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一
1929년 전남 고흥 출생. 東京 역도산체육관 문하생 1기(1957). 올아시아태그챔피언(1966), WWA 세계헤비급챔피언(1967). 국민훈장 석류장·체육훈장 맹호장 수상.
1929년 전남 고흥 출생. 東京 역도산체육관 문하생 1기(1957). 올아시아태그챔피언(1966), WWA 세계헤비급챔피언(1967). 국민훈장 석류장·체육훈장 맹호장 수상.
11년째 병실에서 기거
박치기 하나로 세계의 싸움꾼들을 잠재웠던 프로 레슬러 金一(김일·76). 가난에 쪼들렸던 1960~1970년대 그는 한국인의 영웅이자 恨풀이 어릿광대였다.
사각의 링에서 야수처럼 포효하던 그가 이제는 사각의 병실에 갇혀 버렸다. 그를 만나려고 지난 8월25일 오후 2시 서울 노원구 하계동 을지병원을 찾아갔다.
7층 오른쪽 맨 끝방 7211호. 환자 팻말에 적힌 이름은 「김일」. 6평 남짓한 병실에는 환자침대 1개와 보호자 침상 1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곳은 분명 병실이다. 그런데 벽에 붙어 있는 각종 사진과 기록들이 방문객을 의아하게 만든다.
챔피언 벨트를 맨 사진, 박치기를 날리는 장면, 외국인 프로레슬러들과의 기념사진. 그제야 이곳이 박치기왕이 15년째 살고 있는 안방임을 깨닫게 된다.
한쪽 벽에는 달력만 한 종이 위에 데뷔시절부터 은퇴까지 그의 주요 승부와 일대기가 연도별로 정리돼 있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링거를 꼽았던 왼쪽 손등에는 연필 뚜껑 같은 導管(도관)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박치기 후유증으로 생긴 뇌혈관 질환과 고혈압·심부전은 이제 지병이 됐고, 下肢浮腫(하지부종)은 걸음걸이를 붙들어맨다. 지난 6월23일에는 腸(장) 수술을 받았는데 다행히 악성 종양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병수발은 10년 전 재혼한 부인(李仁順·59)의 몫이었다.
『매일 고마워하며 살고 있다』
진료는 하루 세 번씩 받는다고 했다. 필자가 인터뷰하는 도중에도 회진은 계속됐다. 나이 탓인지 말수가 줄었고 마른침을 자주 삼켰다. 한 마디를 물으면 한참 동안 생각했다. 그때 그 순간의 영상이 빨리 잡히지 않는 듯 느껴졌다.
마침 수제자인 李王杓(이왕표) 한국종합격투기협회 회장이 자리를 함께해 그 옛날 기억들을 끄집어내 주었다.
―세상을 휘젓고 다니던 장사가 11년째 병실에 계시니 참 갑갑하게 보입니다.
『모르는 소립니다. 여기가 얼마나 편한데요. 하루 세 끼 밥 주지요, 방도 깨끗하고 조용하지요. 아프면 약 주고 더 아프면 수술해 주고. 저는 매일 매일을 고마워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지난번의 수술 후유증은 없었습니까.
『처음 며칠간은 고생했습니다만 이제는 편안합니다. 수술 결과도 좋다고 하네요』
―몸이 좀 야윈 것 같습니다.
『늙고 병들었으니 그럴 수밖에요. 한창 때 체중의 3분 2도 안 되는 78kg입니다』
―더러 외식도 하십니까.
『가끔 병원 근처 불고기 집에 가서 된장찌개에 복분자 술 한 잔 정도는 합니다』
―가족들은 자주 옵니까.
『…』
힘겹게 이어지던 대화는 이 대목에서 잠깐 중단됐다.
그의 신상명세서에는 2남2녀가 적혀 있다. 옆에서 李회장이 거든다.
『장남은 6월 수술 때 다녀갔고 막내아들은 예전에 세상을 떴습니다』
장남(壽煥·56)은 뉴욕에 살고, 막내(基煥)는 27년 전 軍 복무 중 사망했단다.
金一은 지금까지 세 번 울었다 한다.
1963년 12월15일 力道山(역도산)의 죽음, 1978년 3월 軍에 간 막내아들의 죽음, 1995년 4월2일 도쿄돔에서의 은퇴식 때로 모두 이별과 접속돼 있다.
레슬링 무대에서의 승부가 환한 조명이었다면 떨어져 산 가족들과의 愛憎(애증)은 어둠이었다.
1929년 2월4일 전남 고흥군 금산면 어전리 거금도에서 金正守(김정수)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6척 장신인 아버지를 닮아 어릴 때부터 기골이 장대했다. 금산공립소학교(14회)를 마친 이듬해부터 마을 씨름대회에 나가 송아지를 상으로 받아 왔다.
그가 열여섯 살 때 광복을 맞았다.
『빨갱이 짓도 못할 놈이구먼』
1948년 10월20일, 여수에 주둔 중인 14연대의 좌익계열이 제주 4·3 사태의 진압출동을 거부하고 남북통일과 인민해방을 앞세워 봉기했다. 이른바 麗順(여순)반란이었다.
섬 마을인 거금도의 젊은이들은 左·右를 구분할 수 없었다. 『마을을 지키러 왔다』는 그들의 말을 믿고 그냥 따라다녔다.
『나도 끼어 들었지요. 그런데 친구들이 「넌 집에 각시가 기다리니 돌아가라」면서 말립디다』
장손인 金一은 그해 5월 아버지의 엄명으로 마을의 세 살 위 처녀(박금례)와 혼례를 올렸었다. 국군의 진압작전이 시작되면서 친구들은 낮에는 산에 올라가고 밤에는 내려왔다.
1950년 2월 여순 사건은 진압됐고 재판이 시작됐다. 친구들은 물론이고 金一도 광주까지 끌려가 軍법정에 섰다.
검사가 물었다.
―너, 빨갱이지?
『아닌데요…』
―왜 附逆(부역)을 했냐?
『부역이 뭡니까?』
검사가 책상을 쳤다. 法帽(법모)가 떨어졌다. 金一이 주워서 먼지를 턴 뒤 올려놓았다. 그가 하는 짓을 지켜보던 검사가 씩 웃었다.
『자식, 빨갱이 짓도 못 할 놈이구먼』
그 길로 풀려났다. 그러나 곧이어 6·25 전쟁이 터지자 뒤죽박죽이 됐다. 어느 쪽이든 잡혀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도망쳤다.
권투 세계 챔피언 金基洙와의 만남
세월은 흘렀다. 1955년 그는 4남매의 아버지가 돼 있었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직장을 구한다는 건 어불성설. 그는 여수 오동도 씨름대회에서 새까만 후배를 한 명 알게 된다.
함경도 북청에서 피란 내려왔다는 金基洙(김기수)는 몸놀림이 꽤나 빨랐다. 막판에 그와 붙어 이기긴 했으나 아주 까다로운 상대였다.
『호적상으로는 10년 차이였지만 피란통이라 실제로는 다섯 살밖에 안 떨어졌습니다』
여수는 선원들의 내왕이 잦았다. 그들을 통해 일본 잡지도 얻어 보았다. 金一은 그 속에서 力道山(역도산)을 발견한다. 일본의 유도왕을 가라데(空手) 한 방에 박살 내고 요코츠나도 그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고 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이었다.
『부산에서는 나가사키(長岐)에서 쏘는 니혼(日本)TV의 방송을 볼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그의 레슬링 장면이 자주 나왔습니다. 그걸 보고 張永哲(장영철)이 레슬링을 시작했으니까』
金一은 「일본에 가서 力道山의 제자가 되자」고 결심한다.
당시에는 일본과 국교가 없을 때라 방법은 밀항뿐이었다. 일본말은 자신 있었다. 소학교에서 일본 선생에게 배웠으니까. 떠나기 전날 그는 여수로 가서 金基洙를 만난다. 그는 씨름을 걷어치우고 권투도장에 다니고 있었다.
『난 간다. 열심히 해라. 나중에 일본에서 만나자』
아내와 4남매는 집에 둔 채 그는 그 길로 밤배를 타고 시모노세키로 갔다. 1956년 10월이었다. 오사카까진 무사했다. 그러나 도쿄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렸다. 요코하마(橫浜) 형무소에 수감됐다. 그곳에는 강제송환 차례를 기다리는 밀항자들이 가득했다.
『해가 바뀌어도 강제송환 순서는 줄어들지 않았어요. 이러다간 평생을 썩겠다싶어 力道山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밑져도 본전이니까』
―뭐라고 쓰셨습니까.
『「저는 한국에서 씨름을 한 젊은이입니다. 제자가 되고 싶어서 현해탄을 건너왔습니다. 제발 좀 구해 주십시오」
겉봉에는 주소를 몰라 「東京 力道山」이라고만 썼는데 편지가 들어갑디다』
며칠 후 金一은 석방된다.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편지를 받은 力道山은 후원자인 오노 반보쿠(大野伴睦·자민당 부총재)에게 부탁했고 그의 전화 한 통화가 金一을 불러낸 것이다. 오노는 훗날 韓日회담의 일본 측 막후 조정자로 나선다.
―力道山은 처음 만나서 뭐라고 합디까.
『제게 「현해탄을 건너왔으니 어떠한 고통이라도 참아야 한다」고 다짐을 시킵디다. 제겐 하늘이었습니다』
金一과 力道山은 불과 다섯 살 차이지만 金一은 인터뷰 내내 力道山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도장 생활은 어땠습니까.
『말 마십시오. 집은 도쿄 우메다초(梅町)에 있고 도장은 니혼바시(日本橋) 닌교초(人形町)에 있었는데, 나는 양쪽을 오가며 잡일을 도맡아서 했습니다. 도장은 2층으로 너무 넓어 빨래하고 청소하는 데 한나절이 걸렸습니다』
―훈련은 어떠했습니까.
『레슬링이란 게 참 묘한 운동입디다. 씨름은 넘어지면 끝인데, 레슬링은 시작이에요. 숨 돌릴 틈이 없습니다.
선생님의 배 아래에 한 번 깔리면 빠져나올 재간이 없어요. 저의 뭉그러진 왼쪽 귀가 그 「증표」입니다』
혹독한 훈련과정
―力道山이 그렇게 독하게 훈련을 시켰습니까.
『난 매일 맞고 살았습니다. 하루라도 안 맞으면 허전했어요.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후배인 자이언츠 바바(馬場)나 안토니오 이노키(猪木)는 거의 안 맞았습니다. 키가 크다고 그런 건지, 아니면 주걱턱이 잘생겼다고 그런 건지, 좌우지간 나는 맞는 게 일과였습니다.
맞고 나면 꼭 일본말로 「감사합니다」하고 인사를 해야 해요. 요즘 같으면 벌써 경찰에 고발했을 텐데』
―왜 그렇게 혹독하게 했을까요.
『한번은 맞는 게 너무 지겨워 도망쳐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같은 민족끼리 이럴 수 있나 싶어 별 생각이 다 듭디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선생님이 조용히 저를 불러서 이렇게 말씀하시데요.
「나의 매가 끝나는 날, 너와 인연도 끝이다」 그제야 선생님의 참뜻을 알았습니다. 좋은 연장은 뜨겁게 달궈서 더 많이 때려야 다듬어진다는 것을』
―바바나 이노키와의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저보다 도장 입문이 1년 늦었습니다. 열 살 아래인 바바는 이름만큼이나 체격도 컸습니다. 키가 208cm인데다 발도 워낙 커 16문(384mm)짜리 신발을 신습니다. 그 큰 발을 이용한 「16文 킥」이 主무기입니다. 아무도 접근이 안 되니까요. 니가타(新瀉) 출신으로 원래는 프로야구 자이언츠의 투수였지요』
이노키는 성장배경이 다르다. 1943년 요코하마에서 태어난 그는 열네 살 때 가족과 함께 브라질로 이민 갔다가 2년 뒤 현지에 순회경기차 갔던 力道山의 눈에 띄어 스카우트되었다. 브라질의 투원반 선수로 주걱턱이 일품이다. 그런데 이 친구는 「雜湯(잡탕)」을 즐긴다. 이른바 異種(이종)격투기.
알리와 이노키의 「세기의 대결」
1976년 6월26일 도쿄에서 프로복싱 세계헤비급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와 이노키의 「세기의 대결」이 펼쳐졌다.
이 시합에서 알리는 15라운드 동안 고작 3개의 펀치를 날렸고, 이노키는 시종 매트에 누워 알리의 정강이만 걷어차다 무승부로 끝냈다. 파이트머니는 알리가 600만 달러, 이노키가 400만 달러였다.
다음날 알리는 이런 말을 내뱉었다.
『이노키는 창녀다. 누워서 돈을 벌었으니까』
이노키는 1989년 스포츠 평화당으로 정계에 진출, 참의원까지 지냈다.
―셋 가운데 누가 가장 강했습니까.
『무제한 대결인 「시멘트 매치」는 내가 왕입니다. 스파링을 하다가 열을 받으면 이것저것 안 가리고 상대가 항복할 때까지 서로 붙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걸 시멘트 매치라고 합니다. 각본도 없고 인정사정 볼 것 없습니다. 바바가 이노키한테 이겼고, 나는 둘 다 잡았습니다.
―「오키 긴타로(大木 金太郞)」란 링네임은 누가 지으셨습니까.
『선생님이 작명했습니다. 긴타로는 곰과 싸우면서 자랐다는 일본 전설 속의 인물입니다』
『너는 한국인이니 평양 박치기를 익혀라』
―언제 데뷔했습니까.
『1958년 5월입니다. 서른 살 때지요. 상대는 다섯 살 위인 죠 히구치(蝶 桶口)였는데, 저는 끽 소리 못하고 무너졌어요』
허망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金一은 꺾기가 특기였다. 팔꿈치나 어깨, 무릎을 逆(역)으로 틀면 큰 덩치들이 휙휙 나가떨어지는 게 너무 신났다.
그날 밤 力道山이 불렀다.
『남들 다 하는 기술로는 일본에서 출세 못한다. 너는 한국인이니 평양 박치기를 익혀라. 그게 네가 사는 길이다』
박치기는 참 유용했다. 레슬링에서 상대에게 손발이 다 잡혔을 때 남은 건 머리뿐이다. 그걸로 상대의 이마나 뒤통수를 까부수니 혼비백산할 수밖에.
이마를 단련시키는 과정은 거칠었다. 새끼줄을 감은 기둥에 처박기를 하루 수백 번. 처음에는 부었다가 찢어지고 그 위에 딱지가 앉으면서 굳은살이 박였다.
『선생님의 훈련방법은 정말 매섭습니다. 내가 곁에 있으면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쥐고 그냥 이마를 때려요. 몽둥이로 때릴 때도 있고, 유리 재떨이를 날릴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일부러 불러서 골프채로 이마를 탁탁 두들겨 봐요. 剛度(강도)를 재는 겁니다』
―골프채로 휘두르면 이마가 망가지지 않습니까.
『그렇게 심하게는 안 하지요. 그냥 한 손으로 하프스윙 정도…』
力道山은 골프를 좋아했다고 한다. 싱글은 못 되지만 보기 플레이는 넉넉하게 했다. 도장에서도 짬만 나면 퍼트 연습을 했다.
金一은 한쪽 다리를 들어올렸다가 내리면서 체중을 싣는 독특한 박치기를 개발했다. 무게를 한쪽으로 실어 임팩트를 최대한 올리는 이른바 외다리 공격술이다.
당시 키 183cm, 몸무게 90kg인 金一의 체구는 프로 레슬링 무대에서는 너무 가벼웠다. 그는 부지런히 먹어서 몸무게를 100kg까지 올렸다. 그해 가을 金基洙가 도쿄 아시안게임에서 복싱 웰터급 금메달을 땄다는 소식을 들었다.
1960년 9월30일 다이토(大同) 체육관에서 이노키가 金一을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다. 이노키는 이때 金一의 「헤딩구」 맛을 톡톡히 봤다.
金一은 기술의 종류를 늘렸다. 박치기뿐 아니라 헤드 시저스와 드롭 킥을 익혔고, 상대선수를 卍(만)字로 감는 일명 「코브라 트위스트」도 구사했다.
力道山의 권유로 미국行
力道山은 力道山대로 바빴다. 그는 金一이 일본에 온 이듬해인 1958년 8월 미국에 가서 NWA(全美 레슬링협회) 챔피언인 J.S 루테즈를 아홉 번 도전 끝에 이겨 세계頂上에 올랐다.
그는 이참에 세계를 상대로 레슬링 프로모션을 시작했다.
1963년 여름, 力道山은 金一을 부른다.
『너, 미국에 한번 갔다 와라. 짝을 맞춰놨으니까 태그챔피언이나 따와』
그해 12월 미국에서 열리는 WWA (World Wrestling Association) 태그챔피언대회의 초청장을 받은 것. 출발날짜는 9월7일이었다.
『전날 저녁에 선생님이 부릅디다. 또 때릴 줄 알고 매를 갖고 내려갔지요. 선생님이 싱긋이 웃더니 「오늘은 장도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내가 한잔 사지」라고 합디다. 문 앞에는 벤츠 오픈카가 대기해 있었습니다』
간 곳은 긴자(銀座)의 유명한 고급클럽인 「히메(姬)」였다.
『선생님이 술을 따라 줍디다. 나는 잔을 받아 한국식으로 돌아앉아 마셨지요. 술은 일부러 배에다 쏟았습니다. 당시 선생님은 가끔 주사가 있었는데, 취하면 내가 뒷감당을 해야 하니까요』
다음날 미국으로 떠난 金一은 LA에서 파트너인 미스터 모토(本)와 석 달간 호흡을 맞추었다. 세 살 위인 일본계 미국인 모토는 가라데가 특기였다.
12월9일 대망의 WWA 태그매치의 날이 밝았다. 상대는 美 서부 태평양 연안을 휘어잡고 있던 랩 마스터 콤비였다.
그런데 이날 새벽 호텔방에 전화가 시끄럽게 울었다. 도쿄에 있는 스포츠닛폰신문사의 체육부장이었다.
力道山의 죽음
『어젯밤에 力道山이 야쿠자의 칼에 찔렸소』
순간 소름이 돋았다. 金一이 『어떻게 됐냐』고 물으니, 체육부장은 『더 이상은 모른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날 시합을 어떻게 치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온통 선생님 걱정뿐이었으니까. 링 위에서도 뵈는 게 없었어요. 닥치는 대로 들이받고 집어 던졌습니다. 끝나고 보니까 챔피언이 됐더군요』
귀국 채비를 서둘렀다.
12월13일 다시 전화가 왔다.
『다행히 상태가 호전됐으니 안심하라. 力道山에게 「金一이 챔피언 됐다」고 전하니까 「그 녀석, 참 고생 많이 했다」며 기뻐하시더라』
그런데 이틀 뒤 다시 연락이 왔다. 운명하셨다는 것이다.
당시 신문기사를 토대로 상황을 재현해보자.
1963년 12월8일 도쿄 아카사카 新일본호텔 나이트클럽 뉴 라틴 쿼터에 한잔 하러간 力道山은 화장실에서 요시즈미 연합회 소속의 야쿠자 무라타 가츠시(村田勝志)의 잭나이프에 복부가 찔렸다. 그 자리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기 때문에 싸움의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었다. 발이 밟혔다는 얘기도 있고 몸이 부딪쳤을 거란 설도 있다.
상처는 3~4cm 정도로 경미했다. 力道山은 한잔 더 하고 집 근처의 산노(山王)산부인과에 가서 봉합수술을 받았다. 경과는 좋았다. 다음날 요시즈미 쪽에서 사과를 하러 왔다.
그런데 14일 밤부터 갑자기 상태가 나빠졌다. 혈압이 뚝 떨어졌다. 원장은 복막염을 일으킨 것 같다며 수술을 서둘렀다. 15일 밤 9시50분, 小腸(소장) 유착으로 腸폐색이 일어나면서 力道山은 숨을 거두었다.
당시 병원에는 결혼 6개월 된 力道山의부인 다나카 게이코(田中敬子·당시 23세)가 지키고 있었다. 임신 3개월째였다.
그녀는 지난 1월28일, 韓日 수교 40주년을 맞아 춘천에서 벌어진 韓日 친선 레슬링대회에 참관차 訪韓했다. 미망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일주일 동안 병실에서 남편을 지켰다. 남편은 숨을 거두기 직전 무엇을 말하려는 듯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부인은 『남편이 숨지기 열흘 전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 「백발 노파가 죽창으로 나를 찔렀다」며 꿈 이야기를 했다』고 덧붙였다.
장례식은 닷새 후인 12월20일 이케가미(池上) 혼몬지(本門寺)에서 치렀으며 金一을 형무소에서 꺼내 준 오노 반보쿠(자민당 부총재)가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항간의 소문에는 力道山이 민족애가 강해 在日교포 야구선수인 가네다(金田正一)와 하리모도(張勳), 가수 미소라 히바리 등을 불러 자주 어울렸다고 한다.
『가끔씩 손님이 왔다면서 저더러 고단다(五反田)역 근처의 고향친구가 하는 불고기 집에 가서 바가지 김치를 사오라고 심부름시킨 적은 있습니다만…』
金一은 力道山이 한국말을 하는 건 딱 한 번 보았다고 했다.
『체육관에서 우연히 「기쿄(桔梗)」 이야기가 나왔는데 제가 그 말뜻을 잘 몰라 어리둥절해하자 선생님이 「자네, 기쿄 몰라? 도라지야, 도라지」라고 합디다. 그것이 제가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유일한 한국말입니다』
力道山의 죽음으로 金一은 하루아침에 오갈 데 없는 국제고아가 된다. 보증인이 죽었기 때문에 일본에 다시 들어갈 수 없게 된 것이다.
金一은 이후 텍사스 일대를 떠돈다. 방랑매치가 시작됐다. 숱한 아픔도 겪었다.
1964년 9월 미국 휴스턴에서 세계 헤비급 1위인 미국의 킬러 칼콕스와 대결하던 중 병으로 이마를 맞아 24바늘을 꿰맸고, 이듬해 4월8일 텍사스에서 당시 600연승을 구가하던 루테즈에게 겁없이 도전했다가 링 밖에서 날아온 병에 눈 언저리가 찢어져 닥터스톱으로 분패했다.
귀국 때 국민적 환영받은 金一
이때 한국 정부에서 손짓이 있었다.
金一은 1965년 6월 귀국한다. 그의 고향소식을 전하는 거금도닷컴(www. ggdo.com)에는 당시 대한뉴스 동영상이 보관돼 있다. 金一은 국민적 환영을 받았다.
金一이 JAL기 트랩에서 내리는 장면과 함께 아나운서의 신파조 내레이션은 시작된다. 아나운서는 흥분했다.
『세계레슬링 태그챔피언 金一 선수가 7년 만에 귀국했습니다. 이날 김포공항에는 수많은 인파가 환영을 나왔고, 그들이 외치는 함성은 6월의 푸른 하늘에 힘차게 메아리쳤습니다. 키 185cm, 체중 32관. 力道山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선배들의 속옷을 빨며 갖은 고생을 했던 金一 선수가 드디어 세계 頂上에 올라 금의환향한 것입니다. 그의 무기인 박치기 때문에 이마는 아물면 터지고 또 아물면 또 터지고…』
체중을 貫(관)으로 표현한 게 어색하다. 32관이면 130kg.
두 달 뒤인 1965년 8월11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는 극동헤비급 챔피언 타이틀전이 열렸다.
한국선수는 金一과 張永哲, 千圭德(천규덕), 禹基煥(우기환), 朴松男(박송남) 등이었다. 일본에선 요시노 사토(吉野 里), 요시무라(吉村) 등이 출전했다.
張永哲은 1회전에서 이겼으나 2회전에서 패해 70연승에 실패했다. 金一은 결승에서 요시노 사토(吉野里)를 박치기로 역전승을 거둬 챔피언에 올랐다.
金鍾泌(김종필)이 링 위에 올라와 金一의 손을 치켜들었다. 이것은 한국 레슬링의 맹주가 張永哲에서 金一로 넘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극동헤비급 챔피언 토너먼트의 흥행을 성공리에 마친 金一은 일본에서 뛰고 있던 노르웨이의 칼 칼슨, 스웨덴의 바이킹 한센, 일본의 오쿠마 등 외국선수들을 불러 5개국 초청 프로레슬링대회를 열었다. 터키 선수도 왔다. 1965년 11월25일부터 사흘간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다.
첫날부터 한국선수들의 기세는 대단했다. 이틀째 경기에서 탤런트 천호진의 아버지인 千圭德은 폴승으로 기염을 토한다.
마지막 날 張永哲의 1회전 상대는 일본의 오쿠마 쿠마고로(大熊熊五郞)였고, 金一의 1회전 상대는 노르웨이의 칼 칼슨이었다.
張永哲의 폭로, 『프로레슬링은 쇼다』
張永哲은 대진표의 변경을 요청했다. 한국의 간판선수가 일본의 오프닝 선수와 맞붙을 수는 없다는 것. 그러나 이미 짜인 대진표는 바꿀 수 없었다. 시합은 시작됐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張永哲이 오쿠마에게 보스턴 크랩(Boston Crab: 허리꺾기)이 걸린 것. 상대의 양발을 옆구리에 끼고 자기 몸을 회전하거나 뒤로 젖혀 항복시키는 고단수의 이 기술은 한번 걸리면 빠져나오기 어렵다.
張永哲의 입에서는 비명이 흘러나왔고 링 아래의 제자들이 황급히 뛰어올라가 병으로 오쿠마를 난타했다.
당시 경향신문은 이렇게 썼다.
〈11월27일 밤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5개국 국제프로레슬링대회 마지막날 경기는 張永哲 선수의 위급한 표정을 보고 링 위에 뛰어오른 10여 제자들에 의해 수라장이 되었다. 이들은 張선수의 상대인 일본의 오쿠마를 병으로 때리고 링을 점령했으며, 곧이어 張永哲 선수는 밑도 끝도 없이 「金一에게 도전하겠다」고 소리쳐 관중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다음날 기사에는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기사가 떴다.
이 대목에서 李王杓 회장이 나섰다.
『프로레슬러들은 힘이 장사라 맘만 먹으면 상대를 병신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당시 張선배는 오쿠마로부터 보스턴크랩을 당할 때 허리에 이상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일단 기술에 제대로 걸리면 상대가 아무리 3류 선수라도 항복해야 하는데, 한국의 간판선수가 일본의 오프닝 선수에게 질 수 없다는 자존심 때문에 끝까지 버티려고 하셨죠. 그때 한 번 지더라도 다음 판에 이기면 되는데… 너무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어쨌든 이 사건은 이후 일파만파로 번진다. 그토록 박진감 있던 프로레슬링이 「미리 짜고 각본대로 하는 쇼」라고 하니 팬들의 놀라움은 당연했다.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登極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프로레슬링이 몰락한 걸로 단정한다. 그러나 그건 오해다.
이후에도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金一은 이 사건 후인 1966년 12월3일 도쿄에서 미스터 모토와 같은 조를 이뤄 아시아태그 챔피언에 오른 뒤 여세를 몰아 이듬해 4월29일 장충체육관에서 WWA 세계헤비급 챔피언에 도전한다.
당시 챔피언은 마크 루인이었다. 뉴욕 태생으로 위스콘신大 시절 美 아마추어 레슬링을 휩쓸었던 그는 전설적인 싸움꾼 루테즈를 슬리퍼 홀드로 기절시켰던 적이 있다.
金一은 마크 루인을 상대로 보스턴 크랩과 박치기로 역전승을 거둬 세계 頂上에 올랐다. 프로레슬링 사상 최초의 한국인 세계 챔피언이 탄생한 것이다.
이 때 金一이 링 위에서 朴正熙 대통령의 전화를 받는다. 이를 두고 인터넷의 한 사이트에서는 「개발독재와 프로레슬링」이란 제하에 이렇게 평하고 있다.
〈朴正熙 前 대통령은 戰後(전후) 일본에서 力道山 신화와 경제부흥이 나란히 가는 것을 목격했다. 스포츠가 지닌 집단최면과 이미지 조작, 그리고 대중 동원력을 깨달은 그는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뒤 스포츠 영웅을 내세우기로 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지 7년 만에 세계 챔피언이 되어 금의환향한 프로레슬러 金一의 등장도 이와 관련이 있다〉
金一은 한 달 뒤인 5월19일 마크 루인과 LA에서 리턴매치를 벌였다. 이때 그는 갓과 담뱃대, 호랑이가 새겨진 가운을 입고 링에 올라섰다.
『내 조국이 자랑스럽고 내 스스로 한국인이라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그렇게 했습니다. 가운은 일본의 기모노 장인들이 수를 놓았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분명히 그의 스승 力道山과는 차별화된다.
마크 루인은 면도칼을 갖고 나와 金一의 이마를 그어 댔다. 혈전이었다. 金一이 피투성이가 된 이마로 박치기를 해 마크 루인을 다운시키고 챔피언 벨트를 매자 링 사이드의 교포들은 모두 일어나 애국가를 합창했다.
金一의 인기는 이미 태평양을 건너가 있었다.
억눌려 살아온 한국인의 한풀이
아시아헤비급 타이틀은 金一의 전유물이 된 지 오래였다. 1968년 11월9일 킬러 오스틴에게 아시아헤비급 챔피언 벨트를 뺏은 뒤 1970년 8월8일 레그파크스를 주저앉힐 때까지 무려 12차 방어에 성공한다.
물론 서울이 主무대였다. 방어전이 열릴 때마다 전국이 레슬링 물결로 넘쳐났다. 金一이 덩치 큰 외국 레슬러들에게 시종 밀리다가 막판에 박치기 몇 방으로 경기를 뒤집으면 열광하지 않은 한국인이 없었다.
그의 박치기가 터지는 순간 박수소리는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동시에 울렸고, 박치기가 작렬할 때마다 국민들의 입에선 『하나~ 둘~ 셋』 구령이 터져 나왔다.
억눌려 살아온 한국인의 恨풀이였다. 시골 里長(이장) 집 마당에 흑백TV가 놓이고 마을 사람들이 서로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저녁밥도 굶고 모여든 게 이 무렵이다. 金一이 이긴 다음날 학교에서는 꼬마들이 너나없이 金一의 박치기 흉내를 내느라 야단이었다.
朴正熙 대통령은 金一을 청와대로 자주 불러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작은 한국인이 외국의 거인들을 무릎 꿇리는 것은 「우리도 하면 된다」는 정신을 심어 주는 거야. 그런데 레슬링에는 반칙이 너무 많아. 어린애들에게 교육상 안 좋아』
金一은 그 때문인지 반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인기가 더욱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1969년 朴대통령의 하사금 2억원으로 재단법인 「金一후원회」가 설립된다. 초대 회장에 청와대 경호실장 朴鐘圭(박종규)가 취임했다.
1972년에는 서울 중구 정동에 「金一체육관」이 착공돼 3년 뒤 문을 열었다.
金一의 박치기가 프로레슬링 무대에 새로운 必殺技(필살기)로 등장하자 세계 곳곳에서 유사 박치기꾼들이 다투어 등장한다.
「原爆 헤딩구 대결」
WWA 초대 챔피언이었던 프레디 블래시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金一과 두 차례 맞붙었다.
첫 판은 1971년 7월 초 히로시마(廣島)에서 열렸다. 그때 히로시마 거리에 나붙은 포스터 문구가 걸작이었다.
「原爆(원폭) 헤딩구 대결」
원폭에 놀란 히로시마 시민들은 「대관절 얼마나 센 머리통이면 원자폭탄에 비하느냐」며 앞다투어 체육관으로 몰렸다. 결과는 金一의 승리였다.
열흘 뒤 장충체육관에서 리턴매치가 벌어졌다. 키 190cm의 프레디는 머리로서는 승산이 없자 이번에는 이빨을 쇠줄(?)로 날카롭게 갈아서 나왔다. 그리고는 金一의 이마와 귀를 닥치는 대로 물어뜯었다. 金一의 얼굴에는 선혈이 낭자했고, 매트는 붉게 물들었다. 이 경기에서 金一은 막판 박치기로 역전승을 일궈 낸다.
팬들은 力道山의 문하생인 이노키와 金一의 대결을 원했다.
1974년 10월10일 둘은 맞붙는다. 경기시작 13분13초 만에 金一은 이노키의 「코브라 트위스트」에 걸려들었다. 너무나 쉽게 끝난 승부였다.
金一은 1975년 3월 국제프로레슬링 오픈 시리즈의 하나로 한국의 5개 도시를 순회하는 경기에 이노키를 초청한다. 여기서 다시 맞붙는다. 이 승부에서 金一은 회심의 박치기로 이노키의 혼을 빼놓는다. 여덟 번째 박치기가 날았을 때 이노키는 링 아래로 떨어지고 화면은 끝난다.
『두 분의 통산성적은 2승1무1패로 金一선생님이 앞섭니다. 1976년 봄 일본에서 열린 대회에서 선생님이 올라가자마자 박치기를 퍼부어 1승을 더 보탰으니까요』
李王杓 회장의 증언이다.
―안토니오 이노키와는 감정이 안 좋았겠습니다.
『천만에요. 도장의 한 숙소에서 8년 3개월을 동거했습니다. 제가 코를 좀 골면 그 녀석이 이불을 몽땅 빼앗아가 얼굴에 덮고 잡니다』
두 사람의 우정은 남다르다.
이노키는 2000년 12월24일 을지병원으로 선배 金一을 찾아왔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함께 보내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나눴다.
『형님의 쾌유를 빌려고 왔습니다』
『바쁠 텐데 병원까지 와 줘서 너무 고맙네』
『어깨를 만져 보니 아직 링에 설 만한데요』
둘은 얼싸안았다. 2년 전 金一의 74세 생일 때 그는 100만 엔을 놓고 갔다.
金一은 1976년 8월1일 NWA 종신회원으로 등록된다. 아시아人으로는 力道山, 바바에 이어 세 번째였다.
좋은 일이 있으면 궂은일도 있게 마련이다.
1978년 3월 도쿄 시부야의 도장에서 훈련하던 金一은 전보를 받는다.
막내아들 基煥이가 죽었다는 것이다. 동국大에 다니다 육군에 입대했는데…. 황급히 귀국해 진해에 있는 부대를 찾아갔다.
부대에서는 『휴가증도 없고, 외출증도 없이 영내에서 갑자기 사라졌다가 열흘 만에 야산에서 발견됐다』고 했다.
부검을 해보자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시체가 너무 부패해서 안 된다는 게 거절 이유였다.
『아비가 레슬링 무대에서 화려한 서치라이트를 받을 때 父情(부정)에 굶주린 막내아들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한국에 경기가 있을 때 가족들과 만나지 않습니까.
『그런 시간을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기자들이 쫓아다니고 프로모터와 선수들을 만난답시고 호텔에서만 묵었으니 같은 땅에 사는 자식들이 얼마나 미워했겠습니까. 난 그냥 집으로 생활비나 보낸 게 고작이었으니…』
5共과 한국 프로레슬링의 惡緣
1979년 10월26일 朴대통령이 서거했다. 新군부가 등장했다. 全斗煥(전두환)의 5共이었다. 그에 대한 기억은 그리 좋지 않다.
그가 군포에 여단장으로 있을 때, 청와대로 朴대통령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가 대통령이 프로레슬링 중계를 보고 있자 『각하, 레슬링은 쇼인데 뭐 하러 보십니까』 했다가 혼이 난 적이 있다. 이제는 프로레슬링이 혼날 차례였다.
이듬해 5월 韓日 친선 태그매치는 계엄령을 피해 관중 5만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주도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는 力道山의 차남(미치오)도 선수로 나섰다. 콧수염의 그는 현재 일본 최고의 레슬링 프로모션인 노아프로레스의 부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이 시합에서 金一은 동생 光式과 組를 짜 일본의 다카시·이노우에 組를 꺾고 우승했다. 그러나 TV가 외면한 프로레슬링은 그늘에 묻혀 갔다.
사흘 뒤 마산에서는 3인 태그매치가 열렸다. 양팀에서 3명씩 출전해 승부를 겨루는 것.
한국에선 金一·金光式·李王杓가 나섰고, 일본에서는 이노우에·아시하라·하마구치가 나왔다.
『이 경기는 제가 나갔기에 기억이 뚜렷합니다. 3판 양승제였는데 제가 1승1패를 한 뒤 막판을 金一 선생님이 박치기로 마무리했습니다』
金一 최후의 무대였다. 5共시대가 열리면서 프로레슬링은 TV화면에서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프로야구와 프로축구가 화면을 메웠다.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도 줄을 서 있었다. 레슬링은 대기석을 잡기도 어려웠다.
정동의 金一체육관은 문화체육관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고, 1981년 재단법인 金一후원회는 해산되었다. 한국 레슬링의 몰락은 어쩌면 新군부의 등장과 관련이 있을 성싶다.
또 하나, 金一에게 의존하던 한국 프로레슬링은 金一이 무대를 내려오자 대체할 만한 스타가 없었다. 무대도 부서지고 각설이도 떠난 것이다.
金一은 강원도 속초에 수산회사를 차리고 일본을 상대로 명란젓·미역 등을 수출했다. 그러나 3년도 버티기 어려웠다. 어획고가 준 데다 현금유통도 제대로 안 됐다.
1992년 1월 필자는 金一과 인터뷰를 했다. 「사각의 링에서 포효하던 박치기왕이 미역장사가 된 까닭」이 궁금해서였다. 필자와 함께 속초 앞바다에서 사진을 찍고 서울로 돌아와 타워호텔에서 인터뷰하던 중 金一은 쓰러진다. 뇌졸중이었다. 겨울 바다의 찬바람이 화근이었다.
그는 국립의료원에 입원했다. 그곳에는 아내가 먼저 와 누워 있었다. 「家長(가장)없는 家庭(가정)」을 꾸려오던 아내는 오래 전부터 백혈병과 싸우고 있었다.
사업에 망한 후 일본을 전전
사실 그의 몸도 만신창이였다. 프로레슬링 입문 당시 워낙 매를 많이 맞은 것도 그렇지만 데뷔 초 벗겨진 로프 와이어에 부딪쳐 크게 다친 오른쪽 눈도 시력이 엄청 떨어졌다.
백 드롭에 걸려 거꾸로 떨어질 때 등보다 머리가 먼저 꽂혀 목뼈가 휘어진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박치기의 후유증도 뇌신경을 조여 온다. 수중에는 돈도 없었다.
속초에서 미역장사를 할 때 거래처였던 「규슈 가이산(九州 海産)」의 이케다(池田) 사장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그는 일본으로 갔다. 그는 이케다 사장의 도움으로 도쿄 적십자병원, 오사카 시립병원, 규슈 나카무라 병원을 전전하던 중 아내의 사망소식을 듣는다.
후쿠오카에서 그는 朴三中 스님(부산 자비사 주지)을 만난다. 三中 스님은 당시 한국인 차별을 반대하며 경찰과 대치해 인질극을 벌이다 구속된 在日동포 김희로씨의 석방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다.
三中 스님을 통해 그의 일본 투병생활이 국내에 전해졌다.
을지병원 이사장인 박준영 을지대학 총장이 나섰다.
『어려웠던 시절,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준 영웅을 어떻게 일본 땅 한구석에 버려 둡니까?』
그는 1994년 1월 三中 스님과 함께 직접 후쿠오카로 가서 그곳 요양소에서 투병생활을 하고 있던 金一에게 평생 무료진료를 약속하고 데려온다. 이후 그의 링은 서울 노원구 하계동 을지병원 7211호실에 설치된다.
일본 팬들이 마련해 준 은퇴식
이 사건은 국내 신문에 일제히 보도됐다. 그제야 「오키 긴타로」의 근황을 안 일본 스포츠기자단은 박치기왕의 은퇴식을 마련했다.
1995년 4월2일 도쿄돔은 6만 명의 관중들로 초만원을 이뤘다. 66세의 레슬러는 혼자 걸어 들어갈 힘이 없었다. 왕년의 숙적 루 테즈와 수제자 李王杓가 그가 탄 휠체어를 나눠 잡았다. 루 테즈도 이제는 늙어 대퇴부가 인공관절이었다.
그가 휠체어에 탄 채 무대로 입장하자 장내는 『오키, 긴타로~ 오키, 긴타로~』의 함성으로 가득찼다. 단상의 바바와 일본의 백발기자들이 모두 기립박수로 그를 맞이했다.
서치라이트는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됐던 사각의 링을 비추었다. 잠시 후 金一을 위한 공(gong)이 도쿄돔을 울렸다. 장내의 함성도 구령을 따라했다.
『원, 투, 쓰리, … 에잇, 나인, 텐』
텐카운트가 끝난 순간 적막이 흘렀다. 열을 셀 동안 링에 올라가지 못한 프로 레슬러 金一은 이제 링을 떠나야 한다.
1957년 10월 力道山 문하생 1기로 들어간 지 37년 6개월. 박치기왕 金一의 소리 없는 통곡은 팬들의 박수소리에 묻혀 버렸다.●
사각의 링에서 야수처럼 포효하던 그가 이제는 사각의 병실에 갇혀 버렸다. 그를 만나려고 지난 8월25일 오후 2시 서울 노원구 하계동 을지병원을 찾아갔다.
7층 오른쪽 맨 끝방 7211호. 환자 팻말에 적힌 이름은 「김일」. 6평 남짓한 병실에는 환자침대 1개와 보호자 침상 1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곳은 분명 병실이다. 그런데 벽에 붙어 있는 각종 사진과 기록들이 방문객을 의아하게 만든다.
챔피언 벨트를 맨 사진, 박치기를 날리는 장면, 외국인 프로레슬러들과의 기념사진. 그제야 이곳이 박치기왕이 15년째 살고 있는 안방임을 깨닫게 된다.
한쪽 벽에는 달력만 한 종이 위에 데뷔시절부터 은퇴까지 그의 주요 승부와 일대기가 연도별로 정리돼 있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링거를 꼽았던 왼쪽 손등에는 연필 뚜껑 같은 導管(도관)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박치기 후유증으로 생긴 뇌혈관 질환과 고혈압·심부전은 이제 지병이 됐고, 下肢浮腫(하지부종)은 걸음걸이를 붙들어맨다. 지난 6월23일에는 腸(장) 수술을 받았는데 다행히 악성 종양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병수발은 10년 전 재혼한 부인(李仁順·59)의 몫이었다.


마침 수제자인 李王杓(이왕표) 한국종합격투기협회 회장이 자리를 함께해 그 옛날 기억들을 끄집어내 주었다.
―세상을 휘젓고 다니던 장사가 11년째 병실에 계시니 참 갑갑하게 보입니다.
『모르는 소립니다. 여기가 얼마나 편한데요. 하루 세 끼 밥 주지요, 방도 깨끗하고 조용하지요. 아프면 약 주고 더 아프면 수술해 주고. 저는 매일 매일을 고마워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지난번의 수술 후유증은 없었습니까.
『처음 며칠간은 고생했습니다만 이제는 편안합니다. 수술 결과도 좋다고 하네요』
―몸이 좀 야윈 것 같습니다.
『늙고 병들었으니 그럴 수밖에요. 한창 때 체중의 3분 2도 안 되는 78kg입니다』
―더러 외식도 하십니까.
『가끔 병원 근처 불고기 집에 가서 된장찌개에 복분자 술 한 잔 정도는 합니다』
―가족들은 자주 옵니까.
『…』
힘겹게 이어지던 대화는 이 대목에서 잠깐 중단됐다.
그의 신상명세서에는 2남2녀가 적혀 있다. 옆에서 李회장이 거든다.
『장남은 6월 수술 때 다녀갔고 막내아들은 예전에 세상을 떴습니다』
장남(壽煥·56)은 뉴욕에 살고, 막내(基煥)는 27년 전 軍 복무 중 사망했단다.
金一은 지금까지 세 번 울었다 한다.
1963년 12월15일 力道山(역도산)의 죽음, 1978년 3월 軍에 간 막내아들의 죽음, 1995년 4월2일 도쿄돔에서의 은퇴식 때로 모두 이별과 접속돼 있다.
레슬링 무대에서의 승부가 환한 조명이었다면 떨어져 산 가족들과의 愛憎(애증)은 어둠이었다.
1929년 2월4일 전남 고흥군 금산면 어전리 거금도에서 金正守(김정수)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6척 장신인 아버지를 닮아 어릴 때부터 기골이 장대했다. 금산공립소학교(14회)를 마친 이듬해부터 마을 씨름대회에 나가 송아지를 상으로 받아 왔다.
그가 열여섯 살 때 광복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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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王杓 한국종합격투기협회 회장(왼쪽)과 함께 을지병원 병실에서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
섬 마을인 거금도의 젊은이들은 左·右를 구분할 수 없었다. 『마을을 지키러 왔다』는 그들의 말을 믿고 그냥 따라다녔다.
『나도 끼어 들었지요. 그런데 친구들이 「넌 집에 각시가 기다리니 돌아가라」면서 말립디다』
장손인 金一은 그해 5월 아버지의 엄명으로 마을의 세 살 위 처녀(박금례)와 혼례를 올렸었다. 국군의 진압작전이 시작되면서 친구들은 낮에는 산에 올라가고 밤에는 내려왔다.
1950년 2월 여순 사건은 진압됐고 재판이 시작됐다. 친구들은 물론이고 金一도 광주까지 끌려가 軍법정에 섰다.
검사가 물었다.
―너, 빨갱이지?
『아닌데요…』
―왜 附逆(부역)을 했냐?
『부역이 뭡니까?』
검사가 책상을 쳤다. 法帽(법모)가 떨어졌다. 金一이 주워서 먼지를 턴 뒤 올려놓았다. 그가 하는 짓을 지켜보던 검사가 씩 웃었다.
『자식, 빨갱이 짓도 못 할 놈이구먼』
그 길로 풀려났다. 그러나 곧이어 6·25 전쟁이 터지자 뒤죽박죽이 됐다. 어느 쪽이든 잡혀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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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6월25일 WBA주니어미들급 타이틀 매치에서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누르고 한국의 첫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이 된 金基洙 선수. |
함경도 북청에서 피란 내려왔다는 金基洙(김기수)는 몸놀림이 꽤나 빨랐다. 막판에 그와 붙어 이기긴 했으나 아주 까다로운 상대였다.
『호적상으로는 10년 차이였지만 피란통이라 실제로는 다섯 살밖에 안 떨어졌습니다』
여수는 선원들의 내왕이 잦았다. 그들을 통해 일본 잡지도 얻어 보았다. 金一은 그 속에서 力道山(역도산)을 발견한다. 일본의 유도왕을 가라데(空手) 한 방에 박살 내고 요코츠나도 그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고 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이었다.
『부산에서는 나가사키(長岐)에서 쏘는 니혼(日本)TV의 방송을 볼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그의 레슬링 장면이 자주 나왔습니다. 그걸 보고 張永哲(장영철)이 레슬링을 시작했으니까』
金一은 「일본에 가서 力道山의 제자가 되자」고 결심한다.
당시에는 일본과 국교가 없을 때라 방법은 밀항뿐이었다. 일본말은 자신 있었다. 소학교에서 일본 선생에게 배웠으니까. 떠나기 전날 그는 여수로 가서 金基洙를 만난다. 그는 씨름을 걷어치우고 권투도장에 다니고 있었다.
『난 간다. 열심히 해라. 나중에 일본에서 만나자』
아내와 4남매는 집에 둔 채 그는 그 길로 밤배를 타고 시모노세키로 갔다. 1956년 10월이었다. 오사카까진 무사했다. 그러나 도쿄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렸다. 요코하마(橫浜) 형무소에 수감됐다. 그곳에는 강제송환 차례를 기다리는 밀항자들이 가득했다.
『해가 바뀌어도 강제송환 순서는 줄어들지 않았어요. 이러다간 평생을 썩겠다싶어 力道山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밑져도 본전이니까』
―뭐라고 쓰셨습니까.
『「저는 한국에서 씨름을 한 젊은이입니다. 제자가 되고 싶어서 현해탄을 건너왔습니다. 제발 좀 구해 주십시오」
겉봉에는 주소를 몰라 「東京 力道山」이라고만 썼는데 편지가 들어갑디다』
며칠 후 金一은 석방된다.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편지를 받은 力道山은 후원자인 오노 반보쿠(大野伴睦·자민당 부총재)에게 부탁했고 그의 전화 한 통화가 金一을 불러낸 것이다. 오노는 훗날 韓日회담의 일본 측 막후 조정자로 나선다.
―力道山은 처음 만나서 뭐라고 합디까.
『제게 「현해탄을 건너왔으니 어떠한 고통이라도 참아야 한다」고 다짐을 시킵디다. 제겐 하늘이었습니다』
金一과 力道山은 불과 다섯 살 차이지만 金一은 인터뷰 내내 力道山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도장 생활은 어땠습니까.
『말 마십시오. 집은 도쿄 우메다초(梅町)에 있고 도장은 니혼바시(日本橋) 닌교초(人形町)에 있었는데, 나는 양쪽을 오가며 잡일을 도맡아서 했습니다. 도장은 2층으로 너무 넓어 빨래하고 청소하는 데 한나절이 걸렸습니다』
―훈련은 어떠했습니까.
『레슬링이란 게 참 묘한 운동입디다. 씨름은 넘어지면 끝인데, 레슬링은 시작이에요. 숨 돌릴 틈이 없습니다.
선생님의 배 아래에 한 번 깔리면 빠져나올 재간이 없어요. 저의 뭉그러진 왼쪽 귀가 그 「증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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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싸움꾼」루테즈를 꺾고 WWA 챔피언에 오른 力道山. |
『난 매일 맞고 살았습니다. 하루라도 안 맞으면 허전했어요.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후배인 자이언츠 바바(馬場)나 안토니오 이노키(猪木)는 거의 안 맞았습니다. 키가 크다고 그런 건지, 아니면 주걱턱이 잘생겼다고 그런 건지, 좌우지간 나는 맞는 게 일과였습니다.
맞고 나면 꼭 일본말로 「감사합니다」하고 인사를 해야 해요. 요즘 같으면 벌써 경찰에 고발했을 텐데』
―왜 그렇게 혹독하게 했을까요.
『한번은 맞는 게 너무 지겨워 도망쳐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같은 민족끼리 이럴 수 있나 싶어 별 생각이 다 듭디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선생님이 조용히 저를 불러서 이렇게 말씀하시데요.
「나의 매가 끝나는 날, 너와 인연도 끝이다」 그제야 선생님의 참뜻을 알았습니다. 좋은 연장은 뜨겁게 달궈서 더 많이 때려야 다듬어진다는 것을』
―바바나 이노키와의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저보다 도장 입문이 1년 늦었습니다. 열 살 아래인 바바는 이름만큼이나 체격도 컸습니다. 키가 208cm인데다 발도 워낙 커 16문(384mm)짜리 신발을 신습니다. 그 큰 발을 이용한 「16文 킥」이 主무기입니다. 아무도 접근이 안 되니까요. 니가타(新瀉) 출신으로 원래는 프로야구 자이언츠의 투수였지요』
이노키는 성장배경이 다르다. 1943년 요코하마에서 태어난 그는 열네 살 때 가족과 함께 브라질로 이민 갔다가 2년 뒤 현지에 순회경기차 갔던 力道山의 눈에 띄어 스카우트되었다. 브라질의 투원반 선수로 주걱턱이 일품이다. 그런데 이 친구는 「雜湯(잡탕)」을 즐긴다. 이른바 異種(이종)격투기.

1976년 6월26일 도쿄에서 프로복싱 세계헤비급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와 이노키의 「세기의 대결」이 펼쳐졌다.
이 시합에서 알리는 15라운드 동안 고작 3개의 펀치를 날렸고, 이노키는 시종 매트에 누워 알리의 정강이만 걷어차다 무승부로 끝냈다. 파이트머니는 알리가 600만 달러, 이노키가 400만 달러였다.
다음날 알리는 이런 말을 내뱉었다.
『이노키는 창녀다. 누워서 돈을 벌었으니까』
이노키는 1989년 스포츠 평화당으로 정계에 진출, 참의원까지 지냈다.
―셋 가운데 누가 가장 강했습니까.
『무제한 대결인 「시멘트 매치」는 내가 왕입니다. 스파링을 하다가 열을 받으면 이것저것 안 가리고 상대가 항복할 때까지 서로 붙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걸 시멘트 매치라고 합니다. 각본도 없고 인정사정 볼 것 없습니다. 바바가 이노키한테 이겼고, 나는 둘 다 잡았습니다.
―「오키 긴타로(大木 金太郞)」란 링네임은 누가 지으셨습니까.
『선생님이 작명했습니다. 긴타로는 곰과 싸우면서 자랐다는 일본 전설 속의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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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개발한 체중을 실은 金一의 必殺技 외다리 박치기. |
『1958년 5월입니다. 서른 살 때지요. 상대는 다섯 살 위인 죠 히구치(蝶 桶口)였는데, 저는 끽 소리 못하고 무너졌어요』
허망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金一은 꺾기가 특기였다. 팔꿈치나 어깨, 무릎을 逆(역)으로 틀면 큰 덩치들이 휙휙 나가떨어지는 게 너무 신났다.
그날 밤 力道山이 불렀다.
『남들 다 하는 기술로는 일본에서 출세 못한다. 너는 한국인이니 평양 박치기를 익혀라. 그게 네가 사는 길이다』
박치기는 참 유용했다. 레슬링에서 상대에게 손발이 다 잡혔을 때 남은 건 머리뿐이다. 그걸로 상대의 이마나 뒤통수를 까부수니 혼비백산할 수밖에.
이마를 단련시키는 과정은 거칠었다. 새끼줄을 감은 기둥에 처박기를 하루 수백 번. 처음에는 부었다가 찢어지고 그 위에 딱지가 앉으면서 굳은살이 박였다.
『선생님의 훈련방법은 정말 매섭습니다. 내가 곁에 있으면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쥐고 그냥 이마를 때려요. 몽둥이로 때릴 때도 있고, 유리 재떨이를 날릴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일부러 불러서 골프채로 이마를 탁탁 두들겨 봐요. 剛度(강도)를 재는 겁니다』
―골프채로 휘두르면 이마가 망가지지 않습니까.
『그렇게 심하게는 안 하지요. 그냥 한 손으로 하프스윙 정도…』
力道山은 골프를 좋아했다고 한다. 싱글은 못 되지만 보기 플레이는 넉넉하게 했다. 도장에서도 짬만 나면 퍼트 연습을 했다.
金一은 한쪽 다리를 들어올렸다가 내리면서 체중을 싣는 독특한 박치기를 개발했다. 무게를 한쪽으로 실어 임팩트를 최대한 올리는 이른바 외다리 공격술이다.
당시 키 183cm, 몸무게 90kg인 金一의 체구는 프로 레슬링 무대에서는 너무 가벼웠다. 그는 부지런히 먹어서 몸무게를 100kg까지 올렸다. 그해 가을 金基洙가 도쿄 아시안게임에서 복싱 웰터급 금메달을 땄다는 소식을 들었다.
1960년 9월30일 다이토(大同) 체육관에서 이노키가 金一을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다. 이노키는 이때 金一의 「헤딩구」 맛을 톡톡히 봤다.
金一은 기술의 종류를 늘렸다. 박치기뿐 아니라 헤드 시저스와 드롭 킥을 익혔고, 상대선수를 卍(만)字로 감는 일명 「코브라 트위스트」도 구사했다.

力道山은 力道山대로 바빴다. 그는 金一이 일본에 온 이듬해인 1958년 8월 미국에 가서 NWA(全美 레슬링협회) 챔피언인 J.S 루테즈를 아홉 번 도전 끝에 이겨 세계頂上에 올랐다.
그는 이참에 세계를 상대로 레슬링 프로모션을 시작했다.
1963년 여름, 力道山은 金一을 부른다.
『너, 미국에 한번 갔다 와라. 짝을 맞춰놨으니까 태그챔피언이나 따와』
그해 12월 미국에서 열리는 WWA (World Wrestling Association) 태그챔피언대회의 초청장을 받은 것. 출발날짜는 9월7일이었다.
『전날 저녁에 선생님이 부릅디다. 또 때릴 줄 알고 매를 갖고 내려갔지요. 선생님이 싱긋이 웃더니 「오늘은 장도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내가 한잔 사지」라고 합디다. 문 앞에는 벤츠 오픈카가 대기해 있었습니다』
간 곳은 긴자(銀座)의 유명한 고급클럽인 「히메(姬)」였다.
『선생님이 술을 따라 줍디다. 나는 잔을 받아 한국식으로 돌아앉아 마셨지요. 술은 일부러 배에다 쏟았습니다. 당시 선생님은 가끔 주사가 있었는데, 취하면 내가 뒷감당을 해야 하니까요』
다음날 미국으로 떠난 金一은 LA에서 파트너인 미스터 모토(本)와 석 달간 호흡을 맞추었다. 세 살 위인 일본계 미국인 모토는 가라데가 특기였다.
12월9일 대망의 WWA 태그매치의 날이 밝았다. 상대는 美 서부 태평양 연안을 휘어잡고 있던 랩 마스터 콤비였다.
그런데 이날 새벽 호텔방에 전화가 시끄럽게 울었다. 도쿄에 있는 스포츠닛폰신문사의 체육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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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과 함께한 金一. |
순간 소름이 돋았다. 金一이 『어떻게 됐냐』고 물으니, 체육부장은 『더 이상은 모른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날 시합을 어떻게 치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온통 선생님 걱정뿐이었으니까. 링 위에서도 뵈는 게 없었어요. 닥치는 대로 들이받고 집어 던졌습니다. 끝나고 보니까 챔피언이 됐더군요』
귀국 채비를 서둘렀다.
12월13일 다시 전화가 왔다.
『다행히 상태가 호전됐으니 안심하라. 力道山에게 「金一이 챔피언 됐다」고 전하니까 「그 녀석, 참 고생 많이 했다」며 기뻐하시더라』
그런데 이틀 뒤 다시 연락이 왔다. 운명하셨다는 것이다.
당시 신문기사를 토대로 상황을 재현해보자.
1963년 12월8일 도쿄 아카사카 新일본호텔 나이트클럽 뉴 라틴 쿼터에 한잔 하러간 力道山은 화장실에서 요시즈미 연합회 소속의 야쿠자 무라타 가츠시(村田勝志)의 잭나이프에 복부가 찔렸다. 그 자리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기 때문에 싸움의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었다. 발이 밟혔다는 얘기도 있고 몸이 부딪쳤을 거란 설도 있다.
상처는 3~4cm 정도로 경미했다. 力道山은 한잔 더 하고 집 근처의 산노(山王)산부인과에 가서 봉합수술을 받았다. 경과는 좋았다. 다음날 요시즈미 쪽에서 사과를 하러 왔다.
그런데 14일 밤부터 갑자기 상태가 나빠졌다. 혈압이 뚝 떨어졌다. 원장은 복막염을 일으킨 것 같다며 수술을 서둘렀다. 15일 밤 9시50분, 小腸(소장) 유착으로 腸폐색이 일어나면서 力道山은 숨을 거두었다.
당시 병원에는 결혼 6개월 된 力道山의부인 다나카 게이코(田中敬子·당시 23세)가 지키고 있었다. 임신 3개월째였다.
그녀는 지난 1월28일, 韓日 수교 40주년을 맞아 춘천에서 벌어진 韓日 친선 레슬링대회에 참관차 訪韓했다. 미망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일주일 동안 병실에서 남편을 지켰다. 남편은 숨을 거두기 직전 무엇을 말하려는 듯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부인은 『남편이 숨지기 열흘 전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 「백발 노파가 죽창으로 나를 찔렀다」며 꿈 이야기를 했다』고 덧붙였다.
장례식은 닷새 후인 12월20일 이케가미(池上) 혼몬지(本門寺)에서 치렀으며 金一을 형무소에서 꺼내 준 오노 반보쿠(자민당 부총재)가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항간의 소문에는 力道山이 민족애가 강해 在日교포 야구선수인 가네다(金田正一)와 하리모도(張勳), 가수 미소라 히바리 등을 불러 자주 어울렸다고 한다.
『가끔씩 손님이 왔다면서 저더러 고단다(五反田)역 근처의 고향친구가 하는 불고기 집에 가서 바가지 김치를 사오라고 심부름시킨 적은 있습니다만…』
金一은 力道山이 한국말을 하는 건 딱 한 번 보았다고 했다.
『체육관에서 우연히 「기쿄(桔梗)」 이야기가 나왔는데 제가 그 말뜻을 잘 몰라 어리둥절해하자 선생님이 「자네, 기쿄 몰라? 도라지야, 도라지」라고 합디다. 그것이 제가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유일한 한국말입니다』
力道山의 죽음으로 金一은 하루아침에 오갈 데 없는 국제고아가 된다. 보증인이 죽었기 때문에 일본에 다시 들어갈 수 없게 된 것이다.
金一은 이후 텍사스 일대를 떠돈다. 방랑매치가 시작됐다. 숱한 아픔도 겪었다.
1964년 9월 미국 휴스턴에서 세계 헤비급 1위인 미국의 킬러 칼콕스와 대결하던 중 병으로 이마를 맞아 24바늘을 꿰맸고, 이듬해 4월8일 텍사스에서 당시 600연승을 구가하던 루테즈에게 겁없이 도전했다가 링 밖에서 날아온 병에 눈 언저리가 찢어져 닥터스톱으로 분패했다.

이때 한국 정부에서 손짓이 있었다.
金一은 1965년 6월 귀국한다. 그의 고향소식을 전하는 거금도닷컴(www. ggdo.com)에는 당시 대한뉴스 동영상이 보관돼 있다. 金一은 국민적 환영을 받았다.
金一이 JAL기 트랩에서 내리는 장면과 함께 아나운서의 신파조 내레이션은 시작된다. 아나운서는 흥분했다.
『세계레슬링 태그챔피언 金一 선수가 7년 만에 귀국했습니다. 이날 김포공항에는 수많은 인파가 환영을 나왔고, 그들이 외치는 함성은 6월의 푸른 하늘에 힘차게 메아리쳤습니다. 키 185cm, 체중 32관. 力道山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선배들의 속옷을 빨며 갖은 고생을 했던 金一 선수가 드디어 세계 頂上에 올라 금의환향한 것입니다. 그의 무기인 박치기 때문에 이마는 아물면 터지고 또 아물면 또 터지고…』
체중을 貫(관)으로 표현한 게 어색하다. 32관이면 130kg.
두 달 뒤인 1965년 8월11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는 극동헤비급 챔피언 타이틀전이 열렸다.
한국선수는 金一과 張永哲, 千圭德(천규덕), 禹基煥(우기환), 朴松男(박송남) 등이었다. 일본에선 요시노 사토(吉野 里), 요시무라(吉村) 등이 출전했다.
張永哲은 1회전에서 이겼으나 2회전에서 패해 70연승에 실패했다. 金一은 결승에서 요시노 사토(吉野里)를 박치기로 역전승을 거둬 챔피언에 올랐다.
金鍾泌(김종필)이 링 위에 올라와 金一의 손을 치켜들었다. 이것은 한국 레슬링의 맹주가 張永哲에서 金一로 넘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극동헤비급 챔피언 토너먼트의 흥행을 성공리에 마친 金一은 일본에서 뛰고 있던 노르웨이의 칼 칼슨, 스웨덴의 바이킹 한센, 일본의 오쿠마 등 외국선수들을 불러 5개국 초청 프로레슬링대회를 열었다. 터키 선수도 왔다. 1965년 11월25일부터 사흘간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다.
첫날부터 한국선수들의 기세는 대단했다. 이틀째 경기에서 탤런트 천호진의 아버지인 千圭德은 폴승으로 기염을 토한다.
마지막 날 張永哲의 1회전 상대는 일본의 오쿠마 쿠마고로(大熊熊五郞)였고, 金一의 1회전 상대는 노르웨이의 칼 칼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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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一과 안토니오 이노키(왼쪽). |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張永哲이 오쿠마에게 보스턴 크랩(Boston Crab: 허리꺾기)이 걸린 것. 상대의 양발을 옆구리에 끼고 자기 몸을 회전하거나 뒤로 젖혀 항복시키는 고단수의 이 기술은 한번 걸리면 빠져나오기 어렵다.
張永哲의 입에서는 비명이 흘러나왔고 링 아래의 제자들이 황급히 뛰어올라가 병으로 오쿠마를 난타했다.
당시 경향신문은 이렇게 썼다.
〈11월27일 밤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5개국 국제프로레슬링대회 마지막날 경기는 張永哲 선수의 위급한 표정을 보고 링 위에 뛰어오른 10여 제자들에 의해 수라장이 되었다. 이들은 張선수의 상대인 일본의 오쿠마를 병으로 때리고 링을 점령했으며, 곧이어 張永哲 선수는 밑도 끝도 없이 「金一에게 도전하겠다」고 소리쳐 관중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다음날 기사에는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기사가 떴다.
이 대목에서 李王杓 회장이 나섰다.
『프로레슬러들은 힘이 장사라 맘만 먹으면 상대를 병신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당시 張선배는 오쿠마로부터 보스턴크랩을 당할 때 허리에 이상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일단 기술에 제대로 걸리면 상대가 아무리 3류 선수라도 항복해야 하는데, 한국의 간판선수가 일본의 오프닝 선수에게 질 수 없다는 자존심 때문에 끝까지 버티려고 하셨죠. 그때 한 번 지더라도 다음 판에 이기면 되는데… 너무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어쨌든 이 사건은 이후 일파만파로 번진다. 그토록 박진감 있던 프로레슬링이 「미리 짜고 각본대로 하는 쇼」라고 하니 팬들의 놀라움은 당연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프로레슬링이 몰락한 걸로 단정한다. 그러나 그건 오해다.
이후에도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金一은 이 사건 후인 1966년 12월3일 도쿄에서 미스터 모토와 같은 조를 이뤄 아시아태그 챔피언에 오른 뒤 여세를 몰아 이듬해 4월29일 장충체육관에서 WWA 세계헤비급 챔피언에 도전한다.
당시 챔피언은 마크 루인이었다. 뉴욕 태생으로 위스콘신大 시절 美 아마추어 레슬링을 휩쓸었던 그는 전설적인 싸움꾼 루테즈를 슬리퍼 홀드로 기절시켰던 적이 있다.
金一은 마크 루인을 상대로 보스턴 크랩과 박치기로 역전승을 거둬 세계 頂上에 올랐다. 프로레슬링 사상 최초의 한국인 세계 챔피언이 탄생한 것이다.
이 때 金一이 링 위에서 朴正熙 대통령의 전화를 받는다. 이를 두고 인터넷의 한 사이트에서는 「개발독재와 프로레슬링」이란 제하에 이렇게 평하고 있다.
〈朴正熙 前 대통령은 戰後(전후) 일본에서 力道山 신화와 경제부흥이 나란히 가는 것을 목격했다. 스포츠가 지닌 집단최면과 이미지 조작, 그리고 대중 동원력을 깨달은 그는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뒤 스포츠 영웅을 내세우기로 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지 7년 만에 세계 챔피언이 되어 금의환향한 프로레슬러 金一의 등장도 이와 관련이 있다〉
金一은 한 달 뒤인 5월19일 마크 루인과 LA에서 리턴매치를 벌였다. 이때 그는 갓과 담뱃대, 호랑이가 새겨진 가운을 입고 링에 올라섰다.
『내 조국이 자랑스럽고 내 스스로 한국인이라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그렇게 했습니다. 가운은 일본의 기모노 장인들이 수를 놓았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분명히 그의 스승 力道山과는 차별화된다.
마크 루인은 면도칼을 갖고 나와 金一의 이마를 그어 댔다. 혈전이었다. 金一이 피투성이가 된 이마로 박치기를 해 마크 루인을 다운시키고 챔피언 벨트를 매자 링 사이드의 교포들은 모두 일어나 애국가를 합창했다.
金一의 인기는 이미 태평양을 건너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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力道山 패밀리의 강가 물놀이. 앞줄 왼쪽이 이노키, 뒤에 우뚝 솟은 바바, 앞줄 오른쪽이 金一. |
물론 서울이 主무대였다. 방어전이 열릴 때마다 전국이 레슬링 물결로 넘쳐났다. 金一이 덩치 큰 외국 레슬러들에게 시종 밀리다가 막판에 박치기 몇 방으로 경기를 뒤집으면 열광하지 않은 한국인이 없었다.
그의 박치기가 터지는 순간 박수소리는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동시에 울렸고, 박치기가 작렬할 때마다 국민들의 입에선 『하나~ 둘~ 셋』 구령이 터져 나왔다.
억눌려 살아온 한국인의 恨풀이였다. 시골 里長(이장) 집 마당에 흑백TV가 놓이고 마을 사람들이 서로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저녁밥도 굶고 모여든 게 이 무렵이다. 金一이 이긴 다음날 학교에서는 꼬마들이 너나없이 金一의 박치기 흉내를 내느라 야단이었다.
朴正熙 대통령은 金一을 청와대로 자주 불러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작은 한국인이 외국의 거인들을 무릎 꿇리는 것은 「우리도 하면 된다」는 정신을 심어 주는 거야. 그런데 레슬링에는 반칙이 너무 많아. 어린애들에게 교육상 안 좋아』
金一은 그 때문인지 반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인기가 더욱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1969년 朴대통령의 하사금 2억원으로 재단법인 「金一후원회」가 설립된다. 초대 회장에 청와대 경호실장 朴鐘圭(박종규)가 취임했다.
1972년에는 서울 중구 정동에 「金一체육관」이 착공돼 3년 뒤 문을 열었다.
金一의 박치기가 프로레슬링 무대에 새로운 必殺技(필살기)로 등장하자 세계 곳곳에서 유사 박치기꾼들이 다투어 등장한다.

WWA 초대 챔피언이었던 프레디 블래시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金一과 두 차례 맞붙었다.
첫 판은 1971년 7월 초 히로시마(廣島)에서 열렸다. 그때 히로시마 거리에 나붙은 포스터 문구가 걸작이었다.
「原爆(원폭) 헤딩구 대결」
원폭에 놀란 히로시마 시민들은 「대관절 얼마나 센 머리통이면 원자폭탄에 비하느냐」며 앞다투어 체육관으로 몰렸다. 결과는 金一의 승리였다.
열흘 뒤 장충체육관에서 리턴매치가 벌어졌다. 키 190cm의 프레디는 머리로서는 승산이 없자 이번에는 이빨을 쇠줄(?)로 날카롭게 갈아서 나왔다. 그리고는 金一의 이마와 귀를 닥치는 대로 물어뜯었다. 金一의 얼굴에는 선혈이 낭자했고, 매트는 붉게 물들었다. 이 경기에서 金一은 막판 박치기로 역전승을 일궈 낸다.
팬들은 力道山의 문하생인 이노키와 金一의 대결을 원했다.
1974년 10월10일 둘은 맞붙는다. 경기시작 13분13초 만에 金一은 이노키의 「코브라 트위스트」에 걸려들었다. 너무나 쉽게 끝난 승부였다.
金一은 1975년 3월 국제프로레슬링 오픈 시리즈의 하나로 한국의 5개 도시를 순회하는 경기에 이노키를 초청한다. 여기서 다시 맞붙는다. 이 승부에서 金一은 회심의 박치기로 이노키의 혼을 빼놓는다. 여덟 번째 박치기가 날았을 때 이노키는 링 아래로 떨어지고 화면은 끝난다.
『두 분의 통산성적은 2승1무1패로 金一선생님이 앞섭니다. 1976년 봄 일본에서 열린 대회에서 선생님이 올라가자마자 박치기를 퍼부어 1승을 더 보탰으니까요』
李王杓 회장의 증언이다.
―안토니오 이노키와는 감정이 안 좋았겠습니다.
『천만에요. 도장의 한 숙소에서 8년 3개월을 동거했습니다. 제가 코를 좀 골면 그 녀석이 이불을 몽땅 빼앗아가 얼굴에 덮고 잡니다』
두 사람의 우정은 남다르다.
이노키는 2000년 12월24일 을지병원으로 선배 金一을 찾아왔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함께 보내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나눴다.
『형님의 쾌유를 빌려고 왔습니다』
『바쁠 텐데 병원까지 와 줘서 너무 고맙네』
『어깨를 만져 보니 아직 링에 설 만한데요』
둘은 얼싸안았다. 2년 전 金一의 74세 생일 때 그는 100만 엔을 놓고 갔다.
金一은 1976년 8월1일 NWA 종신회원으로 등록된다. 아시아人으로는 力道山, 바바에 이어 세 번째였다.
좋은 일이 있으면 궂은일도 있게 마련이다.
1978년 3월 도쿄 시부야의 도장에서 훈련하던 金一은 전보를 받는다.
막내아들 基煥이가 죽었다는 것이다. 동국大에 다니다 육군에 입대했는데…. 황급히 귀국해 진해에 있는 부대를 찾아갔다.
부대에서는 『휴가증도 없고, 외출증도 없이 영내에서 갑자기 사라졌다가 열흘 만에 야산에서 발견됐다』고 했다.
부검을 해보자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시체가 너무 부패해서 안 된다는 게 거절 이유였다.
『아비가 레슬링 무대에서 화려한 서치라이트를 받을 때 父情(부정)에 굶주린 막내아들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한국에 경기가 있을 때 가족들과 만나지 않습니까.
『그런 시간을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기자들이 쫓아다니고 프로모터와 선수들을 만난답시고 호텔에서만 묵었으니 같은 땅에 사는 자식들이 얼마나 미워했겠습니까. 난 그냥 집으로 생활비나 보낸 게 고작이었으니…』


그가 군포에 여단장으로 있을 때, 청와대로 朴대통령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가 대통령이 프로레슬링 중계를 보고 있자 『각하, 레슬링은 쇼인데 뭐 하러 보십니까』 했다가 혼이 난 적이 있다. 이제는 프로레슬링이 혼날 차례였다.
이듬해 5월 韓日 친선 태그매치는 계엄령을 피해 관중 5만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주도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는 力道山의 차남(미치오)도 선수로 나섰다. 콧수염의 그는 현재 일본 최고의 레슬링 프로모션인 노아프로레스의 부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이 시합에서 金一은 동생 光式과 組를 짜 일본의 다카시·이노우에 組를 꺾고 우승했다. 그러나 TV가 외면한 프로레슬링은 그늘에 묻혀 갔다.
사흘 뒤 마산에서는 3인 태그매치가 열렸다. 양팀에서 3명씩 출전해 승부를 겨루는 것.
한국에선 金一·金光式·李王杓가 나섰고, 일본에서는 이노우에·아시하라·하마구치가 나왔다.
『이 경기는 제가 나갔기에 기억이 뚜렷합니다. 3판 양승제였는데 제가 1승1패를 한 뒤 막판을 金一 선생님이 박치기로 마무리했습니다』
金一 최후의 무대였다. 5共시대가 열리면서 프로레슬링은 TV화면에서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프로야구와 프로축구가 화면을 메웠다.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도 줄을 서 있었다. 레슬링은 대기석을 잡기도 어려웠다.
정동의 金一체육관은 문화체육관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고, 1981년 재단법인 金一후원회는 해산되었다. 한국 레슬링의 몰락은 어쩌면 新군부의 등장과 관련이 있을 성싶다.
또 하나, 金一에게 의존하던 한국 프로레슬링은 金一이 무대를 내려오자 대체할 만한 스타가 없었다. 무대도 부서지고 각설이도 떠난 것이다.
金一은 강원도 속초에 수산회사를 차리고 일본을 상대로 명란젓·미역 등을 수출했다. 그러나 3년도 버티기 어려웠다. 어획고가 준 데다 현금유통도 제대로 안 됐다.
1992년 1월 필자는 金一과 인터뷰를 했다. 「사각의 링에서 포효하던 박치기왕이 미역장사가 된 까닭」이 궁금해서였다. 필자와 함께 속초 앞바다에서 사진을 찍고 서울로 돌아와 타워호텔에서 인터뷰하던 중 金一은 쓰러진다. 뇌졸중이었다. 겨울 바다의 찬바람이 화근이었다.
그는 국립의료원에 입원했다. 그곳에는 아내가 먼저 와 누워 있었다. 「家長(가장)없는 家庭(가정)」을 꾸려오던 아내는 오래 전부터 백혈병과 싸우고 있었다.

사실 그의 몸도 만신창이였다. 프로레슬링 입문 당시 워낙 매를 많이 맞은 것도 그렇지만 데뷔 초 벗겨진 로프 와이어에 부딪쳐 크게 다친 오른쪽 눈도 시력이 엄청 떨어졌다.
백 드롭에 걸려 거꾸로 떨어질 때 등보다 머리가 먼저 꽂혀 목뼈가 휘어진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박치기의 후유증도 뇌신경을 조여 온다. 수중에는 돈도 없었다.
속초에서 미역장사를 할 때 거래처였던 「규슈 가이산(九州 海産)」의 이케다(池田) 사장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그는 일본으로 갔다. 그는 이케다 사장의 도움으로 도쿄 적십자병원, 오사카 시립병원, 규슈 나카무라 병원을 전전하던 중 아내의 사망소식을 듣는다.
후쿠오카에서 그는 朴三中 스님(부산 자비사 주지)을 만난다. 三中 스님은 당시 한국인 차별을 반대하며 경찰과 대치해 인질극을 벌이다 구속된 在日동포 김희로씨의 석방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다.
三中 스님을 통해 그의 일본 투병생활이 국내에 전해졌다.
을지병원 이사장인 박준영 을지대학 총장이 나섰다.
『어려웠던 시절,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준 영웅을 어떻게 일본 땅 한구석에 버려 둡니까?』
그는 1994년 1월 三中 스님과 함께 직접 후쿠오카로 가서 그곳 요양소에서 투병생활을 하고 있던 金一에게 평생 무료진료를 약속하고 데려온다. 이후 그의 링은 서울 노원구 하계동 을지병원 7211호실에 설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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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돔의 은퇴식장에서 金一은 뜨거운 울음을 터뜨렸다. 金一의 뒤쪽이 WWA OB 회장 루테즈, 오른쪽이 이왕표. |
1995년 4월2일 도쿄돔은 6만 명의 관중들로 초만원을 이뤘다. 66세의 레슬러는 혼자 걸어 들어갈 힘이 없었다. 왕년의 숙적 루 테즈와 수제자 李王杓가 그가 탄 휠체어를 나눠 잡았다. 루 테즈도 이제는 늙어 대퇴부가 인공관절이었다.
그가 휠체어에 탄 채 무대로 입장하자 장내는 『오키, 긴타로~ 오키, 긴타로~』의 함성으로 가득찼다. 단상의 바바와 일본의 백발기자들이 모두 기립박수로 그를 맞이했다.
서치라이트는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됐던 사각의 링을 비추었다. 잠시 후 金一을 위한 공(gong)이 도쿄돔을 울렸다. 장내의 함성도 구령을 따라했다.
『원, 투, 쓰리, … 에잇, 나인, 텐』
텐카운트가 끝난 순간 적막이 흘렀다. 열을 셀 동안 링에 올라가지 못한 프로 레슬러 金一은 이제 링을 떠나야 한다.
1957년 10월 力道山 문하생 1기로 들어간 지 37년 6개월. 박치기왕 金一의 소리 없는 통곡은 팬들의 박수소리에 묻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