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종이 시들해지면 기자도 끝난다. 어제까지 한 100개의 특종은 아무 의미가 없다. 기자에게는 오늘의 특종 하나가 더 중요하다』(趙甲濟 월간조선 대표)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을 혼합한 교양잡지로 출발
- 1980년 4월에 창간된 月刊朝鮮 표지.
月刊朝鮮은 애초에 시사종합잡지가 아닌 교양잡지로 출발했다.
초대 편집장인 시인 曺永瑞(조영서)씨는 『「思想界」에 대한 鄕愁(향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겨냥해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을 혼합한 잡지를 지향했다』고 말했다. 1980년 4월에 창간된 月刊朝鮮은 「民主의 길」을 특집제목으로 삼아 「80년의 봄」을 반영했다. 창간호는 5만 부가 팔렸다.
당시 方又榮(방우영) 사장은 『적자가 나도 괜찮으니 좋은 잡지를 만들라』며 격려했다. 매일 아침 경리사원이 曺永瑞씨 책상에 100만원을 넣어 두었는데, 그 돈으로 필자들이 원고를 갖고 오면 그 자리에서 원고료를 지불했다.
창간호 책값은 1500원이었고, 원고료는 200자 원고지 한 장당 3000원, 詩 한 편에 3만원이었다.
曺永瑞씨는 『당시에는 특종보다는 좋은 글을 싣기 위해 필자 발굴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駐美특파원을 지낼 때 미국 관련 기사를 재미있게 쓴 金大中(김대중·現 조선일보 고문) 조선일보 외신부장에게 칼럼을 맡겼고, 「중금속 오염」 기사를 써서 기자상을 탄 국제신문 趙甲濟(조갑제·現 月刊朝鮮 대표) 기자가 해직당하자 바로 필자로 기용했다.
『아이디어 좀 갖고 오라고 했더니, 엄청나게 많은 글감을 갖고 왔어요. 다 쓸 만한 얘기들이었죠. 100장씩 써 오라고 해서 그 자리에서 원고료를 30만원씩 지급했습니다. 그때 내 월급이 20만원이었어요』
月刊朝鮮 창간 한 달 뒤 全斗煥 장군의 新군부가 집권하면서 취재와 편집의 자유가 크게 위축되었고 정권에 불리한 기사는 쓸 수 없게 되었다. 1980년 6월호에 「3金 특집」을 준비했으나 신문에 광고조차 할 수 없었다.
교양잡지로 출발했던 月刊朝鮮은 1982년 許鉥(허술) 편집장이 부임하면서 종합 시사잡지로 탈바꿈했다. 許鉥씨는 중앙일보 기자, 「월간중앙」 편집장, 「마당」 편집장을 거쳐 月刊朝鮮에 스카우트되어 왔다. 1982년부터 1987년까지 月刊朝鮮 편집장을 지낸 許鉥씨는 『안기부에 여러 번 불려갔다. 方又榮 사장은 기사에 대해 사전검열 안 하고 모든 걸 맡기는 스타일이었다』고 회고했다.


『늘 칼날 위에서 춤추는 기분이었다』(吳交力鎭)
吳交力鎭(오효진·現 충북 청원군수) 기자는 1984년 7월호에 白凡 金九(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 安斗熙(안두희) 인터뷰, 1986년 12월호에 李厚洛(이후락) 前 중앙정보부장 인터뷰를 성사시키는 등 많은 특종을 했다.
吳交力鎭씨가 1984년 月刊朝鮮에 入社하여 연재한 「吳交力鎭의 인간탐험」은 솔직담백한 인물 묘사와 날카로운 필치로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인터뷰하지 않기로 유명한 인사들을 만나 그들로 하여금 입을 술술 열게 만들었다.
2004년에 그가 낸 책 「인터뷰의 황제가 되는 길」에 보면 사람을 만나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잘 나타나 있다.
그 누구도 만나지 않은 安斗熙를 만나기 위해 집 앞에다 쪽지를 끼워 두고, 앞집에 수박을 맡겨 두기도 했다. 그 후에도 安斗熙씨가 좋아하는 음식을 하나하나 사다 날라 그의 마음을 열었다. 吳交力鎭씨는 『기사화하지 않고 역사 기록으로 남기자고 했는 데 그 약속을 어긴 게 미안하다』고 했다.
『조금 더 시간을 갖지 못한 게 아쉽지만 마감 때문에 글을 쓸 수밖에 없었어요. 마지막에 결정적 장면을 며칠만 더 기다렸으면 들을 수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안타깝죠. 安斗熙씨는 자신의 행동을 나라를 위해서 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 신념을 버리지 않았을 겁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비밀스럽고, 가장 흥미로운 인물로 꼽히는 李厚洛 前 중앙정보부장을 설득할 때에도 그는 심금을 울리는 편지를 보내 허락을 받아냈다.
『李씨 인터뷰 기사는 1986년 12월호, 1987년 10월호 두 번 나갔는데 두 번째 기사로 해서 李厚洛씨께 인간적으로 미안했지요. 기사가 나온 후 DJ납치 관련 부분이 정치문제로 커지고 李厚洛씨가 수세에 몰리고 기자들 앞에서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그 후로 한 번도 못 뵈었는데, 아직도 미안한 마음입니다』
李厚洛 인터뷰에서 5·16 이후 정치적 결정의 배후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秘話(비화)들이 밝혀졌다. 특히 제2공화국의 張勉(장면) 총리가 쿠데타 사실을 알고도 아무 대응을 하지 않은 일, 평양에서 金日成과 나눈 대화, 朴正熙 의장에게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라고 권유를 한 일 등 정치사를 새롭게 밝히는 내용들이 공개됐다.
1987년 10월호는 「李厚洛 증언-金大中 납치사건의 진상은 이렇다」는 題下의 기사로 해서 역사상 최고 발행부수인 40만5000부를 기록했다. 安企部에서 책을 못 내게 막았으나 결국 더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었다.
吳交力鎭 청원군수는 『月刊朝鮮 기자 시절에 불안하고 너무 힘들었다. 늘 칼날 위에서 춤추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특종 하나에 10만 부가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위력적이어서 성취감이 있었다』고 했다.
「한국 내 美 CIA」 기사로 해직
許鉥씨는 『특종을 해야 우수한 기자가 아니라, 우수한 기자여야 특종을 한다』고 했다.
『취재 전문 趙甲濟 기자를 硬派(경파), 인터뷰 전문 吳交力鎭 기자를 軟派(연파)라고 불렀죠. 吳交力鎭씨는 소설가여서 읽히는 기사를 썼죠. 당시 하지 말라는 것만 쓰면 팔렸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쉬웠지요』
許鉥씨는 『잡지가 할 수 있는 특종은 심층취재』라고 정의했다. 그는 자신이 편집장으로 재임할 때 趙甲濟 기자가 쓴 「KAL에 칼을 댄다」, 「KAL 007, 최후의 목격자」를 최고의 특종으로 꼽았다. 이 기사로 인해 月刊朝鮮은 한국 언론에 본격적인 수사식 보도(Investigative Reporting)를 도입한 매체로 평가받았다.
공군 출신인 趙甲濟 기자는 항공 사고에 관심이 많아 1984년 4월호에 「KAL에 칼을 댄다」는 기사를 통해서 대한항공(KAL)의 안전 관리 문제를 심층 취재한 적이 있었다.
『1984년 항공전문가 인맥을 많이 확보해 놓았다가 「KAL 007, 최후의 목격자」 취재 때 도움을 받았습니다. 사고기의 千炳寅(천병인) 기장과 마지막에 만났고, 바로 뒤에 비행을 했던 朴用萬(박용만) 기장과 며칠 동안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면서 쓴 기사입니다. 내가 비행기에 대해서 잘 아니까 대화가 되었죠. 1984년에 인터뷰한 뒤에 계속 연락을 하고 지냈는데 朴기장이 회사를 그만둔 뒤 취재에 응했죠. 하루아침에 되는 기사는 없습니다. 특종에는 공짜가 없어요』
이 기사는 1993년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내놓은 KAL 007기 블랙박스 분석 결과, 사실로 확인됐다.
月刊朝鮮을 위기로 몰고 갔던 특종도 있었다. 1986년 2월호에 趙甲濟 기자가 쓴 「한국 내 美 CIA 연구」는 美 CIA 요원들의 身元(신원)과 이들의 한국內 활동에 대한 최초의 추적 기사였다. 이 기사가 나가자 미국 측에서 張世東(장세동) 안기부장에게 바로 항의전화를 했고, 張世東 안기부장이 朝鮮日報 사장에게 항의전화를 했다.
趙甲濟 기자는 安企部에서 조사를 받은 뒤 회사를 그만두고, 金大中 출판국장은 영국으로 연수를 떠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당시 편집장이었던 許鉥 씨는 마음이 불편했다고 말했다.
『趙甲濟씨가 쉬는 동안에도 회사에서 월급을 지급했고, 퇴직 4개월 만에 연구소 연구원으로 복직시켰습니다. 연구소에 있으면서 月刊朝鮮에 글을 쓰다가 6개월 만에 月刊朝鮮 기자로 복귀했습니다.
당시 趙甲濟 기자가 CIA 기사를 400매를 써 왔어요. 그중 200매만 내보냈는데 그 난리가 난 겁니다. 만약 400매를 다 실었으면 나까지 포함하여 셋 다 형무소 가고 月刊朝鮮은 폐간되었을 겁니다』
趙甲濟 기자는 CIA 기사를 쓸 때 두려운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 얘기했다.
『미국 CIA에 대해서 쓰는데 우리 安企部가 왜 개입하겠나, 하는 생각뿐이었죠. 20일 정도 취재했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어요. 이미 공개된 정보였는데 CIA 전화번호가 나가면서 문제가 되었죠.
鄭亨根(정형근) 의원이 당시 안기부 수사단장이었어요. 「CIA에 관한 정보를 누구에게 들었냐」고 물었지만 공개된 거 외에는 절대 얘기 안 했지요. 「명단은 어디서 나왔느냐」고 물었는데, 명단은 미국대사관 문화원에 비치된 전화번호부에 다 나와 있었어요. CIA가 RU(리서치 유니티)라고 되어 있더군요. 전화번호부를 보고 바로 눈치챘죠. 그 후로 CIA 서울지부는 계속 이름을 바꾸었어요』
1988년 7월호에 趙甲濟 기자는 「공수부대의 광주사태」라는 기사를 통해 光州 민주화운동 당시 투입됐던 공수부대원들의 관점에서 본 光州 민주화운동을 기사화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민 쪽 얘기를 담은 기사만 나왔을 뿐 진압군 쪽 얘기는 軍에서 발표한 것을 인용한 것이 전부였다. 趙甲濟 기자는 공수부대 사병들을 많이 만나고 기사를 썼다.
『재판을 할 때나 다른 매체에서 모두 月刊朝鮮의 이 기사를 참조했습니다. 5共 청문회는 月刊朝鮮이 없으면 진행이 안 됐을 겁니다. 5共 청문회 때 제일 많이 인용되었죠. 지휘관에게 질문을 하려 해도 자료가 없으니 月刊朝鮮 기사를 볼 수밖에 없었죠』
그 후에도 月刊朝鮮은 1999년 1월호, 2005년 1월 두 번에 걸쳐 光州 민주화운동을 담은 별책부록을 발행했다.
在野운동하는 사람들을 제도권에서 다루지 않을 때 月刊朝鮮에서는 그 사람들과 교통했다. 邊衡尹(변형윤) 교수, 인권변호사 趙英來(조영래)씨도 月刊朝鮮 편집위원이었다.
12·12 사태의 진상을 밝혀내다
高銀(고은) 시인과 黃晳暎(황석영) 소설가도 月刊朝鮮에 작품을 연재했다. 劉正顯(유정현) 前 月刊朝鮮 편집장은 『중립적 위치에서 옴니버스式으로 잡지를 만들었다. 특종보다 바른 판단을 하여 시대를 끌고 가는 힘이 중요하다. 그렇게 되려면 독자와의 공감대와 신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月刊朝鮮 편집장을 맡은 劉正顯 前 朝鮮日報 편집국 부국장은 1987년 9월호 「鄭昇和 인터뷰 10·26에서 12·12까지」를 가장 기억나는 특종으로 꼽았다. 1987년 8월에 어떤 사람이 劉正顯 당시 月刊朝鮮 편집장을 찾아왔다.
『예전부터 좀 알던 사람이었어요. 鄭昇和 총장의 친구인 육사 5기 출신이었죠. 鄭昇和 총장이 12·12에 대해 얘기할 의사가 있는 것 같다는 겁니다. 당장 그 사람과 함께 대치동에 있는 쌍용아파트로 찾아갔습니다. 예전에 내가 국방부 출입할 때부터 鄭昇和 총장을 알았어요. 「12·12 사태 얘기를 자세히 해 달라. 그러면 우리 책에 싣겠다」고 했더니 취재에 응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趙甲濟 기자를 보냈지요.
몇 棟에 가서 고향친구라고 하라고 했습니다. 비밀리에 접촉해야 했습니다. 趙甲濟 기자가 인터뷰를 해왔는데 내용이 좋았어요. 책을 만들어 놓고 나는 휴가를 가버렸어요. 安企部에서 빼라 넣어라 귀찮게 할까봐 잠적해 버린 거죠. 朝鮮日報에도 보도를 했습니다. 당시 반응이 좋아서 8판까지 찍었습니다. 제도언론이 제구실을 못하니 月刊朝鮮과 신동아가 비하인드 스토리를 썼죠. 월간지는 신문보다 억압이 덜해 그 틈새에서 열심히 일했죠. 일하면서 참 행복했습니다. 당시에는 책이 나오는 날이면 서울 시내 유명서점 앞에서 보통 400~500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2·12, 장군들의 밤 녹취록 공개
趙甲濟 대표는 『鄭昇和 총창을 인터뷰하러 갔을 때 계엄사령관 출신이어서 무서울 줄 알았는데 굉장히 얌전하고 선비 같았다』고 회고했다.
『며칠간 얘기를 나누고 기사를 썼습니다. 얘기를 나눠 보니 「鄭昇和 총장 말이 다 맞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2·12 사태의 핵심은 「누가 먼저 총을 쐈나」 하는 겁니다. 합수부는 마치 鄭昇和 총장 측 경비병들이 먼저 쏜 것처럼 발표했지만, 취재를 해보니 鄭昇和 장군을 잡으러 온 사람들이 측근들을 등 뒤에서 쐈더군요. 「이건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들이 먼저 쏴 놓고 鄭昇和 장군 쪽에서 먼저 쐈다고 하다니 말이 안 된다」 이런 의분이 생겼습니다. 金泳三 정부 때 再조사했을 때 등 뒤에서 쏜 게 맞았습니다』
최초로 12·12 사태를 정확하게 알린 당시 기사는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그 후 趙成寬(조성관) 기자가 당시 상황을 세밀하게 묘사한 「등 뒤에서 쐈다」라는 기사를 또다시 썼다.
月刊朝鮮은 1995년 9월 「12·12 사건이 녹음되었다」라는 기사로 12·12를 확실하게 마무리를 했다. 禹鍾昌(우종창·現 월간조선 편집위원) 기자는 某 일간지 기자의 제보로 12·12 관련 녹취록을 입수했다.
『12·12 사건이 녹음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뉴스가 되지만, 편집장이 테이프를 한번 구해 보라는 겁니다. 테이프는 朝鮮日報 金基哲(김기철) 기자가 구해왔습니다. 들어보니 너무 재미있어요. 그래서 테이프를 부록으로 붙였습니다. 인쇄매체가 청각매체로 발상의 전환을 한 거죠. 우리 月刊朝鮮이 나오는 날 모든 방송매체 뉴스에서 장군들의 당황한 육성이 생생하게 나왔죠』
이 테이프는 12·12 당시 3軍 사령관으로 新군부 측에 맞섰던 李建榮(이건영) 장군을 존경한 기무司 직원에 의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그는 테이프를 듣고 용감하게 『병력 출동하지 말라』고 외치는 李建榮 장군을 존경하게 되었고, 그 테이프를 기념으로 李장군에게 넘겼던 것이다. 李장군이 테이프 내용을 녹취해 둔 녹취록이 某 신문사 기자의 손에 흘러 들어갔다. 그 기자는 자신의 신문에서 보도를 못 하게 되자 禹鍾昌 기자에게 녹취록을 건넸다.
1995년 9월호는 30만 부가 발행되었다. 군사반란의 물증이 된 이 테이프로 인해 검찰은 12·12 사건을 再수사하게 되었고, 全斗煥·盧泰愚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됐다.
12·12 테이프는 그 후 얼마 동안 테이프 부록 열풍을 불러왔다. 金正日의 생생한 육성이 담긴 비밀 테이프, 朴正熙 노래자랑 테이프, 金正日의 지시로 만든 「야수들의 싸움」 비디오 테이프 등이 그것이다.
대통령들의 비자금
12·12 사건이 勝者(승자)의 관점에서 기록된 「5共 前史-12·12 사건편」도 1996년 5월호에 보도되었다. 5共 시절, 5共이 세워지기까지 역사를 기록한 「5共 前史」라는 게 있다는 소문만 무성했으나 실체는 없었다. 검찰에서도 자료를 갖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崔普植(최보식·조선일보 컨텐츠업그레이드실장) 기자가 5共 측 인사에게 『실체를 보여줌으로써 당시 정황 자체를 일반사람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하라. 공개해서 일반사람들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하는 게 낫다』고 설득해 자료를 입수했다.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도 될 정도로 재미있었어요. 新군부 측 인사들이 자신들의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다소 과장된 부분은 있지만 왜곡은 없었어요. 극히 몇 명이 소장하려고 만든 거니, 거짓말할 이유가 없었죠. 그때까지 12·12에 대해 부분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을 리얼하게 알게 되었죠.
鄭昇和 장군의 증언과 약간 다른 부분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5共 前史가 더 정확할 수 있어요. 처벌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만든 것도 아니기 때문이죠. 12·12를 판단하는 근거로서 史料的 가치가 있지요』
1988년 5월호의 「추적 全斗煥의 金脈과 人脈」은 全斗煥의 軍部內 私조직 「하나회」의 실체와 정치 비자금을 건드린 특종이었다.
이 기사는 趙甲濟 기자가 5共 비리 수사가 시작되기 전에 쓴 것인데, 나중에 全斗煥·盧泰愚 대통령을 수사하고 나서 수사기관이 발표한 내용과 비자금 수치가 거의 비슷했다.
『이 기사의 기본관점은 「한국사회 부패의 원조는 재벌회장들과 대통령 사이에 오고가는 정치자금」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기사가 나간 이후에 대통령들의 비리를 찾는 것이 月刊朝鮮의 큰 흐름이 되었죠. 재벌 회장들이 대통령에게 돈을 갖다 바치는 것은 없어져야 한다는 일련의 기사가 계속 이어졌고, 金泳三·金大中 대통령의 비자금 폭로기사도 이어졌습니다』
6·29 선언에 관해 月刊朝鮮은 두 건의 특종기사를 썼다. 全대통령 측 인사의 제보로 1989년 6월에 「6·29 선언은 全斗煥 작품이었다」가 나왔다. 그때까지 6·29 선언은 盧泰愚 대통령의 작품으로 알려졌었다. 全언론이 이 기사를 받아서 썼고, 국회에서 이 사실을 문제삼아 한동안 與野간에 공방이 이어졌다.
1992년 1월호에 200자 원고지 600장에 이르는 「全斗煥의 육성증언 6·29 선언 前夜」가 실렸다. 金聲翊(김성익)씨는 1983년 3월부터 1988년 2월까지 5년 동안 全斗煥 대통령의 공보비서관으로 근무하면서 全대통령이 각종 공식·非공식 행사에서 한 발언을 빠짐 없이 기록한 인물이다. 이 기사는 「차기 정권 창출을 위해 6·29 선언이 盧泰愚 대표의 독자적인 것이고, 全대통령은 신중한 고려 끝에 그 건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시나리오를 짠 사람이 바로 全斗煥 前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106페이지 분량의 이 기사는 全斗煥 시대를 연구하는 좋은 통치 사료이다.
1967년 3월22일 판문점에서 극적으로 귀순한 李穗根(이수근)은 해외로 탈출했다가 잡혀와 1969년 7월2일 북한 간첩이라는 혐의로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그를 체포했던 李大鎔(이대용) 駐越공사는 趙甲濟 기자에게 『李穗根은 간첩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진실을 밝힐 생각입니다』라고 말했다. 趙甲濟 기자는 1989년 3월호에 「李穗根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기사를 썼다.
趙甲濟 기자는 『객관적으로 증명된 특종은 아니지만 그가 간첩이 아니라는 건 150% 진실』이라고 단정했다. 李穗根은 항소하지 않고 사형선고를 받아들였는데 그 이유는 뭘까? 趙甲濟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李穗根은 항소할 자유도, 안 할 자유도 없었습니다. 판사도 중앙정보부 눈치를 보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중앙정보부장 金炯旭이 자신의 실수(해외탈출을 모른 점)를 덮으려고 죽인 거겠죠. 李씨는 스위스에 가서 살려고 했지 북한으로 갈 생각이 없었어요』
북한 실상을 최초로 고발
月刊朝鮮은 1989년 5월·6월·7월호에 대한항공 폭파범 金賢姬(김현희) 인터뷰 기사를 연재했다. 담당 기자는 『金賢姬가 체험한 북한의 실상과 생활상을 소개하면서 충격을 받았다. 나 자신이 북한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고 있는 데 대해서 충격을 받았고, 金賢姬가 전한 북한의 실상이 너무나 참혹한 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기사를 계기로 그 뒤 月刊朝鮮은 북한의 진실을 파고드는 사실적 취재에 열중하게 되었다.
1990년 12월호 月刊朝鮮 기사 「목탄차로 달리는 공화국―연변 보따리 장사의 북한 종횡기」는 우리 사회에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90년은 중국 조선족들이 처음으로 서울을 드나들기 시작할 때이다. 金東鉉(김동현·現 징기즈칸 편집장) 기자는 朝鮮日報 디자인연구소 曺義煥(조의환) 소장의 소개로 서울에 와있던 중국 조선족 아주머니(당시 36세)를 만나게 되었다.
『시내 호텔에서 만나 이틀 동안 그분의 얘기를 듣고 口述정리를 했습니다. 1983년부터 20여 회 북한을 오가며 보따리 장사를 했다는 아주머니의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140매 분량의 글을 쓰면서 북한 주민이 그렇게 못산다는 사실에 놀라고 가슴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1992년 10월호에는 「서울에 잠입한 북한 공작지도부 수사내막」이 보도되었다. 일명 이선실 사건이다. 이 기사는 신문보다 月刊朝鮮이 먼저 보도했다.
大選자금을 수치화
1994년 3월호에 「러시아를 유랑하는 탈북 벌목공들의 삶」이 보도되었다. 이 기사를 계기로 金泳三 정부는 해외 탈북자들을 받아들이기로 정책전환을 했다. 1994년 1월에 상트 페테르부르크大 전임강사였던 黃晟準(황성준)씨는 月刊朝鮮으로부터 「러시아의 脫北 벌목공들에 관한 취재를 할 수 있겠느냐」는 전화를 받았다. 1991년부터 북한 벌목공들의 탈출이 시작되어 1993년 末에 대거 탈출이 이뤄졌다. 당시 러시아 언론에서는 이미 그 사실을 여러 차례 보도한 상황이었다.
『러시아 특파원들에게 벌목공 얘기를 몇 번 한 적이 있어요. 그때마다 「그게 무슨 기사가 되느냐」고 했습니다. 그런 차에 편집장의 전화를 받고 취재를 하게 되었죠, 아무도 취재하지 않아 내가 처음 하게 되었으니, 내 경우는 특종을 거저 주운 거죠. 벌목공들이 한인교회에 많이 숨어 들어왔기 때문에 취재가 그다지 어렵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볼 때 그 사람들이 정말 고생하며 살고 있지만, 북한에서는 벌목공으로 나가는 걸 대단한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북한內의 생활이 어떨지 짐작이 가는 일이지요』
이 기사에서 처음으로 「脫北者」라는 말이 등장했다. 이 기사로 月刊朝鮮은 그해 관훈언론상을 받았다.
大選자금을 최초로 수치화한 것도 月刊朝鮮이었다. 1993년 3월호에는 「金泳三의 정치자금 내막」이 보도되었다. 金泳三 대통령 취임 초기에 나온 최초의 폭로 기사였다. 大選이 끝난 뒤 「선거에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갔다」는 얘기가 흘러나오자 편집장은 『정말로 천문학적인지 한번 규명해 보자』고 했다고 한다. 金演光(김연광·現 月刊朝鮮 편집장) 기자의 말이다.
『大選이 끝난 뒤 「민자당 지구당을 가동하는 데 법정선거 비용의 10배가 들었다」, 「선거비용이 兆(조) 단위다」 이런 얘기가 떠돌았습니다. 「막판에 1000억원을 구해서 지구당에 뿌렸다」, 「지구당에 5억~10억원을 나눠줬다」는 얘기가 마구 나왔습니다. 구태여 취재하려고 하지 않아도 얘기가 다 들려왔습니다. 선거에 이기고 나니, 서로 YS를 위해 내가 이만큼 했다고 무용담처럼 얘기하더군요. 막연하게 떠돌던 얘기를 처음으로 구체적인 수치로 나타낸 기사죠. 처음으로 우리 사회에 大選자금 액수를 이슈화했습니다』
희한한 것은 기사가 나가도 반응이 「원래 그런 거지. 원래 선거란 脫法·不法을 하게 마련이지」라는 식이었다. 야당조차 쟁점화하지 않았다.
金演光 기자는 후속 기사로 「선거잔금을 어떻게 쓰는가」를 썼다. 「몇억원씩 돈이 남아 그걸로 나눠 가졌다는 사람」, 「집을 샀다는 사람」 등 다양했다. 金演光 기자는 『이 두 기사는 선거자금이 수치화되고 추적된다는 경각심을 갖게 했다. 이 기사는 YS 임기 말에 大選잔금 수사가 진행되면서 새삼 화제가 됐다』고 말했다.
張俊河는 他殺되지 않았다
1993년 5월호 「SBS의 위험한 오보, 張俊河는 타살되지 않았다」는 기사는 張俊河(장준하) 타살설을 부정한 특종이다. 月刊朝鮮은 崔壯源(최장원), 金演光, 李政勳(이정훈), 禹炳賢(우병현) 기자를 특별취재반으로 구성하여 張俊河 실족사를 철저히 추적했다. SBS 제작진, 실족사 목격자 金龍煥(김용환), 당시 담당검사, 법무관 출신 두 변호사 등 관련자를 두루 만난 金演光 기자는 「추락사를 뒤엎을 만한 증거는 하나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張俊河 선생 시신을 檢屍(검시)한 의사를 만났더니, 「死體에는 의혹이 없는데 누구 얘기를 들으니 他殺인 거 같더라」라고 얘기하더군요. 사람들을 만나면 모두들 「누가 그러는데 他殺인 거 같더라」는 답변뿐이었어요. 현장에 가봤느냐고 하면 「갔다 온 사람 얘기를 들으니 그렇다더라」는 식이었지요』
金演光 기자는 張俊河 선생과 함께 등산을 간 고등학교 윤리선생 金龍煥씨의 증언이 가장 확실하다고 했다.
『金龍煥씨는 張俊河 선생과 함께 등산을 가서 張선생이 추락하는 걸 본 사람입니다. 金龍煥씨는 「墜落死(추락사)라고 해도 張선생님은 훌륭한 민주인사다. 왜 他殺이라고 우기는지 모르겠다. 他殺이라고 하면 더 멋진 죽음이 될 것 같아 그러는 것 같다. 他殺이라고 믿고 싶은 사람들의 부정확한 간섭이다」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방송에서는 金龍煥씨가 張俊河 선생을 유인해서 현장에 갔다는 식으로 보도했습니다』
金演光 기자는 『張俊河 사건은 앞으로 100년을 조사해 봐도 실족사다. 더 이상 어떤 결론도 나올 수 없다』고 못 박았다.
1995년 11월5일, 라빈 이스라엘 수상은 텔아비브의 국방장관 사무실에서 月刊朝鮮 趙甲濟 기자와 세상에서 마지막 인터뷰를 했다.
趙甲濟 기자는 인터뷰를 끝내고 밤 비행기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가서 한나절 있다가, 비행기를 갈아타고 일요일 오후에 서울에 도착했다. 趙甲濟 기자가 택시를 탔을 때 말을 시키지도 않았는데 택시 기사가 『라빈 수상이 암살되었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기분이 이상했지요. 바로 어제 만난 사람인데 인터뷰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취재원이 죽었다고 하니 놀랐죠. 바로 회사로 와서 朝鮮日報에 기사를 썼지요』
라빈 수상 최후의 인터뷰는 1995년 12월호에 실렸다. 이스라엘 측에서는 趙甲濟 기자에게 인터뷰 녹음 테이프를 기증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현재 라빈 수상의 마지막 인터뷰 테이프는 이스라엘의 라빈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全斗煥-許錟 극비대화록
1996년 11월호에는 全斗煥-許錟(前 북한노동당 對南 담당 비서)의 극비대화록 全文이 공개되었다. 崔普植 기자는 우연히 이 대화록을 입수했다. 전달한 사람도 어떤 경로로 녹음되고 녹취했는지 알지 못했다.
『全斗煥-許錟 대화록뿐만 아니라 頂上회담을 준비하기 위한 남북 밀사들의 대화 녹취록도 있었어요. 두꺼운 자료철을 세 권이나 입수했습니다. 밀사 간에 어떻게 대화를 풀어 가나 들어보니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그 자료에 기밀자료 도장이 찍혀 있었어요』
보도가 나가자 安企部 기조실장이 朝鮮日報 간부에게 『崔普植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수 있다』며 더 이상 보도하지 말라고 협박했다.
『혹시 우리 집으로 압수수색이 올까 봐 자료를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했어요. 당시 安企部에서 출판국 林伯 국장에게 전화하여 「더 이상 쓰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주면 수색을 안 하고, 사법처리도 하지 않겠다」고 했답니다.
林伯 국장께 「내 개인적으로는 (각서를) 쓸 수 있지만, 그걸 쓸 경우 朝鮮日報 이미지가 어떻겠느냐. 한마디 하니까 바로 써 준다고 하지 않겠나」고 했더니 林伯 국장이 「그러면 쓰지 마라」고 하더군요. 법적으로 검토해 보니까 기자는 처벌대상이 아니더군요. 자료를 제공한 사람은 문제가 될 수 있었어요. 자료 제공자는 밝히지 않고 그 후 보도를 더 했습니다』
金正日의 前妻 성혜림의 西方탈출 최초 보도
1996년 3월호에 세계적 특종이 터졌다. 金正日 전처 성혜림 일가 西方탈출 기사가 실린 것이다. 禹鍾昌 기자는 1994년에 주간조선에 「金正日 처남 서울에 살고 있다」는 기사를 쓸 때 성혜림의 오빠 성일기 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당시 金日成 연구가인 성균관大 이명영 교수가 제보 하여 이뤄진 인터뷰였다.
1995년 8월에 성혜랑씨의 아들인 이한영씨가 급하게 돈이 필요하자 禹鍾昌 기자에게 전화를 했다. 마침 禹鍾昌 기자는 미국 출장을 가고 없었다.
禹鍾昌 기자가 미국 출장에서 돌아오자 이한영씨가 다시 연락을 했다. 성일기씨 딸과 함께 나타난 이한영씨를 禹鍾昌 기자는 林伯 출판국장실로 데려갔다. 전화기에 녹음장치를 한 뒤 모스크바에 있는 이한영씨 어머니 성혜랑씨와 연결했다.
『이한영씨가 어머니와 13년 만에 통화가 되었을 때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 콧날이 시큰했죠. 이한영씨는 전화를 하고 나서 의도적으로 러시아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은 종이로 코를 풀어서 휴지통에 버리더군요. 그걸 주워서 다시 맞췄어요. 코푼 종이를 누가 맞추겠나 생각했겠죠. 우리 목표는 성혜랑의 동생인 성혜림, 그러니까 金正日의 前妻 목소리를 녹음하려는 것이었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계속 모스크바와 전화연락을 하면서 성혜랑·성혜림 자매의 동향을 추적했다. 그런데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갑자기 성혜랑씨가 모스크바를 탈출하겠다고 하여 비상이 걸렸다. 禹鍾昌 기자는 그제서야 安企部에 알리고, 그간 녹음한 테이프를 安企部 직원에게 들려줬다. 安企部에서는 이한영씨를 신뢰하기 어렵다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安企部 직원이 權寧海(권영해) 안기부장에게 테이프를 들려주자 바로 『데려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성혜랑·성혜림씨는 1996년 1월15일을 탈출 D데이로 잡았다.
『우리는 빨리 보도를 해야 탈출한 사람이 안전하다고 판단했고, 安企部는 보도되면 죽는다며 말렸습니다. 그 사람들의 신변이 안전하다는 소식을 듣고, 보도하기로 했죠. 2월13일자 朝鮮日報 수도권판에 기사를 넣었습니다. 밤 12시40분에 신문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가 새벽 4시에 이 신문을 봤고, 동아일보가 부랴부랴 최종판에 내용을 그대로 베껴서 보도했죠. 朝鮮日報는 1면, 3면 사회면에 성혜림 西方탈출 기사를 써서 확실한 특종을 했지요』
이한영씨는 그 후 동아일보·중앙일보와도 인터뷰를 하고 책도 냈으나 1997년 5월 피살당했다. 禹鍾昌 기자는 『안기부의 보호를 받으라고 했는데, 그걸 안 지켰다』며 애석해했다.
성혜림 자매 西方탈출 기사가 나간 뒤 중앙일보와 한겨레신문은 『성혜림은 탈출하지 않고 성혜랑만 탈출했다. 月刊朝鮮 기사는 오보다』라는 기사를 냈다. 성혜림은 스위스까지 왔다가 심경변화를 일으켜 모스크바로 돌아갔는데, 두 신문은 아예 모스크바를 탈출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2004년 성혜림이 사망한 뒤 중앙일보는 『성혜림도 1996년 당시 스위스로 왔다가 돌아갔다』고 처음으로 시인하는 기사를 실었다. 2003년 여름 KBS TV 미디어포커스는 성혜림 사건을 다루면서 『朝鮮日報가 세계적 오보를 냈다』고 보도했다. 禹鍾昌 기자는 미디어 포커스를 상대로 언론중재委에 訂正보도를 신청했고, 언론중재委에서는 訂正보도 명령을 내렸다. 미디어 포커스는 프로그램 생긴 이래 최초로 「朝鮮日報의 성혜림 기사를 誤報라고 한 것은 잘못」이라고 訂正보도했다.
黃長燁 망명보도, 세계적 특종
1997년 3월호에 또 하나의 세계적 대특종이 터졌다. 1997년 2월12일 북한 노동당 비서 출신의 黃長燁(황장엽)씨와 그의 심복 金德弘(김덕홍) 북한 려광무역 대표의 한국 망명을 특종 보도한 것이다.
金容三(現 월드빌리지 편집장 겸 月刊朝鮮 출판팀장) 기자는 두 사람이 망명하기 1년여 전부터 망명 중개인 역할을 했던 이연길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장을 통해 이 두 사람의 동정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金기자는 黃長燁씨의 저술과 논문, 친필 서신, 메모, 북한에서 발간되는 중요자료 등을 입수했다. 金기자가 입수한 친필서신과 저술 등에는 자신의 망명 동기와 결행에 대한 비장한 각오 외에 북한 최고위층의 동향, 한국사회의 첩자들이 북한에 팩시밀리로 정보를 제공하는 사실, 북한 核 보유설, 전쟁 준비 등 고급 정보들이 들어 있었다. 黃長燁씨는 『남한 권력 깊숙한 곳에 북한 사람이 박혀 있다』는 경고를 했다.
金容三 기자는 黃長燁씨와 金德弘씨를 돕기 위해 미국 선교단체와 접촉, 인도적 차원의 의약품 공급도 주선했다. 망명 공작 막바지에는 黃長燁씨의 미국 방문을 성사시키기 위해 초청장 발급을 시도하는 등 金기자는 黃長燁 망명의 全과정에 깊이 개입했다.
1997년 2월12일 아침, 두 사람이 중국 北京에 위치한 한국영사관으로 망명한 사실이 우리 정부를 통해 공식 발표된 직후 朝鮮日報와 月刊朝鮮은 金容三 기자가 입수한 黃長燁씨의 친필 서신 등을 비롯한 각종 자료를 보도했다.
朝鮮日報와 月刊朝鮮의 보도가 나간 후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NHK 등 세계적인 언론이 조선일보와 月刊朝鮮 기사를 인용보도함으로써 세계적인 특종을 하게 되었다.
宋斗律의 정체를 파헤치다
1998년 8월호에 「宋斗律(송두율)은 과연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인가?」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黃長燁씨가 쓴 「북한의 진실과 허위」의 책에 나오는 한 문장에서 시작되었다. 「宋斗律이 김철수라는 가명을 가진 북한 노동당원이다」라는 내용이었다. 李東昱(이동욱·한국갤럽전문위원) 기자가 그 책을 편집장에게 갖고 왔고, 禹鍾昌 기자에게 취재지시가 떨어진 것이다.
宋斗律씨는 1990년에 「내재적 접근론」이라는 책을 통해 「북한 문제는 북한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禹鍾昌 기자는 1997년에 범청학련 소속으로 북한에 갔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도종화씨를 비롯한 학생들을 취재하러 독일에 갔다가 宋斗律씨에게 만나자는 요청을 했었다. 宋斗律씨는 역시 만남을 거절했다.
宋斗律씨는 이 기사가 나온 뒤 月刊朝鮮이 아닌 黃長燁씨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했다. 禹鍾昌 기자가 黃長燁씨의 저서를 근거로 했으니 黃長燁씨가 자신을 명예훼손했다는 것이었다.
『재판이 진행 중일 때 소송기록을 다 봤어요. 安企部에서 「宋斗律은 김철수가 맞다」고 기록해 놨기에 그것까지 보도했지요. 黃長燁 선생의 말이 맞았습니다』
宋斗律씨는 盧武鉉 정권이 들어서자 귀국했고, 귀국하자마자 체포되었다. 1심에서 「宋斗律은 김철수가 맞다」는 판결이 나왔고, 2심에서는 증거가 좀 부족하다는 판결이 나왔다. 宋씨가 북한노동당원임도 이 수사로 밝혀졌다. 현재 이 사건은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禹鍾昌 기자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宋斗律씨는 비겁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한때 김철수였다. 북한으로부터 돈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때와 다르다」 이렇게 인정하는 게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金日成에게서 돈을 받은 건 북한에 유리한 발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李承福 誤報 논쟁에 종지부를 찍다
朝鮮日報는 1998년에 30년 전의 기사로 느닷없이 誤報논쟁에 휘말렸다. 1968년 12월9일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다가 무장공비들에게 살해된 李承福(이승복) 사건이 조선일보의 작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던 것이다. 「언론개혁시민연대(언개련)」는 「朝鮮日報의 당시 기사는 작문」이라며 전국을 돌며 오보전시회를 개최했다. 언개련의 주장을 「월간 말」誌와 「미디어 오늘」, MBC TV가 받아서 보도하면서 사람들은 李承福 사건은 조작이라고 믿게 되었다.
月刊朝鮮은 李東昱 기자에게 『誤報라면 어떻게 誤報하게 됐는지를 밝히는 것도 言論의 사명』이라면서 취재지시를 내렸다.
李東昱 기자는 李承福의 형 李學官(이학관)씨, 당시 취재를 했던 조선일보 사회부 姜仁遠(강인원) 기자 등을 취재한 결과 李承福 소년의 절규는 진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998년 月刊朝鮮 10월호와 11월호에 이 기사가 나간 후 金周彦 前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한국언론재단 연구이사)과 金鍾培 前 미디어 오늘 편집장(시사평론가)은 조선일보에 대한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6년 후인 2004년 10월28일, 서울 중앙지법 형사항소9부(부장판사 강형주)는 판결문에서 『李承福군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다는 보도는 사실에 기초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로써 「李承福 사건」은 「역사적 실제 사실」로 확인되었고, 「李承福 사건 조작」이란 주장은 허위로 판명됐다. 金周彦씨에게는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金鍾培씨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李東昱 기자는 아직도 李承福 기사를 오보로 아는 사람이 많다고 개탄했다.
『법원에 의해 판결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인터넷 사이트에서 「李承福 사건」을 입력하면 수많은 說과 소문들이 버젓이 깔려 있습니다. 소년의 정직함을 정직하지 못한 어른들이 모욕하고 왜곡했습니다. 이 사건을 취재하면서 역사는 정의로운 사람들의 몫이 아니라 부지런한 자들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惡소문을 부지런히 퍼뜨리는 사람을 막지 못하면, 정의는 실종될 것입니다』
崔章集 파문
1998년 11월호 「崔章集 대통령 정책자문위원장의 충격적인 6·25 역사관」을 밝힌 기사가 우리 사회에 일대 회오리를 일으켰다. 禹鍾昌 기자는 이 기사에 대한 오해를 먼저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회사의 사주로 기사를 썼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근거 없는 소리입니다. 1998년 여름 제보가 있었어요. 崔章集 대통령 정책자문위원장이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래서 趙甲濟 편집장께 보고했더니 「崔章集씨는 천하가 아는 左派인데 기사 써봐야 소용 없다」며 내 말을 일축했습니다.
나는 계속 관심이 있어서 추석 때 부산 집에 오가면서 기차 안에서 崔章集씨가 쓴 책 8권을 다 읽었어요. 책을 읽어 보니 정말 문제가 많았습니다. 교수로서는 주장할 수 있는 얘기지만, 대통령 정책자문위원장으로서 이런 사상을 갖고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됐죠. 일단 崔章集씨에게 전화를 했더니 오라고 하더군요. 녹음기를 들고 가서 얘기했는데, 「한때 6·25를 金日成의 위대한 결단이라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아니다」라고 말했으면 기사를 안 썼을텐데, 그게 맞다는 겁니다.
한 시간 동안 얘기를 했는데 한마디로 대한민국 自虐史觀(자학사관)을 갖고 있었어요. 120장짜리 기사를 쓰면서, 60장은 崔章集씨 이론, 나머지 60장은 인터뷰로 구성했죠. 충분히 반론권을 준 기사였습니다』
기사가 나가자 崔章集씨는 바로 명예훼손을 당했으니 5억원을 배상하라며 朝鮮日報를 제소했다. 이 기사로 말미암아 안티조선 세력이 결집하고 대한민국은 반으로 쪼개졌다. 崔章集씨는 조선일보와 月刊朝鮮에 자신의 글을 한 편씩 실어 주는 조건으로 제소를 취하했다. 禹鍾昌 기자는 崔章集씨가 재판을 계속 진행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崔章集 사건의 본질은 「기자가 인용을 어디까지 해야 할 것인가」입니다. 이 부분이 재판을 통해 판례로 남았으면 좋았을 겁니다. 한국 언론사에서 논문인용에 있어 판례가 될 수 있는 사건인데 끝이 안 나 아쉽죠. 신문방송을 전공하는 학생들 박사학위 소재가 될 수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납북어부를 귀환시키다
2000년 4월 金容三 기자는 30년 전 서해상에서 어로작업 도중 납북된 어부 李在根(이재근)씨가 가족과 함께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 모처에 숨어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SBS 대전방송 취재팀과 金容三 기자는 중국 하얼빈에서 두 시간 거리인 상지라는 곳에 가서 李在根 부부와 아들 등 가족 3명을 만났다.
취재를 마친 SBS 팀이 돌아간 후 金容三 기자는 혼자서 이들을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金기자는 北京의 우리나라 대사관에 가서 李在根씨의 소식을 알리고 여행증명서 발급을 의뢰했다. 당시 남북 頂上회담을 앞두고 있던 우리 정부는 여행증명서 발급을 꺼렸다.
金容三 기자는 일주일 동안 밤낮으로 대사관을 드나들어 겨우 여행증명서를 받을 수 있었다. 상지에 가서 金容三 기자가 李在根씨 가족을 北京으로 데려왔다. 대사관에서는 『月刊朝鮮이 여기까지 데려왔으니 신변보호를 당신이 책임지라. 밀항을 해서 한국에 데려가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北京은 여권과 비자가 있어야만 호텔에 투숙할 수 있기 때문에, 金容三 기자는 호텔방을 잡아 李在根씨 가족을 묵게 하고 자신은 다른 곳에 가서 잠을 자야 했다. 일주일 동안 호텔을 옮겨다니면서 계속 대사관과 협상을 벌였지만, 2년 전 李在根씨에게 『국가에 세금 낸 거 있어요? 왜 자꾸 국가에 부담을 주려고 그래요?』라고 말했다는 자세를 대사관 측은 바꾸지 않았다.
『장기전으로 갈 것 같아서 조선일보 北京특파원 지해범 기자가 소개해 준 콘도에 李在根씨 가족을 투숙시켰어요. 그런데 내 이름으로 체크인해 놓고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며 첫날 쫓아내는 겁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택시에 李在根씨 가족을 싣고 대사관으로 가서 「당장 해결해주지 않으면 내일 아침 조선일보에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것을 터뜨리겠다」고 협박했죠. 그제야 대사관에서는 李在根씨 일가족 3명을 인계받더군요』
李在根 사건은 6·25 이후 납북된 한국인이 귀환한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됐으며, 이후 月刊朝鮮은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 대표와 연대하여 납북어부를 속속 귀환시켰다.
月刊朝鮮은 金大中 前 대통령의 對北 불법 송금사건 특종을 연이어 3개나 터뜨렸다. 2002년 5월호에 美 의회 조사국 연구원 래리 닉시가 작성한 韓美관계보고서를 인용해 「현대그룹의 4억 달러 對北 비밀송금說」 기사를 처음 보도했다. 이 보고서에는 현대가 지금까지의 공식지원금 4억 달러 외에 비밀리에 4억 달러를 웃돈으로 주었고, 이 돈이 군사비로 전용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金成東(김성동) 기자는 『이 기사가 나가기 전까지 金大中 정부는 북한에 단 돈 1원도 준 적이 없다고 말했고, 여당과 일부 신문에서 조선일보와 미국이 의혹을 생산한다는 식의 얘기가 나왔다』고 말했다.
「정말」과 「왜」의 차이
한나라당 嚴虎聲(엄호성) 의원은 月刊朝鮮 기사를 토대로 자체조사를 하여 2000년 4월 산업은행이 현대상선에 4000억원을 변칙대출을 해주었다는 의혹을 2002년 9월에 제기했다. 月刊朝鮮의 보도와 嚴虎聲 의원의 변칙대출 의혹제기는 결국 현대그룹의 對北송금 의혹사건에 대한 특검으로 이어졌다.
한겨레신문은 2002년 9월27일자 3면에 「한나라 4억 달러 北 지원 주장 어떻게 나왔나」라는 기사를 이렇게 시작했다.
<엄의원도 26일 국감장에서 月刊朝鮮 5월호를 자료로 들고 나왔지만 지난 3월25일 미국 의회조사국의 래리 닉시 연구원이 내놓은 한미관계 보고서가 그 발단이었다. 月刊朝鮮도 이 보고서를 토대로 「현대는 왜 4억 달러를 비밀리에 주었을까」라는 식으로 4억 달러 비밀 지급을 기정사실화하는 논조를 폈다>
이 기사는 月刊朝鮮 역사상 처음으로 2002년 12월호에 再수록되었다. 그 달에 현대상선이 2000년 3월 20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하여 정치권에 배포했다는 특종기사가 터지면서 對北송금 문제가 다시 도마에 올랐기 때문이다.
현대상선 200억 비자금 기사는 權魯甲(권노갑) 前 민주당 고문의 구속과 鄭夢憲(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에 대한 조사를 불러온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宋承鎬(송승호) 기자는 2002년 10월 초에 현대상선 직원으로부터 제보를 받고 취재를 시작했다.
『현대상선이 정치권에 휘둘리는 것을 보다 못한 직원이 月刊朝鮮의 취재력을 믿고 제보한 겁니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까 봐 너무 몸조심을 하는 바람에 취재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對北 비밀송금 사건의 진실
月刊朝鮮은 연이어 2003년 1월호에 「현대상선 비자금 200억원의 傳票(전표)」를 공개했다. 16代 총선 직전인 2000년 3월3일부터 14일까지 117회에 걸쳐 외국의 거래처에 화물용선료 명목으로 자금을 송금한 것처럼 허위 전표를 꾸민 뒤 이 돈을 제3의 계좌로 보내는 방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했던 것이다.
月刊朝鮮의 이 보도 때문에 정치권이 아연긴장했다. 국회의원들은 宋承鎬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누구에게 얼마가 건너갔느냐』, 『구체적인 명단을 갖고 있는가』, 『명단을 공개할 계획이 있느냐』고 연일 물었다. 한나라당은 이 기사를 인용하여 金大中 정부와 현대그룹과의 커넥션 의혹을 강하게 제기하며 對與 공세를 폈다.
2003년 3월호에 200억원의 구체적인 사용내역에 관한 사법당국의 수사를 촉구하는 기사가 실렸고, 한 달 후 宋斗煥(송두환) 특검팀에서 전표 리스트와 제보자를 소개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宋承鎬 기자는 보도된 전표는 제공했으나 제보자는 공개하지 않았다. 특검팀에 의해 전모가 확인되는 듯했으나, 盧武鉉 대통령의 특검 수사기간 연장 거부로 흐지부지되었다.
2003년 8월4일 鄭夢憲 현대아산 회장이 자살했고, 8월14일 權魯甲 前 민주당 고문이 긴급 구속되었다.
2003년 3월호에는 金大中 대통령이 남북 頂上회담 직전 마카오의 조광무역 계좌(북한의 對南공작기관)로 돈을 송금한 사실을 보도했다. 禹鍾昌 기자는 이 제보를 현직 국회의원으로부터 받았다.
『여의도 길바닥에서 약속장소를 세 번이나 바꿀 정도로 보안을 유지했습니다. 내가 받은 건 종이 한 장이었습니다. 그걸 기사로 쓰고 나니까, 현장에 가봐야 할 거 같더군요. 정말 마카오에 조광무역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현지로 갔죠. 조광무역은 마카오 경찰서 교통국 건물 바로 앞에 있었는데, 마카오 경찰들이 「들어가면 죽는다. 외교관 건물이고 거기 있는 사람들 모두 공작원이다. 우리도 못 들어간다」고 겁을 주더군요』
禹鍾昌 기자는 건물에 비치된 전화번호부를 통해 조광무역이 5층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비밀키를 눌러야 들어갈 수 있는 건물이었는데, 누군가가 키를 누를 때 재빨리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5층에 내리니 조광무역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禹기자는 일단 탈출 때를 대비해 비상구를 알아놓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오전 9시가 안 된 시각이어서인지 직원들이 안 보였다. 안내데스크까지 들어가서 안을 훑어보고 재빨리 나와서 조광무역 현판을 촬영했다.
『조광무역이 실제로 있는지를 보러 갔다가 실체를 확인한 것이지요. 밖으로 나와서 전화를 하니 북한 말투의 남자가 받더군요. 「나 月刊朝鮮 기잔데 여기까지 왔다. 5억 달러가 조광무역을 통해 평양으로 갔다는데, 당신 입장을 밝혀라」고 얘기하자, 그 남자가 「朝鮮日報 기자와는 얘기하지 않겠다」며 끊더군요』
金正日 처제 부부 망명 보도
禹鍾昌 기자는 2003년 6월호에 북한이 尹靜姬(윤정희)·白建宇(백건우) 부부의 납치를 시인하는 문서를 발견하여 기사화했다. 尹靜姬·白建宇 부부가 북한에 납치될 뻔했다는 것은 그들의 주장이었을 뿐, 물증은 없었다. 그런데 북한이 유고에 납치를 시인하고 사과하는 내용을 보낸 문서를 찾은 것이다.
당시 북한의 일본인 납치사건이 일본 언론의 최대 관심사였다. NHK 베테랑 기자가 禹鍾昌 기자에게 납치사건에 개입된 북한공작원 김유철을 찾는 일을 도와 달라고 했다.
『자료를 찾기 위해 유고와 독일 등지를 돌며 문건을 찾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도 도울 테니, 혹시 우리나라와 관련된 문서를 찾으면 나에게 달라고 부탁했죠. 전부터 이응로 화백의 부인 박인경씨의 기사를 계속 쓰고 있었어요. 박인경씨가 계속 거짓 증언을 해 尹靜姬씨가 유고까지 끌려갔다 왔다는 주장을 입증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죠. 尹靜姬씨가 미국 총영사 크리스텐슨 덕분에 풀려났다고 하여 그 사람을 찾으려고 했으나 그것도 잘 안 됐어요. 그래서 尹靜姬씨의 자작극이라는 얘기까지 나왔었죠』
그런데 NHK 기자가 북한이 유고에 보낸 공문서를 찾은 것이다. 그후 크리스텐슨씨까지 만나 尹靜姬·白建宇 부부 납치사건은 북한의 소행임을 증명할 수 있었다.
禹鍾昌 기자는 『특종은 지속적으로 사건을 쫓다 보면 되는 거지,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니라는 걸 그 사건을 통해 다시 깨달았다』고 말했다. 북한 권력층의 인척 관련 취재를 많이 했던 禹鍾昌 기자는 2003년 9월호에 金正日 처제 고영숙 부부가 미국으로 망명한 사건을 보도하여 다시 한 번 특종을 했다. 禹鍾昌 기자는 『일간지는 먼저 보도하는 게 특종이지만, 월간지는 남들이 보도하지 않은 것, 꽁꽁 숨겨져 있던 것 찾는 게 특종』이라고 말했다.
月刊朝鮮 2004년 4월호에서는 국사교과서의 이념적 편향성을 비판하는 「고교 국사교과서의 대한민국 때리고 金正日 감싸기」가 실렸다. 고교 근현대사 교과서의 편향성을 지적한 최초의 보도였다. 이 기사를 쓴 裵振榮(배진영) 기자는 月刊朝鮮 2002년 4월호에서는 全敎組 발간 통일교육 교재 「이 겨레 살리는 통일」의 문제점을 지적한 적이 있었다.
6개월 뒤 權哲賢(권철현) 한나라당 의원이 국회에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裵振榮 기자는 『내가 기사를 쓰면서 조언을 구했던 한 정치학자가 權哲賢 의원 측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편향성에 대해 이야기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朝鮮日報 등 언론들에서는 연일 이 문제를 대서특필했다.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이념적 편향성을 바로잡기 위해 2005년 1월 「교과서포럼」(상임공동대표 박효종 서울大 교수)이 창립됐다.
張成澤 가택연금
2004년 7월호의 金正日 매제 張成澤(장성택)의 가택연금 보도는 국제적 특종이 되었다. 宋承鎬 기자는 某 인사와 술을 마시던 중 이 기사의 실마리를 잡았다. 취기가 어느 정도 올랐을 때 宋기자는 그에게 『대체 요즘 하는 게 뭐가 있느냐, 미국과 정보협조도 안 되고 문제 아니냐』고 물었다.
某 인사는 『그런 소리 마라. 張某 사건도 체크하고 긴밀하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宋承鎬 기자는 張某라면 북한의 2인자인 金正日의 매체인 張成澤이 분명하다고 생각하여 정신을 차리고 일부러 『張成澤이 죽었나』라고 물었다.
『그쪽도 술이 많이 취한 상태였어요. 나도 일부러 술을 많이 마시면서 대수롭지 않은 척 자꾸 질문을 했죠. 그 사람이 「죽기는… 감금되었다」고 얘기하더니, 그쪽도 퍼뜩 정신을 차리더군요. 「그렇다면 탄광이나 교화소로 갔느냐」고 물었더니 그쪽에서 「그래도 2인잔데, 가택연금되었다」고 말한 뒤 절대 보도하면 안 된다고 하더군요』
朝鮮日報에 張成澤 가택연금 기사가 인용보도되자 중앙일보는 「張成澤 건재」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月刊朝鮮 기사가 나간 뒤 미국과 일본 언론이 여러 경로로 확인을 시작했고, 외신에 「張成澤 가택연금」이라는 기사가 계속 나왔다. 몇 달 후 중앙일보는 슬그머니 「張成澤 가택연금」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친일파의 딸 金希宣의 親日청산 활동
2004년 9월20일부터 金演光 편집장이 月刊朝鮮을 맡게 되었다. 金편집장이 만든 첫 호에서 특종이 터져 나왔다. 2004년 10월호 「金希宣 의원의 독립군 家系 의혹 추적」이 바로 그 기사이다. 金希宣 家系의혹 기사는 10월·11월·12월호 3회 연속 이어졌다. 吳東龍(오동룡) 기자는 某 인사의 제보를 받고 金希宣 의원 독립군 家系의혹을 2004년 9월호에 일단 제기했다.
『한독당에서 金學奎(김학규) 장군과 함께 활동했던 분이 제보했습니다. 金學奎 장군이 예전에 金希宣 의원에 대한 얘기하는 걸 들은 적이 없다며 뭔가 석연치 않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 보니 홈페이지와 선거인 명부에 출생지가 다르게 적혀 있더군요. 네티즌들도 이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있었어요. 金希宣 의원이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라면서 親日청산에 앞장서지 않았더라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워낙 설치니 네티즌들의 눈에 거슬린 거죠』
2004년 9월 金學奎 장군의 아들 후배라는 金瓚鎬(김찬호)씨가 吳東龍 기자를 찾아왔다.
『2002년에 쓴 기사 가운데 金學奎 장군 얘기가 나온 걸 봤는데, 家系 설명 가운데 틀린 게 있다는 겁니다. 金學奎 장군의 본처 사이에서 낳은 큰아들 金一鉉(김일현)이 고교선배라면서 책에 나온 金一眞(김일진)은 서자라고 했습니다. 金一鉉씨가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고 하여 金瓚鎬씨와 국립묘지에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金一鉉 대위의 묘지를 확인했습니다. 국가유공자면 누군가 연금을 타지 않겠는가 생각하여 金瓚鎬씨와 함께 보훈처까지 갔죠. 보훈처에서 자료를 보여 주지 않는데 金瓚鎬씨가 집안 친척이라고 하니 보여 주더군요. 거기서 파주에 金一鉉씨의 부인 田鳳愛(전봉애)씨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田鳳愛씨를 찾아갔을 때 『자신의 남편은 안동 김씨』라고 얘기했다. 田鳳愛씨는 아주 교양이 있어서 딱 필요한 말만 하여 별다른 얘기는 듣지 못했다. 마감이 거의 다 되었을 때 田鳳愛씨의 친척이 吳東龍 기자에게 전화를 했다.
『첫마디가 「기자님 어디까지 아시나요」라고 하더군요. 그분이 金希宣 의원이 TV 나올 때마다 田鳳愛씨가 「아버지가 뭐 한 줄도 모르고… 만주 경찰을 했다」고 얘기했다는 겁니다. 그분은 그런 사람이 親日청산하겠다며 날뛰는 걸 보니 역겨워서 전화한다고 하더군요』
田鳳愛씨에게 확인전화를 하자 金希宣 의원의 아버지가 유하에서 만주경찰을 했다고 확인해 주었다. 기사가 나가자 파장은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金希宣 의원이 기자회견을 하고 성명서를 냈다.
『참 이상한 일이죠. 그 기사가 나간 후 金希宣 의원 측으로부터 항의전화 한 통 안 왔고, 月刊朝鮮을 고발하지도 않았죠. 특종기사에 대해서는 항의가 없다는 게 특징이죠. 대신 격려전화가 엄청나게 많이 왔어요』
吳東龍 기자는 「만주에서 치안을 담당했을 수도 있으니 확실하게 문서를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하여 김찬호씨와 함께 만주로 갔다. 길림성의 수도인 장춘에 갔으나 문서고에 일제시대 기록이 없었다. 내친 김에 유하까지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현지 조선족의 안내를 받아 유하 공안국과 접촉을 시도하여 金希宣 의원의 아버지가 독립군을 때려잡은 만주국 특무였다는 증명서를 확보했다.
『그쪽에서 더 이상의 자료는 공개할 수 없다고 하여 범죄기록 리스트를 못 받은 점이 좀 아쉽죠. 독립군을 때려잡는 일을 한 사람의 자녀가 親日청산을 하겠다고 나섰으니…. 이 사건을 통해 얻은 교훈은 親日 청산을 하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입니다』
『특종에 대해 시들해지면 기자생활 끝난다』

趙甲濟 月刊朝鮮 대표는 『명예욕이 특종을 만든다. 「기사를 써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겠다」, 「좋은 의도에서 영향력을 끼치겠다」는 생각, 「불의를 고치겠다」는 게 다 명예욕이다. 정의감, 명예욕, 호기심, 이 세 가지가 있으면 특종을 한다』고 말했다.
『특종에 대해 시들해지면 기자생활도 끝납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서 제일 귀중하고 나를 흥분시키는 건 특종입니다. 기자의 특종은 운동선수가 신기록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특종한 기자가 특종을 하는 이유는 특종에 따른 쾌감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죠. 운동경기도 우승하는 팀이 계속 우승하는 건 우승의 쾌감 때문입니다. 특종의 쾌감이란 「자기가 쓴 기사로 인해 세상이 시끄러워지는 것」이겠죠. 항상 사물에 관심을 갖고 있다가 딱 한 줄도 특종이 된다는 걸 판단해야 합니다』
趙甲濟 대표는 사실에 자신이 있으면 단정적으로 쓸 수 있다며, 『사실을 앞세워 쓰면, 공격을 당한 상대방도 납득한다』고 말했다.
『과거에 특종을 많이 한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나간 특종 100개보다 오늘의 특종 하나가 더 빛납니다』●
초대 편집장인 시인 曺永瑞(조영서)씨는 『「思想界」에 대한 鄕愁(향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겨냥해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을 혼합한 잡지를 지향했다』고 말했다. 1980년 4월에 창간된 月刊朝鮮은 「民主의 길」을 특집제목으로 삼아 「80년의 봄」을 반영했다. 창간호는 5만 부가 팔렸다.
당시 方又榮(방우영) 사장은 『적자가 나도 괜찮으니 좋은 잡지를 만들라』며 격려했다. 매일 아침 경리사원이 曺永瑞씨 책상에 100만원을 넣어 두었는데, 그 돈으로 필자들이 원고를 갖고 오면 그 자리에서 원고료를 지불했다.
창간호 책값은 1500원이었고, 원고료는 200자 원고지 한 장당 3000원, 詩 한 편에 3만원이었다.
曺永瑞씨는 『당시에는 특종보다는 좋은 글을 싣기 위해 필자 발굴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駐美특파원을 지낼 때 미국 관련 기사를 재미있게 쓴 金大中(김대중·現 조선일보 고문) 조선일보 외신부장에게 칼럼을 맡겼고, 「중금속 오염」 기사를 써서 기자상을 탄 국제신문 趙甲濟(조갑제·現 月刊朝鮮 대표) 기자가 해직당하자 바로 필자로 기용했다.
『아이디어 좀 갖고 오라고 했더니, 엄청나게 많은 글감을 갖고 왔어요. 다 쓸 만한 얘기들이었죠. 100장씩 써 오라고 해서 그 자리에서 원고료를 30만원씩 지급했습니다. 그때 내 월급이 20만원이었어요』
月刊朝鮮 창간 한 달 뒤 全斗煥 장군의 新군부가 집권하면서 취재와 편집의 자유가 크게 위축되었고 정권에 불리한 기사는 쓸 수 없게 되었다. 1980년 6월호에 「3金 특집」을 준비했으나 신문에 광고조차 할 수 없었다.
교양잡지로 출발했던 月刊朝鮮은 1982년 許鉥(허술) 편집장이 부임하면서 종합 시사잡지로 탈바꿈했다. 許鉥씨는 중앙일보 기자, 「월간중앙」 편집장, 「마당」 편집장을 거쳐 月刊朝鮮에 스카우트되어 왔다. 1982년부터 1987년까지 月刊朝鮮 편집장을 지낸 許鉥씨는 『안기부에 여러 번 불려갔다. 方又榮 사장은 기사에 대해 사전검열 안 하고 모든 걸 맡기는 스타일이었다』고 회고했다.



吳交力鎭(오효진·現 충북 청원군수) 기자는 1984년 7월호에 白凡 金九(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 安斗熙(안두희) 인터뷰, 1986년 12월호에 李厚洛(이후락) 前 중앙정보부장 인터뷰를 성사시키는 등 많은 특종을 했다.
吳交力鎭씨가 1984년 月刊朝鮮에 入社하여 연재한 「吳交力鎭의 인간탐험」은 솔직담백한 인물 묘사와 날카로운 필치로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인터뷰하지 않기로 유명한 인사들을 만나 그들로 하여금 입을 술술 열게 만들었다.
2004년에 그가 낸 책 「인터뷰의 황제가 되는 길」에 보면 사람을 만나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잘 나타나 있다.
그 누구도 만나지 않은 安斗熙를 만나기 위해 집 앞에다 쪽지를 끼워 두고, 앞집에 수박을 맡겨 두기도 했다. 그 후에도 安斗熙씨가 좋아하는 음식을 하나하나 사다 날라 그의 마음을 열었다. 吳交力鎭씨는 『기사화하지 않고 역사 기록으로 남기자고 했는 데 그 약속을 어긴 게 미안하다』고 했다.
『조금 더 시간을 갖지 못한 게 아쉽지만 마감 때문에 글을 쓸 수밖에 없었어요. 마지막에 결정적 장면을 며칠만 더 기다렸으면 들을 수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안타깝죠. 安斗熙씨는 자신의 행동을 나라를 위해서 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 신념을 버리지 않았을 겁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비밀스럽고, 가장 흥미로운 인물로 꼽히는 李厚洛 前 중앙정보부장을 설득할 때에도 그는 심금을 울리는 편지를 보내 허락을 받아냈다.
『李씨 인터뷰 기사는 1986년 12월호, 1987년 10월호 두 번 나갔는데 두 번째 기사로 해서 李厚洛씨께 인간적으로 미안했지요. 기사가 나온 후 DJ납치 관련 부분이 정치문제로 커지고 李厚洛씨가 수세에 몰리고 기자들 앞에서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그 후로 한 번도 못 뵈었는데, 아직도 미안한 마음입니다』
李厚洛 인터뷰에서 5·16 이후 정치적 결정의 배후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秘話(비화)들이 밝혀졌다. 특히 제2공화국의 張勉(장면) 총리가 쿠데타 사실을 알고도 아무 대응을 하지 않은 일, 평양에서 金日成과 나눈 대화, 朴正熙 의장에게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라고 권유를 한 일 등 정치사를 새롭게 밝히는 내용들이 공개됐다.
1987년 10월호는 「李厚洛 증언-金大中 납치사건의 진상은 이렇다」는 題下의 기사로 해서 역사상 최고 발행부수인 40만5000부를 기록했다. 安企部에서 책을 못 내게 막았으나 결국 더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었다.
吳交力鎭 청원군수는 『月刊朝鮮 기자 시절에 불안하고 너무 힘들었다. 늘 칼날 위에서 춤추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특종 하나에 10만 부가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위력적이어서 성취감이 있었다』고 했다.

許鉥씨는 『특종을 해야 우수한 기자가 아니라, 우수한 기자여야 특종을 한다』고 했다.
『취재 전문 趙甲濟 기자를 硬派(경파), 인터뷰 전문 吳交力鎭 기자를 軟派(연파)라고 불렀죠. 吳交力鎭씨는 소설가여서 읽히는 기사를 썼죠. 당시 하지 말라는 것만 쓰면 팔렸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쉬웠지요』
許鉥씨는 『잡지가 할 수 있는 특종은 심층취재』라고 정의했다. 그는 자신이 편집장으로 재임할 때 趙甲濟 기자가 쓴 「KAL에 칼을 댄다」, 「KAL 007, 최후의 목격자」를 최고의 특종으로 꼽았다. 이 기사로 인해 月刊朝鮮은 한국 언론에 본격적인 수사식 보도(Investigative Reporting)를 도입한 매체로 평가받았다.
공군 출신인 趙甲濟 기자는 항공 사고에 관심이 많아 1984년 4월호에 「KAL에 칼을 댄다」는 기사를 통해서 대한항공(KAL)의 안전 관리 문제를 심층 취재한 적이 있었다.
『1984년 항공전문가 인맥을 많이 확보해 놓았다가 「KAL 007, 최후의 목격자」 취재 때 도움을 받았습니다. 사고기의 千炳寅(천병인) 기장과 마지막에 만났고, 바로 뒤에 비행을 했던 朴用萬(박용만) 기장과 며칠 동안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면서 쓴 기사입니다. 내가 비행기에 대해서 잘 아니까 대화가 되었죠. 1984년에 인터뷰한 뒤에 계속 연락을 하고 지냈는데 朴기장이 회사를 그만둔 뒤 취재에 응했죠. 하루아침에 되는 기사는 없습니다. 특종에는 공짜가 없어요』
이 기사는 1993년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내놓은 KAL 007기 블랙박스 분석 결과, 사실로 확인됐다.
月刊朝鮮을 위기로 몰고 갔던 특종도 있었다. 1986년 2월호에 趙甲濟 기자가 쓴 「한국 내 美 CIA 연구」는 美 CIA 요원들의 身元(신원)과 이들의 한국內 활동에 대한 최초의 추적 기사였다. 이 기사가 나가자 미국 측에서 張世東(장세동) 안기부장에게 바로 항의전화를 했고, 張世東 안기부장이 朝鮮日報 사장에게 항의전화를 했다.
趙甲濟 기자는 安企部에서 조사를 받은 뒤 회사를 그만두고, 金大中 출판국장은 영국으로 연수를 떠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당시 편집장이었던 許鉥 씨는 마음이 불편했다고 말했다.
『趙甲濟씨가 쉬는 동안에도 회사에서 월급을 지급했고, 퇴직 4개월 만에 연구소 연구원으로 복직시켰습니다. 연구소에 있으면서 月刊朝鮮에 글을 쓰다가 6개월 만에 月刊朝鮮 기자로 복귀했습니다.
당시 趙甲濟 기자가 CIA 기사를 400매를 써 왔어요. 그중 200매만 내보냈는데 그 난리가 난 겁니다. 만약 400매를 다 실었으면 나까지 포함하여 셋 다 형무소 가고 月刊朝鮮은 폐간되었을 겁니다』
趙甲濟 기자는 CIA 기사를 쓸 때 두려운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 얘기했다.
『미국 CIA에 대해서 쓰는데 우리 安企部가 왜 개입하겠나, 하는 생각뿐이었죠. 20일 정도 취재했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어요. 이미 공개된 정보였는데 CIA 전화번호가 나가면서 문제가 되었죠.
鄭亨根(정형근) 의원이 당시 안기부 수사단장이었어요. 「CIA에 관한 정보를 누구에게 들었냐」고 물었지만 공개된 거 외에는 절대 얘기 안 했지요. 「명단은 어디서 나왔느냐」고 물었는데, 명단은 미국대사관 문화원에 비치된 전화번호부에 다 나와 있었어요. CIA가 RU(리서치 유니티)라고 되어 있더군요. 전화번호부를 보고 바로 눈치챘죠. 그 후로 CIA 서울지부는 계속 이름을 바꾸었어요』
1988년 7월호에 趙甲濟 기자는 「공수부대의 광주사태」라는 기사를 통해 光州 민주화운동 당시 투입됐던 공수부대원들의 관점에서 본 光州 민주화운동을 기사화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민 쪽 얘기를 담은 기사만 나왔을 뿐 진압군 쪽 얘기는 軍에서 발표한 것을 인용한 것이 전부였다. 趙甲濟 기자는 공수부대 사병들을 많이 만나고 기사를 썼다.
『재판을 할 때나 다른 매체에서 모두 月刊朝鮮의 이 기사를 참조했습니다. 5共 청문회는 月刊朝鮮이 없으면 진행이 안 됐을 겁니다. 5共 청문회 때 제일 많이 인용되었죠. 지휘관에게 질문을 하려 해도 자료가 없으니 月刊朝鮮 기사를 볼 수밖에 없었죠』
그 후에도 月刊朝鮮은 1999년 1월호, 2005년 1월 두 번에 걸쳐 光州 민주화운동을 담은 별책부록을 발행했다.
在野운동하는 사람들을 제도권에서 다루지 않을 때 月刊朝鮮에서는 그 사람들과 교통했다. 邊衡尹(변형윤) 교수, 인권변호사 趙英來(조영래)씨도 月刊朝鮮 편집위원이었다.

高銀(고은) 시인과 黃晳暎(황석영) 소설가도 月刊朝鮮에 작품을 연재했다. 劉正顯(유정현) 前 月刊朝鮮 편집장은 『중립적 위치에서 옴니버스式으로 잡지를 만들었다. 특종보다 바른 판단을 하여 시대를 끌고 가는 힘이 중요하다. 그렇게 되려면 독자와의 공감대와 신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月刊朝鮮 편집장을 맡은 劉正顯 前 朝鮮日報 편집국 부국장은 1987년 9월호 「鄭昇和 인터뷰 10·26에서 12·12까지」를 가장 기억나는 특종으로 꼽았다. 1987년 8월에 어떤 사람이 劉正顯 당시 月刊朝鮮 편집장을 찾아왔다.
『예전부터 좀 알던 사람이었어요. 鄭昇和 총장의 친구인 육사 5기 출신이었죠. 鄭昇和 총장이 12·12에 대해 얘기할 의사가 있는 것 같다는 겁니다. 당장 그 사람과 함께 대치동에 있는 쌍용아파트로 찾아갔습니다. 예전에 내가 국방부 출입할 때부터 鄭昇和 총장을 알았어요. 「12·12 사태 얘기를 자세히 해 달라. 그러면 우리 책에 싣겠다」고 했더니 취재에 응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趙甲濟 기자를 보냈지요.
몇 棟에 가서 고향친구라고 하라고 했습니다. 비밀리에 접촉해야 했습니다. 趙甲濟 기자가 인터뷰를 해왔는데 내용이 좋았어요. 책을 만들어 놓고 나는 휴가를 가버렸어요. 安企部에서 빼라 넣어라 귀찮게 할까봐 잠적해 버린 거죠. 朝鮮日報에도 보도를 했습니다. 당시 반응이 좋아서 8판까지 찍었습니다. 제도언론이 제구실을 못하니 月刊朝鮮과 신동아가 비하인드 스토리를 썼죠. 월간지는 신문보다 억압이 덜해 그 틈새에서 열심히 일했죠. 일하면서 참 행복했습니다. 당시에는 책이 나오는 날이면 서울 시내 유명서점 앞에서 보통 400~500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趙甲濟 대표는 『鄭昇和 총창을 인터뷰하러 갔을 때 계엄사령관 출신이어서 무서울 줄 알았는데 굉장히 얌전하고 선비 같았다』고 회고했다.
『며칠간 얘기를 나누고 기사를 썼습니다. 얘기를 나눠 보니 「鄭昇和 총장 말이 다 맞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2·12 사태의 핵심은 「누가 먼저 총을 쐈나」 하는 겁니다. 합수부는 마치 鄭昇和 총장 측 경비병들이 먼저 쏜 것처럼 발표했지만, 취재를 해보니 鄭昇和 장군을 잡으러 온 사람들이 측근들을 등 뒤에서 쐈더군요. 「이건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들이 먼저 쏴 놓고 鄭昇和 장군 쪽에서 먼저 쐈다고 하다니 말이 안 된다」 이런 의분이 생겼습니다. 金泳三 정부 때 再조사했을 때 등 뒤에서 쏜 게 맞았습니다』
최초로 12·12 사태를 정확하게 알린 당시 기사는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그 후 趙成寬(조성관) 기자가 당시 상황을 세밀하게 묘사한 「등 뒤에서 쐈다」라는 기사를 또다시 썼다.
月刊朝鮮은 1995년 9월 「12·12 사건이 녹음되었다」라는 기사로 12·12를 확실하게 마무리를 했다. 禹鍾昌(우종창·現 월간조선 편집위원) 기자는 某 일간지 기자의 제보로 12·12 관련 녹취록을 입수했다.
『12·12 사건이 녹음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뉴스가 되지만, 편집장이 테이프를 한번 구해 보라는 겁니다. 테이프는 朝鮮日報 金基哲(김기철) 기자가 구해왔습니다. 들어보니 너무 재미있어요. 그래서 테이프를 부록으로 붙였습니다. 인쇄매체가 청각매체로 발상의 전환을 한 거죠. 우리 月刊朝鮮이 나오는 날 모든 방송매체 뉴스에서 장군들의 당황한 육성이 생생하게 나왔죠』
이 테이프는 12·12 당시 3軍 사령관으로 新군부 측에 맞섰던 李建榮(이건영) 장군을 존경한 기무司 직원에 의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그는 테이프를 듣고 용감하게 『병력 출동하지 말라』고 외치는 李建榮 장군을 존경하게 되었고, 그 테이프를 기념으로 李장군에게 넘겼던 것이다. 李장군이 테이프 내용을 녹취해 둔 녹취록이 某 신문사 기자의 손에 흘러 들어갔다. 그 기자는 자신의 신문에서 보도를 못 하게 되자 禹鍾昌 기자에게 녹취록을 건넸다.
1995년 9월호는 30만 부가 발행되었다. 군사반란의 물증이 된 이 테이프로 인해 검찰은 12·12 사건을 再수사하게 되었고, 全斗煥·盧泰愚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됐다.
12·12 테이프는 그 후 얼마 동안 테이프 부록 열풍을 불러왔다. 金正日의 생생한 육성이 담긴 비밀 테이프, 朴正熙 노래자랑 테이프, 金正日의 지시로 만든 「야수들의 싸움」 비디오 테이프 등이 그것이다.

12·12 사건이 勝者(승자)의 관점에서 기록된 「5共 前史-12·12 사건편」도 1996년 5월호에 보도되었다. 5共 시절, 5共이 세워지기까지 역사를 기록한 「5共 前史」라는 게 있다는 소문만 무성했으나 실체는 없었다. 검찰에서도 자료를 갖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崔普植(최보식·조선일보 컨텐츠업그레이드실장) 기자가 5共 측 인사에게 『실체를 보여줌으로써 당시 정황 자체를 일반사람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하라. 공개해서 일반사람들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하는 게 낫다』고 설득해 자료를 입수했다.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도 될 정도로 재미있었어요. 新군부 측 인사들이 자신들의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다소 과장된 부분은 있지만 왜곡은 없었어요. 극히 몇 명이 소장하려고 만든 거니, 거짓말할 이유가 없었죠. 그때까지 12·12에 대해 부분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을 리얼하게 알게 되었죠.
鄭昇和 장군의 증언과 약간 다른 부분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5共 前史가 더 정확할 수 있어요. 처벌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만든 것도 아니기 때문이죠. 12·12를 판단하는 근거로서 史料的 가치가 있지요』
1988년 5월호의 「추적 全斗煥의 金脈과 人脈」은 全斗煥의 軍部內 私조직 「하나회」의 실체와 정치 비자금을 건드린 특종이었다.
이 기사는 趙甲濟 기자가 5共 비리 수사가 시작되기 전에 쓴 것인데, 나중에 全斗煥·盧泰愚 대통령을 수사하고 나서 수사기관이 발표한 내용과 비자금 수치가 거의 비슷했다.
『이 기사의 기본관점은 「한국사회 부패의 원조는 재벌회장들과 대통령 사이에 오고가는 정치자금」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기사가 나간 이후에 대통령들의 비리를 찾는 것이 月刊朝鮮의 큰 흐름이 되었죠. 재벌 회장들이 대통령에게 돈을 갖다 바치는 것은 없어져야 한다는 일련의 기사가 계속 이어졌고, 金泳三·金大中 대통령의 비자금 폭로기사도 이어졌습니다』
6·29 선언에 관해 月刊朝鮮은 두 건의 특종기사를 썼다. 全대통령 측 인사의 제보로 1989년 6월에 「6·29 선언은 全斗煥 작품이었다」가 나왔다. 그때까지 6·29 선언은 盧泰愚 대통령의 작품으로 알려졌었다. 全언론이 이 기사를 받아서 썼고, 국회에서 이 사실을 문제삼아 한동안 與野간에 공방이 이어졌다.
1992년 1월호에 200자 원고지 600장에 이르는 「全斗煥의 육성증언 6·29 선언 前夜」가 실렸다. 金聲翊(김성익)씨는 1983년 3월부터 1988년 2월까지 5년 동안 全斗煥 대통령의 공보비서관으로 근무하면서 全대통령이 각종 공식·非공식 행사에서 한 발언을 빠짐 없이 기록한 인물이다. 이 기사는 「차기 정권 창출을 위해 6·29 선언이 盧泰愚 대표의 독자적인 것이고, 全대통령은 신중한 고려 끝에 그 건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시나리오를 짠 사람이 바로 全斗煥 前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106페이지 분량의 이 기사는 全斗煥 시대를 연구하는 좋은 통치 사료이다.
1967년 3월22일 판문점에서 극적으로 귀순한 李穗根(이수근)은 해외로 탈출했다가 잡혀와 1969년 7월2일 북한 간첩이라는 혐의로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그를 체포했던 李大鎔(이대용) 駐越공사는 趙甲濟 기자에게 『李穗根은 간첩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진실을 밝힐 생각입니다』라고 말했다. 趙甲濟 기자는 1989년 3월호에 「李穗根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기사를 썼다.
趙甲濟 기자는 『객관적으로 증명된 특종은 아니지만 그가 간첩이 아니라는 건 150% 진실』이라고 단정했다. 李穗根은 항소하지 않고 사형선고를 받아들였는데 그 이유는 뭘까? 趙甲濟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李穗根은 항소할 자유도, 안 할 자유도 없었습니다. 판사도 중앙정보부 눈치를 보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중앙정보부장 金炯旭이 자신의 실수(해외탈출을 모른 점)를 덮으려고 죽인 거겠죠. 李씨는 스위스에 가서 살려고 했지 북한으로 갈 생각이 없었어요』

月刊朝鮮은 1989년 5월·6월·7월호에 대한항공 폭파범 金賢姬(김현희) 인터뷰 기사를 연재했다. 담당 기자는 『金賢姬가 체험한 북한의 실상과 생활상을 소개하면서 충격을 받았다. 나 자신이 북한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고 있는 데 대해서 충격을 받았고, 金賢姬가 전한 북한의 실상이 너무나 참혹한 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기사를 계기로 그 뒤 月刊朝鮮은 북한의 진실을 파고드는 사실적 취재에 열중하게 되었다.
1990년 12월호 月刊朝鮮 기사 「목탄차로 달리는 공화국―연변 보따리 장사의 북한 종횡기」는 우리 사회에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90년은 중국 조선족들이 처음으로 서울을 드나들기 시작할 때이다. 金東鉉(김동현·現 징기즈칸 편집장) 기자는 朝鮮日報 디자인연구소 曺義煥(조의환) 소장의 소개로 서울에 와있던 중국 조선족 아주머니(당시 36세)를 만나게 되었다.
『시내 호텔에서 만나 이틀 동안 그분의 얘기를 듣고 口述정리를 했습니다. 1983년부터 20여 회 북한을 오가며 보따리 장사를 했다는 아주머니의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140매 분량의 글을 쓰면서 북한 주민이 그렇게 못산다는 사실에 놀라고 가슴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1992년 10월호에는 「서울에 잠입한 북한 공작지도부 수사내막」이 보도되었다. 일명 이선실 사건이다. 이 기사는 신문보다 月刊朝鮮이 먼저 보도했다.

1994년 3월호에 「러시아를 유랑하는 탈북 벌목공들의 삶」이 보도되었다. 이 기사를 계기로 金泳三 정부는 해외 탈북자들을 받아들이기로 정책전환을 했다. 1994년 1월에 상트 페테르부르크大 전임강사였던 黃晟準(황성준)씨는 月刊朝鮮으로부터 「러시아의 脫北 벌목공들에 관한 취재를 할 수 있겠느냐」는 전화를 받았다. 1991년부터 북한 벌목공들의 탈출이 시작되어 1993년 末에 대거 탈출이 이뤄졌다. 당시 러시아 언론에서는 이미 그 사실을 여러 차례 보도한 상황이었다.
『러시아 특파원들에게 벌목공 얘기를 몇 번 한 적이 있어요. 그때마다 「그게 무슨 기사가 되느냐」고 했습니다. 그런 차에 편집장의 전화를 받고 취재를 하게 되었죠, 아무도 취재하지 않아 내가 처음 하게 되었으니, 내 경우는 특종을 거저 주운 거죠. 벌목공들이 한인교회에 많이 숨어 들어왔기 때문에 취재가 그다지 어렵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볼 때 그 사람들이 정말 고생하며 살고 있지만, 북한에서는 벌목공으로 나가는 걸 대단한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북한內의 생활이 어떨지 짐작이 가는 일이지요』
이 기사에서 처음으로 「脫北者」라는 말이 등장했다. 이 기사로 月刊朝鮮은 그해 관훈언론상을 받았다.
大選자금을 최초로 수치화한 것도 月刊朝鮮이었다. 1993년 3월호에는 「金泳三의 정치자금 내막」이 보도되었다. 金泳三 대통령 취임 초기에 나온 최초의 폭로 기사였다. 大選이 끝난 뒤 「선거에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갔다」는 얘기가 흘러나오자 편집장은 『정말로 천문학적인지 한번 규명해 보자』고 했다고 한다. 金演光(김연광·現 月刊朝鮮 편집장) 기자의 말이다.
『大選이 끝난 뒤 「민자당 지구당을 가동하는 데 법정선거 비용의 10배가 들었다」, 「선거비용이 兆(조) 단위다」 이런 얘기가 떠돌았습니다. 「막판에 1000억원을 구해서 지구당에 뿌렸다」, 「지구당에 5억~10억원을 나눠줬다」는 얘기가 마구 나왔습니다. 구태여 취재하려고 하지 않아도 얘기가 다 들려왔습니다. 선거에 이기고 나니, 서로 YS를 위해 내가 이만큼 했다고 무용담처럼 얘기하더군요. 막연하게 떠돌던 얘기를 처음으로 구체적인 수치로 나타낸 기사죠. 처음으로 우리 사회에 大選자금 액수를 이슈화했습니다』
희한한 것은 기사가 나가도 반응이 「원래 그런 거지. 원래 선거란 脫法·不法을 하게 마련이지」라는 식이었다. 야당조차 쟁점화하지 않았다.
金演光 기자는 후속 기사로 「선거잔금을 어떻게 쓰는가」를 썼다. 「몇억원씩 돈이 남아 그걸로 나눠 가졌다는 사람」, 「집을 샀다는 사람」 등 다양했다. 金演光 기자는 『이 두 기사는 선거자금이 수치화되고 추적된다는 경각심을 갖게 했다. 이 기사는 YS 임기 말에 大選잔금 수사가 진행되면서 새삼 화제가 됐다』고 말했다.

1993년 5월호 「SBS의 위험한 오보, 張俊河는 타살되지 않았다」는 기사는 張俊河(장준하) 타살설을 부정한 특종이다. 月刊朝鮮은 崔壯源(최장원), 金演光, 李政勳(이정훈), 禹炳賢(우병현) 기자를 특별취재반으로 구성하여 張俊河 실족사를 철저히 추적했다. SBS 제작진, 실족사 목격자 金龍煥(김용환), 당시 담당검사, 법무관 출신 두 변호사 등 관련자를 두루 만난 金演光 기자는 「추락사를 뒤엎을 만한 증거는 하나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張俊河 선생 시신을 檢屍(검시)한 의사를 만났더니, 「死體에는 의혹이 없는데 누구 얘기를 들으니 他殺인 거 같더라」라고 얘기하더군요. 사람들을 만나면 모두들 「누가 그러는데 他殺인 거 같더라」는 답변뿐이었어요. 현장에 가봤느냐고 하면 「갔다 온 사람 얘기를 들으니 그렇다더라」는 식이었지요』
金演光 기자는 張俊河 선생과 함께 등산을 간 고등학교 윤리선생 金龍煥씨의 증언이 가장 확실하다고 했다.
『金龍煥씨는 張俊河 선생과 함께 등산을 가서 張선생이 추락하는 걸 본 사람입니다. 金龍煥씨는 「墜落死(추락사)라고 해도 張선생님은 훌륭한 민주인사다. 왜 他殺이라고 우기는지 모르겠다. 他殺이라고 하면 더 멋진 죽음이 될 것 같아 그러는 것 같다. 他殺이라고 믿고 싶은 사람들의 부정확한 간섭이다」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방송에서는 金龍煥씨가 張俊河 선생을 유인해서 현장에 갔다는 식으로 보도했습니다』
金演光 기자는 『張俊河 사건은 앞으로 100년을 조사해 봐도 실족사다. 더 이상 어떤 결론도 나올 수 없다』고 못 박았다.
1995년 11월5일, 라빈 이스라엘 수상은 텔아비브의 국방장관 사무실에서 月刊朝鮮 趙甲濟 기자와 세상에서 마지막 인터뷰를 했다.
趙甲濟 기자는 인터뷰를 끝내고 밤 비행기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가서 한나절 있다가, 비행기를 갈아타고 일요일 오후에 서울에 도착했다. 趙甲濟 기자가 택시를 탔을 때 말을 시키지도 않았는데 택시 기사가 『라빈 수상이 암살되었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기분이 이상했지요. 바로 어제 만난 사람인데 인터뷰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취재원이 죽었다고 하니 놀랐죠. 바로 회사로 와서 朝鮮日報에 기사를 썼지요』
라빈 수상 최후의 인터뷰는 1995년 12월호에 실렸다. 이스라엘 측에서는 趙甲濟 기자에게 인터뷰 녹음 테이프를 기증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현재 라빈 수상의 마지막 인터뷰 테이프는 이스라엘의 라빈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1996년 11월호에는 全斗煥-許錟(前 북한노동당 對南 담당 비서)의 극비대화록 全文이 공개되었다. 崔普植 기자는 우연히 이 대화록을 입수했다. 전달한 사람도 어떤 경로로 녹음되고 녹취했는지 알지 못했다.
『全斗煥-許錟 대화록뿐만 아니라 頂上회담을 준비하기 위한 남북 밀사들의 대화 녹취록도 있었어요. 두꺼운 자료철을 세 권이나 입수했습니다. 밀사 간에 어떻게 대화를 풀어 가나 들어보니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그 자료에 기밀자료 도장이 찍혀 있었어요』
보도가 나가자 安企部 기조실장이 朝鮮日報 간부에게 『崔普植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수 있다』며 더 이상 보도하지 말라고 협박했다.
『혹시 우리 집으로 압수수색이 올까 봐 자료를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했어요. 당시 安企部에서 출판국 林伯 국장에게 전화하여 「더 이상 쓰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주면 수색을 안 하고, 사법처리도 하지 않겠다」고 했답니다.
林伯 국장께 「내 개인적으로는 (각서를) 쓸 수 있지만, 그걸 쓸 경우 朝鮮日報 이미지가 어떻겠느냐. 한마디 하니까 바로 써 준다고 하지 않겠나」고 했더니 林伯 국장이 「그러면 쓰지 마라」고 하더군요. 법적으로 검토해 보니까 기자는 처벌대상이 아니더군요. 자료를 제공한 사람은 문제가 될 수 있었어요. 자료 제공자는 밝히지 않고 그 후 보도를 더 했습니다』

1996년 3월호에 세계적 특종이 터졌다. 金正日 전처 성혜림 일가 西方탈출 기사가 실린 것이다. 禹鍾昌 기자는 1994년에 주간조선에 「金正日 처남 서울에 살고 있다」는 기사를 쓸 때 성혜림의 오빠 성일기 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당시 金日成 연구가인 성균관大 이명영 교수가 제보 하여 이뤄진 인터뷰였다.
1995년 8월에 성혜랑씨의 아들인 이한영씨가 급하게 돈이 필요하자 禹鍾昌 기자에게 전화를 했다. 마침 禹鍾昌 기자는 미국 출장을 가고 없었다.
禹鍾昌 기자가 미국 출장에서 돌아오자 이한영씨가 다시 연락을 했다. 성일기씨 딸과 함께 나타난 이한영씨를 禹鍾昌 기자는 林伯 출판국장실로 데려갔다. 전화기에 녹음장치를 한 뒤 모스크바에 있는 이한영씨 어머니 성혜랑씨와 연결했다.
『이한영씨가 어머니와 13년 만에 통화가 되었을 때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 콧날이 시큰했죠. 이한영씨는 전화를 하고 나서 의도적으로 러시아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은 종이로 코를 풀어서 휴지통에 버리더군요. 그걸 주워서 다시 맞췄어요. 코푼 종이를 누가 맞추겠나 생각했겠죠. 우리 목표는 성혜랑의 동생인 성혜림, 그러니까 金正日의 前妻 목소리를 녹음하려는 것이었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계속 모스크바와 전화연락을 하면서 성혜랑·성혜림 자매의 동향을 추적했다. 그런데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갑자기 성혜랑씨가 모스크바를 탈출하겠다고 하여 비상이 걸렸다. 禹鍾昌 기자는 그제서야 安企部에 알리고, 그간 녹음한 테이프를 安企部 직원에게 들려줬다. 安企部에서는 이한영씨를 신뢰하기 어렵다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安企部 직원이 權寧海(권영해) 안기부장에게 테이프를 들려주자 바로 『데려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성혜랑·성혜림씨는 1996년 1월15일을 탈출 D데이로 잡았다.
『우리는 빨리 보도를 해야 탈출한 사람이 안전하다고 판단했고, 安企部는 보도되면 죽는다며 말렸습니다. 그 사람들의 신변이 안전하다는 소식을 듣고, 보도하기로 했죠. 2월13일자 朝鮮日報 수도권판에 기사를 넣었습니다. 밤 12시40분에 신문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가 새벽 4시에 이 신문을 봤고, 동아일보가 부랴부랴 최종판에 내용을 그대로 베껴서 보도했죠. 朝鮮日報는 1면, 3면 사회면에 성혜림 西方탈출 기사를 써서 확실한 특종을 했지요』
이한영씨는 그 후 동아일보·중앙일보와도 인터뷰를 하고 책도 냈으나 1997년 5월 피살당했다. 禹鍾昌 기자는 『안기부의 보호를 받으라고 했는데, 그걸 안 지켰다』며 애석해했다.
성혜림 자매 西方탈출 기사가 나간 뒤 중앙일보와 한겨레신문은 『성혜림은 탈출하지 않고 성혜랑만 탈출했다. 月刊朝鮮 기사는 오보다』라는 기사를 냈다. 성혜림은 스위스까지 왔다가 심경변화를 일으켜 모스크바로 돌아갔는데, 두 신문은 아예 모스크바를 탈출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2004년 성혜림이 사망한 뒤 중앙일보는 『성혜림도 1996년 당시 스위스로 왔다가 돌아갔다』고 처음으로 시인하는 기사를 실었다. 2003년 여름 KBS TV 미디어포커스는 성혜림 사건을 다루면서 『朝鮮日報가 세계적 오보를 냈다』고 보도했다. 禹鍾昌 기자는 미디어 포커스를 상대로 언론중재委에 訂正보도를 신청했고, 언론중재委에서는 訂正보도 명령을 내렸다. 미디어 포커스는 프로그램 생긴 이래 최초로 「朝鮮日報의 성혜림 기사를 誤報라고 한 것은 잘못」이라고 訂正보도했다.

1997년 3월호에 또 하나의 세계적 대특종이 터졌다. 1997년 2월12일 북한 노동당 비서 출신의 黃長燁(황장엽)씨와 그의 심복 金德弘(김덕홍) 북한 려광무역 대표의 한국 망명을 특종 보도한 것이다.
金容三(現 월드빌리지 편집장 겸 月刊朝鮮 출판팀장) 기자는 두 사람이 망명하기 1년여 전부터 망명 중개인 역할을 했던 이연길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장을 통해 이 두 사람의 동정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金기자는 黃長燁씨의 저술과 논문, 친필 서신, 메모, 북한에서 발간되는 중요자료 등을 입수했다. 金기자가 입수한 친필서신과 저술 등에는 자신의 망명 동기와 결행에 대한 비장한 각오 외에 북한 최고위층의 동향, 한국사회의 첩자들이 북한에 팩시밀리로 정보를 제공하는 사실, 북한 核 보유설, 전쟁 준비 등 고급 정보들이 들어 있었다. 黃長燁씨는 『남한 권력 깊숙한 곳에 북한 사람이 박혀 있다』는 경고를 했다.
金容三 기자는 黃長燁씨와 金德弘씨를 돕기 위해 미국 선교단체와 접촉, 인도적 차원의 의약품 공급도 주선했다. 망명 공작 막바지에는 黃長燁씨의 미국 방문을 성사시키기 위해 초청장 발급을 시도하는 등 金기자는 黃長燁 망명의 全과정에 깊이 개입했다.
1997년 2월12일 아침, 두 사람이 중국 北京에 위치한 한국영사관으로 망명한 사실이 우리 정부를 통해 공식 발표된 직후 朝鮮日報와 月刊朝鮮은 金容三 기자가 입수한 黃長燁씨의 친필 서신 등을 비롯한 각종 자료를 보도했다.
朝鮮日報와 月刊朝鮮의 보도가 나간 후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NHK 등 세계적인 언론이 조선일보와 月刊朝鮮 기사를 인용보도함으로써 세계적인 특종을 하게 되었다.

1998년 8월호에 「宋斗律(송두율)은 과연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인가?」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黃長燁씨가 쓴 「북한의 진실과 허위」의 책에 나오는 한 문장에서 시작되었다. 「宋斗律이 김철수라는 가명을 가진 북한 노동당원이다」라는 내용이었다. 李東昱(이동욱·한국갤럽전문위원) 기자가 그 책을 편집장에게 갖고 왔고, 禹鍾昌 기자에게 취재지시가 떨어진 것이다.
宋斗律씨는 1990년에 「내재적 접근론」이라는 책을 통해 「북한 문제는 북한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禹鍾昌 기자는 1997년에 범청학련 소속으로 북한에 갔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도종화씨를 비롯한 학생들을 취재하러 독일에 갔다가 宋斗律씨에게 만나자는 요청을 했었다. 宋斗律씨는 역시 만남을 거절했다.
宋斗律씨는 이 기사가 나온 뒤 月刊朝鮮이 아닌 黃長燁씨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했다. 禹鍾昌 기자가 黃長燁씨의 저서를 근거로 했으니 黃長燁씨가 자신을 명예훼손했다는 것이었다.
『재판이 진행 중일 때 소송기록을 다 봤어요. 安企部에서 「宋斗律은 김철수가 맞다」고 기록해 놨기에 그것까지 보도했지요. 黃長燁 선생의 말이 맞았습니다』
宋斗律씨는 盧武鉉 정권이 들어서자 귀국했고, 귀국하자마자 체포되었다. 1심에서 「宋斗律은 김철수가 맞다」는 판결이 나왔고, 2심에서는 증거가 좀 부족하다는 판결이 나왔다. 宋씨가 북한노동당원임도 이 수사로 밝혀졌다. 현재 이 사건은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禹鍾昌 기자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宋斗律씨는 비겁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한때 김철수였다. 북한으로부터 돈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때와 다르다」 이렇게 인정하는 게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金日成에게서 돈을 받은 건 북한에 유리한 발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朝鮮日報는 1998년에 30년 전의 기사로 느닷없이 誤報논쟁에 휘말렸다. 1968년 12월9일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다가 무장공비들에게 살해된 李承福(이승복) 사건이 조선일보의 작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던 것이다. 「언론개혁시민연대(언개련)」는 「朝鮮日報의 당시 기사는 작문」이라며 전국을 돌며 오보전시회를 개최했다. 언개련의 주장을 「월간 말」誌와 「미디어 오늘」, MBC TV가 받아서 보도하면서 사람들은 李承福 사건은 조작이라고 믿게 되었다.
月刊朝鮮은 李東昱 기자에게 『誤報라면 어떻게 誤報하게 됐는지를 밝히는 것도 言論의 사명』이라면서 취재지시를 내렸다.
李東昱 기자는 李承福의 형 李學官(이학관)씨, 당시 취재를 했던 조선일보 사회부 姜仁遠(강인원) 기자 등을 취재한 결과 李承福 소년의 절규는 진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998년 月刊朝鮮 10월호와 11월호에 이 기사가 나간 후 金周彦 前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한국언론재단 연구이사)과 金鍾培 前 미디어 오늘 편집장(시사평론가)은 조선일보에 대한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6년 후인 2004년 10월28일, 서울 중앙지법 형사항소9부(부장판사 강형주)는 판결문에서 『李承福군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다는 보도는 사실에 기초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로써 「李承福 사건」은 「역사적 실제 사실」로 확인되었고, 「李承福 사건 조작」이란 주장은 허위로 판명됐다. 金周彦씨에게는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金鍾培씨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李東昱 기자는 아직도 李承福 기사를 오보로 아는 사람이 많다고 개탄했다.
『법원에 의해 판결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인터넷 사이트에서 「李承福 사건」을 입력하면 수많은 說과 소문들이 버젓이 깔려 있습니다. 소년의 정직함을 정직하지 못한 어른들이 모욕하고 왜곡했습니다. 이 사건을 취재하면서 역사는 정의로운 사람들의 몫이 아니라 부지런한 자들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惡소문을 부지런히 퍼뜨리는 사람을 막지 못하면, 정의는 실종될 것입니다』

1998년 11월호 「崔章集 대통령 정책자문위원장의 충격적인 6·25 역사관」을 밝힌 기사가 우리 사회에 일대 회오리를 일으켰다. 禹鍾昌 기자는 이 기사에 대한 오해를 먼저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회사의 사주로 기사를 썼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근거 없는 소리입니다. 1998년 여름 제보가 있었어요. 崔章集 대통령 정책자문위원장이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래서 趙甲濟 편집장께 보고했더니 「崔章集씨는 천하가 아는 左派인데 기사 써봐야 소용 없다」며 내 말을 일축했습니다.
나는 계속 관심이 있어서 추석 때 부산 집에 오가면서 기차 안에서 崔章集씨가 쓴 책 8권을 다 읽었어요. 책을 읽어 보니 정말 문제가 많았습니다. 교수로서는 주장할 수 있는 얘기지만, 대통령 정책자문위원장으로서 이런 사상을 갖고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됐죠. 일단 崔章集씨에게 전화를 했더니 오라고 하더군요. 녹음기를 들고 가서 얘기했는데, 「한때 6·25를 金日成의 위대한 결단이라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아니다」라고 말했으면 기사를 안 썼을텐데, 그게 맞다는 겁니다.
한 시간 동안 얘기를 했는데 한마디로 대한민국 自虐史觀(자학사관)을 갖고 있었어요. 120장짜리 기사를 쓰면서, 60장은 崔章集씨 이론, 나머지 60장은 인터뷰로 구성했죠. 충분히 반론권을 준 기사였습니다』
기사가 나가자 崔章集씨는 바로 명예훼손을 당했으니 5억원을 배상하라며 朝鮮日報를 제소했다. 이 기사로 말미암아 안티조선 세력이 결집하고 대한민국은 반으로 쪼개졌다. 崔章集씨는 조선일보와 月刊朝鮮에 자신의 글을 한 편씩 실어 주는 조건으로 제소를 취하했다. 禹鍾昌 기자는 崔章集씨가 재판을 계속 진행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崔章集 사건의 본질은 「기자가 인용을 어디까지 해야 할 것인가」입니다. 이 부분이 재판을 통해 판례로 남았으면 좋았을 겁니다. 한국 언론사에서 논문인용에 있어 판례가 될 수 있는 사건인데 끝이 안 나 아쉽죠. 신문방송을 전공하는 학생들 박사학위 소재가 될 수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2000년 4월 金容三 기자는 30년 전 서해상에서 어로작업 도중 납북된 어부 李在根(이재근)씨가 가족과 함께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 모처에 숨어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SBS 대전방송 취재팀과 金容三 기자는 중국 하얼빈에서 두 시간 거리인 상지라는 곳에 가서 李在根 부부와 아들 등 가족 3명을 만났다.
취재를 마친 SBS 팀이 돌아간 후 金容三 기자는 혼자서 이들을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金기자는 北京의 우리나라 대사관에 가서 李在根씨의 소식을 알리고 여행증명서 발급을 의뢰했다. 당시 남북 頂上회담을 앞두고 있던 우리 정부는 여행증명서 발급을 꺼렸다.
金容三 기자는 일주일 동안 밤낮으로 대사관을 드나들어 겨우 여행증명서를 받을 수 있었다. 상지에 가서 金容三 기자가 李在根씨 가족을 北京으로 데려왔다. 대사관에서는 『月刊朝鮮이 여기까지 데려왔으니 신변보호를 당신이 책임지라. 밀항을 해서 한국에 데려가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北京은 여권과 비자가 있어야만 호텔에 투숙할 수 있기 때문에, 金容三 기자는 호텔방을 잡아 李在根씨 가족을 묵게 하고 자신은 다른 곳에 가서 잠을 자야 했다. 일주일 동안 호텔을 옮겨다니면서 계속 대사관과 협상을 벌였지만, 2년 전 李在根씨에게 『국가에 세금 낸 거 있어요? 왜 자꾸 국가에 부담을 주려고 그래요?』라고 말했다는 자세를 대사관 측은 바꾸지 않았다.
『장기전으로 갈 것 같아서 조선일보 北京특파원 지해범 기자가 소개해 준 콘도에 李在根씨 가족을 투숙시켰어요. 그런데 내 이름으로 체크인해 놓고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며 첫날 쫓아내는 겁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택시에 李在根씨 가족을 싣고 대사관으로 가서 「당장 해결해주지 않으면 내일 아침 조선일보에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것을 터뜨리겠다」고 협박했죠. 그제야 대사관에서는 李在根씨 일가족 3명을 인계받더군요』
李在根 사건은 6·25 이후 납북된 한국인이 귀환한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됐으며, 이후 月刊朝鮮은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 대표와 연대하여 납북어부를 속속 귀환시켰다.
月刊朝鮮은 金大中 前 대통령의 對北 불법 송금사건 특종을 연이어 3개나 터뜨렸다. 2002년 5월호에 美 의회 조사국 연구원 래리 닉시가 작성한 韓美관계보고서를 인용해 「현대그룹의 4억 달러 對北 비밀송금說」 기사를 처음 보도했다. 이 보고서에는 현대가 지금까지의 공식지원금 4억 달러 외에 비밀리에 4억 달러를 웃돈으로 주었고, 이 돈이 군사비로 전용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金成東(김성동) 기자는 『이 기사가 나가기 전까지 金大中 정부는 북한에 단 돈 1원도 준 적이 없다고 말했고, 여당과 일부 신문에서 조선일보와 미국이 의혹을 생산한다는 식의 얘기가 나왔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嚴虎聲(엄호성) 의원은 月刊朝鮮 기사를 토대로 자체조사를 하여 2000년 4월 산업은행이 현대상선에 4000억원을 변칙대출을 해주었다는 의혹을 2002년 9월에 제기했다. 月刊朝鮮의 보도와 嚴虎聲 의원의 변칙대출 의혹제기는 결국 현대그룹의 對北송금 의혹사건에 대한 특검으로 이어졌다.
한겨레신문은 2002년 9월27일자 3면에 「한나라 4억 달러 北 지원 주장 어떻게 나왔나」라는 기사를 이렇게 시작했다.
<엄의원도 26일 국감장에서 月刊朝鮮 5월호를 자료로 들고 나왔지만 지난 3월25일 미국 의회조사국의 래리 닉시 연구원이 내놓은 한미관계 보고서가 그 발단이었다. 月刊朝鮮도 이 보고서를 토대로 「현대는 왜 4억 달러를 비밀리에 주었을까」라는 식으로 4억 달러 비밀 지급을 기정사실화하는 논조를 폈다>
이 기사는 月刊朝鮮 역사상 처음으로 2002년 12월호에 再수록되었다. 그 달에 현대상선이 2000년 3월 20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하여 정치권에 배포했다는 특종기사가 터지면서 對北송금 문제가 다시 도마에 올랐기 때문이다.
현대상선 200억 비자금 기사는 權魯甲(권노갑) 前 민주당 고문의 구속과 鄭夢憲(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에 대한 조사를 불러온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宋承鎬(송승호) 기자는 2002년 10월 초에 현대상선 직원으로부터 제보를 받고 취재를 시작했다.
『현대상선이 정치권에 휘둘리는 것을 보다 못한 직원이 月刊朝鮮의 취재력을 믿고 제보한 겁니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까 봐 너무 몸조심을 하는 바람에 취재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月刊朝鮮은 연이어 2003년 1월호에 「현대상선 비자금 200억원의 傳票(전표)」를 공개했다. 16代 총선 직전인 2000년 3월3일부터 14일까지 117회에 걸쳐 외국의 거래처에 화물용선료 명목으로 자금을 송금한 것처럼 허위 전표를 꾸민 뒤 이 돈을 제3의 계좌로 보내는 방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했던 것이다.
月刊朝鮮의 이 보도 때문에 정치권이 아연긴장했다. 국회의원들은 宋承鎬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누구에게 얼마가 건너갔느냐』, 『구체적인 명단을 갖고 있는가』, 『명단을 공개할 계획이 있느냐』고 연일 물었다. 한나라당은 이 기사를 인용하여 金大中 정부와 현대그룹과의 커넥션 의혹을 강하게 제기하며 對與 공세를 폈다.
2003년 3월호에 200억원의 구체적인 사용내역에 관한 사법당국의 수사를 촉구하는 기사가 실렸고, 한 달 후 宋斗煥(송두환) 특검팀에서 전표 리스트와 제보자를 소개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宋承鎬 기자는 보도된 전표는 제공했으나 제보자는 공개하지 않았다. 특검팀에 의해 전모가 확인되는 듯했으나, 盧武鉉 대통령의 특검 수사기간 연장 거부로 흐지부지되었다.
2003년 8월4일 鄭夢憲 현대아산 회장이 자살했고, 8월14일 權魯甲 前 민주당 고문이 긴급 구속되었다.
2003년 3월호에는 金大中 대통령이 남북 頂上회담 직전 마카오의 조광무역 계좌(북한의 對南공작기관)로 돈을 송금한 사실을 보도했다. 禹鍾昌 기자는 이 제보를 현직 국회의원으로부터 받았다.
『여의도 길바닥에서 약속장소를 세 번이나 바꿀 정도로 보안을 유지했습니다. 내가 받은 건 종이 한 장이었습니다. 그걸 기사로 쓰고 나니까, 현장에 가봐야 할 거 같더군요. 정말 마카오에 조광무역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현지로 갔죠. 조광무역은 마카오 경찰서 교통국 건물 바로 앞에 있었는데, 마카오 경찰들이 「들어가면 죽는다. 외교관 건물이고 거기 있는 사람들 모두 공작원이다. 우리도 못 들어간다」고 겁을 주더군요』
禹鍾昌 기자는 건물에 비치된 전화번호부를 통해 조광무역이 5층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비밀키를 눌러야 들어갈 수 있는 건물이었는데, 누군가가 키를 누를 때 재빨리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5층에 내리니 조광무역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禹기자는 일단 탈출 때를 대비해 비상구를 알아놓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오전 9시가 안 된 시각이어서인지 직원들이 안 보였다. 안내데스크까지 들어가서 안을 훑어보고 재빨리 나와서 조광무역 현판을 촬영했다.
『조광무역이 실제로 있는지를 보러 갔다가 실체를 확인한 것이지요. 밖으로 나와서 전화를 하니 북한 말투의 남자가 받더군요. 「나 月刊朝鮮 기잔데 여기까지 왔다. 5억 달러가 조광무역을 통해 평양으로 갔다는데, 당신 입장을 밝혀라」고 얘기하자, 그 남자가 「朝鮮日報 기자와는 얘기하지 않겠다」며 끊더군요』

禹鍾昌 기자는 2003년 6월호에 북한이 尹靜姬(윤정희)·白建宇(백건우) 부부의 납치를 시인하는 문서를 발견하여 기사화했다. 尹靜姬·白建宇 부부가 북한에 납치될 뻔했다는 것은 그들의 주장이었을 뿐, 물증은 없었다. 그런데 북한이 유고에 납치를 시인하고 사과하는 내용을 보낸 문서를 찾은 것이다.
당시 북한의 일본인 납치사건이 일본 언론의 최대 관심사였다. NHK 베테랑 기자가 禹鍾昌 기자에게 납치사건에 개입된 북한공작원 김유철을 찾는 일을 도와 달라고 했다.
『자료를 찾기 위해 유고와 독일 등지를 돌며 문건을 찾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도 도울 테니, 혹시 우리나라와 관련된 문서를 찾으면 나에게 달라고 부탁했죠. 전부터 이응로 화백의 부인 박인경씨의 기사를 계속 쓰고 있었어요. 박인경씨가 계속 거짓 증언을 해 尹靜姬씨가 유고까지 끌려갔다 왔다는 주장을 입증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죠. 尹靜姬씨가 미국 총영사 크리스텐슨 덕분에 풀려났다고 하여 그 사람을 찾으려고 했으나 그것도 잘 안 됐어요. 그래서 尹靜姬씨의 자작극이라는 얘기까지 나왔었죠』
그런데 NHK 기자가 북한이 유고에 보낸 공문서를 찾은 것이다. 그후 크리스텐슨씨까지 만나 尹靜姬·白建宇 부부 납치사건은 북한의 소행임을 증명할 수 있었다.
禹鍾昌 기자는 『특종은 지속적으로 사건을 쫓다 보면 되는 거지,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니라는 걸 그 사건을 통해 다시 깨달았다』고 말했다. 북한 권력층의 인척 관련 취재를 많이 했던 禹鍾昌 기자는 2003년 9월호에 金正日 처제 고영숙 부부가 미국으로 망명한 사건을 보도하여 다시 한 번 특종을 했다. 禹鍾昌 기자는 『일간지는 먼저 보도하는 게 특종이지만, 월간지는 남들이 보도하지 않은 것, 꽁꽁 숨겨져 있던 것 찾는 게 특종』이라고 말했다.
月刊朝鮮 2004년 4월호에서는 국사교과서의 이념적 편향성을 비판하는 「고교 국사교과서의 대한민국 때리고 金正日 감싸기」가 실렸다. 고교 근현대사 교과서의 편향성을 지적한 최초의 보도였다. 이 기사를 쓴 裵振榮(배진영) 기자는 月刊朝鮮 2002년 4월호에서는 全敎組 발간 통일교육 교재 「이 겨레 살리는 통일」의 문제점을 지적한 적이 있었다.
6개월 뒤 權哲賢(권철현) 한나라당 의원이 국회에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裵振榮 기자는 『내가 기사를 쓰면서 조언을 구했던 한 정치학자가 權哲賢 의원 측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편향성에 대해 이야기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朝鮮日報 등 언론들에서는 연일 이 문제를 대서특필했다.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이념적 편향성을 바로잡기 위해 2005년 1월 「교과서포럼」(상임공동대표 박효종 서울大 교수)이 창립됐다.

2004년 7월호의 金正日 매제 張成澤(장성택)의 가택연금 보도는 국제적 특종이 되었다. 宋承鎬 기자는 某 인사와 술을 마시던 중 이 기사의 실마리를 잡았다. 취기가 어느 정도 올랐을 때 宋기자는 그에게 『대체 요즘 하는 게 뭐가 있느냐, 미국과 정보협조도 안 되고 문제 아니냐』고 물었다.
某 인사는 『그런 소리 마라. 張某 사건도 체크하고 긴밀하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宋承鎬 기자는 張某라면 북한의 2인자인 金正日의 매체인 張成澤이 분명하다고 생각하여 정신을 차리고 일부러 『張成澤이 죽었나』라고 물었다.
『그쪽도 술이 많이 취한 상태였어요. 나도 일부러 술을 많이 마시면서 대수롭지 않은 척 자꾸 질문을 했죠. 그 사람이 「죽기는… 감금되었다」고 얘기하더니, 그쪽도 퍼뜩 정신을 차리더군요. 「그렇다면 탄광이나 교화소로 갔느냐」고 물었더니 그쪽에서 「그래도 2인잔데, 가택연금되었다」고 말한 뒤 절대 보도하면 안 된다고 하더군요』
朝鮮日報에 張成澤 가택연금 기사가 인용보도되자 중앙일보는 「張成澤 건재」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月刊朝鮮 기사가 나간 뒤 미국과 일본 언론이 여러 경로로 확인을 시작했고, 외신에 「張成澤 가택연금」이라는 기사가 계속 나왔다. 몇 달 후 중앙일보는 슬그머니 「張成澤 가택연금」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2004년 9월20일부터 金演光 편집장이 月刊朝鮮을 맡게 되었다. 金편집장이 만든 첫 호에서 특종이 터져 나왔다. 2004년 10월호 「金希宣 의원의 독립군 家系 의혹 추적」이 바로 그 기사이다. 金希宣 家系의혹 기사는 10월·11월·12월호 3회 연속 이어졌다. 吳東龍(오동룡) 기자는 某 인사의 제보를 받고 金希宣 의원 독립군 家系의혹을 2004년 9월호에 일단 제기했다.
『한독당에서 金學奎(김학규) 장군과 함께 활동했던 분이 제보했습니다. 金學奎 장군이 예전에 金希宣 의원에 대한 얘기하는 걸 들은 적이 없다며 뭔가 석연치 않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 보니 홈페이지와 선거인 명부에 출생지가 다르게 적혀 있더군요. 네티즌들도 이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있었어요. 金希宣 의원이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라면서 親日청산에 앞장서지 않았더라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워낙 설치니 네티즌들의 눈에 거슬린 거죠』
2004년 9월 金學奎 장군의 아들 후배라는 金瓚鎬(김찬호)씨가 吳東龍 기자를 찾아왔다.
『2002년에 쓴 기사 가운데 金學奎 장군 얘기가 나온 걸 봤는데, 家系 설명 가운데 틀린 게 있다는 겁니다. 金學奎 장군의 본처 사이에서 낳은 큰아들 金一鉉(김일현)이 고교선배라면서 책에 나온 金一眞(김일진)은 서자라고 했습니다. 金一鉉씨가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고 하여 金瓚鎬씨와 국립묘지에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金一鉉 대위의 묘지를 확인했습니다. 국가유공자면 누군가 연금을 타지 않겠는가 생각하여 金瓚鎬씨와 함께 보훈처까지 갔죠. 보훈처에서 자료를 보여 주지 않는데 金瓚鎬씨가 집안 친척이라고 하니 보여 주더군요. 거기서 파주에 金一鉉씨의 부인 田鳳愛(전봉애)씨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田鳳愛씨를 찾아갔을 때 『자신의 남편은 안동 김씨』라고 얘기했다. 田鳳愛씨는 아주 교양이 있어서 딱 필요한 말만 하여 별다른 얘기는 듣지 못했다. 마감이 거의 다 되었을 때 田鳳愛씨의 친척이 吳東龍 기자에게 전화를 했다.
『첫마디가 「기자님 어디까지 아시나요」라고 하더군요. 그분이 金希宣 의원이 TV 나올 때마다 田鳳愛씨가 「아버지가 뭐 한 줄도 모르고… 만주 경찰을 했다」고 얘기했다는 겁니다. 그분은 그런 사람이 親日청산하겠다며 날뛰는 걸 보니 역겨워서 전화한다고 하더군요』
田鳳愛씨에게 확인전화를 하자 金希宣 의원의 아버지가 유하에서 만주경찰을 했다고 확인해 주었다. 기사가 나가자 파장은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金希宣 의원이 기자회견을 하고 성명서를 냈다.
『참 이상한 일이죠. 그 기사가 나간 후 金希宣 의원 측으로부터 항의전화 한 통 안 왔고, 月刊朝鮮을 고발하지도 않았죠. 특종기사에 대해서는 항의가 없다는 게 특징이죠. 대신 격려전화가 엄청나게 많이 왔어요』
吳東龍 기자는 「만주에서 치안을 담당했을 수도 있으니 확실하게 문서를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하여 김찬호씨와 함께 만주로 갔다. 길림성의 수도인 장춘에 갔으나 문서고에 일제시대 기록이 없었다. 내친 김에 유하까지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현지 조선족의 안내를 받아 유하 공안국과 접촉을 시도하여 金希宣 의원의 아버지가 독립군을 때려잡은 만주국 특무였다는 증명서를 확보했다.
『그쪽에서 더 이상의 자료는 공개할 수 없다고 하여 범죄기록 리스트를 못 받은 점이 좀 아쉽죠. 독립군을 때려잡는 일을 한 사람의 자녀가 親日청산을 하겠다고 나섰으니…. 이 사건을 통해 얻은 교훈은 親日 청산을 하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입니다』


趙甲濟 月刊朝鮮 대표는 『명예욕이 특종을 만든다. 「기사를 써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겠다」, 「좋은 의도에서 영향력을 끼치겠다」는 생각, 「불의를 고치겠다」는 게 다 명예욕이다. 정의감, 명예욕, 호기심, 이 세 가지가 있으면 특종을 한다』고 말했다.
『특종에 대해 시들해지면 기자생활도 끝납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서 제일 귀중하고 나를 흥분시키는 건 특종입니다. 기자의 특종은 운동선수가 신기록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특종한 기자가 특종을 하는 이유는 특종에 따른 쾌감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죠. 운동경기도 우승하는 팀이 계속 우승하는 건 우승의 쾌감 때문입니다. 특종의 쾌감이란 「자기가 쓴 기사로 인해 세상이 시끄러워지는 것」이겠죠. 항상 사물에 관심을 갖고 있다가 딱 한 줄도 특종이 된다는 걸 판단해야 합니다』
趙甲濟 대표는 사실에 자신이 있으면 단정적으로 쓸 수 있다며, 『사실을 앞세워 쓰면, 공격을 당한 상대방도 납득한다』고 말했다.
『과거에 특종을 많이 한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나간 특종 100개보다 오늘의 특종 하나가 더 빛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