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긴급특집-이라크戰 前夜] 中東의 金正日, 사담 후세인

황성준    sjhwang@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中東의 히틀러」
2000년 12월31일 바그다드「승리 광장」에서 거행된 군사 퍼레이드를 지켜보며 소총을 들어 보이고 있는 사담 후세인.
  「세계 최악의 도발꾼이자 戰爭狂(전쟁광)」, 「바드다드의 도살자」, 「中東(중동)의 히틀러」, 「용인할 수 없는 위험(unacceptable risk)」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언론은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을 「惡魔(악마)」로 묘사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특히 부시 미국 행정부는 『이라크 국민을 위해 사담 후세인은 반드시 제거돼야 한다』며, 戰意(전의)를 불사르고 있다.
 
  이라크 공격에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는 프랑스와 독일도 후세인이 「惡」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異見(이견)을 제시하지 않는다. 단지 「전쟁에 의한」 후세인 제거에 반대하고 있을 따름이다. 심지어 한때 反美 아랍 민족주의의 기수였던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마저도 『후세인은 이성적이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후세인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팔레스타인人들은 사담 후세인을 열렬히 지지하고 있으며, 시리아·리비아·예멘 등 아랍 국가들의 국민들도 후세인에게 우호적이다. 이들에게 후세인은 「미국에 대항하는 아랍 민족주의의 영웅」인 것이다. 특히 이스라엘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는 팔레스타인人들에게 후세인의 인기는 대단하다. 후세인이 『이스라엘을 지중해로 쓸어 내겠다』고 공언했을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현상은 후세인은 이라크 국민들보다도 인근 다른 아랍국가 국민들에게 더 인기가 높다는 사실이다.
 
  수년간 가까이서 후세인을 직접 관찰한 아랍 전문가 사이드 아부리슈는 이렇게 분석했다.
 
  『사담 후세인은 자신의 국민을 파괴했다. 자신의 국민을 학살하고 독가스로 죽였다. 이 때문에 이라크 국민들은 후세인을 증오한다. 그러나 이라크 밖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은 이러한 후세인의 만행을 겪지 않았다. 바로 여기에 이라크 국민들과 다른 아랍 국가 국민들 간의 후세인에 대한 견해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다른 아랍 국가 국민들에게 후세인은 「서방 세계에 대항하는 영웅」이지만, 이라크 국민들에게 후세인은 「이라크를 빈곤과 절망으로 몰아넣은 독재자」인 것이다』
 
  사담 후세인은 1937년 4월28일 바그다드에서 북쪽으로 160km 떨어진 티크리트 지방의 가난한 농촌 마을 알 아우자에서 태어났다. 후세인은 아버지 없이 태어났다. 사생아라는 說도 있고, 가족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說, 출생 전후에 강도에게 살해당했다는 說 등이 있는데, 확인되지 않고 있다. 후세인의 어머니 사브하는 사촌오빠 이브라힘 하산과 재혼했으며, 후세인은 계부 밑에서 구박을 받으며 자랐다. 후세인 자신의 고백에 따르면, 어린 후세인이 가족을 먹이기 위해 달걀과 닭을 훔쳐야만 했을 정도로 가난했으며, 열 살이 될 때까지 아무런 교육을 받지 못했다.
 
  후세인은 만 아홉 살 때, 가출하여 외삼촌 카이르알라를 찾아갔다. 이 사건은 후세인 인생에서 첫 번째 전환점이었다. 외삼촌 카이르알라는 親英 이라크 왕정에 강한 적대감을 지닌 이라크軍 장교로서, 反체제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카이르알라는 反英·反유대인 아랍 민족주의자였으며, 당시 이라크에 퍼져 있던 히틀러의 나치즘에 심취해 있었다. 카이르알라는 『알라께서 만드시지 않았어야 할 세 가지로 페르시아人(이란인), 유대인 그리고 파리들이 있다』고 후세인을 교육시켰으며, 이것이 후세인의 사상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反英 나치주의자인 외삼촌 손에 길러져
 
  후세인은 18세 되던 해 외삼촌의 도움으로 카르크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후세인은 학교 공부보다도 나세르의 아랍 민족주의에 더 깊이 빠져 들어갔다. 그리고 「아랍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혼합시킨 「바트黨」에 암살 행동대원으로 가입한다. 후세인은 1958년 압둘 살람 아레프 대령이 압둘 카림 카심 총리를 제거하려다 실패한 사건으로 첫 투옥된다. 그러나 후세인은 곧 탈옥했으며, 카심 총리 암살계획에 참여한다. 이 암살 시도는 동료의 배신으로 실패했으며, 후세인은 이집트로 망명을 떠나야만 했다.
 
  후세인의 이집트 생활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나세르 이집트 정권은 아랍 민족주의자들을 후원했으며, 이 덕분에 후세인은 이집트 정부 돈을 받아 카이로 대학 법학부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1963년 초 후세인은 외사촌 사지다 카이르알라와 결혼했다.
 
  1963년 이라크 정세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그해 2월 바트黨과 군부가 손잡고 쿠데타를 일으켜 카심 정권을 붕괴시켰다. 그 결과 군부 지도자 살람 아레프 대령이 대통령이 됐다.
 
  이집트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후세인은 쿠데타 소식을 듣고 이라크로 귀국하여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후세인이 처음 맡은 직책은 농민담당 중앙사무소의 하위직이었다. 후세인의 고향인 티크리트 지방 출신들이 바트黨의 중심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덕택에, 이들의 도움을 받아 후세인은 급속히 黨內 영향력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던 중 그해 11월 아레프 대통령이 군부와 손잡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전권을 장악하고 바트黨을 권력에서 추방했다.
 
  아레프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 이후, 후세인은 反아레프 대통령 지하운동을 조직하면서, 급속히 바트黨 지도자로 떠올랐다. 후세인은 1964년 10월 체포됐으나, 후세인의 바트黨 내 지위는 점차 확고해졌다. 1966년 바트黨 副서기장에 선출된 것이다. 그리고 사태는 다시 반전되기 시작했다.
 
  1966년 4월 아레프 대통령이 헬기 사고로 사망하자, 그의 동생인 압둘 알만 아레프 장군이 대통령 겸 총리로 취임했다. 후세인은 1967년 탈옥하여 바트黨 조직 재건 작업에 전념하면서 아레프 정권 전복 준비에 착수한다.
 
  1968년 1월 일부 각료가 사임하고 대규모 反정부 시위가 시작된다. 3∼4월에 이라크 북부 쿠르드族이 들고 일어나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정세는 극도로 불안해졌으며, 결국 그해 6월 바트黨이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잡는다.
 
  알 바크르 바트黨 서기장이 대통령이 됐으나, 新정권의 실세는 후세인이었다. 후세인은 黨을 장악한 동시에 정부와 군부를 강력히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2년부터 이라크의 석유를 독점하고 있던 서방 석유회사들의 국유화 작업을 주도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1979년 7월 바크르 대통령이 사망하자, 후세인은 마침내 명목상으로도 이라크 최고 지도자가 된다. 이라크 공화국 대통령, 이라크 바트黨 서기장, 혁명평의회 의장 등이 그의 공식 직함이다.
 
 
 
 폭력으로 얼룩진 스탈린式 공포정치
 
  후세인은 권력을 잡자마자 반역죄로 각료 21명을 처형했다. 여기에는 과거 지하운동 당시 동지이자 가장 친한 친구들도 많았다. 심지어 장관들과 보좌관들이 정치범들을 총으로 직접 쏴 죽이게 하기도 했다. 또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전쟁을 반대하던 많은 측근 장교들이 원인 모를 헬기 추락 사건으로 죽어 갔다.
 
  이란 호메이니가 평화조약 체결 조건으로 후세인의 퇴진을 요구하자, 대다수의 각료들은 『각하의 계속적인 영도력이 필요할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브라힘 보건 장관은 『각하께서 잠시 일선에서 물러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평화협정 체결 후 다시 복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제안했다. 다음날 이브라힘 장관은 토막살인된 시체로 발견됐다.
 
  후세인은 스탈린을 연구하고, 스탈린을 본받았다. 후세인 측근들에 의하면, 후세인은 지하당 시절부터, 『권력을 잡을 때까지만 기다려라. 나는 이라크를 「스탈린 국가」로 만들 것이다』라고 자주 말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냥 웃고 넘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후세인 서재에는 항상 스탈린 저작들과 스탈린에 관한 책들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세인과 스탈린은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미천한 환경에서 태어나서, 아버지 없이 어머니 손에 길러졌다. 그리고 암살 행동대원으로 활약했으며, 모두 비밀경찰기관을 권력유지의 핵심기구로 사용했으며, 軍을 항상 경계했다.
 
  국제 앰네스티는 『양심수와 정치범을 포함하여 지난 몇 년간 이라크에서 처형된 사람들은 수십만 명에 이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라크 비밀경찰들은 전기고문, 담뱃불로 지지기, 눈알 뽑기, 손톱 뽑기, 강간, 손바닥 뚫기 등을 사용하고 있으며, 친인척을 체포하여 위해를 가하거나 강간하는 정신적 고문 등도 서슴지 않는다.
 
  국제 앰네스티 보고에 의하면, 『가족에게 돌아온 시신에서 눈을 도려낸 자리, 심한 구타와 전기 충격의 자국, 그리고 떨어져 나간 손가락과 발톱 같은 명백한 고문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성들 역시 反정부 활동을 하는 친척과의 접촉을 의심받거나 친척의 활동 중단을 강요받는 과정에서 강간당하고 있다.
 
  후세인은 비밀경찰 요원들에게 『압둘라를 처형할 때, 압둘라만을 처형하지 마라. 그의 가족을 모두 처형하라. 그의 가족이 우리를 암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고 교육을 시키고 있다. 2000년에는 대통령과 대통령 친인척을 비방하거나 욕할 경우 「혀 절단刑」에 처한다는 법안을 공포하기도 했다.
 
 
 
 이라크를 개인 우상화의 場으로 만들어
 
   후세인의 대통령宮은 바그다드에 32곳, 티크리트에 14곳, 바이지에 아홉 곳, 모술에 아홉 곳, 바스라港에 네 곳 등 전국에 걸쳐 약 70여 개나 된다. 이 대통령宮들은 서구의 어떤 재벌도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라크 당국은 이 많은 호화판 대통령宮들이 『不世出의 영웅 후세인 대통령의 위엄을 드높이고, 美제국주의자들의 암살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라크는 석유 매장량 2위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極貧(극빈)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라크 당국은 이를 「미국의 경제 제재」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런데 후세인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석유 밀수를 통해 연간 30억 달러를 챙기고 있으며, 이 돈을 무기 구입과 개인 우상화 그리고 개인적 蓄財(축재)에 사용하고 있다.
 
  후세인은 약 180억 달러를 쏟아 부어 古代 바빌로니아 제국의 首都 바벨론을 복원했는데, 복원된 유적 곳곳에 후세인을 찬양하는 글들을 새겨 놓았다. 고대 「바벨탑」 모형으로 알려진 남부 자쿠르 지역의 「지구라트」에 자신의 이니셜을 새겨 놓기도 했다.
 
  바그다드를 비롯한 이라크 전역에는 사담 후세인의 동상과 초상화로 덮여 있다. 관공서는 물론 거리와 교통표지판, 심지어는 식당에 이르기까지 후세인의 동상이나 초상화가 없는 곳이 없다. 그리고 후세인의 동상은 우러러보아야만 할 존재로서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다.
 
 
 
 
후세인의 망나니 아들, 우다이

 
   이러한 우상화 작업은 유치원과 각급 학교에서 더욱 철저히 진행되고 있다. TV에 나오는 이라크 어린이들의 모습은 북한 어린이들의 金正日 숭배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우리 아버지 사담 후세인께서는 저희들에게 선생님이 되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의 아버지 사담 후세인께서는 저희들에게 농부가 되는 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저희들은 美帝 침략자들을 죽일 것입니다』
 
  『후세인의 장남 우다이는 살인과 강간을 일삼는 희대의 악당이며, 그 흉폭함은 아버지를 닮았다』고 해외 거주 이라크人들은 입을 모은다.
 
  우다이 후세인은 이라크에서 살인, 강간, 고문 등 각종 反인권적 범죄와 권력 남용, 그리고 西歐 재벌 못지않은 蓄財와 호화판 생활로 원성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한때 후세인의 차기 권력 승계 0순위였으나, 워낙 원성이 자자하자 현재는 동생 쿠사이와 함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다투고 있다. 현재 이라크 권력은 후세인 一族과 후세인 고향인 티크리트 출신들에게 집중돼 있다.
 
  우다이는 후세인이 권력을 잡았을 때인 15세에 이미 당시 각료들을 집단학살하는데 가담하여 악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1995년 내무장관을 지낸 丈人(장인) 이브라함 알 하산과 논쟁을 벌이다가 권총으로 그의 다리에 7발을 난사했으며, 이 과정에서 동석했던 6명의 여성이 목숨을 잃었다. 1998년에는 자신이 눈독 들이던 여자를 아버지에게 소개시켜 줬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측근을 때려죽이기도 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이라크팀이 패배하자 선수들을 폭행하여 국제사회로부터 망신당하기도 했다.
 
  우다이는 여성 편력과 호화생활로도 악명이 높다. 자동차 수집광으로 외제 최고급 승용차를 1300대나 가지고 있으며, 거리에서 예쁜 여자를 보면 차에 강제로 태운 뒤 性폭행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우다이는 최근 「종교개혁 운동」을 주도하며 賣買春(매매춘) 및 향락문화 제거에 앞장서고 있다. 이 과정에서 매춘 혐의를 받은 부녀자들을 공개적으로 참수한 뒤 경고의 표시로 효수하기도 했다. 이것은 1996년 12월 우다이가 바그다드 중심가에서 총격을 받아 性불구가 됐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이라크인들은 『자기가 못 하게 되니, 남도 못 하게 한다』고 비꼬고 있다.
 
 
 
 석유무기화 同參 않는 쿠웨이트 침공
 
   지역패권을 노리고 8년간 이란과 전쟁을 벌였지만, 이라크에게 남은 것은 전쟁 후유증밖에 없었다.
 
  이라크 인구 2300만 명 가운데 약 400만 명의 이라크 사람들이 후세인의 탄압과 가난을 피해 해외로 도피했다. 특히 경제인들과 석유 기술자·의사·과학자 등 사회 주도층 인사들이 대거 탈출했다. 따라서 경제는 더욱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라크의 유일한 산업이라고 할 수 있는 석유산업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유능한 석유 기술자들이 해외로 도피하는 바람에 기술혁신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자본부족 현상을 빚은 것은 물론이다.
 
  후세인은 서구 자본을 끌어들여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서구 자본은 이라크 정부의 對外 채무해결을 투자조건으로 내세우고, 채무 해결 방안으로 「국영 석유산업의 민영화」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후세인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中東 산유국들의 단합을 통한 「석유 무기화」를 시도했다. 석유수출기구(OPEC)에서도 합의가 이뤄졌다.
 
  그런데 쿠웨이트가 이 합의를 깨뜨린 것이었다. 그 결과 1990년 7월 원유값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쿠웨이트는 서구 자본의 도움으로 그동안 기술혁신을 이룩하여 생산단가를 낮추는 데 성공했기에 그만큼 가격을 떨어뜨려도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 기술혁신을 이룰 수 없었던 이라크는 엄청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후세인은 중동석유 패권을 장악하고자 1990년 8월 「석유 무기화」에 동참하지 않은 쿠웨이트를 침공한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진영은 국제 석유시장 질서를 무력으로 파괴하려는 이라크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특히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장악하여 걸프만으로 진출할 경우, 다른 중동국가의 석유 수송로도 위협받게 되기 때문에 더더욱 이라크에 대한 응징이 필요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軍은 이라크를 공격했으며, 이 전쟁은 1991년 다국적軍의 일방적인 승리로 종결된다(그러나 이라크에서는 후세인이 美 제국주의자들의 침공을 막아 내고 승리를 거두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이 전쟁에서 패전한 이라크는 쿠웨이트에서 철수함은 물론 유엔으로부터 무기사찰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경제 제재가 가해졌으며, 이라크 북부와 남부에 비행금지구역(No-Fly Zone)이 설정되어 헬기 이외의 항공기 비행이 금지됐다.
 
 
 
 
독가스를 사용, 18만 명의 쿠르드人 학살

 
   후세인은 反유대주의, 反페르시아(이란)주의 그리고 反서방주의로 무장한 인물이다. 후세인이 꿈꾸는 것은 아랍을 단결시켜, 과거 바빌로니아 제국과 같은 중동지역 패권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궁핍한 국가재정에도 불구, 180억 달러라는 막대한 자금을 바빌로니아 유적 복원작업에 투입하기도 했다.
 
  후세인은 1979년 이란혁명으로 서방진영이 反이란 노선을 걷는 것을 이용하여 1980년 9월 이란을 침공했다. 같은 이슬람이지만, 후세인은 이란系와 터키系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내며, 아랍 패권주의를 제창했던 것이다(최근 터키가 미국에 동조하여 이라크 전쟁에 8만 명을 파견하기로 결정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이같은 후세인의 아랍 패권주의에 대한 경계심이다).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후세인은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로부터 많은 무기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후세인의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8년이나 끌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휴전하고 말았다.
 
  후세인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부터 生化學(생화학) 무기 및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총력을 기울였다. 당시 미국은 이를 눈치 챘지만, 적대국인 이란과 전쟁하고 있었기에 못 본 척했다. 후세인은 이란과의 전쟁에서 독가스를 사용했다. 그리고 1987년 이라크 북부 지역의 쿠르드族이 분리독립운동을 벌이자, 독가스를 사용, 약 18만 명의 쿠르드人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유엔은 1991년 걸프전쟁 이후 무기사찰단을 조직, 이라크에 대해 대대적인 대량살상무기 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사찰과정은 순조롭지 못했다. 사찰요원들은 『이라크가 사찰정보를 제공하지 않거나 고의적으로 사찰을 지연시킨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반대로 이라크는 『사찰단이 이라크 주권침해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고 비난했다.
 
  어쨌든 이라크는 계속 말썽을 부렸고, 이때마다 미국은 공습으로 답했다. 대표적인 예가 1996년 8월 이라크가 터키로 연결되는 송유관을 점거한 사건이다. 또 다시 중동석유 공급체계를 흔들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미국은 미사일로 이라크 남부를 공격했으며, 이 공격으로 터키 석유공급이 재개됐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계속 반복됐다. 고개를 내밀면 망치로 때리고, 때리면 고개를 집어넣는 「두더지 잡기 게임」이 미국과 이라크 사이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후세인은 「中東의 金正日」
 
  미국은 후세인을 「中東의 무장한 깡패」로 간주하고 있다. 이러한 깡패가 「세계 경제의 젖줄」인 中東 석유지대에서 어슬렁거리도록 그냥 내버려 두면 언젠가 후환이 되며, 따라서 이번에 반드시 제거해야 된다는 입장이다.
 
  한 터키 기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 터키 기자는 2001년 아프간 전쟁 당시 카불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한국軍의 이라크 참전 문제」를 취재하기 위해 전화한 것이었다. 이 기자와의 전화 통화 내용 일부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기사를 마치기로 하겠다.
 
  ―한국은 이라크에 派兵하는가.
 
  『국민여론이 좋지 못하다』
 
  ―1980∼1990년대에 低油價(저유가)로 많은 재미를 본 국가 가운데 하나가 한국이 아닌가.
 
  『많은 한국인들, 특히 젊은 층은 이번 이라크 전쟁을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적 횡포로 여기고 있다』
 
  ―이해할 수 없다. 후세인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언젠가 다시 말썽을 일으킨다. 그러면 안정적인 세계 석유공급 체계가 흔들리게 된다. 인권 입장에서 보더라도 후세인은 반드시 제거돼야 한다.
 
  『오히려 터키는 자기 이익을 위해 명분을 버리고 참전을 결정했다는 것이 한국의 분위기다』
 
  터키 기자는 『후세인은 「중동의 金正日」이다. 「민족」이란 이름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민족」을 파멸시키고 있다. 터키가 實益을 고려한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터키는 6·25 전쟁에도 파병했다. 발달된 경제력과 강한 군대를 가진 한국은 이제 국제사회에 이바지해야 한다. 후세인을 제거하여 안정된 석유 수급체계를 확보하는 것이 한국의 국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남기며 전화 통화를 마쳤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