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書勉
1926년 강원 원주 출생. 연희전문 文科 수료. 연세大 정치외교학과 명예졸업. 大東新聞 기자, 고아원 「聖방지거의 집」 원장, 日本 아세아大 교수, 日本 도쿄 한국연구원 원장, 安重根 의사 숭모회 이사, 現 국제한국연구원장. 저서 「安重根 사료」, 「7년전쟁(임진, 정유왜란)」, 「몽골기행」, 「새로 쓴 安重根 의사」 「安重根의 墓」 등.
정리 :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1926년 강원 원주 출생. 연희전문 文科 수료. 연세大 정치외교학과 명예졸업. 大東新聞 기자, 고아원 「聖방지거의 집」 원장, 日本 아세아大 교수, 日本 도쿄 한국연구원 원장, 安重根 의사 숭모회 이사, 現 국제한국연구원장. 저서 「安重根 사료」, 「7년전쟁(임진, 정유왜란)」, 「몽골기행」, 「새로 쓴 安重根 의사」 「安重根의 墓」 등.
정리 :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한 동네에서 兄으로 모셨던 崔대통령
나는 지난 12월9일, 玄石 崔圭夏(현석 최규하) 前 대통령의 49재가 열리는 강원도 원주시 치악산 龜龍寺(구룡사)를 찾았다. 하늘은 무겁게 내려앉았고,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간혹 눈발이 날렸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와의 어릴 적 일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제10代 대통령을 지낸 崔 前 대통령을 나는 어린 시절부터 「三光兄(삼광형)」이라고 불렀다. 崔 前 대통령의 가족은 강원도 원주군 원주면 화천리(現원주시 봉산동)에 있는 「三光마을」이란 곳에 살았다. 兄은 1919년 7월 강원도 원주시 옥거리(現 평원동 25번지)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字는 瑞玉(서옥)이라 했다.
崔대통령과 우리 집의 家系
崔대통령의 할아버지는 韓末(한말) 成均館博士(성균관박사)로서 이름 높았던 漢學者(한학자) 崔在民(최재민)이다. 아버지 崔養吾(최양오)는 원주·홍천·정선 등지에서 訓導(훈도)를 지내다 평창·인제 등지에서 郡屬(군속)을 거쳐, 말년에는 원주면장을 지냈다. 할아버지가 성균관박사를 지냈기 때문에 삼광마을에서 宅號(택호)를 「최박사댁」이라고 불렀다.
兄의 조부 崔在民은 갑오경장 직전인 1892년 조선조 마지막 과거시험에 합격했다. 남편이 과거에 급제하고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한양에 머무르자 兄의 조모는 1901년 4월29일 언문편지를 보내 마음에 새겨 두었던 애정을 표시한다.
<붓을 드니 하고 싶은 말이 마음속에 서려 있으나 등잔불빛 아래에서 된지만지 하여 갈피를 잡을 수가 없나이다. 속히 금의환향하실 일이 잠자리에 누울 때나 아니면 앉아서 일을 하고 있을 때에도 잠시도 잊을 수가 없어 즐겁기 그지없는 바입니다. 평생 「생원」 소리와 편지 봉투에 그리 쓰여지는 것이 마음에 걸리옵더니 옥황상제께서 감응하사 「최박사」 택호를 빌려주시니 그간 억울하였음을 감동하신 줄 알게 되었나 봅니다>
兄이 家寶(가보)로 간직하고 있는 이 언문편지는 조선왕조 시대 사대부 집안 부녀자의 수준을 알 수 있는 名文(명문)이다.
1920년대 원주 치악산 아래 삼광마을에는 강릉 최씨 31세손인 崔在民, 崔在謨(최재모), 崔在鎬(최재호), 崔在武(최재무), 崔在建(최재건), 崔在弼(최재필) 여섯 가족이 가깝게 지냈다. 내 조부는 崔在謨이고 父는 강원도에 잘 알려진, 嘉善大夫(가선대부)를 지낸 崔養浩(최양호)다.
崔在鎬의 아들 崔良洵(최양순)은 원주향교의 典校(전교)를 지냈고, 崔在弼은 中樞院議官(중추원의관)으로 동아학원을 경영했다. 崔在建의 아들 崔養玉(최양옥)은 韓末의 독립운동가로 횡성에서 3·1 운동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나는 崔圭夏 前 대통령의 아버지를 「삼광아저씨」, 崔圭夏 前 대통령을 「삼광형」, 그 누이인 崔敬夏(최경하)를 「삼광누나」라고 불렀다.
兄의 아버지는 兄처럼 키가 크고 얼굴이 길었다. 原州橋(원주교)를 지나 출퇴근할 때면 누구나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할 만큼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일본인들은 삼광아저씨를 두고 『얼굴이 길어 面長(면장)이냐, 면장이라서 面長이냐』고 했다.
10년간 자식이 없다가 낳은 귀한 아들
삼광누나는 兄보다 열 살 위로 원주에서 드물게 이화女中(이화女高 前身)에 입학해 유관순 열사와 함께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兄이 1932년 경성제일고보(경기高 前身)에 입학할 때 삼광누나가 서류를 가지러 원주까지 한달음에 뛰어왔다. 삼광누나는 外家(외가)인 국어학자 李崇寧(이숭녕) 선생을 보증인으로 세워 주었다.
兄의 모친인 전주 이씨가 삼광누나를 낳고 10년간 後嗣(후사)가 없다가 치악산에서 치성을 드려 낳은 게 삼광형이다. 兄의 모친은 늘그막에 본 아들이라 누가 삼광형에게 험담이라도 할까 전전긍긍할 만큼 兄을 끔찍이 생각했다.
兄은 원주공립보통학교 시절 尹心德(윤심덕:1897~1926) 선생에게 음악을 배웠다고 하면서, 「死의 찬미」만 흘러나오면 흥얼거리곤 했다.
兄은 경성제일고보에 진학하면서 서울 종로구 봉익동에 있는 崔在武의 손자(崔鳳夏)댁에서 공부했다. 삼광형은 스무 살이나 손위인 봉하형을 「봉익동 형」이라고 깍듯하게 부르며 따랐다.
兄은 경성제일고보 5학년 때인 1935년, 兄보다 세 살 위인 형수 洪基(홍기) 여사와 혼례를 치렀다.
19세 되던 이듬해,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한 兄은 東京고등사범학교 영문학과에 진학한다. 兄은 경성제대 예과와 東京고등사범 두 학교를 모두 합격했으나, 학비면제였던 東京고등사범을 선택했다. 당시 농사를 지었던 삼광형 집은 가세가 기울어 가고 있었다.
兄이 東京에 유학하고 있을 때, 형수는 남편에게 시집온 여자라기보다 시부모를 모시기 위해 온 사람처럼 살았다. 결혼한 지 이태 만에 시아버지(崔養吾)가 돌아가셨는데, 죽기 전까지 극진하게 대했다. 孝婦(효부)라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어릴 적 붉은 댕기를 매고 시집온 형수를 보고 참 미인이라고 생각했다. 몇 해 전 영결식 때 본 형수의 모습은 세월에 바래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만큼 얼굴이 상해 있었다.
학비 무료인 東京高師로 진학
원주보통학교 학생이던 나는, 남편은 東京에 유학 보내고 시아버지와 밭을 가는 형수에게 『남편이 도망갔다』고 놀려댔다. 그럴 때마다 형수는 『도련님은 왜 날 못살게 구세요』 라며 눈을 흘겼다.
내가 결혼해 아내를 데리고 서교동 兄댁을 찾아갔던 일이 있다. 짓궂은 兄이 내 아내 앞에서 『너는 코를 중학교 때까지 흘리더니, 언제 코를 안 흘리게 됐니』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고 넘길 이야기지만, 어린 시절 최고의 아킬레스건을 들춰 내 스타일 구기게 하는 소리를 하는 데 대해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서 옆에서 반기던 洪基 여사 쪽으로 화살을 돌렸다. 『(파마 머리를 하고 있던 형수에게) 아주머니는 언제 쪽을 잘랐수?』라고 응수했다.
兄의 막내 여동생이 崔茂夏(최무하)이다. 하루는 내게 와서 兄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崔茂夏는 일제 때 정신대에 끌려갈까 봐 나이가 차기 전 시집을 간 누이다. 그래서 늘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것을 애석해했다.
하루는 오라버니(崔圭夏)가 『올케가 몸이 좋지 않으니 총리관저의 안살림을 해달라』고 해서 큰 책임감을 갖고 갔다고 한다. 그러나 한 달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고 말았다. 본디 검소한 올케가 총리관저 살림이 사치해선 안 된다면서 찬거리를 사는 데 돈을 쓰지 않았고, 음식도 남는 것이 없도록 했다고 한다. 오라버니의 양복도 여유분이 없어 출근할 적마다 다림질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형수는 검소한 여자였다.
東京고등사범학교 재학 시절, 방학 때 원주에 내려온 兄은 한참 아래인 나를 붙들고, 일본 여성에 대한 느낌을 들려주었다. 兄은 東京고등사범 수재니까 여자들이 관심을 갖더라고 했다.
한번은 귤을 먹다가 실수로 물이 여학생 얼굴에 튀었다고 한다. 그 여학생은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兄이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린 틈을 타서 서둘러 닦더라는 것이다. 兄은 『일본 여자는 감추는 아름다움이 있더라』고 했다. 兄이 여자 이야기를 하기에 『일본에서 연애를 하냐』고 했더니 『예끼, 장가를 갔으면 부인에 대한 禮를 지켜야지』라고 했다.
兄은 東京고등사범에 다니면서 방학 때면 선물을 한아름 사들고 왔다. 『돈이 어디서 났느냐』고 물으면 『프랑스말 번역도 하고 통역도 해서 벌었지』라고 했다. 그가 전공인 영어는 잘하는 줄 알았지만 프랑스어까지 하는 줄은 몰랐다. 물론 일어에도 능통하다. 朴正熙(박정희) 대통령 외교특보 시절, 일본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강연하는 것을 들었는데, 격식에 맞는 일어를 구사했다.
광복 후 영어를 잘하는 3인방이 兄을 비롯, 金溶植(김용식) 前 외무부 장관, 金東祚(김동조) 前 외무부 장관이었다.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은 세 사람의 젊은이들을 登用(등용)했다. 兄은 성격처럼 발음 하나, 악센트 하나 조심스러웠다. 바리톤 음색으로 영어연설을 하면 외국인들이 숨소리를 죽였다.
1979년 4월, 兄은 국무총리 자격으로 호주ㆍ뉴질랜드ㆍ인도네시아 3국을 공식 방문했다. 兄이 호주 의회에서 연설을 마치자 말콤 프레이저 호주 총리가 단상에 올라 『崔圭夏 총리께서 「킹스 잉글리시(영국식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니 내가 주눅이 들어 답사를 할 수 없겠다』고 조크했다. 유창하면서도 격식 있는 영어는 외교관에게 커다란 무기였을 것이다.
崔圭夏가 만주로 간 까닭
東京고등사범을 1941년 졸업한 兄은 일본인만 다니는 대구중학 교사로 부임한다. 조선인은 東京고등사범을 졸업하면 조선인 중학교에 가는 게 상례였다. 하지만 兄이 일본인 학교에 보내진 것으로 보아 월등한 실력의 소유자임을 짐작케 한다. 대구는 집안 어른인 독립운동가 秋岡 崔養玉(추강 최양옥) 선생이 복역하던 곳이다.
東京고등사범을 졸업하고 東京에서 귀국한 兄은 원주보통학교 나가누마(長沼) 교장을 인사차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일본인들은 원주의 유력자 집안이나 사범학교 출신자들을 우대했다. 兄은 교장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센세이(선생)」가 아닌 「상(씨)」이라고 호칭을 했노라고 했다. 당시 일본인 교장에게 조선인으로서 「센세이」라고 호칭하지 않은 것은 「혁명적」 발언이었을 것이다. 兄이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 나는 兄의 치기가 발동했다고 생각했다.
兄은 조선총독부 고등문관시험을 보는 대신, 1942년 만주국 고등문관시험에 응시해 합격한다. 兄은 率家(솔가)해 新京(신경·現 장춘)으로 떠나 대동학원에서 연수를 받았다. 대동학원은 만주국 고급관료 연수기관이었다.
兄이 대구중학 교사로 근무한 것은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대구중학을 그만둔 이유는 일본인 사회에서의 차별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여겨진다. 洪基 여사가 쪽을 찌고 있어서 일본 여성들과 금방 구별이 됐기 때문이다.
兄의 어머니 李여사는 남편과 사별하고 딸(敬夏)을 시집 보내자, 아들을 따라 만주로 移住(이주)할 요량으로 집과 땅을 팔았다. 그런데 그 돈을 전부 집안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고 말았다. 이때 兄의 生家(생가)와 땅이 남의 손에 넘어갔다. 그럼에도 兄은 『사기당한 이야기를 하면 한이 없다』며 말문을 닫았다. 일전에 원주市에서 「崔圭夏 生家」를 복원한다고 하기에 兄에게 이야기했더니 『우리 집은 초가집인데 기와집으로 만들어 놓았더라』고 했다. 兄은 솔직하고 청빈한 사람이었다.
兄은 광복 직전 만주에서 장남(胤弘)을 얻었다. 광복이 되자 귀국해 우리 집을 찾아 우리 모친께 인사를 했는데, 갓난아이를 안고 있던 洪基 여사는 자손이 귀한 집에 아들을 낳아선지 얼굴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兄은 서울大 사범대학에서 교편을 잡는다.
이때 사범대 교육학과에 다니던 金大中(김대중) 前 대통령 부인 李姬鎬(이희호) 여사가 兄의 강의를 들었다. 李여사가 내게 『선생님께서 어찌나 영어를 잘 가르치시는지 몰라요』라고 했다. 이 말을 兄에게 전하니 『그래?』 하고 심드렁하게 한마디 했던 기억이 난다.
금시계와 리어카를 교환
광복 직후, 정부 수립 전까지 李承晩 대통령은 부족한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영어가 뛰어난 人材(인재)들을 대거 발탁했다. 외국의 식량원조를 받느냐 못 받느냐에 따라 국가의 存亡(존망)이 좌지우지되던 시기였다.
兄은 美 軍政廳의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발탁됐다. 兄은 이때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대구에서 열린 양정과장 회의에 참석하려고 서류를 챙기다가 그만 여의도 비행장에서 이륙하는 연락기(세스나機)를 놓쳤다. 兄은 비행기를 놓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에 갔다.
몇 시간 후 대구의 경북도청에 도착하니 도청 사람들이 『죽었다는 崔圭夏가 어떻게 살아왔냐』고 했다. 세스나機는 추풍령을 넘다 제트기류를 만나 추락해 전원이 사망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兄의 가족은 한강을 건너지 못했다. 인민군들이 장악한 서울을 빠져나가 洪基 여사와 함께 고향인 원주로 피란길에 올랐다. 광나루를 건너는데 여섯 살난 장남을 업고 피란 보따리까지 머리에 인 洪여사가 몹시 힘들어 했다. 이때 짐을 헐렁하게 실은 리어카를 끌고 가는 젊은이가 눈에 띄었다.
兄은 東京고등사범 입학기념으로 아버지가 선물한 금시계를 풀었다. 한참을 흥정한 끝에 리어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짐을 풀고 장남까지 태웠다. 장남은 기분이 좋은지 애국가를 불러 댔고, 兄은 아들의 입을 틀어막았다고 한다.
1952년 외무부는 兄을 통상국장으로 데려가더니 그해 7월 駐日(주일)한국대표부 총영사로 내보냈다. 4·19로 잠시 공직에서 물러난 兄은 崔世璜(최세황) 前 국방부 차관, 金貞烈(김정렬) 前 국무총리 등과 어울렸다. 바둑을 둘 줄 모르는 兄은 두 사람이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다가 팔베개를 한 채 잠이 들었다고 한다. 兄은 식사 때 金貞烈 총리 부인이 국수를 말아 오면 두 그릇을 모두 비운 「大食家」다. 이는 兄을 가까이 모시던 申斗淳(신두순) 비서관에게 들은 이야기다.
두 가지 출세 이유
1972년 李厚洛(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 金英柱(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한 7·4 남북공동성명이 일본에 전달되자 일본은 경악했다. 5·16 군사혁명 당시, 「朴正熙는 공산주의자가 아닌가」 하고 혁명정부를 의심한 일이 있었던 일본인들은 朴正熙 대통령이 드디어 공산주의자로서 본성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의심했었다.
兄은 駐말레이시아 대사를 거쳐 1967년 외무부 장관에 올랐고, 1971년 대통령 외교담당 특보로 자리를 옮겼을 때였다.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前 일본 총리를 비롯한 정계 거물들이 그들의 지도자격인 「가야 오키노리(賀屋興宣)」 대장상에게 『일본이 한국에 경제원조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 터에 이런 소문이 나면 곤란하다』면서 『朴正熙 대통령의 철학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줄 사람을 일본에 보내 달라』며 한국 측에 요청했다. 내가 韓·日 중간에서 심부름을 했다.
이러한 일본 정가의 동향을 朴正熙 대통령을 만나 이야기했더니 『아직 駐日한국대사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지 못했다』며 깜짝 놀랐다. 동석했던 공화당 陸寅修(육인수) 의원은 朴正熙 대통령의 철학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은 白南檍(백남억) 공화당 의장일 것이라 생각하고 이에 대한 준비를 하라고 전했다. 당시 東京에 있던 나는 朴대통령이 白南檍씨를 보낼 것으로 알았는데, 정작 온 것은 崔圭夏 대통령 외교특보였다.
나는 어린 시절에 본 兄이 어떻게 朴正熙 대통령의 정치철학을 대변할 수 있을까 의아하게 생각했다. 兄은 일본 국회의원 모임에서 총리를 비롯해 일본 정계인사들을 상대로 남북공동성명에 대한 의미를 심도 있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결과에 만족한 兄은 한턱 내겠다며 나를 「타카무라(篁)」란 日食 요정에 데리고 갔다.
음식점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兄은 기껏 잘해야 학교 교장 정도나 할 줄 알았는데, 어떻게 외무장관을 거쳐서 대통령 외교특보라는 중책을 맡게 됐냐』고 물었다. 兄은 주저하지 않고 『장가를 잘 갔고, 비서를 잘 둔 게 이유』라고 했다.
兄이 외무차관 시절의 일이다. 외무부 과장이 兄집으로 과자상자를 들고 왔다. 영문을 몰랐던 형수는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배가 고프다고 하자 과자를 먹였다. 과자를 다 먹고 나자 바닥에서 돈봉투가 발견됐다. 퇴근한 兄에게 형수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니까, 『지금 진급심사철인데, 난 도와줄 수 없으니 당신이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줘 봐』라고 했다.
형수는 그 길로 총무과장을 불러 돈봉투를 돌려주었다. 兄은 이후로 집으로 돈봉투가 들어온 일도, 나간 일도 없다고 했다. 『관직에 있으면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이 돈인데, 집안에서 내조를 잘 해주니 아무 걱정이 없더라』고 했다.
兄은 『독립운동가 후손을 비서로 두고 있는 것도 내게는 행운』이라고 했다. 나는 놀라서 그 비서관이 한국에 있는 줄 알고 『이름이 뭐냐?』고 했더니, 『曺晩植(조만식) 선생의 외손자인 鄭東烈(정동렬)군』이라며 『정신과 몸가짐이 훌륭하다』고 했다. 형과의 식사를 끝내고 밖에 기다리고 있는 鄭東烈군에게 『상관이 부하를 칭찬하는데 이보다 더한 게 있겠느냐』며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더니, 鄭東烈군이 눈물을 떨구었다.
鄭東烈(曺晩植 선생 외손), 申斗淳(임정 金九 주석 판공실장 申鉉商의 차남) 두 전직 비서관은 兄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35~40년간 한결같은 마음으로 兄의 곁을 지켰다. 兄은 매일 오전 7시만 되면 비서관들에게 전화로 아침 인사를 했다.
兄의 49재 날, 鄭東烈 비서관이 앰뷸런스에 실려가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고 하기에 밤늦은 시각에 서울대병원으로 달려갔다. 兄이 성미가 급한지 49재가 되기도 전에 그의 비서관들을 지하에서 부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崔興洵(최흥순) 비서실장, 申斗淳(신두순) 前 의전비서관 모두 건강이 위태롭다.
사돈을 서울市 교육감 후보에서 탈락시켜
兄은 재임 중 강릉 최씨 門中 사람들을 측근에 두지 않았다. 아마 강릉 최씨라면 실력이 있어도 역차별을 받을 판이었다. 청탁을 하면 도리어 하지 않는 것만 못했다고 한다. 퇴임 후 崔興洵씨를 비서실장으로 두었지만, 재임 중에는 他姓(타성)인 鄭씨와 申씨를 곁에 두었다. 兄이 공직에 있는 동안 兄으로 인해 덕을 본 일가 친척은 눈 씻고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국무총리 시절, 사돈인 徐章錫(서장석) 前 경기高 교장(徐大源 대사의 부친)이 서울市 교육감 후보 1순위로 올라있었다. 兄은 『사돈이 교육감이 되면 총리가 사돈이라 뽑았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오해할 것』이라면서 2순위자가 뽑히도록 했다고 들었다.
兄은 公을 위해 私를 죽인 마지막 선비 대통령이었다. 兄은 朴正熙 대통령의 「문민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能吏(능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농림부 양정과장으로 발탁된 것은 영어를 잘해서 간 것뿐이지, 그는 교육자로 남고자 했을 것이다. 그는 관직에 있을 때, 사람 차별을 하지 않았고, 선생이 제자를 대하는 것처럼 교육적이었다.
삼광누나 崔敬夏씨가 올케 洪基 여사를 만나러 총리 공관에 찾아왔다. 때마침 올케가 당대 최고의 명의인 沈浩燮(심호섭) 박사의 치료를 받고 있었다. 沈浩燮 박사가 명의인 것을 알고 있던 누나가 兄에게 『나도 치료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兄이 『그러시지요』 하면서 옆방으로 가더니 봉투를 하나 들고 나왔다.
兄은 『누님, 沈박사는 국무총리 담당 의사로 총리와 그 아내만을 치료하도록 돼 있으니 다른 병원을 가시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내가 어떻게 해서 (규하를) 경성제일고보를 집어넣었는데 이럴 수 있느냐』며 봉투를 열어본 삼광누나는 다시 한 번 분통을 터트렸다. 봉투 안에는 6만원이 들어 있었는데, 건강보험증이 없었던 삼광누나는 이 돈으로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삼광누나는 나를 찾아와 병원비로 받은 6만원을 내 책상에 놓으며 『너하고는 살아도, 걔하고는 못 산다』고 하소연을 했다. 가톨릭의과대학 설립자의 한 사람이었던 나는 당시 성모병원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원장 金學仲(김학중) 가톨릭의대 교수에게 『나를 업어 주신 누님』이라고 소개하며 진찰을 부탁했다. 성모병원 金원장은 몸소 삼광누나를 모시고 각과를 돌며 진찰을 받게 해주었다. 진찰을 받고 돌아온 누나는 『역시 너밖에 없어』 하고는 사진을 한 장 보여 주었다.
兄이 총리가 되자 신문사에서 崔圭夏의 어릴 적 사진을 달라고 해서 나누어 주었는데 내 사진이 있더라는 것이었다. 사진을 보니 나도 본 적이 없던 사진이었다. 사진에는 어머니(洪榮鎭)와 일찍이 죽은 형 崔鍾夏(최종하), 그리고 작은누나(崔正夏), 나, 그리고 낯선 여자 한 분이 찍혀 있었다.
『이 여자는 누구냐』고 했더니 『그게 나 아니니』라고 했다. 내 아버지 제삿날 묘 앞에서 찍은 사진인데, 삼광누나는 우리 집에서 살다시피 했기 때문에 묘소도 함께 갔던 것이다.
그러나 兄이 인간미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兄이 총리 시절, 중앙청 식당에서 閔寬植(민관식) 당시 문교부 장관과 식사를 하고 있었을 때다. 兄과 閔寬植씨는 경성제일고보 동기동창이다. 먼 발치에서 兄이 우리들에게 다가와 내게 『崔원장 오셨구먼』이라고 했다. 갑자기 존대말을 하자 閔寬植씨가 놀래 『도대체 어떻게 되는 사이냐』고 했다. 兄은 공적인 자리에서는 절대로 집안식구들에게 「해라」를 하지 않았다.
「王은 臣下의 허물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兄은 왜 5공화국 재판 증언대에 서지 않았을까. 당시 나는 성균관박사인 崔在民 선생의 손자로서 兄이 절대로 증언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내가 아는 兄은 유교적 가르침에 따라 「王은 臣下의 허물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켰다고 본다. 兄은 한때 부하였던 全斗煥 당시 보안사령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兄이 저 세상으로 떠나던 날, 경복궁에 차려진 영결식장에 과거 그를 총칼로 위협했던 政敵(정적)들도 함께 자리를 했다. 그는 세상의 和合(화합)을 이루고 떠났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와의 어릴 적 일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제10代 대통령을 지낸 崔 前 대통령을 나는 어린 시절부터 「三光兄(삼광형)」이라고 불렀다. 崔 前 대통령의 가족은 강원도 원주군 원주면 화천리(現원주시 봉산동)에 있는 「三光마을」이란 곳에 살았다. 兄은 1919년 7월 강원도 원주시 옥거리(現 평원동 25번지)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字는 瑞玉(서옥)이라 했다.
崔대통령과 우리 집의 家系
崔대통령의 할아버지는 韓末(한말) 成均館博士(성균관박사)로서 이름 높았던 漢學者(한학자) 崔在民(최재민)이다. 아버지 崔養吾(최양오)는 원주·홍천·정선 등지에서 訓導(훈도)를 지내다 평창·인제 등지에서 郡屬(군속)을 거쳐, 말년에는 원주면장을 지냈다. 할아버지가 성균관박사를 지냈기 때문에 삼광마을에서 宅號(택호)를 「최박사댁」이라고 불렀다.
兄의 조부 崔在民은 갑오경장 직전인 1892년 조선조 마지막 과거시험에 합격했다. 남편이 과거에 급제하고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한양에 머무르자 兄의 조모는 1901년 4월29일 언문편지를 보내 마음에 새겨 두었던 애정을 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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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초봄, 서교동 자택 뜰에서 덩쿨장미를 손질하고 있는 崔圭夏 前 대통령. |
兄이 家寶(가보)로 간직하고 있는 이 언문편지는 조선왕조 시대 사대부 집안 부녀자의 수준을 알 수 있는 名文(명문)이다.
1920년대 원주 치악산 아래 삼광마을에는 강릉 최씨 31세손인 崔在民, 崔在謨(최재모), 崔在鎬(최재호), 崔在武(최재무), 崔在建(최재건), 崔在弼(최재필) 여섯 가족이 가깝게 지냈다. 내 조부는 崔在謨이고 父는 강원도에 잘 알려진, 嘉善大夫(가선대부)를 지낸 崔養浩(최양호)다.
崔在鎬의 아들 崔良洵(최양순)은 원주향교의 典校(전교)를 지냈고, 崔在弼은 中樞院議官(중추원의관)으로 동아학원을 경영했다. 崔在建의 아들 崔養玉(최양옥)은 韓末의 독립운동가로 횡성에서 3·1 운동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나는 崔圭夏 前 대통령의 아버지를 「삼광아저씨」, 崔圭夏 前 대통령을 「삼광형」, 그 누이인 崔敬夏(최경하)를 「삼광누나」라고 불렀다.
兄의 아버지는 兄처럼 키가 크고 얼굴이 길었다. 原州橋(원주교)를 지나 출퇴근할 때면 누구나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할 만큼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일본인들은 삼광아저씨를 두고 『얼굴이 길어 面長(면장)이냐, 면장이라서 面長이냐』고 했다.
10년간 자식이 없다가 낳은 귀한 아들
삼광누나는 兄보다 열 살 위로 원주에서 드물게 이화女中(이화女高 前身)에 입학해 유관순 열사와 함께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兄이 1932년 경성제일고보(경기高 前身)에 입학할 때 삼광누나가 서류를 가지러 원주까지 한달음에 뛰어왔다. 삼광누나는 外家(외가)인 국어학자 李崇寧(이숭녕) 선생을 보증인으로 세워 주었다.
兄의 모친인 전주 이씨가 삼광누나를 낳고 10년간 後嗣(후사)가 없다가 치악산에서 치성을 드려 낳은 게 삼광형이다. 兄의 모친은 늘그막에 본 아들이라 누가 삼광형에게 험담이라도 할까 전전긍긍할 만큼 兄을 끔찍이 생각했다.
兄은 원주공립보통학교 시절 尹心德(윤심덕:1897~1926) 선생에게 음악을 배웠다고 하면서, 「死의 찬미」만 흘러나오면 흥얼거리곤 했다.
兄은 경성제일고보에 진학하면서 서울 종로구 봉익동에 있는 崔在武의 손자(崔鳳夏)댁에서 공부했다. 삼광형은 스무 살이나 손위인 봉하형을 「봉익동 형」이라고 깍듯하게 부르며 따랐다.
兄은 경성제일고보 5학년 때인 1935년, 兄보다 세 살 위인 형수 洪基(홍기) 여사와 혼례를 치렀다.
19세 되던 이듬해,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한 兄은 東京고등사범학교 영문학과에 진학한다. 兄은 경성제대 예과와 東京고등사범 두 학교를 모두 합격했으나, 학비면제였던 東京고등사범을 선택했다. 당시 농사를 지었던 삼광형 집은 가세가 기울어 가고 있었다.
兄이 東京에 유학하고 있을 때, 형수는 남편에게 시집온 여자라기보다 시부모를 모시기 위해 온 사람처럼 살았다. 결혼한 지 이태 만에 시아버지(崔養吾)가 돌아가셨는데, 죽기 전까지 극진하게 대했다. 孝婦(효부)라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어릴 적 붉은 댕기를 매고 시집온 형수를 보고 참 미인이라고 생각했다. 몇 해 전 영결식 때 본 형수의 모습은 세월에 바래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만큼 얼굴이 상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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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원주시 치악산국립공원 龜龍寺에서 열린「崔圭夏 前 대통령」의 49재에서 장남 胤弘씨가 분향하고 있다. |
학비 무료인 東京高師로 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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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겨울 경성제일고보(경기高 前身) 3학년 시절의 崔圭夏 학생. 당시에는 키가 크고 마른 편이었다. |
내가 결혼해 아내를 데리고 서교동 兄댁을 찾아갔던 일이 있다. 짓궂은 兄이 내 아내 앞에서 『너는 코를 중학교 때까지 흘리더니, 언제 코를 안 흘리게 됐니』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고 넘길 이야기지만, 어린 시절 최고의 아킬레스건을 들춰 내 스타일 구기게 하는 소리를 하는 데 대해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서 옆에서 반기던 洪基 여사 쪽으로 화살을 돌렸다. 『(파마 머리를 하고 있던 형수에게) 아주머니는 언제 쪽을 잘랐수?』라고 응수했다.
兄의 막내 여동생이 崔茂夏(최무하)이다. 하루는 내게 와서 兄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崔茂夏는 일제 때 정신대에 끌려갈까 봐 나이가 차기 전 시집을 간 누이다. 그래서 늘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것을 애석해했다.
하루는 오라버니(崔圭夏)가 『올케가 몸이 좋지 않으니 총리관저의 안살림을 해달라』고 해서 큰 책임감을 갖고 갔다고 한다. 그러나 한 달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고 말았다. 본디 검소한 올케가 총리관저 살림이 사치해선 안 된다면서 찬거리를 사는 데 돈을 쓰지 않았고, 음식도 남는 것이 없도록 했다고 한다. 오라버니의 양복도 여유분이 없어 출근할 적마다 다림질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형수는 검소한 여자였다.
東京고등사범학교 재학 시절, 방학 때 원주에 내려온 兄은 한참 아래인 나를 붙들고, 일본 여성에 대한 느낌을 들려주었다. 兄은 東京고등사범 수재니까 여자들이 관심을 갖더라고 했다.
한번은 귤을 먹다가 실수로 물이 여학생 얼굴에 튀었다고 한다. 그 여학생은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兄이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린 틈을 타서 서둘러 닦더라는 것이다. 兄은 『일본 여자는 감추는 아름다움이 있더라』고 했다. 兄이 여자 이야기를 하기에 『일본에서 연애를 하냐』고 했더니 『예끼, 장가를 갔으면 부인에 대한 禮를 지켜야지』라고 했다.
兄은 東京고등사범에 다니면서 방학 때면 선물을 한아름 사들고 왔다. 『돈이 어디서 났느냐』고 물으면 『프랑스말 번역도 하고 통역도 해서 벌었지』라고 했다. 그가 전공인 영어는 잘하는 줄 알았지만 프랑스어까지 하는 줄은 몰랐다. 물론 일어에도 능통하다. 朴正熙(박정희) 대통령 외교특보 시절, 일본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강연하는 것을 들었는데, 격식에 맞는 일어를 구사했다.
광복 후 영어를 잘하는 3인방이 兄을 비롯, 金溶植(김용식) 前 외무부 장관, 金東祚(김동조) 前 외무부 장관이었다.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은 세 사람의 젊은이들을 登用(등용)했다. 兄은 성격처럼 발음 하나, 악센트 하나 조심스러웠다. 바리톤 음색으로 영어연설을 하면 외국인들이 숨소리를 죽였다.
1979년 4월, 兄은 국무총리 자격으로 호주ㆍ뉴질랜드ㆍ인도네시아 3국을 공식 방문했다. 兄이 호주 의회에서 연설을 마치자 말콤 프레이저 호주 총리가 단상에 올라 『崔圭夏 총리께서 「킹스 잉글리시(영국식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니 내가 주눅이 들어 답사를 할 수 없겠다』고 조크했다. 유창하면서도 격식 있는 영어는 외교관에게 커다란 무기였을 것이다.
東京고등사범을 1941년 졸업한 兄은 일본인만 다니는 대구중학 교사로 부임한다. 조선인은 東京고등사범을 졸업하면 조선인 중학교에 가는 게 상례였다. 하지만 兄이 일본인 학교에 보내진 것으로 보아 월등한 실력의 소유자임을 짐작케 한다. 대구는 집안 어른인 독립운동가 秋岡 崔養玉(추강 최양옥) 선생이 복역하던 곳이다.
東京고등사범을 졸업하고 東京에서 귀국한 兄은 원주보통학교 나가누마(長沼) 교장을 인사차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일본인들은 원주의 유력자 집안이나 사범학교 출신자들을 우대했다. 兄은 교장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센세이(선생)」가 아닌 「상(씨)」이라고 호칭을 했노라고 했다. 당시 일본인 교장에게 조선인으로서 「센세이」라고 호칭하지 않은 것은 「혁명적」 발언이었을 것이다. 兄이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 나는 兄의 치기가 발동했다고 생각했다.
兄은 조선총독부 고등문관시험을 보는 대신, 1942년 만주국 고등문관시험에 응시해 합격한다. 兄은 率家(솔가)해 新京(신경·現 장춘)으로 떠나 대동학원에서 연수를 받았다. 대동학원은 만주국 고급관료 연수기관이었다.
兄이 대구중학 교사로 근무한 것은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대구중학을 그만둔 이유는 일본인 사회에서의 차별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여겨진다. 洪基 여사가 쪽을 찌고 있어서 일본 여성들과 금방 구별이 됐기 때문이다.
兄의 어머니 李여사는 남편과 사별하고 딸(敬夏)을 시집 보내자, 아들을 따라 만주로 移住(이주)할 요량으로 집과 땅을 팔았다. 그런데 그 돈을 전부 집안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고 말았다. 이때 兄의 生家(생가)와 땅이 남의 손에 넘어갔다. 그럼에도 兄은 『사기당한 이야기를 하면 한이 없다』며 말문을 닫았다. 일전에 원주市에서 「崔圭夏 生家」를 복원한다고 하기에 兄에게 이야기했더니 『우리 집은 초가집인데 기와집으로 만들어 놓았더라』고 했다. 兄은 솔직하고 청빈한 사람이었다.
兄은 광복 직전 만주에서 장남(胤弘)을 얻었다. 광복이 되자 귀국해 우리 집을 찾아 우리 모친께 인사를 했는데, 갓난아이를 안고 있던 洪基 여사는 자손이 귀한 집에 아들을 낳아선지 얼굴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兄은 서울大 사범대학에서 교편을 잡는다.
이때 사범대 교육학과에 다니던 金大中(김대중) 前 대통령 부인 李姬鎬(이희호) 여사가 兄의 강의를 들었다. 李여사가 내게 『선생님께서 어찌나 영어를 잘 가르치시는지 몰라요』라고 했다. 이 말을 兄에게 전하니 『그래?』 하고 심드렁하게 한마디 했던 기억이 난다.
금시계와 리어카를 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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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주재 한국대표부 참사관 시절의 가족사진. 1957년 당시 崔참사관은 39세, 장남 胤弘은 13세, 차남 鍾晳은 7세, 장녀 鍾惠는 3세 때이다. |
兄은 美 軍政廳의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발탁됐다. 兄은 이때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대구에서 열린 양정과장 회의에 참석하려고 서류를 챙기다가 그만 여의도 비행장에서 이륙하는 연락기(세스나機)를 놓쳤다. 兄은 비행기를 놓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에 갔다.
몇 시간 후 대구의 경북도청에 도착하니 도청 사람들이 『죽었다는 崔圭夏가 어떻게 살아왔냐』고 했다. 세스나機는 추풍령을 넘다 제트기류를 만나 추락해 전원이 사망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兄의 가족은 한강을 건너지 못했다. 인민군들이 장악한 서울을 빠져나가 洪基 여사와 함께 고향인 원주로 피란길에 올랐다. 광나루를 건너는데 여섯 살난 장남을 업고 피란 보따리까지 머리에 인 洪여사가 몹시 힘들어 했다. 이때 짐을 헐렁하게 실은 리어카를 끌고 가는 젊은이가 눈에 띄었다.
兄은 東京고등사범 입학기념으로 아버지가 선물한 금시계를 풀었다. 한참을 흥정한 끝에 리어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짐을 풀고 장남까지 태웠다. 장남은 기분이 좋은지 애국가를 불러 댔고, 兄은 아들의 입을 틀어막았다고 한다.
1952년 외무부는 兄을 통상국장으로 데려가더니 그해 7월 駐日(주일)한국대표부 총영사로 내보냈다. 4·19로 잠시 공직에서 물러난 兄은 崔世璜(최세황) 前 국방부 차관, 金貞烈(김정렬) 前 국무총리 등과 어울렸다. 바둑을 둘 줄 모르는 兄은 두 사람이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다가 팔베개를 한 채 잠이 들었다고 한다. 兄은 식사 때 金貞烈 총리 부인이 국수를 말아 오면 두 그릇을 모두 비운 「大食家」다. 이는 兄을 가까이 모시던 申斗淳(신두순) 비서관에게 들은 이야기다.
1972년 李厚洛(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 金英柱(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한 7·4 남북공동성명이 일본에 전달되자 일본은 경악했다. 5·16 군사혁명 당시, 「朴正熙는 공산주의자가 아닌가」 하고 혁명정부를 의심한 일이 있었던 일본인들은 朴正熙 대통령이 드디어 공산주의자로서 본성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의심했었다.
兄은 駐말레이시아 대사를 거쳐 1967년 외무부 장관에 올랐고, 1971년 대통령 외교담당 특보로 자리를 옮겼을 때였다.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前 일본 총리를 비롯한 정계 거물들이 그들의 지도자격인 「가야 오키노리(賀屋興宣)」 대장상에게 『일본이 한국에 경제원조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 터에 이런 소문이 나면 곤란하다』면서 『朴正熙 대통령의 철학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줄 사람을 일본에 보내 달라』며 한국 측에 요청했다. 내가 韓·日 중간에서 심부름을 했다.
이러한 일본 정가의 동향을 朴正熙 대통령을 만나 이야기했더니 『아직 駐日한국대사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지 못했다』며 깜짝 놀랐다. 동석했던 공화당 陸寅修(육인수) 의원은 朴正熙 대통령의 철학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은 白南檍(백남억) 공화당 의장일 것이라 생각하고 이에 대한 준비를 하라고 전했다. 당시 東京에 있던 나는 朴대통령이 白南檍씨를 보낼 것으로 알았는데, 정작 온 것은 崔圭夏 대통령 외교특보였다.
나는 어린 시절에 본 兄이 어떻게 朴正熙 대통령의 정치철학을 대변할 수 있을까 의아하게 생각했다. 兄은 일본 국회의원 모임에서 총리를 비롯해 일본 정계인사들을 상대로 남북공동성명에 대한 의미를 심도 있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결과에 만족한 兄은 한턱 내겠다며 나를 「타카무라(篁)」란 日食 요정에 데리고 갔다.
음식점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兄은 기껏 잘해야 학교 교장 정도나 할 줄 알았는데, 어떻게 외무장관을 거쳐서 대통령 외교특보라는 중책을 맡게 됐냐』고 물었다. 兄은 주저하지 않고 『장가를 잘 갔고, 비서를 잘 둔 게 이유』라고 했다.
兄이 외무차관 시절의 일이다. 외무부 과장이 兄집으로 과자상자를 들고 왔다. 영문을 몰랐던 형수는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배가 고프다고 하자 과자를 먹였다. 과자를 다 먹고 나자 바닥에서 돈봉투가 발견됐다. 퇴근한 兄에게 형수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니까, 『지금 진급심사철인데, 난 도와줄 수 없으니 당신이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줘 봐』라고 했다.
형수는 그 길로 총무과장을 불러 돈봉투를 돌려주었다. 兄은 이후로 집으로 돈봉투가 들어온 일도, 나간 일도 없다고 했다. 『관직에 있으면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이 돈인데, 집안에서 내조를 잘 해주니 아무 걱정이 없더라』고 했다.
兄은 『독립운동가 후손을 비서로 두고 있는 것도 내게는 행운』이라고 했다. 나는 놀라서 그 비서관이 한국에 있는 줄 알고 『이름이 뭐냐?』고 했더니, 『曺晩植(조만식) 선생의 외손자인 鄭東烈(정동렬)군』이라며 『정신과 몸가짐이 훌륭하다』고 했다. 형과의 식사를 끝내고 밖에 기다리고 있는 鄭東烈군에게 『상관이 부하를 칭찬하는데 이보다 더한 게 있겠느냐』며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더니, 鄭東烈군이 눈물을 떨구었다.
鄭東烈(曺晩植 선생 외손), 申斗淳(임정 金九 주석 판공실장 申鉉商의 차남) 두 전직 비서관은 兄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35~40년간 한결같은 마음으로 兄의 곁을 지켰다. 兄은 매일 오전 7시만 되면 비서관들에게 전화로 아침 인사를 했다.
兄의 49재 날, 鄭東烈 비서관이 앰뷸런스에 실려가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고 하기에 밤늦은 시각에 서울대병원으로 달려갔다. 兄이 성미가 급한지 49재가 되기도 전에 그의 비서관들을 지하에서 부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崔興洵(최흥순) 비서실장, 申斗淳(신두순) 前 의전비서관 모두 건강이 위태롭다.
사돈을 서울市 교육감 후보에서 탈락시켜
兄은 재임 중 강릉 최씨 門中 사람들을 측근에 두지 않았다. 아마 강릉 최씨라면 실력이 있어도 역차별을 받을 판이었다. 청탁을 하면 도리어 하지 않는 것만 못했다고 한다. 퇴임 후 崔興洵씨를 비서실장으로 두었지만, 재임 중에는 他姓(타성)인 鄭씨와 申씨를 곁에 두었다. 兄이 공직에 있는 동안 兄으로 인해 덕을 본 일가 친척은 눈 씻고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국무총리 시절, 사돈인 徐章錫(서장석) 前 경기高 교장(徐大源 대사의 부친)이 서울市 교육감 후보 1순위로 올라있었다. 兄은 『사돈이 교육감이 되면 총리가 사돈이라 뽑았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오해할 것』이라면서 2순위자가 뽑히도록 했다고 들었다.
兄은 公을 위해 私를 죽인 마지막 선비 대통령이었다. 兄은 朴正熙 대통령의 「문민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能吏(능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농림부 양정과장으로 발탁된 것은 영어를 잘해서 간 것뿐이지, 그는 교육자로 남고자 했을 것이다. 그는 관직에 있을 때, 사람 차별을 하지 않았고, 선생이 제자를 대하는 것처럼 교육적이었다.
삼광누나 崔敬夏씨가 올케 洪基 여사를 만나러 총리 공관에 찾아왔다. 때마침 올케가 당대 최고의 명의인 沈浩燮(심호섭) 박사의 치료를 받고 있었다. 沈浩燮 박사가 명의인 것을 알고 있던 누나가 兄에게 『나도 치료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兄이 『그러시지요』 하면서 옆방으로 가더니 봉투를 하나 들고 나왔다.
兄은 『누님, 沈박사는 국무총리 담당 의사로 총리와 그 아내만을 치료하도록 돼 있으니 다른 병원을 가시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내가 어떻게 해서 (규하를) 경성제일고보를 집어넣었는데 이럴 수 있느냐』며 봉투를 열어본 삼광누나는 다시 한 번 분통을 터트렸다. 봉투 안에는 6만원이 들어 있었는데, 건강보험증이 없었던 삼광누나는 이 돈으로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삼광누나는 나를 찾아와 병원비로 받은 6만원을 내 책상에 놓으며 『너하고는 살아도, 걔하고는 못 산다』고 하소연을 했다. 가톨릭의과대학 설립자의 한 사람이었던 나는 당시 성모병원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원장 金學仲(김학중) 가톨릭의대 교수에게 『나를 업어 주신 누님』이라고 소개하며 진찰을 부탁했다. 성모병원 金원장은 몸소 삼광누나를 모시고 각과를 돌며 진찰을 받게 해주었다. 진찰을 받고 돌아온 누나는 『역시 너밖에 없어』 하고는 사진을 한 장 보여 주었다.
兄이 총리가 되자 신문사에서 崔圭夏의 어릴 적 사진을 달라고 해서 나누어 주었는데 내 사진이 있더라는 것이었다. 사진을 보니 나도 본 적이 없던 사진이었다. 사진에는 어머니(洪榮鎭)와 일찍이 죽은 형 崔鍾夏(최종하), 그리고 작은누나(崔正夏), 나, 그리고 낯선 여자 한 분이 찍혀 있었다.
『이 여자는 누구냐』고 했더니 『그게 나 아니니』라고 했다. 내 아버지 제삿날 묘 앞에서 찍은 사진인데, 삼광누나는 우리 집에서 살다시피 했기 때문에 묘소도 함께 갔던 것이다.
그러나 兄이 인간미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兄이 총리 시절, 중앙청 식당에서 閔寬植(민관식) 당시 문교부 장관과 식사를 하고 있었을 때다. 兄과 閔寬植씨는 경성제일고보 동기동창이다. 먼 발치에서 兄이 우리들에게 다가와 내게 『崔원장 오셨구먼』이라고 했다. 갑자기 존대말을 하자 閔寬植씨가 놀래 『도대체 어떻게 되는 사이냐』고 했다. 兄은 공적인 자리에서는 절대로 집안식구들에게 「해라」를 하지 않았다.
「王은 臣下의 허물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兄은 왜 5공화국 재판 증언대에 서지 않았을까. 당시 나는 성균관박사인 崔在民 선생의 손자로서 兄이 절대로 증언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내가 아는 兄은 유교적 가르침에 따라 「王은 臣下의 허물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켰다고 본다. 兄은 한때 부하였던 全斗煥 당시 보안사령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兄이 저 세상으로 떠나던 날, 경복궁에 차려진 영결식장에 과거 그를 총칼로 위협했던 政敵(정적)들도 함께 자리를 했다. 그는 세상의 和合(화합)을 이루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