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濟多士(제제다사).
경기고등학교 출신 법조인 모임인 「경기법조회」의 회원 명부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절로 이 말이 떠오른다. 쟁쟁한 경력의 소유자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기」라면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고등학교였으니 만큼 전국의 수재들이 모여 들었고 법조계로 진출한 사람은 그 중에서도 拔群(발군)의 才士들이었다.
지금은 법조 인구 확산 시책에 따라 매년 1000명이 넘는 합격자를 배출하지만 많아야 수십 명, 적게는 서너 명의 합격자 밖에 나오지 않던 고등고시 사법과나 사법시험 시절, 법조인의 관문을 통과한 이들은 과연 바늘구멍을 통과한 낙타에 견줄 만했다.
이들의 이력서와 프로필을 보면 수석 입학-수석 졸업-수석 합격 등 「首席」이라는 수식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여기다가 「준수한 용모」, 「뛰어난 외국어 실력」, 「좋은 家門(가문)」 등등,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조건이 골고루 열거되고 있어 적어도 세속적으로만 본다면 이들은 갖출 것을 모두 갖춘 完人처럼 보인다.
법조인들은 관료, 기업인, 언론인 등과 더불어 사회를 이끌어 가는 조타수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여타 그룹이 선두에 서서 隊列(대열)을 이끌어 나가는 소임을 맡았다면 법조인들은 그 隊伍(대오)가 흐트러지거나 옆으로 비껴 나가는 일이 없도록 살펴보고 채찍질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숫자 면에서 경기 출신 법조인은 다른 학교에 비할 바가 아니다. 경기법조회 회원 명부에 등재된 인원은 모두 423명. 단연 압도적이다. 이 중 판사가 82명, 검사가 58명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변호사다. 약간 명의 교수와 행정부처 공무원, 기업인이 포함돼 있다.
참고로 다른 고등학교 출신 법조인 숫자를 비교해 보자.
상위직으로 갈수록 比重 무거워
법률신문사가 발행한 「한국 법조인 大觀」을 보면 경북高 출신은 269명. 영남의 수재들이 모여드는 명문고답게 경기고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법조인을 배출했다. 세 번째로는 全北지방의 명문 전주高가 224명의 법조인을 길러냈다. 그 다음으로 서울高 183명, 대전高 174명, 광주일高 168명, 경복高 158명, 부산高 128명, 광주高 106명의 순으로 100명 이상씩의 법조인을 배출했다. 진주高 98명, 경남高 90명, 순천高 89명, 마산高 81명, 용산高 80명, 휘문高 72명, 경동高 68명, 대구 계성高 65명, 중앙高 61명, 청주高 61명, 대구高 61명, 우신高 57명, 경북사대부고 55명, 대구 달성高 55명, 제주 제일高 54명, 중동高 51명, 목포高 50명, 대륜高 50명씩의 사법시험 합격자를 냈다(이상 2000년판 한국법조인大觀 기준).
광주 지역의 경우 광주일고-광주高가 광주서중 및 광주고보 출신들을 망라해 「서광회」라는 친목 모임을 결성하고 있는 바 서광회원 명부에는 법관 47명, 검사 43명, 변호사 144명, 기타 12명, 합계 246명의 회원 명단이 실려 있다.
이러한 출신 고교별 법조인 숫자의 격차는 고교 평준화 이후 크게 완화됐다. 예컨대 전주高나 진주高처럼 평준화에 늦게 참여한 학교의 경우는 나중까지 그 지역의 수재들이 집중된 결과, 소장 법조인층에서 약진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기高 출신들은 숫자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법원과 검찰 내에서 점하는 위치에 있어서 他의 추종을 불허하는 바가 있다.
경기高 출신 법관 82명의 직급별 분포를 보면 대법관 2명, 고등법원장 1명, 지방법원장 1명, 고등법원 부장판사 17명, 지방법원 부장판사 42명, 판사 19명이다. 우리나라 법관 총원 1631명 중 82명이라고 하면 5%로서 그리 놀랄 만한 비율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행정부처로 따진다면 차관급에 해당하는 고등법원 부장판사 81명 중 17명(21%), 지방법원 부장판사 257명 중 42명(16%)이 경기高 출신이다.
특히 高法에서도 핵심인 서울고법의 경우, 부장판사 35명 중 7명이 경기高 출신이다. 고법 부장판사라고 하면 항소심 재판의 재판장이다. 대법원이라는 상급 법원이 있지만, 대부분의 사건은 고등법원에서 시시비비가 갈려지게 된다.
차관급인 고법 부장판사는 20% 차지
과거에는 전체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30~40%가 경기高 출신으로 채워진 시절도 있었으니만치 지금은 좀 改善(?)됐다고 볼 수 있다.
高法 부장은 이변이 없는 한, 법원장으로 승진하는 대기 코스라고 봐도 무방한 것이 법원의 관행이다. 그런 자리를 20% 내외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경기高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고 있는 例다.
現 대법원의 대법관 13명 중 경기高 출신은 2명이다. 이는 출신 지역과 출신 학교의 안배에 따른 결과라고 법조계는 보고 있다. 참고로 現 대법관의 출신 고교별 분포를 보면 경북高 3명, 경기高와 전주高가 각 2명, 서울高·광주일高·대전高·경북사대부고·진주사범 체신高가 각 1명씩이다. 고등법원장의 경우는 경북사대부고 2명, 경기高·서울高·경남高·서울사대부고·익산 남성高가 각 1명씩이다.
경우에 따라서 대법원과의 이견으로 말미암아 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 관계를 빚곤 하는 헌법재판소는 경기高 勢가 눈에 띈다. 재판관 9명 중 4명이 경기高 출신으로서 한 명만 더한다면 과반수를 채울 만한 세력이다.
검찰 쪽도 만만치 않다.
전국의 검사 숫자는 1400여 명. 이 중 경기高 출신이 58명으로 역시 선두를 지키고 있다. 뒤를 경북高 41명, 전주高 32명, 서울高-광주일高-진주高 각각 26명, 대전高 25명, 경복高 23명의 순으로 따르고 있다.
「검찰의 꽃」이라고 불리는 핵심 간부인 검사장급 이상 검사 42명 중 경기 출신은 9명으로 역시 20%를 상회한다. 경북高 4명, 경복高·대전高·부산高·목포高 각 3명씩, 서울高와 익산 남성高가 각 2명씩 분포돼 있다.
경기高 출신의 한 검찰 간부는 『경기高는 원래 全國區(전국구)다. 각 지방에서 상경하는 수재들이 많았다』는 말로 경기高의 寡占(과점) 현상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를 경계했다.
검찰 내에는 現 정권 들어 목포高 출신을 필두로 한 호남 지역 고교 출신의 약진이 눈에 띈다. 서울 소재 고교 출신들이라도 본디 호남 지역을 고향으로 둔 인물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김&장」엔 210여 명의 변호사
최근 변호사 업계는 법률시장의 개방에 대비, 몸집을 불려 가는 추세에 있다. 대형화를 통한 전문화를 꾀해 외국 변호사들과의 경쟁에서 이겨내자는 뜻일 것이다.
3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법무법인 「김&장」은 국내 최초로 본격적인 로펌 형태를 갖춘 「변호사 회사」이다. 국내 변호사 160여 명, 미국 변호사 50여 명, 기타 변리사 공인회계사 세무사 등의 프로페셔널을 합쳐 250명 이상의 인재가 몸담고 있다.
具本英(구본영) 前 OECD 대사 같은 전직 경제 관료이자, 외교관도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金永珷(김영무)-李載厚(이재후)-玄鴻柱(현홍주)-장수길 변호사가 대표로 있는 「김&장」에는 韓相鎬(한상호), 丁啓聲(정계성) 등 중견 변호사들을 비롯 다수의 경기高 출신이 主力부대를 형성하고 있다.
또다른 법무법인 「충정」에는 黃周明(황주명·경기高 54회), 徐廷信(부산高·前 대검 차장), 張容國(경기高 67회) 변호사가 대표로 있다.
외국 변호사 8명을 포함, 모두 51명의 변호사와 공인회계사 1명, 변리사 4명의 인적 구성을 갖고 있는 「충정」은 최근 사법연수원장을 지낸 申明均(신명균) 변호사와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를 마지막으로 법원을 떠난 河光鎬(하광호), 宋政勳(송정훈) 변호사를 영입했다. 이들 세 명은 모두 경기高 선후배 간이다.
「세종」과 「열린합동」이 합친 법무법인 「세종」에는 120명의 국내, 미국, 고문 변호사와 공인회계사 4명, 변리사 9명이 활동 중인데, 대법관을 지낸 吳成煥(오성환·경기高), 李建雄(이건웅·경기高), 黃相顯(황상현·서울高), 辛永茂(신영무·서울高) 변호사와 최근 합류한 金慶漢(경북高·前 법무차관) 변호사가 대표다.
경기高 출신 법조인들 개개인의 면모를 일별해 보자.
경기高 49회(1953년 졸업)인 원로 법조인 吳成煥(오성환) 변호사는 전형적인 수재형 법관이었다. 서울법대 3학년 재학중 고시 8회에 합격, 법관 초년 시절부터 동기생 가운데 선두 주자의 길을 달렸다. 소탈하고 과묵하면서도 항상 누구에게나 웃음을 잃지 않는 원만한 성격으로 정평이 나 있다.
대법원 판사를 마지막으로 27년 간의 법관 생활을 마무리 짓던 날, 그는 『법관은 50점짜리 인생』이라는 말을 남겼다.
『법관은 이해가 상충하는 당사자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줘야 하기 때문에 결국 다른 쪽의 원망을 듣게 마련』이라고 했다. 따라서 『승패를 가리는 50점짜리 재판을 통하기보다 이해당사자들이 조금씩 양보하는 100점짜리 화해를 유도해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이다. 『화해 잘 붙이는 법관이 유능한 법관』이라는 얘기다.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과 대한변협 회장을 역임한 李世中(이세중) 변호사는 재야 법조계의 거목이다. 20여 년 동안의 변호사 생활중 1974년 民靑學聯(민청학련)사건 관련 피고인들을 변론하다 구속당한 姜信玉(강신옥) 변호사의 변론을 맡기도 했으며 변협 회장 재직시 「고문신고센터」를 설치, 수사기관에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앞장섰다.
이 두 변호사는 모두 李會昌(이회창) 한나라당 前 총재와 고교-대학-高試 동기이며 절친한 사이다.
53회 洪性宇(홍성우) 변호사는 웬만한 在野 인사 가운데 그의 무료 변론을 받지 않은 사람이 드물 만큼 대표적인 인권 변호사의 한 사람이다. 그는 권위주의 정권 시절 朴炯圭(박형규) 목사, 李敦明(이돈명) 변호사, 李泳禧(이영희) 교수, 白樂晴(백낙청) 교수, 咸世雄(함세웅) 신부, 李富榮(이부영) 의원, 金槿泰(김근태) 의원, 張琪杓(장기표)씨 등 당시 시국관련 피고인들의 무료 변론을 자청했던 대가 센 인물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대표를 지냈다.
『내 재판 받기 싫으면 기피해도 좋다』
문민정부 시절 서울고법 부장판사로 재직중, 재산공개 과정에서 많은 재산을 갖고 있다 하여 구설수에 올랐던 趙胤(조윤) 변호사는 재산공개 직후 법정에서 『제가 언론에 집중 거론되고 있는 조윤입니다. 만약 저의 양심을 의심해 재판을 받기 싫으면 이 법정을 나가시거나 재판부를 기피해도 좋습니다』라는 신상발언을 해서 화제가 됐던 인물이다.
朴正熙(박정희) 대통령 시절, 소신 있는 법조인으로 알려졌던 趙鎭滿(조진만) 대법원장의 차남이자, 金泳三(김영삼) 신민당 총재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 들였던 趙彦(조언) 변호사의 동생이다. 형인 趙彦 변호사는 그의 경기高 3년 선배다.
고시 兩科 합격한 宋鎭禹의 손자 宋相現
54회에는 申鉉武(신현무) 安東壹(안동일) 柳吉善(유길선) 李輔獻(이보헌) 鄭址炯(정지형) 黃周明(황주명) 변호사가 있다.
安東壹 변호사는 4·19 당시 학생운동의 주역들이 모여 결성한 「4월회」 회장을 역임했다. 서울법대 2학년생으로 4·19 혁명에 참여했으며 4·19의 계기가 된 2·28 대구 학생 데모에서부터 4·26 대통령 하야 성명 발표 때까지의 4·19 全과정을 기록, 혁명 직후인 1960년 6월 「기적과 환상」이란 제목의 책자를 출간한 바 있다. 제1회 군법무관 시험에 합격, 법조계에 입문한 그는 1978년부터 변호사 개업을 했다. 그는 朴正熙 대통령 살해범 金載圭(김재규), KAL 858편 폭파범 金賢姬(김현희) 등의 변론을 맡아 유명해졌다.
1959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경기高 55회」는 정계 관계 법조계에 인물 많기로 유명한 期數(기수)다. 「찬란한 55회」라고도 불리는 이들 중에는 사법시험 합격자만 21명에 이른다.
金斗喜(김두희) 前 법무장관, 金有厚(김유후) 前 서울고검장, 文鐘洙(문종수) 前 인천지검장, 宋相現(송상현) 서울법대 교수, 安剛民(안강민) 前 서울지검장, 安文泰(안문태) 前 부산고법원장, 柳在成(유재성) 前 검사장, 李健介(이건개) 前 대전고검장, 張基旭(장기욱) 前 의원, 池昌權(지창권) 前 법무연수원장, 崔信錫(최신석) 前 대검강력부장, 崔永光(최영광) 前 검사장, 韓大鉉(한대현) 헌법재판소 재판관, 玄鴻柱(현홍주) 前 駐美대사 등이 그들이다.
이들이 고등학생이던 시절에는 졸업장을 받지 않고 검정고시를 거쳐 早期(조기) 진학하는 유행이 있었다. 宋相現 교수는 『당시 서울법대 한 학년 정원 300명 중 25%에 달하는 75명을 경기高 출신이 차지했기 때문에 고시 합격자가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회고한다. 이들처럼 동기끼리 법원장과 검사장급 이상을 다수 역임한 예는 찾기 힘들 것이다.
金斗喜 변호사의 경력을 보면 검찰관으로서 이 기록을 깰 사람이 다시 나올 것 같지 않을 만큼 화려하다. 고시 14회에 합격한 그는 서울지검 검사 임관-법무부 검찰 1·2과장-대통령 사정비서관-대검 중수부장-법무부 검찰국장-서울지검장-법무부 차관-대검 차장-검찰총장-법무장관까지 그야말로 검찰의 要職(요직)으로 꼽히는 자리를 차곡차곡, 빠짐없이 역임했다.
그는 경기高 2학년 때 검정고시로 서울법대에 입학한 수재형이다. 才德을 겸비했으며 예리한 판단력과 돌다리도 두드려 보는 신중한 언행과 성격으로 일찌감치 검찰의 재목으로 지목받았던 인물이다.
金有厚 변호사는 외유내강형이면서 재기가 번득이는 전형적인 수재형 검사였다. 법률이론에 정통해 「살아 있는 법학사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서울지검 3차장 시절, 저질 연탄사건 수사와 관련, 全斗煥(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불만을 사 부산지검 2차장으로 전보된 적도 있는 그는 盧泰愚(노태우) 대통령의 사정수석비서관을 지낸 인연으로 盧대통령의 비자금 소명서 작성에 관여했다. 서울지검장과 내무장관을 지낸 金亨根(김형근) 변호사(작고)가 부친이다.
서울법대 학장을 역임한 宋相現(송상현) 교수는 고시 행정과와 사법과를 합격하고 미국 코넬大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서울법대 사법학과 교수로 재직해 왔으며, 1994년에는 한국인으론 처음으로 미국 뉴욕大의 석좌교수로 선정됐다. 古下 宋鎭禹(송진우) 선생의 손자. 조선중기 이후, 정권을 독점한 노론의 領袖 宋時烈(송시열)의 후손이다.
1995년 盧泰愚 대통령 비자금 사건 수사기간인 47일 동안 거의 매일 TV 뉴스에 나와 「검찰 사상 가장 인지도가 높은 검사」로 이름을 날렸던 「영원한 중수부장」 安剛民 변호사는 정권 교체와 함께 화려한 꿈을 접어야 했던 인물이다. 비록 고교-대학 동기들보다 늦게 사법시험을 합격했지만 대검 공안-중수부장에 이어 검찰의 꽃인 서울지검장은 가장 먼저 차지한 대기만성형이자, 司試 9회의 선두 주자였다. 경기中-경기高-서울법대 출신이지만 고향이 부산이라 金泳三 정권 시절에는 사실상 PK로 인정됐고 金大中 정권이 들어서면서는 「李會昌 라인」으로 분류됐기 때문에 고검장 승진 대열에서 탈락됐을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었다.
池昌權 변호사는 검찰內 보기드문 평북 출신으로서 時流(시류)를 타는 공안이나 특수 수사보다 전형적인 형사부 검사로 재직해 왔다. 온화한 성품과 빈틈없이 꼼꼼히 일을 챙기는 업무 처리로 상하간에 신망이 두터운 「선비」였다.
韓大鉉 헌법재판관은 李會昌 한나라당 前 총재의 처남이자, 韓聖壽(한성수) 前 대법관의 장남이며 金弘燁(김홍엽) 변호사가 동서인 법조가족이다.
검사 출신인 玄鴻柱 변호사도 경기고가 자랑하는 才士 중 한 사람이다. 깔끔한 인상과 명석한 두뇌를 갖춘, 분명하고 합리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검사로 중앙정보부에 파견 근무 중, 10·26을 맞아 안기부 제1차장을 지냈다. 그후 민정당 전국구 의원, 민정당 제2사무차장, 법제처장을 거쳤다. 영어 실력도 뛰어나 駐 UN 대사, 駐美대사를 지냈다.
동기생인 金榮一과 權誠의 차이
경기고 56회(졸업)에는 權誠(권성), 金榮一(김영일) 憲裁 재판관, 徐晟(서성) 대법관, 姜哲求(강철구) 광주고법원장, 金永珷(김영무), 金容鈞(김용균), 孫晉坤(손진곤), 宋哉憲(송재헌), 李宰勳(이재훈) 변호사가 있다.
1996년은 12·12와 5·18 사건 재판을 둘러싸고 온 나라가 시끌시끌한 한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해 십수명의 전직 장관과 예비역 장성들이 법정에 끌려나와 온 국민의 따가운 시선을 받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이 「首魁(수괴)」로서 군병력을 동원해 정권을 탈취했던 사건을 단죄하는 자리에서 두 사람의 법관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金榮一 당시 서울 지법 형사 수석부장판사와 權誠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그들이다.
각기 1심과 항소심의 재판장을 맡았던 두 사람은 경기高-서울법대 동기동창으로서 「엄격한 법이론가」 들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재판진행 방식에서는 대조적인 면모를 보여 눈길을 끌었다.
자그마한 키에 다소 차가워 보이는 金재판장은 구속재판 시한을 지키기 위해 변호인측이 요청한 91명의 증인 중 50명을 취소해 가며 재판을 진행했다. 그는 법정에서 全-盧 두 전직 대통령의 자격을 철저히 피고인으로 한정했다. 변호인들이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다가 재판부의 지적을 수십 차례 받기도 했다. 흥분한 피고인들이 언성을 높일 때마다 『법정에서는 누구라도 재판장보다 큰 소리를 낼 수 없다』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힐책했다.
金재판장은 변호인단이 집단 퇴정했을 때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국선 변호인을 선정한 뒤 재판을 속행, 全-盧 피고인에게 각각 사형과 징역 22년 6월이라는 중형을 선고했다. 그는 비자금 사건에서도 돈을 건넨 재벌 회장들에게 이례적으로 실형을 선고하는 엄격함을 보였다.
반면 훤칠한 키에 부드러워 보이는 權재판장은 1심에서 걸러낸 재판 결과를 토대로 비교적 여유 있게 항소심 재판을 진행할 수 있었다. 權재판장은 1심에서 못다한 33명의 증인 신문을 보충했으며 7대 핵심 쟁점에 대한 檢-辯의 법정 토론을 허용하는 여유를 보였다.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하면서도 全피고인의 형을 무기로 감형한 權재판장은 『양형을 가능한 한 낮춰 주려고 했다. 사람 마음이란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감형 결정이 언제였는지 정확히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친절 재판장과 훈계 재판장
그는 또 판결문에 僭越(참월·신하가 임금의 지위를 넘봄), 黨與(당여·한 패거리), 不軌(불궤·모반), 妄動(망동) 등의 한자成語를 섞어 써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두 사람은 법원장을 거쳐 지금은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재직중이다.
美 하버드 로스쿨의 법학박사이기도 한 金永珷(김영무) 변호사는 일찍이 설립한 법무법인 「김&장」을 더욱 대형화, 전문화해 외국 로펌과 맞설 경쟁력 배양을 꾀하고 있다.
육군 법무장교 1기 출신인 金容鈞 변호사(국회의원)는 국방부 검찰부장, 입법회의-국회 전문위원, 방송위원회 위원, 국회사무처 차장, 체육부 차관, 헌법재판소 사무처장 등을 거친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다.
徐晟 대법관은 현재 사법부에서 경기高 출신의 가장 맏형. 명쾌한 법률 판단과 합리적인 재판능력을 갖췄다는 평을 듣고 있다. 司試 1회에 수석 합격, 초임 판사 시절부터 대법관 감으로 꼽혔다. 好, 不好가 뚜렷한 성격에 추진력을 갖췄다는 평이다.
孫晉坤 변호사는 부드러운 성품에 균형잡힌 사고를 갖춰 敵이 없다는 말을 듣는 편이다. 서울법대 3년 때 사시 1회에 합격해 학창시절이나 법조계에서 선두 주자의 자리를 지켰다. 5共 때 全斗煥 대통령의 近親(근친)담당 비서관을 맡은 연유로 한때 어려움을 겪었다. 안기부 1차장 역임.
李宰勳 변호사는 서울지법 부장판사 재직 시절, 美 문화원 방화사건을 맡아 법정소란-분리심리-재판거부-퇴정명령-변호인 총사퇴 등 숱한 파란을 겪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판사는 판결문으로 말한다』는 오랜 불문율을 깨고 장문의 訓戒文(훈계문)을 곁들여 「훈계 판사」란 별명을 얻었다. 지금은 농민법률무료상담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재단법인 국제농업개발원 이사장 직도 겸하고 있다.
57회의 金曉鍾(김효종) 헌재 재판관은 법정에서 사건 당사자에게 재판 진행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는 「친절 재판장」으로 유명했다. 朱光逸(주광일) 변호사(前 서울고검장)는 「면도날」로 불릴 만큼 일처리가 매섭고 깔끔한 것으로 이름났다. 서울大 법학박사로 법학 관련 저서가 있으며 詩作에도 일가견이 있다.
58회에는 朴淙烈(박종열) 광주 지검장, 申明均(신명균)-李建雄(이건웅)-鄭聖哲(정성철) 변호사가 있다.
칭찬에 인색한 판사들도 평가하는 孫智烈 대법관
李建雄 변호사와 申明均 변호사는 고교 재학 시절 반장, 부반장을 맡았거나 공부를 잘하는 동급생들 몇 명과 함께 「새벽」이라는 서클을 만들었다. 林昌烈 경기 지사, 崔東植 고려大 교수(한솔 崔鉉培 선생의 장손), 이홍식 서울공대 교수, 金禹起(김우기) 前 한국코카콜라 부사장, 변길남 예비역 육군 소장, 이종량씨(4·19 희생자) 등이 그 멤버였다. 이들 중 申明均 李建雄 金禹起 셋이 나란히 서울법대에 합격해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李建雄 변호사는 졸업과 동시에 司試 6회에 수석 합격했으며 李一珪 대법원장 시절 비서실장을 지냈다. 이듬해 8회에서는 申明均 변호사가 사법시험 사상 유례가 없는 높은 점수로 수석 합격의 영예를 안았다.
鄭聖哲 변호사는 평소 온화한 성품이지만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정의파로 알려져 있으며 법조계의 마당발로 통한다. 1964년 6·3사태와 이듬해 한일협정비준 반대시위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재야와 제도권의 통합에 다리 역할을 자임했던 그는 金泳三 정부 시절 한때 정무 1차관의 자리에 나가기도 했다.
59회 출신의 崔慶元(최경원) 변호사는 법무부 검찰국장으로 있던 당시 朴相千 장관에 의해 司試 8회 동기 9명 중 가장 먼저 고검장으로 승진하면서 법무차관에 기용됐다. 말을 극히 아끼는 빈틈없는 성격이나 뼈 있는 한마디로 정곡을 찌르곤 한다. 청와대 법률비서관을 두 차례 지냈다. 온화한 성격으로 선후배들의 신망이 두텁다. 검찰이 휘청거리던 시기에 법무장관을 맡아 내부 개혁을 차분히 추진해 주위의 기대를 모았으나 중도 하차, 아쉬움을 남겼다.
61회(1965년 졸업)인 孫智烈(손지열) 대법관은 합리적인 사고와 뛰어난 균형 감각에 원만하고 예의 바른 對人관계로 위아래로부터 두터운 존경과 신망을 모으고 있다.
항용 좀 배우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남의 칭찬에 인색하다. 자기보다 좀 잘났다 싶은 사람을 대하면 어딘가 속이 편치 않다. 판사들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건 판사들 스스로가 하는 말이다. 판사들은 거개가 인생에서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판사들도 孫대법관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자그마한 체구에 달변이 아닌, 아직은 대법관으로서 젊은 나이인데도 그를 대하면 고개가 숙여진다고 한다.
법원행정처에서 孫대법관과 함께 근무한 적이 있는 어느 중견 법관은 『손판사, 손판사 하길래 어떤 사람인가 했더니 과연 남다른 데가 있더라』라는 말로 그의 인품을 평가한다. 재판업무 법원행정을 두루 섭렵했다. 부친 孫東頊(손동욱) 前 대법원 판사에 이은 2代 대법관으로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판사는 칼과 지갑을 가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梁三承 前 대법원장 비서실장은 대전 법조비리 사건의 와중에서 流彈(유탄)을 맞았다. 『판사에게는 칼도 없고 지갑도 없습니다. 단지 공정한 판단만이 있을 뿐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판사는 칼이나 지갑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는 한쪽짜리 글을 남기고 아쉽게 법원을 떠났다.
청렴하기로 이름높던 부친 梁會卿 전 대법관의 뒤를 이을 것으로 법원 안팎의 기대를 모았던 그가 고등학교 후배인 이종기 변호사로부터 대전 법조계 고교 동문들의 회식비 명목으로 100만원을 받았다는 「비위 사실」이 알려지자, 모두들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1993년 현대상선 비자금 유용 사건 재판에서 경제논리를 내세운 鄭周永 회장을 준엄히 꾸짖고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했던 그였다.
부드러운 성품의 「충청도 양반」 검사로 꼽히는 明魯昇 대전고검장, 경기高 출신 현직 판사들의 모임인 一法會 회장을 맡고 있는 李鴻薰 서울고법 부장판사, 부천 權仁淑양 성고문사건 등의 변론을 맡아 활발한 인권 변호를 펼치고 民辯 활동에 적극 참여하다 요절한 趙英來 변호사도 경기高 61회다.
62회의 韓富煥(한부환) 법무차관은 경기高 출신 현직 검사 중 최고참이다. 일 욕심이 많고 다방면에 걸쳐 해박한 데다 분석력이 뛰어나 특수수사-공안-기획 분야에서 골고루 능력을 발휘했다.
12·12와 5·18 사건 수사 때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수사 결과 발표나 이용호 게이트 비호 의혹 사건의 특별감찰본부장으로서 동료 검사들에 대한 수사 등에서 보여 줬듯 악역이 맡겨져도 묵묵히 해내는 뚝심의 소유자로 장래 검찰총장감의 하나로 일찍부터 지목돼 왔다.
63회의 金振煥(김진환) 법무부 검찰국장은 항상 넉넉한 미소를 잃지 않는 신사풍의 검사다. 초임 검사 때와 부장검사 시절 특수부를 경험, 수사검사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고, 서울 북부지청장 시절에는 아이스하키선수 체육특기생 선발 비리사건을 파헤쳐 입시 부정의 쇄신책을 마련하는 데 일조했다. 「음주운전 3진 아웃제」 시행 등 뛰어난 아이디어로 기획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서울대 대학원을 거쳐 독일 프라이부르그 대학에서 법학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다수의 논문과 저서를 펴낸 학구파이기도 하다. 서울법대 재학중에는 校誌 편집위원으로 활약했으며 학내 시위 때 시국선언문을 작성했던 명문장가로서 詩를 쓰고 연극 활동에도 참여한 낭만파다.
民辯 회장을 맡고 있는 宋斗煥 변호사와 청소년보호위원장을 지낸 姜智遠 서울고검검사, 李宇根 서울고법 부장판사, 鄭東旭 서울고검 검사가 동기들이다. 검사출신으로 장인 李洋球 회장의 뒤를 이어 동양그룹을 맡고 있는 玄在賢 회장은 고교 시절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동기들 중에서도 톱클라스의 자리를 지켰던 인물이다.
64회에는 오랜 세월 民辯과 대한변협의 인권위원장 직을 맡아 오고 있는 朴淵徹 변호사, 宋基榮 변호사, 徐相弘 憲裁 사무차장, 최근 丁海昌 변호사(前 법무장관)가 대표로 있는 법무법인 「좋은합동법률사무소」에 합류한 柳濟仁 변호사, 촉망받던 젊은 법관으로 의정부지원장 재직 중 법조비리사건의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난 韓相鎬 변호사가 있다.
지나친 우월감, 엘리트 의식에 빠질 우려
취재중 만난 경기高 출신의 한 중견 변호사는 개인적 소견임을 전제, 『후진 사회라면 법조인이 엘리트일지 모르나 선진사회에서는 건전한 사고를 가진 평균인이면 된다』고 했다. 엘리트 의식과 우월감이 전혀 재판에 도움이 안 된다고도 했다. 『법학은 빵을 위한 학문(Brotwissenschaft)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독일의 법철학자도 있다.
경기고등학교를 가리켜 「인재의 寶庫」 또는 「인재 풀(pool)」이라고 부르는 데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경기高 출신 법조인 중에는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평가하자면 집안 좋고 머리 좋고 인물 좋고 가진 것 많은 사람들도 간간이 눈에 띈다. 『어쩌면 당신은 그다지도 많은 복을 타고 났소』 싶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사람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한편에서 세상 사람들은 우려의 눈길을 보내는 것도 사실이다. 경기高 출신들은 귀족적이라고. 지나친 우월감과 엘리트 의식에 젖어 있다고. 그래서 못 배운 사람,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궁핍을 이해할 만한 아량이 부족할 수도 있다고.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허나 경기高 출신들은 이 말에도 한 번쯤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경기고등학교 출신 법조인 모임인 「경기법조회」의 회원 명부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절로 이 말이 떠오른다. 쟁쟁한 경력의 소유자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기」라면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고등학교였으니 만큼 전국의 수재들이 모여 들었고 법조계로 진출한 사람은 그 중에서도 拔群(발군)의 才士들이었다.
지금은 법조 인구 확산 시책에 따라 매년 1000명이 넘는 합격자를 배출하지만 많아야 수십 명, 적게는 서너 명의 합격자 밖에 나오지 않던 고등고시 사법과나 사법시험 시절, 법조인의 관문을 통과한 이들은 과연 바늘구멍을 통과한 낙타에 견줄 만했다.
이들의 이력서와 프로필을 보면 수석 입학-수석 졸업-수석 합격 등 「首席」이라는 수식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여기다가 「준수한 용모」, 「뛰어난 외국어 실력」, 「좋은 家門(가문)」 등등,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조건이 골고루 열거되고 있어 적어도 세속적으로만 본다면 이들은 갖출 것을 모두 갖춘 完人처럼 보인다.
법조인들은 관료, 기업인, 언론인 등과 더불어 사회를 이끌어 가는 조타수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여타 그룹이 선두에 서서 隊列(대열)을 이끌어 나가는 소임을 맡았다면 법조인들은 그 隊伍(대오)가 흐트러지거나 옆으로 비껴 나가는 일이 없도록 살펴보고 채찍질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숫자 면에서 경기 출신 법조인은 다른 학교에 비할 바가 아니다. 경기법조회 회원 명부에 등재된 인원은 모두 423명. 단연 압도적이다. 이 중 판사가 82명, 검사가 58명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변호사다. 약간 명의 교수와 행정부처 공무원, 기업인이 포함돼 있다.
참고로 다른 고등학교 출신 법조인 숫자를 비교해 보자.
상위직으로 갈수록 比重 무거워
법률신문사가 발행한 「한국 법조인 大觀」을 보면 경북高 출신은 269명. 영남의 수재들이 모여드는 명문고답게 경기고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법조인을 배출했다. 세 번째로는 全北지방의 명문 전주高가 224명의 법조인을 길러냈다. 그 다음으로 서울高 183명, 대전高 174명, 광주일高 168명, 경복高 158명, 부산高 128명, 광주高 106명의 순으로 100명 이상씩의 법조인을 배출했다. 진주高 98명, 경남高 90명, 순천高 89명, 마산高 81명, 용산高 80명, 휘문高 72명, 경동高 68명, 대구 계성高 65명, 중앙高 61명, 청주高 61명, 대구高 61명, 우신高 57명, 경북사대부고 55명, 대구 달성高 55명, 제주 제일高 54명, 중동高 51명, 목포高 50명, 대륜高 50명씩의 사법시험 합격자를 냈다(이상 2000년판 한국법조인大觀 기준).
광주 지역의 경우 광주일고-광주高가 광주서중 및 광주고보 출신들을 망라해 「서광회」라는 친목 모임을 결성하고 있는 바 서광회원 명부에는 법관 47명, 검사 43명, 변호사 144명, 기타 12명, 합계 246명의 회원 명단이 실려 있다.
이러한 출신 고교별 법조인 숫자의 격차는 고교 평준화 이후 크게 완화됐다. 예컨대 전주高나 진주高처럼 평준화에 늦게 참여한 학교의 경우는 나중까지 그 지역의 수재들이 집중된 결과, 소장 법조인층에서 약진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기高 출신들은 숫자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법원과 검찰 내에서 점하는 위치에 있어서 他의 추종을 불허하는 바가 있다.
경기高 출신 법관 82명의 직급별 분포를 보면 대법관 2명, 고등법원장 1명, 지방법원장 1명, 고등법원 부장판사 17명, 지방법원 부장판사 42명, 판사 19명이다. 우리나라 법관 총원 1631명 중 82명이라고 하면 5%로서 그리 놀랄 만한 비율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행정부처로 따진다면 차관급에 해당하는 고등법원 부장판사 81명 중 17명(21%), 지방법원 부장판사 257명 중 42명(16%)이 경기高 출신이다.
특히 高法에서도 핵심인 서울고법의 경우, 부장판사 35명 중 7명이 경기高 출신이다. 고법 부장판사라고 하면 항소심 재판의 재판장이다. 대법원이라는 상급 법원이 있지만, 대부분의 사건은 고등법원에서 시시비비가 갈려지게 된다.
차관급인 고법 부장판사는 20% 차지
과거에는 전체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30~40%가 경기高 출신으로 채워진 시절도 있었으니만치 지금은 좀 改善(?)됐다고 볼 수 있다.
高法 부장은 이변이 없는 한, 법원장으로 승진하는 대기 코스라고 봐도 무방한 것이 법원의 관행이다. 그런 자리를 20% 내외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경기高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고 있는 例다.
現 대법원의 대법관 13명 중 경기高 출신은 2명이다. 이는 출신 지역과 출신 학교의 안배에 따른 결과라고 법조계는 보고 있다. 참고로 現 대법관의 출신 고교별 분포를 보면 경북高 3명, 경기高와 전주高가 각 2명, 서울高·광주일高·대전高·경북사대부고·진주사범 체신高가 각 1명씩이다. 고등법원장의 경우는 경북사대부고 2명, 경기高·서울高·경남高·서울사대부고·익산 남성高가 각 1명씩이다.
경우에 따라서 대법원과의 이견으로 말미암아 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 관계를 빚곤 하는 헌법재판소는 경기高 勢가 눈에 띈다. 재판관 9명 중 4명이 경기高 출신으로서 한 명만 더한다면 과반수를 채울 만한 세력이다.
검찰 쪽도 만만치 않다.
전국의 검사 숫자는 1400여 명. 이 중 경기高 출신이 58명으로 역시 선두를 지키고 있다. 뒤를 경북高 41명, 전주高 32명, 서울高-광주일高-진주高 각각 26명, 대전高 25명, 경복高 23명의 순으로 따르고 있다.
「검찰의 꽃」이라고 불리는 핵심 간부인 검사장급 이상 검사 42명 중 경기 출신은 9명으로 역시 20%를 상회한다. 경북高 4명, 경복高·대전高·부산高·목포高 각 3명씩, 서울高와 익산 남성高가 각 2명씩 분포돼 있다.
경기高 출신의 한 검찰 간부는 『경기高는 원래 全國區(전국구)다. 각 지방에서 상경하는 수재들이 많았다』는 말로 경기高의 寡占(과점) 현상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를 경계했다.
검찰 내에는 現 정권 들어 목포高 출신을 필두로 한 호남 지역 고교 출신의 약진이 눈에 띈다. 서울 소재 고교 출신들이라도 본디 호남 지역을 고향으로 둔 인물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김&장」엔 210여 명의 변호사
최근 변호사 업계는 법률시장의 개방에 대비, 몸집을 불려 가는 추세에 있다. 대형화를 통한 전문화를 꾀해 외국 변호사들과의 경쟁에서 이겨내자는 뜻일 것이다.
3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법무법인 「김&장」은 국내 최초로 본격적인 로펌 형태를 갖춘 「변호사 회사」이다. 국내 변호사 160여 명, 미국 변호사 50여 명, 기타 변리사 공인회계사 세무사 등의 프로페셔널을 합쳐 250명 이상의 인재가 몸담고 있다.
具本英(구본영) 前 OECD 대사 같은 전직 경제 관료이자, 외교관도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金永珷(김영무)-李載厚(이재후)-玄鴻柱(현홍주)-장수길 변호사가 대표로 있는 「김&장」에는 韓相鎬(한상호), 丁啓聲(정계성) 등 중견 변호사들을 비롯 다수의 경기高 출신이 主力부대를 형성하고 있다.
또다른 법무법인 「충정」에는 黃周明(황주명·경기高 54회), 徐廷信(부산高·前 대검 차장), 張容國(경기高 67회) 변호사가 대표로 있다.
외국 변호사 8명을 포함, 모두 51명의 변호사와 공인회계사 1명, 변리사 4명의 인적 구성을 갖고 있는 「충정」은 최근 사법연수원장을 지낸 申明均(신명균) 변호사와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를 마지막으로 법원을 떠난 河光鎬(하광호), 宋政勳(송정훈) 변호사를 영입했다. 이들 세 명은 모두 경기高 선후배 간이다.
「세종」과 「열린합동」이 합친 법무법인 「세종」에는 120명의 국내, 미국, 고문 변호사와 공인회계사 4명, 변리사 9명이 활동 중인데, 대법관을 지낸 吳成煥(오성환·경기高), 李建雄(이건웅·경기高), 黃相顯(황상현·서울高), 辛永茂(신영무·서울高) 변호사와 최근 합류한 金慶漢(경북高·前 법무차관) 변호사가 대표다.
경기高 출신 법조인들 개개인의 면모를 일별해 보자.
경기高 49회(1953년 졸업)인 원로 법조인 吳成煥(오성환) 변호사는 전형적인 수재형 법관이었다. 서울법대 3학년 재학중 고시 8회에 합격, 법관 초년 시절부터 동기생 가운데 선두 주자의 길을 달렸다. 소탈하고 과묵하면서도 항상 누구에게나 웃음을 잃지 않는 원만한 성격으로 정평이 나 있다.
대법원 판사를 마지막으로 27년 간의 법관 생활을 마무리 짓던 날, 그는 『법관은 50점짜리 인생』이라는 말을 남겼다.
『법관은 이해가 상충하는 당사자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줘야 하기 때문에 결국 다른 쪽의 원망을 듣게 마련』이라고 했다. 따라서 『승패를 가리는 50점짜리 재판을 통하기보다 이해당사자들이 조금씩 양보하는 100점짜리 화해를 유도해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이다. 『화해 잘 붙이는 법관이 유능한 법관』이라는 얘기다.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과 대한변협 회장을 역임한 李世中(이세중) 변호사는 재야 법조계의 거목이다. 20여 년 동안의 변호사 생활중 1974년 民靑學聯(민청학련)사건 관련 피고인들을 변론하다 구속당한 姜信玉(강신옥) 변호사의 변론을 맡기도 했으며 변협 회장 재직시 「고문신고센터」를 설치, 수사기관에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앞장섰다.
이 두 변호사는 모두 李會昌(이회창) 한나라당 前 총재와 고교-대학-高試 동기이며 절친한 사이다.
53회 洪性宇(홍성우) 변호사는 웬만한 在野 인사 가운데 그의 무료 변론을 받지 않은 사람이 드물 만큼 대표적인 인권 변호사의 한 사람이다. 그는 권위주의 정권 시절 朴炯圭(박형규) 목사, 李敦明(이돈명) 변호사, 李泳禧(이영희) 교수, 白樂晴(백낙청) 교수, 咸世雄(함세웅) 신부, 李富榮(이부영) 의원, 金槿泰(김근태) 의원, 張琪杓(장기표)씨 등 당시 시국관련 피고인들의 무료 변론을 자청했던 대가 센 인물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대표를 지냈다.
『내 재판 받기 싫으면 기피해도 좋다』
문민정부 시절 서울고법 부장판사로 재직중, 재산공개 과정에서 많은 재산을 갖고 있다 하여 구설수에 올랐던 趙胤(조윤) 변호사는 재산공개 직후 법정에서 『제가 언론에 집중 거론되고 있는 조윤입니다. 만약 저의 양심을 의심해 재판을 받기 싫으면 이 법정을 나가시거나 재판부를 기피해도 좋습니다』라는 신상발언을 해서 화제가 됐던 인물이다.
朴正熙(박정희) 대통령 시절, 소신 있는 법조인으로 알려졌던 趙鎭滿(조진만) 대법원장의 차남이자, 金泳三(김영삼) 신민당 총재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 들였던 趙彦(조언) 변호사의 동생이다. 형인 趙彦 변호사는 그의 경기高 3년 선배다.
고시 兩科 합격한 宋鎭禹의 손자 宋相現
54회에는 申鉉武(신현무) 安東壹(안동일) 柳吉善(유길선) 李輔獻(이보헌) 鄭址炯(정지형) 黃周明(황주명) 변호사가 있다.
安東壹 변호사는 4·19 당시 학생운동의 주역들이 모여 결성한 「4월회」 회장을 역임했다. 서울법대 2학년생으로 4·19 혁명에 참여했으며 4·19의 계기가 된 2·28 대구 학생 데모에서부터 4·26 대통령 하야 성명 발표 때까지의 4·19 全과정을 기록, 혁명 직후인 1960년 6월 「기적과 환상」이란 제목의 책자를 출간한 바 있다. 제1회 군법무관 시험에 합격, 법조계에 입문한 그는 1978년부터 변호사 개업을 했다. 그는 朴正熙 대통령 살해범 金載圭(김재규), KAL 858편 폭파범 金賢姬(김현희) 등의 변론을 맡아 유명해졌다.
1959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경기高 55회」는 정계 관계 법조계에 인물 많기로 유명한 期數(기수)다. 「찬란한 55회」라고도 불리는 이들 중에는 사법시험 합격자만 21명에 이른다.
金斗喜(김두희) 前 법무장관, 金有厚(김유후) 前 서울고검장, 文鐘洙(문종수) 前 인천지검장, 宋相現(송상현) 서울법대 교수, 安剛民(안강민) 前 서울지검장, 安文泰(안문태) 前 부산고법원장, 柳在成(유재성) 前 검사장, 李健介(이건개) 前 대전고검장, 張基旭(장기욱) 前 의원, 池昌權(지창권) 前 법무연수원장, 崔信錫(최신석) 前 대검강력부장, 崔永光(최영광) 前 검사장, 韓大鉉(한대현) 헌법재판소 재판관, 玄鴻柱(현홍주) 前 駐美대사 등이 그들이다.
이들이 고등학생이던 시절에는 졸업장을 받지 않고 검정고시를 거쳐 早期(조기) 진학하는 유행이 있었다. 宋相現 교수는 『당시 서울법대 한 학년 정원 300명 중 25%에 달하는 75명을 경기高 출신이 차지했기 때문에 고시 합격자가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회고한다. 이들처럼 동기끼리 법원장과 검사장급 이상을 다수 역임한 예는 찾기 힘들 것이다.
金斗喜 변호사의 경력을 보면 검찰관으로서 이 기록을 깰 사람이 다시 나올 것 같지 않을 만큼 화려하다. 고시 14회에 합격한 그는 서울지검 검사 임관-법무부 검찰 1·2과장-대통령 사정비서관-대검 중수부장-법무부 검찰국장-서울지검장-법무부 차관-대검 차장-검찰총장-법무장관까지 그야말로 검찰의 要職(요직)으로 꼽히는 자리를 차곡차곡, 빠짐없이 역임했다.
그는 경기高 2학년 때 검정고시로 서울법대에 입학한 수재형이다. 才德을 겸비했으며 예리한 판단력과 돌다리도 두드려 보는 신중한 언행과 성격으로 일찌감치 검찰의 재목으로 지목받았던 인물이다.
金有厚 변호사는 외유내강형이면서 재기가 번득이는 전형적인 수재형 검사였다. 법률이론에 정통해 「살아 있는 법학사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서울지검 3차장 시절, 저질 연탄사건 수사와 관련, 全斗煥(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불만을 사 부산지검 2차장으로 전보된 적도 있는 그는 盧泰愚(노태우) 대통령의 사정수석비서관을 지낸 인연으로 盧대통령의 비자금 소명서 작성에 관여했다. 서울지검장과 내무장관을 지낸 金亨根(김형근) 변호사(작고)가 부친이다.
서울법대 학장을 역임한 宋相現(송상현) 교수는 고시 행정과와 사법과를 합격하고 미국 코넬大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서울법대 사법학과 교수로 재직해 왔으며, 1994년에는 한국인으론 처음으로 미국 뉴욕大의 석좌교수로 선정됐다. 古下 宋鎭禹(송진우) 선생의 손자. 조선중기 이후, 정권을 독점한 노론의 領袖 宋時烈(송시열)의 후손이다.
1995년 盧泰愚 대통령 비자금 사건 수사기간인 47일 동안 거의 매일 TV 뉴스에 나와 「검찰 사상 가장 인지도가 높은 검사」로 이름을 날렸던 「영원한 중수부장」 安剛民 변호사는 정권 교체와 함께 화려한 꿈을 접어야 했던 인물이다. 비록 고교-대학 동기들보다 늦게 사법시험을 합격했지만 대검 공안-중수부장에 이어 검찰의 꽃인 서울지검장은 가장 먼저 차지한 대기만성형이자, 司試 9회의 선두 주자였다. 경기中-경기高-서울법대 출신이지만 고향이 부산이라 金泳三 정권 시절에는 사실상 PK로 인정됐고 金大中 정권이 들어서면서는 「李會昌 라인」으로 분류됐기 때문에 고검장 승진 대열에서 탈락됐을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었다.
池昌權 변호사는 검찰內 보기드문 평북 출신으로서 時流(시류)를 타는 공안이나 특수 수사보다 전형적인 형사부 검사로 재직해 왔다. 온화한 성품과 빈틈없이 꼼꼼히 일을 챙기는 업무 처리로 상하간에 신망이 두터운 「선비」였다.
韓大鉉 헌법재판관은 李會昌 한나라당 前 총재의 처남이자, 韓聖壽(한성수) 前 대법관의 장남이며 金弘燁(김홍엽) 변호사가 동서인 법조가족이다.
검사 출신인 玄鴻柱 변호사도 경기고가 자랑하는 才士 중 한 사람이다. 깔끔한 인상과 명석한 두뇌를 갖춘, 분명하고 합리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검사로 중앙정보부에 파견 근무 중, 10·26을 맞아 안기부 제1차장을 지냈다. 그후 민정당 전국구 의원, 민정당 제2사무차장, 법제처장을 거쳤다. 영어 실력도 뛰어나 駐 UN 대사, 駐美대사를 지냈다.
동기생인 金榮一과 權誠의 차이
경기고 56회(졸업)에는 權誠(권성), 金榮一(김영일) 憲裁 재판관, 徐晟(서성) 대법관, 姜哲求(강철구) 광주고법원장, 金永珷(김영무), 金容鈞(김용균), 孫晉坤(손진곤), 宋哉憲(송재헌), 李宰勳(이재훈) 변호사가 있다.
1996년은 12·12와 5·18 사건 재판을 둘러싸고 온 나라가 시끌시끌한 한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해 십수명의 전직 장관과 예비역 장성들이 법정에 끌려나와 온 국민의 따가운 시선을 받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이 「首魁(수괴)」로서 군병력을 동원해 정권을 탈취했던 사건을 단죄하는 자리에서 두 사람의 법관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金榮一 당시 서울 지법 형사 수석부장판사와 權誠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그들이다.
각기 1심과 항소심의 재판장을 맡았던 두 사람은 경기高-서울법대 동기동창으로서 「엄격한 법이론가」 들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재판진행 방식에서는 대조적인 면모를 보여 눈길을 끌었다.
자그마한 키에 다소 차가워 보이는 金재판장은 구속재판 시한을 지키기 위해 변호인측이 요청한 91명의 증인 중 50명을 취소해 가며 재판을 진행했다. 그는 법정에서 全-盧 두 전직 대통령의 자격을 철저히 피고인으로 한정했다. 변호인들이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다가 재판부의 지적을 수십 차례 받기도 했다. 흥분한 피고인들이 언성을 높일 때마다 『법정에서는 누구라도 재판장보다 큰 소리를 낼 수 없다』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힐책했다.
金재판장은 변호인단이 집단 퇴정했을 때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국선 변호인을 선정한 뒤 재판을 속행, 全-盧 피고인에게 각각 사형과 징역 22년 6월이라는 중형을 선고했다. 그는 비자금 사건에서도 돈을 건넨 재벌 회장들에게 이례적으로 실형을 선고하는 엄격함을 보였다.
반면 훤칠한 키에 부드러워 보이는 權재판장은 1심에서 걸러낸 재판 결과를 토대로 비교적 여유 있게 항소심 재판을 진행할 수 있었다. 權재판장은 1심에서 못다한 33명의 증인 신문을 보충했으며 7대 핵심 쟁점에 대한 檢-辯의 법정 토론을 허용하는 여유를 보였다.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하면서도 全피고인의 형을 무기로 감형한 權재판장은 『양형을 가능한 한 낮춰 주려고 했다. 사람 마음이란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감형 결정이 언제였는지 정확히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친절 재판장과 훈계 재판장
그는 또 판결문에 僭越(참월·신하가 임금의 지위를 넘봄), 黨與(당여·한 패거리), 不軌(불궤·모반), 妄動(망동) 등의 한자成語를 섞어 써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두 사람은 법원장을 거쳐 지금은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재직중이다.
美 하버드 로스쿨의 법학박사이기도 한 金永珷(김영무) 변호사는 일찍이 설립한 법무법인 「김&장」을 더욱 대형화, 전문화해 외국 로펌과 맞설 경쟁력 배양을 꾀하고 있다.
육군 법무장교 1기 출신인 金容鈞 변호사(국회의원)는 국방부 검찰부장, 입법회의-국회 전문위원, 방송위원회 위원, 국회사무처 차장, 체육부 차관, 헌법재판소 사무처장 등을 거친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다.
徐晟 대법관은 현재 사법부에서 경기高 출신의 가장 맏형. 명쾌한 법률 판단과 합리적인 재판능력을 갖췄다는 평을 듣고 있다. 司試 1회에 수석 합격, 초임 판사 시절부터 대법관 감으로 꼽혔다. 好, 不好가 뚜렷한 성격에 추진력을 갖췄다는 평이다.
孫晉坤 변호사는 부드러운 성품에 균형잡힌 사고를 갖춰 敵이 없다는 말을 듣는 편이다. 서울법대 3년 때 사시 1회에 합격해 학창시절이나 법조계에서 선두 주자의 자리를 지켰다. 5共 때 全斗煥 대통령의 近親(근친)담당 비서관을 맡은 연유로 한때 어려움을 겪었다. 안기부 1차장 역임.
李宰勳 변호사는 서울지법 부장판사 재직 시절, 美 문화원 방화사건을 맡아 법정소란-분리심리-재판거부-퇴정명령-변호인 총사퇴 등 숱한 파란을 겪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판사는 판결문으로 말한다』는 오랜 불문율을 깨고 장문의 訓戒文(훈계문)을 곁들여 「훈계 판사」란 별명을 얻었다. 지금은 농민법률무료상담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재단법인 국제농업개발원 이사장 직도 겸하고 있다.
57회의 金曉鍾(김효종) 헌재 재판관은 법정에서 사건 당사자에게 재판 진행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는 「친절 재판장」으로 유명했다. 朱光逸(주광일) 변호사(前 서울고검장)는 「면도날」로 불릴 만큼 일처리가 매섭고 깔끔한 것으로 이름났다. 서울大 법학박사로 법학 관련 저서가 있으며 詩作에도 일가견이 있다.
58회에는 朴淙烈(박종열) 광주 지검장, 申明均(신명균)-李建雄(이건웅)-鄭聖哲(정성철) 변호사가 있다.
칭찬에 인색한 판사들도 평가하는 孫智烈 대법관
李建雄 변호사와 申明均 변호사는 고교 재학 시절 반장, 부반장을 맡았거나 공부를 잘하는 동급생들 몇 명과 함께 「새벽」이라는 서클을 만들었다. 林昌烈 경기 지사, 崔東植 고려大 교수(한솔 崔鉉培 선생의 장손), 이홍식 서울공대 교수, 金禹起(김우기) 前 한국코카콜라 부사장, 변길남 예비역 육군 소장, 이종량씨(4·19 희생자) 등이 그 멤버였다. 이들 중 申明均 李建雄 金禹起 셋이 나란히 서울법대에 합격해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李建雄 변호사는 졸업과 동시에 司試 6회에 수석 합격했으며 李一珪 대법원장 시절 비서실장을 지냈다. 이듬해 8회에서는 申明均 변호사가 사법시험 사상 유례가 없는 높은 점수로 수석 합격의 영예를 안았다.
鄭聖哲 변호사는 평소 온화한 성품이지만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정의파로 알려져 있으며 법조계의 마당발로 통한다. 1964년 6·3사태와 이듬해 한일협정비준 반대시위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재야와 제도권의 통합에 다리 역할을 자임했던 그는 金泳三 정부 시절 한때 정무 1차관의 자리에 나가기도 했다.
59회 출신의 崔慶元(최경원) 변호사는 법무부 검찰국장으로 있던 당시 朴相千 장관에 의해 司試 8회 동기 9명 중 가장 먼저 고검장으로 승진하면서 법무차관에 기용됐다. 말을 극히 아끼는 빈틈없는 성격이나 뼈 있는 한마디로 정곡을 찌르곤 한다. 청와대 법률비서관을 두 차례 지냈다. 온화한 성격으로 선후배들의 신망이 두텁다. 검찰이 휘청거리던 시기에 법무장관을 맡아 내부 개혁을 차분히 추진해 주위의 기대를 모았으나 중도 하차, 아쉬움을 남겼다.
61회(1965년 졸업)인 孫智烈(손지열) 대법관은 합리적인 사고와 뛰어난 균형 감각에 원만하고 예의 바른 對人관계로 위아래로부터 두터운 존경과 신망을 모으고 있다.
항용 좀 배우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남의 칭찬에 인색하다. 자기보다 좀 잘났다 싶은 사람을 대하면 어딘가 속이 편치 않다. 판사들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건 판사들 스스로가 하는 말이다. 판사들은 거개가 인생에서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판사들도 孫대법관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자그마한 체구에 달변이 아닌, 아직은 대법관으로서 젊은 나이인데도 그를 대하면 고개가 숙여진다고 한다.
법원행정처에서 孫대법관과 함께 근무한 적이 있는 어느 중견 법관은 『손판사, 손판사 하길래 어떤 사람인가 했더니 과연 남다른 데가 있더라』라는 말로 그의 인품을 평가한다. 재판업무 법원행정을 두루 섭렵했다. 부친 孫東頊(손동욱) 前 대법원 판사에 이은 2代 대법관으로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판사는 칼과 지갑을 가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梁三承 前 대법원장 비서실장은 대전 법조비리 사건의 와중에서 流彈(유탄)을 맞았다. 『판사에게는 칼도 없고 지갑도 없습니다. 단지 공정한 판단만이 있을 뿐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판사는 칼이나 지갑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는 한쪽짜리 글을 남기고 아쉽게 법원을 떠났다.
청렴하기로 이름높던 부친 梁會卿 전 대법관의 뒤를 이을 것으로 법원 안팎의 기대를 모았던 그가 고등학교 후배인 이종기 변호사로부터 대전 법조계 고교 동문들의 회식비 명목으로 100만원을 받았다는 「비위 사실」이 알려지자, 모두들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1993년 현대상선 비자금 유용 사건 재판에서 경제논리를 내세운 鄭周永 회장을 준엄히 꾸짖고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했던 그였다.
부드러운 성품의 「충청도 양반」 검사로 꼽히는 明魯昇 대전고검장, 경기高 출신 현직 판사들의 모임인 一法會 회장을 맡고 있는 李鴻薰 서울고법 부장판사, 부천 權仁淑양 성고문사건 등의 변론을 맡아 활발한 인권 변호를 펼치고 民辯 활동에 적극 참여하다 요절한 趙英來 변호사도 경기高 61회다.
62회의 韓富煥(한부환) 법무차관은 경기高 출신 현직 검사 중 최고참이다. 일 욕심이 많고 다방면에 걸쳐 해박한 데다 분석력이 뛰어나 특수수사-공안-기획 분야에서 골고루 능력을 발휘했다.
12·12와 5·18 사건 수사 때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수사 결과 발표나 이용호 게이트 비호 의혹 사건의 특별감찰본부장으로서 동료 검사들에 대한 수사 등에서 보여 줬듯 악역이 맡겨져도 묵묵히 해내는 뚝심의 소유자로 장래 검찰총장감의 하나로 일찍부터 지목돼 왔다.
63회의 金振煥(김진환) 법무부 검찰국장은 항상 넉넉한 미소를 잃지 않는 신사풍의 검사다. 초임 검사 때와 부장검사 시절 특수부를 경험, 수사검사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고, 서울 북부지청장 시절에는 아이스하키선수 체육특기생 선발 비리사건을 파헤쳐 입시 부정의 쇄신책을 마련하는 데 일조했다. 「음주운전 3진 아웃제」 시행 등 뛰어난 아이디어로 기획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서울대 대학원을 거쳐 독일 프라이부르그 대학에서 법학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다수의 논문과 저서를 펴낸 학구파이기도 하다. 서울법대 재학중에는 校誌 편집위원으로 활약했으며 학내 시위 때 시국선언문을 작성했던 명문장가로서 詩를 쓰고 연극 활동에도 참여한 낭만파다.
民辯 회장을 맡고 있는 宋斗煥 변호사와 청소년보호위원장을 지낸 姜智遠 서울고검검사, 李宇根 서울고법 부장판사, 鄭東旭 서울고검 검사가 동기들이다. 검사출신으로 장인 李洋球 회장의 뒤를 이어 동양그룹을 맡고 있는 玄在賢 회장은 고교 시절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동기들 중에서도 톱클라스의 자리를 지켰던 인물이다.
64회에는 오랜 세월 民辯과 대한변협의 인권위원장 직을 맡아 오고 있는 朴淵徹 변호사, 宋基榮 변호사, 徐相弘 憲裁 사무차장, 최근 丁海昌 변호사(前 법무장관)가 대표로 있는 법무법인 「좋은합동법률사무소」에 합류한 柳濟仁 변호사, 촉망받던 젊은 법관으로 의정부지원장 재직 중 법조비리사건의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난 韓相鎬 변호사가 있다.
지나친 우월감, 엘리트 의식에 빠질 우려
취재중 만난 경기高 출신의 한 중견 변호사는 개인적 소견임을 전제, 『후진 사회라면 법조인이 엘리트일지 모르나 선진사회에서는 건전한 사고를 가진 평균인이면 된다』고 했다. 엘리트 의식과 우월감이 전혀 재판에 도움이 안 된다고도 했다. 『법학은 빵을 위한 학문(Brotwissenschaft)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독일의 법철학자도 있다.
경기고등학교를 가리켜 「인재의 寶庫」 또는 「인재 풀(pool)」이라고 부르는 데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경기高 출신 법조인 중에는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평가하자면 집안 좋고 머리 좋고 인물 좋고 가진 것 많은 사람들도 간간이 눈에 띈다. 『어쩌면 당신은 그다지도 많은 복을 타고 났소』 싶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사람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한편에서 세상 사람들은 우려의 눈길을 보내는 것도 사실이다. 경기高 출신들은 귀족적이라고. 지나친 우월감과 엘리트 의식에 젖어 있다고. 그래서 못 배운 사람,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궁핍을 이해할 만한 아량이 부족할 수도 있다고.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허나 경기高 출신들은 이 말에도 한 번쯤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