국토를 개척하고 근대국가의 기본골격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이렇게 국가의 하드웨어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학술, 문화 예술 등의 소프트웨어는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됐고, 그 수준도 유럽에 비해 상당히 낮았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부터 미국에 정착한 독일계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보고 듣고 연구했던 학술, 문화 예술에 관한 단편적인 지식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의 와중에 미국에 이민 온 서구와 중·동구계 유대 지식인들도 미국의 각 분야에 진출하여 유럽의 문물을 미국에 전파하고 이를 미국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문학계에서는 <세일즈맨의 죽음>의 작가이자 배우 마릴린 먼로의 남편으로 유명한 아서 밀러, <裸者(나자)와 死者(사자)>의 작가 노먼 메일러 등이 유명하다.
클래식음악계의 유대인 거장들
20세기 이전까지는 미국에 클래식 음악이라는 것이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러시아와 동유럽 출신 음악인들이 19세기 말부터 대거 미국에 들어오면서 미국의 고전음악계가 활기를 띠게 됐다.
유럽에서 건너와 미국 고전음악의 제1세대를 이룬 유대인 작곡가들로는 스위스 태생의 에른스트 블록, 세르비아 출신의 루돌프 레티, 독일 출신의 쿠르트 베일, 러시아계 아론 코플랜드 등이 있다.
이들의 뒤를 이은 미국 태생의 유대인 작곡가들은 정통 클래식 음악과 대중음악을 가깝게 만든 이른바 ‘아메리칸 클래식’을 창조했다. 러시아계 유대인인 조지 거슈윈은 그의 대표작인 피아노 협주곡 ‘랩소디 인 블루’를 통해 접목이 어려워 보였던 클래식 음악과 재즈를 교묘하게 결합시켰다.
러시아계 유대인인 레너드 번스타인은 클래식과 뮤지컬을 넘나드는 작곡가 겸 지휘자로 명성을 날렸다. 번스타인이 작곡한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는 미국 뮤지컬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유대인들은 지휘자로도 미국의 클래식 음악계를 주름잡았다. 프랑스 태생으로 라벨, 베를리오즈 연주의 大家(대가)인 피에르 몽퇴, 독일 태생이며 바그너의 1인자인 오토 클렘페러, 독일계로 브람스 곡의 대가인 브루노 발터, 프랑스 태생의 지휘자 로린 마젤, 헝가리계 유대인인 아서 피들러, 조르지 스젤, 프리츠 라이너, 유진 오르만디, 게오르그 솔티, 안탈 도라티 등 유대인 名(명)지휘자들은 미국 주요 대도시의 교향악단을 하나씩 맡아 활약하고 있다.
이들은 고전음악을 접하지 못했던 미국 일반대중의 문화의식을 크게 일깨우는 한편,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에도 기여했다. 특히 보스턴 교향악단을 지휘한 아서 피들러는 클래식과 경음악의 경계를 허문 ‘크로스 오버(Crossover)’ 음악 개념을 처음 도입한 지휘자였다.
이들의 대를 이은 유대계 지휘자인 제임스 레바인, 레너드 슬랫킨, 안드레 프레빈,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마이클 틸슨 토마스 등도 ‘마에스트로’ 반열에 오른 인물들이다.
유대계 성악가들도 미국 고전음악 발전에 한몫을 했다. 비버리 실스, 레지나 레스닉, 로베르타 피터스 등은 소프라노로 명성을 날렸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테너 리처드 터커와 바리톤 레너드 워렌 등은 남성 성악가로 한 시절을 풍미했다.
기악 연주부문에는 더욱 많은 유대인 名人(명인)들이 있다. 피아노에는 우크라이나 태생의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폴란드 태생의 아서 루빈슈타인, 아르헨티나 태생의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 러시아 태생의 지휘자이며 피아니스트인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와 루마니아 태생의 라두 루푸 등이 있다.
바이올린을 위시한 현악기 연주는 유대인의 독무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프리츠 크라이슬러, 우크라이나 태생의 미샤 엘만·나탄 밀스타인·아이작 스턴, 우크라이나계의 에후디 메뉴힌, 리투아니아 태생의 야샤 하이페츠, 라트비아 태생의 기돈 크레머, 그리고 이스라엘 태생의 이작 펄만·핀커스 주커맨 등은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이다.
첼로에는 헝가리 태생의 야노스 스타커, 러시아 태생의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나탈리아 구트만, 라트비아 태생의 미샤 마이스키 등의 원로연주가와 아울러 최근 인기 절정인 이스라엘 태생의 오프라 하르노이 등이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키운 마이크 스톨러
필자는 2001년 9·11 테러사건 발생 당시 보스턴 총영사로 근무했다. 사건 이후 각종 추모행사에 자주 참석했는데, 이 행사 때마다 미국 國歌(국가) 다음으로 반드시 연주된 곡이 ‘신께서 미국을 축복하신다(God Bless America)’였다.
이 곡은 벨로루시 태생 유대인으로 19세기 말 미국에 정착한 어빙 벌린이 작곡했다. 벌린은 매년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듣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도 작곡했다. 벌린과 同(동)세대의 유대인 대중음악 작곡가로는 제롬 컨이 있었다.
1950~60년대의 로큰롤 시대에도 많은 유대인 작곡가들이 명성을 날렸다. 맥스 프리드맨은 가수 빌 헤일리가 부른 로큰롤의 고전 ‘록 어라운드 더 클락(Rock Around the Clock)’을 작곡했다. 이 곡은 1955년 미국의 대중음악 순위를 정하는 빌보드 차트에서 7주 동안 1위를 지켰다.
로큰롤 시대의 황제는 엘비스 프레슬리다. 무명 가수이던 그는 1957년 ‘제일하우스 록’이라는 공전의 히트곡으로 최고 인기가수 반열에 오른다. 이 곡을 작곡한 사람이 유대인 마이크 스톨러다. 스톨러는 동료 유대인 작곡가인 제리 라이버와 모트 슈만과 함께 이후 엘비스의 히트곡 거의 모두를 작곡했다.
‘오 캐롤’은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졌던 닐 세다카의 노래다. 유대인 닐 세다카는 클래식 피아노를 전공하다 대중음악 작곡가 겸 가수로 전향한다. 이후 세다카는 대성공을 거두어 본인의 후속곡인 ‘원 웨이 티켓’을 위시한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했다. 그는 1960년대의 인기 여가수인 카니 프랜시스 등 여러 가수에게도 곡을 주어 이들의 성공을 도왔다.
1960년대 말에는 미국에 월남전 反戰(반전)운동 열풍이 불었고, 이른바 염세적인 ‘히피’ 문화와 함께 포크 송 시대가 열렸다. 이 포크 송 시대를 선도한 주역은 폴란드계 유대인이며 작곡가 겸 가수인 밥 딜런(본명 로버트 짐머맨. 1978년 기독교로 개종)이었다. 딜런 외에도 필 옥스, 캐롤 킹, 닐 다이아몬드 등도 이 시대를 함께한 유대인 작곡가 겸 가수들이다. 1980~90년대에 들어와서는 빌리 조엘과 재니스 이안 등이 대표적인 대중음악 작곡가로 활약했다.
뮤지컬은 유대인들이 개척
뮤지컬은 유대계 작곡가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분야라고 할 만큼 이들의 참여가 컸다. 미국 뮤지컬의 始祖(시조) 격인 리처드 로저스는 콤비 작사가인 오스카 해머스타인과 함께 ‘오클라호마’ ‘회전목마’ ‘남태평양’ ‘왕과 나’ ‘사운드 오브 뮤직’ 등의 대작을 남겼다.
로저스 외에도 ‘스타 탄생’의 해롤드 알렌, ‘화니 걸’의 줄리우스 스턴, ‘지붕 위의 바이올린’의 제리 보크, 그리고 ‘코러스 라인’의 마빈 햄리시 등 유대인 작곡가들도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정수를 보여준 대가들이다.
재즈와 경음악 연주부문에서도 유대인들이 빠지지 않는다. 클라리넷의 명연주자인 베니 굿맨, 트럼펫의 대가인 지기 엘만과 해리 제임스, 드럼 연주가 버디 리치와 스탄 게츠, 데이브 브루벡, 아티 쇼 등은 스윙, 블루스, 모던재즈, 라틴재즈 등 분야에서 이름을 날렸다.
우리나라에서도 공연을 가진 적이 있는 현대 재즈의 명인 케니 G(본명: 케네스 골레릭)도 유대인이다. 그는 소프라노 색소폰의 대가로 재즈와 감미로운 경음악을 합친 ‘퓨전 재즈’라는 새로운 악풍을 만들었다.
1960~80년대에 멕시코풍의 경음악 연주로 이름을 날린 독일계 유대인 허브 앨퍼트는 그의 대표적인 연주곡인 ‘외로운 투우’로 우리나라에도 소개됐다. 싱얼롱(Sing-A-Long: 모두 같이 노래 따라 부르기) 음악을 이끈 유대인 지휘자 미치 밀러는 ‘콰이강의 다리’라는 영화 주제곡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미국 영화계에 유대인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는 관계로 영화음악에도 유대인 작곡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제곡을 작곡한 오스트리아 태생의 유대인 맥스 스타이너는 미국 영화음악의 泰斗(태두)다. 서부영화의 大作(대작) 중 하나인 ‘쉐인’과 ‘80일간의 세계일주’의 주제곡을 만든 사람은 유대인 빅터 영이다.
영화음악가로 가장 오랫동안 활동한 우크라이나 태생의 유대인 디미트리 티옴킨은 우리에게 친숙한 영화인 ‘하이 눈’ ‘자이언트’ ‘OK 목장의 결투’ ‘리오 브라보’ ‘알라모’, 그리고 ‘노인과 바다’ 등 할리우드 대작의 주제곡을 만들었다. 그 다음 세대로는 영화 ‘스팅’의 마빈 햄리시, ‘타이타닉’의 제임스 호너, ‘미션 임파서블‘의 랄로 시프런, 그리고 ‘배트맨’의 대니 엘프맨 등이 있다.
미국 대중가수의 시조는 알 욜슨이다. 리투아니아 태생의 유대인 욜슨은 ‘스와니’와 ‘생일의 노래’ 등으로 유명했다.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세 번째 남편인 유대인 에디 피셔는 ‘오 마이 파파’라는 감미로운 노래로 많은 여성 팬을 갖고 있었다.
이후에도 유대인 가수의 전통은 이어졌다. 닐 세다카, 스티브 로렌스, 레슬리 고어 등은 1960년대에, 밥 딜런, 칼리 사이몬, 레너드 코헨, 캐롤 킹, (폴)사이먼 앤 (아트)가펑클,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닐 다이아몬드, 배리 매닐로 등은 1970~80년대의 명가수들이다.
미국과 영국에서 가수와 연기자로 활동한 뒤 오랫동안 암과 투병한 올리비아 뉴튼 존은 외할아버지가 독일계 유대인으로 1954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막스 보른이다. 1980~90년대에는 시리아계 유대인인 폴라 압둘과 아울러 코트니 러브, 마이클 볼턴, 그리고 2008년 우리나라에 와서 공연한 빌리 조엘 등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유대인 가수들이다.
중·동유럽 출신 유대인들이 할리우드 帝國 건설
‘代父(대부)’ 등의 영화로 유명한 말론 브랜도는 생전에 유대인 문제로 두 차례 舌禍(설화)를 입은 적이 있었다. 1979년 1월 그는 “유대인이 지배하는 할리우드 영화계는 단 한번도 유대인이 非(비)호감으로 비치는 영화를 만들지 않는 이중적인 잣대를 갖고 있다”고 말해 미국 유대인 사회의 불만을 샀다.
1996년 4월에는 CNN 방송의 ‘래리 킹 라이브’(사회자 래리 킹은 유대인이다) 토크쇼에 출연하여 “MGM을 비롯한 할리우드 영화계는 유대인이 독점하고 있다”고 말해 유대인을 자극했다.
그가 한 말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세계적인 인기배우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유대인 문제를 거론해 미국 사회의 오랜 禁忌(금기)를 깼다는 점에서 당시 적지 않은 구설수를 낳았다.
브랜도만 유대인에게 불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매드 맥스’ ‘리셀 웨폰’ ‘브레이브 하트’ ‘컨스피러시’ 등으로 유명한 호주 배우 겸 감독인 멜 깁슨은 2008년 12월 음주운전을 하다 경찰에 적발되자 단속 경관에게 “당신도 유대인인가. 이 세상 모든 전쟁의 책임은 유대인에게 있다”라는 反(반)유대적 발언을 해서 물의를 일으켰다. 그가 감독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년)도 촬영 전부터 미국 유대단체로부터 반유대 정서가 깔려있는 영화라는 비판을 받았다.
촬영기와 영사기를 발명한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다. 1895년 최초의 ‘활동사진’을 만든 사람도 유대인이 아닌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다. 그러나 영화를 20세기 이후 독보적인 오락 예술산업으로 발전시킨 초기 공로자는 불과 10명도 안되는 중·동구 출신 유대인들이다. 할리우드 왕국을 창건한 이들 대부분은 모두 영화나 문화예술과 관련한 기본적인 교육을 전혀 받은 적이 없는 의류, 모피, 세탁소 등 自營商(자영상) 출신이었다.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원조는 1912년에 세워진 유니버설 영화사다. 이 회사 설립자인 칼 래믈은 1867년 독일 라우파임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그는 17세가 되던 1884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별다른 학력이 없었던 그는 20년 동안 시카고, 보스턴 등지에서 의류장사를 하다 1912년 모피상인 마커스 로와 동업으로 유니버설 영화사를 설립했다.
유니버설은 세실 B 데밀과 같은 당대의 탁월한 유대인 감독을 기용해 ‘삼손과 데릴라’ 등 유대색 짙은 대작을 만들어 흥행에 성공했다.
유니버설은 1962년 유대인 줄리어스 스턴이 1925년에 설립한 음반회사 DECCA-MCA와 통합됐다. 그 후 유대인인 루 웨서맨 회장과 시드니 샤인버그 사장 팀의 활약으로 계속 번창했다. 유니버설은 그 후 일본 마쓰시타(松下) 그룹에 인수되는 등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으나 1995년 캐나다 유대계 酒類(주류)재벌 시그램 그룹에 넘어가 한동안 운영되었다. 현재 유니버설은 제너럴 일렉트릭(GE), 프랑스의 비벤디 그룹, 그리고 TV 방송사 NBC 등의 합작 형태로 운영되지만 CEO는 유대인 로널드 메이어다.
7대 메이저 영화사 가운데 6개를 유대인이 설립
아돌프 주커는 헝가리의 포도주 산지인 리세에서 태어나 早失父母(조실부모)하고 16세 되던 해인 1889년 미국으로 이민 왔다. 그는 의류상을 하다 1914년 유대인 친구인 제시 래스키와 동업으로 파라마운트영화사를 설립했다. 파라마운트사는 1966년 유대인 기업 걸프 웨스턴그룹에 흡수됐다가 1994년 이후에는 유대계 미디어기업인 바이아컴그룹 중심의 컨소시엄에 통합됐다.
헝가리 톨츠바에서 1879년에 태어난 유대인 빌모스 푹스는 생후 9개월이 되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왔다. 제대로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푹스는 한동안 세탁소를 경영하면서 이름을 윌리엄 폭스로 바꾸었다. 망한 극장을 떠맡으면서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폭스는 1915년 폭스영화사를 설립했다. 1935년 폭스사는 ‘20세기 영화사’와 합쳐져 ‘20세기 폭스’사로 재출발했다.
폭스는 이기적인 영업방식으로 동료 유대인 영화인과도 사이가 좋지 못했으며 불공정 독점행위로 고발당하기도 했다. 폭스가 1952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유대인 영화제작자가 단 한 명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폭스사는 유대인 제작자인 대릴 자눅과 석유부호 마빈 데이비스 등에 의해 운영되다 1985년 ‘미디어의 제왕’ 루퍼트 머독의 뉴스코퍼레이션에 통합됐다.
루이스 메이어(본명: 라자르 메이르)는 벨로루시 민스크 태생으로 캐나다를 거쳐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허드레 자영상을 하던 그는 1922년 폴란드 태생의 유대인 사무엘 골드윈과 동업으로 영화사 MGM(Metro-Goldwyn-Mayer)을 설립했다. 메이어는 독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일에는 열정적이어서 짧은 시간에 MGM을 대형 영화사로 키웠다. MGM은 당대 최고의 희극배우인 찰리 채플린 영화의 연속적인 흥행 성공으로 한때는 전 세계 영화제작 시장의 60%를 차지했다.
1969년 MGM은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와 호텔업의 거물인 아르메니아계 실업인 커크 커코리안에게 넘어갔다. 오늘날 MGM은 유대계 금융, 부동산 자본과 소니 아메리카의 합작회사인 MGM 홀딩의 산하기업으로 운영되고 있다.
1881년 러시아와 폴란드 국경지역에서 태어난 유대인 히르시 원살은 1889년 볼티모어로 이주했다. 볼티모어에서 구두 수선소를 차린 원살은 이름을 해리 워너로 바꾸었다. 이후 워너는 모피장수, 극장주 등의 직업을 전전하다 1925년 3명의 형제들과 함께 워너브러더스 영화사를 설립했다. 워너는 1950년대에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스타 탄생’ ‘자이언트’, 그리고 ‘이유 없는 반항’ 등의 영화의 대성공으로 社勢(사세)를 키웠다. 워너는 1989년 유대 기업인 타임-워너그룹으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91년 뉴욕서 독일계 유대 가정에서 태어난 해리 콘은 전차기사, 음반제작사, 프린트공 등으로 일하다 1924년 동생 잭과 함께 CBS 영화사를 설립했다. CBS는 몇 년 후 컬럼비아영화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컬럼비아사는 1982년 코카콜라로 넘어갔다가 1989년 일본 소니에 인수되면서 컬럼비아-트라이스타로 개칭됐다.
미국에는 50여 개의 크고 작은 영화사가 있다. 그중에서 유니버설, 파라마운트, MGM, 폭스, 워너, 컬럼비아, 디즈니를 7대 메이저라고 부른다. 이 가운데 만화영화로 시작해서 성장한 디즈니를 제외한 6개의 영화사는 모두 유대인이 설립했고, 오늘날까지 유대인의 참여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디즈니도 설립자인 월트 디즈니가 세상을 떠난 후 경영권이 한때 유대인 CEO 마이클 아이스너에게 넘어간 적이 있었다.
위에서 열거한 메이저 외에도 유대인이 만든 신흥 영화사가 있다. 미라맥스는 독일계 유대인 하비 와인스타인이 1979년에 설립한 영화사다. 이 회사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와 ‘펄프 픽션’ 등의 성공으로 한동안 새로운 메이저급 영화사로 대접받았다. 2005년 설립자인 와인버그가 은퇴한 후 미라맥스는 디즈니그룹에 통합됐다.
미라맥스와 함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드림웍스SKG는 1994년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제작자 제프리 카첸버그, 그리고 연예흥행사 데이비드 게펜 등 유대인 세 명이 설립한 회사로 제작과 배급을 겸하고 있다. 이들은 영화제작과 감독 그리고 흥행 전문가들이 모여 만든 기업이라는 장점을 활용하여 수많은 히트작을 선보였다. ‘아미스타드’ ‘글래디에이터’ ‘슈렉’ ‘마이너리티 리포트’ ‘뮌헨’ 등이 유명하다.
‘미스터 블록버스터’ 제리 브룩하이머
우리나라에서도 방영되고 있는 인기 ‘미드’(미국 TV 드라마) 중 하나인 과학수사극 CSI(과학수사대) 시리즈는 전 세계에서 공전의 히트를 친 TV극이다. CSI뿐 아니라 손대는 영화나 TV극마다 대성공을 거두는 미국 유대인 영화제작자가 1945년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난 독일계 유대인 제리(제롬) 브룩하이머다.
대학 졸업 후 펩시콜라 광고제작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리처드 기어 주연의 ‘아메리칸 지골로’(1980)와 나스타샤 킨스키가 주연한 ‘캣 피플’(1982), 여배우 제니퍼 빌스를 스타로 만들어준 ‘플래시 댄스’(1983) 등이 잇달아 성공하면서 영화감독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 후 그가 제작해 성공을 거둔 영화는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탑 건’ ‘베벌리힐스 캅’시리즈, ‘더 록’ ‘블랙 호크다운’ ‘크림슨 타이드’ ‘콘 에어’ ‘펄 하버’ ‘아마겟돈’ ‘캐리비안의 해적’시리즈, ‘배드 보이즈’시리즈, ‘킹 아서’ ‘데자 뷰’ ‘내셔널 트래져’시리즈 등. ‘탑 건’의 톰 크루즈, ‘베벌리힐스 컵’ 시리즈의 흑인배우 에디 머피, 그리고 ‘더 록’의 니컬러스 케이지는 브룩하이머에 의해 대스타로 성장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브룩하이머가 제작한 TV극으로는 ‘저스티스’, ‘CSI’ 3개(라스베이거스, 뉴욕, 마이애미) 시리즈, ‘위드아웃 어 트레이스’ 등이 유명하다. 현재 CBS TV에서 ‘열한 번째 시간’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2003년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위클리誌(지)는 브룩하이머를 ‘할리우드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는 인물’로 꼽았다. 2007년 브룩하이머는 포브스지 선정 ‘세계의 100대 부자’ 중 39위에 올랐다. 교육기관 등에 열성적으로 기부를 하는 것으로도 유명한 그는 많은 미국 유대인들과는 달리 親(친)공화당 성향을 보이고 있다.
유대인 영화감독들
한 영화의 성패는 배우의 연기력보다는 기획, 제작, 시나리오, 음악, 영상, 감독 등 제작진의 기량에 의해 좌우된다. 보통 예술인은 자유분방한 기질과 자신의 재능에 대한 자만심으로 인해 협동정신이 부족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재주가 있으면서도 협동심이 강해 영화를 만드는 데 효과적이라고 한다.
사실 할리우드의 기획제작자, 감독, 캐스팅, 시나리오 작가, 음악담당과 아울러 극장주, 배급자의 대다수가 유대인이므로 이들이 한 팀이 되어 작품을 만들고 흥행에도 성공할 수 있는 좋은 터전을 갖추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할리우드 영화계는 서유럽의 프랑스나 이탈리아 영화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戰後(전후) 빌리 와일더, 엘리아 카잔, 에드워드 드미트릭, 오토 프레밍거, 윌리엄 와일러, 프레드 지네만, 조지프 맨키비츠, 조슈아 로건, 안소니 맨, 아서 펜 등 유능한 유대인 영화감독들이 맹활약을 펼치면서 1950년대부터는 할리우드가 세계영화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하이 눈’(1952) ‘사브리나’(1954) ‘맨발의 백작부인’(1954) ‘에덴의 동쪽’(1955) ‘쉐인’(1955) ‘피크닉’(1956) ‘남태평양’(1958) ‘벤허’(1959)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1959) ‘엑소더스’(1961) ‘사운드 오브 뮤직’(1964) 등 수많은 명작들을 쏟아냈다.
이후 제2~3세대 유대인 명감독들이 나타나 선배들의 맥을 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시드니 폴락, 밀로스 포르만, 밥 포스, 마이크 니콜스, 스탠리 큐브릭, 시드니 루멧, 우디 앨런, 올리버 스톤(불교도로 개종) 등이 그들이다. ‘인디애나 존스’ ‘ET’ ‘맨해튼’ ‘뻐꾸기 지붕 위를 날다’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살인사건’ ‘졸업’ ‘카바레’ ‘쥐라기 공원’ ‘JFK’, ‘플래툰’ ‘쉰들러 리스트’ ‘배리 린든’ ‘아미스타드’ ‘라이언 일병 구하기’ 등이 이들의 작품이다.
미국 영화의 신세대 감독 중에도 유대계가 많다. ‘밀러스 크로싱’과 ‘파르고’의 조엘과 이산 코엔 형제, ‘미션 임파서블 III’ ‘스타트렉’의 J.J 에이브람스, 추리극 ‘유주얼 서스펙츠’ ‘엑스 멘’ 그리고 올 초 국내서 개봉된 ‘작전명 발키리’를 감독한 브라이언 싱어 등이 유명하다.
유대인 영화배우들
유대인 영화배우들도 넘쳐나지만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들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율리시스’ ‘OK 목장의 결투’ ‘스파르타쿠스’ 등으로 유명한 커크 더글러스는 러시아계 유대인이다, ‘형사 콜롬보’의 피터 포크(러시아계), ‘왕과 나’의 율 브리너(러시아/몽골/스위스계), ‘키 라르고’의 로렌 바콜(루마니아계), ‘바이킹’의 토니 커티스(헝가리 계), ‘스팅’의 폴 뉴먼(독일계) 등은 노장층을 대표하는 유대인 배우들이다.
TV 시리즈 ‘스타트랙’의 레너드 니모이, ‘미션 임파서블’의 마틴 랜도, ‘보난자’의 론 그린, 그리고 영화 ‘붉은 옷의 여인’의 진 와일더, ‘졸업’의 더스틴 호프만, ‘다이아몬드는 영원히’의 질 세인트 존, ‘인디애나 존스’의 해리슨 포드, ‘한 미혼여성’의 질 클레이버그, ‘원초적 본능’의 마이클 더글러스, ‘모히칸의 최후’의 다니엘 데이루이스, ‘언더시즈’의 스티븐 시걸, ‘조스’의 리처드 드레퓌스 등은 그 다음 세대를 대표하는 유대인 배우들이다.
제임스 칸, 골디 혼, 케빈 클라인, 대릴 해나, 빌리 크리스탈, 데브라 윙거, 미미 로저스, 제인 세이무어, 로잔나 아르켓, 엘렌 바킨, 벤 스틸러, 사라 제시카 파커, 숀 펜, 헬렌 헌트, 데이비드 듀초브니, 네브 캠벨, 행크 아자리아, 지나 거션, 제나 엘프맨과 위노나 라이더 등은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는 유대계 중견 연기자들이다.
신세대 유대인 배우로는 기네스 팰트로, 사라 미셀 젤러, 케이트 헛슨, 애덤 샌들러, 제니퍼 코널리, 앨리시아 실버스톤, 에이드리언 브로디, 나탈리 포트만, 그리고 스칼렛 요한슨 등이 있다.
유대인들은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즉 홀로코스트에 대해 씻지 못할 恨(한)을 품고 있다. 그래서 할리우드의 유대계 제작자와 감독들은 거의 매년 한편 꼴로 홀로코스트 관련 영화를 만들어 이 역사적 비극을 상기시키고 있다.
1945년 이후 홀로코스트나 독일 나치를 소재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지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총 104편이다. 이 중 미국서 제작된 것만 72편이다. ‘안네프랑크의 일기’(1959) ‘엑소더스’(1960) ‘뉘른베르크의 재판’(1961) ‘카바레’(1972) ‘오데사파일’(1974) ‘마라톤 맨’(1976) ‘홀로코스트’(TV 극:1978) ‘인디애나 존스’1편(1981) ‘소피의 선택’(1982) ‘뮤직 박스’(1989) ‘쉰들러 리스트’(1993) ‘인생은 아름다워’(1997) ‘아트 퓨필’(1998) ‘제이콥 더 라이어’(1999) ‘컨스피러시’(TV극: 2001) ‘피아니스트’(2002) ‘디파이언스’(2008) ‘작전명 발키리’(2008), 그리고 얼마 전 오스카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더 리더’ 등이 홀로코스트나 나치 독일을 다룬 영화다.
영화를 통해 홀로코스트를 聖域化
인류역사상 수많은 대량학살이 있었다. 나치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약 1500만명의 슬라브인 군인과 민간인을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죽였다. 50만명의 유럽 집시(로마니)도 몰살당했다. 80만명의 동성애자, 정신병자, 장애자, 프리메이슨,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도 희생됐다.
그밖에도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인디언 학살, 1919년 오스만 투르크의 아르메니아인 150만명 학살, 일본의 난징(南京) 대학살, 캄보디아 킬링필드, 르완다·부룬디에서의 학살, 그리고 유고 내전 중의 인종청소 등 수많은 대량학살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 사건 가운데 그 어느 것도 홀로코스트처럼 저술과 영화 등을 통해 끊임없이 상기되고,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홀로코스트를 부정적으로 말하거나 책 등 출판물을 통해 비판하는 사람은 ‘神聖冒瀆罪(신성모독죄)’에 버금가는 죄를 저지른 범죄자로 몰려 사회에서 매장된다. 이제 홀로코스트는 모든 교육과정과 영화 등 영상물을 통해 거의 종교적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2000년 미국 시카고 드폴대학의 노먼 핀켈슈타인 교수는 ‘홀로코스트 산업’이라는 책을 발간해 홀로코스트를 상업화한 유대인들을 비난했다. 핀켈슈타인은 폴란드계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그의 어머니는 나치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홀로코스트의 산 증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미국의 主流(주류) 유대인들의 행태, 특히 中東(중동)문제에 관해 미국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데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20여 권의 저서를 통해 홀로코스트 賠償(배상)과 관련한 非理(비리)나 이스라엘의 중동정책 등에 대해 비판해 왔다. 때문에 그는 미국 주류 유대인 사회로부터 이단취급을 받았다. ‘홀로코스트 산업’이 출간된 후 그는 대학에서 축출됐다. 2008년 이스라엘 정부는 핀켈슈타인을 ‘反(반)시온주의자’로 낙인 찍어 10년간 이스라엘 입국을 금지했다.
할리우드 영화와 反유대주의
할리우드 영화 가운데 내용이 문제가 되어 반유대주의의 표적이 된 경우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88년에 개봉된 윌렘 대포 주연의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이다. 당시 전 세계 가톨릭 단체는 이 영화에 대해 “예수를 비하하는 할리우드의 쓰레기 유대문화”라고 비난했다. 사실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는 개신교 신자인 폴 슈레이더였고, 감독은 가톨릭 신도인 마틴 스코세지였지만, 이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한 영화사가 유대인이 설립하고 운영하는 유니버설사였다는 점이 가톨릭 단체를 자극한 듯하다.
미국 공화당의 보수정치인인 패트릭 뷰캐넌은 1995년 ABC-TV ‘나이트 라인’ 프로에 출연해서 “할리우드의 유대 마피아가 기독교인의 가치관을 좀먹고 있다”고 비난했다.
미국영화 중에는 간혹 가톨릭 성직자나 개신교 목회자가 부정적으로 그려진 경우는 있지만, 유대교 성직자인 랍비를 부정적으로 그린 영화는 없다. 필자도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유대인이 다소나마 부정적으로 그려진 영화는 1992년에 나온 유대인 감독 시드니 루멧이 만든 ‘우리 중의 낯선 사람’이라는 영화 한 편뿐이었다.
오늘날에도 할리우드 영화계는 유대계의 활약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관객이 조금이라도 싫증난 눈치를 보이면 즉각 새로운 소재를 개발해서 순발력 있게 대응하는 유대계 영화인들의 창의성과 상업성은 아무도 따라갈 수 없는 듯하다.⊙
오늘날 全(전)세계 유대인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아시케나지 유대인(중·동유럽계 유대인)들에게 탈무드는 거의 독보적인 교육·신앙서로 인식되고 있다. 4세기에 걸쳐 유럽 각국의 ‘게토’(격리된 유대인 거주구역; 중·동구권에서는 ‘슈테틀’이라고 부름)에서 격리되어 살면서 일반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던 유대인들이 근대 이후 사상 철학 문학 문화 예술 등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탈무드 교육의 힘이다.
탈무드 교육은 유대인들의 논리적인 사고와 창조적 상상력을 배양했다. 이런 전통이 바탕이 되어 유대인 중 많은 사상가, 학자, 언론인, 문화·예술인들이 배출됐다.
문학계의 유대인들
미국은 독립 이후 한동안 광활한 국토를 개척하고 근대국가의 기본골격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이렇게 국가의 하드웨어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학술, 문화 예술 등의 소프트웨어는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됐고, 그 수준도 유럽에 비해 상당히 낮았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부터 미국에 정착한 독일계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보고 듣고 연구했던 학술, 문화 예술에 관한 단편적인 지식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의 와중에 미국에 이민 온 서구와 중·동구계 유대 지식인들도 미국의 각 분야에 진출하여 유럽의 문물을 미국에 전파하고 이를 미국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문학계에서는 <세일즈맨의 죽음>의 작가이자 배우 마릴린 먼로의 남편으로 유명한 아서 밀러, <裸者(나자)와 死者(사자)>의 작가 노먼 메일러 등이 유명하다.
클래식음악계의 유대인 거장들
20세기 이전까지는 미국에 클래식 음악이라는 것이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러시아와 동유럽 출신 음악인들이 19세기 말부터 대거 미국에 들어오면서 미국의 고전음악계가 활기를 띠게 됐다.
유럽에서 건너와 미국 고전음악의 제1세대를 이룬 유대인 작곡가들로는 스위스 태생의 에른스트 블록, 세르비아 출신의 루돌프 레티, 독일 출신의 쿠르트 베일, 러시아계 아론 코플랜드 등이 있다.
이들의 뒤를 이은 미국 태생의 유대인 작곡가들은 정통 클래식 음악과 대중음악을 가깝게 만든 이른바 ‘아메리칸 클래식’을 창조했다. 러시아계 유대인인 조지 거슈윈은 그의 대표작인 피아노 협주곡 ‘랩소디 인 블루’를 통해 접목이 어려워 보였던 클래식 음악과 재즈를 교묘하게 결합시켰다.
러시아계 유대인인 레너드 번스타인은 클래식과 뮤지컬을 넘나드는 작곡가 겸 지휘자로 명성을 날렸다. 번스타인이 작곡한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는 미국 뮤지컬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유대인들은 지휘자로도 미국의 클래식 음악계를 주름잡았다. 프랑스 태생으로 라벨, 베를리오즈 연주의 大家(대가)인 피에르 몽퇴, 독일 태생이며 바그너의 1인자인 오토 클렘페러, 독일계로 브람스 곡의 대가인 브루노 발터, 프랑스 태생의 지휘자 로린 마젤, 헝가리계 유대인인 아서 피들러, 조르지 스젤, 프리츠 라이너, 유진 오르만디, 게오르그 솔티, 안탈 도라티 등 유대인 名(명)지휘자들은 미국 주요 대도시의 교향악단을 하나씩 맡아 활약하고 있다.
이들은 고전음악을 접하지 못했던 미국 일반대중의 문화의식을 크게 일깨우는 한편,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에도 기여했다. 특히 보스턴 교향악단을 지휘한 아서 피들러는 클래식과 경음악의 경계를 허문 ‘크로스 오버(Crossover)’ 음악 개념을 처음 도입한 지휘자였다.
이들의 대를 이은 유대계 지휘자인 제임스 레바인, 레너드 슬랫킨, 안드레 프레빈,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마이클 틸슨 토마스 등도 ‘마에스트로’ 반열에 오른 인물들이다.
유대계 성악가들도 미국 고전음악 발전에 한몫을 했다. 비버리 실스, 레지나 레스닉, 로베르타 피터스 등은 소프라노로 명성을 날렸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테너 리처드 터커와 바리톤 레너드 워렌 등은 남성 성악가로 한 시절을 풍미했다.
기악 연주부문에는 더욱 많은 유대인 名人(명인)들이 있다. 피아노에는 우크라이나 태생의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폴란드 태생의 아서 루빈슈타인, 아르헨티나 태생의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 러시아 태생의 지휘자이며 피아니스트인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와 루마니아 태생의 라두 루푸 등이 있다.
바이올린을 위시한 현악기 연주는 유대인의 독무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프리츠 크라이슬러, 우크라이나 태생의 미샤 엘만·나탄 밀스타인·아이작 스턴, 우크라이나계의 에후디 메뉴힌, 리투아니아 태생의 야샤 하이페츠, 라트비아 태생의 기돈 크레머, 그리고 이스라엘 태생의 이작 펄만·핀커스 주커맨 등은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이다.
첼로에는 헝가리 태생의 야노스 스타커, 러시아 태생의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나탈리아 구트만, 라트비아 태생의 미샤 마이스키 등의 원로연주가와 아울러 최근 인기 절정인 이스라엘 태생의 오프라 하르노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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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다니엘 바렌보임,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 아서 루빈슈타인 (왼쪽부터). |
엘비스 프레슬리를 키운 마이크 스톨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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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 프레슬리를 스타로 만든 마이크 스톨러(왼쪽)과 제리 라이버. |
이 곡은 벨로루시 태생 유대인으로 19세기 말 미국에 정착한 어빙 벌린이 작곡했다. 벌린은 매년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듣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도 작곡했다. 벌린과 同(동)세대의 유대인 대중음악 작곡가로는 제롬 컨이 있었다.
1950~60년대의 로큰롤 시대에도 많은 유대인 작곡가들이 명성을 날렸다. 맥스 프리드맨은 가수 빌 헤일리가 부른 로큰롤의 고전 ‘록 어라운드 더 클락(Rock Around the Clock)’을 작곡했다. 이 곡은 1955년 미국의 대중음악 순위를 정하는 빌보드 차트에서 7주 동안 1위를 지켰다.
로큰롤 시대의 황제는 엘비스 프레슬리다. 무명 가수이던 그는 1957년 ‘제일하우스 록’이라는 공전의 히트곡으로 최고 인기가수 반열에 오른다. 이 곡을 작곡한 사람이 유대인 마이크 스톨러다. 스톨러는 동료 유대인 작곡가인 제리 라이버와 모트 슈만과 함께 이후 엘비스의 히트곡 거의 모두를 작곡했다.
‘오 캐롤’은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졌던 닐 세다카의 노래다. 유대인 닐 세다카는 클래식 피아노를 전공하다 대중음악 작곡가 겸 가수로 전향한다. 이후 세다카는 대성공을 거두어 본인의 후속곡인 ‘원 웨이 티켓’을 위시한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했다. 그는 1960년대의 인기 여가수인 카니 프랜시스 등 여러 가수에게도 곡을 주어 이들의 성공을 도왔다.
1960년대 말에는 미국에 월남전 反戰(반전)운동 열풍이 불었고, 이른바 염세적인 ‘히피’ 문화와 함께 포크 송 시대가 열렸다. 이 포크 송 시대를 선도한 주역은 폴란드계 유대인이며 작곡가 겸 가수인 밥 딜런(본명 로버트 짐머맨. 1978년 기독교로 개종)이었다. 딜런 외에도 필 옥스, 캐롤 킹, 닐 다이아몬드 등도 이 시대를 함께한 유대인 작곡가 겸 가수들이다. 1980~90년대에 들어와서는 빌리 조엘과 재니스 이안 등이 대표적인 대중음악 작곡가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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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음악가 : 밥 딜런, 닐 다이아몬드, 빌리 조엘 (왼쪽부터). |
뮤지컬은 유대계 작곡가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분야라고 할 만큼 이들의 참여가 컸다. 미국 뮤지컬의 始祖(시조) 격인 리처드 로저스는 콤비 작사가인 오스카 해머스타인과 함께 ‘오클라호마’ ‘회전목마’ ‘남태평양’ ‘왕과 나’ ‘사운드 오브 뮤직’ 등의 대작을 남겼다.
로저스 외에도 ‘스타 탄생’의 해롤드 알렌, ‘화니 걸’의 줄리우스 스턴, ‘지붕 위의 바이올린’의 제리 보크, 그리고 ‘코러스 라인’의 마빈 햄리시 등 유대인 작곡가들도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정수를 보여준 대가들이다.
재즈와 경음악 연주부문에서도 유대인들이 빠지지 않는다. 클라리넷의 명연주자인 베니 굿맨, 트럼펫의 대가인 지기 엘만과 해리 제임스, 드럼 연주가 버디 리치와 스탄 게츠, 데이브 브루벡, 아티 쇼 등은 스윙, 블루스, 모던재즈, 라틴재즈 등 분야에서 이름을 날렸다.
우리나라에서도 공연을 가진 적이 있는 현대 재즈의 명인 케니 G(본명: 케네스 골레릭)도 유대인이다. 그는 소프라노 색소폰의 대가로 재즈와 감미로운 경음악을 합친 ‘퓨전 재즈’라는 새로운 악풍을 만들었다.
1960~80년대에 멕시코풍의 경음악 연주로 이름을 날린 독일계 유대인 허브 앨퍼트는 그의 대표적인 연주곡인 ‘외로운 투우’로 우리나라에도 소개됐다. 싱얼롱(Sing-A-Long: 모두 같이 노래 따라 부르기) 음악을 이끈 유대인 지휘자 미치 밀러는 ‘콰이강의 다리’라는 영화 주제곡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미국 영화계에 유대인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는 관계로 영화음악에도 유대인 작곡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제곡을 작곡한 오스트리아 태생의 유대인 맥스 스타이너는 미국 영화음악의 泰斗(태두)다. 서부영화의 大作(대작) 중 하나인 ‘쉐인’과 ‘80일간의 세계일주’의 주제곡을 만든 사람은 유대인 빅터 영이다.
영화음악가로 가장 오랫동안 활동한 우크라이나 태생의 유대인 디미트리 티옴킨은 우리에게 친숙한 영화인 ‘하이 눈’ ‘자이언트’ ‘OK 목장의 결투’ ‘리오 브라보’ ‘알라모’, 그리고 ‘노인과 바다’ 등 할리우드 대작의 주제곡을 만들었다. 그 다음 세대로는 영화 ‘스팅’의 마빈 햄리시, ‘타이타닉’의 제임스 호너, ‘미션 임파서블‘의 랄로 시프런, 그리고 ‘배트맨’의 대니 엘프맨 등이 있다.
미국 대중가수의 시조는 알 욜슨이다. 리투아니아 태생의 유대인 욜슨은 ‘스와니’와 ‘생일의 노래’ 등으로 유명했다.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세 번째 남편인 유대인 에디 피셔는 ‘오 마이 파파’라는 감미로운 노래로 많은 여성 팬을 갖고 있었다.
이후에도 유대인 가수의 전통은 이어졌다. 닐 세다카, 스티브 로렌스, 레슬리 고어 등은 1960년대에, 밥 딜런, 칼리 사이몬, 레너드 코헨, 캐롤 킹, (폴)사이먼 앤 (아트)가펑클,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닐 다이아몬드, 배리 매닐로 등은 1970~80년대의 명가수들이다.
미국과 영국에서 가수와 연기자로 활동한 뒤 오랫동안 암과 투병한 올리비아 뉴튼 존은 외할아버지가 독일계 유대인으로 1954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막스 보른이다. 1980~90년대에는 시리아계 유대인인 폴라 압둘과 아울러 코트니 러브, 마이클 볼턴, 그리고 2008년 우리나라에 와서 공연한 빌리 조엘 등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유대인 가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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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수 : 닐 세다카, 사이먼&가펑클,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올리비아 뉴튼존 (왼쪽부터). |
중·동유럽 출신 유대인들이 할리우드 帝國 건설
‘代父(대부)’ 등의 영화로 유명한 말론 브랜도는 생전에 유대인 문제로 두 차례 舌禍(설화)를 입은 적이 있었다. 1979년 1월 그는 “유대인이 지배하는 할리우드 영화계는 단 한번도 유대인이 非(비)호감으로 비치는 영화를 만들지 않는 이중적인 잣대를 갖고 있다”고 말해 미국 유대인 사회의 불만을 샀다.
1996년 4월에는 CNN 방송의 ‘래리 킹 라이브’(사회자 래리 킹은 유대인이다) 토크쇼에 출연하여 “MGM을 비롯한 할리우드 영화계는 유대인이 독점하고 있다”고 말해 유대인을 자극했다.
그가 한 말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세계적인 인기배우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유대인 문제를 거론해 미국 사회의 오랜 禁忌(금기)를 깼다는 점에서 당시 적지 않은 구설수를 낳았다.
브랜도만 유대인에게 불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매드 맥스’ ‘리셀 웨폰’ ‘브레이브 하트’ ‘컨스피러시’ 등으로 유명한 호주 배우 겸 감독인 멜 깁슨은 2008년 12월 음주운전을 하다 경찰에 적발되자 단속 경관에게 “당신도 유대인인가. 이 세상 모든 전쟁의 책임은 유대인에게 있다”라는 反(반)유대적 발언을 해서 물의를 일으켰다. 그가 감독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년)도 촬영 전부터 미국 유대단체로부터 반유대 정서가 깔려있는 영화라는 비판을 받았다.
촬영기와 영사기를 발명한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다. 1895년 최초의 ‘활동사진’을 만든 사람도 유대인이 아닌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다. 그러나 영화를 20세기 이후 독보적인 오락 예술산업으로 발전시킨 초기 공로자는 불과 10명도 안되는 중·동구 출신 유대인들이다. 할리우드 왕국을 창건한 이들 대부분은 모두 영화나 문화예술과 관련한 기본적인 교육을 전혀 받은 적이 없는 의류, 모피, 세탁소 등 自營商(자영상) 출신이었다.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원조는 1912년에 세워진 유니버설 영화사다. 이 회사 설립자인 칼 래믈은 1867년 독일 라우파임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그는 17세가 되던 1884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별다른 학력이 없었던 그는 20년 동안 시카고, 보스턴 등지에서 의류장사를 하다 1912년 모피상인 마커스 로와 동업으로 유니버설 영화사를 설립했다.
유니버설은 세실 B 데밀과 같은 당대의 탁월한 유대인 감독을 기용해 ‘삼손과 데릴라’ 등 유대색 짙은 대작을 만들어 흥행에 성공했다.
유니버설은 1962년 유대인 줄리어스 스턴이 1925년에 설립한 음반회사 DECCA-MCA와 통합됐다. 그 후 유대인인 루 웨서맨 회장과 시드니 샤인버그 사장 팀의 활약으로 계속 번창했다. 유니버설은 그 후 일본 마쓰시타(松下) 그룹에 인수되는 등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으나 1995년 캐나다 유대계 酒類(주류)재벌 시그램 그룹에 넘어가 한동안 운영되었다. 현재 유니버설은 제너럴 일렉트릭(GE), 프랑스의 비벤디 그룹, 그리고 TV 방송사 NBC 등의 합작 형태로 운영되지만 CEO는 유대인 로널드 메이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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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제국을 건설한 유대인들. 왼쪽부터 칼 래믈(유니버설), 윌리엄 폭스(20세기 폭스), 루이스 메이어(MGM). |
아돌프 주커는 헝가리의 포도주 산지인 리세에서 태어나 早失父母(조실부모)하고 16세 되던 해인 1889년 미국으로 이민 왔다. 그는 의류상을 하다 1914년 유대인 친구인 제시 래스키와 동업으로 파라마운트영화사를 설립했다. 파라마운트사는 1966년 유대인 기업 걸프 웨스턴그룹에 흡수됐다가 1994년 이후에는 유대계 미디어기업인 바이아컴그룹 중심의 컨소시엄에 통합됐다.
헝가리 톨츠바에서 1879년에 태어난 유대인 빌모스 푹스는 생후 9개월이 되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왔다. 제대로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푹스는 한동안 세탁소를 경영하면서 이름을 윌리엄 폭스로 바꾸었다. 망한 극장을 떠맡으면서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폭스는 1915년 폭스영화사를 설립했다. 1935년 폭스사는 ‘20세기 영화사’와 합쳐져 ‘20세기 폭스’사로 재출발했다.
폭스는 이기적인 영업방식으로 동료 유대인 영화인과도 사이가 좋지 못했으며 불공정 독점행위로 고발당하기도 했다. 폭스가 1952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유대인 영화제작자가 단 한 명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폭스사는 유대인 제작자인 대릴 자눅과 석유부호 마빈 데이비스 등에 의해 운영되다 1985년 ‘미디어의 제왕’ 루퍼트 머독의 뉴스코퍼레이션에 통합됐다.
루이스 메이어(본명: 라자르 메이르)는 벨로루시 민스크 태생으로 캐나다를 거쳐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허드레 자영상을 하던 그는 1922년 폴란드 태생의 유대인 사무엘 골드윈과 동업으로 영화사 MGM(Metro-Goldwyn-Mayer)을 설립했다. 메이어는 독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일에는 열정적이어서 짧은 시간에 MGM을 대형 영화사로 키웠다. MGM은 당대 최고의 희극배우인 찰리 채플린 영화의 연속적인 흥행 성공으로 한때는 전 세계 영화제작 시장의 60%를 차지했다.
1969년 MGM은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와 호텔업의 거물인 아르메니아계 실업인 커크 커코리안에게 넘어갔다. 오늘날 MGM은 유대계 금융, 부동산 자본과 소니 아메리카의 합작회사인 MGM 홀딩의 산하기업으로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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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너브러더스 영화사를 세운 워너 형제들. 왼쪽부터 해리, 잭, 샘, 앨버트 워너. |
1891년 뉴욕서 독일계 유대 가정에서 태어난 해리 콘은 전차기사, 음반제작사, 프린트공 등으로 일하다 1924년 동생 잭과 함께 CBS 영화사를 설립했다. CBS는 몇 년 후 컬럼비아영화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컬럼비아사는 1982년 코카콜라로 넘어갔다가 1989년 일본 소니에 인수되면서 컬럼비아-트라이스타로 개칭됐다.
미국에는 50여 개의 크고 작은 영화사가 있다. 그중에서 유니버설, 파라마운트, MGM, 폭스, 워너, 컬럼비아, 디즈니를 7대 메이저라고 부른다. 이 가운데 만화영화로 시작해서 성장한 디즈니를 제외한 6개의 영화사는 모두 유대인이 설립했고, 오늘날까지 유대인의 참여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디즈니도 설립자인 월트 디즈니가 세상을 떠난 후 경영권이 한때 유대인 CEO 마이클 아이스너에게 넘어간 적이 있었다.
위에서 열거한 메이저 외에도 유대인이 만든 신흥 영화사가 있다. 미라맥스는 독일계 유대인 하비 와인스타인이 1979년에 설립한 영화사다. 이 회사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와 ‘펄프 픽션’ 등의 성공으로 한동안 새로운 메이저급 영화사로 대접받았다. 2005년 설립자인 와인버그가 은퇴한 후 미라맥스는 디즈니그룹에 통합됐다.
미라맥스와 함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드림웍스SKG는 1994년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제작자 제프리 카첸버그, 그리고 연예흥행사 데이비드 게펜 등 유대인 세 명이 설립한 회사로 제작과 배급을 겸하고 있다. 이들은 영화제작과 감독 그리고 흥행 전문가들이 모여 만든 기업이라는 장점을 활용하여 수많은 히트작을 선보였다. ‘아미스타드’ ‘글래디에이터’ ‘슈렉’ ‘마이너리티 리포트’ ‘뮌헨’ 등이 유명하다.
‘미스터 블록버스터’ 제리 브룩하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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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의 히트 영화 제조기 제리 브룩하이머. |
대학 졸업 후 펩시콜라 광고제작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리처드 기어 주연의 ‘아메리칸 지골로’(1980)와 나스타샤 킨스키가 주연한 ‘캣 피플’(1982), 여배우 제니퍼 빌스를 스타로 만들어준 ‘플래시 댄스’(1983) 등이 잇달아 성공하면서 영화감독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 후 그가 제작해 성공을 거둔 영화는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탑 건’ ‘베벌리힐스 캅’시리즈, ‘더 록’ ‘블랙 호크다운’ ‘크림슨 타이드’ ‘콘 에어’ ‘펄 하버’ ‘아마겟돈’ ‘캐리비안의 해적’시리즈, ‘배드 보이즈’시리즈, ‘킹 아서’ ‘데자 뷰’ ‘내셔널 트래져’시리즈 등. ‘탑 건’의 톰 크루즈, ‘베벌리힐스 컵’ 시리즈의 흑인배우 에디 머피, 그리고 ‘더 록’의 니컬러스 케이지는 브룩하이머에 의해 대스타로 성장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브룩하이머가 제작한 TV극으로는 ‘저스티스’, ‘CSI’ 3개(라스베이거스, 뉴욕, 마이애미) 시리즈, ‘위드아웃 어 트레이스’ 등이 유명하다. 현재 CBS TV에서 ‘열한 번째 시간’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2003년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위클리誌(지)는 브룩하이머를 ‘할리우드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는 인물’로 꼽았다. 2007년 브룩하이머는 포브스지 선정 ‘세계의 100대 부자’ 중 39위에 올랐다. 교육기관 등에 열성적으로 기부를 하는 것으로도 유명한 그는 많은 미국 유대인들과는 달리 親(친)공화당 성향을 보이고 있다.
유대인 영화감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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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웍스SKG를 설립한 제프리 카첸버그, 스티븐 스필버그, 데이비드 게펜 (왼쪽부터). |
사실 할리우드의 기획제작자, 감독, 캐스팅, 시나리오 작가, 음악담당과 아울러 극장주, 배급자의 대다수가 유대인이므로 이들이 한 팀이 되어 작품을 만들고 흥행에도 성공할 수 있는 좋은 터전을 갖추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할리우드 영화계는 서유럽의 프랑스나 이탈리아 영화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戰後(전후) 빌리 와일더, 엘리아 카잔, 에드워드 드미트릭, 오토 프레밍거, 윌리엄 와일러, 프레드 지네만, 조지프 맨키비츠, 조슈아 로건, 안소니 맨, 아서 펜 등 유능한 유대인 영화감독들이 맹활약을 펼치면서 1950년대부터는 할리우드가 세계영화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하이 눈’(1952) ‘사브리나’(1954) ‘맨발의 백작부인’(1954) ‘에덴의 동쪽’(1955) ‘쉐인’(1955) ‘피크닉’(1956) ‘남태평양’(1958) ‘벤허’(1959)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1959) ‘엑소더스’(1961) ‘사운드 오브 뮤직’(1964) 등 수많은 명작들을 쏟아냈다.
이후 제2~3세대 유대인 명감독들이 나타나 선배들의 맥을 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시드니 폴락, 밀로스 포르만, 밥 포스, 마이크 니콜스, 스탠리 큐브릭, 시드니 루멧, 우디 앨런, 올리버 스톤(불교도로 개종) 등이 그들이다. ‘인디애나 존스’ ‘ET’ ‘맨해튼’ ‘뻐꾸기 지붕 위를 날다’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살인사건’ ‘졸업’ ‘카바레’ ‘쥐라기 공원’ ‘JFK’, ‘플래툰’ ‘쉰들러 리스트’ ‘배리 린든’ ‘아미스타드’ ‘라이언 일병 구하기’ 등이 이들의 작품이다.
미국 영화의 신세대 감독 중에도 유대계가 많다. ‘밀러스 크로싱’과 ‘파르고’의 조엘과 이산 코엔 형제, ‘미션 임파서블 III’ ‘스타트렉’의 J.J 에이브람스, 추리극 ‘유주얼 서스펙츠’ ‘엑스 멘’ 그리고 올 초 국내서 개봉된 ‘작전명 발키리’를 감독한 브라이언 싱어 등이 유명하다.
유대인 영화배우들
유대인 영화배우들도 넘쳐나지만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들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율리시스’ ‘OK 목장의 결투’ ‘스파르타쿠스’ 등으로 유명한 커크 더글러스는 러시아계 유대인이다, ‘형사 콜롬보’의 피터 포크(러시아계), ‘왕과 나’의 율 브리너(러시아/몽골/스위스계), ‘키 라르고’의 로렌 바콜(루마니아계), ‘바이킹’의 토니 커티스(헝가리 계), ‘스팅’의 폴 뉴먼(독일계) 등은 노장층을 대표하는 유대인 배우들이다.
TV 시리즈 ‘스타트랙’의 레너드 니모이, ‘미션 임파서블’의 마틴 랜도, ‘보난자’의 론 그린, 그리고 영화 ‘붉은 옷의 여인’의 진 와일더, ‘졸업’의 더스틴 호프만, ‘다이아몬드는 영원히’의 질 세인트 존, ‘인디애나 존스’의 해리슨 포드, ‘한 미혼여성’의 질 클레이버그, ‘원초적 본능’의 마이클 더글러스, ‘모히칸의 최후’의 다니엘 데이루이스, ‘언더시즈’의 스티븐 시걸, ‘조스’의 리처드 드레퓌스 등은 그 다음 세대를 대표하는 유대인 배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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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 커크 더글러스, 율 브리너, 폴 뉴먼, 더스틴 호프만, 해리슨 포드 (왼쪽부터). |
신세대 유대인 배우로는 기네스 팰트로, 사라 미셀 젤러, 케이트 헛슨, 애덤 샌들러, 제니퍼 코널리, 앨리시아 실버스톤, 에이드리언 브로디, 나탈리 포트만, 그리고 스칼렛 요한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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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 영화배우 : 위노나 라이더, 기네스 팰트로, 나탈리 포트만, 스칼렛 요한슨 (왼쪽부터). |
1945년 이후 홀로코스트나 독일 나치를 소재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지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총 104편이다. 이 중 미국서 제작된 것만 72편이다. ‘안네프랑크의 일기’(1959) ‘엑소더스’(1960) ‘뉘른베르크의 재판’(1961) ‘카바레’(1972) ‘오데사파일’(1974) ‘마라톤 맨’(1976) ‘홀로코스트’(TV 극:1978) ‘인디애나 존스’1편(1981) ‘소피의 선택’(1982) ‘뮤직 박스’(1989) ‘쉰들러 리스트’(1993) ‘인생은 아름다워’(1997) ‘아트 퓨필’(1998) ‘제이콥 더 라이어’(1999) ‘컨스피러시’(TV극: 2001) ‘피아니스트’(2002) ‘디파이언스’(2008) ‘작전명 발키리’(2008), 그리고 얼마 전 오스카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더 리더’ 등이 홀로코스트나 나치 독일을 다룬 영화다.
영화를 통해 홀로코스트를 聖域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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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의 홀로코스트 상업화를 비난한 노먼 핀켈슈타인 교수. |
그밖에도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인디언 학살, 1919년 오스만 투르크의 아르메니아인 150만명 학살, 일본의 난징(南京) 대학살, 캄보디아 킬링필드, 르완다·부룬디에서의 학살, 그리고 유고 내전 중의 인종청소 등 수많은 대량학살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 사건 가운데 그 어느 것도 홀로코스트처럼 저술과 영화 등을 통해 끊임없이 상기되고,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홀로코스트를 부정적으로 말하거나 책 등 출판물을 통해 비판하는 사람은 ‘神聖冒瀆罪(신성모독죄)’에 버금가는 죄를 저지른 범죄자로 몰려 사회에서 매장된다. 이제 홀로코스트는 모든 교육과정과 영화 등 영상물을 통해 거의 종교적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2000년 미국 시카고 드폴대학의 노먼 핀켈슈타인 교수는 ‘홀로코스트 산업’이라는 책을 발간해 홀로코스트를 상업화한 유대인들을 비난했다. 핀켈슈타인은 폴란드계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그의 어머니는 나치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홀로코스트의 산 증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미국의 主流(주류) 유대인들의 행태, 특히 中東(중동)문제에 관해 미국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데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20여 권의 저서를 통해 홀로코스트 賠償(배상)과 관련한 非理(비리)나 이스라엘의 중동정책 등에 대해 비판해 왔다. 때문에 그는 미국 주류 유대인 사회로부터 이단취급을 받았다. ‘홀로코스트 산업’이 출간된 후 그는 대학에서 축출됐다. 2008년 이스라엘 정부는 핀켈슈타인을 ‘反(반)시온주의자’로 낙인 찍어 10년간 이스라엘 입국을 금지했다.
할리우드 영화와 反유대주의
할리우드 영화 가운데 내용이 문제가 되어 반유대주의의 표적이 된 경우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88년에 개봉된 윌렘 대포 주연의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이다. 당시 전 세계 가톨릭 단체는 이 영화에 대해 “예수를 비하하는 할리우드의 쓰레기 유대문화”라고 비난했다. 사실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는 개신교 신자인 폴 슈레이더였고, 감독은 가톨릭 신도인 마틴 스코세지였지만, 이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한 영화사가 유대인이 설립하고 운영하는 유니버설사였다는 점이 가톨릭 단체를 자극한 듯하다.
미국 공화당의 보수정치인인 패트릭 뷰캐넌은 1995년 ABC-TV ‘나이트 라인’ 프로에 출연해서 “할리우드의 유대 마피아가 기독교인의 가치관을 좀먹고 있다”고 비난했다.
미국영화 중에는 간혹 가톨릭 성직자나 개신교 목회자가 부정적으로 그려진 경우는 있지만, 유대교 성직자인 랍비를 부정적으로 그린 영화는 없다. 필자도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유대인이 다소나마 부정적으로 그려진 영화는 1992년에 나온 유대인 감독 시드니 루멧이 만든 ‘우리 중의 낯선 사람’이라는 영화 한 편뿐이었다.
오늘날에도 할리우드 영화계는 유대계의 활약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관객이 조금이라도 싫증난 눈치를 보이면 즉각 새로운 소재를 개발해서 순발력 있게 대응하는 유대계 영화인들의 창의성과 상업성은 아무도 따라갈 수 없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