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암센터 추진 경과
▲1989년 12월 정부, 국립암센터 건립계획 수립
▲1991년 9월 국립암센터 건립지 매입
▲1992년 12월 국립암센터 병원동 착공
▲1999년 2월 국립암센터법 제정
▲6월 국립암센터 운영주체 특수법인화 확정
▲7월 국립암센터 준공
▲2000년 1월 국립암센터 공포
▲3월 국립암센터 원장에 박재갑 교수 임명
▲10월 국립암센터 시험 개원
▲2001년 6월 정식 개원.
朴 在 甲 국립암센터 원장 주요 경력
▲1948년 충북 청주 출생 ▲1967년 경기고 졸업 ▲1973년 서울의대 졸업 ▲1978년 일반외과 전문의 ▲1981년 서울대병원 전임강사 ▲1989년 대한암학회 학술위원장 ▲1993년 아시아 대장·항문학회 사무총장 ▲1996년 대장·항문학회 이사장 ▲1999년 국립암센터 준비본부장 ▲서울대병원 일반외과 교수, 서울의대 암연구소장 역임 ▲세계 대장·항문외과학회 지역 부회장, 미국 암학회 국제위원. 국제 학술지에 74편, 국내 학술지에 182편의 논문 게재. 1993년 대한소화기학회 학술상, 1997년 미국 대장외과학회 학술상 수상.
▲1989년 12월 정부, 국립암센터 건립계획 수립
▲1991년 9월 국립암센터 건립지 매입
▲1992년 12월 국립암센터 병원동 착공
▲1999년 2월 국립암센터법 제정
▲6월 국립암센터 운영주체 특수법인화 확정
▲7월 국립암센터 준공
▲2000년 1월 국립암센터 공포
▲3월 국립암센터 원장에 박재갑 교수 임명
▲10월 국립암센터 시험 개원
▲2001년 6월 정식 개원.
朴 在 甲 국립암센터 원장 주요 경력
▲1948년 충북 청주 출생 ▲1967년 경기고 졸업 ▲1973년 서울의대 졸업 ▲1978년 일반외과 전문의 ▲1981년 서울대병원 전임강사 ▲1989년 대한암학회 학술위원장 ▲1993년 아시아 대장·항문학회 사무총장 ▲1996년 대장·항문학회 이사장 ▲1999년 국립암센터 준비본부장 ▲서울대병원 일반외과 교수, 서울의대 암연구소장 역임 ▲세계 대장·항문외과학회 지역 부회장, 미국 암학회 국제위원. 국제 학술지에 74편, 국내 학술지에 182편의 논문 게재. 1993년 대한소화기학회 학술상, 1997년 미국 대장외과학회 학술상 수상.
대장암 수술실에서
『삑-삑-삑-』
환자의 맥박을 나타내는 스크린의 점이 파란 물결 모양의 軌蹟(궤적)을 그리면서 규칙적인 전자음을 냈다. 새하얗게 밝은 조명, 하얀 실내, 거즈를 집는 집게 소리가 들릴 정도의 고요함이 딴세상에 온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7월30일 오전 11시20분쯤,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있는 국립암센터 4층 대장암 수술실에 朴在甲(박재갑·53) 원장을 따라 들어갔다. 마스크를 뚫고 진한 소독약 냄새가 들어왔다. 녹색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朴원장을 맞았다.
『준비됐지』
3명의 의사와 3명의 간호사들은 완전 切開해 둔 환자의 뱃속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피를 닦아냈다. 붉게 물든 거즈들이 연이어 환자의 뱃속에서 나왔다. 하얀 기름이 얇게 낀 분홍빛 내장과 창자들은 숨결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했다.
마취醫는 인공호흡기, 혈압측정기 등 생명 보조 장치를 체크했다.
40代 남자 환자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마취에 들어간 시간은 오전 9시15분. 의료진은 두 시간 동안, 體毛(체모)를 제거하고, 피부를 소독하고, 배를 가르는 수술 준비작업을 마쳤다.
朴원장은 곧바로 손을 환자의 뱃속에 깊이 넣어, 癌(암)이 번진 대장을 끄집어 냈다. 그는 후배 의사들에게 암덩이가 번진 대장을 보여 줬다.
『암 조직이 CT촬영대로 항문에서 8㎝ 이상 떨어져 있구만, 정말 다행이야. 항문에서 3~4㎝ 정도 떨어져 있었으면 항문을 살리기가 어려웠을 텐데…』
이제 결단의 순간. 손가락을 항문에 넣어 하는 觸珍(촉진), 대장 내시경, CT촬영을 통해 그동안 머릿속으로만 그려온 암의 실체를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執刀醫는 항문을 살려둘 건지, 암에 감염된 직장을 얼마나 잘라낼 건지 빨리 결정해야 한다. 이걸 판단하는 게 대장암 수술의 핵심이라고 한다.
수술이 끝난 후 朴원장은 『의사들이 잘 아는 사람,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이들을 수술하면서 腸器를 조금이라도 더 살려두려다가 합병증이 발생하는 경우를 「VIP증후군」으로 부른다』며 『의사는 어떤 순간에도 냉정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암덩어리를 살펴보고, 수술실 벽에 쭉 걸린 환자의 CT필름을 훑어본 朴원장은 아무런 망설임없이 지시를 내렸다.
『자, 시작하지』
먼저 스태이플러(Stapler)라는 수술 도구로 항문에 연결된 대장 쪽을 집고, 항문에서 8㎝쯤 떨어진 부분을 가위로 잘랐다. 그리고 떨어져 나온 대장을 꺼내 암이 퍼져 있는 부분을 중심으로 30㎝쯤 잘라냈다. 대장암 수술만 3000회를 넘긴 大家의 손놀림은 가벼웠다.
철제 접시에 옮겨진 병든 大腸을 조직병리 담당 여의사가 가위로 안이 보이도록 절개했다. 잘라낸 대장의 중간 부분에 하얀 암 조직이 직경 7~8㎝ 크기로 뭉쳐져 있었고, 그 주변 조직은 검붉은 색깔이었다.
朴원장은 『조직검사를 하면 3~4일쯤 후에 암 조직이 임파선으로 침범했나 확인된다』며 『암이 임파선으로 많이 번지지 않았다면, 完治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암 조직을 눈으로 확인한 朴원장은 接合시켜야 할 대장 양쪽 부위의 이물질을 전기 칼로 제거하고, 실과 바늘로 한 뜸 한 뜸 꿰맸다. 그가 손을 움직이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의사들은 환자의 장기를 손으로 잡아 공간을 확보했다. 간호사들은 朴원장의 이마에 밴 땀방울을 수시로 닦아냈다.
우리 기술 없으면 外國의 노예
수술 기구, 장기에 임시로 삽입할 튜브 등을 주고받는 수술 팀의 호흡은 환상적이었다. 눈빛만으로 수술은 진행됐다.
수술 장면을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다가서자 한 간호사가 팔꿈치로 기자를 밀어냈다. 대장 봉합을 끝내는 데 걸린 시간은 10여분. 마무리 작업을 하면서 그는 이런 얘기를 했다.
『이 실도 수입한 겁니다. 위생용 재료 빼곤 다 외국 거예요. 중요한 수술장비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물건에 로열티를 내고 있어요. 우리 기술을 개발 안 하면 외국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봉합을 끝내고 갈색 소독약을 항문 쪽에서 집어 넣어 이 액체가 꿰맨 대장 부위로 새나오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朴원장은 긴 집게로 바늘을 잡고, 봉합한 대장이 터지지 않도록 다시 실로 연결시켰다. 몸 아래 깊숙한 곳에 위치한 대장에 집게로 바느질을 하는 게 무척 힘들어 보였지만, 그의 손은 한 치 오차없이 움직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오전 11시47분. 朴원장이 마스크를 벗고 한숨을 돌리자, 후배 의사들이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곤 환자의 뱃 속에 몇 가지 튜브를 박고 약물처리를 한 뒤, 배를 봉합하기 시작했다. 이런 작업은 한 시간 이상 계속됐다.
朴원장이 27분 동안의 시술로 암덩어리를 잘라낸 환자는 경남 출신의 남자(45).
이 환자는 2개월 전 항문에서 피가 나 동네의원을 찾았다. 동네의원에서는 「內痔疾(내치질)」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치질 약을 바르고, 동네 한의원에서 針 치료를 병행했다. 증세는 심해지기만 했다. 한 달쯤 뒤 가까운 대학병원에서 腸 내시경 진찰을 받으려 했다. 그런데 대장 안의 혹이 커서 대장 안으로 내시경 기구가 들어가지 않았다.
7월 초 서울 모 대학병원에서 CT촬영을 한 결과, 대장암 3기 판정이 나왔다. 그리고 이날 대장암 수술을 받은 것이다. 그는 직장생활 잘하다가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3기 암 선고를 받았다.
오늘 수술을 받은 이 환자는 열흘 정도 입원치료를 한 후 퇴원하게 된다. 입원 비용은 총 250만원 가량, 본인 부담금은 150만원쯤 된다. 그는 퇴원하고나서도 6개월 정도 병원을 오가며 抗癌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가 5년 이후까지 살아 남아 있을 가능성은 60% 안팎. 그는 다시 암이 재발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살아가야 한다.
朴원장은 탈의실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으면서, 이런 얘기를 했다.
『이 환자가 대장암을 초기에 발견했더라면, 장 內視鏡 수술로 간단히 암을 잘라낼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럴 경우는 完治率이 90% 이상입니다. 肝癌도 암덩이의 지름이 2~3㎝ 정도면, 수술로 완치됩니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 5만명이 암으로 죽는데, 이들 대부분이 손을 쓰기 어려운 진행암으로 발견됩니다. 암을 早期에 찾아내고, 암 치료의 質을 높이려고 국립암센터를 세운 겁니다. 미국보다 60년(1937년 설립), 일본보다 40년(1962년 설립)이 늦었습니다』
왜 그가 기자를 만나자마자 느닷없이 수술실로 끌고 들어가 끔찍한 대장암 수술 현장을 지켜보게 했는지 짐작이 갔다.
『어느 날 속이 아파 병원에 갔더니, 말기 癌이더라』는 얘기가 우리 주변에선 낯설지가 않다. 한국에서는 40, 50대 성인 사망자 4명 중 1명이 암으로 사망한다. 사망 원인 1위가 암이다.
日本에선 초기 발견이 65%, 한국은 15%
2000년 10월 통계청이 발표한 「사망 원인 통계 결과」를 보자.
1999년 사망자 24만6500명 가운데 사망 원인은 뇌혈관 질환이 살아 있는 인구 10만명당 72.9명으로 1위, 심장 질환이 39.1명으로 2위, 교통사고가 26.3명으로 3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24.0명으로 4위를 차지한 위암, 22.1명으로 5위를 차지한 폐암, 20.7명으로 8위를 차지한 간암 사망자를 더하면, 모두 66.8명으로 암 사망자가 전체 사망 원인의 2위가 된다. 여기에 췌장암(5.4명), 식도암(3.0명), 유방암(2.4명), 자궁경부암(2.9명), 방광암(1.3명)을 포함시키면 암은 명실상부한 사망 원인 1위다.
의사의 정확한 진단이 포함되지 않은「肝 질환 사망」(인구 10만명당 23.5명)까지 고려하면,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암으로 쓰러지고 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암이 10분에 한 명꼴로 한국인들의 생명을 앗아가지만, 우리 의료체계는 암에 대해 無방비 상태다. 일례로 일본의 胃癌 환자 가운데 65%가 초기 단계에서 발견되는 반면, 우리나라 胃癌 환자는 15%만 초기 단계에서 발견된다. 이유는 하나 국가 차원의 조기 암 검진 사업이 부진하기 때문이다.
2000년 10월 부분 가동을 시작, 지난 6월 정식 출범한 국립암센터는 「癌과의 전쟁」을 지휘할 야전사령부다. 당초 500병상으로 시작할 예정이었던 암센터의 암병원은 현재 200병상만 운영되고 있다. 500병상이 완전 가동될 때 직원 정원을 770명으로 잡고 있지만, 현재 인원은 300명에 불과하다. 부속병원 院長 예정자인 미국 MD 앤더슨 병원의 이진수 교수는 오는 9월 귀국한다.
출발이 이렇게 부진한 이유는 부족한 豫算 때문이다. 올해 국립암센터에 배정된 연구 예산은 11개 분야 40억원, 운영 예산은 1060억원이다. 대장암 수술을 끝낸 朴在甲 원장을 암센터 뒤편 별관 3층의 한 회의실에서 만났다.
두 평 정도 되는 원장실은 그의 책상 하나만으로 꽉 차 방문객이 앉을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홍보실 옆에 있는 빈 회의실을 이용했다. 狹小(협소)한 원장실을 보면서 「이분이 예산 안 주는 정부 당국자들을 향해 示威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癌은 하루하루를 전쟁 치르듯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兵家之常事(병가지상사)다. 한국 최고의 암 전문가를 만나니, 평소 암에 대해 궁금했던 걸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묻는 30대 후반의 기자나, 대답하는 50대 초반의 암 전문가나 암으로 죽은 사람이 왜 이렇게 주변에 많은지….
―대학 동창 하나가 2년 전 대장암으로 죽었습니다. 서울대 병원에서 「대장암 末期」를 선고받고, 수술을 앞두고 서울대병원에서 뛰쳐나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기도원에서 숨졌습니다. 친구들이 수술을 받으라고 하자, 이 친구는 『평생 똥주머니 차고 살기 싫다. 수술한다고 몇 년 더 산다고 보장되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품위 있게 죽고 싶다』고 하더군요. 이 친구가 잘한 겁니까, 잘못한 겁니까.
『정말 잘못한 거죠. 20년 전 서울의대 전임강사 시절 저희 큰어머니의 위암 수술을 했습니다. 淸州에 사시던 분인데, 아버님이 「서울대 병원 의사인 네가 수술을 맡아라」고 해서 제가 執刀를 했습니다. 배를 열어 보니까 위암덩어리가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크고 膵臟(췌장)으로 암이 轉移돼 있었습니다. 위암은 잘라내고, 췌장 쪽의 암은 잘라내기가 어려워 전기 칼로 지졌습니다. 수술을 끝내고 사촌 형님한테 「큰어머니는 앞으로 6개월을 넘기기 어렵겠다」고 솔직하게 얘기했습니다. 큰어머니가 지금까지 80세를 넘겨 살고 계십니다』
「조기 검진」만이 살 길
―그런 일이 종종 있나요.
『그럼요. 한 환자는 수술해도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판단돼서, 제가 방사선 치료와 항암제 투여만 했습니다. 벌써 돌아가셨어야 할 양반이 지금 8년째 살아 계십니다. 그분이 종종 찾아와서 「선생님 덕분에 살았다」고 인사를 하는데, 나는 미안해 죽겠어요』
―그러면 의사가 「앞으로 3개월, 6개월」이라고 얘기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癌이 한 장기를 완전히 파괴시키고, 근처 장기에까지 심각하게 轉移됐으면, 1년 못 넘길 거라고 판단하는 거죠. 암세포가 인체에서 자라나 초기에 발견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5~6년쯤 됩니다. 그런 상태가 3~4년 더 지속되면 암이 온몸으로 퍼져 죽는 거예요. 의사들은 경험과 통계를 바탕으로 얘기하는 거지만, 다 맞을 수는 없죠』
朴원장은 자신이 수술한 대장암 환자 1532명을 대상으로 집계한 통계자료를 하나 보여줬다. 수술 환자 가운데 초기 암 환자 216명의 수술 후 5년 이상 생존율은 91.1%, 암 2기 환자 478명의 5년 생존율은 77.9%, 임파선까지 암이 번진 3기 암환자 448명의 생존율은 57.1%, 암이 간과 폐로까지 번진 4기 환자의 5년 생존율은 18.9%였다.
대장암이 간과 폐로까지 번진 말기 암환자라도 수술하면 5년 이상 살 수 있는 확률이 20%에 가깝다. 초기에 발견하면, 대부분이 5년 이상 살 수 있다는 얘기다. 늦게 발견할수록 생존 가능성은 急減한다. 그가 『조기 검진, 조기 검진』을 입에 달고 사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의사들이 蘇生이 어려운 말기 암환자들 삶의 질을 고려하기보다 수술해서 배를 열어, 암을 제거하는 데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수술 좋아하는 의사가 있겠어요. 물론 수술이 생명 延長에 도움이 안 되지만 권하는 경우도 있죠. 대장암 말기가 되면 살 썩는 냄새로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주위 사람들 情을 다 끊어놓죠. 피고름 나고 굉장히 아픕니다. 생존 기간이 6개월 1년밖에 안 되더라도, 냄새 안 나고 피고름 안 나게 해주려고 수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환자가 수술을 해달라고 해도 안 합니다. 뱃속에 암이 퍼져 腹水가 찼지만, 암을 떼내도 삶의 질이 높아지지 않으면, 의사는 「우리의 한계를 벗어났다」고 얘기하죠』
―지난해 조선일보 동료 기자 세 명이 췌장암, 대장암, 위암으로 숨졌습니다. 매년 정기검진 때 胃腸 조영술을 하고, CT촬영을 했는데 癌을 조기에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정기검진 시스템을 바꿔야 합니다. 몸무게·키 재고, 시력 측정하는 형식적인 검진은 곤란합니다. 血中의 불필요한 수치 를 나열할 게 아니라, 위암·간암·대장암 같이 삶의 질에 큰 영향을 주는 몇 가지를 골라 집중적으로 점검하는 방식이 돼야 합니다』
직장인의 암예방 守則
―작은병원에서는 誤診도 많은 것 아닌가요.
『대장 내시경을 할 때 에스결장 윗부분의 암은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위 내시경을 하고도 암 부위를 못 찾아내는 일도 있고요. 의사의 오랜 임상경험과 좋은 기계가 어우러져야, 암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동네병원에서 찍은 CT에는 肝癌이 안 잡혔는데, 우리 병원의 새 CT로 잡은 일이 있습니다. 의료의 質을 높여야 하는데 이게 醫療酬價와 곧바로 연결됩니다. 우리 의료보험은 수가를 낮게 해서 모든 국민에게 혜택을 주자는 방향입니다. 의료의 質은 희생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30, 40대 직장인은 어떻게 암을 예방할 수 있습니까.
『우선 위 내시경은 40세를 넘으면 2년에 한 번은 해야 합니다. 장 내시경도 50세를 넘기면 5년마다 한 번 해야 하고요. 집안에 암으로 돌아간 분이 있으면, 더 젊은 나이부터 그쪽에 신경을 써야죠. 췌장암, 대장암, 위암은 이웃사촌입니다. 췌장과 위, 대장을 같이 봐야죠』
―다들 암 걱정은 하지만, 거기에 맞게 실천을 못 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 국립암센터가 해야 할 일입니다. 암 예방 권고안을 만드는 게 그 첫 걸음입니다. 자궁암, 대장암, 유방암에 대해서는 대처 방안을 이미 권고안으로 내놓았습니다. 종합 건강검진을 어떤 방식으로 하는 게 경제적이고, 효과적인지 국립암센터 「예방 검진센터」 지침을 만들고 있습니다』
―숨진 조선일보 기자 세 명은 의사들이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해 수술도 못 받고 다들 6개월 안에 숨졌습니다. 자기 몸이 그렇게 썩는 걸 죽기 직전까지 느끼지 못했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사람 몸은 기기묘묘하게 신비스럽게 잘 만들어진 겁니다. 아주 엄청난 안전장치가 있고, 이게 없으면 저게 하는 대체 기능이 많고,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기계입니다. 탄복할 정도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잘 만드신 겁니다』
―종교를 갖고 계십니까.
『없습니다. 조상 제사 잘 받드는 엄격한 儒敎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그렇지만 집 사람은 천주교 신자고,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입니다』
―神이 있는 것 같습니까.
『神은 있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이든, 이슬람의 하나님이든, 우주와 인간을 만든 神은 있다고 믿습니다』
―30, 40대 암환자의 사회복귀가 어렵지는 않습니까.
『제 처남이 지금부터 15년 전에 조기 위암 수술을 받았는데 지금 대기업 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초기암은 한두 달 病暇내면 충분히 치료를 끝낼 수 있습니다』
―얼마 전 KBS에서 암세포에 색전술 치료를 하면서 식이요법을 한 암환자 10여 명 가운데 절반 가까이에서 암세포가 줄어드는 등 효과가 있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식이요법으로 암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한 메시지였습니다.
『언론이 의학 관련 보도는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들만 신중하게 보도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주사 한 방으로 간암이 낫는다」, 「상황버섯이 암에 특효다」라는 보도들이 나오면, 암환자들이 휘청합니다. 잘 치료받던 환자가 언론 보도에 휘둘려 제대로 된 치료를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암으로 죽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공포에 질려 있지만, 발견된 암환자의 50%는 완치됩니다』
―말기 암환자들은 담당 의사보다는 동료 환자들끼리 정보교환을 더 활발히 한다고 합니다. 무얼 먹으면 좋다, 어떤 민간요법이 좋다고.
『그게 그분들만 탓할 일은 아닙니다. 말기암일 때는 무슨 음식을 먹는 게 좋고, 어떤 치료를 하는 게 좋은지 알려 줘야 하는데, 국가 차원에서 그런 노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환자들이 답답하니까 그러는 거예요. 앞으로 암치료 기술 개발뿐 아니라, 식이요법, 투병 요령에 관한 정보도 암환자들에게 활발하게 제공할 생각입니다』
암 공포 너무 지나치다
―종교적인 치유에 매달리는 암환자가 의외로 많습니다.
『제 처남의 부인이 고등학교 때 백혈병을 앓고 다 나아서 결혼하고 아들을 둘 뒀습니다. 목에 다시 암이 생겨 결국 죽었습니다. 처남댁의 오빠가 검찰 최고위층 가운데 한 분이었습니다. 가까운 내가 암 전문가인데도 처남댁은 按手기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수술하고 항암제를 썼으면 생명을 연장했을 텐데 안수기도받다가 다 죽을 무렵 병원으로 왔습니다. 그런 곳들 가운데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곳도 있습니다. 억제하거나 처벌하는 법조항이 없어서 더욱 성행하는 것 같습니다』
―암치료에서는 韓方의 도전도 거셉니다. 「양의학은 對症요법일 뿐이다. 암덩어리를 잘라내는 것은 암치료의 근본이 아니다. 체력을 길러 암을 이겨야 한다」는 얘기에 많은 환자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한의학의 효능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저도 과학기술부에서 연구비를 받아, 한약제 가운데 항암제를 찾는 연구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통 한의학과 한약제에서 항암제를 찾는 일은 피눈물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과학적으로 약효를 검증받아야 하고요. 중국과 일본이 지금까지 엄청나게 연구하고 그 결과를 자료로 축적해 놓았습니다. 전통 의학은 우리만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말기 암환자들이 왜 종교적인 치유나 민간 처방에 의존하게 됩니까.
『수술과 항암제로 암을 다 고칠 수는 없습니다. 의사가 「우리 능력의 한계를 벗어났다」고 선언한 상황에서,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다는 말이 나오면 환자 가족들은 귀가 솔깃해집니다. 죽음을 앞둔 인간은 나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자식된 도리로, 부인된 도리로, 꺼져가는 생명에 뭔가 해주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죠』
―30, 40대에 말기암 선고를 받으면 어떤 마음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30, 40대면 다 家庭이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절망적이겠어요. 저는 환자에게 상황을 사실대로 다 얘기합니다. 「얼마 더 살지는 나도 잘 모른다. 대장암은 온몸으로 암이 번져도 2,3년은 산다」고. 지금 30, 40대의 평균 수명은 80세 이상이 될 겁니다. 인생을 남보다 40여 년 빨리 접는 셈이죠. 환자들에게 「내 생을 마감할 시간을 알게 되지 않았느냐.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인생을 정리하라」고 충고해 줍니다』
『미국 수가의 20분의 1로 의료의 質 보장 못 해요』
―받아들입니까.
『암에 걸렸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죠. 하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각 분야에서 성취한 분들은 의외로 담담하더군요. 열심히 회고록 쓰는 분도 있고, 재벌같은 경우는 재산분배를 하고. 30, 40대는 억울하죠. 정부 예산을 담당하던 40대 공무원 환자가 있었습니다. 이분이 「암으로 안 죽으면, 앞으로 암 예산을 대폭 늘려서 나처럼 억울하게 죽는 이들이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을 하더군요. 기도원 갔다 가 얼마 안돼 돌아가시더라고요』
―한 사람이 암에 걸릴 경우, 완치하는데까지 드는 비용은 암별로 얼마나 됩니까.
『우리 암센터에서 암환자 비용 분석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병세가 나타나서 수술할 때까지 얼마나 돈이 들고, 직장은 얼마나 빠졌는지 조사하고 있습니다. 1~2년 정도 지나면 암환자의 경제부담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한 통계가 나올 겁니다. 지금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암환자의 총 의료 비용이 나와야 정확한 의료재정 추계가 가능합니다. 이것도 국립 암센터가 해야 할 일입니다』
―제가 아는 현역 국회의원의 부인이 의사인데 올해 초 서울대 병원에서 『肺癌(폐암)으로 의심된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서울대 병원에서는 『진전되는 걸 지켜보자. 두 달 후에 오라』고 했다가, 다시 두 달 후에 보자고 했답니다. 이 부부가 미국 텍사스 의대의 MD 앤더슨 병원에 갔습니다. 앤더슨 병원에서는 곧바로 폐를 절개하고 조직검사를 해 폐암이 아니라는 판정을 내렸습니다. 진찰료로 4만 달러를 냈다고 합니다. 왜 서울대 병원은 이렇게 적극적으로 못 하는 겁니까.
『의사의 權威가 강력하면 수술해서 조직검사해 볼 수 있겠죠. 지금 의사의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VIP를 수술까지 해서 조직검사를 했는데 암이 아니라는 결과가 나오면 얼마나 부담이 되겠어요. 그러니까 기다려 보자고 한 거죠. 자꾸 미국 최고 병원하고 우리를 비교하는데 진료 여건이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이 부분에서 朴원장은 상당히 흥분하는 모습이었다).
우리 병원이 내년 연말쯤 500병상 체제를 갖추게 되면, 정식 직원 800명, 용역직원 700명을 포함해 직원이 1500명쯤 됩니다. MD 앤더슨은 病床이 470개인데 직원이 연구인력을 포함해 1만명이 넘습니다. 똑같은 大腸 내시경을 해도, 酬價가 우리의 20배입니다. 대장 내시경하는 장비는 거기나 우리나 똑같습니다. 게다가 MD 앤더슨은 전체 예산의 10% 정도를 기부금으로 충당합니다. 미국의 20분의 1 酬價를 받으면서 의료의 질을 높일 수가 있겠습니까. 9월부터 부속병원장을 맡을 이진수 선생을 MD 앤더슨 병원에서 영입했는데, 제대로 연구하고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걱정이 태산입니다』
국립암센터는 「세계 超一流 암연구기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연구시설과 연구 전문인력을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 臨床실험용 병원만 갖춘 절름발이 암 연구기관인 셈이다. 미국 국립암센터는 200병상을 운영하면서, 무료 진료를 하고 있다. 여비와 용돈까지 대준다. 대신 환자들은 암연구에 필요한 이들을 골라서 받는다.
「암병원들의 병원」이 돼야 할 국립암센터는 서울대 암병원, 연세대 암병원과 체제에서는 지금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니다. 그래도 국립암센터 탄생의 기구한 사연을 아는 이들은 『지금 이 정도나마 모양을 갖추고, 出帆한 게 다행』이라고 얘기한다.
無 vision, 無決定, 12년 표류
국립암센터 건립의 端初를 연 사람은 盧泰愚 전 대통령. 朴원장의 설명이다.
『1989년 우리 국민의 사망 원인 1위가 癌이라는 보도를 접한 盧대통령이 「대책을 세우라」고 보사부에 지시를 했습니다. 그때 담당과장이 저를 찾아와 어떡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저는 서울의대 교수였고, 암학회의 총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제가 1985년부터 2년 간 미국 국립암연구소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 「국립암센터를 지어야 한다」고 강력히 얘기했죠』
보사부는 1990년 1월 청와대 업무보고 때 『1992년까지 일산에 500병상 규모의 국립암센터를 짓겠다』고 보고했다. 암센터는 국가 차원의 암 예방검진, 암 연구사업을 맡는다는 방향 설정도 그때 이미 이뤄졌다. 朴원장은 처음부터 암센터 건립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92년 국립암센터 건물 기공식이 있었지만, 그후 9년 동안 국립암센터 건립은 표류했다.우선 국립암센터의 운영주체를 놓고 논란이 시작됐다. 공무원이 운영하는 국가기관으로 하자, 특수법인으로 하자, 민간에 위탁하자는 세 가지 아이디어가 나왔다.
보사부 쪽은 『국가기관으로 해서는 국립 암센터가 2流 병원밖에 안 된다. 정부가 예산을 지원하고 경영은 독립시키자』로 기울어져 있었다. 논쟁은 암센터 병원건물이 완공된 1999년까지 이어졌다.
환자를 치료해서 이익을 낼 수 있는 암병원 건립 문제는 그래도 간단했다.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어야 할 「암연구 센터」 건립은 더 난항이었다. 金泳三 정부 시절 충북 오송에 과학단지를 조성하기로 결정하면서, 국립암센터의 연구시설은 오송으로 보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일산 국립암센터 안에 연구시설을 둘 것이냐, 오송으로 옮길 것이냐, 임상과 연구를 병행해야 할 의사들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論爭이 또 한편에서 벌어졌다. 그 와중에 국립암센터는 연구시설도 없는 畸形的인 기관으로 출발하게 됐다.
보사부, 보건복지부에서 국립암센터 건립에 관여해온 崔善政 前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립암센터 건물을 짓는 데 7년(1992년 12월~1999년 7월)이나 걸린 것은 눈에 띄는 외형적인 사업에만 신경을 쓰고, 미래에 대비하는 연구사업을 외면한 정책 집행자들의 短見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암 관리나 암 연구사업은 收益이 나는 일이 아닙니다. 굉장한 투자가 필요합니다. 국립암센터는 암 병원 하나 더 짓자고 시작한 게 아닙니다. 연구소가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임상 실험을 위한 병원만 서고, 연구센터는 지금 건물공사를 하고 있으니 딱한 일이죠. 돈줄을 쥔 부서에서는 「국립암센터는 돈이 엄청나게 들어갈 사업」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국립암센터 건립예산 1800억원을 지원하는 데 10년 가까이 걸린 겁니다』
지루한 부처 간 힘 겨루기, 소모적인 논쟁 끝에 국립암센터는 「特殊法人」으로 법적지위를 획득했고, 2000년 3월 서울의대 암연구소장이던 朴在甲 서울의대 교수가 국립암센터 원장에 임명됐다.
朴在甲의 熱情
朴원장은 국립암센터 건립 아이디어를 냈고, 결국 12년의 産苦 끝에 국립암센터를 탄생시킨 산파로 꼽힌다.
崔 전 장관의 얘기다.
『朴원장의 熱情이 없었더라면, 국립암센터 설립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이 대개 추진력과 설득력이 떨어지는데, 朴원장은 달랐습니다. 의사로서 대성해 일가를 이룬 분인데도, 암센터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선 정부 공무원들을 붙들고 집요하게 설득했습니다. 국립암센터를 특수법인으로 만들고, 예산을 따낸 게 朴원장입니다. 미국 일류 암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 의사들을 그들의 애국심에 호소해, 국립암센터에 불러모은 일도 그가 아니었으면 어려웠을 겁니다』
朴원장과 함께 하는 후배 의사들은 朴원장을 『어떤 일이건 목표를 정하면 무모하게 보일 정도로 물고 늘어지는 「불독」』이라고 했다. 1985년부터 2년 간 미국 국립암연구소에서 일할 당시, 매일 도시락 두 개를 싸들고 출근해 밤새워 연구한 일은 지금까지도 서울대 후배의사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유전성 암에 대한 유전자 진단체계를 국내 최초로 확립한 업적은 이런 돌파력이 있어서 가능했다. 그는 1991년 서울대 병원에 유전성 대장암 등록소, 1993년 유전성 종양등록소, 1997년 암 유전자 클리닉을 개설했다.
유전성 암에 대한 그의 관심은 유전자 염기서열 분석을 통한 유전성 암 유전자 발견, DNA 칩을 이용한 유전성 암 진단법 발견으로 이어지고 있다.
―유전성 암을 찾아내는 작업은 어느 정도 진척이 되고 있습니까.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인간의 유전자 지도를 발견한 후 세계의 생명공학 연구소, 의약업계에서 암 치료제 연구사업이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인간의 염기서열이 30억 쌍 있는데 사람마다 1000개당 1개씩 다른 게 나옵니다. 그게 사람마다 차이를 만듭니다. 이 차이에 따라 쌍꺼풀이 지고, 코가 크고 작고 달라지죠. 유전성 암과 염기서열과의 관계를 규명하는 게 핫 이슈입니다』
―DNA 칩이 어떤 도움이 되나요.
『유전성 암 판정을 위한 염기서열 분석에 몇 달씩 걸립니다. DNA 칩을 이용하면, 이 시간을 하루이틀로 단축시킬 수도 있습니다. 제가 최근 갑상선 부신피질 등의 내분비암을 찾아내는 DNA 칩을 개발해 미국의 과학잡지에 보냈습니다.
올해 중에 받아들여지면 내년쯤 언론에 보도자료를 낼 수 있을 겁니다. 가족성 암 발견을 위한 DNA 칩 개발이 우리의 핵심 프로젝트 중 하나입니다. 칩들이 개발되면 全국민이 내가 어떤 암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는지 값싸고 손쉽게 알아낼 수 있게 될 겁니다』
『유전성 대장암은 자식의 半에 유전』
―내가 어떤 유전적 암 인자를 갖고 있나 판정하는 데 지금은 얼마나 시간이 걸립니까.
『지금도 자기 가족의 암 家系圖를 그려보면, 내가 무슨 암에 위험한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가족 중 살아 있는 암환자가 있으면 임파구에서 DNA를 뽑아, 암의 원인이 될 만한 유전자 돌연변이를 확인합니다. 유전성 대장암의 경우 자식 중 半에 유전이 됩니다. 유전된 아이가 누군지, 유전자 요인을 가진 사람은 몇 살 때부터 이런 조치를 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유전자 돌연변이를 찾는 데 시간이 걸리니까, 그걸 DNA 정보를 찾아내는 칩으로 하는 거죠』
―가족들 중에 암 발생자가 많아, 미리 찾아와서 확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아주 많습니다』
―간암도 잘 걸리는 집안이 있던데, 간암도 유전입니까.
『간암은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거죠. 유전은 아닙니다. 독한 바이러스가 부모로 부터 자식에게 감염돼 간암을 일으키는 경우는 흔합니다』
―혈액암 치료약 그리벡에 이어 대장암 치료약이 나왔다는 비즈니스 위크 보도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약개발은 어디까지 와 있습니까.
『암 치료제가 계속 나와 환자들에게 큰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값비싼 약을 써야 하는 환자들을 보면 처절합니다. 백혈병 치료제 그리벡은 노바티스가 부르는 게 값입니다. 우리 연구소도 암 치료제 개발을 위해 몇 가지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문제는 연구비입니다』
―올해 연구 예산이 40억원인데, 어느 정도 연구비가 책정돼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미국 국립암연구소의 연구비가 40억 달러쯤 됩니다. 내부에서 20~30%쯤 쓰고 나머지는 전국의 연구기관에 배정합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투자하니까, 그리벡이 나오는 겁니다. 그리벡 개발비가 1조원이 넘습니다. 많은 제약회사가 있지만 연구원들은 美 국립암연구소에서 돈받아 연구하고 큰 사람들입니다.
BT, BT(Bio-Technology, 생명공학)하는데 BT의 꽃은 암 연구입니다. 미국 국립보건원과 국립암연구소가 미국의 생명공학을 세계 최고로 올려놓은 겁니다. 우리가 미국의 20분의 1경제 규모니까, 국립암센터에 2000억원은 줘야죠. 우리가 그 중 400~500억원을 쓰고, 나머지는 대학과 연구소에서 쓰게 해야죠』
―정부에서 내년도 연구예산을 삭감하겠다고 해서, 암센터 분들의 불만이 대단하더군요.
『암센터 연구비로 복지부가 90억원을 올렸는데, 기획예산처에서 잘려 25억원으로 책정돼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밖에서 프로젝트를 따다가 연구를 하라고 합니다. 火星에 무인탐사선 보내라고 임무를 줘놓고, 연구비 끌어다 쓰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항암제도 만들고, 어떤 게 좋은 항암제고 암치료 방법인가 연구해야 하는데, 돈이 있어야죠. 정말 이런 식으로 예산을 지원해서는 국립암센터를 만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담배가 암 사망 원인의 30% 차지』
朴원장은 지난해 3월 국립암센터 원장으로 부임한 직후,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제2의 국방장관으로 일하겠다』, 『10년 내 암 치료율을 30%에서 50%로 올리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표정에선 자신감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1년 만에 만난 그는 많이 지쳐 있었다.
그는 『내가 정부 부처 과장들을 붙잡고 「살려달라」며 애원하고 다니는 걸 알면, 암센터 사람들 자존심이 너무 상할 것』이라고도 했다. 朴원장은 『고위 공직자인 내가 이렇게 정부를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면서도, 쉽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국립암센터는 암과의 전쟁에서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기관인데, 전쟁하려면 무기와 탄약을 줘야지, 너희가 벌어서 하라니? 우리나라 醫療酬價가 연구비 뺄 수 있는 수가가 아닙니다. 병원 운영하기도 빠듯해요. 그리고 국립암센터가 병원과 대학에 연구비 주면서, 이런 연구해라 저런 연구해라 主管을 해야지, 암 전쟁의 사령탑이 남한테 연구비 동냥을 하러 다녀서는 일을 못 합니다』
―왜 연구비 지급을 줄이겠다는 겁니까.
『병원 세워 주었으니 자립해서 네가 연구비 벌어서 쓰라는 논리입니다. 다른 기관들은 빚이 많은데, 국립암센터는 빚이 하나도 없으니 자급자족할 수 있다는 거예요』
―다른 암병원과 국립암센터를 동일한 선에 놓고 얘기를 하는 거군요.
『그렇죠. 저는 예산을 못 주겠다면, 담배에 건강증진기금 부담금을 200원 올려 1조원을 걷고, 그중에 2000억원은 암 예방과 연구에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담배가 암 사망 원인의 30%를 차지합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이 내는 돈은 그 사람들 생명 연장과 암 정복에 써야 하는 것 아닙니까』
―국립암센터를 찾는 사람들의 치료비용은 서울대 병원 등과 비교할 때 어떻습니까.
『국립암센터가 약간 쌉니다. 돈을 많이 번다는 건 환자들에게 많은 酬價행위를 하는 거죠. 우리는 병상당 1억~1억5000만원을 법니다. 너희가 벌어 너희가 쓰라면 우리도 열심히 수가행위를 할 수밖에 없죠』
―불필요한 의료행위를 더 하게 된다는 겁니까.
『의사로서 그런 얘기는 할 수 없고,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경우 하는 쪽으로 가겠죠. 국립암센터가 국내 암 병원과 경쟁해서는 안 되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암 연구기관이 돼야죠. 우리가 세계적인 수준을 갖춘 후 외국의 위암, 간암, 자궁암 환자를 국립암센터로 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국립암센터 병원은 위암, 간암, 폐암, 대장암, 유방암, 자궁암 등 발생빈도가 높은 6大 암센터, 그밖에 뇌암 등을 다루는 특수 암센터가 설치돼 있다. 암센터를 지원할 화학요법 센터, 진료지원센터, 암 예방검진센터 등 3개 센터가 있다.
현재 일하고 있는 전문의는 71명. 파트별로 7~8명이 일하고 있다.
암 치료의 3大 산맥은 외과적 수술, 항암치료, 방사선 치료다.
외과수술 부분에서는 朴在甲 원장, 항암치료 부분에는 폐암 항암제 치료의 전문가인 MD 앤더슨 흉부종양내과 교수 출신인 李振洙(이진수) 박사, 방사선 치료는 美 미네소타 대학 방사선 종양학과 교수 출신인 曺瓘鎬(조관호) 박사 같은 大家들이 포진해 있다.
朴원장과 함께 국립암센터 病棟을 돌아봤다. 링거액 주사바늘을 팔뚝에 꼽고, 아니면 이동 침대에 실려 병원 이곳 저곳을 오가는 환자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선지 병원 안이 다른 대학병원들보다 조용했다.
환자는 가만 있고, 의사들이 찾아다녀
일반 대학병원에서는 암 수술을 마친 환자들이 항암제 투여나 방사선 치료를 위해 이 병동 저 병동을 옮겨다니는 일이 잦다. 국립암센터는 이런 관행을 바꿔, 전공 의사들이 환자들을 병실로 찾아다니는 協診(협진)체계를 갖췄다.
환자의 입원실이나 간호사 대기실 어디에도 환자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환자들의 사생활을 지켜 주려는 작은 배려들이라고 했다. 朴원장은 병실을 돌아보며 의사들과 간호사들에게 『의사, 간호사라도 웃어야지, 지금 이 병동에서 웃을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농담을 던졌다.
―암센터 의사들이 무척 젊어보입니다. 전문의 71명 중 선택진료를 할 수 있는 10년 이상 경력자가 16명밖에 안 되는데, 너무 젊은 것 아닙니까.
『30代 중반에서 40代 중반까지를 중점적으로 선발했습니다. 능력이 뛰어나 조금만 노력하면 세계적인 大家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모아놓은 겁니다. 암센터 내의 모든 회의와 연구발표회는 영어로 합니다. 저 같은 50代 의사들은 자리를 옮기기가 힘들죠. 또 스카우트하면서 다른 의료기관에 큰 피해를 줄 수도 있고요. 이진수 병원장이 경기고 서울대 1년 후배인데 정말 힘든 결단을 내렸습니다. 수입이 미국의 절반도 채 안 됩니다』
―1년 전에 최고의 인력과 시설을 모으겠다고 포부를 밝히셨는데.
『한 센터가 연구작업을 강력하게 밀고가려면, 하나의 大家 밑에 신진기예들을 붙여 주는 방식이 제일 좋습니다. 한 분야의 大家들을 한 암센터에 둘씩 놓기는 곤란합니다. 이 정도 컴비네이션이면 現 상황에서는 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170병상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당초 계획했던 500병상 체계는 언제쯤 갖춰지게 됩니까.
『내년 연말은 돼야 할 것 같습니다. 의사도 문제지만 간호사를 뽑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50~60명이 지원해도 뽑을 사람이 한두 명밖에 안 됩니다. 우수 인력을 계속 충원할 계획입니다. 500병상 체제를 갖추는 게 시급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기준을 낮출 수 없는 고민이 있습니다』
―서울대에서 레지던트를 마치고 오는 30代 초반의 전문의들은 월급 수준은.
『그런 분들을 전임의라고 하는데 보수기준을 서울대학 수준에 맞추고 있습니다. 어차피 정부의 보조를 받는 기관이니까 더 많이 줄 수는 없고, 월급을 많이 안 주면 人材를 구할 수 없고…』
―액수가 얼마나 됩니까.
『연봉계약인데, 전임의 1년차가 3500만원, 2년차가 4000만원 정도입니다』
―10년씩 공부를 마치고, 군대를 갔다온 전임의가 3500만원이면 보수가 낮은 편 아닙니까.
『좀더 많은 급여를 줄 수 있도록 하려고 국립암센터를 특수법인으로 만든 건데, 그래도 국립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전임의 이상 교수급은 서울대와 보수가 같습니다』
―다들 후배들인데 공부하는 열의나 사기는 어떻습니까.
『국립암센터에 국가 차원의 암 관리와 암 치료 연구라는 뚜렷한 비전이 있으니까 좋아합니다. 병원 내에서 하는 모든 연구발표회를 영어로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힘들긴 하지만 새로운 시스템에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시작도 못한 5大암 조기검진
―보건복지부는 全국민을 상대로 5大 암 조기검진을 실시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국립암센터의 가장 중요한 사업 중 하나가 암 조기 검진 사업 확대 아닙니까.
『우리나라는 3, 4期까지 암이 진행된 상태에서 병원을 찾는 환자가 훨씬 많습니다. 평상시 건강할 때 1~2년 주기로 암검사를 하는 게 아니라 암으로 인해 어떤 증상이 나타나야 병원을 찾기 때문이죠. 불편함을 느끼는 상태에서는 이미 완치가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조기검진 사업의 첫단계는 암 예방 권고안이 나와야 합니다. 6大 암 중 위암, 간암, 대장암, 유방암 등 4大 암은 조기 발견하면 완치됩니다. 몇 살부터 어떤 간격으로 암 검진을 해야 하는지 권고안이 없었습니다. 최근 학계와 국립암센터가 자궁암, 대장암, 유방암 예방검진 권고안을 만들었습니다. 다른 암들도 권고안을 만들어야 합니다』
―권고안을 만들어 홍보한 다음에는 뭘해야 합니까.
『그 다음으로는 시범사업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권고안이 지금의 의료체계 안에서 적용가능한 건지, 장비와 인력 문제는 없는지 현장에서 확인해야죠. 개인적으로는 의약분업이 의약품 오남용 방지에 얼마나 실효가 있었는지 시범사업을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안타까움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 최종단계는 全국민을 상대로 1년이나 2년에 한 번씩 위 내시경, 장 내시경 검사 등 예방검진을 의무화하고, 정부가 비용 등을 보전하는 방안이 되겠군요.
『그렇죠. 하지만 돈이 많이 드는 일이기 때문에 국민적인 합의가 있어야 합니다. 의료보험으로 부담하든, 세금을 거둬 재원을 마련하든 결국 국민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와야 하니까요. 국민들이 비용부담을 할 생각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예방검진 권고안을 낸 후 시범사업을 하고, 시범사업 성과를 토대로 「이만큼 돈이 필요한데 하겠느냐」고 국민들에게 물어봐야죠. 궁극적으로는 예방검진을 통해 전체 의료비 지출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해야 합니다』
―40세 이상 全성인을 대상으로 2년에 한 번 위장 내시경을 의무적으로 실시하는 데 얼마나 비용이 들까요.
『한두 군데 市나 道를 선택해 시범사업을 해야 확실하게 계산이 될 수 있을 거예요. 강제 위내시경을 실시해서, 얼마나 암 발생률이 줄어드는지 알아내야 경제적 손익을 짐작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의약분업 시작하기 전에 정부의 한 국장이 「이건 돈이 너무 들어가는 제도다. 국회의원들이 돈 들어가는 내용을 알면 법이 국회를 통과하기 어려울 거다」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국회에서 법이 통과됐지 않습니까.「나라 경제가 이렇게 어려운데 의약분업 법안 낼 수 있습니까」라고 일개 국장이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5大 암 검진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로서는 필요하고 좋은 제도지만, 얼마 간격으로 어떤 범위에서 실시하느냐는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 따라야 합니다』
―암 치료의 최근 동향은 어떤 게 있습니까.
『암수술을 하면서 가능한 한 장기 손실을 줄이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암이 있는 부위만을 절제하고, 방사선 화학요법을 동원해 주변 장기를 살리려는 거죠. 수술 전에 화학요법과 방사선 요법을 써 절제부위를 줄이기도 합니다. 후두암 수술을 하면서 성대를 살리고, 골육종 수술을 하면서 인공관절을 이용해 다리를 살리고, 유방암 수술을 하면서 가능한 유방을 살리려고 애씁니다』
外國 암환자 불러들이겠다
―뉴욕의 유명한 통증 치료병원(Pain Clinic)인 캘버리 병원은 말기 암환자들에게 모르핀을 허용 용량의 1000배까지 제공한다고 합니다. 말기 암환자들의 삶의 질을 배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습니다.
『그건 맞는 얘기입니다. 말기 암환자가 통증에 고통받게 하면 안 됩니다. 말기 암환자에게는 모르핀을 최대한 써서 안 아프게 해줘야 합니다. 그걸 마약중독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모르핀 쓰는 건 치료죠. 우리도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국립암센터 발전전략을 보면, 「우리국민이 외국에 나가 진료받는 일이 없도록 하고, 해외교포 외국인도 유치하겠다」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의료진에 외국인이 하나도 없네요.
『아직 우리 암센터의 이름이 외국에 안알려져 있으니까요. 우선 목표는 일단계로 해외에 거주하는 우리 교포들이 위암, 간암, 자궁암 치료를 받으러 오도록 만드는 겁니다. 이 분야는 우리가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2단계는 중국, 동남아 등지의 부자환자들을 불러들이는 것이고, 3단계는 사우디나 유럽의 부호를 받아들이는 겁니다』
朴원장은 기부문화를 활성화시키고, 암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높이기 위해 「백만인 클럽」, 「국립암센터 발전기금」을 만들었다.
재단법인인 발전기금은 李健熙 삼성그룹 회장이 私財(사재) 2억원과 삼성생명 기부금 3억원을 내놓아 만들었다. 朴원장은 서울대 암연구소장으로 일하면서, 삼성에서 300억원을 기부받아 암 연구동을 2000년 서울의대 안에 건립했다. 100만명이 한 달에 1000원씩 기부해 한 해에 암 연구비 120억원을 조성하자는 것이 「암퇴치 백만인 클럽」이다.
『미국의 암연구소나 일류 병원들은 예산의 10% 이상을 기부금으로 충당합니다. 국민들이 생명과 재산을 지켜달라고 세금을 내는 것 아닙니까. 국민의 사망원인 1위가 암이고, 암이라는 총알이 한해에 5만명을 죽이는데, 암 퇴치에 정부나 민간이나 왜들 이렇게 인색한지 모르겠어요』
100만인 클럽의 회원은 현재 3만명. 朴원장은 『자기 돈 1000원은 남의 돈 1000만원과 같으니까, 회원분들은 암 퇴치사업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된다』며 『경제인구 2000만의 20분의 1만 회원으로 확보해도 암 전쟁 수행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를 걸었다.
朴원장은 현재 세 군데 기관에 적을 두고 있어 월급을 세 기관에서 나눠서 받는다. 국립암센터에서 3분의 1, 서울대 의대에서 3분의 1, 서울대병원에서 3분의 1. 일정이 바쁠 수밖에 없다.
월 수 금 사흘은 국립암센터에서 수술을 하고, 화요일에는 서울대병원에서 외래환자를 보고, 목요일에는 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한다. 토요일에는 서울대병원에서 세미나를 갖는다.
朴원장은 『내 생활은 너무 단조롭다』며 『최상의 몸과 마음으로 환자들을 돌본다는 게 인생살이의 유일한 신조』라고 했다. 그는 매일 아침 6시40분 병원에 도착해 대장암 센터의 환자 회진을 돌고, 저녁 7시쯤 퇴근한다.
잘 먹고 잘 자는 게 건강비결
―서울의대 교수로 계실 때 환자를 얼마나 보셨습니까.
『제가 두 시간에 70명을 봤습니다. 한 사람에 2분도 안 되죠. 그 시간에 항문에 손도 넣어봐야 하고, 차트도 봐야 합니다. 옆에서 보좌하는 사람이 컴퓨터에 기록을 하지만, 중요한 건 내 노트에 기록을 따로 했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체크하려면 나만이 아는 메모가 필요하거든요. 미국 의사들처럼 한 환자를 30분, 한 시간씩 보고싶죠. 그렇지만 그렇게 했다간 병원이 아마 문을 닫아야 할 겁니다』
―아무리 大家라도 한 환자를 1~2분씩 봐서는 중요한 걸 놓치는 경우가 많다고 봐야죠.
『저 같은 경우는 대부분 내게 수술하러 온 사람이고, 내가 수술한 사람이라 놓칠 가능성은 적죠. 그렇지만 환자가 궁금한 걸 물어보고 의사가 상세하게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지금도 일주일에 4일 간 국립암센터와 서울대병원에서 10여 건씩 수술을 하는데, 이제 행정 쪽에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후배들에게 하나라도 기술을 더 전수하기 위해 수술실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병원이 어디가 안 막히고 잘 돌아가는지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병원 이곳저곳을 직접 다니고, 환자를 만나는 겁니다』
―국립암센터 일도 벅차실 텐데, 서울대병원에 계속 나가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여기는 연구기관이어서 의사들이 교수신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직원들에게 교수신분을 달라고 서울대학교와 협상중입니다. 여기 분들 교수신분을 얻어 주려면 대학에 기여를 해야죠. 그래서 시간을 쪼개서 서울의대에 가서 수술하고, 대학생들을 가르치는 거죠』
―한 번 수술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나요.
『전체 수술 시간에서 내가 들어가는 시간은 20% 안쪽입니다. 암 덩어리를 얼마나 잘라낼 것인지 판단하고, 기술적으로 제일 어려운 부분을 하죠. 30분에서 한 시간입니다』
―병원 전체를 금연구역으로 만드셨더군요. 담배는 안하시고, 술은 얼마나 하십니까.
『마시면 많이 마시는데 가급적 안 마십니다. 제가 수술하는 사람은 모두 누구의 부모거나 부인이거나 남편이거나 자식인데 전날 술을 마시고 수술실에 들어갈 수는 없죠. 술마시고 힘들면 정성이 부족해지죠. 나도 힘의 한계가 있는데,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은 일생에 한 번 받는 수술이거든요. 내가 자기 부모 수술하면서 술이 덜 깨서 했다면 환자 가족들이 가만 있겠습니까』
―그러면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십니까. 외과 수술이 엄청나게 스트레스가 크다고 하던데.
『저는 잘 자고 잘 먹습니다. 잠을 많이 잡니다. 밤 11시쯤 자서 아침 6시에 일어납니다. 일요일 아침에는 한 시간 정도 예술의 전당 뒷산에서 共匪들이 뛰듯이 달립니다』
―다른 운동은 안하십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병원을 왔다갔다 하니까요. 저는 제가 노동강도가 가장 높은 육체 노동자라고 생각합니다』
―잘 드시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대장암을 전공하시니까 육류는 잘 안 드실 것 같은데요.
『제 친구들이 「재갑이가 맛있다는 건 먹지 말라」고 농담을 합니다. 아무거나 다 잘먹으니까. 가리는 게 없습니다. 골고루 먹으면 육류를 겁낼 이유가 없습니다. 하루 세 끼 스테이크만 먹는다든지, 고기만 먹고 물 마신다든지 이런 식습관은 위험하죠』
―원장님 레지던트하실 때는 수술 많이하는 외과 의사가 인기가 있었죠.
『우리 때부터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조금 윗기 선배들은 10등 안에 드는 사람만 외과에 갈 수 있었는데, 우리 때는 꼭 그렇지는 않았죠. 외과 인기가 아주 나빠졌었는데 지금 다시 올라가고 있습니다』
―어떨 때 보람을 느끼십니까.
『대장암 말기 환자를 수술해 항문으로 변 보게 할 때 제일 보람이죠. 서울대병원에 있을 때 저를 찾아오는 환자 가운데 20~30%는 다른 병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다 봐줄 수가 없으니까. 그렇지만 다른 데서 肛門을 없애야겠다고 판정한 환자 가운데 항문을 살릴 수 있겠다고 생각되는 환자는 무조건 받아줬습니다. 항문이 있는 환자와 없는 환자의 인생은 하늘과 땅 차이죠. 평생 배로 변을 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日本의사의 5배 수술
―몇 명이나 수술하셨습니까.
『레지던트 때부터 3900건 했습니다. 과거에는 위암 수술도 좀했고, 최근 3년은 모두 대장암 수술입니다』
―다른 선진국 의사들도 원장님처럼 그렇게 많이 수술을 합니까.
『일본 국립암센터의 대장암 전문가 세 분과 한 번 비교해 본 적이 있습니다. 일본 암센터에선 의사 한 분이 1년에 최대 80例(례)를 봅니다. 세 사람이 1년에 250명의 환자를 수술합니다. 제가 1999년 서울의대 교수 하면서 380명을 수술했습니다. 일본 의사보다 다섯 배 수술을 한 겁니다.
수술만 했느냐, 서울대 암연구소 소장일 했죠, 학생 강의했죠. 연구비 타내려고 계획서 냈죠. 엄청나게 혹사당한 거죠. 제가 수술이 좋아서, 아니면 수입이 늘어나서 수술을 했겠습니까. 低酬價 政策 때문에, 의사를 그렇게 酷使시키지 않으면 병원이 유지되지 않는 시스템입니다』
―어려서부터 의사가 될 꿈이 있었습니까.
『저는 의사되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이런 얘기하려면 솔직히 창피합니다. 아버님께서 충북 淸州에서 큰 양조장을 하셨습니다. 집안이 아주 잘 살았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대로 사업하면서 힘이 드셨나봐요. 「그저 세상이 바뀌어도 밥 굶지 않는 건 의사다, 의사해라」 하시더라고요. 아버지 뜻을 따라 의사가 됐습니다』
―말기 암환자를 주로 보시면서, 生과 死에 대한 철학이 저절로 생겼을 것 같습니다.
『그런 대단한 철학은 없습니다. 하루하루 베스트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환자를 진료한다는 원칙을 지켜왔습니다. 피곤하지 않은 상태에서 환자에게 최선을 다한 거지 무슨 철학이 있었던 건 아니고요』
긴 인터뷰를 끝내면서 최근 다시 일고 있는 의사들의 休珍 투쟁 움직임에 대해 물어봤다. 朴원장은 『평등주의, 획일주의가 우리 사회 곳곳을 병들게 하고 있다』며 『사회 각 부문에 단 한 사람도 존경할 만한 이를 남겨놓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했다.
『너무 하향 평준화하지 말아야 해요. 가난한 사람은 의료보장을 해줘야 하지만, 돈 있는 사람은 특별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줘야 합니다. 돈 많이 번 사람을 죄인 취급하면 어떻게 자유주의 경제가 발전하겠습니까. 가난한 사람이 진료를 못 받는 상황이 되면 안 되겠지만,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단 하나의 의료체계에 끼워넣어서는 문제가 있죠. 의사들은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평등주의가 나라 발전의 저해요인
―시민단체들은 국가가 모든 의료체계를 관리하는 유럽식 의료보험으로 가자고 주장해왔지 않습니까.
『다른 나라는 모르겠고 영국은 제가 직접 가봤습니다. 거기도 私保險이 있고, 부자들이 가는 병원이 따로 있습니다. 정부에서 의사들이 하루이틀 그런 병원에 가서 수술하고 돈 받는 건 인정해 줍니다. 돈많은 사람이 특별한 대우받을 길을 열어놓는 거죠.
예를 들어 시설투자를 많이 한 삼성의료원 같은 곳은 일반 의원보다 다섯 배 열 배의 수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신라호텔 숙박비가 여인숙과 같을 수는 없죠.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너는 뭐가 잘나서 특별한 대우를 받느냐」는 지나친 평등주의가 우리나라 발전에 저해 요인입니다』
―세계 수준의 병원이 한국에서도 나오려면 수가문제가 어떤 형태로든 조정이 돼야겠군요.
『10분의 1의 돈과 인력을 가지고 환자들의 치료를 소홀히 하지 않으려니 병원들이 죽을 지경이죠. 평등, 평등하다 보면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세계 1등 제품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국립암센터는 세계 최고기관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면 없애버리자는 게 제 생각입니다.
지금 국립암센터에 수술방이 여덟 개밖에 없습니다. 15개로 늘리려고 예산을 달라고 하니까, 예산부서에서 「다른 병원들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고 하더군요. 도대체 이런 게 어디 있습니까』
朴원장은 서울대 암연구소장 시절, 李健熙 회장의 출연금 300억원으로 암연구소 건물을 짓고 1층 로비에 李회장의 흉상을 부조로 만들어 설치했다. 이 건물 1층의 암 박물관을 찾는 청소년들은 누구나 한 번 李회장의 흉상을 바라보게 된다.
『흉상 세우는 데 반대하는 분들도 있더라구요. 그렇지만 내가 밀어붙였습니다. 아이들에게 돈을 좋은 데 쓴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 줘, 나도 커서 이런 사람 되겠다는 꿈을 심어 주자고요. 지금 우리 아이들이 존경하는 생존인물은 아마 박찬호나 박세리밖에 없을 겁니다.
기업한 이들은 다 잡혀가고, 의사들 변호사들 도둑놈으로 만들어 놨으니… 지금 우리 사회에 안 다친 사람이 金壽煥 추기경, 姜元龍 목사 같은 종교계 지도자밖에 없어요. 종교계가 워낙 세력이 크니까 손을 못 대고 나머지는 다 손을 대 병신을 만들어 놨어요. 이 사회가 어디로 가는지 냉철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朴원장은 슬하에 세 딸과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세 딸은 모두 의사에게 출가했다.
큰 사위는 內科 전임의이고, 둘째 사위는 外科 전문의로 일본 국립암센터에 연수중이다. 막내 사위는 일반외과 레지던트로 일하고 있다. 막내 아들은 현재 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중이다. 朴원장은 『가족들 얘기는 사생활이니까 가급적 상세히 안 다뤄줬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삑-삑-삑-』
환자의 맥박을 나타내는 스크린의 점이 파란 물결 모양의 軌蹟(궤적)을 그리면서 규칙적인 전자음을 냈다. 새하얗게 밝은 조명, 하얀 실내, 거즈를 집는 집게 소리가 들릴 정도의 고요함이 딴세상에 온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7월30일 오전 11시20분쯤,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있는 국립암센터 4층 대장암 수술실에 朴在甲(박재갑·53) 원장을 따라 들어갔다. 마스크를 뚫고 진한 소독약 냄새가 들어왔다. 녹색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朴원장을 맞았다.
『준비됐지』
3명의 의사와 3명의 간호사들은 완전 切開해 둔 환자의 뱃속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피를 닦아냈다. 붉게 물든 거즈들이 연이어 환자의 뱃속에서 나왔다. 하얀 기름이 얇게 낀 분홍빛 내장과 창자들은 숨결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했다.
마취醫는 인공호흡기, 혈압측정기 등 생명 보조 장치를 체크했다.
40代 남자 환자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마취에 들어간 시간은 오전 9시15분. 의료진은 두 시간 동안, 體毛(체모)를 제거하고, 피부를 소독하고, 배를 가르는 수술 준비작업을 마쳤다.
朴원장은 곧바로 손을 환자의 뱃속에 깊이 넣어, 癌(암)이 번진 대장을 끄집어 냈다. 그는 후배 의사들에게 암덩이가 번진 대장을 보여 줬다.
『암 조직이 CT촬영대로 항문에서 8㎝ 이상 떨어져 있구만, 정말 다행이야. 항문에서 3~4㎝ 정도 떨어져 있었으면 항문을 살리기가 어려웠을 텐데…』
이제 결단의 순간. 손가락을 항문에 넣어 하는 觸珍(촉진), 대장 내시경, CT촬영을 통해 그동안 머릿속으로만 그려온 암의 실체를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執刀醫는 항문을 살려둘 건지, 암에 감염된 직장을 얼마나 잘라낼 건지 빨리 결정해야 한다. 이걸 판단하는 게 대장암 수술의 핵심이라고 한다.
수술이 끝난 후 朴원장은 『의사들이 잘 아는 사람,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이들을 수술하면서 腸器를 조금이라도 더 살려두려다가 합병증이 발생하는 경우를 「VIP증후군」으로 부른다』며 『의사는 어떤 순간에도 냉정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암덩어리를 살펴보고, 수술실 벽에 쭉 걸린 환자의 CT필름을 훑어본 朴원장은 아무런 망설임없이 지시를 내렸다.
『자, 시작하지』
먼저 스태이플러(Stapler)라는 수술 도구로 항문에 연결된 대장 쪽을 집고, 항문에서 8㎝쯤 떨어진 부분을 가위로 잘랐다. 그리고 떨어져 나온 대장을 꺼내 암이 퍼져 있는 부분을 중심으로 30㎝쯤 잘라냈다. 대장암 수술만 3000회를 넘긴 大家의 손놀림은 가벼웠다.
철제 접시에 옮겨진 병든 大腸을 조직병리 담당 여의사가 가위로 안이 보이도록 절개했다. 잘라낸 대장의 중간 부분에 하얀 암 조직이 직경 7~8㎝ 크기로 뭉쳐져 있었고, 그 주변 조직은 검붉은 색깔이었다.
朴원장은 『조직검사를 하면 3~4일쯤 후에 암 조직이 임파선으로 침범했나 확인된다』며 『암이 임파선으로 많이 번지지 않았다면, 完治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암 조직을 눈으로 확인한 朴원장은 接合시켜야 할 대장 양쪽 부위의 이물질을 전기 칼로 제거하고, 실과 바늘로 한 뜸 한 뜸 꿰맸다. 그가 손을 움직이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의사들은 환자의 장기를 손으로 잡아 공간을 확보했다. 간호사들은 朴원장의 이마에 밴 땀방울을 수시로 닦아냈다.
우리 기술 없으면 外國의 노예
수술 기구, 장기에 임시로 삽입할 튜브 등을 주고받는 수술 팀의 호흡은 환상적이었다. 눈빛만으로 수술은 진행됐다.
수술 장면을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다가서자 한 간호사가 팔꿈치로 기자를 밀어냈다. 대장 봉합을 끝내는 데 걸린 시간은 10여분. 마무리 작업을 하면서 그는 이런 얘기를 했다.
『이 실도 수입한 겁니다. 위생용 재료 빼곤 다 외국 거예요. 중요한 수술장비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물건에 로열티를 내고 있어요. 우리 기술을 개발 안 하면 외국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봉합을 끝내고 갈색 소독약을 항문 쪽에서 집어 넣어 이 액체가 꿰맨 대장 부위로 새나오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朴원장은 긴 집게로 바늘을 잡고, 봉합한 대장이 터지지 않도록 다시 실로 연결시켰다. 몸 아래 깊숙한 곳에 위치한 대장에 집게로 바느질을 하는 게 무척 힘들어 보였지만, 그의 손은 한 치 오차없이 움직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오전 11시47분. 朴원장이 마스크를 벗고 한숨을 돌리자, 후배 의사들이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곤 환자의 뱃 속에 몇 가지 튜브를 박고 약물처리를 한 뒤, 배를 봉합하기 시작했다. 이런 작업은 한 시간 이상 계속됐다.
朴원장이 27분 동안의 시술로 암덩어리를 잘라낸 환자는 경남 출신의 남자(45).
이 환자는 2개월 전 항문에서 피가 나 동네의원을 찾았다. 동네의원에서는 「內痔疾(내치질)」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치질 약을 바르고, 동네 한의원에서 針 치료를 병행했다. 증세는 심해지기만 했다. 한 달쯤 뒤 가까운 대학병원에서 腸 내시경 진찰을 받으려 했다. 그런데 대장 안의 혹이 커서 대장 안으로 내시경 기구가 들어가지 않았다.
7월 초 서울 모 대학병원에서 CT촬영을 한 결과, 대장암 3기 판정이 나왔다. 그리고 이날 대장암 수술을 받은 것이다. 그는 직장생활 잘하다가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3기 암 선고를 받았다.
오늘 수술을 받은 이 환자는 열흘 정도 입원치료를 한 후 퇴원하게 된다. 입원 비용은 총 250만원 가량, 본인 부담금은 150만원쯤 된다. 그는 퇴원하고나서도 6개월 정도 병원을 오가며 抗癌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가 5년 이후까지 살아 남아 있을 가능성은 60% 안팎. 그는 다시 암이 재발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살아가야 한다.
朴원장은 탈의실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으면서, 이런 얘기를 했다.
『이 환자가 대장암을 초기에 발견했더라면, 장 內視鏡 수술로 간단히 암을 잘라낼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럴 경우는 完治率이 90% 이상입니다. 肝癌도 암덩이의 지름이 2~3㎝ 정도면, 수술로 완치됩니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 5만명이 암으로 죽는데, 이들 대부분이 손을 쓰기 어려운 진행암으로 발견됩니다. 암을 早期에 찾아내고, 암 치료의 質을 높이려고 국립암센터를 세운 겁니다. 미국보다 60년(1937년 설립), 일본보다 40년(1962년 설립)이 늦었습니다』
왜 그가 기자를 만나자마자 느닷없이 수술실로 끌고 들어가 끔찍한 대장암 수술 현장을 지켜보게 했는지 짐작이 갔다.
『어느 날 속이 아파 병원에 갔더니, 말기 癌이더라』는 얘기가 우리 주변에선 낯설지가 않다. 한국에서는 40, 50대 성인 사망자 4명 중 1명이 암으로 사망한다. 사망 원인 1위가 암이다.
日本에선 초기 발견이 65%, 한국은 15%
2000년 10월 통계청이 발표한 「사망 원인 통계 결과」를 보자.
1999년 사망자 24만6500명 가운데 사망 원인은 뇌혈관 질환이 살아 있는 인구 10만명당 72.9명으로 1위, 심장 질환이 39.1명으로 2위, 교통사고가 26.3명으로 3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24.0명으로 4위를 차지한 위암, 22.1명으로 5위를 차지한 폐암, 20.7명으로 8위를 차지한 간암 사망자를 더하면, 모두 66.8명으로 암 사망자가 전체 사망 원인의 2위가 된다. 여기에 췌장암(5.4명), 식도암(3.0명), 유방암(2.4명), 자궁경부암(2.9명), 방광암(1.3명)을 포함시키면 암은 명실상부한 사망 원인 1위다.
의사의 정확한 진단이 포함되지 않은「肝 질환 사망」(인구 10만명당 23.5명)까지 고려하면,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암으로 쓰러지고 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암이 10분에 한 명꼴로 한국인들의 생명을 앗아가지만, 우리 의료체계는 암에 대해 無방비 상태다. 일례로 일본의 胃癌 환자 가운데 65%가 초기 단계에서 발견되는 반면, 우리나라 胃癌 환자는 15%만 초기 단계에서 발견된다. 이유는 하나 국가 차원의 조기 암 검진 사업이 부진하기 때문이다.
2000년 10월 부분 가동을 시작, 지난 6월 정식 출범한 국립암센터는 「癌과의 전쟁」을 지휘할 야전사령부다. 당초 500병상으로 시작할 예정이었던 암센터의 암병원은 현재 200병상만 운영되고 있다. 500병상이 완전 가동될 때 직원 정원을 770명으로 잡고 있지만, 현재 인원은 300명에 불과하다. 부속병원 院長 예정자인 미국 MD 앤더슨 병원의 이진수 교수는 오는 9월 귀국한다.
출발이 이렇게 부진한 이유는 부족한 豫算 때문이다. 올해 국립암센터에 배정된 연구 예산은 11개 분야 40억원, 운영 예산은 1060억원이다. 대장암 수술을 끝낸 朴在甲 원장을 암센터 뒤편 별관 3층의 한 회의실에서 만났다.
두 평 정도 되는 원장실은 그의 책상 하나만으로 꽉 차 방문객이 앉을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홍보실 옆에 있는 빈 회의실을 이용했다. 狹小(협소)한 원장실을 보면서 「이분이 예산 안 주는 정부 당국자들을 향해 示威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癌은 하루하루를 전쟁 치르듯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兵家之常事(병가지상사)다. 한국 최고의 암 전문가를 만나니, 평소 암에 대해 궁금했던 걸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묻는 30대 후반의 기자나, 대답하는 50대 초반의 암 전문가나 암으로 죽은 사람이 왜 이렇게 주변에 많은지….
―대학 동창 하나가 2년 전 대장암으로 죽었습니다. 서울대 병원에서 「대장암 末期」를 선고받고, 수술을 앞두고 서울대병원에서 뛰쳐나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기도원에서 숨졌습니다. 친구들이 수술을 받으라고 하자, 이 친구는 『평생 똥주머니 차고 살기 싫다. 수술한다고 몇 년 더 산다고 보장되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품위 있게 죽고 싶다』고 하더군요. 이 친구가 잘한 겁니까, 잘못한 겁니까.
『정말 잘못한 거죠. 20년 전 서울의대 전임강사 시절 저희 큰어머니의 위암 수술을 했습니다. 淸州에 사시던 분인데, 아버님이 「서울대 병원 의사인 네가 수술을 맡아라」고 해서 제가 執刀를 했습니다. 배를 열어 보니까 위암덩어리가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크고 膵臟(췌장)으로 암이 轉移돼 있었습니다. 위암은 잘라내고, 췌장 쪽의 암은 잘라내기가 어려워 전기 칼로 지졌습니다. 수술을 끝내고 사촌 형님한테 「큰어머니는 앞으로 6개월을 넘기기 어렵겠다」고 솔직하게 얘기했습니다. 큰어머니가 지금까지 80세를 넘겨 살고 계십니다』
「조기 검진」만이 살 길
―그런 일이 종종 있나요.
『그럼요. 한 환자는 수술해도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판단돼서, 제가 방사선 치료와 항암제 투여만 했습니다. 벌써 돌아가셨어야 할 양반이 지금 8년째 살아 계십니다. 그분이 종종 찾아와서 「선생님 덕분에 살았다」고 인사를 하는데, 나는 미안해 죽겠어요』
―그러면 의사가 「앞으로 3개월, 6개월」이라고 얘기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癌이 한 장기를 완전히 파괴시키고, 근처 장기에까지 심각하게 轉移됐으면, 1년 못 넘길 거라고 판단하는 거죠. 암세포가 인체에서 자라나 초기에 발견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5~6년쯤 됩니다. 그런 상태가 3~4년 더 지속되면 암이 온몸으로 퍼져 죽는 거예요. 의사들은 경험과 통계를 바탕으로 얘기하는 거지만, 다 맞을 수는 없죠』
朴원장은 자신이 수술한 대장암 환자 1532명을 대상으로 집계한 통계자료를 하나 보여줬다. 수술 환자 가운데 초기 암 환자 216명의 수술 후 5년 이상 생존율은 91.1%, 암 2기 환자 478명의 5년 생존율은 77.9%, 임파선까지 암이 번진 3기 암환자 448명의 생존율은 57.1%, 암이 간과 폐로까지 번진 4기 환자의 5년 생존율은 18.9%였다.
대장암이 간과 폐로까지 번진 말기 암환자라도 수술하면 5년 이상 살 수 있는 확률이 20%에 가깝다. 초기에 발견하면, 대부분이 5년 이상 살 수 있다는 얘기다. 늦게 발견할수록 생존 가능성은 急減한다. 그가 『조기 검진, 조기 검진』을 입에 달고 사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의사들이 蘇生이 어려운 말기 암환자들 삶의 질을 고려하기보다 수술해서 배를 열어, 암을 제거하는 데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수술 좋아하는 의사가 있겠어요. 물론 수술이 생명 延長에 도움이 안 되지만 권하는 경우도 있죠. 대장암 말기가 되면 살 썩는 냄새로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주위 사람들 情을 다 끊어놓죠. 피고름 나고 굉장히 아픕니다. 생존 기간이 6개월 1년밖에 안 되더라도, 냄새 안 나고 피고름 안 나게 해주려고 수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환자가 수술을 해달라고 해도 안 합니다. 뱃속에 암이 퍼져 腹水가 찼지만, 암을 떼내도 삶의 질이 높아지지 않으면, 의사는 「우리의 한계를 벗어났다」고 얘기하죠』
―지난해 조선일보 동료 기자 세 명이 췌장암, 대장암, 위암으로 숨졌습니다. 매년 정기검진 때 胃腸 조영술을 하고, CT촬영을 했는데 癌을 조기에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정기검진 시스템을 바꿔야 합니다. 몸무게·키 재고, 시력 측정하는 형식적인 검진은 곤란합니다. 血中의 불필요한 수치 를 나열할 게 아니라, 위암·간암·대장암 같이 삶의 질에 큰 영향을 주는 몇 가지를 골라 집중적으로 점검하는 방식이 돼야 합니다』
직장인의 암예방 守則
―작은병원에서는 誤診도 많은 것 아닌가요.
『대장 내시경을 할 때 에스결장 윗부분의 암은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위 내시경을 하고도 암 부위를 못 찾아내는 일도 있고요. 의사의 오랜 임상경험과 좋은 기계가 어우러져야, 암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동네병원에서 찍은 CT에는 肝癌이 안 잡혔는데, 우리 병원의 새 CT로 잡은 일이 있습니다. 의료의 質을 높여야 하는데 이게 醫療酬價와 곧바로 연결됩니다. 우리 의료보험은 수가를 낮게 해서 모든 국민에게 혜택을 주자는 방향입니다. 의료의 質은 희생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30, 40대 직장인은 어떻게 암을 예방할 수 있습니까.
『우선 위 내시경은 40세를 넘으면 2년에 한 번은 해야 합니다. 장 내시경도 50세를 넘기면 5년마다 한 번 해야 하고요. 집안에 암으로 돌아간 분이 있으면, 더 젊은 나이부터 그쪽에 신경을 써야죠. 췌장암, 대장암, 위암은 이웃사촌입니다. 췌장과 위, 대장을 같이 봐야죠』
―다들 암 걱정은 하지만, 거기에 맞게 실천을 못 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 국립암센터가 해야 할 일입니다. 암 예방 권고안을 만드는 게 그 첫 걸음입니다. 자궁암, 대장암, 유방암에 대해서는 대처 방안을 이미 권고안으로 내놓았습니다. 종합 건강검진을 어떤 방식으로 하는 게 경제적이고, 효과적인지 국립암센터 「예방 검진센터」 지침을 만들고 있습니다』
―숨진 조선일보 기자 세 명은 의사들이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해 수술도 못 받고 다들 6개월 안에 숨졌습니다. 자기 몸이 그렇게 썩는 걸 죽기 직전까지 느끼지 못했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사람 몸은 기기묘묘하게 신비스럽게 잘 만들어진 겁니다. 아주 엄청난 안전장치가 있고, 이게 없으면 저게 하는 대체 기능이 많고,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기계입니다. 탄복할 정도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잘 만드신 겁니다』
―종교를 갖고 계십니까.
『없습니다. 조상 제사 잘 받드는 엄격한 儒敎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그렇지만 집 사람은 천주교 신자고,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입니다』
―神이 있는 것 같습니까.
『神은 있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이든, 이슬람의 하나님이든, 우주와 인간을 만든 神은 있다고 믿습니다』
―30, 40대 암환자의 사회복귀가 어렵지는 않습니까.
『제 처남이 지금부터 15년 전에 조기 위암 수술을 받았는데 지금 대기업 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초기암은 한두 달 病暇내면 충분히 치료를 끝낼 수 있습니다』
―얼마 전 KBS에서 암세포에 색전술 치료를 하면서 식이요법을 한 암환자 10여 명 가운데 절반 가까이에서 암세포가 줄어드는 등 효과가 있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식이요법으로 암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한 메시지였습니다.
『언론이 의학 관련 보도는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들만 신중하게 보도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주사 한 방으로 간암이 낫는다」, 「상황버섯이 암에 특효다」라는 보도들이 나오면, 암환자들이 휘청합니다. 잘 치료받던 환자가 언론 보도에 휘둘려 제대로 된 치료를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암으로 죽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공포에 질려 있지만, 발견된 암환자의 50%는 완치됩니다』
―말기 암환자들은 담당 의사보다는 동료 환자들끼리 정보교환을 더 활발히 한다고 합니다. 무얼 먹으면 좋다, 어떤 민간요법이 좋다고.
『그게 그분들만 탓할 일은 아닙니다. 말기암일 때는 무슨 음식을 먹는 게 좋고, 어떤 치료를 하는 게 좋은지 알려 줘야 하는데, 국가 차원에서 그런 노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환자들이 답답하니까 그러는 거예요. 앞으로 암치료 기술 개발뿐 아니라, 식이요법, 투병 요령에 관한 정보도 암환자들에게 활발하게 제공할 생각입니다』
암 공포 너무 지나치다
―종교적인 치유에 매달리는 암환자가 의외로 많습니다.
『제 처남의 부인이 고등학교 때 백혈병을 앓고 다 나아서 결혼하고 아들을 둘 뒀습니다. 목에 다시 암이 생겨 결국 죽었습니다. 처남댁의 오빠가 검찰 최고위층 가운데 한 분이었습니다. 가까운 내가 암 전문가인데도 처남댁은 按手기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수술하고 항암제를 썼으면 생명을 연장했을 텐데 안수기도받다가 다 죽을 무렵 병원으로 왔습니다. 그런 곳들 가운데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곳도 있습니다. 억제하거나 처벌하는 법조항이 없어서 더욱 성행하는 것 같습니다』
―암치료에서는 韓方의 도전도 거셉니다. 「양의학은 對症요법일 뿐이다. 암덩어리를 잘라내는 것은 암치료의 근본이 아니다. 체력을 길러 암을 이겨야 한다」는 얘기에 많은 환자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한의학의 효능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저도 과학기술부에서 연구비를 받아, 한약제 가운데 항암제를 찾는 연구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통 한의학과 한약제에서 항암제를 찾는 일은 피눈물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과학적으로 약효를 검증받아야 하고요. 중국과 일본이 지금까지 엄청나게 연구하고 그 결과를 자료로 축적해 놓았습니다. 전통 의학은 우리만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말기 암환자들이 왜 종교적인 치유나 민간 처방에 의존하게 됩니까.
『수술과 항암제로 암을 다 고칠 수는 없습니다. 의사가 「우리 능력의 한계를 벗어났다」고 선언한 상황에서,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다는 말이 나오면 환자 가족들은 귀가 솔깃해집니다. 죽음을 앞둔 인간은 나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자식된 도리로, 부인된 도리로, 꺼져가는 생명에 뭔가 해주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죠』
―30, 40대에 말기암 선고를 받으면 어떤 마음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30, 40대면 다 家庭이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절망적이겠어요. 저는 환자에게 상황을 사실대로 다 얘기합니다. 「얼마 더 살지는 나도 잘 모른다. 대장암은 온몸으로 암이 번져도 2,3년은 산다」고. 지금 30, 40대의 평균 수명은 80세 이상이 될 겁니다. 인생을 남보다 40여 년 빨리 접는 셈이죠. 환자들에게 「내 생을 마감할 시간을 알게 되지 않았느냐.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인생을 정리하라」고 충고해 줍니다』
『미국 수가의 20분의 1로 의료의 質 보장 못 해요』
―받아들입니까.
『암에 걸렸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죠. 하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각 분야에서 성취한 분들은 의외로 담담하더군요. 열심히 회고록 쓰는 분도 있고, 재벌같은 경우는 재산분배를 하고. 30, 40대는 억울하죠. 정부 예산을 담당하던 40대 공무원 환자가 있었습니다. 이분이 「암으로 안 죽으면, 앞으로 암 예산을 대폭 늘려서 나처럼 억울하게 죽는 이들이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을 하더군요. 기도원 갔다 가 얼마 안돼 돌아가시더라고요』
―한 사람이 암에 걸릴 경우, 완치하는데까지 드는 비용은 암별로 얼마나 됩니까.
『우리 암센터에서 암환자 비용 분석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병세가 나타나서 수술할 때까지 얼마나 돈이 들고, 직장은 얼마나 빠졌는지 조사하고 있습니다. 1~2년 정도 지나면 암환자의 경제부담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한 통계가 나올 겁니다. 지금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암환자의 총 의료 비용이 나와야 정확한 의료재정 추계가 가능합니다. 이것도 국립 암센터가 해야 할 일입니다』
―제가 아는 현역 국회의원의 부인이 의사인데 올해 초 서울대 병원에서 『肺癌(폐암)으로 의심된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서울대 병원에서는 『진전되는 걸 지켜보자. 두 달 후에 오라』고 했다가, 다시 두 달 후에 보자고 했답니다. 이 부부가 미국 텍사스 의대의 MD 앤더슨 병원에 갔습니다. 앤더슨 병원에서는 곧바로 폐를 절개하고 조직검사를 해 폐암이 아니라는 판정을 내렸습니다. 진찰료로 4만 달러를 냈다고 합니다. 왜 서울대 병원은 이렇게 적극적으로 못 하는 겁니까.
『의사의 權威가 강력하면 수술해서 조직검사해 볼 수 있겠죠. 지금 의사의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VIP를 수술까지 해서 조직검사를 했는데 암이 아니라는 결과가 나오면 얼마나 부담이 되겠어요. 그러니까 기다려 보자고 한 거죠. 자꾸 미국 최고 병원하고 우리를 비교하는데 진료 여건이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이 부분에서 朴원장은 상당히 흥분하는 모습이었다).
우리 병원이 내년 연말쯤 500병상 체제를 갖추게 되면, 정식 직원 800명, 용역직원 700명을 포함해 직원이 1500명쯤 됩니다. MD 앤더슨은 病床이 470개인데 직원이 연구인력을 포함해 1만명이 넘습니다. 똑같은 大腸 내시경을 해도, 酬價가 우리의 20배입니다. 대장 내시경하는 장비는 거기나 우리나 똑같습니다. 게다가 MD 앤더슨은 전체 예산의 10% 정도를 기부금으로 충당합니다. 미국의 20분의 1 酬價를 받으면서 의료의 질을 높일 수가 있겠습니까. 9월부터 부속병원장을 맡을 이진수 선생을 MD 앤더슨 병원에서 영입했는데, 제대로 연구하고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걱정이 태산입니다』
국립암센터는 「세계 超一流 암연구기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연구시설과 연구 전문인력을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 臨床실험용 병원만 갖춘 절름발이 암 연구기관인 셈이다. 미국 국립암센터는 200병상을 운영하면서, 무료 진료를 하고 있다. 여비와 용돈까지 대준다. 대신 환자들은 암연구에 필요한 이들을 골라서 받는다.
「암병원들의 병원」이 돼야 할 국립암센터는 서울대 암병원, 연세대 암병원과 체제에서는 지금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니다. 그래도 국립암센터 탄생의 기구한 사연을 아는 이들은 『지금 이 정도나마 모양을 갖추고, 出帆한 게 다행』이라고 얘기한다.
無 vision, 無決定, 12년 표류
국립암센터 건립의 端初를 연 사람은 盧泰愚 전 대통령. 朴원장의 설명이다.
『1989년 우리 국민의 사망 원인 1위가 癌이라는 보도를 접한 盧대통령이 「대책을 세우라」고 보사부에 지시를 했습니다. 그때 담당과장이 저를 찾아와 어떡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저는 서울의대 교수였고, 암학회의 총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제가 1985년부터 2년 간 미국 국립암연구소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 「국립암센터를 지어야 한다」고 강력히 얘기했죠』
보사부는 1990년 1월 청와대 업무보고 때 『1992년까지 일산에 500병상 규모의 국립암센터를 짓겠다』고 보고했다. 암센터는 국가 차원의 암 예방검진, 암 연구사업을 맡는다는 방향 설정도 그때 이미 이뤄졌다. 朴원장은 처음부터 암센터 건립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92년 국립암센터 건물 기공식이 있었지만, 그후 9년 동안 국립암센터 건립은 표류했다.우선 국립암센터의 운영주체를 놓고 논란이 시작됐다. 공무원이 운영하는 국가기관으로 하자, 특수법인으로 하자, 민간에 위탁하자는 세 가지 아이디어가 나왔다.
보사부 쪽은 『국가기관으로 해서는 국립 암센터가 2流 병원밖에 안 된다. 정부가 예산을 지원하고 경영은 독립시키자』로 기울어져 있었다. 논쟁은 암센터 병원건물이 완공된 1999년까지 이어졌다.
환자를 치료해서 이익을 낼 수 있는 암병원 건립 문제는 그래도 간단했다.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어야 할 「암연구 센터」 건립은 더 난항이었다. 金泳三 정부 시절 충북 오송에 과학단지를 조성하기로 결정하면서, 국립암센터의 연구시설은 오송으로 보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일산 국립암센터 안에 연구시설을 둘 것이냐, 오송으로 옮길 것이냐, 임상과 연구를 병행해야 할 의사들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論爭이 또 한편에서 벌어졌다. 그 와중에 국립암센터는 연구시설도 없는 畸形的인 기관으로 출발하게 됐다.
보사부, 보건복지부에서 국립암센터 건립에 관여해온 崔善政 前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립암센터 건물을 짓는 데 7년(1992년 12월~1999년 7월)이나 걸린 것은 눈에 띄는 외형적인 사업에만 신경을 쓰고, 미래에 대비하는 연구사업을 외면한 정책 집행자들의 短見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암 관리나 암 연구사업은 收益이 나는 일이 아닙니다. 굉장한 투자가 필요합니다. 국립암센터는 암 병원 하나 더 짓자고 시작한 게 아닙니다. 연구소가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임상 실험을 위한 병원만 서고, 연구센터는 지금 건물공사를 하고 있으니 딱한 일이죠. 돈줄을 쥔 부서에서는 「국립암센터는 돈이 엄청나게 들어갈 사업」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국립암센터 건립예산 1800억원을 지원하는 데 10년 가까이 걸린 겁니다』
지루한 부처 간 힘 겨루기, 소모적인 논쟁 끝에 국립암센터는 「特殊法人」으로 법적지위를 획득했고, 2000년 3월 서울의대 암연구소장이던 朴在甲 서울의대 교수가 국립암센터 원장에 임명됐다.
朴在甲의 熱情
朴원장은 국립암센터 건립 아이디어를 냈고, 결국 12년의 産苦 끝에 국립암센터를 탄생시킨 산파로 꼽힌다.
崔 전 장관의 얘기다.
『朴원장의 熱情이 없었더라면, 국립암센터 설립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이 대개 추진력과 설득력이 떨어지는데, 朴원장은 달랐습니다. 의사로서 대성해 일가를 이룬 분인데도, 암센터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선 정부 공무원들을 붙들고 집요하게 설득했습니다. 국립암센터를 특수법인으로 만들고, 예산을 따낸 게 朴원장입니다. 미국 일류 암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 의사들을 그들의 애국심에 호소해, 국립암센터에 불러모은 일도 그가 아니었으면 어려웠을 겁니다』
朴원장과 함께 하는 후배 의사들은 朴원장을 『어떤 일이건 목표를 정하면 무모하게 보일 정도로 물고 늘어지는 「불독」』이라고 했다. 1985년부터 2년 간 미국 국립암연구소에서 일할 당시, 매일 도시락 두 개를 싸들고 출근해 밤새워 연구한 일은 지금까지도 서울대 후배의사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유전성 암에 대한 유전자 진단체계를 국내 최초로 확립한 업적은 이런 돌파력이 있어서 가능했다. 그는 1991년 서울대 병원에 유전성 대장암 등록소, 1993년 유전성 종양등록소, 1997년 암 유전자 클리닉을 개설했다.
유전성 암에 대한 그의 관심은 유전자 염기서열 분석을 통한 유전성 암 유전자 발견, DNA 칩을 이용한 유전성 암 진단법 발견으로 이어지고 있다.
―유전성 암을 찾아내는 작업은 어느 정도 진척이 되고 있습니까.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인간의 유전자 지도를 발견한 후 세계의 생명공학 연구소, 의약업계에서 암 치료제 연구사업이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인간의 염기서열이 30억 쌍 있는데 사람마다 1000개당 1개씩 다른 게 나옵니다. 그게 사람마다 차이를 만듭니다. 이 차이에 따라 쌍꺼풀이 지고, 코가 크고 작고 달라지죠. 유전성 암과 염기서열과의 관계를 규명하는 게 핫 이슈입니다』
―DNA 칩이 어떤 도움이 되나요.
『유전성 암 판정을 위한 염기서열 분석에 몇 달씩 걸립니다. DNA 칩을 이용하면, 이 시간을 하루이틀로 단축시킬 수도 있습니다. 제가 최근 갑상선 부신피질 등의 내분비암을 찾아내는 DNA 칩을 개발해 미국의 과학잡지에 보냈습니다.
올해 중에 받아들여지면 내년쯤 언론에 보도자료를 낼 수 있을 겁니다. 가족성 암 발견을 위한 DNA 칩 개발이 우리의 핵심 프로젝트 중 하나입니다. 칩들이 개발되면 全국민이 내가 어떤 암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는지 값싸고 손쉽게 알아낼 수 있게 될 겁니다』
『유전성 대장암은 자식의 半에 유전』
―내가 어떤 유전적 암 인자를 갖고 있나 판정하는 데 지금은 얼마나 시간이 걸립니까.
『지금도 자기 가족의 암 家系圖를 그려보면, 내가 무슨 암에 위험한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가족 중 살아 있는 암환자가 있으면 임파구에서 DNA를 뽑아, 암의 원인이 될 만한 유전자 돌연변이를 확인합니다. 유전성 대장암의 경우 자식 중 半에 유전이 됩니다. 유전된 아이가 누군지, 유전자 요인을 가진 사람은 몇 살 때부터 이런 조치를 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유전자 돌연변이를 찾는 데 시간이 걸리니까, 그걸 DNA 정보를 찾아내는 칩으로 하는 거죠』
―가족들 중에 암 발생자가 많아, 미리 찾아와서 확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아주 많습니다』
―간암도 잘 걸리는 집안이 있던데, 간암도 유전입니까.
『간암은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거죠. 유전은 아닙니다. 독한 바이러스가 부모로 부터 자식에게 감염돼 간암을 일으키는 경우는 흔합니다』
―혈액암 치료약 그리벡에 이어 대장암 치료약이 나왔다는 비즈니스 위크 보도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약개발은 어디까지 와 있습니까.
『암 치료제가 계속 나와 환자들에게 큰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값비싼 약을 써야 하는 환자들을 보면 처절합니다. 백혈병 치료제 그리벡은 노바티스가 부르는 게 값입니다. 우리 연구소도 암 치료제 개발을 위해 몇 가지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문제는 연구비입니다』
―올해 연구 예산이 40억원인데, 어느 정도 연구비가 책정돼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미국 국립암연구소의 연구비가 40억 달러쯤 됩니다. 내부에서 20~30%쯤 쓰고 나머지는 전국의 연구기관에 배정합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투자하니까, 그리벡이 나오는 겁니다. 그리벡 개발비가 1조원이 넘습니다. 많은 제약회사가 있지만 연구원들은 美 국립암연구소에서 돈받아 연구하고 큰 사람들입니다.
BT, BT(Bio-Technology, 생명공학)하는데 BT의 꽃은 암 연구입니다. 미국 국립보건원과 국립암연구소가 미국의 생명공학을 세계 최고로 올려놓은 겁니다. 우리가 미국의 20분의 1경제 규모니까, 국립암센터에 2000억원은 줘야죠. 우리가 그 중 400~500억원을 쓰고, 나머지는 대학과 연구소에서 쓰게 해야죠』
―정부에서 내년도 연구예산을 삭감하겠다고 해서, 암센터 분들의 불만이 대단하더군요.
『암센터 연구비로 복지부가 90억원을 올렸는데, 기획예산처에서 잘려 25억원으로 책정돼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밖에서 프로젝트를 따다가 연구를 하라고 합니다. 火星에 무인탐사선 보내라고 임무를 줘놓고, 연구비 끌어다 쓰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항암제도 만들고, 어떤 게 좋은 항암제고 암치료 방법인가 연구해야 하는데, 돈이 있어야죠. 정말 이런 식으로 예산을 지원해서는 국립암센터를 만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담배가 암 사망 원인의 30% 차지』
朴원장은 지난해 3월 국립암센터 원장으로 부임한 직후,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제2의 국방장관으로 일하겠다』, 『10년 내 암 치료율을 30%에서 50%로 올리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표정에선 자신감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1년 만에 만난 그는 많이 지쳐 있었다.
그는 『내가 정부 부처 과장들을 붙잡고 「살려달라」며 애원하고 다니는 걸 알면, 암센터 사람들 자존심이 너무 상할 것』이라고도 했다. 朴원장은 『고위 공직자인 내가 이렇게 정부를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면서도, 쉽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국립암센터는 암과의 전쟁에서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기관인데, 전쟁하려면 무기와 탄약을 줘야지, 너희가 벌어서 하라니? 우리나라 醫療酬價가 연구비 뺄 수 있는 수가가 아닙니다. 병원 운영하기도 빠듯해요. 그리고 국립암센터가 병원과 대학에 연구비 주면서, 이런 연구해라 저런 연구해라 主管을 해야지, 암 전쟁의 사령탑이 남한테 연구비 동냥을 하러 다녀서는 일을 못 합니다』
―왜 연구비 지급을 줄이겠다는 겁니까.
『병원 세워 주었으니 자립해서 네가 연구비 벌어서 쓰라는 논리입니다. 다른 기관들은 빚이 많은데, 국립암센터는 빚이 하나도 없으니 자급자족할 수 있다는 거예요』
―다른 암병원과 국립암센터를 동일한 선에 놓고 얘기를 하는 거군요.
『그렇죠. 저는 예산을 못 주겠다면, 담배에 건강증진기금 부담금을 200원 올려 1조원을 걷고, 그중에 2000억원은 암 예방과 연구에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담배가 암 사망 원인의 30%를 차지합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이 내는 돈은 그 사람들 생명 연장과 암 정복에 써야 하는 것 아닙니까』
―국립암센터를 찾는 사람들의 치료비용은 서울대 병원 등과 비교할 때 어떻습니까.
『국립암센터가 약간 쌉니다. 돈을 많이 번다는 건 환자들에게 많은 酬價행위를 하는 거죠. 우리는 병상당 1억~1억5000만원을 법니다. 너희가 벌어 너희가 쓰라면 우리도 열심히 수가행위를 할 수밖에 없죠』
―불필요한 의료행위를 더 하게 된다는 겁니까.
『의사로서 그런 얘기는 할 수 없고,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경우 하는 쪽으로 가겠죠. 국립암센터가 국내 암 병원과 경쟁해서는 안 되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암 연구기관이 돼야죠. 우리가 세계적인 수준을 갖춘 후 외국의 위암, 간암, 자궁암 환자를 국립암센터로 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국립암센터 병원은 위암, 간암, 폐암, 대장암, 유방암, 자궁암 등 발생빈도가 높은 6大 암센터, 그밖에 뇌암 등을 다루는 특수 암센터가 설치돼 있다. 암센터를 지원할 화학요법 센터, 진료지원센터, 암 예방검진센터 등 3개 센터가 있다.
현재 일하고 있는 전문의는 71명. 파트별로 7~8명이 일하고 있다.
암 치료의 3大 산맥은 외과적 수술, 항암치료, 방사선 치료다.
외과수술 부분에서는 朴在甲 원장, 항암치료 부분에는 폐암 항암제 치료의 전문가인 MD 앤더슨 흉부종양내과 교수 출신인 李振洙(이진수) 박사, 방사선 치료는 美 미네소타 대학 방사선 종양학과 교수 출신인 曺瓘鎬(조관호) 박사 같은 大家들이 포진해 있다.
朴원장과 함께 국립암센터 病棟을 돌아봤다. 링거액 주사바늘을 팔뚝에 꼽고, 아니면 이동 침대에 실려 병원 이곳 저곳을 오가는 환자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선지 병원 안이 다른 대학병원들보다 조용했다.
환자는 가만 있고, 의사들이 찾아다녀
일반 대학병원에서는 암 수술을 마친 환자들이 항암제 투여나 방사선 치료를 위해 이 병동 저 병동을 옮겨다니는 일이 잦다. 국립암센터는 이런 관행을 바꿔, 전공 의사들이 환자들을 병실로 찾아다니는 協診(협진)체계를 갖췄다.
환자의 입원실이나 간호사 대기실 어디에도 환자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환자들의 사생활을 지켜 주려는 작은 배려들이라고 했다. 朴원장은 병실을 돌아보며 의사들과 간호사들에게 『의사, 간호사라도 웃어야지, 지금 이 병동에서 웃을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농담을 던졌다.
―암센터 의사들이 무척 젊어보입니다. 전문의 71명 중 선택진료를 할 수 있는 10년 이상 경력자가 16명밖에 안 되는데, 너무 젊은 것 아닙니까.
『30代 중반에서 40代 중반까지를 중점적으로 선발했습니다. 능력이 뛰어나 조금만 노력하면 세계적인 大家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모아놓은 겁니다. 암센터 내의 모든 회의와 연구발표회는 영어로 합니다. 저 같은 50代 의사들은 자리를 옮기기가 힘들죠. 또 스카우트하면서 다른 의료기관에 큰 피해를 줄 수도 있고요. 이진수 병원장이 경기고 서울대 1년 후배인데 정말 힘든 결단을 내렸습니다. 수입이 미국의 절반도 채 안 됩니다』
―1년 전에 최고의 인력과 시설을 모으겠다고 포부를 밝히셨는데.
『한 센터가 연구작업을 강력하게 밀고가려면, 하나의 大家 밑에 신진기예들을 붙여 주는 방식이 제일 좋습니다. 한 분야의 大家들을 한 암센터에 둘씩 놓기는 곤란합니다. 이 정도 컴비네이션이면 現 상황에서는 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170병상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당초 계획했던 500병상 체계는 언제쯤 갖춰지게 됩니까.
『내년 연말은 돼야 할 것 같습니다. 의사도 문제지만 간호사를 뽑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50~60명이 지원해도 뽑을 사람이 한두 명밖에 안 됩니다. 우수 인력을 계속 충원할 계획입니다. 500병상 체제를 갖추는 게 시급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기준을 낮출 수 없는 고민이 있습니다』
―서울대에서 레지던트를 마치고 오는 30代 초반의 전문의들은 월급 수준은.
『그런 분들을 전임의라고 하는데 보수기준을 서울대학 수준에 맞추고 있습니다. 어차피 정부의 보조를 받는 기관이니까 더 많이 줄 수는 없고, 월급을 많이 안 주면 人材를 구할 수 없고…』
―액수가 얼마나 됩니까.
『연봉계약인데, 전임의 1년차가 3500만원, 2년차가 4000만원 정도입니다』
―10년씩 공부를 마치고, 군대를 갔다온 전임의가 3500만원이면 보수가 낮은 편 아닙니까.
『좀더 많은 급여를 줄 수 있도록 하려고 국립암센터를 특수법인으로 만든 건데, 그래도 국립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전임의 이상 교수급은 서울대와 보수가 같습니다』
―다들 후배들인데 공부하는 열의나 사기는 어떻습니까.
『국립암센터에 국가 차원의 암 관리와 암 치료 연구라는 뚜렷한 비전이 있으니까 좋아합니다. 병원 내에서 하는 모든 연구발표회를 영어로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힘들긴 하지만 새로운 시스템에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시작도 못한 5大암 조기검진
―보건복지부는 全국민을 상대로 5大 암 조기검진을 실시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국립암센터의 가장 중요한 사업 중 하나가 암 조기 검진 사업 확대 아닙니까.
『우리나라는 3, 4期까지 암이 진행된 상태에서 병원을 찾는 환자가 훨씬 많습니다. 평상시 건강할 때 1~2년 주기로 암검사를 하는 게 아니라 암으로 인해 어떤 증상이 나타나야 병원을 찾기 때문이죠. 불편함을 느끼는 상태에서는 이미 완치가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조기검진 사업의 첫단계는 암 예방 권고안이 나와야 합니다. 6大 암 중 위암, 간암, 대장암, 유방암 등 4大 암은 조기 발견하면 완치됩니다. 몇 살부터 어떤 간격으로 암 검진을 해야 하는지 권고안이 없었습니다. 최근 학계와 국립암센터가 자궁암, 대장암, 유방암 예방검진 권고안을 만들었습니다. 다른 암들도 권고안을 만들어야 합니다』
―권고안을 만들어 홍보한 다음에는 뭘해야 합니까.
『그 다음으로는 시범사업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권고안이 지금의 의료체계 안에서 적용가능한 건지, 장비와 인력 문제는 없는지 현장에서 확인해야죠. 개인적으로는 의약분업이 의약품 오남용 방지에 얼마나 실효가 있었는지 시범사업을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안타까움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 최종단계는 全국민을 상대로 1년이나 2년에 한 번씩 위 내시경, 장 내시경 검사 등 예방검진을 의무화하고, 정부가 비용 등을 보전하는 방안이 되겠군요.
『그렇죠. 하지만 돈이 많이 드는 일이기 때문에 국민적인 합의가 있어야 합니다. 의료보험으로 부담하든, 세금을 거둬 재원을 마련하든 결국 국민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와야 하니까요. 국민들이 비용부담을 할 생각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예방검진 권고안을 낸 후 시범사업을 하고, 시범사업 성과를 토대로 「이만큼 돈이 필요한데 하겠느냐」고 국민들에게 물어봐야죠. 궁극적으로는 예방검진을 통해 전체 의료비 지출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해야 합니다』
―40세 이상 全성인을 대상으로 2년에 한 번 위장 내시경을 의무적으로 실시하는 데 얼마나 비용이 들까요.
『한두 군데 市나 道를 선택해 시범사업을 해야 확실하게 계산이 될 수 있을 거예요. 강제 위내시경을 실시해서, 얼마나 암 발생률이 줄어드는지 알아내야 경제적 손익을 짐작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의약분업 시작하기 전에 정부의 한 국장이 「이건 돈이 너무 들어가는 제도다. 국회의원들이 돈 들어가는 내용을 알면 법이 국회를 통과하기 어려울 거다」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국회에서 법이 통과됐지 않습니까.「나라 경제가 이렇게 어려운데 의약분업 법안 낼 수 있습니까」라고 일개 국장이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5大 암 검진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로서는 필요하고 좋은 제도지만, 얼마 간격으로 어떤 범위에서 실시하느냐는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 따라야 합니다』
―암 치료의 최근 동향은 어떤 게 있습니까.
『암수술을 하면서 가능한 한 장기 손실을 줄이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암이 있는 부위만을 절제하고, 방사선 화학요법을 동원해 주변 장기를 살리려는 거죠. 수술 전에 화학요법과 방사선 요법을 써 절제부위를 줄이기도 합니다. 후두암 수술을 하면서 성대를 살리고, 골육종 수술을 하면서 인공관절을 이용해 다리를 살리고, 유방암 수술을 하면서 가능한 유방을 살리려고 애씁니다』
外國 암환자 불러들이겠다
―뉴욕의 유명한 통증 치료병원(Pain Clinic)인 캘버리 병원은 말기 암환자들에게 모르핀을 허용 용량의 1000배까지 제공한다고 합니다. 말기 암환자들의 삶의 질을 배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습니다.
『그건 맞는 얘기입니다. 말기 암환자가 통증에 고통받게 하면 안 됩니다. 말기 암환자에게는 모르핀을 최대한 써서 안 아프게 해줘야 합니다. 그걸 마약중독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모르핀 쓰는 건 치료죠. 우리도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국립암센터 발전전략을 보면, 「우리국민이 외국에 나가 진료받는 일이 없도록 하고, 해외교포 외국인도 유치하겠다」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의료진에 외국인이 하나도 없네요.
『아직 우리 암센터의 이름이 외국에 안알려져 있으니까요. 우선 목표는 일단계로 해외에 거주하는 우리 교포들이 위암, 간암, 자궁암 치료를 받으러 오도록 만드는 겁니다. 이 분야는 우리가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2단계는 중국, 동남아 등지의 부자환자들을 불러들이는 것이고, 3단계는 사우디나 유럽의 부호를 받아들이는 겁니다』
朴원장은 기부문화를 활성화시키고, 암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높이기 위해 「백만인 클럽」, 「국립암센터 발전기금」을 만들었다.
재단법인인 발전기금은 李健熙 삼성그룹 회장이 私財(사재) 2억원과 삼성생명 기부금 3억원을 내놓아 만들었다. 朴원장은 서울대 암연구소장으로 일하면서, 삼성에서 300억원을 기부받아 암 연구동을 2000년 서울의대 안에 건립했다. 100만명이 한 달에 1000원씩 기부해 한 해에 암 연구비 120억원을 조성하자는 것이 「암퇴치 백만인 클럽」이다.
『미국의 암연구소나 일류 병원들은 예산의 10% 이상을 기부금으로 충당합니다. 국민들이 생명과 재산을 지켜달라고 세금을 내는 것 아닙니까. 국민의 사망원인 1위가 암이고, 암이라는 총알이 한해에 5만명을 죽이는데, 암 퇴치에 정부나 민간이나 왜들 이렇게 인색한지 모르겠어요』
100만인 클럽의 회원은 현재 3만명. 朴원장은 『자기 돈 1000원은 남의 돈 1000만원과 같으니까, 회원분들은 암 퇴치사업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된다』며 『경제인구 2000만의 20분의 1만 회원으로 확보해도 암 전쟁 수행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를 걸었다.
朴원장은 현재 세 군데 기관에 적을 두고 있어 월급을 세 기관에서 나눠서 받는다. 국립암센터에서 3분의 1, 서울대 의대에서 3분의 1, 서울대병원에서 3분의 1. 일정이 바쁠 수밖에 없다.
월 수 금 사흘은 국립암센터에서 수술을 하고, 화요일에는 서울대병원에서 외래환자를 보고, 목요일에는 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한다. 토요일에는 서울대병원에서 세미나를 갖는다.
朴원장은 『내 생활은 너무 단조롭다』며 『최상의 몸과 마음으로 환자들을 돌본다는 게 인생살이의 유일한 신조』라고 했다. 그는 매일 아침 6시40분 병원에 도착해 대장암 센터의 환자 회진을 돌고, 저녁 7시쯤 퇴근한다.
잘 먹고 잘 자는 게 건강비결
―서울의대 교수로 계실 때 환자를 얼마나 보셨습니까.
『제가 두 시간에 70명을 봤습니다. 한 사람에 2분도 안 되죠. 그 시간에 항문에 손도 넣어봐야 하고, 차트도 봐야 합니다. 옆에서 보좌하는 사람이 컴퓨터에 기록을 하지만, 중요한 건 내 노트에 기록을 따로 했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체크하려면 나만이 아는 메모가 필요하거든요. 미국 의사들처럼 한 환자를 30분, 한 시간씩 보고싶죠. 그렇지만 그렇게 했다간 병원이 아마 문을 닫아야 할 겁니다』
―아무리 大家라도 한 환자를 1~2분씩 봐서는 중요한 걸 놓치는 경우가 많다고 봐야죠.
『저 같은 경우는 대부분 내게 수술하러 온 사람이고, 내가 수술한 사람이라 놓칠 가능성은 적죠. 그렇지만 환자가 궁금한 걸 물어보고 의사가 상세하게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지금도 일주일에 4일 간 국립암센터와 서울대병원에서 10여 건씩 수술을 하는데, 이제 행정 쪽에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후배들에게 하나라도 기술을 더 전수하기 위해 수술실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병원이 어디가 안 막히고 잘 돌아가는지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병원 이곳저곳을 직접 다니고, 환자를 만나는 겁니다』
―국립암센터 일도 벅차실 텐데, 서울대병원에 계속 나가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여기는 연구기관이어서 의사들이 교수신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직원들에게 교수신분을 달라고 서울대학교와 협상중입니다. 여기 분들 교수신분을 얻어 주려면 대학에 기여를 해야죠. 그래서 시간을 쪼개서 서울의대에 가서 수술하고, 대학생들을 가르치는 거죠』
―한 번 수술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나요.
『전체 수술 시간에서 내가 들어가는 시간은 20% 안쪽입니다. 암 덩어리를 얼마나 잘라낼 것인지 판단하고, 기술적으로 제일 어려운 부분을 하죠. 30분에서 한 시간입니다』
―병원 전체를 금연구역으로 만드셨더군요. 담배는 안하시고, 술은 얼마나 하십니까.
『마시면 많이 마시는데 가급적 안 마십니다. 제가 수술하는 사람은 모두 누구의 부모거나 부인이거나 남편이거나 자식인데 전날 술을 마시고 수술실에 들어갈 수는 없죠. 술마시고 힘들면 정성이 부족해지죠. 나도 힘의 한계가 있는데,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은 일생에 한 번 받는 수술이거든요. 내가 자기 부모 수술하면서 술이 덜 깨서 했다면 환자 가족들이 가만 있겠습니까』
―그러면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십니까. 외과 수술이 엄청나게 스트레스가 크다고 하던데.
『저는 잘 자고 잘 먹습니다. 잠을 많이 잡니다. 밤 11시쯤 자서 아침 6시에 일어납니다. 일요일 아침에는 한 시간 정도 예술의 전당 뒷산에서 共匪들이 뛰듯이 달립니다』
―다른 운동은 안하십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병원을 왔다갔다 하니까요. 저는 제가 노동강도가 가장 높은 육체 노동자라고 생각합니다』
―잘 드시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대장암을 전공하시니까 육류는 잘 안 드실 것 같은데요.
『제 친구들이 「재갑이가 맛있다는 건 먹지 말라」고 농담을 합니다. 아무거나 다 잘먹으니까. 가리는 게 없습니다. 골고루 먹으면 육류를 겁낼 이유가 없습니다. 하루 세 끼 스테이크만 먹는다든지, 고기만 먹고 물 마신다든지 이런 식습관은 위험하죠』
―원장님 레지던트하실 때는 수술 많이하는 외과 의사가 인기가 있었죠.
『우리 때부터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조금 윗기 선배들은 10등 안에 드는 사람만 외과에 갈 수 있었는데, 우리 때는 꼭 그렇지는 않았죠. 외과 인기가 아주 나빠졌었는데 지금 다시 올라가고 있습니다』
―어떨 때 보람을 느끼십니까.
『대장암 말기 환자를 수술해 항문으로 변 보게 할 때 제일 보람이죠. 서울대병원에 있을 때 저를 찾아오는 환자 가운데 20~30%는 다른 병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다 봐줄 수가 없으니까. 그렇지만 다른 데서 肛門을 없애야겠다고 판정한 환자 가운데 항문을 살릴 수 있겠다고 생각되는 환자는 무조건 받아줬습니다. 항문이 있는 환자와 없는 환자의 인생은 하늘과 땅 차이죠. 평생 배로 변을 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日本의사의 5배 수술
―몇 명이나 수술하셨습니까.
『레지던트 때부터 3900건 했습니다. 과거에는 위암 수술도 좀했고, 최근 3년은 모두 대장암 수술입니다』
―다른 선진국 의사들도 원장님처럼 그렇게 많이 수술을 합니까.
『일본 국립암센터의 대장암 전문가 세 분과 한 번 비교해 본 적이 있습니다. 일본 암센터에선 의사 한 분이 1년에 최대 80例(례)를 봅니다. 세 사람이 1년에 250명의 환자를 수술합니다. 제가 1999년 서울의대 교수 하면서 380명을 수술했습니다. 일본 의사보다 다섯 배 수술을 한 겁니다.
수술만 했느냐, 서울대 암연구소 소장일 했죠, 학생 강의했죠. 연구비 타내려고 계획서 냈죠. 엄청나게 혹사당한 거죠. 제가 수술이 좋아서, 아니면 수입이 늘어나서 수술을 했겠습니까. 低酬價 政策 때문에, 의사를 그렇게 酷使시키지 않으면 병원이 유지되지 않는 시스템입니다』
―어려서부터 의사가 될 꿈이 있었습니까.
『저는 의사되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이런 얘기하려면 솔직히 창피합니다. 아버님께서 충북 淸州에서 큰 양조장을 하셨습니다. 집안이 아주 잘 살았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대로 사업하면서 힘이 드셨나봐요. 「그저 세상이 바뀌어도 밥 굶지 않는 건 의사다, 의사해라」 하시더라고요. 아버지 뜻을 따라 의사가 됐습니다』
―말기 암환자를 주로 보시면서, 生과 死에 대한 철학이 저절로 생겼을 것 같습니다.
『그런 대단한 철학은 없습니다. 하루하루 베스트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환자를 진료한다는 원칙을 지켜왔습니다. 피곤하지 않은 상태에서 환자에게 최선을 다한 거지 무슨 철학이 있었던 건 아니고요』
긴 인터뷰를 끝내면서 최근 다시 일고 있는 의사들의 休珍 투쟁 움직임에 대해 물어봤다. 朴원장은 『평등주의, 획일주의가 우리 사회 곳곳을 병들게 하고 있다』며 『사회 각 부문에 단 한 사람도 존경할 만한 이를 남겨놓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했다.
『너무 하향 평준화하지 말아야 해요. 가난한 사람은 의료보장을 해줘야 하지만, 돈 있는 사람은 특별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줘야 합니다. 돈 많이 번 사람을 죄인 취급하면 어떻게 자유주의 경제가 발전하겠습니까. 가난한 사람이 진료를 못 받는 상황이 되면 안 되겠지만,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단 하나의 의료체계에 끼워넣어서는 문제가 있죠. 의사들은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평등주의가 나라 발전의 저해요인
―시민단체들은 국가가 모든 의료체계를 관리하는 유럽식 의료보험으로 가자고 주장해왔지 않습니까.
『다른 나라는 모르겠고 영국은 제가 직접 가봤습니다. 거기도 私保險이 있고, 부자들이 가는 병원이 따로 있습니다. 정부에서 의사들이 하루이틀 그런 병원에 가서 수술하고 돈 받는 건 인정해 줍니다. 돈많은 사람이 특별한 대우받을 길을 열어놓는 거죠.
예를 들어 시설투자를 많이 한 삼성의료원 같은 곳은 일반 의원보다 다섯 배 열 배의 수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신라호텔 숙박비가 여인숙과 같을 수는 없죠.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너는 뭐가 잘나서 특별한 대우를 받느냐」는 지나친 평등주의가 우리나라 발전에 저해 요인입니다』
―세계 수준의 병원이 한국에서도 나오려면 수가문제가 어떤 형태로든 조정이 돼야겠군요.
『10분의 1의 돈과 인력을 가지고 환자들의 치료를 소홀히 하지 않으려니 병원들이 죽을 지경이죠. 평등, 평등하다 보면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세계 1등 제품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국립암센터는 세계 최고기관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면 없애버리자는 게 제 생각입니다.
지금 국립암센터에 수술방이 여덟 개밖에 없습니다. 15개로 늘리려고 예산을 달라고 하니까, 예산부서에서 「다른 병원들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고 하더군요. 도대체 이런 게 어디 있습니까』
朴원장은 서울대 암연구소장 시절, 李健熙 회장의 출연금 300억원으로 암연구소 건물을 짓고 1층 로비에 李회장의 흉상을 부조로 만들어 설치했다. 이 건물 1층의 암 박물관을 찾는 청소년들은 누구나 한 번 李회장의 흉상을 바라보게 된다.
『흉상 세우는 데 반대하는 분들도 있더라구요. 그렇지만 내가 밀어붙였습니다. 아이들에게 돈을 좋은 데 쓴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 줘, 나도 커서 이런 사람 되겠다는 꿈을 심어 주자고요. 지금 우리 아이들이 존경하는 생존인물은 아마 박찬호나 박세리밖에 없을 겁니다.
기업한 이들은 다 잡혀가고, 의사들 변호사들 도둑놈으로 만들어 놨으니… 지금 우리 사회에 안 다친 사람이 金壽煥 추기경, 姜元龍 목사 같은 종교계 지도자밖에 없어요. 종교계가 워낙 세력이 크니까 손을 못 대고 나머지는 다 손을 대 병신을 만들어 놨어요. 이 사회가 어디로 가는지 냉철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朴원장은 슬하에 세 딸과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세 딸은 모두 의사에게 출가했다.
큰 사위는 內科 전임의이고, 둘째 사위는 外科 전문의로 일본 국립암센터에 연수중이다. 막내 사위는 일반외과 레지던트로 일하고 있다. 막내 아들은 현재 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중이다. 朴원장은 『가족들 얘기는 사생활이니까 가급적 상세히 안 다뤄줬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