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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현대사 강좌 (5) 金九·金奎植의 南北연석회의 참석

蘇 공산당, 평양 정치협상 개최 결정
남북협상 中 북한 헌법 草案 심의

남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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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사기극은 金九·金奎植의 평양行으로 극적인 성과를 거뒀다. 金日成은 「단독정부 수립 않겠다」는 약속으로 미국과 李承晩이 분단의 원흉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는 데 성공했다.

南時旭
1938년 경북 의성 출생. 서울大 정치학과 졸업. 서울大 대학원 외교학 석사. 동아일보 정치부장·同 출판국장·편집국장·논설위원실장·상무이사, 관훈클럽 총무, 한국신문편집인협회 회장, 문화일보 사장 역임. 現 세종大 언론홍보대학원 석좌교수. 저서 「항변의 계절」, 「인터넷 시대의 취재와 보도」, 「한국보수세력연구」 등.
金九, 위대했으나 현실 정치인으로는 한계
南北협상을 위해 38선을 넘는 白凡 金九. 오른쪽은 아들 金信, 왼쪽은 비서 鮮于鎭.
  白凡 金九(백범 김구)는 위대한 민족지도자였지만, 동시에 현실 정치지도자로서의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다.
 
  「민족의 평화통일」이라는 엄청난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보다도 그의 올바른 민족주의 노선이다. 金九는 『나의 정치이념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고 선언함으로써 「민주」와 「자유」를 기본이념으로 하는 국가건설에 대한 확고한 자신의 신념을 밝혔다.
 
  그의 민족주의는 자기 민족의 이익만을 주장하는 편협한 國粹主義的(국수주의적)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그는 철저한 反日주의자면서 세계 평화와 문화국가의 이상을 추구한 열린 민족주의자였다. 이 점은 세계화 시대의 우리 민족이 깊이 새겨야 할 정신적 좌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金九는 민족주의적 열정 때문에 냉엄한 국제정치 환경을 요리하는 데는 일정한 한계를 드러냈다. 그 단적인 예가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위해 金奎植(김규식)과 함께 단행한 평양방문이다. 金九가 평양行에 오르게 된 경위부터 우선 살펴보기로 하자.
 
 
 
 美,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
 
  모스크바 3相 회의에서 합의된 한국 신탁통치 방안을 협상하기 위한 美蘇공동위원회(이하 美蘇共委)가 1947년 7월10일로 진전을 보이지 못하게 되자 미국 측은 중대한 정책변경을 단행했다. 즉, 美蘇共委에서 한국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중단하고 美·英·中·蘇 4개국 회의를 열 것을 제의했다.
 
  미국은 이와 아울러 남북한에서 각각 선거를 실시해 각자의 입법기관을 설치한 다음 이들 남북의 두 입법기관 대표들로 통일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美蘇 兩軍의 철수문제와 완전한 독립국가 수립문제를 4개국과 협의케 하자고 제안했다. 이것은 말하자면 美蘇 양국이 1대 1로 협상하던 방식을 미국·영국·중국의 자유진영과 소련이 3대 1로 협상하자는 것이어서 소련에게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방식이었다.
 
  소련 측은 미국의 제의에 대해 「美蘇공동위원회에서 다루던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4개국 회의로 가져가는 것은 모스크바합의의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남북한이 별개의 임시입법회의를 설치한 것도 남북분단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미국은 소련의 반대에 부딪히자 2개월 후에는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가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미국은 美蘇共委 2차 회의가 완전 결렬된 다음인 9월17일 한국독립 결의안을 유엔에 제출했다. 유엔으로 이관된 한국문제는 미국의 주도 아래 일사천리로 처리되었다.
 
  유엔총회는 1947년 9월23일 한국문제를 의제로 상정했는데, 美國 국무장관은 총회 연설을 통해 『과거 2년간 소련과 모스크바 3相 회의의 결정을 실천해 한국을 독립시키려 노력했으나 진전을 보지 못했다』며 『신탁통치를 거치지 않고 한국을 바로 독립시키는 수단이 강구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소련대표는 『모스크바협정만이 한국문제 해결의 유일한 방안으로 유엔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며 만약 모스크바협정의 이행이 불가능하다면 美蘇 兩軍이 동시에 철수하자』고 逆제의했다.
 
美 군정 자문기구인 남조선민주의원에서 연설하는 金奎植(일어선 사람). 그 오른쪽으로 李承晩, 金九의 모습이 보인다.
 
 
 소련, 유엔한국임시위원단 入北 不許
 
  당시 유엔은 사실상 미국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소련의 반대를 물리치고 한국문제 결의안을 유엔정치위원회를 거쳐 11월14일 총회에서 통과시켰다. 결의안은 9개국으로 구성되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설립하고, 그 감시下에 1948년 3월 말까지 남북한에서 인구비례에 따른 자유선거를 실시해 국회 및 정부를 수립하고 美蘇 양군은 철수한다는 내용이다.
 
  8개국으로 구성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1948년 1월8일 한국에 입국했다. 위원단은 남한 정치지도자들과 만나 협의했으나, 북한인민위원장 金日成은 1월9일 이들이 38도선 以北(이북)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소련도 1월22일 유엔총회에서 위원단의 入北 不許 성명을 냈다.
 
  위원회의 임시의장 쿠무라 메논은 2월20일 유엔 小총회에서 연설을 통해 『南北에 별개의 정부가 탄생한다면 유엔총회가 결의한 (한반도의) 중앙정부가 되지 못할 것이지만, 위원단 대다수는 남한에서 제한된 선거를 행하기 전 또는 후에 南北의 지도자들이 회담 등의 방법으로 한반도 통일을 위한 운동을 벌인다면 「입국 가능한 지역만에서의 총선거」, 즉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동정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보고했다.
 
  유엔 소총회는 미국이 제출한 「입국 가능한 지역만의 선거」(즉 남한 단독선거) 실시 권한을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부여하는 결의안을 2월26일 격론 끝에 찬성 31, 반대 2, 기권 11표로 통과시켰다. 위원단은 이에 따라 5월 첫 주 이내에 총선을 실시할 것을 요망했으며 美 군정사령관 하지 장군은 5월10일을 선거일로 결정했다.
 
 
 
 金九·金奎植, 남북협상으로 기울어져
 
  남한 단독선거 결정은 국내에서 左右翼 간에는 물론이고 右翼 진영 내부에서도 갈등을 일으켰다.
 
  李承晩(이승만)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入國해 총선을 실시하기 전에 조기 과도선거를 실시해 공산분자가 다시 활동을 개시하지 못하도록 위원단과 협의할 民選(민선)대표단을 구성하든지, 그렇지 못하면 한반도 전체 인구의 3분의 2를 가진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했다.
 
  한민당도 早期(조기) 單政 수립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5·10 선거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반면 左翼 세력은 남한 단독선거를 결사반대했다. 右翼 세력 내에서도 金九와 金奎植 등은 단독정부 및 총선 반대를 위해 南北협상으로 기울어졌다. 두 김씨는 1947년 12월 말 李承晩系의 민족대표자대회와 金九系의 국민의회의 통합교섭이 결렬된 다음부터 남한 단독선거를 저지하고자 南北협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두 김씨 중 金九가 李承晩과 갈등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李承晩과 한민당이 본격적으로 單政 수립노선을 추구하는 데 맞서 1947년 11월18일 독자적인 각 정당협의회를 개최하면서부터였다. 金九는 이때 유엔결의를 비판하면서 자주적인 통일정부 수립방안을 내놓았다.
 
  金奎植은 민중동맹·신진당·사회민주당 등 14개 정당과 51개 사회단체의 중도파 세력을 하나로 묶어 1947년 12월20일 종로구 천도교 강당에서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고 통일정부 수립운동에 나서면서부터 李承晩과 결별했다.
 
  민족자주연맹은 1948년 1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입국한 것을 계기로 남한 단독선거 가능성이 짙어지자 2월4일 金奎植의 숙소인 삼청장에서 위원장 金奎植의 주재로 洪命熹(홍명희·소설 「임꺽정」의 저자·후일 북한 부수상)·元世勳(원세훈·독립운동가·조선농민당 당수) 등 정치위원 5명과 安在鴻(안재홍·독립운동가·前 美 군정청 민정장관)·呂運弘(여운홍·사회민주당 당수·呂運亨의 동생)·崔東旿(최동오·독립운동가)·柳錫鉉(유석현·독립운동가)·李相佰(이상백) 등 상무위원 17명이 참석한 가운데 연석회의를 열고 南北협상을 요청하는 서한을 북측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서한은 한독당의 金九와 金奎植 두 사람의 공동명의로 보내기로 한독당 측과 합의하고, 申基彦(신기언)과 嚴恒燮(엄항섭)이 金日成과 金枓奉(김두봉·북조선노동당 위원장·후일 최고인민회의 의장)에게 보내는 편지를 기초하기로 했다.
 
  두 김씨는 1948년 2월9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공동명의의 서한을 보내 南北협상 계획을 통고하고 적극 협조를 요청했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인도대표 메논과 중국 대표 劉馭萬(유우만·리우위완)은 두 김씨의 南北협상 제의에 큰 관심을 표시했다.
 
  메논이 나중에 유엔 소총회에 보고한 바에 의하면, 金九와 金奎植은 자신들이 북측에 제안한 南北요인 회담이 실현되지 않거나 회담이 성공하지 못할 경우에는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밝혔다고 한다.
 
 
 
 
金日成, 처음에는 南北협상 제의 묵살

 
환영 나온 북측 관계자와 인사를 나누는 金九.
  金九는 2월10일 「3000만 동포에게 泣告(읍고)함」이라는 감동적인 남한 단독선거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南北협상을 제안하는 두 김씨 공동명의의 서한은 2월16일 金日成과 金枓奉에게 비밀리에 발송되었다. 서한은 두 통이 작성되어 한 통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통해 모스크바를 경유하도록 했고, 다른 한 통은 서울의 소련군 대표부를 통해 보내졌다.
 
  북한인민위원장 金日成은 당초에는 두 김씨의 南北협상 제의를 묵살했다. 평양주재 소련군사령부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의 비망록을 분석한 연세大 박명림 교수에 따르면, 金日成은 『金九를 만나 보았자 아무런 수확이 없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지도층 일부는 『金九는 어리석은 사람이기 때문에 반드시 만날 필요가 있고 그를 설득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의 입장에) 동의할 것이다. 그는 북한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고 하면서 金九의 제의에 응할 것을 주장했다.
 
  金九를 평양에 부르는 데 가장 적극적인 사람은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金枓奉이었다고 한다.
 
  결국 북측은 3월15일에야 金日成·金枓奉 두 사람 이름으로 두 김씨가 보낸 서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마치 자신들이 처음 제안하듯이,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통일독립을 위한 「全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회의」를 평양에서 열자고 제의했다.
 
 
 
 金九·金奎植, 북한 진의 탐색
 
金奎植.
  북측은 이어 3월25일에는 金日成·金枓奉·崔庸健(최용건·조선민주당 당수·후일 북한 민족보위상) 등 9개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의 공동명의로 발표된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제26차 중앙위원회 결정을 평양방송과 서한을 통해 알려왔다. 그 내용은 4월14일부터 평양에서 남한의 모든 민주주의 정당 단체와의 연석회의를 개최하자는 것이었다.
 
  金九와 金奎植은 북한의 진의를 탐색하기 위해 安敬根(안경근)과 權泰陽(권태양)을 평양에 파견했다. 두 사람은 金日成과 金枓奉을 직접 면담했다.
 
  金日成은 『우리가 통일을 위해 만나 이야기하는데 아무런 조건이 있을 수 없다. 두 선생님께서는 무조건 오셔서 우리와 모든 문제를 상의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 보고를 받고 金九는 北行을 결심했으나 金奎植은 태도를 금방 결정하지 못했다. 평양회의는 4월19일로 연기되었다. 金九는 4월19일 단독으로 평양으로 떠났다.
 
  金奎植은 민족자주연맹 긴급간부회의를 소집해 자신의 北行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5개항을 金日成에게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그 조건은 ▲어떤 형태의 독재정치도 이를 배격할 것 ▲私有재산제도를 승인하는 국가를 건립할 것 ▲전국적 총선거를 통해 통일 중앙정부를 수립할 것 ▲어떠한 외국의 군사기지도 허용하지 말 것 ▲美蘇 양군의 撤退(철퇴)는 상호 간에 조건·방법·기일을 협정해 공표할 것 등이다.
 
  권태양과 裵成龍(배성룡)이 金奎植의 제안을 가지고 특사로 다시 평양을 방문했다. 金日成은 이를 수락한다고 그들에게 약속했다. 金奎植은 4월22일 민족자주연맹 대표단 16명과 함께 北行길에 올랐다.
 
  金九와 金奎植 일행의 北行은 남한 사회에 큰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美 군정 당국을 비롯해 李承晩과 한민당, 그리고 右翼 청년·학생·기독교 단체와 以北 출신 인사들이 金九의 北行을 강력히 반대하는 성명을 내고 시위도 벌였다. 반면 문화인 108명을 비롯한 중도계 인사들은 두 김씨 일행을 지지하는 성명을 내어 여론이 양분되었다.
 
 
 
 
북한, 南北협상 기간 중 헌법 草案 심의

 
남북협상 회담장으로 들어가는 金日成과 金九.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南北협상은 ▲南北조선 諸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4월19~26일) ▲南北조선 諸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4월27~30일) ▲金九·金奎植·金枓奉·金日成의 4金 회담(5월3일) 순으로 진행되었다. 대표자연석회의는 金九 일행이 평양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연석회의는 북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진행되어 美蘇 양군의 즉시 철수요청과 「單政 수립을 반대하는 전체 동포에 보내는 격문」을 채택했다.
 
  金九 자신은 연석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다른 그의 일행은 회의에 참석했으나 발언다운 발언조차 하지 못한 가운데 결의들이 채택되었다. 金奎植도 아예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지도자협의회도 ▲외국군대의 즉시 철수 ▲외국군 철수 후의 內戰(내전) 발생 부인 ▲全조선정치회의 구성 및 그 주도下의 총선 실시와 정부 수립 ▲ 남한 單政 수립 반대의 4개항을 채택했다.
 
  지도자협의회에는 남쪽 대표 11명과 북쪽의 金日成·金枓奉·崔庸健·朱寧河(주영하) 등 4명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도 북측 방침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4金 회담」에서 金九와 金奎植은 ▲ 남한에 대한 북한의 電力(전력)공급 계속 ▲延白(연백) 水利조합 개방 ▲曺晩植(조만식)의 越南(월남) 허용 등을 제안했다. 金日成은 앞의 두 가지만 약속했다. 그러나 金九와 金奎植이 서울로 돌아와 이를 발표한 뒤에 金日成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南北협상이 진행 중이던 4월 말 북조선인민회의 특별회의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草案(초안)을 逐條(축조)심의한 점이다.
 
  평양에 간 남측 대표단이 북측과의 협상을 마치고 인민회의 청사 견학을 갔다가 때마침 그곳에서 헌법 草案 축조심의를 하고 있는 광경을 목도하고 크게 실망했다. 북한 측은 남한에 대해서는 단독정권이 안 된다고 비난하면서도 자신들은 남한보다 훨씬 먼저 헌법 草案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두 김씨, 북측의 2차 협상제의 거부
 
남북협상을 보도한 朝鮮日報.
  지도자회의에서 합의된 美蘇 양군의 철수문제를 교섭하기 위해 북측에서는 金枓奉을 소련군사령부로, 남측에서는 呂運弘을 미군사령부로 각각 보냈다.
 
  소련군사령관 코로트코프는 『미국군대가 동시에 철수한다면 소련군대는 즉시 철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답변했다. 하지 미군사령관은 『유엔결의안에는 全조선에 걸쳐 총선거를 실시한 다음 조선국민정부가 수립되면 가급적 빨리 양군이 철수하도록 규정되어 있다』고 해 정부수립 후 철군할 뜻을 밝혔다고도 한다.
 
  金九와 金奎植은 서울에 돌아온 다음 평양에서의 南北협상 경위와 합의사항을 설명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서 두 사람은 單政 수립을 위한 5·10 총선 참여를 거부할 것이라고 밝혔다.
 
  두 김씨와 함께 北行했던 洪命熹·李克魯(이극로·한글학자·후일 북한 무임소상)·李英(이영·사회노동당 중앙집행위원·후일 최고인민회의 의장)·이용 등은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남아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했다. 북측은 두 김씨에게도 평양에 남아 있으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얼마 후 북측은 제2차 南北협상을 황해도 海州(해주)에서 개최할 것을 제의하면서, 북한 단독정부 수립 의사를 밝혔다. 북측은 金九·金奎植의 越北(월북)과 참여를 요청했다.
 
  金九와 金奎植은 이때 비로소 북측의 진정한 의도를 깨닫고, 『남측의 單政 수립을 핑계로 북측이 단독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것 역시 민족분열 행위』라면서 제2차 南北협상 제의를 거부했다.
 
  북측은 예정대로 6월29일~7월5일까지 평양에서 「제2차 南北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를 일방적으로 개최했다. 이 회의는 남측에서 남로당과 親共단체 대표 일부만 참석했으므로 더욱 「대표성」 없는 모임이 되었다.
 
 
 
 金九·金奎植, 金日成 비난성명 발표
 
南北협상회의에서 축사하는 金九.
  북측은 이 회의에서 5·10 총선에 의해 구성된 대한민국 국회를 불법적 조직체라고 규정하면서 지체 없이 「全조선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의했다. 이 무렵은 남한에서 5·10 총선이 끝나고 국회가 구성되어 한창 헌법을 심의 중일 때였다.
 
  金九·金奎植은 이같은 북측의 움직임에 깊은 실망을 느끼고 1948년 7월19일 『그들은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헌법에 의해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國旗(국기)까지 바꾸었다. 물론 시기와 지역과 수단방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지언정 半조각 국토 위에 국가를 세우려는 의도는 일반인 것이다. 그로부터 남한·북한은 호상 경쟁적으로 국토를 분열하여 民族相殘(민족상잔)의 길로 나아갈것이다』라는 비난성명을 공동 발표했다.
 
  이로써 金九·金奎植 두 사람과 金日成의 관계는 끝장 나고 말았다. 결국 이상주의적이고 현실을 모른 두 민족주의자들은 南北의 집권세력 모두와 대립되는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金九, 처음에는 單政 지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金九가 처음부터 單政을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그러나 당시의 신문보도에 의하면 金九는 1947년 11월30일 李承晩과 회담한 직후인 12월1일에 발표한 담화에서 『소련의 방해로 인해 북한의 선거만은 실시하지 못할지라도 추후 어느 때든 그 방해가 제거되는 대로 북한이 참가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의연히 총선거 방식으로서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李承晩 박사의 주장을 세인이 단독정부라고 오해하는 것은 유감』이라고 말하면서 『李박사와 나는 조금도 근본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같은 날 회의석상에서도 자신의 생각이 李承晩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언명함으로써 단독정권 수립을 지지했다.
 
  그러나 金九는 1947년 12월 말,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李承晩系의 민족대표자대회와 金九系의 국민의회의 통합교섭이 실패하자 南北협상으로 전환한 것이다.
 
  그러면 왜 金九는 노선을 전환했을까. 그가 反共(반공)에서 連共(연공)으로 방향을 바꾼 것은 臨政(임정)의 프랑스 주재 외교위원을 지낸 徐嶺海(서영해)가 찾아와 『남한에서 단독선거를 실시하면 李承晩이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있으나, 南北 총선을 실시하면 당신이 당선될 수 있으므로 南北협상을 추진하라』고 집요하게 설득했기 때문이라는 說이 있다.
 
  물론 당시에 南北통일 열기가 너무 컸으므로 그의 설득 하나로 金九가 노선을 바꾸었다고 볼 수는 없다. 『노선변경이 석연치 않다』는 한 기자의 질문에 대해 金九는 『민족대표자대회와 국민의회를 통합하는 데 열중해 李承晩과 보조를 같이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정략적으로 單政을 반대했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나는 그런 비열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강력히 부인했다. 이 때문에 金九의 노선 변경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金日成에게 완전히 이용당한 金九와 金奎植은 평양의 南北협상이 소련의 지시에 의해 개최된 사실을 새카맣게 몰랐을 것이다.
 
  소련 붕괴 후 밝혀진 「한국관련 문제들에 대한 소련공산당 정치국 결정」이라는 문서에 의하면, 평양의 南北협상은 평양의 소련군사령부가 건의해 1948년 4월12일 소련공산당 정치국에서 승인된 것이다.
 
  소련공산당 정치국은 이날 「金日成 동지」에게 南北연석회의 개최를 권고하기로 의결하고, 그 회의의 의제와 통과시켜야 할 결의안 草案의 내용도 아울러 결정했다.
 
  그것은 南北연석회의가 ▲조선인민의 참여 없이 채택된 유엔총회 결의와 한국문제임시위원회의 「불법적인」 결의를 규탄하고 유엔임시위원단의 한국으로부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할 것 ▲남북한에서 동시 철군하자는 소련의 제안을 환영하고 한반도로부터의 즉각적인 외국군대 철수를 요구할 것 ▲외국군대의 철수 후 남북한 同時 선거를 주장할 것 등 3개 항이다.
 
  이같은 소련의 조치는 북한 단독정권의 수립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취해진 능란한 선전공세였다. 평양 주둔 소련군사령관은 같은 날짜로 南北연석회의의 남조선대표단의 입북, 교통 및 안전을 보장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소련 공산당, 金日成에게 「남북한 지하 총선거」 지시
 
북한 정권 수립의 막후 인물인 슈티코프 中將(왼쪽)과 레베데프 少將(오른쪽).
  소련의 이같은 사기극은 金九와 金奎植의 평양방문 실현으로 대단한 선전효과를 거두었다. 金日成은 이들에게 「북한은 결코 단독정권을 먼저 수립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함으로써 자신이 조국의 통일을 위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런 방식을 통해 金日成은 남한의 李承晩과 미국이 분단의 원흉이라는 인식을 全민족에게 심어 주는 데 성공했다.
 
  소련공산당 정치국의 정치적 술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제2의 연극을 꾸몄다.
 
  즉, 북한의 金日成 정권이 단독정권이 아닌, 전체 한반도의 정통적 정부인 것처럼 선전하기 위해 1948년 4월22일 평양의 소련군 당국과 金日成에게 「남북한의 선거」를 실시하도록 지시했다.
 
  소련공산당 정치국은 이날의 지시에서 『만약 남한에서 단독선거가 실시되어 남한 단독정권이 수립된다면 슈티코프 동지는 金日成 동지에게 다음과 같은 결의를 하기 위해 북한의 최고인민회의를 소집하도록 권고하라』고 지시했다. 슈티코프는 소련군 沿海州(연해주) 군관구 정치위원이자 美蘇共委 소련 측 대표로 북한 軍政을 총지휘한 인물이다.
 
  결의안 내용은 ▲한반도 통일 때까지는 최고인민회의 4월 회의에서 채택되는 헌법이 북한에서만 효력을 가지며 ▲ 헌법에 따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전체 한반도에서 실시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나라 이름도 소련이 作名
 
  정치국의 이같은 건의는 4월24일 스탈린과 外相 몰로토프, 그리고 슈티코프의 회동에서 최종 확정되었다. 모스크바의 이같은 지시는 남한 측 대의원을 「지하선거」를 통해 선출해 비밀리에 황해도 海州에 모이게 하는 방식으로 집행되었다.
 
  남한에서 단독정부가 수립되기를 기다린 소련과 金日成은 예정대로 평양에 북한 정권을 수립했다. 북한 정권의 수립을 위한 마무리 작업을 소련이 어떻게 진행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한 인민회의는 1947년 11월 제3차 회의에서 헌법 제정 작업을 개시한다는 공식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金枓奉을 위원장으로 하는 임시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했다. 실제로 북한 헌법의 草案 제정 작업은 이보다 빠른 그해 가을에 시작되었다. 그 결과 1948년 2월 초,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규정한 1936년의 소련 헌법을 모델로 한 북한 「임시헌법」의 草案이 마련되었다.
 
  러시아 학자 안드레이 란코프는 북한의 國號(국호)는 소련 25군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少將이 作名(작명)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레베데프가 북한 측이 당초에 마련한 국호인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원안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바꾸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1948년 2월20일자 東亞日報는 북한의 「민주조선」 2월11일자를 인용 보도했는데, 이에 따르면 북조선임시헌법제정위원회가 2월10일자로 발표한 헌법案에 國號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되어 있다. 란코프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소련은 헌법案의 기초단계에서부터 개입한 셈이다.
 
  이 헌법 草案은 평양에서 成案된 다음 모스크바로 보내졌다. 소련공산당 정치국은 2월3일 이 草案을 공개토론에 붙여야 한다는 이유로 북한에서의 헌법제정 작업의 진행을 연기시키고 자신들이 심의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헌법전문가들이 이 헌법 草案의 정밀한 검토 작업에 착수했다. 심의 결과 북한의 헌법 草案에 대해 전체적으로 부정적인 평가가 내려졌다.
 
 
 
 蘇 공산당, 북한 헌법 草案 심의
 
스탈린.
  즉, 『헌법 草案의 주된 결점은 북한의 현존 사회·경제적 관계와 인민민주주의의 발전수준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잘못」 반영했으며 대부분의 條文(조문)은 서투르게 배열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 결론에 따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국은 몇 가지 수정안을 마련하고 최종적인 판단은 정치국과 「스탈린 동지」가 내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스탈린은 헌법전문가들의 비판을 모두 수용하지는 않았다. 그가 슈티코프를 면담한 후인 1948년 4월24일 소련공산당 정치국은 金日成이 보내온 북한의 헌법 草案 중 3개 조문의 수정을 전제로 이를 승인했다. 즉, 「주권」 관련 조문인 제2조와 「신앙의 자유」 관련 조문인 제14조는 완전히 수정하고, 「토지」 관련 조문인 제6조의 문안은 더 길게 늘린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제6조는 무려 7개 문장으로 구성된 긴 조문이 되었다. 슈티코프 일기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제2조는 스탈린이 직접 손을 대서 「임시헌법」이라는 표현에서 「임시」라는 말을 삭제했다.
 
  같은 날 스탈린은 슈티코프와 소련공산당 이념담당 비서 즈다노프 그리고 外相 몰로토프를 참석시킨 가운데 한반도문제 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여기서 헌법 草案 승인문제 이외에 한반도의 군사문제와 북한 정권 수립에 대한 최종 승인문제가 논의되었다.
 
  스탈린의 습관대로 자정부터 이튿날 오전 8시까지 계속된 이 회의에서 중대한 결정들이 내려졌다. 스탈린은 북한에서 선거를 실시해, 평양에 수도를 두면서도 전체 한반도의 정통성 있는 정권임을 주장하는 북한 정부를 수립하는 案을 최종적으로 승인했다.
 
  스탈린의 승인을 받은 북한 헌법 草案은 4월24일의 소련공산당 정치국의 지시에 따라 4월28일 평양의 북한 인민회의 특별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이때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평양에서 金九와 金奎植이 참석한 가운데 南北협상(4월19일~5월3일)이 열리고 있었다. 스탈린과 金日成은 겉으로는 단일정부 수립을 내세워 南北협상을 벌이는 척하면서 뒤로는 북한 단독정부 수립준비를 착착 진행시킨 것이다.
 
  그해 7월에는 다시 모스크바로부터 평양에 떨어진 지시에 따라 북한인민회의 5차 회의에서 「북한 헌법은 통일 때까지 북한 지역에서만 효력이 있다」는 결의를 했다.
 
 
 
 소련의 마스터플랜대로 북한 정권 수립
 
  金日成은 남한의 단독정부가 들어선 지 10일 후인 1948년 8월25일 인민들의 투표로 남한의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할 북한 측 대의원 212명을 뽑는 선거를 실시했다. 투표는 북한노동당이 이미 그들이 지명한 후보들에 대해 유권자들이 可否만 표시하는 흑백투표 방식이기 때문에 하나의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남한 측 대의원 360명은 이보다 앞서 8월21일 황해도 海州에서 선출되었다. 대의원에 선출된 사람은 남로당·조선인민공화당·신진당·사회민주당·민주한독당·근로인민당·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全評)·민주독립당의 당원과 회원들이라고 했다. 이 남한 측 대의원들은 앞에서 설명한 제2차 남북諸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의 결정에 따라 각각 남녘의 자기 주소지에서 비밀리에 실시된 남조선 인민들의 「지하선거」로 선출된 1080명의 대표들이 海州에 집결해 개최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선출되었다고 북측은 발표했다.
 
  이 南北 대의원들은 9월 초 평양에 집결해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했다. 최고인민회의는 1948년 9월8일, 스탈린이 승인하고 인민회의 특별회의가 통과시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만장일치로 정식 채택한 뒤 『이 헌법을 全조선 지역에 실시한다』고 선언했다.
 
  북한 정권의 구성작업은 9월8일 헌법이 최종적으로 채택된 직후 착수되었다. 이날 洪命熹의 제의에 따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조직되고 최고인민회의 의장에 許憲(허헌·변호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는 金枓奉을 각각 선출했다.
 
  9월9일에는 金日成이 내각 수상에 선출된 데 이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이 선포되었다. 북측은 이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만이 전체 조선인민을 대표하는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라고 선포했다. 북한 정권의 수립으로 한반도에는 두 개의 국가,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서 南北 분단이 고착되었다.
 
  金九는 極右派(극우파)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反共的인 右翼지도자이지만 金日成과 직접 담판을 벌여 통일정부를 세우려고 노력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李承晩과 한민당의 신탁통치 반대에는 보조를 같이 했으나, 單政 수립 노선에는 완강하게 반대했다.
 
  金九가 아니었으면 그 어려운 日帝(일제) 시절 임시정부를 끌고 가는 것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는 반공주의자이면서 還國(환국) 직후부터 呂運亨의 人共(인공: 조선인민공화국) 측과 협상을 마다하지 않는 열린 자세를 보여 後世(후세)의 귀감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金九를 북측은 철저하게 이용했다. 金九는 북한으로 출발하기 전 무례하고 오만불손한 편지를 북측으로부터 받았다. 金奎植 측근의 회고에 의하면 金日成과 金枓奉이 공동서명한 이 편지는 『당신들이 3相 회의 결정을 반대했기 때문에 단독정부가 수립되어 국토가 분단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요지의 말로 두 민족지도자들을 훈계했다는 것이다. 金九는 그런 무례를 무릅쓰고 北行길에 올랐지만 결국 북측에 배반당했다.
 
  金奎植은 南北연석회의에 대해 金九보다 훨씬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의 측근이 나중에 회고한 바에 의하면 金奎植은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 「南北연석회의의 성공을 확신하지 못해 北行을 망설였지만 처음부터 안 된다고 해서 시도도 하지 않고 단념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여 북측에 대해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5개항의 조건을 붙여 뒤늦게 평양으로 출발했다.
 
  그는 南北협상에 실패하고 서울로 돌아온 후에도 단독선거 반대와 南北총선거를 주장하면서 5·10 총선에 불참했다.
 
북한의 초대 내각. 앞줄 오른쪽부터 崔庸健(민족보위상), 朴憲永(부수상 겸 外相), 金日成(수상), 洪命熹(부수상).
 
 
 美 군정, 마지막까지 金奎植에게 미련
 
  美 군정은 金奎植이 새 정권을 장악토록 하기 위해 그에게 선거에 나갈 것을 강력히 권고하는 한편 李承晩이 無투표 당선되는 것을 막으려고 공작을 벌였다.
 
  美 군정은 李承晩이 출마한 서울 동대문 갑구에 미국 유학생 출신으로 군정청 수사부 부국장이던 崔能鎭(최능진)을 뒤늦게 출마토록 했다. 그러나 후보등록 마감 직전 선거관리위원회 사무실 앞에서 최능진의 후보등록 서류를 괴한들이 탈취함으로써 마감시간 안에 등록이 불가능해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美 군정청은 즉각 그의 신변보호조치를 취하는 동시에 해당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마감 시한을 연장하라고 지시해 그의 등록을 가능케 했다.
 
  美 군정의 이같은 조치에도 불구하고 金奎植은 끝내 單政 수립에 반대하는 신념을 굽히지 않고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代案이 없어진 美 군정 측은 李承晩의 출마를 방관할 수밖에 없게 됐다. 최능진은 스스로 사퇴했다.
 
  金奎植은 이 사건을 계기로 美 군정과의 관계가 소원하게 되었다. 金奎植의 이상주의도 높이 살 만하지만, 그 역시 북한 정세에 어두워 南北연석회의에 참석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북한 정권의 출범에 도움을 준 반면, 대한민국 건국에는 협조하지 않은 인물이 되었다.
 
 
 
 金九·金奎植, 건국 후에도 反대한민국 운동
 
金九의 암살은 李承晩 정권의 도덕성과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흠집을 냈다.
  金九와 金奎植은 金日成과의 南北협상이 실패한 다음에도 제헌국회를 구성하는 5·10 총선을 보이콧했다. 金九의 한독당을 비롯한 여러 정당의 참여거부로 총선은 반쪽 선거가 되고 말았다.
 
  金九는 유엔한국임시위원회 임시의장 메논에게 『南北협상 노력이 실패한다면 5·10 총선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했던 것을 뒤집고, 총선을 거부했다.
 
  金九와 金奎植은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 공포된 다음인 1948년 7월21일 통일독립촉성회를 구성하고, 단독정부 수립 반대운동을 계속했다. 金九의 한독당과 金奎植의 민족자주연맹이 중심이 된 이 기구는 單政을 반대하는 통일독립운동자의 총역량 결집과 민족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기치로 해 反대한민국 운동을 벌였다.
 
  통일독립촉성회는 1948년 8월1일 파리에서 열린 유엔총회에 대표단을 파견해 남한 단독정부의 승인거부와 두 분단국가의 해체 및 남북 총선거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 등을 요구하는 연설을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東西冷戰의 전쟁터이자 강대국 간 이해다툼의 장터가 된 유엔 무대에서 「대한민국의 승인거부와 해체」 주장을 하려는 것이었다. 수석대표로 선출된 金奎植이 이 일을 수락하지 않아 계획은 유산되었다.
 
  金九와 金奎植의 反單政·反李承晩 운동은 1949년 6월26일 포병대위 安斗熙(안두희)라는 테러리스트에 의한 金九 암살로 이어졌다. 金九의 죽음은 그 자체가 건국 초기의 정치적 재앙이었을 뿐만 아니라 범인의 배후세력을 둘러싸고 전개된 논란과정에서 李承晩 정권의 도덕성은 물론 대한민국의 정통성에도 흠집을 냈다.
 
 
 
 소련의 배후조종을 알았더라면…
 
  李承晩과 한민당 지도자들, 그리고 金九는 다 같은 보수우익 지도자들이었다. 다른 점은 李承晩과 한민당 지도자들이 정치적 현실주의자인 데 반해, 金九와 金奎植은 이상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정치적 현실주의란 목표를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달성하려고 노력하되, 최선의 결과가 불가능할 경우에는 次善(차선)을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李承晩과 한민당 지도자들은 통일정부의 수립이라는 최선의 결과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그들이 次善이라고 생각한 단독정부 수립을 선택해 대한민국을 세웠다.
 
  金九와 金奎植은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어서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민족주의의 순교자가 되었다. 만약 그들이 한반도의 분단정책을 앞장서서 추진하던 소련이 평양의 남북협상까지 뒤에서 조종한 사실을 제대로 알았다면 과연 그렇게 행동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金九와 金奎植은 1차 평양行에서 자신들의 통일을 위한 순수한 열정이 무참하게 배반당하자 곧바로 북측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오늘날 맹목적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북한의 核개발과 人權(인권)탄압을 외면한 채 무조건 「民族共助(민족공조)」를 외치는 일부 세력들은 金九의 올바른 민족주의 정신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두 김씨의 실패한 평양行의 진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의도적으로 이를 神話化(신화화)하려는 듯한 행동을 벌이고 있다.
 
  그들은 金九와 金奎植의 평양行을 神話化함으로써 젊은 세대의 인기를 얻고 자신들의 잘못된 對北접근 방식을 합리화하려는 것이다. 이같은 무책임한 「맹민주의」(맹목적 민족주의)는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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