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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비망록] 李範俊·朴定洙 부부의 교유기

우리 부부가 만난 한국 현대사의 거물들
朴正熙·丁一權·金載圭…

김성동    ksd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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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준
1933년 서울 출생. 경기女高 졸업. 美 켄터키주립大 정치학과 졸업. 美 아메리칸大 대학원 정치학 석·박사. 이화女大교수, 9代 국회의원, 성신女大 교수, 한국정치학회 회장 역임.

박정수
1932년 경북 김천 출생. 경기高 졸업. 美 조지타운大 졸업. 美 아메리칸大 대학원 석·박사. 美 한인유학생회 회장, 국무총리특별보좌관, 10·11·13·14代 국회의원, 명지大 교수, 국제의원연맹(IPU) 집행위원회 부위원장, 국민회의 부총재, 외교통상부 장관 역임.
부부 정치학 박사 1호
  李範俊(이범준·72) 前 성신女大 정외과 교수가 최근 남편 朴定洙(박정수) 前 외교통상부 장관과 함께했던 52년 동안의 생활을 기록한 회고록, 「함께 못 다 부른 노래」(경제풍월 刊)를 펴냈다.
 
  朴 前 장관은 2003년 3월 대장암 투병 중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의 부제는 「국내 부부 정치학박사 1호 박정수 의원과 이범준 교수 회고록」이다. 정리는 산 자의 몫이 됐지만 내용은 죽은 자와 산 자의 공동 기록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李씨는 지난 7월14일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이 책에는 두 사람의 만남에서 死別(사별)까지의 개인적 기록뿐만 아니라 국내 정치의 이면들이 기록돼 있다.
 
  두 사람은 1949년 가을, 서울 장충동 소재 경동교회에서 처음 만났다. 경기女高 4학년(6년제 시절)이었던 여학생과 경기高 6학년이었던 남학생으로 만났다. 당시 李교수는 만 16세, 朴장관은 만 17세였다.
 
   경동교회 목사로서 기독학생 모임을 이끌던 姜元龍(강원용·前 크리스찬아카데미 이사장·방송위원장) 목사는 그 남학생에 대해 『정수는 이 다음에 크게 될 인물』이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
 
  李교수는 키가 크고 얼굴이 흰 朴장관에게 호감을 가졌다. 이듬해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부산으로 피란을 간 두 사람은 그곳에서 사랑을 키워 나갔고, 각각 19세와 18세가 되던 해에 장래를 약속했다.
 
  1952년 2월 이화女大에 입학한 李교수는 그해 9월 화물선에 몸을 싣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다음해인 1953년 2월 연세大에 다니던 朴장관도 화물선을 타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957년 두 사람은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는 당시 뉴욕에서 신학대학원에 다니고 있던 姜元龍 목사가 맡았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업을 이어 가고 있는 중에 두 사람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미국 공보처에서 한국 텔레비전에 보내는 프로그램 제작을 맡아 달라는 제의였다. 부부가 직접 출연한 방송이 한국으로 보내지기도 했다.
 
1965년 6월, 같은 날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5·16 후 朴正熙(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두 사람은 유학생 대표로 대사관 주최 리셉션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을 알아본 朴대통령은 『텔레비전에서 보았다』며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면 함께 일하자』고 했다. 유학생활 중 두 사람은 유학생 대표로서 駐美(주미)대사로 나와 있던 丁一權(정일권) 前 국무총리 등 훗날 국내 요직을 맡았던 인사들과 교류하게 된다.
 
  1965년 6월 두 사람은 나란히 미국 아메리칸大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내 부부 정치학 박사 1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박사학위를 받자마자 두 사람은 1965년 9월 귀국했다.
 
  두 사람의 귀국은 「대한 늬우스」에 소개됐다.
 
  朴 前 장관은 丁一權 총리특보로, 李교수는 이화女大 정외과 교수로 한국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李교수는 1973년에 「유정회」 소속으로 9代 국회의원이 됐다.
 
  1979년 무소속으로 10代 국회의원이 된 朴 前 장관은 11·13·14·15代 국회의원을 지내고 金大中 정부 시절에는 초대 외교통상부 장관이 된다.
 
워싱턴 D.C. 파운드리 교회에서 올린 결혼식. 1957년 4월14일.
  朴 前 장관의 이력만 간략히 언급하면 그는 정치인으로서 평탄한 길을 걸은 것처럼 보인다. 화려해 보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李교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이는 朴正熙 정권 때는 丁一權 사람이어서, 全斗煥 대통령 때는 金載圭 사람이라서, 金泳三 정권 때는 朴泰後 사람으로 분류돼 기피인물로 지냈어요. 그가 가졌던 큰 꿈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거죠』
 
  朴 前 장관은 金大中 정부 시절 5개월여 만에 외교통상부 장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金大中 정부 최단명 장관이다. 朴 前 장관이 물러나게 된 이유는 한국과 러시아 간에 벌어진 외교분쟁 때문이다. 이 분쟁은 1998년 7월 초 국가정보원이 파견한 駐러 한국대사관 참사관이 러시아 외교부 간부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러시아 당국에 체포된 후 추방되자, 한국정부도 駐韓 러시아대사관 참사관을 맞추방하면서 벌어진 사건이다.
 
  李교수는 이 사건을 『청와대와 국정원이 단독 결정한 정책을 위해 외교부가 아무 권한이나 충분한 자료 없이 대리전을 치르다가 공개적으로 책임만 뒤집어쓰게 된 전형적인 사례』라고 비판한다. 당시 국정원장은 朴장관의 절친한 후배였던 李鍾贊(이종찬)씨였다.
 
  朴 前 장관은 장관직에서 물러난 1년 반 후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후 3년 3개월여의 암투병 끝에 2003년 세상을 떠난다.
 
  『그이가 돌아가신 후 강영훈 前 총리가 빈소를 두 번씩이나 찾아와서 그러시더라고요. 「장관만 안 했어도 암에 걸리지는 않는 건데」라고 말이죠. 제 생각도 그래요』
 
 
  남편이 떠난 빈 자리
 
   대화 중 남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李교수는 울먹였다.
 
  『남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했으면서 아직도 무슨 그리움이 그리 남았느냐고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아요. 아직도 그 양반이 곁에서 만져지는 것처럼 느껴지는걸요』
 
  李교수와 朴 前 장관 부부는 1973년에 당시 열 살이던 딸(성연)을 뇌암으로 잃었다. 성연이의 암투병기는 「엄마가 없는 너의 천국엔」으로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1991년에는 딸 성연이를 기리는 「박성연 장학회」를 설립해 학기마다 25명의 학생들을 선발해 장학금을 지급해 왔다.
 
  李교수는 『성연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슬픔을 나눌 남편이 있었지만,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슬픔을 혼자 다 떠안아야 했다』는 말로 남편이 떠난 빈자리의 크기를 설명했다.
 
  568페이지에 달하는 李교수 부부의 회고록 「함께 못 다 부른 노래」에는 朴 前 장관의 암투병기와 함께 陸英修 여사, 丁一權 前 국무총리 등 두 사람이 교류했던 당대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의 인연들이 기록돼 있다.
 
  朴正熙 정권 시절, 朴 前 장관은 『귀국 후 당시 丁一權 국무총리부터 찾아간 것을 「운명의 장난」이었다』고 말한다. 미국을 방문했던 朴대통령이 「귀국하면 찾아오라」는 말대로 청와대를 먼저 찾아갔다면 朴장관의 운명이 180。 바뀌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丁一權의 사람」으로 알려지면서 10代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출마해야 했을 정도로 권력에서 배제됐다.
 
丁一權 총리와 남편 朴定洙 씨
  ― 귀국 후 청와대로 먼저 갈 수 있었는데 왜 총리실로 먼저 찾아갔습니까.
 
  『그 양반의 운명이었죠. 아마 청와대로 먼저 갔다면 朴대통령의 사람으로 알려졌겠죠. 별다른 뜻으로 총리실에 먼저 간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됐어요. 가는 날 바로 丁총리가 비서실장을 불러서 「朴박사가 내일부터 내 특별보좌관으로 일할 수 있게 만들어 보라」고 했고, 그래서 곧바로 총리실에서 일하게 된 겁니다』
 
  ― 丁一權 총리의 품성은 어땠습니까.
 
  『부부 동반으로 자주 뵈었는데 항상 웃는 얼굴이었죠. 재미가 없는 분이죠. 이야기를 하다 보면 누구 흉도 보고 그래야 재미있는데(웃음). 그냥 심심한 분이었어요. 남편은 그분한테 「남 얘기 절대 안 한다. 약속 시간은 철저히 지킨다」는 걸 배웠다고 해요. 그분은 항상 약속 시간보다 20~30분 일찍 나온답니다. 그분의 무색무취는 당시의 정치적인 배경 속에서는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처신이었다고 봐요』
 
  ― 丁총리와 李교수님이 특별한 사이라는 소문도 있었다면서요.
 
  『(웃음) 丁총리가 외국에서 손님이 오면 저희 부부를 불렀어요. 당시 외국 손님과 함께 주로 가던 곳이 조선호텔 나이트클럽이었는데 거기서 춤도 추고 그랬어요. 친구 교수 중 한 명이 「丁총리가 여자관계 소문이 많으니까 조심하라」고 했지만 그거야 말로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는 경우였어요. 항상 부부 동반이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죠』
 
 
  무소속 출마로 공화당 거물을 꺾다
 
   1978년 말 朴장관은 고향인 경북 김천에서 10代 국회의원에 무소속으로 출마한다. 공화당 공천을 원했지만 중학교 은사였던 金載圭(김재규) 당시 중앙정보 부장은 朴장관에게 무소속 출마를 권했다.
 
  『우리는 돈도 없고 고향의 사조직도 공천을 받는 게 났다고 해서 제가 김재규 부장에게 도움을 청했어요. 그런데 부인을 통해서 「각하가 의리상 백남억 의장 공천을 안 줄 수 없는 상황이다. 무소속으로 뛰는 게 좋겠다」는 전갈을 보내왔어요. 서운하기는 했지만 朴대통령에 대해서 함께 정치한 사람에게 마지막 배려까지 해주는 의리 있는 분이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어요』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朴 前 장관은 공화당 의장을 역임한 당대의 정치 거물 백남억씨를 제치고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 가까이에서 본 金載圭 부장의 성격은 어땠습니까. 10·26 사건을 벌인 걸 보면 욱하는 성질이 있는 것 같은데요.
 
  『적어도 우리와 접촉에서는 그런 모습은 볼 수 없었어요. 진지한 성격이었죠. 부마 사태가 발생했을 때 우리 부부를 만난 자리에서 「민심은 천심인데」 하는 말을 했어요. 저는 「어머, 저분이 어떻게 저런 말을 하나」 했어요. 당시 그런 말은 못 하죠. 그게 이 정부가 잘못하고 있다는 말 아니에요? 그 말을 듣고 우리 부부가 많이 놀랐어요』
 
  ― 10·26 전에 그런 말을 한 걸 보면 金부장이 사건을 당일 그 자리에서 우발적으로 일으킨 게 아니라 사전에 많은 고민을 하고 감행했다는 이야기로 들리는데요.
 
  『저는 고민한 것으로 봐요. 우리 부부는 나중에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분이 고민을 했어」 이렇게 결론을 내렸어요. 「민심이 천심」이란 말을 그 시절 그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감히 이야기를 합니까. 金부장을 만나고 집에 와서 남편이 「어디 가서 金부장의 그런 말 전하지 말라」고 입단속을 시킬 정도였어요. 그래서 제가 일기장에 기록까지 해놨던 거예요』
 
  ― 10·26 사건 후에 金載圭 부장의 가족을 만난 적이 있다면서요.
 
  『金부장 돌아가시고 10년쯤 후에 댁으로 찾아가서 사모님을 뵈었어요. 예전에도 그분은 우리가 방문하면 차만 내놓고 방으로 들어가는 조용한 분이었어요. 남편이 뭘 어떻게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지내는 그야말로 현모양처 스타일이죠』
 
  ― 요즘도 만나십니까.
 
  『같은 미용실을 다니기 때문에 어쩌다 만나는데 언제 식사 대접을 하겠다고 하면 「나는 밖에 안 다니잖아요」 하는 말로 정중하게 거절하죠. 너무 조용한 분이에요』
 
  ― 陸英修 여사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습니까.
 
  『제가 귀국 후 신문에 칼럼을 쓰고 방송 토론회에도 나가고 그랬어요. 한번은 제 글을 보고 직접 전화를 걸어 왔어요. 「청와대에 한번 놀러오지 않을래요?」 하고 말이죠.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진출하기 전이죠』
 
  ― 자주 만나셨습니까.
 
  『陸여사께서 가끔 불러서 청와대에 가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대해 물으셨어요. 그때마다 저는 솔직하게 여론을 전달해 드렸어요. 한번은 서울大 최종길 교수가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陸여사의 얼굴이 굳어지면서 다시 최종길 교수의 이름을 묻고 제가 들은 이야기를 다시 물으면서 꼼꼼하게 적더라고요.
 
  그 얼마 후 제게 직접 전화를 걸어 와서는 「내가 알아보니까 고문사가 아니라 자살을 했다네요」 하시더라고요. 물론 공무원들의 해명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꼭 챙겨 본다는 점이었죠』
 
  ― 朴대통령에 대한 내조도 지켜볼 수 있었겠네요.
 
  『샅샅이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어요. 청와대內에서 나름대로 야당 역할을 하신 것 같아요. 내조도 잘 하신 것 같아요. 한 예로 지도자는 제한된 사람들만 만나면 오해를 받기 쉽기 때문에 골프를 치러 가실 때도 늘 같은 사람들하고만 나가시지 말고 돌아가며 초대하라고 조언을 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朴正熙 가족과의 인연
 
朴正熙 대통령과(1973년)
  ― 朴대통령을 직접 대면하신 적은 있습니까.
 
  『있죠. 한번은 9代 때 여성의원 3명이 가족법 관계로 청와대에 가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대통령이 퇴근을 하셔서 함께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어요. 그 자리에서 제가 朴대통령에게 「다음에는 저 말고 남편을 기용해 주세요」 했는데, 곁에 있던 陸여사가 「박정수 박사 잊지 말고 기억해 주세요」 했는데도 안 됐어요. 2기 때도 제가 됐잖아요. 그때부터 朴대통령이 미웠어요(웃음)』
 
  ― 많이 미웠습니까.
 
  『아니에요. 저는 朴대통령을 좋아하는데 그분은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소질이 있어요. 저는 텔레비전 토론회에 나와서 정부를 무조건 옹호하지 않았어요. 미국에서 교육 받은 민주주의 원칙대로 거기서 어긋나는 점에 대해서는 비판을 많이 했죠. 그래도 저를 유정회 의원을 시켰잖아요』
 
  ― 朴槿惠 前 한나라당 대표를 직접 가르치신 일이 있습니까.
 
  『그런 일은 없었어요. 10·26 사건 후인 1980년 당시 신당동 자택에 있던 朴대표를 위로차 방문한 적이 있고, 1981년에도 방문을 한 적이 있어요. 아직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비운에 보내고 슬픔에 차 있을 텐데 말하는 태도가 너무 의젓했어요. 특히 우리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뿌리가 없는 모함은 곧 사라진다」며 오히려 저를 위로하더군요. 지난 5·31 지방 선거를 앞두고 테러를 당한 후 대처하는 모습을 보고 「과연 어머니, 아버지가 교육은 잘 시켰구나」 하는 생각에 너무 기뻤어요』
 
 
 
행복한 남자 박정수

 
   ― 남편이 외교통상부 장관직에서 물러날 때 국정원의 작용이 있었다고 알려져 당시 李鍾贊 원장에 대한 원망도 했겠습니다.
 
  『韓·러 외교 갈등 후에 많은 분들이 李鍾贊씨가 뒤집어쓸 부분을 朴장관이 뒤집어썼다고들 하는데 저희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남편이 장관직에 물러난 후 제일 마음 아파한 사람은 李鍾贊씨 부부가 아닌가 생각해요.
 
  남편이 물러난 후 李鍾贊씨 부부가 즉시 우리 내외와 밥을 먹자는 연락이 왔는데 속 좁은 저는 그때 안 나갔어요. 남편이 저를 꾸짖었죠.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제가 속이 좁았던 거고 李鍾贊씨에 대한 원망은 손톱만치도 없어요. 죽은 남편이 저 세상에서 원치도 않을 거고요』
 
  朴定洙. 그는 세상을 떠난 후에도 소중한 사람으로부터의 사랑을 잃지 않고 있다.
 
  <여름이면 골프장에서 맥주와 사이다를 섞은 시원한 맥사이다를 내가 좋아한다고, 먼저 식당에 가서 맥사이다를 시켜 놓고 기다리던 당신이 보고 싶어요. 자동차를 타면 의자 가운데 우리의 두 손을 포개 놓았던 그때가 그리워요…> (「함께 못 다 부른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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