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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연쇄 인터뷰 (10) 李榮薰 낙성대경제연구소장

민족주의로는 선진화 못 이뤄
자유주의가 민족주의의 代案

배진영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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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독자적인 근대화 역량 없었다. 日帝가 시장경제체제 移植하면서 근대화 시작됐다. 20세기 우리나라의 발전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기인한 것이었다.

李榮薰
1951년 대구 출생. 서울大 경제학과 졸업. 同 경제학 박사. 한신大 경제학과 조교수, 성균관大 교수, 일본 京都大 교환교수, 한국고문서학회장, 한국경제사학회장 역임. 現 교과서포럼 공동대표, 「시대정신」 편집위원. 저서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편), 「조선후기사회경제사」, 「조선토지조사사업의 연구」 등.
「자본주의 맹아론」 對 「식민지 근대화론」
  李榮薰(이영훈·55) 서울大 교수는 『1960년 이래 노동자들의 賃金(임금)은 생산에 기여한 만큼 착실히 성장했으며, 한국은 분배의 모범생이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朴正熙 시대의 경제성장은 노동자들의 低임금에 바탕을 둔 것이며, 경제발전에 따라 빈부격차가 커졌다」는 그간의 통설을 반박한 것이다. 그는 중·고교 교과서의 이념적 편향성을 바로잡기 위해 만들어진 「교과서포럼」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지난 6월에는 뉴라이트재단의 기관지로 再창간된 「시대정신」의 편집위원을 맡았다.
 
  하지만 李榮薰 교수는 뉴라이트 활동가이기 이전에 경제사학자이다. 그는 古文書(고문서) 등을 통해 조선 후기의 경제를 數量的(수량적)으로 분석, 다음과 같이 주장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광복 후 국사학자들이 주장해 온 것과는 달리 조선 후기에는 근대 자본주의의 萌芽(맹아)라고 부를 만한 경제체제상의 발전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19세기의 극심한 경제적 침체를 거쳐 20세기 日帝 식민시대에 들어와서야 근대적 자본주의로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비판자들은 그의 주장을 흔히 「식민지 근대화論」이라고 지칭한다. 그는 현재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産室(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서울大에 있는 李榮薰 교수의 연구실을 찾아갔다.
 
 
  『조선은 환경파괴로 체제 붕괴』
 
李榮薰 교수의 저서들.
  ―雅號(아호)가 耘丁(운정)이시더군요. 누가 지어 주셨습니까.
 
  『漢學者 任昌淳(임창순) 선생님이 지어 주셨습니다. 한국경제사를 연구하는 제게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연구하라」는 의미에서 지어 주셨습니다』
 
  「김맬 운(耘)」 자에 「사내 정(丁)」 자니, 전국방방곡곡을 다니면서 古文書를 찾아내고, 거기에 나타난 조선후기의 경제사정을 연구해 온 그에게는 안성맞춤인 아호다.
 
  ―한국고문서학회 회장을 지내셨던데, 경제학자로서 고문서학회장을 지내셨다는 것이 조금 뜻밖입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現 한국학중앙연구원)과 함께 전국 13개 마을에 전래되어 오는 「契冊(계책)」에 기록된 쌀값·물가·이자율 등을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고문서학회 회장을 지냈습니다』
 
  ―「계책」이 뭔가요.
 
  『마을 사람들로 구성된 洞契(동계)나 친족으로 구성된 族契(족계)에서 수입과 지출을 기록한 책입니다. 구성원의 이동이 적고 宗法(종법)원리가 잘 지켜지는 同族집단이 발달했던 전라도나 경상도 지역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전남 영암의 文씨 일족의 족계 「用下記(용하기)」는 1740년에 만들어지기 시작해서 200년 이상 이어져 왔습니다』
 
  ―족계 등을 통해 본 조선 후기의 경제실태는 어떻든가요.
 
  『우선 토지의 실질 가치가 하락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띕니다. 이는 토지의 생산성이 하락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지난 6월20일 뉴라이트재단 창립기념 리셉션에 참석한 李榮薰 교수(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소유권 제도 不在가 산림 황폐화 촉진』
 
  ―토지의 생산성이 하락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山林의 황폐에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에서는 18세기 후반부터 산림이 황폐해지기 시작해서 19세기 말에는 많은 산들이 민둥산이 되었습니다. 「클랩스」라는 책을 보니, 문명이 소멸하게 되는 주요 원인을 환경파괴에서 찾고 있더군요. 조선은 경제적 번영과 이에 따른 인구증가, 인구증가로 인한 환경파괴로 인해 체제가 붕괴한 대표적인 사례일 것입니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山地(산지)를 農地(농지)로 개간하다 보니 산림이 파괴된 것인가요.
 
  『조선 초기만 해도 쌀은 상류층에서만 소비했습니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조가 主穀(주곡)이었습니다. 그런데 쌀에는 일종의 「주술성」이 있어서, 「쌀을 먹어야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17세기 이후 쌀이 주곡이 되면서 농지 개간이 확대되었고, 18세기에는 지리산 등지에 「다락논」이 등장했습니다. 산림의 파괴는 온돌의 보급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온돌은 古代부터 있어 온 것 아닙니까.
 
  『온돌이 전국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이후였습니다. 이전에는 북부지방이나 의료시설에서나 쓰였는데, 18세기 이후 남부지방까지 보급되었습니다. 온돌의 보급과 함께 연료채취를 위해 나무를 베어 내면서 산림이 황폐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조정에서도 산림 황폐에 대해 많은 우려를 했지만, 대책을 마련하지는 못했어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산림에 대한 소유권 제도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유권 제도요.
 
  『조선시대에는 산소에 딸린 산림을 제외하고는 산림에 대한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글자 그대로 「無主空山(무주공산)」이었던 것이죠.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 내기만 했지, 심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公有林(공유림)은 황폐해지게 마련입니다. 우리나라는 화강암이나 현무암 지질이어서 지표층이 얕아 水害(수해)가 나면 쉽게 흙이 휩쓸려 나가고, 산림이 한번 황폐해지면 복구가 어렵습니다.
 
  일본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같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 문제를 마을 단위로 산림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해 주고, 나무를 베어 낸 만큼 반드시 심도록 하는 것으로 해결했습니다』
 
 
  『혁명이 「역사의 진보」 의미하지 않아』
 
   ―「조선 후기에는 근대 자본주의의 맹아라고 부를 만한 경제체제상의 발전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19세기 극심한 경제적 침체를 거쳐 20세기 日帝 식민시대에 들어와서야 근대적 자본주의로의 발전이 시작되었다」는 교수님의 주장은, 어떻게 보면 日帝시대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했던 「停滯性論(정체성론)」과 일맥상통하는 것 아닙니까.
 
  『日帝 식민사학자들의 「정체성론」은 「조선은 영원한 정체사회다」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들이 19세기 조선사회의 정체만을 가지고 그런 주장을 편 것은 잘못입니다. 조선은 1630~1770년 장기간에 걸쳐 경제발전과 안정을 이루었습니다』
 
  ―그 시기 경제발전은 어떻게 가능했었습니까.
 
  『한마디로 「對外무역 발달」 덕분이었습니다. 17세기 중반 淸나라는 明의 遊民(유민)들이 점거한 臺灣(대만)을 봉쇄하기 위해 해상무역을 금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필요로 하는 중국산 絹織物(견직물)을 수입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중계무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중계무역을 통해 조선은 막대한 銀(은)을 벌어들였습니다』
 
  ―19세기에 그 이전 시대보다 후퇴했다니, 충격적이네요.
 
  『저도 「역사발전에 후퇴는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만, 역사는 지도자와 국민의 선택에 따라 발전할 수도, 후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조선 역사에서 경제 사정이 가장 안 좋았을 때는 언제입니까.
 
  『1880년대가 가장 심각했을 것입니다. 이후 서서히 회복돼 1911년에는 1인당 GDP가 60달러(1936년 가격 기준) 정도 되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日帝시대의 경제발전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연간 2% 정도였습니다. 1910년에서 戰時 경제체제下에 들어가게 되는 1940년까지 총 GDP는 2.7배 성장했습니다. 이는 20세기 前半(전반)의 경제성장률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日帝시대가 경제사적 의미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중요한 것은 質的(질적)변화였습니다. 한반도를 영구 합병하려 했던 日帝는 일본의 法制(법제)를 한반도에 移植(이식)했습니다. 1915년 日帝는 「朝鮮民事令(조선민사령)」을 頒布(반포)했습니다. 조선민사령은 1899년 제정된 일본 民法에 바탕을 둔 것인데, 이 조선민사령의 시행으로 한반도에 私有재산제와 근대적 시장경제제도가 성립하게 됐습니다』
 
  ―日帝시대에 경제발전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들을 위한 것 아니었습니까.
 
  『물론 대부분의 收益(수익)은 일본인들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렇다고 조선인들이 법제적으로 차별받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日帝, 私有재산제와 시장경제 利殖』

 
  ―高校 시절 국사 시간에 「총독부는 會社令(회사령)을 제정해서 조선인들의 기업 설립을 막았다」고 배웠습니다. 이건 조선인들을 경제활동의 영역에서 차별한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1910년대까지 조선인들이 세운 회사는 「자본의 결합」인 근대적 의미의 회사가 아니라, 「상인조합」에 가까운 人的(인적) 결합이었습니다. 한편 韓日합방 이후 일확천금을 꿈꾸는 浪人(낭인)들이 건너와 謀利(모리)행위를 일삼았습니다.
 
  회사령은 이러한 상황을 정비하기 위해 회사 설립의 자격요건을 규정하고 신고토록 한 것이었습니다. 이때는 한반도에 대한 日帝의 경제발전 의지가 본격화되기 전이었습니다. 그나마 회사령은 1920년에 폐지되었습니다』
 
  ―법제적으로는 일본인과 조선인들 간에 차별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인 차별은 있었잖습니까.
 
  『일본인들이 경제발전을 주도하는 것이기는 해도, 형식적 평등이 보장되는 상황 아래서 조선인들에게는 그 이전 시대에 비해 많은 성취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1940년에 이르러 조선인 기업가들은 5000명에 달했습니다.
 
  남자 아동의 국민학교 취학률은 60%에 달했고, 중학교육에 대한 수요가 폭발하면서 年 3만~4만 명이 일본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특히 취학률의 증가는 경제성장이 없이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경제사정이 나쁘면 애들을 일시키지 학교에 보냅니까?』
 
  ―日帝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토지를 약탈한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日帝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토지의 40%를 약탈했다는 것은 1967년경 연세大 모 교수가 근거 없이 주장한 것이 교과서에까지 들어갔던 것입니다. 「日帝가 토지를 신고하도록 하고, 기간 내에 신고하지 않은 토지들을 빼앗았다」고 하는데, 이건 「누워서 침뱉기」式의 이야기입니다.
 
  「토지는 사람의 命脈(명맥)」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소중한 토지를 「신고」가 뭔지 몰라서 日帝에 빼앗겼다는 주장은 우리 민족을 한없이 선량한 愚民(우민)으로 그리는 것일 뿐입니다. 일본인들은 한반도 전체 논 면적의 14% 정도를 소유했을 뿐입니다. 이상화 詩人(시인)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했지만, 여기서 「빼앗긴 들」은 「국토」일 수는 있어도 「농토」는 아니었습니다』
 
 
  『토지의 40% 약탈은 근거 없는 주장』
 
동사무소에서 토지조사 신고를 받는 모습.
  ―日帝의 강제동원은 어떻습니까.
 
  『日帝가 650만 명을 강제동원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징병 10만 명, 군속 12만 명, 官에 의해 알선·징용된 사람 70만 명 정도였습니다. 그 밖에 「근로보국대」라고 해서 학생과 국민들을 努力(노력)동원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예전에 재해時 지방자치단체에서 주민들을 동원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노예적 강제연행」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무리입니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日帝시대의 공업시설이나 기업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光復 이후 설립된 공장과 기업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日帝시대에 한반도 남쪽에는 약간의 경공업과 소규모 기계공업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공업기반이 없었고, 그나마 분단으로 인한 타격이 컸습니다. 하지만 日帝가 구축한 시장경제제도는 남았습니다.
 
  日帝末의 戰時체제가 사라지자, 시장경제체제가 복구되었습니다. 日帝시대에 경험을 쌓은 多數의 기업가와 테크노크라트들이 남았습니다. 이들을 바탕으로 경제개발에 대한 의지를 가진 정부가 들어서면서 경제발전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日帝는 한국땅에 물질적 시혜는 남기지 않았지만, 私有재산제를 남겨 놓았습니다』
 
  ―북한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1946년 현재 북한에는 800여 개의 공장이 있었는데, 그중 200여 개는 종업원 500명 이상의 대공장이었습니다. 종업원이 수천 명인 공장들이 꽤 있었습니다. 1인당 電力(전력) 생산이나 철도의 길이는 일본보다 높았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1946년 일본법제를 폐지하면서 사유재산제를 폐지했습니다. 북한은 광복 후 800여 명의 일본인 기술자들을 억류하고 있었는데, 이들 모두 1955년까지는 귀국했습니다. 북한땅에는 군수공업만 남게 된 것입니다. 6·25로 공장이 파괴되었다 해도, 부서진 시설을 복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1958년 이승기 박사가 비날론을 만들어 낸 함흥질소비료공장은 日帝시대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1950~1960년대 북한의 경제성장은 일본이 남기고 간 시설 덕분이었습니다. 북한은 日帝로부터 物的 시설을, 남한은 人的 자원과 제도를 물려받은 셈입니다』
 
 
 
李榮薰과 국사학계의 갈등

 
  ―日帝의 침략이 없었을 경우, 대한제국이 독자적으로 근대화를 이룩할 가능성은 없었다고 보십니까.
 
  『전혀 가능성이 없었다고 봅니다. 일례로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된 후 1899년에 반포된 「대한국 國制(국제)」를 보세요. 9개조에 불과한 그것을 근대적 헌법이라고 보기는 어렵거니와, 「君權(군권)은 無限(무한)하다」 고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近代를 향한 어떠한 가능성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대한국 국제」를 읽으면서 너무 슬펐습니다. 결국 개항기 30년 동안 근대화를 위한 어떠한 통합적·체계적 대응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여튼 식민사관 극복을 위해 노력해 온 국사학계에서는 교수님의 주장을 못마땅해하는 것 같더군요.
 
  『정치적 편견으로 가득한 日帝의 정체성론도 잘못이지만,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 사학계를 풍미해 온 「內在的 (내재적) 발전론」도 잘못입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민중사학에서는 19세기를 「밝은 사회」로 묘사하면서, 19세기에 있었던 民亂(민란)과 東學亂(동학란) 등을 「역사의 발전」으로, 시민계급의 성립으로 이해합니다. 이는 잘못입니다.
 
  법과 제도에 의해 정상적인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폭동이나 혁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프랑스나 러시아에서는 영국에서처럼 타협과 개량주의에 의해 발전하지 못해 혁명이 일어났지만, 혁명이 곧 역사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혁명은 역사발전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
 
  ―젊으셨을 때도 그런 생각을 하신 것은 아니겠죠.
 
  『대학 시절에야 민족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것들이 공기와 같은 것이었죠. 대학에 입학한 뒤 이론경제학회에 가입해서 西歐혁명이나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했습니다. 당시 대학가에는 강물 밑바닥에서 소리 없이 물이 흐르듯이 세계를 유물변증법으로 이해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적 역사인식에서 빠져나온 것은 언제쯤이었습니까.
 
  『저는 비교적 일찍 빠져나왔어요. 1979년경부터 奎章閣(규장각) 史料(사료)들을 가지고 18, 19세기 조선시대 경제를 공부하게 됐는데, 그러면서 어느 정도 현실과 떨어져서 생각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생겼어요』
 
  ―주체사상이나 북한에 대한 관심은 없었습니까.
 
  『1980년대 초에 일본의 「구로다 도시오」라는 역사학자가 1977년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일본의 「역사평론」이라는 잡지에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북한역사연구소장 허정호가 「북한은 역사발전 5단계를 모두 거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이라고 얘기하는 것을 듣고, 「이 사회에 역사는 없다」고 생각했다더군요.
 
  그때는 이탈리아 공산당 등에서 현실공산주의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을 때였는데, 그런 글을 읽고 나니 북한에 대해서는 환상을 갖지 않게 되더군요』
 
  李교수는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인식이 결정적으로 바뀌게 된 것은 1987년 大選을 앞두고서였다』고 말했다.
 
  『26년간의 개발독재를 청산해야 하는 마당에 金泳三씨와 金大中씨가 분열을 하더군요. 인간의 욕심과 사회적 正義(정의)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金大中씨를 지지했어요. 어느 날 택시를 타고 가는데, 라디오에서 金大中씨가 유세를 하면서 남북통일을 얘기하는 것이 나오더군요. 그런데 운전기사가 「전라도, 경상도를 갈라 놓으면서, 통일 얘기를 하나」라고 말하더군요. 그때 「역사는 名分(명분)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얼마나 협동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문명은 협동이다」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역사는 名分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국사학계는 여전히 名分이 지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채호類의 민족주의 史學은 中世 성리학적 史學을 變用(변용)한 것으로 실증보다는 명분을 중시하는 것이었습니다. 1930년대 이후 근대과학으로서 史學이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랑케的 의미에서의 근대적 實證主義(실증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사학계의 흐름과는 달리 민족주의에 대해 비판적이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
 
  『저는 奴婢史(노비사)에 대한 연구로 출발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인구의 최대 40%가 노비였고, 노비에 대해 극심한 차별이 존재했습니다. 경북지방의 古문서들을 보면, 최고 757명의 노비를 거느린 양반가도 있었습니다. 노예제가 폐지되기 전 미국 남부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도 노예를 200명 이상 소유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신분제 사회에서는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라는 의미에서의 「근대적 민족」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日帝시대에 사회적 해방이 이루어지면서, 진심으로 日帝에 협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日帝가 물러난 후 미국이 이 땅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는 식의 역사인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국의 지배체제를 舊제국주의 시대와 구분하지 않는 것은 잘못입니다. 미국은 식민지가 필요 없는 나라입니다. 미국은 자유주의적 통합으로 헤게모니를 유지하려는 문명화된 형태의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입니다. 그런 「문명적 토대」 아래서 대한민국이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은 1970년대까지 한국에 100억 달러 이상의 원조를 했지만, 한국을 지배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일부에서는 미국에 대한 代案으로 중국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중국은 우리와는 향유하고 있는 「문명적 토대」가 다른 나라입니다. 중국에 진출한 기업 가운데 성공한 기업이 없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중국으로의 접근은 자기의 출생의 原籍(원적)을 바꾸는 것이 다름없는 일입니다』
 
 
  『朴正熙 시대의 성장요인은 해외에 있었다』
 
朴正熙 시대의 경제발전은 노동력 착취가 아니라 해외 수출시장의 개척에 의한 것이었다. 사진은 공단을 시찰하는 朴正熙 대통령.
  ―朴正熙 시대의 경제발전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朴正熙 시대의 경제발전은 고전적 자본주의 발전과는 달리 노동착취를 통해 성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朴正熙 시대에는 노동자들의 임금이나 노동이동을 제약하는 제도가 없었습니다. 朴正熙 시대의 성장요인은 해외에 있었습니다. 해외시장을 상대로 수출지향적인 경제발전 정책을 폈고, 그 시절 해외의존도는 80~100%에 달했습니다』
 
  ―朴正熙 시대의 해외지향적 경제정책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진 것입니까.
 
  『朴正熙 정권 초기에는 해외지향적 경제정책에 대한 확고한 플랜이 없었습니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야심차게 내놓았던 1962년 경제는 大실패를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1964년에 이르면 당초 예상의 2배에 이를 정도로 수출이 잘 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이 중공업화를 하면서 경공업 분야의 경쟁력을 상실하게 됐고, 우리나라에 자연스럽게 기회가 오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朴正熙 정권은 그 기회를 잘 포착한 것입니다』
 
  ―당시 수출지향적 경제정책에 대해서는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지요.
 
  『市場(시장)에 있던 사람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어도 수출에 우리의 활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全세계적인 市場구조가 우리에게 그런 기회를 제공해 준 것이었습니다. 그걸 몰랐던 것은 대학이나 언론에 갇혀 있던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럼 朴正熙 대통령은 세계 경제의 흐름에 편승했을 뿐인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朴대통령은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특히 중화학공업 건설과 새마을운동을 추진한 것은 朴대통령의 공로입니다』
 
  ―오늘날 피폐해진 농촌을 보면, 「새마을운동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새마을운동은 당시 필요한 운동이었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오늘날 농촌이 피폐해진 것은 1980년대 이후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었습니다. 농촌에 아직 인구가 남아 있을 때 농촌에 농업 이외의 다른 산업을 건설하면서, 「농업」 정책이 아닌 「농촌」 정책으로 전환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습니다』
 
 
  『문명의 北方한계선 확장하는 통일』
 
  ―광복 이후 대한민국이 이룩한 정치적·경제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부정되고, 국가보다는 민족에 귀속감을 느끼는 국민들이 많은 것을 보면, 대한민국이 결국은 「네이션 빌딩」에 실패한 것이 아닙니까.
 
  『실패했다기보다는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번영은 그 가운데에 실패와 붕괴의 癌的(암적)요소를 내포하고 있게 마련입니다』
 
  ―교수님은 민족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우리 민족끼리」, 「통일지상주의」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통일은 우리의 至上(지상)과제라고 할 수 없습니다. 先進化(선진화)로 가는 여러 가지 선택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사회의 문명적 기초가 다르면 귀신도 통합할 수 없습니다. 북한이 중국 수준으로의 개혁이라도 해야 통일을 논의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통일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의 北方(북방)한계선을 확장하는 의미에서의 통일이어야 합니다.
 
  20세기 우리나라의 발전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민족주의로는 선진화로 나갈 수 없습니다. 자유주의가 민족주의 代案(대안)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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