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1월 전국농민조합 북조선연맹 결성대회
『인민 주권에 적극 협력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에게는 보복적으로 민족반역자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 일본軍 통역 출신 金英柱(金日成의 동생), 權力 2인자로 장기 군림
● 일본軍 출신 이활, 조선인민군 공군사령관
● 만주에서 광산 지배인 지낸 정준택, 북한 초대 국가계획위원장·정무원 부총리
● 일제末 함흥 철도국장 한희진, 북조선임시인민委 교통국장
● 지주 출신 전기산업 이론가 이문환, 북조선임시인민委 산업국장
● 만주國 검사장 한낙규, 북조선 검찰총장
申周鉉 데일리NK 취재부장
1975년 전남 강진 출생. 전남大 무역학과 졸업. 월간 Keys 편집위원. 저서 「웃기는 김정일」.
『인민 주권에 적극 협력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에게는 보복적으로 민족반역자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 일본軍 통역 출신 金英柱(金日成의 동생), 權力 2인자로 장기 군림
● 일본軍 출신 이활, 조선인민군 공군사령관
● 만주에서 광산 지배인 지낸 정준택, 북한 초대 국가계획위원장·정무원 부총리
● 일제末 함흥 철도국장 한희진, 북조선임시인민委 교통국장
● 지주 출신 전기산업 이론가 이문환, 북조선임시인민委 산업국장
● 만주國 검사장 한낙규, 북조선 검찰총장
申周鉉 데일리NK 취재부장
1975년 전남 강진 출생. 전남大 무역학과 졸업. 월간 Keys 편집위원. 저서 「웃기는 김정일」.
「북한의 親日청산」에 대한 神話
- 북한 공군의 모체가 된 신의주항공학교 학생들과 金日成(앞줄 가운데). 오른쪽은 일본군 출신으로 북한 공군사령관이 된 이활.
親北左派(친북좌파) 성향의 학자들은 광복 이후 분단과 건국,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북한정권의 정통성을 더 높이 평가한다. 그러한 주장의 주요한 근거 중의 하나가 親日派(친일파) 청산 문제다.
姜禎求(강정구) 교수는 2005년 5월 「親日청산은 북한이 앞섰다」는 칼럼에서 『북한은 민중들의 자연발생적 욕구, 소련 軍政(군정)의 지원, 정권기관의 과거 청산 의지로 거의 완벽하게 親日派 청산이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반면, 그는 남한에서는 美 軍政이 침몰해 가는 민족반역자를 나락에서 구원하고, 이들을 중용해 권력을 장악하게 했기 때문에 역사적 정통성이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주장한다.
姜교수는 이 칼럼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북한의 親日청산은 일본의 패망이 발표되는 해방공간 시점인 1945년 8월부터 조선민중의 자연발생적 힘에 의해 곧바로 시작되어 1946년 거의 완벽할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이 결과 북한에는 親日이라는 과거 청산 논쟁이 아예 발붙일 틈이 없게 되었다. 남한 역시 해방과 동시에 親日청산과 민중적 요구가 분출되어 자연발생적인 청산작업이 시작되었으나 美 점령군의 개입으로 즉각 중단되고 말았다.
북한의 親日청산은 진상규명에서부터 정신계승에 이르기까지 거의 완벽할 정도로 청산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남한의 경우 부끄럽게 진상규명조차 안 된 수준이다. 북의 親日청산과 이를 이은 자주정신은 그들만의 자산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자산으로 통일조국이 계승해야 할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창립선언문에서 『민족의 이름으로 단죄되어야 할 賣國(매국), 背族(배족)의 무리들이 참회하고 자숙하기는커녕 오히려 反민족적·反민중적 지배구조를 온존시킴에 따라 민족의 정신사는 황폐해지고 기회주의와 타락한 가치만이 현실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親日派를 청산하지 못하면서 우리 사회가 기회주의가 득세하는 세상이 됐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들 속에는 북한의 과거사 청산 의지를 높이 평가하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의식이 깔려 있다. 親北左派들은 북한 親日派 청산을 신화적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경향마저 있다. 그러나 정작 광복 이후 북한에서 親日派 청산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관해 구체적인 자료와 증언을 통해 규명해 보려는 노력은 찾아보기 어렵다. 해방 공간에서 북한의 정권기관이 편찬한 몇 가지 저작물을 인용해 북한 당국의 선전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이 고작이다.
8·15 광복 이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공산주의 세력이 확고히 뿌리 내리지 못한 상황에서 성급하게 공산당 단독 정권 수립을 기도하지 않았다.
蘇 軍政, 초기엔 親日청산에 소극적
평양에서는 古堂 曺晩植(고당 조만식)을 비롯해 민족진영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1945년 8월17일 평양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됐다. 각 지역에서는 자치위원회나 인민위원회 같은 정권기관들이 속속 탄생했다. 당시 평양에 파견돼 북한정권 수립의 막후 조정 역할을 했던 소련 25군 정치사령부 정치담당관 메크레르 중좌(중령)는 『평양은 조만식 판이었다』고 회상했다.
소련 軍政은 1945년 말 신탁통치 문제로 左右연립을 포기하기 전까지 親日派 처벌 최소화를 요구한 민족주의 진영의 입장을 존중했다. 민족주의 진영은 독립운동가뿐만 아니라 日帝시대 사법행정기관 복무자·교육자·지주·문인·상업자본가 출신 등이 혼재돼 있었다. 소련 軍政과 공산당도 親日派 숙청 범위를 최소화하면서 사회적 갈등으로 비화시키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했다.
광복 직후 북한 전역에서는 日帝 강점기 주민들로부터 원성이 높았던 악질 형사나 밀정 등을 자발적으로 처벌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를테면 경찰주재소·파출소 등에서 미처 도망가지 못한 자들을 주민들이 직접 잡아 가두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형태였다.
소련 軍政이 실시되면서 지방에는 행정체계가 마련되고, 각 道 인민위원회 산하에 경찰조직인 보안서를 설치해 치안유지와 親日세력 척결에 나섰다.
그러나 그 대상과 처벌 정도는 매우 온건했다. 당시 민족주의 계열이 인민위원회에 다수 포함돼 있었고, 左右의 심각한 대립을 방지하기 위한 양측 진영의 정치적 고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親日 혐의자도 親日 이력이 매우 뚜렷하고 그 행위가 악독한 자로 제한됐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북한관계사료집에는 1945년 11월 강원도 철원에서 道 검찰국이 주민들을 모아 놓고 민족반역자 11명의 死刑(사형)을 집행하려다 소련軍의 명령으로 중지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강원도 검찰국은 1946년 4월 강원도內 13개郡에서 290명의 민족반역자 명단을 작성해 북조선 사법국장에게 제출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그러나 그해 親日혐의로 체포된 사람은 북한 전역에서 810명이었다. 이 중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98명뿐이었다.
親日파 청산과 「토지개혁」 결부
광복 이후 북한에서 日帝 잔재 청산 문제가 최초로 공론화한 것은 1945년 9월15일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 회의에서였다. 조선산업노동조사소가 1945년 편찬한 「옳은 노선을 위하여」라는 문건에 따르면, 평남지구위원회 회의에서는 「조선혁명을 위해 反日을 목적으로 하는 각 당파, 각 단체, 각 계급계층을 망라하여 민족대동단결을 이뤄 日帝 잔재 요소를 철저히 숙청하는 데 있다」고 결정한 사실이 나온다.
이 회의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와 親日的 조선인 및 반동자본가가 소유한 일체의 생산기관을 몰수해 국유화하고, 일본 제국주의자와 親日的 조선인 및 反動지주가 소유한 토지도 전부 몰수해 國有化하고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할 것을 규정했다.
당시 親日派와 그 잔재에 대한 청산문제가 공산당의 주요한 과제로 설정된 점을 알 수 있다. 이것은 親日派를 청산하고 경제적 기반을 몰수하는 것이 결국 사회주의적 혁명을 통한 공산정권 수립의 주요한 원천이 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공산당 협력자는 親日派에서 제외
1945년 서북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에서는 「토지문제에 대한 결정서」를 채택, 토지를 몰수하는 「반역지주」 규정을 채택했다. 「반역지주」에 해당하는 자는 「日帝와 한일합방에 공헌한 매국노와 그 후대」, 「日帝의 강도적 기관에 악질적으로 협력한 자」, 「日帝 침략전쟁에 직간접적으로 협력한 자」로 명시했다. 이러한 규정은 그 대상도 지극히 제한적인 데다 인근 주민의 악의가 아니라는 소명만 있으면 그 죄를 묻지 않도록 했다.
1945년 11월15~17일 사이에 열린 북조선 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제2차 확대 집행위원회에서 金日成은 「진정한 인민의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라는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 金日成은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는 親日派, 민족반역자들을 제외하고 진보적이며 애국적인 각 정당들과 각계각층 인민의 참다운 대표들로 구성돼야 한다』고 연설했다.
1946년 1월31일 전국농민조합 북조선 연맹 결성대회에서는 『인민주권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에게는 보복적으로 민족반역자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다.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결성됐다. 임시인민위원회 委員長에는 金日成이 선출됐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그해 3월7일 「親日派, 민족 반역자에 대한 규정」을 채택했다. 북한에서는 남한의 반민특위법과 같은 親日派 처리에 대한 법률이 제정되지 못했다. 親日派 분류나 처벌에 관한 법률이 없기 때문에 임시인민위원회의 親日派 규정이 북한에서 일반적인 親日 분류 기준으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1992년 조선노동당출판사가 펴낸 「金日成 전집」 3권에 총 15개로 이루어진 규정이 나온다. 이 규정에 따르면 ▲日帝의 조선 침략 당시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와 그 관계자 ▲日帝 당국으로부터 귀족 칭호를 받은 자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고문 및 참의 ▲일본 국회 귀족원과 중의원의 의원 ▲日帝 통치시대 악질 고관(道 사무관 이상까지) ▲日帝 경찰 및 헌병의 고급관리(경찰 경시, 헌병 하사관급 이상) ▲사상담임 판사와 검사 ▲인민들의 원한이 된 고등정치경찰의 악질분자 ▲고등정치 경찰의 밀정 책임자와 악질 밀정 ▲해외 혁명투사를 학살한 자 ▲親日부역단체의 간부와 악질분자 ▲군수 산업의 책임 경영자 및 군수품 조달 책임자 ▲日帝 행정사법경찰 기관과 관계를 맺고 만행을 저지른 민간 악질 분자 ▲학도병 및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는 데 앞장선 정치지도자가 대상이다. 그리고 ▲8·15 광복 이후 민주주의적 단체를 파괴하고 그 지도자를 암살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 자와 반동단체에 의식적으로 가담한 자 ▲민족통일전선 형성을 방해하는 반동단체의 밀정 혹은 선전원으로서 밀정 행위를 감행한 자 등이 포함됐다.
反託 계기로 右翼타도 본격화
이러한 규정은 단순히 日帝 기관에 복무했거나 관련 기관에 근무했다고 해서 親日派로 분류하는 것을 제한하고 있다. 또한, 부칙에 「이상의 조항에 해당한 자로서 현재 나쁜 행동을 하지 않는 자와 건국사업을 적극 협력하는 자에 한하여서는 그 죄상을 감면할 수도 있다」는 조항을 뒀다. 결국 공산당에 적극 협력한 자는 그 죄를 묻지 않는 길을 열어둔 것이다.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반도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조만식은 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를 소집하고 「신탁통치를 찬성할 수 없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것은 조만식을 비롯한 민족진영의 소련 軍政에 대한 선전포고와 같은 것이었다. 결국, 조만식은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의장직을 사임하고 고려호텔에 강제 軟禁(연금)됐다.
이후 소련 軍政과 공산당 세력은 「민족주의 진영과 연대」 노선에서 「우익 타도」 노선으로 급선회했다. 이후 북한에서 親日派와 민족반역자에 대한 처벌은 과거의 親日행위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소련 軍政과 북한정권 기관에 대한 저항과 이들이 시행하는 국가시책에 대한 반대라는 현재의 「反動행위」에 대한 처벌과 밀접한 연관을 맺게 된다.
親日청산은 右翼민족주의 세력 척결의 일부분
경북大 전현수 교수는 저서 「蘇聯의 美蘇共委 대책과 韓國臨時政府 수립 구상」과 「韓國 近現代의 民族問題와 新國家建設」에서 북한의 親日派 민족반역자 숙청이 右翼민족주의 세력을 척결하기 위한 투쟁과 결합되는 과정임을 설명하고 있다. 전현수 교수는 이 책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右翼민족주의 세력을 배제하기 위한 논리로 등장한 親日派 민족반역자 숙청운동은 美蘇공동위원회 시기 한층 격화되었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반탁진영의 모든 집단에 대해 전면적인 공격을 가했다. 曺晩植에 대한 비난은 그가 학도지원병 모집에 협력한 전쟁범죄자라고 주장함으로써 극에 달했다.
북조선분국은 李承晩을 나라의 이권을 팔아먹는 파렴치범으로, 金九를 「살인·방화·매국의 화신」으로 단죄했다. 남조선 민주의원에 대해서도 親日분자 민족반역자 소수 특권계층을 기반으로 「팟쇼적 노선」을 걷고 있다고 비판하고, 이를 타도하기 위해 무자비한 투쟁을 전개할 것을 촉구했다. 신탁통치에 반대한 북한의 개신교 목사들은 신사참배를 선동하고 학도지원병 모집에 협력한 「왜놈들의 앞잡이」로 성토되었다>
북한의 역사서 「조선전사」의 현대편(23권) 「민주건설사 1」은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曺晩植과 그 일당을 비롯하여 지방정권기관의 일부 책임적 지위에 기어들었던 불순분자들은 사업을 고의적으로 태공(사보타주)하면서 인민정권 기관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을 파괴하기 위하여 음으로 양으로 날뛰었다』고 기록했다.
이어 『지방인민위원회들로 하여금 진정한 인민의 정권기관으로서의 자기의 임무를 옳게 수행하게 하자면 무엇보다도 그 안에 기어든 親日派, 민족반역자 등 불순분자들을 적발 숙청하기 위한 투쟁이 힘차게 벌어지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는 曺晩植을 비롯해 반탁운동을 전개한 右翼민족주의자들을 親日派로 몰아 정권기관에서 추방하기 위한 사업이 진행됐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조선민주당 탄압
당시 지방 인민위원회에서도 소련 軍政에 의해 민족주의 진영 인사들이 밀려나고 공산당 세력이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인민위원장을 비롯해 주요 간부직은 공산당원이 독점했다. 보안대의 역할도 단순한 치안유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에 반대하는 주요 인사와 세력들을 감시하고 잡아 가두는 일로 확대됐다.
당시 인민위원회는 소련 軍政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권한이 막강했다. 日帝시대 유식계층이었던 공무원(道·郡·面 사무소 근무자, 공공기관 근무자, 사법기관 경찰 종사자, 공출담당, 교육자 등)과 자산가(지주와 상업자본가) 등은 국가 건설 주역에서 감시와 핍박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인민위원회는 자신들의 정치적 명분과 위상을 세우고 공산당에 대한 지지를 강화하기 위해 親日派 청산을 대대적으로 내세웠다. 이때부터는 사회적으로 강압적인 분위기가 형성되고, 유식계층에 대한 공산당의 적극적인 침투와 회유작업도 진행됐다.
曺晩植이 결성한 조선민주당 당원들은 보안대의 집중 감시 대상이 됐다. 조선민주당 결성은 결과적으로 공산당이 주민들을 赤과 白으로 구분해 反共·민족주의 진영을 탄압하는 데 좋은 자료를 제공한 셈이 됐다. 1946년 이후 조선민주당 가입 인사들은 미행과 감시의 대상이 되고, 관직에도 발을 붙이지 못했다.
함경남도 고원에서 교사로 근무했던 한 越南者(월남자)의 증언에는 당시 사회 분위기가 잘 드러난다. 이 越南者는 1946년 초 面 체육대회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동창생을 만나서 『「저놈들(공산당원들) 보기 싫어서 살맛이 안 난다」는 말을 했다가 밀고를 당해 보안서에서 호되게 당한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日帝시대 함경남도 영흥읍 면장을 지낸 박지양의 경우 당시 60세가 넘고 면장 재임기간 주민들의 신망이 두터웠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의 정책에 협조하지 않는다고 하여 악질 親日派라는 딱지를 붙여 가산을 몰수하고 가족을 모두 다른 지방으로 추방했다고 한다. 북한에 남아 있는 대다수 민족주의 성향의 인사들은 無보수 노력동원에 계속 끌려 다니면서 집단노동을 해야 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서 親日派에 대한 규정을 매우 제한적으로 적용하는 원칙을 내렸지만, 필요에 따라서 정치적 이유로 자의적인 親日派 처벌이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반면, 日帝시대 밀정이나 순사로 일했던 사람들이 재빨리 공산당에 가입해 면죄부를 받은 경우가 허다했다. 유식계층이 드물었던 공산당은 이들의 親日경력을 알면서도 入黨을 허락하고 관직까지 부여했다.
지주 308명을 親日派로 몰아 추방
1946년 실시된 토지개혁은 지주계층의 物的(물적) 토대를 붕괴시키고 조선공산당의 사회·경제적 입지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3월5일 「토지개혁법령」을 공포하고 「無償몰수·無償분배」 원칙 아래 수용과 분배를 실시했다. 당시 북한의 농경지 약 200만 정보 중 100여만 정보가 無償몰수되어 그중 98%가 토지 없는 농민들에게 無償으로 분배됐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사회주의 정권 수립을 위한 경제적 토대를 만들고, 國有化로 넘어가기 위한 단계적 조치였다. 토지개혁에 반대한 308명의 地主(지주)들과 富農(부농)들은 親日 反動분자로 낙인찍히고 거주지역에서 추방당했다.
1946년 실시된 지방 행정기관 선거에서 親日派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하는 조치를 취해 과거 정권기관에 복무했던 사람들이 권력기관에 진출하는 기회를 원천 봉쇄했다. 「북조선 面·郡·市·道 인민위원회 선거에 관한 규정」의 제1조에 따르면, 「조선총독부 및 道의 책임자급 이상으로 근무한 조선인, 親日단체 지도자로 복무한 자」들의 선거참여를 금지했다.
이러한 조치가 실시되자 정치·사회·경제적 토대를 잃은 많은 과거 日帝시대 행정기관 공무원, 지주와 자본가, 유식계층 등 공산당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남쪽으로 넘어오는 사태가 초래됐다.
소련 민정국 자료에 따르면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간 사람의 수는 1946년 4만4175명, 1947년에는 3만471명, 1948년 9723명(8월 말까지)이다. 그러나 통계에 잡히지 않은 실제 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의 사회성분을 살펴보면 貧農(빈농)이 1462명, 中農이 981명, 富農이 2773명, 地主가 3만2832명, 사무원이 1만4860명, 종교인이 3942명, 학생이 5432명, 기타가 2만1018명이다. 1947년에는 북한에서 만주로 2만5900명이 탈출했는데, 이들 중 대다수는 지주와 상인들이었다. 사회성분별 분류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의 땅을 가진 농민과 지주, 종교인과 유식계층이 탈출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親日 혐의자가 남한과 中國으로 대거 탈출
결국 북한에서는 광복 이후 1948년까지 日帝시대 親日 혐의자가 대부분 越南하거나 만주로 도피하면서 그 청산 대상 자체가 크게 축소됐다. 북한의 親日派 청산이 司法的(사법적) 처벌을 통하지 않고 급속히 진행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공산당에 협조하지 않거나 불만을 품은 과거 日帝시대 司法행정경찰 관료, 유식계층과 유산계층의 상당수가 남한으로 피신했기 때문이다.
소련 민정국의 「3개년(1945년 8월~1948년 11월) 사업총결보고서」에 따르면 1947년 279명이 親日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1948년에는 182명이 유죄로 확정됐다. 1946년 임시인민위원회 검찰청은 810명의 親日派와 반동자들을 체포했는데, 그들 중 131명만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것은 그 당시 해당의 법적 근거 없이 사람들을 잡아들였고, 죄가 없는 데도 상당수가 정치적 이유 등으로 親日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음을 시사한다. 이와 같은 부당한 행위는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47년 각급 검찰청 기관들은 親日 혐의로 321명을 체포했다. 그러나 체포된 親日 혐의자 중에 유죄판결은 98명에 그쳤다. 당시 검찰기관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북한 체제에 대한 정치적 공격행위와 親日세력 청산을 공동선상에 놓고 정치적 반대 세력을 탄압하는 데 이용했다.
북한 당국이 親日派로 규정된 당사자와 그 가족들을 3代가 지난 지금에 와서도 적대계층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정치적 의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金日成 동생 金英柱는 일본軍 통역
북한에서 親日派와 日帝시대 엘리트의 관직 진출도 적지않았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親日派 민족반역자 규정에 있는 부칙에서도 밝혔듯이, 「현재 나쁜 행동을 하지 않고 건국사업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자」는 그 죄상을 감면할 수도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민족통일전선에 대한 방침은 광복 직후 소련 軍政이 金日成에게 일관되게 요구했던 것이다. 日帝시대 엘리트에 대한 적극적인 영입정책은 金日成을 위시한 抗日 빨치산 세력이 토착 공산주의 세력과의 노선투쟁에도 적극 활용되었다.
金日成은 공산당에 협력하는 자에 한해서는 과거 행적을 묻지 않는 수용정책을 펼쳤다. 「조선전사」는 『金日成 동지께서는 지난날 공부나 좀 하고 日帝기관에 복무하였다고 해 오랜 인텔리들을 의심하거나 멀리하는 그릇된 경향을 비판 폭로하시면서, (중략) 그들을 새 조국 건설의 보람찬 길에 세워 주시었다』고 기록했다.
이어 『지난날 식민지 노예교육을 받고 日帝기관에 복무한 데로부터 자신들에게 적지않게 남아 있는 부르주아 사상을 뿌리 뽑고, (중략) 맡겨진 혁명임무를 책임적으로 수행해 나갔다』며 親日 인텔리들의 북한사회에 대한 기여를 높이 평가했다.
金日成은 당시 과학자·기술자·문화예술인 등의 인텔리들을 인민정권 기관과 주요 산업 기업소들의 책임적 지위와 그리고 교육·문화·보건기관들의 주요 부서에 일하도록 배치했다.
親日 경력을 가지고도 북한의 정권 중심부에 진출한 인물이 적지않았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金日成의 친동생 金英柱이다. 일본軍 통역으로 활동했던 그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북한의 실질적인 2인자로 활약했다.
黃長燁(황장엽) 前 북한 노동당 비서는 『金英柱가 중국 본토에 갔다가 관동군에게 체포돼 그에 복무한 것은 사실이다』면서 『북한 내부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金英柱가 어쩔 수 없이 이용당했다」는 논리를 쓰면서도 대외적으로 일본軍 복무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고 말했다.
駐북한 소련 민정국이 작성해 러시아 국방성 중앙문서보관소에 보관 중인 「지도적 당일꾼과 기술간부에 대한 평정」이라는 보고서에는 日帝에 복무하다가 광복 이후 북한의 정권 기관에 참여한 인물들의 이력이 나온다.
日帝 시기 만주에서 광산 지배인을 지내면서 日帝에 복무한 정준택은 광복이 되면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산업국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북한 정부 수립 당시 초대 국가계획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최고인민회의 1기부터 5기까지 대의원을 역임하고, 黨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을 거쳐 1972년 정무원 부총리로 기용됐다. 이듬해 사망할 때까지 그는 내각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日帝 말 함흥 철도국장을 지낸 한희진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교통국장에 임명됐다. 지주 출신 산업경제가이자 전기산업 이론가인 이문환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산업국장을 거쳤다.
만주에서 검사장을 하던 한낙규는 최영달 사법부장 밑에서 검찰총장을 했다. 그도 親日경력이 있었으나 정권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주변에서도 신망이 좋아 나중에는 金日成대학 교수로도 재직했다. 이들 대부분은 북한정권에 적극 협력하는 대신 선별적 관용을 받아 정부 요직에 진출했다.
일본군 출신의 공군사령관 이활
前 북한 노동당 고위관리를 지내다가 유럽에 망명한 서용규(가명)씨는 『金日成은 日帝 때 학병에 나갔거나, 해군으로 복무했거나, 비행기 조종사로 근무했던 사람들을 찾는 데 역점을 두었다. 金日成은 원산을 통해 입국하기 전부터 빨치산 출신들을 지방에 보내 세력을 확장하고 人材를 찾는 데 역점을 뒀다. 지방에 내려간 빨치산들이 이런 사람을 찾으면 소개장을 써서 金日成에게 보냈다』고 증언했다.
과거 일본군에서 활약했던 조종사들이 북한 공군을 창설하고 지도부를 형성한 것도 눈길을 끈다.
金日成은 초기 항공조종사 양성과정부터 일본군 출신을 적극 활용했다. 이는 金日成은 1946년 3월 평남 진남포에 설립된 북한 최초의 군사정치학교인 「평양학원」 책임일꾼들과의 담화에서 이렇게 말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지금 우리 청년들의 머릿속에는 日帝사상 잔재가 적지않게 남아 있습니다. 특히 항공기술자들 중에는 과거 日帝 군대에 복무한 사람들이 적지않은 것만큼 그들의 머릿속에 日帝 사상잔재가 많습니다. 평양학원에서는 항공반 학생들의 머릿속에서 日帝 사상 잔재를 뿌리 빼고 그들을 민주주의 사상으로 무장시키기 위한 정치사상 교양사업을 힘있게 전개해야 하겠습니다』
일본군 출신으로 북한 공군 창설을 지휘한 인물이 조선인민군 공군사령관을 지낸 이활이다. 1995년 평양 백과사전출판사가 출판한 조선대백과사전에는 이활의 이력이 잘 나와 있다. 이에 따르면 그는 평안북도 염주 출생으로 광복 전에 중학교를 다녔으며, 외국에서 비행학교를 졸업한 이후 그곳의 어느 한 신문사에서 비행사로 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필자에게 이 자료를 제공한 한 대학교수는 『공화국 영웅으로 그 업적을 빛내기 위해 일본군으로 복무한 사실을 덮어 두려는 것이다』고 말했다.
백과사전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이활은 1945년 8월부터 조선항공대 대장으로 근무하다 1947년 8월 군대에 입대해 비행부서 연대장으로 복무했다. 조국해방전쟁시기에는 항공사단장, 항공사령부 부사령관으로 미제의 공중작전을 파탄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1952년 1월1일 김포비행장에 대한 야간 기습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를 능숙하게 지휘해 B29를 포함한 적기를 수많이 격파 격추했다. 전쟁 전 기간 그가 지휘한 부대에서 10여 명의 공화국영웅이 탄생했다. 광복 직후부터 전후 시기까지 여러 차례 걸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접견을 받고 강령적 교시를 받았다. 1995년 10월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
金日成의 엘리트·기술자 우대
金日成은 일본인과 일본기업에 종사한 기술자들도 우대하는 파격적인 정책을 쓰기도 했다. 남한의 美 군정이 일본인 기술자를 대부분 일본으로 추방한 데 반해, 북한에서는 공장을 가동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 같은 사실은 朴正熙 정권 시절 청와대 경제제2수석비서관을 지낸 吳源哲(오원철)씨의 증언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북한의 경제건설과 관련, 매주 당시 중앙정보부로부터 보고와 중요자료를 받았다.
그에 따르면, 북한 당국이 일본인 기술자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북한에 남게 된 일본인 기술자는 1946년 11월 당시 868명이었다고 한다. 가족까지 합하면 2095명이다. 이 일본인 기술자들에게는 月 4500∼5000원을 지급했다. 당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金日成은 4000원, 인민위원회 과장급이 1500원을 받았다. 또한 이들에게는 「어떤 상황에서도 생명과 재산을 보장한다」는 신분증을 발부하고, 생필품과 주택을 포함해 최고 대우를 해주었다(吳源哲 著, 「한국형 경제건설」 제7권).
북한 당국은 1946년 흥남 비료공장에서 근무한 일본인 기술자 코 지치로(昆吉郞)씨를 「노동영웅」으로 표창까지 했다. 이후 그는 우리나라에 와서 울산석유화학의 폴리프로필렌 공장건설에 참여, 산업훈장을 받았다. 북한은 1949년 실시한 「2개년 계획」의 경제목표를 1944년도의 생산 수준까지 복구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상황이어서 이러한 조치가 불가피했다.
吳 前 수석은 『美 軍政은 일본의 기술을 무시하는 자세를 취했지만 소련은 일본인이 운영한 공장과 기술진을 적극 우대하는 정책을 취했다』면서 『金日成도 일본인과 이에 협력한 기술자들을 적극 우대하는 정책을 취했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親日派 청산이 비교적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에서 親日派 청산은 민족사적 청산작업이라기보다는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고 政敵(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의 성격이 강하다. 또한, 사회주의적 체제 수립 과정에서 수많은 親日 혐의자들이 越南하거나 만주로 탈출하는 등 자진 이탈한 것도 주요한 부분이다.
우리 현대사를 부정하는 어리석음
金日成의 엘리트 우대 정책은 親日派 처리 문제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 우리 사회 일각에서 일어나고 있는 때늦은 親日청산 회오리는 북한 金日成이 추진한 정책에도 미치지 못한 천박한 인식에서 출발한 것임을 잘 보여 준다.
金日成도 親日 엘리트들을 사회발전에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정권 기관에 등용하는 합리성을 보였다. 그러나 국내 일부 左派세력들은 광복 이후 5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사실과 다른 북한의 「親日派 청산 神話」를 들먹이며 우리 현대사를 부정하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있다.●
姜禎求(강정구) 교수는 2005년 5월 「親日청산은 북한이 앞섰다」는 칼럼에서 『북한은 민중들의 자연발생적 욕구, 소련 軍政(군정)의 지원, 정권기관의 과거 청산 의지로 거의 완벽하게 親日派 청산이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반면, 그는 남한에서는 美 軍政이 침몰해 가는 민족반역자를 나락에서 구원하고, 이들을 중용해 권력을 장악하게 했기 때문에 역사적 정통성이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주장한다.
姜교수는 이 칼럼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북한의 親日청산은 일본의 패망이 발표되는 해방공간 시점인 1945년 8월부터 조선민중의 자연발생적 힘에 의해 곧바로 시작되어 1946년 거의 완벽할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이 결과 북한에는 親日이라는 과거 청산 논쟁이 아예 발붙일 틈이 없게 되었다. 남한 역시 해방과 동시에 親日청산과 민중적 요구가 분출되어 자연발생적인 청산작업이 시작되었으나 美 점령군의 개입으로 즉각 중단되고 말았다.
북한의 親日청산은 진상규명에서부터 정신계승에 이르기까지 거의 완벽할 정도로 청산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남한의 경우 부끄럽게 진상규명조차 안 된 수준이다. 북의 親日청산과 이를 이은 자주정신은 그들만의 자산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자산으로 통일조국이 계승해야 할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창립선언문에서 『민족의 이름으로 단죄되어야 할 賣國(매국), 背族(배족)의 무리들이 참회하고 자숙하기는커녕 오히려 反민족적·反민중적 지배구조를 온존시킴에 따라 민족의 정신사는 황폐해지고 기회주의와 타락한 가치만이 현실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親日派를 청산하지 못하면서 우리 사회가 기회주의가 득세하는 세상이 됐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들 속에는 북한의 과거사 청산 의지를 높이 평가하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의식이 깔려 있다. 親北左派들은 북한 親日派 청산을 신화적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경향마저 있다. 그러나 정작 광복 이후 북한에서 親日派 청산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관해 구체적인 자료와 증언을 통해 규명해 보려는 노력은 찾아보기 어렵다. 해방 공간에서 북한의 정권기관이 편찬한 몇 가지 저작물을 인용해 북한 당국의 선전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이 고작이다.
8·15 광복 이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공산주의 세력이 확고히 뿌리 내리지 못한 상황에서 성급하게 공산당 단독 정권 수립을 기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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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30일 소련군 정치장교 메크레르 중좌(가운데)의 주선으로 평양의 한 음식점에서 만난 曺晩植(왼쪽)과 金日成(오른쪽). |
소련 軍政은 1945년 말 신탁통치 문제로 左右연립을 포기하기 전까지 親日派 처벌 최소화를 요구한 민족주의 진영의 입장을 존중했다. 민족주의 진영은 독립운동가뿐만 아니라 日帝시대 사법행정기관 복무자·교육자·지주·문인·상업자본가 출신 등이 혼재돼 있었다. 소련 軍政과 공산당도 親日派 숙청 범위를 최소화하면서 사회적 갈등으로 비화시키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했다.
광복 직후 북한 전역에서는 日帝 강점기 주민들로부터 원성이 높았던 악질 형사나 밀정 등을 자발적으로 처벌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를테면 경찰주재소·파출소 등에서 미처 도망가지 못한 자들을 주민들이 직접 잡아 가두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형태였다.
소련 軍政이 실시되면서 지방에는 행정체계가 마련되고, 각 道 인민위원회 산하에 경찰조직인 보안서를 설치해 치안유지와 親日세력 척결에 나섰다.
그러나 그 대상과 처벌 정도는 매우 온건했다. 당시 민족주의 계열이 인민위원회에 다수 포함돼 있었고, 左右의 심각한 대립을 방지하기 위한 양측 진영의 정치적 고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親日 혐의자도 親日 이력이 매우 뚜렷하고 그 행위가 악독한 자로 제한됐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북한관계사료집에는 1945년 11월 강원도 철원에서 道 검찰국이 주민들을 모아 놓고 민족반역자 11명의 死刑(사형)을 집행하려다 소련軍의 명령으로 중지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강원도 검찰국은 1946년 4월 강원도內 13개郡에서 290명의 민족반역자 명단을 작성해 북조선 사법국장에게 제출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그러나 그해 親日혐의로 체포된 사람은 북한 전역에서 810명이었다. 이 중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98명뿐이었다.

광복 이후 북한에서 日帝 잔재 청산 문제가 최초로 공론화한 것은 1945년 9월15일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 회의에서였다. 조선산업노동조사소가 1945년 편찬한 「옳은 노선을 위하여」라는 문건에 따르면, 평남지구위원회 회의에서는 「조선혁명을 위해 反日을 목적으로 하는 각 당파, 각 단체, 각 계급계층을 망라하여 민족대동단결을 이뤄 日帝 잔재 요소를 철저히 숙청하는 데 있다」고 결정한 사실이 나온다.
이 회의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와 親日的 조선인 및 반동자본가가 소유한 일체의 생산기관을 몰수해 국유화하고, 일본 제국주의자와 親日的 조선인 및 反動지주가 소유한 토지도 전부 몰수해 國有化하고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할 것을 규정했다.
당시 親日派와 그 잔재에 대한 청산문제가 공산당의 주요한 과제로 설정된 점을 알 수 있다. 이것은 親日派를 청산하고 경제적 기반을 몰수하는 것이 결국 사회주의적 혁명을 통한 공산정권 수립의 주요한 원천이 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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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월 贊託 집회에 참석하는 金日成. |
1945년 11월15~17일 사이에 열린 북조선 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제2차 확대 집행위원회에서 金日成은 「진정한 인민의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라는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 金日成은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는 親日派, 민족반역자들을 제외하고 진보적이며 애국적인 각 정당들과 각계각층 인민의 참다운 대표들로 구성돼야 한다』고 연설했다.
1946년 1월31일 전국농민조합 북조선 연맹 결성대회에서는 『인민주권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에게는 보복적으로 민족반역자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다.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결성됐다. 임시인민위원회 委員長에는 金日成이 선출됐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그해 3월7일 「親日派, 민족 반역자에 대한 규정」을 채택했다. 북한에서는 남한의 반민특위법과 같은 親日派 처리에 대한 법률이 제정되지 못했다. 親日派 분류나 처벌에 관한 법률이 없기 때문에 임시인민위원회의 親日派 규정이 북한에서 일반적인 親日 분류 기준으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1992년 조선노동당출판사가 펴낸 「金日成 전집」 3권에 총 15개로 이루어진 규정이 나온다. 이 규정에 따르면 ▲日帝의 조선 침략 당시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와 그 관계자 ▲日帝 당국으로부터 귀족 칭호를 받은 자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고문 및 참의 ▲일본 국회 귀족원과 중의원의 의원 ▲日帝 통치시대 악질 고관(道 사무관 이상까지) ▲日帝 경찰 및 헌병의 고급관리(경찰 경시, 헌병 하사관급 이상) ▲사상담임 판사와 검사 ▲인민들의 원한이 된 고등정치경찰의 악질분자 ▲고등정치 경찰의 밀정 책임자와 악질 밀정 ▲해외 혁명투사를 학살한 자 ▲親日부역단체의 간부와 악질분자 ▲군수 산업의 책임 경영자 및 군수품 조달 책임자 ▲日帝 행정사법경찰 기관과 관계를 맺고 만행을 저지른 민간 악질 분자 ▲학도병 및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는 데 앞장선 정치지도자가 대상이다. 그리고 ▲8·15 광복 이후 민주주의적 단체를 파괴하고 그 지도자를 암살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 자와 반동단체에 의식적으로 가담한 자 ▲민족통일전선 형성을 방해하는 반동단체의 밀정 혹은 선전원으로서 밀정 행위를 감행한 자 등이 포함됐다.

이러한 규정은 단순히 日帝 기관에 복무했거나 관련 기관에 근무했다고 해서 親日派로 분류하는 것을 제한하고 있다. 또한, 부칙에 「이상의 조항에 해당한 자로서 현재 나쁜 행동을 하지 않는 자와 건국사업을 적극 협력하는 자에 한하여서는 그 죄상을 감면할 수도 있다」는 조항을 뒀다. 결국 공산당에 적극 협력한 자는 그 죄를 묻지 않는 길을 열어둔 것이다.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반도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조만식은 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를 소집하고 「신탁통치를 찬성할 수 없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것은 조만식을 비롯한 민족진영의 소련 軍政에 대한 선전포고와 같은 것이었다. 결국, 조만식은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의장직을 사임하고 고려호텔에 강제 軟禁(연금)됐다.
이후 소련 軍政과 공산당 세력은 「민족주의 진영과 연대」 노선에서 「우익 타도」 노선으로 급선회했다. 이후 북한에서 親日派와 민족반역자에 대한 처벌은 과거의 親日행위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소련 軍政과 북한정권 기관에 대한 저항과 이들이 시행하는 국가시책에 대한 반대라는 현재의 「反動행위」에 대한 처벌과 밀접한 연관을 맺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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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親日派 청산은 토지개혁 등 사회주의 체제 수립을 위한 수단이었다. |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右翼민족주의 세력을 배제하기 위한 논리로 등장한 親日派 민족반역자 숙청운동은 美蘇공동위원회 시기 한층 격화되었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반탁진영의 모든 집단에 대해 전면적인 공격을 가했다. 曺晩植에 대한 비난은 그가 학도지원병 모집에 협력한 전쟁범죄자라고 주장함으로써 극에 달했다.
북조선분국은 李承晩을 나라의 이권을 팔아먹는 파렴치범으로, 金九를 「살인·방화·매국의 화신」으로 단죄했다. 남조선 민주의원에 대해서도 親日분자 민족반역자 소수 특권계층을 기반으로 「팟쇼적 노선」을 걷고 있다고 비판하고, 이를 타도하기 위해 무자비한 투쟁을 전개할 것을 촉구했다. 신탁통치에 반대한 북한의 개신교 목사들은 신사참배를 선동하고 학도지원병 모집에 협력한 「왜놈들의 앞잡이」로 성토되었다>
북한의 역사서 「조선전사」의 현대편(23권) 「민주건설사 1」은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曺晩植과 그 일당을 비롯하여 지방정권기관의 일부 책임적 지위에 기어들었던 불순분자들은 사업을 고의적으로 태공(사보타주)하면서 인민정권 기관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을 파괴하기 위하여 음으로 양으로 날뛰었다』고 기록했다.
이어 『지방인민위원회들로 하여금 진정한 인민의 정권기관으로서의 자기의 임무를 옳게 수행하게 하자면 무엇보다도 그 안에 기어든 親日派, 민족반역자 등 불순분자들을 적발 숙청하기 위한 투쟁이 힘차게 벌어지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는 曺晩植을 비롯해 반탁운동을 전개한 右翼민족주의자들을 親日派로 몰아 정권기관에서 추방하기 위한 사업이 진행됐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당시 지방 인민위원회에서도 소련 軍政에 의해 민족주의 진영 인사들이 밀려나고 공산당 세력이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인민위원장을 비롯해 주요 간부직은 공산당원이 독점했다. 보안대의 역할도 단순한 치안유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에 반대하는 주요 인사와 세력들을 감시하고 잡아 가두는 일로 확대됐다.
당시 인민위원회는 소련 軍政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권한이 막강했다. 日帝시대 유식계층이었던 공무원(道·郡·面 사무소 근무자, 공공기관 근무자, 사법기관 경찰 종사자, 공출담당, 교육자 등)과 자산가(지주와 상업자본가) 등은 국가 건설 주역에서 감시와 핍박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인민위원회는 자신들의 정치적 명분과 위상을 세우고 공산당에 대한 지지를 강화하기 위해 親日派 청산을 대대적으로 내세웠다. 이때부터는 사회적으로 강압적인 분위기가 형성되고, 유식계층에 대한 공산당의 적극적인 침투와 회유작업도 진행됐다.
曺晩植이 결성한 조선민주당 당원들은 보안대의 집중 감시 대상이 됐다. 조선민주당 결성은 결과적으로 공산당이 주민들을 赤과 白으로 구분해 反共·민족주의 진영을 탄압하는 데 좋은 자료를 제공한 셈이 됐다. 1946년 이후 조선민주당 가입 인사들은 미행과 감시의 대상이 되고, 관직에도 발을 붙이지 못했다.
함경남도 고원에서 교사로 근무했던 한 越南者(월남자)의 증언에는 당시 사회 분위기가 잘 드러난다. 이 越南者는 1946년 초 面 체육대회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동창생을 만나서 『「저놈들(공산당원들) 보기 싫어서 살맛이 안 난다」는 말을 했다가 밀고를 당해 보안서에서 호되게 당한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日帝시대 함경남도 영흥읍 면장을 지낸 박지양의 경우 당시 60세가 넘고 면장 재임기간 주민들의 신망이 두터웠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의 정책에 협조하지 않는다고 하여 악질 親日派라는 딱지를 붙여 가산을 몰수하고 가족을 모두 다른 지방으로 추방했다고 한다. 북한에 남아 있는 대다수 민족주의 성향의 인사들은 無보수 노력동원에 계속 끌려 다니면서 집단노동을 해야 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서 親日派에 대한 규정을 매우 제한적으로 적용하는 원칙을 내렸지만, 필요에 따라서 정치적 이유로 자의적인 親日派 처벌이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반면, 日帝시대 밀정이나 순사로 일했던 사람들이 재빨리 공산당에 가입해 면죄부를 받은 경우가 허다했다. 유식계층이 드물었던 공산당은 이들의 親日경력을 알면서도 入黨을 허락하고 관직까지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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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통역 출신으로 한때 북한 정권의 2인자였던 金日成의 동생 金英柱. |
북한의 토지개혁은 사회주의 정권 수립을 위한 경제적 토대를 만들고, 國有化로 넘어가기 위한 단계적 조치였다. 토지개혁에 반대한 308명의 地主(지주)들과 富農(부농)들은 親日 反動분자로 낙인찍히고 거주지역에서 추방당했다.
1946년 실시된 지방 행정기관 선거에서 親日派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하는 조치를 취해 과거 정권기관에 복무했던 사람들이 권력기관에 진출하는 기회를 원천 봉쇄했다. 「북조선 面·郡·市·道 인민위원회 선거에 관한 규정」의 제1조에 따르면, 「조선총독부 및 道의 책임자급 이상으로 근무한 조선인, 親日단체 지도자로 복무한 자」들의 선거참여를 금지했다.
이러한 조치가 실시되자 정치·사회·경제적 토대를 잃은 많은 과거 日帝시대 행정기관 공무원, 지주와 자본가, 유식계층 등 공산당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남쪽으로 넘어오는 사태가 초래됐다.
소련 민정국 자료에 따르면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간 사람의 수는 1946년 4만4175명, 1947년에는 3만471명, 1948년 9723명(8월 말까지)이다. 그러나 통계에 잡히지 않은 실제 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의 사회성분을 살펴보면 貧農(빈농)이 1462명, 中農이 981명, 富農이 2773명, 地主가 3만2832명, 사무원이 1만4860명, 종교인이 3942명, 학생이 5432명, 기타가 2만1018명이다. 1947년에는 북한에서 만주로 2만5900명이 탈출했는데, 이들 중 대다수는 지주와 상인들이었다. 사회성분별 분류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의 땅을 가진 농민과 지주, 종교인과 유식계층이 탈출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결국 북한에서는 광복 이후 1948년까지 日帝시대 親日 혐의자가 대부분 越南하거나 만주로 도피하면서 그 청산 대상 자체가 크게 축소됐다. 북한의 親日派 청산이 司法的(사법적) 처벌을 통하지 않고 급속히 진행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공산당에 협조하지 않거나 불만을 품은 과거 日帝시대 司法행정경찰 관료, 유식계층과 유산계층의 상당수가 남한으로 피신했기 때문이다.
소련 민정국의 「3개년(1945년 8월~1948년 11월) 사업총결보고서」에 따르면 1947년 279명이 親日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1948년에는 182명이 유죄로 확정됐다. 1946년 임시인민위원회 검찰청은 810명의 親日派와 반동자들을 체포했는데, 그들 중 131명만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것은 그 당시 해당의 법적 근거 없이 사람들을 잡아들였고, 죄가 없는 데도 상당수가 정치적 이유 등으로 親日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음을 시사한다. 이와 같은 부당한 행위는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47년 각급 검찰청 기관들은 親日 혐의로 321명을 체포했다. 그러나 체포된 親日 혐의자 중에 유죄판결은 98명에 그쳤다. 당시 검찰기관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북한 체제에 대한 정치적 공격행위와 親日세력 청산을 공동선상에 놓고 정치적 반대 세력을 탄압하는 데 이용했다.
북한 당국이 親日派로 규정된 당사자와 그 가족들을 3代가 지난 지금에 와서도 적대계층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정치적 의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북한에서 親日派와 日帝시대 엘리트의 관직 진출도 적지않았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親日派 민족반역자 규정에 있는 부칙에서도 밝혔듯이, 「현재 나쁜 행동을 하지 않고 건국사업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자」는 그 죄상을 감면할 수도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민족통일전선에 대한 방침은 광복 직후 소련 軍政이 金日成에게 일관되게 요구했던 것이다. 日帝시대 엘리트에 대한 적극적인 영입정책은 金日成을 위시한 抗日 빨치산 세력이 토착 공산주의 세력과의 노선투쟁에도 적극 활용되었다.
金日成은 공산당에 협력하는 자에 한해서는 과거 행적을 묻지 않는 수용정책을 펼쳤다. 「조선전사」는 『金日成 동지께서는 지난날 공부나 좀 하고 日帝기관에 복무하였다고 해 오랜 인텔리들을 의심하거나 멀리하는 그릇된 경향을 비판 폭로하시면서, (중략) 그들을 새 조국 건설의 보람찬 길에 세워 주시었다』고 기록했다.
이어 『지난날 식민지 노예교육을 받고 日帝기관에 복무한 데로부터 자신들에게 적지않게 남아 있는 부르주아 사상을 뿌리 뽑고, (중략) 맡겨진 혁명임무를 책임적으로 수행해 나갔다』며 親日 인텔리들의 북한사회에 대한 기여를 높이 평가했다.
金日成은 당시 과학자·기술자·문화예술인 등의 인텔리들을 인민정권 기관과 주요 산업 기업소들의 책임적 지위와 그리고 교육·문화·보건기관들의 주요 부서에 일하도록 배치했다.
親日 경력을 가지고도 북한의 정권 중심부에 진출한 인물이 적지않았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金日成의 친동생 金英柱이다. 일본軍 통역으로 활동했던 그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북한의 실질적인 2인자로 활약했다.
黃長燁(황장엽) 前 북한 노동당 비서는 『金英柱가 중국 본토에 갔다가 관동군에게 체포돼 그에 복무한 것은 사실이다』면서 『북한 내부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金英柱가 어쩔 수 없이 이용당했다」는 논리를 쓰면서도 대외적으로 일본軍 복무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고 말했다.
駐북한 소련 민정국이 작성해 러시아 국방성 중앙문서보관소에 보관 중인 「지도적 당일꾼과 기술간부에 대한 평정」이라는 보고서에는 日帝에 복무하다가 광복 이후 북한의 정권 기관에 참여한 인물들의 이력이 나온다.
日帝 시기 만주에서 광산 지배인을 지내면서 日帝에 복무한 정준택은 광복이 되면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산업국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북한 정부 수립 당시 초대 국가계획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최고인민회의 1기부터 5기까지 대의원을 역임하고, 黨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을 거쳐 1972년 정무원 부총리로 기용됐다. 이듬해 사망할 때까지 그는 내각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日帝 말 함흥 철도국장을 지낸 한희진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교통국장에 임명됐다. 지주 출신 산업경제가이자 전기산업 이론가인 이문환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산업국장을 거쳤다.
만주에서 검사장을 하던 한낙규는 최영달 사법부장 밑에서 검찰총장을 했다. 그도 親日경력이 있었으나 정권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주변에서도 신망이 좋아 나중에는 金日成대학 교수로도 재직했다. 이들 대부분은 북한정권에 적극 협력하는 대신 선별적 관용을 받아 정부 요직에 진출했다.

前 북한 노동당 고위관리를 지내다가 유럽에 망명한 서용규(가명)씨는 『金日成은 日帝 때 학병에 나갔거나, 해군으로 복무했거나, 비행기 조종사로 근무했던 사람들을 찾는 데 역점을 두었다. 金日成은 원산을 통해 입국하기 전부터 빨치산 출신들을 지방에 보내 세력을 확장하고 人材를 찾는 데 역점을 뒀다. 지방에 내려간 빨치산들이 이런 사람을 찾으면 소개장을 써서 金日成에게 보냈다』고 증언했다.
과거 일본군에서 활약했던 조종사들이 북한 공군을 창설하고 지도부를 형성한 것도 눈길을 끈다.
金日成은 초기 항공조종사 양성과정부터 일본군 출신을 적극 활용했다. 이는 金日成은 1946년 3월 평남 진남포에 설립된 북한 최초의 군사정치학교인 「평양학원」 책임일꾼들과의 담화에서 이렇게 말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지금 우리 청년들의 머릿속에는 日帝사상 잔재가 적지않게 남아 있습니다. 특히 항공기술자들 중에는 과거 日帝 군대에 복무한 사람들이 적지않은 것만큼 그들의 머릿속에 日帝 사상잔재가 많습니다. 평양학원에서는 항공반 학생들의 머릿속에서 日帝 사상 잔재를 뿌리 빼고 그들을 민주주의 사상으로 무장시키기 위한 정치사상 교양사업을 힘있게 전개해야 하겠습니다』
일본군 출신으로 북한 공군 창설을 지휘한 인물이 조선인민군 공군사령관을 지낸 이활이다. 1995년 평양 백과사전출판사가 출판한 조선대백과사전에는 이활의 이력이 잘 나와 있다. 이에 따르면 그는 평안북도 염주 출생으로 광복 전에 중학교를 다녔으며, 외국에서 비행학교를 졸업한 이후 그곳의 어느 한 신문사에서 비행사로 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필자에게 이 자료를 제공한 한 대학교수는 『공화국 영웅으로 그 업적을 빛내기 위해 일본군으로 복무한 사실을 덮어 두려는 것이다』고 말했다.
백과사전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이활은 1945년 8월부터 조선항공대 대장으로 근무하다 1947년 8월 군대에 입대해 비행부서 연대장으로 복무했다. 조국해방전쟁시기에는 항공사단장, 항공사령부 부사령관으로 미제의 공중작전을 파탄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1952년 1월1일 김포비행장에 대한 야간 기습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를 능숙하게 지휘해 B29를 포함한 적기를 수많이 격파 격추했다. 전쟁 전 기간 그가 지휘한 부대에서 10여 명의 공화국영웅이 탄생했다. 광복 직후부터 전후 시기까지 여러 차례 걸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접견을 받고 강령적 교시를 받았다. 1995년 10월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

金日成은 일본인과 일본기업에 종사한 기술자들도 우대하는 파격적인 정책을 쓰기도 했다. 남한의 美 군정이 일본인 기술자를 대부분 일본으로 추방한 데 반해, 북한에서는 공장을 가동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 같은 사실은 朴正熙 정권 시절 청와대 경제제2수석비서관을 지낸 吳源哲(오원철)씨의 증언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북한의 경제건설과 관련, 매주 당시 중앙정보부로부터 보고와 중요자료를 받았다.
그에 따르면, 북한 당국이 일본인 기술자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북한에 남게 된 일본인 기술자는 1946년 11월 당시 868명이었다고 한다. 가족까지 합하면 2095명이다. 이 일본인 기술자들에게는 月 4500∼5000원을 지급했다. 당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金日成은 4000원, 인민위원회 과장급이 1500원을 받았다. 또한 이들에게는 「어떤 상황에서도 생명과 재산을 보장한다」는 신분증을 발부하고, 생필품과 주택을 포함해 최고 대우를 해주었다(吳源哲 著, 「한국형 경제건설」 제7권).
북한 당국은 1946년 흥남 비료공장에서 근무한 일본인 기술자 코 지치로(昆吉郞)씨를 「노동영웅」으로 표창까지 했다. 이후 그는 우리나라에 와서 울산석유화학의 폴리프로필렌 공장건설에 참여, 산업훈장을 받았다. 북한은 1949년 실시한 「2개년 계획」의 경제목표를 1944년도의 생산 수준까지 복구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상황이어서 이러한 조치가 불가피했다.
吳 前 수석은 『美 軍政은 일본의 기술을 무시하는 자세를 취했지만 소련은 일본인이 운영한 공장과 기술진을 적극 우대하는 정책을 취했다』면서 『金日成도 일본인과 이에 협력한 기술자들을 적극 우대하는 정책을 취했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親日派 청산이 비교적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에서 親日派 청산은 민족사적 청산작업이라기보다는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고 政敵(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의 성격이 강하다. 또한, 사회주의적 체제 수립 과정에서 수많은 親日 혐의자들이 越南하거나 만주로 탈출하는 등 자진 이탈한 것도 주요한 부분이다.

金日成의 엘리트 우대 정책은 親日派 처리 문제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 우리 사회 일각에서 일어나고 있는 때늦은 親日청산 회오리는 북한 金日成이 추진한 정책에도 미치지 못한 천박한 인식에서 출발한 것임을 잘 보여 준다.
金日成도 親日 엘리트들을 사회발전에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정권 기관에 등용하는 합리성을 보였다. 그러나 국내 일부 左派세력들은 광복 이후 5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사실과 다른 북한의 「親日派 청산 神話」를 들먹이며 우리 현대사를 부정하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