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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 세계무대 데뷔 40주년 맞은 첼리스트 鄭明和

“내가 첼로를 택한 것이 아니라 첼로가 나를 택했다”

서철인    iron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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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보다 더 감동적인 정트리오 가족 이야기

⊙ “나에게 있어 형제들은 영혼을 살찌우는 음식과 같은 존재들”
⊙ 어머니가 첼로 선물하며 “우리 명화는 성격이 온화하니까 이 악기가 맞을 거야”라고 권해
⊙ 명화씨는 매사에 느긋하고 대범한 반면 경화씨는 섬세하고 격정적
⊙ 정경화씨는 있는 에너지를 200% 쏟아부을 정도로 무리하다 혼나는 타입,
    정명화씨는 일정 선을 넘지 않도록 스스로 통제하며 연습하는 스타일
⊙ 여섯째인 명훈씨는 어렸을 때부터 동생 도시락을 꼬박 꼬박 챙겨줄 정도로 성격이 다정다감

鄭明和
⊙ 1944년 서울 출생.
⊙ 서울예고, 美 줄리어드음대 졸업, 美 서던캘리포니아주립대 피아티고르스키 마스터클래스
    3년 수료.
⊙ 닉슨 대통령 초청 백악관 연주회, LA필하모닉 협연, 뉴욕 링컨센터 정트리오 연주회 등
    수많은 공연 가짐. 매니스음대 교수 역임.
⊙ 現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 상훈: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재단 콩쿠르 1위, 제네바 국제콩쿠르 첼로 부문 1위,
    미국 은관문화 훈장, 청소년 차이코프스키콩쿠르 최고지도자상, 미국 메인스트림 아메리카상 수상.
  프로 연주가들에게 악기는 몸의 일부다. 오랜 시간 악기와 同苦同樂(동고동락)하다 보면 성격도 소리도 악기를 닮아 간다고 한다. 세계적인 첼리스트 鄭明和(정명화)씨는 자신이 연주하는 첼로 음색처럼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와 온화한 성품을 지녔다. 자기 존재를 애써 내세우지 않고도 오케스트라의 중심을 잡는 첼로처럼 부드러우면서 묵직한 카리스마가 있다.
 
  첼리스트 정명화씨를 서울 구기동 자택에서 만났다. 데뷔 40주년 기념 연주회를 20여 일 남겨 놓은 시점이었다. 북한산 자락에 자리 잡은 정씨의 집은 주택이 아니라 산장 같았다. 집 뒤편은 숲이고, 집 앞으로는 계곡이 흘렀다. 거실 통유리창으로 폭포수 같은 햇살이 쏟아져 별도의 조명이 필요치 않은 집이었다. 동행한 사진작가는 “이곳에 살면 예술적 영감이 마구 떠오를 것 같다”고 말했다.
 
  흰색 셔츠에 감색 바지를 받쳐 입고 필자를 맞은 정씨는 “귀국한 이후 계속 이 집에 살고 있다”면서 “서울 시내면서 조용하고 공기가 좋아 살기 편하다”고 말했다. AP통신 기자였던 남편 具三悅(구삼열)씨를 따라 미국과 유럽, 일본 등지를 순례하며 살아온 그녀는 1994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빙교수로 부임한 후 한국과 뉴욕을 오가다 2000년 남편과 함께 영구 귀국했다.
 
  정씨가 복층 빌라의 2층으로 안내했다.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햇살이 찰랑찰랑한 마룻바닥 한편에 31년째 그와 동행한 첼로가 놓여 있었다. 전 세계에 50대밖에 없다는 스트라디바리우스 첼로였다. 가격을 물으니 “공개할 수 없지만 바이올린보다 희귀해 가격이 두 배인 것으로 안다”고 했다.
 
 
  스트라디바리우스 첼로
 
   이탈리아의 악기 名匠(명장) 스트라디바리는 평생 1100여 개의 현악기를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이 중 현존하는 악기는 바이올린 600대, 비올라 12대, 첼로 50대, 기타 3대, 하프 3대, 비올라 다모레 1대다. 명장의 혼과 위대한 연주자들의 숨결이 밴 악기라 함부로 가격을 매길 수 없지만 바이올린의 경우 수십억 원대를 호가한다. 돈이 있어도 현재 사용하는 연주자가 사망하거나 활동을 중단해야 시장에 나오기 때문에 수십 년씩 기다려야 구입할 수 있다. 정씨는 이 명품 악기를 1978년 미국의 유명한 악기상에서 운 좋게 구입했다고 한다.
 
  “이 첼로는 스트라디바리가 1731년에 제작한 말기 작품인데, 다른 첼로에 비해 몸통이 좁다는 특징이 있어요. 저 같은 여자 연주자에게 잘 맞는 첼로죠. 원래 시카고 심포니가 소유하고 있던 악기인데, 그쪽 첼리스트가 몸이 커서 사용하지 않다가 악기상에 내놓은 것 같아요. 오래전부터 좋은 악기가 나오면 연락 달라고 예약해 놓은 덕분에 제 차지가 됐어요. 시카고심포니 이전에는 이탈리안 첼리스트 가에타노 브라가가 사용했습니다.”
 
  브라가는 1900~1940년대 활발하게 활동했던 첼리스트로 ‘천사의 세레나데’라는 곡으로 널리 알려진 연주자다. 명품 악기는 사용한 연주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이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필자가 “이 다음에는 선생님의 이름도 새겨지겠네요”라고 묻자 정씨는 웃으며 “글쎄요, 이 다음 주인도 한국인 연주자였으면 좋겠네요”라고 답했다.
 
  ―해외 공연 때면 첼로 운반하는 일이 보통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함부로 취급할 수 없으니까 좌석표를 두 장씩 사서 옆 좌석에 태우고 다니죠. 첼로 때문에 겪은 우여곡절은 밤새도록 이야기해도 끝이 없을 거예요. 첼리스트들끼리 모이면 별별 경험담이 다 나오죠. 이건 짐이니까 짐칸에 실으라는 항공사도 있었고, 좌석이 둘이니까 보딩 패스를 두 장 주었다가 나중에 한 사람이 없다는 걸 안 승무원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적도 있었습니다. 9·11 테러 후 미국 공항에서는 첼로 핀도 빼라고 하고, 줄이 무기가 될 수 있다며 따로 싣도록 조치하기도 해요.”
 
  지난 50여 년 동안 첼로는 정씨와 분리될 수 없는 한몸이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음악 인생과 가족 이야기로 흘러갔다. 첼로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음악 인생을 이야기하는 데 빠질 수 없는 것이 ‘정트리오’이기 때문이다.
 
 
  정트리오 데뷔 무대는 백악관
 
  정트리오는 첼리스트 정명화씨와 지휘자 鄭明勳(정명훈)씨, 바이올리니스트 鄭京和(정경화)씨 등 3남매로 구성된 실내악단이다. 이들은 1969년 닉슨 前(전) 미국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 음악회에서 연주를 해 화제가 됐다. 닉슨 대통령은 연주가 끝나자 무대 위로 올라와 “한국인 연주자를 처음 보는데, 이렇듯 훌륭한 연주자 셋이 모두 남매라니 놀랍다”며 악수를 청했다고 한다.
 
  ―트리오는 어떻게 결성된 건가요.
 
  “제가 학교에서 벗어나 직업 연주자의 길을 가고자 연주 전문 기획사인 콜롬비아 아티스트 매니지먼트에 들어간 것이 1968년입니다. 이해에 獨奏會(독주회)를 가졌는데 동생 명훈이가 피아노 반주를 했죠. 이것을 보고 기획사 측에서 트리오를 구성해 보자고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과거 언니, 오빠까지 합세한 가족연주회를 몇 번 해보기는 했었지만 트리오 구성에 대한 생각은 전혀 못했었죠.”
 
  백악관에서 가진 연주회가 사실상 ‘정트리오’의 데뷔 무대다. 이후 공연 요청이 쇄도했지만 정씨는 독주 생활에 방해가 돼 트리오 공연은 되도록 자제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한국에 들어오면 정트리오 멤버로 기억하는 이가 많아 놀랐다고 한다.
 
  정씨는 1969년부터 첼리스트로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해에 주빈 메타 지휘의 LA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해 <워싱턴 포스트>로부터 ‘보배로운 첼리스트’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어 식스텐 에를링이 지휘하는 디트로이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세계무대에 정식 데뷔했고, 2년 뒤인 1971년에는 제네바 국제음악콩쿠르에 나가 첼로 부문 1등상을 수상했다. 미국에 이어 유럽 무대에 성공적으로 진출함으로써 세계 최정상급 첼리스트 반열에 오른 것이다.
 
  “콩쿠르 우승 후 한동안 유럽을 돌며 수많은 공연을 했어요. 이탈리아에 거점을 두고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 덴마크 등을 순회했죠. 연 평균 30회씩 공연했습니다. 올해가 데뷔 40주년이라고 하기에 정리해 보니 그래도 연주를 가장 많이 한 나라는 미국이더군요.”
 
  정씨는 기록을 잘 하지 않는 성격이라 올해가 첼리스트 데뷔 40주년인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졸업선물로 첼로 선물 받아
 
정명화씨와 30여 년 동안 함께한 첼로. 1731년 이탈리아의 악기 명장 스트라디바리가 제조한 작품이다.
  ―첼로를 50년 넘게 하신 것으로 아는데, 데뷔 40주년은 세계무대 진출을 기점으로 한 건가요.
 
  “40이라는 숫자는 제가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 전문 직업 연주자로 나선 해부터 헤아린 걸 거예요. 첼리스트로 산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됐습니다.”
 
  정씨가 첼로를 손에 잡은 것은 초등학교 졸업 직후다. 그 전까지는 무용과 노래에 소질이 있어서 오페라 가수를 꿈꾸었다고 한다. 진로가 바뀐 사연은 이렇다.
 
  “언니, 오빠, 동생들이 피아노는 기본이고 플루트와 바이올린을 연주했는데, 저는 어느 것에도 흥미를 붙이지 못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저를 데리고 첼로 연주회에 갔는데, 그 소리가 너무 좋은 거예요. 어머니는 돌아오는 길에 초등학교 졸업 선물이라며 첼로를 사 주셨어요. 그 첼로를 지금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정씨의 어머니는 남다른 교육법으로 7남매를 훌륭하게 키워낸 이원숙씨다. 이화여전 가사과를 수석 졸업하고 교직에 몸담았던 이씨는 피아노 연주에 정통해 7남매 중 넷을 음악가로 키웠다. 1990년대 자녀교육 지침서 <너의 꿈을 펼쳐라>를 발간해 화제가 되었던 이씨를 이야기할 때면 두 가지 유명한 일화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6·25 당시 부산으로 피란 가면서 무게를 줄이려 생활용품은 버릴지언정 무거운 피아노를 챙겨 갔다는 일화와, 1970년대 이화여대 강당에서 피아노 독주회를 가질 당시 철도청에 전화를 걸어 신촌역을 지나가는 기차가 기적소리를 내지 않도록 협조를 구한 일화가 그것이다. 그 정도로 열정적이고 철두철미했던 어머니에 대해 정명화씨는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놀라울 만큼 섬세한 분이세요. 저희 형제들이 무심코 한 행동이나 말 한마디도 그냥 흘리는 법이 없었죠. 어머니에게는 그게 형제들 각각의 성향에 맞는 재능을 발굴하는 좋은 도구이자 재료였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첼로를 선물하며 ‘우리 명화는 성격이 온화하니까 이 악기가 맞을 거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남매가 함께 미국 유학 떠나
 
  어릴 때부터 감성이 풍부하고 섬세했던 동생 경화씨에게 바이올린을 권하고, 식구들은 물론 남들 챙기기를 좋아했던 명훈씨에게 지휘자의 길을 권한 것도 어머니였다고 한다.
 
  “어머니에게 우리 형제는 누구나 ‘특별한 아이’였어요.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저희 형제들을 비교 평가하신 적이 없었죠. 그런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저는 어쩌면 중간에 음악을 포기했을지도 몰라요. 동생 경화의 재능이 워낙 특별해서요. 걔는 네 살 차이인 제가 봐도 ‘천재’라고 느껴질 만큼 사물을 감지하는 속도가 빨랐습니다. 그런 동생을 보며 어린 마음에 ‘나는 왜 저렇게 하지 못하지’ 하며 좌절할 수도 있었을 텐데, 어머니의 현명함 덕분에 그런 방황에 빠지지 않았던 거죠.”
 
  정씨는 어린 시절 자신이 받은 어머니의 훈육법을 좇아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지난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직에서 정년 퇴임했지만 학교 측의 요청으로 계속 학부와 영재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한창 자라는 아이들의 재능을 함부로 비교하거나 재단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교육 현장에 있어 보니 천재 소리를 듣던 아이의 재능이 커 가면서 옅어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저 그랬던 아이가 커 가면서 빛을 발하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재능을 발견하고 키워 준 어머니 덕분에 정씨는 첼로 입문 2년여 만에 서울대가 주최한 콩쿠르에서 전 부문 특상을 휩쓸었다. 그리고 17세가 되던 해에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줄리어드음대에서 레너드 로즈에게, 서던캘리포니아대학 마스터 클래스(3년 과정)에서 피아티고르스키에게 師事(사사)했다.
 
  ―미국 유학은 혼자 떠난 건가요.
 
  “아니오, 동생(정경화)과 함께 갔습니다. 유학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 여러 가지로 어려운 점이 많았지만 언니(정명소)와 오빠(정명근)가 먼저 가서 터를 닦아 놓은 뒤라 저희는 편했어요. 당시 오빠는 MIT공대에 재학 중이었고, 언니는 줄리어드에서 플루트를 전공하고 있었죠.”
 
  얼마 후 정명훈씨를 포함한 동생 둘이 뒤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언니인 정명소씨가 결혼하고 나서는 정명화씨가 맏이 역할을 했다. 음악도로서 이들 형제가 가는 길은 모두가 한국인 최초여서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쉬지 않고 연습했다고 한다. 그녀는 “서로 끌어 주고 의지할 형제가 없었다면 가기 힘든 길이었다”고 말했다.
 
  ―부모 없이 형제끼리 있다 보면 집안일 문제로 많이 다투지 않나요.
 
  “저희는 가사 분담을 철저히 했기 때문에 다툴 일은 없었어요. 요리를 좋아하는 저와 명훈이가 요리와 설거지를 담당하고, 성격이 깔끔한 경화가 청소와 빨래를 맡았죠. 나름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특히 경화와는 같은 현악기라 여름 캠프도 함께 가고 공유할 게 많았어요.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읽을 정도였지요. 제가 서던캘리포니아대에 다닐 때는 LA에서 따로 생활했기 때문에 매일같이 통화하며 보고 싶다고 눈물 바람을 하곤 했습니다. 편지도 많이 주고받았지요.”
 
 
  명화 VS 경화
 
미국 줄리어드 음대 교수로 재직 중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씨.
  자매지만 두 사람은 얼굴 생김새가 다르다. 정명화씨는 친탁을 했고, 경화씨는 외탁을 한 까닭이다. 외모만큼이나 성격도 다르다. 정명화씨는 매사에 느긋하고 대범한 반면 경화씨는 섬세하고 격정적이다. 영락없이 각자가 연주하는 악기의 성질을 닮았다. 이에 대해 정명화씨는 “애초에 성격에 맞는 악기를 고른 것이기도 하지만, 오래 하다 보니 악기의 성격에 맞춰진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공연 준비 스타일도 서로 많이 달라요. 경화는 있는 에너지를 200% 쏟아부을 정도로 무리하다 혼나는 타입이고, 저는 일정 선을 넘지 않도록 스스로 통제하며 연습하는 스타일이죠. 덕분에 지금껏 부상 때문에 연주를 쉰 적은 없습니다. 경화는 과거에도 인대가 늘어나 연주를 못한 적이 있는데, 지금도 같은 원인 때문에 고생하고 있죠. 지난 3년 동안 공연을 하지 못했어요. 최근에야 좀 좋아져 재기를 준비하고 있는 중입니다.”
 
  타고난 운명인지 자매는 연주 스승도 판이하게 다른 성향의 사람을 만났다. 정명화씨의 스승이며 첼로 巨匠(거장)인 피아티고르스키는 일찍 결혼한 사람으로 “훌륭한 소리는 가정적으로 안정되고 평화로울 때 나오므로 결혼 후 연주 경력을 쌓는 것이 좋다”고 가르쳤고, 경화씨의 스승 이반 갈라이먼은 독신자로 “연주 경력은 때를 놓치면 쌓기 힘드니 결혼은 뒤로 미루라”고 가르쳤다.
 
  각자 스승의 영향을 받아 정명화씨는 1971년 연주자로서는 이른 나이인 스물일곱에 결혼해 슬하에 두 딸을 두었다. 30대가 된 딸들은 대학 졸업 후 미국에서 살고 있다. 맏딸 꽃샘씨는 이미 결혼해 두 아이의 엄마가 돼 뉴욕에서 살고 있고, 둘째딸 꽃별씨는 보스턴대에서 식품영양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다.
 
  그녀와 달리 경화씨는 1984년 서른여섯의 늦은 나이에 영국인 사업가 제프리 리케트 씨와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다.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자란 두 아들은 대학에 재학 중이다.
 
  육아와 음악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방식도 두 사람은 서로 달랐다. 정명화씨는 두 딸이 사춘기에 접어들자 연주 활동을 과감하게 줄이고 미국 매니스 음대 교수로 재직하며 아이들 뒷바라지에 신경 썼다. 유럽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시절이라 아쉬웠지만 가정이 우선이라 결정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반면 경화씨는 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었는데도 연주 일정을 조정하거나 크게 줄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1990년대 후반 아이들은 물론 남편과도 사이가 원만하지 않아 가정적으로 큰 위기를 겪었다. 정명화씨는 “아이들 문제로 힘든 시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경화씨는 현재 자신의 모교인 뉴욕 줄리어드 음악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명화 VS 명훈
 
일본과 프랑스를 오가며 바쁘게 지내고 있는 마에스트로 정명훈씨.
  정명화씨와 명훈씨는 나이가 아홉 살이나 차이 나는 남매지만 외모상으로는 형제 중 가장 많이 닮았다. 게다가 성격도 비슷하다. 그녀는 동생 명훈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명훈이는 피아노뿐만 아니라 축구, 농구 등 스포츠에도 재능이 많아 프로 음악가의 길을 가게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저는 요즘 지난 40년을 돌아보며 ‘내가 첼로를 택한 것이 아니라 첼로가 나를 택했다’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명훈이 역시 애초부터 지휘자가 될 운명을 타고난 것이 아닌가 싶어요. 명훈이가 여섯째인데, 어렸을 때부터 막내동생 명규의 도시락을 꼬박꼬박 챙겨 줄 정도로 성격이 다정다감했거든요. 어머니가 뉴욕에서 식당을 할 때도 형제 중 가장 많이 일을 거든 동생이 명훈이었습니다. 그렇게 포용력 있고 꼼꼼한 성격이니까 지휘자로서는 안성맞춤이었죠.”
 
  정명화씨와 명훈씨는 남매이면서 처남댁과 媤妹夫(시매부: 시누이 남편) 관계다. 동생 명훈씨가 정명화씨 남편의 여동생 具純悅(구순열)씨와 결혼, 겹사돈을 맺었기 때문이다. 구순열씨는 명훈씨보다 다섯 살 연상이다.
 
  ―남동생이 손아래 시누이와 결혼한 셈인데, 두 사람이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나요.
 
  “전에는 몰랐고, 저희 부부 때문에 알게 된 사이죠. 연애 시절 우리 두 사람을 열심히 쫓아다니더니 서로 정이 들었던 모양이에요. 처음에는 저희 부부뿐만 아니라 집안에서도 반대를 많이 했죠. 근데 서로 좋아하는 것을 보니까 이것도 운명인가보다 싶어 더 이상은 말리지 못하겠더라고요.”
 
  연애 시절 “언니, 언니” 하며 따라다니던 구순열씨는 결국 시누이이자 올케가 되었다. 결혼 후에도 구순열씨는 여전히 “언니”라고 부르고, 정명화씨는 “고모”라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 명훈씨는 슬하에 아들 셋을 두었다.
 
  ―아이들이 호칭 문제로 많이 헷갈렸을 것 같은데요.
 
  “요즘에는 외가가 대세라 별로 헷갈려 하지 않던데요. 외삼촌, 외숙모로 통일이 됐더라고요. 두 집 아이들은 친사촌이면서 외사촌 관계라 친형제 자매처럼 아주 가깝게 지냅니다. 신기한 것은 우리 형제 중 저와 명훈이가 가장 많이 닮았듯 남편과 시누이도 형제들 중 가장 많이 닮아 2세들 얼굴이 모두 비슷하다는 점이에요. 그 때문에 재미있는 일도 많았죠. 동생네가 프랑스에 살 때 작은딸이 놀러 갔는데, 시누이가 평소 잘 가던 식료품점에 딸아이를 데리고 갔더니 가게 주인이 ‘아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딸도 있네요’라며 놀라워하더래요. 시누이는 기분 좋게 ‘네’라고 답했다고 하더군요.”
 
  부모를 따라 미국과 유럽에서 자란 아이들은 언어나 정서가 비슷해 더없이 친하다고 한다.
 
 
  정명화 VS 구삼열
 
둘째딸 꽃샘씨의 대학 졸업사진. 왼쪽부터 큰딸 꽃별, 정명화씨, 꽃샘, 시어머니, 남편 구삼열씨.
  AP통신 기자 출신의 남편 구삼열씨는 정명화씨 못지않게 기자로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경기고와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구씨는 코리아헤럴드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 1968년부터 1987년까지 AP통신 기자로 세계를 누볐다. 이후 UN 특파원, UN특별기획 본부장, 유니세프 駐(주)일본·한국 대표와 아리랑TV 대표를 거쳐 현재는 서울 관광마케팅 대표로 있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코리아헤럴드 외무부 출입 기자로 있던 구씨는 정명화씨의 차이코프스키 국제음악 콩쿠르 참가 무산 소식을 1면 톱으로 보도했다. 한국인 음악가가 全無(전무)하던 그 시절 정씨는 세계 최고 권위인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를 통해 국제무대에 데뷔하고자 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가 북한의 테러 위험이 있다며 참가를 무산시켜 꿈이 좌절됐다.
 
  이때의 한은 8년 후인 1974년 동생 정명훈씨가 대신 풀어 주었다. 그해 명훈씨가 미국 국적으로 이 콩쿠르에 참가해 피아노 부문 2등상을 수상한 것이다.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인사를 나눈 것은 1968년 뉴욕의 한 댄스파티에 초청 인사로 참석하면서다. 당시 구씨는 컬럼비아대 언론대학원을 마치고 AP통신에 입사한 말단 기자였다. 남편 구씨의 회고다.
 
  “그날 집사람(정명화)이 춤을 추다 한쪽 귀고리를 잃어 버렸다고 하더군요. 모두들 바닥을 찾고 난리인데, 용케도 제가 찾아내 장난삼아 ‘데이트 한 번 해주면 주겠다’며 제 주머니 속에 넣었죠. 그러곤 서로 바빠 잊고 있다가 1년 후 뉴욕에서 열린 경기고 동문들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인연이 되려고 그랬던지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는데, 집사람이 저를 보자마자 귀고리 가지고 있느냐고 묻더군요. 그게 계기가 돼 데이트를 했고, 정식으로 만난 지 11일 만에 제가 프러포즈를 했습니다.”
 
  그는 정씨의 활달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고, 결혼 후에도 자기 일을 꾸준히 하는 여성이 이상형이어서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구삼열씨는 1978년부터 1987년까지 10년 동안 AP통신 로마 주재 유럽 특파원으로 근무했다. 이 기간 동안 두 건의 세계적인 특종을 터뜨렸다. 그 하나는 1981년에 일어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저격 사건을 외신 기자로서는 가장 먼저 보도한 일이다. 사건 소식을 접한 그는 사건 현장인 성 베드로 광장에 가장 먼저 도착해 당시 상황을 목격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로 전 세계에 타전했다.
 
  두 번째 특종은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한 1982년에 올렸다. 당시 그는 AP통신의 스타 기자 테리 앤더슨을 대신해 베이루트에 특파됐다. 종군기자는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일이어서 거절해도 되지만 사망자나 부상자가 많지 않은 데다 전쟁 특파원으로서 경력을 쌓을 좋은 기회라 생각해 현장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그런데 가는 날부터 전쟁 상황이 심각해졌다. 그가 도착한 동베이루트의 알렉산더 호텔에는 ABC 방송의 피터 재닝스(2005년 작고), ‘전설의 여기자’로 불리는 이탈리아의 오리아나 팔라치 등 기라성 같은 기자들로 가득했다. 그는 이 호텔에 묵는 동안 죽을 고비를 세 번 넘겼다.
 
  “어느 날 점심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호텔이 폭격을 맞았는데, 내가 늘 앉던 자리에 폭탄이 떨어졌더군요. 그날 오후에는 대통령궁이 폭격을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다가 갑작스러운 2차 폭격으로 차가 굴러 눈썹이 찢어지고 다리를 7바늘이나 꿰매는 부상을 입었죠. 안전 보장이 안돼 다음날 서베이루트 사무실로 갔더니 상사가 근처 아파트가 폭격을 맞아 박살이 났는데 지하에 생존자가 있는 것 같으니 빨리 출동하라고 하더군요.”
 
  현장에는 테리 앤더슨이 먼저 도착해 확성기를 들고 아파트 지하 쪽에 대고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때 한쪽에서 팔레스타인 여인 하나가 통곡하며 소리 지르고 있었다. 구씨가 “무슨 일인지 내가 보고 오겠다”며 여자에게 다가갔다. 임신부인 듯 배가 부른 여인이 “남편과 아이와 아파트 7층에 살았는데 모두 죽었다”고 하는 순간 ‘쾅’ 하는 굉음과 함께 폭탄이 터졌고, 그의 머리 위로 흙과 유리 파편들이 쏟아졌다.
 
  잠시 정신을 잃고 쓰러진 그를 누군가가 “빨리 일어나 뛰어”라며 깨웠고, 정신을 차린 그는 방금 전까지 소리치며 울던 여인의 몸이 두 동강이 난 채 눈앞에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여기저기 잘린 팔다리가 널려 있는 현장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어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쏟아지는 눈물을 닦으며 달리고 달린 끝에 겨우 사무실에 도착했죠. 그러곤 넋이 나간 채 앉아 있는데, 상사가 맥주 한 잔을 따라주며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기에 본 대로 얘기했더니 ‘그런데 지금 기사 쓰지 않고 뭐 하고 있느냐’고 다그쳤습니다. 얼마 후 도착한 테리 앤더슨은 제가 죽은 줄 알고 시체를 찾다 늦었다고 하더군요.”
 
  그날 죽음의 공포 속에 ‘AP 특파원의 자동차 폭탄 체험’이라는 수기 형식의 기사를 작성했고, 이 기사는 세계적인 특종이 되었다. 더불어 그는 ‘불사조’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가 3개월 동안 死地(사지)에서 종군기자로 일하는 동안 정명화씨는 동생과 함께 뉴욕 근처에서 서머스쿨 강좌를 진행했다. 정씨는 “단순히 출장 간 것으로 알고 있다가 나중에 보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구씨는 아내에 대해 “자기 관리가 철저해 일과 가정,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던 것 같다”며 “아내의 음악은 나이 들면서 무르익어 지금 연주하는 소리가 듣기에 가장 좋다”고 말했다.
 
 
  가족 모임은 뉴욕에서
 
2004년 9월 4일 예술의전당에서 음악회를 마친 정트리오가 어머니와 함께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명훈(피아노), 정경화(바이올린), 어머니 이원숙, 정명화(첼로)씨.
  형제들은 미국과 한국에 흩어져 산다. 첫째인 명소씨는 줄리어드음대 졸업 후 예일대 대학원을 거쳐 워싱턴주립대에서 교육학 박사 과정을 밟았다. 이후 결혼해 살다 2년 전 세상을 떠났다. 둘째 명근씨는 MIT공대 졸업 후 사업가로 살았다. 현재 클래식 전문 기획사인 CMI 대표로 있다. 명훈씨보다 한 살 위인 명철씨는 캘리포니아 주립대 부교수로 있다가 뒤늦게 신학공부를 하던 중 생을 달리했다. 벌써 11년 전이다. 명훈씨의 유일한 동생인 명규씨는 의대 졸업 후 뉴욕에서 의사로 지내고 있다.
 
  ―형제들이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져 살아서 다 모이기가 쉽지 않겠네요.
 
  “언니와 동생이 세상을 떠나 모두 모이는 것은 이제 불가능한 일이 됐죠. 2년 전 언니의 죽음으로 어머니가 큰 충격을 받아 몇 번의 고비를 넘기셨습니다.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뉴욕으로 달려간 게 벌써 두세 번 되는데, 요즘은 상태가 호전돼 한숨 돌렸습니다.”
 
  어머니 이씨는 미국 뉴욕에서 의사인 막내 남동생과 살고 있다. 이 때문에 형제들은 뉴욕에서 주로 모이는데, 다들 일정이 바빠 두세 명은 빠지게 마련이란다.
 
  ―정명훈씨가 가장 바쁘죠.
 
  “명훈이는 일본과 프랑스에 일이 있어서 한국에 머무는 시간이 1년에 3개월밖에 되지 않아요. 바로 옆 동이 동생 집인데도 얼굴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느 날 불쑥 ‘스파게티 해 놓았으니 먹으러 오라’고 부르면 그때야 한국에 왔구나 싶어 달려가죠.”
 
  명훈씨네 집은 창문만 열면 보이는 옆 동 빌라 같은 층이었다. 거리가 불과 5m도 안돼 명훈씨가 맛있는 요리를 할 때면 고개를 내밀고 먹으러 오라고 부른다고 한다. 정명훈씨는 몇 해 전 요리책을 냈을 정도로 요리에 일가견이 있다.
 
  ―정명훈씨 요리 솜씨가 전문가 수준이라고 들었습니다.
 
  “저나 명훈이나 요리하는 걸 좋아해요. 남편은 기자라서 어디를 가든 맛집 찾아다니기를 좋아하고요. 그러다 보니 명훈이 부부와 만나면 음악 얘기보다 음식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곤 합니다. 저희 부부가 로마에 살 때는 런던에 있던 경화랑 파리에 있던 명훈이가 자주 와서 셋이 함께 이탈리아의 맛있는 집들을 찾아다녔어요. 명훈이는 그렇게 먹어 본 음식들을 집에서 만들어 보곤 했죠. 미각이 발달한 데다 식당을 하셨던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이 있어서 따로 배우지 않고도 요리를 아주 잘했습니다.”
 
 
  가장 좋은 비평가는 가족
 
  3남매는 요리 외에도 공유할 추억이 많다. 정명화씨는 “내게 형제들은 영혼을 살찌우는 음식과 같은 존재들”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형제라서 정서적으로 타고난 공통점도 많았지만 함께 음악을 하면서 공유할 게 더 많아졌어요. 우린 음악을 알고 무대에 선 연주자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서로에게 가장 좋은 비평가였지요. 덕분에 전문 평론가들의 호평에 우쭐대거나 혹평에 상처받지 않고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음악 전문가들의 평가에 신경 쓰지 않았다는 말씀인가요.
 
  “신경 쓰지 않았다기보다 비교적 자유로웠다는 거죠. 연주자는 아무리 성공적인 무대였다 해도 공연이 끝나고 나면 허탈하기 마련입니다. 공연 직후에는 감정적으로 예민해져서 티끌만한 단점도 100배쯤 크게 느껴지는 시기죠. 그 때문에 속상해 하고 있는데, 이미 잘 알고 있는 단점들을 누군가가 콕콕 집어내면 화가 날 뿐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형제들은 서로의 연주에 대해 어떤 식으로 평가를 하나요.
 
  “저희 형제들은 연주자의 그런 심리 상태를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공연이 끝난 직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그냥 혼자 있게 내버려 둡니다. 그러다 시간이 좀 지난 후 자연스럽게 ‘내 생각에는 지난 공연 때 이렇게 연주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아’ ‘무대 의상에 변화를 좀 주면 어떨까’ 하는 식으로 마음속 주머니에 담아 놓았던 평을 하나씩 꺼내 놓죠.”
 
  평론가 수준의 음악 마니아인 남편은 연주 경험이 없어서인지 지금도 공연이 끝나기 무섭게 자신의 느낌을 전하고 싶어 안달이라고 한다. 정씨는 “형제들의 비평 방법을 예로 들어 남편에게 수차례 경고를 했는데도 고쳐지지 않는다”며 웃었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평은 있죠.
 
  “뉴욕 데뷔 콘서트에서 좋은 평을 받았어요. ‘멋과 혼이 밴 연주였다’는 평이었죠. 이 말은 지금까지 저를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됐습니다. 데뷔 40주년 기념 연주회인 이번 공연에도 ‘멋과 혼’이라는 말이 사용됐죠.”
 
  ―최근 2~3년 전부터 국내 연주가 부쩍 늘어난 것으로 압니다.
 
  “청중과 가까이서 소통할 수 있는 작은 무대가 좋아 지방 공연을 많이 했습니다. 옛날에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전국 주요 도시에만 공연장이 있었는데 요즘은 서울 근교 경기도에만도 10군데가 넘더군요. 시설도 나무랄 데 없고 청중의 음악 수준도 높습니다. 여러모로 연주 환경이 너무 좋아졌어요. 올해 1월과 2월에는 경기도에 있는 공연장에서 10회 이상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같은 곡을 반복 연주하다 보면 지겹다는 생각 들지 않습니까.
 
  “같은 곡이라도 젊은 시절 연주할 때 다르고 나이 들어 연주할 때 다릅니다. 심지어 어제 연주한 곡도 오늘 연주회 때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죠. 양파 껍질을 까듯 매번 다른 그 신비함 때문에 싫증 나지 않아요.”
 
  ―본인의 음반을 자주 듣습니까.
 
  “거의 듣지 않아요. 다른 연주자 음반도 마음먹고 감상하지 습관처럼 듣지 않습니다. 남편은 음악을 틀어 놓고 일을 하는데 저는 그렇게 하면 집중이 안돼요.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못하는 성격이죠.
 
  한번은 친구 집에 갔다가 느낌이 아주 좋은 음악을 들었어요. ‘이거 너무 좋다’며 ‘누구 것이냐’고 물었더니 친구가 웃더군요. 놀랍게도 제 음반이었습니다. 내 것인지 알 때는 비판적으로 들으니까 와 닿지 않았는데, 모르고 들으니 꽤 좋더라고요. 아무래도 내 표현이니까 공감이 갔겠죠.”
 
  ―첼리스트 거장이 좋아하는 첼리스트는 누구일지 궁금한데요.
 
  “저는 여전히 피아티고르스키 선생님의 연주를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첼로의 곱고 아름다운 선율을 좋아하는데, 저는 그것과 더불어 좀 거칠지만 이야기가 있는 연주를 좋아합니다. 피아티고르스키 선생님은 그 두 가지를 다 소화하는 분이세요. 그래서 싫증 나지 않죠. 아름답기만 한 여자는 금세 싫증이 나지만 知的(지적)인 여자는 겪을수록 매력이 있는 것과 같아요.”
 
  올해 우리 나이로 66세. 정씨는 “이제야말로 진짜 음악을 즐길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경력을 쌓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자유로워진 만큼 내가 좋아하는 곡으로 프로그램을 짤 수 있어 연주회가 즐겁고 행복하다”고 했다.
 
 
  젊은 날을 돌아본 공연
 
지난 4월 20일과 22일 경기도 문화의전당(수원)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가진 첼리스트 정명화씨의 세계무대 데뷔 40주년 기념 연주회. 피아노 반주는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맡았다.
  첼리스트 정명화씨의 데뷔 40주년 기념 공연은 지난 4월 20일 수원과 4월 22일 서울에서 한 차례씩 있었다. 서울 예술의전당 공연이 일찌감치 매진되는 바람에 필자는 수원 경기도 문화의전당에서 열린 공연에 참석했다. 저녁 7시30분 공연이었고, 오랜 가뭄 끝에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이었다.
 
  1800여 석의 객석이 꽉 찬 가운데 이날의 주인공인 정명화씨와 우정의 반주자로 나선 피아니스트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나란히 등장했다. 어깨가 드러난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정씨는 손에 든 스트라디바리우스 첼로만큼이나 우아하고 기품 있어 보였다.
 
  첫 곡은 사무엘 바버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유럽의 전통적인 양식과 서정성을 담은 신낭만주의 작곡가 바버가 1932년 유럽을 여행하면서 만든 곡이다. 지그시 눈을 감은 그녀가 계곡물처럼 흐르는 피아노 선율에 맞추어 활을 켜기 시작했다. 청중은 곧 전통을 중시했던 바버의 음악 세계로 여행을 떠났다. 기교가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첼로 소리가 그녀의 요즘을 대변하는 듯했다. 거장의 원숙미가 묻어 났다.
 
  두 번째 곡은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말년에 헝가리로 여행을 떠난 슈베르트가 발명된 지 10년 만에 사라진 악기 아르페지오네를 위해 1824년에 작곡한 곡이다. 첼로와 기타의 특징이 섞인 이 악기는 음량은 작지만 연인끼리 소곤소곤 속삭이는 것 같아 ‘사랑의 기타’로 불렸다고 한다.
 
  정씨는 가난한 예술가가 대백작의 딸과 사랑에 빠진 여름날의 추억을 때론 아련하면서 슬프게, 때론 길을 잃고 헤매듯 격정적으로 연주했다. 습기 찬 마룻바닥을 뛰어다니는 피아노 소리를 안으로 슬픔을 삭인 첼로 소리가 끌어당겼다 놓았다 하는 느낌이었다.
 
  마지막 곡은 20대 초반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감성적이면서 순수함이 묻어 나는 곡이다. 정씨는 이 곡을 자신의 젊은 날을 회상하듯 서정적이면서 경쾌하게 해석해 냈다.
 
  모든 연주가 끝나자 한여름의 소나기 같은 기립 박수가 터졌고, 이에 화답하듯 그녀는 마스네의 ‘타이스 명상곡’을 비롯한 앙코르곡 3곡을 더 들려주었다. 공연은 밤 10시가 다 된 시각에야 끝이 났다. 밖에는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첼로의 여운을 달래듯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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