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9월17일에 光復軍總司令部成立典禮式을 거행한 臨時政府는 11월에 총사령부를 西安으로 옮겼다. 그러나 中國政府는 광복군 성립에 대한 공식승인을 계속 미루다가 1941년 5월28일에야 蔣介石이 정식승인을 공포했다.
金九는 광복군 결성문제로 부심하면서도 臨時政府 大家族을 江에서 重慶으로 移住시켰다. 중경 교외의 土橋에도 여나믄 家口의 「新韓村」이 건설되었다.
1941년 4월에 호놀룰루에서 열린 海外韓民族大會에는 미주와 하와이의 獨立運動團體 代表들이 다 모였다. 이 대회의 건의에 따라 臨時政府는 워싱턴에 駐美外交委員部를 설치하고, 李承晩을 駐美外交委員長으로 임명했다. 임시정부 출범 때에 臨時大統領과 警務局長이었던 李承晩과 金九의 위상은 이제 國務委員會主席과 駐美外交委員長으로 역전되었다. 대회의 결의로 재미한족단체들의 통합기구인 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결성되었다.
1) 光復軍總司令部의 西安移動과 臨時政府 大家族의 重慶 移住
1940년 9월17일에 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식을 마친 金九는 이틀 뒤에 중국 국민당 조직부장 朱家?(주가화)에게 광복군의 훈련과 편제 등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광복군총사령 李靑天과 함께 조만간 방문하겠다는 뜻을 전했다.1)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의 북미대한인국민회 앞으로도 〈한국독립광복군 총사령부 정식성립의 전례는 만족히 거행하였고, 17일로부터 활동을 개시하였으니, 후원금을 보내시오〉2)라는 전보를 쳤다. 북미국민회는 전보를 받은 9월23일 저녁 9시에 중앙부 긴급회의를 열고, 임시정부와 중국정부에 축하전보를 보냈다. 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사실은 미국에서 발행되는 중국신문들도 앞 다투어 보도했다.3)
光復軍後援金 募集活動 활발해져
광복군총사령부 성립 뉴스는 재미동포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新韓民報」는 연일 광복군에 관한 뉴스를 다루었다. 북미국민회는 10월1일에 중앙연석회의를 열어 각 지부별로 광복군 성립 축하식을 거행하기로 결의하고, 10월5일에 예치해 둔 자금 가운데에서 1,000달러를 임시정부에 송금했다.4) 광복군성립전례식 뉴스를 계기로 광복군 후원금 모집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金九는 10월7일 오후 4시에 李靑天과 함께 국민당 조직부로 주가화를 방문했다.5) 金九는 주가화에게 광복군의 성립사실을 蔣介石에게 보고하여 하루빨리 광복군이 공작을 실시할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을 요청했다.6)
국무위원회는 11월1일에 「통수부관제」를 제정하여 공포했다. 통수부는 군사에 대한 최고통수권을 행사하는 기구이며,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이 최고통수권자로서 직권을 행사한다고 규정했다. 이로써 金九는 행정부뿐만 아니라 군 최고통수권까지 갖는 명실상부한 임시정부의 최고지도자가 된 것이었다. 통수부는 참모총장과 군무부장, 그리고 국무위원 가운데에서 선임하는 막료 1명으로 구성하도록 되어 있었다. 국무위원회에서는 趙琬九를 막료로 추선했다.7)
임시정부는 총사령부를 비롯한 중요 군사기구를 전방에 배치한다는 방침에 따라 총사령부를 陝西省(섬서성)의 西安으로 옮기기로 했다. 옛 漢唐의 수도였던 서안은 화북지방의 일본군 점령지역에 인접해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1년 전부터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이 파견되어 광복군 모집과 선전활동을 하고 있는 곳이었다. 총사령 이청천과 참모장 李範奭만 중국 군사당국과의 군사협정문제를 처리하기 위하여 중경에 남기로 하고, 黃學洙를 총사령 대리, 金學奎를 참모장 대리, 趙擎韓을 총무처장 대리로 하는 총사령부 잠정부서를 편성했다.8)
國際放送局 통해 光復軍 당면공작 천명
김학규는 11월12일에 중경 국제방송국을 통하여 광복군의 전략과 전술을 종래의 유격전으로부터 대규모의 주력전과 대폭동전으로 전환한다는 등 네 가지의 광복군 당면공작을 천명했다.9)
중경을 떠나 11월17일에 서안에 도착한 황학수 이하 18명의 광복군 간부 일행은 그곳에 있던 군사특파단과 함께 12월26일에 서안시 二府街에 광복군총사령부 총무처를 개설했다. 이에 따라 기존의 군사특파단은 해체되고, 특파단장 曺成煥은 중경으로 돌아왔다.10) 서안사령부는 중국어와 국문으로 된 기관지 「光復」을 발행하는 한편 일본군의 점령 아래 있는 지방에 공작원을 파견하여 선전과 청년요원 확보 등의 공작활동을 벌였다.11)
광복군총사령부는 李俊植, 高雲起, 김학규를 1, 2, 3지대장으로 하는 3개 지대를 편성했다. 이어 1941년 1월1일에는 羅月煥을 대장으로 하는 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흡수하여 제5지대를 새로 창설했다. 청년전지공작대는 1939년 11월11일에 중경에서 나월환을 대장으로 무정부주의 계열 청년 30여 명으로 조직되어 임시정부와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무장부대였다. 제5지대는 활발히 초모공작을 전개하여 1940년 말까지 100여 명의 대원을 확보했는데, 그것은 광복군이 창설 초기에 거둔 가장 큰 성과였다.12)
臨時政府 大家族을 重慶으로 옮겨
임시정부 요인들과 그 가족들의 중경생활은, 金九가 〈그 고해파란만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13)고 술회했듯이, 고통스러웠다. 임시정부 청사의 모습이 그것을 상징했다. 임시정부는 청사를 네 번 옮겼다. 처음에 楊柳街라는 곳에 있다가 폭격 때문에 버틸 수 없어서 石坂街로 옮겼는데, 여기서도 오래 있지 못했다. 광복군성립전례식이 있기 보름 전인 1940년 9월2일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폭격이 얼마나 심했든지 옷가지 하나 건지지 못했다.14) 석판가를 떠나서 세 번째로 이사한 곳이 和平路 吳師爺巷 1호였다. 오사야항은 중경시내의 번화가 較場區에서 동북쪽으로 조금 벗어난 곳에 있는 빈민굴 같은 동네였다. 오사야항 1호의 건물은 1900년대 전반기에 지은 전형적인 2층 목조가옥이었다. 건물 안에는 변소도 없어서 한 구석에 칸막이를 쳐서 통을 놓고 용변을 보아야 했다. 건물 안은 햇빛이 잘 들지 않아서 굴속같이 어두컴컴했고 습기가 많았다. 이 무렵 金九는 長沙에서 있었던 남목청 사건의 후유증으로 고생했는데, 습기가 많고 불결한 곳에서 하루 종일 일을 보려니까 항상 몸이 불편했다.15) 임시정부는 1945년 새해에 청사를 七星崗 蓮花池로 옮길 때까지 4년 넘어 이곳을 사용했다. 그것은 임시정부가 상해를 떠난 이후로 한 곳에서 가장 오래 머문 것이었다. 金九는 이곳에서 「백범일지」 하권을 집필했다.
연화지의 청사는 호텔로 사용하던 81칸짜리 번듯한 계단식 건물이었는데, 배타성이 강한 사천성 사람인 건물주인은 입주자가 한국인들임을 알고 세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임시정부는 그를 설득시키는 데 애를 먹었다. 임시정부청사로 사용하게 되면 당신의 이름이 한국독립사에 길이 남게 되고, 한국이 독립된 뒤에 당신이 한국과 무역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등으로 구슬려서 세를 얻을 수 있었다.16) 임시정부는 이 연화지 청사에서 해방을 맞았다.
?江(기강)에 머물고 있는 임시정부 대가족을 重慶으로 옮겨 오는 것도 金九의 큰 과제였다. 金九는 중국정부가 임시수도를 중경으로 정한 뒤에 임시정부 대가족도 곧바로 중경으로 옮기려고 했었으나 집 구하기도 힘들고 공습이 심하여 뜻대로 되지 않았다. 金九는 貴陽에서 중경으로 오는 도중에 있는 기강이 좋아 보여서 그곳에 대가족의 임시피란처를 마련했었는데, 일행이 그곳에 머문 지 어느덧 1년 6개월이 되고 있었다. 金九는 임시정부청사는 중경으로 옮겼으나 대가족을 그대로 기강에 머물게 하고 있는 것이 여간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17)
金九는 1939년 10월에 朴贊翊을 통하여 중국정부의 전시구호기관인 振濟委員會에 한국독립당 남녀노소 300여 명의 이주경비 지원을 요청했다. 진제위원회에서는 주택건축비 1만8,000원, 학교 건축비 1,200원, 의료실 건축비 900원, 건축대지와 채소밭의 임대료 1차분 보조금 420원, 의약품설치비 2,000원 등 총계 2만2,520원을 보조해 주기로 했다. 그러나 1939년도 예산은 이미 다 집행되었으므로 보조금은 1940년도 예산에서 지급해 주겠다고 했다.18)
서남내륙 지방인 사천성 분지의 양자강과 가릉강이 만나는 곳에 자리잡은 중경은 교통과 상업의 중심도시이다. 전쟁 전에는 50만도 안 되던 인구가 중국 정부의 중앙관서가 옮겨 오면서 100만을 넘어섰다. 그 때문에 주택난이 극심하여 여름에는 길거리에서 자는 노숙자가 태반이었다.19)
임시정부 대가족이 중경으로 옮긴 이후로 중경에 사는 한인수는, 시기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는 있었으나, 대체로 400명가량 되었다. 金九가 1942년 12월에 주가화에게 보고한 「재중경 당정기관의 경상비 명세서」에는 중경 부근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 총수가 340명으로 기재되어 있다.20) 이 한인들은 거의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임시정부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이었다.
여나믄 家口는 重慶郊外의 土橋로
중경시내에서 남쪽으로 양자강을 건너서 약 30리쯤 떨어진 곳에 土橋라는 조그마한 시골마을이 있었다.21) 金九는 진제위원회로부터 받은 원조금으로 토교에서 1km 떨어진 洞坎(동감)의 땅 약 2,000평을 20년 기한으로 조차했다.22) 토교에는 花灘溪라는 개울과 폭포가 있었는데, 동감은 그 폭포 위쪽에 있었다. 동감마을의 행정구역상의 명칭은 巴縣의 土文鄕이었으나, 흔히 토교라고 불렀다.23) 토교는 시골이라서 중경보다 주택난도 덜할 뿐만 아니라 공기도 맑았다. 조선의용대와 민족혁명당 간부들과 그 가족들이 모여 사는 南岸의 鵝宮堡(아궁보)는 토교에서 멀지 않았다.24)
金九는 임시정부 가족들의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토교를 방문하고 토교향 鄕公所 鄕長 何鰲(하오)를 만나서 토지매입과 주택건설 문제를 상의했다. 하향장은 향공소 于事[동사무소장] 王仁杰이 소개한 장씨라는 미장공이 책임지고 공사를 진행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金九는 동감땅에 똑같은 크기의 반양옥 세 채를 남향으로 지었다. 두 채는 목조로, 한 채는 흙벽으로 된 단층 청기와집들이었다. 그리고 도로변에 있는 2층 기와집 한 채를 따로 매입했다.25)
임시정부 가족들이 토교로 이사한 것은 1940년 11월13일이었다.26) 소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이 있는 가정은 아이들이 소학교를 졸업하는 이듬해 1월까지 있다가 아이들이 졸업하고 나서 이사했다. 이렇게 하여 토교에는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와 광복군에서 활동하지 않는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을 포함한 여나믄 가구 정도가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 뒤로 들고 나는 가족들이 더러 있었으나, 대부분은 1945년에 귀국할 때까지 5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27) 이 때에는 양자강에 다리가 없어서 중경에서 토교로 가려면 반드시 배를 타야 했다. 토교까지는 두세 시간쯤 걸렸다.28) 중경의 동포들은 토교를 「新韓村」, 또는 「韓國租界」라고 불렀다.29) 그것은 임시정부가 중국정부에 교섭하여 한국인 거류지로 조차해 얻은 땅이기 때문이었다.30)
金九는 대가족이 중경으로 이사한 뒤의 동포들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식량은 배급제인데, 배급소 문전은 사계절을 가릴 것 없이 장사진을 이루었고, 구타와 욕설 등 허다한 분규가 계속 벌어졌다. 그러나 우리 동포들은 인구대장을 작성해서 중국정부와 교섭하여, 인구비례에 의해 단체 분량을 한꺼번에 타서 화물차로 운반하였고, 다시 미곡을 도정하여 하인을 시켜 집집마다 배달해 주었다. 쌀그릇은 쥐와 참새의 해를 방비하기 위하여 집집마다 독그릇을 사용하였으며, 그밖의 반찬 등은 돈으로 지급하고 식수까지 하인을 부리어 사용하였으니,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동포들의 단체생활은 규율이 있고 안전한 편이었다.
비단 중경뿐만 아니라 남안과 토교에 사는 동포들도 중경과 같이 한인촌을 이루고 중국의 중산계급 정도의 생활수준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곳곳마다 생활이 부족하다는 원성도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이곳 생활은 지옥생활인 줄 알고 살아가기 바란다고 말하였다.〉31)
임시정부는 중국정부로부터 매달 80석의 쌀[公米]을 무상으로 지급받았다. 쌀 배급을 받게 된 것은 중국군사위원회에 근무하다가 1940년 5월부터 임시정부의 주석판공실장 겸 외무차장이 된 閔弼鎬의 교섭에 따른 것이었다. 민필호는 처음 이 문제를 중국국민당 조직부의 邊彊(변강) 당무처장 李永新과 상의했다. 이영신은 몽고인이었다. 그는 『공미는 외국인에게 주지 않는 것이 규칙이지만 당신들은 다른 외국인들과 다르니까 蔣총재에게 한번 공문을 올려 건의해 보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했다. 공문을 만들어 조직부장 주가화를 통하여 장개석에게 올렸으나 어렵다는 대답이었다. 이에 민필호와 이영신은 장개석의 결재공문을 알리지 않은 채 주가화를 졸라서 그가 직접 식량국에 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쌀을 임시정부 가족들에게 지급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식량국에서는 중경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명단을 작성해 오면 자기들이 직접 한 사람씩 일정량을 배급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민필호는 『우리는 중국기관의 사람들이 아닌데 그들과 똑같이 다루는 것은 외국혁명단체를 돕는 예의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여 임시정부의 요구대로 한꺼번에 타 와서 임시정부 가족들과 동포 거류민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게 되었다고 한다.32)
일꾼들과 같이 道路工事하기도
金九는 주가화에게 임시정부 가족들의 생활비 지원을 요청하여 1941년 12월부터 매달 6만원을 지원받았다. 그리고 일년 뒤부터 인구증가와 인플레이션 등의 요인을 감안하여 14만원을 더 증액하여 매달 20만원의 보조금을 받았다.33) 이에 따라 임시정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직급과 식구수에 따라 월급을 받았고, 「平價米」라는 쌀도 배급받았다. 평가미는 일반미에 비해서 질이 떨어졌다. 그나마 배급할 때에 쌀을 빼내고 대신에 물을 부어 무게를 늘려서 배급했다. 그 때문에 살짝 발효된 쌀을 먹어야했다.34)
중국정부의 지원으로 임시정부 가족들의 생활은 피란 다닐 때보다는 안정되었으나, 살림살이가 쪼들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속에서도 임시정부 가족들은 한집안 식구들처럼 지냈다. 토교지방은 아열대성 기후여서 한겨울에도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날이 드물었다. 겨우내 영하로 내려가는 날은 며칠뿐이었다. 영하라고 해야 밤에 내린 눈은 해뜨기 전에 녹아 버리고 물독에 살얼음이 어는 정도였다. 토교는 마을 전체가 대나무밭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주위로 사철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화탄계의 물은 이름만큼이나 맑아서 그냥 마셔도 될 정도였다. 그 물에 나가서 빨래도 하고 미역도 감았다.35) 金九는 이따금 토교에 가서 일꾼들과 같이 도로 수선, 과수 재배, 돌쌓기, 제방공사 등의 일을 하면서 임시정부 가족들의 생활을 보살폈다.36)
1942년 여름에는 임시정부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에서 멀지 않은 동쪽 언덕에 목조 기와집을 지었다. 공사기간이 양자강의 홍수기간이어서 자재들은 양자강에 띄워서 운반했다. 건물이 완성되자 이웃사람들을 초청하여 다과회를 겸한 낙성식을 거행하고, 옥상에는 태극기를 내걸었다. 이 건물은 광복군의 숙소로 사용했다. 광복군은 매일 오전과 오후에 화탄계 강변에 있는 중경 청화중학교의 운동장을 빌려 훈련을 실시했다.37)
큰아들 仁도 폐병으로 잃어
그러나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대가족은 중경의 고약한 기후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중경은 안개의 도시였다. 1년의 반은 안개가 끼는 날이었다. 金九는 그러한 기후 때문에 큰아들 仁을 잃은 일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중경의 기후는 9월 초부터 다음해 4월까지는 구름과 안개 때문에 햇빛을 보기 힘들며, 저기압의 분지라 지면에서 솟아나는 악취가 흩어지지 못해 공기는 극히 불결하며, 인가와 공장에서 분출되는 석탄연기로 인하여 눈을 뜨기조차 곤란하였다. 우리 동포 삼사백 명이 육칠 년을 거주하는 동안에 순전히 폐병으로 사망한 사람만 칠팔십 명에 달하였다. 이는 중경에 거주하는 전체 한인의 일이할에 해당하는 숫자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중경에 거주하는 외국의 영사관이나 상업자들이 삼년 이상을 견디지 못한다는 곳에서, 우리가 육칠 년씩이나 거주하다 큰아들 인(仁)이도 역시 폐병으로 사망하였으니, 알고도 불가피하게 당한 일이라 좀처럼 잊기 어렵다.〉38)
여름과 겨울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여름에는 방바닥 온도가 체온보다 더 높이 올라갈 만큼 무더운 찜통 더위 때문에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39) 겨울에는 지독한 안개 때문에 고생했다. 겨울 안개 속에는 무연탄 연기까지 차 있어서 그 공기를 마시면 목구멍은 언제나 아릿했고, 폐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도 늘 기침을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폐결핵을 앓았다.40)
1944년에는 스웨덴 선교회의 지원을 받아서 토교 언덕 위에 기독교청년회관을 지었다. 그곳에서는 동포아이들에게 우리말과 노래를 가르쳤고, 임시정부는 그곳에 주말임시학교를 열어서 아이들에게 한글과 우리나라 역사 등 민족혼을 심어 주기 위한 교육을 실시했다.41) 이 무렵에 토교를 방문했던 金秉豪와 宋志英은 토교의 한인사회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토교만은 완전히 우리나라의 생활양식 그대로 巴蜀[四川省의 다른 이름. 巴는 중경지방, 蜀은 成都지방] 하늘 밑에 옮겨 놓은 우리의 마을입니다. 거기는 주로 직접 혁명공작에 참가할 수 없는 부녀자들이며 어린이들이 주민의 대부분으로서, 주택은 따로지만 식사 같은 것은 중앙에 집합소가 있어서 아침저녁 모여서들 한 그릇의 밥 한 사발의 국일망정 화기가 넘치게 언제나 재미롭게들 식사를 하고 있으며, 위생과 교육기관 같은 것도 충분하다고는 못 하겠지만 대략 설비되어 있습니다. … 토교에서 가장 감격한 것은 우리네 어린이들을 양성하는 학원을 찾아갔었는데, 무엇보다도 매일 아침 우리나라의 국기 밑에서 우리나라의 국가를 부른 다음 우리말로서 가르침을 시작하는 그 장면입니다. 오랫동안 국내에서 무지한 손아귀와 발길 밑에 억눌려 생활하여 온 나로서 처음 해외에서 이 광경을 볼 때에 저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용솟음쳐 흘러내리더군요. 그래서 나는 이 어린이들의 손목을 하나둘 부여잡고 그대들은 참으로 행복스러운 조선의 아들딸들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국내에 있는 우리의 어린이들은 불쌍하게도 태극기를 모르고 우리나라의 국가를 꿈에도 들어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가만히 눈을 감고 국내의 어린이들과 토교의 우리 어린동무들의 광경을 그릴 때에 나는 끝없이 울었습니다.〉42)
光復軍에 관한 7個項의 要望事項
金九는 1월21일에 장개석을 비롯한 중국정부의 유관기관에 전해 달라면서 광복군에 관한 7개항의 요망사항 및 활동방침을 적은 문서를 주가화에게 제출했다. 그것은 광복군에 대한 金九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어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1)한국광복군은 그 계획안을 이미 비준받았으므로 정식으로 성립되었음을 인준해 줄 것을 요망함.
(2)군사참모와 정치공작 인원을 파견하여 지도와 협조를 해주기 바람.
(3)각지에 있는 당·정·군 장관에게 통보하여 (광복군 성립사실을) 알려 주고 아울러 가능한 협조를 하게 해주기 바람.
(4)한국광복군의 각급 간부는 모두 한국을 멸망으로부터 구하기 위하여 분투하는 혁명청년이며 앞으로 필요한 인원들 역시 한국의 혁명 군중임. 현재 서안 부근에 집결해 있는 간부는 이미 2백여 명에 이르고, 화북 각지에 흩어져 있는 옛 부하 2천여 명이 지금 계속 서안 일대로 집결하고 있으므로 하루속히 정식 성립을 인준하여 이들로 하여금 부대편성을 편리하게 해주기 바람.
(5)한편으로는 공작을 개시하고 한편으로는 한인 청장년을 계속 흡수하여 훈련과 공작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점차 확충하도록 하며, 아울러 현재 동북지방[만주]에서 항전하는 한인무력을 먼저 정리하고자 함.
(6)앞으로의 공작은 유격전을 기준으로 삼고, 서안을 그 근거지로 하여 점차 추진하여 화북 각 省과 동북에 이르도록 함.
(7)한국광복군은 전민족의 혁명을 지도하고 총동원을 추진하며, 왜적을 축출하고 나라를 세우는 한국국군의 기간부대의 책임을 담당하며, 아울러 한인 각파의 무력의 권능을 파악하여 지도함. 그러므로 한국광복군은 대내적으로는 한국임시정부의 지휘를 받아야 함. 지금처럼 각 민족의 사상계파가 복잡한 때에는 국군의 기틀을 확립하지 않고는 전민족의 항전역량을 집중 발휘하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특별히 인준할 것을 요망함.43)
金九는 그 뒤에도 주가화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이 요망서를 계속해서 첨부했다.
주가화는 1월24일에 참모총장 何應欽과 군사위원회 판공청 주임 商震에게 金九의 제안을 전달했다. 상진은 2월3일에 주가화에게 광복군의 지휘권을 중국 당국이 확실히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정식성립을 인허해 줄 수는 있으나 이 문제는 군정부의 소관이기 때문에 그쪽으로 교섭하라고 통보했다.44) 그러나 군정부에 전달된 공문은 소관부서에서 정체되고 있었다. 초조해진 金九는 2월14일에 주가화에게 다시 편지를 보냈다.45)
軍事委員會辦公廳이 光復軍 주관하기로
金九가 초조해하고 있는 동안 광복군에 대한 주관부서가 바뀌면서 정식승인은 계속 지연되었다. 중국 군정부는 2월22일에 광복군문제를 군사위원회 판공청이 주관하는 것으로 방침을 결정했다.46) 주가화는 3월6일에 판공청 주임 상진에게 하루빨리 광복군에 대한 정식인준을 해줄 것을 요청하고,47) 같은 날 金九에게 광복군의 주관부서가 군정부에서 판공청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통보했다.48) 판공청은 3월8일에 광복군문제를 연석회의에 회부하여 토론한 결과, 원칙적으로는 可하나 그 편제의 보고를 받고 그것을 심의한 다음에 그 결과에 따라 파견할 인원을 정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49)
한편 광복군총사령부가 서안으로 옮겨서 활동을 시작하고 석 달쯤 지난 1941년 2월 말 무렵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중국군사위원회에서 각 전구 사령관에게 광복군의 활동을 엄격히 단속하라는 지시가 하달된 것이었다. 중국영토에서 군사활동을 하면서 중국군당국의 협조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었다. 중국군당국의 의심으로 잘 되고 있던 공작이 중단되기도 하고 통행증을 발급해 주지 않아서 활동에 큰 불편을 겪기도 했다.50) 이러한 사태의 배경에는 중국군사위원회가 광복군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도 작용했다. 이 무렵 화북·화중·화남 일대에 진출해 있는 한국인들 가운데에는 일본인들을 끼고 장사를 하거나 일본군의 앞잡이로 일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일본군 속에 조선병사들이 많다는 소문도 있어서 그것이 그러한 불신의 원인이 된 것이었다.51)
金九는 3월20일에 주가화로부터 판공청 연석회의의 결과를 통보받고,52) 李靑天으로 하여금 광복군총사령부 잠행편제와 월별경상비예산표를 작성하게 하여 중국군사위원회 판공청에 제출했다. 판공청은 4월17일에 제2차 연석회의를 열어 이 문제를 심의한 결과, 군사위원회에서 9명의 인원을 광복군에 파견하기로 하고, 잠행편제에도 이의가 없으므로 참모총장의 지시가 있는 대로 장개석의 재가를 받아 시행하기로 했다.53) 군사위원회 판공청의 제2차 연석회의 결과를 통보받은 金九는 4월28일에 다시 주가화에게 하응흠 참모총장이 조속히 광복군 편제를 승인하도록 도와줄 것을 부탁했고, 주가화는 5월3일에 하응흠에게 다시 편지를 보냈다.54)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장개석은 1941년 5월28일에 광복군총사령부의 정식 편제를 실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55)
金九나 임시정부가 광복군에 대한 중국정부의 정식승인을 받기 위하여 고심한 가장 큰 이유는 말할 나위도 없이 본격적인 항일전을 하루빨리 수행할 수 있는 군대를 편성하기 위해서였다. 정식승인을 받아야 자금지원을 비롯한 인적 및 물적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1938년 10월에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의 직할로 창설된 金元鳳의 조선의용대는 이 무렵에는 군사위원회로부터 매달 1만6,000원의 활동비를 지급받으면서 200여 명의 대원들이 각 지역에 배치되어 활동하고 있었다.56)
물론 자금지원 뿐만이 아니었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이 중국정부의 정식승인을 받게 되면 다음과 같은 영향이 발생할 것으로 기대했다. 첫째로 한국독립운동의 역량 있는 중심조직이 됨으로써 국내 민중을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고, 둘째로 미국이나 그밖의 한국에 동정적인 국가들의 승인과 원조를 요청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며, 셋째로 세계 약소민족, 특히 아시아의 약소민족들에게 중국의 항전이 피압박 민족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것을 인식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57) 그러나 金九는 광복군이 중국정부의 어떤 기관에 직속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광복군에 관한 7개항의 요망사항에서 金九가 광복군이 대내적으로는 임시정부의 지휘를 받아야한다고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장개석의 승인이 나자 군사위원회 판공청에서는 광복군의 정식성립을 허가하고 편제도 결정했다. 그 내용은 명칭은 그대로 한국광복군총사령부라고 하고, 이청천을 총사령으로 임명하며, 소요되는 참모와 정훈인원은 군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 중앙조사통계국,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의 4개 기관에서 협의하여 전원 선정 파견하며, 이와는 별도로 군정부에서 경리인원 1명을 파견하고, 이상 각 기관에서 파견할 인원의 사무는 판공청에서 맡아서 처리한다는 것이었다.58)
먼저 〈同胞의 血力〉으로 光復軍의 기초를 마련해야
金九는 중국정부의 광복군설립인준이 늦어지자 우선 재미동포들의 자금지원으로 광복군의 활동을 시작하는 방안을 생각했다. 그는 1941년 2월16일자로 로스앤젤레스의 金乎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러한 구상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제 광복군의 기초견고를 자력, 즉 동포의 血力으로 완성하고, 그 위에 우방의 원조를 얻어서 진전하는 것이 우리의 만년대계의 최상책이라 생각한 것은 전자에도 공사간 말씀을 드렸던 것으로 알기 때문에 상세히 말씀을 않고, 대체로 몇 가지를 상의드립니다. 오늘날에 중국의 항전은 영국·미국·소련의 원조로 지탱하는 바, 미국이나 소련 어느 한 나라에서만 도움을 받는다면 자연히 감독과 지도 등 鉗制[겸제: 자유를 억누름]를 면할 수 없겠으나, 중국이 자력으로 장기항전의 기초가 튼튼한 것을 보고서 각종 후원을 경쟁적으로 하기 때문에 중국의 자존성은 조금도 손실이 없이 자타의 역량이 항전으로 집중하거니와, 만일 우리 같은 거지로서 광복전쟁을 이웃 어느 한 나라의 도움을 처음부터 끝까지 받는다면, 우리 같은 놈을 제3자가 경쟁적으로 도울 리도 없을 것이고, 따라서 처음부터 독단으로 도와주는 그 주인의 소유물 될 것은 필연의 사실입니다. 가난한 자가 도움을 못 얻어 애를 쓰지마는 도움을 주는 자에게 노예될 것을 근심하는 자는 쉽게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광복군의 기초를 우리 힘으로 건축한 후에는 어느 우방이고 원조를 청하여 얻는다 하여도 자존성을 보존하여 가며 자주독립의 실물을 산출할 수 있는 원리를 굳게 파지하고 이를 악물고 우선 반년만 끌고 나가면, 현재에 모여드는 잡색군은 접어두고 순전한 기간 간부로 최소 천명은 모집 훈련하여 놓고 타인의 원조를 받을 결심으로, 지금은 미주와 하와이 한교의 출력으로 광복군의 기초는 확립할 것을 담대하게 선전하고 나갑니다.〉
이처럼 金九는 우선 〈동포의 혈력〉으로 최소 1,000명의 광복군을 모집 훈련하여 자력의 기초를 마련하고 난 다음에 외국의 원조를 받는 것이 자존성을 보전하는 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편지에는 중국정부와 광복군지원문제를 교섭하면서 노심초사하는 金九의 고뇌가 역력히 드러나 있다. 金九는 재미동포들의 재력으로 광복군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방안으로 세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로 미주와 하와이에서 수합한 본국 한재구제금을 광복군에 넘길 것. 이유는 본국 동포들은 모든 양식을 국가가 가지고 빈부의 소유 양식을 전부 거두어 사람수를 헤아려서 나누어 주므로 굶어 죽을 수도 없고 살도 찔 수 없이 전국 동포가 아귀지옥의 생활을 하므로 중국으로 물밀듯이 나오는데, 왜놈에게 그 귀한 돈을 주는 것이 뜻이 없다는 점.
둘째로 흥사단의 저축을 광복군에 사용할 것. 金九는 안창호가 살아 있어서 지금의 형세를 본다면 자기가 말하지 않더라도 자기 이상으로 용기를 내어 작심할 것이라고 말했다.
셋째로 미주·하와이·멕시코의 우리 사람 가운데 수천의 재산이 있는 유지를 동원하여 특종, 즉 일시 出損으로 6개월 동안 지탱시킬 것.59)
미주의 내지한재구제회는 모금한 구제금 가운데 500달러는 미국구제기관을 경유하여 국내로 보내고, 나머지 모금액은 보낼 통로가 없어서 보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金九의 뜻을 전해듣고 보관 중이던 1,628달러 64센트는 광복군과 그 가족을 위한 일에 쓰도록 12월5일에 임시정부로 보냈다.60)
루스벨트 大統領에게 편지 보내
金九는 광복군 결성문제로 경황이 없는 속에서도 대미외교를 강화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모든 일이 결국은 미국정부의 임시정부 승인 문제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金九는 1941년 2월에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로 중경을 방문한 커리(Lauhlim Currie)에게 부탁하여 루스벨트에게 각서를 보냈다. 2월25일자로 된 장문의 이 각서는 먼저 1882년의 조-미통상조약으로 두 나라의 국교가 개시되었음을 상기시키고, 한국의 독립문제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 줄 것을 부탁했다. 이어 각서는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다섯 가지 「사실」을 열거했는데, 그 하나로 〈지난 30년 동안 일본의 지배에 의하여 비인도적인 압박을 받았고, 중국과 러시아의 혁명으로부터 교훈을 얻었으므로, 일본의 멍에를 벗어나려는 우리의 결의는 확고합니다〉라고 적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그것은 미국정부와 국민들이 공산주의나 러시아혁명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 데서 나온 것이었다. 이는 기회 있을 때마다 미국의 독립전쟁의 의의나 건국정신을 강조하는 李承晩의 태도와는 대조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金九는 미국정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사항을 요구했다.
(1)미국정부가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2)그것은 항일전을 전개하는 우리 정부의 외교적·군사적·경제적 힘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임.
(3)우리의 독립전쟁을 더욱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하여 중경주재 미국 대표에게 기술협력·경제원조·무기공급이 원활히 되도록 지시할 것.
(4)지금의 세계대전이 종결되면 미국정부는 한국독립문제를 평화회의에 제출하고, 모든 회의에 한국대표가 참가하도록 허락할 것.
(5)지금의 세계대전이 종결된 뒤에 새로운 국제기구가 설립되면 우리 임시정부가 참가하는 것을 허락할 것.61)
위의 5개항은 그 뒤의 임시정부의 공식문서에서 표명된 요구사항의 기초가 되었는데, 외교부장 趙素昻이 작성한 원문은 내용은 같으나 한결 적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62)
그러나 金九의 이 각서에 대해 미국정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백악관에서는 이 편지를 4월11일에 국무부로 회부했고, 국무부에서는 이 문서를 과거의 임시정부 문서들과 같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문서철에 철해서 보관했다.63) 임시정부는 5월에 루스벨트 대통령의 아들 제임스 루스벨트(James Roosevelt)가 특사로 중경을 방문했을 때에도 다른 문건을 수교했고, 7월에도 별도의 편지를 루스벨트에게 보냈다.64)
(2) 海外韓族大會의 결의로 駐美外交委員部 설치
1940년 들어 유럽의 전황은 점점 위기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다. 영국의 유럽파견군 22만6,000명을 비롯하여 프랑스군과 벨지움군 11만2,000명이 5월28일부터 6월4일까지 프랑스의 던커크(Dunkirk)에서 극적으로 영국으로 철수하고, 6월14일에는 파리가 독일군에 점령되었다. 마침내 루스벨트 대통령은 6월10일에 버지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에서 행한 연설을 통하여 미국의 정책이 「중립」에서 「非교전국(non-belligerency) 입장」으로 바뀌었다고 선언했다. 「비교전국 입장」이란 공공연히 참전은 하지 않으나 한쪽 전쟁 당사국의 교전 이유를 지지하고 직접적인 원조를 하는 나라의 경우를 말한다. 그것은 미국의 뿌리 깊은 고립주의 여론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영원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7월의 해군증강법에 이어 9월에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징병법(Selective Training and Service Act)이 제정되었다.
美國은 「民主主義의 兵器廠」이 돼야
11월의 대통령선거에서 전례가 없는 3선을 달성한 루스벨트는 12월20일에는 군수산업을 총괄할 생산관리국을 설립하고, 연말의 노변담화를 통하여 『미국은 민주주의의 병기창(兵器廠)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그의 이 「민주주의의 병기창」 구상에 따라 1941년 3월에 성립된 것이 유명한 「무기대여법(Lend-Leas Act)」이었다. 「무기대여법」의 직접적인 목적은 무기구입 자금이 바닥이 난 영국에 무기를 긴급히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1940년 9월에 미국은 대서양의 미국 연안에 있는 영국령 섬들에 대한 조차권과 교환으로 노휴 구축함 50척을 영국에 양도했으나, 그것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무기대여법은 우선 필요한 무기와 군수품을 공급하고 승리한 뒤에 어떤 형식으로든지 상환받는다는 조건이었다. 1941년 11월에는 대독전을 전개하고 있는 소련에도 무기대여법이 적용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군수생산이 늘어남에 따라 중국과 북유럽 등 피침략 국가들과 망명정부의 군대, 반파시즘 지하 저항조직 등으로 무기대여법의 적용범위가 확대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까지 무기대여법에 의한 원조액은 500억 달러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에서 절반은 영국에, 4분의 1은 소련에 제공되었다.65)
미국정부의 적극적인 전쟁준비 분위기는 재미 한인사회를 한결 고무시켰다. 하와이에서는 1940년 10월13일에 6개 한인단체대표들이 모여 미국의 국방 준비를 조직적으로 후원하기 위한 연합한인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하와이 국민회 총회장 趙柄堯와 동지회 중앙부장 孫昇雲의 연서로 각 섬에 지방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촉구했다.66) 하와이의 연합한인위원회는 1941년의 3·1절 기념행사를 17개 단체들이 연합으로 거행하고, 광복군 후원금으로 1,000여 달러를 모금했다. 또 오아후섬 서부지역 동포들은 국민회와 동지회의 연합기념식을 계기로 광복군후원회를 조직하기로 했고, 그밖의 지방에서도 3·1절 행사가 연합행사로 거행되어 동포들의 단합기운을 보여 주었다.67)
하와이國民會의 合同會議 제의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북미국민회와는 별도로 1939년 8월에 기존의 중국후원회가 해체되고 새로 조직된 조선의용대후원회가 활발한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의용대후원회는 1940년 10월에는 중국인과 미국인들과 함께 일본영사관 앞에서 대대적인 시위운동을 벌이고, 조선의용대 미국후원회연합회를 결성했다.68)
조선의용대후원회의 결성으로 북미국민회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 그것은 재미동포들로 하여금 새로운 국면을 맞아 대일 항전계획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임시정부를 효과적으로 지원하게 하는 데도 지장이 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북미국민회는 하와이국민회와의 합동운동에 나섰다. 북미국민회의 제의에 대해 하와이국민회가 1940년 3월10일에 보낸 다음과 같은 회답은 두 국민회의 합동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이미 형성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전자에 귀회의 공문을 받자옵고 감격무지온바 다만 총회 임원회의 결의를 기다리느라고 앙답의 시일이 과히 지체되었사오니 용서하시옵소서.
귀회에서 제의하신 바를 우리 총임원회에서 일치한 의견으로 찬동하오며, 독립운동에 관한 일반활동을 임시정부 한 기관 아래 집중하도록 하자는 것이 본회의 년부년래 고집하여 오던 바이오며, 귀회에서도 동일한 보조와 논조를 취하시는 줄 대개 앙측하고 동조동감으로 영적 연락이 이미 심절하오나 그 연락의 물적 실적 발표가 충분치 못하다는 유감이 없지 아니하옵던 차에 이번의 교명을 받자와 더욱 감하하오며, 실제적으로 무슨 좋은 방책을 가르쳐 주시기를 바라옵고, 여간의 재정상 소비가 있더라도 일차 대표적 회집이 있으면 하는 의견이 있사오니 사조 회교하심을 바라나이다.〉69)
하와이국민회의 이러한 회답에 대해 북미국민회는 4월7일에 다시 다음과 같은 정중한 편지를 보내고 있다.
〈(귀회가 제의한) 하와이와 미주 양 국민총회의 대표회집 안건을 본기 중집회의에 제출한 바 이를 실행하야 시국부응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정세연락 보조일치 무엇으로나 필요한 줄 압니다. 이를 실행하는 방침에 대한 고견을 다시 주사 준비하도록 도와주심을 바라나이다.〉70)
金九에게 代表 派遣 요청해
처음에는 이처럼 북미국민총회와 하와이국민총회의 합동회의를 열 것을 생각했었으나, 李承晩을 지원하는 대한인 동지회가 참가하지 않는 두 국민회만의 통합작업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동지회를 포함한 모든 한인단체들의 대표자 회의로 범위를 확대하기로 했다.
북미국민회는 1940년 9월 무렵부터 애국부인회와 합동으로 단일체결성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9월2일에 하와이국민회와 동지회에 편지를 보내어 합석회의를 열어 시국대책을 강구하자고 제의했다. 이때는 하와이에서는 이미 하와이국민회와 동지회의 주동으로 연합한인위원회 결성운동이 논의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리하여 연합한인위원회가 결성되고 나서 달포쯤 지난 11월5일에 하와이국민회, 동지회, 북미국민회의 대표자들이 모여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세 단체가 제안한 통합방안을 검토했다.
세 단체의 제안은 입장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달랐다. 통합운동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북미국민회는 모든 기성단체들을 해체하고 미주와 하와이를 통틀어 단일당을 조직하자고 제의했다. 하와이의 대한인동지회 중앙본부는 재미한족의 연합기관을 설립하여 독립운동과 관련된 정치·재정·외교·선전의 사무를 관장하게 하고, 각 단체는 존속하되 단체 유지에 관한 사무만 다루고 독립운동에 관한 일은 새로 결성되는 연합기관의 지시에 따르게 하자고 제의했다. 그리고 하와이국민회는 우선 미국과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단체들의 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해외한족대회를 열고 독립운동의 새 방략을 확정하고, 모든 사업은 그 대회의 결의에 따라 진행하기로 하자고 제의했다.71)
준비위원회는 사흘 동안 다섯 차례의 회의를 거듭한 끝에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1)현하 각 단체의 설립이 그 자체를 해체하고 단일당을 결성하기에 준비되지 않은 까닭에, 해외한인 전체의 공동결의로 연합기관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의 모든 행사를 그 기관에 일임하기로 함.
(2)각 단체들은 연합기관의 세포기관이 되어서 독립운동에 대한 의무를 분담하되, 다만 그 자체에 관한 일에는 자의로 행사하기로 함.
(3)각 단체가 이 결의안을 일치 동의하면 해외한족대회를 열기로 함.72)
각지에 흩어져 있는 해외한인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이 다 참가하는 대회가 되기 위해서는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자들도 초청할 필요가 있었다. 회의를 준비한 사람들은 1923년에 상해에서 열렸던 국민대표회의와 같은 명분의 회의를 상정했던 것이다. 그들은 金九에게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 대표를 회의에 참석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金九는 북미국민회 총무 金秉堧(김병연)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美國入國許可와 비행기편까지 마련해 놓고
〈지금 하와이국민회와 동지회의 공함을 본즉, 귀회대표가 하와이로 와서 3단체회의를 거행하게 되었으니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으로서 대표를 파송하야 참석하여 달라는 요구가 있으나, 黨·政·軍의 각종 사무가 분망하야 인재난을 극도로 느끼는 이때에 또한 전방의 군비부족으로 전보가 하루에 여러 차례 되는 재정 상황에서 미주에 가는 여비를 가졌으면 우선 군비를 소용할 형편이니, 이상 두 가지 원인으로 대표파송은 불가능일 듯합니다. 그러나 대표 참석이 없다하여도 근본 3방 회의는 원만한 효과가 있으리라고 신념이 많습니다.…〉73)
金九는 또 하와이로는 미국정부의 입국허가 문제와 여비문제로 참가하지 못한다고 통보했던 모양이다. 주최 쪽의 기록에는 〈하와이에서 이민국의 허가를 얻고 비행기회사에 교섭하여 왕래의 편의를 준비하고 다시 청하였으나, 임시정부의 일이 많아서 떠날 수 없다는 대답을 받고, 원동대표의 참석은 단념하였다〉라고 적혀 있다.74)
1941년 4월19일부터 29일까지 호놀룰루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는 1930년대에 여러 갈래로 추진되어 온 재미민족운동단체들의 통일운동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급박한 국제정세의 전개 속에서 비로소 결실을 본 획기적인 행사였다. 동지회의 기관지 「太平洋週報」의 다음과 같은 권두 논설이 이 대회의 의의를 짐작하게 한다.
〈수화상극(水火相剋)의 러시아와 일본이 각자 이익을 위하야 중립협약을 체결하여서 태평양에 대한 일본 위협이 급박하야진 이 비상시기에 로스앤젤레스 국민회 대표 한시대, 김호, 송종익 3씨가 하와이국민회, 동지회, 기타 단체대표와 참석하야 국가 대사를 의논키로 하와이를 방문함에 우리는 대표 3씨를 알로하 사랑으로 환영하노라.
민간단체로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광복운동을 어떻게 어느 방도로 실효천행(實效踐行)할 방략과 정책을 심의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오 이번 연합회 호성적으로 자조 친선 단결하기를 기대하노라. 단체성질로는 각각 다르나 연합회 대표제씨는 미주·하와이·멕시코 재류 한족을 대표하야 전민족의 운명개척할 사명을 가졌은즉, 나랏일이 단체일보다 더 소중한 줄 깨닫고 각자의 주의 주장을 서로 고집하지 말며 순리로 화기 있게 민족의 대경륜과 소망을 (실천하는 데) 서공하기 부탁하며, 다시금 대표 3씨의 하와이 방문을 만강의 열정으로 알로하 하노라.〉75)
9개 團體代表 15명이 호놀룰루에 모여
북미국민회의 대표 韓始大, 金乎, 宋鍾翊 세 사람은 4월16일에 「미소니아」호 편으로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하와이 국민회에서는 해외한족대회에 참석할 대표로 安元奎, 金鉉九, 金元容을 선임했고, 동지회에서는 李元淳, 安玄卿, 都鎭鎬를 선임했다. 선임된 세 단체 대표들로 대회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하와이국민회 회장 조병요와 동지회 중앙부장 손승운은 정식대표는 아니었으나, 대표자격으로 참석했다. 해외한족대회에 참가한 단체와 정식대표는 미국 본토의 두 단체(북미국민회,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연합회)와 하와이의 일곱 단체(하와이국민회, 동지회, 중한민중동맹단, 대조선독립단, 한국독립당 하와이총지부, 대한부인구제회의 국민회 쪽과 동지회 쪽) 대표 15명이었다. 두 국민회와 동지회 이외의 단체에서는 대표 한 명씩이 참가했다.76)
대회를 주동한 세 단체가 준비한 의제는 다음과 같았다. 곧, 임시정부 기치 아래 대동단결하여 총역량을 집중한다는 목표 아래 첫째 독립전선에 대한 전민족의 총동원 강화와 그 지도 방략, 둘째 정치·외교·군사의 3대운동의 현시대적 신방략의 전개, 셋째 독립운동의 강화 실현에 대한 경제적 기초와 운동방략을 토의사항으로 정했다.77)
동지회가 해외한족대회에 기대한 가장 중요한 의안은 구미위원부를 정부기구로 인정하고 재미동포단체들이 협력하여 재정지원을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회의 개막에 즈음하여 李元淳은 「우리의 임시정부와 대미외교」라는 글을 발표하여 동지회의 그러한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원순은 대미외교의 필요성과 구미위원부의 내력, 그리고 만주사변[9·18 전쟁]이 일어나자 李承晩이 임시정부 명의로 제네바의 국제연맹회의에 가서 활동했던 일 등을 상기시킨 다음, 〈2, 3년 전부터는 구미위원부 사무소를 다시 열고 리박사께서 평생 활동하시며 동지회와 부인구제회가 그 경비를 전담하야 가는 바이라〉고 설명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우리의 모든 일이 이만치 진행되는 이때에 아무쪼록 조직적으로, 또는 통일적으로 일을 하야 사업을 분담하야 가지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임시정부를 최고기관으로 하여 광복군과 구미위원부를 직접 연락을 하게 하며 우리 민간단체 등은 그 기관들을 물질적으로 원조를 할 것 같으면 모든 일이 순서적으로 진행되어 갈 것이오, 무슨 일에나 질서를 유지하야 가지고 적극적 운동을 하야 나아가서 이번 기회에 우리의 원하는 독립을 기어코 찾을 것이라 한다.…〉78)
「韓吉洙는 國家와 民族에 罪過를 범한 者」
대미외교사업문제는 해외한족대회의 준비단계에서부터 임시정부의 큰 관심사였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의용대후원회는 임시정부에 편지를 보내어 자신들의 단체도 인정하고 임시정부를 개조하여 각 당파의 수령들을 망라한 내각을 구성하라는 등 몇 가지를 제의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韓吉洙를 외교대표로 임명하라는 요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임시정부는 공식답서를 보내지 않고 金九 개인 명의로 편지를 보냈다. 그것은 〈임시정부는 한길수와 합작하는 개인이나 단체에는 공식 문서를 보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미국의원들에게 한국의 독립운동은 무력을 쓰지 않고 정신으로 하며, 앞으로 독립청원단을 조직하여 도쿄까지 갈 것이라는 둥, 한-미조약의 부활, 또는 알래스카에 극동으로부터 한인 1만 명을 이민시킨다는 등의 광패(狂悖)한 언동으로 국가와 민족에 용납하지 못할 죄과를 범한 자와 합작하기 때문이다. 한길수가 사죄서를 발표하지 않으면 필경 정부에서 성토할 것이고, 소위 민중동맹단이나 후원회는 해산하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다〉라는 요지의 내용이었다.79) 金九의 이러한 강경한 주장은 한길수와 그의 후원자들에 대한 반감뿐만 아니라 그들이 지지하는 김원봉 등의 민족전선연맹에 대한 적개심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의용대후원회에 보낸 金九의 이러한 편지는 아랑곳없이 한길수의 중한민중동맹단은 해외한족대회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해외한족대회는) 첫째는 임시정부를 일체로 봉대하여 유력한 정부가 되게할 것이오, 둘째로는 외교단을 조직하여 이미 외교 선전사업을 시작한 인사들이나 새로 증가되는 인원들이라도 이 범위안에서 일치한 행동을 취하게 할 것이오, 셋째로는 군사운동이니, 임시정부 명령과 항일전선의 기치를 같이하야 나아가게 할지니, 이 세 가지를 원만히 해결하야 놓으면 이번 대회는 대성공이라 하노라.…〉80)
이러한 주장은 한족대회가 한길수의 활동까지 포괄하는 통합적인 외교활동기구를 구성할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金九는 의용대후원회에 편지를 보낸 사실을 북미국민회 총무 김병연(金秉堧)에게 알리고, 해외한족대회를 앞두고 북미국민회가 건의한 외교선전대표 문제에 대해서는 李承晩을 단장으로 하라고 다음과 같이 잘라 말했다.
〈귀회에서 고려하는 외교선전의 대표문제는 현하 시세에 비추어 보면 그다지 염려가 안 될 듯합니다. 한 사람을 맡겨도 전횡하기 불능한 것은 원동력이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있은 즉, 전일의 구미위원부 시대와는 판이할 것이오며, 여러 사람에게 맡겨도 爭功을 할지언정 爭權은 못 할 것이니 李博士를 단장으로 하고 2, 3인 보조를 하게 하면 적당할 듯합니다. 하물며 미주와 하와이의 각 단체가 일치한 주장으로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절대 옹호하는 그 배경을 가진 대표들이 감히 딴생각을 할 리가 없을 듯하외다.…〉81)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임시정부의 방침은 한족대회가 끝날 때까지 명확하게 결정되어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내무부장 조완구가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한족대표회에 보낸 다음과 같은 「훈사」로 짐작할 수 있다. 조완구의 이 「훈사」는 공식회의가 시작되기 하루 전인 4월20일에 중경방송국의 단파방송을 통하여 전해졌다. 조완구는 〈이미 김주석의 서함을 받으셨을 터인즉, 정부의 의사를 벌써 알으셨을 줄 압니다〉라고 전제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와 같이 중대한 사명을 유감없이 준행하려면 그 책임을 맡길 인물을 선택하는 것이 첫 일입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인물은 훌륭한 수완과 총명한 재간을 반드시 구비하여야 할 것은 물론이지만 그보다도 더 보귀한 것은 순정한 정신과 인격입니다. 외교기구의 명칭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회로, 책임자는 3인쯤 임명하는 것이 적당하리라 생각합니다.…〉82)
外交代表問題로 사흘 동안 討論
하와이 한족대표회는 4월19일 저녁 7시에 국민총회관에서 공개리에 개회되어 대회임원을 선정했다. 의장에 안원규, 부의장에 한시대, 서기에 김원용·도진호, 영문서기에 김현구가 선임되고, 대표심사위원으로는 안원규·이원순·김호가 선임되었다. 이원순과 김호는 의안수정위원을 겸임했다. 이러한 임원구성은 대회가 세 단체의 주동으로 성사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4월20일은 일요일이었다. 대표일행은 오전에 기독교 예배당에서 예배를 보고, 오후 2시에 국민총회관에서 일반동포들도 참석한 민중대회로 모였다. 대회진행에 대한 설명이 있고 나서 대표들의 연설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는 중경임시정부 각원들의 축전과 워싱턴 위원부의 李承晩과 북미국민총회의 축사가 낭독되었다. 본격적인 의안토의는 4월21일 하오 7시부터 갈리히의 한인기독학원에서 개시되었다.83)
회의는 4월26일까지 계속되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열띤 토론이 전개된 것은 역시 외교사업을 담당할 대표의 수와 인선문제였다. 이 문제로 사흘 동안 계속 토론이 벌어졌다. 결국 북미국민회의 총회장을 역임한 김호의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李承晩을 대표로 천거하여 임시정부의 임명을 받기로 했다. 김호의 주장은 첫째로 미주와 하와이의 지도자들 가운데에서 자격·신용·배경 등을 감안할 때에 40년의 애국 성의를 가진 李承晩만 한 인물이 없고, 둘째로 李承晩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두려워서 그를 외교중심 인물로 내세우지 않았다가 미주 및 하와이동지회의 찬조를 얻지 못하게 되면 이번 대회의 목적인 대동단결의 노력은 실패하고 말 것이며, 셋째로 李承晩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소수 지식인 층인 반면에 그를 신복하는 다수의 민중이 그의 임명을 환영한다는 것이었다.84)
논란이 벌어지자 중한민중동맹단 대표 등은 대회에서 탈퇴하겠다면서 흥분하기도 했으나, 회의는 침착하게 진행되었다. 김호는 또 한길수가 북미국민회에 대해 활동비를 지원하지 않는다고 미국인을 시켜 위협하다시피 했고, 임시정부를 비방했던 일 등을 설명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기능에 들어가서는 우리가 칭찬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외다. 한길수는 풍부한 학식은 없으나 탐보[探報: 정보수집]함에는 경탄할 것이 많으며, 따라서 미국친구들도 그의 봉사를 어느 정도까지는 신임하며 찬조합니다. 그의 자격과 활동범위가 미국 국방에 긴절히 소용되는고로 한씨를 외교원으로 쓰는 것보다 미국 정부에 봉사하며 미주 및 하와이 한인사회에 충성을 보이게 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 줄 절실히 믿습니다』
이렇게 하여 대회는 한길수를 외교원의 한 사람으로 포함시키기보다 미국 국방공작에 대한 미주 및 하와이 한인사회의 봉사자로 임명하기로 합의했다.85) 이러한 조치에 대해 金九는 회의가 끝난 뒤에 김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번 대회에서 李博士를 단독으로 외교대표로 선택한 것과 한길수를 국방봉사원으로 선정하야 민중적으로 감독 지도케 된 것이 모두 지혜스러운 공작이라고 정부동인 등은 贊賀하기 마지않습니다〉라고 평가했다.86)
李承晩은 外交代表, 韓吉洙는 國防工作 봉사원으로
해외한족대회에서 토의된 사항은 4월27일 오후 2시에 센트럴 주니어학교에서 열린 공동대회에 보고되었고, 공동대회의 논평을 거쳐 이틀 뒤인 4월29일에 「해외한족대회 결의안」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결의안」은 역사적인 한족대회의 결의사항을 7개항에 걸쳐서 구체적으로 망라한 것이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독립전선 통일문제.
1)주의와 이론을 초월하여 온갖 역량을 항일전선에 집중하고, 2)신문·잡지 및 모든 출판물들의 논조를 통일하며, 3)표어를 제정하여 정신을 집중하고 행동을 민활하게 한다.
둘째로 임시정부 봉대문제.
대한민족과 각 단체는 1)임시정부를 절대로 신뢰하며 물질과 정신을 다하여 희생적으로 봉사하고, 2)임시정부로부터 발표되는 온갖 법령을 절대로 준행하며, 3)정부의 위신과 기율의 보증을 위하여 임시정부는 민족의 총의적 요구가 아니면 현행 정체를 변경하지 않도록 정부에 요청한다.
셋째로 군사운동 문제.
1)각 단체는 우리 국민 전체가 광복군인 된 인식을 고취하여 전선출동의 준비적 훈련을 행하기로 하고, 2)광복군과 의용대는 무조건으로 임시정부 통제 아래 대일항전을 합작하도록 요청한다.
넷째로 외교운동과 그 기관설치에 관한 문제. 이 항목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1)외교위원부를 워싱턴에 설치함. [이유] 미국은 오늘 세계외교의 중심이 되느니만치 그 수부 워싱턴에 우리의 외교기관을 두어 활동케 하자 함.
2)외교대표는 위원 한 사람을 두어 전무케 하되, 시국의 전개와 사무의 증가를 따라 인원을 더함. [이유] 재정과 모든 이론의 관계로 위원 한 사람으로서 전무케 하고 시국에 어울리며 일이 복잡함을 따라서 인원을 더하자 함.
3)외교위원부는 임시정부의 법적 절차를 마친 뒤에 사무를 개시케 함. [이유] 이 외교기관을 민중적으로 하지 않고 정부의 기관으로 실행케 함에는 외교부의 정식 인준을 받는 것이 옳다함에 터함.
4)외교위원부 경비는 재외동포가 부담하기로 함. [이유] 실제상으로 재정은 재미(미주·하와이·멕시코·쿠바) 동포의 수중에 있음에서임.
5)대미 외교대표는 李承晩으로 택정함.
6)이상의 조목을 임시정부에 청원하여 인가를 받은 뒤에 실행하기로 함.
다섯째로 미국의 국방공작을 원조하는 문제.
1)해외한족은 어디서든지 직접 간접으로 미국의 국방공작을 원조하라고 권유문을 발포하고, 2)미국 국방공작 봉사원 1인을 선정하여 적당한 봉사를 하게 하되, 경비는 재미한인이 부담하며 3)미국 국방공작 봉사원은 한길수로 선정한다.
모든 資金은 「獨立金」으로 통합하기로
여섯째로 독립운동에 대한 재정방침문제.
1)독립운동에 쓰는 모든 자금은 「독립금」이라는 이름으로 각 지방단체에서 일치한 방법으로 수납하고, 2)지금까지 각 단체에서 실행하던 각종 독립운동금의 명칭은 다 폐지하며 3)독립운동금은 연예산 2만 달러로 책정하고, 그 가운데에서 3분의 2는 임시정부로 상납하고 3분의 1은 외교비와 국방공작 원조비로 사용하기로 한다.
「재정에 관한 세칙」은 따로 정했다.
일곱째로 연합기관 설치 문제.
1)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한다. 2)연합회는 의사부와 집행부로 구성하되, 의사부는 하와이에 있는 대표원으로 조직하고 집행부는 미주에 있는 대표원으로 조직하기로 하고, 3)연합회 규정은 따로 재정하기로 했다.87)
해외한족대회의 성과로 결성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미주와 하와이 동포사회를 총괄하는 새로운 조직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1909년 2월에 대한인국민회가 결성되어 미국 본토와 하와이의 한인사회를 처음으로 하나로 결합시킨 이래 최대의 업적이라고 할만했다.88)
「해외한족대회결의안」과 함께 발표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규정」은 연합위원회의 목적을 조국의 독립운동과 그 전선을 통일하여 항전 승리를 획득하며 동포사회의 발전 향상을 위하여 연락 협조하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또 연합위원회는 재미한족의 정치단체들로 구성하며, 체제는 위원제로 하고, 위원은 해외한족대표회 출석대표 전원과 하와이국민회, 동지회, 북미국민회 수석으로 선출하기로 했다. 운영방식은 정례회가 없고 특별한 사정에 따라 의사부와 집행부의 공동결의로 임시로 소집하는 것으로 했다. 주목되는 것은 각 회원 단체는 독립금을 수합하여 본위원회로 납부하는 의무를 각별히 준수하도록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또한 미국 국방공작의 후원사무 일체를 본회에서 관리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은 각 단체와 한길수의 관계에서 있을 수 있는 알력을 최대한으로 방지하고자 한 배려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워싱턴에 설치될 외교위원부도 행정적으로는 임시정부의 직속기관이 될 것이나, 재정은 연합위원회에 의존하게 될 것이므로 경우에 따라서 알력을 빚을 소지가 없지 않았다.
李承晩과 金九의 祝賀文이 차이나
대회를 성공리에 마쳤다는 소식을 듣고 李承晩은 다음과 같은 축하문을 보냈다.
〈이번에 호놀룰루에서 개최한 해외한족대회 결과를 모든 한족이 다 기뻐할 줄 믿습니다.… 피차 호의로 의사를 교환하고 따라서 민족운동을 합심합력하야 하기로 작정하고 각각 호감을 가지고 일해 나가게 된 것은 과연 축하할 만한 성적입니다.
이 뒤를 계속하야 이 성적이 영구한 결실을 내고 못 내는 것은 각 단체의 인도자들과 또한 일반 민중에 달렸나니, 어떤 단체나 어떤 인도자나 이것을 이용해서 자기들의 세력을 세워보기를 경영하는 데가 있으면 아무리 비밀히 하고 아무리 수단 있게 할지라도 스스로 남들이 다 알고 각각 그 정신이 다시 들어와서 서로 분열이 부지중에 생기리니, 이것을 극히 조심할 것입니다. 민족을 이때에 우리 손으로 살려내야 하겠는데, 일편공심만 가지고 서로 받들어 나가면 스스로 신앙이 생기며 정의가 통해서 몇십몇백 단체가 있을지라도 다 단합 단결한 민족이 될 것이라.…
그런즉 자금 이후로 어떤 한인이든지 외국인을 대하야 글로나 말로나 한인들이 단합이 못 되어서 일하기 어렵다 하는 자이 있으면 이는 곧 거짓말하는자요 한족의 생활길을 막는 자로 인정하야 공개성토할 것이라.… 종금 이후로는 모든 지난 일을 다 잊어버리고 천재일시인 이 기회에 우리 삼천리 금수강산을 회복하자는 목적에 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는 대의를 지켜서 이 굳은 애국심과 이 굳은 단결로 대업을 성취하도록 나가기를 바랍니다.…〉89)
이러한 문면은 한족대회의 성과보다는 앞으로의 일을 중시하면서 지도자들의 단결을 강조한 것이었다.
李承晩의 이러한 신중한 평가와는 대조적으로 金九는 해외한족대회가 재미동포들의 〈독립운동 역사상에 신광채를 표현하는〉 쾌거였다고 극찬했다. 해외한족대회의 결의안을 받아본 金九는 6월4일자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북미국민회로 보냈다.
〈그간 독립당 대표대회를 하와이 대표대회와 동시에 거행하고 임시정부 국무회의와 광복군 통수부회의를 왜적 비행기의 공습을 피해 가면서 월여를 계속 개회하야 이제야 겨우 마쳤고, 하와이 대표 대회가 결의한 모든 중대 안건은 소료밖에 원만히 토의 결속된 보고를 작일에 받아보고 금일[6월4일] 국무회의를 열고 보고를 의지하야 절차를 행하는 중입니다. 이것은 우리 동포가 미주에서 독립운동 역사상에 신광채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정부 동인 등은 크게 경하하오며 외교위원 천보도 지금 이 시기에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매우 지혜로운 처사로 압니다.〉90)
李承晩과 金九의 하와이 해외한족대회에 대한 이러한 평가의 차이는 새로 결성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앞으로의 활동에 대한 기대와 전망의 차이에 따른 것이었다.
李承晩은 外交代表 자리를 사양해
李承晩은 한족대회가 개회되는 동안 동지회에 대하여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았다. 대회 의장 안원규는 대회결의안을 임시정부에 보내고 李承晩을 대미외교대표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李承晩에게도 결의안과 함께 대회의 결의를 수락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李承晩은 「太平洋週報」로 한족대회를 치하하는 글을 보낸 이튿날 안원규의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李承晩은 이 결정을 사양했다. 그는 5월18일에 안원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敬啓者. 귀함을 접수하여 해외한족대회 결의안을 자세히 보았으며 귀 대회 대성공을 다시 축하하나이다.
그런데 본인을 주미 외교대표로 추천하셨다 하니 극히 감사하오나 시기에 응하여 상당한 인격을 택임하시면 본인은 힘껏 협찬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을 터입니다. 이 뜻을 임시정부에 글을 보내어 품고하오니 서량(恕諒)함을 열망하오며 민족통일을 위하여 이렇듯 노력하심을 감복하나이다.〉91)
李承晩은 안원규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이원순에게도 알렸다. 이때의 李承晩의 사양의 뜻이 얼마나 강력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족대회의 결의에 규정된 외교위원부의 위상이 李承晩으로서는 만족스럽지 못했을 것이다. 이원순에게 밝힌 외교대표직 사양의 이유는 좀 생뚱맞은 것이었다.
〈내가 연래로 주장하던 바는 각 단체 인도자들이 각각 합동을 대응하여 단체 세력을 확장하려는고로 합동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하여 온 것입니다. 각 단체들이 모든 사상과 신조를 불계하고 합동을 주장하는 자리에 음연히 중요 책임을 맡고 앉으면 나 개인으로는 전후 모순이요 민족 전체로는 합동을 무력하게 함이니, 다만 뒤에 앉아서 힘껏 도울 것이오. 公私凉天(공사양천)이겠기에 이같이 결정하는 것이며, 여러분이 모든 기를 희생하시므로 이만치라도 개발된 것이니, 일만동포의 양해를 바랍니다.〉92)
그러나 이러한 설명만으로는 2년 전에 임시정부에 대하여 구미위원부의 복설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던 李承晩이 외교대표의 직임을 사양한 분명한 의사를 판단하기 어렵다. 아무튼 한족대회의 결의안에 규정된 외교위원부의 위상은 지난날의 구미위원부의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구미위원부는 李承晩이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 자격으로 1919년 8월에 공포한 「집정관총재 공포문(제2호)」을 근거로 하여 설립된 기관이었다. 상해정부를 중심으로 임시정부가 통합된 뒤에도 구미위원부는 재미동포들을 대상으로 행정권과 재정권을 행사하는 이원적인 정부기구로 운영되었다. 임시정부는 1925년 3월에 李承晩을 탄핵 면직시키면서 구미위원부에도 폐지령을 내렸으나 李承晩은 이를 무시하고 동지회와 부인구제회 등 지지자들의 지원으로 1937년까지 워싱턴에 구미위원부 사무실을 유지했고,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다가 1939년 3월에 李承晩이 하와이에서 다시 워싱턴으로 가서부터 활동을 제재하고 있었다.
臨時政府에서 信任狀 보내와
해외한족대회의 요청을 받은 임시정부는 6월4일에 국무회의를 열어 워싱턴에 주미외교위원부를 설치하기로 결의하고 「주미외교위원부 규정」을 제정했다. 「규정」은 새로 설치하는 외교기관의 명칭을 「주미외교위원부」라고 명시함으로써 지난날의 구미위원부와는 다른 정부직할 기관임을 분명히 했다(제1조). 그러나 대외명칭은 李承晩이 사용하는 대로 「Korean Commission」을 사용했다. 주미외교위원부에는 위원장 1인을 임시정부에서 임명하여 교섭사무를 전임하게 하고(제2조), 위원장은 수시로 외교상황을 임시정부에 보고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안건은 반드시 임시정부의 지시를 받도록 했다(제3조).93)
임시정부는 같은 날짜(6월4일)로 된 임명장과 함께 국문과 영문으로 된 신임장을 李承晩에게 보냈다. 영문 신임장의 문면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신임장. 본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은 국무회의의 의결로 미주 워싱턴 D.C. 주재 주미외교위원부(the Korean Commission) 위원장 李承晩 박사를 합중국정부와의 모든 외교교섭을 재량에 따라 행사할 수 있는 전권을 부여받은 본 정부의 공식대표로 임명하였음을 통보합니다.〉
임시정부는 이러한 신임장과 함께 6월6일자로 金九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와 조소앙이 헐(Cordell Hull)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편지를 동봉해서 李承晩에게 보냈다. 두 편지는 모두 1882년의 조-미통상조약을 상기시키면서 두 나라 사이의 우호관계가 재개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李承晩에게 협조해 주도록 부탁하는 내용이었다.94)
혼벡이 信任狀 제출 말라고 권유
李承晩은 7월14일에 이 문서들을 가지고 국무부로 정치문제고문 혼벡(Stanley K. Hornbeck)을 찾아갔다. 그는 이 문서들을 혼벡에게 꺼내 보이면서 수신인들에게 보내거나 혼벡이 전해 주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그 이전에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혼벡의 조언을 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李承晩에게 호의적인 혼벡은 임시정부의 도장이 찍히고 문장이 첨부된 문서들을 훑어보고 나서 회의적으로 대답했다. 그는 먼저 국무부 동료들과 사전협의를 하지 않고는 문서들을 접수할 의사가 없다고 말하고, 만일 李承晩이 그 문서들을 잠정적으로 맡겨 놓고 가겠다면 며칠 안으로 회답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혼벡은 정중하게 말했다.
『나의 조언이 선생이 생각했던 일을 못 하도록 방해하는 조언이 되고 마는 것이 두렵습니다』
혼벡은 자기 보좌관이었다가 1937년에 후임 극동국장이 되어 있는 해밀턴(Maxwell M. Hamilton)과 해밀턴의 보좌관 발렌타인(Joseph W. Ballantine), 그리고 국무차관 웰스(Sumner Welles) 등 국무부 간부들과 상의했다. 혼벡, 해밀턴, 발렌타인 세 사람은 국무부의 핵심적인 극동정책담당자였다. 헐 국무장관은 뒷날 이들을 자기의 「주요한 협력자」였다고 술회했다.95) 혼벡은 7월22일에 李承晩에게 연락했다. 혼벡은 문서들을 심도 있게 검토했다고 말하면서, 이 문서들을 수신인들에게 보내지 말고 李承晩이 보관하고 있으라고 했다.
『이 시점에 여기에서 이렇게 접근하는 것은 李博士의 장년기의 온 생애를 바친 운동을 진전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요컨대 타이밍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李承晩이 예상한 대답이었다. 그는 혼벡에게 국무부가 진지하게 검토해 주어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적절하고 유리한 기회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계속해서 국제상황의 추이를 지켜보겠습니다』96)
李承晩이 기대한 적절하고 유리한 기회는 넉 달 남짓 뒤로 다가오고 있었다. 1941년 12월7일 새벽의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이 그것이었다.●
1) 「金九가 朱家?에게 보내는 1940년 9월19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1994, 國史編纂委員會, 41쪽. 2) 「新韓民報」 1940년 9월26일자, 「중경으로부터 날아오는 광복군 성립공전」. 3) 「新韓民報」 1940년 9월26일자, 「소년중국특전」, 「금산시보의 전하는 향항통신」, 「세계일보의 전하는 중앙통신」. 4) 「新韓民報」 1940년 10월10일자, 「한국광복군 축하에 관한 문건」 및 「임정송금 1천원」. 5) 「朱家?가 金九에게 보낸 1940년 10월4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43쪽. 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6) 독립군전투사(하)」, 1969,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667쪽. 7) 「新韓民報」 1941년 2월27일자, 「臨時政府公報 제68호」.
8) 「新韓民報」 1940년 10월3일자, 「한국광복군의 성립과 그 장래」;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2005, 18쪽; 金學奎, 「白波自敍傳」,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198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598쪽; 「독립운동사(6) 독립군전투사(하)」, 205~207쪽. 9) 「독립운동사(6) 독립군전투사(하)」, 202~205쪽. 10)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18쪽; 「新韓民報」 1941년 4월17일자, 「국무회의」; 「독립운동사(6) 독립군전투사(하)」, 206쪽. 11) 「金學奎와 王俊誠이 朱家?에게 제출한 備忘錄」,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62쪽. 12) 「新韓民報」 1941년 3월13일자, 「韓國獨立光復軍, 1월1일 제5지대성립전례거행」; 「독립운동사(6) 독립군전투사(하)」, 207~210쪽; 韓詩俊, 「韓國光復軍硏究」, 1993, 一潮閣, 151~155쪽. 13)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1997, 돌베개, 404쪽. 14) 「新韓民報」 1940년 10월3일자, 「광복군조직에 대한 중요통신」; 「백범일지」, 404쪽.
15)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제시의 일기」, 1999, 혜윰, 226쪽; 南坡朴贊翊傳記刊行委員會, 「南坡朴贊翊傳記」, 1989, 乙酉文化社, 257~259쪽. 16) 閔弼鎬, 「大韓民國臨時政府와 나」, 金俊燁 編, 「石麟閔弼鎬傳」, 1995, 나남출판, 99쪽. 17) 「백범일지」, 376쪽, 393쪽. 18)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14쪽. 19) 「백범일지」, 402쪽; 정정화, 「녹두꽃」, 1987, 未完, 147~148쪽. 20)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15~16쪽. 21) 「新朝鮮報」 1945년 11월2일자, 金秉豪·宋志英, 「重慶特信(2)」. 22) 「백범일지」, 406쪽; 金俊燁, 「長征」 2, 1989, 나남, 469쪽. 23) 정정화, 앞의 책, 142~143쪽. 24) 「백범일지」, 377쪽, 392쪽; 정정화, 앞의 책, 149쪽.
25) 「백범일지」, 381~382쪽, 406쪽; 董晏明, 「抗日戰爭時期 土橋場에 駐在하고 있던 韓國臨時政府와 僑民」, 市政協九龍坡區委員會 文史工作委員會, 「九龍文史」, 第七期, 1995년 9월, 40~41쪽. 26)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앞의 책, 136쪽. 27) 정정화, 앞의 책, 142~143쪽. 28)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앞의 책, 171쪽; 정정화, 앞의 책, 149쪽. 29)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앞의 책, 220쪽. 30) 「新朝鮮報」 1945년 11월2일자, 金秉豪·宋志英, 「重慶特信(2)」. 31) 「백범일지」, 402쪽.
32) 閔弼鎬, 「大韓民國臨時政府와 나」, 101~102쪽. 33)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15~16쪽, 20~22쪽. 34) 정정화, 앞의 책, 147쪽, 160쪽;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앞의 책, 176쪽. 35) 정정화, 앞의 책, 146쪽;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앞의 책, 220쪽. 36) 「백범일지」, 406쪽. 37) 董晏明, 앞의 글, 41~42쪽. 38) 「백범일지」, 406쪽. 39)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앞의 책, 166쪽. 40) 南坡朴贊翊傳記刊行委員會, 앞의 책, 257쪽. 41)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앞의 책, 200쪽, 225쪽; 金俊燁, 앞의 책, 469쪽; 정정화, 앞의 책, 146쪽; 南坡朴贊翊傳記刊行委員會, 앞의 책, 258쪽.
42) 「新朝鮮報」 1945년 11월2일자, 金秉豪·宋志英, 「重慶特信(2)」. 43) 「金九가 朱家?에게 보낸 1941년 1월21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47~48쪽. 44) 「朱家?가 何應欽과 商震에게 보낸 1941년 1월24일자 편지」 및 「商震이 朱家?에게 보낸 1941년 2월3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ⅩⅠ」, 48쪽. 45) 「金九가 朱家?에게 보낸 1941년 2월14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ⅩⅠ」, 49쪽. 46) 「軍政部에서 朱家?에게 보낸 3월3일자 전문」,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50쪽. 47) 「朱家?가 商震에게 보낸 1941년 3월6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51쪽. 48) 「朱家?가 金九에게 보낸 1941년 3월6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51~52쪽. 49) 「商震이 朱家?에게 보낸 1941년 3월16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54쪽.
50) 「金學奎와 王俊誠이 朱家?에게 보낸 備忘錄」 및 「金九가 朱家?에게 보낸 1941년 6월13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62쪽. 66~67쪽; 「독립운동사(6) 독립군전투사(하)」, 218쪽. 51) 李範奭, 「光復軍」, 「新東亞」 1969년 4월호, 196쪽. 52) 「朱家?가 金九에게 보낸 1941년 3월20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54쪽. 53) 「賀耀祖가 金九에게 보낸 1941년 4월19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55~56쪽. 54) 「金九가 朱家?에게 보낸 1941년 4월28일자 편지」 및 「朱家?가 何應欽에게 보낸 5월3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56~57쪽. 55) 「金九가 金乎에게 보내는 1941년 6월18일자 편지」, 「白凡金九全集(7)」, 43쪽; 金九가 蔣介石에게 보낸 1941년 7월28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73쪽. 56) 「徐恩曾이 朱家?에게 보낸 1941년 11월1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81쪽; 金榮範, 「朝鮮義勇隊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198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487쪽. 57) 「金學奎가 1941년 5월에 朱家?에게 제출한 韓國光復軍問題節略」,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63~65쪽. 58) 「商震이 朱家?에게 보낸 1941년 5월30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59쪽.
59) 「金九가 金乎에게 보낸 1941년 2월16일자 편지」, 「白凡金九全集(7)」, 41~42쪽. 60) 「新韓民報」 1941년 12월11일자, 「내지한재구제금 임정에 밧쳐」. 61) Kim Ku to Franklin D. Roosevelt, Feb. 25, 1941, 「白凡金九全集(7)」, 53~57쪽. 62) 「致美大統領」,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趙素昻篇(三)」, 1997, 韓國精神文化硏究院, 817~823쪽. 63) 미 국무부 문서번호 FW 895.01/48 Division of Far Eastern Affairs, Apr. 15, 1941.
64) 미 국무부 문서번호 895.00/729 Joe So-ang to Corde Hull, June 6, 1941;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3) 임시의정원Ⅱ」, 2005, 국사편찬위원회, 17쪽. 65) Arthur M. Schlesinger, Jr., The Almanic of American History, 1983, Putnam Publishing Group. pp. 480~482. 66)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편, 「해방조선」, 1948, 재미한족연합위원회집행부, 149쪽. 67) 「太平洋週報」 1941년 3월1일호, 「3·1절경축순서」, 및 3월15일호 「누가 광복군인가」; 「新韓民報」 1941년 3월27일자, 「한국독립광복군――하와이 6천동포의 힘있는 후원」. 68) 최기영, 「조선의용대와 미주한인사회――조선의용대 미국후원회를 중심으로」, 「식민지시기 민족지성과 문화운동」, 2003, 한울, 305~335쪽 참조.
69) 「新韓民報」 1940년 4월11일자, 「國民會總會공독」. 70) 위와 같음. 71)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편, 앞의 책, 150쪽; 金元容, 「在美韓人五十年史」, 1959, Reedley, 400~401쪽. 72) 金元容, 위의 책, 400쪽. 73) 「金九가 金秉堧에게 보낸 1941년 3월20일자 편지」, 「白凡金九全集(7)」, 59쪽.
74)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편, 앞의 책, 151쪽. 75) 「太平洋週報」, 1941년 4월19일호, 「라성국민회대표를 환영」. 76) 洪善均, 「在美韓族聯合委員會硏究(1941~1945)」, 2002, 漢陽大學校 博士學位論文, 60쪽. 77) 「太平洋週報」, 1941년 4월5일호, 「해외한족전체대회」: 「新韓民報」, 1941년, 4월17일자, 「3대단체 대표회의 회의정서」. 78) 리원순, 「우리의 림시정부와 대미외교」, 「太平洋週報」 1941년 4월19일호, 11쪽.
79) 「金九가 金秉堧에게 보낸 1941년 3월20일자 편지」, 「白凡金九全集(7)」, 59~60쪽. 80) 「한중동맹단선전문」 1941년 4월18일호(제70호), 「사설: 미포대표회에 대하야」. 81) 「金九가 金秉堧에게 보낸 1941년 3월20일자 편지」, 「白凡金九全集(7)」, 59~60쪽. 82) 「太平洋週報」 1941년 5월31일호, 「재미한족에 대한 임정훈사」, 10쪽.
83) 「太平洋週報」 1941년 4월26일호, 「해외한족대회진행」, 16쪽; 「新韓民報」 1941년 5월8일자, 「해외한족대회준비회」. 84) 「太平洋週報」 1941년 5월3일호, 「한족대회의 3대운동」, 16~17쪽. 85) 「太平洋週報」 1941년 5월10일호, 「한족대회 3대운동」, 6~7쪽. 86) 「金九가 金乎에게 보낸 1941년 6월18일자 편지」, 「白凡金九全集(7)」,44쪽.
87) 「太平洋週報」 1941년 5월10일호, 「해외한족대회결의안」, 7~9쪽; 「新韓民報」 1941년 5월15일자, 「해외한족대회결의안」. 88) 洪善均, 앞의 논문, 220쪽. 89) 리승만, 「해외한족대표회를 치하」, 「太平洋週報」 1941년 5월31일호, 5쪽.
90) 「新韓民報」 1941년 6월26일자, 「임시정부당국은 한족대회를 자랑」. 91) 李元淳, 앞의 책, 233~234쪽. 92) 위의 책, 233쪽.
93)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 헌법·공보」, 2005, 국사편찬위원회, 237~238쪽. 94) 미 국무부 문서번호 895.01/49 1/2, in Records of the U.S. Department of State relating to the Internal Affairs of Korea, 1940~1944. 95). Codell Hull, The Memoirs of Codell Hull, 1948. Macmillan Company, vol. Ⅰ. pp. 894~895, vol Ⅱ. pp.988~989. 96) 미 국무부 문서번호 895.00/729 PS/SBH, “Adviser on Political Relations.”
金九는 광복군 결성문제로 부심하면서도 臨時政府 大家族을 江에서 重慶으로 移住시켰다. 중경 교외의 土橋에도 여나믄 家口의 「新韓村」이 건설되었다.
1941년 4월에 호놀룰루에서 열린 海外韓民族大會에는 미주와 하와이의 獨立運動團體 代表들이 다 모였다. 이 대회의 건의에 따라 臨時政府는 워싱턴에 駐美外交委員部를 설치하고, 李承晩을 駐美外交委員長으로 임명했다. 임시정부 출범 때에 臨時大統領과 警務局長이었던 李承晩과 金九의 위상은 이제 國務委員會主席과 駐美外交委員長으로 역전되었다. 대회의 결의로 재미한족단체들의 통합기구인 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결성되었다.
1) 光復軍總司令部의 西安移動과 臨時政府 大家族의 重慶 移住
1940년 9월17일에 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식을 마친 金九는 이틀 뒤에 중국 국민당 조직부장 朱家?(주가화)에게 광복군의 훈련과 편제 등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광복군총사령 李靑天과 함께 조만간 방문하겠다는 뜻을 전했다.1)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의 북미대한인국민회 앞으로도 〈한국독립광복군 총사령부 정식성립의 전례는 만족히 거행하였고, 17일로부터 활동을 개시하였으니, 후원금을 보내시오〉2)라는 전보를 쳤다. 북미국민회는 전보를 받은 9월23일 저녁 9시에 중앙부 긴급회의를 열고, 임시정부와 중국정부에 축하전보를 보냈다. 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사실은 미국에서 발행되는 중국신문들도 앞 다투어 보도했다.3)
光復軍後援金 募集活動 활발해져

金九는 10월7일 오후 4시에 李靑天과 함께 국민당 조직부로 주가화를 방문했다.5) 金九는 주가화에게 광복군의 성립사실을 蔣介石에게 보고하여 하루빨리 광복군이 공작을 실시할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을 요청했다.6)
국무위원회는 11월1일에 「통수부관제」를 제정하여 공포했다. 통수부는 군사에 대한 최고통수권을 행사하는 기구이며,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이 최고통수권자로서 직권을 행사한다고 규정했다. 이로써 金九는 행정부뿐만 아니라 군 최고통수권까지 갖는 명실상부한 임시정부의 최고지도자가 된 것이었다. 통수부는 참모총장과 군무부장, 그리고 국무위원 가운데에서 선임하는 막료 1명으로 구성하도록 되어 있었다. 국무위원회에서는 趙琬九를 막료로 추선했다.7)
임시정부는 총사령부를 비롯한 중요 군사기구를 전방에 배치한다는 방침에 따라 총사령부를 陝西省(섬서성)의 西安으로 옮기기로 했다. 옛 漢唐의 수도였던 서안은 화북지방의 일본군 점령지역에 인접해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1년 전부터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이 파견되어 광복군 모집과 선전활동을 하고 있는 곳이었다. 총사령 이청천과 참모장 李範奭만 중국 군사당국과의 군사협정문제를 처리하기 위하여 중경에 남기로 하고, 黃學洙를 총사령 대리, 金學奎를 참모장 대리, 趙擎韓을 총무처장 대리로 하는 총사령부 잠정부서를 편성했다.8)
國際放送局 통해 光復軍 당면공작 천명
김학규는 11월12일에 중경 국제방송국을 통하여 광복군의 전략과 전술을 종래의 유격전으로부터 대규모의 주력전과 대폭동전으로 전환한다는 등 네 가지의 광복군 당면공작을 천명했다.9)
중경을 떠나 11월17일에 서안에 도착한 황학수 이하 18명의 광복군 간부 일행은 그곳에 있던 군사특파단과 함께 12월26일에 서안시 二府街에 광복군총사령부 총무처를 개설했다. 이에 따라 기존의 군사특파단은 해체되고, 특파단장 曺成煥은 중경으로 돌아왔다.10) 서안사령부는 중국어와 국문으로 된 기관지 「光復」을 발행하는 한편 일본군의 점령 아래 있는 지방에 공작원을 파견하여 선전과 청년요원 확보 등의 공작활동을 벌였다.11)
광복군총사령부는 李俊植, 高雲起, 김학규를 1, 2, 3지대장으로 하는 3개 지대를 편성했다. 이어 1941년 1월1일에는 羅月煥을 대장으로 하는 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흡수하여 제5지대를 새로 창설했다. 청년전지공작대는 1939년 11월11일에 중경에서 나월환을 대장으로 무정부주의 계열 청년 30여 명으로 조직되어 임시정부와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무장부대였다. 제5지대는 활발히 초모공작을 전개하여 1940년 말까지 100여 명의 대원을 확보했는데, 그것은 광복군이 창설 초기에 거둔 가장 큰 성과였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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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12월에 西安에 설치된 光復軍總司令部 총무처의 직원들. 가운데는 임시정부 군무부장 曺成煥〔白凡記念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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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時政府의 세 번째 청사인 和平路 五福街 吳師爺巷 1호. 임시정부는 이 청사에서 4년 넘게 있었다. 金九는 이곳에서 「白凡逸志」 하권을 집필했다〔최기영 편, 「국외항일운동유적(지) 실태조사보고서」(2002)에서〕. |
연화지의 청사는 호텔로 사용하던 81칸짜리 번듯한 계단식 건물이었는데, 배타성이 강한 사천성 사람인 건물주인은 입주자가 한국인들임을 알고 세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임시정부는 그를 설득시키는 데 애를 먹었다. 임시정부청사로 사용하게 되면 당신의 이름이 한국독립사에 길이 남게 되고, 한국이 독립된 뒤에 당신이 한국과 무역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등으로 구슬려서 세를 얻을 수 있었다.16) 임시정부는 이 연화지 청사에서 해방을 맞았다.
?江(기강)에 머물고 있는 임시정부 대가족을 重慶으로 옮겨 오는 것도 金九의 큰 과제였다. 金九는 중국정부가 임시수도를 중경으로 정한 뒤에 임시정부 대가족도 곧바로 중경으로 옮기려고 했었으나 집 구하기도 힘들고 공습이 심하여 뜻대로 되지 않았다. 金九는 貴陽에서 중경으로 오는 도중에 있는 기강이 좋아 보여서 그곳에 대가족의 임시피란처를 마련했었는데, 일행이 그곳에 머문 지 어느덧 1년 6개월이 되고 있었다. 金九는 임시정부청사는 중경으로 옮겼으나 대가족을 그대로 기강에 머물게 하고 있는 것이 여간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17)
金九는 1939년 10월에 朴贊翊을 통하여 중국정부의 전시구호기관인 振濟委員會에 한국독립당 남녀노소 300여 명의 이주경비 지원을 요청했다. 진제위원회에서는 주택건축비 1만8,000원, 학교 건축비 1,200원, 의료실 건축비 900원, 건축대지와 채소밭의 임대료 1차분 보조금 420원, 의약품설치비 2,000원 등 총계 2만2,520원을 보조해 주기로 했다. 그러나 1939년도 예산은 이미 다 집행되었으므로 보조금은 1940년도 예산에서 지급해 주겠다고 했다.18)
서남내륙 지방인 사천성 분지의 양자강과 가릉강이 만나는 곳에 자리잡은 중경은 교통과 상업의 중심도시이다. 전쟁 전에는 50만도 안 되던 인구가 중국 정부의 중앙관서가 옮겨 오면서 100만을 넘어섰다. 그 때문에 주택난이 극심하여 여름에는 길거리에서 자는 노숙자가 태반이었다.19)
임시정부 대가족이 중경으로 옮긴 이후로 중경에 사는 한인수는, 시기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는 있었으나, 대체로 400명가량 되었다. 金九가 1942년 12월에 주가화에게 보고한 「재중경 당정기관의 경상비 명세서」에는 중경 부근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 총수가 340명으로 기재되어 있다.20) 이 한인들은 거의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임시정부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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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월에 결성된 光復軍제5지대〔白凡記念館 제공〕. |
여나믄 家口는 重慶郊外의 土橋로
중경시내에서 남쪽으로 양자강을 건너서 약 30리쯤 떨어진 곳에 土橋라는 조그마한 시골마을이 있었다.21) 金九는 진제위원회로부터 받은 원조금으로 토교에서 1km 떨어진 洞坎(동감)의 땅 약 2,000평을 20년 기한으로 조차했다.22) 토교에는 花灘溪라는 개울과 폭포가 있었는데, 동감은 그 폭포 위쪽에 있었다. 동감마을의 행정구역상의 명칭은 巴縣의 土文鄕이었으나, 흔히 토교라고 불렀다.23) 토교는 시골이라서 중경보다 주택난도 덜할 뿐만 아니라 공기도 맑았다. 조선의용대와 민족혁명당 간부들과 그 가족들이 모여 사는 南岸의 鵝宮堡(아궁보)는 토교에서 멀지 않았다.24)
金九는 임시정부 가족들의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토교를 방문하고 토교향 鄕公所 鄕長 何鰲(하오)를 만나서 토지매입과 주택건설 문제를 상의했다. 하향장은 향공소 于事[동사무소장] 王仁杰이 소개한 장씨라는 미장공이 책임지고 공사를 진행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金九는 동감땅에 똑같은 크기의 반양옥 세 채를 남향으로 지었다. 두 채는 목조로, 한 채는 흙벽으로 된 단층 청기와집들이었다. 그리고 도로변에 있는 2층 기와집 한 채를 따로 매입했다.25)
임시정부 가족들이 토교로 이사한 것은 1940년 11월13일이었다.26) 소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이 있는 가정은 아이들이 소학교를 졸업하는 이듬해 1월까지 있다가 아이들이 졸업하고 나서 이사했다. 이렇게 하여 토교에는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와 광복군에서 활동하지 않는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을 포함한 여나믄 가구 정도가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 뒤로 들고 나는 가족들이 더러 있었으나, 대부분은 1945년에 귀국할 때까지 5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27) 이 때에는 양자강에 다리가 없어서 중경에서 토교로 가려면 반드시 배를 타야 했다. 토교까지는 두세 시간쯤 걸렸다.28) 중경의 동포들은 토교를 「新韓村」, 또는 「韓國租界」라고 불렀다.29) 그것은 임시정부가 중국정부에 교섭하여 한국인 거류지로 조차해 얻은 땅이기 때문이었다.30)
金九는 대가족이 중경으로 이사한 뒤의 동포들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식량은 배급제인데, 배급소 문전은 사계절을 가릴 것 없이 장사진을 이루었고, 구타와 욕설 등 허다한 분규가 계속 벌어졌다. 그러나 우리 동포들은 인구대장을 작성해서 중국정부와 교섭하여, 인구비례에 의해 단체 분량을 한꺼번에 타서 화물차로 운반하였고, 다시 미곡을 도정하여 하인을 시켜 집집마다 배달해 주었다. 쌀그릇은 쥐와 참새의 해를 방비하기 위하여 집집마다 독그릇을 사용하였으며, 그밖의 반찬 등은 돈으로 지급하고 식수까지 하인을 부리어 사용하였으니,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동포들의 단체생활은 규율이 있고 안전한 편이었다.
비단 중경뿐만 아니라 남안과 토교에 사는 동포들도 중경과 같이 한인촌을 이루고 중국의 중산계급 정도의 생활수준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곳곳마다 생활이 부족하다는 원성도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이곳 생활은 지옥생활인 줄 알고 살아가기 바란다고 말하였다.〉31)
임시정부는 중국정부로부터 매달 80석의 쌀[公米]을 무상으로 지급받았다. 쌀 배급을 받게 된 것은 중국군사위원회에 근무하다가 1940년 5월부터 임시정부의 주석판공실장 겸 외무차장이 된 閔弼鎬의 교섭에 따른 것이었다. 민필호는 처음 이 문제를 중국국민당 조직부의 邊彊(변강) 당무처장 李永新과 상의했다. 이영신은 몽고인이었다. 그는 『공미는 외국인에게 주지 않는 것이 규칙이지만 당신들은 다른 외국인들과 다르니까 蔣총재에게 한번 공문을 올려 건의해 보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했다. 공문을 만들어 조직부장 주가화를 통하여 장개석에게 올렸으나 어렵다는 대답이었다. 이에 민필호와 이영신은 장개석의 결재공문을 알리지 않은 채 주가화를 졸라서 그가 직접 식량국에 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쌀을 임시정부 가족들에게 지급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식량국에서는 중경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명단을 작성해 오면 자기들이 직접 한 사람씩 일정량을 배급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민필호는 『우리는 중국기관의 사람들이 아닌데 그들과 똑같이 다루는 것은 외국혁명단체를 돕는 예의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여 임시정부의 요구대로 한꺼번에 타 와서 임시정부 가족들과 동포 거류민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게 되었다고 한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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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橋의 臨時政府 가족들과 주거지(사진 위) 〔「白凡金九全集(11)」(1999) 및 최기영 편, 「국외항일운동유적(지) 실태 조사보고서」(2002)에서〕. |
金九는 주가화에게 임시정부 가족들의 생활비 지원을 요청하여 1941년 12월부터 매달 6만원을 지원받았다. 그리고 일년 뒤부터 인구증가와 인플레이션 등의 요인을 감안하여 14만원을 더 증액하여 매달 20만원의 보조금을 받았다.33) 이에 따라 임시정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직급과 식구수에 따라 월급을 받았고, 「平價米」라는 쌀도 배급받았다. 평가미는 일반미에 비해서 질이 떨어졌다. 그나마 배급할 때에 쌀을 빼내고 대신에 물을 부어 무게를 늘려서 배급했다. 그 때문에 살짝 발효된 쌀을 먹어야했다.34)
중국정부의 지원으로 임시정부 가족들의 생활은 피란 다닐 때보다는 안정되었으나, 살림살이가 쪼들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속에서도 임시정부 가족들은 한집안 식구들처럼 지냈다. 토교지방은 아열대성 기후여서 한겨울에도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날이 드물었다. 겨우내 영하로 내려가는 날은 며칠뿐이었다. 영하라고 해야 밤에 내린 눈은 해뜨기 전에 녹아 버리고 물독에 살얼음이 어는 정도였다. 토교는 마을 전체가 대나무밭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주위로 사철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화탄계의 물은 이름만큼이나 맑아서 그냥 마셔도 될 정도였다. 그 물에 나가서 빨래도 하고 미역도 감았다.35) 金九는 이따금 토교에 가서 일꾼들과 같이 도로 수선, 과수 재배, 돌쌓기, 제방공사 등의 일을 하면서 임시정부 가족들의 생활을 보살폈다.36)
1942년 여름에는 임시정부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에서 멀지 않은 동쪽 언덕에 목조 기와집을 지었다. 공사기간이 양자강의 홍수기간이어서 자재들은 양자강에 띄워서 운반했다. 건물이 완성되자 이웃사람들을 초청하여 다과회를 겸한 낙성식을 거행하고, 옥상에는 태극기를 내걸었다. 이 건물은 광복군의 숙소로 사용했다. 광복군은 매일 오전과 오후에 화탄계 강변에 있는 중경 청화중학교의 운동장을 빌려 훈련을 실시했다.37)
큰아들 仁도 폐병으로 잃어
그러나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대가족은 중경의 고약한 기후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중경은 안개의 도시였다. 1년의 반은 안개가 끼는 날이었다. 金九는 그러한 기후 때문에 큰아들 仁을 잃은 일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중경의 기후는 9월 초부터 다음해 4월까지는 구름과 안개 때문에 햇빛을 보기 힘들며, 저기압의 분지라 지면에서 솟아나는 악취가 흩어지지 못해 공기는 극히 불결하며, 인가와 공장에서 분출되는 석탄연기로 인하여 눈을 뜨기조차 곤란하였다. 우리 동포 삼사백 명이 육칠 년을 거주하는 동안에 순전히 폐병으로 사망한 사람만 칠팔십 명에 달하였다. 이는 중경에 거주하는 전체 한인의 일이할에 해당하는 숫자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중경에 거주하는 외국의 영사관이나 상업자들이 삼년 이상을 견디지 못한다는 곳에서, 우리가 육칠 년씩이나 거주하다 큰아들 인(仁)이도 역시 폐병으로 사망하였으니, 알고도 불가피하게 당한 일이라 좀처럼 잊기 어렵다.〉38)
여름과 겨울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여름에는 방바닥 온도가 체온보다 더 높이 올라갈 만큼 무더운 찜통 더위 때문에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39) 겨울에는 지독한 안개 때문에 고생했다. 겨울 안개 속에는 무연탄 연기까지 차 있어서 그 공기를 마시면 목구멍은 언제나 아릿했고, 폐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도 늘 기침을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폐결핵을 앓았다.40)
1944년에는 스웨덴 선교회의 지원을 받아서 토교 언덕 위에 기독교청년회관을 지었다. 그곳에서는 동포아이들에게 우리말과 노래를 가르쳤고, 임시정부는 그곳에 주말임시학교를 열어서 아이들에게 한글과 우리나라 역사 등 민족혼을 심어 주기 위한 교육을 실시했다.41) 이 무렵에 토교를 방문했던 金秉豪와 宋志英은 토교의 한인사회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토교만은 완전히 우리나라의 생활양식 그대로 巴蜀[四川省의 다른 이름. 巴는 중경지방, 蜀은 成都지방] 하늘 밑에 옮겨 놓은 우리의 마을입니다. 거기는 주로 직접 혁명공작에 참가할 수 없는 부녀자들이며 어린이들이 주민의 대부분으로서, 주택은 따로지만 식사 같은 것은 중앙에 집합소가 있어서 아침저녁 모여서들 한 그릇의 밥 한 사발의 국일망정 화기가 넘치게 언제나 재미롭게들 식사를 하고 있으며, 위생과 교육기관 같은 것도 충분하다고는 못 하겠지만 대략 설비되어 있습니다. … 토교에서 가장 감격한 것은 우리네 어린이들을 양성하는 학원을 찾아갔었는데, 무엇보다도 매일 아침 우리나라의 국기 밑에서 우리나라의 국가를 부른 다음 우리말로서 가르침을 시작하는 그 장면입니다. 오랫동안 국내에서 무지한 손아귀와 발길 밑에 억눌려 생활하여 온 나로서 처음 해외에서 이 광경을 볼 때에 저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용솟음쳐 흘러내리더군요. 그래서 나는 이 어린이들의 손목을 하나둘 부여잡고 그대들은 참으로 행복스러운 조선의 아들딸들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국내에 있는 우리의 어린이들은 불쌍하게도 태극기를 모르고 우리나라의 국가를 꿈에도 들어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가만히 눈을 감고 국내의 어린이들과 토교의 우리 어린동무들의 광경을 그릴 때에 나는 끝없이 울었습니다.〉42)
光復軍에 관한 7個項의 要望事項
金九는 1월21일에 장개석을 비롯한 중국정부의 유관기관에 전해 달라면서 광복군에 관한 7개항의 요망사항 및 활동방침을 적은 문서를 주가화에게 제출했다. 그것은 광복군에 대한 金九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어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1)한국광복군은 그 계획안을 이미 비준받았으므로 정식으로 성립되었음을 인준해 줄 것을 요망함.
(2)군사참모와 정치공작 인원을 파견하여 지도와 협조를 해주기 바람.
(3)각지에 있는 당·정·군 장관에게 통보하여 (광복군 성립사실을) 알려 주고 아울러 가능한 협조를 하게 해주기 바람.
(4)한국광복군의 각급 간부는 모두 한국을 멸망으로부터 구하기 위하여 분투하는 혁명청년이며 앞으로 필요한 인원들 역시 한국의 혁명 군중임. 현재 서안 부근에 집결해 있는 간부는 이미 2백여 명에 이르고, 화북 각지에 흩어져 있는 옛 부하 2천여 명이 지금 계속 서안 일대로 집결하고 있으므로 하루속히 정식 성립을 인준하여 이들로 하여금 부대편성을 편리하게 해주기 바람.
(5)한편으로는 공작을 개시하고 한편으로는 한인 청장년을 계속 흡수하여 훈련과 공작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점차 확충하도록 하며, 아울러 현재 동북지방[만주]에서 항전하는 한인무력을 먼저 정리하고자 함.
(6)앞으로의 공작은 유격전을 기준으로 삼고, 서안을 그 근거지로 하여 점차 추진하여 화북 각 省과 동북에 이르도록 함.
(7)한국광복군은 전민족의 혁명을 지도하고 총동원을 추진하며, 왜적을 축출하고 나라를 세우는 한국국군의 기간부대의 책임을 담당하며, 아울러 한인 각파의 무력의 권능을 파악하여 지도함. 그러므로 한국광복군은 대내적으로는 한국임시정부의 지휘를 받아야 함. 지금처럼 각 민족의 사상계파가 복잡한 때에는 국군의 기틀을 확립하지 않고는 전민족의 항전역량을 집중 발휘하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특별히 인준할 것을 요망함.43)
金九는 그 뒤에도 주가화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이 요망서를 계속해서 첨부했다.
주가화는 1월24일에 참모총장 何應欽과 군사위원회 판공청 주임 商震에게 金九의 제안을 전달했다. 상진은 2월3일에 주가화에게 광복군의 지휘권을 중국 당국이 확실히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정식성립을 인허해 줄 수는 있으나 이 문제는 군정부의 소관이기 때문에 그쪽으로 교섭하라고 통보했다.44) 그러나 군정부에 전달된 공문은 소관부서에서 정체되고 있었다. 초조해진 金九는 2월14일에 주가화에게 다시 편지를 보냈다.45)
軍事委員會辦公廳이 光復軍 주관하기로
金九가 초조해하고 있는 동안 광복군에 대한 주관부서가 바뀌면서 정식승인은 계속 지연되었다. 중국 군정부는 2월22일에 광복군문제를 군사위원회 판공청이 주관하는 것으로 방침을 결정했다.46) 주가화는 3월6일에 판공청 주임 상진에게 하루빨리 광복군에 대한 정식인준을 해줄 것을 요청하고,47) 같은 날 金九에게 광복군의 주관부서가 군정부에서 판공청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통보했다.48) 판공청은 3월8일에 광복군문제를 연석회의에 회부하여 토론한 결과, 원칙적으로는 可하나 그 편제의 보고를 받고 그것을 심의한 다음에 그 결과에 따라 파견할 인원을 정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49)
한편 광복군총사령부가 서안으로 옮겨서 활동을 시작하고 석 달쯤 지난 1941년 2월 말 무렵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중국군사위원회에서 각 전구 사령관에게 광복군의 활동을 엄격히 단속하라는 지시가 하달된 것이었다. 중국영토에서 군사활동을 하면서 중국군당국의 협조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었다. 중국군당국의 의심으로 잘 되고 있던 공작이 중단되기도 하고 통행증을 발급해 주지 않아서 활동에 큰 불편을 겪기도 했다.50) 이러한 사태의 배경에는 중국군사위원회가 광복군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도 작용했다. 이 무렵 화북·화중·화남 일대에 진출해 있는 한국인들 가운데에는 일본인들을 끼고 장사를 하거나 일본군의 앞잡이로 일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일본군 속에 조선병사들이 많다는 소문도 있어서 그것이 그러한 불신의 원인이 된 것이었다.51)
金九는 3월20일에 주가화로부터 판공청 연석회의의 결과를 통보받고,52) 李靑天으로 하여금 광복군총사령부 잠행편제와 월별경상비예산표를 작성하게 하여 중국군사위원회 판공청에 제출했다. 판공청은 4월17일에 제2차 연석회의를 열어 이 문제를 심의한 결과, 군사위원회에서 9명의 인원을 광복군에 파견하기로 하고, 잠행편제에도 이의가 없으므로 참모총장의 지시가 있는 대로 장개석의 재가를 받아 시행하기로 했다.53) 군사위원회 판공청의 제2차 연석회의 결과를 통보받은 金九는 4월28일에 다시 주가화에게 하응흠 참모총장이 조속히 광복군 편제를 승인하도록 도와줄 것을 부탁했고, 주가화는 5월3일에 하응흠에게 다시 편지를 보냈다.54)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장개석은 1941년 5월28일에 광복군총사령부의 정식 편제를 실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55)
金九나 임시정부가 광복군에 대한 중국정부의 정식승인을 받기 위하여 고심한 가장 큰 이유는 말할 나위도 없이 본격적인 항일전을 하루빨리 수행할 수 있는 군대를 편성하기 위해서였다. 정식승인을 받아야 자금지원을 비롯한 인적 및 물적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1938년 10월에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의 직할로 창설된 金元鳳의 조선의용대는 이 무렵에는 군사위원회로부터 매달 1만6,000원의 활동비를 지급받으면서 200여 명의 대원들이 각 지역에 배치되어 활동하고 있었다.56)
물론 자금지원 뿐만이 아니었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이 중국정부의 정식승인을 받게 되면 다음과 같은 영향이 발생할 것으로 기대했다. 첫째로 한국독립운동의 역량 있는 중심조직이 됨으로써 국내 민중을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고, 둘째로 미국이나 그밖의 한국에 동정적인 국가들의 승인과 원조를 요청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며, 셋째로 세계 약소민족, 특히 아시아의 약소민족들에게 중국의 항전이 피압박 민족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것을 인식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57) 그러나 金九는 광복군이 중국정부의 어떤 기관에 직속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광복군에 관한 7개항의 요망사항에서 金九가 광복군이 대내적으로는 임시정부의 지휘를 받아야한다고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장개석의 승인이 나자 군사위원회 판공청에서는 광복군의 정식성립을 허가하고 편제도 결정했다. 그 내용은 명칭은 그대로 한국광복군총사령부라고 하고, 이청천을 총사령으로 임명하며, 소요되는 참모와 정훈인원은 군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 중앙조사통계국,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의 4개 기관에서 협의하여 전원 선정 파견하며, 이와는 별도로 군정부에서 경리인원 1명을 파견하고, 이상 각 기관에서 파견할 인원의 사무는 판공청에서 맡아서 처리한다는 것이었다.58)
먼저 〈同胞의 血力〉으로 光復軍의 기초를 마련해야
金九는 중국정부의 광복군설립인준이 늦어지자 우선 재미동포들의 자금지원으로 광복군의 활동을 시작하는 방안을 생각했다. 그는 1941년 2월16일자로 로스앤젤레스의 金乎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러한 구상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제 광복군의 기초견고를 자력, 즉 동포의 血力으로 완성하고, 그 위에 우방의 원조를 얻어서 진전하는 것이 우리의 만년대계의 최상책이라 생각한 것은 전자에도 공사간 말씀을 드렸던 것으로 알기 때문에 상세히 말씀을 않고, 대체로 몇 가지를 상의드립니다. 오늘날에 중국의 항전은 영국·미국·소련의 원조로 지탱하는 바, 미국이나 소련 어느 한 나라에서만 도움을 받는다면 자연히 감독과 지도 등 鉗制[겸제: 자유를 억누름]를 면할 수 없겠으나, 중국이 자력으로 장기항전의 기초가 튼튼한 것을 보고서 각종 후원을 경쟁적으로 하기 때문에 중국의 자존성은 조금도 손실이 없이 자타의 역량이 항전으로 집중하거니와, 만일 우리 같은 거지로서 광복전쟁을 이웃 어느 한 나라의 도움을 처음부터 끝까지 받는다면, 우리 같은 놈을 제3자가 경쟁적으로 도울 리도 없을 것이고, 따라서 처음부터 독단으로 도와주는 그 주인의 소유물 될 것은 필연의 사실입니다. 가난한 자가 도움을 못 얻어 애를 쓰지마는 도움을 주는 자에게 노예될 것을 근심하는 자는 쉽게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광복군의 기초를 우리 힘으로 건축한 후에는 어느 우방이고 원조를 청하여 얻는다 하여도 자존성을 보존하여 가며 자주독립의 실물을 산출할 수 있는 원리를 굳게 파지하고 이를 악물고 우선 반년만 끌고 나가면, 현재에 모여드는 잡색군은 접어두고 순전한 기간 간부로 최소 천명은 모집 훈련하여 놓고 타인의 원조를 받을 결심으로, 지금은 미주와 하와이 한교의 출력으로 광복군의 기초는 확립할 것을 담대하게 선전하고 나갑니다.〉
이처럼 金九는 우선 〈동포의 혈력〉으로 최소 1,000명의 광복군을 모집 훈련하여 자력의 기초를 마련하고 난 다음에 외국의 원조를 받는 것이 자존성을 보전하는 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편지에는 중국정부와 광복군지원문제를 교섭하면서 노심초사하는 金九의 고뇌가 역력히 드러나 있다. 金九는 재미동포들의 재력으로 광복군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방안으로 세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로 미주와 하와이에서 수합한 본국 한재구제금을 광복군에 넘길 것. 이유는 본국 동포들은 모든 양식을 국가가 가지고 빈부의 소유 양식을 전부 거두어 사람수를 헤아려서 나누어 주므로 굶어 죽을 수도 없고 살도 찔 수 없이 전국 동포가 아귀지옥의 생활을 하므로 중국으로 물밀듯이 나오는데, 왜놈에게 그 귀한 돈을 주는 것이 뜻이 없다는 점.
둘째로 흥사단의 저축을 광복군에 사용할 것. 金九는 안창호가 살아 있어서 지금의 형세를 본다면 자기가 말하지 않더라도 자기 이상으로 용기를 내어 작심할 것이라고 말했다.
셋째로 미주·하와이·멕시코의 우리 사람 가운데 수천의 재산이 있는 유지를 동원하여 특종, 즉 일시 出損으로 6개월 동안 지탱시킬 것.59)
미주의 내지한재구제회는 모금한 구제금 가운데 500달러는 미국구제기관을 경유하여 국내로 보내고, 나머지 모금액은 보낼 통로가 없어서 보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金九의 뜻을 전해듣고 보관 중이던 1,628달러 64센트는 광복군과 그 가족을 위한 일에 쓰도록 12월5일에 임시정부로 보냈다.60)
루스벨트 大統領에게 편지 보내
金九는 광복군 결성문제로 경황이 없는 속에서도 대미외교를 강화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모든 일이 결국은 미국정부의 임시정부 승인 문제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金九는 1941년 2월에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로 중경을 방문한 커리(Lauhlim Currie)에게 부탁하여 루스벨트에게 각서를 보냈다. 2월25일자로 된 장문의 이 각서는 먼저 1882년의 조-미통상조약으로 두 나라의 국교가 개시되었음을 상기시키고, 한국의 독립문제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 줄 것을 부탁했다. 이어 각서는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다섯 가지 「사실」을 열거했는데, 그 하나로 〈지난 30년 동안 일본의 지배에 의하여 비인도적인 압박을 받았고, 중국과 러시아의 혁명으로부터 교훈을 얻었으므로, 일본의 멍에를 벗어나려는 우리의 결의는 확고합니다〉라고 적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그것은 미국정부와 국민들이 공산주의나 러시아혁명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 데서 나온 것이었다. 이는 기회 있을 때마다 미국의 독립전쟁의 의의나 건국정신을 강조하는 李承晩의 태도와는 대조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金九는 미국정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사항을 요구했다.
(1)미국정부가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2)그것은 항일전을 전개하는 우리 정부의 외교적·군사적·경제적 힘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임.
(3)우리의 독립전쟁을 더욱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하여 중경주재 미국 대표에게 기술협력·경제원조·무기공급이 원활히 되도록 지시할 것.
(4)지금의 세계대전이 종결되면 미국정부는 한국독립문제를 평화회의에 제출하고, 모든 회의에 한국대표가 참가하도록 허락할 것.
(5)지금의 세계대전이 종결된 뒤에 새로운 국제기구가 설립되면 우리 임시정부가 참가하는 것을 허락할 것.61)
위의 5개항은 그 뒤의 임시정부의 공식문서에서 표명된 요구사항의 기초가 되었는데, 외교부장 趙素昻이 작성한 원문은 내용은 같으나 한결 적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62)
그러나 金九의 이 각서에 대해 미국정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백악관에서는 이 편지를 4월11일에 국무부로 회부했고, 국무부에서는 이 문서를 과거의 임시정부 문서들과 같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문서철에 철해서 보관했다.63) 임시정부는 5월에 루스벨트 대통령의 아들 제임스 루스벨트(James Roosevelt)가 특사로 중경을 방문했을 때에도 다른 문건을 수교했고, 7월에도 별도의 편지를 루스벨트에게 보냈다.64)
(2) 海外韓族大會의 결의로 駐美外交委員部 설치
1940년 들어 유럽의 전황은 점점 위기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다. 영국의 유럽파견군 22만6,000명을 비롯하여 프랑스군과 벨지움군 11만2,000명이 5월28일부터 6월4일까지 프랑스의 던커크(Dunkirk)에서 극적으로 영국으로 철수하고, 6월14일에는 파리가 독일군에 점령되었다. 마침내 루스벨트 대통령은 6월10일에 버지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에서 행한 연설을 통하여 미국의 정책이 「중립」에서 「非교전국(non-belligerency) 입장」으로 바뀌었다고 선언했다. 「비교전국 입장」이란 공공연히 참전은 하지 않으나 한쪽 전쟁 당사국의 교전 이유를 지지하고 직접적인 원조를 하는 나라의 경우를 말한다. 그것은 미국의 뿌리 깊은 고립주의 여론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영원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7월의 해군증강법에 이어 9월에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징병법(Selective Training and Service Act)이 제정되었다.
美國은 「民主主義의 兵器廠」이 돼야
11월의 대통령선거에서 전례가 없는 3선을 달성한 루스벨트는 12월20일에는 군수산업을 총괄할 생산관리국을 설립하고, 연말의 노변담화를 통하여 『미국은 민주주의의 병기창(兵器廠)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그의 이 「민주주의의 병기창」 구상에 따라 1941년 3월에 성립된 것이 유명한 「무기대여법(Lend-Leas Act)」이었다. 「무기대여법」의 직접적인 목적은 무기구입 자금이 바닥이 난 영국에 무기를 긴급히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1940년 9월에 미국은 대서양의 미국 연안에 있는 영국령 섬들에 대한 조차권과 교환으로 노휴 구축함 50척을 영국에 양도했으나, 그것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무기대여법은 우선 필요한 무기와 군수품을 공급하고 승리한 뒤에 어떤 형식으로든지 상환받는다는 조건이었다. 1941년 11월에는 대독전을 전개하고 있는 소련에도 무기대여법이 적용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군수생산이 늘어남에 따라 중국과 북유럽 등 피침략 국가들과 망명정부의 군대, 반파시즘 지하 저항조직 등으로 무기대여법의 적용범위가 확대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까지 무기대여법에 의한 원조액은 500억 달러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에서 절반은 영국에, 4분의 1은 소련에 제공되었다.65)
미국정부의 적극적인 전쟁준비 분위기는 재미 한인사회를 한결 고무시켰다. 하와이에서는 1940년 10월13일에 6개 한인단체대표들이 모여 미국의 국방 준비를 조직적으로 후원하기 위한 연합한인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하와이 국민회 총회장 趙柄堯와 동지회 중앙부장 孫昇雲의 연서로 각 섬에 지방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촉구했다.66) 하와이의 연합한인위원회는 1941년의 3·1절 기념행사를 17개 단체들이 연합으로 거행하고, 광복군 후원금으로 1,000여 달러를 모금했다. 또 오아후섬 서부지역 동포들은 국민회와 동지회의 연합기념식을 계기로 광복군후원회를 조직하기로 했고, 그밖의 지방에서도 3·1절 행사가 연합행사로 거행되어 동포들의 단합기운을 보여 주었다.67)
하와이國民會의 合同會議 제의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북미국민회와는 별도로 1939년 8월에 기존의 중국후원회가 해체되고 새로 조직된 조선의용대후원회가 활발한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의용대후원회는 1940년 10월에는 중국인과 미국인들과 함께 일본영사관 앞에서 대대적인 시위운동을 벌이고, 조선의용대 미국후원회연합회를 결성했다.68)
조선의용대후원회의 결성으로 북미국민회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 그것은 재미동포들로 하여금 새로운 국면을 맞아 대일 항전계획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임시정부를 효과적으로 지원하게 하는 데도 지장이 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북미국민회는 하와이국민회와의 합동운동에 나섰다. 북미국민회의 제의에 대해 하와이국민회가 1940년 3월10일에 보낸 다음과 같은 회답은 두 국민회의 합동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이미 형성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전자에 귀회의 공문을 받자옵고 감격무지온바 다만 총회 임원회의 결의를 기다리느라고 앙답의 시일이 과히 지체되었사오니 용서하시옵소서.
귀회에서 제의하신 바를 우리 총임원회에서 일치한 의견으로 찬동하오며, 독립운동에 관한 일반활동을 임시정부 한 기관 아래 집중하도록 하자는 것이 본회의 년부년래 고집하여 오던 바이오며, 귀회에서도 동일한 보조와 논조를 취하시는 줄 대개 앙측하고 동조동감으로 영적 연락이 이미 심절하오나 그 연락의 물적 실적 발표가 충분치 못하다는 유감이 없지 아니하옵던 차에 이번의 교명을 받자와 더욱 감하하오며, 실제적으로 무슨 좋은 방책을 가르쳐 주시기를 바라옵고, 여간의 재정상 소비가 있더라도 일차 대표적 회집이 있으면 하는 의견이 있사오니 사조 회교하심을 바라나이다.〉69)
하와이국민회의 이러한 회답에 대해 북미국민회는 4월7일에 다시 다음과 같은 정중한 편지를 보내고 있다.
〈(귀회가 제의한) 하와이와 미주 양 국민총회의 대표회집 안건을 본기 중집회의에 제출한 바 이를 실행하야 시국부응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정세연락 보조일치 무엇으로나 필요한 줄 압니다. 이를 실행하는 방침에 대한 고견을 다시 주사 준비하도록 도와주심을 바라나이다.〉70)
金九에게 代表 派遣 요청해
처음에는 이처럼 북미국민총회와 하와이국민총회의 합동회의를 열 것을 생각했었으나, 李承晩을 지원하는 대한인 동지회가 참가하지 않는 두 국민회만의 통합작업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동지회를 포함한 모든 한인단체들의 대표자 회의로 범위를 확대하기로 했다.
북미국민회는 1940년 9월 무렵부터 애국부인회와 합동으로 단일체결성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9월2일에 하와이국민회와 동지회에 편지를 보내어 합석회의를 열어 시국대책을 강구하자고 제의했다. 이때는 하와이에서는 이미 하와이국민회와 동지회의 주동으로 연합한인위원회 결성운동이 논의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리하여 연합한인위원회가 결성되고 나서 달포쯤 지난 11월5일에 하와이국민회, 동지회, 북미국민회의 대표자들이 모여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세 단체가 제안한 통합방안을 검토했다.
세 단체의 제안은 입장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달랐다. 통합운동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북미국민회는 모든 기성단체들을 해체하고 미주와 하와이를 통틀어 단일당을 조직하자고 제의했다. 하와이의 대한인동지회 중앙본부는 재미한족의 연합기관을 설립하여 독립운동과 관련된 정치·재정·외교·선전의 사무를 관장하게 하고, 각 단체는 존속하되 단체 유지에 관한 사무만 다루고 독립운동에 관한 일은 새로 결성되는 연합기관의 지시에 따르게 하자고 제의했다. 그리고 하와이국민회는 우선 미국과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단체들의 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해외한족대회를 열고 독립운동의 새 방략을 확정하고, 모든 사업은 그 대회의 결의에 따라 진행하기로 하자고 제의했다.71)
준비위원회는 사흘 동안 다섯 차례의 회의를 거듭한 끝에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1)현하 각 단체의 설립이 그 자체를 해체하고 단일당을 결성하기에 준비되지 않은 까닭에, 해외한인 전체의 공동결의로 연합기관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의 모든 행사를 그 기관에 일임하기로 함.
(2)각 단체들은 연합기관의 세포기관이 되어서 독립운동에 대한 의무를 분담하되, 다만 그 자체에 관한 일에는 자의로 행사하기로 함.
(3)각 단체가 이 결의안을 일치 동의하면 해외한족대회를 열기로 함.72)
각지에 흩어져 있는 해외한인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이 다 참가하는 대회가 되기 위해서는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자들도 초청할 필요가 있었다. 회의를 준비한 사람들은 1923년에 상해에서 열렸던 국민대표회의와 같은 명분의 회의를 상정했던 것이다. 그들은 金九에게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 대표를 회의에 참석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金九는 북미국민회 총무 金秉堧(김병연)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美國入國許可와 비행기편까지 마련해 놓고
〈지금 하와이국민회와 동지회의 공함을 본즉, 귀회대표가 하와이로 와서 3단체회의를 거행하게 되었으니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으로서 대표를 파송하야 참석하여 달라는 요구가 있으나, 黨·政·軍의 각종 사무가 분망하야 인재난을 극도로 느끼는 이때에 또한 전방의 군비부족으로 전보가 하루에 여러 차례 되는 재정 상황에서 미주에 가는 여비를 가졌으면 우선 군비를 소용할 형편이니, 이상 두 가지 원인으로 대표파송은 불가능일 듯합니다. 그러나 대표 참석이 없다하여도 근본 3방 회의는 원만한 효과가 있으리라고 신념이 많습니다.…〉73)
金九는 또 하와이로는 미국정부의 입국허가 문제와 여비문제로 참가하지 못한다고 통보했던 모양이다. 주최 쪽의 기록에는 〈하와이에서 이민국의 허가를 얻고 비행기회사에 교섭하여 왕래의 편의를 준비하고 다시 청하였으나, 임시정부의 일이 많아서 떠날 수 없다는 대답을 받고, 원동대표의 참석은 단념하였다〉라고 적혀 있다.74)
1941년 4월19일부터 29일까지 호놀룰루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는 1930년대에 여러 갈래로 추진되어 온 재미민족운동단체들의 통일운동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급박한 국제정세의 전개 속에서 비로소 결실을 본 획기적인 행사였다. 동지회의 기관지 「太平洋週報」의 다음과 같은 권두 논설이 이 대회의 의의를 짐작하게 한다.
〈수화상극(水火相剋)의 러시아와 일본이 각자 이익을 위하야 중립협약을 체결하여서 태평양에 대한 일본 위협이 급박하야진 이 비상시기에 로스앤젤레스 국민회 대표 한시대, 김호, 송종익 3씨가 하와이국민회, 동지회, 기타 단체대표와 참석하야 국가 대사를 의논키로 하와이를 방문함에 우리는 대표 3씨를 알로하 사랑으로 환영하노라.
민간단체로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광복운동을 어떻게 어느 방도로 실효천행(實效踐行)할 방략과 정책을 심의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오 이번 연합회 호성적으로 자조 친선 단결하기를 기대하노라. 단체성질로는 각각 다르나 연합회 대표제씨는 미주·하와이·멕시코 재류 한족을 대표하야 전민족의 운명개척할 사명을 가졌은즉, 나랏일이 단체일보다 더 소중한 줄 깨닫고 각자의 주의 주장을 서로 고집하지 말며 순리로 화기 있게 민족의 대경륜과 소망을 (실천하는 데) 서공하기 부탁하며, 다시금 대표 3씨의 하와이 방문을 만강의 열정으로 알로하 하노라.〉75)
9개 團體代表 15명이 호놀룰루에 모여
북미국민회의 대표 韓始大, 金乎, 宋鍾翊 세 사람은 4월16일에 「미소니아」호 편으로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하와이 국민회에서는 해외한족대회에 참석할 대표로 安元奎, 金鉉九, 金元容을 선임했고, 동지회에서는 李元淳, 安玄卿, 都鎭鎬를 선임했다. 선임된 세 단체 대표들로 대회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하와이국민회 회장 조병요와 동지회 중앙부장 손승운은 정식대표는 아니었으나, 대표자격으로 참석했다. 해외한족대회에 참가한 단체와 정식대표는 미국 본토의 두 단체(북미국민회,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연합회)와 하와이의 일곱 단체(하와이국민회, 동지회, 중한민중동맹단, 대조선독립단, 한국독립당 하와이총지부, 대한부인구제회의 국민회 쪽과 동지회 쪽) 대표 15명이었다. 두 국민회와 동지회 이외의 단체에서는 대표 한 명씩이 참가했다.76)
대회를 주동한 세 단체가 준비한 의제는 다음과 같았다. 곧, 임시정부 기치 아래 대동단결하여 총역량을 집중한다는 목표 아래 첫째 독립전선에 대한 전민족의 총동원 강화와 그 지도 방략, 둘째 정치·외교·군사의 3대운동의 현시대적 신방략의 전개, 셋째 독립운동의 강화 실현에 대한 경제적 기초와 운동방략을 토의사항으로 정했다.77)
동지회가 해외한족대회에 기대한 가장 중요한 의안은 구미위원부를 정부기구로 인정하고 재미동포단체들이 협력하여 재정지원을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회의 개막에 즈음하여 李元淳은 「우리의 임시정부와 대미외교」라는 글을 발표하여 동지회의 그러한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원순은 대미외교의 필요성과 구미위원부의 내력, 그리고 만주사변[9·18 전쟁]이 일어나자 李承晩이 임시정부 명의로 제네바의 국제연맹회의에 가서 활동했던 일 등을 상기시킨 다음, 〈2, 3년 전부터는 구미위원부 사무소를 다시 열고 리박사께서 평생 활동하시며 동지회와 부인구제회가 그 경비를 전담하야 가는 바이라〉고 설명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우리의 모든 일이 이만치 진행되는 이때에 아무쪼록 조직적으로, 또는 통일적으로 일을 하야 사업을 분담하야 가지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임시정부를 최고기관으로 하여 광복군과 구미위원부를 직접 연락을 하게 하며 우리 민간단체 등은 그 기관들을 물질적으로 원조를 할 것 같으면 모든 일이 순서적으로 진행되어 갈 것이오, 무슨 일에나 질서를 유지하야 가지고 적극적 운동을 하야 나아가서 이번 기회에 우리의 원하는 독립을 기어코 찾을 것이라 한다.…〉78)
「韓吉洙는 國家와 民族에 罪過를 범한 者」
대미외교사업문제는 해외한족대회의 준비단계에서부터 임시정부의 큰 관심사였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의용대후원회는 임시정부에 편지를 보내어 자신들의 단체도 인정하고 임시정부를 개조하여 각 당파의 수령들을 망라한 내각을 구성하라는 등 몇 가지를 제의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韓吉洙를 외교대표로 임명하라는 요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임시정부는 공식답서를 보내지 않고 金九 개인 명의로 편지를 보냈다. 그것은 〈임시정부는 한길수와 합작하는 개인이나 단체에는 공식 문서를 보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미국의원들에게 한국의 독립운동은 무력을 쓰지 않고 정신으로 하며, 앞으로 독립청원단을 조직하여 도쿄까지 갈 것이라는 둥, 한-미조약의 부활, 또는 알래스카에 극동으로부터 한인 1만 명을 이민시킨다는 등의 광패(狂悖)한 언동으로 국가와 민족에 용납하지 못할 죄과를 범한 자와 합작하기 때문이다. 한길수가 사죄서를 발표하지 않으면 필경 정부에서 성토할 것이고, 소위 민중동맹단이나 후원회는 해산하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다〉라는 요지의 내용이었다.79) 金九의 이러한 강경한 주장은 한길수와 그의 후원자들에 대한 반감뿐만 아니라 그들이 지지하는 김원봉 등의 민족전선연맹에 대한 적개심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의용대후원회에 보낸 金九의 이러한 편지는 아랑곳없이 한길수의 중한민중동맹단은 해외한족대회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해외한족대회는) 첫째는 임시정부를 일체로 봉대하여 유력한 정부가 되게할 것이오, 둘째로는 외교단을 조직하여 이미 외교 선전사업을 시작한 인사들이나 새로 증가되는 인원들이라도 이 범위안에서 일치한 행동을 취하게 할 것이오, 셋째로는 군사운동이니, 임시정부 명령과 항일전선의 기치를 같이하야 나아가게 할지니, 이 세 가지를 원만히 해결하야 놓으면 이번 대회는 대성공이라 하노라.…〉80)
이러한 주장은 한족대회가 한길수의 활동까지 포괄하는 통합적인 외교활동기구를 구성할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金九는 의용대후원회에 편지를 보낸 사실을 북미국민회 총무 김병연(金秉堧)에게 알리고, 해외한족대회를 앞두고 북미국민회가 건의한 외교선전대표 문제에 대해서는 李承晩을 단장으로 하라고 다음과 같이 잘라 말했다.
〈귀회에서 고려하는 외교선전의 대표문제는 현하 시세에 비추어 보면 그다지 염려가 안 될 듯합니다. 한 사람을 맡겨도 전횡하기 불능한 것은 원동력이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있은 즉, 전일의 구미위원부 시대와는 판이할 것이오며, 여러 사람에게 맡겨도 爭功을 할지언정 爭權은 못 할 것이니 李博士를 단장으로 하고 2, 3인 보조를 하게 하면 적당할 듯합니다. 하물며 미주와 하와이의 각 단체가 일치한 주장으로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절대 옹호하는 그 배경을 가진 대표들이 감히 딴생각을 할 리가 없을 듯하외다.…〉81)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임시정부의 방침은 한족대회가 끝날 때까지 명확하게 결정되어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내무부장 조완구가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한족대표회에 보낸 다음과 같은 「훈사」로 짐작할 수 있다. 조완구의 이 「훈사」는 공식회의가 시작되기 하루 전인 4월20일에 중경방송국의 단파방송을 통하여 전해졌다. 조완구는 〈이미 김주석의 서함을 받으셨을 터인즉, 정부의 의사를 벌써 알으셨을 줄 압니다〉라고 전제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와 같이 중대한 사명을 유감없이 준행하려면 그 책임을 맡길 인물을 선택하는 것이 첫 일입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인물은 훌륭한 수완과 총명한 재간을 반드시 구비하여야 할 것은 물론이지만 그보다도 더 보귀한 것은 순정한 정신과 인격입니다. 외교기구의 명칭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회로, 책임자는 3인쯤 임명하는 것이 적당하리라 생각합니다.…〉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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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4월에 호놀룰루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에 참석한 대표들〔金元容, 「在美韓人五十年史」(1999)에서〕. |
外交代表問題로 사흘 동안 討論
하와이 한족대표회는 4월19일 저녁 7시에 국민총회관에서 공개리에 개회되어 대회임원을 선정했다. 의장에 안원규, 부의장에 한시대, 서기에 김원용·도진호, 영문서기에 김현구가 선임되고, 대표심사위원으로는 안원규·이원순·김호가 선임되었다. 이원순과 김호는 의안수정위원을 겸임했다. 이러한 임원구성은 대회가 세 단체의 주동으로 성사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4월20일은 일요일이었다. 대표일행은 오전에 기독교 예배당에서 예배를 보고, 오후 2시에 국민총회관에서 일반동포들도 참석한 민중대회로 모였다. 대회진행에 대한 설명이 있고 나서 대표들의 연설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는 중경임시정부 각원들의 축전과 워싱턴 위원부의 李承晩과 북미국민총회의 축사가 낭독되었다. 본격적인 의안토의는 4월21일 하오 7시부터 갈리히의 한인기독학원에서 개시되었다.83)
회의는 4월26일까지 계속되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열띤 토론이 전개된 것은 역시 외교사업을 담당할 대표의 수와 인선문제였다. 이 문제로 사흘 동안 계속 토론이 벌어졌다. 결국 북미국민회의 총회장을 역임한 김호의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李承晩을 대표로 천거하여 임시정부의 임명을 받기로 했다. 김호의 주장은 첫째로 미주와 하와이의 지도자들 가운데에서 자격·신용·배경 등을 감안할 때에 40년의 애국 성의를 가진 李承晩만 한 인물이 없고, 둘째로 李承晩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두려워서 그를 외교중심 인물로 내세우지 않았다가 미주 및 하와이동지회의 찬조를 얻지 못하게 되면 이번 대회의 목적인 대동단결의 노력은 실패하고 말 것이며, 셋째로 李承晩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소수 지식인 층인 반면에 그를 신복하는 다수의 민중이 그의 임명을 환영한다는 것이었다.84)
논란이 벌어지자 중한민중동맹단 대표 등은 대회에서 탈퇴하겠다면서 흥분하기도 했으나, 회의는 침착하게 진행되었다. 김호는 또 한길수가 북미국민회에 대해 활동비를 지원하지 않는다고 미국인을 시켜 위협하다시피 했고, 임시정부를 비방했던 일 등을 설명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기능에 들어가서는 우리가 칭찬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외다. 한길수는 풍부한 학식은 없으나 탐보[探報: 정보수집]함에는 경탄할 것이 많으며, 따라서 미국친구들도 그의 봉사를 어느 정도까지는 신임하며 찬조합니다. 그의 자격과 활동범위가 미국 국방에 긴절히 소용되는고로 한씨를 외교원으로 쓰는 것보다 미국 정부에 봉사하며 미주 및 하와이 한인사회에 충성을 보이게 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 줄 절실히 믿습니다』
이렇게 하여 대회는 한길수를 외교원의 한 사람으로 포함시키기보다 미국 국방공작에 대한 미주 및 하와이 한인사회의 봉사자로 임명하기로 합의했다.85) 이러한 조치에 대해 金九는 회의가 끝난 뒤에 김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번 대회에서 李博士를 단독으로 외교대표로 선택한 것과 한길수를 국방봉사원으로 선정하야 민중적으로 감독 지도케 된 것이 모두 지혜스러운 공작이라고 정부동인 등은 贊賀하기 마지않습니다〉라고 평가했다.86)
李承晩은 外交代表, 韓吉洙는 國防工作 봉사원으로
해외한족대회에서 토의된 사항은 4월27일 오후 2시에 센트럴 주니어학교에서 열린 공동대회에 보고되었고, 공동대회의 논평을 거쳐 이틀 뒤인 4월29일에 「해외한족대회 결의안」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결의안」은 역사적인 한족대회의 결의사항을 7개항에 걸쳐서 구체적으로 망라한 것이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독립전선 통일문제.
1)주의와 이론을 초월하여 온갖 역량을 항일전선에 집중하고, 2)신문·잡지 및 모든 출판물들의 논조를 통일하며, 3)표어를 제정하여 정신을 집중하고 행동을 민활하게 한다.
둘째로 임시정부 봉대문제.
대한민족과 각 단체는 1)임시정부를 절대로 신뢰하며 물질과 정신을 다하여 희생적으로 봉사하고, 2)임시정부로부터 발표되는 온갖 법령을 절대로 준행하며, 3)정부의 위신과 기율의 보증을 위하여 임시정부는 민족의 총의적 요구가 아니면 현행 정체를 변경하지 않도록 정부에 요청한다.
셋째로 군사운동 문제.
1)각 단체는 우리 국민 전체가 광복군인 된 인식을 고취하여 전선출동의 준비적 훈련을 행하기로 하고, 2)광복군과 의용대는 무조건으로 임시정부 통제 아래 대일항전을 합작하도록 요청한다.
넷째로 외교운동과 그 기관설치에 관한 문제. 이 항목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1)외교위원부를 워싱턴에 설치함. [이유] 미국은 오늘 세계외교의 중심이 되느니만치 그 수부 워싱턴에 우리의 외교기관을 두어 활동케 하자 함.
2)외교대표는 위원 한 사람을 두어 전무케 하되, 시국의 전개와 사무의 증가를 따라 인원을 더함. [이유] 재정과 모든 이론의 관계로 위원 한 사람으로서 전무케 하고 시국에 어울리며 일이 복잡함을 따라서 인원을 더하자 함.
3)외교위원부는 임시정부의 법적 절차를 마친 뒤에 사무를 개시케 함. [이유] 이 외교기관을 민중적으로 하지 않고 정부의 기관으로 실행케 함에는 외교부의 정식 인준을 받는 것이 옳다함에 터함.
4)외교위원부 경비는 재외동포가 부담하기로 함. [이유] 실제상으로 재정은 재미(미주·하와이·멕시코·쿠바) 동포의 수중에 있음에서임.
5)대미 외교대표는 李承晩으로 택정함.
6)이상의 조목을 임시정부에 청원하여 인가를 받은 뒤에 실행하기로 함.
다섯째로 미국의 국방공작을 원조하는 문제.
1)해외한족은 어디서든지 직접 간접으로 미국의 국방공작을 원조하라고 권유문을 발포하고, 2)미국 국방공작 봉사원 1인을 선정하여 적당한 봉사를 하게 하되, 경비는 재미한인이 부담하며 3)미국 국방공작 봉사원은 한길수로 선정한다.
모든 資金은 「獨立金」으로 통합하기로
여섯째로 독립운동에 대한 재정방침문제.
1)독립운동에 쓰는 모든 자금은 「독립금」이라는 이름으로 각 지방단체에서 일치한 방법으로 수납하고, 2)지금까지 각 단체에서 실행하던 각종 독립운동금의 명칭은 다 폐지하며 3)독립운동금은 연예산 2만 달러로 책정하고, 그 가운데에서 3분의 2는 임시정부로 상납하고 3분의 1은 외교비와 국방공작 원조비로 사용하기로 한다.
「재정에 관한 세칙」은 따로 정했다.
일곱째로 연합기관 설치 문제.
1)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한다. 2)연합회는 의사부와 집행부로 구성하되, 의사부는 하와이에 있는 대표원으로 조직하고 집행부는 미주에 있는 대표원으로 조직하기로 하고, 3)연합회 규정은 따로 재정하기로 했다.87)
해외한족대회의 성과로 결성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미주와 하와이 동포사회를 총괄하는 새로운 조직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1909년 2월에 대한인국민회가 결성되어 미국 본토와 하와이의 한인사회를 처음으로 하나로 결합시킨 이래 최대의 업적이라고 할만했다.88)
「해외한족대회결의안」과 함께 발표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규정」은 연합위원회의 목적을 조국의 독립운동과 그 전선을 통일하여 항전 승리를 획득하며 동포사회의 발전 향상을 위하여 연락 협조하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또 연합위원회는 재미한족의 정치단체들로 구성하며, 체제는 위원제로 하고, 위원은 해외한족대표회 출석대표 전원과 하와이국민회, 동지회, 북미국민회 수석으로 선출하기로 했다. 운영방식은 정례회가 없고 특별한 사정에 따라 의사부와 집행부의 공동결의로 임시로 소집하는 것으로 했다. 주목되는 것은 각 회원 단체는 독립금을 수합하여 본위원회로 납부하는 의무를 각별히 준수하도록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또한 미국 국방공작의 후원사무 일체를 본회에서 관리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은 각 단체와 한길수의 관계에서 있을 수 있는 알력을 최대한으로 방지하고자 한 배려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워싱턴에 설치될 외교위원부도 행정적으로는 임시정부의 직속기관이 될 것이나, 재정은 연합위원회에 의존하게 될 것이므로 경우에 따라서 알력을 빚을 소지가 없지 않았다.
李承晩과 金九의 祝賀文이 차이나
대회를 성공리에 마쳤다는 소식을 듣고 李承晩은 다음과 같은 축하문을 보냈다.
〈이번에 호놀룰루에서 개최한 해외한족대회 결과를 모든 한족이 다 기뻐할 줄 믿습니다.… 피차 호의로 의사를 교환하고 따라서 민족운동을 합심합력하야 하기로 작정하고 각각 호감을 가지고 일해 나가게 된 것은 과연 축하할 만한 성적입니다.
이 뒤를 계속하야 이 성적이 영구한 결실을 내고 못 내는 것은 각 단체의 인도자들과 또한 일반 민중에 달렸나니, 어떤 단체나 어떤 인도자나 이것을 이용해서 자기들의 세력을 세워보기를 경영하는 데가 있으면 아무리 비밀히 하고 아무리 수단 있게 할지라도 스스로 남들이 다 알고 각각 그 정신이 다시 들어와서 서로 분열이 부지중에 생기리니, 이것을 극히 조심할 것입니다. 민족을 이때에 우리 손으로 살려내야 하겠는데, 일편공심만 가지고 서로 받들어 나가면 스스로 신앙이 생기며 정의가 통해서 몇십몇백 단체가 있을지라도 다 단합 단결한 민족이 될 것이라.…
그런즉 자금 이후로 어떤 한인이든지 외국인을 대하야 글로나 말로나 한인들이 단합이 못 되어서 일하기 어렵다 하는 자이 있으면 이는 곧 거짓말하는자요 한족의 생활길을 막는 자로 인정하야 공개성토할 것이라.… 종금 이후로는 모든 지난 일을 다 잊어버리고 천재일시인 이 기회에 우리 삼천리 금수강산을 회복하자는 목적에 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는 대의를 지켜서 이 굳은 애국심과 이 굳은 단결로 대업을 성취하도록 나가기를 바랍니다.…〉89)
이러한 문면은 한족대회의 성과보다는 앞으로의 일을 중시하면서 지도자들의 단결을 강조한 것이었다.
李承晩의 이러한 신중한 평가와는 대조적으로 金九는 해외한족대회가 재미동포들의 〈독립운동 역사상에 신광채를 표현하는〉 쾌거였다고 극찬했다. 해외한족대회의 결의안을 받아본 金九는 6월4일자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북미국민회로 보냈다.
〈그간 독립당 대표대회를 하와이 대표대회와 동시에 거행하고 임시정부 국무회의와 광복군 통수부회의를 왜적 비행기의 공습을 피해 가면서 월여를 계속 개회하야 이제야 겨우 마쳤고, 하와이 대표 대회가 결의한 모든 중대 안건은 소료밖에 원만히 토의 결속된 보고를 작일에 받아보고 금일[6월4일] 국무회의를 열고 보고를 의지하야 절차를 행하는 중입니다. 이것은 우리 동포가 미주에서 독립운동 역사상에 신광채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정부 동인 등은 크게 경하하오며 외교위원 천보도 지금 이 시기에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매우 지혜로운 처사로 압니다.〉90)
李承晩과 金九의 하와이 해외한족대회에 대한 이러한 평가의 차이는 새로 결성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앞으로의 활동에 대한 기대와 전망의 차이에 따른 것이었다.
李承晩은 外交代表 자리를 사양해
李承晩은 한족대회가 개회되는 동안 동지회에 대하여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았다. 대회 의장 안원규는 대회결의안을 임시정부에 보내고 李承晩을 대미외교대표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李承晩에게도 결의안과 함께 대회의 결의를 수락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李承晩은 「太平洋週報」로 한족대회를 치하하는 글을 보낸 이튿날 안원규의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李承晩은 이 결정을 사양했다. 그는 5월18일에 안원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敬啓者. 귀함을 접수하여 해외한족대회 결의안을 자세히 보았으며 귀 대회 대성공을 다시 축하하나이다.
그런데 본인을 주미 외교대표로 추천하셨다 하니 극히 감사하오나 시기에 응하여 상당한 인격을 택임하시면 본인은 힘껏 협찬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을 터입니다. 이 뜻을 임시정부에 글을 보내어 품고하오니 서량(恕諒)함을 열망하오며 민족통일을 위하여 이렇듯 노력하심을 감복하나이다.〉91)
李承晩은 안원규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이원순에게도 알렸다. 이때의 李承晩의 사양의 뜻이 얼마나 강력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족대회의 결의에 규정된 외교위원부의 위상이 李承晩으로서는 만족스럽지 못했을 것이다. 이원순에게 밝힌 외교대표직 사양의 이유는 좀 생뚱맞은 것이었다.
〈내가 연래로 주장하던 바는 각 단체 인도자들이 각각 합동을 대응하여 단체 세력을 확장하려는고로 합동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하여 온 것입니다. 각 단체들이 모든 사상과 신조를 불계하고 합동을 주장하는 자리에 음연히 중요 책임을 맡고 앉으면 나 개인으로는 전후 모순이요 민족 전체로는 합동을 무력하게 함이니, 다만 뒤에 앉아서 힘껏 도울 것이오. 公私凉天(공사양천)이겠기에 이같이 결정하는 것이며, 여러분이 모든 기를 희생하시므로 이만치라도 개발된 것이니, 일만동포의 양해를 바랍니다.〉92)
그러나 이러한 설명만으로는 2년 전에 임시정부에 대하여 구미위원부의 복설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던 李承晩이 외교대표의 직임을 사양한 분명한 의사를 판단하기 어렵다. 아무튼 한족대회의 결의안에 규정된 외교위원부의 위상은 지난날의 구미위원부의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구미위원부는 李承晩이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 자격으로 1919년 8월에 공포한 「집정관총재 공포문(제2호)」을 근거로 하여 설립된 기관이었다. 상해정부를 중심으로 임시정부가 통합된 뒤에도 구미위원부는 재미동포들을 대상으로 행정권과 재정권을 행사하는 이원적인 정부기구로 운영되었다. 임시정부는 1925년 3월에 李承晩을 탄핵 면직시키면서 구미위원부에도 폐지령을 내렸으나 李承晩은 이를 무시하고 동지회와 부인구제회 등 지지자들의 지원으로 1937년까지 워싱턴에 구미위원부 사무실을 유지했고,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다가 1939년 3월에 李承晩이 하와이에서 다시 워싱턴으로 가서부터 활동을 제재하고 있었다.
臨時政府에서 信任狀 보내와
해외한족대회의 요청을 받은 임시정부는 6월4일에 국무회의를 열어 워싱턴에 주미외교위원부를 설치하기로 결의하고 「주미외교위원부 규정」을 제정했다. 「규정」은 새로 설치하는 외교기관의 명칭을 「주미외교위원부」라고 명시함으로써 지난날의 구미위원부와는 다른 정부직할 기관임을 분명히 했다(제1조). 그러나 대외명칭은 李承晩이 사용하는 대로 「Korean Commission」을 사용했다. 주미외교위원부에는 위원장 1인을 임시정부에서 임명하여 교섭사무를 전임하게 하고(제2조), 위원장은 수시로 외교상황을 임시정부에 보고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안건은 반드시 임시정부의 지시를 받도록 했다(제3조).93)
임시정부는 같은 날짜(6월4일)로 된 임명장과 함께 국문과 영문으로 된 신임장을 李承晩에게 보냈다. 영문 신임장의 문면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신임장. 본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은 국무회의의 의결로 미주 워싱턴 D.C. 주재 주미외교위원부(the Korean Commission) 위원장 李承晩 박사를 합중국정부와의 모든 외교교섭을 재량에 따라 행사할 수 있는 전권을 부여받은 본 정부의 공식대표로 임명하였음을 통보합니다.〉
임시정부는 이러한 신임장과 함께 6월6일자로 金九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와 조소앙이 헐(Cordell Hull)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편지를 동봉해서 李承晩에게 보냈다. 두 편지는 모두 1882년의 조-미통상조약을 상기시키면서 두 나라 사이의 우호관계가 재개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李承晩에게 협조해 주도록 부탁하는 내용이었다.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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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이 駐美外交委員長 任命狀과 信任狀. 主席 金九와 外交部長 趙素昻의 명의로 되어 있다〔「雩南李承晩 文書東文篇(六)」(1998)에서〕. |
혼벡이 信任狀 제출 말라고 권유
李承晩은 7월14일에 이 문서들을 가지고 국무부로 정치문제고문 혼벡(Stanley K. Hornbeck)을 찾아갔다. 그는 이 문서들을 혼벡에게 꺼내 보이면서 수신인들에게 보내거나 혼벡이 전해 주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그 이전에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혼벡의 조언을 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李承晩에게 호의적인 혼벡은 임시정부의 도장이 찍히고 문장이 첨부된 문서들을 훑어보고 나서 회의적으로 대답했다. 그는 먼저 국무부 동료들과 사전협의를 하지 않고는 문서들을 접수할 의사가 없다고 말하고, 만일 李承晩이 그 문서들을 잠정적으로 맡겨 놓고 가겠다면 며칠 안으로 회답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혼벡은 정중하게 말했다.
『나의 조언이 선생이 생각했던 일을 못 하도록 방해하는 조언이 되고 마는 것이 두렵습니다』
혼벡은 자기 보좌관이었다가 1937년에 후임 극동국장이 되어 있는 해밀턴(Maxwell M. Hamilton)과 해밀턴의 보좌관 발렌타인(Joseph W. Ballantine), 그리고 국무차관 웰스(Sumner Welles) 등 국무부 간부들과 상의했다. 혼벡, 해밀턴, 발렌타인 세 사람은 국무부의 핵심적인 극동정책담당자였다. 헐 국무장관은 뒷날 이들을 자기의 「주요한 협력자」였다고 술회했다.95) 혼벡은 7월22일에 李承晩에게 연락했다. 혼벡은 문서들을 심도 있게 검토했다고 말하면서, 이 문서들을 수신인들에게 보내지 말고 李承晩이 보관하고 있으라고 했다.
『이 시점에 여기에서 이렇게 접근하는 것은 李博士의 장년기의 온 생애를 바친 운동을 진전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요컨대 타이밍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李承晩이 예상한 대답이었다. 그는 혼벡에게 국무부가 진지하게 검토해 주어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적절하고 유리한 기회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계속해서 국제상황의 추이를 지켜보겠습니다』96)
李承晩이 기대한 적절하고 유리한 기회는 넉 달 남짓 뒤로 다가오고 있었다. 1941년 12월7일 새벽의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이 그것이었다.●
1) 「金九가 朱家?에게 보내는 1940년 9월19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1994, 國史編纂委員會, 41쪽. 2) 「新韓民報」 1940년 9월26일자, 「중경으로부터 날아오는 광복군 성립공전」. 3) 「新韓民報」 1940년 9월26일자, 「소년중국특전」, 「금산시보의 전하는 향항통신」, 「세계일보의 전하는 중앙통신」. 4) 「新韓民報」 1940년 10월10일자, 「한국광복군 축하에 관한 문건」 및 「임정송금 1천원」. 5) 「朱家?가 金九에게 보낸 1940년 10월4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43쪽. 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6) 독립군전투사(하)」, 1969,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667쪽. 7) 「新韓民報」 1941년 2월27일자, 「臨時政府公報 제68호」.
8) 「新韓民報」 1940년 10월3일자, 「한국광복군의 성립과 그 장래」;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2005, 18쪽; 金學奎, 「白波自敍傳」,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198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598쪽; 「독립운동사(6) 독립군전투사(하)」, 205~207쪽. 9) 「독립운동사(6) 독립군전투사(하)」, 202~205쪽. 10)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18쪽; 「新韓民報」 1941년 4월17일자, 「국무회의」; 「독립운동사(6) 독립군전투사(하)」, 206쪽. 11) 「金學奎와 王俊誠이 朱家?에게 제출한 備忘錄」,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62쪽. 12) 「新韓民報」 1941년 3월13일자, 「韓國獨立光復軍, 1월1일 제5지대성립전례거행」; 「독립운동사(6) 독립군전투사(하)」, 207~210쪽; 韓詩俊, 「韓國光復軍硏究」, 1993, 一潮閣, 151~155쪽. 13)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1997, 돌베개, 404쪽. 14) 「新韓民報」 1940년 10월3일자, 「광복군조직에 대한 중요통신」; 「백범일지」, 404쪽.
15)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제시의 일기」, 1999, 혜윰, 226쪽; 南坡朴贊翊傳記刊行委員會, 「南坡朴贊翊傳記」, 1989, 乙酉文化社, 257~259쪽. 16) 閔弼鎬, 「大韓民國臨時政府와 나」, 金俊燁 編, 「石麟閔弼鎬傳」, 1995, 나남출판, 99쪽. 17) 「백범일지」, 376쪽, 393쪽. 18)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14쪽. 19) 「백범일지」, 402쪽; 정정화, 「녹두꽃」, 1987, 未完, 147~148쪽. 20)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15~16쪽. 21) 「新朝鮮報」 1945년 11월2일자, 金秉豪·宋志英, 「重慶特信(2)」. 22) 「백범일지」, 406쪽; 金俊燁, 「長征」 2, 1989, 나남, 469쪽. 23) 정정화, 앞의 책, 142~143쪽. 24) 「백범일지」, 377쪽, 392쪽; 정정화, 앞의 책, 149쪽.
25) 「백범일지」, 381~382쪽, 406쪽; 董晏明, 「抗日戰爭時期 土橋場에 駐在하고 있던 韓國臨時政府와 僑民」, 市政協九龍坡區委員會 文史工作委員會, 「九龍文史」, 第七期, 1995년 9월, 40~41쪽. 26)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앞의 책, 136쪽. 27) 정정화, 앞의 책, 142~143쪽. 28)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앞의 책, 171쪽; 정정화, 앞의 책, 149쪽. 29)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앞의 책, 220쪽. 30) 「新朝鮮報」 1945년 11월2일자, 金秉豪·宋志英, 「重慶特信(2)」. 31) 「백범일지」, 402쪽.
32) 閔弼鎬, 「大韓民國臨時政府와 나」, 101~102쪽. 33)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15~16쪽, 20~22쪽. 34) 정정화, 앞의 책, 147쪽, 160쪽;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앞의 책, 176쪽. 35) 정정화, 앞의 책, 146쪽;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앞의 책, 220쪽. 36) 「백범일지」, 406쪽. 37) 董晏明, 앞의 글, 41~42쪽. 38) 「백범일지」, 406쪽. 39)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앞의 책, 166쪽. 40) 南坡朴贊翊傳記刊行委員會, 앞의 책, 257쪽. 41)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앞의 책, 200쪽, 225쪽; 金俊燁, 앞의 책, 469쪽; 정정화, 앞의 책, 146쪽; 南坡朴贊翊傳記刊行委員會, 앞의 책, 258쪽.
42) 「新朝鮮報」 1945년 11월2일자, 金秉豪·宋志英, 「重慶特信(2)」. 43) 「金九가 朱家?에게 보낸 1941년 1월21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47~48쪽. 44) 「朱家?가 何應欽과 商震에게 보낸 1941년 1월24일자 편지」 및 「商震이 朱家?에게 보낸 1941년 2월3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ⅩⅠ」, 48쪽. 45) 「金九가 朱家?에게 보낸 1941년 2월14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ⅩⅠ」, 49쪽. 46) 「軍政部에서 朱家?에게 보낸 3월3일자 전문」,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50쪽. 47) 「朱家?가 商震에게 보낸 1941년 3월6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51쪽. 48) 「朱家?가 金九에게 보낸 1941년 3월6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51~52쪽. 49) 「商震이 朱家?에게 보낸 1941년 3월16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54쪽.
50) 「金學奎와 王俊誠이 朱家?에게 보낸 備忘錄」 및 「金九가 朱家?에게 보낸 1941년 6월13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62쪽. 66~67쪽; 「독립운동사(6) 독립군전투사(하)」, 218쪽. 51) 李範奭, 「光復軍」, 「新東亞」 1969년 4월호, 196쪽. 52) 「朱家?가 金九에게 보낸 1941년 3월20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54쪽. 53) 「賀耀祖가 金九에게 보낸 1941년 4월19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55~56쪽. 54) 「金九가 朱家?에게 보낸 1941년 4월28일자 편지」 및 「朱家?가 何應欽에게 보낸 5월3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56~57쪽. 55) 「金九가 金乎에게 보내는 1941년 6월18일자 편지」, 「白凡金九全集(7)」, 43쪽; 金九가 蔣介石에게 보낸 1941년 7월28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73쪽. 56) 「徐恩曾이 朱家?에게 보낸 1941년 11월1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81쪽; 金榮範, 「朝鮮義勇隊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198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487쪽. 57) 「金學奎가 1941년 5월에 朱家?에게 제출한 韓國光復軍問題節略」,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63~65쪽. 58) 「商震이 朱家?에게 보낸 1941년 5월30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59쪽.
59) 「金九가 金乎에게 보낸 1941년 2월16일자 편지」, 「白凡金九全集(7)」, 41~42쪽. 60) 「新韓民報」 1941년 12월11일자, 「내지한재구제금 임정에 밧쳐」. 61) Kim Ku to Franklin D. Roosevelt, Feb. 25, 1941, 「白凡金九全集(7)」, 53~57쪽. 62) 「致美大統領」,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趙素昻篇(三)」, 1997, 韓國精神文化硏究院, 817~823쪽. 63) 미 국무부 문서번호 FW 895.01/48 Division of Far Eastern Affairs, Apr. 15, 1941.
64) 미 국무부 문서번호 895.00/729 Joe So-ang to Corde Hull, June 6, 1941;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3) 임시의정원Ⅱ」, 2005, 국사편찬위원회, 17쪽. 65) Arthur M. Schlesinger, Jr., The Almanic of American History, 1983, Putnam Publishing Group. pp. 480~482. 66)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편, 「해방조선」, 1948, 재미한족연합위원회집행부, 149쪽. 67) 「太平洋週報」 1941년 3월1일호, 「3·1절경축순서」, 및 3월15일호 「누가 광복군인가」; 「新韓民報」 1941년 3월27일자, 「한국독립광복군――하와이 6천동포의 힘있는 후원」. 68) 최기영, 「조선의용대와 미주한인사회――조선의용대 미국후원회를 중심으로」, 「식민지시기 민족지성과 문화운동」, 2003, 한울, 305~335쪽 참조.
69) 「新韓民報」 1940년 4월11일자, 「國民會總會공독」. 70) 위와 같음. 71)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편, 앞의 책, 150쪽; 金元容, 「在美韓人五十年史」, 1959, Reedley, 400~401쪽. 72) 金元容, 위의 책, 400쪽. 73) 「金九가 金秉堧에게 보낸 1941년 3월20일자 편지」, 「白凡金九全集(7)」, 59쪽.
74)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편, 앞의 책, 151쪽. 75) 「太平洋週報」, 1941년 4월19일호, 「라성국민회대표를 환영」. 76) 洪善均, 「在美韓族聯合委員會硏究(1941~1945)」, 2002, 漢陽大學校 博士學位論文, 60쪽. 77) 「太平洋週報」, 1941년 4월5일호, 「해외한족전체대회」: 「新韓民報」, 1941년, 4월17일자, 「3대단체 대표회의 회의정서」. 78) 리원순, 「우리의 림시정부와 대미외교」, 「太平洋週報」 1941년 4월19일호, 11쪽.
79) 「金九가 金秉堧에게 보낸 1941년 3월20일자 편지」, 「白凡金九全集(7)」, 59~60쪽. 80) 「한중동맹단선전문」 1941년 4월18일호(제70호), 「사설: 미포대표회에 대하야」. 81) 「金九가 金秉堧에게 보낸 1941년 3월20일자 편지」, 「白凡金九全集(7)」, 59~60쪽. 82) 「太平洋週報」 1941년 5월31일호, 「재미한족에 대한 임정훈사」, 10쪽.
83) 「太平洋週報」 1941년 4월26일호, 「해외한족대회진행」, 16쪽; 「新韓民報」 1941년 5월8일자, 「해외한족대회준비회」. 84) 「太平洋週報」 1941년 5월3일호, 「한족대회의 3대운동」, 16~17쪽. 85) 「太平洋週報」 1941년 5월10일호, 「한족대회 3대운동」, 6~7쪽. 86) 「金九가 金乎에게 보낸 1941년 6월18일자 편지」, 「白凡金九全集(7)」,44쪽.
87) 「太平洋週報」 1941년 5월10일호, 「해외한족대회결의안」, 7~9쪽; 「新韓民報」 1941년 5월15일자, 「해외한족대회결의안」. 88) 洪善均, 앞의 논문, 220쪽. 89) 리승만, 「해외한족대표회를 치하」, 「太平洋週報」 1941년 5월31일호, 5쪽.
90) 「新韓民報」 1941년 6월26일자, 「임시정부당국은 한족대회를 자랑」. 91) 李元淳, 앞의 책, 233~234쪽. 92) 위의 책, 233쪽.
93)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 헌법·공보」, 2005, 국사편찬위원회, 237~238쪽. 94) 미 국무부 문서번호 895.01/49 1/2, in Records of the U.S. Department of State relating to the Internal Affairs of Korea, 1940~1944. 95). Codell Hull, The Memoirs of Codell Hull, 1948. Macmillan Company, vol. Ⅰ. pp. 894~895, vol Ⅱ. pp.988~989. 96) 미 국무부 문서번호 895.00/729 PS/SBH, “Adviser on Political Rela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