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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65)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韓人게릴라部隊 創設計劃과 中國의 臨時政府 支援方針 전환

손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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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國政府의 臨時政府不承認政策을 확인한 李承晩은 韓美協會를 중심으로 美國國民들을 상대로 한 전국적인 宣傳캠페인을 벌이기로 했다. 일찍이 그의 상투를 잘라 주었던 애비슨을 내세워 基督敎人親韓會를 조직하고, 올리버 博士로 하여금 韓國에 관한 저술을 하게 하는 한편, 韓吉洙 등 反對派들의 공격에 대처하기 위하여 「주미외교위원부통신」을 발행했다.
 
  李承晩은 1942년 6월에 새로 조직된 OSS로부터 韓國人靑年 50명의 추천을 요청받고 10월 초에 명단을 제출했다. 그는 美合同參謀本部에 韓國人게릴라部隊와 韓國軍事使節團을 설치할 것을 제의하고, 자신은 인도의 캘커타로 갈 계획을 세웠다.
 
  光復軍의 편성이 지지부진하자 金九는 蔣介石에게 中國軍事委員會를 맹렬히 비판하는 편지를 보냈다.
 
  7월에 華北朝鮮獨立同盟이 결성된 것을 계기로 國民政府는 韓國獨立運動 支援方針을 확정했다. 그것은 金九의 리더십 아래 각 政派를 통합시키는 한편 모든 政派를 臨時政府에 참여시킨다는 것이었다. 그 작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中韓文化協會가 결성되었다.
 
 

  (1) OSS(戰略諜報局)에 韓國人 50명 추천
 
 
  李承晩은 1942년 6월13일 오전에 워싱턴에 머물고 있는 국민정부 외교부장 宋子文과 만났다. 이날은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통하여 국내외 동포들을 상대로 한 그의 연설이 방송되기 시작하는 날이었다. 송자문과의 회담은 국민정부의 스위스주재 대사 겸 국제연맹 상주대표로 제네바에서 활동했던 胡世澤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호세택은 李承晩이 1933년에 만주사변[9·18전쟁] 문제를 다루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제네바에 갔을 때에 호의를 가지고 협조해 주었었다. 이 무렵 그는 12월에 외교부 상무차장으로 임명되기에 앞서, 워싱턴에 와서 태평양전쟁협의회 등 대미외교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학자인 주미대사 胡適은 9월에 귀국하기로 되어 있었다.1) 중국국민당의 조직부장 朱家?(주가화)는 金九의 요청으로 5월25일에 송자문과 호적 및 주미군사대표단장 熊式輝에게 李承晩을 소개하면서 앞으로 李承晩의 미국 정부에 대한 요구조건을 사전에 긴밀히 협조하고 상호 신뢰와 우의를 표하라고 타전했다.2)
 
  胡世澤의 주선으로 宋子文과 會談
 
   李承晩은 주미외교위원부의 서기 鄭雲樹를 대동하고 노스웨스트 V스트리트 1601의 중국대사관 사무실을 찾아갔다. 약속시간은 오전 10시였다. 대기실로 안내된 두 사람을 호세택이 맞이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송자문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자리를 권했다. 李承晩은 송자문에게 중국과 한국은 언제나 친구이며 동맹국이었고, 또 한국인들은 중국인들을 맏형으로 존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중국의 모든 지도자들이 힘자라는 대로 우리를 도울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송자문이 입을 열었다.
 
  『胡대사에게 몇 차례 선생을 뵙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李承晩은 제네바에서 胡박사를 알게 되어 기뻤으며 최근에 그와 흥미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고 말하고, 송자문과의 면담이 너무 늦게 이루어진 것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다.
 
  『좀더 일찍 뵙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부장께서 미국에 한국 정부를 승인하도록 권고해 주시라고 부탁하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이 한국 정부를 승인하면 우리는 적과 한결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가 너무 늦지 않았나 염려됩니다. 이제 승인을 받은들 무슨 효력이 있겠습니까?』
 
  송자문은 대답했다.
 
  『나라를 위하여 싸우는 데에 너무 늦은 때란 없는 법입니다. 한 나라의 생명은 개인의 생명과는 다릅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한국에 대해 매우 동정적이며 그 주장 등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李承晩은 성급했다. 그는 송자문의 말을 가로막았다.
 
  『말씀 도중에 실례입니다만, 루스벨트 대통령은 부장에게 한국상황을 조사해서 태평양전쟁협의회의 다음 회의에 보고하도록 요청했을 정도로 훌륭한 분입니다. 그러나 부장께서 우리에게 불리하게 보고하신 것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송자문은 보고서에서 중국에 있는 한국독립운동자들이 두 그룹으로 분열되어 있다고 보고했었다. 李承晩의 힐난에 대해 송자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 제가 여러분의 주장을 해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작성한 보고서는 중국인들과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저는 사실을 말해야 했습니다』
 
  李承晩은 미소를 머금으면서 말했다.
 
  『이른바 <다른 그룹>이란 몇몇 무책임한 개인들뿐입니다. 한국 국민들은 그들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들이라는 것을 밝힐 것입니다. 승인을 거부하기 위한 구실로 이러한 자들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오도되어 왔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조선의용대는 李靑天 총사령 휘하의 한국광복군과 통합했습니다.…』
 
  이번에는 송자문이 李承晩의 말을 가로막았다.
 
  『분열은 있었지요. 만일에 분열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들이 통합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저는 그에 대한 기록을 보고싶군요』
 
 
  會談內容을 「極秘」 文書로 臨時政府에 알려
 
對美交涉을 위하여 장기간 美國에 머물고 있던 國民政府 外交部長 宋子文〔「白凡金九全集(7)」(1999)에서〕.
  송자문은 중경에 있는 조선의용대 잔류 대원들이 중국군사위원회의 강력한 종용에 따라 한 달 전에 광복군에 편입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부장께서는 「차이니스 뉴스 서비스(Chines News Service)」의 중경발 특신을 못 보셨습니까?』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송자문은 李承晩에게 그 기사를 보게 해 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李承晩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자신의 말을 계속했다.
 
  『크롬웰(James H. R. Cromwell) 대사를 대표로 한 우리 미국인 친구들이 전국적인 홍보 캠페인을 시작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손놓고 앉아서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크롬웰씨와 선생의 다른 친구분들이 얼마 전에 저를 만나러 왔었습니다』
 
  李承晩이 일어서려고 할 즈음에, 정운수가 송자문을 보고 당돌하게 말했다.
 
  『한국인들의 분열을 말씀하십니다만, 중국인들 가운데에는 汪精衛[왕정위: 汪兆銘]와 그밖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비애국적인 개인들을 어떻게 중지시킬 수 있습니까?』
 
  왕정위는 1940년 3월에 南京에 일본의 괴뢰정권인 「國民政府」를 세우고 일본군에 협력하고 있었다. 1943년에는 일본과 동맹조약도 맺었다.
 
  송자문은 매우 놀라는 눈빛으로 정운수를 바라보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李承晩은 얼마쯤 당황해하면서 일어섰다. 송자문과 정중하게 악수를 나누고 방을 나왔다.
 
  호세택이 李承晩을 따라 나오면서 말했다.
 
  『저는 선생이 송부장을 이렇게 우호적인 방법으로 만나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중경에 있는 의용대의 통합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십시오. 韓吉洙는 질레트(Guy M. Gillett) 상원의원이 의회 회의록에 실린 자기의 라디오 연설문을 우리에게 보내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길수는 우리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거기에는 선생이 개인적인 원한도 없는데 자기를 선생의 그룹에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만일에 한국 국민들이 한길수에 대한 것을 폭로하는 성명을 내면 더 좋을 것입니다. 선생 때문에 다른 말썽이 생기면, 그것은 그에 대한 선생의 개인적인 원한문제로 간주될 것입니다』
 
  한길수는 5월27일이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60주년이 되는 날인 것을 계기로 미국인들에게 그 조약에 따른 미국의 도덕적 의무를 강조하는 방송 연설을 했었다. 그는 한국 임시정부가 중국에 수립되어 있다고 말하고, 한국이 스물일곱 번째의 대서양조약국으로 가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3) 李承晩도 한족연합위원회로부터 300달러를 지원받아 한-미조약 60주년을 선전하는 특별 활동을 벌였다.4) 李承晩은 호세택에게 뉴스와 전문 보고를 보내기로 다시 약속하고 작별했다. 李承晩은 송자문과의 회견내용을 영문으로 정리하여 임시정부로 보내면서 자필로 「극비(Strictly Confidential)」라고 표시했다.5)
 
 
 
韓吉洙를 國防工作奉仕員에서 解任

 
李承晩의 政敵인 中韓民衆同盟團의 美洲代表 韓吉洙〔유영익, 「이승만의 삶과 꿈」(1996)에서〕.
  한길수는 1942년 1월14일부로 미국 국방공작봉사원직을 사임한 뒤에 李承晩에 대한 공격을 더욱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었다. 그가 미국 국방공작봉사원직을 사임한 것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의 결의에 따른 것이었다.
 
  한길수의 행동에 대해서는 미-일전쟁이 발발한 뒤로 동포사회에서 더욱 논란이 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41년 12월28일에 소집된 국민회 북미총회 대표대회는 한길수가 한족연합회의 월급을 받고 다른 단체의 일을 하고 있으므로 그를 해임시킬 것을 한족연합위원회에 건의하기로 결의했고,6) 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는 1월6일에 韓始大와 宋憲澍(송헌주)를 워싱턴에 파견하여 李承晩과 한길수의 사무진행과 권한획정 및 외교방략의 구체적인 계획 등을 상의하게 했다.7) 워싱턴을 방문하고 돌아온 두 사람은 1월29일에 열린 한족연합회 집행부 특별회의에서 한길수와 관련된 이러저러한 소문들의 진상을 보고했다. 조사한 사항은 다섯 가지였는데, 그것은 두 사람이 한길수를 만나서 확인한 것이었다. 한길수는 하와이동지회와 국민회가 폐쇄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조선의용대후원회에 전보로 알린 것과,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국민회와 한족연합회 당국을 미국 관헌이 조사한다는 말을 듣고 이를 전보로 의용대 후원회에 알린 사실은 시인했다. 그리고 李承晩이 미국 관헌에게 체포되었다가 보증금을 걸고 석방되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그러면서 다만 어떤 곳에 편지할 때에 李承晩이 1931년경에 하와이 해군부와 어떤 계약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 계약 위반으로 벌금을 물게 되었던 사실을 말한 것뿐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한길수는 시애틀에 있는 한국인 두 사람이 체포되었다는 말을 듣고 전보로 알렸다는 것은 시인했다. 그리고 한국인 다수가 친일파라고 말했다는 소문에 대해서는 그런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이러한 보고와 함께 두 사람은 한길수가 뉴욕에 있는 동포들에게 자기는 한족연합위원회로부터 한 달밖에 월급을 받지 못했다고 하여 뉴욕동포들이 140달러를 거두어 주었는데, 나중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동포들 사이에서 말썽이 되고 있더라는 말도 했다.8)
 
  한길수는 하와이에 간다는 핑계로 한시대와 송헌주에게 사임청원서를 제출했는데, 두 사람의 보고를 받은 이날의 연합위원회 집행부 회의는 그의 사임청원을 수리하기로 결의하고, 그에게 보내는 매달 150달러씩의 활동비 지급도 중단했다.9) 한길수는 1월14일에 연합위원회 집행위원장 金乎에게 사임을 통보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그는 〈만일 내가 잘못 썼다면 나를 떠밀어 지옥에 보내주십시오. 나는 강제로 왜놈이라고 공식적으로 분류되기보다는 지옥에 있는 것이 더 행복할 것입니다〉라고 적었다.10) 그것은 그가 일본의 이중첩자였다고 알려져 있는 데 대한 항의였다.
 
  한길수가 사임하자 그를 지원하던 중한민중동맹단과 조선의용대후원회도 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하여 연합위원회는 결성 이후 처음으로 분열되기 시작했다.11)
 
 
  國務部官吏를 委員長으로 한 5人委員會 設置 제의
 
  한길수는 4월20일에 헐 국무장관에게 미국과 중국에 있는 한국지도자들의 합동방안을 제의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에서 그는 李承晩의 반공주의에 대해 사실을 왜곡해 가면서 맹렬히 비난했다. 한길수는 李承晩과 그의 추종자들은 1920년대 후반까지 실패를 거듭한 뒤에 새로 젊은 무력 투쟁자들이 등장하자 이들을 공산주의자와 반역자로 낙인찍었다고 말했다. 조선의용대 대장 金元鳳을 李承晩이 공산주의자라고 하여 임시정부에서 배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 安昌浩도 공산주의자로 몰렸고, 朴容萬은 李承晩의 추종자에게 사살되었다고 적었다. 그래놓고도 李承晩 자신은 소련의 자금지원과 승인을 받기 위해 1934년에 모스크바에 갔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길수는 1941년 이후로 미국이 히틀러와 싸우도록 소련을 돕는 것을 두고 루스벨트와 미국무부 관리들을 공산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또 李承晩이 金奎植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김원봉과 협력한다고 해서 공산주의자로 몰아 임시정부에서 몰아내었다고 주장했다.
 
  한길수는 자신들은 한국과 일본과 만주에서 활동하는 공작원 1,500명을 두고 있다고 과장했다. 그러면서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 있는 한국인 단체들이 공동전선을 형성할 수 있도록 5명으로 구성되는 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李承晩과 李承晩 쪽의 한 사람, 자기와 자기 쪽의 한 사람, 그리고 미국관리 한사람이 위원장으로 참가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중경의 임시정부도 이러한 방법으로 새로 조직해야 된다고 그는 주장했다.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은 12명으로 제한하되, 중경에 있는 독립운동자들 가운데에서 李承晩과 金九가 지명하는 6명과 김원봉과 김규식이 지명하는 6명으로 구성하고, 중국관리 2명을 고문으로 참여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일 현재의 李承晩과 金九 그룹이 유임한다면 나머지 여섯 자리는 김원봉과 김규식의 리더십 아래 있는 군인들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12)
 
  이러한 제안을 李承晩이나 金九가 받아들일 턱이 없었다. 한길수도 그러한 사정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실추된 자신의 위신을 만회하려는 선전의 일환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한길수 개인에 대해서 그다지 신뢰하지 않고 있던 미국무부 관리들은 그의 이 제안에 대해 실현 가능성을 의심하면서도 일단 검토해 볼 만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蔣介石이 朝鮮義勇隊 解散시켰다고 李承晩이 말했다고 선전

 
  국무부의 호스킨스(Harold B. Hoskins) 보좌관은 한길수의 편지를 보고 나서 COI(Coordinator of Information: 정보조정국)의 굿펠로(Preston M. Goodfellow) 대령을 만나서 COI의 한길수에 대한 평가를 물어보았다. COI는 얼마 전에 한길수를 태평양연안 군사지역의 일본인 상황을 조사하도록 보낸 일이 있었다. 굿펠로는 한길수의 보고는 거의 가치없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한길수는 인터뷰와 연설에 더 신경을 썼는데, 그것도 허황한 내용들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한 연설에서 4월 중순쯤에 일본이 서부해안을 공격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의 상황전개는 정반대였다. 4월19일에 미공군기에 의한 최초의 동경폭격이 있었기 때문이다.13)
 
  극동국 고문 혼벡(Stanley K. Hornbeck)의 의견에 따라, 헐은 5월6일에 주중대사 고우스(Clarence E. Gauss)에게 한길수의 편지 내용을 알리면서, 국무부는 李承晩에게 한두 명의 국무부관리와 함께 한길수를 비공식적으로 만날 용의가 있는지 타진할 것을 고려 중이라고 말하고, 그의 제안에 대한 중국 정부의 반응을 알아보도록 전보로 훈령했다.14) 고우스의 보고는 부정적이었다. 중국외교부 차장 傅秉常(부병상)은 고우스에게 중국 정부도 두 그룹을 통합시키려고 노력했으나 양쪽의 사소한 비타협적 태도로 말미암아 실패했던 일을 설명하면서, 미국 정부의 통합노력도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혼란스럽게 만들지 모른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15) 이때 이후로도 미국 정부는, 재미한국독립운동자들의 통합의 필요성은 계속 강조하기는 했으나, 더 이상 그것을 직접 시도하지는 않았다.16)
 
  한길수는 李承晩에 대한 비방을 멈추지 않았다. 5월6일자로 된 「여러분 앞에 드림」이라는 전단에는 李承晩이 워싱턴에서 열렸던 자유한인대회에서 蔣介石이 조선의용대를 신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해산시켰다고 연설했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17)
 
  李承晩은 이러한 한길수의 행태에 대해 몹시 괘씸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독립운동자들의 분열을 거론하는 송자문의 말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OSS로부터 韓國人靑年 50명 추천 의뢰받아
 
  6월 하순에 이르러 李承晩은 그가 강력히 주장하고 기대해 온 중요한 일을 다시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국내와 일본 등지로 파견할 한국인 공작원을 비밀리에 모집하여 특수훈련을 시키는 일이었다. 그의 추천으로 COI의 101지대원이 된 張錫潤은 버마(現 미얀마)의 밀림지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활동하고 있었다. COI가 해체되고 6월22일에 새로 조직된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전략첩보국)는 6월 하순에 李承晩에게 한국인 청년 50명을 추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때의 사업 내용은 전모가 밝혀져 있지 않으나 李承晩의 수취인 이름이 없는 7월17일자 영문 〈비밀편지〉로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내가 알려드리려는 것은 군사사항이며 아시다시피 전시에는 군사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철저히 비밀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전쟁에 참가하기를 원하는 20세에서 44세까지의 한국인 50명이 필요합니다. 다른 조건만 갖추어지면 미국 시민권자나 연령제한은 문제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 50명 가운데에서 10명은 라디오 무선통신을 위한 훈련을 받을 것입니다. 다른 10명은 해상 전술훈련을 받을 것이고, 나머지 30명은 여러 가지 중요한 작전을 지도하고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될 것입니다.
 
  이 지원용지의 공란을 채워서 가능한 한 빨리 주미외교위원부로 보내 주십시오. 지원자들은 선발되면 훈련장으로 보내어지고 모든 경비는 미국 정부가 부담하여 훈련을 받을 것입니다. 훈련은 2개월쯤 걸리고 복무준비가 끝나는 대로 각자는 미국, 중국, 한국 또는 그밖의 지역에 배치되어 종신고용으로 복무하게 될 것입니다.
 
  각 지원자들은 주미외교위원부가 추천을 합니다. 외교위원부가 심사에서 매우 중요시하는 것은 지원자의 이력, 인적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애국심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은 보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일이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는 조언을 받고 있습니다. 이 일이 성과가 만족스러우면 한국인들은 이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인들이 원하는 것은 그들의 역할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야 합니다.…>18)
 
  李承晩은 이어 7월28일에는 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부위원장 金秉堧(김병연)에게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내고 있다.
 
  〈한인 적임자를 천거하기 위하야 사용할 영어로 만든 청원서 30매를 우편으로 지난 7월24일에 부송하였사오니, 그 청원서를 받는 대로 속히 매 개인이 두 벌씩 기록하야 즉시 이곳으로 회송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인선문제에 있어서 애국적 정신이 풍부하고 재능이 있는 분들로서 주의하야 천거하시기를 바라나이다. 청원서를 더 청구하였사오니, 오는 대로 또 부송하겠습니다. 청원서가 50명이 거진 다 차가니, 할 수 있는 대로 속히 부송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전쟁시기라 군사적 행동을 민간에 발표할 수 없으므로 자세한 말씀은 못 합니다. 애국적 정신과 지도적 정신과 재능이 있고 조국과 연합국을 위하야 군사적 행동에 공헌하겠다면 적재적소에 임명이 될 줄 아나이다.〉19)
 
  7월24일자 편지의 문면으로 보거나 이 편지와 앞의 영문편지가 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문서에 들어 있는 점으로 보아 앞의 편지도 연합위원회 인사에게 보낸 것이었을 것이다.
 
 
  林炳稷을 駐美外交委員部 武官으로 임명
 
  위험이 따르게 마련인 특수임무를 수행할 인물을 선발하는 기준으로 애국심을 특별히 중요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李承晩은 워싱턴에 와 있던 林炳稷을 9월에 대령계급의 주미외교위원부 무관으로 임명하여 로스앤젤레스로 다시 파견했다.20) 임병직은 워싱턴으로 오기에 앞서 5월30일에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에 재류하는 한국인 20여 명이 샌프란시스코 한인경위대를 결성하는 데 앞장섰었다.21) 그보다 앞서 2월에는 로스앤젤레스에 78명이 참가한 로스앤젤레스 한인경위대가 결성되어 있었다. 두 한인경위대는 캘리포니아주 국방경위군의 요청에 따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군사운동의 일환으로 결성한 것이었다.22) 그리하여 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는 3·1절 행사 때에는 한인경위대 관병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하는 한편 임시정부에 그 관리권을 요청하여 3월31일자로 인허를 받았다.23) 그것은 임시정부가 한인경위대를 광복군 산하의 군사조직으로 인준한 것이었다.
 
  캘리포니아주 국방경위대는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중국인들과 필리핀인들에게도 경위대를 조직하게 했었다. 4월26일에 거행된 인준식에서 세 나라 경위대는 캘리포니아주정부의 인가증을 받고 캘리포니아주 국방경위군의 부속군대로 정식으로 편성되었다. 이날 한인경위대는 맹호 휘장의 연대기를 받으면서 맹호군(The Tiger Brigade)으로 불리게 되었다.24) 7월에는 하와이에서도 80명가량의 동포들로 맹호군이 조직되었다.25)
 
  이처럼 군사활동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李承晩의 OSS훈련생 모집은 쉽사리 동포청년들의 호응을 얻었다.
 
1942년 4월에 캘리포니아州政府의 인증을 받은 韓人警衛隊(猛虎軍)〔金元容, 「在美韓人五十年史」(1959)에서〕.
 
 
  『外交委員部와 韓美協會는 문을 닫고 外國으로 가라』
 
  한길수의 李承晩 공격은 집요했다. 그는 한미협회의 활동을 비판하고 나섰다. 꼬투리는 한미협회 회장 크롬웰이 헐과 주고받은 편지문제였다. 그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라는 조선민족혁명당 명의의 전단을 만들어 헐이 크롬웰에게 보낸 5월20일자 답신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크롬웰씨에게 보낸 미국무경 헐씨 글을 보면 조선민족은 누구나 씨를 좋은 낯으로 대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그 글의 내용을 살펴보면 외교부의 정책을 헐씨는 손샅같이 꿰뚫고 한 편지일다. 헐씨의 글을 읽고 그 뜻을 바로 해석할진대 크롬웰씨는 외교부에 출입할 면목이 없을 터일다. 따라서 외교부니 한미협회니가 미국 정부를 향하여 외교를 하고저함이 최고의 목적인 바 헐씨의 글을 보면 다시는 무슨 면목으로 대할 수가 없이 되었다. 그런즉 외교부와 한미협회는 워싱턴에서 문을 닫치고 행장을 수습해 가지고 차라리 다른 나라로 옮아가는 것이 상당한 일일다. 동포여러분, 헐씨의 글을 보고도 그냥 외교부의 현 책임자들을 후원하며 발전을 도모하시렵니까?〉26)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워 임시정부의 승인을 거부하는 미국 정부 책임자에게 전직 대사였던 미국인이 임시정부 승인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낸 것을 한길수는 李承晩의 큰 실책인 것처럼 힐난한 것이었다. 전단에는 그밖에도 예의에 벗어난 비아냥도 적혀 있었다.
 
  한길수는 이어 7월3일에는 헐에게 크롬웰과 李承晩을 비난하는 편지를 썼다. 그는 특히 크롬웰이 〈한국의 젊은이들은 전쟁터로 뛰쳐나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으나, 李承晩은 미국 정부가 사실상의 한국 정부를 승인할 때까지 그들을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대목을 지적하면서, 한국인들은 이 유치한 성명에 반대한다고 적었다.27) 그러나 한길수의 이러한 행동은 곧 동포들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 각지의 동포들뿐만 아니라 멕시코, 쿠바 등지에 재류하는 동포들도 한길수의 전단을 보고 분개했다.28)
 
 
  美國國民 상대로 宣傳캠페인 벌이기로
 
  미국 정부의 임시정부 불승인정책을 확인한 李承晩은 새로운 계획을 구상했다. 그것은 한미협회를 중심으로 하여 미국 국민들을 상대로 전국적인 선전캠페인을 벌이는 것이었다. 이 일을 성과 있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5,000달러의 비용이 필요할 것으로 계상했다. 李承晩은 8월 들어 심복인 하와이의 한인연합위원회 의사부 위원장 李元淳과 동지회기관지 「태평양주보」의 주필이면서 의사부 재정검사를 맡고 있는 金永基,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의 연합위원회 집행위원장 김호에게 자기의 구상을 밝히고 지원을 요청했다. 5,000달러를 우선 연합위원회에서 빌려 주면 한미협회가 모금운동을 벌여서 갚겠다고 했다. 李承晩의 생각으로는 그 정도의 자금은 의사부와 집행부가 절반씩 부담하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와이의 연합위원회 의사부는 처음에 이번 일이 앞으로 동포사회의 반감을 초래할 수 있을지 모르므로 단념해 달라고 요청했다. 李承晩은 일이 이미 시작되었고 또 반감을 초래할 사안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을 믿어 달라고 말했다. 의사부는 또 집행부와 협의해서 일을 추진하기를 원한다고 했으나, 李承晩은 외교위원부는 민간단체의 간섭을 받지 않을 것이며 집행부 때문에 정부 일을 지연시킬 수 없다면서 곧 송금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의사부는 마침내 2,500달러를 송금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집행부는 그만한 거액을 마련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李承晩의 계획을 일단 반대했다. 그러면서 중경 특파원으로 선정되어 워싱턴으로 가는 길에 로스앤젤레스에 와 있는 의사부의 田耕武에게 외교위원부의 재정과 활동상황을 조사해 줄 것을 요청하고, 그 결과에 따라 李承晩의 요구를 재검토하겠다고 의사부에 통보했다.29) 그러나 그것은 李承晩과 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의 협력 관계가 결딴나는 실마리가 되었다.
 
 
  韓族聯合委員會에서 外交委員 2명 추가로 추천
 
  한족연합위원회의 중경특파원 파견계획은 4월3일부터 개최된 제1차 전체위원회에서 결의된 것이었다. 회의는 하와이 의사부 대표로 참석한 이원순과 趙炳堯(조병요)가 본토 순방을 하는 동안(4월8일부터 5월3일까지) 정회했다가 5월4일부터 나흘 동안 속개되었다. 이때에 이원순은 워싱턴에 와서 李承晩을 만나고 돌아갔다.
 
  그런데 연합위원회의 중경특파원 파견목적이 李承晩이 추진하고 있던 OSS요원 훈련계획과 거의 비슷한 것이어서 의아스럽다. 그것은 북미주에서 미국 정부가 정하는 한인대표자 서너 명을 중경에 파견하여 한국 임시정부의 지도 아래서 한국, 일본, 만주 등지에서 정탐·파괴·선전 등의 활동을 할 비밀단을 조직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활동에 필요한 비용은 미국 정부와 교섭하고, 교통 등의 편의는 다른 연합국들의 협조를 얻게 하며, 중국 영토 안에 있는 한국인들로 비밀기관을 조직하게 하겠다고 했다. 연합위원회는 7월10일자 공문으로 그러한 계획을 李承晩에게 알리면서 그의 의견을 물었다.30) OSS에 추천할 지원자 50명 모집에 열중하고 있던 李承晩이 어떤 답장을 보냈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때의 한족연합위원회 제1차 전체위원회는 또 주미외교위원부에 위원 두 사람을 증원하기로 하고, 3·1운동 무렵에 李承晩과 함께 활동했던 鄭翰景과 연합위원회 집행위원장 김호를 추천했는데, 그 사실을 통보받은 李承晩은 두 사람을 비공식으로 추천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말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조건을 못박았다.
 
  (1) 이번 추천이 전례가 되지 않을 것.
 
  (2) 외교위원부에서 일정한 정책을 가지고 일을 진행하는데, 이 정책이나 사무처리에 장애나 모순이 있는 경우에는 부득이 해임해도 이를 감수할 것.
 
  (3) 외교나 선전 등의 사무 가운데 공개하지 않아야 할 일은 이를 어떤 개인이나 단체에 알리지 못함.
 
  (4) 임시정부와 외교위원부의 위신을 높이는 것이 우리 일반의 책임이므로 다른 주의나 단체를 대표하여 이 책임과 모순이 되거나 혹 반대분자와 혼잡되어 우리 정책에 손해되는 등 폐단이 없도록 할 것.
 
  (5) 양씨의 월봉은 각각 매월 200달러로 하되 이곳에 도착하여 일을 보는 날로 위시하여 시무하는 동안 계속함.31)
 
1942년 4월의 在美韓族聯合委員會 제1차 전체위원회에 참석한 대표들.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집행위원장 金乎, 그 다음이 하와이에서 온 의사부 위원장 李元淳〔유영익, 「이승만의 삶과 꿈」(1996)에서〕.
 
  직접 募金活動 벌일 뜻 내비쳐
 
  李承晩은 같은 내용의 공문을 하와이의 의사부에도 보냈다. 李承晩은 이 공문에서 외교위원부가 직접 동포들에게 재정지원을 요청하면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을 것인데, 한족연합위원회와의 협동을 위하여 할 일을 못 하고 앉았으려니까 자기네의 사업을 전폐하고 헌신하는 미국친구들 보기가 민망하다고 적었다. 이것은 연합위원회가 외교위원부의 활동비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직접 모금 활동을 벌이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었다. 1941년 6월15일부터 1942년 5월30일까지의 주미외교위원부의 「재정보단」을 보면, 수입총계가 7,307.41달러, 지출총계가 7,112.90달러였고, 그 가운데에서 사업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한미친우경비 1,915.53달러뿐이었다. 나머지는 사무실 임대료 등 사무실 유지비와 봉급이었다. 李承晩은 봉급으로 2,504.58달러를 받았는데, 그것은 한 달에 200달러에 해당하는 돈이었다.32)
 
 
  「주미외교위원부통신」 發行하기로
 
  李承晩은 한번 결심하면 바로 실행하는 성품이었다. 그는 우선 동포들을 상대로 한길수의 선전 전단 등에 대처할 통신 매체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리하여 9월10일부터 1주일 또는 열흘에 한 번씩 「주미외교위원부통신」을 한글타자로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난날 「구미위원부통신」과 체제가 같은 것이었다. 그는 「주미외교위원부통신」을 발행하는 목적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동안 몇 해를 내가 침묵하야 온 것은 첫째로 도울 사람이 없었으므로 시간을 얻지 못한 것이 큰 이유이고, 또는 미주 하와이와 한인 각 단체가 연합하야 정부를 받치기로 한 이후로 중간에 불량분자들이 나서 내외국 인심을 혼란시키기에 이르매 내가 침묵하고 있으면 민중의 공론으로 정돈되기를 믿고 있는 것인데, 지금에 보면 민중을 지도하는 이가 없으매 어떤 것을 따를지 알 수 없다는 비평이 많으니, 내가 책임을 가지고 나서서 우리 일반민중이 어떻게 해야 광복을 속성하겠다는 한찰(翰札)을 계속적으로 발표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통신」을 영문으로 발행하지 않고 한글로 발행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글을 국문으로 쓰나니, 그 이유가 첫째는 영문을 못 보는 동포도 다 볼 수 있게 하기를 위함이오, 둘째로는 우리의 토의하려는 사건은 대부분이 우리 한인내정에 관계되는 것이니, 영문으로 발간하야 외국인의 이목에 들어가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한인의 속옷을 내어걸어서 세인에게 광고하려는 한인들도 없지 않겠지마는 이는 민족을 욕되게 함으로써 저희 사사 영광을 도모할까 하는 무지 몰각한 무리들의 행위지마는 애국애족하는 한민으로서는 결코 못 하는 것입니다…>33)
 
  이처럼 이때의 「외교위원부통신」은 동포들을 상대로 주로 반대파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단단히 마음먹고 발행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李承晩은 「외교위원부통신」의 원고를 직접 썼는데, 거기에는 그의 투쟁적 기질이 남김없이 드러나 있다. 그리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족연합위원회는 「외교위원부통신」의 발행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새로 외교위원으로 추천된 정한경은 9월21일에 워싱턴에 도착했다.34)
 
 
  올리버 博士를 카페테리아로 초대해
 
1942년부터 李承晩을 도운 올리버〔유영익, 「이승만의 삶과 꿈」(1996)에서〕.
  9월15일 점심시간에 스태거스와 함께 외국기자클럽에 갔던 李承晩은 거기에서 국무부 극동국 고문 혼벡을 만났다.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스태거스는 혼벡에게 한미협회는 국무부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알렸다.35)
 
  9월 중순 어느 날 李承晩이 펜실베이니아주의 루이스버그 장로교회 목사 정킨(Edward Junkin)의 소개로 올리버(Robert T. Oliver)를 만나 것은 더없는 행운이었다. 정킨 목사는, 앞에서 보았듯이, 李承晩에게 펜실베이니아주 출신 하원의원 패디스(Charles I. Faddis)를 소개해 주었던 사람이었다.
 
  루이스버그에 있는 바크넬 대학교(Bucknell University) 교수였던 올리버는 교수직을 한동안 휴직하고 워싱턴에 와서 식량관리계획처(Food Conservation Program)의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다. 李承晩은 백악관과 옛 국무부에 인접한 라파예트공원 광장을 바로 벗어난 코네티컷 애비뉴의 아래쪽에 있는 숄 콜로니얼 카페테리아(Sholl’s Colonial Cafeteria)로 올리버를 점심에 초대했다. 이 카페테리아는 급한 점심을 들면서 의견 교환과 정책 비교를 하는 중급관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올리버는 한국에 대하여 그다지 알지 못했다. 그러한 그에게 李承晩은 4,000년에 걸친 한국의 역사에 대하여 설명했다. 李承晩은 한국은 유럽보다 훨씬 앞서서 금속활자와 나침반과 4절지 112권의 백과사전을 사용했고, 중국문자나 일본문자와는 전혀 다른 스물여섯 자의 문자를 발명한 사실 등을 들었다. 그리고 러-일전쟁 뒤에 일본에 강제로 점령당하고, 한국인들은 자기네 말도 사용하지 못하고, 심지어 그들 자신의 이름, 그들의 문화, 그들의 행동, 그들의 사고방식까지 일본식으로 하도록 강요되었다고 설명했다.
 
  올리버는 李承晩에게 매료되었다. 그는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는 잘 선택되고 흠잡을 데 없이 분명한 단어를 구사하면서 힘들이지 않고 분명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그 낱말들도 그의 온몸으로 나타내는 표현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의 용모는 표정이 풍부하고, 눈은 빛났으며, 눈과 입 언저리의 주름은 멋진 유머와 열의를 나타내고 있었다. 내가 받은 가장 큰 인상은 억제된 위엄―― 단호하기는 하나 완강하지 않은 침착과 자신감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다스리면서 남을 다스리는 사람이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또한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했고, 나의 반응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인 것처럼 하는 그의 말은 확신을 나타내면서도 확인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는 의사소통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아주 능숙했다.〉36)
 
  붐비는 카페테리아의 식탁에 앉아서 李承晩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올리버는 큰 소리로 말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써서 출판하지 않으십니까? 미국인들이 알기만 하면 도와줄 것입니다』
 
  그제서야 李承晩은 올리버를 만나고자한 속내를 드러냈다.
 
  『나는 저술가가 아닙니다. 당신이 그 일을 하면 어떻습니까?』
 
  이때부터 올리버는 23년 뒤에 李承晩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李承晩의 가장 특별한 친구이자 보좌역이 되었다. 올리버의 저서 「李承晩――神話에 가려진 人物(Syngman Rhee――The Man Behind the Myth)」(1960)은 李承晩의 구술을 토대로 하여 저술된 대표적인李承晩 전기이다.
 
 
  애비슨 앞세워 基督敎人親韓會 조직
 
  李承晩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9월22일에는 그의 초청으로 애비슨(O. R. Avison: 魚丕信)이 워싱턴으로 왔다. 일찍이 李承晩의 상투를 잘라 준 것을 비롯하여 미국식 민주주의 생활방식에 대한 李承晩의 눈을 뜨게 해주었던 애비슨은 세브란스의전과 연희전문학교 명예교장직을 마지막으로 43년 동안의 한국 선교생활을 마치고 1935년에 미국으로 돌아와 있었다.37) 李承晩은 애비슨을 앞세워 한국에 파견되었던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한미협회와는 별도의 기독교인 친한회(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기로 한 것이었다. 李承晩은 이 단체를 새로 조직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조선독립을 위하야 힘써야 하겠다는 주의가 종교관념으로 발생되어 조선인들과 합작하야 임시정부를 도와 미국 각교회 중에 유력한 단체를 조직하야 후원이 되어야 지금 승인을 얻는 데도 도움이 되려니와, 전쟁이 필한 후에도 조선에 대하야 불공정한 일이 있거나 혹 조선인들에게 억울한 사정이 생길 때에는 항의와 변론으로 극력 옹호(하게)하자는 목적이다.…〉38)
 
  이처럼 李承晩은 전후에 전개될 상황까지 염두에 두면서 기독교인친한회의 결성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애비슨은 이미 82세의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李承晩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는 「친애하는 친구들에게(Dear Friend)」라는 장문의 편지를 써서 선교사 등 한국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미국인 600명에게 발송했다. 애비슨은 이 편지에서 아시아에 기독교 문명을 전파하는 일은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된 한국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하고, 또 한국인들의 대다수는 李承晩을 그들의 지도자로 신뢰하고 있다고 썼다.39) 이렇게 하여 조직된 기독교인친한회의 1943년 2월 현재의 집행부를 보면 아메리칸 대학교 총장 더글러스(Paul F. Douglass)가 회장을 맡았고, 애비슨은 서기 겸 재무를 맡았다. 서기는 피치(George A. Fitch) 부인이었고, 재무는 윌리엄스, 법률고문은 스태거스였다. 이처럼 애비슨 말고는 모두 한미협회의 간부들이었다. 李承晩은 한미협회의 이사장 해리스(Frederick Harris)와 함께 이사로 참가했다. 이사진에는 연방대법원 판사 머피(Frank Murphy) 등 저명 인사들이 포함되었다.40)
 
 
  OSS에 韓人靑年 50명 名單 제출해
 
  그러나 선전캠페인보다도 李承晩이 더 열성을 기울인 것은 극동지역에 침투시킬 게릴라부대를 조직하는 문제였다. 그는 10월 초에 OSS가 요청한 한국인청년 훈련지망자 50명의 명단을 OSS에 제출했다. 이어 10월10일에는 굿펠로에게 자기가 작성한 미국 본토 및 하와이의 한국인 청년 훈련계획서를 합동참모본부회의에 제출해 달라고 부탁했다. 훈련이 끝나면 극동전역사령부와 한국독립군 사이에서 연락공작을 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 계획이 미국무부와의 협의를 거쳐 무기대여(Lend Lease)당국의 승인을 획득했다고 덧붙였다.
 
  또한 李承晩은 이미 추천한 50명 이외에도 지원자가 500명도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극동에서는 게릴라 전술에 익숙한 한국군 2만5,000명을 극동전역사령부에 배치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이 계획이 승인되면 자기는 한미협회의 크롬웰과 함께 인도의 캘커타로 가겠다고 했다. 그곳에서 광복군총사령 李靑天과 연락하여 임시정부 주석 金九와 필요한 사람들을 캘커타로 오게 하여 스틸웰 중장에게 제공할 정확한 사실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41) 요컨대 임시정부는 중국에 있는 한국인들로 한국인 게릴라부대를 조직하여 미국의 지휘 아래에서 운영하고, 워싱턴의 주미외교위원부는 예하에 재미한국인들로 구성된 한국군사사절단(Korean Military Mission)을 조직하여 미군과의 연락을 담당한다는 것이었다. 李承晩은 극동의 게릴라부대 창설계획은 「A계획」이라고 하여 필요한 장비와 무기의 목록까지 자세히 적고, 한국군사사절단 설치계획은 「B계획」이라고 하여 필요한 인원과 한 달 운영비 3,190달러의 예산 명세까지 자세히 적어서 제출했다.42)
 
  李承晩의 제안을 두고 굿펠로, 크롬웰, 제이 윌리엄스, 李承晩 네 사람이 협의를 가졌다. 李承晩과 크롬웰이 먼저 캘커타와 중경에 다녀오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육군의 협조가 없이는 항공 여행이 불가능했다. 크롬웰이 육군의 마셜(George C. Marshall) 장군을 만나서 교섭하기로 했다. 그러나 크롬웰은 도중에 해군의 레이히(William D. Leahy) 제독을 먼저 만나 보기로 했다. 크롬웰은 10월24일에 레이히의 보좌관 프리즈먼(Freeseman) 중령을 장시간 만났다. 프리즈먼은 李承晩의 제안에 대해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스틸웰 장군뿐이라는 것이 레이히 제독의 생각이라고 전했다. 李承晩의 제안은 OSS의 권고와 지원에 따라서 스틸웰이 결정할 문제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캘커타와 중경행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43)
 
 
  對馬島를 돌려받아야
 
  OSS는 李承晩이 추천한 50명 가운데에서 12명을 선발하여 워싱턴으로 보냈다. 12명 가운데 1명은 신체장애로 탈락되고, 나머지 11명은 12월7일부터 훈련에 들어갔다.44) 이들 가운데 소정의 훈련과정을 마친 사람은 9명이었다.
 
  12월7일은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 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 李承晩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어, 금년의 12월7일은 미육군부에 의하여 한국 국민들이 대일전을 위한 훈련을 시작한 날로 기록될 것이므로 이 <치욕의 날>에 각하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보낸다고 적었다. 비록 그 수는 적으나 목적은 아시아에 있는 한국의 방대한 인적 자원을 활용하여 섬나라의 야만인들을 쳐부수는 데 있다고 李承晩은 말했다.45) 李承晩은 귀국하는 호세택의 요청으로 작성한 자신의 각서의 초본을 동봉하면서 읽어 주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호세택은 외교부 상무차장으로 발령받고 귀국하면서 李承晩에게 한국 임시정부의 목적을 문서로 작성해 줄 것을 요청했다. 李承晩은 각서에서 임시정부의 당면 목적은 대일전쟁에서 연합국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1) 한국광복군을 전쟁무기로 적절히 무장시키고, 2) 극동지역의 한국인 인력자원을 활용하여 독립군을 증강시키며 3) 적에 대항하여 효과적인 파괴공작과 혁명활동을 착수할 수 있는 첩보부대를 국내와 국외에 설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궁극적인 목표는 일본의 군국주의 체제의 완전한 해체라고 말하고, 그 다음에는 다음과 같은 조치들이 뒤따라야 한다면서, 1)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추방 2) 일본에서 노역에 동원되고 있는 한국인들의 송환 3) 일본인들이 약탈해 간 서적, 문서, 예술품의 반환 4) 일본인들의 어업, 운항(항해 및 항공), 상업의 제한 5) 對馬島46)의 반환 6) 지난 37년 동안의 약탈과 앞으로 있을 군사행동으로 발생할 파괴에 대한 배상의 여섯 가지를 들었다.
 
 
  헐과의 面談要請 다시 거절당해
 
  이처럼 李承晩은 이 시점에서 전후 일본과 교섭할 항목을 정리해 놓고 있었다. 이 요구사항들은 뒷날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 때에 대부분 한국 정부가 요구한 기본항목들이었는데, 이때의 李承晩의 요구사항 가운데 대마도가 한국고유의 영토로 포함되어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李承晩은 또 전후에 새로 등장할 세계에서 한국은 극동의 평화를 보장하는 데 가장 영향력 있는 나라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각서에 적었다. 그는 지금도 기독교인이 100만 명이 넘는 한국은 동양에서 가장 큰 기독교 요새라고 말하고, 앞으로 유교의 교리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함께 융합하는 큰 용광로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47)
 
  李承晩은 12월31일에 헐에게 다시 짤막한 편지를 보내어 만나고 싶다는 뜻을 겸손하게 전했다.
 
  〈저는 거의 13개월 동안 귀부가 2,300만 한국인의 전쟁잠재력을 이해하도록 설득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지금 개인적으로 장관을 찾아뵙고 설명드릴 수 있겠습니까?〉48)
 
  장관실에서는 李承晩에게 전화를 걸어 헐은 격무로 만나기 어려우므로 벌 차관보나 혼벡을 만나라고 알려왔다. 그것은 李承晩이 중경특파원 파견문제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갈등을 빚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여 갈등이 해소될 때까지 장관의 면담을 보류하는 것이 좋겠다는 극동국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49)
 
 
 
  (2) 華北朝鮮獨立同盟 結成과 中國政府의 臨時政府 支援方針 전환
 
 
  중국군사위원회의 주동으로 중경에 남아 있는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된 뒤에도 광복군 편제문제는 제대로 진척되지 않았다. 광복군 부사령 겸 제1지대 대장으로 임명된 金元鳳은 독단적인 행동으로 총사령 李靑天과 마찰을 빚고 있었다. 김원봉은 제1지대장 자리를 자신의 심복인 宋壽昌에게 넘겨주면서 이청천의 동의도 받지 않았고, 이에 대해 이청천은 趙素昻의 동생 趙時元을 제1지대의 정치지도원으로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김원봉과 송수창은 이청천이 자기들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마음대로 발표한 인사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하고, 송수창은 제1지대장직을 사임했다.50) 金九는 이러한 일들이 광복군에 대한 중국군사위원회의 일관성 없는 정책과 함께 김원봉과 가까운 군사위원회 인사들이 그를 부추겨 내부분열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51)
 
 
  孔祥熙와 吳鐵城은 서로 責任 미루어
 
  무엇보다도 절박한 것은 자금문제였다. 金九는 국민당 조직부장 朱家?(주가화)를 통해 미화 50만 달러의 신용차관을 요청했다. 주가화는 金九에게 행정원 부원장 겸 재정부장 孔祥熙와 상의해 보라고 했다.52) 金九는 공상희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고, 그가 金九 자신이나 임시정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 金九는 6월24일에 주가화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어, 초면에 중요한 문제를 꺼내면 공상희가 귀담아 듣지 않을 우려가 있어서 망설여진다면서 주가화가 직접 공상희를 만나서 상의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면서 金九는 임시정부 승인문제와 광복군 편성문제가 난관에 봉착한 상황에서 느끼는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몇 년 동안이나 노력했던 한국광복군 문제는 근일에 와서는 거의 만회할 수 없는 국면에 이르렀고, 내외에서 바라는 우리 임시정부의 승인문제도 기약도 없이 아득한데다 대내외적으로 해야 할 활동공작도 역시 물자의 결핍으로 하나도 추진하지 못하고 앉아서 좋은 기회를 놓치고 있습니다. 실망되는 나머지 자신의 무능이 부끄러워 장차 인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단지 이러한 최후의 슬픈 소리를 제가 가장 신뢰하는 선생께 부득불 피력진술하오니 살펴보시고 방향을 지시하여 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53)
 
  주가화는 공상희를 직접 방문하여 金九와의 면담을 주선해 주었다.54) 金九는 7월16일 정오에 공상희의 집을 방문하여 임시정부에 대한 물자지원문제를 상의했다. 이 자리에는 중국 국민당 비서장 吳鐵城도 참석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책임을 미루었다. 결국 金九는 蔣介石의 명백한 지시가 없는 한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방법은 장개석을 면담하는 길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주가화에게 편지를 보내어, 지금 우리 쪽의 일반운동이 조우한 심각한 위기와 양 민족이 장래 공수하고 공존해야 하는 등의 중대문제에 관해 중국 최고영수께서 적절한 시정과 명백한 제시를 해주지 않는 한 앞날은 낙관하기 어렵다고 말하고, 장개석과의 면담을 다시 한 번 주선해 줄 것을 부탁했다.55)
 
 
  蔣介石에게 직접 抗議 편지 써
 
  金九는 7월17일에 장개석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편지는 비록 표현은 완곡했으나 광복군 편성이 지연되고 있는 데 대한 강력한 항의를 담은 것이었다. 金九는 이 편지에 「한국 광복군의 성립 경과와 저지당한 사실에 관한 기술」이라는 장문의 글을 첨부했다. 1940년 봄에 자신이 광복군 창설계획을 중국 정부에 제안한 이래 지금까지 겪었던 군사위원회의 朝令暮改식이고 부당한 처사를 14조목에 걸쳐서 하나하나 비판한 것이었다. 金九는 또한 「광복군 9개준승」의 가혹한 속박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이번 대전 중에 미국, 영국, 소련 세 나라가 맹방을 원조하여 군대를 조성케 하여 참전하게 한 실례는 매우 많은데, 피원조자에 대한 다른 속박하는 조건을 내세웠다는 소문을 들은 바 없습니다〉56)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미국은 미-일전쟁을 시작한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으나 금년 4월에 로스앤젤레스에서 한국인 지원병을 편성 훈련하며 완전무장시킨 인원이 80명에 이른다고 맹호군의 성립을 크게 강조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마지막으로 金九는 광복군의 성립 자체가 중국 정부의 동의와 원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 만큼 군사상의 작전과 지휘 및 이동 등 군령 부분은 중국 최고통수의 지휘와 통할 아래 두는 것은 당연하나, 그밖의 정훈, 인사, 경비 등의 문제는 광복군 쪽에 맡겨서 책임지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1) 정훈공작은 한국인이 주재하되 중국 쪽에서 상당한 인원을 파견하여 협조 감시한다.
 
  (2) 한국인 요원의 임용은 한국인이 선정하며 광복군 총사령부를 거쳐 군사위원회에 보고하여 처리한다.
 
  (3) 광복군의 경비는 국제신용대부의 예에 따라 1년에 한 번 또는 두 번으로 나누어 유리하게 발급함으로써 공작상의 신속성을 기하고, 특수한 상황이 발생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간섭하지 않음으로써 견제를 면하게 한다.57)
 
  金九의 이러한 주장은 이 무렵에 발생된 한국독립운동자 사회의 새로운 정세변화를 의식한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정세변화의 대표적인 것은 중국공산당 지역에 華北朝鮮獨立同盟이 결성된 사실이었다.
 
 
  華北朝鮮靑年聯合會가 華北朝鮮獨立同盟으로 改編돼
 
  광복군이 제대로 전투부대 체제도 갖추지 못한 채 조선의용대의 통합으로 내부분란을 겪고 있을 때에 延安에 있던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은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했다. 7월11일부터 14일까지 태항산 기슭에서 열린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제2회 대회는 화북조선청년연합회의 명칭을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바꾸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하여 독립동맹 산하에 편입시켰다.58) 이로써 형식상으로나마 남아 있던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에 대한 지휘권은 완전히 없어졌다.
 
  독립동맹은 주석에 중경에서 간 金枓奉을 추대하고, 부주석에 崔昌益과 韓斌을, 집행위원에 武亭, 許貞淑, 朴孝三, 朴一禹, 李春岩 등을 선임했다. 그리고 무정을 조선의용군 총사령으로, 박효삼과 박일우를 부사령으로 임명했다. 정당의 체제를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동맹이 조직명칭에 「정부」나 「당」을 사용하지 않고 굳이 「동맹」을 표방한 것은 민족혁명당이나 임시정부와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기 위한 의도도 담겨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독립동맹에 참여한 인물들 가운데에는 중국공산당 당원이나 민족혁명당 당원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정당을 표방함으로써 초래될 2중 당적의 문제를 피하고자 한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김두봉, 金世光, 박효삼 등은 민족혁명당을 탈당하지 않고 독립동맹에 참여할 수 있었다.59)
 
  독립동맹의 성격과 정치노선은 결성 당시에 채택된 선언과 강령에 잘 드러나 있다. 독립동맹은 강령에서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전복하고 독립 자유의 조선민주공화국의 수립을 목적으로 표방하고, 보통선거제 실시, 국민기본권 확보, 남녀평등, 대기업의 국유화와 토지분배, 8시간 노동제, 의무교육제 실시 등을 강령으로 채택했다.60) 독립동맹의 주동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이었으나, 독립동맹의 강령은 이처럼 한국독립당이나 조선민족혁명당 및 임시정부의 건국강령 등에서 천명된 내용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요컨대 독립동맹의 강령은 우파 민족주의자도 포함시킬 수 있는 이념을 표방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61) 주목되는 것은 독립동맹이 자신들의 존재를 독립운동 세력의 대표기관임을 자임하지 않고 조선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하나의 지방단체로 규정하고 있는 점이다.62) 이는 이 무렵 중국공산당이 지방정부를 자임하면서 국민정부와 합작하고 있던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립동맹은 임시정부를 통일전선의 대상으로는 생각했을지언정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하지는 않았다.63)
 
  독립동맹의 성격은 참여한 그룹들의 정치적 색채에서도 잘 드러난다. 독립동맹 결성에는 중국 공산당 관할 구역에서 활동하던 무정을 중심으로 한 한인공산주의자들과 최창익, 한빈, 허정숙, 박효삼, 金學武 등 중국국민당 정부 관할지역에서 활동하다가 북상한 공산주의자들을 주축으로 하여, 일본군을 탈출해 온 한인 청년들, 화북지역 토착 한국인, 모스크바 동방노동학교 출신 한인공산주의자 등 다양한 경력의 인물들이 참여했다.64) 독립동맹이 결성됨으로써 그동안 이합집산을 거듭하던 중국 본토의 한국독립운동자들은 이제 국민당 정부가 지원하는 임시정부와 중국공산당이 지원하는 화북조선독립동맹이라는 양대 그룹으로 재편되었다.
 
 
  「조선말본」 지은 한글학자 金枓奉
 
  독립동맹의 결성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것은 한글학자로 잘 알려진 김두봉이 동맹의 주석으로 추대된 사실이다.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상해로 망명한 김두봉은 잠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으나, 임시정부 사료편찬위원과 인성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글연구에 정력을 쏟았다. 그가 상해에서 몰두했던 일은 우리말 사전 편찬이었다. 그는 1916년에 국내에서 펴낸 「조선말본」을 수정 보완하여 1922년에는 상해에서 「깁더 조선말본」을 출판했다. 「깁더 조선말본」은 글자 그대로 이전에 펴낸 「조선말본」의 모자라는 부분을 깁고 더 보태고 하여 펴낸 것이었다. 「깁더 조선말본」은 상해에서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東亞日報」가 〈이 책은 아본을 망각치 아니하려는 인사로서는 일독치 아니치 못할 귀중한 책〉이라고 소개했을 정도로 국내에서는 주목을 받았다. 동아일보사는 그의 한글연구에 대한 공로를 높이 사서 1930년에 그를 표창했다.65)
 
  김두봉은 1921년에 李東輝가 조직한 고려공산당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공산주의자로서 어떤 구체적인 활동을 했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다. 1929년에 임시정부의 지주정당으로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었을 때에는 김두봉은 비서장에 선출되었고, 1932년에 대일전선통일동맹이 결성될 때에는 한국독립당 대표로 참여했다. 통일동맹에 참여한 단체들을 기반으로 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 내무 겸 선전부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러한 그의 활동 경력으로 볼 때에 그가 공산주의 이념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선민족혁명당이 분열된 이후에도 김두봉은 그대로 당에 남았으나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중경에 와서도 민족혁명당 인사들과 함께 남안의 아궁보에 살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1942년 봄에 중경을 떠나서 4월에 팔로군 지역인 태항산에 도착했다.66) 그의 연안행은 비밀리에 추진되었기 때문에 임시정부 관계자들은 그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독립동맹의 주석으로 추대된 김두봉은 독립동맹이 간부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설립한 조선혁명군정학교의 교장직을 겸임했다.
 
 
  金枓奉이 華北으로 간 理由
 
  상해 동포사회에서 대부분 철저한 보수주의자로 알려져 있던 김두봉이 독립동맹의 주석이 되었다는 사실은 중경에 있던 동포들 사이에 충격적인 사건이었다.67) 해방 이후에 쓰인 그에 관한 한 기록에는 자기의 혁명이념과 합치되는 동지들이 싸우고 있는 곳에 가서 함께 손을 잡고 싸우고 싶은 생각에서 중경을 떠났다고 서술되어 있으나,68) 그 이유가 분명히 밝혀진 것은 아니었다. 김두봉이 연안으로 떠난 뒤에 중경의 동포들 사이에서는 두 가지 풍설이 떠돌았다. 하나는 연안에서 김두봉에게 밀사를 보내어 한글연구소를 차려 주겠다고 하는 유혹에 넘어가서 연안으로 갔다는 것이었다. 생각에 잠겨 길을 걷다가 전신주에 이마를 부딪히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김두봉은 〈언제나 학구에 몰두하여 세상 돌아가는 것도 제대로 모르는〉 학자로만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소문이 그럴듯해 보였던 것이다.
 
  다른 하나의 소문은 김두봉이 딸에 대한 좋지 못한 소문을 피하기 위해서 중경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象燁과 海燁이라는 두 딸이 있었다. 큰딸 상엽은 아주 영리하고 예뻤다. 상엽이 성장하자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한 소문이 나도는 것을 김두봉은 여간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綏遠(수원)에 있는 광복군 전진기지로 가서 일을 하겠다고 자청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수원으로 가자면 팔로군 지역을 통과해야 했다. 그리하여 연안에 도착한 김두봉을 팔로군이 극진히 대접하여 주석자리에 모셨다는 것이었다.69) 그 밖에도 임시정부 요인들의 푸대접에 반발하여 홧김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좌익이 되어 연안으로 갔다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70)
 
  그러나 태항산에 도착한 김두봉에게 팔로군 부총사령 彭德懷(팽덕회)가 성대한 환영연을 열어 주었다는 사실과,71) 그가 연안에 도착한 지 3개월 뒤에 창설되는 화북조선독립동맹의 주석으로 추대된 사실 등을 고려하면, 그의 연안행은 중국공산당이나 연안에 있던 한인공산주의자들과의 긴밀한 연락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독립동맹의 주석 자리에 화북조선청년연합회 회장인 무정 대신에 김두봉을 선출한 것은 독립동맹 주동자들이 동맹의 성격을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조직보다는 좌우를 통합한 통일전선으로 표방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김두봉의 주석 추대는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통합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던 셈이다.72)
 
 
  中國政府는 韓國獨立運動 支援方針 바꿔
 
  화북조선독립동맹의 결성에 대하여 임시정부나 중국국민정부가 어떻게 생각했는가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독립동맹이 결성된 직후부터 국민정부가 한국독립운동 지원방침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독립동맹의 결성이 어떤 면으로든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국민정부는 7월에 접어들면서 승인문제와는 별도로 한국 임시정부의 지원방침에 대하여 심도 있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장개석의 지시에 따라 중국 군사위원회는 7월에 한국원조의 원칙과 방침을 정리한 「對韓國在華革命力量扶助運用指導草案」을 작성했다. 3항 15개조로 된 이 「지도초안」은 「요지」와 「방법」으로 나누어 한국독립운동지원의 기본원칙과 구체적인 운영방법을 제시했는데, 「방법」 가운데에서 주목되는 것은 임시정부의 지원방침에 관한 다음과 같은 항목이다.
 
  〈한국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정권을 개방하도록 촉구하고 중국에 있는 모든 한인당파를 받아들여 민주정치를 실행케 함. 현재로는 金九를 정치영수로 보고 그를 도우나 반드시 그가 실행하는 정책은 우리가 정한 규정의 원칙에 부합할 수 있어야 함.〉73)
 
  그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국민정부의 기본이념인 三民主義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核心人物들로 韓國問題專門委員會 구성
 
蔣介石의 최측근 참모 陳果夫.〔「白凡金九全集(7)」(1999)에서〕
  7월20일에 열린 중국국민당 제206차 중앙상무위원회는 한국문제에 대하여 장시간에 걸쳐 토의를 한 끝에 한국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기 위하여 何膺欽, 陳果夫, 朱家?, 吳鐵城, 王寵惠, 王世杰 등 7인을 위원으로 하고 오철성과 왕총혜를 소집인으로 하는 전문위원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74) 하응흠은 중국 군부에서 장개석 다음가는 영수로서 군사위원회 참모총장이고, 외교부장 출신의 왕총혜는 국방최고위원회 비서장이며, 일찍이 중앙조직부의 실질적인 책임자였던 진과부는 남의사 등을 운영하면서 가장 힘있는 장개석의 참모였다. 주가화는 국민당 중앙조직부장이고, 오철성은 중앙당 부비서장이었다. 왕세걸은 국민참정회의 비서장으로서 국제정세 전문가였다.75) 이러한 막강한 인물들로 한국문제전문위원회를 구성한 것은 이 시점에서 국민정부가 한국문제를 얼마나 중시하고 있었는가를 말해 준다.
 
  위원회는 8월1일에 제1차 회의를 열고 군사위원회가 작성한 「지도초안」을 검토했다. 출석 위원들은 1) 한국독립운동을 부조하는 최고원칙은 무엇이며, 어느 기관이 책임을 맡고 통일적으로 집행할 것인가. 2) 중국에서 20여 년이나 유랑한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인가, 승인하는 데 가장 적절한 시기는 언제인가 라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회의는 몇 차례의 토론을 거쳐 1) 한국에 관한 최고의 지도원칙은 군사위원회에서 작성한 「지도초안」을 주로 하고, 2)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다른 나라보다 먼저 승인하되 시기는 정부가 결정하고, 3)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표면화하기 전에는 상대방을 단지 하나의 단체로서 승인하며, 4) 차관문제는 당에서 관대와 자유의 처리원칙으로 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中國國民黨 秘書長 吳鐵城.
  이어 8월17일에 열린 제2차 회의에는 전문위원들 이외에 입법원장 孫科, 행정원 부원장 공상희, 장개석의 핵심막료인 陳布雷도 참석했다. 회의에서는 1) 중국에 있는 한국의 당·정·군의 지도부와의 접촉은 군사 방면만 군사위원회에서 책임을 지고 그밖의 당·정 방면은 중앙당부가 통일 책임을 맡고, 2) 먼저 차관의 방식으로 한국 임시정부의 경비 100만원을 대여하고 그 활동의 추진을 협조하며, 3) 적당한 시기에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그 시기는 장개석 총재에게 보고하여 결정케 한다의 세 가지를 결정했다. 오철성은 8월22일에 한국전문위원회의 두 차례에 걸친 회의내용을 7월의 군사위원회의 「지도초안」의 요점과 함께 장개석에게 보고했다.76)
 
  두 차례에 걸친 한국전문위원회의 토의 내용에서 주목되는 것은 국민정부가 金九와 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임시정부와 김원봉 그룹 두 갈래로 추진해 오던 한국독립운동단체에 대한 지원방침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고 있는 점이다. 그것은 한국독립운동단체에 대한 지원을 金九와 임시정부로 단일화시키되, 임시정부로 하여금 문호를 개방하여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있던 모든 정파를임시정부에 참여시키도록 압력을 행사한다는 것이었다.
 
 
  金九가 領導하는 韓國獨立黨 중심으로
 
中國國民黨 中央組織部長 朱家?.
  전문위원회의 건의와는 별도로 주가화는 9월12일에 「한국문제처리에 관한 의견」이라는 문서를 작성하여 장개석에게 보고했다. 주가화는 이 건의서에서 먼저 광복군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자신이 한국문제를 맡아서 처리한 지 3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광복군문제가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원인을 세 가지로 들었다. 첫째는 의용대를 광복군에 합병시킨 것은 원칙적으로 타당하나 광복군의 두 통솔자, 곧 이청천과 김원봉이 서로 융합할 수 없는 다른 사상을 대표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광복군의 역량을 모으고 군령을 통일하는 것이 어렵고, 둘째는 광복군을 지원하는 중국국민당의 관련 기관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아서 광복군의 운용과 지도에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됨으로써 국가 시책에 부합되지 못하고 은연중에 광복군의 내부 분규를 조장하거나 그들의 업무를 방해했으며, 셋째는 광복군의 편제가 너무 소규모이고 매달 경비도 2만원밖에 되지 않아서 그것으로는 생활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형편이므로 활동을 제대로 행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주가화는 한국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군사와 당파와 정치의 세 가지 문제를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서 접근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사상통일을 준칙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고, 당파문제, 정치문제, 군사문제의 세 가지로 나누어서 구체적인 처리원칙을 건의했다. 먼저 당파처리문제에 대해서는 金九가 영도하는 한국독립당을 지원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각 당파에 대해 원래 그 통일을 강제로 요구할 필요는 없으나 우수한 당을 택해 지원하여 독립운동을 영도하게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살펴보건대 한국의 각 당파 가운데 金九가 영도하는 한국독립당이 가장 뛰어납니다. 한국독립당은 한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이 합병하여 성립된 것으로서 범위가 가장 크고 역사도 가장 오래이며 오늘과 과거를 막론하고 그들의 당강에 내세운 것은 민족주의의 색채가 풍부하여 우리 당의 혁명취지와 같습니다. 그리고 간부 인원 가운데 다수는 우리 당의 혁명에 참가한 바 있거나 또는 우리 당을 동정하고 있으며, 일찍이 동맹회에 가입한 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당이 그 당을 지원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김약산[김원봉]이 영도하는 조선민족혁명당의 당강에는 토지 혁명, 노동시간 단축, 언론집회 자유, 반침략국가 연합 등을 표방하고 있어서 그 정치적 색채가 국제노선임은 명약관화합니다. 또 조선의용대는 섬서성 북부 각지로 가서 奸僞者[간위자: 공산당]에게 넘어간 자가 120명에 달하고, 여기 남은 수 10명 가운데 다수는 조선전투동맹에 속하는 두 다리 걸치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수는 적으나 신념은 각각 다릅니다. 사상이 복잡한 당파에 대해서는 공산당에 이용당하지 않을지 경계하는 것이 마땅하고 그들의 발전을 조장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문제 처리에 관해서는 적당한 때에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여 내부의 정쟁을 없애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렇게 하면 김원봉도 임시정부에 복종하게 되어 내부 갈등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군사문제에 대해서는 광복군의 고급인원의 인사를 재조정하여 의지를 집중하게 하고 군령을 통일하는 방법으로 처리할 것을 건의했다.
 
  〈현재 광복군은 이청천과 김약산이 공동으로 통솔하는 책임을 맡고 있으나 두 사람은 사상도 같지 않고 신앙도 서로 다르기 때문에 광복군 내부에는 자주 마찰이 생겨 군령의 관철을 기대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이를 정리하기 위해 고급인원의 인사를 다시 조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개괄하여 말하면, 金九나 김약산 두 파 사이의 갈등은 당·정 방면에서도 합작하도록 할 수 없는데, 그들 사이에서 군사영도권의 타협을 바란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마땅히 임시정부 계통 하에서 광복군의 역량을 배양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며, 광복군의 중심을 이청천에게 두고 광복군의 인사 문제도 그가 중심이 되게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봅니다. 또 이청천이 영도하는 한국인 군관 가운데에는 李無雄, 王衡[安椿生] 등 20여 명의 중앙군관학교 출신자가 있습니다. 반면에 김약산이 훈련한 청년들의 품류는 복잡하고 사상도 난잡하므로 임시정부에서 적당하게 처리하게 하고, 우리 쪽에서는 굳이 원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가화는 마지막으로 지난 여름에 제기된 이래 계속해서 지연되고 있는 金九, 이청천, 조소앙, 박찬익의 장개석 면담요청을 허락해 줄 것을 다시 한 번 건의했다.77)
 
 
  蔣介石은 다섯 가지 原則 제시
 
  전문위원회와 주가화의 보고에 근거하여 장개석은 10월9일에 한국원조에 관한 다섯 가지 처리원칙을 오철성에게 지시했다.
 
  (1) 당·정·군은 사실상 불가분의 관련을 갖고 있어서 통일운용 및 지도를 하도록 해야 하며, 하응흠 총장 이외에 한두 사람을 더 참가시켜 맡도록 할 수 있다. 이후 한국문제에 관하여는 당·정 혹은 군사를 막론하고 이 위원회의 다수가 협의하여 처리하되, 소집인이 보고하기를 희망함.
 
  2) 다른 나라보다 먼저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하는 원칙에 따라 처리할 것을 확정함.
 
  (3) 〈단지 하나의 단체를 상대방으로 승인한 것〉이라는 문제는 이와 같이 고정시킬 필요가 없을 것으로 보이며, 陷川侍六代電에서 지시한 〈한국 내부의 당쟁을 지나치게 중시할 필요가 없으며 하나의 정당만을 고집하지 말고 원조한다〉는 요지를 참조하여 적당히 운용할 것.
 
  (4) 한국독립단체에 관한 차관은 한국 임시정부에만 제한하지 말고 마땅히 복국 역량이 있으며 우리의 항전에 관계가 있는 단체인가를 중시하고 당에서 접촉하고, 먼저 100만원을 지급하여 그 진도를 협조하고 처리할 것.
 
  (5) 이상의 원칙에 따라 원래의 지도방안을 수정하고 또한 문구를 정리하여 결재받기를 희망함.78)
 
  장개석의 지시는 전문위원회가 합의한 내용보다 탄력성이 있는 것이었다. 장개석은 국민정부가 金九 그룹만을 지원함으로써 문제가 더 복잡해질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扶助朝鮮復國運動指導方案」을 확정해
 
  장개석의 지시를 받은 오철성은 왕총혜, 하응흠, 주가화 등과 다시 의논하여 장개석의 지침을 근거로 새로 「扶助朝鮮復國運動指導方案」이라는 한국독립운동 지원방침을 확정했다. 새 「지도방안」은 국민정부의 한국독립운동 지원정책이 당의 공식적인 방침으로 제도화되었음을 의미하며, 이 문서는 이후 한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근거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지도방안」은 이전에 논의되었던 국민정부의 한국문제처리방침을 대부분 그대로 채택하고 있으나, 군사위원회에서 작성한 「지도초안」과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 조문이 비교적 전보다 간략하게 정리되어 중복되는 내용이 없고, 초안에서와 같은 강제규정이 비교적 완화되었으며, 문구상에서도 한국인의 자존심을 존중하라는 표현이 가미되었다. 그러나 확정된 「지도방안」도 한국독립운동단체를 지원하기 위한 원칙상의 규정일 뿐, 구체적인 업무는 12월27일에 장개석이 지명한 하응흠, 주가화, 오철성 세 사람의 지도위원이 공동으로 부담하도록 정식으로 결정했다.79)
 
  이와 같은 중국 국민당의 한국독립운동 지원방침의 변화는 金九에게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또한 金九가 국민정부에 지속적으로 요구해 온 사항이 실현됨과 아울러 오랜 기간에 걸쳐 팽팽히 맞섰던 김원봉과의 경쟁에서 승리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韓人團體 統合 위해 中韓文化協會 결성
 
中韓文化協會 會長을 맡은 國民政府 立法院長 孫科 〔「白凡金九全集(7)」(1999)에서〕.
  한국인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지원에 대한 기본정책을 확정한 국민정부는 바로 한국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작업에 나섰다. 7당통일회의나 5당통일회의를 종용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는 중국인들은 이번에는 자신들도 직접 참가하는 연합단체를 결성하기로 했다. 그것이 중한문화협회였다. 10월11일 오전에 중경방송국 빌딩에서 열린 중한문화협회 성립 전례식에는 손과, 오철성, 왕총혜, 于右任, 郭末若, 憑玉祥(풍옥상) 등 중국 정부 간부들과 金九, 조소앙, 이청천, 김원봉, 박찬익, 崔東旿 등 한국독립운동가들을 포함한 400여 명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양국 애국가 봉창과 중국 전몰장병과 한국 순국열사에 대한 묵념에 이어 손과 의장이 개회를 선언했다. 손과는 개회사에서 한국 국민의 분투와 희생정신에 대하여 경의를 표한다고 말하고, 아울러 중국의 삼민주의 건국이념을 강조했다. 이어 임시정부 외교부장 조소앙과 풍옥상 장군 및 중국구제위원회 주임 아이버스(Ivers) 박사가 한국독립과 한-중합작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장개석은 〈중-한 양국 인사들은 그 문화를 지키고 독립과 자유를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 민족발전의 기본으로 전통문명을 발양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민의 자존심과 자신을 진작시킬 수 있다. 우리는 동아시아의 王道文化를 간성으로 삼아야 하고 세계 반침략전쟁의 최종 목표도 민족 자유와 인류 평등을 완수하는 데 있다〉는 축하전문을 보냈다.80)
 
  31조에 이르는 「章程」의 채택에 이어 이사와 감사진을 선출했는데, 선출된 이사와 감사들의 면면을 보면 국민정부가 중한문화협회의 역할에 얼마나 큰 비중을 두고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사로는 중국 쪽에서 손과, 오철성, 주가화가, 한국 쪽에서는 각 정파를 망라한 박찬익, 金奎植, 申翼熙, 金星淑, 김원봉, 嚴恒燮, 柳子明이 선정되었고, 감사로는 중국 쪽에서 왕세걸과 馬超俊이, 한국 쪽에서 최동오와 朴建雄이 선정되었다. 그밖에 중국인 16명과 한국인 8명의 저명인사들을 명예이사로 추대했는데, 중국인으로는 張治中, 곽말약, 周恩來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한국인으로는 이청천, 조소앙 등 뿐만 아니라 멀리 미국에 있는 李承晩과 徐載弼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례식은 마지막으로 국민정부 주석 林森과 장개석, 그리고 루스벨트와 처칠과 스탈린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했다.81)
 
 
  「戰時兩國合作에 가장 중요한 소식」
 
  이날 채택된 「장정」에 따라 중한문화협회는 이사장(회장)에 손과를 선임하고 부회장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의 김규식을 선임했다. 그리고 이 두 사람과 오철성, 주가화, 박찬익을 상무이사로 선임했다. 이사회 아래 조직, 선전, 연구, 연락, 총무의 5개조를 구성하고 昆明, 星都 등지에 분회를 설치했다.
 
  중한문화협회의 결성에 대해서는 재미동포들도 크게 환영했다. 중한문화협회가 결성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嚴恒燮의 전보를 1면 머리기사로 크게 보도한 「新韓民報」는 이어 사설난에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중한문화협회는 10월11일에 중경에서 정식 성립되었다고 하였으니, 이는 전시 한-중 양국의 합작에 가장 중요한 소식이오 이왕으로부터 진중한 한-중 양국의 우의가 이로 말미암아 더욱 진중할 터이매, 우리 재미 한국 일만 동포는 이 소식을 듣고 다같이 기뻐 축하하는 것이다. 문화협회의 공작을 간단히 말하면 예술합작 즉 정신합작이오 군사합작을 힘쓰는 이 시기에 있어 예술합작을 제창하는 것은 정신합작으로 들어가서 무력합작을 강화하여 대일전쟁의 승리를 촉진하자는 것이다.…〉82)
 
  중한문화협회가 결성되고 보름 뒤인 10월25일에 소집된 제34회 임시의정원은 한국독립당 인사들뿐만 아니라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등 중경에 있던 모든 정파가 참여한 역사적인 의회였다. 그러나 그것은 金九가 또 다른 험난한 풍파를 겪어야 하는 정치무대가 되었다. ●
 
 

  1) 徐友春 主編 「民國人物大辭典」, 1991, 河北人民出版社, 562~563쪽, 566~567쪽. 2) 石源華 編著, 「韓國獨立運動與中國」, 1995, 上海人民出版社, 371쪽.
 
  3)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 1235, “Congressional Record, May 25, 1942.” 4)「新韓民報」, 1942년 5월14일자, 「재미한족연합회 제1차 전체위원회 결의안」. 5) Syngman Rhee, “Memorandum of the Conversation with Dr. T.V.Soong,” June 13, 1942,「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趙素昻篇(三)」, 1997, 韓國精神文化硏究院, 668~690쪽. 6) 「新韓民報」, 1942년 1월1일자, 「대한인국민회 제6차 대표대회 의안」 7) 「新韓民報」, 1942년 1월1일자, 「재미한족연합회 집행부 중요결의」 및 1942년 1월8일자, 「雜報 : 연합회대표 한시대 송헌주 양씨, 중요한 사명을 띠고 미경으로 전왕」. 8) 「新韓民報」, 1942년 2월5일자, 「재미한족연합회 집행부 중요회록」 9) 위와 같음. 10) “Killsoo Haan to Visit L.A.”, The New Korea, Feb. 26, 1942. 11) 洪善杓,「在美韓族聯合委員會硏究(1942~1945)」, 2002, 漢陽大 博士學位論文, 145쪽.
 
  12)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01/102, Haan to Hull, Apr. 20, 1942. 13)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01/102, Harold B. Hoskins, “Memorandum”, Apr. 23, 1942. 14)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01/102, Hull to Gauss, May 6, 1942. 15)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01/114, Gauss to Hull, May 13, 1942. 16) U.S. Department of State, United State Policy Regarding Korea 1938-1950(자료총서 1), 1987, 翰林大 아시아文化硏究所, 72~73쪽. 17)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1224 「여러분 앞에 드림」, 1942년 5월9일.
 
  18)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A01148, Letter of Syngman Rhee, July 17, 1942 19)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1186, 재미한족연합회 부위원장 김병연에게 보낸 1942년 7월28일자 주미외교위원부 공문. 20) Syngman Rhee to Colonel C.T.Harris, Sept. 29, 1942,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 Ⅹ」, 196쪽. 21) 「新韓民報」 1943년 4월1일자, 「재미 한인경위대 맹호군」. 22) 洪善杓, 앞의 논문 129쪽. 23) 「新韓民報」1942년 4월30일자, 「임시정부의 한인경위대에 대한 전보」. 24) 「新韓民報」 1942년 4월30일자, 「의기가 하늘에 닿은 한·중·비 3국인 경위대 관병식의 장관」. 25) 「新韓民報」 1942년 9월24일자, 「맹호군인」.
 
  26)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1244-2 조선민족혁명당, 「반드시 알아야 할 것」. 27)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1231, Haan to Hull, July 3, 1942. 28) 「新韓民報」 1942년 7월16일자, 「社說: 지방동포의 분개한 여론」 및 「하바나 지방회는 미주의 반전선을 보고」; 「國民報-太平洋週報」 1942년 6월10일자, 「독립운동과 방해자」. 29) 洪善杓, 앞의 논문, 162~163쪽.
 
  30)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1198, 李承晩에게 보낸 1942년 7월10일자 韓族聯合會執行委員部의 公文. 31)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888, 李承晩이 金乎에게 보낸 1942년 6월10일자 公文. 32) 「태평양주보」 1942년 8월25일자, 「주미외교위원부의 재정보단」.
 
  33) 「외교위원부통신」 제1호, 1942년 9월10일자. 34) 「외교위원부통신」 제3호, 1942년 9월28일자, 「인사소식」. 35)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01/165, Hornbeck, “Memorandum,” Sept. 15, 1942. 36)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Panmun Book Company, 1978, pp.3~4.
 
  37) 김승태-박혜진, 「내한선교사총람 1884-1984」, 1994,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48쪽; 이광린, 「올리버 알 애비슨의 생애――한국근대서양의학과 근대교육의 개척자」, 1993, 연세대출판부, 290~295쪽. 38) 「國民報-太平洋週報」, 1943년 8월3일자, 「주미외교위원부통신」. 39) O. R. Avison, “Dear Friend”, Oct. 5, 1942.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재미한인자료」, 2005, 國家報勳處, 351~353쪽. 40) 고정휴, 「이승만과 한국독립운동」 2004, 연세대출판부, 431~432쪽.
 
  41) Rhee to Goodfellow, “Offer of Korean Military Resources to U.S. Military,” Oct. 10, 1942,「韓國獨立運動史 資料(24) 臨政篇Ⅸ」, 147~148쪽. 42) Syngman Rhee, “Confidential Memorandum,”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Ⅹ」, 242~243쪽. 43) Cromwell to Goodfellow, “Dr. Syngman Rhee’ Letter”, Oct. 26, 1942,「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Ⅹ」, 232쪽. 44) Devlin to Potter, “Weekly Report, FE-6”, Dec. 8, 1942,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재미한인자료」, 2005, 國家報勳處, 542쪽. 45)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00/841, Rhee to Roosevelt, Dec. 7, 1942. 46) 李承晩은 대마도를 ‘Satsuma Island’라고 표기했으나, 이는 ‘Tsushima Island’의 오기이다. 47) Rhee to Hoo, Dec. 5, 1942,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Ⅹ」, 248~249쪽.
 
  48)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01/209. Rhee to Hull, Dec. 31, 1942. 49)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01/209. Salisbury to Hull, Dec. 31, 1942. 50)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1) 한국광복군Ⅱ」, 2006, 국사편찬위원회, 28쪽. 51) 「金九가 蔣介石에게 보낸 1942년 7월17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7) 臨政篇 ⅩⅠⅠ」, 1994, 國史編纂委員會, 4~9쪽. 52) 「朱家?가 金九에게 보낸 1942년 5월18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1994, 國史編纂委員會, 110쪽; 「朱家?가 孔庸之에게 보낸 1942년 6월27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7) 臨政篇 ⅩⅠⅠ」, 3쪽. 53) 「金九가 朱家?에게 보낸 1942년 6월24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7) 臨政篇 ⅩⅠⅠ」, 3쪽. 54) 「朱家?가 金九에게 보낸 1942년 6월27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7) 臨政篇 ⅩⅠⅠ」, 3~4쪽. 55) 「金九가 朱家?에게 보낸 1942년 7월17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7) 臨政篇 ⅩⅠⅠ」, 9~10쪽. 56) 「金九가 蔣介石에게 보낸 1942년 7월17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7) 臨政篇 ⅩⅠⅠ」, 8쪽.
 
  57) 「金九가 蔣介石에게 보낸 1942년 7월17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7) 臨政篇 ⅩⅠⅠ」, 9쪽. 58) 「解放日報」 1942년 8월29일자, 「華北朝鮮獨立同盟成立」, 「海外의 韓國獨立運動史料(Ⅴ) 中國篇①」, 1992, 國家報勳處, 253쪽. 59) 廉仁鎬, 「朝鮮義勇軍硏究」, 1994, 國民大博士學位論文, 109~111쪽. 60) 「解放日報」 1942년 8월29일자, 「華北朝鮮獨立同盟成立」,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Ⅴ」, 1968, 原書房, 992쪽; 鐸木昌之, 「忘れられた共産主義者たち」, 「法學硏究」 1984년 4월, 慶應義塾大學法學硏究會, 53쪽. 61) 鐸木昌之, 앞의 글, 54쪽. 韓洪九, 「華北朝鮮獨立同盟의 조직과 활동」, 1988,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6~17쪽. 62) 金正明編, 앞의 책, 992쪽. 63) 심지연, 「잊혀진 革命家의 肖像―金枓奉硏究」, 1993, 인간사랑, 77쪽. 64) 韓洪九, 앞의 논문, 18쪽.
 
  65) 심지연, 앞의 책, 49~51쪽. 66) 「解放日報」 1942년 5월22일자, 「朝鮮革命領袖 金白淵先生抵太行山」, 「海外의 韓國獨立運動史料(Ⅴ) 中國篇 ①」, 247쪽. 67) 정정화, 「녹두꽃」, 1987, 未完, 166~167쪽. 68) 「白淵 金枓奉先生의 鬪爭史」, 「新天地」(제1권 2호), 1946년 3월호, 207쪽 ; 심지연, 「朝鮮新民黨硏究」, 1988, 동녘, 36쪽. 69) 정정화, 앞의 책, 167쪽; 金弘壹, 「大陸의 憤怒」, 1972, 文潮社, 352쪽. 70) 심지연, 「잊혀진 革命家의 肖像―金枓奉硏究」, 68~74쪽. 71) 「解放日報」 1942년 5월22일자, 「朝鮮革命領袖 金白淵先生抵太行山」, 「海外의 韓國獨立運動史料(Ⅴ) 中國篇 ①」, 247쪽.
 
  72) 鐸木昌之, 앞의 글, 35쪽. 73) 胡春惠, 「中國 안의 韓國獨立運動」, 1978, 檀國大出版部, 97쪽. 74) 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編, 「國民政府與韓國獨立運動史料」, 1988, 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570쪽. 75) 胡春惠, 앞의 책, 91~92쪽. 76) 胡春惠, 위의 책, 91~98쪽.
 
  77) 「朱家?가 蔣介石에게 보고하는 1942년 9월12일자 한국문제처리에 관한 의견」,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7) 臨政篇 ⅩⅠⅠ」, 11~13쪽.
 
  78) 胡春惠, 앞의 책, 98쪽. 79) 胡春惠, 위의 책, 99~103쪽. 80) 楊昭全編, 「關內地區朝鮮人反日獨立運動資料匯編(下)」, 1987, 遼寧民族出版社, 1590~1591쪽 ; 石源華編著, 앞의 책, 393쪽.
 
  81) 「新韓民報」 1942년 10월22일자, 「중한문화협회 설립 전례; 호춘혜, 「중한문화협회의 창립과 한국의 항일독립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옛 청사관리처 편, 김승일 역, 「중국항일전쟁과 한국독립운동」, 2005, 시대의 창, 208쪽. 82) 「新韓民報」 1942년 10월22일자, 「중한문화협회 성립을 축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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