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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軍의 NLL 작전예규 수정에 대해

전문가인 국방장관이 非전문가인 대통령의 눈치만 보는가

민병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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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병장 경력의 대통령이 海戰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수치도 아니고 무능도 아니다. 전문가인 해군제독·국방장관이 非전문가인 대통령 눈치를 본다면 이는 韓國軍만의 희극이요 비극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閔 丙 敦
1935년 서울 출생. 휘문高 졸업. 육군사관학교 졸업. 육군대학·국방대학원 수료. 특전여단장, 20사단장, 육군정보참모부장, 특전사령관, 陸士 교장 역임.
軍통수권자로서 링컨과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차이
  미국에 南北전쟁(1861~1865)이 발발하자 예비역에서 소집되어 제21 일리노이 보병연대를 지휘하던 그랜트 대령을 장군으로 발탁하여 중용한 링컨 대통령에게 어떤 사람이 그랜트 장군의 음주벽(술주정)을 비난하는 말을 했다.
 
  그러자 링컨 대통령은 그에게 『그랜트 장군이 어떤 술을 좋아하느냐』고 묻고서, 그랜트 장군이 즐겨 마시는 술을 다른 장군들에게 한 상자씩 보내주도록 했다. 그들도 그 술을 마시고 그랜트 장군처럼 훌륭하게 되라고.
 
  링컨은 生面不知(생면부지)의 고급장교 개개인의 강점만을 보고 장군으로 발탁하여 중책을 맡기고 계속 신임하여 그들 생각대로 싸우도록 그들에게 軍의 지휘를 완전히 일임했다. 그는 「강점주의 人事」를 단행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 후 그랜트 장군은 北軍 총사령관직을 거쳐 戰後 美 합중국 제18代 대통령이 되었다.
 
  영국의 국왕 조지 2세(1683~1760) 앞에서 한 大臣(대신)이, 1759년 캐나다에서 퀘벡을 공격·점령한 울프 장군을 『미친 개(狂犬)』라고 비난했다. 그러자 국왕이 말했다.
 
  『제발, 그 울프 장군에게 다른 장군들도 한 번씩 물려서 모두 그 같은 미친 개가 되었으면 좋겠네』
 
  일찍이 孫子(손자)는 그의 병법 제3장 謀攻(모공)에서 전쟁에 이기는 「다섯 가지 길(知勝有五)」을 가르치면서 『장수가 능력이 있고 군왕이 그 장수의 指揮(지휘)를 제어하지 않으면 승리한다(將能而君不御者勝)』고 강조했다. 이러한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링컨 대통령이나 조지 2세 국왕은 훌륭한 統帥權者(통수권자)였음이 틀림없다.
 
  이에 비하여 근년에 우리나라의 軍 최고통수권자인 몇몇 대통령의 행태는 이와는 거리가 멀다. 차라리 정반대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대통령들)은 軍 수뇌부에 「유능한 장군들」을 발탁하여 보직하기보다는 대통령에게 위협이 되지 않고 절대 복종하며 충성할 사람들을 골라 올린다.
 
  그러므로 리더십이나 전문성이 뛰어난 것보다는 자기와의 개인적 친분이나 신뢰 여부가 중요하며, 따라서 혈연·지연·학연 등 개인적 인연을 중시한다. 그들의 능력이나 人品(인품)이 뛰어난 것은 오히려 꺼려하고, 차라리 사람됨이나 능력이 부족하다든지 다소의 법적·윤리적 약점을 안고 있는 편이 부리기에는 편하다는 생각을 가진 듯하다. 人事 발표 때마다 드러나는 「의외성」이 이런 추측을 가능케 한다.
 
  자신의 신분상승을 기대하지 않고 있다가 뜻밖의 발탁으로 중책(요직)을 맡게 된 사람은 자기를 발탁해 준 「고마운 분」의 은혜에 感泣(감읍)하며 그분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그리고 자기 자리를 계속 유지하고 계속적인 신분상승을 하기 위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고 犬馬之勞(견마지로)를 다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대통령은 이러한 발탁人事가 軍 조직에 미칠 악영향이나 국가에 끼칠 폐해 등에는 눈을 감아 버린다.
 
  예컨대 金大中 前 대통령이 육군참모총장직에 발탁했던 특정지역 출신 金모 대장이 전역하여 쉬고 있던 중, 국내 반대 여론이 분분한 가운데 非전향 장기수들을 北韓으로 돌려보내는 현장에 느닷없이 나타나서 그들에게 꽃다발을 안겨주며 환송하는 어처구니없는 장면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家門의 영광」 앞에서 무너지는 군인으로서의 명예
 
  金大中에 대한 충성심이 검증된 그는 그 얼마 후 또다시 발탁되어 국방장관의 중책을 맡았고, 장관 재임 중 2001년 6월2일과 3일 北韓이 「상선」이라고 주장하는 청진2호 등 그들의 선박 3척이 『金正日 장군님이 개척하신 항로』라고 억지를 부리며 우리 제주해협을 東에서 西로, 西에서 東으로 막무가내로 관통한 후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北으로 돌아갔다.
 
  北의 공공연한 우리 領海(영해) 농락에 국방장관은 「평양의 심기」에 민감한 청와대를 의식해야만 했고, 국방부의 미온적 대응을 질타하는 軍 안팎의 여론에 귀를 막아야 했다. 그의 육군대장으로서의 명예나 국방장관으로서의 무거운 사명도 그에게 「가문의 영광」을 안겨준 金大中에 대한 「충성의무」 앞에서는 「별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임명권자가 이러한 생각으로 발탁한 장관이나 각군 참모총장 등 수뇌들과 상당수의 장성들이 누구누구인지 軍 내부에서는 간부의 대다수가 알고 있으며, 물론 그들의 사람됨이나 능력 등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신뢰하지도 존경하지도 않으며 심한 경우 경멸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사람들은 자기를 임명해 준 「고마운 분」의 정치논리에 부응하여 상식 밖의 일, 해서는 안 될 일도 해치우기 때문이다.
 
  앞에서 예를 들었듯이 非전향 장기수를 北으로 돌려보내는 현장에서 꽃다발을 안겨주며 환송한 金모 前 육군참모총장이 국방장관으로 부임하여 또다시 자기들의 상관이 되었다고 해서, 군인들이 그를 진심에서 상관으로 받아들이고 존경했겠는가. 국민들도 이를 수긍했겠는가. 그러한 장관, 그러한 장성들에게 무슨 자부심이나 명예가 있겠는가.
 
 
 
 「DJ 4大 交戰 지침」 수용한 軍 지휘부
 
  임명권자의 이러한 人事 뒤에는 그 조직에 대한 정치적 간섭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 표본적인 예가 2002년 「6·29 서해交戰」 직후 우리 사회에 알려진 이른바 「DJ 4大 交戰지침」이다. 이는 이미 이 교전이 있기 3년 전에 金大中 前 대통령이 내린 것으로서 「첫째, 북방한계선(NLL)을 지켜라. 둘째, 먼저 발포하지 마라. 셋째, 상대가 발포하면 교전수칙을 준수해 격퇴하라. 넷째,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불합리한 대통령의 지침은 국방장관이나 합참의장 등 수뇌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즉각 강력히 반대건의를 했어야 했는데,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이를 그대로 수용하여 예하 부대에 하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악영향은 그리 오래지 않아 나타나고 말았다.
 
  2002년 6월29일 오전 10시1분 敵艦(적함)이 우리 해군함정의 경고를 무시하고 NLL을 넘어 南進하는데, 현장에서 경비 중이던 우리 해군 고속정은 「DJ 4大 交戰지침」에 묶여 발포도 하지 못하고 敵 전투함의 함포 바로 코앞에서 배 옆구리를 드러내 보이며 몸(선체)으로 막아내는 이른바 차단기동이라는 자살행위를 해야 했다.
 
  오전 10시25분에 결국 적함의 기습포격을 받아 우리 고속정은 침몰했고, 27명의 승조원 중 정장 尹永夏(윤영하) 대위를 포함하여 5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당한 혹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를 계기로 이른바 「DJ 4大 交戰지침」이 세상에 드러나 국민적 지탄을 받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군인은 물론 온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前 육군참모총장 李鍾贊(이종찬) 중장은 6·25 때 혁혁한 전공을 세웠지만 그보다 당시 자기 자신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해 준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의 옳지 않은 명령을 거부한 것으로 더 유명하다.
 
  1948년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당선되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李承晩은 6·25 전쟁 때 임시 首都(수도) 부산에서 국회에서의 간접선거로는 자신의 再選(재선)이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되자 직선제 개헌으로 직접선거를 통한 再選을 기도한다. 그러나 개헌 또한 여의치 않게 되자 무리수를 써 1952년 5월25일 00시 비상계엄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부산 정치파동」이다.
 
  이때 李총장은 계엄군으로 (전방에서) 병력 2개 대대를 차출하여 부산으로 보내라는 李承晩 대통령의 지시를, 전쟁 중 전투 병력을 정치목적으로 차출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그 전해에 자기를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해 주었고 중장으로 진급시켜 준 대통령의 지시였는데도 불구하고.
 
  그 후 그에게 가해진 李대통령과 申泰英(신태영) 국방장관의 압력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얼마 후 陸本 상황실에 들른 李총장은, 흑판에 써놓은 『…軍은 국가민족의 수호를 유일한 사명으로 하고 … 기관이나 개인에 예속된 것이 아니라 … 국가의 公器(공기)임을 銘記(명기)하고 각자 그 소임에 헌신해 주기 바란다』는 내용의 참모들이 만든 훈령초안을 보았다.
 
  그는 『참모들의 이 같은 애국충정을 (내가 일찍이) 알지 못했던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즉석 훈시로 이 초안을 승인하고 즉시 全軍에 하달할 것을 지시했다. 陸本 훈령 제217호였다(강성재, 「참軍人 李鍾贊 장군」, 1986년 東亞日報社).
 
  1952년 7월22일, 13개월 만에 참모총장직에서 해임된 李장군은 약 1년간 美 지휘참모대학에 유학하고 돌아와 육군대학총장으로 부임한다. 진해 육군대학에서 7년간 후진을 양성하는 동안에도 그를 존경하는 장병들이 그를 계속해서 「총장각하」라 부르며 예우함으로써 육군대학의 長(장)은 학장이 아닌 총장으로 굳혀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口傳(구전)이 있다.
 
  1983년에 67세를 일기로 生을 마쳤지만 그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가장 훌륭한 장군이었다는 평가와 함께 「참軍人의 표상」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의문사委의 조사를 받은 장군과 거부한 장군
 
  1987년 6월 제5공화국 말기 이른바 「6 ·10 사태」 때 국민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와 이에 대한 정부의 「4·13 호헌 조치」로 정국이 요동치고 있었다. 연일 계속되는 시위에 경찰이 힘겹게 진압작전을 벌일 때 특전사와 수방사, 기타 수도권 주요 부대들은 「충정작전」이란 이름의 폭동진압훈련에 열심이었다.
 
  이런 가운데 6월19일 예상되는 계엄령선포에 대비한 「출동준비명령」이 주요 부대에 하달되었다. 이미 1980년 5·18 사태를 겪은 軍 고급간부들은 또 한 번의 충돌과 유혈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며 크게 염려하고 있었다.
 
  이에 일부 고급간부들(대령, 준장: 필자는 중장으로 특전사령관)이 어떠한 경우에도 유혈사태는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출동준비명령의 취소를 보안사령부를 통하여 대통령에게 강력히 건의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져서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87-4호(1987년 6월19일)는 취소되었다.
 
  만약 그런 반대 건의 없이 부대들이 출동하면서 계엄령이 선포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간부들 특히 고급간부들은 필요한 경우 상관에게 반대 건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간부의 도덕적 책임이며 良識(양식)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 일반(특히 공직사회), 그중에서도 특히 軍에 그런 기풍이 별로 없는 것이 큰 문제요, 약점이다. 장교, 특히 장군이 지녀야 할 자존심도 명예심도 이젠 없는 듯하다.
 
  지난 여름, 「간첩 및 빨치산 출신 非전향 장기수의 민주화 유공」 운운으로 우리나라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던 대통령 직속 제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간첩 출신 위원이, 현직 軍사령관을 조사했다는 충격적인 뉴스에 많은 의식 있는 사람들이 분노하거나 허탈해했다. 이것은 간첩 출신이 고위급 장성을 조사했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육군대장이 그곳에 「가서 조사받았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현상은 앞에서 이미 지적했지만, 자질이 없는 사람을 고위 장성으로 발탁하여 軍사령관이란 과분한 자리에 앉혀 놓은 결과라고 본다. 당사자가 스스로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이고 대장이 어떤 계급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운 좋게 그 자리에 앉아 사명감도 자부심도 없이 그저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념」도 「의식」도 없는 사람이다.
 
  의문사委의 다섯 차례에 걸친 소환에 단호히 불응하고 끝내 무시해 버린 3성 장군 현직 사령관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는 아무 일 없이 그의 직무를 계속 수행하고 있다. 이건 본인의 의지에 달린 것이고, 「의식」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戰場을 아는 군인은 이런 짓 안 한다

 
  최근에는 軍의 NLL 작전예규 수정으로 논란이 일고 있다. 종전에는 NLL을 넘어오는 敵 선박에 「경고방송 및 시위기동을 하고, 이에 불응하면 NLL을 넘어온 선박에 경고사격 후 불응하면 격파사격」하게 되어 있었다. 이를 첫 단계 경고방송 대신 「경고통신 및 시위기동」을 하고 그 다음에 경고사격을 한 후에 그래도 불응하면 격파사격하는 순서로 바꾸려 한다.
 
  경고통신을 하면서 NLL을 침범한 北 선반의 의도를 파악, 침범한 北의 선박이 NLL 無力化(무력화)를 시도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되면 여유를 가지고 「경고사격을 자제」하며, 「신중히 대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쪽에서 경고통신을 해도 저쪽에서 짐짓 수신이 되지 않은 것처럼 속이면 이쪽에서는 어찌할 방법이 없다. 현장의 말단 전투원들이 越境해 온 敵들이 마치 선박구조를 하는 듯한 연출을 한다면 무슨 수로 그 진위를 확인할 수 있겠는가. 저들이 NLL의 無力化를 시도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물어볼 수도 없고 어떻게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는 戰場(전장)을 아는 군인이 스스로 한 변경 작업이라고 이해하기 힘들다. 자세히 보면 여기에는 NLL을 고집하지 않겠다는 메시지가 숨겨져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작전을 아는 사람은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하물며 새로 부임한 尹光雄(윤광웅) 국방장관은 평생을 해군에서 근무한 海戰(해전)의 전문가 해군중장이 아닌가.
 
  이런 문제를 가지고 소신 없이 청와대 눈치나 보면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육군 병장 경력의 대통령이 海戰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수치도 아니고 무능도 아니다. 전문가인 해군제독·국방장관이 이런 일로 非전문가인 대통령 눈치를 본다면 이는 韓國軍만의 희극이요 비극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수정한 NLL 작전예규」를 바로잡지 않고 고수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들의 사상과 숨겨진 의도를 의심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 2002년 「6·29 서해交戰」에서의 「억울한 비극」을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이 나라의 역적이 될 생각이 아니라면….
 
  그대들에게는 李鍾贊 장군의 호통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將軍의 명예, 장군이 지켜라!』, 『장군의 명예가 군대의 명예다!』
 
  그리고 盧武絃 대통령은 오래 전부터 존경해 온 미국 링컨 대통령을 부디 계속해서 존경하고, 앞에서 예를 들었던 그의 모범적 軍 통수권 행사를 따라 배우기 바란다. 毛澤東(모택동)보다는 링컨이 백 배, 천 배 더 훌륭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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